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상)

 

이오씨프 쓰딸린(Иосиф Сталин)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차례]

1) 맑스주의 변증법적 방법

2)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3) 역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은 맑스-레닌주의 당의 세계관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 현상에 대한 접근 즉 연구 방법과 인식 방법이 변증법적이고,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 즉 이해와 이론이 유물론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를 발전시켜 사회생활을 연구한 것이다. 즉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를 사회의 생활 현상과 사회 및 역사 연구에 응용한 것이다.

 

맑스와 엥엘스는 자신들의 변증법적 방법을 언급하면서 변증법의 기본 특징을 정식화한 철학자 헤겔의 말을 많이 인용했다. 그러나 이것이 맑스와 엥엘스의 변증법이 헤겔의 변증법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맑스와 엥엘스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합리적 핵심”만을 취하고, 그 관념론적 껍데기는 버렸다. 나아가 변증법을 더욱 발전시켜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형식을 부여했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헤겔과 다를 뿐만 아니라 정반대이다. 헤겔에게 있어, … 사고 과정은 현실 세계의 데미우르고스(창조주)이다. 헤겔은 이 사고 과정을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독립적인 주체로까지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현실 세계는 단지 ‘이념’의 외적 현상 형태로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이념이란 물질세계를 인간 정신이 반영하여 사고 형태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칼 맑스, ≪자본론≫ 제1권 독일어판 제2판 서문.)

 

맑스와 엥엘스는 자신들의 유물론을 설명할 때, 유물론의 권위를 회복한 철학자 포이에르바흐를 많이 인용했다. 그러나 이것이 맑스와 엥엘스의 유물론이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맑스와 엥엘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에서 “기본 핵심”을 취하고, 관념적이며 종교-윤리적 불순물을 버렸다. 나아가 유물론을 과학적-철학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아시다시피 포이에르바흐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자이지만 유물론이라는 이름에는 반대했다. 엥엘스는 포이에르바흐가 “유물론에 기초해 있지만 … 아직 낡은 관념론의 족쇄에 묶여 있었다”며 “포이에르바흐의 종교 철학과 윤리학을 접하는 순간 그의 진정한 관념론이 드러난다”고 누차 말했다. (맑스ㆍ엥엘스, 제14권, pp. 652-54.)

 

변증법은 대화와 토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dialego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에 변증법은 토론 상대방의 주장에서 모순을 드러내고 이 모순의 극복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기술이었다. 일부 고대 철학자들은 사고 속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과 상반된 견해들이 논쟁하는 것을 진리 발견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후에 자연 현상으로 확장되어 자연을 이해하는 변증법적 방법이 된다. 이 방법은 자연 현상을 영원히 운동하며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고, 자연의 발전을 자연에 있는 모순들이 발전한 결과로, 자연에 있는 대립되는 힘들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간주했다.

 

변증법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과 정반대이다.

 

 

1) 맑스주의 변증법적 방법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ㄱ) 형이상학과는 반대로, 변증법은 자연을 서로 분리되고, 고립되고, 의존하지 않는 사물과 현상들의 우연한 집합으로 보지 않는다. 자연을 사물과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되고, 의존하고, 제약하며 연결된 통일적인 총체로 본다.

 

따라서 변증법적 방법은 자연 현상을 주위 현상과 분리하여 그 자체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자연 영역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도 주변 조건과 연관 없이 분리된 채 고찰한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로 어떤 현상이든 주위 현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주위 현상에 의해 영향받는다고 생각하면 현상을 이해할 수 있고 원인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ㄴ) 형이상학과는 반대로, 변증법은 자연이 정지와 부동, 정체와 불변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 끊임없는 갱신과 발전의 상태에 있으며 무엇인가는 항상 생성 성장하고 다른 무엇인가는 항상 쇠락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방법은 현상을 상호 연관되고 상호 의존하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운동, 변화, 발전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존재의 생성, 소멸의 관점에서도 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변증법적 방법에서 당장은 확고해 보이지만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것보다는 비록 당장은 확고해 보이지 않지만 생성 발전하고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유력한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방법에서 생성 발전하고 있는 것만이 무적이기 때문이다.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자연은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까지, 모래알에서 태양에 이르기까지, 원생생물(원시적인 살아 있는 세포―쓰딸린)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원한 생성과 소멸, 부단한 흐름, 쉼 없는 운동과 변화 속에 존재한다.” (같은 책, p. 484.)

