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고등 의식으로의 발전과 실천에 대하여(상)

 

한동백 | 회원

 

[차례]

1. 유물론의 역사와 물질의 존재 형태

2. 모순과 생성ㆍ변화ㆍ발전의 관계

   2-1. 모순의 유형들

   2-2. 물질의 모순과 변화ㆍ발전

   2-3. 의식의 모순과 변화ㆍ발전

3. 물질-의식 관계와 의식의 발달

   3-1. 감각

   3-2. 지각ㆍ표상ㆍ오성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3-3. 이념

   3-4. 사고/사유

4. 대상적 활동

5.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그리고 사회적 관계

6. 극복해야 할 편향들과 결론

 

 

철학의 근본 문제의 핵심은 물질과 의식의 선차성 문제이다. 이 근본 문제에서 물질에 선차성을 두면 유물론이고, 의식에 선차성을 두면 관념론이 된다. 이 근본 문제의 핵심은 엥엘스가 저술한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에서 등장하는 “근대 철학에서 중요한 기본 문제는 존재(물질)와 사유(의식)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1]프리드리히 엥겔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양재혁 역, 돌베개, 1987, p. 31.라는 유명한 언급에서부터 시작하여,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통해 확립됐다.[2]“두 근본 노선, 두 근본 경향 … 1차적인 것으로서 자연, 물질, 물리적인 것, 외부 세계를 취하고 의식, 정신, 감각(오늘날 유포되고 있는 용어로 … Continue reading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은 철학의 근본 문제에서 물질에 선차성을 두는 유물론으로, 의식을 물질의 반영으로 설명하고 있다.[3]“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의하여 반영되는 이 객관적 실재의 운동이다. 표상, 지각 등등의 운동은 나의 밖에 있는 물질의 운동에 상응한다. 물질 … Continue reading 그런데 의식이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의 반영이라는 것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유물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흔치 않게 보이는 편향은, 의식을 ‘변형된 물질’로 대체하고 의식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이다. 이러한 이해는 속류 유물론적 이해로, 객관적 실재의 반영으로서 의식, 더 나아가 변혁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의식적 활동인 실천의 존재를 없애 버린다. 결국,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감각된 것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외력에 의해 강제된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 움직임은 다시 다른 하나의 감각자로 되고, 그것이 다시 수동적 움직임의 원인자가 된다는 소박한 해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게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반영 이론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규명할 때, 후자를 단순히 전자의 동질적 연장으로서 파악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후자가 전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별도의 자립된 존재라고 파악하지도 않는다. 반영 이론에서 다루는 의식은 그것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이자 일면 수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감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의 분류화로서 지각,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감각의 재현 또는 상기 가능한 형식으로서의 표상을 말하며, 감각적 인식의 단계를 넘어간 것으로서의 의식인 오성(오성적 인식)과 사고/사유(이성적 인식)를 말하고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표상은 주관적 관념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립된 관념 속’에 존재하는 관념적 기억의 저장물을 말하는 것이 아닌데, 표상은 항상 대뇌 피질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오성은 물질의 반영으로서 생성된 개념의 능동적인 자기 운동 과정에서 생긴 산물로 이해되며, 마지막으로 사고/사유는 객관적 단계로서 개념인 이념이 갖는 구체적인 의식성으로, 필연적으로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내용이 있다. 반영 이론이 주관적 관념론의 의식 해석과, 속류 유물론의 의식 해석을 모두 비판하며 탄생한, 양자 지양의 결과라면,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내용으로서, 그리고 어떠한 명확한 논증으로서 의식의 발전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이다. 물론 레닌의 반영 이론의 핵심이 되는 문건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그 나름의 해법을 당대 관념론 철학자의 견해에 대한 반증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관념론자들의 대응은 더욱 복잡화되었기에 추가적인 설명, 그리고 더욱 구체적인 설명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실천을 올바르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유물론의 역사와 물질의 존재 형태

 

철학의 물질에 관한 이해는 각 시대마다 일정한 차이를 가졌다. 고대 밀레토스학파는 물질을 정태적이고 고정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였다.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 역시 물질을 고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며, 나눠질 수 없는 유형의 입체인 ‘아톰’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현실 사물이 모두 이 아톰의 규칙적인 배열이며, 이 배열에 힘이 가해지면 그 규칙적인 배열에 변화가 생겨 모습도 바뀌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물질이 그 자체로서는 그저 멈춰 있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이 어떠한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을 경우, 그것은 무조건 그 힘에 의한 인과를 따르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데모크리토스는 우연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며, 강한 결정론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굳혔다. 반대로 관념론자들은 물질은 의식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의 경우는 감각할 수 없는 이데아가 만물의 성격을 규정하며, 각 사물이 갖는 물질적인 성격은 그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이데아가 에이코나(形像, eikona)를 산출하여 형성된 것이라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등장한 스토아학파는 초기에 만유를 이성(logos)에 의한 생성ㆍ변화로 보고, 최고 존재와 자연 개물(個物)의 일체성을 원용으로 하는 범신론적인 견해를 보여 주면서 유물론 철학을 전개했으나,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이성에 의한 제 원리에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내맡겨라. 현실에 만족하고, 정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찾으며, 금욕하라”라는 숙명론적 인생관을 설파하는 지배계급의 착취 이데올로기로 되었다. 이후 등장한 고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물질은 정신이 산출한 산물이며, 정신은 미지의 신적 존재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 함으로써 객관적 관념론의 길을 걸었다.

 

근세 말기 과학이 발달하면서 물질은 그저 신의 창조물이라는 중세기적 몽매주의에 기반하고 있던 그리스도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근세 말기, 근대 초기에 진행된 과학 발전의 초기적 성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고대에 존재했던 소박한 유물론의 견해를 다시 부활시켰는데, 이 성과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고대 유물론의 소박한 경향이 부분적으로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인 극복이었을 뿐, 전적인 극복은 아니었다. 18세기 유물론은 인간의 다양한 생활상, 행동, 실천을 해석하는 데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로써 유물론은 다시 관념론에 그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특히 헤겔의 학설은 객관적 관념론의 가장 발전한 형태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것에 대해 대립되는 것은, 그것이 그 ‘어떠한 것(대립되는 대상)’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그 헤겔의 반성 철학 지반은 세계사적으로 가장 해석력이 강한 유물론을 낳게 되었다. 바로 맑스주의 유물론의 등장이다. 맑스주의 유물론에서 사실상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론가는 엥엘스로, 그의 ≪자연변증법≫은 상호 대립에 의한 모순 운동의 총체로서 물질 일반의 존재 형태를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헌을 통해 물질의 존재 형태에 관해 면밀하게 검토할 수 있으며, 곧 그 내용이 가장 본질적인 심원에서 진행되는 상호 대립에 의한 투쟁이며, 그것의 일정한 양태가 물질의 존재 형태란 것을 알 수 있다.

 

엥엘스는 원물질(原物質, Urmaterie)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견인과 중력의 관계에 대해 … 견인이 있는 곳에서 그것은 반드시 반발을 통해 보충되어야 한다. 그래서 물질의 본질은 견인과 반발이라고 한 헤겔은 이미 매우 옳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물질의 본산은 견인이 반발로 전화하는 경계를 갖고, 그와 반대로 반발된 물질의 응축은 그것이 견인으로 되는 경계를 갖는다는 필연성이 더욱더 강화된다.[4]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1872-1883),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 250. (강조는 인용자. 다른 말이 없는 한, 이하 동일.)

 

여기서 언급되는 물질은 사실 사물 일반의 본산으로서 원물질, 즉 미시적인 세계에서의 물질 일반을 가리킨다. 엥엘스는 그것이 견인과 반발이라는 운동 원리의 연속 또는 진행이라고 하였다. 엥엘스의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맑스주의 유물론이 말하는 견인과 반발이 단순히, 소박한 사고 체계 속에서 머무는 수준, 즉 입자적인 수준에서 머무는 고형(固形)상의 반발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엥엘스는 이어서 물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물질의 분할 가능성: 이 문제는 과학에서는 실제로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다. 우리는 화학에 있어 분할 가능성의 일정한 한계가 존재하고, 그것을 넘어서면 그 물체들은 더 이상 화학적으로 작용할 수 없으며(원자의 경우), 여러 개의 원자들은 항상 결합되어 있다(분자의 경우)는 것을 알고 있다. 위와 똑같이 물리학에서도 ―물리학적 관찰을 위해서― 그것의 배열이 물체들의 형태와 응집력을 조건 지우고, 그것의 진동들이 열 등으로 현시되는 그런 일정한 최소의 입자들은 상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5]같은 책, p. 251.

 

자연 과학의 변증법: 대상은 운동하는 소재. 물질 자체의 상이한 형태들과 양식들은 다시금 오직 운동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오직 운동 속에서만 물체들의 성질이 나타난다. 운동하지 않는 물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운동의 형태들로부터 운동하는 물체들의 성상이 나온다.[6]같은 책, p. 255.

 

이러한 엥엘스의 해석은 현재 과학 분야에서 타당한 것으로 되었다. 물리학적 견지에서 놓고 볼 때, 모든 기본 입자는 보손계와 페르미온계로 나뉘게 된다. 그리고 이 두 계열을 나누는 기준은 스핀값이다. 보손계는 정수의 스핀값을 가지며, 페르미온계는 반정수의 스핀값을 갖는다. 물리학계에서 정수/반정수값으로 기본 입자 계열을 나누는 이유는 그 고유한 값의 규칙성에 따라 각자 속한 기본 입자의 고유한 성질 차이가 일관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스핀은 고형(固形)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운동량으로서 표지되는 것인데, 엄밀히 말하여 스핀 운동은 각운동이 아니며, 그것이 전체로서 구성하는 원 입자의 운동과는 무관한 운동량(질적으로는 다른 운동이라는 점에서)이다. 입자의 기본 성질인 스핀은 단순히 ‘고형의 무언가를 쪼개서 얻어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의 성격에서 이미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추가적으로, 이것은 물질의 거시 세계에서 역학적 운동과도 구별된다. 따라서 ‘고형의 무언가를 쪼개서 얻어 낼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라는 시도가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는 엥엘스의 분석은 물리학 발전의 역사에서 확실히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엥엘스에 따르면, 이러한 운동은 거시 세계에서의 물질 내 및 사이의 분할, 상호 작용과 이어진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통일을 추구하는 만물 이론(흔히, ToE라 불리는)에서 유심히 다뤄지는 막 이론(M-theory)과 초끈 이론은 모두 끈 이론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도 역시 물질을 규명할 때 그것을 단순히 입자적 성격에서 다루는 것이 아닌, 네 가지 기본 상호 작용의 매개로서 다루는 측면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물질이 어떠한 입자적, 고형적 존재로서가 아닌, 가장 본질적인 운동 그 자체 또는 그 운동이 매개로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물질은 입체적으로 쪼개지는, 또는 고형의 무언가로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성격을 가진 단일한 ‘물질’로 제 물질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서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물질에 대해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서 완전히 국소적으로 존재하는, 닫혀진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그 대상이 미시적인 세계든, 거시적인 세계든―에 관해 아주 강력한 치명타를 날렸다. 물리학의 성과로서 물질은 이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 운동을 매개하고, 생성, 소멸, 발전하는 존재로서 확연히 규정될 수 있게 되었다(제 물질의 상호 연관성의 법칙). 물론, 과학계 내 동요는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EPR 일군은 국소성의 원리를 주장하며, 양자 역학에서 주장하는 양자 얽힘의 비국소성에 반발했다. 하지만, 현재 양자 세계에 관해서 EPR 일군의 국소성의 원리는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되었다(EPR 역설).[7]이는 아인슈타인이 갖고 있던, 물질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해석으로부터 생겨난 결함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특히, 숨은 변수 찾기와 관련된 이론화와 실험의 결과는 양자 얽힘의 비국소성이 일반적인 원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는데, 이러한 연장선 속에서 해석되는 물질의 성격을 양자 비국지성(non-locality)이라고 한다.

 

엥엘스는 위와 같은 물리학 연구가 진척되기 전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2개의 서로 다른 사물들에 있어 항상 일정한 질들(최소한의 물체성의 성질들)은 공통되며, 다른 질들은 등급상 차이가 있고, 또 다른 질들은 그 두 사물 중 하나에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 양자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일련의 다른 자연물들과 자연 과정들이 개입되며,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운석으로부터 인간까지의 계열을 완성하고, 각각에게 자연 연관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시하고, 그로써 그것들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8]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37.

 

즉, 인간이 이성적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고의 주체가 ‘인식의 한계(각자 경험한 것의 다름을 통한)’를 넘어서 자연 일반의 다양한 운동으로서 그 총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사실은 20세기 사회주의 성립 이후 ‘물질의 반영으로서 의식의 발달’이 지속적으로 연구됨으로써 확고해졌다.

 

 

2. 모순과 생성ㆍ변화ㆍ발전의 관계

 

의식의 발달을 다루기에 앞서, 모든 발달과 발전을 매개하는 모순을 다루어야 한다.

 

“모순이 없으면, 발전 또한 없다”라는 말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제공하는 모순과 발전관의 가장 기초를 표현하는 말이다.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에서 의식의 발달을 포함한 모든 발달과 발전은 모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다루는 모순은 형식 논리학에서 다루는 무미건조한 모순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실체화된 양태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며, 운동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발전의 모순으로서 모순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압축에 압축을 거듭한 형태의 모순 이론을 내보이는 쏘련의 무미건조한 교재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발전의 모순관’을 이해하기 위해선 헤겔이 ≪대논리학≫의 본질론에서 장황하게 서술한 ‘모순론’에 대해 알아야 하며, 이 내용을 이후 20세기 사회주의가 파악한 모순 이론과 비교하여 이해해야 한다.

