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뜨로쯔끼주의 비판] 기회주의 운동으로서의 뜨로쯔끼주의

 

끼릴로스 빠빠스따브루(Κύριλλος Παπασταύρου)

|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번역: 김의진(회원)

 

* 이 글은, 그리스 공산당의 이론지 ≪공산주의 평론(ΚΟΜΕΠ )≫ 2006년 제6호(11/12월호)에 실린 것으로, 미국의 Politsturm이 번역한 영역본을 대본으로, 그리스어 원문을 참조하며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komep.gr/m-article/65f74b62-ff2c-11e9-95d7-3ed1504937da> 영역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us.politsturm.com/trotskyism-as-opportunist-movement>

 

 

우리는 독자 여러분들께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장(head of the ideological department) 끼릴로스 빠빠스따브루(Kyrillos Papastavrou)의 논문 번역본을 소개하고자 한다. 빠빠스따브루의 논문은 그리스 공산당 이론지 ≪공산주의 평론(Communist Review )≫ 2008년 제1호에 실렸다.[1][편집자 주] 2008년 제1호에 실려 있다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이 논문은 ≪공산주의 평론≫ 2006년 제6호(11/12월호)에 실려 있다.

 

 

1. 서론

 

우리는 본 논문에서 노동 운동의 기회주의적인 경향으로서 뜨로쯔끼주의와 그 역사, 현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뜨로쯔끼주의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서 기인한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는 뜨로쯔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레닌과 쓰딸린에게 몰역사적인 공세를 가하며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10월 혁명 89주년을 앞두고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승리의 “불가능성”을 논했던 뜨로쯔끼에 대한 투쟁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둘째, “뜨로쯔끼주의자”를 자처하거나 뜨로쯔끼주의 이론을 차용하는 조직들의 숫자는 학교와 대학에서 청년층들 사이로, 노동계급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들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은 공산주의 운동에 위협의 되기에는 매우 협소한 규모이지만, “혁명주의”라는 가면의 이면에서 부르주아적, 기회주의적 시각들을 재생산하며 자본주의에 유효타를 주지 못하는 세력을 강화시키며, 공산당과 청년 조직의 앞을 방해한다.

 

뜨로쯔끼주의에 대한 이해의 기초를 닦기 위해 우리는 뜨로쯔끼주의가 소부르주아들의 초혁명적 수사들과 타협주의로 특징되는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적인 경향이라는 사실을 폭로할 것이다. 제국주의의 반쏘 책동이라는 1930년대의 상황에서 뜨로쯔끼주의는 쏘련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념적, 정치적 경향으로서 뜨로쯔끼주의는 레닌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적대시했다.

 

 

2. 기회주의 운동 조류로서 뜨로쯔끼주의의 형성 과정

 

1) 혁명 이전

뜨로쯔끼와 현대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볼쉐비끼를 자처하며 볼쉐비끼적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볼쉐비끼주의는 “1903년 이래로 정치사상적 조류이자 당으로서 존재”(V. I. 레닌,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했으며, 뜨로쯔끼주의는 시초부터 볼쉐비끼 사상을 적대시해 왔다. 뜨로쯔끼주의는 당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레닌의 방침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로씨야사회민주로동당(RSDLP) 제2차 당 대회(1903년)부터 뜨로쯔끼는 일찍이 당 규약 논쟁에서 레닌의 반대자들을 두둔해 왔다.

 

당 규약에 대한 레닌의 혁명적 견해는 다수파에 의해 채택됐으며, 기회주의 파벌(뜨로쯔끼, 마르또프, 악쎌로트)이 소수파로서 멘쉐비끼로 불린 반면 레닌 지지파는 볼쉐비끼로 명명됐다.

 

투쟁의 연간 동안 쓰인 뜨로쯔끼의 레닌에 대한 서술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 준다. 아래는 뜨로쯔끼의 사상관을 규정짓는 ≪우리의 정치적 임무(Наши политические задачи)≫(1904년)의 인용문들이며, 반맑스주의적, 기회주의적 논조를 폭로한다. 몇몇 인용문들은 레닌의 뜨로쯔끼와의 의견 차이가 부분적이었다는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한다. 레닌의 ≪일보전진 이보후퇴(Шаг вперёд, два шага назад)≫를 비판하며 뜨로쯔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맑스주의적이자 사회민주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적 유산을 향한 레닌 동지의 비관주의만큼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조는 지금까지 존재치 않았다! 그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막대한 이론적 책임이 요구되는 과학적 방법론이 아니라, 원하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누더기요, 아무런 실속이 없으며, 당내 의식 상태가 현실에 직면할 때 구부러지기 쉬운 법칙에 다름 아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혁명파의 거두인 레닌 동지는 … 사회민주주의가 우리 당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이론적 공격이라고 정의내려야 했다. 그렇다. 베른슈타인의 ‘비판적’ 사고관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위험한 이론적 공격을 말이다. (같은 책, p. 98.)

 

그리고 ≪이쓰끄라(Искра)≫ 신문을 언급하면서,

 

구 ≪이쓰끄라(Искра)≫는 인쩰리겐찌야의 정치적 의식을 깨우치기보다 파괴시키는 데에 주목적을 뒀다. ≪이쓰끄라≫에서 훈련받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정통’이란 자꼬뱅적인 절대적 진실과 매우 근접한 무언가이다. 교조적 진실은 모든 영역, 심지어는 공동 협력의 문제에도 뿌리내렸다. 이에 도전하며, 문제 제기를 던지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요주의 의심 대상이 됐다. (같은 책, p. 96.)

 

1910년에서 1914년까지 로씨야 사회민주로동당은 단일 정당이 아니었다. 분파별로 개별적인 정당들이 난립했고, 각자마다 지도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분파들로는 레닌의 볼쉐비끼와 멘쉐비끼 정파들인 뜨로쯔끼파, 소환파(Otzovists)가 있었다. 뜨로쯔끼파는 볼쉐비끼와 멘쉐비끼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 본질적으로 멘쉐비끼파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뜨로쯔끼주의는 사회배외주의(social-chauvinism)와 소부르주아 평화주의 사이에서 표류하는 “중도주의”의 확고부동한 경향 중 하나였으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좌파)과 기회주의자 및 수정주의자들(우파) 사이의 “화합”을 강조했다.

 

로씨야의 혁명 정세하에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볼쉐비끼 노선과의 일치를 표명했으며 로씨야 사회민주로동당(볼) 제6차 전당 대회에서 볼쉐비끼 소속 당원으로 수용됐다. 뜨로쯔끼는 따라서 1917년 7월 볼쉐비끼 당의 당원이 됐다.

 

그러나 볼쉐비끼 당에 가담한 이후에도 뜨로쯔끼는 독자적인 행보를 지속했으며 레닌에 대한 투쟁을 이어 나갔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브레쓰트 평화 조약(1918년)에 반대했고, 시의적절한 조약 체결을 방해했으며, 이제 갓 탄생하여 미약한 쏘비에트 권력에 큰 손실을 초래했다.

