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로티의 신실용주의 비판

 

한동백 | 회원

 

[차례]

1.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의 연관성과 차이점

2. 실용주의에 대한 로티의 정의로부터 알 수 있는 실용주의의 비과학성

3. 로티의 신실용주의의 개괄과 비판

   3-1. 로티의 ‘인식론적 행동주의’가 갖는 주관적 관념론의 성격

   3-2. “지식은 자연의 반영이 아니다”라는 로티의 강변에 대한 비판

   3-3. 로티의 사고 실험으로서 <대척행성인의 존재>가 갖는 비과학성과 허구성

4. 로티의 반맑스주의 선동에 관한 비판

5. 한국 내 각종 운동에서 나타나는 신실용주의적 편향들

6. 신실용주의의 철학적 해독성과 결론

 

 

신실용주의는 미국의 철학자인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가 주창한 사상이다. 신실용주의는 21세기 영미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비록 로티가 살아 있었을 때, 정확히 1990년대까지 그는 분석 철학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대중성을 갖게 됨에 따라, 이제 그의 저서는 영미 철학의 이해에서 거의 필독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로버트 브랜덤, 도널드 데이빗슨, 데니얼 데닛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미 철학계 학자의 대부분이 로티의 저작을 연구하였고, 그 영향을 받았다.

 

로티는 1956년 예일 대학에서 ≪잠재성의 개념(The Concept of Potentiality)≫이라는 논문을 쓰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티는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프린스턴 대학, 버지니아 대학, 런던 대학, 하버드 대학 등에서 수십 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는 2007년 스탠포드 대학 문학과 교수직을 수행하다가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로티는 박사 학위를 수여받을 때까지 줄곧 분석 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사상 형성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떠날 때 그는 스스로 분석 철학을 버렸다고 선언했으며, 그 대신 실용주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전개한 실용주의 사상은 엄밀히 말하여 분석 철학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것이었다.

 

로티의 철학 주저로는 1979년에 내보인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이 있다. 로티의 에세이 단편은 ≪실용주의의 결과(Consequences of Pragmatism)≫[1]로티는 1972년에서 1980년까지의 에세이를 묶은 ≪실용주의의 결과≫를 1982년에 펴냈다.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저술에 실린 여러 에세이는 로티가 실용주의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왜 새로운 실용주의를 제창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 두 저술은 로티가 전개한 정치사상의 근거에 놓인 철학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새로운 실용주의, 즉, 신실용주의는 이전 실용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를 상당 부분 답습하고 있으며, 진리 검증의 가능성 자체를 회의하고 있다. 특히, 언어론에 대한 그의 입장은 관념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로티의 철학은 부르주아 철학의 교당인 각 자본주의 사회의 철학과에서 필수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사상으로 되었다는 점에서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명백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르주아 비과학이다.

 

특히 현재 ‘진보 운동과 노동 운동’ 전반에서 유사 실용주의적 논리, 실용주의적 인과율만을 앞세워서 온갖 비과학을 ‘자본주의의 대안’이랍시고 내놓는 실정에선 더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현상을 본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유적 존재로서 인간’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계를 이루는 층위로서 현상과 본질, 이 사이를 잇는 변증법적 위상 자체를 ‘형이상학’이라고 하며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종합할 수 있다. 오로지 인간에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은 감각(정확히는 감수성)뿐이고[2]단, 감각인상 자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은 운동은 감각을 완전히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그것의 형이상학적 저장이 … Continue reading, 그 감각에 반응하는 인간만 있다는 경험주의의 새 흐름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실용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 운동과 노동 운동’은 오로지 욕구를 가진 인간, 그 욕구를 실현하려는 인간, 그 욕구를 이루기 위한 실증적인 방법이라는 세 가지 테마로서 세계를 해석하려고 한다. 당연히 이 형식논리적인 연쇄 속에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당면에서 작용하는 문제에 대한 우회, 회피로 일관하며, 기층 대중을 상대하는 데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밝히는 것이 아닌, 그때의 불리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으로 보이는 설명’만을 제공하여 기층 대중의 인식에 해악성을 더한다. 기회주의 노동 운동의 상층부는 이를 ‘현실적이며 세련된 전술’이라고 한다.

 

국내 반동 언론은 이 반동적인 흐름에 대해서 해외 사례[3]“사무직노조원 중심으로 구성된 스웨덴사무직노총(TCO)의 매츠 에세미르 연구원은 노동운동의 방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변했다. / 그는 … Continue reading까지 들춰내며 ‘실용주의 정신’에 대한 열렬한 찬양을 마다하지 않는다. 약 10년 전인 2009년, 현대차노조의 기회주의 상층부는 역시 ‘실용주의’를 천명하며 노골적으로 협조주의 노선을 천명한 바 있다.[4]윤기설, “실용주의 선언한 현대차노조”, ≪한국경제≫, 2009. 9. 29.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09092992151> 이것 외에도 2021년 현재까지 <노조 상생>, <국민을 위한 노동 운동>, <합리적인 노동 운동>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이러한 연장에서의 정책을 구상하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 노동 운동의 현주소라 할 수 있겠다.

 

본문에서 살펴보겠지만, 로티의 이론은 논리학, 인간 행동의 연구라는 세계관적인 신실용주의와 그리고 이에 기반한 정치적 행동의 방침으로서 신실용주의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실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국내 ‘진보 운동과 노동 운동’ 내 기회주의 행보는 바로 후자의 방침과 그 어떠한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바, 기회주의 ‘진보 운동과 노동 운동’ 상층부 스스로가 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변명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들의 행동상은 신실용주의의 반동성과 일치한다.

 

이 글은 로티의 신실용주의를, 그 기원인 실용주의에 대한 로티의 간단한 규정을 확인한 후 개괄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1.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의 연관성과 차이점

 

실용주의가 20세기 영국과 미국의 철학 기조에 영향을 받은 것만큼, 실증주의와 무관할 수는 없다. 실용주의학파는 실용주의가 실증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실증주의의 반표상주의(로티의 표현으로서)는 실용주의 핵심으로, 이전 시기의 영국 관념론과 구분되는 제일의 근거로 되고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실증주의와 다른 중요한 두 가지 지점이 있다. 첫 번째 지점은 실증주의가 언어논리에 갇혔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의 세계관으로 되지 못한다는 비판, 그리고 그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서 ‘세계관으로서 실증주의’라는 점이다. 즉 이 지점에서 실증주의는 오로지 학문의 영역에서 머무는,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학문적’의 기반이 되는 논리학으로서의 성격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반면에 실용주의는 실증주의의 논리로 인간의 행동, 정치적 의식(믿음) 등의 문제를 해석하려고 한다. 두 번째 지점은 기존 경험주의(실증주의를 포함하는)에 대한 비판으로서 드러난다. 이 비판은 기존의 실증주의가 논리적 진술을 두 가지(분석적 진리 혹은 명제[5]술어가 주어에 포함되는 개념일 때, 이러한 술어와 주어를 연관시키는 진술을 말한다. 가령 “모든 하마는 포유류이다”라는 진술이 있을 때, 주어 … Continue reading, 종합적 진리 혹은 명제[6]술어와 주어가 서로 연관 관계가 아닐 때, 이러한 술어와 주어를 연관시키는 진술을 말한다. 가령 “어떤 요리사는 수학을 잘한다”라는 진술이 있을 … Continue reading )로 분류한 후 이 분류를 이원화시켰다는 비판, 그리고 그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수단으로서 경험이 그 진술이 표현하는 언어적 상황과 무조건 일치한다고 믿은 것에 대한 비판으로 종합할 수 있다. 실용주의학파로서의 이러한 작업은 분석 철학자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이 주도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논문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현대 경험주의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도그마들에 의해서 조건 지워져 왔다. 하나는 사실의 문제와 독립적으로 의미에 근거한 분석적인 진리와 사실에 근거한 종합적인 진리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구분이 있다는 어떤 믿음이다. 다른 도그마는 환원주의이다. 즉, 각각의 의미 있는 진술은 직접적인 경험을 언급하는 용어로 형성된 어떤 논리적 구성물과 동일하다는 믿음이다.[7]W. V.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p. 20.

 

콰인은 현대 경험주의로서 실증주의가 지나치게 의미 환원주의적 경향[8]이미 앞에서도 논하였지만, 의미 환원주의는 각각의 진술(명제)이 경험을 받는 주체에게 주어진 경험 일반(감각인들)을 언급하는 용어로 형성된 어떤 … Continue reading을 가져왔다고 비판한다.[9]W. V. Quine, loc. cit. 콰인은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서 기존 경험주의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을 논지로 실용주의와 기존 경험주의로서 실증주의를 구분한다.

 

실증주의와 실용주의가 구분되는 첫 번째 이유에 대한 문제의식으로서, 로티의 경우는 자신의 신실용주의 사상을 통해 현실 사회를 다룬다. 리처드 로티는 자신의 저서 ≪미국 만들기≫에서 맑스주의를 심하게 비방하고, 기존 ‘좌익 운동’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합리적인 좌익 운동’을 만들어 나갈 것을 요구한다. ≪미국 만들기≫를 통해 그가 보여 주는 반동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그의 신실용주의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과, 그에 대한 비판을 선차적으로 한 다음 확인하기로 하자.

 

이미 확인한 것처럼,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의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감각주의라는 틀이 전제되어 있으며, 감각인(경험 일반)에 대해 감각인상이라는 표상화를 거부하고, 감각인을 감각질이라는 물질적 개념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속류 유물론, 소박실재론의 성격을 가진 같은 계열의 사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2. 실용주의에 대한 로티의 정의로부터 알 수 있는 실용주의의 비과학성

 

로티의 신실용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선, 그의 신실용주의가 잇는 개념인 실용주의를 알 필요가 있다. 특히, 신실용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로티가 기존 실용주의를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로티는 ≪실용주의의 결과≫에서 실용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실용주의의 첫 번째 특징은 반본질주의에 있다. 제임스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실용주의에서 ‘참된 것’이란 ‘믿기에 좋은 것’이다. … 두 번째 특징으로 실용주의는 어떠한 한 사실의 당위성을 이끌 최종적인 결론과 존재에 관한 사시(邪視)에는 어떠한 인식론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하여 사실과 가치 사이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 마지막 특징으로 실용주의 논리의 구성은 대상, 마음, 언어 등의 본성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다. 단, 탐구자에 의해 제기된 <대화적인 성격의 제약>만이 소소한 제약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10]Richard Rorty, Consequences of Pragmatism,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pp. 163-164.

 

로티의 매우 간단한 정의를 통해 기존 실용주의가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

 

실용주의의 첫 번째 정의에 따르면, 실용주의가 말하는 ‘참된 것’ 즉, ‘진리’는 엄밀한 철학적 수행, 방법에 의해 보편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실용주의가 감각주의[11]인간의 오감이 모든 인식의 전부이며, 오감 외의 이질적인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 감수성주의라고도 한다.를 기반으로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전제할 때, 실용주의의 ‘참된 것’은 그저 감각에 의해 “참된 것일 것이다”라고 주관적으로 믿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감각적 확신이라는 즉자적 단계에서 인지된 감각의 총합에 불과하거나, 감수성의 단계에서 인지된 생리학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오감이 인식 틀의 전부라는 주장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발전하는 현대 인지 과학에서조차 그 한계성을 절감한 틀이다. 이른바, 1990년대 말 행동주의의 붕괴는 인간의 행동 양식을 관찰할 때 단순히 오감에 의해 축적된 정보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 인지적 차원에서 훨씬 복잡한 사유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 것으로부터 생겨난 결과이다. 한편, ‘참된 것’이 오감에 따라 그렇다고 ‘믿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인데, ‘믿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인지의 주체인 개인에 따라 그 내용이 변하기 때문에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실용주의의 첫 번째 특징을 종합한 결과, 실용주의가 매우 강한 주관주의 경향을 내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급적 관점에서 볼 때, 실용주의의 주관주의는 노동계급이 착취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계급 의식을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철학적 당위성을 완전히 잘라 버린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실용주의에 따르면 계급 의식은 그것이 선진 사회로 갈 수 있게 하는 바탕이라고 믿는 노동자 개인의 주관적인 감각적 확신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의 두 번째 정의를 통해 실용주의의 세계관이 오로지 감각계(정확히는 감수성의 세계)[12]이후 신실용주의에 관한 설명에서 로티는 현상-절대의 양분 자체를 거부하며, 현상계라는 용어를 쓰는 것조차 거부한다. 로티에게 세계는 오로지 … Continue reading만을 인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대해서 본질, 그에 근거하는 현상의 측면, 그리고 그 둘을 매개하는 변증-실천이라는 인식의 세 가지 토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실용주의 사상이 과거 영국 관념론의 주자인 데이비드 흄이나 조지 버클리의 전통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실용주의는 사실과 가치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차이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인식 주체가 감각을 인식할 때, 그러한 감각이 감각인상이라는 표상화 과정을 거쳐서 저장된다는 영국 관념론과 대비되는 인식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입장에 대해 로티는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에서 반표상주의(antirepresentationalism)라고 칭했다.[13]Richard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p. 37.

 

실용주의는 한편으로 피착취자가 대자적 존재로서 갖는 혁명적인 사상에 대한 강렬한 반대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실용주의는 오로지 감각계만 인정하며, 현상과 본질이라는 두 가지 영역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혁명적인 사회 운동도 실용주의에 따르면 그저 현상적 층위에 머무는 공허한 운동이 된다.