 

그러므로 엥엘스는 변증법이란 “물질과 물질의 지각 이미지를 본질적으로 물질의 상호 연관 속에서, 연쇄 속에서, 운동 속에서 그리고 생성과 소멸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맑스ㆍ엥엘스, 제14권, p. 23.)

 

(ㄷ) 형이상학과는 반대로, 변증법은 발전 과정을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단순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미한, 눈에 보이지 않는 양적 변화가 뚜렷한 변화, 근본적인 변화, 질적 변화로 발전한다고 본다. 여기서 질적 변화는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급속히 그리고 갑자기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비약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점진적인 양적 변화가 축적되어 일어난 자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방법은 발전 과정을 이미 발생한 것의 단순한 반복이나 순환 운동이 아니라 전진하고 상승하는 운동으로, 낡은 질적 상태에서 새로운 질적 상태로의 전환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발전으로 응당 이해하고 있다.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은 변증법의 검증 기준이다. 그리고 현대 자연 과학은 이러한 검증을 위해 매우 풍부하고 매일 증진된 자료를 제공하여 결국 자연의 변화는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변증법적이라는 것, 그리고 변화 없이 획일적이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 운동이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역사를 경과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는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술은 당연히 다윈에게서 나왔다. 그는 오늘날의 모든 유기체 세계 즉 식물과 동물, 따라서 인간도 역시 수백만 년 동안 진행된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이로써 형이상학적 자연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같은 책, p. 23.)

 

변증법적 발전은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하면서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리학에서 … 모든 변화는 양에서 질로 전환하는 것으로, 물체에 고유한 또는 부가된 어떤 운동 형태가 양적으로 변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물의 온도는 처음에 액체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액체 상태에 있는 물의 온도가 오르거나 내리면 응집 상태가 변하는 순간이 오고 물은 증기나 얼음으로 전환한다. … 백금선이 빛을 내려면 일정한 최소 전류가 필요하며, 모든 금속은 녹는 온도가 있다. 우리가 필요한 온도를 얻기 위한 수단이 있다면 주어진 압력하에서 모든 액체의 고유한 어는점과 끓는점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기체는 적절한 압력과 냉각에 의해 액체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 임계점이 있다. … 물리학에서 소위 상수(한 상태가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지점―쓰딸린)는 대부분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마디점을 이르는 명칭에 불과하다. 양적 변동의 증감은 주어진 물체 상태의 질적 변화를 야기하고, 그 결과 양이 질로 전환한다.” (같은 책, pp. 527-28.)

 

엥엘스는 화학으로 넘어가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화학은 물체의 양적 구성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질적 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헤겔도 이미 알고 있었다. … 산소를 보자. 한 분자에 통상적인 2개 대신에 3개의 원자가 결합하면 오존이 된다. 오존은 냄새와 반응에서 일반 산소와 전혀 다른 물질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산소가 질소나 황과 각기 다른 비율로 결합하면 이러한 각각의 화합물은 다른 화합물들과 질적으로 다른 물체가 된다.” (같은 책, p. 528.)

 

끝으로, 엥엘스는 뒤링이 헤겔의 가치 있는 모든 것에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암암리에 헤겔의 무감각 세계에서 감각 세계로의 이행, 무기물 왕국에서 유기 생명체 왕국으로의 이행은 새로운 상태로의 비약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표절했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확히 헤겔의 한도(measure, Maβ) 관계의 마디선이다. 어떤 특정한 마디점에서 순전히 양적 증감이 질적 비약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물을 가열하거나 냉각할 경우 정상 압력에서 끓는점과 어는점이 마디점이다. 이 마디점에서 새로운 응집 상태로의 비약이 일어난다. 따라서 양이 질로 전환된다.” (같은 책, pp. 45-46.)