 

내전기에 뜨로쯔끼주의는 로씨야 공산당(볼) 내부의 반대파로서 기능했다.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전당적 토의를 제의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정치적 강령과 함께 분파를 형성했다. 강령의 본질은 노동조합을 국가 기구의 일부로 전환하며,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전위당의 지도적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뜨로쯔끼주의 이론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에 기초했다. 멘쉐비끼 지도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쏘련 노동계급은 권력을 공고화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적 발달 환경 속에 놓여 있는 기술/경제적 후진성으로 인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유럽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혁명들이 성공하고, 그것이 쏘련의 노동계급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혁명의 승리는 매우 짧고, 쏘비에트 권력은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전위당 원칙에 반대하며, 당내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당내 분파 형성의 자유를 주장했다.

 

뜨로쯔끼의 영향하에서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은 독일과 프랑스, 영국, 체쓰꼬쓸로벤쓰꼬(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당을 형성했다. 쏘련 내에서 모든 반(反)볼쉐비끼 조직들은 뜨로쯔끼주의로 단결했다. 레닌과 쓰딸린은 논문과 연설, 당 기구 성명서들을 통해 뜨로쯔끼주의자들에 대항했다. 뜨로쯔끼주의는 수많은 회의들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들에서 성토 대상으로 지목됐다.

 

로씨야 공산당(볼) 제15차 당 대회(1927년)는 뜨로쯔끼와 지노비예프를 추방하는 중앙위원회의 결정문을 승인했다. 코민테른 제9차 집행위원회 전원회의(1928년)는 뜨로쯔끼주의와 연계된 정당들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맹 정당으로서 부적격하다고 강조했으며, 해당 결정은 동년에 열린 제6차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2) 사회주의 쏘비에트 권력에 대하여

뜨로쯔끼주의자들과 부르주아 계급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쏘비에트 국가와 당내에서 벌어진 투쟁의 성격을 뜨로쯔끼와 쓰딸린 개인의 충돌로 환원시킨다. 부르주아 계급의 선전기구는 뜨로쯔끼를 배신자에 맞선 순수하고 무고한 혁명가로 묘사한다. 이러한 악선전은 진중하고 심각하게 전개되는 만큼, 장편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매체와 교과서 등지에서 다루는 만큼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그들의 조직 역량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알리는, 자신들의 견해를 홍보할 또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씨스템은 뜨로쯔끼주의가 패배주의 노선을 장성케 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상의 선전 보급에 있어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지닌다. 이는 개인 간의 투쟁이 아닌, 사회주의 건설과 국가 행정 등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적 입장 간의 투쟁, 즉 전례 없는 상황하에서의 투쟁이다.

 

뜨로쯔끼와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수많은 우익 기회주의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맑스주의를 교조적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1917년 로씨야의 복잡성과 매우 동떨어진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이상적인 지향점”을 추구했다.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처럼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노동자 대중이 빈농들을 지도할 수 없다고 신봉하다시피 했다. 그들은 공산당의 지도하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낙후된 군중들이 10월 혁명의 이상을 실천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농민들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농촌에서의 독재”가 수립되어야 하고, 서방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움을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혁명전쟁이라는 미명하에 군사적 모험주의와 “혁명의 수출”을 제창했다.

 

그러나 1918년-1923년간 혁명의 물결은 로씨야 이외의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없었다. 물론,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개입 책동에 처해 있었을 때, 전국에 걸쳐 쏘비에트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을 때,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전쟁에 나서지 않고 혁명을 수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볼쉐비끼를 비난할 수는 없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논조는 자승자박으로 빠져든다. 맑스주의를 과학이 아닌 교조(dogma)로 규정하며, 낮은 생산력 수준에서부터 시작해야 했고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국가에서 쏘비에트 권력이 직면한 과제의 복잡성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제국주의론에 기초한 혁명 전략의 발전 진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서유럽의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논한 맑스와 엥엘스, 그리고 20세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있던 맑스주의자들의 초기 문헌들을 교조적으로 옹호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거하여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 이론을 창안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발전에 공헌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제국주의 세계 체제는 한 국가에서 몇 가지 조건들(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들)과 조응할 때 붕괴되며, 자본주의를 보다 더 취약하게 만든다. 약한 고리론은 혁명이 단일 국가에서 쟁취될 가능성을 이론화했다.

 

[…] 세계합중국이라는 슬로건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로는, 그것이 사회주의에 합치되는 구호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왜곡될지 모르고, 이러한 하나의 나라와 다른 나라들 간의 관계들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균등한 경제적, 정치적 발달은 자본주의의 절대 법칙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먼저 몇몇 국가, 혹은 일국에서도 가능하다. 자본가들에게서 생산 수단을 몰수하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조직을 완수한 이후, 한 국가에서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세계에 투쟁하며 각국의 피억압계급을 끌어들이고, 자본가들에 맞서 봉기를 조장하는 데에 앞장서며, 필요에 따라 착취계급과 착취국가에 맞서 무력을 동원할 것이다. (V. I. 레닌,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О лозунге Соединенные Штаты Европы)”.)

 

뜨로쯔끼는 레닌의 논문에 응수하며 이렇게 썼다.

 

혁명 로씨야가 보수적인 유럽에 맞서 스스로를 보위한다거나, 자본주의 세계에서 고립된 사회주의 독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 상상할 수 없다.

 

일국 내부에서의 사회 혁명이라는 관점은 사회애국주의적(social-patriotism) 내용을 만들어 내는 민족적 협소함에 국한시키는 전망이다. (L. D. 뜨로쯔끼, “평화 강령(Программа мира)”.)

 

그러나 우리는 1917년에 제국주의적 사슬이 깨진 나라가 방대한 옥토를 보유했으며, 독점자본주의가 발달 중에 있었고, 많은 전(前) 자본주의적 요소들과 뿌리 깊은 모순이 농업 생산은 물론 상부구조에서도 관철됐던 로씨야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혁명이 내전과 계급 투쟁의 형용할 수 없는 난관들에 직면하여 쏘비에트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을 때, 레닌과 쓰딸린이 로씨야 공산당(볼)과 볼쉐비끼 지도부 전체의 지도자로서, 노동계급과 로씨야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있어 혁명 권력의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을 때, 뜨로쯔끼는 패배주의를 조장하며 쏘련을 강화시키는 문제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켰다.

 

로씨야에서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뜨로쯔끼주의자들의 관점은 빈곤층과 중간계층을 혁명으로 끌어들일 수 없고, 노농 동맹을 사수하기 불가능하다는 시각에서, 노동계급과 대다수 농민 대중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유일한 탈출구란 오로지 서유럽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 원조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것뿐이다. 1850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과 발달한 자본주의 유럽에서 국가에서 국가로 혁명의 전파 가능성을 제시한 맑스와 엥엘스의 계속 혁명론 혹은 영구 혁명론에 기초한 이러한 시각은 뜨로쯔끼에 의해 1905년부터 줄곧 표출됐었다.