 

로티가 언급한 두 번째 특징을 가진 실용주의는 단순히 “저장된 감각들(감각질)의 표출”이라는 인지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 사유 능력에 관해 설명할 때 그 치명적인 무능력함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감각으로만 이루어진 현상실재의 세계(경험 세계)만 존재하고, 인간의 인식, 사고 체계도 모두 감각인의 종합/복합에 의한 것이면, 인간의 인식 능력은 감각적 확신에만 머물게 된다. 그런데 감각적 확신 하나만으로는 인간의 수학적 사고 능력, 과거 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 같은 것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일어섰는지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실제 사용되는 수학적 개념을 정식적으로 바라볼 때, 수학적 개념은 단순 감각인/감각된 것의 총합으로부터만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적 개념은 의식 제 내용의 질적 변화 없이는 사유될 수 없다. 가장 쉬운 예로, 평면 기하학 체계에서 정삼각형을 이루는 세 각이 각각 60도의 일정한 값을 갖는다는 사고는 감각인의 단순한 종합만으로 도출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다. 애초에 감각인은 정삼각형을 구성하는 변이라는 것을 구성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직선도 마찬가지다. 현재까지 연구된 물리학의 발전의 성과에 따르면, 현실에서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감각대상은 직선이라는 수학적 성격을 가질 수 없다. (감각이 주관적인 상이라는 전제에 따라) 가령, 우리가 흔히 직사광선이라고 하는 빛이란 것도 실은 수학적인 의미에서 완벽한 직선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광자(photon)가 갖는 파동-입자 이중성을 알면 쉽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마찬가지로, 사실 광자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관찰된 모든 물질이 사실은 파동-입자 이중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물질적 존재인 감각대상에 대한 감각적인 인식을 통해 직선을 찾을 수는 없다. 사실 파동-입자 이중성까지 나아갈 필요가 없이, 직선을 구성하기 위한 정적인 두 점이라는 3차원 이하의 구상부터가 단순 감각적 확신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학 발전의 지난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수학적 개념으로서 직선을 구상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인간 의식의 발달 가능성이 제기된다.[14]조셉 레빈(Joseph Levine)과 더불어 그가 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영미 철학의 일원들은 이러한 문제 제기를 설명적 간격(explanatory gap)이라는 용어로 … Continue reading 그런데, 실용주의의 두 번째 정의에 따르면, 인간은 수학적 개념을 정립할 수조차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실증주의의 모순이 폭로된다.

 

혹자는 이에 대해 “그 무수히 많은 감각질을 종합하는 과정 속에서 수학적 엄밀성에 기초한 개념이 등장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로티를 비롯한 실용주의 학자들은 인간 인식, 논리학에 대해서 술어 논리[15]프레게(Frege)와 러셀(Russell) 등 수많은 분석 철학자들은 형식논리학의 기반을 구축했던 명제 논리가 실제 논리적 서술이 될 수 없음을 비판하면서 술어 … Continue reading의 무미건조한 나열인 형식논리학에 기초한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사고란, 감각질로서 술어화될 수 있는 모든 개념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에 따른 질적 전화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감각인으로서 나열된 것의 단순 총합의 언어적 표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감각질의 단순한 나열로서 사유할 수 없는 수학적 개념의 존재성이 반론으로 제기될 때 그들은 항상 (속류 유물론에 대항하는, 더욱 관념론적인 경향으로서) 유심론자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과거 시기 혁명적 부르주아의 철학,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노동계급의 철학에서 인간의 수학적 사고에 대한 해명을 찾을 단초가 어떻게 제공되었을까?

 

헤겔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성과를 언급하고, 그러한 기하학의 발견에 대해 누구나 참인식할 수 있는 무규정적인 공리자(공리, 헤겔식으로는 모순의 시초로서 순수유, 순수유-무, 무)[16]순수유는 그것이 갖는 성격으로 인해 무(無, nichts)로 화한다. 최초 존재는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이고, 그런 의미로 무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 Continue reading를 시원으로서 하는 사유의 운동을 학(學)으로서 형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헤겔은 수학적 공준의 성립을 존재와 무로부터 생겨난 대립의 가장 처음의 지점이라 했다. 따라서, 헤겔이 말하는, ‘모순 운동의 실체를 파악하는 이성’은, 공준에 기초한, 동시에 그 공준으로부터 나아가려는 수학적 엄밀성에 기초한 의식이다. 이 사유를 통해 상호 대립으로 인한 생성으로서 정재(定在, 현존이라고도 한다)의 이면을 파악할 수 있다. 정재는 대립의 내용(규정성 또는 그것의 질)으로서 계기이다. 실재 이면의 세계를 파악하는 정신으로서 대자유(對自有)는 세계정신을 이루고 있는데, 참된 인식이란 세계정신이 계기로서 현상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감지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에 따르면 유클리드 공준의 발견은 이성의 세계에 한 발짝 내딛게 하는 가장 초보적인, 사유의 운동이란 점에서 새로운 모순의 국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훗날 이 성과는 쌍곡 기하학상의 여러 위구(僞球)들이 발견되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지양 발전되었다.

 

다른 방향에서 맑스는 유물론적 해석을 제공한다. 이 입장에 따라 헤겔적 계기인 ‘이성의 간지로서 계기’는 자연의 규정력 일반(물질의 존재 양식)으로서, 자연사적 과정으로 대체된다. 맑스는 그 운동의 총체를 세계정신 및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관념 덩어리라고 보지 않았으며, 물질적인 것의 집적이라고 하였다. 감수성/감각적인 수준에서 주관적인 상으로서 취급되는 의식(물질의 반영으로서)에서 수학적 개념을 찾을 수는 없지만, 변증법적 사유는 인식 대상의 객관적 운동을 참되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물질 운동은 인간이 사고하는 모든 수학적 개념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반영인 의식으로부터 이러한 수학적 개념의 추출은 인간의 이성적 인식의 결과이다.

 

그는 소외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생산 활동이 갖는 자아실현의 성격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인간의 노동은 단순히 감각된 대상의 피상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된 것, 그리고 그것을 생산 활동과 접목하려는 목적의식으로부터, 감각된 대상에서 단편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창조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후 맑스가 구사하는, 물질과 그 반영으로서의 의식, 현상과 본질을 잇는 일원론 세계관은 모두 이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을 통해 지금까지 인간이 이루어 낸 수학, 과학, 기타 물질적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 반면, 실증주의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헤겔과 맑스의 두 견해 모두 수학적 공준을 부정하지 않으며, 수학적 공준에 기초한 연역성을 귀납성과 함께 합리적 사유의 두 축으로 둔다. 단, 헤겔은 그것이 순수사유 일반으로서 행해지는 것이라 보았고, 맑스는 그것이 자연적 규정성의 내용이고, 인간의 생산 활동으로부터 파악된 것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두 견해 모두 인간의 창조적인 의식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중심축을 잡는다. 이는 실증주의/실용주의의 감각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실증주의/실용주의가 인간의 수학적 사고력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공준의 성립 가능성에 대해 회피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면, 헤겔과 맑스의 견해는 이러한 경향에 대한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실용주의의 세 번째 정의에 따르면, 실용주의가 변증법을 거부하는 사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을 형성함에서 그 철학의 내용은 인간이 처한 구체적인 환경, 예를 들어, 생산력의 발전 정도, 그 정도에 따른 현실 사회의 새로운 양상들에 의해 규정된다. 더군다나, 논리의 영역은 그 일정 정도의 성격상 의식적인 것이기에 언어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변증법에 따른 모순 이해의 단계성에 따라 변화한다. 즉, 논리라는 영역은 정적이고 고정된 영역이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그에 따른 일정한 의식 정도, 목적의식, 합목적성에 따라 질적 변화를 수반한다. 논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변증법적인 이해이다.

 

반면, 실용주의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논리가 대상, 언어, 마음 등에 제약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하면서도, 그 논리 일단에 접근하는 ‘탐구자’의 대화적인 문제 제기만이 그것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용주의가 갖는 두 번째 정의에 곧바로 위배되는 모순을 갖는다. 왜 위배된다고 할 수 있는가? 앞서 살핀 것처럼 로티는 실용주의에 대해 “실용주의는 어떠한 한 사실의 당위성을 이끌 최종적인 결론과 존재에 관한 사시에는 어떠한 인식론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실과 가치 사이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특징을 갖는다 하였다. 그렇다면, ‘대화적인 문제 제기’는 질적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 고정된 성격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논리가 대상, 언어, 마음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언어적인 성격을 갖는 ‘대화적인 문제 제기’는 그것 그대로 논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로티는 실용주의 논리의 탐구자가 대화적인 양식으로 제기하는 문제를 언어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인가? 그것은 언어가 아닌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라는 것인가? 세 번째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이 둘이 다른 층위에 놓인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의 두 번째 정의에 따르면 그 둘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실용주의가 갖는 세 가지 특성을 살펴본 결과, 실용주의는 주관주의, 감각주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비과학적인 사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로티는 스스로가 실용주의를 계승한다고 자처하였고, 스스로의 사상을 <신실용주의>라고 하였는데, 과학성이 빈약한 실용주의를 로티가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3. 로티의 신실용주의의 개괄과 비판

 

3-1. 로티의 ‘인식론적 행동주의’가 갖는 주관적 관념론의 성격

영미 철학과 그 오래된 전통인 과거 영국 관념론이 그러했듯이 로티의 사상에서도 주관적 관념론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로티는 과거 실용주의가 의식적인 측면을 과도하게 경시했다는 지점을 비판한다. 그는 과거 실용주의가 신체 기관이 멀쩡하면 모두에게나 느껴지는 감각인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인에 대한 인식 주체의 믿음[17]그는 의식 일반을 의식이라고 표현하기보단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현재 영미 철학에서 의식 문제를 단순히 모든 감각에 대한 ‘믿음’으로 … Continue reading까지 물적인 반응의 연속으로 취급한 것에 반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존 실용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피처와 암스트롱이 지각에 의한 보고를 해석했던 것처럼 고통을 보고로 해석한 결과로 고통을 신체 조직의 일부가 손상됐다는 믿음을 획득하는 것으로 뜯어고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이원론적인 직관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기에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조직의 손상과 그 주위의 붉은색 대상이 있다는 믿음을 획득하려는 것보다는 통증과 붉은색을 감지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등 수많은 무언가가 더 있다는 직관이다. … 이를 다루는 다른 방식으로 정신적이라는 용어는 현상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한정, 귀속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 역시 심신 문제가 어떤 것이든, 뉴런을 느끼는 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반박과 충돌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표상화, 지향적인 상태 등을 정신에서 추방한다면 심신 문제가 아닌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 같은 것만 남게 될 것이다.[18]Richard Rorty, op. cit., 1979, pp. 31-32.

 

로티는 “지각에 의한 보고를 해석했던 것처럼 고통을 보고로 해석한 결과로 고통을 신체 조직의 일부가 손상됐다는 믿음을 획득하는 것으로 뜯어고칠 수도 있다(‘지향적인 측면’).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이원론적인 직관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기에 문제가 생긴다”라고 언급하며 표상주의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주장한다. 즉 상세한 논리적 연관과 설명이 없이, 감각된 것과 그 실질적인 내용이 그 ‘감각된 것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믿음(마음)으로 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여러 가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를 다루는 다른 방식으로 정신적이라는 용어는 현상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한정, 귀속시킬 수도 있다(‘현상적인 측면’)”라는 언급을 통해, 그 ‘믿음’ 자체가 감각인들의 단순 총합에 불과하다는 인식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은 심신 문제에서 심(마음)을 완전히 배제하고 결국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은 무생물과 생물 사이의 기계적인 관계라는 소박한 자연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티는 이 점에 대해 더 나아가서 “정신적인 것을 현상적인 것[의 종합]으로 정의하게 되면 어떤 개인의 실제 믿음은 언제나 보이는 것과 같지는 않다는 명백한 반론이 제기된다”[19]Ibid.라는 비판을 제기한다.

 

그가 언급한 대로 물질과 의식 문제를 ‘지향적인 측면’으로 파악할 경우, 그 규준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관념론적 한계에 봉착하게 되며, 극심한 비과학성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현상적인 측면’으로 파악할 경우, 속류 유물론으로 나아가게 되며, 인간 행위에 어떠한 당위성도 부여할 수 없게 된다. 이 지점에서 로티가 반표상주의라는 실용주의의 대전제를 어기지 않으면서 감각하는 사람과 의식하는 사람에 대해 나름의 ‘통일적인’ 방식으로 규명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다룰 내용을 통해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 대신, 유아론의 도입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이라는 모든 존재론적 구분이 <데카르트적 이원론>이라고 지적한다.[20]Ibid., pp. 39-40. 그는 이러한 입장에 근거한 자기 논리 전개를 자신의 저서에서 계속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는 틀린 주장이다. 데카르트가 말년에 ≪정념론≫을 통해 육체와 마음의 구분에 관한 이원적 견해를 철회했다는 것을 차치하고, 흔히 그가 말하는 이원(二元)이란 것은 물질과 정신이 각자 독립적인 토대를 갖추고 나아간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과 본질의 존재론적 구분은 이러한 심신 이원성이 아니라 심신 일원성을 주장하는 세계관에도 얼마든지 도입될 수 있다. 가령, 스피노자는 심신 일원성을 견지한 상태에서의 존재론적 구분을 시도했다. 헤겔도 마찬가지이다. 개별 현상 속의 본질, 그리고 본질에 의한 개별 현상이라는 토대에서 변증논리학의 적용은 심신(또는 물심) 일원성의 기반 속에서의 존재론적 구분을 가능하게 해 준다. 로티는 모든 존재론적 함의가 이원론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기초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의 다음 언급을 살펴보자.

 

인식에 대해 대상 사물에 관한 외양의 면만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 본질을 파악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면 우리는 신(新)이원론자[21]로티는 현상과 본질을 개념적으로는 구분하는 논리, 존재론적 함의를 갖춘 모든 입장을 신이원론이라 칭한다. 따라서, 그의 ‘신이원론’ 정의에 … Continue reading와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 마음, 기타 정신적인 성분들은 얇고 가느다랗고 반투명한 사물들을 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뺀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나? 고통을 감지하게 해 줄 수 있는 느낌들이 어떤 개인의 두뇌 신경의 속성인 한, 그것이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한 보고와, 그것과는 다르게 느껴진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보고 사이의 인식론적인 차이가 존재론적인 차이를 만들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어 보인다.[22]Richard Rorty, loc. cit.

