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1] 빠리 꼬뮌을 생각하며―≪프랑스에서의 내전(국제 노동자 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을 읽고

 

심미숙 | 편집위원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 규명 투쟁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사람들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그 답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들이 내놓은 이런저런 답을 살펴보기도 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서 특히 사회 운동을 앞장서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미 오래전에 정답이 나와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이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엥엘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 등의 책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책을 알아도 책 내용을 알지 못할 수 있고, 책의 내용을 알아도 제대로 정확히 알지 못할 수도 있겠다.

 

빠리 꼬뮌 150주년을 맞은 올해, 빠리 꼬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빠리 꼬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맑스의 저작인 ≪프랑스에서의 내전(국제 노동자 협회 담화문)≫[1]맑스는 빠리 꼬뮌의 경험을 국제 노동자 운동의 공동 재산으로 만들기 위해 국제 노동자 협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담화문을 발표할 것을 … Continue reading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못했었다. 이번에 이 책을 좀 더 제대로 읽고, 관련지어 맑스의 다른 저작들도 조금 살펴보면서 정말 제대로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빠리 꼬뮌이 있었고, 이 저작이 있었기에, 후에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썼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도 가능했을 것이다. 배우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은 내용과 소감 등의 일부를 정리해 보았다. 큰 따옴표로 인용한 문장은 거의 모두 ≪프랑스에서의 내전(국제 노동자 협회 담화문)≫에서 인용한 것이고(약간의 수정과 재구성 등이 있음), 아닌 것은 별도로 표시를 하였다.

 

먼저, 혁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빠리의 노동자들이 현재의 혁명의 주도권을 쥐고 있고 전투에서 영웅적인 자기희생으로 정면 공격에 맞서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프랑스 혁명들에서 두드러지는 사실이다. 혁명이 인민 대중, 생산자 대중의 이름으로 명백히 그들을 위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이 혁명과 모든 선행한 혁명들에 공통적인 특징이다.”

 

모든 “혁명은 인민 대중, 생산자 대중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혁명의 고귀함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혁명의 뜻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정치학에서 혁명은 권력의 급작스러운 교체를 뜻하는데, 민중의 참여로 권력의 근간 자체를 바꾼다는 점에서 일부 집단의 무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변인 쿠데타와 구별된다.”(위키백과.) 그런데 빠리 꼬뮌은 앞선 혁명들과 달랐던 점이 있다.

 

빠리 꼬뮌의 “새로운 특징은 인민들이 최초의 봉기 후에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배계급의 공화주의적 야바위꾼들의 수중에 양보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꼬뮌 구성에 의해 혁명의 실제적 운영권을 자신의 수중에 쥐었고, 지배계급의 국가 기구, 정부 기구도 그들 자신의 정부 기구로 대체함으로써 그 운영권을 인민 자신의 수중에 확보할 수단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그때에,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빠리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무장봉기를 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자신들이 잡은 권력을 양보하지 않은 것은 또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고 놀라웠다.

 

“프랑스는 역사적 계급 투쟁들이 매번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종국에까지 철저히 진행되었던 나라이다. 따라서 계급 투쟁들이 이루어지며 그 결과들이 요약되는 정치적 형태들의 교체도 프랑스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중세에는 봉건제의 중심이었고 르네상스 이후에는 통일적인 신분제적 군주제의 모범국이었던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봉건제를 타파하였고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고전적 형태로 부르주아지의 순수한 지배를 정초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지배하는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대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또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날카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엥엘스,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3판 서문”, 1885. 중에서.)

 

1848년 6월 혁명에서 “빠리 노동자들은 우세한 힘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힘에 굴복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격파되고 말았지만, 그들의 적들은 패배하였다. 야만적 폭력의 순간적 승리는 … 프랑스 국민이 소유자 국민과 노동자 국민이라는 두 개의 국민들로 나누어진 대가로 획득된 것이다.”(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50. 10. 중에서.)

