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고등 의식으로의 발전과 실천에 대하여(하)

 

한동백 | 회원

 

[차례]

1. 유물론의 역사와 물질의 존재 형태

2. 모순과 생성ㆍ변화ㆍ발전의 관계

  2-1. 모순의 유형들

  2-2. 물질의 모순과 변화ㆍ발전

  2-3. 의식의 모순과 변화ㆍ발전

3. 물질-의식 관계와 의식의 발달

  3-1. 감각

  3-2. 지각ㆍ표상ㆍ오성

  3-3. 이념

  3-4. 사고/사유

4. 대상적 활동

5.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그리고 사회적 관계

6. 극복해야 할 편향들과 결론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3-3. 이념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이념은 사고와 연결된다. 사고는 원 반영인 물질이 내/외적 모순 운동, 제 모순 관계를 통찰하는 단계에 이른 의식이다. 따라서 사고는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른 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추상에 도달(또는 구체적 의식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사고는 객관의 끝점으로서, 그 지양은 실천으로 화한다. 지금까지 논한 감각과 지각-표상-오성의 관계, 그리고 사고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종합한다면, 실천(의식적 구체의 승인을 통한 현실적 행동들)-감각(살아 있는 직관을 통한 추상으로의 진입)-사고(의식적 구체로의 진입)-재실천-재감각-재사고라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제시하는 변증법적 전개의 그 유명한 3단계 체계를 정식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표현으로서,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사고/사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기서 헤겔이 칸트에 대해 반박한 것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올바르다.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사유는 ―만약 그 사고가 올바른 것이라고 할 때,―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물질이라는 추상, 자연법칙이라는 추상, 가치라는 추상 등등, 한마디로 말해 모든 과학적인(올바른, 진지하게 생각하는, 무의미하지 않는) 추상들은 자연을 보다 깊게, 보다 정확하게, 보다 완벽하게 반영한다. 생생한 직관에서 추상적인 사유로 그리고 이 추상적인 사유로부터 실천으로이것이 진리 인식의, 즉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변증법적 도정이다. 칸트는 신앙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하여 지식을 업신여긴다. 헤겔은 지식을 찬양하고, 지식은 신의 지식이라고 단언한다.[1]W. I. 레닌, ≪철학 노트≫[1909-1913], 홍영두 역, 논장, 1989, pp. 120-121. (강조는 인용자. 다른 말이 없는 한, 이하 동일.)

 

사유의 대상은 이미 불완전한 대상(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통일된 대상으로서 이념(Idee)이다. 사유는 이념-이론의 변증법적 전개로부터 생성된다는 헤겔의 정의를 전제한다면, 이를 통해 사유는 지각, 표상, 오성 작용의 제 관계(교호) 지양ㆍ발전, 즉 변증법적 통일에 따라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념 생성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이념은 개념에 의한 ‘목적함’의 결과에서 부득이하게 나타나는 지양 및 통일로서 생성된다. 헤겔은 ≪철학 강요≫에서 개념과 목적함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목적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객관성이 부정을 통하여 자유로운 실재에 걸어 나온,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목적이라는 것은 주관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정은 첫 번째로 추상적이고 따라서 그 목적은 또 객관성과 대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관성이라는 규정은 개념의 총체성에 비하면 일면적이고, 더구나 목적 그 자체에 대하여 일면적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목적 중에서 모든 규정성이 지양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목적이라는 것은 목적 그 자체의 자기 동일성과 이 목적 중에서 드러나는 부정 및 대립과의 모순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지양 작용, 즉 대립을 부정하여 이것을 목적 제 자체와 일치시키는 활동이다. 이것이 목적의 현실이다.[2]헤겔, “204절”, ≪철학 강요≫[1817-1830], 서동익 역, 을유문화사, 1998.

 

직접적인 객관성이란 객체로서, 유물론에서는 객관적 실재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직접적인 객관성(객관적 실재)은 모두 자기 부정을 내포한다. 이러한 대립은, 그 반영으로서 의식의 대립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 의식상의 개념으로 옮겨 간 객관적 실재의 제 대립 관계는, 감각의 지양으로서 지각, 그 지각을 통한 개념화를 거치게 되는데, 개념은 아직까지는 주관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객관성(유물론적으로는 객관적 실재)과 대조할 때 양자 상호 사이의 모순을 내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3]이는 헤겔의 반성 철학이 관념론 세계관이란 것을 증명한다. 헤겔은 자신의 저서 도처에서 의식의 타재로서 질료를 말한다. 동시에 의식이 직접적인 … Continue reading 이는 인식 주체의 인식 과정 전(全) 단계를 고려할 때 일정 주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앞에 놓인 사물이 의식의 층위에서 다루어지는 사물과 동일하지 않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전자는 객관적인 것이고, 후자는 (아직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부분적인(일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의식의 자기 운동은 계속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이 다루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절대정신의 외화, 그리고 그 외화의 역으로서 자기 복귀를 하는 과정에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인간의 현실적인 행동/수행과는 무관한 것으로 취급된다. 객관과 대립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목적 개념은 헤겔에 의해, 그것이 지고의 절대정신에서 실재성(현실)까지 하강하고, 다시 상승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나타나는 의식의 자기 운동으로 묘사된다. “목적이라는 것은 목적 그 자체의 자기 동일성과 이 목적 중에서 드러나는 부정 및 대립과의 모순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지양 작용, 즉 대립을 부정하여 이것을 목적 제 자체와 일치시키는 활동이다. 이것이 목적의 현실이다”라는 헤겔의 언급은 절대정신의 외화 과정의 연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헤겔의 ‘목적’은 개념으로까지의 형성과 개념 자체의 대립으로서 자기 운동이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인간적 활동과는 동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헤겔은 이를 ‘목적론적 관계’[4]헤겔은 이 장에서 목적을 목적인(目的因)과 관련시켜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며, 스스로의 목적에 대한 관점이, 목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 Continue reading라 말한다.

 

한편 헤겔은 이 목적론적 관계를 ‘유한적인 합목적성’으로 규정한다. 목적론적 관계는 제한된 대상에 대한 변증법적 전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최상의 단계인 사고/사유가 취급하는 대상으로서 ‘객관적 개념’이 아닌 이상, 개념은 아직은 제한된 추상에서 생성된 ‘의식적 구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유물론 세계관에서 개념은 물질의 내/외적 모순의 반영으로서 모순 제 내용의 ‘확신적 지시’인 감각 자료를 분류화/개념화한 것으로, 아직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이 객관적 실재의 대립 제 내용과 같지 않을 것이란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점에선 헤겔과 같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목적 개념은 객관적 실재를 규정하거나 객관적 실재로 하강하는 원리로서 자기 외화라는 성격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목적론적 관계에 대한 헤겔의 견해는 유물론 세계관의 목적론적 관계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적 개념은 객관적 실재와 추상 속에서 대립할 어떠한 토대도 없다고 할 수 있다(헤겔은 목적 개념이 객관성과 추상에서 대립한다고 하지만, 이는 절대정신의 타재를 전제한 관념론적 해석에 불과하다).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을 무시하고 세워진 개념 자체만으로는 ‘대립자 사이의 무한한 변증법적 전개로서 의식 운동’은 불가능하다.

 

헤겔은 목적론적 관계를 논함에서 스스로의 관념론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목적은 또한 첫째, 객관과의 매개를 가져야 한다. 수단은 객관이기 때문에, 이 제2의 전제 중에서 추리는 타 극단, 전제된 것으로서의 객관성, 즉 질료[5]관념론자인 헤겔은 당연하게도,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을 승인하지 않고, 이것을 절대정신의 타재로서 질료라고 보고 있다. 이는 객관적 관념론에 … Continue reading와의 직접적인 관계 중에 존재하는 것이다.[6]헤겔, 앞의 책, p. 209.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인식은 제한된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층위에서의 변증법적 전개이다. 헤겔이 말하는 인간의 제 인식 행위와 유한적인 합목적성에 기초한 목적론적 관계의 결부는 그 스스로가 견지하는 관념론적 세계관(절대정신의 외화/타재)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이에 기반하여 다시 헤겔의 추가적인 언급을 확인해 보자.

 

유한적인 합목적성 가운데에는 성취된 목적도 매개자와의 최초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자기 내에서 분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질료에 의하여 외적으로 정립된 형식만이 눈에 보이는바, 이 형식은 목적 내용이 제한되어 있기에, 말하자면 우연적인 규정이다. 따라서 달성된 목적은 또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 또는 질료가 되며 이리하여 한없이 진행하는 하나의 객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목적의 실현에서 도대체 무엇이 결과되느냐 하면, 그것은 일면적인 주관성과 또 이 주관성이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같이 보이는 객관적 독립성과의 지양이다. 개념은 수단을 파악함으로써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의 본질로 나타난다.[7]매우 중요한 헤겔의 언급이다. 여기서 헤겔은 본질적으로 유물론에 대적하는데, 그는 ‘목적 개념(목적론적 관계로서 개념)’의 질료화의 과정을 … Continue reading … 목적은 형식 규정의 지양을 통하여 제 자신과 연결하며, 따라서 제 자신과 동일적인 것인 형식이 내용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개념은 형식 활동으로서 오직 제 자신만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밟아서 대체로 목적의 개념이었던 것이 자각적으로 드러나고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과의 통일이 대자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곧 이념이다. … 이념이라는 것은 즉자적으로나 대자적으로나 참다운 것, 즉 개념의 객관과의 절대적 통일이다. 이념의 관념적 내용은 모든 규정을 갖춘 개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 실재적 내용은 이 개념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8]헤겔, 앞의 책, pp. 209-210.

 

대립쌍을 갖는 목적 개념은, 그 대립 관계에서 일정량에 도달하게 되면 이념으로 된다(“제 다양성은 모순이라고 하는 정점에까지 고양되어서야 비로소 ‘활동적’이고 상호 생동적으로 되고, 자기 운동과 생동성의 내적 박동인 부정성을 획득한다”라는 언급은 이와 연관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후술할 오성의 한계는 이러한 대립쌍의 양적 축적을 조장 및 방관한다. 개념에서 이념으로 전화되는 과정에 대한 헤겔의 기나긴, 그리고 혼잡한 설명을 종합하면, 의식적인 것의 질료로의 전화라고 할 수 있다. 질료로 하강하는 과정은 의식이 곧 실재성을 갖는 실재로 되는 과정과도 같은데, 이 과정에서 개념은 수단을 파악하게 되고, 그 수단을 파악함으로써 의식상에서 객관의 본질로 드러나게 된다. 바로 여기서 개념은 역설적으로 감각 자료가 되는 질료(물체, 그러나 유물론적으론 물질인)가 내포한 모순의 제 내용을 ‘알게’ 되고 하나의 통일로서 이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헤겔은 자신의 뼈 깊은 관념론적 지반을 내보이고 있다. 레닌은 이를 “유물론까지 접근해 가다가, 유물론으로부터 비겁하게 달아날 구실을 만들었다”[9]W. I. 레닌, 앞의 책, p. 252.라고 평가한다.

 

유물론에 기초한다면 이 지점에서, “‘성취된 목적’이 그 한계로 인해 ‘질료’가 된다”라는 관념론적 지반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 물론 헤겔의 체계를 폐기하기만 하고, 그 빈자리를 다른 발전된 체계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면, 개념이 이념으로 된다는 설명을 유물론 세계관으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레닌은 이 지점에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한다.