 

그는 감각은 즉 현상의 외양을 보는 것이기에, 그 외양(아주 외형적인 차원에서 접근한 감각인을 산출하는 바로 그것)에 따라 감각이 형성되는 한, 인식론적 차이가 존재론적 차이(로티가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로 그것)를 만들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바로 그 감각이 외양의 전부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한계를 포착함을 통해,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가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부정성). 이러한 문제의식은 ‘외양 차원에서 인지를 통해 얻어낸 모든 감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외부 사물의 전부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으로부터 나오는 문제의식이다. 가령, 우리가 과일인 사과의 실질을 규명한다고 할 때, 사과에 대한 외양의 인지가 갖는 한계점을 아주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과를 본다고 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분자체, 그리고 그 분자를 넘어선 기본 입자를 보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과를 구성하는 분자체의 규명을 통해 여러 가지 과학적 방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동원했고, 마침내 사과를 구성하는 분자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수학적 방법 자체가 이미 ‘외양 차원에서 인지를 통해 얻어낸 모든 감각’이 아닌 것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감각 일반으로부터 환원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인간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규명할 때, 결국 인식론(인식된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의 조우, 인식 주체의 인식 방식 등에 관한 모든 논리적 문제)과 존재론(인식에 대한 기본 틀을 제공하는 위상, 그 특정한 위상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 문제)의 문제에 대한 통일적인 접근이 필요해진다. 이것이 바로 셸링, 헤겔 등 혁명적 부르주아 철학에서 제기했던 문제인 것이다. 헤겔은 그것을 존재에서 무, 무에서 정재, 정재에서 대자유(대자적 유), 그리고 대자유에 내재된 차이, 대립, 모순의 운동 내에서 파악할 수 있는 도량(度量), 즉 질-량 전화, 양-질 전화의 내용으로 연역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변증법적 운동을 인식함을 통해 감각 일반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여러 수학적 개념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하였다.[23]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이를 순수량(연속량-분리량)과 ‘분리량→정량’(수, 외연량-내포량)의 관계를 해석함으로써 아주 세밀하게 논의한다. 예를 들어, 헤겔의 존재론적(유론적) 범주에서 다루어지는 개념들은 모두 수학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헤겔이나 맑스는 인간 사고 지평의 발전 가능성을 노동과 엮었다. 비유기적인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활동, 즉 생산 활동과 관련된 문제에서 그 해답을 찾은 것이다. 단, 맑스는 유물론 해석이 뒷받침되었다. 맑스에 따르면 자연은 이성의 간지로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모순 운동으로서 물질의 총체이다. 그것을 대하는 인간 스스로가 갖는 모순의 직면을 통해 질-량 전화, 양-질 전화로서 수학적 개념의 도출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반면 수학적 개념을 단순히 질료에 대한 감각인의 감각표상(감각인상)화로 설명한다면(예를 들어, 질료엔 없었으나, 그것이 표상으로 되면서 질료에 없던 정적 성질이 생겨난다는 식의), 필시 왜 외부에 실재하는 물질이 인식되었을 때 ‘표상’으로 되는지 그 과학적 해명을 못 하게 되는 한계에 봉착한다. 반대로 순수 감각주의는 인간이 수학적 개념을 추상하는 것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후에 확인하겠지만, 로티는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

 

로티는 다음으로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보편을 파악하는 마음’의 속성에 대해 어떻게 규정했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세 가지 문제들(지성, 지식, 언어) 사이의 몇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나는 ‘단순 물리적인 것’(물체, 중추신경계, 본성, 실증 과학에서 다루는 기타 개념)에 대비하여 마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을 가려내는 방법의 목록을 제시할 것이다.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철학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정신적인 것의 표지라고 생각했던 몇몇 특징은 다음과 같다.[24]Richard Rorty, op. cit., 1979, pp. 45-46.

 

로티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규정한다.

 

1. 자신에 대해 무오류로 인식할 수 있는 특권, 그리고 그 특권적인 접근 / 2. 육체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능력 / 3. 비공간적인 부분, 요소를 가지는 것 / 4. 보편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 5. 현존하지 않는 것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에 대한 지향 / 6.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 7.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는 능력 / 8. 특정 사회 집단의 일부분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 / 9. 세계 속에 있는 어떤 대상과 동일시되지 않을 수 있는 능력[25]Ibid., p. 46.

 

로티는 위와 같은 아홉 가지 구분 설정이 엄밀한 기준으로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비록 그가 나열한 몇 가지 규정은 충분히 엄밀성이 있다고 해도 되지만, 그는 이를 고의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이들이 말했던 ‘보편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마음’이 보편자를 규정하는 방식은 보편자를 개별 존재자로부터 연역한 것이 아니라, 즉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문제들을 고찰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러한 규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성격을 자의적으로 규정한 데서 나온 것이며, 오히려 물질-정신의 문제는 그 보편-개별이라는 구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라고 한다.

 

지향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연관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향적인 것을 현상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현상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자를 실체화하여 그 보편자를 시공간 속에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도 그것을 개별자로부터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개별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편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규명하려는 철학자에 따르면: 인용자] 보편-개별 구분만이 우리가 행해야 하는 유일한 형이상학적 구분임이 밝혀진다. … 보편개별의 구분은 마음(정신)-물리(물질)의 구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물리 구분이 보편개별의 구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26]Ibid., p. 41.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그의 이러한 발언은 철학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그가 언급한 ‘보편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취급하는 철학자들의 논리를 모두 위와 같은 설명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외부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이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현상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동일시하기 위해 보편자를 실체화하며, 그 보편자를 개별자로 생각한다는 식과 유사한 사고는 영국 관념론자인 존 로크(John Locke)나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가 구사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 대한 반례는 영국 경험론이 아닌, 대륙 철학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가령, 스피노자(Spinoza)는 그가 지적한 ‘보편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취급하는 철학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현상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동일시하려고 한 바 없다. 스피노자는 현상적인 것은 능산적 자연의 양태가 갖는 전체 관계로서 산출되는 것이며, 개별 현상에 대한 정합적 관조를 통해 보편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언급하였는데, 그는 보편으로 다가감이 개별 현상 자체에 천착하는 것 이상의 성격으로부터 도출된다고 하였다. 즉, 추상적 보편과 같은 층위를 이루는 (이성적 사고의 또는 실체의) 시작점을 통한 연역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일련의 ‘상승의 기회’를 개별에 대한 정합적 관조(이성지)를 통해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단순히 ‘습득된 개별 현상의 조작을 통한 추상적 보편의 앎’을 주장한 게 아니다.[27]스피노자는 현상과 본질이라는 양분의 논리 속에서, 현상의 개념을 아무리 모으고 그 속에 천착하는 일련의 논리를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 Continue reading 여기서 추상적 보편의 앎은 비물질(물체)적인 것이지만, 개별 현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로티는 ‘보편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다루는 철학자들의 논리에 대해, 마음-물리 구분이 “현상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동일시하기 위해 요청된 보편자”와 그것의 실체화로서 ‘개별자’의 구분에 의존하는 전제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례는 수많은 철학자의 논리로부터 확인된다.

 

예를 들어, 헤겔은 지향적인 것을 현상적인 것과 동일시한 바 없으며, 보편자를 실체화하긴 했지만, 그것을 개별자 자체로 간주하진 않았으며, 둘을 상호 지양의 관계로서 설명하였다.

 

헤겔은 무규정적인 공리자로서 몇 가지 실존하는 수학적 개념의 정립(앞에서 언급한 유클리드 기하학이 대표적이다)을 들었고, 그 수학적 개념에 기반한 문제의식이 사유가 무규정적인 공리자로부터 한 발짝 더 내딛고(즉 이성의 간지에 의한 계기로서 현상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그런 것이 세계의 모순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사유는 그 대립된 것의 통일을 추구하는 속성을 갖고 있는데, 인간 지성사는 특정 시기에 보인 인간 사고의 지평이 훗날 오류라고 판별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떠한 통일적인 인식을 통해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취급했다는 것을 흔히 보여 준다. 이는 헤겔의 ≪철학 강요≫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간단하게 표현된다.

 

정신(사유)은 형식상 일면성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형식들을 절대적 형식으로 높이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을 내용이 되도록 규정하며, 내용과 동일한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내용 속에서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필연성을 인식한다. 철학이라고 하는 이러한 운동은, 종말에 가서 그 자신이 개념을 파악하기 때문에, 즉 오로지 그 지식만을 되돌아보기 때문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28]게오르크 헤겔, ≪철학 강요≫(1817), 서동익 역, 을유문화사, 1998, p. 481.

 

천동설과 지동설의 문제, 헤겔 활동기로부터 한참 이후이지만, 고전 물리학과 일반 상대성 이론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것을 드러내는 아주 대표적인 양상이라 할 수 있다.[29]오늘날에는 천동설의 오류에 대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동설이 확고한 진리로 되었지만, 근세 시기 초까지는 천동설은 나름대로의 … Continue reading 헤겔은 자기가 살았던 시기와, 그 이전 시기 지성사의 내용으로부터 “사유는 상호 대립자를 통일된 관점에서 바라보는 본연적 성격이 있다”고 규정한 동시에 다른 어떠한 본연적 성격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헤겔은 관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지만, 사유(인간의 이성적 활동)가 갖는 위와 같은 규정은 인간 행동의 합리성과 관념적인 이성 사이의 연결성을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있는 첨단의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진보적이었다. 맑스 또한 위와 같은 설명 방식을 지양 발전의 원리를 통해 유물론적 해석으로 발전시켰다.

 

로티는 ‘보편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다루는 철학자들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지향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연관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지향적인 것을 현상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현상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자를 실체화하여 그 보편자를 시공간 속에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도 그것을 개별자로부터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개별자로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사고를 고정시킬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위 헤겔의 예시를 포함해서, 이전 철학자들의 철학을 탐구할 경우, 그가 언급한 특징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반대가 되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결국 로티가 말하는 ‘전통적인 철학’의 체계에 관한 오해는, 그가 기존 철학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로티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대안에 대해서 로티는 자신이 1989년에 저술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에서 상세히 밝힌다.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일 수 없으며,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진리가 우리의 밖에 놓여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문장이 없으면 진리가 없으며, 문장이란 인간 언어의 요소이며, 그리고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문장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또는 밖에 있는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밖에 존재하지만, 세계에 대한 기술은 그렇지 않다. 오직 세계에 대한 기술들만이 진리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인간 존재에 의해 기술되지 않은 세계 그 자체는 진리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30]Richard Rorty,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p. 5.

 

로티는 과감하게 ‘현상적인 측면’이든 ‘지향적인 측면’이든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현상과 일치하지 않으며, 두 측면을 기술하는 방식으로서 언어가 구성하는 세계와, 그 외부 세계(즉 외부의 실재들)는 본래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형성한 언어 관계가 곧 유일하게 다뤄질 수 있는 실체가 되며, 그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물질은 그러한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가 택한 것은 결국 주관적 관념론의 가장 저급한 단계에 있는 유아론(唯我論)이었다. 로티는 정확히 언어 활동으로 표현됨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에 대해, 기존 철학의 진리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진인 주장’으로 대체한다. 그는 ‘진인 주장’의 성립 단서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진인 주장이란 언어놀이로서 표현되는 언어 활동이 언어 사용자의 사회적인 실제로서 현실적인 행위를 충분히 지목할 수 있을 때를 의미한다. … 진인 주장은 단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게임’이라 말한 사회적 실제에 있어서 성공적인 행위이다.”[31]ichard Rorty, Hermeneutics, General Studies, and Teaching, George Mason University, 1982, p. 3.

 

로티는 사회적 총체를 파악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의 진리 자체가 없다고 하고, 그저 인간의 다양한 언어 활동이, 그 언어 활동자가 행하는 여러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의미를 갖췄을 때만 그러한 언어 활동으로서의 진리만 존재한다고 본다. 사실 이러한 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궤변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입장은 유아론적인 회의주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 표현 자체가 객관적 실재를 재단(裁斷)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어 놀이가 진리라는 측면에서, 언어가 객관적 실재를 재단한다면, 객관적 실재는 언어 이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은 언어 형성 전에 존재했다. 이로써 언어가 객관적 실재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 영양 세균과 같은 초기 생명체가 등장하기 전, 코아세르베이트 단계나 그보다 더 단순한 형태의 분자 구조에 언어 활동이 존재했다는 것은 증명된 바 없으며, 언어 활동의 일반적인 정의와 규정을 보았을 때, 세포 전 단계의 분자 복합체가 언어 활동을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활동의 탄생 시기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논란이 많기에 하나의 입장으로 정리하기 어렵지만, 다른 연구들 속에서도 언어 활동에 대해 논할 때, 물질의 복잡화가 증대됨에 따라, 세포를 이루는 구성물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가 등장한 이래, 거듭된 진화를 통해 아주 느린 속도로 형성된 것이라는 전제는 모두가 인정한다. 물론,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이 주관적 관념의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상의 경우 이러한 당연한 설명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지만, 현시대의 과학 성과를 모조리 부정하지 않는다면, 주관적 관념이 곧 실재 그 자체라는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활동은 구두 언어, 문자 언어, 기타 특수한 언어 등으로 나눠진다. 복잡화된 물적 상호 작용으로서 인간이 존재하기 전의 동물들도 언어의 다양한 형태에 준하는 수준으로서, 각자 방식의 유사 언어 활동을 하였다. 유사 언어 활동은 스스로의 생물학적 조건, 처한 환경의 조건에 따라 다양화되었다. 한편, 인간 이전의 생물체도 삶을 유지하기 위한 유사 생산 활동(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생산 활동이라 할 수 없는)을 했던바, 이러한 활동이 각자 언어 활동의 내용을 구성해 왔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자연 언어의 탄생). 유인원이 진화를 거듭해서 사피엔스종이 탄생한 이래, 그리고 원시 사회에 진입한 이래 인간이 갖는 추상적 사유에 관한 능력은 인간종이 갖는 자연적 성격(대표적으로 뇌의 발달에 따른 지능의 발달)과 사회적 성격(노동 실천)에 따라 증대하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생산 활동의 고도화에 있어 이전 종에 비해 월등한 발달 정도를 나타내게 되었다.

 

엥엘스는 “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노동의 발달은 상호 원조와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 작업의 경우들을 증가시켰고 이러한 공동 작업의 유용성에 대한 의식을 모든 개인들에게 뚜렷하게 해 주었다. 요컨대, 형성되어 가고 있던 인간들은 서로에게 말할 어떤 것이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욕구가 그 기관을 창조하였다: 원숭이의 발전하지 못한 후두는 계속해서 증폭되어 가는 변조를 위한 변조를 통해서 완만하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변혁되어 갔고, 구강 기관들은 분절 문자를 하나하나 발음하는 것을 점차로 배웠다.[32]≪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p. 382. (강조는 엥엘스.)