 

그러나 뜨로쯔끼에게 있어 영구 혁명이란, 농촌 내부의 계급적 차이에 관계없이 반동적인 세력으로 여겨진 전체 농민들에 대한 적대를 의미했다. 뜨로쯔끼의 입장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논했다.

 

뜨로쯔끼의 본래 이론은 농민층의 역할에 대한 “청산”에 있어 멘쉐비끼 이론을 빌려 왔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장악과 혁명의 결정적인 투쟁에 관한 요구에서는 볼쉐비끼의 이론을 차용했다. (V. I. 레닌, ≪혁명의 두 가지 노선에 대하여(О двух линиях революции)≫.)

 

뜨로쯔끼는 농민들이 토지와 재산에 애착심을 지닌 소지주들처럼 단일한 계층이 아니며, 사회적 지위에 입각한 사회 발달에 있어 당대 농업 수준에서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교조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계급 투쟁의 기계적 해석이자, 소지주층의 반동적 측면에 대한 절대화요,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진영으로 견인할 수 없게끔 하며,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

 

그러나 농민들이 혁명을 지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공산당 선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엘스에 의해 그 가능성이 예견되었다.

 

그들이 혁명적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머지않아 프롤레타리아트로 넘어가게 될 것을 고려하는 한에서만, 그들이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장래의 이익을 옹호하는 한에서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려고 그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엘스, ≪공산당 선언≫.)

 

이러한 관점은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농민들의 이익은 나뽈레옹 시기와는 달리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자본의 이익에 조응하지 않는다. 따라서 농민들은 부르주아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우군들과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지도자들을 물색하고자 시도한다.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엘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제7장.)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로씨야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과 제휴하거나, 빈농 및 중농층의 상당 부분을 혁명 강령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농민들의 계급적 차이는 그들 내부의 계급 투쟁을 강화시켰고,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잠들어 있던 적잖은 분자들을 일깨웠다. 농민들의 계급적 분화는 농촌과 도시의 무산자들을 가깝게 만들었다. […] 뜨로쯔끼가 빠리에서 쓴 수많은 문구들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논박할 수 없다. 뜨로쯔끼는 농민층의 역할을 “청산”함으로써 로씨야에서 혁명에 대한 농민들의 갈망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적인 노동자 정치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일조하고 있다. (V. I. 레닌, ≪혁명의 두 가지 노선에 대하여(О двух линиях революции)≫.)

 

농민층과의 제휴, 즉 10월 혁명 이후 국유지로 전환된 토지의 분배라는 전체 농민층의 요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대규모 생산의 공동화라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로씨야 사회의 계급적 역관계를 고려하고, 농민층 내부에서 자체적인 계급 투쟁을 강화해 나가며, 분산된 소생산적 농업의 집중화를 사회화라는 방편을 통해 촉진해 나가는 조치였다.

 

농촌에서 평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기초적인 조건들 중 하나이다. 강도떼들의 활동과 농민 반란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곡창 지대는 전전 시기 면적(95%)을 회복해 나가고 있으며, 우리는 농촌에서 평화를 구가하고 있다. 중농 및 미조직 빈농과의 동맹은 지역 쏘비에트를 강화시켰고, 농촌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의 위신을 향상시켰다.

 

우리는 따라서 농촌의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공세를 펼칠 수 있는 조건을,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을 보증할 수 있게 된 조건을 창출해 냈다. (쓰딸린, “뜨로쯔끼주의 반대파의 과거와 현재”.)

 

내전 종결 이후 노농 동맹을 강화시키는 문제가 대두될 때 뜨로쯔끼는 농촌에서 실질적으로 내전을 초래할 수 있었던, 군사적 수단을 통한 폭력적인 집산화를 옹호했다.

 

1929년에서 1933년까지 치러진 집산화는 빈농층의 대다수가 관여했던 격렬한 계급 투쟁의 산물이었다. 뜨로쯔끼와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집산화와 탈(脫)부농화를 “관료주의적 도박”으로 묘사했다. (L. D. 뜨로쯔끼, “관료집단의 하찮은 문제”.) 같은 해 3월에 뜨로쯔끼는 “[…] ‘전면적 집산화’의 공상주의적, 반동적 본성은 […] 소생산적 농장에 우위를 보증할 유일한 수단인 기술적 토대 없이 강제가 동반된 대규모 집단 농장의 탄생을 골자로 한다”고 썼다. (L. D. 뜨로쯔끼, “로씨야 공산당(볼) 당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그는 “집단 농장은 기술적 인프라의 미비로 붕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J. 그레프의 논문인 “농촌 집단화와 그에 따른 인구의 과잉 현상”의 “편집자 후기”, ≪반대파 통신≫ 제11호, 1930년 5월을 참조하라.)

 

사회주의의 건설과 농업 집산화 과정에서 실수들이 나타났지만,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모든 “예언”을 뒤집어 놓았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동계급의 지도 기관으로 바라보며 군사적 조치의 도입을 염원했다. 이러한 주장의 기저에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독재는 전체 계급에 의해 직접적으로 집행된다는 개념과, 전체 집단으로서 계급이 충분히 숙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적 조치들을 통해 “숙성도”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다. 이러한 관료주의적인 인식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따른 대중 설득의 가능성에 대한 과소평가를 재차 드러내는 것이었다.

 

레닌은 노동조합 문제에서 뜨로쯔끼와 극심하게 대립했다. “노동조합과 현 상황, 그리고 뜨로쯔끼의 오류들”이라는 논문에서 레닌은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그 계급의 전체를 포괄하는 한 기구를 통해서 수행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가장 후진적인 곳 중 하나인 여기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몇몇 국가들에서는 제국주의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타락하고 부패해 있어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를 포괄하고 있는 한 기구가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그 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해 왔던 전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V. I. 레닌, “노동조합과 현 상황, 그리고 뜨로쯔끼의 오류들”.)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 레닌은 언급한다.

 

노동조합은 전위로부터 선진적 대중으로 이어지는 몇 가지 ‘전달 벨트’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으며, 근로인민 대중과 전위를 이어주는 사다리이다. (같은 글.)

 

쓰딸린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동조합은 우리나라에서 수권을 쥐고 있는 노동계급 모두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부를 수 있다. 노동조합은 공산주의의 학교이다. 노동조합은 행정사무의 모든 부문에 걸쳐 지도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최고의 인자들을 선별한다.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선진분자와 후진분자 사이에서 고리를 형성한다. 노동조합은 근로대중과 노동계급의 전위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맡는다. (쓰딸린, ≪레닌주의의 제 문제에 대해≫.)

 

그는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당의 역할을 설명한다.

 

물론 이는 우리 당이 노동조합과 쏘비에트, 기타 대중 조직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거나, 대신해야 한다는 식으로 인식되서는 안 될 것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행사한다. 그러나 당은 노동조합의 도움으로, 쏘비에트와 예하 집행 기관들의 승인을 거쳐서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행사한다. 이러한 ‘전달 벨트’가 없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공고화란 한낱 공상일 뿐이다. (같은 책.)

