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닥터 지바고≫에서 드러나는 혁명과 문학에 대하여

제일호 │ 회원

 

  1. ≪닥터 지바고≫의 줄거리
  2.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점과 논쟁 요소
  3. ≪닥터 지바고≫의 출간
  4. 혁명기 러시아의 문학
  5. 파스테르나크의 시 세계
  6. 닥터 지바고의 출간을 위한 CIA의 공작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 이 소설에 대한 CIA의 공작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냉전 시대 CIA는 이 소설이 나오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이 소설을 쏘련 체제를 붕괴시키고자 하는 정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였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WP)에 그 증거는 분명히 실려 있다.[1]냉전 시대, CIA는 ‘닥터 지바고’를 쏘련을 붕괴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다. 피터 핀과 페트라 쿠비, “During Cold War, CIA used ‘Doctor Zhivago’ as a tool … Continue reading 또한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등의 소설이 냉전 시대 동안 쏘련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정치 프로파겐다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구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왜 이 소설들에 환호하며 찬사를 보내는 걸까? 문학을 정치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이 소설들이 역사 왜곡은 물론이고 잘못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들이 마치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큼의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휴머니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선전을 하고 있지만, 이 소설들은 자본주의라는 계급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부분으로 흡수되어 소부르주아적이고 몰계급적인 자유와 휴머니즘을 설파하고 자본가계급의 영구 지배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과 계급 없는 세상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나아가 이 소설들은 쏘련의 사회주의 혁명과 체제를 폄하하고, 혁명을 이끈 지도자들을 중상 모략하여 쏘련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조지 오웰처럼 노골적인 역사 왜곡은 하지 않았지만, 혁명의 시대를 관통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면서, 혁명에 대한 환멸, 인민의 구체적 삶과는 너무나도 유리된 사랑과 종교적 구원, 자연과 자유를 그리고 있다. 혁명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구체제의 모순 타파이고 새로운 사회의 희망적인 건설이다. 이때 나타날 수 있는 계급 충돌과 과정상의 사소한 오류를 보편적 가치에 빗대어 버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며, 이 점이 바로 CIA의 낚시에 걸려든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본 글은 파스테르나크와 ≪닥터 지바고≫에 투영된 파스테르나크의 모습, 즉 유리 지바고의 삶과 시를 살펴보고 CIA가 어떻게 이 소설을 활용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닥터 지바고≫의 줄거리

유리 지바고는 시베리아 지방 부유한 사업가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난 뒤, 열 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병으로 죽게 되자 지바고 일가는 몰락하고 만다. 고아가 된 지바고는 모스크바 상류 가정인 그로메코 집안으로 입양된다. 그로메코 집에는 지바고 또래의 토냐라는 딸이 있었는데, 고아가 된 지바고는 그와 함께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게 된다. 이 시기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격동기로 철도 노동자 파업이 확대되었으며, 1905년 모스크바 브레스니야 지역에서는 무장 세력에 의해 도시기능이 마비되는 등 무질서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바고는 의학을 공부한 뒤 어린 시절 소꿉놀이 친구였던 토냐와 결혼하게 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의관으로 종군하게 된다. 야전병원으로 배치되어 일하던 중 간호사로 일하던 라라를 만나게 된다.

라라의 어머니 기샤르 부인은 남편을 잃고 1904년에 우랄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아들 로지온과 딸 라라를 데리고 이주한다. 부인은 남편의 친구였던 코마로프스키에게 의존하며, 생계를 위해 남은 재산을 털어 작은 양장점을 인수하여 운영했다. 냉혹한 사업가이자 변호사인 코마로프스키는 그 대가로 나약한 기샤르 부인을 농락한다. 그가 주기적으로 기샤르 부인 집에 들락거리던 그해 7월 중순 어느 일요일, 침대 속에서 휴일의 편안함을 누리던 라라는 몸이 아픈 어머니 대신 코마로프스키와 함께 그가 초대받은 파티에 동행했다. 그런데 거기서 코마로프스키는 파렴치하게도 라라마저 범하고 만다. 이때 라라는 쾌활하고 청순한 열여섯 살 소녀였다. 라라는 코마로프스키에게 몸을 뺏기게 된 이후에, 계속해서 육체관계를 원하던 코마로프스키를 저격하나 실패했던 적도 있었다.

라라는 세상은 규칙과 질서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혁명을 꿈꾸는 청년 파벨 안치포프와 결혼했으나 파벨은 라라를 놔두고 전장으로 향한다. 라라는 파벨을 찾고자 간호사로 자원하여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지바고와 라라가 만났으며 그들은 숙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1917년이 되자 전쟁은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으로 확산된다. 전장으로 나간 뒤 3년 후 지바고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혁명 직후 모스크바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바고는 모스크바의 생활을 보면서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가족과 함께 우랄에 있는 시골 마을 바투이키노로 옮겨간다. 하지만 그곳도 안정되고 평화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구차한 생활이지만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시를 쓰며 살던 중 고요하고 조용하지만 뭔지 모를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유리아틴에 있는 도서관을 찾은 그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라라와 다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라라에게 코마로프스키가 관능적인 자극 자체에 머물렀다면, 이 만남에서 지바고는 관능적인 자극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지바고와 라라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했으며 같은 시선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지바고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라라 자체를 놀랍고 신비스럽게 받아들여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라라를 사랑하게 된다.

