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20)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제6장 띨라크(Tilak) 시대


Ⅰ. “스와데시(Swadeshi)”와 “스와라지(Swaraj)”1)


19세기 말 20세기 초 세계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 시기는 독점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강대국 간의 전쟁,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여러 민족의 투쟁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 내부에 노동계급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같은 모든 일들이 광범위하게 격화되었고, 새로운 세계 정치 정세는 이런 모든 특징들을 포함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기타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 계급 정당이 강력하게 성장했고 의회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목소리가 상당한 힘을 얻었다. 이 측면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뒤쳐진 영국 역시,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당이 만들어졌고 선거 참여도 시작되었다. 특별히 여기에서 엥겔스를 언급하여야 겠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그는 노동계급 정당의 발전을 기꺼이 환영하는 글들과 편지를 썼고, 이 정당들의 활동을 위한 실질적인 안내를 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물결은 인도 독립 투쟁에도 몰아쳤다. 인도 국민회의의 지부가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활동가들은 원래 자유당에 의존했었다. 하지만 노동당이 결성되자, 노동당은 인도 독립투쟁을 강력히 동조하고 대변하였다. 인도 독립운동 활동가들 역시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계급 사회주의 운동과 관계를 맺었다.

다다브호이 나로지와 마담 까마2)가 제2 인터내셔널의 각기 다른 회의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에 카마와 그녀의 동료들은 유럽 전역의 다양한 혁명 조직과 접촉을 지속하면서 혁명조직 결성을 시작하였고 나로지와 여타 사람들의 지도력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사용할 무기를 확보하고 훈련하기 위해서 프랑스, 독일 그리고 러시아 혁명가들의 도움과 협력을 구했다.

인도 ‘급진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랄랄라즈빠트 라이(Lalalajpat Rai)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도 독립투쟁이 국제적인 역량으로부터 지지받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국 노동계급의 투쟁과 승리, 프랑스 혁명가들의 희생 그리고 필연적인 그들의 승리, 이탈리아인의 노력과 그들의 승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유럽 민족주의자들의 계속적인 투쟁이 우리를 고무시키고 강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들도 발생하였다. 1896년 유럽 제국주의 강대국인 이탈리아가 아프리카 국가인 아비씨니아 제국(Ab-yssenia, 편집자: Abbyssinia로 더 많이 표기함. 현 이디오피아.)과 충돌하였고 승리하였다. 영국은 1899-1902년 보어 전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중국, 페르시아(이란), 터키 같은 아시아 나라들에서는 혁명 운동이 등장하였다. 1905년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는 아시아의 강대국인 일본에게 패배했고, 곧 이어서,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인민들은 짜르 체제에 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미국산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그런 모든 발전의 물결은 인도 전역 또한 휩쓸었다. 주로 정신적 차원에 국한된 활동을 하던 스와미 비베카난다조차 러일 전쟁에 관해서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지금 일본은 현시대에 필요한 것들을 완벽히 깨달은 것처럼 보입니다. …… 자, 사람들이여! 당신의 좁은 구멍에서 나와 넓은 세계를 보십시오. 보세요, 어떻게 각국이 전진하는지. 당신은 사람을 사랑합니까? 당신은 조국을 사랑합니까? 자 그러면 이리와서 더 숭고하고 더 나은 것을 위해 싸웁시다. 고되고 일촉즉발의 울부짖음이 있어도 뒤돌아보지 맙시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봅시다.”3)

이 새로운 열정은 인도 국민회의 문구에서도 발견되었다. 제한된 행정개혁들을 위해서 인도 주재 영국관료들과 영국의 지배자들에게 청원을 하는 온건한 활동으로 형성된 국민회의는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투쟁하는 조직으로 변모하고 보다 집중적인 선동을 담은 투쟁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원하는 지도자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처럼 청원만하는 단체로서 국민회의가 유지되는 것을 원하는 지도자들 사이에 격한 갈등이 벌어졌다.

이 갈등은 국민회의의 분열을 이끌었는데, 그것은 분열에 이르게 된 정황과 함께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인도 경제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나서 그러한 변화가 가능케 되었는지만을 살펴볼 것이다.