 

프랑스는 1789년의 부르주아 혁명 이래로 1871년의 빠리 꼬뮌 직전까지 여러 국가 형태를 다양하게 거쳤으나, 결국 그 본질은 부르주아지의 지배계급으로의 성장과 국가 권력 장악의 과정이었다. 1848년의 6월 혁명에 이르러 빠리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자본가계급과 격돌하였고 “다른 어느 곳에서 볼 수 없는 날카로운 형태”로 자본가계급에 맞서 투쟁하기 시작하였고, 자본가계급과의 계급 대립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871년 3월 18일, 빠리의 노동자들은 혁명을 통해 빠리를 장악하고 빠리 꼬뮌을 선언했다.

 

1870년 9월 이후 새롭게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한 방위 정부[2]방위 정부는 1870년에 시작된 독일-프랑스 전쟁 중에 루이 보나빠르트의 프랑스 제2제정이 무너지고 선포된 공화국의 정부임. 친왕당파와 부르주아 … Continue reading는 공화국의 책무를 다하지 않고 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정부 권력을 복구하고 영속화하는 반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적 프로이센에 서둘러 항복을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프로이센에 맞서려면, 전쟁으로 인해 상비군 군대가 거의 무너져 있기 때문에 빠리의 인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국민 방위대가 나서야 했고, 그러려면 그들의 무장을 강화해야 했다. 그런데 무장한 빠리의 인민들이 나서서 외적 프로이센을 물리친다는 것은 결국, 국내의 지배계급 자신들에 대한 빠리 인민들의 승리를 의미하기에, 프로이센에 서둘러 항복하며 프로이센의 힘을 빌려 자국의 노동자들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한편 빠리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 방위대는 독일-프랑스 전쟁 시작 때부터 특히, 방위 정부가 프로이센에 투항하려 시도할 때부터 투항에 반대하며 스스로를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방위대원 전체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에 최고 지휘권을 위임하였고, 중앙위원회는 프로이센의 빠리 포위 전야에 투항론자들이 반역적으로 버리고 간 무기들을 모으고 옮겼다. 이 무기들은 국민 방위대 자체의 분담금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그들의 소유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방위 정부가 프로이센과 투항 협약을 맺을 때(1871년 1월 28일)도 일괄 반납하는 정부의 무기에서 제외되었다.

 

이렇게 투항을 반대하며 계속 무장하고 있던 빠리의 노동자들에게 방위 정부는 항복을 강요하고 무기의 반납을 요구한다. 전쟁과 프로이센의 빠리 포위로 인해 5개월 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는 중이었으면서도 빠리의 노동자 인민들은 주저하지 않고 국내 지배자들의 음모와 프로이센의 대포에 맞서 저항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국민 방위대는 방어적인 태도만 취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침내 방위 정부가 3월 18일에 국민 방위대의 무기를 탈취하려고 기습하면서 먼저 내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국민 방위대의 저항 및 연대하는 인민들의 형제애에 부딪혀 좌초했다. 영광스러운 3월 18일의 노동자 혁명이 빠리를 확실히 장악한 것이다. 국민 방위대의 중앙위원회가 그 임시 정부 역할을 했다.

 

최근에 맑스-엥엘스 저작 읽기 공부를 시작한 한 동지는 “옛사람들이 우리보다 결정력이나 행동이 빠르다는 느낌이 든”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문득, 최초의 노동자 혁명인 빠리 꼬뮌의 성공이 빨랐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내가 혁명을 너무 멀고 어렵고 불가능한 것으로 느끼며 느리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점점 깊어 가고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또 한편 자본주의는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고, 이대로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 같고, 그래서 혁명은 꿈도 못 꾸고, 그래서 행동도 결정도 느린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1871년 3월 18일에서 5월 28일까지의 빠리 꼬뮌에서 빠리의 노동자들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이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국가 기구를 부수고 새롭게 조직하였다. 노동자계급의 억압을 위한 공적 권력,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기구였던 국가에 맞서 “빠리의 노동자들이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프로이센의 오랜 포위 공격으로 상비군 군대가 거의 없게 되었고,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 방위대가 그것을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이제 하나의 지속적인 제도로 전환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꼬뮌의 첫 번째 훈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국가 정부의 물리적 권력의 도구였던 경찰도 즉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속성을 벗어 버리고 책임이 있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꼬뮌의 도구로 전환되었다.”