 

(ㄹ) 형이상학과는 반대로, 변증법은 자연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 고유한 내적 모순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모두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 과거와 미래, 쇠퇴하는 것과 발전하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립물의 투쟁 즉 낡은 것과 새 것, 죽어 가는 것과 태어나는 것, 소멸하고 있는 것과 발전하고 있는 것 사이의 투쟁은 발전과정의 내적 내용,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환이라는 내적 내용을 이룬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방법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의 발전 과정을 현상의 조화로운 전개가 아니라 사물과 현상에 고유한 모순의 발현으로, 이러한 모순에 기초하여 작용하는 대립적 경향의 “투쟁”으로 본다.

 

레닌은 “본래의 의미에서 변증법은 대상의 본질 자체 내에 있는 모순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했다. (레닌, ≪철학 노트≫, p. 263.)

 

그리고 계속하여,

 

“발전이란 대립물의 ‘투쟁’이다”라고 했다. (레닌, 제13권, p. 301.)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맑스주의 변증법적 방법의 주요 특징이다.

 

변증법적 방법의 원리를 사회생활과 사회 역사 연구에 확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이러한 원리를 사회 역사와 프롤레타리아 당의 실천 활동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세계에 고립된 현상이 없고 모든 현상이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이라면 역사의 모든 사회 체제와 사회 운동은 역사가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영원한 정의”나 다른 선입관의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안 되고 그 체제와 그 사회 운동을 낳고 그와 연결된 조건의 관점에서 평가해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노예제는 현대적 조건에서는 몰상식적이고 어리석고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원시 공산제가 해체되어 가는 조건에서 노예제는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원시 공산제의 발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의 요구는 1905년 러시아와 같이 짜르 체제와 부르주아 사회가 현존하는 조건에서 매우 정상적이고 정당한 혁명적 요구였다. 왜냐하면 당시에 부르주아 공화국은 진일보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쏘련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의 요구는 무의미하고 반혁명적인 요구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공화국은 쏘비에뜨 공화국에 대한 퇴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조건, 시간 및 장소에 달려 있다.

 

사회 현상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접근 없이는 역사 과학은 존재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접근만이 역사 과학이 우연적 사건들로 뒤죽박죽되고 터무니없는 오류로 점철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세계가 끊임없이 운동하며 발전하고 있다면, 즉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은 성장하는 것이 발전 법칙이라면, “고정 불변의” 사회 체제, 사적 소유와 착취의 “영원한 원리”, 농민은 지주에게,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예속된다는 “영원한 관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때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 체제를 교체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로 교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향을 비록 현재는 지배적인 세력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사회 계층에 의거해서는 안 되고, 비록 현재는 지배적인 세력이 아니라도 발전하고 있으며 미래가 있는 사회 계층에 기반해야 한다.

 

지난 세기 80년대, 맑스주의자들이 나로드니끼와 투쟁하던 시기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구의 미미한 소수에 불과했다. 반면에 개인농은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발전하고 있었다. 반면에 계급으로서의 농민은 분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맑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향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후 미미한 세력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볼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

 

나아가, 느린 양적 변화가 급속하고 돌연한 질적 변화로 바뀌는 것이 발전 법칙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이 수행하는 혁명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이 분명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노동계급의 해방은 느린 변화나 개량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자본주의 체제의 질적 변화, 혁명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런즉 정치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개량주의자가 아니라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발전이 내적 모순의 폭발, 즉 모순에 기초한 적대 세력들의 충돌을 통해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 극복되기 위해 진행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은 아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덮어 둘 것이 아니라 폭로하고 해결해야 하며, 계급 투쟁을 멈추지 말고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

 

정치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개량주의 정책이 아니라 비타협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책을 추구해야 하며, “자본주의가 점차 사회주의로 성장한다”는 타협 정책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회생활과 사회 역사에 적용될 때의 맑스주의 변증법적 방법이다.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관념론과는 정반대이다.

 

 

2)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ㄱ) 세계를 “절대 이념”, “세계정신”, “의식”의 체현이라고 보는 관념론과는 반대로, 맑스의 철학적 유물론은 세계는 본질적으로 물질이며, 세계의 다양한 현상은 운동하는 물질의 각이한 형태에 다름 아니며, 변증법적 방법에 의해 밝혀진 현상의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은 운동하는 물질의 발전 법칙이라고 본다. 그리고 세계는 물질의 운동 법칙에 따라 발전하기에 “세계정신”은 필요 없다고 여긴다.