 

유물변증법: 외적 세계, 즉 자연의 법칙들이 기계적 법칙과 화학적 법칙으로 세분되는 것(이것은 매우 중요하다)은 인간 합목적적 활동의 기초이다. 인간은 그 실천적 활동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를 자기 앞에 가지며, 이 객관적 세계에 의존하고, 이 객관적 세계에 의해 자신의 활동을 규정한다. … 인간의 실천적(목적정립적) 활동의 측면으로부터 보면, 세계(자연)의 기계적(및 화학적) 인과성은 마치 외적인 것처럼, 마치 이차적인 것처럼 마치 숨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10]같은 책, p. 140.

 

객관적 과정의 두 형식: 즉, 자연(기계적 및 화학적 자연)과 인간의 목적정립적 활동. 이 두 개의 형식의 상호 관계. 인간의 목적은 최초에는 자연에 대한 관계에 있어 낯선(타자)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의식, 과학(개념)은 자연의 본질, 실체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이 의식은 자연에 대한 관계에 있어 외적인 것이다(이것은 자연과 즉각 그리고 간단히 합치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적 및 화학적 기술이 인간의 목적에 유용한 까닭은 그것들의 성격(본질)이 그것들의 외적 조건(자연법칙)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이다.[11]같은 책, pp. 140-141.

 

기계적 연관화학적 연관은 헤겔이 정립한 것으로, 기계적 연관이란 역학적 법칙을 말한다. 이것은 객관 세계의 사물이 스스로의 개별적 존재성을 확립하면서, 다른 것(타 사물)에게 가하는 힘으로 표현된다. 화학적 연관은 이 역학적 힘을 하나의 관계로 중화하는 매개이다. 이 매개는 자기(Magnetismus)와 전기(Elektrizität)로 구성되는데, 자기는 사물의 응집을 가능하게 하고, 전기는 그것의 사물의 성격을 유지시키는 힘으로 된다. 역설적이게도, 목적 개념의 질료화에 대한 헤겔의 이러한 설명은 레닌이 내내 주를 달았던 것처럼, 유물론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헤겔은 한편 이러한 작용을 관념이 질료(물질)로 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적 관념론을 짙게 내보이고 있다.

 

레닌은 기계적 연관과 화학적 연관을 목적 개념의 외화가 아닌 현실 물질 운동의 외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라고 하여, 헤겔의 관념론적 해석을 지양한다. 개념으로서 정립된 과학은 개념 발달의 끝으로서, 물질의 외연 운동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으로서 과학(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레닌은 과학을 ‘개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인 의식은 실체(물질)를 반영하지만, 자연과의 관계에서 외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런 성격에 근거한 의식의 제 내용은 아직까지는 자연과 완전히 합치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사고/사유(다른 말로 원 반영체로서 물질의 내/외적 모순 관계를 관통하는)가 아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언급을 ‘사적 유물론’이라 칭송하며, 승인한다.

 

목적은 절대적인 것이나 혹은 반드시 즉자대자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수단은 목적의 수행인 추론의 외적 매개항이다. ; 그런 까닭에 목적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성적 성격은 이러한 외적 타자 안에서 그리고 이러한 외면성을 통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목적의 수행 가운데에서 발현한다. 이런 한에서 수단은 외적 합목적성의 유한한 목적보다 더 고차적인 것이다. … 비록 인간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보면 자연에 오히려 종속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의 도구로 말미암아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얻게 된다.[12]같은 책, p. 142.

 

헤겔은 목적 개념이 질료화가 되는 과정으로서 기계적 연관/화학적 연관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과학적 수행’으로서 인간의 수행 활동이 한편으로는 이념으로 나아가는 개념의 자기 운동의 현실적인 과정이라고 하였다. 레닌은 목적 개념이 질료화된다는 헤겔의 관념론적 주장을 거부하지만, 바로 그러한 목적 개념이 인간에게 ‘과학적 수행’을 야기하는 것이며, 이 과학적 수행이 곧 이념으로 나아가는 개념의 자기 운동으로서, 인간에게 작용되는 의식이라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목적 개념의 이념으로의 이행은 그것이 질료로 되면서, 즉 제 질료의 모순 관계를 파악하게 되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추가적인 과학적 수행(기계적/화학적 연관과 관련된)을 야기하는 것과 관련된다. , 과학적 수행은 제반 물질의 내적외적 모순 관계를 과학적으로 판명하려는 인간의 의식 행위에 근거한다. 바로 여기서 인식 주체의 의식 내 대립 관계로서 개념은 이념으로 이행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수행은 기계학, 화학에 관련된 학술 연구를 포함하지만, 이것으로만 표현되는 수행은 아니며, 제 현상의 역학, 응집적 내용을 규명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뜻한다. 이 경로를 통해 인식 주체는 객관적 실재의 외연과 직접적으로 관련하여, 그 폭발적인 대립 관계가 다시 의식에 반영된 것을 매개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데, 바로 여기서 의식은 ‘상시적인’ 변증법적 전개에 진입하고 바로 여기서 자의성은 더욱 높은(잦은) 수준으로 발양된다. 따라서 이 수행은 능동적인 의식이 행하는 것이다.

 

레닌은 개념이 갖는 한계 자체를 ‘새로운 모순 국면으로 나아감’으로 취급함으로써, 그것의 운동의 진행으로 인간의 과학적 수행을 야기한다고 본 것이다. 반면 헤겔은 그러한 한계로 인해 이것이 질료로 되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질료의 제반 내적 모순 내용을 파악하게 됨으로써 이념으로 된다고 하였다. 레닌은 의식 활동의 결과로서 인간의 실제적인 행동을 얘기하고, 행동이 의식에 새로운 모순 국면을 반영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반대로 헤겔은 의식이 물질을 규정한다는 발출론적 설명을 제공한다. 이것이 유물론과 관념론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가 가진 결함을 지양하는 것으로도 된다. 예를 들어, ‘유한한 합목적성’의 목적론적 관계가 그것이 갖는 주관적 성격으로 인해 질료화된다면, 의식으로서 감각적 확신도 질료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정신에 이르지 못한 단계에 있는 의식의 타재를 허용하는 것으로, 절대정신의 ‘특출남’을 부정하는 결과를 갖고 온다. 따라서 이 논리를 따르면, 헤겔의 체계도 붕괴된다. 감각적 확신의 단계에서 확신적 지시의 대상이 갖는 주관성의 극복으로서 ‘보편화된 대상’의 성립(인식 주체의 의식적 활동으로서)을 말한 것은 옳았으나, 지각-표상-오성에서 사유로 나아가는 단계에서 헤겔은 관념론을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의 체계에서 급격히 이탈해 버린다. 레닌은 헤겔이 목적을 다룸에서 보여 주는, ‘의식이 객관적 실재를 규정한다’는 관념론을 완전히 폐기하고, 그것을 인간의 과학적 수행으로 대체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13]과학적 수행을 취급하는 레닌의 노력에서, 레닌의 과학관(科學觀)을 알 수 있다. 이 과학관으로부터 추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역학-응집적 … Continue reading 즉, 이 지점에서 헤겔은 관념론을 위해 변증법을 버리지만, 레닌은 변증법을 위해 관념론을 버린다.

 

레닌이 말하는 과학적 수행을 ‘실천의 제1단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실천은 과학적 수행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초보적인 의식으로서 감각의 취합과는 구별된다. 과학적 수행을 통해 기계적 연관과 화학적 연관을 파악하는 것은, 의식상 지각-표상-오성의 단계를 매개하고, 더욱 본질에 다가간 수준의 ‘내적 모순 운동 관계의 파악’의 성격을 갖는다. 한편 이것은 객관적 실재의 모순 제 내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더욱 다가간 것으로, 자연에 대한 훨씬 더 높은 수준, 통일된 견해를 피력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객관적 개념’이 성립되고 이념으로 나아간다. 레닌은 이러한 연관 속에서 헤겔의 해석에 대해 “헤겔의 탁월한 점은 인간의 실천적, 합목적적 활동을 넘어서 개념과 객관의 일치로서의 ‘이념’으로, 진리로서의 이념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정립했다는 점이다”[14]W. I. 레닌, 앞의 책, p. 143.라고 칭송한다.

 

3-4. 사고/사유

위와 같은 맥락에서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유의해야 할 지점으로서, 긍정하고 있다.

 

(1) 이념은 첫 번째로 단순한 진리이며, 개념 및 보편적인 것으로서 객관성과의 동일성이다.두 번째로, 이념은 단순한 개념이 지니고 있는 대자적으로 존재하는(für sich Seiende) 주관성과 이 주관성과는 구별되는 개념의 객관성의 관계이다. 전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분리를 지양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 (2) 이러한 관계로서 이념은 스스로를 개체성과 이 개체성의 무기적 자연 속으로 분열시키고 나서 또다시 이 자연을 주관의 위력 아래에 종속시키고는 최초의 단순한 보편성으로 귀환하는 과정이다. (3) 이념의 자기 동일성은 이 과정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 (4) 개념은 이념 속에서 자유에 도달하는데, 바로 이 자유 때문에 이념은 가장 격렬한 대립을 자기 내에 간직하고 있다; 이념의 평온은 견고함과 확실성에 그 본질이 있으며, 이것에 의해 이념은 끊임없이 대립을 산출하고 끊임없이 대립을 극복함으로써 대립 속에서 자기 자신과 합치하게 된다. … (5) 인식이란 사유가 객관에로 끊임없이 무한히 접근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 속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인용자] 운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끊임없는 과정, 모순의 발생과 그 해결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15]같은 책, pp. 147-149. (≪철학 노트≫에 서술된 헤겔 ≪대논리학≫의 구절.)

 

이념은 개념의 자기 부정 운동(실천의 제1단계를 통한)을 통해 형성되는 것인데, 부정을 통한 종합(Synthesis)이 독자존재로 안착될 때, 그것이 이념으로 될 수 있는 통일성(개념 사이의 통일)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다면, 본질적으로 같은 수준의 질적 성격을 갖는 부정의 종합(또는 통일)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힘이며, 오성은 이 힘을 추동한다.

 

개념이 이념으로 향하게끔 하는 원자료(原資料)에 대한 통일적 해석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시 관념론과 유물론이 갈라진다. 관념론은 이것에 대해, 개념의 자기 운동에서 본질을 추려 낼 수 있는 자의성의 노력을 강조한다. 즉 의식 능력을 강조한다. 따라서 오류를 의지를 통해 극복하자는 것으로 나아간다. 반면 유물론은 의식화를 통한 극복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감각 자료의 지속적인 증대를 요구한다(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 감각 자료의 증대는 물질의 내적-외적 모순 운동의 반영으로서 가장 초보적인 자료이다.