 

헤겔은 ≪대논리학≫의 본질론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구별 일반은 바로 그 자신의 두 측면을 계기로서 내포한다. … 대립 그 자체에 있어서는 이들 두 측면이 오직 구별을 이루는 두 측면[9]상호 대립항이라는 이 양극성(polaritat)은 헤겔 이후 모든 변증법에서 다루어지는 모순의 기본 법칙을 가능하게 한다. 양극성은 모든 상호 대립의 기본 … Continue reading이 되므로 그중의 한쪽은 다른 한쪽에 의해서 규정을 받는, 다름이 아닌 계기의 구실을 하는 셈이다. … 양자는 그 자체에 규정이 되어있으므로 서로가 전혀 무관한 상호 배타적 입장에 있으니, 이것이 곧 자립적 반성규정이다. … 그런데 이러한 자립적 반성규정은 마치 이들 서로가 자기와 다른 또 하나의 규정을 내포함으로써 비로소 자립적일 수 있다는 그러한 입장에서 오직 이 타자를 배제해야만 하는 까닭에 결국 그 하나의 규정은 스스로의 자립성을 지닌 상태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자립성을 배제하는 것이 되고 만다.여기서 자립적 반성규정은 스스로 모순을 유발하기에 이른다.[10]F. 헤겔, ≪대논리학 II≫(1812-1817), 임석진 역, 지학사, 1983, pp. 87-88.

 

여기서 말하는 구별은 동일성을 규정한다. 동시에 동일성은 구별을 규정한다. 헤겔은 이를 묶어서 양자를 피정립적 존재라고 칭했다. 이렇게 구별은 어떠한 것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갖는 동질로서 동일성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별은 두 측면의 존재를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측면은 상호 배타적이며 상호에 대해 피정립적이다.

 

예를 들어, 인식 대상으로서 정육면체로 보이는 것을, 일상적인 용어로서, 그리고 그러한 느낌들로서 ‘정육면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정육면체를 감싼 동시에 정육면체와 배타적인 영역을 확인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다.[11]모순에 관한 엥엘스의 통찰을 상기하자. 애초에 인식된 대상은 인식 주체의 의식 활동과 무관하게, 본래 정육면체라 대상화된 이유를 제공한 여러 … Continue reading 물론 일부는 이에 대해서 “그냥 정육면체 자체의 성격만 따로 떼어 내서 그것을 대상을 정육면체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반론할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정육면체의 외부에서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영역이 없다면, 정육면체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수학적 대상으로 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면, 분명 그것 자체라고 여겨지는 것과, 그것과 배타적인 영역 사이의 경계(이는 추상적인 영역에서 생각되는데 보통 이것은 점, 선, 면 등으로 불린다)가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대상에 대해 항시 상호 배타적인 영역을 통해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대상으로서 정육면체를 감싼 외부의 배타적인 영역은, 그 실제 대상이 놓인 여러 환경들, 즉 나란히 배열된 여러 사물들에 따라 항시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며, 또한 그 사물 자체로서도 다른 피정립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바로 이 무한한 상호 피정립 운동을 헤겔은 자립적 반성규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상호 대립항의 대립으로서 모순 운동이다. 엥엘스가 이에 대해 헤겔을 참조한 글은 다음과 같다.

 

동일성이 그 자체 내에 구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어가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명제에서 표명되고 있다: 즉, “백합은 식물이다”, “장미는 빨갛다”와 같은 명제에서는, 주어나 혹은 술어에는 그 술어나 주어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은 어떤 것들이 들어 있다. 자기와의 동일성이 처음부터 다른 모든 것과의 구별을 그 보족(補足)으로서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12]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17.

 

모순을 통한 생성ㆍ변화ㆍ발전은 이 피정립 운동 또는 대립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 ‘생성’ 또는 ‘생성된 것’은 피정립 운동으로서 현존하는 피정립적 존재이다. 변화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견해의 유물론, 관념론 여부가 나눠지는데, 헤겔에 있어 변화는 모든 것이 절대정신의 타재(他在, Anderssein)라는 것으로부터 성립되는 것으로, 대립으로서 외화되는 모든 것이다. 변화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정신에 말미암은 현실성의 계속적 운동으로, 그 결과로서 갖가지 현실성으로서 나타나는 실제 세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앞서 다룬 정육면체는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며, 구체적인 현실성에 따라 그것을 취급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반면, 유물론의 지반에서 변화는 곧 물질의 자기 운동을 통해 성립된다. 가령, 물질의 내적인 상호 작용으로서 보손계 기본 입자에서 페르미온계 기본 입자로의 변화와, 그 반대로의 변화는 생성 그 자체인 피정립적 존재로서 물질의 자기 운동으로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물질의 내적 모순, 즉 내적인 대립으로서 변화는 앞서 예를 든 정육면체(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대립항의 상호 대립을 단순히 언명(言明)의 의미로서 부정으로만 취급하면 대립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는 B이다”(p)의 부정으로서 “A는 B가 아니다”(~p)를 말한다면, 이는 언명적 의미에서 부정이다. 그러나, 변증법에서 말하는 부정은 형식적-언명적 대치 또는 언명적 양극성(선언 판단으로서 반대대립)으로서의 부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 반에서 특정 시간에 축구를 할 것인가, 야구를 할 것인가라는 것으로 토론하고 있을 때, 여기서 “야구를 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언명적으로는 “축구를 해야 한다”의 부정은 아니지만, 그 조건에 따라 “축구를 하지 말아야 한다”와 같은 것이 된다. 다른 예로서, 지극히 ‘양적 차이’로만 파악되는 것처럼 보이는 “과자를 한 개 사야 한다”와 “과자를 두 개 사야 한다”라는 두 항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대립의 관계로 될 수 있다.[13]“맑스는 결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본질을 지닌 대립물을 양극적인 대립물로 간주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 임의의 형식적 … Continue reading 변증법에서 말하는 대립은 바로 이러한, 조건으로서의 부정, 그리고 그 부정으로서 대립을 말하는 것이다.

 

헤겔부터 이어진 이 부정의 진리는, 의식의 능동성으로서 의식의 대립-모순 운동의 전제가 된다.

 

변화는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로 나눠진다. 양적 변화는 일반적인 변화로서, 동일성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변화를 말한다. 양적 변화는 그것 자체로 발전은 아니지만, 발전의 계기가 된다. 양적 변화가 한도에 이르게 되면, 질적 변화를 추동한다. 한편, 질적 변화는 양적 변화가 진행되는 그 구체적 내용의 성격과, 그 양적 변화가 갖는 한도를 규정한다. 즉, 양자는 서로 교호한다. 그런데 이러한 질적 변화는 하나의 영역 내지는 하나의 주어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여러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자연 과학에서 생물학적 운동이 존재하는 한편, 물리적 운동은 역시 사라지지 않고 항시적으로 존재한다. 사회적으로는 낡은 생산 양식과 진보된 생산 양식의 양립, 의식적으로는 낡은 의식과 고도로 발전한 의식의 양립, 즉 질적 측면에서 불균등성은 항상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한 질은 필연적으로 상호 투쟁을 동반하는데, 이 상호 투쟁을 대립물의 투쟁이라 하고, 합으로서 나아갔다면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한다. 이를 합쳐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라 하며, 이것을 간단하게 대립물의 전화라고도 한다. 이 대립물의 전화가 곧 발전이다.[14]G. 슈틸러, ≪변증법적 모순≫(1966), 양운덕ㆍ김재용 역, 중원문화, 2009, pp. 71-72. 예를 들어, 생물학과 화학의 양립은 상호 제 모순 영역을 통일적으로 고려한 생화학으로서, 화학과 물리학의 양립은 마찬가지로서 물리화학으로서 화할 수 있다. 이 통일은 생물학적 현상을 화학적 연계를 통해 규명하고, 화학적 현상을 물리학적 연계를 통해 규명하여, 인간에게 물질세계에 대한 더욱 넓은 시야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생산력과 생산관계 모순의 극복으로서 새 생산 양식의 건설은 대립물의 통일이며, 발전이고, 사회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투쟁 및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과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투쟁을 통한 식민지 해방, 제 식민지의 민주주의 변혁 추동 역시 대립물의 통일로 나아감으로서의 발전이다. 더 나아가, 발전은 새로운 대립의 내용과 형식을 불러온다.

 

이로써 발전은 생성의 조건으로서 필연으로 따라오는 양적 및 질적 변화와 불가분(헤겔은 이를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이라 하였다)의 관계에 있으며, 모순이 곧 발전의 동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 모순의 유형들

모순의 유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범주 유형, 지위 유형, 층차 유형, 성질 유형이 있다.

 

범주의 유형으로서 모순에는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이 있다. 내적 모순은 지위 유형으로서 주요 모순이라고도 하며, 대상의 본질 그 자체에 있는 모순이다. 두 개의 대립물 사이의 투쟁이라는 양극성은 내적인 대립을 정의하는 기초이다. 외적 모순은 지위의 유형으로서 부차 모순이라고도 하며, 여러 가지 대상 사이의 대립을 말한다. 외적 모순의 대립을 외적인 대립이라고 한다.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가 양극성 대립자를 무조건 갖고 있어야 함에 비해, 외적 모순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적 모순에는 상호 제약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각자 다른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탄소 원자핵과 산소 원자핵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물리학에서 탄소 원자핵 성립의 내적 모순은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의 투쟁, 즉 내적 모순 제 관계이며, 산소 원자핵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탄소와 산소는 각자의 물리화학적 조건에 따라 화학적으로 결합할 수 있으며, 분리될 수도 있다. 탄소 원자핵의 성립이 외부에 존재하는 산소 원자핵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즉, 상호 제약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외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탄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질적으로 새로운 물질이 성립된다면, 그 새로운 물질의 내적 모순은 탄소와 산소 사이의 대립 관계가 된다.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져 있으며, 상호 연관과 대립 제 관계에 따라 그 내적-/외적-의 위치가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하나가 갖는 선차성이 불변한다거나, 내적 모순이 외적 모순과는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변증법적 인식과 무관하다. 외적 모순은 종종 내적 모순의 표현이고, 존재 형태로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품과 화폐 사이의 모순을, 맑스는 제 상품이 그들에 내재하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을 단지 화폐를 통하여 상호 표시하는, 외적인 대립으로 부르고 있다.[15]≪세계철학사 II≫, 녹두, 1985, p. 193.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에서 고려되는 모순도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이 존재한다. 둘은 마찬가지로 서로 얽혀져 있으며, 어느 한쪽만 강조해서는 사회 발전을 촉진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적 모순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노동생산물에 대한 사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며, 이것은 층차 유형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적 모순은 그 내적인 성격의 연장에서 파생 모순을 생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개별 자본의 고도로 조직화된 생산과 전체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 사이의 모순,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 사이의 모순 등이다. 층차 유형으로서 모순은 기본 모순과 파생 모순으로 나눠지는데, 이는 모순의 진행 방향을 시간적 순서 배열로 나열한 것이다. 파생 모순이라고 해서 그 내적, 주요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 사이의 모순은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에서 생성된 파생 모순이지만, 민족 해방 혁명에서 내적 모순/주요 모순으로 된다. 한편, 외적 모순이 기본 모순으로 될 수는 없으며, 외적 모순은 층차의 유형으로서 모순에서 파생 모순의 성격만을 갖는다. 그러나, 언제든 다시 그 범주/지위는 변화할 수 있다.

 

성질의 유형으로서 모순은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존재한다. 적대적 모순은 적의에 기초한 모순으로 상호 대립자의 목적, 경향, 이해로 말미암아 화해될 수 없는 모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은 서로 적대적 대립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는 적대적 모순의 관계라고 할 수 있으며,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 사이의 모순도 적대적 모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적대적 모순은 화해될 수 없는 계급 투쟁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 비적대적 모순은 적의가 존재하지 않는 모순으로 대립자 사이에 공통적 근본 이해도 존재하는 모순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모순, 민족 해방 혁명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족자본가 사이의 모순[16]문영찬, “마오쩌둥의 ‘인민내부의 모순’에 대하여”, ≪현대사상≫ 제20호(2018. 12.), 현대사상연구소, p. 173. 등이 비적대적 모순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비적대적 모순은 비적대적 대립을 적극적으로 인식한 진보한 정책을 도입하고, 비적대적 대립의 당사자 의견과 문제 사항을 새 사회 건설에 적극 반영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때로 비적대적 대립을 극복하는 방식은 투쟁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낡은 것(보수주의, 관료주의 등 기타 낡은 사상)에 대한 새로운 것의 투쟁으로서 비적대적 모순을 극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7]≪세계철학사 II≫, p. 200.

 

지위 유형으로서 모순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으로 나눠진다. 주요 모순은 당면 현실에서 주된 대립에 기초한 모순을 말하는데, 주요 모순은 한 현상, 한 과정, 특정 제한된 기간에 한정하여 일차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따라서 주요 모순은 객관적 조건에 의해 부차 모순으로 될 수 있으며, 부차 모순 역시 주요 모순으로 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주요 모순은 기본 모순과 구분되어야 한다.[18]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I≫, p. 180. 지위 유형으로서 모순은 범주 유형으로서 모순과 대응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의식은 물질의 제 대립 관계/모순 관계를 반영한 것인데, 여기서 모순은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의식 발전/발달에서 의식이 갖는 능동적인 대립은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의 총체적인 관계의 반영이며, 변증법적 사유가 다루는 모든 제 내용 역시 반영된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의 제 내용이다.

 

2-2. 물질의 모순과 변화ㆍ발전

헤겔은 질료의 자기 운동으로서 발전(질적 변화)을 말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것의 양적 변화만을 말한다. 그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발달로서의 발전만을 논한다. 헤겔에게서 질료는 정신 활동의 외화에 불과한데, 이것은 ‘질료에 제한받지 않는, 그리고 연관되지 않는 영역에서의 개념’의 자기 운동, 즉 개념 내부의 모순만을 언급하는 한계로부터 비롯된다. 반면, 유물론에서 발전은 물질과 의식의 발전을 상호 연관으로서, 통일적인 발전으로 이해하며, 동시에 물질과 의식의 발전을 구체화한다. 예를 들어, 물질의 발전은 물리적 양적 변화로서 화학적 발전이라는 질적 변화로, 화학적 양적 변화로서 생물학적 발전이라는 질적 변화로 이어진다. 엥엘스는 이를 자연 과학의 변증법이라 하였다. 자연 과학의 변증법의 범주는 역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범주로 나눠진다. 더 발전된 범주(예를 들어 생물학)의 정형화된 대립, 즉 모순 운동으로는 그 전 단계(예를 들어 화학이나 물리학)의 범주를 환원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19]“최초의, 가장 간단한 운동 형태는 역학적, 순수히 장소 변화적 운동 형태이다. … 물리학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을 고려하지 않고 방치해야만 … Continue reading 전 단계 제 모순 운동의 파악은, 그것보다 더 발전된 단계의 정형화된 모순 운동이 아닌, 인식된 자연의 제 모순 관계를 통일적으로 규명함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생물학에서 에너지 생산을 다루는 정형화된 TCA 회로를 통해 화학적 법칙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회로가 갖는 자연법칙적 성격을 자연의 전체 내/외적 모순과 연계하여 다룬다면, 비로소 화학적 법칙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며,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라는 자연 과학의 영역 내 소영역에서 각자 적용되는 모순의 네 가지 기본 법칙이 갖는 실질적인 내용은, 나머지 소영역에 일규(一揆)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20]예를 들어 사회학적 현상을 화학적 현상으로 설명한다면, 이는 부정확한 것이 되며,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적 … Continue reading

 

2-3. 의식의 모순과 변화ㆍ발전

헤겔은 모순을 정신의 자기 운동―존재(순수유)와 무(순수무)의 대립을 근본적인 대립으로서 갖는―과 인식 대상과 주체 사이의 사유 운동에만 적용하였지만, 엥엘스는 이러한 모순 운동이 물질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 양식이라는 것을 밝혔다.

