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2] 칼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에의 서문

 

칼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에의 서문

 

프리드리히 엥엘스(Friedrich Engels)

번역: 채만수(소장)

 

여기에 인쇄된 원고―브롸케(Bracke)에게 동봉한 편지와 강령초안 비판―는 맑스가, 가이프(Geib)와 아우어(Auer), 베벨(Bebel), 리프크네히트(Liebknecht)에게 전달한 후에 되돌려달라며, 1875년 통합대회[2] 조금 전에 브롸케에게 보냈던 것이다. 할레(Halle) 당대회[3]가 고타강령의 토론을 당의 대회일정에 올렸기 때문에, 이 토론과 관련된 이 중요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서를 내가 더 이상 계속 공표하지 않는다면, 일종의 은닉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고는 또 다른 그리고 더욱 광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최초로, 라쌀(Lassalle)이 정치적 선전활동을 개시한 이래 취해온 견해에 대한 맑스의 입장이 명확하게 표명되고 있으며, 게다가 그것은 라쌀의 경제학적 원칙들뿐만이 아니라 전술에도 해당된다.

여기에서 강령이 해부되는 가차 없는 예리함, 획득된 결론들이 서술되는 준열함, 폭로되는 초안의 허점들, 이 모든 것들은 1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더 이상 감정을 해칠 수 없다. 특유의 라쌀주의자들은 이제 개별적으로 고립된 패잔자들로서 외국에만 존재할 뿐이고, 고타강령은 할레에서는 그것의 창작자들에 의해서조차 전적으로 미비한 것으로서 포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제와 관련하여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는, 몇몇 개인적인 신랄한 표현들과 평가들을 생략하고 점선으로 대체했다. 맑스 자신도, 만일 그가 오늘날 이 원고를 공표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 원고 여기저기의 격렬한 어조는 두 가지 사정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었다. 첫째로는, 맑스와 나는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독일의 운동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따라서 이 강령초안 속에 드러난 결정적인 퇴보는 우리를 특히 격렬하게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둘째로는, 인터내셔날 헤이그 대회[4] 겨우 2년 후였던 당시에 우리는 바꾸닌(Bakunin) 및 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극히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독일의 노동자운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가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 강령의 은밀한 아버지의 지위를 떠넘기리라고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동기는 이제 사라졌으며, 그와 함께 문제의 대목들의 필요성도 사라졌다.

또한 언론출판법 상의 이유들로부터도 몇몇 문장들이 단지 점선으로만 암시되어 있다. 내가 보다 부드러운 표현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곳에서는 그것을 각괄호 속에 넣었다. 그 외 인쇄는 원문대로다.

 

1891년 1월 6일 런던

Fr. 엥엘스

노사과연

 


[2] 1875년 5월 22일부터 27일까지의 고타 통합당대회에서 독일 노동자운동의 두 유파―아우구스트 베벨과 뷜헬름 리프크네히트가 이끌던 사회민주노동자당(아이제나흐파)과 라쌀(Lassalle)파의 전독일노동자협회―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와 더불어 독일 노동자계급의 당은 결정적으로 전 국민적 성격을 띠었다. 통합된 당은 1890년까지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oz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타 통합당대회에 제출된 통합당 강령초안은 중대한 오류와 라쌀주의에의 원칙상의 양보를 안고 있었다. 초안의 공동작성자는 뷜헬름 리프크네히트였는데, 그는 이 문제에서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맑스와 엥엘스는 독일에서의 단일한 사회주의 정당의 건설에 동의했지만, 라쌀파와의 이데올로기 타협을 반대했고, 강령초안의 잘못된 명제들에 예리한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초안은 단지 사소한 수정만으로 당대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3] 독일 사회민주당의 제1차 당대회는, 사회주의자단속법이 폐지된 후 1890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할레에서 개최되었다. 이 당대회는, 뷜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제안에 따라, 에르푸르트(Erfurt)에서 개최될 다음 당대회까지 새로운 강령의 초안을 작성하고, 지방의 당조직들과 신문에서 토론될 수 있도록 이것을 당대회 3개월 전에 공표하도록 결의하였다. 나아가 당대회는 당의 새로운 조직규약을 결의했는데, 이것은 1900년의 마인츠(Mainz) 당대회까지 유효했다.

 

[4] 제1 인터내셔날(국제노동자협회) 헤이그 대회는 1872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그 구성으로 보아 제1 인터내셔날의 모든 대회들 중에서 가장 많은 대표들이 참석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15개 국가의 조직들로부터 65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했다. 맑스와 엥엘스는 직접 대회의 작업을 지휘했다. 이 대회에서 노동자운동 내부의 소부르주아적 종파주의의 온갖 변형들에 대한 맑스와 엥엘스 및 그들의 지지자들의 수년에 걸친 투쟁이 종결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분열적 활동은 규탄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제1 인터내셔날에서 제명되었다. 이 헤이그 대회의 결의들은 여러 국가에서 장차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을 창설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제1 인터내셔날의 활동에 의해서 독일 노동자운동 내부의 정치적 성장과정이 결정적으로 촉진되었다.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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