 

이런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언어 활동은 자연을 인식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뇌의 발달, 그리고 그에 따른 생산 활동의 다양화 등과 조우하여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언어 활동은 자연의 반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자연 원리는 언어 활동이 나타나기도 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연 원리, 자연 원리를 이루는 가장 객관적인 단위인 물질의 자기 운동 내용을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는 언어 활동 이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 활동 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동차’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든, 그리고 그 자동차라는 단어가 어떠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그러한 사용이 실제 인간 욕구를 반영하는 가장 첨예한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자동차’라고 부르는 대상이 현실에서 기능하는 성격, 이것이 갖는 사용가치는 위와 같은 언어 표현이 생겨나기 이전에 존재한다. 물론, 그러한 ‘자동차’라는 존재를 도대체 어떻게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를 따졌을 때, 단순 기능적 차원 이상의 층위에서 그것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순 기능적 차원 이상의 층위’가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언어 행위일 수는 없다.

 

로티와 달리 맑스는 언어 활동을 사회적 산물이라고 하였다. 단, 로티의 주장과는 관계가 없는 영역에서, 오늘날 언어에 대한 맑스의 입장은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언어 활동을 완전한 감각적 인식의 층위에 두는 입장(즉 완전히 생물학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불과하다는 입장, ‘빠블로프적 반영 이론’이라고도 칭해진다), 또는 개념적 사유와 같은 층위를 구성하는 수준의 정신적 활동에 두는 입장(일례로, 1930년대 쏘련 언어학자 마르의 언어 상부구조론이 이에 속한다).[33]쓰딸린은 ≪맑스주의와 언어≫에서 둘 중 하나의 입장에 천착하는 것을 비판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언어가 갖는 ‘현실적 도구성’에 집중했기에 … Continue reading 어떻게 보면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입장 사이에서 맑스의 언어에 관한 입장이 무엇인지, 아직 논쟁 중에 있다.[34]≪독일 이데올로기≫의 확정적인 문구들을 볼 때, 맑스는 언어가 사회적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다층, 다양한 … Continue reading 관념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던 헤겔은 ≪인륜성의 체계≫에서 발성어 활동이 절대의 영역에 속하는 정신 일반을 표현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했으며, 발성어에 신비한 기능이 존재한다고 강변한 바 있다.[35]게오르크 헤겔, ≪인륜성의 체계≫(1803), 김준수 역, 울력, 2007, pp. 37-38. 언어에 대한 헤겔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맑스가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지양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오늘날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입장이든, 자연과 분리된, 형식화된 언어 표현, 활동 자체에서 진리의 외화에 불과한 진인 주장을 찾을 수 있다는 식의 비과학적 설명을 맑스의 견해, 이후 여러 맑스주의적 해석에서는 찾을 수 없다.

 

로티는 자신이 내세우는 대안, 그 진리관이 수많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듯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거울로서 지식’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주야장천 설명한다. 왜냐하면 지식이 자연의 반영이 아니라면, 지식 일반을 기술하는 언어 활동도 역시 자연의 반영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언어 활동이 지식 일반을 기술하는 독점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진리 결정이라는 차원에서 언어 활동에 독자성을 부여하는 데 훨씬 수월한 작업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가 ‘자연의 거울로서 지식’에 근거하지 않아도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바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로부터 끌어온다. 그는 자신의 저술인 ≪객관성, 상대주의, 그리고 진리(Objectivity, Relativism, and Truth)≫(1991)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불행하게도 주목받지 못한 탐구 주제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탐구와 시의 차이, 그리고 권력을 위한 투쟁과 우연성을 수용하는 차이에 관심을 돌리고 싶어서”이다. 그는 과학적인 철학보다 시가 전형적인 인간의 행위로 여겨지는 곳에서 문화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것인지를 보여 주고 싶어 한다. … 그는 그 전통 속에 등을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다시 서술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나고자 한다.[36]Richard Rorty, Objectivity, Relativism, and Trut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36-37.

 

로티는 하이데거를 ‘전통적인 철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라 일컫는다. 로티는 ≪하이데거와 그 외에 관한 에세이(Essays on Heidegger and Others)≫(1991)를 비롯한, 하이데거에 관한 여러 에세이에서 ‘현상적인 것’과 ‘지향적인 것’이 객관적 실재(맑스주의적인 표현에서)의 반영이라는 성격을 갖지 않는다고 보는 자신의 견해를 삶의 영역에서 인간이 지닌 하이데거적 평균성[37]하이데거나 로티가 말하는 평균성은 헤겔적, 맑스적 의미에서의 보편성과는 아예 다른 뜻임을 유의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적 현존재의 … Continue reading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그 평균성을 실용적인 행동[38]로티는 자신의 수많은 저작에서 맑스를 형이상학자이자 존재론자라고 묘사하며,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인식에 천착하여 사상을 전개했다”라는 … Continue reading과 그 행동이 대상으로 하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을 염려하는 ‘실존적 존재’에서 찾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을 떠받칠 수 있는 개념이 세계-내-존재라는 틀이라는 것이다.[39]신승환,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석의 의미와 한계―인간 실존성과 도구성”, ≪인간연구≫ 제12호(2007. 1.), 가톨릭대학교 … Continue reading 로티에 따르면, 지향적인 측면(것)이나 현상적인 측면(것)이나 그것은 인간이 세계-내-존재 속에서, 즉 일상적 현존재로서 삶의 문제를 취급하는 방식에서 만들어 내는 것(로티의 표현에 따르면 ‘유용성에 관한 취급’)에 불과하며, 보편의 제(諸) 내용과는 무관하다고 봤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이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하이데거적 평균성의 문제를 지엽화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는 역시 ‘전통적인 철학’(그는 맑스주의도 ‘전통적인 철학’이라고 간주한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불과하다. 그가 말하는 ‘전통적인 철학’의 역사에서 유물론은 인간이 갖는 가장 ‘하찮게 보이는 문제’를 다뤘다. 가장 대표적으로 전기 및 중기 스토아학파는 그것이 기계적인 시도였다는 한계는 있으나, 인간의 현실 생활에서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agathos)을 나열,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apoproegmena)을 나열, 유용하지도, 해롭지도 않은 것들(adiaphora)을 나열해서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로고스로서의 보편을 구성하는 논리를 연결하려고 하였다. 즉 로고스를 구성하는 본질의 논리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는 삶의 측면을 연결하려고 하였다. 뛰어넘어서, 헤겔학파나 맑스주의도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삶의 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 관해 이미 수많은 언급을 하였다.

 

진정 중요한 문제는 그 “일상적인 생활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일상적 현존재’라는 개념에 발을 걸친 것에 걸맞게, 로티는 그 문제를 해결할 만한 보편 이론을 성립하지 못하였고, 사실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가 ≪미국 만들기≫에서 보여 주는, 현실 문제에 대한 절충주의적 접근은 그가 갖는 철학의 성격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신실용주의의 한계도 드러난다. 로티는 인간 사회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의미성에 대해, 존재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는 통로를 아예 무시한다는 데 있다.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인간의 실존적인 범주에서 드러나는 존재 의미를 인간이 행한 다양한 ‘실용적인 행동으로서 작업들’의 결과인 ‘문화적인 생활 양식’ 안에서 드러나는 ‘실용적 범주’에서만 찾으려고 한다.[40]같은 글, p. 171. 로티는 자신의 인식, 논리에 관한 견해를 ‘인식론적 행동주의’라 칭하였다.

 

반표상주의를 대표하며, ‘형이상학을 맹렬히 비판하는’ 로티가 반동적 형이상학(이성 일반의 역할, 보편으로서 철학을 배제하는 류의 형이상학), 유신론적인 반동 철학의 대표자인 하이데거와의 ‘동맹’을 숨기지 않는 것은, 반동적 독점부르주아와 개혁적 독점부르주아가 과학적인 이데올로기를 사장함에 있어 양자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연합’을 숨기지 않는 것[41]로티가 예의를 갖춘 문투로 “그는 그 전통 속에 등을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다시 서술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나고자 한다”라고 … Continue reading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2. “지식은 자연의 반영이 아니다”라는 로티의 강변에 대한 비판

앞선 설명에 따르면, 로티는 자연 세계 법칙의 반영으로서 지식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물론, 그러한 거부에는 ‘타당한 논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로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사실상 분리하는 작업은 철학이 지식 이론을 그 핵심으로 한다는 생각을 통해서 가능해졌다. 즉 지식 이론은 과학의 기반이기 때문에 과학에서 분리된다는 것이다. 지식 이론의 그 근대적 기원은 적어도 데카르트의 ≪성찰≫과 스피노자의 ≪지성 개선론≫에까지 소급된다.[42]Richard Rorty, op. cit., 1979, p. 150.

 

그는 지식 이론을 핵심으로 하여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사실상 분리하는 작업’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이는 틀린 주장이다. 오히려 그가 언급하는 ‘지식 이론’을 통해 자연 일반과, 사회 일반을 연결하는 사회 물리학이 대두됨에 따라 과학 발전의 성과가 사회 일반, 더 나아가서 세계관을 정립하는 데에 긴밀하게 연계되었다. 만약 ‘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 과학 일반과 이전 시기 중세기적 몽매주의의 낡은 유산과의 분리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로티는 근대 이후 여러 분과 학문이 생겨났다는 것을 근거로 위와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과 학문은 중세 때도 존재했으며, 심지어, 분과 학문의 존재와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사실상 분리하는 작업”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철학과 과학의 단절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박힐 자본주의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하기 위한, 제국주의자/자본가의 발악에 따른 결과로 봐야 한다.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통해 자본의 재생산을 이루어내야 했다. 그리하여 분업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노동자의 분업적 기능 능력의 강화를 꾀해야 했다. 그 결과 분업 체계에 맞는 교육 과정의 도입으로서, ‘학문의 분업화’가 가속된 것이 오늘날 철학과 과학의 엄격한 단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로티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이후 로크와 칸트, 헤겔 등 여러 지식 이론을 정당화하는 학자가 등장함에 따라, 지식은 자연의 반영이라는 풍토가 만연해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43]Ibid., pp. 165-167. 그런 다음 토대 중심의 철학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러한 철학을 ‘토대 기반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그가 말하는 ‘토대 기반의 철학’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토대주의(=정초주의)와는 다르다. 엄밀히 말하면, 데카르트적 토대주의까지 포함하는 용어인데, 그가 말하는 ‘토대 기반의 철학’이란, ‘특권적인 표상’[44]이데아, 세계영혼 논리 구조와 같은, 절대계를 구성하는 사유, 표상 등을 말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특권화된 표상’이라고 한다.을 성립하기 위한 존재에 관한 인식, 파생 명제 성립에 제일 근거를 제공하는 무언가를 상정하는 모든 철학을 말한다. 대개 이러한 제일 근거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성격을 가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자기 존재의 명증성’, 스피노자, 셸링, 헤겔 등의 수학적 성격을 갖춘 무규정적 공리자가 그것이다. 그런데 로티는 이러한 전통이 사실 칸트주의 연장이며, 독일 철학의 전통이 사실 칸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버 해협 양쪽[영국과 대륙: 인용자]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칸트주의자로 남았다. 그들이 인식론을 넘어섰다고 주장했을 때조차 그들은 철학이 믿음의 형식적 혹은 구조적 측면을 연구 과제로 삼는 학문 분야이며, 또한 이러한 과제를 검토함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다른 학문 분야의 정직성을 감시하는 문화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했다. 신칸트주의적인 합의에 대한 위대한 예외는 듀이,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이다.[45]Richard Rorty, op. cit., 1979, p. 181.

 

로티는 당대 철학이 칸트적 표상주의(헤겔식으로는 현상과 본질의 형이상학적 단절을 전제하는 입장들)에 근거했음은 물론이고, 플라톤적인 ‘퓌시스와 이데아의 동일성’[46]퓌시스(physis)는 질료를 말하며, 이데아(idea)는 절대계를 구성하는 근본 논리로서의 형식(form, 形式)을 말한다. 퓌시스-이데아 동일성이란, 표상으로서 … Continue reading[47]엄밀히 따지면, 플라톤은 표상주의자가 아니며, 플라톤을 표상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로티의 오해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자연 세계 전체를 … Continue reading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에서 그 칸트적인 성격이 극복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48]Richard Rorty, op. cit., 1979, p. 182.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표상화에 관련해서, 칸트주의의 대전제와 그 이후 등장한 독일 철학가들의 논리는 지대한 차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칸트는 표상주의자로서 감성적 객체가 지각되는 동시에 그것이 자기의식에서 오성(지성) 및 순수지성(순수오성, 오성의 범주)과 연계될 수 있는, 순수지성과 동질인 표상으로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감성 형식을 이미 순수지성이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칸트는 로티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약 30년의 차이) 독일 지역에서 활동한 헤겔은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의식(표상)의 저장’을 내던졌다. 헤겔은 표상이란 개념을 중심에 놓기를 거부하고, 개념적 사유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칸트적 표상이 절대와 동질로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았다. 헤겔은 절대의 동질로서 개념적 사유에 대해 변증법적 관계에서, 이성의 계기로서 현상 사이의 모순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모순의 인식 자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자기의식이 전자와 서로 얽혀져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컵을 관찰할 때, 우리는 그 컵이라는 집합이 갖는 단순 원소의 총합(물론 이것은 헤겔 이전 철학의 관점에서 표상의 층위에 속해 있다)으로부터 그것을 컵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컵이라는 존재가 갖는 역사적 성격, 즉 현존 또는 정재(定在, Dasein)으로서 컵이라는 개념적 성격이 성립할 수 있게 한 상호 대립자의 모순들(그 컵이 형성되기까지의 여러 개념상의 모순들, 즉 모순율이 표하는 관계들)을 파악함으로써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헤겔은 지(知)와 인식의 관계로서 총체성(Totalität)의 한 단면으로서 사물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즉 헤겔은 ‘표상화된 감각인’으로 대표할 수 있는 표상 작용을 ‘개념적 사유’로 지양-발전한 것이다. 이로써 헤겔 철학에서 경험론적인 표상주의는 지양으로서 폐기된다. 이로써 퓌시스-이데아라는 단편적인 표상 관계는 극복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헤겔은 로티가 흔히 말하는 류의 표상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칸트는 구상력(Einbildungskraft)을 발휘하는 오성이 그 자체로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하여, 필연성에 대한 이해와 무관한[49]애초에 칸트는 불가지론자였기에 필연성을 판단하는 기초로서 물자체를 인간이 알 수 없다고 봤다. 지각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의식 자유를 주장하였다. 반면, 헤겔은 필연성의 이해를 위한 변증법적 사유 운동(대립, 모순의 결과로서 생성을 총체적 파악하기 위한 정합적인 인식), 그 사유 운동에서 사유객체(헤겔은 대립, 모순의 총체적 파악, 실제적인 대립, 모순의 취급 자체를 사유객체와 동일시했다)를 취급만이 자유의 확립 과정이라고 보았다. 주관과 객관에 관한 문제로 따지자면, 칸트는 표지된 ‘객관의 양상’ 속에서 형성된 표상 사이에서 주관과 객관이 공존한다는 식의 설명을 한 반면, 헤겔은 주관과 객관의 일체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칸트는 형식논리학자고, 헤겔은 변증논리학자이다. 이미 여러 부분에서 칸트와 헤겔은 그 인식론과 존재론, 논리학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칸트의 불가지론과 대립되는 논리를 구사한 학자가 헤겔뿐이었겠는가?)[50]헤겔의 반성 철학은 본래 칸트식 절충주의로부터 합리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로티는 당대 철학을 모조리 칸트주의에 귀속시킨다. 이는 사실 그가 근대 철학에 관해서 로크와 칸트 외에는 무지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서술에 불과하다.