 

앞서 논의했던 것처럼 엥엘스는 물질의 변증법적 운동/전개와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전개를 모두 논하였고, 레닌은 후자를 전자의 반영으로서, 반영론을 명확하게 제시했는데, 전자의 반영으로서 인식상의 변증법을 주체-객체 변증법(Subjekt-Objekt Dialektik)이라고 한다.

 

의식의 변증법은 인식된 물질의 모순, 즉 대립물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상당한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물질의 제 대립 관계의 내포로서 의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물질적 자극(이 자극도 물질의 내/외적 모순 운동이며, 바로 그렇기에 자극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에른스트 마흐가 주장한 것처럼 고립된 자극자의 단순 나열로서 ‘감각 요소’로 취급하면, 그것은 비변증법적 이해라 할 수 있다)이 뇌를 통한 의식적 해석에 진입하기 전(前) 단계까지의 과정은 감수성의 단계로서, 의식적인 성격을 갖지 않지만, 대부분의 물질적 자극은 필연적으로 뇌를 통한 해석을 거치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가장 초보적인 의식은 이 모든 경로로부터 누적된 모순을 반영한다.[21]감수성의 단계에서 물질적 자극의 연속/연쇄 역시 모순 운동이다. 우리는 앞서 모순이 없으면 운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물질적 자극은 … Continue reading

 

인식된 제 모순 관계, 다시 말해, 물질의 반영으로서 성립된 의식상에서 제 모순 관계는 변증법적 운동/전개로서 모순 운동을 유발하는데, 의식에는 다양한 형식이 있다. 의식의 모순 운동은 단순히 모순의 제 내용을 다룸에서, 의식 내에서의 양적 변화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의식을 성립한다. 즉, 의식의 모순 운동에서 의식은 낮은 수준의 의식에서 높은 수준의 의식으로의 질적 변화를 동반한다. 여기서 의식이라는 질로서 형식은 일정한 단계까지 유지된다.[22]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이다. 특정한 한 형식의 내용이 변화하면, 그 형식은 일정 변화하고, 동시에 그 형식은 … Continue reading

 

의식의 발달인(發達因)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통한, 상호 대립항의 피정립으로서 ‘의식적으로 파악된 것’의 능동적 부인(verleugnen)이다. 물론, 이것은 모순의 가장 기본적인 대립물의 투쟁을 다른 입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대립물의 투쟁에서 대립물은 사물만이 아니라 정신도 그 대상이다(대립물의 투쟁은 ‘사회, 정신을 포함하여 자연의 모든 현상과 과정 안에서 모순되고 서로 배제하려는, 대립하는 경향’이라는 레닌의 정의에 따라). 모순에 따른 변화와 발전의 추동으로서 일반 법칙은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가장 주된 것으로 되지만 더욱 넓은 시야에서 보자면, 이는 대립물의 투쟁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것을 정신적인 것의 자기 운동과 사변 활동에만 적용하였는데, 그는 사변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 긍정적-이성적인 것(das Positive-Vernünftige)을 형성하고, 그것의 타재로서 실천만을 말하였다. 여기서 실천은 긍정적-이성적인 것의 신플라톤주의적 하강으로만 취급될 뿐이며, 이러한 실천관은 헤겔의 관념론적 전제인 ‘절대정신의 타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이용된다. 헤겔에 따르면 ‘올바른 실천’의 당위는 오로지 의식의 가장 지고에 위치한 ‘절대지(absolutes Wissen)의 하강’에 근거한다. 여기서 절대지는 절대정신과 동일한 층위에 놓여 있는데, 바로 여기서 절대지는 매우 엄밀한 단계로서 불변이며 절대적이다. 반면 맑스와 엥엘스는 불변의 절대지를 과감하게 부정하고, 오로지 변증법적 부정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놓는다.[23]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 p. 202.

 

맑스와 엥엘스는 실천을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추상화된 개념에서 가장 높은 단계로서 의식인 사고/사유로 나아감은 인식 대상의 제 모순 관계를 벼려낸 것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이지만, 이 구체는 ‘의식된 구체성’이고, 그 구체의 현실적 실현, 즉 ‘구체적인 검증으로서 구체적인 수준(과학적 실천,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실천이 된다. 여기서 추상은 초보적인 의식 단계에 의해 다루어지는 ‘의식에 반영된 존재(물질)의 제 모순 관계’를 상대적으로 이르는 말로, 아직은 주관적이다. 이 지점에서 맑스는 의식 발달 경로에서 ‘필연성을 인식하는 과정’으로서 자의(Willkur), 자의에서 더 높은 수준의,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서 자유로 나아감을 말하고, 의식의 발달이 곧 의식으로부터 벗어난, 즉 객관 세계의 실천[24]실천은 물질-의식 관계에 속하지만, 그 존재 방식은 객관 세계에서 엄연한 물질적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 Continue reading으로 나아가는 것을, 물질의 내적 모순 운동이 본래의 존재성을 확립하기 위한,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오는 운동’[25]유일한 객관적 실재인 물질, 이것의 집적인 수많은 사물이 그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 사물이 불변이며, 운동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 Continue reading)으로서 파악한다.[26]예를 들어, 우리가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푸른 책’이라는 사물을 인식한다면, 의식의 발달 경로에서 이 ‘푸른 책’에 대해 의식할 때, 그 … Continue reading 맑스의 단계에서 이는 추상적으로 논해졌지만, 엥엘스는 ≪반뒤링론≫과 ≪자연변증법≫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이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오는 운동’은 두 가지 고려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하나는 물질의 비(非)의식적-매개로서 자기 운동에서 질의 유지 또는 발전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 복합체로서 인간의 뇌수를 거친, 물질의 의식적-매개로서 자기 운동에서 질의 유지 또는 발전과 관련된 것이다. 의식의 발달은 후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데, 엥엘스는 전자를 객관적 변증법, 후자를 주관적 변증법(=변증법적 사유)이라 칭하였다. 엥엘스는 객관적 변증법이 자연 전체를 지배하며,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운동인 동시에 진리의 기준이자 인식 주체 없는 과정이라고 주장한 반면, 주관적 변증법은 객관적 변증법을 추적하여 상대적인 진리를 얻어 가는 과정이자 인식 주체가 있는 과정이라고 보았다.[27]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 p. 369.

 

그렇다면 주관적 변증법에서 의식의 모순 운동, 그리고 이를 통한 의식의 발달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지며, 그것이 어떠한 구체적인 경로를 통해 실천과 연결될 수 있는가? 이 내용은 엥엘스와 레닌의 방대한 작업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앞으로 다룰 내용이 된다.

 

 

3. 물질-의식 관계와 의식의 발달

 

의식은 물질의 모순과 대립물의 투쟁(앞으로 /외적 모순 운동 및 관계로 통칭)의 반영이며, 필시 의식은 그 반영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유의해야 할 것은, 물질-의식의 전환 관계가 단순히 협소한 수준의 인식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의식의 탄생은 물질의 존재 기초, 그 내용에 의한 물질적 자극에 기반하지만, 물적 자극이 곧바로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가령 원핵생물, 식물에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적 자극이 원핵생물이나 식물에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무생물의 경우 물질에 의해 추가적인 자극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의식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인간은 물질의 내/외적 운동으로서 물적 자극을 통해 의식을 갖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물적 복합체로서 인간이 갖는 성격과 긴밀히 관계된다. 특히, 뇌의 발달은 그 해명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진핵생물상 여러 진화 단계에서 뇌가 형성되었고, 이는 과학에서 엄밀하게 정의되는 ‘뇌의 사용(두뇌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두뇌 활동은 초기에 아주 원시적인 수준에서 행해졌다. 그 활동은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아주 기초적인 활동에서 시작됐는데, 예를 들면, 유인원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나무 위에 있는 열매를 땄다. 육식을 하는 침팬지의 경우는 가장 기초적인 근력의 이용해서 자신보다 먹이 사슬에서 낮은 지위에 위치한 생물체를 섭취하기도 했다. 진화를 거듭하여 유인원이 사피엔스종(현생 인류)이 되었을 때, 그 활동 범위나 질적 성격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마찰 원리를 이용하여 불을 사용할 줄 알았으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에 이르면 독자적인 석기 도구를 만들기까지 한다. 뇌의 발달은 곧 지능의 발달이었고, 지능의 발달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질의 반영 외, 스스로의 행위로부터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새로운 질적 측면을 갖는 물질의 반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일정한 진화의 거듭을 통해 추상적 사유로 진입하는 능력이 발달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인류는 체계적인 생산 활동을 영위하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생명체가 되었다. 이렇듯, 삶의 영위를 위한 욕구와 생산 활동은 인류의 성격을 정의하는 한편, 역사는 이러한 인간 활동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모든 인간적 실존의 첫 번째 전제, ‘역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은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모든 역사의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음식, 주거, 의복, 기타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의 생산, 즉 물질적인 생활 자체의 생산이었다. … 최초의 욕구의 충족은 즉 충족 행위 및 충족 수단은 새로운 욕구를 유도해 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욕구의 창출이야말로 최초의 역사적 행위이다.[28]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I≫(1845-1846), 박재희 역, 청년사, 1988, pp. 56-57.

 

맑스가 말하는 역사는 자연사적 과정이다. 자연사적 과정은 역학적 자연법칙과 다른 성격을 갖는데, 전자는 물질-의식의 관계에서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자연사적 과정은 필연적으로 의식을 동반한다.[29]엥엘스는 ≪반뒤링론≫에서 의식 활동을 ‘자연적 연관’(Naturzusammenhang)이라고 하였다. 역사는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이면서 … Continue reading 인간은 생산 활동을 통해 변증법적 전개로서 정립될 수 있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서 인류는 그러한 생산 활동의 연장으로서, 생산 활동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일정한 형식을 갖춘 말 또는 문자 기호 체계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언어이다.

 

네 가지 측면[인간 생산 활동의 여러 측면: 인용자]들을 고찰한 뒤라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의식 또한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순수한 의식은 아니다. 정신은 애시당초부터 물질에 묶인 저주받은 운명을 짊어지고 있으니, 여기서 물질은 진동된 공기층, 소리, 요컨대 언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 의식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다른 인간과 교류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그 절박한 필요성 때문에 비로소 발생한 것이다.[30]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앞의 책, p. 59.

 

언어는 그것의 구체적 내용에 따라 매우 다양한 수준의 물질적 반영을 창출해 냈다. 예를 들어, 언어는 대개 문자 언어나 구두 언어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시각적으로 보이는 특정한 기호 체계는 종래 찾아볼 수 없던 수많은 형식의 자극으로 되었으며, 청각적으로 들리는 특정한 음성기호 체계 역시 종래 찾아볼 수 없던 수많은 형식의 자극이 되었다. 새로운 물적 자극의 폭발은 인간의 추상적 사유 능력을 더더욱 발달시키는 원인으로 되었다. 언어와 지능의 관계에 관한 수많은 연구는 물질-의식 문제에서 언어의 지위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엥엘스는 물질-의식 관계에 관해서 가장 기초적인 이해를 담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언급하였다.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질적인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적 세계이며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그것이 아무리 초감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 육체적 기관인 뇌수의 산물이다. … 인간에 대한 외계의 영향은 인간의 두뇌에 새겨지며 감점, 사유, 충동, 의사표시 등으로서, 한마디로 말하면 ‘관념적인 지향’으로서 반영되며, 이러한 형태에서 그것들은 ‘관념의 힘’으로 되는 것이다.[31]프리드리히 엥겔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pp. 37, 43-44.

 

엥엘스가 논한 물질의 반영으로서 의식을 재규명해 보면 필연적으로 자연과 정신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학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물질이 그 스스로의 동일성을 놓지 않는 전제하에서, 의식을 물질이 갖는 여러 형태의 일부이거나 변형이라고 본다면 이는 의식이 없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면 소박한 수준의 결정론에 떨어지게 된다. 나아가 형식 논리학의 이해를 전제한다면 물질은 물질일 뿐이며, 의식은 의식일 뿐이다. 따라서 물질-의식 관계를 논할 수조차 없게 된다.[32]형식 논리학적 흐름에서 물질-의식의 연관을 말한다면, 세상에는 물질은 존재하나 의식은 없거나, 의식은 존재하나 물질은 없는, 양자 중 하나의 … Continue reading 결과적으로 의식의 존재 형태를 알기 위해 변증법적 논리학의 승인과 그 발전은 필수적이다.

 

“이 상호 작용[상호 대립: 인용자]의 인식보다 뒤로 후퇴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뒤에는 인식되어야 할 어떠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물질의 운동 형태들을 인식하면(자연 과학이 존재하게 된 뒤의 그 짧은 기간을 볼 때 물론 아직도 물질의 운동 형태들의 인식에 있어서 매우 많은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물질 자체를 인식한 것이고, 그로써 인식은 완료된 것이다[33]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36.라는 엥엘스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대립항의 상호 대립으로서 모순 운동은 가장 본질에 서 있는 운동이고 모든 것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유물론적 관점으로 돌아온 우리는 현실의 사물을 절대 개념의 일정한 발전 단계의 모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개념들을 현실 사물들의 모사로 보았다. 이리하여 변증법은 외부 세계와 인간 사유의 두 영역의 일반적 운동 법칙에 관한 과학으로 환원되었다. 이 두 계열의 법칙은 본질상 동일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인간의 두뇌는 이 법칙을 의식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나, 자연에서 ―이때까지는 대체로 인간 역사에서― 이 법칙은 외견상으로 무한한 우연성 가운데서 외적 필연성의 형식을 취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개념의 변증법 자체는 다만 현실 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의 의식적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되었다.[34]프리드리히 엥엘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p. 64.