 

엥엘스는 말했다.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은 어떤 외부 요소의 추가 없이 자연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맑스ㆍ엥엘스, 제14권, p. 651.)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세상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일체로서, 어떤 신이나 그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며, 살아 있는 불꽃으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체계적으로 타오르고 체계적으로 꺼질 것이다”라는 유물론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레닌은 이 유물론적 관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에 대한 절묘한 설명이다”라고 했다. (레닌, ≪철학 노트≫, p. 318.)

 

(ㄴ) 우리의 의식만이 실제로 존재하고 물질세계, 존재, 자연은 단지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 우리의 감각(sensations), 관념(ideas)과 지각(perceptions)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관념론과는 반대로,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은 물질, 자연, 존재가 우리의 의식 외부에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한다. 물질은 감각, 관념, 의식의 원천이기 때문에 1차적이며, 의식은 물질의 반영, 존재의 반영이기 때문에 2차적이고 파생적이다. 사유는 고도로 발전된 물질, 즉 두뇌의 산물이며, 두뇌는 사유하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중대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유를 물질에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문제,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 문제는 철학 전체의 최고 문제이다. …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하는가에 따라 두 개의 큰 진영으로 갈라졌다. 자연의 기초를 정신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하였다. 자연이 기초라고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여러 학파에 속한다.” (맑스, ≪선집≫ 제1권, p. 329.)

 

그리고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우리가 속한 세계가 유일한 실재(reality)이다. …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아무리 초감각적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 육체적 기관인 두뇌의 산물이다. 물질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물질의 최고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같은 책, p. 332.)

 

물질과 사유에 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유는 생각하는 물질에서 분리할 수 없다. 물질은 모든 변화의 주체이다.” (같은 책, p. 302.)

 

레닌은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물론은 일반적으로 존재(물질)를 인간의 의식, 감각, 경험에서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 의식은 단지 존재의 반영이며, 기껏해야 근사적으로만 참된(충분한, 완전히 정확한) 반영일 뿐이다.” (레닌, 제13권, pp. 266-67.)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질은 우리의 감각 기관에 작용하여 감각을 생산한다. 물질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 물질, 자연, 존재, 물리적인 것이 1차적인 것이고, 정신, 의식, 심리적인 것은 2차적인 것이다.” (같은 책, pp. 119-20.)

 

“세계에 대한 묘사는 어떻게 물질이 운동하며 어떻게 ‘물질이 사유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같은 책, p. 288.)

 

“두뇌는 사유하는 기관이다.” (같은 책, p. 125.)

 

(ㄷ) 관념론은 세계와 그 법칙을 알 수 없다고 하고, 우리의 지식은 근거가 없다고 믿고, 객관적 진리를 부정한다. 그리고 세계는 과학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물자체”로 꽉 차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은 세계와 그 법칙은 충분히 알 수 있으며, 경험과 실천으로 검증된 자연법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진정한 객관적 진리로서 타당성을 가진 지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계에는 알 수 없는 것은 없고, 단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과학과 실천의 결과로 알려지고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는 알 수 없으며, 그리고 알 수 없는 “물자체”가 있다는 칸트 및 기타 관념론자들의 명제를 비판하고, 우리의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라는 잘 알려진 유물론적 명제를 옹호하면서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철학적 망상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논박은 다른 모든 철학적 망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천, 즉 실험과 산업이다. 우리가 자연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즉 우리 스스로 자연을 변화시키고 자연의 조건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우리의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면, 칸트의 이해할 수 없는 “물자체”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동식물의 체내에서 형성되는 각종 화학 물질도 유기 화학이 그것들을 차례로 생산하기 시작할 때까지 여전히 “물자체”로 남아 있었다. 화학 물질이 생산되기 시작하자 “물자체”는 우리를 위한 물질로 되었다. 꼭두서니의 색소인 알리자린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들판에서 꼭두서니를 재배하느라 애먹을 필요가 없다. 이제 훨씬 값싸고 손쉽게 콜타르에서 생산한다. 코페르니쿠스 태양계는 수많은 지지와 유리한 기회에도 불구하고 300년 동안 가설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르베리에(Leverrier)가 이 씨스템이 제공하는 데이타를 사용하여 미지의 행성이 존재해야 할 필연성을 증명하고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이 행성이 반드시 자리할 위치를 계산했다. 그리고 갈레(Galle)가 실제로 그 행성을 발견하였을 때 비로소 코페르니쿠스 태양계는 증명되었다.” (맑스, ≪선집≫ 제1권, p. 330.)