 

관념론과 유물론에서 다루는 개념과 이념, 그리고 의식 활동에 대해 위와 같은 차이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념론에서 말하는 의식은 물질에 의존하지 않으며, 붕 뜬 절대정신이라는 하늘이 ‘무한한 자비를 베풀며 땅에 친히 하사’하는 것으로, 한계가 없이 산출되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순간에서 숱하게 등장한 객관적 관념론자들이 물질세계의 객관적 조건을 무시하고 오로지 ‘고귀한 이상’을 중시하며 현실과 괴리된 행동을 하거나 그러한 행동을 추구할 것을 강변한 이유기도 하다. 반면 유물론에서 의식은 뇌의 작용으로 인한 산물이다. 의식의 무한한 능동성을 보장하기 위해, 무한한 수준의 감각 자료를 인간의 뇌에 제공할 수 있는가? 이는 불가능할뿐더러, 과학적 성과가 밝힌 뇌의 특질 측면에서도 비현실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뇌신경 활동은 다양한 신경 전달 물질에 의해 조절되는데, 특정 신경 전달 물질의 과다 분비는 신경 전위상의 이유로 인한 인지 과부하(cognitive overload)를 유발한다. 그리고 ‘무한한 수준의 감각 자료의 주입’은 당연히 과부하를 일으킬 것이다. 만약 인지 과부하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감각 자료가 주입된다면, 과부하는 피하겠지만, 의식 활동이 능동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16]인지 부하 이론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주로 뇌파전위기록술(EEG)을 통한)과 연계된 설명은 오늘날 심리, 교육 이론에서 실험적으로 증명되는 … Continue reading 물질의 내/외적 모순 운동의 반영으로서 의식이 성립(뇌를 통해)되기 전의 생리학적 과정, 즉 의식 형성의 전(前) 단계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에너지 전달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데, 에너지는 가해지는 힘량(물리량)이 무한이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7]다시 강조하지만, 의식은 물리적 특질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의식의 제 내용은 바로 물질이 신경학적 과정을 통해 반영되기까지의 모든 … Continue reading 의식의 제한성은 바로 이러한 물질적 특성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 활동은 한편으로 물질상의 객관적 조건에 의해 제약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 활동은 그 능동성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의식 활동이 갖는 목적성의 표적이 되는 감각 자료의 추가 지원이 없이는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의식은, 맑스가 언급한 것처럼 “그 탄생의 처음부터 물질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존재’”이다.

 

의식의 변증법적 전개로 돌아오자. 레닌은 (3)과 (5)를 재차 강조를 한다. 우리는 앞서서 개념화(‘보편적인 대상’으로서)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은 지각, 그리고 그것들의 재현 가능한 형태로서 나열은 표상, 마지막으로 개념을 유지시키는 힘을 간단하게 훑었다. 모순 범주가 한정을 짓는 경계에 따라 개념은 각자 영역에서 고유한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존재하는데 이는 힘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각 개념의 모순에 양적, 질적 변화가 축적될 경우, 각 개념 사이의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힘(오성에 의해 지탱되는)이 폐기된다. 왜냐하면, 각 개념(아직은 불완전한)이 갖는 모순에 양적, 질적 변화가 축적될 경우 개별로서 각 개념이, 다른 개념과 상호 연관되는 지점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각 개념은 폭발적으로 다른 개념과 상호 연관의 고리(대립 관계로)를 생성하게 되는데, 오성에 의해 지탱되는 힘은 이러한 상호 연관을 막아 낼 여력이 없다. 힘의 폐기는 오성의 폐기와 함께 이루어지는데, 오성의 폐기는 곧 이념의 생성을 말하는 것이다.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다음과 같은 헤겔의 언급을 인용하며 ‘오성(과)의 교호’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오성이 이념에 접근할 때 오성은 이중의 오해를 한다. 첫 번째로, 오성은 이념의 양극단을그것들이 통일적인 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표현하여도 무방하지만,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통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 바깥에 여전히 추상물로서 남아 있는 한, 여전히 의미와 규정을 지니는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오성은 관계가 이미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을 때조차도 그 관계를 오해한다: 예를 들면 오성은 심지어 개별자, 즉 주어에 대해 “개별자는 아주 똑같은 정도에서 개별자가 아니라 오히려 보편자이다”라고 언명[18]이와 관련하여 레닌이 오성의 본성을 ‘감각 자료의 ‘언어적 명명’을 통한 개념을 다루는 것’이라고 해석했다는 근거는 상당히 많다. 레닌은 … Continue reading하는 판단에 있어서 계사[copula, 繫辭][19]본래 고대 스토아학파의 논리학에서 등장한 용어로, 명제의 주사(主辭)와 빈사(賓辭)의 관계를 긍정 또는 부정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매개해 주는 … Continue reading의 본성까지 간과한다. 두 번째로 오성은 자기 동일적 이념이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것, 즉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오성 자신의 반성을 이념 자체에 속하지 않는 외적 반성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반성은 오성의 고유한 지혜가 아니다. 오히려 이념은 그 자체의 변증법이다.[20]따라서 오성은 폐기되는 것(의식)이다. 의식의 층위 내에서 해석하자면, 사유는 바로 이 이념의 변증법을 통해 등장한다. 이념은 자기 동일성을 … Continue reading 이 변증법은 자기 동일적인 것을 차별적인 것으로부터,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부터,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부터, 영혼을 육체로부터 끊임없이 분리하고 구별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런 한에 있어서만 이념은 영원한 창조, 영원한 생동성, 영원한 정신인 것이다.[21]W. I. 레닌, 앞의 책, pp. 153-154.

 

레닌은 이 내용을 긍정하고, 이 내용을 ‘개념의 변증법과 그것의 유물론적 뿌리’라고 하였다. 레닌은 이에 “이념은 현실적인 것, 오성은 공상적인 것이다”라는 주를 달아, 이것을 유물론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의식의 변증법적 전개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인식 주체는 그것들의 필연성 속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자유’는 자의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인 자유이다(주체가 자기 원인으로서 자율성을 갖는 것).[22]이 단계에서 자의성은 헤겔과 레닌에 의해 문헌 서술의 구체적인 요소에 따라 자율성, 자발성, 능동성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치밀한 사유’란 외력에 의해 강압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닌, 주체의 부단한 능동적 의식 과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이념은 이전 단계의 대상처럼, 그 스스로가 가진 대립을 의식에 의탁해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적 운동을 통해 극복한다.

 

오성은 이념으로의 변증 과정을 통해 폐기된다.[23]이 폐기는 그 대상에 한해서의 폐기이다. 변증법적 사유의 도정 내부에는 여러 국면의 개념 관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론의 지양으로서 … Continue reading 사유가 성립되는 것, 즉 개념적 사유의 끝을 통해 인간이 추상에서 실재의 구체(아직은 의식적이지만)에 접근한 한에 있어 오성은 의미가 없게 된다.[24]예를 들어, 종의 차이가 DNA의 염기 서열 차이에 의한 것, 그리고 양적 유전학적 차이에 의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면(유전 인자로서의 통일), 종의 … Continue reading 그리고 이에 따라 오성에 의탁한 힘도 폐기된다. 아직 이념으로 나아가지 못한 ‘보편화된 대상’은 동요하게 될 것이고, 인식상 다시 모순의 새로운 국면을 산출할 것이다. 이념은 이 국면에서 이론(Theorie)으로 통일된다. 한편 레닌은 헤겔의 위의 언급의 마지막 문장에 “영원한 생동성=변증법”이라는 주를 달았다. 이는 변증법이 상호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무한함을 갖는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념을 형성하고, 그것이 사고와 연결되는 데 있어, 오성이 어떠한 중요한 역할조차 하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실 헤겔 이후 형성된 변증법 체계에서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점인데, 헤겔 변증법에서 인식 주체의 주관(감각-지각-오성-사고)은 ‘다루어지는 대상들(지시 대상, 보편 대상, 개념, 이념, 이론)’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관적 변증법에서 의식체의 본질은 인식 주체의 주관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능동적으로 취급한다’고 믿는 ‘다루어지는 대상들’이다. 헤겔은 그의 수많은 후기 저작에서 후자를 본질, 전자를 비본질이라고 파악한다. 여기서 인식 주체의 주관은 주관적 변증법의 인식론적 틀이고, ‘다루어지는 대상들’은 주관적 변증법의 존재론적 틀이다. 부정의 시초는 인식 이전의 틀로서 존재론적 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주관적 변증법에서 인식론적 틀은 존재론적 틀의 자기 복귀를 위한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산물에 불과하다.[25]앞서 설명하였지만,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객관의 자기 복귀로서 부정의 부정을 동일성 확립의 핵심으로 놓는다. 그는 스스로의 보존(동일성)을 … Continue reading 그러나, 한편으로 인식론적 틀은 존재론적 틀을 구체화하는 핵심으로 된다.

 

레닌이 이념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이 의미에 기초해서 유물론의 원칙을 생각한다면, 인식의 전(全) 과정상에서 대상과 이념의 자기 운동은 물질이 갖는 총체적인 모순 운동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의식의 대상과 사유의 대상으로서 이념을 이성의 간지에 의한 것, 즉 이성의 자기실현으로 간주하면 이것은 객관적 관념론으로 후진하는 것이며, 현실에 엄연히,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물질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길로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근대 이래 폭발적으로 발전한 과학을 통째로 부정하는 무모한 시도이며, 무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 속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끊임없는 과정, 모순의 발생과 그 해결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라는 구절은 변증법적 전개 자체라 할 수 있는 인식으로서, 3단계 체계 속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인식은 실천-감각-사고라는, 수동적이기도 동시에 능동적이기도 한 것, 그리고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한 것, 마지막으로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이기도 한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사고/사유는 자연법칙을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고/사유가 관통하는 내용은, 물질의 내적 모순 운동(끊임이 없는 생성, 발전, 소멸) 및 이 내적 모순 운동과 상호 관련되는 외적 모순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사고/사유는 이 합법칙성 모든 내용을 뛰어넘는, 즉 물질의 제반 운동의 제 관계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아니다.[26]“가능한 것은 오직 인식이 경험의 무수한 모순을 제거하고, 경험을 위해 일반적 조직 형식을 창조하며 근원적인 혼란스러운 요소의 세계를 파생적인 … Continue reading

 

그렇다면, 사고/사유는 어떻게 지양으로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레닌은 “생생한 직관에서 추상적인 사유로 그리고 이 추상적인 사유로부터 실천으로 ― 이것이 진리 인식의, 즉 객관적 실재를 인식하는 변증법적 도정이다”라는 주석을 통해 추상적 사유와 실천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이론적 인식은 자신의 필연성에 있어서, 자신의 전반적 제 관계에 있어, 자신의 모순적 운동에 있어 객관을 ‘즉자대자적으로’ 제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개념은, 개념이 실천의 의미에 있어서 ‘대자존재(Fürsichsein)’로 될 때, 비로소 인식의 이러한 객관적 진리를 파악하고 포착하여 ‘최종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된다. 즉, 인간과 인류의 실천은 인식의 객관성에 대한 검증이자 기준이다. …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 세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창조하기도 한다”[27]W. I. 레닌, 앞의 책, pp. 166-167.라는 레닌의 언급을 통해 실천의 중요성에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레닌은 물질의 모순 운동의 반영으로서 의식을 인정하고, 그러한 의식이 물질의 모순 운동이 갖는 내용을 반영한 모순 운동을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 이후 레닌의 추상적 사유와 실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분석하면 실천은 추상적 사유의 지양 결과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의 제2단계’ 또는 ‘근본적인 실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헤겔에 있어 실천은, 의식적 구체, 즉 사유의 대상으로서 이념(Idee)의 총체로서 이론의 자기실현 과정이다. 여기서 자기실현은 이론이 갖는 ‘관조하는’의 항(項)과, 그것 자체가 현실에 그 내용을 실현하려는 항의 대립으로서 조건 지워진다(불가침성의 모순). 이에 따라 그것의 지양으로서 실천이 등장하는데, 실천은 객관과 주관의 관계 형태이고, 그것의 실현은 추상적 사유에서 의식적 구체(구체적 사유)로 나아간 주체의 전적으로 자율적인, 즉자대자적 자유에 기초한 목적 정립이다. “투쟁하는 존재가 곧 자유로운 존재이다”라는 헤겔의 말은 바로 이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헤겔의 실천에 관한 해석은 타당하지만 그것은 상위의 이성의 간지에 의해 진행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정신의 활동이며, 물질의 반영으로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실천에 대한 헤겔의 위와 같은 견해에 대해 요약하였다. 실천에 대해, 외화와 의식화를 거친 절대정신의 자기 복귀 과정으로 설명한 헤겔과 달리, 레닌은 그것을 물질이 갖는 고유한 운동의 자기 복귀 과정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앞서 모순의 성격을 짚으면서 실천의 가능성이, 물질이 갖는 내/외적 모순 제 관계의 자기 유지를 위한, 물질의 변증법적 복귀 과정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 레닌의 추가적인 메모를 통해, 레닌이 의식의 자기 운동의 중요성을 재차 부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세계’는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그리고 이 객관적 세계에 직면해 있는 인간의 실천은 목적의 ‘수행 과정에서 장해에’ 봉착하고 심지어 ‘불가능’에 부딪히게 된다. … 인식은주관적 의견(정립 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현실성이라는 참다운 존재자를 자기 앞에서 발견한다(이것은 순수한 유물론이다!). 인간의 의지, 즉 인간의 실천이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자신을 인식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외적 현실성을 참다운 존재자로(객관적 진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인식[이론]과 실천의 통합이다.[28]같은 책, pp. 170-172. (강조는 레닌이 확실히 긍정한 것.)