 

“꼬뮌은 빠리의 다양한 구에서 보통 선거권을 통해 선출된 시 의원들로 구성되었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기관이었다. 사법 공무원들도 선출되고 책임을 지니고 소환될 수 있게 되었다. 꼬뮌의 의원들부터 모든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되어야 했고 국가 고위 관직의 권리 주장과 판공비는 이 고위 관리들 자체와 함께 사라졌다. 옛 정부의 억압의 정신적 도구인 성직자 권력도 분쇄하고자 했으며 교회가 재산 소유 단체인 한에서 모든 교회의 해산과 교회 재산의 몰수를 포고하였다. 모든 교육 기관은 무상 개방되었고 국가와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났다. 과학은 계급적 선입견 및 정부 권력이 부과한 족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제빵공 직인의 야간작업을 폐지하고 온갖 구실로 노동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임금을 삭감하는 고용주들의 관행을 과태료를 물려 금지했다. 폐쇄된 작업장과 공장들을 보상을 조건으로 노동자 협동조합에 양도하는 것, 저당 잡은 공영 전당포의 차용 증서 가운데 20프랑을 넘지 않은 것을 모두 무상으로 찾아갈 수 있는 등의 여러 조처들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빠리 꼬뮌은 “프랑스 사회의 모든 건강한 요소의 진정한 대표자”가 되었다. “꼬뮌 체제는 사회에서 자양분을 얻고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을 저해하는 ‘국가’라는 이상 생성물이 이제까지 빨아먹은 모든 힘을 사회라는 몸뚱이에 돌려줄 것이다. 꼬뮌은 군대와 관료라는 양대 지출 원천을 중지시킴으로써 모든 부르주아 혁명의 슬로건인, 값싼 정부를 현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값싼 정부’도 ‘진정한 공화국’도 꼬뮌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그것들은 부수적으로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계급에 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계급의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음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꼬뮌은 계급 지배의 형태만이 아니라, 계급 지배 자체를 제거한 공화국의 명료한 형태였다.”

 

그리고 “꼬뮌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으로 공공연하게 인정된 최초의 혁명이었다. 부유한 자본가들만 제외한 빠리의 대다수 중간계급인 소상점주, 수공업자, 상인들도 이 점을 인정했다. 농민들에게도 빠리 꼬뮌은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꼬뮌은 프랑스 사회의 모든 건강한 요소의 진정한 대표자였고 따라서 진정한 국민 정부였다면, 꼬뮌은 동시에 노동자 정부로서, 노동 해방의 완강한 전위 투사로서 말 그대로 국제적이었다. 프랑스의 두 지방을 독일에 병합한[3]독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의 알자스와 로렌 지방이 독일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프로이센 군대의 눈앞에서 꼬뮌은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병합시켰다.”

 

이렇게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이루었던 빠리 꼬뮌”에 대하여 지배계급과 그들의 의회와 언론은 끔찍한 비방과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맞서 맑스는 빠리 꼬뮌의 고귀하고 위대함을 변호하고 웅변했다.