 

레닌은 보그다노프(Bogdanov), 바자로프(Bazarov), 유쉬께비치(Yushkevich)와 기타 마하의 추종자들을 신앙주의(과학보다 믿음을 택하는 반동 이론)라고 규탄하고 자연법칙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며 과학 법칙은 객관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유물론의 잘 알려진 명제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의 신앙주의는 결코 과학을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과학의 ‘과장된 주장’, 정확히 말해서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장을 거부할 뿐이다. 만약 객관적 진리가 (유물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한다면, 즉 인간의 ‘경험’ 안에 외부 세계를 반영하는 자연 과학이 단지 객관적 진리를 줄 능력이 있다면 모든 신앙주의는 완벽하게 논박된다.” (레닌, 제13권, p. 102.)

 

간단히 말해 이것이 맑스주의 철학적 유물론의 특징이다.

 

철학적 유물론의 원리들을 사회생활과 사회 역사에 확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러한 원리를 사회 역사와 프롤레타리아 당의 실천 활동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만약 자연의 현상 관계와 상호 의존이 자연의 발전 법칙이라면, 결과적으로 사회생활의 현상 관계와 상호 의존도 사회의 발전 법칙이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사회생활과 사회 역사는 “우연적 사건들”의 집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 역사는 우연이 아닌 법칙에 따라 발전하며, 사회 역사에 대한 연구는 과학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당의 실천 활동은 “뛰어난 개인”의 선한 의도, “이성”의 명령, “보편적 도덕” 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발전 법칙과 이 법칙에 대한 연구에 근거해야 한다.

 

나아가, 만약 세계를 알 수 있고 자연의 발전 법칙에 대한 지식이 진정한 지식으로 타당한 객관적 진리라면, 사회생활과 사회 발전도 알 수 있고 사회의 발전 법칙에 관한 과학적 지식도 진정한 지식으로 타당한 객관적 진리가 된다.

 

사회 역사 과학은 사회의 생활 현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생물학과 같은 정밀과학이 될 수 있고, 사회의 발전 법칙은 실천적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당은 우연한 동기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 법칙과 이 법칙의 실천적 결론에 따라 실천 활동을 해야 한다.

 

사회주의가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공상에서 과학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실천 활동, 이론과 실천의 결합 통일은 프롤레타리아 당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만약 자연, 존재, 물질세계가 1차적이고 의식, 사유는 2차적 파생적이라면, 만약 물질세계가 인간의 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인 반면 의식은 이 객관적 실재의 반영이라면, 결과적으로 사회에서도 물질적 삶과 존재는 1차적이고 정신적 삶은 2차적 파생적이 된다. 즉 사회에서 물질적 삶은 인간의 의지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인 반면 정신적 삶은 이 객관적 실재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다.

 

사회에서 정신적 삶을 이루는 원천, 즉 사회사상, 사회 이론, 정치 견해와 정치 제도의 기원은 사상, 이론, 견해와 정치 제도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물질적 삶의 조건에서, 즉 이 사상, 이론, 견해 등이 반영한 사회적 존재에서 찾아야 한다.

 

사회 역사가 다른 시대에는, 다른 사회사상, 이론, 견해, 정치 제도가 나타난다. 우리는 노예제에서 노예제에 맞는 사회사상, 이론, 견해, 정치적 제도와 마주한다. 마찬가지로 봉건제에서는 봉건제에 맞는, 자본제에서는 자본제에 맞는 사회사상, 이론, 견해, 정치 제도와 마주한다. 이것은 사상, 이론, 견해와 정치 제도 자체의 “본성”이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 발전이 다른 시대에는 사회의 물질적 삶이 다르다는 조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가 무엇이든,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 사회의 사상, 이론, 정치 견해 및 정치 제도로 된다.

 

이와 관련하여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규정한다.” (맑스, ≪선집≫ 제1권, p. 269.)