 

헤겔 반성 철학 체계에서 인식과 의식의 정립 작용 사이의 관계에서 참다운 존재자로서 현실성을 발견한다는 서술은 의식의 존재 형태에서 그것의 모순 운동을 상정하지 않고는 전혀 긍정할 수 없다. “인식과 의식의 정립 작용 사이의 관계에서 참다운 존재자로서 현실성을 발견한다”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앞서 비판한, 의식을 물질의 단순한 변형의 연장으로서 파악하거나, 형식 논리학적 전개로 나아간다.

 

위 단서에 기초해서, 헤겔 변증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를 요약하고 스스로의 견해를 밝힌 레닌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분석하면, 레닌이 요약한, 그리고 주석을 달은 참된 맥락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대립물들의 동일성(대립물들의 통일이라고 하는 것이 아마 더 올바를지도 모르지만, 물론 동일성(Identität)과 통일(Einheit) 용어상의 차이는 여기서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올바르다)이란 자연(여기에는 정신과 사회도 포함된다)의 모든 현상과 사건들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 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그 자기 운동에서, 그 자발적(spontanen) 발전에서, 그 살아 있는 생활에서 인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그 모든 사건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 두 개의 근본적인 발전(진화)관은 (1) 감소 및 증가로서의, 즉 반복으로서의 발전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2) 대립물의 통일(통일물의 상호 배제하는 대립물들의 분열과 그것들 간의 상호 관계)로서의 발전이다. … 전자의 구상은 죽은, 창백한, 무미건조한 것이다. 후자의 구상은 살아 있는 것이다.[29]같은 책, p. 300.

 

레닌은 변증법을 이해하고, 승인하는 데서 정신과 사회를 포함하는 자연, 그리고 그 모든 현상과 사건들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 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하는 것을 필수로 갖고 나아간다. 이를 통해 레닌이 감각-추상적 사유-의식적 구체-실천까지 그것의 내적 모순에 의한, 의식 내부의 지양ㆍ발전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사이의 자의성에 대해서도 승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변증법적 전개로서 주체는 의식의 질적 발전으로 나아갈 때 더 높은 수준의 자유를 향유한다. 투쟁으로서 실천(대표적으로 착취 사회를 향한 투쟁, 자연과의 투쟁)은 같은 의미에서 그것이 의식적 구체에서 현실적 구체(실천의 제 내용)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자율적인 목적 정립의 운동’이고, 그러하다는 것으로부터 인간은 또한 자유를 향유한다. 다시 말하면, 투쟁하는 자는 자유로운 존재(정확히는 항구적 자유로 나아가는 존재)이며, 투쟁하지 않는 자, 유적(類的)이지 않은 자는 예속된 존재(마찬가지로, 소외된 존재로서, 스스로의 예속을 고착화하려는)이다. 그리하여 의식의 발달로 나아가는 의미로서 의식 활동은 외력에 의한 강압이나 모종의 힘에 의한, 완전히 수동적인 운동이 아니며, 주체의 능동적인 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엇에 관해) 통찰한다”라는 것은 변증법적 전개로서 자의성과 그 이상의 즉자대자적 자유를 갖춤을 이미 전제한 것이다. 이것은 한편 자연의 제 내용으로서, 물질의 내/외적 모순 운동에 대한 인식 수준이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존재는 그러한 무지의 사슬을 끊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예속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에 관해 적지 않게 존재하는 편향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오로지 의식적 구체의 ‘내적 평형으로서 유지’를 통해 노동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며, 두 번째는 오로지 실천만으로 노동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오로지 의식적 구체만 강조하는 견해는 지구에서 표면에 보이는 물을 안 보이게 하기 위해 그 물을 퍼다가 지하 탱크에 저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무모한 견해이다. 의식적 구체 이전 지각과 오성의 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수이며, 실천은 감각 자료를 풍부화한다. 동시에 실천만 강조하고 사고를 강조하지 않는 태도 역시 오류인데, 이러한 ‘실천(실천이 아닌 맹동으로서)’은 필연적으로 즉자적 대응 외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동은 실천이 아닌, 감수성의 단계에서 논해지는, ‘수용(력)에 의한 반응(력)’에 불과하다.

 

레닌의 위와 같은 언급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1)과 (2)에 대한 레닌의 견해이다. (1)은 기계론적 발전관으로 변증법적 전개를 전제하지 않는다. 레닌은 살아 있는 변증법적 전개로서, (2)를 주장한다. 이는 유물론적 식견에서, 물질이 갖는 내적인, 동시에 외적 대립, 즉 모순 운동이 다양한 양상으로서, 서로에 대해 비국소적인, 둘 이상의 대립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명확한 구분을 통해, 의식의 제 요소가 자기 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제 요소는 그것 자체가 물질과 완전히 독립하여, 그 스스로 모순의 동력을 얻는 게 아니라, 항시적으로 추가되는 감각 자료를 통해, 그것들의 전체 발달 속에서 생겨난 물질의 총체적인 모순 운동을 반영한 것으로서 의식의 모순의 내용항상 새롭게 대립하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30]모순의 동력으로서 대립의 제공은 헤겔의 견해에선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성이다. 반면 레닌의 견해에서 모순의 동력으로서 대립의 제공은 물질의 … Continue reading

 

이로써 추상으로서 추상적 사유와 그것의 구체로 나아감으로써 실천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것이며, 실천-감각-사고의 변증법이 완성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관계를 규명함은 실천에 관해 가장 초보적인 의식적 활동인 조사부터 시작하여, 제1단계로서 ‘과학적 수행’으로, 제2단계로서 ‘의식적 구체의 내용을 현실화하는 것’과 ‘살아 있는 직관으로 나아감’이라는 여러 가지 측면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실천은 오로지 구체적인 사유의 결과의 이후에라야, 즉 그 최종의 지양으로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 전개의 3단계 체계는 과학 발전사 일반에 적용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천동설의 발달 과정과 지동설로의 대전환이 있다.

 

천동설의 확립은 인간의 외부 세계 인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해가 뜨고 지는 대략적인 방향을, 하늘에서 보이는 밝은 빛, 그리고 일정한 주기마다 같은 분포의 빛이 반복되는 것, 밝음이 오고 어두움이 오는 것, 그리고 그 주기의 일정성, 수평선의 구부러짐 등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감각 작용이다. 한편, 이것을 동쪽, 서쪽, 낮, 밤, 시간, 월식, 일식, 원운동, 타원운동, 시운동 등으로 나눠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지각(개념을 정립하는 것)-표상(정립된 개념을 재현하는 것)-오성(개념들을 차이로서 구분하는 것) 단계라 할 수 있다. 천동설은 이러한 개념의 적극적인 이용으로 정교화되었다. 한편 지각-표상-오성은 그것이 갖고 있는 개념에서 이념으로 나아가는데, 이것은 나열된 개념의 총체, 즉 개념의 통일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과감하게 이심원과 동시심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천동설 체계를 확장하였는데, 즉 지구의 외부에 관찰되는 행성은 주전원에 따라 돌지만, 주전원의 중심은 이심원에 따라 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심원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며, 그 중심을 이심점과 지구의 중간 지점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지구의 외부에서 관찰되는 행성의 운동이 설명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러한 복잡한 체계로 천체 운동을 설명했지만, 상당히 정교했다.

 

이것이 바로 상위의 개념으로서 이념의 통일, 즉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천체 관측에 대해서, 처음에는 감각에서 시작했지만, 의식의 능동성을 통해 지각-표상-오성으로, 그리고 다시 의식의 능동성을 통해 의식적 구체로 나아갔고, 그 결과로 주어진 현상을 통일적인 이론의 틀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천동설은 과학적으로 오류라는 것이 밝혀졌다. 천동설은 분명히 구체적인 사유의 결과물이지만 그것의 정립 도정에서 맨 처음 단계인 감각, 그 감각에 기반하는 감각 자료의 제한성으로 인해, 바로 그 제한적인 토대 위에 선 구체적인 사유였기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31]과학에 대해 몰지각한 입장을 견지하는 자들은 과학의 발달사를 경시한다. 이들은 오로지 현재적 의미에서 ‘가장 완벽한’ 과학만을 ‘최종적인 … Continue reading 이것은 그 구체적인 사유의 단계 끝에서, 다시 실천으로, 즉 과학적 실천을 통해 극복된 것(지동설)이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발전된 도구의 이용, 적극적인 관찰이다(케플러, 갈릴레오 등). 이것이 바로 과학적 실천의 본질이다. 과학적 실천은 다시 감각 자료의 풍부화를, 그리고 감각 자료의 풍부화는 의식적 구체의 확장성 팽창을 가져왔다.[32]코페르니쿠스와 같이, 당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한 감각 자료의 확장의 불가능성이 전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사유로서 천동설의 모순을 … Continue reading 그 결과가 바로 지동설이다. 그러나 천동설은 당시 유럽 봉건 통치배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던 이유로, 이 과학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착취적인 토대에 기생하며, 그것을 부단히 유지하려는 착취계급은 인류의 즉자대자적인 의식 발전의 결과의 현실화를 적극적으로 막으려 한다. 착취계급은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그를 규정하는, 생산관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제한된 생산력과 함께)를 점하고 있는 지배계급이고, 따라서, 소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들이 나날이 발전하는 인류의 과학적 인식의 팽창을 막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인식의 즉자대자적으로 나아감은 생산 양식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일정 생산력의 증가로 인한 천체 관측 도구의 발달과 기반 과학의 발달은 과학적 실천을 통한 발전된 인식을 만들어 낸다.

 

인간이 자의성을 갖춘 존재로서, 즉 자각하는 존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그 구간은 대략적으로 감각에서 지각-표상-오성으로 나아갈 때, 그리고 지각-표상-오성에서 구체적인 사유로 나아갈 때이고, 구체적인 사유에 다다르면 자기 원인으로서 자유인 즉자대자적 자유를 갖고 다시 실천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실천은 ‘인과성에 종속된’ 운동이 아니라, 순전히 주체 그 자체의 자율성에 근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자율성은 필연성과 합치되는데, 필연성은 생성ㆍ발전ㆍ소멸로서 물질의 내적 모순 운동의 제 내용과 다르지 않다.