 

꼬뮌,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범죄이다! 노동자들이 상층 만 명의 통치 특권을 침해하다니, 사회의 조직된 힘을 자신들을 위하여 행사하여 온 계급 전제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파괴하려는 의지를 선포하다니! 유럽에서나 합중국에서 존경할 만한 계급들을 경련의 발작으로 던져 넣은 것은 바로 이것이며, 그들이 이것을 신성 모독이라며 혐오의 비명을 지르고 인민 학살을 격렬히 호소하고, 어시장에서나 나올 욕지거리와 비방이 그들의 의회 연단과 그들의 저널리스트 종들의 건물에서 나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본과 임금 노예제라는 두 개의 극을 가진 지금의 사회의 대변자들은 꼬뮌이 모든 문명의 토대인 소유를 철폐하려 한다고 외친다. 그렇다. 꼬뮌은 다수의 노동을 소수의 부로 전화시키는 저 계급 소유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꼬뮌은 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의도하였다. 노동의 노예화와 착취의 수단인 토지와 자본이라는 생산 수단을 자유로운 연합된 노동의 단순한 도구로 전화시킴으로써 개인적 소유를 사실로 만들려 하였다. 이것은 바로 ‘불가능한’ 공산주의이다. 지금의 제도의 지속 불가능성을 충분히 통찰할 줄 아는 지배계급의 다수의 인물들은 협동조합적 생산의 주제넘고 허풍 떠는 사도들인 체하고 있다. 협동조합적 생산이 공허한 가상이나 사기로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한다면, 협동조합들이 모두 공동 계획에 의거하여 국민적 생산을 조절하고 따라서 생산을 자기 자신의 지휘 아래 두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운명인 지속적인 무정부 상태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경련을 끝장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가능한’ 공산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소수 지배계급 독재의 경제적 토대를 파괴하고 그 통치 특권을 행사하는 “현대 국가를 파괴한 이 새로운 꼬뮌은 중세 꼬뮌[4]중세의 꼬뮌은 봉건 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한 일정한 범위의 자치권을 가진 도시를 말한다.의 재생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사회적 생산의 강력한 요인이 되고 있는 대규모적인 인민의 통일성을 소규모 국가들의 연맹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로 오인되었다. 국가 권력에 대한 꼬뮌의 적대는 과도한 중앙 집권화에 대한 낡은 투쟁의 지나친 형태로 오인되었다.” 오늘날 우리 노동자들 역시 빠리 꼬뮌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빠리 꼬뮌은 더 단호하게 혁명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결국 2개월여 만에 무너지게 된다. “3월 18일부터 5월 21일의 베르사유 상비군 군대의 빠리 침입에 이르기까지 빠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는, ‘상류계급’의 혁명, 반혁명에 팽배한 폭력 행위가 전혀 없었다. 보복에 관한 꼬뮌의 훈령은 만들어졌으나 한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도당들이 체포되었을 뿐이다. 베르사유 정부[5]방위 정부가 빠리 노동자들에 밀려 베르사유로 물러남.가 전열을 가다듬고 꼬뮌에 대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인쇄되는 모든 신문들을 태우고 빠리를 오가는 모든 편지들을 검열하고, 빠리 외부에서는 피에 굶주린 전쟁을 수행하고 빠리 내부에는 부패 및 음모를 시도하는 동안에도 꼬뮌은 가장 깊은 평화의 시기에서처럼 자유주의의 예법을 준수하면서 부끄럽게 자신의 지위를 배신했다.”

 

“만약 그들이 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이 좋다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비느와가, 그 다음에는 빠리 국민 방위대의 반동적인 부분이 자진하여 퇴각한 직후에 곧장 베르사유로 행군했어야 했습니다. 좋은 순간을 놓친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짓궂은 난쟁이 띠에르가 빠리의 무장을 해제하려는 시도로 이미 내전을 개시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사람들은 내전을 개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두 번째 오류는 중앙위원회가 자신의 권력을 너무 일찍 포기하고 꼬뮌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6]중앙위원회는 일찍이 국민 방위대에서 선출한 20여 명의 대의원로 구성되었으며 3월 18일 혁명이 시작되고, 3월 26일 꼬뮌에 권력을 넘길 때까지 혁명의 … Continue reading 또다시 너무 ‘고결한’ 가책 때문이었습니다.”(“맑스가 하노버의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1871. 4. 12. 중에서.)