 

따라서 정치적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공허한 몽상가의 처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당은 자기의 활동을 추상적인 “인간 이성의 원리”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결정적 힘이 되는 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구체적 조건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위대한 인물”의 선한 의지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 발전의 현실적 요구에 근거해야만 한다.

 

나로드니끼, 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을 포함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몰락은 무엇보다 이들이 사회 발전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하는 선차적 역할을 알지 못하고 관념론에 빠진 때문이다. 이들의 실천 활동은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의 요구에 근거하지 않고 이러한 요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무관하게 사회의 현실 생활에서 유리된 “이상적 계획”과 “전면적 목표”에 근거하고 있었다.

 

맑스-레닌주의의 강력함과 생명력은 실천 활동이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의 필요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 즉 사회의 현실적 삶과 결코 괴리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나 맑스의 말에서 사회사상, 이론, 정치 견해 및 정치 제도가 사회생활에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사회적 존재와 사회의 물질생활 조건의 발전에 상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사상, 이론, 견해, 정치 제도의 기원발생과 사회에서 정신생활은 물질생활 조건의 반영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사회사상, 이론, 견해 및 정치 제도의 중요성과 그 역사적 역할에 관하여 역사적 유물론은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생활과 사회 역사에서 그것의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강조한다.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사상과 이론이 있다. 낡은 사상이론은 쇠퇴하고 있으며 소멸하는 세력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낡은 사상이론이 사회 발전과 진보를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진보적 사상이론은 진보적인 사회 세력의 이익에 복무한다. 중요한 점은 진보적 사상이론이 사회 발전과 진보를 촉진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진보적 사상이론이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면 할수록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회사상과 이론은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이 사회 앞에 새로운 과제를 제기한 후에야 발생한다. 그러나 일단 발생하고 나면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이 제기한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고 사회 진보를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이론, 새로운 정치 견해 및 새로운 정치 제도의 거대한 조직적, 고양적, 변혁적 가치가 있다. 새로운 사회사상과 이론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것이 사회에 필요한 때문이며, 그의 조직적, 고양적, 변혁적 작용이 없이는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의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이 제기한 과제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사회사상과 이론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인민의 소유가 되어 죽어 가는 사회 세력에 대항하여 인민을 고양시키고 조직한다. 이리하여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을 방해하는 세력의 전복을 촉진한다.

 

이와 같이 사회사상, 이론과 정치 제도는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 사회적 존재 발전의 당면한 과제에 기초하여 발생한 다음에는 그것들 자체가 다시 사회 존재에, 사회의 물질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즉 사회의 물질생활의 당면 과제를 완수하고 한층 더 발전시킬 필수 조건들을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론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곧 물질적 힘이 된다.” (맑스ㆍ엥엘스, 제1권, p. 406.)

 

즉, 프롤레타리아 당이 사회의 물질생활 조건에 영향을 미치고 그 발전과 개선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한 사상이론에 의거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상이론은 광범한 인민 대중을 움직이고, 그들을 동원하여 프롤레타리아 당을 거대한 군대로 조직할 수 있게 하고, 반동 세력을 쓸어버리고 사회의 진보 세력의 앞길을 열어 줄 준비를 하게 한다.

 

“경제주의자들”과 멘쉐비끼가 몰락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진보적 이론과 진보적 사상의 고양하고 조직하고 변혁하는 역할을 알지 못하고, 속류 유물론에 빠져서 사상이론의 역할을 거의 마비시켰으며 그래서 당을 소극적이고 무기력하게 만든 데 기인한다.

 

맑스-레닌주의의 영향력과 생활력은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의 요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진보적 이론에 의거하여 이 이론을 적절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이 이론의 고양하고 조직하고 변혁하는 힘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관계, 사회의 물질생활 발전의 조건과 사회의 정신생활 발전의 관계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1938년 9월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신재길 교육위원장

1개의 댓글

연구소 일정

2월

3월 2024

4월
25
26
27
28
29
1
2
3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3
4
5
6
7
8
9
3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10
11
12
13
14
15
16
3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17
18
19
20
21
22
23
3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24
25
26
27
28
29
30
3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3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
31
1
2
3
4
5
6
3월 일정

31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