 

그러나 이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당의 지도적 역할(당의 ‘독재’)가 동일하다고, 전자가 후자와 동일시될 수 있다고, 또는 후자가 전자에 종속될 수 있다고 여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 (같은 책.)

 

레닌은 뜨로쯔끼가 노동자계급 의식의 불균등성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의 첫 번째 단계(레닌에 의해 이행기 안의 이행기로 불렸다)에서 신생 권력의 약세를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대처했던 노동조합 논쟁의 본질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접근법에 명시적으로 기초한다고 강조했다. 뜨로쯔끼와 그 추종자들은 사회주의 건설기에 대중 차원의 사회주의적 의식 형성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포고령과 행정적 조치들로 “간소화”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독차지했던 곳에서는 매사에 노동자들과 마찰이 발생했다.

 

뜨로쯔끼는 기층 당 조직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당내 투쟁 내내 자신의 관점을 철회하지 않았다.

 

교조주의, 한 국가에서 사회주의 승리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 대중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 및 군사주의적 방식에 대한 의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당의 역할 부정, 그리고 로씨야 공산당(볼) 당내 단결의 손상과 분파 난립을 초래했던 의사 표명의 자유 및 신념의 자유에 대한 쁘띠부르주아적 사고관은 뜨로쯔끼의 사고관을 일목요연하게 규정짓는 특징들이다.

 

 

3. 반혁명 세력으로서 뜨로쯔끼주의

 

한 국가에서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의 일관된 부정은 쏘련의 사회주의적 성격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뜨로쯔끼는 로씨야 공산당(볼) 지도부를 보나빠르뜨주의 관료 집단이라고 비난하고,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불가능성을 강조하며, 반동적 시각과 행동으로 점차 쏠려갔다.

 

쏘련에 대한 제국주의의 공세하에서 뜨로쯔끼주의는 1930년대에 실질적으로 쏘비에트 권력 타도를 부르짖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쏘련 내부의 모든 반대파들과 협력했다. 쏘련 내부의 여러 반당적, 반쏘비에트 집단들과의 관계는 견실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뜨로쯔끼는 쏘비에트 권력의 타도를 공공연하게 주장했고, “관료 집단의 ‘평화적인’ 제거가 가능한가?”라고 물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지난 몇 년간의 경험에 미뤄볼 때 쓰딸린주의 관료 집단이 당 대회나 쏘비에트 대회로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치기 어린 공상일 것이다. 실제로 볼쉐비끼 당의 마지막 당 대회는 1923년 초에 열린 12차 당 대회였다. 이후에 열린 당 대회들은 모두 관료 집단의 축하연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당 대회조차도 열리지 않고 있다. “적법한” 절차에 의거하여 지배 파벌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찾아볼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는 무력을 통해서만이 관료 집단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 (L. D. 뜨로쯔끼, “쏘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물론 뜨로쯔끼는 “쓰딸린주의 관료 집단”, “관료 집단의 사회적 기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적극적인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용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는 것은 쉬운 임무가 아니라고 여겼다. (같은 글.)

 

1980년대 후반 반혁명의 승리는 뜨로쯔끼주의의 이론과 가정들을 확증시켜 주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좌초”되어 자본주의로 돌아서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건설 도중에는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투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지도자들이었던 레닌과 쓰딸린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1) 전간기(Interwar Period) 그리스 뜨로쯔끼주의의 간략한 역사

1930년대 그리스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뜨로쯔끼주의 분파는 “아카이브 맑스주의(arch-Marxist)” 경향이었다. “교육이 먼저, 행동은 그 다음에”를 표어로 삼았던 ≪아카이브 맑스주의(Archive Marxism)≫라는 이름의 잡지는 뜨로쯔끼주의가 생겨나기 오래 전인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나타났다. “아카이브 맑스주의”는 그리스 노동 운동의 기회주의적 조류였다. “아카이브 맑스주의자들”은 그리스 공산당을 적대시했다. 제1차 노동자청년 전국대회에 발표된 그리스 공산당 정치국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카이브 맑스주의’ 파벌의 대표단과 회원들은 대회에서 주도권 행사가 여의치 않게 되자 이를 해산시키고자 했으며 공산주의 청년단원들과 공산당 지지자는 물론, ‘아카이브 맑스주의파’와 ‘결별한’ 대표적인 사람들에게도 흉기를 휘둘렀다.”

 

1934년에 “그리스 공산주의 아키비스트 당(Greek Communist Archivist Party)”으로 개칭되는 “맑스-레닌주의 아키비스트 공산주의 그룹”은 1930년에 형성됐다. “아카이브 맑스주의자들”은 훗날 “제4 인터내셔널”로 변모하는 “국제 좌익 반대파(International Left Opposition)”의 그리스 지부 공식 대표로 인정받았으며, “제4 인터내셔널”의 일부분이었던 뜨로쯔끼주의 주요 조직들의 시초였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아키비스트들”은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내부 분쟁의 여파로 노동계급의 몇몇 층위들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방침하에서 당내 위기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들과 대중과의 굳건한 유대 관계 성립은 그리스 공산당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아카이브 맑스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이들 사이에 존재했던 내분은 1934년에 분립한 디미뜨리스 지오또뿔로스(Dimitris Giotopoulos)의 파벌과 D. 비트소리(Vitsori)의 “제4 인터내셔널” 추종파로 나뉘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오또뿔로스의 “그리스 아카이브 맑스주의 당”이 퇴보했다는 증거는 1949년 제3차 당 대회에서 그리스 민주군(DSE, 그리스 내전에 참가했던 그리스 공산당의 군대)에 대한 정부군의 승리를 기념하며 당국에 보낸 축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카이브 맑스주의 당”의 대다수 당원들은 당이 1950년대에 해체되자 부르주아 정당들에 가담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내내 뜨로즈끼주의자들은 항구적인 내부 분열과 조직명의 변경으로 우왕좌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은 “제4 인터내셔널 그리스 지부”를 참칭하는 소규모 조직들의 난립으로 귀결됐다.

 

2) 독일 강점기와 내전 당시 뜨로쯔끼주의자들

소수의 뜨로즈끼주의자들은 독일의 그리스 강점기 도중에 민족 저항 운동을 지지하며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에 가입하거나 협력했다. 그러나 뜨로쯔끼주의자의 대다수는 이러한 저항 운동을 제국주의 전쟁의 연장으로 인식하며 반대했다. 이러한 태도는 쏘련과 쏘련의 방위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라 좌우됐다. 과반 이상의 그리스 뜨로쯔끼주의자들과 “제 4인터내셔널” 공식 대표단에게 있어 쏘련 방어의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쏘련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맺어진 협정들이 “세계 노동계급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망연자실하게 하며,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환에 있어 장애물이 된다”고, “쏘련의 패배는 군중을 각성시키며 진실을 밝혀낼 것”이라고, “10월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기 위해 군중이 스스로를 지도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입장들에 기초하여 1차 세계 대전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장병들의 연대에 관한 표어를 교조적으로 재생산하며, 전쟁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연대해야 할 무장된 노동자라는 이유로 그리스 인민들에게 독일과 이딸리아 점령군에 대항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입장은 점령기 당시 주요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이었던 “그리스 국제 공산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of Greece)”과 “그리스 공산주의 국제당(Party of Communist Internationalists of Greece)”의 공동성명서 논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견해로 귀결됐다.

