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1] ≪제1 인터내셔널과 빠리 꼬뮌(The First International and the Paris Commune)≫

 

김병기 | 회원

 

*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bannedthought.net/Britain/MarxistStudyCourses/HistoryOfWorkingClass/L04-FirstInternationalAndParisCommune.pdf

 

올해는 빠리 꼬뮌 150주년이다. 1871년 3월 18일 빠리 노동자와 시민들이 무장봉기를 했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빠리 꼬뮌을 선포했다. 다수인 노동자계급이 소수인 자본가계급을 통제하고 지배했던 정부였다. 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빠리 꼬뮌은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입법권과 행정권 모두를 갖고 있는 민중의 권력이었다. 부르주아 정부가 노동자 정부로 이행된 빠리 꼬뮌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본래 꼬뮌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지방자치제의 독립된 기구’라는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소동’이나 ‘행동하는 협의회’라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다. 12-13세기 이후로 프랑스 농민, 장인과 무역하는 상인들은 봉건 영주로부터 그들의 계급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장시키기 위해서 꼬뮌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상호 협조하기로 맹세한 약속이나 협정’을 뜻했다. 봉건 지배 세력은 꼬뮌 회원들을 ‘맹세한 음모자들’이라고 불렀다.

1850-60년대 프랑스 자본주의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했다. 산업ㆍ금융 자본가는 엄청난 자본을 축적했다. 소상공인들, 즉 소부르주아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군인, 정부 관료, 성직자 등이 지배하는 반동과 억압의 시기였다. 언론 검열이 심했다. 교회는 학교를 장악했다. 지주와 자본가 등의 지지를 받았던 나뽈레옹 3세의 인기는 떨어졌고, 나뽈레옹 제정 반대파와 공화국 세력의 지지는 올라갔다. 1869년 선거에서 정부 지지표는 4백 5십만, 반대표는 3백만에 달했다. 나뽈레옹 정부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고자, 나뽈레옹 3세는 전쟁 카드를 승부수로 던졌다. 전쟁의 승리로 공화국 지지 세력을 누르고, 프랑스 제국의 위신을 다시 한번 높이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 주도하에 독일 통일을 이루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1870년 7월 15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8월 12일 국민 방위군 결성. 9월 1일 전투에 연패한 나뽈레옹 3세 생포됨. 9월 4일 나뽈레옹 제정이 무너지고 부르주아 공화국이 선포됨. 자유주의파와 반동적인 왕당파로 임시 정부 설립. 9월 14일 노동계급은 민병대를 결성하고 중앙위원회 조직. 9월 20일 빠리가 포위됨. 시민들은 식량 부족과 유행병으로 신음했다. 10월 30일 띠에르 정부는 휴전과 항복 협상을 시작. 10월 31일 블랑끼파가 시 의회 선거와 봉기 가담자에 대한 면책을 요구하며 빠리 시청을 습격. 정부는 모두 약속했지만 실행하지 않았다.

1871년 1월 21일 블랑끼파가 다시 한번 봉기. 1월 27일 프랑스–프로이센 휴전 협정 조인: 프랑스 정부군 무장 해제, 빠리의 북부동부 요새를 프로이센군에게 인도,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2월 의원 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 국회에서 ‘평화 조건’ 통과: 전쟁 배상금 지급, 알자스로렌 지역 양도, 프로이센군의 빠리 주둔, 치안 담당을 위해 민병대인 국민 방위군의 무장 허용 등. 국민을 배신한 정부에 대한 빠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반감과 저항이 고조되었다. 부르주아 민병대원들이 국민 방위군에서 이탈하자 국민 방위군은 중앙위원회를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새롭게 결성했다.

3월 1일 프로이센군이 빠리 외곽에 주둔. 빠리의 모든 학교 폐쇄, 상가 철시―중앙위원회와 맑스의 제1 인터내셔널이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다. 3월 10일 평화 조건 서명. 전쟁 기간 동안 유예되었던 임대료를 즉각 지불하라는 법령을 공포―소상공인들은 크게 반발하면서 정부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을 지지. 3월 18일 베르사유 정부군의 국민 방위군 무장 해제 시도에 반발해 빠리 시민들 무장 시위. 정부군 베르사유로 퇴각. 3월 19일 중앙위원회가 빠리 꼬뮌 평의회 선거를 공포. 3월 28일 빠리 꼬뮌 선포. 중앙위원회의 권력이 평의회로 이양됨.