 

로티는 이 잘못된 철학사적 해석 속에서 ‘자연의 거울로서 지식’이라는 전제에 반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거울로서 지식’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직면을 담화로 대체하면 자연의 거울로서의 마음에 대한 개념은 없애 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거울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 특권적인 표상을 탐구하는 학문 영역이라는 철학의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51]Richard Rorty, op. cit., 1979, p. 189.

 

로티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제거적 유물론(eliminative materialism)이라 칭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물론이라기보단 심신 동일성을 부정함을 전제로 한 유아론에 불과하다. 제거적 유물론은 의식성 자체를 거부하며, 의식성의 자리에 ‘복잡화된 언어 활동’을 넣는다. 그런 다음, 이 ‘복잡화된 언어 활동’이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의 반영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앞서 논의한 내용과 같은, ‘세계-내-존재’라는 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각자성(各自性)[52]각자성은 내던져진 현존재로서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주관적 자아의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무관하게, “나에게로 … Continue reading이 ‘복잡화된 언어 활동’의 기원이라고 한다. 즉 인간 의식이 자연 일반의 반영이 아니며, 객관적 실재와 무관하고, 인간 언어 활동에서 드러나는 각자성의 표현 하나하나가 곧 진리라는 다원주의인 것이다. 로티는 이 제거적 유물론이라는 기본 입장을 접수하고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체계적인 철학’과 ‘교화적인 철학’을 나눈다.

 

체계적 철학자들은 건설적이며 논증을 제시한다. 교화적 철학자들은 저항적이며 격언을 내놓는다. 교화적 철학자들은 저항의 시대가 끝나면 자신들의 작업의 생명이 끝나는 것도 알고 있다. 반면, 체계적 철학자들은 영원의 집을 짓는다. … 교화적 철학자들은 시인들이 가끔 불을 질러 놓은 놀라움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53]Richard Rorty, op. cit., 1979, pp. 369-370.

 

[교화적인 철학자는] 태양 아래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의 정확한 재현이 아닌 것이 있지 않을까? 이 순간에는 설명될 수 없고 또 좀처럼 서술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한다.[54]Ibid.

 

로티에 따르면 체계적인 철학자는 세계의 전일성이라는 관점에서 보편, 진리, 본질을 파악하여 정리하려고 한다. 반면, 교화적인 철학자는 위와 같은 목표를 상정하지 않고, 오로지 대화 속에서 형성되는 관계, 그 관계로부터 ‘자신과 타인의 각자 자기 정립’이라는 가능성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로티에 따르면 맑스는 체계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맑스는 단순 ‘인간-인간의 담화라는 관계 속에서 각자의 자기 정립’이라는 주제를 경시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목표는 자연과 사회의 본질을, 이에 대해 인간이 갖는 관계에 대한 과학적 해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장래성을 마련하고자 했는데, 대표적으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른 생산 양식에서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했다. 이것 외에도 고대 그리스 시기의 대부분 철학자 그리고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은 모두 체계적인 철학자에 속할 것이다.

 

로티는 “철학은 문화의 한 장르이다. 오크쇼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철학은 인류의 대화 속에서 참여하는 하나의 목소리일 뿐이다”[55]Ibid., p. 264.라고 자신의 주장의 일단을 정리한다. 그는 인간과 인간의 담화를 통한 관계 형성이 인간 사회에서 인간이 갖는 가장 중시하는 문제이며, 그러한 관계의 총체가 담화(즉 언어 활동)로서 나타나기에 진리는 이 관계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다원론적 전개를 시도한다. 그는 이것을 교화라고 하고, 자신이 전개하는 ‘교화’의 이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기댄다.

 

가다머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나 ‘초월적인 구성’이라는 개념 그 어느 쪽에도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내가 제7장에서 옹호하려고 노력했던 ‘자연주의적’ 입장(정신과학의 ‘환원불가능성’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과, 우리 자신을 재기술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실존주의적’ 직관을 서로 조화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이러한 기여는 사유의 목표인 ‘지식’이라는 개념을 교양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써 가능했다.[56]Ibid., p. 385.

 

로티는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57]가다머는 현재적으로 다뤄지는 문제에 관해 물음, 응답이라는 상호 작용이 각자가 갖고 있는 전승(언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각 주체의 경험 … Continue reading의 차원에서 언어 활동이, 그것이 자연이라는 규정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립적 영역에서 다원론적 전개의 당위성을 보장한다고 보았다.[58]Vaden House, Without God Or His Doubles: Realism, Relativism and Rorty, Brill, 1994, p. 100. 한편 지평융합에 따라 언어 활동에서 성립된 언어 의미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 활동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A)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그저 그것이 대면 상황에서 언어 활동을 처음 개시한 사람에 대한, 타자의 언어 활동을 불러오는 시발적 행위(B)라고 규정한다. 진인 주장 여부를 따질 때는 바로 언어 행위자 사이의 언어 관계의 ‘무한한 지평의 융합’의 관점에서 따져야 한다.[59]Richard Rorty, op. cit., 1989, p. 18.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사실 ‘순수 언어’라는 관점에서, 인간 활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그가 비판하는 언어 활동의 의미(A), 그리고 그가 지지하는 언어 활동의 의미(B)는 사실 그것을 성립 가능하게 한 현실 사회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로티는 이에 관해 제기될 수 있는 질문에 대한 회피로 일관하고, 더 깊게 설명하기를 포기한다. 로티의 “내가 제시하고 있는 철학에 대한 견해에 따르자면, 철학자들은 가령 진리대응설이나 “실재의 본래적 본성”이라는 관념에 반대하는 논변들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60]Ibid., p. 8.는 그의 일종의 ‘병적인 회피 증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이 언어 활동, 담화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현시대의 지배적인 우끌라드인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서 인간의 담화는 즉자적인 성격에서 주로 스스로의 이해관계에서 유리한 지점을 사수하기 위한 것에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저 자기가 갖고 있는 욕구의 실현이라는 점에서의 대화일 것이다. 아주 미시적인 예로, 사람들이 자기가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한 사회에서 자기가 욕구하는 것에 대한 담화를 통해 자기만족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자적인 성격에서 인간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른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논하고, 그것의 근본적인 해결점을 찾기 위해 대화할 것이다.

 

그런데 그 현실적인 문제는 자연적 규정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연적 규정력이 가장 첨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그렇다면, 로티의 주장은 다시 무의미한 말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대학생들은 왜 학점의 고득점을 열망하는가? 그 지표가 자신의 경제적 생활 양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직장인이 더 높은 봉급을 받기 위해 그 방법론에 관해서 타인과 자잘한 논의를 하는가? 역시 경제적 생활 양식 자체와 관계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갖는 자연적 속성과 떨어질 수는 없다. 인간은 어떻게든, 그 스스로의 사회적 조건을 형성한 물적 토대의 필연적 성격에 따른 생활 양식을 충족해야 한다. 먹는 것, 그리고 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치료하는 것, 기타 재해로부터의 안전함 등이 그것이다. 인간의 어떠한 특정 대화들에선 그것이 경제적 문제와는 동떨어진 것인 양 보이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필시 인간이 갖는 자연적 속성에 따른 대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 속성에 따라 다시 인간은 생산 활동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담화, 언어 활동에서 본질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 문제이다. 물론 위와 같은 즉자적인 수준에서의 대응을 설명하는 것에서만 끝을 내면 그것은 소박한 수준에서 제기되는 경제주의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은 착취 사회의 토대가 갖는 모순을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상품 생산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과, 그 상품의 소유, 즉 잉여가치 전유의 주체인 자본가계급 사이에서의 모순, 개별 자본이 갖는 계획성과, 총자본이 갖는 무계획성 사이의 모순 등으로 구체화된다. 이 모순을 인식하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합목적적 투쟁이며, 대자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활동이다. 인간은 이러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인바, 인간은 토대가 그 토대에 기반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갖는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 능력을 갖는다. 그러한 점에서 지난 시기 역사에서 인간이 보여 준 투쟁은 유적 존재로서 인간, 즉 사회적 존재로서 보편적인 인간의 투쟁이었다. 이것은 한편 인간이 자연 일반의 운동으로서 물질이 갖는 모순 운동을 이해, 극복, 제어할 수 있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에 담화이든 언어 활동이든, 그 활동에 동원되는 지식이든 모조리 자연의 반영으로서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쓰딸린은 ≪쏘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가 자연적 힘이나 경제적 힘을 ‘정복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들을 ‘지배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이것은 인간이 과학적 법칙을 ‘폐기’하거나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단지 인간이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지배하여, 그것을 완전히 이해와 더불어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사회를 위하여 활용하며, 그래서 그것을 정복하고 그것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61]J. V. 스탈린, ≪스탈린 선집≫ 제2권, 서중건 역, 전진, 1990, p. 232.

 

즉자적이든 대자적이든 그것은 경제 토대라는 단일한 문제와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담화가 충분히 길게 이어지고, 더욱 다양화된다고 하더라도 이 성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사소한 언어 활동에서 가장 복잡한 언어 활동을 모두 포괄하여 그 활동의 근원을 따진다면, 인간이 사회, 그리고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에 대해서 섣불리 ‘무관함’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로티 스스로는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지만 로티가 구상한 철학 체계 또한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로티가 말하는 문제의식은 어떻게든 경제 토대로부터 생겨난 문제와 동떨어질 수 없다. 먹을 것, 입는 것, 정치의 문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현실 문제들’ 등 모든 것이 토대와 관련이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식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이 단순히 “인류의 대화 속에서 참여하는 하나의 목소리뿐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현실에 대한 회피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 논하는 대상을 넘어서, 철학 형성의 기원에 관해 따진다면, 철학은 이미 대화라는 협소한 지점 이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것의 존립 자체가 경제 관계의 문제로부터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초반부로 돌아가 보자. 로티는 “직면을 담화로 대체하면 자연의 거울로서의 마음에 대한 개념은 없애 버릴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로티는 내내 하이데거의 일상적 현존재를 들춰내고, 그러한 일상적 현존재가 타자와 관계하는 지점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언어놀이)과 가다머(지평융합) 등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로티는 인간이 갖는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는 욕구, 욕망의 내용이 자연의 반영으로부터 벗어난 문제라는 잘못된 믿음에 기초하여 자기주장을 전개한다. 즉 그는 그가 비판하는 ‘지식을 자연의 거울로 여기는 체계적인 철학자’가 인간의 사소한, 자잘한 문제를 경시했다는 점에서, 그 ‘체계적인 철학자’의 반대급부로서 기능하는 것이 곧 ‘지식을 자연의 거울로 취급하는 것’의 반대로 나아가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이라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언어 활동으로서 드러내는 사소한, 자잘한,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박(薄)해 보이는 문제들이야말로 자연을 단위적 차원에서 바라볼 때의 물질, 그 물질이 내포하는 모순으로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된다는 것을 보았다.

 

다시 말하여, 로티가 신성시하는 일상적 현존재가 욕구하는 것[62]소득 수준, 소비 생활, 학교 성적 등 자잘한 ‘현실적 고민’들로부터 드러나는 자기 욕구들., 담화 관계, 즉 언어 활동의 내용이 갖는 것 등은 사실 그들이 살고 있는 토대 지반의 문제와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토대 반영에 대한 복잡성의 증대로서 즉자적인 대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언어 활동에서조차 제기되는 여러 문제를 다룰 때조차 우리가 그것에 대해 본질을 규명하는 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결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 본질을 해명하는 시초(정작 그들은 자신이 제기한 문제가 경제 토대로부터 소산된 문제임을 몰랐겠지만)에서 관념론자는 정신, 사유에 선차성을 두었을 뿐이며, 유물론자는 물질 그 자체에 선차성을 두었을 뿐이다.

 

종합해 보자. 우리는 로티가 ‘좋아하는’ 일상적 현존재로서 겪는 자잘한 문제들에 대해서 미시적인 관점을 통해 그것들을 일일이 확인하여도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가장 현실적이고도 강렬한 양태인 경제 토대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혐오하는’ 추상적 방식으로 인간 문제를 접근해도 역시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짧게 다루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 활동은 실제 생산 활동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로티가 말하는 ‘자연의 반영과는 무관한, 진리를 표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언어놀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로티의 여러 주장에 대한 전거(典據)의 당위성이 사라진 셈이다.

 

3-3. 로티의 사고 실험으로서 <대척행성인의 존재>가 갖는 비과학성과 허구성

영미 철학의 오래된 전통인 과거 영국 관념론이 그러했듯이 로티의 사상에서도 주관적 관념론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예시(‘비과학적’ 사고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로티는 그 사고 실험을 <대척행성인(antipodean) 실험>이라 칭하였다. 그는 대척행성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저 멀리 우리 은하 반대편에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들―집과 폭탄을 만들고 시를 쓰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깃털 없는 두 발 동물―이 살고 있는 행성이 있었다. 이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마음[정신]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고 싶다’, ‘하려고 한다’, ‘~임을 믿는다’,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놀라움을 느낀다’ 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앉는다’,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성적으로 흥분되었다’ 등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인 상태―특별하고 분명한 종류의 상태―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63]Richard Rorty, op. cit., 1979, p. 82.