 

만약 실천을 확고부동의 인과로부터 도출되는, 즉 수동적 과정으로 본다면 그것은 속류 유물론-결정론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실천-감각-사고의 변증법적 전개는 물질의 반영으로서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의식 발달의 지점에서 능동적인 성격을 갖는 과정이다.

 

 

4. 대상적 활동

 

맑스가 주장한 대상적 존재(gegenständliches Gattungswesen)[33]본래 ‘대상적 유적 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직역에 맞지만, 유적 존재는 이미 대상적 활동을 전제한 보편적인 인간 존재이기에, ‘대상적’과 … Continue reading대상적 활동(gegenständliche Tätigkeit)[34]1888년에 발행된 원문에서 등장하는 원표기는 ‘gegenständliche Thätigkeit’이다.의 참된 의미를 아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는 맑스와 엥엘스 이후, 레닌의 헤겔 변증법 해석을 연구하면 된다. 두 번째는 헤겔의 관념론과 변증법에 대한 맑스의 비판을 조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니, 두 번째 방향으로 넘어가 보자. 이는 가장 파악하기 쉬운 내용으로서, 맑스가 “현실은 절대정신의 타재이며, 이성의 간지이다”라는 헤겔의 관념론적 세계관을 비판한 그 내용을 곱씹으면 될 것이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물질 없이 완전한 추상에서 자기 자신에 근거하여 자기 운동을 하는 절대정신’[35]이와 관련한 헤겔의 대표적인 언급은 다음과 같다: “이 정신의 세계는 이중의 세계로 분열된다. 하나는 현실의 세계 또는 정신 소외 그 자체의 … Continue reading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으며, 그것이 현실을 외화한다는 것 역시 신비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맑스주의 세계관이 왜 유물론인지를 안다면, 누구나 알며, 이해했을 내용이다.

 

그 다음으로 유의해야 할 비판은 헤겔 변증법에 관한 구체적인 비판이다. 맑스는 이 작업을 하기에 앞서 헤겔의 ‘추상에 의한 외화의 무분별한 적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추상적 사유의 외면성 … 자연, 이 추상적 사유에 마주 서 있는 자연. 자연은 추상적 사유에 대해 외적이며 추상적 사유의 자기 상실이다. 그리고 사유는 자연을 외적으로, 추상적인 사상으로 파악하지만 외화된 추상적 사유라고 본다. ― 마지막으로 정신, 자기 자신의 탄생지로 되돌아가는 사유, 이것은 마지막에 자기 자신이 절대지, 따라서 절대적인, 다시 말해서 추상적인 정신임을 발견하고 자기를 긍정하여 자신의 자각된, 그리고 자신에 상응하는 현존을 획득할 때까지는, 인간학적현상학적심리학적인륜적예술적종교적 정신인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정신의 현실적 현존은 추상이기 때문이다.[36]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강유원 역, 이론과실천, 2006, pp. 188-189.

 

추상적 사유는 앞에서 다룬 것처럼 의식적 구체(구체적인 사유)에 다다르지 못한 의식으로, 아직은 오성적 수준에서 추상적 언명으로만 있는 사유이다. 헤겔이 말하는 (맑스적 의미의) 자연 일반은 절대정신이 아니더라도, 추상적 사유에서 분유되는 것으로 되는데, 이는 맑스가 요약한 대로 “자연은 추상적 사유에 대해 외적이며 추상적 사유의 자기 상실이다”라는 내용을 갖는다. 그러나, 여기서 절대정신의 타재는 그 권위를 인간에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절대정신이 그 스스로의 순수한 과정으로서 타재로 현실을 외화하기 전에 이미 인간적 수준에서 사상(寫象)되는 추상적 사유가 그 ‘엄밀하지 못한’ 외화로서 현실을 구성해 버리기 때문이다. 맑스는 헤겔의 논리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현실은 추상 속의 정신이 아니라 인간적 활동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하여,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변증법으로 지양한다.[37]공교롭게도, 형식은 다르지만 레닌의 헤겔 변증법 비판도 맑스와 같은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맑스는 헤겔 변증법에서 의식의 능동성은 승인하고, 그것의 관념론적 지반은 폐기한다. 헤겔은 구체적인 사유, 즉 자기의식-이성-정신의 운동을 외부 세계를 반영하는 운동의 연장으로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이성의 관조에서 비롯되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관념의 능동적 자기 운동으로 의식 현상을 해석하였지만, 맑스는 그 모순을 폭로하여 유물변증법을 성립한 것이다.

 

맑스가 말하는 대상적 활동은 바로 이 관조의 견해에 관한 체계적인 비판의 연장에서 해석해야 한다. 맑스는 의식을 인간이 삶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생산 활동의 산물이자, 이러한 활동에 완전히 종속되는 매개로서 파악하였다. 맑스는 의식을 인간의 현실적인 활동들의 매개 산물 중 하나라고 본 것이다. 의식의 자기 운동은 그러한 매개 과정으로서만 확립될 수 있으며, 생산 활동과 완전히 독립된 의식의 자기 운동은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인간이 현실 문제에 직면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며, 그것의 통일로서 실천으로 나아가고, 다시 새로운 현실 문제를 인식하는, 무한한 인간적 활동을 맑스는 감성적대상적 활동이라고 간주하였다. 맑스는 헤겔 이후의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비판적 의식의 집약인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 …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실천으로부터 고립된―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는 포이에르바흐는 직관[혹은 관조]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 인간적ㆍ감성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38]≪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p. 185-186.

 

이를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의 추가적인 설명(“판단 및 감각의 성질”에서 다룬 맑스의 언급들)과 연결해서 이해한다면, 맑스는 관념이 이성의 간지 속에서 나타나는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영위, 즉 인간 삶에서 가장 기초적인 욕구 충족 및 이를 위한 노력의 산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관념의 자기 운동 역시 이러한 욕구 실현을 위한 인간 활동과 자연의 반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맑스는 외적 세계를 반영하는 관념의 운동 방식에서 변증법을 승인한다. 즉 상호 대립항의 선재(先在)로서 그것의 자기 운동을 설명한다. 여기서는 의식의 일정 단계, 즉 구체적인 사유의 자기 운동(외부 물질세계로부터의 반영으로서)은 긍정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맑스에 대한 ‘거꾸로 선 헤겔학도’라는 평가가 성립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의식의 최고 단계라 할 수 있는 사유, 즉 구체적인 사유는 헤겔의 ‘자기의식’부터 ‘정신’에 상응하고, 추상적인 사유는 감각적 인식 단계에 있는 의식이다. 구체적인 사유는 ‘순수한 정신’으로서 머무는 것으로 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연 일반에서 감각되고, 대상적으로 되는 실체로서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체적인 사유는 객관에 접근하는 ‘추상적 엄밀함’의 끝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오로지 현실에 놓이게 됨으로써만 그것의 본 내용에 그것의 존립 근거를 확립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현존성을 완전히 추상에 내재함으로써 구체적인 ‘사유’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의 현존성은 현실에 놓여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새 형의 대립이 발생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변증법적 전개로서 실천, 지(知)와 행(行)의 통일로서 실천이 확고히 설 수 있는 자리가 있다. 헤겔에 대한 레닌의 긍정과 비판적 의식, 그리고 맑스가 자신의 저술 전체에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해 물질에 선차성을 부여한 확고부동의 유물론자라는 두 가지 축을 교차하여 이를 바라본다면, 의식의 능동성을 확증할 수 있으며, 동시에 순수한 정신은 존재할 수 없거니와, 의식 일반은 물질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물질의 산물이라 함은 자연에 대한 모든 인간 활동을 포함한다.

 

오직 이 경로를 따라 대상적 활동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 대상적 활동이란 실천을 통한 이론의 성립, 그리고 이론의 성립을 통한 실천의 변증법적 전개의 활동인데, 이는 자연 일반에 대한 인간의 투쟁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그 투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생물은 ‘무엇을 위해’라는 동기가 없으며, 또한 무생물에 대해 ‘무엇을 위해 그것(무생물)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추상에서 구체,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전개, 짧게는 대상적 활동의 당위는 무엇인가? 해답은 맑스가 언제나 언급한 것이다. 바로 삶의 영위이다. 생존하려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을 넘어서 많이 먹고, 많이 자며, 더 높은 수준의 안정됨을 누리려는 것, 더 청결해지려는 것 등의 인간 욕구가 바로 삶의 영위이다. 인간은 이를 위해 대상적 활동을 하는 것이며, 대상적 활동의 당위는 오로지 여기서만 찾을 수 있다. 과학의 그 목적성은 모두 인간적 욕구, 그 욕구의 충족을 위한 제 생산 활동에 연원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합리성의 기준이다.[39]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그를 담당하는 수많은 어용학자는, 합리성을 자기 욕구에 기초한 인간의 바람과 완전히 단절된 것으로 취급한다. … Continue reading 노예제 이후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과 착취는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계급이 인간적 존재로서 추구하는 ‘삶의 영위’의 파괴이다. 따라서 변증법적 전개의 전재(全才)로서 대상적 활동은 착취계급의 절멸 그리고 사유제의 종국적 철폐, 즉 공산제의 달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계급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5.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그리고 사회적 관계

 

물질적 생산관계로부터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 경제적 관계로서 사회적 관계는 경제적 관계 외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총체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규정한다.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경제적 관계 외의 사회적 관계로서 제 형식들은 정치, 법률, 종교, 기타 인간(감성)적 관계 등으로 나눠지는데 이것을 하나의 단위로 통일한다면 사회적 의식으로 묶을 수도 있다.

 

지배계급은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데, 이들은 여러 상부 구조의 조작을 통해 피지배에 놓인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러한 지배 행위는 착취적인 토대에 복무할 수 있게 하는 의식 내용을 주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은 문화 매체, 교육, 대인 관계에서의 관습 등으로 매개된다. 이러한 것의 타파로서 관념론적인 해결 방식은 착취적인 토대 위에 선 ‘지배계급에 복무하는 사회적 의식’을 의식적으로 공략해야 함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한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공략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천인 한에서만 성립된다. 그리고 실천은 의식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 세계(물질의 내적 모순 운동의 결과로서 현실인 생산관계) 위에 서 있다. 실천은 능동적인 의식 활동이 전제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의 현실적인 발로는 토대 내에서의 투쟁이다. 사상 투쟁과 정치 투쟁도 이 토대 내에서의 투쟁과 변증법적으로 엮여 있으며, 토대의 규정력이 일차적인 것으로 되어, 상호 작용을 통해 그 양상이 항시 변화한다.