알다시피, 영국은 상품을 인도에 팔고 인도 상품을 영국으로 가져가는 무역상으로서 인도에 처음 왔다. 동인도회사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무역을 위한 허가서를 받았고 나중에는 델리 황제와 지방의 지배자들로부터 동인도 회사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행정권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행정권이 인도 전 지역으로 점점 확대되자, 동인도 회사는 상업적 거래들에만 제한된 활동에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농업과 산업 생산에도 진출해야만 한다고 인식했다. 그에 맞춰서, 근대 자본가 대농장(플랜테이션), 원자재를 가공하는 기초 산업들, 그런 활동들을 위해서 기본이 되는 철도와 통신망 건설 영역에 진출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행정이 그런 모든 활동들에 도움을 주지 못하자, 동인도 회사 행정이 영국 정부의 통제 아래 점진적으로 넘어갔다. 결국 모든 행정권력이 정부로 이양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 지배의 성격은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주지하듯이 독점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 주요 특징은 자본의 수출이다. 따라서 영국 독점자본가들은 영국 산업을 위해서 값싼 원자재를 확보하거나 또는 영국의 산업 제품들에 높은 가격을 매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영국에서의 이윤의 일부를 더 많은 이윤을 벌기 위한 자본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도를 투자처로 삼아야만 한다. 그들은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가 풍부한 인도에 대한 투자는 영국자본가들에게 더 높은 이윤율을 가져다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였다.

영국은 그런 필연적인 귀결로 제한적인 산업화를 인도에 도입하여 그로 인해 인도 사회의 변모를 일으키게 한 전초세력(preforce)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인도 전체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위험에 빠뜨리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 인도에서 영국에서와 같은 독립적이고 빠른 산업화가 일어난다면, 그 결과 영국의 인도 지배에 도전하는 독립적인 인도 부르주아지가 출현하고 발전할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인도에서 수립되고 있는 자신들의 직접 통제와 소유권하에 있는 것들을 제외한 어떠한 토착 산업도 없도록 예방책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수입과 수출 관세 도입을 포함하여 철도와 선박 화물 요금을 여러 단계로 설정하여 토착 기업가들의 이익에 해로움을 주었다. 또한 그들이 자본을 투자한 산업 원자재의 생산과 가격을 통제하기 위해서 그들의 행정권력을 이용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인도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자유를 막을 목적으로 행정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지배권에 도전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자본가 계급이 영국 지배자들의 그늘 아래서 빠르게 발전하였다. 사실 나로지와 라나데 같은 인도 경제학자들은 그런 계급의 대변자들이었다. 결국 그들과 여러 계층의 부르주아들이 인도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이렇게하여, 영국 독점자본가들과 인도 자본가들 둘다 인도에서 산업에 자본을 투자했을 때, 그들 각자의 이익들은 서로 충돌하였다. 20세기가 시작되자 그런 일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러일 전쟁기에 ― 또한 전쟁의 발발로 인해 자유투사(freedom fighters)가 고무되었을 시기에 ― 영국 기업들이 투자한 자본은 9670만 파운드스털링이었다. 그 금액은 인도의 모든 기업들이 투자한 자본의 3배였다. 이것은 영국 기업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상당한 수의 인도 산업체들을 영국인이 소유하고 통제하였다.

그러함에도 인도에 등록된 산업체들의 숫자와 자본투자의 규모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다. 1897년과 1906년 사이, 인도 기업들이 투자한 자본이 36.8%나 증가했다. 봄베이의 섬유산업과 같은 특정한 산업에서는 인도자본가들이 지배하였다. 영국인들은 직접적으로는 대리점제(agency system)의 운영에 의해, 간접적으로는 정부정책을 통해 그런 산업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인도 자본주의 발전을 막으려는 분명한 목적하에 이루어졌다. 그에 따른 갈등이 스와데시 구호를 이끌었고 그에 기초와 사회·정치적 운동을 격발시켰다. 인도 자본가들은 영국자본가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려고 자신들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과 인도 양국의 지배자들에 영향력을 끼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도와 영국 자본가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면, 영국 정부는 영국 자본가들 편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인도 자본가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청원과 대의제에 의존하기보다는 선동적인 노선을 채택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인도 독립투쟁의 지도자들은 정부가 인도 자본가에 대해 영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나가는 것처럼 인도인들에게 인도 자본가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나가달라고 제안하였다.

1905년에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 당시 스와데시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사회·경제적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의 상징이었다. 1880년부터 인도산업의 공황에 맞서는 시위자들의 목소리가 서부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에는 스와데시는 애국주의를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 그것은 1885년에 잠쉐지 타타가 자신이 설립한 방직공장 이름을 ‘스와데시 공장(Swadeshi Mill)’으로 지은 사실에서 입증된다. 뿌나의 싸르바자니크 싸바4) 같은 대중 조직은 인도의 해방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스와데시’를 채택하였다.