 

로티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 지구에서 사는 인류가 흔히 생각하는, 자연의 반영으로서 지식, 그 지식에 대한 접근 문제로서 표상 등과 같은 사고가 전혀 없는 외계 생명체(대척행성인)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대척행성인은 어떠한 한 경험(자연적 사건)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의식을 재차 생각하지 않고, 그 자연적 사건과 완전히 이질의, 무관계의 행동 양상을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3-2’에서 충분히 다룬 사안이며, 이미 오류가 내포한 사상임이 폭로된 것이다. 자연적 사건을 반영하는 즉자적인 존재로서 인간이든 대자적인 존재로서 인간이든 결국 스스로의 물적 토대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내보일 수밖에 없다. 다만 즉자적인 존재는 그것을 구체적 관계의 결과로서 실재로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며, 그것이 갖는 필연성, 즉 그 실재의 이면에 있는 모순 운동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반면 대자적인 존재는 역사적인 관계의 관점으로서, 그 모순 운동을 파악하는 존재이다.

 

추가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로티가 구사한 <대척행성인>의 구체적 내용이 어떻든, 그의 사고에 있어 <대척행성인>이란 구상을 꺼내는 것 자체가 최근 신경과학의 성과, 그리고 진화학에 관한 새로운 성과를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사람들은 외계인이 인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지능 지수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수준에 이를 것이라 추론하지만, 실은 인간이라는 고등한 생명체의 진화 조건, 그 유기 화합물을 이루는 원소들의 성격을 봤을 때 외계에 존재하는 고등 생물체라고 하더라도 인간과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진화학적 연구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다.

 

인간 외 다른 모든 동물, 식물을 이루는 세포, 그 세포 구성물이 모조리 탄소-수소-산소 유기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이유는 각자 원소가 갖는 오비탈, 즉 전자 배열이 갖는 적합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가령, 탄소, 수소, 산소와 전자껍질이 같은 다른 원소는 많지만, 각 원소가 갖는 오비탈의 에너지 준위는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탄소, 수소, 산소 외 다른 원소가 우연히 현재 생명체를 이루는 탄소-수소-산소 유기체와 유사한 형태의 분자 구조를 갖는 화합물을 형성한다고 하더라도(대표적으로 뉴클레오타이드와 같은), 안정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그것이 독자적인 생명체를 구성할 수 있는 화합물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원핵생물, 진핵생물 등이 모조리 탄소-수소-산소의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생명 가능 지대’에 속하는 환경에서 생명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생겨날 수 있으며, 이러한 조건이 충분한 시간과 결합될 경우, 생명체의 등장을 필연으로 갖고 나온다는 식의 논리도 위와 같은 원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서 나온 천체 생물학 이론(평범성의 원리)인 것이다.[64]현재 이러한 입장(평범성의 원리)은 ‘희귀한 지구 가설’과 논쟁 중에 있다. 희귀한 지구 가설은 현재 지구의 환경과 완전히 비슷한 행성이 되기 … Continue reading

 

우리는 이로부터, 지구로부터 몇백만 광년 이상 떨어진 행성에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러한 생명체가 인간과 완전히 다른,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가지진 않을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명체도 어디까지나 탄소-수소-산소의 유기 화합물의 집적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외계 생명체를 이루는 신경 조직, 특히 사고를 담당하는 중추인 뇌(와 유사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되는 기관)의 생물학적 속성(지능 수준, 그 지능 수준에 따른 사고 능력을 제외한) 등이 인간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인간을 이루는 생물학적 기관이 의식을 만들어 내고, 3-2에서 논구한(로티에 대항해) 일련의 사유 체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때, 이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기상천외한 대척행성인’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이는 부적합한 논리에 해당되기에 무의미한 사고 실험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러한 생명체가 있는지, 없는지, 그 ‘사고방식’이 어떤지 현재 수준에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며, 최대한 인간과 비슷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사고의 지평도 그에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로티의 ‘대척행성인’은 적어도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지구 내에서 미개한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사고 수준은 지대한 차이를 갖고 있지 않느냐고, 따라서 대척행성인과 지구인 사이의 사고 수준도 지대한 차이가 날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로티가 든 예시를 다시 보자. “두려움을 느낀다”, “~임을 믿는다”, “~하려고 한다” 등 그가 예시로 든 ‘자연적 사건’(언어적으로 명시된)이란 사실 인간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는 포유강, 심지어 절지동물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행동 양상도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4. 로티의 반맑스주의 선동에 관한 비판

 

로티는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맑스주의 세계관을 강도 높게 비난한 바 있다. 그의 반맑스주의 선동, 비난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저서는 1998년에 발행된 ≪미국 만들기≫(원제는, Achieving Our Country: Leftist Thought in Twentieth-Century America)이다.

 

≪미국 만들기≫는 미국 내 문화 좌파, 서구 유럽의 이른바, ‘좌익 지식인’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서적이다. 로티는 ≪미국 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관점, 외교적인 관점을 모두 드러내며, 자신이 행하는 맑스주의 비판은 미국 진보주의 운동의 선진화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진보적인 관점을 갖는 학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진보주의란 현대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로티는 비엣남(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잔학 행위, 미국 정부의 극심한 부패, 미국 내 고질적인 실업과 빈곤층에게 놓인 암담한 현실 등을 언급하지만 그 해결을 1945년 이후 성장한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복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국가 권력 점유와 이에 근거한 생산 수단의 전면적인 국유화’는 비현실적이며, 낡은 주장이라고 치부한다. 한편, 나찌 독일 패망 직후 동유럽에서 수행되었던 일련의 반공주의 사보타주와 그 사보타주를 지원한 미국 내 ‘인권 단체’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동유럽에서 수행된 인민민주 혁명과, 그 이후 성립된 수많은 사회주의 정부를 ‘권위주의 독재 정부’라고 규정한다. 로티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신좌파가 등장하는 1960년대 이전까지의 ‘개혁주의 좌파’(그는 이를 ‘구좌파’라고도 칭한다) 노선이 훨씬 건강한 노선이었다고 자부한다.

 

1960년대부터 미국 내 노동조합의 경제 투쟁과 대중의 연대성이 끊어졌으며, 문화 좌파는 이를 가속화하였고,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 미국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에 관한 지속적 향상이 요원하게 되었다는 그의 비판은 일견 타당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문제의 해결을 미국 헌법의 틀에서, 즉 부르주아 독재의 용인 아래에서 찾고 있으며, 현실 문제를 다루는 철학 이론을 과감히 버릴 것을 요구한다. 바로 이 점에서 로티는 반동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그는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좌파는 이론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좌파의 철학화하는 습관을 내던져야 한다. 둘째, 좌파는 미국인으로서 느끼는 자부심의 잔해를 가동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65]리처드 로티, ≪미국 만들기≫(1998), 임옥희 역, 동문선, 2003, p. 111.

 

현실 문제에 대한 철학, 더 넓은 의미에서 세계관의 구축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천과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이론적 고민의 산물이다. 일정한 철학/세계관이 없이는 피압박 대중을 대자적인 존재로서 각성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철학/세계관의 구축은 필수이다. 현실 문제를 철학화하는 습관을 내던진다면, 그리고 그러한 내던짐에 근거한 운동을 추구한다면, 피압박 대중은 착취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속절없이 당해야 할 것이며, 운동은 소극적인 요구안을 내세우는 것 이상의 궤도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으로서 느끼는 자부심을 가동하는 것’은 부르주아 애국주의 편향을 절충하자는 것인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것 이상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착취계급은 저들의 착취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온갖 민족주의, 애국주의 누더기들을 피착취 대중에게 주입한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은 그저 그러한 누더기의 일종에 불과하며, 이는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로티는 내내 저서에서 좌파도 애국주의를 가져야 한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할 것을 주문하는 행태이다.

 

≪미국 만들기≫에서 서술된 거의 대부분이 문장은 절충주의적 서술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실업 문제, 빈부 격차 문제는 심각하다”라는 언급을 통해 미국의 사회 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미국은 빈자와 부자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경쟁력에서: 인용자] 그 이전 산업민주주의 국가에 뒤처지게 되었다”[66]같은 책, p. 127.라는 언급을 한다. 미국이 빈자와 부자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보장한다는 것은 거짓이며, 동시에 빈자와 부자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산업 경쟁력을 뒤처지게 한다는 것도 무근거한 낭설이다. 이는 로티의 분열적인 사고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일반적인 반공주의 감정보다 더욱 열렬한 형태의 반공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행동 방침으로 갖고 있다. ≪미국 만들기≫의 내용 전체가 반공주의로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스스로가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대표적인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의 학생들 중 가장 극단적인 좌파들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학생들이기도 한 이들은 나의 반공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어한다.[67]같은 책, p. 75.

 

로티는 일관되게 반공주의를 고수하며, 좌파에게 ‘사회주의가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실현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환상’을 버릴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로티는 헤겔 철학과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도 보여 준다. 그는 맑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고무적인 목적뿐 아니라 예언적인 목적에도 사용될 수 있을 거라고 잘못 생각했다. … 헤겔식 역사주의 행태에서 역사주의는 플라톤, 심지어 칸트가 영속화하려고 했던 바의 단순한 시간화에 불과하다.”[68]같은 책, p. 29.

 

로티는 맑스가 헤겔 변증법에 대해 “어떤 ‘예언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맑스가 어떠한 철학자로부터 스스로의 비전을 제시함에 있어 ‘예언적인 목적’의 내용 및 형식을 취하려고 했다면, 이미 맑스는 목적론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맑스는 오히려 헤겔이 주장한, 절대정신의 타재(Anderssein)에 기초한 헤겔의 목적론적인 성격을 비판했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들[가족, 시민사회, 국가: 인용자]은 현실적 이념에 의해 움직인다. 그것들을 국가로 통합시키는 것은 그것들 자신의 생활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했던 것은 이념의 생활 과정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이 이념의 유한성이다. 그것들은 그들 자신의 정신과는 다른 어떤 정신 덕분에 그들 자신의 현존재를 가진다. 그것들은 어떤 제3자에 의해 정립된 규정이지, 자기 규정이 아니다.[69]칼 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1843), 강유원 역, 이론과실천, 2011, p. 40.

 

헤겔은 이념의 주어인 것을 산물, 즉 이념의 술어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대상으로부터 전개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완결된 또는 논리학의 추상적 영역 속에서 스스로 완결된 사유에 따라 대상을 전개한다. … ‘여러 권력’이 ‘개념의 본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그런 까닭에 보편적인 것은 여러 권력을 ‘필연적인 방식으로 산출한다’라는 또 다른 규정이 있다. [이는 모두: 인용자] 낯선 본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70]같은 책, pp. 51-52.

 

헤겔의 추론으로부터는 ‘자기의식의 양식과 교양’이 ‘체제’와 모순을 일으키는 국가는 결코 참된 국가가 아니라는 결론만이 나온다. … 오히려 헤겔의 견해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것은, 체제가 의식과 더불어 진보한다―현실적 인간과 더불어 진보한다는 것은 ‘인간’이 체제의 원리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는 규정과 원리를 그 자신 안에 가져야 한다는 요구만이다. 여기서 헤겔은 궤변론자이다.[71]같은 책, p. 62.

 

맑스는 절대정신 또는 절대이념의 타재로서 현실의 실체를 설명하려는 헤겔의 노력이, 헤겔이 인간의 주체성을 말하려고 했던 것과는 모순된 결론을 가져오며, 전자의 견해에 무게가 가중될 경우 헤겔의 철학 체계는 필연적으로 목적론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로티는 헤겔의 역사 철학을 칸트와 엮었다. 칸트는 인간 행위를 로티가 그렇게도 비판했던 표상주의, 그리고 그 표상주의에 기초한 불가지론과 그 예외적인 영역에서의 ‘실천이성’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실제적 존재로서 인간 역사 및 인간 사유의 역사를 개인적 행위에 귀속했을 뿐, ‘헤겔식 역사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한 바 없다. 헤겔의 역사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참인식할 수 있다는 가지론에 기반하며, 이 기반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칸트와 상충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로티는 ‘마르크스주의자의 과학에 대한 강박증적 추구’를 ‘푸코식 좌파의 특징’으로 서술하는데[72]리처드 로티, 앞의 책, p. 49., 푸코는 스스로 반과학을 선언한 학자로 ‘맑스주의자의 과학에 대한 강박증적 추구’와는 무관하다. 이렇듯, 로티는 맑스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무지를 보여 준다.

 

로티는 20세기 사회주의, 미국에 관한 역사에서 무지를 보여 준다. 그는 맑스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방이 시작되는 “개혁주의 좌파의 몰락” 초입부터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늘날 동부 유럽과 중부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해 그와 유사한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의 생각이 옳다. 만일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사회민주주의와 경제 정의가 훨씬 진보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구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레닌이 실패했더라면, 러시아가 더 잘 살았을 것이라고 지적되는 마당에, 좌파 진영 사람들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감상주의를 중단해야 한다.[73]같은 책, pp. 55-56.

 

즉 쏘비에트 로씨야 탄생 이후 적백 내전기 레닌의 비교적 짧은 기간의 지도가 ‘볼쉐비끼 통치’의 마지막이었다면, 로씨야 상황은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언급한, ‘쏘련 공산당 서기장 레닌’은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 지도기 서기장은 쓰딸린이었으며, 레닌은 국가직으로서는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직을, 그리고 당직으로서는 볼쉐비끼당의 정치국원을 지냈다. 레닌은 집단지도제로써 혁명을 지도했다. 여기서 쏘련사에 대한 그의 짧은 이해가 드러난다. 심지어 <쏘련 공산당>은 레닌 지도기에 존재하지 않던 명칭이었으며, <쏘련 공산당>은 1952년 제19차 당 대회의 결의에 따라 공식화된 명칭이다.