 

이 언급을 통해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더욱 고등한 수준의 의식은 물질의 제 대립 관계의 반영을 어떠한 형태로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어떠한 변증법적 전개를 취하며, 어떠한 발달 경로를 거치는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의식은 크게 감각, 지각-표상-오성, 마지막 단계로서 사고 또는 사유로 분류된다. 여기서 사고/사유는 제 물질의 모순 운동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가장 고도로 발달한 의식이다.[35]“사유의 ‘대상적 진리성(gegenstandliche Wahrheit)’이란 사유에 의해 옳게 반영되는 대상(=‘사물 자체’)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 Continue reading 이러한 분류는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의식을 감각적 확신(sinnliche Gewissheit)지각(Wahrnehmung)오성(悟性, Verstand)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이성(Vernunft) / 정신(Geist)절대지(absolutes Wissen)로 분류했던 것과 관련되는데, 헤겔의 ‘정신론’에서 ‘관념론적 특권’을 제거한 맑스와 엥엘스의 견해를 간명하게 체계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물질의 반영으로서, 그 초보적인 단계가 감각의 구성으로 나타난다고 하면, 어떻게 그것이 지각, 표상, 사고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이에 대해서, “감각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으며, 나열된 의식들은 본질적으로 감각과 동질이며, 물질의 다양한 변형인, 물질 그 자체이다”라고 하면 이는 강한 결정론에 기초한 속류 유물론적 해석에 불과하게 되며, 감각이 모종의 계시나 완전히 독자적인 자기 운동을 통해 이성으로 나아간다고 하면 이는 관념론이 될 것이다.

 

변혁 운동에서 물질-의식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물질 또는 의식의 규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실천에선 물질과 의식의 존재 형태를 정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중 물질의 반영으로서 의식의 존재 형태를 정확히 하는 것은 현 시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변혁적 실천에는 일정한 의식적 성격이 상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천에 몸담는 자 외에도, 그 실천을 바라보는 대중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의식적인 활동으로 인식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의식의 정확한 규명은 새 사회를 일구는 실천의 명확화에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맑스와 엥엘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의식 일반이 물적 토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물질적 생산 활동의 후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세부적인 예와 부연 설명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맑스와 엥엘스의 설명에 따르면, 의식은 객관적 존재인 물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은 이에 착안하여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통해 거대한 반영 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세 이론가 모두 의식은 그 초보적인 형태이든, 발전된 형태이든 뇌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라고 하였다.

 

오늘날 심리 과학의 의식 연구는 이러한 입장에 더 많은 타당성을 부여하였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여러 연구 성과를 통해 개별 인간의 의식이 담고 있는 내용, 특히 감각(질)에 대해서, 개별 인간이 경험한 제반 물질의 성질들과 유사한 내용을 갖는다는 것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부르주아 철학은 이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기 위해 과학과 철학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며, 철학으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대하여,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그 의식을 규명함에서 감각적 인식을 뛰어넘는 의식 및 인지 활동의 존재를 말하지 않는다. 자연 과학의 발달로 인해 과거 행동주의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분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현대 심리학, 정확히는 인지 과학에서 말하는 의식은 감각적 수준에 한정된,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의식에 불과하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의 주류 심리학이 갖는 당파성적인 한계와 연관된다. 현대 심리학의 ‘옅어져 가는 도그마’와 달리,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의식 연구는 우리이게 더 깊은 지식과 정보를 준다.

 

인간의 의식에는 감각만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 여러 관계를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 상위의 의식이 존재한다.[36]“불가지론자 나름의 노선의 본질은 어디 있는가? 불가지론자는 “감각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 어떠한 ‘확실한 … Continue reading 이러한 상위의 의식은 과학적 방법론의 정립, 이론화 작업, 그것의 실천 매개 등을 통해 나타나고 또 그것 자체로도 상위 의식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한편, 엥엘스는 이러한 상위의 의식이 갖는 성질이 연역 일반을 확립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과학적 검증/실천으로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엥엘스가 ≪자연변증법≫ 내 여러 문건을 저술할 당시, 영국 경험론자들은 귀납법을 모든 과학적 연구의 유일한 방법론이라고 하면서, 연역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엥엘스는 ≪자연변증법≫에서 이에 대해 비판한다. 엥엘스는 귀납법이 인간이 제 자연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만으로는 인식의 질적 변화를 추동할 수 없다고 하였다.[37]귀납법은 분석이 대상이 되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수량 비교에 의존하고 있기에, 흑조(黑鳥) 현상과 같은 문제에 취약하다. 이는 감각 자료가 유용한 … Continue reading 엥엘스는 헤겔이 ≪대논리학≫에서 제시한 현존재의 판단, 반성의 판단, 필연성의 판단, 개념의 판단을 질적 상승으로서 판단의 기초라고 한다.

 

≪자연변증법≫에서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모든 형태의 운동은 대개의 경우 일정한 제 조건하에서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다른 형태의 운동으로 전화될 수 있고 전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개념의 판단, 특히 필연판단이며, 판단 일반의 최고 형식이다. … 개별성, 특수성, 보편성, 바로 이 세 가지 규정 속에서 ‘개념론’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리고 나서는 하나의 양상(Modalität)으로서가 아니라 많은 양상들로서, 개별적인 것에서 특수적인 것으로, 그리고 특수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며, 이것은 매우 빈번히 헤겔에 의해서 개체, , 유라는 진보로 예시되었다.[38]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30.

 

하지만, 엥엘스가 언급한, 위와 같은 판단들의 근거가 어디로부터 설 수 있는지, 과학적인 입장에서 밝혀내지 못한다면 이는 공허한 ‘개념 놀음’이 될 것이다. 판단 능력 존재의 당위성을 신이나 미지의 관념적 존재에서 찾게 되면 그것은 비과학이자 관념론으로 될 뿐이기 때문이다.

 

엥엘스는 판단을 ‘사고 운동의 형식’이라고 한다. 사고 운동의 형식을 말하기 위해선 사고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알아야 하는데, 이를 알기 위해선 의식 발전을 총체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과학성에 기초해서 판단 능력을 취급한다는 것은 결국 의식 문제와 연결되는데, 의식 문제에서 의식은 필시 물질의 틀 내(물질-의식 문제에서)에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따라서 판단 능력조차 제 물질과 의식의 연관에서 그 당위성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으로 된다.

 

3-1. 감각

우리는 앞서 인식의 모순과 변화ㆍ발전을 다루면서 의식의 발전/발달이 물질을 반영한 의식의 모순으로 대표되는 변증법적 운동과 관계된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감각부터 사고/사유까지의 발달이 어떠한 경로로서 이어지는지 알아볼 것인데, 이 과정에서 변증법적 운동이 얼마나 의식 발달에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엥엘스는 개별성-특수성-보편성의 지양(모순의 내용들)을 파악하는 것이 이성적 인식이라고 하였다. 엥엘스는 그 이성적 인식을 향한 가장 초보적인 단계 즉 초보적인 도정인 감각을 분석한다. 엥엘스는 감각의 근원과 물질의 운동을 수용하는 감각 기관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엥엘스는 흔히 오감이라고 부르는 것(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서 전제되는 구별이 과학의 진보에 따라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 여긴다.[39]같은 책, p. 240. 왜냐하면, 이미 각 감각을 맡고 있는 신체 기관이 인간으로 진화되기 전에는 같은 기능을 하는 기관(상동 기관)이었다는 게 당시에도 충분히 과학적 설명을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오감을 취급할 때, 이 각 다섯 가지 기능이 나눠진 그 연원은 진화이고, 현재로서는 확실히 ‘달라 보이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본래 오감은 하나의 감각으로서 동질성이 존재한다. 실제 과학의 발달을 통해 이것을 전기적 신호라는 단일한 성격으로 종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감각은 주관적인 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감각은 그것의 시초가 되는 매개가 인식자의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의 내/외적 모순 운동의 반영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다양한 감각 기관에 의해 다루어지게 되며, 이로 인해 그 제 대립 관계가 더욱 복잡화되어 불완전한 상태(인식자의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사물과 다른)로 인간의 뇌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꾸우시넨은 ≪맑스-레닌주의 철학의 기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감각에는 주관적 요소도 있다. 왜냐하면, 감각은 감각 기관과 신경계의 활동, 즉 인간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도 그것이 반영하는 사물과 동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사물의 특징들을 다소 불완전하게 전달한다.[40]쿠시넨,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1960), 서진영 역, 동녘, 1996, p. 122.

 

그렇다면, 감각은 물질의 내/외적 모순 운동의 반영으로서, 그리고 의식 발달이라는 방향성으로서 어떠한 자기 운동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발달한 의식으로의 전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레닌의 ≪철학 노트≫는 그것을 ‘살아 있는 직관’으로서 감각으로 다루며, 지각, 그리고 사고, 마지막으로 실천이라는 세 가지 사이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인식의 발전을 설명한다.[41]W. I. 레닌, ≪철학 노트≫(1909-1913), 홍영두 역, 논장, 1989, p. 120. 그러나 이에 대한 서술의 더욱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며, 헤겔, 맑스, 엥엘스의 저술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을 통해 의식의 발달인 인식의 발전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42]빠벨 꼬프닌은 ‘살아 있는 직관(감각)-사고-실천’이라는 레닌의 설명이 형이상학적 3단계설로 이해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코프닌, … Continue reading

 

먼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살펴보자. 현재 파악하고자 하는 감각은 ≪정신현상학≫의 초입 부분에서 ‘감각적 확신’으로 설명되고 있다.

 

감각적 확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일단은 감각적 확신이야말로 더없이 풍부한 인식, 아니 무한히 풍부한 인식인 듯이 보인다. … 그러나 사실 이 감각적 확신은 더없이 추상적이고 더없이 빈약한 진리임을 그 스스로 보여 준다. … 이 확신의 본질을 이루고 그 진리로 내세워지는 이 순수한 존재를 잘 살펴보면 여기에는 그 밖의 갖가지 부수적인 것이 포함되어 우연히 작용하고 있다.[43]G. W. F. 헤겔, ≪정신현상학≫(1806), 김양순 역, 동서문화사, 2011, pp. 76-77.

 

헤겔은 자신의 글 도처에서 스스로의 주장이 관념론적 지반 위에 있다는 것을 내내 보여 주는데, 헤겔 역시 감각적 확신을 주관적인 의식이라고 보고 있다.

 

감각적 확신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부수적인 것’을 유물론적으로 이해하자면, 다양한 감각 기관이 매개로 되면서 더해지는 갖가지 작용, 그리고 인간의 감각 능력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객체(감각 기관의 매개로 들어오기 전의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가 의식과 독립하여 갖는 성질 그리고 그에 의한 작용에 따른 것이 될 것이다.[44]이러한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다루는 감각은 대상과 인식 주체의 생리학적 체계의 반응으로, 감각 대상은 이 반응과 무관하게, 그것을 … Continue reading 그렇다면 이 감각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지각으로 나아가는가? 헤겔의 언급을 다시 보자.

 

우리는 곧 감각적 확신의 진리가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경험하게 된다. 내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의 여기이지만 그것은 또한 수많은 다른 여기이기도 하며, 그 자체는 다수의 여기가 하나로 모아진 단일한 집합체인 보편적인 여기이다. 이것이야말로 ‘여기’라는 것의 참된 모습이라고 하겠으니, 나는 직접 거기에 있는 것을 안다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지각’으로 향하게 된다.[45]G. W. F. 헤겔, 앞의 책, p. 82.

 

감각적 확신은 필시 인식의 객체가 되는 대상에 대한 확신적 지시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이곳’이라는 확신적 언명으로서 나타난다. 이어서 감각적 확신을 통해 파악된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본질과는 달리, 불변하는 파악으로 된다.[46]대상을 보고 “이것은 사탕이다”라는 언명적 의식을 가졌을 때, 이미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의 본질을 그대로 표현한 것도 아니며,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실제로 그 대상은 내/외적인 모순 운동을 통해 이미 지나간 것에 불과하며, 바로 그로 인해서 확신적 지시는 객체 대상화에 있어서 모호한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인식 주체가 갖는 ‘저기’, ‘여기’의 지시는 실제 그것을 지시를 받는 대상이 떠나간 자리에 안착한 지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언명적 의미로서 확정된 불변적 언명이 갖는 어떠한 표현이, 그 대상이 되었던 객관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은 필시 확신적 지시를 필요로 한다. 확신적 지시가 없으면 어떠한 것을 대상으로 한 ‘초보적인 의식’은 성립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확신적 지시를 통해 대상을 확신하려고 함’과 ‘확신적 지시는 실제 대상을 엄밀하게 지시하는 것이 아님’의 대립이 일어나고, 그러한 내적인 모순(부정의 부정의 법칙)으로서, 지시자인 인식 주체는 지양이 된다(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그리고 그 지양을 통해 지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각은 “하나로 모아진 단일한 집합체인 보편적인 ‘여기’이다”라는 설명처럼, 감각적 확신의 대상을 보편적인 대상으로서 개념화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인식 주체는 이 대립항을 직접적으로 현시하게 되는데 바로 이 규준이 필연성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의 일단에 속하고, 이것은 인식 주체가 즉자적 예속과 대자적 자유(Freiheit)의 중간 지점으로서 반성적 의지로서 자의[47]‘Willkur’는 의지를 뜻하는 ‘Wille’와 선택을 뜻하는 ‘Kur’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칸트는 이것을 ‘선택 의지’라 하였다.를 갖게 한다.[48]자의는 일반적으로 논구되는 ‘선택할 자유’와 같은 것이다. 헤겔과 맑스는 모두 자의와 자유를 구분하였다. 전자는 충동과 자유 … Continue reading[49]마찬가지로 엥엘스는 자유에 관해 ≪반듀링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헤겔은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맨 처음 올바르게 설명한 사람이다. … Continue reading 바로 이 지점에서 인식 주체는 두 가지 경우로 갈라진다: 감각적 확신에 머물며 후진 분자가 되든지, 지각으로 나아가 선진 분자가 되든지.[50]꼬프닌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이 과정에서] 지식은 경험적 지식에 고유한 구체성을 상실하지만 그 … Continue reading

착취 사회의 지배계급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며 피압박대중이 피착취계급으로서,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저급하고 저열한 수준의 내용을 가진 문화 ‘상품’, 교육 등을 생산한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가 갖고 있는 생리학적 본능, 즉 말초적 본능을 극렬히 자극하는 내용 외에 존재하지 않는데, 맑스-레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 세계관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쓰레기 문화(junk culture)에 충분히 속한다. 하지만 소외된 존재가 ‘추구’하는 욕구는 그저 조야한 욕구일 뿐이기에 소외된 존재는 그러한 잡동사니를 열렬히 ‘추구’한다.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한 침식은 인간의 의식을 감각적 확신 수준에 정체되게 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헤겔의 변증법은 관념론적인 지반이 전제된 것이기도 하지만, 모순 운동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특기할 수 있다. 맑스는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이와 직접적으로 연계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감각의 대상이라는 것, 감각적 대상이라는 것, 따라서 자기 바깥에 감각적 대상들을 가진다는 것, 자기의 감성의 대상들을 가진다는 것이다. 감각적이라는 것은 시달리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상적, 감각적 존재로서 인간은 시달리는 존재이며, 자신의 고뇌를 느끼는 존재이므로 열정적 존재이다. 열정, 정념은 자신의 대상을 정력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적 힘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이고, 그러므로 유적 존재이며, 그의 존재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지에서도 자기 자신을 확증하고 실증해야 한다. … 모든 자연적인 것이 생성되어야만 하듯이 인간도 자신의 생성 행위, 역사를 가지지만, 인간에게 역사한 의식된 역사이며, 생성 행위로서 역사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지양하는 생성 행위이다.[51]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강유원 역, 이론과실천, 2006, p. 200.