 

1944년 5월에 처형된 이들은 파르티잔 전쟁이라는 미명으로 독일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암살과 사보타주를 저지른 쓰딸린주의 당 방침의 희생자들이며, 집중적인 테러 행위는 독일군에게 노동자들을 학살할 충분한 명분을 제공했다.

 

다양한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대회가 1946년에 개최됐다. 아래는 그리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통일단결대회”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요청”이라는 “국제 혁명당(International Revolutionary Party)” 중앙위원회 기관지 ≪노동자전선(Labor Front)≫의 1946년 1월 15일 특별 호 기사에 나온 문구들이다.

 

전시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 쓰딸린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들과 파씨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점령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책무는 민족주의 조직에 대한 투쟁을 격화시키며, 반독일 정서와 민족주의라는 독소로부터 노동계급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민족해방군(ELAS) 및 다른 조직들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노동계급의 당은 규모와 형태에 관계없이 모든 애국적인 투쟁을 규탄하며, 노동자들에게 그러한 투쟁과 절연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한다. […] ‘저항 운동’에의 참여는 어떠한 명분과 보증수단이 존재하건 전쟁에 대한 개입이다. 민족주의적 조직들로부터 대중을 분리시키는 작업과 사회주의적 혁명 투쟁은 이와 같은 단체들 밖에서야 가능하며, 격렬한 투쟁으로써 이들에게, 이들의 민족주의적 방침들에 맞설 때에야 온전해질 수 있다.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의 전반적인 행보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반동적이었다. […] 독일군 장병들을 학살함으로써 (민족해방전선은) 점령 당국에 의한 폭거의 단초를 제공했다. […] 그리스 민족해방군은 […] 그 자체로서 반동적이었다. 영국 및 그리스 왕당파 연합과 그리스 민족해방군 사이에서 일어났던 무력 충돌인 데켐브리아나 봉기는 무수한 범죄 행위들에 혈안이 되어있던 쓰딸린주의 관료 집단과 민족해방군(ELAS)의 부패분자, 사령관들에 의해 시작됐다. […] 그리스 민족해방군(ELAS)은 급속도로 전개됐던 대중 운동의 확장세에 있어 단순한 개입뿐만 아니라 억제에도 앞장섰다. […] 노동자들은 민족해방전선의 야만적인 테러보다 더한 만행을 지금껏 보지 못했다. […] 대중을 등한시하며 모든 형태의 활동과 자유로운 무장을 허용하지 않는 집단은 쓰딸린주의 공산당이다. 우리는 이러한 장애물을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

 

[…] 우리의 정치적 구호는 군사적 합병과 전쟁배상금이 없는 평화, 그리고 독일과 이딸리아를 비롯한 점령국 군대의 철수이다. […] 우리 당은 영국군의 철수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 ‘인민민주주의’는 대중에 의한 권력 장악을 가로막는 자본가계급의 최후 수단이다. […] 쓰딸린주의 공산당은 12월 봉기와 에스빠냐 내전에서 보여 준 대로, 혁명적 대중에 맞서 파쑈적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 프롤레타리아트 당[뜨로쯔끼주의자들의 당]은 쓰딸린주의 패당에 맞서 자경단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 그리스 공산당은 사적 소유를 위협하는 대신 방어에 나서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자본가 정당이나 다름없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리스 공산당의 전략을 “애매모호하다”고 지적하면서, 그리스에서 독일-이딸리아, 그 다음 영국-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지지를 보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민족해방전선(EAM)과 후속조직인 그리스 민주군(DCE)에 대한 공세를 지지했다. 자본가 군대와 지배계급의 테러 독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주된 과제는 독일 강점기와 그 이후 민족해방전선(ELAS)과 민족해방군(ELAS), 그리스 공산당과 맞서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 뜨로쯔끼주의의 정치적 파산과, 사전에 예정됐던 독일 강점기와 전후 시기 위기의 배경을 설명해 준다. 그리스에서 뜨로쯔끼주의는 존재 기간 내내 가장 심각했던 사상적, 정치적 위기들 중 하나에 직면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이 독일 강점기와 그리스 내전당시 무장 저항 운동 진영에서 배신자로 인식됐던 사실은 따라서 놀랄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뜨로쯔끼주의자들을 “쓰딸린주의”의 희생자들로 띄워 주기 위해 다양한 출판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범죄자를 희생자로, 또는 다른 무언가로 치환하여 역사를 수정하려는 반공주의 캠페인의 일환이다. 그리스 지배계급이 권력 상실 위험에 시달렸으며 계급적 기반이 흔들렸던 유일무이한 순간이었던 만큼 독일 강점기와 내전은 20세기 역사에서 중대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말 유럽 반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역사적 다원주의”는 반공주의적 비방이자 왜곡에 다름 아니다. 뜨로쯔끼주의의 반공주의적 성격과 역할은 그리스 지배계급에게 유용한 수단으로서 기능했기에 찬사받기 일쑤다.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의 기관지에서 그리스 공산당이 “혁명을 배반”했다는 비난은 인민들을 공격했던 당사자가 뜨로쯔끼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온당하다고 볼 수 없다.

 

 

4. 뜨로쯔끼주의의 현재

 

뜨로쯔끼주의는 인터내셔널(“제4 인터내셔널” 등)을 창설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들에 불구하고 분파적인 운동으로 남았다. 오늘날 뜨로쯔끼파로 특징되는 조직들과, 각자의 이론적 입장에 동의하며, 뜨로쯔끼주의를 포함한 “공통의 전통”으로부터 파생된 정파들이 난립한다. “전통적”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의 분열과 “네오뜨로쯔끼주의” 출현의 발단은 쏘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했던 뜨로쯔끼와 달리, 토니 클리프가 “국가자본주의론”을 제창한 1950년대였다. “네오뜨로쯔끼주의”의 중심에는 1977년에 창설된 “국제 사회주의 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이 있다. 이외에도 한 국가 단위에서 뜨로쯔끼주의자로서 행동하는 제 조직들을 망라하는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이 국제적으로도 존재한다.