 

더 나아가서, 로티는 볼쉐비끼의 사회주의 지도가 없었다면 러시아가 현재보다 더 잘살았을 것이며, 동부 유럽에 맑스주의가 퍼지지 않았다면 더 희망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의 존재가, 그가 그토록 껴안고 있는 현대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강력한 힘을 부여했던 것을 안다면, 로티의 언급은 그저 공허한 허세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례로, 20세기 초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실시된 진보적 성격을 갖는 민주주의 변혁은 쏘비에트 로씨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당시 가장 선진적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이 1925년에 되어서야 비로소 여성에게 완전히 동등한 조건의 선거권/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쏘련 사회주의 성과와 관련이 없는가? 성별, 인종, 재산의 격차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선거권/투표권을 부여한 것, 그리고 육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직장 내 국립 탁아소 건설 정책, 사회주의 노동의 법적 규율화인 현대적인 노동법, 기타 복지 정책 등 쏘비에트 로씨야가 이룩한 것은 서유럽과 아메리카, 심지어 당시에 존재했던 식민지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조직된 노동 운동은 사회 진보를 촉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쏘련의 빠른 산업 복구 능력과 수준 높은 복지 정책은 서구 사회의 사회 진보에 다시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서구의 현대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이 존재했기에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20세기 사회주의가 퇴조한 현재의 현실에서 현대 사회민주주의 운동 또한 계속하여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

 

현대 사회민주주의를 그토록 중시하는 로티가 현대 사회민주주의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를 폄훼하는 것은 노동 운동사에 대한 무지에 불과하다.

 

한편, 20세기 사회주의는 수정주의라는 난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상 교육, 의료, 주택, 심지어 생필품과 기초 식량의 전면적인 무상 분배를 달성하였으며, 실업률, 평균 수명, 노동 시간 및 노동자의 휴가 시간, 무주택자 비율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거의 모든 수치에서 선진 자본주의인 서유럽과 미국보다 긍정적인 수치를 보여 주었다. 오히려 해당 나라들의 불행은 사회주의의 해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로티는 좌파에게 애국주의를 가져야 한다고 선동하는데, 그는 그 스스로가 이러한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해당 저서에서 충실히 보여 준다: “나는 미국에게서 부조리한 점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미국이 소수 독재를 세계의 사회민주주의로 대체하면서 동시에 미친 독재자들이 통치했던 사악한 제국의 팽창을 중지시킨 핵무기 초강대국이 될 수도 있었다는 판단에서 어떠한 부조리도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74]같은 책, p. 79.

 

로티는 미국이 나찌 독일, 일본 제국 등 극단적인 파쑈 국가와 싸웠다는 것으로 미국에게서 어떠한 부조리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이 언급을 하기 전에 미국이 쓰딸린에 대항했다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를 매우 편협하게 보는 것으로, 미국이 필리핀과 남태평양 군도에서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중남미에서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그는 다루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이미 ‘헛짓거리’라고 언급한 미국의 비엣남(베트남) 전쟁 참전은 이 구절에서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미국이 ‘독재 국가’라고 규정한 나라들이 실제 어떠한 역사성을 갖는지도 심도 있게 분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로티는 맑스주의에 대해 무지하며, 노골적으로 반맑스주의 선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입장은 좌파가 헌정 민주주의 틀에서 진보주의 운동을 해야 하며, ‘맑스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편향을 완전히 극복해야 하고, 20세기 중반의 현대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5. 한국 내 각종 운동에서 나타나는 신실용주의적 편향들

 

지금까지 로티의 철학과 정치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로티의 정치론은 사실 노동 운동 내 기존 기회주의 조류의 사고방식과 조금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철학적인 요소는 부분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다. 로티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을 나열해 보자. 첫 번째는 불가지론이다. 로티는 인간이 자연과 사회의 관계, 사회의 모순을 참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며, 이러한 참된 인식에 관한 일말의 필요성조차 없다고 본다. 두 번째는 실용적으로 보이는 언어 활동의 형식과 내용을 진리 그 자체로 간주하고, 그것의 근저에 있는 자연의 영역을 경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진리, 이론적 실천, 정합적인 사고와 연계된 모든 주의 주장을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로 치부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주관주의에 기초한 상대주의이다. 로티는 각 담화자의 언어 활동이 곧 그 담화자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며,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로티식으론 진인주장)는 오로지 이것뿐이라 하였다. 그는 언어 활동이 자연에 규정받지 않으며, 자연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각 담화자마다 언어 활동의 내용과 상대적 형식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면, 결국 로티의 이런 말은 주관주의적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티의 철학은 초기에 등장했을 때 ‘분석 철학의 이단아’로 취급되었지만, 분석 철학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자체적으로 형성해 내지 못하자, 분석 철학의 영향을 받은 적지 않은 일군은 로티의 신실용주의를 상당 인용하게 되었다. 로티 철학의 네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이후 등장한 미국 철학자들 대부분이 답습하였고, 이것이 한국 철학 강단에서 지배적인 흐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로티의 오류를 답습한 영미 철학자들의 주장이 한국 강단에서 지배적인 흐름이 되고, 이것이 재생산되어 현재에 이르렀는데, 오늘날 만연하는 노동 운동, 민중 운동, 진보 운동 내 기회주의 경향은 그 스스로를 신실용주의라 규정하지 않지만, 그 논리적 경로나 귀결은 로티식 신실용주의와 유사하다. 예를 들면, 노동 운동 내 기회주의 경향은 “우리가 어떻게 사회의 모든 면을 알 수 있겠느냐? 우리는 사용자와 사회적으로 합의하면서 서로를 알아갈 뿐이다. 그들과 소통을 끊으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없다”, “맑스주의는 이미 한물간 견해로, 교조적인 태도를 양산하여 노동 운동 혐오를 불러왔다. 새로운, 실용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보다 모든 것을 완벽에 가깝게 알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사고가 권위주의를 양산하고, 노동 운동을 경직되게 만든다”라는 식의 주장은, 그 주장자가 특정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직접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신실용주의적 편향에 잠식된 주장에 불과하다.

 

국가독점 부르주아와의 ‘소통’을 발전적 시도로 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옳지 않음이 입증되고 있다.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은 문재인 정권과 지속적인 소통을 해 왔지만 그 결과는 최저임금 산정에서 사용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었으며, 범죄를 저지른 자본가를 가석방하는 것이었다. ‘소통’을 핑계로 현 정권의 기만적인 ‘사회적 합의주의’에 포섭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독점 예속 부르주아의 지배 도구라는 것, 그리고 그 역사를 철저히 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 운동 내 신실용주의적 편향은 맑스주의를 취급함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맑스주의는 이론일 뿐, 현실 투쟁과는 무관하며, 한국의 실정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천, 운동에 보편적인 해석 틀을 제공하는 것 자체를 곧바로 ‘교조주의’, ‘전체주의적 현상’과 엮는다. 이런 경향이 맑스주의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나름대로는 해석 틀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운동의 현주소이다. 세계관 자체의 부정, 즉 보편적인 해석의 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노동 운동의 장기성 상실을 가져왔으며, 대중 추수주의, 조합주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실용주의적 편향의 극단적 상대주의는 부문주의(部門主義)를 가능케 한다. 즉 민중 운동, 진보 운동의 각 부문이 저마다, 다른 것과는 단절된 완전히 독자적인 운동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조를 지지하는 이들은 수많은 부문 운동을 하나의 본질적인 관점으로, 즉 총체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운동 법칙’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바로 각 부문마다 상이한 행동과 언어 활동이 있고, 그것은 다시 특정한 담화 수행 체계로서 일반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화 수행 체계가 자연의 반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체계는 한 사회구성체의 총체적인 모순의 일면이지, 분절되어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 부문 운동의 담화 수행 체계가 자연의 반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바로 그렇기에 이들은 부문을 계급 투쟁에 기초한 보편적인 틀로 해석하는 것을 ‘노동자의 무근거한 선민의식’이라고 취급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신실용주의의 전제를 그대로 따른다면, 계급 투쟁은 ‘분해된 대중의 분절 운동’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신실용주의적 편향은 운동 내부에서 너무나도 기본적인 입장으로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노동 운동 내에 특정한 철학이 ‘직접적으로’ 교육되고 선전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단 ‘간접적으로’ 교육되고 선전되었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육, 다양한 매체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노동 운동 내 지배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담당했다.

 

 

6. 신실용주의의 철학적 해독성과 결론

 

우리는 로티 철학의 기초 개념이 되는 것들을 거의 모두 훑었고, 이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그가 실은 유아론자임을 알게 됐다. 로티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에 앞서, 그가 표상주의자라고 규정한 여러 철학자를 비판하는데, 사실 그러한 비판은 자신이 비판한 철학자의 저술에 대한 치명적인 오독에 기초한 비판에 불과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철학사에 대한 무지가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신실용주의의 해독성은 운동 전반에 걸쳐서 확인되지만, 가장 크게 확인되는 곳은 바로 교육 영역에 있다. 철학,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 모든 대학의 분과 학문이 미국의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가장 조잡한 일단을 번역해 온 것이라는 점에서 로티의 철학이 한국에 소개될 수 있는 창구는 널려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로티 철학이 한국 강단에 끼치는 해독성은 보편적 진리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적 관점의 양산에 있다. 도널드 데이빗슨(Donald Davidson), 데니얼 데닛(Daniel Dennett),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등이 로티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으며, 강단 ‘인문학계’는 인간의 삶을 협소한 기호논리학의 틀로 설명하려고 할 때 로티의 인식론적 행동주의를 거친다. 그리고 그 결론은 항상 “인간 행동에 진리는 없다. 오로지 각자 욕구를 서로 최대한 분쟁 없이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차선책만이 존재한다!”라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제거적 유물론’은 염세주의를 낳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착취 사회, 그 토대의 모순을 바로 인식해서 대자적 존재가 되는 것을 막게 한다. 왜냐하면, 제거적 유물론은 인간의 협소한 관계 하나하나가 곧 진리이며,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거짓된 다원주의를 선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자적 존재로서, 즉자적 존재와는 차별화된, 진리에 가까운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신실용주의에 따르면, 오로지 나 스스로의 관계, 삶의 내용만이 곧 진리이며, 타인의 진리는 당연히 그 타인이 갖고 있는 특정한 관계와 삶의 내용인 것이다. 이미 착취계급의 이데올로그는 “너희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라!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삶이란 없다! 오로지 너희들이 만들어 가는 관계, 그 삶의 내용 자체가 너희들의 입장에서 옳은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하노니, 너희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라!”라는 뻔하디뻔한 선전을 다양한 문화 매체, 교육 매체를 통해 확산하는 중이며, 신실용주의는 그러한 지배 이데올로기 선전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는 여러 사상 중 하나이다.

 