 

이 언급이 있기 전, 맑스는 헤겔이 오로지 세계정신의 간지(奸智)에 귀속된 사유의 자기 운동으로서 의식 일반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비판하였다. 맑스는 그러한 틀이 갖는 내용과 형식이 결과적으로는 소외된 인식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가했다. 맑스는 인간 의식의 자기 운동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때, 이러한 자기 운동이 오로지 인간이 겪는 삶의 내용과 직결된 것들, 생활 양식들에 기초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난 전제에서 ‘높디높은 미지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허한 것이며, 인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맑스는 헤겔의 의식에 관한 개념 규정이 변증논리학적으로는 타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현실적 인간 자체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추상화된 인간, 즉 자기의식 앞과 뒤의 형식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다.

 

맑스는 본질적으로는 감각적 대상, 감각적 인간으로서 인간이 스스로를 지양함으로써 발전적인 의식을 갖춘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의식의 자기 운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운동에 대해 논할 때, 의식이 외부의 현실과 완전히 독립된 상태에서, 그 자기 운동의 규정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게 전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인 정신’이며, 현실의 구체적 조건, 인간적 삶의 조건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로부터 인간 실천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 실천은 바로 인식론적[52]일부 편향적인 견해는 피착취계급의 혁명 활동을 인식론적 층위에서 다루길 거부하고, 현장주의적 의미에서 ‘실천’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러한 … Continue reading으로 ‘지양되어질 것’인 감각적 확신의 경험적 내용을 풍부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실천에 기반하여 의식의 최상의 단계인 사고로서 객관에 접근하고, 그 객관은 다시 지양되어 새로운 경험 내용(살아 있는 직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실천은 이성적 인식의 확장(객관 범위의 확장)을 위해, 객관의 지양으로서 다시 요구된다. 그리고 풍부화된 경험적 내용은 다시 더 높은 수준의 확장된 객관을 제공하는 토양이 된다. 이로써 실천의 중요성이 바로 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변증법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관념론의 지반 위에서 이러한 능동적인 의식 운동을 이성의 상위에 있는, 절대지로 나아가는 정신이라 규정하였고,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받은 그러한 정신-절대지에 따라 세계가 움직인다고 보았으며, 그 본질은 ‘자유의 확대’로 일컬어진다.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에서 이 과정은 물질적 진보를 누리려는 사회적 존재로서 보편적 인간의 욕구(조야한 욕구가 아닌) 실현 과정으로 파악되며, 철저한 현실 변혁 및 그 결과 자아실현으로서의 노동의 실현으로 그 대표성을 갖는다.

 

근래 현대 철학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에서, 인간 의식을 오로지 감각 활동이나 감수성(Sensibilität)[53]감수성은 의식 전 단계로서, 생리학, 신경학적 차원에서 무조건-반사, 조건-반사 반응을 총칭한다. 헤겔은 ≪철학 강요≫에서 감수성을 유기체적 … Continue reading에 귀속시키고 있는데, 이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성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소박한 수준의 결정론이나 주관적 관념론으로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한다. 여기서 더 심각하게 나아간다면 불가지론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의식이 그저 감수성에 불과하다고 전제할 경우, 결국 남는 것은 조건과 그에 따른 반사(수용과 반응)뿐인데, 인식 대상에 대해 인간이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질적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감수성이 제반 사물에 대한 완전한 해석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란 걸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에는 인식 주체가 겪는 사건(경험들)에 대해, 그러한 사건이 완전히 정지된 시간성에 갇힌 고정된 사건의 연속 또는 총합이며, 그 사건의 다양한 프레임의 일면을 선별하여 감각질을 연구할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불가지론자들은 특정 사건에 작용된 감수성이 그 사건에 대해, 그들이 정한 시간 구간 내에 완벽하게 설명해 내지 못하면, 곧바로 그 감수성은 그 특정 사안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게 한다는 보증을 얻는 시험에서 불합격 처리―실제로 일면적으로 파악된 감수성은 아직도 인간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고 있지는 못하기에―가 되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활동을 각 정지된 프레임의 단순한 연결로 보는 것은 비과학적인 견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이 있기 이전에,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이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물질의 이러한 성격은 인간이란 생명체의 성질도 규정한다. 대상에 대한 앎이란 그 대상의 운동 방향과 그 운동의 법칙성을 아는 것이지, ‘그 대상이 멈춰져 있을 때의 모종의 모습’을 아는 것이 아니다. 실제 과학의 성과를 통해, 인류를 둘러싼 자연은 끊임없이 운동한다는 것이 미시적인 단위까지 밝혀졌다.

 

따라서, 인간 활동은 운동의 연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감각의 성질을 특정 정지된 시간 속에 멈춰 있는 사건 속에서 추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근시안적인 귀납 속에서 오류의 점철로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의 대상으로서, 동시에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3-2. 지각ㆍ표상ㆍ오성

감각의 성질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지양과 같은 자기 운동으로 나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감각은 지양을 통해 지각, 더 나아가 표상을 거치고, 이후 단계에서 최종 단계인 사고로 된다. 사고는 제 물질의 내/외적 운동, 즉 제 모순의 관계를 파악하는 최상의 의식으로 지양으로서 실천의 동력이 되는 객관의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감성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이 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개별성의 지양으로서 보편성으로의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의 지양으로서 다시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생생한 변증법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맑스주의 세계관에서 감각 이상의 단계에 관한 언급은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 ≪독일 이데올로기≫, ≪철학의 빈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저술은 모두 당대 독일 관념론의 관념론적 견해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의식이 중점으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저술들은 인간의 생산 활동, 생활 양식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을 경제사에 대한 세밀한 접근을 통해 증명한다. 그러나 나열된 저술은 모두 관념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적 세계관을 확증하기 위해 쓰인 것이지, 의식 발달의 단계를 규명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 서술의 전모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상술한 저서 외 다양한 문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레닌의 ≪철학 노트≫이다.

 

감각 이상의 의식 단계를 논하기에 앞서, 감각이 특정한 시간 구간이나, 정지된 시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제 물질의 내/외적 모순 운동의 반영으로서, 감각을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의식으로 취급해야 감각에 대한 옳은 성질 규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더 나아가 감각이 더 높은 수준의 의식으로 발달하는 그 계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감각에 대한 앞선 연구를 승인하고 이후의 단계로서 지각을 언급하지만, 수많은 문헌들은 감각과 지각을 다른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엄격히 분류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단, 여러 문헌은 지각에 대해, 감각된 것의 지양의 결과로서 파악하며, 감각된 것의 내용을 압축, 분류, 체계화 등을 하는, 개념이 이루어지는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등장하는 “경험에 관한 반성적 인식의 방법은 우선 맨 먼저 현상 속에서 갖가지 규정을 지각하고 난 뒤에, 이들 규정을 기초로 하여 이른바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 규정에 대응하는 원질(原質) 혹은 힘들, 즉 상술한 현상의 제 규정들을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의 원질 혹은 힘들을 상정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주목해야 할 내용으로서 긍정한다.[54]W. I. 레닌, 앞의 책, pp. 61-62. 이러한 레닌의 언급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반영 이론에서 감각적 인식으로서 지각 의식을 말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헤겔의 언급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 다음 단계로서 지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지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방식은 감각적 확신에서처럼 나타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필연성을 따른 수용 방식이다. 이 원리가 발생함과 동시에 여기서 떨어져 나오듯이 보이는 두 개의 요소가 생성되는데, 하나는 뭔가를 제시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이 동일한 운동을 단일물로 나타낸 것이다. 전자가 지각이고 후자가 대상이다. … 이 두 요소는 보편적인 본질을 이루므로 모두가 본질적이라고 해야만 하지만,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서 관계하며, 이 관계 속에서는 한쪽만이 본질적이어서결국 구별이 생겨난다. … 대상은 그 원리상 보편적인 것이고 단일체 속에서 매개 관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을 대상 자체의 본성으로서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 이리하여 대상은 다수의 성질을 지닌 사물로서 나타나게 된다.[55]G. W. F. 헤겔, 앞의 책, pp. 82-83.

 

앞서 언급한 감각의 내적 모순에 대해 상기해 보자. 감각은 ‘이것’, ‘저기’ 등의 확신적 지시로부터 인식 대상을 ‘있는 것 그대로’의 내용으로 보존하려 하지만, 실제로 인식 대상에 대한 지시는, 인식 대상이 갖는 객관적 성격(변화, 즉 항상 운동하는 것, 그리고 시공간적 한계로 인해 감성적 단계에서 명확한 지시는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인해 확신적 지시로 목적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에 따라 감각적 확신-지시는 내적 모순을 겪고, 제 인식 대상을 보편화/개념화한다. 이것이 지각의 단계이다. 지각은 그 감각적 확신의 대상을 술어화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눈앞에 놓인 사과를 보고 “저기에 사과가 있다”라는 확신적 지시로서 대상에 대해 감각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저기’는 사과만이 아니라 사과를 얹은 그릇, 그리고 그 뒤의 배경을 모두 포함하거나 일부를 포함하는 것일 수 있다. 동시에 사과는 시간에 따라 엄연히 썩고 있으며, 썩어서 문드러진 사과는 더 이상 사과가 아니다. 한편으로, 사과라는 개념화를 확신적 지시 하나로 정립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감각이 갖는 확신적인 지시는 그것이 감각적 인식에 머무르는 한 지시할 수 있는 대상이 사실상 무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었는데 느껴지는 맛, 향은 때마다 다른 느낌에 따라, 그것에 대해서 때마다 다른 내용을 갖춘 지시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적인 지시의 종류는 실질적으로 무한하기 때문에 개념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념화의 가장 기초로서 술어화는 어떠한 경로로 이루어지는가? 사과를 먹었을 때 느껴지는 단맛을 통해, “사과는 달다”라고 감지해 낼 수 있지만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사과를 먹었을 때, 단맛보다 충분히 비중이 높아 보이는 신맛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사과의 맛은 ‘달기도 하지만, 신맛(단맛이 아닌)’으로 대립된 정의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감각적 확신은 모든 것을 술어화해야 한다는 지양으로서, 지각으로 된다.

 

지각에 의해 감각 자료의 분류적 개념화(주관적 개념으로서)가 이루어지고, 감각된 것들의 보편적 형식이 설 수 있게 된다.

 

헤겔은 이후 내용에서 지각과 대상의 내적 운동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다.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지각은 보편화된 대상을 만들어 내는데, 지각은 지속적으로 대상을 관찰하며, 지각과 대상은 지각 단계에서 일체를 이루지만 동시에 둘은 대립 관계로서 일체를 이룬다. 여기서 지각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대상은 본질적인 것으로 된다. 한편, 본질적인 것으로서 대상은 보편성을 얻으며, 대상은 단일체 속에서 매개 관계를 이루게 되는데, 보편적인 것이 된 이상 대상성은 그 매개 내용을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 이에 따라 대상은 ‘다수의 성질을 지닌 사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성질은 각자 성질의 대립 관계에 있는 대립항과의 관계로서 그 실질을 드러내야 하기에 그 성질을 드러내는 것부터 모순 운동을 갖고 있다. 즉, ‘A인 것’에 대한 ‘A가 아닌 것’ 등의 대립 관계로서 여러 성질을 드러낸다.[56]특정 시공간에서 보편화/개념화 작업이 일어나고, 실제 그러한 ‘보편화된 대상’을 통해 실재를 설명하려고 해도,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은 ‘다른 … Continue reading 그리고 그 지양의 결과로서 ‘독자존재(보편적인 대상 그 자체)와 대타존재(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성질)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통일의 결과로서 인식 주체는 절대적 보편자를 대상으로 갖게 되는데, 이 대상은 순수한 대상으로서, 이 보편자는 여러 개의 성질이 상호 대립이 없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로, 여러 개의 성질을 안고 불가분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개의 성질, 즉 소재들이 각자의 독자적인 존재 양식을 가지면서 다른 소재와 관계하지 않는다면 보편자 내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통해 소재가 추가되면서, 다른 소재들의 독자성이 폐기될 위험이 생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은 각 소재가 독자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다시금 불가분의 통일로 나아가는 것으로 된다.[57]틈에 독자존재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그 틈에 들어갈 독자존재가 생성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생성 과정은 감각적 확신-지각에서 보편화된 … Continue reading 이렇게 보편자가 그 자체의 통일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을 헤겔은 힘(Macht)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의식으로는 되지 못하였으나 그 힘을 내포하는 의식을 오성이라고 하는데, 오성은 보편자를 언명적 차별을 통해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한다.[58]감각 분류(오감으로 대표할 수 있는), 물리 법칙의 여러 구분, 생물학에서 유(類)와 종(種)의 분류 등은 오성의 결과물인데, 오성은 언명적 의미에서 … Continue reading 이 구분은 표상 행위(감각소여)에서 각 개념의 차별에 근거를 준다.