 

착취적인 토대에 기초한, 경제 외적인 형식을 갖는 사회적 관계는 그것이 사회적 의식의 단위로 재생산된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으로서 서는 각각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생산 양식의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 생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과 그 목적성이 경제 활동이라는 점에서 이는 타당하다. 사회적 관계를 모종의 의식 주입으로써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일시적으로 관계가 이루어지는 실제 내용을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다시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가 본래적으로 내재한 가장 근본적인 생활 양식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 경제적 영역의 활동 양식의 제 내용을 반영한 바로 그 규정력을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물질의 복합체로서 인간이 갖는 생물학적 복잡성과, 인간이 갖는 의식 활동의 제 법칙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토대든, 비정치적 측면의 상부 구조(상부 구조의 생성 초기로서)로 전환되는 과정으로서 경제적 토대인 시민 사회든, 상부 구조로서 국가든 인간 생활은 항상 집체적이다. 이는 생산력의 발달로 인해 더욱 두드러졌다. 이러한 집체적 인간은 지리적 조건, 생활 양식, 교통 발달의 정도에 따라 서로에 대해 근사(近似)한 수준, 다시 말하여 거의 같은 수준의 감각 자료를 얻는다. 사회적 의식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을 말한다. 더 나아가 물질의 총체적인 모순 운동의 가장 현실적이고도 보편적인 종착지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사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제 내용에 따라 규정되는, ‘집단적인 의식(도덕, 법률, 예술, 정치, 종교 등)’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맑스는 이에 대해 아주 간명하게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40]≪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박종철출판사, pp. 477-478.(≪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제 내용에 의해 규정된 의식으로서, 그것이 동질의 사회구성체를 근거하는 토대에 의존하여 생성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 낡은 사회적 의식은 토대가 발전하더라도 남아 있을 수는 있다.[41]의식을 규정하는 토대가 폐지되더라도, 인식 주체의 의식은 낡은 생산 양식을 반영하는 제 내용을 가질 수 있다. 토대가 개변하면 낡은 의식도 … Continue reading 사회적 의식에 대해 단순히 지엽적인 의미에서 ‘공통된 환경’에서 영위하는 각 개인 의식의 총합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사회구성체의 영향 범위 내에서 형성되는 동질에 근사한 의식인 ‘집단적인 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하에서도 감각 자료의 내용은 각 인식 주체마다 상이하기에, 사회적 의식은 내적으로는 의식의 불균등성을 항시적으로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생산 양식의 개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공산주의로의 이행에서 과도기인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성립은, 그것이 종국적으로는 사유제의 폐지로 나아가는 사회라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부터 사회적 관계도 전면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되기 전, 즉 그것의 원형으로서 그 이전의 착취적 토대에서 추동된 즉자대자적 의식으로 취급한다면, 사회 발전의 노정에서 인식된 지배 이데올로기는 한때 과학이었으며,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적 전개로써 태어난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원형(아직은 현실적으로 지배적이지 못한 즉자대자적 인식)은 그것이 지배적인 견해로 되었을 때 이미 과학성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그것도 어디까지나 착취적인 토대(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달과 그로 인한 생산관계의 동요, 즉 양자 사이의 모순이라는 국면에서 그 ‘한때 즉자대자적인 인식으로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원형’은 그 스스로의 제 내용을 지양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비과학에 의존하든지, 둘 중 하나의 극단적인 길로 나가게 된다. 착취적인 토대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그것이 한때 변증법적 전개로써 형성된, 즉자대자적인 원형이었을 때 과감히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부터 확립된다. 그래서 즉자대자적인 인식은 생산 양식의 그 구체적 성격에 따라 과학적이지 않을 수도, 과학적일 수도 있는데,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아직 그것 자체로 과학은 아니고 ‘합리적인 것(합리성)’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아담 스미스의 고전파 경제학설, 즉 부르주아 경제학은 한 시기에서 과학적이었으나, 현재는 아니며, 즉자대자적 인식으로서 성립된 이 과학은 지속적인 외화 과정을 거치면서, 소외된 형태의 비과학으로 추락하였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이 한계 효용 비과학으로 후퇴하게 된 것은 이와 관련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인간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봉건 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인간관계는 지극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 양식 확립 이후 개인주의적 인간관계는 인간 소외로서 사회적 관계의 한 형식일 뿐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로 향하는 노정에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되며, 사회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인간관계는 집단주의적 인간관계로 지양ㆍ발전된다. 법치주의와 이것에 기초한 법률적 관계, 부르주아 의회 제도에 기초한 정치적 관계 등도 모두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그것의 제 내용이 한 시대에서 경제 외적 형식의 사회적 관계의 합리성을 기준하고, 의식의 내적 지양과 과학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 변증법과의 통일로서 변증법적 사유(주관적 변증법)는 항상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다. 레닌은 사회적 관계로서 주관적 변증법을 이행기의 변증법이라 하였다.

 

이행기의 변증법에 대한 레닌의 기여는 유물변증법의 법칙, 원칙, 범주, 새 시대의 현상과 과정을 상호 연관된 체계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유물변증법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42]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I≫[1971], 문성원 외 역, 한울림, 1990, p. 178.

 

이행기의 변증법은 네 가지 방법론적 원칙을 갖는다.

 

첫 번째는 대상과 과정의 원칙으로, 현상에 대한 접근이 역사적-사회적 관계 이행을 위한 의식적 활동에서 필수 불가결임을 뜻한다. 이는 주관적 변증법에서 다루는, 감각 자료의 증대로서 실천이 갖는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발전의 원칙으로, 인식 대상으로서 현상과 과정은 한편으로 물질의 총체적인 모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고, 이것은 대립물의 투쟁으로서 내용과 형식, 부분과 전체, 양, 질의 변화를 규정함을 뜻한다. 이는 역사 이행기에서 모순 유형의 변칙성을 능동적으로 파악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역사주의 원칙으로, 변증법적 사유에서 사물 현상의 과거와 현재를 통일적으로 규명하여 그것의 변화 및 발전 경향을 밝히는 것이 필수적임을 뜻한다. 이는 모든 현상을 구체적-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각 시대가 갖는 계급적 당파성을 통해 그 시대의 이데올로그를 평가ㆍ분석해야 하며, 사회적 의식의 제 내용을 해석하는 것 또한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네 번째는 계급 분석의 원칙으로, 제 사회적 관계, 역사 이행에서 계급의 기원, 구조, 관계, 투쟁을 분석해 내야 함을 뜻한다. 이는 변증법적 사유에서 한 사회구성체의 계급 관계, 투쟁의 관계를 중점으로 놓아야 함을 강조한 것인데,[43]같은 책, p. 179.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사회구성체 논쟁도 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레닌은 이행기의 변증법에서 다루는 문제를 확정하면서 자기 발전으로서, 모순의 다양성이 발전하고, 동시에 그 해결점도 발전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현실은 역사의 이행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행기의 변증법은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 원칙으로서 견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부터 변증법적 사유와 소박한 수준의 인식론은 그 성격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6. 극복해야 할 편향들과 결론

 

지금까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의식 발달 내용을 다루었다. 우리는 이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아는 것을 넘어서, 국내 변혁 운동에 퍼진 잘못된 견해를 비판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사회 변혁 운동 내에 만연한 잘못된 경향, 즉 극복되어야 할 편향을 다뤄 보자. 이 편향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진다.

 

첫 번째로, 엥엘스의 자연변증법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며, ‘사회의 변증법’만을 승인하려는 경향이다. 우리는 변증법적 전개의 3단계에서 나타나는 각 의식의 존재 형태를 고찰할 때, 자연변증법을 부정한다면 사회의 변증법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문제의 첫 주제는 경험 내용에 관한 것이다. 만약 원 반영체인 물질이 모순 운동을 하지 않는, 정태적 존재라면 감각에 주관적인 상의 부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구태여 의식의 발달 경로를 통한, 구체에서 추상, 추상에서 구체라는 체계도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는 원 반영체가 갖는 내적 운동의 실질을 통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쓸모가 있는 개념인데, 본래부터 운동성이 없는 물질을 의식이 불완전하게 인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엥엘스의 자연변증법을 부정하는 견해대로라면, 구체적인 사유는 무의미하며,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추상적인 사유에서 구체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 자연변증법을 부정하면 고도로 발전한 의식으로서 의식적 구체, 다시 말해 사고/사유는 성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시 실천은 일회적인 성격을 갖는 것에 불과하게 되며,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완전히 독립적인 의식적 운동’을 억지로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주제는 첫 번째 문제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의식의 내적 운동이 성립하지 못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본래 물질이 객관적 실재로서 정태적 존재에 불과하다면, 의식의 내적 운동은 도저히 성립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의식의 내적 운동이 전적으로 물질이 갖는 총체적인 모순 운동 덕에 성립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보편성을 얻기 위한 개별성의 내/외적 투쟁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별성의 근거가 되는 것(물질의 모순 운동)으로부터 추동된다. 자연변증법 일체를 부정한다면, 의식의 내적 운동은 있을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맑스주의는 형식 논리학에 기초한 세계관이 되어 버릴 것이다.

 

두 번째로 변증법적 전개의 3단계 체계를 마치 현실에서의 수학 공식처럼 도식화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향도 존재한다. 그러나 역시 이는 성립할 수 없다.

 

실천에서 감각, 감각에서 사고/사유까지 나아가는 과정은 실제로 그 내부에서 의식 내 불균등성을 전제하고 있다. 가령, 의식의 주된 경향으로서 가장 높은 단계, 가장 의식적으로는 구체적인 단계인 사고/사유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의식은 실천을 통해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직관, 즉 경험 내용의 확장을 내포하고 이것을 내적 모순 운동으로서 지양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천이 경험 내용을 확장시킨 와중에도, 실천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식을 단일한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며, 필수적으로, 의식 내 불균등성은 상존(常存)한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변증법적 전개를 도식화하고, 그것을 도식적으로 이해한다면 추상과 구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제대로 이루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변혁의 현장에 나아가 실천을 하는 한 활동가를 예로 들어 보자. 변혁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살아 있는 직관을 구하는 것은 의식의 가장 고등한 단계인 사고/사유(구체적인 사유, 의식적 구체)로 나아갈 기회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활동가는 자신의 실천을 통해 얻은 경험 자료를 갖고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의식적 구체로 다가갈 것이다. 그 내용은 예를 들어, 현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이 가져야 할 전략 및 전술에 관련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현실적인 결론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결론이 서기 전에 이미 새로운 경험은 실천을 통해 다시 밀려들며, 이로 인해 새로운 내용을 갖는 추상적 사유는 동시에 그 활동가에게 의식적 차원에서 병존하고 있다. 구체로 다가가는 와중에도, 실천을 통해 다시 의식의 초보적인 단계에서 추상은 끊임이 없이 밀려온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변증법적 전개의 3단계 체계를 도식적으로 이해한다면, 실천에 대해 질적으로 고정이 되어 있으며, 무조건 경험 내용을 수집하는 장(場)으로만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현실 운동 양상의 다양한 변화를 고의로 무시하는 것이 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대개 변혁의 퇴조를 불러오며, 실제 주관적 변증법의 운동 법칙도 그렇지 않다.

 

세 번째로 자의성(恣意性, Willkürlichkeit) 부정에 관한 것이다.