상술된 간략한 전개 과정이 말해 주듯이 전쟁 패배, 빠리 포위로 인한 식량 부족, 높은 실업과 소부르주아의 경제적 몰락, 국민을 배신하고 항복한 정부와 지배 세력에 대한 분노, 국회의원 선거에서 반동적인 왕당파의 승리, 굴욕적인 평화 조건과 프로이센 군대의 빠리 주둔, 베르사유 정부군에 의한 국민 방위군의 무장 해제 시도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빠리 시민과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정부를 몰아내고 빠리 꼬뮌을 선포했다.

빠리 꼬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처럼 프롤레타리아 당의 주도하에 계획되고, 준비된 사회 혁명은 아니었다. 명확한 강령과 통일된 지도력이 부재했다. 85명의 의원들로 구성된 꼬뮌 평의회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이 혼재되어 있었다―자꼬뱅 당원, 블랑끼파, 쁘루동파, 바꾸닌파, 맑스의 제1 인터내셔널 등. 또한 꼬뮌에는 프롤레타리아와 소부르주아가 섞여 있었다: 노동자 32%, 하급 공무원 15%, 소상공인 15%, 변호사교사 등이 39%. 따라서 꼬뮌은 소부르주아와 사회주의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발표된 정책을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소부르주아적 정책: 꼬뮌은 프랑스 은행이 보관하고 있는 천문학적인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재정이 어려울 때는 은행에 가서 빌렸다! 철도회사 재산 압수, 부채 의무 폐지, 부르주아 과세 등에 반대했다. 자꼬뱅 당원과 쁘루동파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소부르주아를 대변하는 그들은 사유 재산을 지지ㆍ옹호했고, ‘모두를 위한 정의’와 ‘공정한 교환’을 주장했다.

사회주의적 정책: 상비군과 징병제 폐지, 민병대 신설, 남ㆍ여 무료 교육, 집세 폐지, 남ㆍ여 동일 임금, 정치와 종교의 분리, 종교 교육 금지, 종교 재산의 국유화, 모든 공직자의 선출과 소환, 꼬뮌 의원과 모든 공직자는 노동자 평균 임금 수령, 제빵 공장의 야간 근무 금지,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벌금 부과 금지, 자본가가 폐쇄한 공장들의 노동자 접수와 운영 허용. 꼬뮌 전사의 과부와 자녀, 그리고 고아들에 대한 특별 지원금 등.

맑스는 빠리 꼬뮌을 사회주의 정부로 여기지 않았다. 꼬뮌이 보여 준 소부르주아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적 사건에서 노동 대중이 보여 준 역사적 주도권에 찬사를 보내면서 빠리 꼬뮌을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새로운 사회의 선구자’라고 선언했다. 엥엘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질문에, “빠리 꼬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라고 대답했다. 빠리 꼬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형(Prototype)이고, 쏘비에트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빠리 꼬뮌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레닌은 피력했다.

반면에, 배신자 카우츠키는 빠리 꼬뮌을 ‘단기간의 지역 에피소드(Brief local episode)’라고 왜곡하면서, 프롤레타리아가 진정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혁명과 내전을 단념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맑스ㆍ엥엘스ㆍ레닌의 입장과 얼마나 다른가! 제2 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 개량주의적인 입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맑스의 우려대로 빠리 꼬뮌의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태도, 반혁명 세력에 대한 소부르주아적인 도덕적 관대함은 ‘피의 일주일(Bloody Week, 5월 21-28일)’로 돌아왔다. 패주의 위기를 모면하고 전열을 새롭게 정비한 베르사유 부르주아 정부군은 적군인 프로이센 군대와 함께 노동자 정부를 공격했다. 꼬뮌 전사들은 일주일 동안 영웅적인 항쟁을 했지만 엄청난 무력의 차이로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더 이상 빠리 시청에서 붉은 깃발은 펄럭이지 않았다. 꼬뮌 전사 25,000명이 사살되었고, 13,500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 섬으로 유배되었다. 피의 일주일은 자꼬뱅 당원이 외친 ‘모두를 위한 정의’가 유토피아적인 구호임을 또렷하게 증언했다.