 

1950년대-1970년대와 오늘날 프랑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역사는 눈여겨볼 만한 이야기다. 여러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은 사회민주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으며,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처럼 “부르주아 정치인의 요람”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들은 ≪르 몽드(Le Monde)≫가 “좌익 반공주의적 경향”으로 지칭했을 만큼 극도로 반공적이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당시 프랑스 공산당(FCP)의 기회주의적 재탄생을 틈타 세력 확대에 나서며 각종 선거에서 상당한 득표율을 획득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공산당과 세계교사총연맹(WCT)의 우익인자들과 친분 관계 유지에 치중했고, 부르주아 체제와 중도좌파 연정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이 “노동자투쟁(Lutte Ouvrière)”의 협조하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쟁취”를 “쓰딸린주의”로 규정하며 강령에서 제외시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현대 그리스에서는 “혁명적 노동자당(Revolutionary Workers’ Party)”과 “그리스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당(Organization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ists of Greece)”, “공산주의 연맹-노동자 권력(Communist Union–Workers’ Power)”, “쎄키니마(Ξεκίνημα, 사회주의 국제주의자 기구)”를 비롯하여 소규모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이 난립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신문 배포를 통해 전개되며, 그중 많은 활동가들이 부르주아 언론에 출현한다. 이들의 견해와 사상적, 정치적 특성은 “네오뜨로쯔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은 국제 사회주의 경향(IST)의 그리스 지부로, 영국 SWP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클 것일 것이다. 당은 1967년 그리스 군부 정권 수립 이후 런던에 망명한 일군의 학생들에 의해 창당됐다. 이들은 처음에는 마오주의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혁명 기구(SRO, Socialist Revolutionary Organization)”라는 정치 조직을 결성했다. 런던 체류 기간 동안 사회주의 혁명 기구 지도부는 뜨로쯔끼주의의 영향으로 토니 클리프의 국제 사회주의 경향과 제휴 관계를 형성했다. 조직 내 활동가들이 그리스로 귀국할 무렵 국제 사회주의자와의 연락망은 잠시 단절됐으나 1980년대 초반에 재개됐다. 그 무렵 국제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1990년대 후반에 [영국의 SWP와 같은 이름의]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의 조직명 변경이 있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1970년대에 ≪여성 인사(The Nodding Woman)≫라는 잡지를 발행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연대(Εργατική Αλληλεγγύη)≫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Σοσιαλισμός από τα Κάτω)≫지를 발간하고 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상승세였다가 그 이후 오랜 위기와 빈사 상태로 치달았다. 2001년 사회주의 노동자당 내에서 분열이 일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에서 분립한 분파는 정치, 사상적으로 국제 사회주의자 경향 미국 지부와 연계하는 “국제 노동자 좌익(ΔΕΑ, Internationalist Workers’ Left)”을 창설했다. 국제 노동자 좌익은 급진좌파연합(시리자)과 좌익연합(Coalition of the Left Forces)의 창설에 관여했다.

 

그리스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창당된 경위는 영국 측 모체 조직의 활동과 정치적 입장을 대부분 있는 그대로 차용함으로써 좌우됐다. 사회주의 노동자당 홈페이지를 훑어보기만 해도 기본적인 이론적 개념들뿐만 아니라 표어와 조직 체계도 빌려 왔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주간모임을 조직하는 데에 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인 투쟁”을 즉자적인 활동으로 위축시키는, 정치적 강령이 없는 조직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에게는 전략이 없으며,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통속적이고도 공허한 선전 문구들만이 있을 뿐이다. 일정 부분 영향력을 지니는 대중 조직들(노동조합과 클럽 등)에서 이들은 “사회포럼(Social Forum)”이나 “국제 사회주의 경향”에 의해 채택된 활동에 관여하거나 지지를 보낸다. 이들은 투쟁을 위해 세부적인 요구 사항이나 목표를 심화시키는 대신, 투쟁의 형태만 집중한다. 이는 실질적인 파업이나 시위, 건물 점거에 대한 요구가 아닌, 정치적 방향성과 무관한 즉자적인 실천에 “혁명적 성격”을 부여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5.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의 공통분모들

 

그리스와 세계 각국의 주요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은 사소한 차이에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공통점들을 공유한다.

 

1) 뜨로쯔끼에 대한 인용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뜨로쯔끼의 정치적 노선을 방어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정치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취사선택하듯 뜨로쯔끼주의적 입장을 표출하고, 뜨로쯔끼가 레닌의 계승자임을 알리기 위해 레닌과 레닌의 저작들을 선택적으로 인용한다. 또한 레닌과 쓰딸린을 대립시키며 반쓰딸린적 주요 주장들을 재생산한다.

 

2) 반(反)사회주의 악선전

뜨로쯔끼주의자들은 20세기 쏘련과 중유럽 및 동유럽 사회주의의 성취들을 부인한다. 사회주의의 전복을 사회 진보로 여기며, 이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자본주의를 복고시키기 위한 모든 반혁명적 행태들을 “인민 혁명”으로 부르며 지지를 보냈다.

 

일례로 그리스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그 모체인 국제 사회주의 경향(IST)의 정치적 저술들은 일련의 반공 쿠데타들에 환영하며, 이를 “대중 운동”, “대중 봉기”로 불렀다. CIA와 자본주의 국가들의 퇴직 관료들조차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고 토로한 사건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불렀다.

 

이들은 반공ㆍ반쏘 선전을 재생산한다. 사회주의 노동자당(SWP)의 기관지 ≪노동자 연대≫ 제593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쓰딸린의 로씨야는 이론적으로는 파씨즘과 화해할 수 없는 관계였다. 홉스봄은 말한다. 쏘련은 정책의 변동폭이 심했던 서방과 달리 나찌 독일에 대한 일관적인 반대로 유명했다. […] 그러나 1939년 8월 ‘파씨즘과 화해할 수 없었던’ 로씨야는 독일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몰로또프-리벤트로프 조약은 쏘련에게 발트 국가들을 ‘기증’했으며 뽈쓰까(폴란드)를 ‘분할’시켰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뽈쓰까 서부로 진입했을 때 쓰딸린의 ‘붉은 군대’는 뽈쓰까 동부로 쇄도했다.

 

뽈쓰까는 1달 이내로 지도에서 사라졌다. 1941년 6월 독일군의 로씨야에 대한 기습공격인 ‘바르바로사’ 작전이야말로 쓰딸린으로 하여금 ‘연합군’ 측에 서도록 강제했다.

 

네오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비방에 힘입어 반파씨즘 투쟁에서 쏘련의 결정적 역할과 추축국 제국주의에 대한 전민적 승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공로를 희석시키며 유럽에서 파씨즘을 강화시킨 자본주의 국가들의 역할을 정당화한다.

 

이들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쏘련군이 진주하고 나서야 나타났다는 제국주의 선전을 신줏단지처럼 받는다. 따라서 이들은 말한다.

 

동유럽 국가들은 ‘독일민주공화국’과 마찬가지로 […] 노동자 혁명이 전무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1944-45년 사이에 베를린으로 서진하던 쓰딸린의 군대에 의해 접수됐다. 이후 유럽의 새 지도는 얄타와 포츠담 회의에서 연합국 관할 구역에 따라 공식적으로 분할된다. 그리스의 노동자들에게 영국과 미국의 ‘후견인’들이 그러했듯이, 아무도 뽈쓰까(폴란드) 노동자들에게 로씨야의 ‘영향권역’에 편입되는 것을 원했는지 의중을 살펴보지 않았다.