 

몇 동지들은 결정론적 편향에 질식되어 있다. 이것은 주로 강한 결정론의 무분별한 수용을 통한 자의성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즉 혁명을 단순 자연법칙(0℃ 이상의 섭씨온도에서 얼음이 녹는 것과 같은)이라고 착각하며,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혁명이 단순 자연법칙이 아니라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것은 이미 의식의 발달 단계에서 자의가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혁명을 단순히 운명론적인 틀에서 짜일 수 있는, 루터교나 칼뱅교의 예정설(豫定說)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구태여 착취적인 토대 속에서 피착취계급이 착취계급에 대항할 실천적 행동을 취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의식의 발달에서 자의를 갖는 것은, 의식이 내적으로 모순을 갖고 있고, 그 모순에 의한 운동을 인식 주체는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등장한다. 주체가 물질의 총체적인 모순 운동을 반영한 의식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하고,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 원 반영으로서 물질 운동의 필연성을 이해한다면, 그것 자체로 주체는 확장된 의식 틀 내에서 부분적인 자의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제한적인 자유’가 생겨난다.[44]자의는 필연성과 우연성의 관계를 면밀히 알아본 다음에야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자의는 거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과 우연성 사이의 … Continue reading 따라서 단언컨대, 변혁은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며, 부단한 노력, 뛰어난 역량이 없다면 새 사회 건설을 성취할 수 없다. 객관적 정세는 그것이 감각 자료로 되는 한에서 인식의 틀을 넓히지만, 감각으로부터 사고까지 나아가고, 그것이 올바른 실천으로 발현됨은 순전히 역량의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변혁은 자연사적 과정이며, 사회적 인간의 활동이다. 이는 더 나아가서, 객관적 정세의 무르익음이 변혁 운동에 아주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계급 의식 역량이 부족하다면, 그저 변혁에서 퇴조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객관적 정세가 조성되기 전에 노동자계급의 의식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네 번째로 의식성의 부정에 관한 것이다. 쏘련 해체 이후 운동 내 온갖 개량주의, 절충주의 사조가 넘치면서, 맑스주의에 대한 속류 유물론적 해석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의식성 일체를 부정하고, 오로지 세계에는 물질만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계의 유일한 ‘객관적 실재’는 물질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물질인 것은 아니다.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저 물질 운동의 연속으로 될 것이며, 인간 크기의 물적 집적체는 충분히 큰 거시적 물질 복합체로서, 결국 인과성의 지배만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변혁을 위한 실천은 공문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의가 없는 혁명은 소박한 결정론으로 귀결된다.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속류 유물론은 혁명적 부르주아가 발흥하던 시기에 일정한 진보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독점자본이 등장한 이래, 완전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속류 유물론으로서 지배계급의 심리학은 대표적으로 행동주의가 있다. 1920년 ‘어린 앨버트 실험’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된 미국 심리학자 존 왓슨은 행동주의 심리학을 창시하였다. 이 실험은 인간 행동이 물질적 운동에 강한 종속 관계를 보인 것을 증명한 실험으로, 실험윤리적으로는 커다란 문제가 존재했던 실험이다. 이후 존 왓슨의 행동주의는 1930년대를 걸쳐서 거대한 심리학파인 행동심리학파를 구성했다. 이후 등장한 B. F. 스키너는 여러 실험과 논문을 통해 소박한 수준에서 조작적 조건화를 연속적으로 증명해 내었다. 행동주의는 모든 인간 행동이 감수성의 단계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는데, 오로지 외적 자극과 그에 합당한 반응으로서만 인간 행동의 원천을 말한다. 즉, 인간에게 능동성을 갖는 것, 즉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 행동은 물리적 환원이 가능하다는 속류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한편 미국 지배계급은 이 행동주의를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승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지배계급의 꼭두각시로서 기능하는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변혁을 위한 실천이 무용한 것이고, 인간이 갖는 ‘의식적인 것’은 그저 생리학적 욕구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심지어 그러한 욕구의 적당한 실현으로서, 의미 있는 행동까지 생리학적 욕구에 의한 수동적인, 연쇄적 조건-반응이라는 견해를 재생산하여 변혁 운동의 당위성을 ‘과학의 영역’에서 파괴하려 시도했다.

 

‘환경에 의한 지배’를 내세우는 행동주의 심리학파는 1970년대에 이르면 심리학계를 넘어서 사회 운동까지, 그 반동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학파는 불충분한 환경에서 자란 인간에 대해, 이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가난한 계층’은 위험한 존재라고 선동했는데, 이러한 선동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놓인 미국의 노동자계급을 겨냥한 것이었다. 행동주의 심리학파는 미국 내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변혁 운동의 ‘반사회성’이 ‘과학’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인간은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이며, 사회화가 고도로 이루어졌기에, 이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인간이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행동상으로 보이지 않는, 내적 행동(내적 실천)의 존재, 즉 사고력의 존재가 뇌신경 관련 실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되었고, 행동주의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 퇴조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뇌과학의 일정 진보에 따른, 지배계급의 후퇴라고도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 퇴조기에 접어들던 행동주의를 통해 맑스주의를 해석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른바, 미국의 ‘분석 맑스주의’를 수입하는 형태를 보였다. 한편, 이 절충주의 흐름은 한국 지배계급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자기 외적 틀에서의 변증법적 매개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즉 의식의 불균등성을 해소하는 과정으로서 사회적 의식의 형성이 의식-의식 관계의 망이나 총합으로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의식’을 따질 때 이것을 ‘개개의 의식으로서, 의식-의식 관계의 총합’으로 정의하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사회학은 이러한 잘못된 관점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의식 관계는 주관적 관념론과 신비주의의 소산일 뿐, 과학에 근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의식은 물리적 성질을 갖고 있지 않기에 물체성이 없다. 인식 주체가 타자에게 스스로의 의식 발달 수준에 기초한 행위를 가한다면,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그저 물질에 의한 반영이다. 그것은 감각 단계에서 설명된 감각의 내용, 즉 경험 내용으로 되는 것이지 이미 발달한 의식이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상대가 물질의 반영으로서, 어떠한 행동을 가한 인식 주체의 의식적 내용을 알기 위해선 주어진 물질적 자극(물질의 내/외적 모순의 운동으로서)을 변증법적 매개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의식-의식 관계로 설명해야 할 것인데, 이는 비과학적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의식으로서 상대의 의식을 직접 경험하거나, 그것의 모종의 반영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면, 인간은 서로의 머릿속 공상에 대해 이미 다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주관적 관념론자들조차 이러한 결과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상대방의 의식에 있는 내용을, 스스로의 의식이 알아낼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 전개 역시 지극히 비과학적이다.

 

사회 변혁에 들어선 모든 자는 자연변증법의 승인, 그리고 도식적 이해로부터의 해방, 자의성의 승인, 의식성의 인정,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투쟁이라는 다섯 가지를 변혁의 운동에서 항상 일관되게 새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본 위에서 맑스-레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더욱 명료한 세계관으로서 강화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가진 허위의식의 현신(現身)인 강단의 주류로부터 재생산되는 사이비 철학에 대한 사상 투쟁에서 유리한 지점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한편, 현재까지 진행된 논의에도 역시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 한계는 자의성을 온전히 설명해 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자의성이란 주관적 변증법의 도정에서 임의적인 성격을 갖지만, 이러한 임의성이 어떠한 경로에 따라 추동되는지, 그리고 추동된 경로의 존재성과 그 임의성이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 논의에서 심도 있게 다루지를 못하였다. 이는 필연성과 우연성의 관계 문제를 완전히 규명해 낸 후에라야 비로소 올바르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한계는 첫 번째 한계와 직결되는 문제로, 연속성의 중단 문제를 해명하기는커녕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연속성의 중단이란, 의식 활동의 진행이 특정한 때에 중단되고, 의식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이 산출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역시 자의성과 관계되는데, 의식적인 논의 속에서 부유하는 자의성과 달리, 연속성의 중단 문제는 논의 범위를 인간의 실재적 행동까지 넓힌 문제이기에 더 많은 과학적 연구와 해명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한계는 인지/인식의 육적 단계로서 감수성 단계의 의식 단계로 질적 전화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현대 인지 과학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한데, 쏘련 심리학 역시 그 세밀한 과정을 명확하게 밝혀내지를 못하였다.

 