빠리 여성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첫날부터 모래 자루를 만들어 빠리 전역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어린 자녀들과 함께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여성경찰위원회’와 제1 인터내셔널에 가입된 ‘빠리를 방어하는 여성동맹’ 등과 같은 여러 여성 단체들은 간호병 조직과 부상병 치료, 민병대 취사 담당, 전투에 필요한 물품 생산과 공급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피의 일주일 기간에는 남성 전사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끝까지 투쟁했다. 이런 의미에서, 빠리 꼬뮌 항쟁은 전 인민의 항쟁이었다.

1901년 꼬뮌 여성 전사이자 맑스의 협력자였던 뽈 밍크(Paule Mink)의 장례식이 있었다. 수만 명의 빠리 시민들이 수백 명의 경찰과 군인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꼬뮌 만세’와 ‘인터내셔널 만세’를 외치며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 1905년 전설적인 꼬뮌 여성 전사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어 애도를 표했다. 꼬뮌의 목표와 이상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72일 동안 존재했던 노동자 정부는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맑스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 은행의 돈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 베르사유로 달아난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던 것, 그런 것들을 베르사유 정부를 위협하기 위한 협상 카드로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 318일 이후 10일 동안 국민 방위군 중앙위원회가 베르사유로 패주하는 반혁명 세력들을 공격하지 않았던 것(고로, 반혁명 세력은 쉽게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선거를 관리하고 10일 만에 빠리 꼬뮌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중앙위원회의 노동계급 의식이 꼬뮌 평의회보다 더 높았다), 빠리 시내에서 베르사유 정부 지지 시위를 하는 반혁명 세력의 앞잡이들을 탄압하지 않았던 것, 타 지역으로부터의 고립 등.

왜 빠리 꼬뮌은 반혁명 세력에 단호하지 못했을까? 맑스주의자는 서로 연관되는 몇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당이 없었다. 그 당시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의 미성숙과 노동 대중의 소부르주아적인 태도(쁘루동파와 자꼬뱅 당의 영향), 노동 해방이라는 계급적인 사회주의적 과제보다 조국 해방이라는 애국적인 민족적 과제에 대한 집중(혁명가 블랑끼의 신문 제호가 부르주아적인 위험에 처한 조국이었다), 단단한 계급 의식의 결여와 반혁명 세력에 대한 도덕적인 관대함 등.

빠리 꼬뮌이 무너지자 프랑스와 유럽에는 보수ㆍ반동의 물결이 더욱 거세졌다. 온갖 탄압의 화살이 꼬뮌을 지지ㆍ옹호ㆍ방어했던 제1 인터내셔널로 향했다. 사회 명망가와 노조 지도자들이 인터내셔널을 비난하며 떠났다. 노동조합들은 탈퇴했다. 유럽 각국의 인터내셔널 지부 활동도 극심하게 제약되었다. 제철 만났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활개 치는 개량주의와 기회주의는 계급적인 노동 운동과 제1 인터내셔널의 활동을 더욱 어렵게 했다.

제1 인터내셔널은 물러서지 않았다. 빠리 꼬뮌의 목표와 이상을 지지하는 모임과 시위 등을 다양하게 조직했다. 전 세계의 빠리 꼬뮌 지지자들은 강력한 ‘국제 연대 활동’으로 응답했다.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들은 빠리 꼬뮌을 옹호하고, ‘피의 일주일’을 거세게 비난하는 대중 모임과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빠리 꼬뮌의 망명자와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빠리 꼬뮌은 애국과 민족을 늘 밥 먹듯이 외치는 부르주아 계급은 그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공모해서라도 자기 나라의 노동계급을 적군처럼 짓밟는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사악하고 교활한 부르주아의 배신적인 행위는 빠리 꼬뮌 때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다.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때 러시아 지주와 자본가도 그랬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지배 세력은 침략자 나찌 히틀러 도당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빠리 꼬뮌이 전 세계 노동계급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소개하는 작은 책은 영국 공산당(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의 맑스주의 학습 교재 시리즈 제4권(1931년, 47쪽)이다. 다음은 이 책의 간추린 요약이다.