주로 사회·경제적 영역에만 국한되었던 ‘스와데시’ 운동은 1905년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정치적 진전과 함께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스와데시 운동에는 그 당시 토착산업을 고무하는 “건설적인” 접근과 함께, 외국상품을 거부하는 시위를 하는 내용 또한 내포되어 있었다. ‘스와데시’가 경제 분야의 구호였다면 그와 동시에 스와라지 구호는 정치 분야의 구호로 떠올랐다. 이 구호에 선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랄-발-빨(Lal-Bal-Pal)’ 삼총사로 잘 알려진 랄라 라자빠뜨 라이(Lala Lajapat Rai), 발 강가다르 띨라크(Bal Gangadhar Tila-k), 비삔 찬드라 빨(Bipin Chandra Pal)이었다. 그들은 스와데시가 대중들의 행동강령으로 구성되기 전부터 영국 상품 거부, 민족교육정책을 주장하였고 국민회의가 그런 강령을 채택하게끔 분투하였다. 그들은 자유투사들의 목표가 국민회의 초창기에 요구했던 행정개혁이 아니라, 영국인들이 영국에서 누리는 것만큼 인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행정체제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흥미롭게도 온건주의자인 다다브호이 나로지가 1906년에 국민회의 의장으로서 캘커타 회의 연설에서 이 구호를 내세웠다. 그 회의에서 ‘스와데시’와 ‘급진적인’ 구호들이 받아들여진 결의안이 발표되었다.

이어지는 장에서 보겠지만, 이것은 국민회의 온건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 간에 벌어진 갈등의 첫 단계 표현이었다. 사실 캘커타 회의는 두 계층 간의 단결을 도운 것이 아니라 더 큰 갈등의 토대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함에도 급진주의자들의 강령으로 상징이었던 ‘스와데시’와 ‘스와라지’ 구호를 온건주의자들이 이끄는 국민회의에서 채택한 것은 독립투쟁의 역사 발전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 영국지배자들과 인도 부르주아 간의 갈등은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인도 부르주아의 대변자로 떠올라 독립운동을 지도한 국민회의는 전환점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독립운동은 이제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돌입하였다. <노사과연>



1) 역주: 스와데시는 힌디어로 모국을 뜻하는 말이다. 널리 알려진 스와데시 운동은 20세기 초 인도에서 일어난 벵골 분리에 대한 인도인의 반영 운동이다. 벵골 분리에 대한 분노는 국산품 애용과 영국 상품 배척운동으로 나타났고 벵골에서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11년 벵골 분할령을 철회하였다. 스와라지는 힌디어로 자치를 뜻하는 말로 스와데시 운동과 스와라지 운동은 대표적인 반영 민족주의 운동이다.

편집자주: 참고로 1923년 인도 국민회의 내에는 치따란잔 다스(Chittaranjan Das) 및 모띨랄 네루(Motilal Nehru)의 지도하에 스와라지당(Congress-Khilafat Swaraja-ya Party)이 결성되었다. 이 당은 인도의 자치령 지위 획득을 강령으로 하며, 간디에 대해 우경적인 노선으로 반대하였다. 주의 입법참사회에 참가하고, 그 내부에서부터 자치 달성에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 1928-33년의 혁명적 고양기에 그 세력은 쇠퇴했다. ≪코민테른 자료선집 3≫, 동녘, 1989, p. 300. (≪코민테른 자료선집 3≫에는 이 당의 결성년도를 1922년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영문 위키페디아 항목에는 1922년 운동의 결과로 1923년에 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Swaraj_Party)



2) Madame Cama. 편집자 주. 비까지 루스또 까마(Bhikaiji Rusto Cama, 1861-1936). 인도 독립운동가. 까마는 1907년 8월 22일 제2 인터내셔널 슈트트가르트 대회에 참가하여 인도아대륙을 강타한 기근의 파괴적인 참상에 대해 보고하였고 인권과 평등, 영국으로부터의 자치를 호소하였다.



3) 원주: Letters of Swami Vevekananda, Advaita Ashrama, Calcutta. (1964 Edition), pp. 43-44.



4) Sarvajanik Sabha of Poona. 편집자주: 마라타어는 पुणे सार्वजनिक सभा. 1870년에 활동을 시작한 인도 민족주의 운동단체로 인도 민족주의 특출한 지도자들을 다수 배출한다. 본문에 나오는 발 강가다르 띨라크가 바로 이 조직 출신이다. 이들은 출판활동도 하였으며 마드라스 마하자나 싸바(Madras Mahajana Sabha) 같은 조직과 함께 인도 국민회의의 전신격인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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