 

여기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상극의 관계인 국제적 계급 연대의 양대 진영을 동일시한다. 그리스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침공이 동반된 국제자본의 ‘연대’가 자리했던 반면에, 중유럽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쏘련과 붉은 군대의 지원은 현지 노동자들과 전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쏘련과 중유럽ㆍ동유럽 국가들이 “국가자본주의”였다는 관점에 기초하여 1945년부터 1989년간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치를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의 충돌로 인식한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당시 쓰딸린주의 좌익들이 주장했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세력’이 아니었으며, 나토처럼 ‘자국의’ 인민들을 억압하고 도둑질하던 경쟁자 제국주의 진영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 건설의 “실패”에 관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ㆍ선전을 강화시킬 뿐이다.

 

3) 사민주의에 대한 협조

“입당 전술”이 초래한, 그리스와 유럽에서 돋보인 뜨로쯔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직간접적인 연결 고리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활동은 사민주의 정당들의 ‘좌익적’ 날개 형성은 물론 ‘좌익’ 반공주의적 실천에도 기여했다. 오늘날 뜨로쯔끼주의는 사민주의 정당들과 다방면적인 교류에 나서고 있다. 많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는 뜨로쯔끼주의 조류들이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일례로 뜨로쯔끼주의 조직인 “쎄키니마(Ξεκίνημα, 사회주의 국제주의자 기구)”는 그리스에서 “쎄키니마-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당(ΠΑΣΟΚ, PASOK) 맑스주의 경향”이라는 이름으로 자체적인 신문을 발간했다.

 

과거 노동 운동 진영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역할과 특성에 막대한 환상을 지녔을 때,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그리스의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당(PASOK)과 영국 노동당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지지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혁명과 사회주의를 논하고 “혁명가”들은 선거에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이론”들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혁명적 수사들로 스스로의 치부를 덮고 치장하면서 인민들에게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당에 투표할 것을 촉구해 왔다.

 

부르주아 정당으로서 사민주의당의 주류는 오늘날 뜨로쯔끼주의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전술을 변경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협에 안주하려는 노동조합의 사민주의 지도부의 ‘전통적인’ 아군으로서 반(反)노동계급 공세를 지지해 왔다.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여러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은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대중들과 협력’한다는 미명하에 그리스전노동자총연맹(ΓΣΕΕ)과 전그리스공공노동자총연맹(ΑΔΕΔΥ)의 타협주의적인 노동조합 지도부에 의해 조직된 시위와 집회에 참가했다.

 

이들은 노동 운동 진영에서 그리스 공산당의 전술과 “전노동자투쟁전선(PAME)” 산하의 노동조합들에 대항하며, 그리스 공산당(KKE)이 ‘분파주의’ㆍ‘고립주의’ㆍ‘분열주의’적으로 행동한다는 비방을 확대 재생산한다. 전노동자투쟁전선(PAME)에 대한 적대 행위로 치닫는 이러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친정부 성향의 어용노조들에게 놀아나는 양상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이 2005년 1월 파업에서 친정부적인 노조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예시와 함께 살펴보자.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시위대가 마르스 광장(Champ de Mars)에 집결했다”고 평가했다. 전노동자총연맹(ΓΣΕΕ)과 공공노동자총연맹(ΑΔΕΔΥ) 지도부의 타협주의적 행보에 대해서는 이렇게 논평했다. “전노동자총연맹과 공공노동자총연맹의 지도자들이 비록 주저했고 정부의 도전에 수긍하지 않았지만, 인민들은 도전에 직면했고 시위를 중단하거나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전노동자총연맹과 공공노동자총연맹의 지도자들은 겁에 질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친자본주의적 개혁 정책에 앞장서서 지지해 왔다. 이들의 역할은 사민주의적 정책에 헌신을 굳게 다지며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종하고 절단내며 화해시키는 것이다.

 

뜨로쯔끼주의자들과 좌익환경운동연합(ΣΥΝ)의 우익 기회주의자들은 “‘전투적이고 좌익적인’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에 대한 환상을 지속적으로 유포함으로써, 전노동자총연맹과 공공노동자총연맹 지도자들을 노동계급 단결의 방어자로 소개함으로써, 노동조합 운동에서 이들의 친정부적 역할을 은폐하는 데에 있어 막대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4) 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다양한 유형들에 대한 지지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은 “사회 포럼(Social Forums)”의 핵심적인 지지자들이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체계들을 통해 “세계 혁명”의 주체와 연결 고리가 형성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뜨로쯔끼주의의 수다한 정파들은 “사회 포럼”과 같은 조직들에서 주도적 역할을 자임하고 국제적 수준에서 투쟁을 중시한다는 입장을 확증하는 증거로 여기면서 국가적 차원으로 전개되는 투쟁의 역할을 일축시킨다. 공산주의 운동의 ‘효력이 지난’ 전략 전술에 대립되는 ‘신세대 운동’론과, 반쓰딸린주의라는 형태로 표출되는 이러한 조직 체계들은 뜨로쯔끼주의자들한테 최적의 조건을 조성한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사민주의와 자본주의 통제단들에게 장악된 체제 순응적인 조직체들의 ‘좌익적’, ‘혁명적’ 날개를 자임한다. 이들은 ‘혁명적’ 수사로 대중들에게 혼동을 초래하고 노동계급의 후진 부위와 청년, 소부르주아들을 자본주의 착취 체계 내부로 포섭시킨다.

 

이들은 이이제이(以夷伐夷) 전략과 함께 “반전 운동” 내에서 기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고전적 노선이었던 제국주의와의 타협 및 협력책을 추종한다. (“세계화”의 범위 내에서 미국에 맞서자는 주장 등) 뜨로쯔끼주의 제 조직들의 지분은 런던 시청과 ≪가디언(The Guardian)≫지, 그리고 “유럽 사회 포럼-런던 2005 COO”사의 후원으로 런던에서 개최된 제3차 “유럽 사회 포럼”에서 증대됐다. 이들은 또한 아테네에서 열린 제4차 유럽 사회 포럼에서도 중대한 역할을 맡았다고 자임한다.

 

공산주의(혹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파생한) 운동이 기회주의라는 우산 밑에서 뜨로쯔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더불어 공존하는 조직체를 형성하고자 체계적인 시도가 존재해 왔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유럽 좌파당(Party of European Left)” 창설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영국의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유럽 좌파당에 가맹한 조지 갤러웨이(George Galloway) 노동당 전 의원의 “리스펙트(Respect)” 선거연합에 속해 있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평가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유럽 좌파당 제1차 전당대회는 10월 30일 일요일에 마감됐다. 참가자의 수적 측면에서 대회는 경사스러운 사건이었다. 대회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좌익 정당들의 대표단과 초청객들이 참석했다. 프랑스와 영국 대표단이 유럽 헌법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빗발쳤고, 독일에서의 선거를 계기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5) 유럽 연합의 제국주의적 구조에 대한 입장

모든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의 주된 특성은 유럽 연합(EU)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는 데에 있다. EU의 이러한 성격은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자체적인 내부 문건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다뤄진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과거에 그리스 공산당의 반(反)EU 기조를 ‘민족주의적’ 견해로 간주하면서 집요하게 공격했고, 국제적인 제국주의 체제 내부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그리스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했다.