 

 

1. 19세기 유럽의 봉건주의는 빠르게 무너지고, 자본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경제적으로 몰락한 농민과 도시 소부르주아는 노동계급으로 전락했다. 1850년대에 영국 자본주의는 다른 나라를 압도했다. 그 당시에 이미 인구의 절반이 도시에 거주했다. 프랑스 자본주의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중ㆍ소기업이 대다수인 프랑스 산업은 ‘자본의 집중’에서 영국보다 한참 뒤쳐졌다. 노동 대중의 대다수는 수공업자, 가내공업 노동자, 소규모 기업 노동자들이었다. 산업 노동자는 소수였다.

 

2. 1850년대에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다. 노동 운동은 ‘차티즘의 패배’를 아직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했다. 수백만의 청년 노동자들이 미국과 호주로 이주했다. 영국 노동자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높은 임금과 고용 안정을 누렸다. 이런 세 가지 요인들로 인해 영국 노조는 노동계급적인 정치 투쟁을 멀리했다. 경제 투쟁에 집중하면서 부르주아 정당인 자유당의 2중대 역할에 충실했다. 협동조합, 상호공제조합, 금주협회 등과 같은 비정치적인 조직들도 빠르게 성장했다. 1859년도에 회원 수가 3백만에 달했다.

 

3. 1857년 공황이 발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정치적인 계급 투쟁이 지지를 받았다. 자본가의 공세에 노동 운동은 파업으로 맞섰다(1859, 1861년). 1861년에 런던의 무역조합원들은 함께 모여 ‘런던무역협의회’를 창립했다. 1868년에는 처음으로 노조의 연합과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조합회의’를 개최했다.

 

4. 프랑스에서 1848년 6월 봉기가 진압되었다. 전투적 노동 운동은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시기에 쁘루동의 평화적인 소부르주아 이론이 노동 대중에게 파고들었다. 쁘루동은 자본주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빈곤의 근본 원인이 생산 영역이 아니라 교환 영역에 있다고 그릇된 주장을 했다. 그래서 ‘상호공제협회’와 ‘협동조합’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쁘루동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미숙한 폭정’이라고 비난했다. 사유 재산을 옹호하고 파업을 비롯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투쟁을 반대했다.

 

5. 그 당시 프랑스 노동 운동에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경향들이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몰락하는 소생산자와 장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쁘루동파. 정보기관원들에게 뇌물을 받고 정치 투쟁을 비난했던 경찰 사회주의(Police-socialism) 조직. 소수이긴 하지만 블랑끼를 따르는 노동자 조직. 블랑끼는 사회 체제 전복을 위해서 소수의 음모적인 혁명가 그룹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대중 운동을 경시했다.

 

6. 1848년 혁명의 패배로 인해 독일 노동계급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러나 6-70년대에 독일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하자 노동 운동 역시 빠르게 성장하면서 정치적 독자성을 추구했다. 1862년, 전국노동자회의는 라쌀(Lassalle)의 입장을 채택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결별하고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독자적으로 결성하자. 라쌀은 1863년 5월에 창립된 ‘전독일노동자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7. 라쌀은 노동 조직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면서 독일 노동자의 계급 의식을 높이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근본적으로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다투는 과정 속에서, 라쌀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인 융커에게 의지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경제적 양보를 얻어 내고자 비스마르크 체제를 지지했다. 결국 독일 노동 운동은 프로이센 지배 세력에 흡수되었다. 라쌀의 ‘현실주의’를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8. 관념론자인 라쌀은 부르주아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보통 선거권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선거를 통해서 노동계급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계급 모순까지도 폐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민을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집단으로 여겼다.

 

9.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은 1869년에 아이제나흐에서 창당되었다. 지도자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1826-1900)와 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 아이제나흐 강령은 라쌀의 잘못된 입장이 담겨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맑스주의의 입장과 가까웠다.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은 제1 인터내셔널과 연락을 유지했다.

 

10. 두 가지 정치적 사건으로 1860년대에 유럽 노동 운동은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는 미국 남북 전쟁(1861-5)으로 인해 목화 품귀 현상이 발생하자 섬유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자, 런던업종협의회(London Trades’ Council)는 실업자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결성했다. 프랑스 노조 역시 그렇게 했다. 자연스럽게 영국ㆍ프랑스 위원회는 국제 연대 차원에서 함께 그 사업을 추진했다.