 

결국 “노골적인 야만과 무법적인 복수”가 시작되었다. 방위 정부의 권력자들은 빠리 꼬뮌과 강화 협상을 하는 척하면서 빠리 꼬뮌과의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로이센과 연합하여 5월 21일, 빠리 꼬뮌에 대한 피의 진압을 시작했다. 이후 5월 28일까지 8일 동안, 빠리 노동자들은 대의의 위대함으로, 자기희생적이고 영웅적인 용기로 꼬뮌 방위를 위해 싸웠다. “사상자 수는 이전의 그 어떤 전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 빠리의 여성들은 바리케이드와 형장에서 의연하게 목숨을 바쳤다. … 외국 정복자의 보호 아래 수행된 내전을 통하여 혁명을 진압하려는 지배계급의 음모는 빠리의 대량 학살로 절정에 다다랐다.”

 

이제 “프랑스 노동자들과 그들의 노동의 산출물의 전유자들 사이에는 강화도 휴전도 존재할 수 없다. … 투쟁은 끊임없이 증대되고 확대되며 발발할 것이 틀림없으며, 종국에 가서 누가 승리자가 될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유하는 소수인가, 아니면 노동하는 엄청난 다수인가. 그런데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전위일 뿐이다.”

 

“유럽의 정부들은 빠리 앞에서 계급 지배의 국제적 성격을 증명하는 한편, 국제 노동자 협회, 자본의 세계 시민적인 음모에 대항하는 노동의 국제적 대항 조직을 이 모든 재해의 주된 원천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모든 유럽의 언론은 이 합창에 동참하고 있다. … 부르주아의 이성은 당연하게도, 국제 노동자 협회를 때때로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의 폭동을 명하는 중앙 관청을 가진 일종의 비밀 음모 단체라고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 협회는 문명화된 세계의 서로 다른 나라들의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국제적 연대에 불과하다. 계급 투쟁이 어디에서든지, 어떤 모습으로든지, 어떤 조건에서든지 어쨌든 존립한다면, 우리 협회의 회원이 전면에 서 있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7]빠리의 노동자들은 국제 노동자 협회의 창립(1864년)에서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 Continue reading 이러한 협회가 성장하는 토양은 현대 사회 그 자체이다. 아무리 많은 유혈을 통해서도 이 협회를 짓밟을 수는 없다. 이것을 짓밟으려면, 정부는 무엇보다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강제적 지배를 짓밟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맑스는 애초에는 노동자들의 빠리 봉기를 우려했다. 1870년 독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고 루이 보나빠르트의 스당 항복 이후, 공화국이 선언되었던 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적[8]프로이센 군대를 말한다. 당시는 독일-프랑스 전쟁 중이었고 1870년 9월 1일 스당에서 루이 보나빠르트가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고 프랑스는 공화정을 … Continue reading이 이미 빠리 성문을 두드리려고 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자포자기에 빠진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 그러나 노동자들은, 프랑스 농민들이 제1제정의 국민적 추억에 기만당한 것처럼 1792년의 국민적 추억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공화주의적 자유가 자신들에게 가져다준 수단을 냉정하고도 단호히 이용하여, 자기 계급을 확실히 조직해야 할 것이다. …”(맑스, “독일-프랑스 전쟁에 관한 총평의회의 두 번째 담화문”, 1870. 9. 9. 중에서.)

 