 

헤겔은 지각을 논함에서 스스로의 관념론적 성격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가령, 지각 작용에서 절대적 보편자가 다수의 성질을 갖게 되고, 그러한 다수의 성질이 객관적 실재를 이루는 제 요소와 직접 관계한다는 설명은 유물론과 반대되며, 과학적으로도 동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철학 노트≫에 등장하는 수많은 레닌의 메모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의식 일반의 내적 모순 운동에 관해서는 상당히 긍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레닌의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지가 넘치고 총명하다! 헤겔은 통상 죽은 것으로 생각되는 제 개념을 분석하여 그 개념들 속에 운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낸다. 유한적인 것이란? 이것은 종말을 향해 운동해 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어떤 것이란? 이것은 타자이지 않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존재 일반이란? 이것은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하다라는 것과 같은 무규정성을 일컫는 말이다. 제 개념의 전면적, 보편적 굴신성(屈伸性, Elastizität), 대립물의 동일성에까지 나아가는 굴신성 여기에 본질적인 것이 있다.이러한 굴신성이 객관적으로 적용되면, 즉 이 굴신성이 물질적 과정의 전면성 및 이 과정의 통일성을 반영하면, 그것은 변증법이며, 세계의 끊임없는 발전에 대한 올바른 반영인 것이다.[59]W. I. 레닌, 앞의 책, p. 55.

 

헤겔의 결론 속에는 많은 신비주의와 ‘공허한’ 현학적 근성이 들어차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근본 사상은 천재적이다. , 만물과 만물의 보편적인, 전면적인, 살아 있는 연관 및 인간 개념 속에서의 이러한 연관의 반영―‘유물론적으로 거꾸로 서 있는 헤겔’―, 그리고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념도 마찬가지로 세련되고 정돈되고, 유연하게 동적으로 상대적으로 상호 결합되고, 대립 속에서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헤겔과 맑스의 사업을 계승하는 일은 인간의 사고, 과학 및 기술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가공하는 데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60]같은 책, pp. 94-95.[61]뒤에 다룰 오성에 관해서, 레닌이 ≪철학 노트≫에서 보여 준 오성에 관한 요약은, 그가 긍정하는 개념의 운동에 속하는 내용이다.

 

한편으로 레닌은 유물론 사상이 개념의 운동을 필시 부정하는 방향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헤겔의 에피쿠로스 철학 비판) 헤겔의 ≪철학사 강의≫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유물론에 대한 중상모략이다! ‘개념의 필연성[62]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그 내용을 규정하고, 그것이 필연을 이루는 것이 된다는 의미에서 ‘개념적 필연성’을 말한다.은 인식 및 개념의 원천에 관한 학설에 의하여 조금도 폐기되지 않는다! ‘상식’과 불일치는 관념론자의 구차한 변덕이다.[63]W. I. 레닌, 앞의 책, p. 225.[64]관련된 헤겔 구절은 정확히는 감각 자료에 대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형식 논리학적 전개를 비판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의식이 물질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적 모순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레닌이 승인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감각, 그 대상, 그리고 이를 통해 확립된 지각과, 그 이후의 지각의 변증법적 전개 등에 대해서 레닌은 모두 승인(관념론적 성격을 제거하고)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의식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고 어떠한 존재 형태를 갖는지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철학 노트≫에서 레닌은 헤겔이 칸트를 비판한 대목, 즉 개념의 자기 운동으로서 힘, 그리고 이것의 자기의식으로의, 즉 더 높은 수준의 의식으로의 전환을 인정하지 않는 칸트의 표상주의를 비판한 대목에 관해 상당히 많은 칭찬을 기록해 두고 있다.[65]W. I. 레닌, 앞의 책, pp. 119-120. 이 지점에서 사고/사유에 대한 레닌의 통찰이 등장하는데, 이는 “가장 발달한 의식으로서 사고/사유”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레닌의 변증법에 대한 해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식 발달의 경로와 발달된 의식의 내용을 명확하게 잡는 것이 변혁 실천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지각, 개념 그리고 그것의 내적 모순 운동에 대한 레닌의 긍정은 이성적 인식이 갖는 능동성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소외되지 않은 인간(해방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지각은 한편으로 실천에서 얻어낸 경험 내용/감각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되, 그러한 반영으로서 형성된 지각은 동시에 내적 차원에서의 모순 운동을 동반하며 그러한 모순 운동은 곧 인식 주체가 변증법적 전개에 진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역시 감각/감각적 확신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자의를 통해 의식의 퇴보로 가느냐, 아니면 발전으로 나아가느냐를 인식 주체가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경로로서 작용한다(반성성).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것은 반영의 원체(原體)인 물질의 내/외적 운동/제 모순 관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과정이 어디까지나 대뇌 피질에 의한 작용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반영 이론을 다룰 때, 의식을 단순히 물리적 특성/특질을 갖는 물질 존재의 변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물질이 그 내적 운동을 감각 기관을 통해 반영시킨 결과로서, 뇌는 대뇌 피질의 복잡한 신경 작용으로서 의식을 만들어 내며, 의식은 이미 물질의 내적 운동을 반영하는 모든 내용을 갖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그 내용의 실질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뇌에서 시작이 되었으나, 뇌가 의식을 산출했을 때, 산출된 의식에는 이미 원 반영체로서 물질(≪철학 교정≫은 이를 사고방식의 자기 운동 원천으로서 물질이라 칭한다)의 내적 운동이 반영된 것이다.

 

재차 강조하자면, 의식의 내용을 단순히 물리적 현상의 일종, 변형으로 등치(等値)하여 이해해서는 의식 현상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의식의 내용을 물리적 현상의 일종이나 그 변형으로 이해한다면 의식에 물체성이 없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은 필시 물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식에 대한 물리주의적 또는 행동주의적 편향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 그 비과학성이 폭로되었는데, 물리주의와 행동주의는 의식의 일정 정도의 상대적 독자성을 인정하는 최신 인지 과학 이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지각의 내용에서, 지각이 오성으로 질적 전화하는 것과 관련된 헤겔의 내용은 ≪철학 노트≫에서 레닌이 “그러나 다음과 같은 근본 사상은 천재적이다”라고 언급한 전체 단락 중에 존재한다. 레닌은 오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사유하는 이성(오성)은 상이한 것의 무딘 구별, 즉 제 표상의 단순한 다양성을 본질적인 구별, 즉 대립으로까지 첨예화시킨다. 제 다양성은 모순이라고 하는 정점에까지 고양되어서야 비로소 활동적이고 상호 생동적으로 되고, 자기 운동과 생동성의 내적 박동인 부정성을 획득한다.[66]같은 책, p. 90.

 

개념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승인한 레닌은 오성에 관해서, 스스로가 요약한 내용대로 흡수하고 그것은 반영 이론을 구성할 것이다. ‘제 표상’과 관련해서 요약 내용의 뜻을 추려 보자. 경험의 내용을 보편적인 대상 또는 보편적인 성격으로서 개념화하는 의식인 지각은 물질의 반영에 따른 모순 운동을 하면서 표상을 형성한다. 여기서 표상은 재현의 의미에서, 지각된 개념들을 상기하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물질의 내/외적 모순 운동의 성격을 갖는 것(무언가에 베이든, 특정한 맛을 느끼든, 그 어떤 것이든 본질적으로 원 반영의 실체인 물질의 성질이다)의 반영으로서 감각이 형성되었다면, 그 감각의 총체적인 내용을 상기할 수 있는 형태로 개념화하는 것이 지각이며, 상기된 것은 표상이다.[67]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마흐의 “우리가 자연 속에서 관찰하는 것은 비록 이해되지 못하고 분석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표상에 새겨지며 … Continue reading 그리고 그 개념화된 것이 서로에 대해 갖는 대립을 파악하는 것이 오성이다. 그리고 오성은 사고의 전 단계로서, 아직은 가장 발달한 의식 형식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는데, 오로지 지각으로서 성립된 개념의 대립을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차이’로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그 결과로서 오성의 한계에 대해 ≪정신현상학≫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성은 대상이 평온한 통일을 유지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므로 운동은 단지 오성적인 사유 자체에만 속할 뿐 대상 속에서 행해지지는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 설명은 이미 얘기된 것과 다른 것을 얘기하려고 하면서도 그러지 않고 변함없이 이전과 동일한 것을 되풀이할 뿐이다. 이 운동을 통하여 사태 그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생겨나지 않고 운동은 오직 오성의 운동으로서 그치고 만다.[68]G. W. F. 헤겔, 앞의 책, p. 111.

 

이렇기에 오성의 의식 수준에서는 아직 이성적 인식을 갖춘 존재로서 대자적인 계급으로는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여 오성적 의식에만 머무는 것도 즉자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오성에 관한 내용은 대자적인 존재로서 나아가는 것, 지각-표상-오성의 의미를 다지는 것,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이 이상의 의식 발달을 다룸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논의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의식의 가장 높은 발달 수준인 사고/사유를 규명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프리드리히 엥겔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양재혁 역, 돌베개, 1987, p. 31.
2 두 근본 노선, 두 근본 경향 1차적인 것으로서 자연, 물질, 물리적인 것, 외부 세계를 취하고 의식, 정신, 감각(오늘날 유포되고 있는 용어로 말하면 경험), 심리적인 것 등등을 2차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바로 이것이 사실상 철학자들을 양대 진영으로 분열시키고 있는 근본 문제다”(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하)≫(1909), 박정호 역, 돌베개, 1992, p. 110.)라는 레닌의 언급은 이를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3 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의하여 반영되는 이 객관적 실재의 운동이다. 표상, 지각 등등의 운동은 나의 밖에 있는 물질의 운동에 상응한다. 물질 개념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져 있는 객관적 실재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 유물론자는 ‘누구의 것인 관념’을 말하며, 관념론자는 ‘누구의 것도 아닌 관념’을 말한다.”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상)≫, pp. 30-31.)
4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1872-1883), 윤형식ㆍ한승완ㆍ이재영 역, 중원문화, 1989, p. 250.
5 같은 책, p. 251.
6 같은 책, p. 255.
7 이는 아인슈타인이 갖고 있던, 물질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해석으로부터 생겨난 결함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8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37.
9 상호 대립항이라는 이 양극성(polaritat)은 헤겔 이후 모든 변증법에서 다루어지는 모순의 기본 법칙을 가능하게 한다. 양극성은 모든 상호 대립의 기본 전제이다.
10 F. 헤겔, ≪대논리학 II≫(1812-1817), 임석진 역, 지학사, 1983, pp. 87-88.
11 모순에 관한 엥엘스의 통찰을 상기하자. 애초에 인식된 대상은 인식 주체의 의식 활동과 무관하게, 본래 정육면체라 대상화된 이유를 제공한 여러 성질들은, 대상의 객관적 성격 그 자체로서, 즉 자기 운동으로서 확립된 것이다.
12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17.
13 “맑스는 결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본질을 지닌 대립물을 양극적인 대립물로 간주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 임의의 형식적 이율배반의 배후에 무조건적으로 실질적인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1971), 문성원 외 역, 한울림, 1990, pp. 177, 180.)
14 G. 슈틸러, ≪변증법적 모순≫(1966), 양운덕ㆍ김재용 역, 중원문화, 2009, pp. 71-72.
15 ≪세계철학사 II≫, 녹두, 1985, p. 193.
16 문영찬, “마오쩌둥의 ‘인민내부의 모순’에 대하여”, ≪현대사상≫ 제20호(2018. 12.), 현대사상연구소, p. 173.
17 ≪세계철학사 II≫, p. 200.
18 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I≫, p. 180.
19 최초의, 가장 간단한 운동 형태는 역학적, 순수히 장소 변화적 운동 형태이다. 물리학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을 고려하지 않고 방치해야만 하였거나 방치할 수 있었다. 화학은 유기 화합물의 연구를 통해서야 비로소 가장 중요한 물체들의 진정한 본성에 관한 본래적인 해명을 찾게 되었고, 다른 한편 오직 유기적 자연에서만 나오는 물체들을 합성해 냈다. 여기서 화학은 유기적 생명의 영역으로 나아가며, 화학은 화학만이 유기체로의 변증법적 이행을 설명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충분히 진보하였다.” (프리드리히 엥엘스, ≪자연변증법≫, pp. 255-256.)
20 예를 들어 사회학적 현상을 화학적 현상으로 설명한다면, 이는 부정확한 것이 되며,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적 변화로서 복잡성이 증대된 범주 및 영역의 법칙성이 그 전 단계의 법칙성과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립의 양적 격화로서, 상승의 양적 변화를 통한 질적 변화는 그것 자체로 양에서 질로 지양인데, 지양은 폐기되는 것과 계승하는 것을 둘 다 포함한다. 예를 들어, 화학적 전기력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놓고 봐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견지에서 근육 운동, DNA의 복제, 전사, 발현 과정은 모두 화학적 전기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승 및 보존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과학에 대한 통일적인 안목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21 감수성의 단계에서 물질적 자극의 연속/연쇄 역시 모순 운동이다. 우리는 앞서 모순이 없으면 운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물질적 자극은 그것 자체로 물질의 운동이며, 이러한 운동 없이 물질적 자극은 성립되지 않는다. 물질적 자극을 불변하며, 정지해 있는 물질에 의해 생겨난 각 요소의 혼합 작용이라고 본다면 이는 유물론적 인식과 무관한 것이며, 단순한 경험론적 편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관념론자인 헤겔이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다.
22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이다. 특정한 한 형식의 내용이 변화하면, 그 형식은 일정 변화하고, 동시에 그 형식은 상위의 한 형식의 내용으로 될 수 있다.
23 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 p. 202.
24 실천은 물질-의식 관계에 속하지만, 그 존재 방식은 객관 세계에서 엄연한 물질적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장비를 사용하여 사물을 연구하는 것,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생생한 현장에서 사회적 실천은 모두 그것 자체로 물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시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식은 아니다. 그러나, 실천은 의식과 동질이 아니더라도, 의식에 근거하는 의식적인 활동이며, 물질-의식 관계에 포섭된다.
25 유일한 객관적 실재인 물질, 이것의 집적인 수많은 사물이 그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 사물이 불변이며, 운동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동일성은 구별을 포함하며, 피정립으로서 무한한 대립에 의한 모순 운동을 하고 있다. 맑스, 엥엘스는 헤겔이 언급한 ‘자기로의 복귀’로서 동일성을 언급할 때, 다음과 같은, ≪대논리학≫의 동일성에 관한 설명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배제하는 규정 자체는 그 자신이 곧 타자가 되는가 하면 또한 바로 이 타자의 부정은 그 자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피정립성의 지양은 다시금 이것이 어떤 타자가 지니는 부정소(否定素)로서의 피정립성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와의 적극적인 통일(positive Einheit mit sich)을 의미하는 자기 자신과의 합치인 셈이다. 이럼으로써 자립성은 자기 자신의 부정을 통해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통일임으로써 이것은 즉 자립성이 자기의 피정립성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자기에게 복귀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자립성은 어떤 타자의 부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부정에 의해서 자기 동일적인 것이 되기도 하는 본질의 통일인 셈이다.” (F. 헤겔, 앞의 책, p. 93.
26 예를 들어, 우리가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푸른 책’이라는 사물을 인식한다면, 의식의 발달 경로에서 이 ‘푸른 책’에 대해 의식할 때, 그 ‘의식된 푸른 책’은 본래 객관적 실재로서 ‘푸른 책’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자기 유지로서의 자기모순 운동을 반영한다. 여기서 ‘푸른 책’의 ‘본래 자기 유지의 성격’은 의식된 존재로서 ‘의식된 푸른 책’으로만 남고자 하는 것과는 대립된다.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로서 통일은 그것이 ‘의식된 존재’로서 구체적인 사유로 나아가는 동시에, 그것을 반영한 행동으로서, 즉 객관 세계를 실체적(추상 속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의)으로 구성하는 실천으로서 나타난다. 물론, 그 실천의 구체적인 모습은 각 시대의 사회적 관계 내용에 따라 달라지며, 천태만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낙후된 분자는 물질의 반영으로서 의식을 발전적 방향으로 가꾸어 가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의 본래적인 존재 방식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실천이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실천이 ‘객관적인 세계에서 드러난 푸른 책’의 내용으로 생성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인데, 여기에는 인간의 ‘인간적 욕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 존재를 정확히 반영하는 의식이 실천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인식된 대상의 객관적인 구체성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라는 현실적인 동인이 결부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적 동인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규정한다: “역사 전체는 인간이 감각적 의식의 대상이 되기 위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욕구가 욕구로 되기 위한 준비사/발전사이다. … 궁핍은,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부(富)인 다른 인간을 욕구로서 느끼게 만드는 수동적인 끈이다. 내 안에서의 대상적 본질의 지배, 나의 본질적 활동의 감각적 폭발은 정열인바, 그리하여 정열은 여기서 나의 본질의 활동으로 된다.” (칼 맑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객관적 존재가 갖는 제 모순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그 올바르게 인식된 것을 사회적인 욕구에 걸맞게 이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실천은 이 방향으로 진행되며, 이는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실천은 물질-의식 관계에 포섭되며, 물질-의식 관계의 밖에서 완전히 독자적인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제3의 개념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동부 민주독일의 실천 논쟁에서 헬무트 자이델(Helmut Seidel)이 보여 준 결론은 맑스-레닌주의 원칙에 어긋난 것이기도 하다.