사회주의 세계가 퇴조한 현재,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과거보다 훨씬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오늘날, 변혁 운동은 앞서 논의하지 못한 세 가지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W. I. 레닌, ≪철학 노트≫[1909-1913], 홍영두 역, 논장, 1989, pp. 120-121.
2 헤겔, “204절”, ≪철학 강요≫[1817-1830], 서동익 역, 을유문화사, 1998.
3 이는 헤겔의 반성 철학이 관념론 세계관이란 것을 증명한다. 헤겔은 자신의 저서 도처에서 의식의 타재로서 질료를 말한다. 동시에 의식이 직접적인 객관성과 대립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관념론적인 인식이다. 유물론 세계관에서 이를 본다면, 물질과 의식은 추상의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않으며, 추상 속에서 그러한 대립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존재론적 토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과 의식의 대립은 실천이 매개한다. 실천을 통해서 물질의 내/외적 모순 관계(대립의 내용)가 의식에 지속적으로 반영되는 것일 뿐이다.
4 헤겔은 이 장에서 목적을 목적인(目的因)과 관련시켜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며, 스스로의 목적에 대한 관점이, 목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적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강조한다. 헤겔은 목적을 인식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갖춘 것이라 하였다. 가령 개념 형성까지의 경로를 볼 때, 그것이 다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지각의 단계로 이어지는, 즉 미래적인 의미에서 그것이 사유로 파악될 수 있음이 ‘목적지’로 되어 있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목적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목적이며, 이미 헤겔에 있어 목적은 이전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목적론과 같은, 숙명론적 의미를 갖는 게 아니다. 물론 자의가 의식의 발달을 거부하면(헤겔이 언급한 ‘자의가 갖는 악(惡)의 측면’) 당연히 객관(유물론으로는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의 제 모순 관계)을 파악하기 위한 의식의 발달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헤겔은 종래 형이상학의 목적 이해인 ‘존재자(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가 단절적으로 내포한 고유의 목적’에 대해 비판하였고, 이를 올바르지 못한 목적 이해라고 하였다.
5 관념론자인 헤겔은 당연하게도,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을 승인하지 않고, 이것을 절대정신의 타재로서 질료라고 보고 있다. 이는 객관적 관념론에 의한 세계 해석의 ‘위대한 구세주’로서, 헤겔이 신플라톤주의의 발출론(發出論)에 기대고 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6 헤겔, 앞의 책, p. 209.
7 매우 중요한 헤겔의 언급이다. 여기서 헤겔은 본질적으로 유물론에 대적하는데, 그는 ‘목적 개념(목적론적 관계로서 개념)’의 질료화의 과정을 ‘기계적 연관/화학적 연관 과정의 진행’이라고 한다. 기계적 연관/화학적 연관에 대해서는 이에 대한 레닌의 해법을 언급하면서 다루겠다.
8 헤겔, 앞의 책, pp. 209-210.
9 W. I. 레닌, 앞의 책, p. 252.
10 같은 책, p. 140.
11 같은 책, pp. 140-141.
12 같은 책, p. 142.
13 과학적 수행을 취급하는 레닌의 노력에서, 레닌의 과학관(科學觀)을 알 수 있다. 이 과학관으로부터 추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역학-응집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과 사물의 완전한 객관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후자에서 낮은 수준의 단계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역학 운동, 그리고 그것의 응집 반응(화학적인)을 파악하는 것이 물질 모순 운동의 제 내용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예를 들어, 양자 세계는 단순 역학적 전제를 뛰어넘는 세계이며, 자기를 양자적으로 연구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응집의 성격으로서만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과학 연구의 단계화는 과학에 대한 레닌의 특징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14 W. I. 레닌, 앞의 책, p. 143.
15 같은 책, pp. 147-149.
16 인지 부하 이론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주로 뇌파전위기록술(EEG)을 통한)과 연계된 설명은 오늘날 심리, 교육 이론에서 실험적으로 증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쏘련 내에서 구체적 과정은 심리학자 븨고쯔끼(Vygotsky)가 연구한 바 있으나, 주제와 동떨어져 있는 관계로 설명을 생략한다.
17 다시 강조하지만, 의식은 물리적 특질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의식의 제 내용은 바로 물질이 신경학적 과정을 통해 반영되기까지의 모든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있다. 이러한 의식의 성격으로 인해, 외부 세계에 인식 주체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현상과 인식 주체의 의식 제 내용에 차이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식된 것은 신경 작용의 물질적 성격까지 모두 반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 실재의 모순 운동(그 존재 양식부터 변증법적인)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감각 자료의 풍부화와 의식의 능동적인 운동, 즉 변증법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식 주체의 인식과 무관한, 객관적 실재의 모순 제 내용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18 이와 관련하여 레닌이 오성의 본성을 ‘감각 자료의 ‘언어적 명명’을 통한 개념을 다루는 것’이라고 해석했다는 근거는 상당히 많다. 레닌은 개념과 그것을 다루는 의식 체계가 언어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는 포이에르바흐가 ≪종교의 본질≫에서 지성 일반(오성)을 다루는 내용에 대한 레닌의 평가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자연 현상을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것을 그와 유사한 인간적 현상과 비교하고 이름을 부여하며 일반적으로 질서니 목적이니 법칙이니 하는 인간적인 표현이나 개념을 그것에다 적용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의 언어의 본성을 따르자면 적용하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포이에르바흐)”라는 내용에 대해 레닌은 “개념을 취급하는 것에서 있어 유물론적 인식이다”(≪유물론과 경험비판론(상)≫[1909], 박정호 역, 돌베개, 1992, p. 205.)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레닌이 말한 오성과 오성의 대상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19 본래 고대 스토아학파의 논리학에서 등장한 용어로, 명제의 주사(主辭)와 빈사(賓辭)의 관계를 긍정 또는 부정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매개해 주는 것을 계사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나는 활동가이다”에서 “나는”(주사)과 “활동가”(빈사)를 긍정으로서 연결해 주는 “이다”를 계사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너는 정직하지 않다”에서 “너는”(주사)과 “정직하지”(빈사)를 부정의 의미로 이어 주는 역할로서 “않다”가 계사로 된다. 헤겔은 이 계사를 근본 논리의 끈(lysis)이라고 하였다. 즉, 어떠한 대립 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하는 것이라 하였다. 오성은 이념 내 무수한 계사 관계(대립)를 망각하고, 이념을 전(前) 단계의 개념(또는 ‘개념’적 대상)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 사이의 차이에 몰두하는 ‘오해(다른 말로는 오류)’를 범한다고 헤겔은 설명한다.
20 따라서 오성은 폐기되는 것(의식)이다. 의식의 층위 내에서 해석하자면, 사유는 바로 이 이념의 변증법을 통해 등장한다. 이념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지만, 헤겔이 ≪대논리학≫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동일성은 차별을 포함하고 있다. 이념은 수많은 제 모순 관계의 자기 운동으로서 통일이기에 이는 필연이다. 차별은 대립을 가져오며, 이념의 변증법의 동인으로 된다.
21 W. I. 레닌, 앞의 책, pp. 153-154.
22 이 단계에서 자의성은 헤겔과 레닌에 의해 문헌 서술의 구체적인 요소에 따라 자율성, 자발성, 능동성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23 이 폐기는 그 대상에 한해서의 폐기이다. 변증법적 사유의 도정 내부에는 여러 국면의 개념 관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론의 지양으로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즉 인식의 지평을 넓혀 가는 와중에도, 이론과 관계하는 사유보다 낮은 수준의 의식(그리고 이념보다 낮은 수준으로서 대상을 갖는)을 항상 자신 의식에 내포하고 있다.
24 예를 들어, 종의 차이가 DNA의 염기 서열 차이에 의한 것, 그리고 양적 유전학적 차이에 의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면(유전 인자로서의 통일), 종의 분류는 이제 객관적 실재를 파악하는 ‘객관적인 내용’을 갖지 않게 되고, 그것은 언명적 분류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오감이 모두 전기적 신호의 일종이며, 오감 사이의 차이는 그저 그것이 작용하는 공간적 범위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전기적 신호로서의 통일), 미각, 촉각, 후각, 청각, 시각의 구분은 언명적 분류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25 앞서 설명하였지만,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객관의 자기 복귀로서 부정의 부정을 동일성 확립의 핵심으로 놓는다. 그는 스스로의 보존(동일성)을 ‘자체적인 부정성으로서 구별’의 자기반성(so wie diese, indem sie in die Bestimmung des Unterschieds getreten, nicht in ihn als ihr Anderes sich verloren hat, sondern in ihm sich erhalt, seine Reflexion in sich und sein Moment ist)이라고 하였다. (Werke, Vollstandige Ausgabe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d. 4, S. 38.) 이는 이후 맑스의 주요 저서에서 크게 반영되었다.
26 “가능한 것은 오직 인식이 경험의 무수한 모순을 제거하고, 경험을 위해 일반적 조직 형식을 창조하며 근원적인 혼란스러운 요소의 세계를 파생적인 질서 있는 제 관계의 세계로 대체함으로써, 경험을 능동적으로 조화시키기 때문이다”라는 전진파의 수장 보그다노프의 주장에 대해 레닌은 “인식이 일반적 형식을 ‘창조’하여 근원적 혼돈을 질서로 대체할 수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관념은 관념론 철학의 관념이다”라고 비판한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상)≫, p. 222.)
27 W. I. 레닌, 앞의 책, pp. 166-167.
28 같은 책, pp. 170-172.
29 같은 책, p. 300.
30 모순의 동력으로서 대립의 제공은 헤겔의 견해에선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성이다. 반면 레닌의 견해에서 모순의 동력으로서 대립의 제공은 물질의 반영으로서 발달 가능성이 전제된 감각 자료이다.
31 과학에 대해 몰지각한 입장을 견지하는 자들은 과학의 발달사를 경시한다. 이들은 오로지 현재적 의미에서 ‘가장 완벽한’ 과학만을 ‘최종적인 과학이자, 유일무이의 과학’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은, 그것이 설명하는 대상, 그리고 이와 관계된 사건의 ‘완벽한 설명’에만 당위성이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무수히 많은 오류의 극복인데, 이 오류의 극복은 변증법적 사유를 통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기도 하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에서 오류는 그것의 극복 계기이고, 극복은 다시 오류의 계기로 된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이론 물리학 체계가 양자 역학에 의해 부정되었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 물리학 체계가 과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 물리학 성립은 양자 역학으로의 발전이라는 계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과학이냐?”라는 규정에서 중요한 화두는 “성립된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통일, 즉 “변증법적 사유의 전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느냐?”이다.
32 코페르니쿠스와 같이, 당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한 감각 자료의 확장의 불가능성이 전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사유로서 천동설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도 가능하지만(특히, 그가 가진 달 궤도의 편차 문제, 금성과 수성의 공전 주기 문제 등에 관한 의문), 그것은 순전히 사유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자의성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기에 일반적이지는 않다.
33 본래 ‘대상적 유적 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직역에 맞지만, 유적 존재는 이미 대상적 활동을 전제한 보편적인 인간 존재이기에, ‘대상적’과 ‘유적’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불필요한 이중 형용이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대상적 존재’라고 일컬어진다.
34 1888년에 발행된 원문에서 등장하는 원표기는 ‘gegenständliche Thätigkeit’이다.
35 이와 관련한 헤겔의 대표적인 언급은 다음과 같다: “이 정신의 세계는 이중의 세계로 분열된다. 하나는 현실의 세계 또는 정신 소외 그 자체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이 첫 번째 세계를 넘어서서 순수 의식의 경지로 들어선 곳에 건설되는 세계이다. 첫 번째 세계의 소외와 대립하는 이 두 번째 세계는 바로 그렇기에 소외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외의 또 다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형식은 의식이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으면서 이 두 개 세계를 모두 다 끌어안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 [이것은] 그 자신의 완전한 형태를 띠지 못한 채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왕국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러한 도피는 그 자체가 곧 이중의 세계를 이룬다. 정신은 순수 의식의 경지를 향해 고양되어 나가는데 이 경지는 결코 신앙의 장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장이기도 하다. 이렇듯 신앙과 개념은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개념과의 대립 속에서 고찰되게 마련이다.” (G. W. F. 헤겔, ≪정신현상학≫[1806], 김양순 역, 동서문화사, 2011, p. 325.)
36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강유원 역, 이론과실천, 2006, pp. 188-189.
37 공교롭게도, 형식은 다르지만 레닌의 헤겔 변증법 비판도 맑스와 같은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38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p. 185-186.
39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그를 담당하는 수많은 어용학자는, 합리성을 자기 욕구에 기초한 인간의 바람과 완전히 단절된 것으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 제3 세계에 만연하는 빈곤과 국내에서 폭발적인 사회 모순을 안고 그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대해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마치 그것이 합리적이며, 앞으로도 합리적일 것이기에 유지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더 많은 인간 집단이 자기가 바라는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면 거기에 어떠한 인간적 합리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시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고, 수많은 사회적 부조리를 산출하며, 이에 따른 인류 고통이 필연인 체제라면, 합리성이 인간의 본연 욕구의 충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현 시기 자본주의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용학자들은 이 문제를 가리기 위해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도 어쩔 수 없다. 자본주의는 영원하며, 인간이 택한 가장 뛰어난 체제이다”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의 영원불멸성을 주장한다.
40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박종철출판사, pp. 477-478.
41 의식을 규정하는 토대가 폐지되더라도, 인식 주체의 의식은 낡은 생산 양식을 반영하는 제 내용을 가질 수 있다. 토대가 개변하면 낡은 의식도 구심점을 잃고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낡은 의식은 새로운 사회에서도 언어의 형태로, 다소 불완전한 내용으로 재생산될 수는 있다.
42 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I≫[1971], 문성원 외 역, 한울림, 1990, p. 178.
43 같은 책, p. 179.
44 자의는 필연성과 우연성의 관계를 면밀히 알아본 다음에야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자의는 거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과 우연성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따라 생성되며, 인간에게 ‘조건 없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필연성과 우연성에 관한 헤겔과 엥엘스의 체계적인 논의는 양자의 변증법적 관계로서 자의가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 암시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필연성과 우연성에 대해서는 본 주제와 동떨어져 있으며, 그 내용을 지면에 다 채울 수 없기에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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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댓글

  • 마르크스주의가 경제환원주의라는 생각을 하고있었고 마르크스의 생각대로라면 결국 환경에 완전히 지배되는 수동적인 인간외 다른게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보고 그런게 아니란걸 어느정도 안것같습니다

    • 맑스주의 사조 내에서도 그런 경제결정론이 득세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2인터네셔날의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등이 대표적 지지자입니다. 하지만 경제결정론 내지는 환원론은 전혀 변증법적이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기계적 유물론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 국내 마르크스레닌파에서 독자적으로 나온 의식론이니 아주 신선한것 같습니다. 보통 사르트르,지젝,루카치,프롬,베커,네그리 외 잡다한 잡탕철학 섞어서 주장하던데 의식론을 마르크스,레닌,스탈린,모택동 / 그 주변부이론만 참고해서 쓴건 처음보네요

  • 시간 조각내서 꾸준히 읽어서 완독. 소련동유럽에서 의식 관련 심리학 연구했을 때 크게 정신현상학파(동독에서 유행한…), 비고츠키파, 파블로프파가 세 파가 있었는데 이 글은 정신현상학파에 가깝네…

    • 실천을 객주주객으로 설명하고 자기운동을 두 측면으로 나눈것부터 동독 정신현상학파랑 유사. 국내엔 소개 안된 관점(국내엔 파블로프파 관점만 욜라게 소개됨… 이북도 파블로프파가 우세)이라서, 스스로 터득한 건지 아니면 동독 관련 문서를 봤는지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