하지만 맑스는 빠리 꼬뮌이 일어나고 난 후에는 빠리 꼬뮌을 소부르주아 시위와 비교하는 쿠겔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1849년 6월 13일 식의 소부르주아 시위 등을 지금의 빠리에서의 투쟁과 비교할 수 있는지 나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투쟁이 틀림없이 유리한 찬스의 조건에서만 시작된다면, 세계사는 물론 대단히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우연한 사건들’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세계사는 매우 신비한 성질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들 우연한 사건들은 당연히 그 자체가 발전의 일반적 과정에 속하며, 다른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상쇄됩니다. 그러나 촉진과 지연은 그러한 ‘우연한 사건들’에 대단히 많이 좌우됩니다. … 결정적으로 불리한 ‘우연’은 이번에는 프랑스 사회의 일반적 조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프랑스에 프로이센 사람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과 빠리 코앞에 그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빠리 사람들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르사유의 부르주아 악당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빠리 사람들에게 투쟁을 시작하겠느냐 투쟁 없이 굴하겠느냐 하는 선택을 제시한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의 노동자계급의 사기 저하는 어떠한 수의 ‘지도자’들의 붕괴보다도 엄청나게 큰 불행이 될 것입니다. 자본가계급 및 그들의 국가와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빠리 사람들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사태가 직접적으로 어떻게 경과하든 간에, 세계사적 비중을 갖는 새로운 출발점이 얻어진 것입니다.”(“맑스가 하노버의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1871. 4. 17. 중에서.)

 

또한 맑스는 빠리 꼬뮌에서 인민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운동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행동을 저해하”고 “혁명의 충분한 발전을 저해”하는 이들에 대하여 언급하며, 그들이 불가피한 악이며 시간이 감에 따라 사람들은 그들을 떨쳐 내지만, 그러나 바로 그 시간이 꼬뮌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9]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국제 노동자 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4권), 박종철출판사, pp. 73-74.

 

그리고 “노동자들의 빠리는 꼬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된 선구자로 영원히 칭송될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가슴속에 들어가 있다. 역사는 꼬뮌을 근절시킨 자들을 지금 벌써 효목에 못 박아 놓았으며, 그들의 성직자들의 어떤 기도도 그들을 효목에서 구제하기에는 무기력할 것이다”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을 통해 맑스는, 지금도 우리 노동자들에게 조언하고 당부하고 있다.

“운동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것!

“냉정하고도 단호하게”, “부르주아적 자유가 허용하는 수단을” 이용하며 “자기 계급을 확실히 조직”할 것!

“투쟁 없이 굴하지 말고 투쟁을 시작”할 것!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맑스는 빠리 꼬뮌의 경험을 국제 노동자 운동의 공동 재산으로 만들기 위해 국제 노동자 협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담화문을 발표할 것을 제안하고(1871년 4월 18일) 그 작성을 위임받아 담화문을 쓰고 발표하였다(1871년 5월 30일).
2 방위 정부는 1870년에 시작된 독일-프랑스 전쟁 중에 루이 보나빠르트의 프랑스 제2제정이 무너지고 선포된 공화국의 정부임. 친왕당파와 부르주아 공화파의 정부. 이후 빠리 꼬뮌을 잔인하게 진압함.
3 독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의 알자스와 로렌 지방이 독일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4 중세의 꼬뮌은 봉건 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한 일정한 범위의 자치권을 가진 도시를 말한다.
5 방위 정부가 빠리 노동자들에 밀려 베르사유로 물러남.
6 중앙위원회는 일찍이 국민 방위대에서 선출한 20여 명의 대의원로 구성되었으며 3월 18일 혁명이 시작되고, 3월 26일 꼬뮌에 권력을 넘길 때까지 혁명의 지도부 역할을 했다. 꼬뮌은 빠리의 다양한 구에서 보통 선거권을 통해 선출된 시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온건한 중앙위원회보다 더 온건한 성향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맑스는 ≪프랑스에서의 내전≫에서 이 일을 “결정적인 실수”라고 했다.
7 빠리의 노동자들은 국제 노동자 협회의 창립(1864년)에서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지배계급 간의 이권 다툼일 뿐인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활동 등을 하며, 국제 노동자 협회의 빠리 지부에서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8 프로이센 군대를 말한다. 당시는 독일-프랑스 전쟁 중이었고 1870년 9월 1일 스당에서 루이 보나빠르트가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고 프랑스는 공화정을 선언한 직후의 상황이다.
9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국제 노동자 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4권), 박종철출판사, pp. 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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