 

반(反)EU 투쟁의 문제는 불균등 발전에 관한 레닌주의적 이론과,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론,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적(뜨로쯔끼주의에 입각한 분석이 아니라!) 분석, 그리고 한 국가에서 혁명의 시작과 성취 가능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한다.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에게 있어 유럽 연합의 창설은 계급 투쟁의 공간으로 인식되며, 이는 국가에서 지역 차원으로 계급 투쟁의 전이와 세계 혁명론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가 된다.

 

그러나 “유럽합중국” 슬로건의 주요 창시자들 중 하나였던 뜨로쯔끼 자신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세례를 받았었다. 레닌은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에서 이러한 슬로건을 거부했으며, 그와 같은 슬로건의 차용은 불균등 발전 법칙과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직결된다고 적시하였다.

 

유럽 사회 포럼에서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의 지원과 활동적인 참여,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는 슬로건에 대한 지지는 유럽 제국주의의 옹호자로서 실체를 명백하게 폭로하고 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이러한 행보는 스스로로 하여금 미국의 안티테제라는, 유럽 제국주의에 가세하려는 시도를 통해 표출되는 현대 유럽 사회배외주의의 일익으로서 복무하게끔 한다.

 

6)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공격

현대의 모든 뜨로쯔끼주의 조직은 역사적으로 뜨로쯔끼주의 경향의 특징이었던, 반공주의 운동으로서 체계적으로 행동하고, 맑스주의 고전들을 인용하며, “혁명”과 “사회주의” 같은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리스에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의 반공주의는 그리스 공산당(KKE) 당원과 활동가들에 대한 “동지적 공격”이 수반됐다. “동지적 공격”이란, 공산당 평당원들과 지지자들을 찬양하는 동시에 그리스 공산당의 “개량주의적” 정책을 추종하는 정치적 문맹으로 간주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진영 내부를 교란시키기 위해 그리스 공산당원과 청년 공산주의 조직 소속원들이 조직화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동지”로서 찬양하기에 바빴다. 이들의 사상적 타협주의는 이러한 전략에 복무한다. 뜨로쯔끼주의 정파들은 맑스주의 고전들을 이론에 끼워 맞추거나 그리스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맥락과 무관하게 인용한다. 그리스 공산당과 청년 공산주의 조직에 대한 비판의 요점들은 무릇 이와 같다.

 

공산당의 역사적 여정 전반을 기층부 대중에 대한 당 지도부의 배신의 역사로 치부하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부터 시작하여 12월 봉기, 그리스 민주군(DSE), 7월 사건, 아테네 폴리텍대학교 봉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기층과 당 지도부 사이에 괴리가 반복됐다는 주장을 재생산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쓰딸린주의-개량주의 노선”을, 그리스 공산당의 “기만적인 위치”를 이유로 들며, 1920년대와 1930년대 공산주의 운동의 노선이 유럽 혁명의 패배와 파씨즘의 부상을 비롯한 제반 사건들의 원인이 됐다고 믿는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그리스 공산당의 방침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 이들은 그리스 공산당이 신민주당(ΝΔ, ND)에 부역했다는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ΠΑΣΟΚ, PASOK)의 주장을 되풀이한다. 이는 비단 개개 사안들에 국한될 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포럼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과 노동조합 내부의 기회주의ㆍ타협주의적인 지도부에 대항하는 전략, 20세기 사회주의의 경험에 대한 견해로 대표되는 당적 방침의 본질을 겨냥한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따라서 “그리스 공산당이 대규모로 열리는 투쟁에 소극적”이라고, 공산당과 청년 공산주의 조직의 지도부가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청년층의 투쟁을 고무 추동하는 운동에 수구적이며 종파주의적인 방식”으로 임한다고 평가한다.

 

“좌익 진영 통합”의 필요성을 둘러싼 문제는 그리스 공산당과 청년 공산주의 조직에 대해 뜨로쯔끼주의자들(시리자에 속해 있는 국제 노동자 좌익과 같은 경우)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벌이는 “동지적 공격”의 주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다. 앞서 말하였듯,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론에서 강조한 바와 달리 혁명적 사상과 기회주의의 “연결 고리” 역할을 맡고자 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그러한 이유로 정책 기조 전반이 아닌, 좌익환경운동연합(ΣYN) 내에 자체적으로 함유된 공포심과 패배주의를 비난하면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좌파는 가능하다.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동력을 표출하며 까라만리스[그리스 전 대통령.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역임]와 빠빤드레우 가(家)의 쇠퇴하는 당파에 결정타를 가할 수 있다. 새로운 좌파는 오랜 기간 동안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의 특징이었던 종파주의에서 탈피하면 그만일 뿐이다. ≪리조스빠스띠스(Rizospastis)≫(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는 지금도 독일 좌익 진영에 대한 공격 이외에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좌익운동연합 지도부의 가장 중차대한 과제는 패배주의와 결별하는 것이다. 매주 주말 독일에서의 선거철마다 알레꼬스 알라바노스(Aλέκος Aλαβάνος)는 청년들에게 ‘세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자’는 구호를 대신하여 ‘현 상황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찾자’고 촉구했다.

 

이들은 “좌익 조직들”의 동맹에 대한 지지를 넘어서서 뽈리조고뿔로스(Polizogopoulos)와 꼼빠네이(Kompanei)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좌익 사회민주주의’ 연정도 마찬가지로 지지한다. 그러면서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PASOK)의 지지자들과 모든 좌익들에게, 투쟁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며 정치적 의사 표현이 확대될 수 있다는 희망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한다.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PASOK)의 좌익이 어떠할지,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유사한 조건을 만들어 낼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몇몇 이들이 좌익 정당을 우후죽순처럼 만드는 방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중요한 관건은 신민주당에 대하여 조직적인 파업 운동과 집회가 일어날 때, 테살로니끼의 투쟁 현장에서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이 기존에 맡지 못했던 역할을 인수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6. 결론

 

뜨로쯔끼주의 조직들의 반공주의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신좌익의 기회주의적 방침들뿐만 아니라 반동적인 선전 및 실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극소수의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맑스주의적” 가면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동적”인 연막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좌ㆍ우익 기회주의의 모든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는 부상하는 노동자/청년 운동의 급진적 경향을 종속시키고자 뜨로쯔끼주의자들을 활용하고 있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편집자 주] 2008년 제1호에 실려 있다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이 논문은 ≪공산주의 평론≫ 2006년 제6호(11/12월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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