27 소연방과학아카데미,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 p. 369.
28 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I≫(1845-1846), 박재희 역, 청년사, 1988, pp. 56-57.
29 엥엘스는 ≪반뒤링론≫에서 의식 활동을 자연적 연관(Naturzusammenhang)이라고 하였다. 역사는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이면서 능동적인 의식 활동이 전제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자연적 연관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30 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앞의 책, p. 59.
31 프리드리히 엥겔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pp. 37, 43-44.
32 형식 논리학적 흐름에서 물질-의식의 연관을 말한다면, 세상에는 물질은 존재하나 의식은 없거나, 의식은 존재하나 물질은 없는, 양자 중 하나의 결핍이라는 결론에만 도달하기 때문이다. 물질이냐, 의식이냐, 형식 논리학의 지반 위에서 두 입장 중 어떤 것을 택하든, 소박한 수준의 결정론 또는 자유 의지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의식이 물리적 존재와 같은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최소한 현재까지의 과학 발전의 역사에서 밝혀진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다(현재 심리 과학계가 의식을 물리적 실체로 낱낱이 해체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를 거들떠보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현재까지의 과학 발전의 역사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통일된 견해로서, 대립항의 상호 대립이라는 모순을 승인해야 한다.
33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36.
34 프리드리히 엥엘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p. 64.
35 “사유의 ‘대상적 진리성(gegenstandliche Wahrheit)’이란 사유에 의해 옳게 반영되는 대상(=‘사물 자체’)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상)≫, p. 145.)
36 “불가지론자 나름의 노선의 본질은 어디 있는가? 불가지론자는 “감각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 어떠한 ‘확실한 것’도 보기를 거부하고 “[모든 것은: 인용자] 현상의 차안에 머물러 있다”는 데에 있다. … 유물론자는 엥겔스가 말하고 있는 쟁점에서 사물 자체의 존재와 그 인식 가능성을 주장한다. 반면, 불가지론자는 사물 자체에 관한 생각조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사물 자체에 관해서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고 언명한다.”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p. 149.)
37 귀납법은 분석이 대상이 되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수량 비교에 의존하고 있기에, 흑조(黑鳥) 현상과 같은 문제에 취약하다. 이는 감각 자료가 유용한 정보로서 기능은 하지만, 감각/지각이 단독으로 현상을 정립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그 주관적인 성격으로 인해 한계가 있음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까지 물리 법칙을 탐구함에서 지배적인 방식인 대칭성(symmetry) 연구가 철저한 수학적 연역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 영국 경험론자들에 대한 엥엘스의 비판은 타당한 것이다. 대칭성 연구는 불변성(invariance) 연구라고도 불린다.
38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연변증법≫, p. 230.
39 같은 책, p. 240.
40 쿠시넨,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1960), 서진영 역, 동녘, 1996, p. 122.
41 W. I. 레닌, ≪철학 노트≫(1909-1913), 홍영두 역, 논장, 1989, p. 120.
42 빠벨 꼬프닌은 ‘살아 있는 직관(감각)-사고-실천’이라는 레닌의 설명이 형이상학적 3단계설로 이해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코프닌, ≪마르크스주의 인식론≫(1966), 김현근 역, 이성과현실사, 1988, pp. 200-201.). 이는, 각각의 인식 발전 수준이 완전히 분리되며, 불연속적이라는 잘못된 이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재차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단계설’을 지적하는 그도 각각의 상이한 의식 발전 수준에 대해서는 질적 차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단계설’이라는 표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43 G. W. F. 헤겔, ≪정신현상학≫(1806), 김양순 역, 동서문화사, 2011, pp. 76-77.
44 이러한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다루는 감각은 대상과 인식 주체의 생리학적 체계의 반응으로, 감각 대상은 이 반응과 무관하게, 그것을 추동하는 대상으로 이해된다(코프닌, 앞의 책, pp. 180-181.).
45 G. W. F. 헤겔, 앞의 책, p. 82.
46 대상을 보고 “이것은 사탕이다”라는 언명적 의식을 가졌을 때, 이미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의 본질을 그대로 표현한 것도 아니며, 언명적인 무언가로 그 끊임없는 대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47 ‘Willkur’는 의지를 뜻하는 ‘Wille’와 선택을 뜻하는 ‘Kur’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칸트는 이것을 ‘선택 의지’라 하였다.
48 자의는 일반적으로 논구되는 ‘선택할 자유’와 같은 것이다. 헤겔과 맑스는 모두 자의와 자유를 구분하였다. 전자는 충동과 자유 의지(즉자대자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의 사이에 머무른 것이다. 따라서, 자의는 (헤겔적 의미에서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자유와 필연성’을 대표할 수 있는 구절에 관해 다음과 같은 헤겔의 언급을 강조하고 있다. “단순히 개념의 부정적이고 추상적인 형식에만 머물러 있든가, 아니면 개념을 자신의 참된 본성에 따라서 긍정적인 것임과 동시에 구체적인 것으로서 파악하는가는 우리들의 행동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자유를 필연성의 추상적 대립물로서 고찰한다면, 그것은 자유라는 한갓 오성적 개념이지만, 자유라는 참된 이성적 개념은 이에 반해 필연성을 지양된 것으로서 자기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W. I. 레닌, 앞의 책, p. 132.)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식의 내적 운동이란 의미에서 변증법적 전개는 의식이 발달로 나아가는 과정인데, 그 질적 향상의 기로에서 인식 주체는 머물러 있든지, 앞으로 나아가든지에 관해서 ‘선택할 자유’를 갖는다. 당연하게도, ‘선택할 자유’는 이러한 첨예한 변증법적 전개 내에서만 생성된다. 소외된 존재는 변증법적 사유-실천을 하지 않는 존재이며, 자의적으로 그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인식하고 행하길 거부한 존재이다.
49 마찬가지로 엥엘스는 자유에 관해 ≪반듀링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헤겔은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맨 처음 올바르게 설명한 사람이다. 헤겔에게 있어 자유란 필연성에 대한 통찰이었다. … 의지[Wille]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에 관한 지식을 갖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하다. …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많은 결단가능성 가운데서 얼핏 보아 임의로 선택하는 것과 같은 무지에 입각한 불확실성은, 바로 그렇기에 자기가 지배해야 할 대상에 의하여 도리어 지배당한다는 점에서 자기의 부자유를 증명하는 것이다. 자유는 자기필연성(Naturnotwendigkeit)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반듀링론≫(1877-1878), 김민석 역, 새길, 1988, pp. 125-126.)
50 꼬프닌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이 과정에서] 지식은 경험적 지식에 고유한 구체성을 상실하지만 그 대신 감각소여의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획득한다. 실제 모든 추상에서는 이와 같은 뛰어넘음이 끝없이 계속된다. … 이때 추상은 감각소여의 한계를 뛰어넘음에 의하여 객관과 그 내적 운동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자 노력한다.” (코프닌, 앞의 책, pp. 204-205.) 자의성이 역할이 구체적으로, 동시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감각에서 지각으로, 지각에서 오성으로, 오성에서 사고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전 단계의 의식이, 그보다 발전한 의식으로 ‘뛰어넘음’이 추동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를 ‘가능성’이라고 표현한다.
51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1844), 강유원 역, 이론과실천, 2006, p. 200.
52 일부 편향적인 견해는 피착취계급의 혁명 활동을 인식론적 층위에서 다루길 거부하고, 현장주의적 의미에서 ‘실천’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러한 태도는 마오쩌뚱이 비판했던 바와 정확히 일치한 논지 위에서 맹동에 불과한 것이며, ‘이론적 사고’만 강조하는 것과 똑같이 공허하다. ‘이론적 사고 없는 실천’은 맹동에 불과한 것이다. 실천은 이론적 사고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혁명 활동에 대한 인식론적 분석은 필수적이다.
53 감수성은 의식 전 단계로서, 생리학, 신경학적 차원에서 무조건-반사, 조건-반사 반응을 총칭한다. 헤겔은 ≪철학 강요≫에서 감수성을 유기체적 외부의 힘을 수용하는 수용성(Rezeptivität)과, 그것을 통해 새로운 힘을 산출하는 반응력(Irritabilität)으로 설명하였으며, 이것을 인간의 육적(肉的) 작용, 신경계의 작용이라고 하였다: “감수성의 계(系)는 또 흥분성의 계기로, 곧 뇌수와 다시금 그 뇌수계의 신경으로의 새로운 분열로서 자기를 규정한다. 이 신경은 또한 골계와 같이 내부를 향해서는 감각 신경이요, 외부를 향해서는 운동 신경이다.” (헤겔, “354절”, ≪철학 강요≫, 서동익 역, 을유문화사, 1998.)
54 W. I. 레닌, 앞의 책, pp. 61-62.
55 G. W. F. 헤겔, 앞의 책, pp. 82-83.
56 특정 시공간에서 보편화/개념화 작업이 일어나고, 실제 그러한 ‘보편화된 대상’을 통해 실재를 설명하려고 해도,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은 ‘다른 인식 주체의 보편화된 대상(즉, 대타존재)’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보편화된 대상’은 그 탄생부터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57 틈에 독자존재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그 틈에 들어갈 독자존재가 생성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생성 과정은 감각적 확신-지각에서 보편화된 대상이 생겨나고, 그것이 다시 앞서 서술한 독자존재화가 되는 과정과 같다. 그렇다면, 틈이 독자존재로 메워져서, 다른 독자존재로서 소재와 통일된다면, 그것은 다시 하나의 독자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편화된 대상으로서 성립된 독자존재는 자기 운동을 해 나간다.
58 감각 분류(오감으로 대표할 수 있는), 물리 법칙의 여러 구분, 생물학에서 유(類)와 종(種)의 분류 등은 오성의 결과물인데, 오성은 언명적 의미에서 구분을 한다. 이는 개념의 차별화에 당위성을 부여하지만, 객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가령, 생물학에서 유종 구분은 사실 진리를 밝힌다는 차원에서 무의미한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보편적으로 언명(예를 들어 두삭동물문, 척추동물문 등의)으로서 차이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핵생물이든 원핵생물이든, 그것이 갖는 차이는 언명적 분류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객관 세계에 실재하는 DNA의 염기 서열과 양적유전학적 차이에 근거한다. 마찬가지로 촉각과 미각은 언명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전기 신호의 작용 경로에 따른 것이다. 오성은 언명적 차이로서 개념의 자기 운동들을 구분하지만, 실제 내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의 구분은 아니란 점에서 사고(이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59 W. I. 레닌, 앞의 책, p. 55.
60 같은 책, pp. 94-95.
61 뒤에 다룰 오성에 관해서, 레닌이 ≪철학 노트≫에서 보여 준 오성에 관한 요약은, 그가 긍정하는 개념의 운동에 속하는 내용이다.
62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그 내용을 규정하고, 그것이 필연을 이루는 것이 된다는 의미에서 ‘개념적 필연성’을 말한다.
63 W. I. 레닌, 앞의 책, p. 225.
64 관련된 헤겔 구절은 정확히는 감각 자료에 대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형식 논리학적 전개를 비판한 것이다.
65 W. I. 레닌, 앞의 책, pp. 119-120.
66 같은 책, p. 90.
67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마흐의 “우리가 자연 속에서 관찰하는 것은 비록 이해되지 못하고 분석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표상에 새겨지며 그리하여 이들 표상은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뚜렷한(stärksten) 특징에 있어서 자연 과정을 모방한다(nachahmen). 우리는 이들 경험 속에서 언제나 우리 수중에 있는 보물(Schatz)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언급에 대해 “이러한 의견을 일관되게 견지했다면, 그는 인류를 관념론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pp. 200-201.)
68 G. W. F. 헤겔, 앞의 책, p. 111.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4개의 댓글

  • 철학의 역사 초기의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물질을 정태적 타성태에 젖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적으셨는데,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는 대표적인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탈레스는 물을 온갖현상적 다수성의 기저에 깔린 하나의 근본원리 혹은 원질이라고 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이것과는 별도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자연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이해는 ‘물활론'(物活論)적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비롯하여 이오니아 학파 사람들은 자연을 스스로 생기하는 생명으로 바라봤습니다. 이런 선존재론적 이해/판단은 그들이 그것의 타당성을 엄밀히 논증을 했다기 보다, 그들의 학적 활동의 밑바탕에 깔려 있던 막연한 이해/판단이었습니다.