 

11. 다른 하나는 1863년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노동 대중은 그 폭동을 지지했다. 그러자 영국ㆍ프랑스 노동 단체는 지지 모임과 시위를 조직하고, 폴란드를 지지ㆍ지원하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영국ㆍ프랑스 노조는 런던에서 폴란드 폭동을 지지ㆍ연대하는 국제 모임을 개최했다. 그 모임에서 두 나라 노조 대표들은 영국과 유럽 대륙의 노동자들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자고 결의했다.

 

12. 그 당시 영국 자본가는 프랑스ㆍ벨기에ㆍ독일 등으로부터 값싼 외국 노동자를 데려왔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좋은 노동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 영국 노조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유럽 대륙의 노조에 연대 활동을 호소했다. 응답으로 1864년 9월 프랑스 노조 대표들이 런던에 왔다.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결성이 결정되었다. 강령과 법규를 작성하는 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들은 주로 영국ㆍ프랑스 노동 대표자와 런던에 거주하는 독일ㆍ이딸리아 이주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었다. 맑스도 위원으로 뽑혔다.

 

13. 위원들의 정치적 성향과 조직적 배경은 매우 다양했다: 노조 대표, 오웬주의자, 차티스트주의자, 쁘루동주의자, 블랑끼주의자, 독일 공산주의자, 폴란드와 이딸리아의 혁명적 민족주의자 등.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맑스는 ‘강령과 규약’을 작성했다.

 

14. 맑스는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무역과 산업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노동계급의 고통은 개선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정치적 권력을 요구한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자본가와 지주는 그들의 경제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정치적 특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15. 제1 인터내셔널(이하 인터내셔널) 1차 대회(Congress)는 1866년 9월에 제네바에서 열렸다. 쁘루동파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육체 노동자만 회의 참석을 허용하자(맑스와 엥엘스 등을 겨냥한 제안이었다). 파업에 반대하고 공제조합을 설립하자. 여성의 공적 생활과 생산 현장 취업을 반대하자. 그러나 모두 부결되었다. 맑스의 노동조합에 관한 제안서는 가결되었다: 일상적인 경제 투쟁과 임금 노동의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 투쟁에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필수적인 조직이다.

 

16. 1차 대회는 러시아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폴란드 독립을 지지했다. 8시간 노동법, 그리고 여성과 청소년 노동자를 보호하는 특별법 제정을 결의했다. 1차 대회 후에 영국 노동조합들이 가입했다. 스위스, 이딸리아, 독일, 벨기에 등에 지부가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부르주아 언론의 기사도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이 노동자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선동적인 패거리(Gang of Incendiaries)”라고 거칠게 비난했다.

 

17. 2차 대회는 1867년 9월 로잔에서 열렸다. 부르주아 국가의 전쟁 정책을 반대했다. 정치 투쟁은 노동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정치권력의 쟁취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고 선언했다. 국제 연대의 실천으로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하면서, 자본가들이 파업 파괴를 위해 데려오는 외국 노동자들을 가로막았다. 인터내셔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프랑스 노동자가 파업에서 승리하자, 유럽의 노동계급은 인터내셔널에 호의적인 관심을 보였다.

 

18. 3차 대회는 1868년 10월 브뤼셀에서 열렸다. 전쟁 위험에 관해서 토론했다. 1866년에 프로이센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 끝났고, 프랑스와 독일 간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전쟁 반대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파업은 노동자계급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으로 인정되었다. 그동안 파업을 줄곧 반대해 왔던 쁘루동파도 동의했다. 소유 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토지, 광산, 철도, 통신ㆍ교통수단 등은 모두 ‘사회적 소유’라는 결의안이 쁘루동파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통과되었다(찬성 34, 반대 4, 기권 15).

 

19. 인터내셔널에서 쁘루동파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바꾸닌파가 등장했다. 미하일 바꾸닌(1814-76)은 러시아 혁명가로 무정부주의자였다. 노동 운동 문제에서 맑스의 입장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바꾸닌은 사회적 비참함과 경제적 불평등의 근원이 국가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 사회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확신했다. 국가의 폐지와 함께 자본주의 체제는 자동적으로 무너지고, 국가가 없는 새로운 사회 질서가 자리를 잡는다고 주장했다. 사회 혁명의 목적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폭동을 준비하는 것만이 혁명가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20. 바꾸닌은 토지, 광산, 기업 등의 공동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그의 공동 소유 개념은 모든 계급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소부르주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입장이었다. 바꾸닌은 노동계급이 담당해야 할 선도적인 역할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 혁명의 기본 세력을 가난한 구호 대상자, 떠돌이 농민, 룸펜 프롤레타리아, 청년 지식인 등에서 찾았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터무니없이 과장한다고 맑스를 비판했다. 바꾸닌의 영향력은 특별히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이딸리아, 스위스, 스페인, 벨기에 등에서 강했다.