한편, 토대가 갖는 모순에 따른 고통을 즉자적인 존재로서 항상 느끼고 사는 취약한 계층은 염세주의를 이러한 고통의 회피로서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갖는 근본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기나긴 사색을 필요로 하며, 당장에 유용해 보이는 것은 모순의 직시가 아닌, 모순으로부터의 단순 회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모습은 그저 자연의 규정력에 의해 하릴없이 살아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자연의 규정력에 따라 인간은 자기 욕구의 충족을 위해 즉자성의 연속에 압도된 행동을 이어 나갈 것이고, 그 결과는 오로지 자기의 손과 발에 차여진 쇠사슬을 견고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외이다. 모순을 대하는 자세가 회피인 한, 소외된 인간으로서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사회 모순으로 인한 고통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대중에게 매우 익숙한 서술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겉으로는 개인적 개성,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자기 규정, 획일적인 것을 거부함, 실용적 사고와 행동 등과 같은 ‘자유롭고 합리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착취 체제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본질적인 원리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즉자적인 수준에서 인식된 부당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반동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운동 전반에 퍼진 신실용주의적 편향은 그저 소외되고 분해된 대중의 의식을 정형화한 것에 불과하며, 그러한 분해된 행동이 가져온 것은 피착취 대중의 착취계급으로의 예속을 심화할 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해방하는 것은 착취 체제, 그리고 이후의 전망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세계관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피착취계급의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바로 지난 시기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로서 벼려 낸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 모든 피압박 대중은 맑스-레닌주의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그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로티는 1972년에서 1980년까지의 에세이를 묶은 ≪실용주의의 결과≫를 1982년에 펴냈다.
2 단, 감각인상 자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은 운동은 감각을 완전히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그것의 형이상학적 저장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관념적인 토대 자체를 부정한다. 이들은 감각하는 인간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그 ‘저장된 감각’을 미지의 관념이 아닌, 생물학적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3 “사무직노조원 중심으로 구성된 스웨덴사무직노총(TCO)의 매츠 에세미르 연구원은 노동운동의 방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변했다. / 그는 “투쟁중심의 노동운동은 접은 지 오래됐다”며 “실용적 조합주의만이 일선 조합원들의 복지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 … 우리나라 노동계처럼 명분도 실익도 없는 정치파업을 밥먹듯 벌이는 행태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에세미르 연구원은 “정치적 또는 이념적 이유로 파업을 벌인 적은 한 번도 없다”며 “기업이 성장해야 노동자의 몫도 커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투쟁 대신 실용적 자세로 어프로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북유럽 ‘노조천국서 기업천국으로’] (上) 실용주의 노동운동..권력 대신 실리..‘작은 노조 큰 시장’ 정착”, ≪한국경제≫, 2008. 3. 7.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08030547281>)
4 윤기설, “실용주의 선언한 현대차노조”, ≪한국경제≫, 2009. 9. 29.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09092992151>
5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는 개념일 때, 이러한 술어와 주어를 연관시키는 진술을 말한다. 가령 “모든 하마는 포유류이다”라는 진술이 있을 때, 주어 개념인 하마는 술어 개념인 포유류라는 소집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을 분석적 진리, 분석적 명제라고 한다.
6 술어와 주어가 서로 연관 관계가 아닐 때, 이러한 술어와 주어를 연관시키는 진술을 말한다. 가령 “어떤 요리사는 수학을 잘한다”라는 진술이 있을 때, ‘요리사’는 주어, ‘수학을 잘한다’를 술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요리사라는 주어를 이루는 개념에는 ‘수학을 잘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리사가 되는 필수 조건, 요리사로서 덕목이 ‘수학을 잘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진술의 진위 여부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진술은 그것의 종합적 판단이 끝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종합적 명제, 종합적 진리라고 불린다.
7 W. V.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p. 20.
8 이미 앞에서도 논하였지만, 의미 환원주의는 각각의 진술(명제)이 경험을 받는 주체에게 주어진 경험 일반(감각인들)을 언급하는 용어로 형성된 어떤 논리적 구성물과 동일하다는 믿음을 뜻한다.
9 W. V. Quine, loc. cit.
10 Richard Rorty, Consequences of Pragmatism,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pp. 163-164.
11 인간의 오감이 모든 인식의 전부이며, 오감 외의 이질적인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 감수성주의라고도 한다.
12 이후 신실용주의에 관한 설명에서 로티는 현상-절대의 양분 자체를 거부하며, 현상계라는 용어를 쓰는 것조차 거부한다. 로티에게 세계는 오로지 감각으로 구성된 세계뿐이며, 그것을 뛰어넘는 세계는 없는 것이다. 또한, 감각인 자체가 표상이 아닌 그것 자체로 인식 주체에게 저장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관념론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13 Richard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p. 37.
14 조셉 레빈(Joseph Levine)과 더불어 그가 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영미 철학의 일원들은 이러한 문제 제기를 설명적 간격(explanatory gap)이라는 용어로 정리하였다. 앞서 설명한 ‘설명적 간격’이라는 문제 제기는 감각인상(감각된 것을 표상화한 것) 또는 감각질(감각인상에서 표상성을 제거한 것으로, 주로 뇌신경에 의한 감각의 저장 형태를 가리킨다)이 인간 행동을 근거하는 것의 전부라는 속류 유물론에 대한 직격타라고 할 수 있다. 몇몇 유심론자들은 설명적 간격의 문제 제기가 유물론 일반을 모조리 난제로 빠뜨릴 문제로 보고, 이것을 설명해 내지 못할 경우 유물론 일반이 설 자리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레빈은 설명적 간격이 유물론 일반을 위기로 빠뜨리진 않으며, 그저 감각과 감각인만이 존재한다는 감각주의 실험을 위기로 빠뜨릴 뿐이라 하였다.
15 프레게(Frege)와 러셀(Russell) 등 수많은 분석 철학자들은 형식논리학의 기반을 구축했던 명제 논리가 실제 논리적 서술이 될 수 없음을 비판하면서 술어 논리를 제안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데모크리토스는 사람이다”(A), “에피쿠로스는 사람이다”(B)라는 명제를 통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언젠가 죽는다”(C)라는 다단논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A와 B를 이루는 원소의 함수적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현실 상황’이 완전히 같아야 한다. 그런데, 명제 논리는 실제 그 논리가 성립함에서 그 현실 상황에 기대면서도, 역설적으로는 그 현실 상황을 따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데모크리토스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 그 시간적 상황에서 규정되는 ‘사람’의 의미,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 그 시간적 상황에서 규정되는 ‘사람’의 의미는 다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는 사실 서로 이어질 수 없는, 독립적이면서 파편화된 명제라 할 수 있으며, 독립적이면서 파편화된 명제는 C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다시 말하여 명제 논리는 형식논리적으로 이어지는 다단논법 구조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호로서 완전히 술어화할 수 있는 술어 논리를 주장한다. 술어 논리는 A와 B를 이루는 원소의 함수적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현실 상황’을 아예 ‘수학적인 집합’으로 대체한 후, 그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에 대해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모든 원소가 포함된 원소라고 가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것을 규정하는 원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적 내용이 된다. 그리하여 이를 수학적 기호로서 파악, 대체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념에 대해 형식논리학이 갖는 한계를 과학적 인식인 변증법적 이해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개념의 논리화에 대한 비현실적인 가정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6 순수유는 그것이 갖는 성격으로 인해 무(無, nichts)로 화한다. 최초 존재는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이고, 그런 의미로 무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미 ‘있는 것’을 구축한 상태에서 무규정적이라는 성격의 공존은 상호 모순적인 것이다. 여기서 상호 대립이 생겨나고 정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헤겔은 인간 사유의 시원을 존재와 무의 관계로서 파악하였다.
17 그는 의식 일반을 의식이라고 표현하기보단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현재 영미 철학에서 의식 문제를 단순히 모든 감각에 대한 ‘믿음’으로 취급하는 것은 모두 로티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관해 연구하는 것을 ‘믿음 연구’라고 한다.
18 Richard Rorty, op. cit., 1979, pp. 31-32.
19, 54 Ibid.
20 Ibid., pp. 39-40.
21 로티는 현상과 본질을 개념적으로는 구분하는 논리, 존재론적 함의를 갖춘 모든 입장을 신이원론이라 칭한다. 따라서, 그의 ‘신이원론’ 정의에 따르면, 엄밀히 일원론라고 할 수 있는 셸링의 동일 철학, 헤겔의 반성 철학, 맑스주의조차 신이원론에 해당한다. 이는 이원론에 대한 잘못된 정의로부터 만들어 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22 Richard Rorty, loc. cit.
23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이를 순수량(연속량-분리량)과 ‘분리량→정량’(수, 외연량-내포량)의 관계를 해석함으로써 아주 세밀하게 논의한다.
24 Richard Rorty, op. cit., 1979, pp. 45-46.
25 Ibid., p. 46.
26 Ibid., p. 41.
27 스피노자는 현상과 본질이라는 양분의 논리 속에서, 현상의 개념을 아무리 모으고 그 속에 천착하는 일련의 논리를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현상의 영역에 머무른 것에 불과하며, 이성적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28 게오르크 헤겔, ≪철학 강요≫(1817), 서동익 역, 을유문화사, 1998, p. 481.
29 오늘날에는 천동설의 오류에 대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동설이 확고한 진리로 되었지만, 근세 시기 초까지는 천동설은 나름대로의 통일적,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있었다. 물론, 천동설은 과학적 견지에서 오류(즉 그것 자체로 이미 상호 대립이라는 모순을 극심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를 내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 사고의 노정에서 그러한 ‘오류’ 또는 ‘모순의 총체’를 통일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근거로도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천동설은 오늘날 천체의 활동을 측정하는 데서 더 이상 쓸모가 있는 이론은 아니지만, 지성(보편적 의미)의 발전을 규정하는 데는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된다.
30 Richard Rorty,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p. 5.
31 ichard Rorty, Hermeneutics, General Studies, and Teaching, George Mason University, 1982, p. 3.
32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p. 382.
33 쓰딸린은 ≪맑스주의와 언어≫에서 둘 중 하나의 입장에 천착하는 것을 비판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언어가 갖는 ‘현실적 도구성’에 집중했기에 전자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34 ≪독일 이데올로기≫의 확정적인 문구들을 볼 때, 맑스는 언어가 사회적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다층, 다양한 표현의 일부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로티의 입장과 상반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5 게오르크 헤겔, ≪인륜성의 체계≫(1803), 김준수 역, 울력, 2007, pp. 37-38.
36 Richard Rorty, Objectivity, Relativism, and Trut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36-37.
37 하이데거나 로티가 말하는 평균성은 헤겔적, 맑스적 의미에서의 보편성과는 아예 다른 뜻임을 유의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적 현존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서 일상적 현존재가 평균적으로 삶의 기준의 지표로 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는 이를 일정 기간에 버는 수입, 학교 성적, 사는 지역, 외모 등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하이데거와 로티가 말하는 평균성인 것이다.
38 로티는 자신의 수많은 저작에서 맑스를 형이상학자이자 존재론자라고 묘사하며,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인식에 천착하여 사상을 전개했다”라는 비판으로 맑스의 사상을 비과학이라고 비방한다. 로티의 기존 입장을 접수한다면, 그는 맑스가 제기한 ‘비유기적 자연을 다루는 인간, 그 인간의 생산 활동에서 제기된 문제(인식된 모순), 그에 따른 투쟁’을 ‘실용적인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하다. 그가 말하는 ‘실용적인 행동’이란 앞서 설명한 ‘평균성’의 개념을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실용적인 행위’란 결국 단순히 파편화된, 소외된 개인이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는 ≪미국 만들기≫에서 이러한 생각을 상당히 자주 드러낸다.
39 신승환,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석의 의미와 한계―인간 실존성과 도구성”, ≪인간연구≫ 제12호(2007. 1.),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p. 174.
40 같은 글, p. 171.
41 로티가 예의를 갖춘 문투로 “그는 그 전통 속에 등을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다시 서술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나고자 한다”라고 서술한 부분을 보자. 하이데거는 유럽의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반동적인 형이상학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티는 그러한 (하이데거의) 고수에 대해 “전통 철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시도이다”라고 하면서 든든한 변호까지 해 준다!
42 Richard Rorty, op. cit., 1979, p. 150.
43 Ibid., pp. 165-167.
44 이데아, 세계영혼 논리 구조와 같은, 절대계를 구성하는 사유, 표상 등을 말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특권화된 표상’이라고 한다.
45 Richard Rorty, op. cit., 1979, p. 181.
46 퓌시스(physis)는 질료를 말하며, 이데아(idea)는 절대계를 구성하는 근본 논리로서의 형식(form, 形式)을 말한다. 퓌시스-이데아 동일성이란, 표상으로서 이데아가 퓌시스의 단선적인 반영이라는 것을 말한다.
47 엄밀히 따지면, 플라톤은 표상주의자가 아니며, 플라톤을 표상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로티의 오해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자연 세계 전체를 포괄하므로, 그것 자체가 이미 특정한 퓌시스의 내용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두 개념에 대한 표상화라는 설명을 제공한 적이 없다. 단, 플라톤이 퓌시스-이데아의 단적인 표상화가 정당화될 수 있는 논리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퓌시스-이데아의 단적인 표상성을 주장한 대표적 학파로는 영국 관념론의 시초라고 불리는 케임브리지플라톤학파가 있는데, 이들은 플라톤학파의 교의를 내세웠다. 이 표상주의에 제기되는 문제점은 ‘현상계의 층위(퓌시스)에서 절대계의 층위(이데아)’가 어떻게 인간 인식을 매개로 곧바로 전화될 수 있는지이다. 로크, 칸트 모두 이러한 것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48 Richard Rorty, op. cit., 1979, p. 182.
49 애초에 칸트는 불가지론자였기에 필연성을 판단하는 기초로서 물자체를 인간이 알 수 없다고 봤다.
50 헤겔의 반성 철학은 본래 칸트식 절충주의로부터 합리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51 Richard Rorty, op. cit., 1979, p. 189.
52 각자성은 내던져진 현존재로서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주관적 자아의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무관하게, “나에게로 향하는 무언가”, 또는 “나로부터 나아가는 무언가”라는 것을 인식한 것 자체로서 자각하는 것이 각자성이다. 하이데거는 이 각자성이 보편 위에 서며, 인간의 각자성 자체가 본질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하이데거의 이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을, 로티는 받아들인다. 로티는 이러한 각자성을 그대로 자신 철학의 구성물로 하였다.
53 Richard Rorty, op. cit., 1979, pp. 369-370.
55 Ibid., p. 264.
56 Ibid., p. 385.
57 가다머는 현재적으로 다뤄지는 문제에 관해 물음, 응답이라는 상호 작용이 각자가 갖고 있는 전승(언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각 주체의 경험 총합)을 이해하는 과정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이 각 주체가 가진 전승의 내용이 과거, 그리고 미래에 관해 갖는 규정성을 지평이라고 한다. 그리고 물음, 응답, 즉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가다머는 언어를 통해 서로의 지평이 융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체는 타인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58 Vaden House, Without God Or His Doubles: Realism, Relativism and Rorty, Brill, 1994, p. 100.
59 Richard Rorty, op. cit., 1989, p. 18.
60 Ibid., p. 8.
61 J. V. 스탈린, ≪스탈린 선집≫ 제2권, 서중건 역, 전진, 1990, p. 232.
62 소득 수준, 소비 생활, 학교 성적 등 자잘한 ‘현실적 고민’들로부터 드러나는 자기 욕구들.
63 Richard Rorty, op. cit., 1979, p. 82.
64 현재 이러한 입장(평범성의 원리)은 ‘희귀한 지구 가설’과 논쟁 중에 있다. 희귀한 지구 가설은 현재 지구의 환경과 완전히 비슷한 행성이 되기 위한 수많은 조건(드레이크 방정식)을 나열한 후 이러한 조건에 들어맞는 행성이 복수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카네기 과학 연구소(Carnegie Institution of Science) 등 여러 천체 관찰 연구소는 지구와 같은 조건을 갖는 행성은 지구 내 관찰 범위 내에서 적어도 수십억 개에 이를 것이라 지적한다.
65 리처드 로티, ≪미국 만들기≫(1998), 임옥희 역, 동문선, 2003, p. 111.
66 같은 책, p. 127.
67 같은 책, p. 75.
68 같은 책, p. 29.
69 칼 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1843), 강유원 역, 이론과실천, 2011, p. 40.
70 같은 책, pp. 51-52.
71 같은 책, p. 62.
72 리처드 로티, 앞의 책, p. 49.
73 같은 책, pp. 55-56.
74 같은 책, p. 79.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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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비판문은 로티 철학뿐이 아니라 미국의 강단철학 전체에 들이대도 통할 좋은 글임 / 지면에 한계가 있었겠지만 분량을 두 배 이상 늘려서 글에 나오는 개념, 내용을 기초까지 설명하면 더 좋을 것 같음

  •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글답게 로티 철학의 논쟁되는 부분만(동시에 로티의 허점이 되는 부분만…) 찝어서 다루었고 나머지 실천에 별 관련없는 자잘한 부분은 다루지 않았군요.

    글의 공격지점이 다분히 로티 철학의 뿌리가 되는 부분에만 국한되었기에.. 로티가 구상한 다양한 논의가 많이 생략된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 분들은 ‘다양한 논의’를 다루는 건 현상기술적이라고 할 것 같지만…

    콰인이 비판한 두 독단 이후와 이전의 영미철학 경향도 다루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에서 행한 비판의 의의도 찝어서 다뤄주셨으면 합니다.

    • 글쓰신 분의 다른 글도 읽어봤는데 너무 뿌리가 되는 영역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서(100가지 진술중 나머지 99가지 진술의 근거가 되는 1가지 진술을 무너뜨려서 나머지 99가지 진술을 무력화시키는 논법) 비판대상이 되는 철학자의 순기능을 함께 살펴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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