    이 대립물의 전화가 곧 발전이다.[14]

    죄송하지만 이 부분에 관련하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저 맥락에서 ‘발전’이란 술어가 쓰인다는 게 저에게는 조금 맘에 걸립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일반적으로 발전이라는 개념의 내포는, 내적 분화의 복잡화/풍부화, 체계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새로운 질(적 차원)의 출현 등인데, 이것은 이것대로 차치하고라도, 한동백 님께서 사용하신 발전이란 개념은 헤겔에 의해 설명된 발전 개념과도 합치되지 않습니다. 헤겔은 발전이란 개념을 「개념의 논리학」에서 자세히 설명하는데, 헤겔에게 있어서 개념은 세 계기로 나누어지며, 몰구분적 보편성의 자기구분을 통하여, 다시말해 스스로를 부정하여, 그 속에서 스스로 특수성들로 분화되어 나가며, 이러한 분화상에서 다시 자체내로 반성복귀하여 개별성으로, 내적으로 분화된 총체성으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으로 성장전화해 나가는 과정을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오는 것이 보편성인데, 이것은 자기자신과의 무한한 동등성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태적으로 즉자적 상태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특수성으로 분화되어 나가는 이유는 개념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부정성으로서의 주체성을 가진 보편성은 자기로부터 자기를 구분하여 다수의 특수성들로 분화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특수성들은, 추풍낙엽처럼, 봄바람에 벚꽃잎 흩날리는 것처럼 상호 무관심한 이접적 다수성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 보편성이 혼탁함없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의 통일성 속에 있는 분지들이며, 이러한 분화가 부정되어 하나의 통일성 속으로 총체화되면 그것이 바로 개별성입니다. 하지만 개념의 세 계기(보편성-특수성-개별성) 모두 총체성이므로 개별성은 총체성으로 이루어진 총체성이라고, 구체적 총체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헤겔에 따르면 발전이라는 것은 즉자적 보편성의 자기구분과 자기동일화 과정 전체입니다. 이 과정 전체에서 보편성은 타자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므로, 개념의 발전전개는 자유로운 자기전개이기도 하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발전’개념은 대략 위에 제가 설명한 바와 같은데, 한동백 님께서 쓰신 글에서 더구나 저 맥락에서 발전이라는 술어가 나오니, 살짝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비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맘도 있고, 제 의견을 내고 싶은 맘도 있고 해서 댓글 적어봤어요. 그러니 노여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 한동백 님의 글이 너무 길어서 좀 이따가 차근차근 읽어보고, 또 제 의견을 댓글로 말씀드릴게요… 위의 댓글이 끝이 아닙니다^^

    • 그리고 대립물의 전화가 발전이 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발전은 대논리학 제 3권에 나오는 반면, 대립물의 변증법적 상호이행은, 제1권에서 다뤄지기 때문이지요. 일이 다로, 다가 일로 이행하거나,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이 어떤 것으로 이행하는 게 대립물의 상호 전화인데, 그런데 이게 발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발전이라는건, 위의 댓글에서 제가 언급했듯이 부정성의 자기관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반면, 대립물의 상호이행은, 순수존재에 순수무(부정성)가 외적인 부정적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제1부 존재론에서는 부정성이 출현하기는해도 이것은 자기자신과 관계 맺는 부정성이라기보다, 존재에 외적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순수 존재)에 ‘타격’을 가하는 그런 식의 부정성입니다. 따라서 ‘대립물의 전화’는 발전이 아니며, 오히려 현상, 다시 말해 본질에 의해 매개되는 현상적 층위에서 일어나는 운동입니다.

    • 다시 말하며,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라는 자연 과학의 영역 내 소영역에서 각자 적용되는 모순의 네 가지 기본 법칙이 갖는 실질적인 내용은, 나머지 소영역에 일규(一揆)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20]

      라고 말씀하셨는데,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자기운동하는 물질적 총체성으로서의 자연은, 그 속에 다수의 존재 층위들로 특수화되어 있는데, 비록 변증법적 유물론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원리들이 그것들에 관철되기는 하지만, 일괄적으로, 천편일률적으로 관철되는 것은 아니고,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이 특수화되면서 관철되기 때문에, 말씀하신대로 어느 하나의 영역(가령, 물리학에서의 기계적인 위치이동)에서 타당한 합법칙성이 일규적으로(저는 이 말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어려운 말이네요…) 생물학의 영역에도 타당하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옳습니다. 동의합니다.

    • 감각-지각-표상-오성-사유(이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의식의 변증법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레닌의 「경험비판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언급되지 않지만, 주체쪽에서의 종합활동에 대하여 일언반구 언급조차 되지 않는 점입니다. 주체 쪽에서의 능동적인 종합활동을 추가적으로 언급한다고해서,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물질(철학적 범주로서의 물질)의 선차성이 부인되는게 아닌데도 말이죠. 종합활동을 승인한다고 해도 반영이론에 하등 타격될 것이 없는데, 기이하게도 맑스주의 문헌을 읽어보면, 종합활동에 대해서 언급하는 논자들을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종합활동이 전제가 안되면, 아무리 물질이 객관적으로 있어도 안정된 상이 형성이 안됩니다. 탈형식화된 감성질료들의 무질서하고 혼란된 표상만이 주체에게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칸트처럼 통각의 근원적 종합활동에 현상적 다수성의 합법칙적 연관(=자연)이 의존해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결론은 주관적 관념론일 뿐입니다.

    • 글쓴이입니다. 세심한 지적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공부하여 발전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비판하신 부분에 대해서, 절반 정도 동의합니다. 제가 이 긴 글을 쓰면서 거친 사고 과정을 조금 더 면밀하게 적어야 할 것 같아 씁니다.

      1. 물질을 정태적 타성태로 규정하지 않은 사례로서, 헤라클레이토스 및 초기 스토아 학파의 몇 가지 입장을 들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뮬론사를 본다면, 그러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았기에 일반론적 입장에서 적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는 그 철학을 원용한 적지 않은 이론가들이 객관적 관념론의 성격을 보였다는 점에서 고려할 게 많은 인물인데, 헤라클레이토스와 유물론적 인식의 연관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면 본 문서의 주제와 맞지 않을 것 같아 생략하였습니다.

      2. 탈레스 및 그의 직계 제자들이 물질에 대해 물활론적인 입장을 가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발생론적 유물론 및 자연발생론적 변증법은 현재의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 같은 경우는 근원의 운동을 통한 변화로서, 새로운 것으로의 전화를 말하지 않았으며, 그저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근원자가 산출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낙시만드로스는 근원이 영원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정량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생성과 소멸로 대표되는 변화태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가 상정한 근원이 운동은 하지만, 그것은 한계 있는 한정량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정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이 부분을 언급할 때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 학파에 속한 학자들이 근원의 운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운동은 그에게 있어서 한정적이기도 한 것이라 선술한 것처럼 적었습니다. 이 부분은 선생님이 지적해주셔서 독자들에게 주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점입니다.

    • 3.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및 부정의 부정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대립물의 전화에 관한 선생님의 설명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대립물의 전화는 절대자의 자기복귀 속에서도, 동시에 의식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사용됩니다. 그러한 변증법의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절대정신의 부정의 부정을 통한 자기복귀로서, 존재(피규정의 시작점으로서 첫 번째 부정에 의해 규정을 받는)로서 출발한 절대자가 그것 자체가 갖는 본래의 순수성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발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제2권에서는 그러한 의문을 지울 수 없는 수많은 내용이 나옵니다. (부정의 부정을 통한, 본질에 의한 규정을 받는 존재의 풍부화 등의 측면이 한편으로는 설명되지만, 사실 동시에 헤겔은 정신의 순수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정의 부정에 의해 자기복귀한 절대자에 대해서, 그 순수성(다른 말로 불변)을 고집하려고 합니다)

      절대정신의 영원성 및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 그리고 헤겔이 주장한 자기의식 따위와 관련된 서술은 맑스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에 대한 소외 외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맑스는 그러한 두 개념을 버렸는데, 이는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발전은 그러한 헤겔의 입장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슈틸러는 대립물의 전화를 말하면서(인용된 서적 70페이지부터 78페이지까지) 선생님이 말한 피규정 관계를 모두 다룹니다. 선생님이 말하신 ‘내적 분화의 복잡화/풍부화, 체계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새로운 질(적 차원)의 출현’ 역시 대립물의 전화 부분에서 다루죠. 마지막 ‘새로운 질의 출현’은 제가 언급한 부분이기에 생략하도록 하겠으며, 내적 분화의 복잡화와 풍부화, 그리고 체계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와 관련하여, 레닌이 말한 대립물의 전화에 관해 ‘현상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말하겠습니다.

    • 일단 대립물의 전화는 현상의 위치 교환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이 위치 교환 과정은 인간 활동과 필연적으로 매개되는데, 인간은 필연적으로 생산 활동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맑스가 변증법적 발전이란 개념에서 헤겔과 달리, 인간의 욕구와 생산 활동에 얼마나 많은 방점을 찍었는지에 대해선,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에서, 그러한 활동과 매개가 되어 위치 교환 후, 다시 복귀하는 과정에서 내적 분화의 복잡화와 풍부화가 이루어집니다. 대립항의 상호 피규정을 통하여, 외적 영향을 내포하게 되고 그로 인해 내용의 풍부화를 가져왔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가능성으로서의 사회주의로, 그로부터 피규정을 통해 다시 현실성으로서의 사회주의로,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가능성이라는 결론으로서, 위치 교환을 통해 더욱 발전된 사회주의의 성립 내에, 지양된 자본주의, 그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내포한 형태로 풍부화되는 과정도 역시 대립물의 전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선생님의 첫 댓글 세 번째 문단의 내용과 충분히 호환되어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극복되지 못했던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순이 극복되면서, 그것의 극복을 통해 질적 새로운 모순 관계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돌아와서, 제가 “이 대립물의 전화가 곧 발전”이라는 서술했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 전에 언급된 사례 역시 대립물의 전화를 통한 발전이며, 위 설명대로라면 사실 대립물의 전화를 발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성에 따라 인간 생산 활동의 다양화, 복잡화, 그리고 생산량의 증대라는 것과 맞물리면서 발전의 경향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기 떄문입니다. 저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순수한 자기복귀로서, 발전적 측면이 거세된 대립물의 전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화를 일면적으로 볼 때 후퇴를 표현할 수 있지만(그래서 제가 ‘이 대립물의 전화가 발전’이라고 하여 앞에 나열된 것을 특정한 것입니다), 실은, 그것은 다시 발전적 계기로서 설명되어야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이라는 필연성이 배태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발전이 다시 후퇴의 계기로도 된다는 점에서, 이를 두고 “후퇴만 있다.”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래 공산주의, 즉 원시공산제의 피규정을 통해 풍부화된 규정으로서의 미래 공산주의를 생각한다면,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지점입니다. 원시공산제가 대립의 주어로서, 즉 이 대립 관계의 존재(부정을 통해 규정받는 것)로서 설정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존재를 통해 본다면 궁극적으로는 대립물의 전화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그리하여 스탈린 시기에 부정의 부정의가 모순의 기본 법칙 중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 또한 그러한 것과 관련된 이론적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전 이 해석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대립물의 전화를 통해 ‘체계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도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선생님의 입장에서 어렵지 않게 생각해내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선생님이 현상적 층위에 관해 언급하신 것은 인간의 생산 활동과 관련해서 논해지는 맑스의 변증법에 대해 제가 쓴 글을 보시면 충분히 이해되시리라고 믿습니다.

    • 선생님의 마지막 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바로 그 주관의 역할을 규명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맑스-레닌주의의 유물 변증법 체계에서 주관의 종합활동을 구체화한다고 하여 그것이 관념론으로 될 것이란 비판은 말 그대로 유물 변증법을 기계론으로 떨어뜨리는 일 외에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한다고 해서, 그 종착지가 표상의 건조한 나열(칸트적 질료-[감각-오성범주]-표상의 체계 속에서) 속에 잠긴다고는 생각지는 않습니다.

      • 기분이 좋지 않으셨을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잘 것 없는 제 의견에 대하여 정성스러이 길게 응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한동백 님께서 많은 글을 써주십시오!! 많이 배워갈 것 같습니다

      • 저도 선생님의 글을 보고, 글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실 부정의 부정, 대립물의 전화, 발전이라는 하나의 고리와 관련된 학설(발전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성립될 수 있다 할 수 있는가? 대립물의 전화가 발전의 일반성을 표하는데 충분한가? 아니면 부정의 부정의를 따로 특수하게 고찰해야 함이 필연적이며 동시에 필수적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것)은 유물 변증법 내에서도 상당히 갈리는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련에서 그 해석점은 제가 파악한 것만 해도 최소 다섯 가지이며, 중국은 두 가지, 동독은 세 가지 정도 됩니다. 중복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아홉 가지 정도의 해석, 이견이 있으며, 결국 이 모든 학설을 비판적으로 대한 후, 발전적으로 종합해 나가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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