 

21. 4차 대회는 1869년 바젤에서 열렸다. 회의에서 바꾸닌은 상속권 폐지를 제안했다. 상속권이 정치적ㆍ경제적인 정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고, 사회적 평등 실현을 어렵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사회적 불평등의 근본 원인은 상속권이 아니라 기존의 자본주의 경제 질서라고 반박했다. 상속권 폐지를 중심에 놓고 사회 혁명을 추진하는 것은 마차를 말 앞에 놓고 마차를 끌고 가려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22. 인터내셔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 터졌다. 1870년 7월에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독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인터내셔널 대회는 취소되었다. 인터내셔널 회원인 프랑스ㆍ독일 노동자들은 함께 전쟁을 강하게 반대했다. 인터내셔널은 7월 23일 맑스가 쓴 호소문을 배포했다: 전쟁 책임은 프랑스독일 지배계급에게 있다.

 

23. 프랑스의 패배로 나뽈레옹 제국은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제1 인터내셔널은 9월 9일 다시 한번 맑스가 쓴 호소문을 배포했다: 프랑스를 합병하려는 독일 부르주아 계급의 계획을 비난했다. 인터내셔널 독일 회원들도 프랑스 합병 계획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의회에서 전쟁 지출금(War Appropriation)에 반대한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2년 징역형을 받았다. 스위스ㆍ벨기에ㆍ오스트리아 지부들도 프랑스 합병 계획을 큰 소리로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24. 1871년 3월 18일 폭동으로 빠리 꼬뮌이 선포되었다. 인터내셔널은 빠리 꼬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방어하면서, 빠리 꼬뮌을 전 세계 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빠리 꼬뮌은 1871년 5월에 무너졌다. 인터내셔널은 큰 타격을 받았다. 거센 탄압으로 인터내셔널의 프랑스ㆍ독일 지부는 활동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빠리 꼬뮌을 지지했다고 비난하면서 사회 운동 명망가와 영국 노조 대표 등은 인터내셔널을 떠났다.

 

25. 인터내셔널에서 빠리 꼬뮌을 주제로 맑스와 바꾸닌 지지자는 논쟁했다. 맑스의 입장: 꼬뮌은 노동자 정부였다.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이 절정에 달했던 정치 체제였다. 무정부주의자 바꾸닌의 입장: 꼬뮌은 국가에 대한 부정이었다. 가장 큰 실수는 혁명적 독재를 시도했던 것이다.

 

26. 1871년 9월에 런던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협의회(Conference)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계급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치적 당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필수적인 것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경제적 운동은 정치적 활동과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터내셔널 회원들에게 상기시킨다. 노동계급은 정치적 사안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바꾸닌의 입장에 대한 거부였다.

 

27. 5차 대회는 1872년 9월 헤이그에서 열렸다. 맑스와 엥엘스는 인터내셔널 본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제안했다. 1871년 5월 빠리 꼬뮌의 붕괴 이후, 유럽에 불어닥친 보수ㆍ반동적인 광풍으로 인터내셔널 활동은 매우 어려워졌다. 점점 증가하는 무정부주의 바꾸닌파와 개량주의ㆍ기회주의적인 영국 노동 운동의 영향으로부터 인터내셔널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찬성 26 반대 23 기권 9으로 가결되었다. 미국으로의 이전 이유는 그 당시 유럽과 전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맑스와 엥엘스의 동지들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8. 1876년 7월 미국 필라델피아 협의회에서 인터내셔널은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고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인터내셔널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국제 노동계급 운동에 과학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퍼트렸다.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국제 연대 활동을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노동계급 운동에서 정치적인 계급 투쟁을 경시하는 종파주의 입장을 물리쳤다.

 

29. 1919년 레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 인터내셔널은 맑스ㆍ엥엘스의 제1 인터내셔널의 진정한 계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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