아내 모르게 라라와의 재회의 기쁨을 누리던 지바고는 어느 날 라라를 만나러 가는 도중, 의사가 필요했던 민간인으로 조직된 유격대(빨치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간다. 빨치산과 함께 생활하면서 지바고는 백군과 빨치산,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배반과 복수의 잔인한 행위를 직접 목격한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어 탈출하여 폐허가 된 우랄의 시골 마을 바투이키노 마을로 가게 되며, 그곳에서 지바고는 라라를 다시 만나 얼음 궁전에서 꿈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지바고 가족들은 유럽으로 추방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바고와 라라의 생활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한다. 바투이키노로 피신한 이들 두 사람 앞에 지난날 라라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코마로프스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바고는 코마로프스키가 그들을 극동의 안전지대로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하자 라라 모녀를 넘겨주고 만다. 결국 지바고와 라라는 다시 헤어지고 만다.

라라와 헤어진 지바고는 걸어서 모스크바로 향한다. 지바고의 몸과 마음은 많이 지치고 쇠약해진 상태였다. 지바고는 모스크바에서 옛날 하인이었던 사람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나 실의와 좌절 속에서 집필로 시간을 보낸다. 직업은 의사였으나 모든 열정을 다해 시를 쓰고 번역하는 일로 가난하고 구차한 생활을 꾸려나갔던 것이다. 가끔 유럽에서 토냐로부터 편지가 왔으나 지바고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여름이 끝나가는 8월 하순, 그는 병원에 출근하려고 전차를 탔다. 허탈한 마음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가던 중 라라와 비슷한 여인을 발견하고 급하게 전차에서 뛰어내려 몇 발자국 걷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채 숨을 거두고 만다. 모스크바에 온 라라는 우연히 지바고의 죽음을 알고 목메어 운다. 그녀는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지바고 옆에 내내 있었던 여인이었다.

이것이 ≪닥터 지바고≫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2.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점과 논쟁 요소

첫째, 생명에 대한 찬미와 부활에 대해서이다.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닥터 지바고≫는 유리 지바고라는 한 의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시적 서사의 웅장한 스케일로 그린 장편소설로 1901년부터 1953년까지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혁명을 배경으로 주인공 이름을 ‘생명’(жизнь)을 뜻하는 지바고(Живаго)로 부르면서 진정한 생명력에 대한 의미를 작품에 담고자 했다. 그의 생명에 대한 시각은 다음에서 잘 드러난다. 유리 지바고가 모스크바를 떠나 시베리아로 가던 길에, 연료 보급을 위해 잠시 멈춰 선 열차에서 내려 바라본 숲속, 둑 밑의 벌거벗은 숲, 생명이 없는 듯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는 나무와 수풀, 무질서 상태로 죽은 것들, 그런데 이 쓸모없는 것, 이 무질서와 부서질 듯 말라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에게는 생명(жизнь)이었다. 이것은 지바고의 자연과의 교감과 생명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라라에 대한 사랑으로 생명과 구원의 상징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인과성을 가질 수 없는 연결이라고 하겠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인들을 피해 갈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목숨과 사랑을 잃었다. 혁명의 과정은 ‘피의 일요일’ 등으로 나타나듯이 지배계급의 저항은 처절하고 잔인했다. 많은 노동자 민중이 쓰러져갔다. 이 혁명의 과정 속에서 짜르, 백군, 우파, 귀족과 지주가 파괴한 노동자 민중의 삶과 사랑은 분노로써 표현되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며, 그 파괴된 삶과 사랑을 한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되돌릴 게 아니라 혁명에 헌신적인 어머니로 되돌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불멸과 부활이라는 지바고의 내적 울부짖음은 한낱 공허한 메아리일 뿐, 현실의 혁명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주제가 아닐까? 지바고가 질병을 앓다가 살아나는 대목에서 지바고와 예수의 삶을 비교하면서 삶과 예술의 불멸과 부활을 암시하는 부분은 종교적 신념의 과잉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라라는 막달라 마리아란 말인가?) 인민을 아편굴에 빠뜨려 혁명성을 거세하고자 하는 지배계급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기에, 냉전 시대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이 소설에 노벨상을 주고 쏘련에서 출판 금지된 이 소설을 몰래 퍼뜨리려고 한 것이다. 생명 의지의 보편적 가치는 구체적인 생산적 노동의 발현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종교적 신념의 화석화된 추상적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인민의 생명 의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 의지를 갉아 먹는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 지바고는 신정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작품 속에서 지바고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활인이나 가장으로서는 부적합한 몽상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처해나가는 대신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어떤 순간적이고 강력한 충격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는, 역사 위에 더 높은 무언가(신적 존재)가 존재한다는 신정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며, 풀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없듯,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 혁명, 차르, 로베스피에르 같은 자는 역사의 유기체적인 선동자, 즉 발효소일 뿐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자는 활동적이고 단선적인 열광자들, 자제의 천재들이다. 그들은 몇 시간이나 며칠 만에 구질서를 뒤엎어 버린다. 전복은 수주나 수년에 걸쳐 지속되지만, 이후 수십 년, 수 세기에 걸쳐 성물과 같은 전복을 낳은 편협성의 정신에 경배한다. (≪닥터 지바고≫, 민음사, p. 367.)

 

그는 역사의 주체가 영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민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신이라는 구원의 존재에 빠져버렸기에, 혁명에 회의적이게 되고 혁명의 원인과 성격을 무시하고, 혁명기나 전쟁기의 파괴를 단순하게 인간의 삶과 사랑을 파괴하는 부정적 요소로 바라보게 되며, 사유형, 수동적 인간형이기에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알고 있었다면, 지바고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본다.

셋째, 이데올로기 무용론과 혁명에 대한 환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변혁의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단지 이데올로기의 무용성을 말하고자 전혀 터무니없는 곳에서 동기를 찾고 있다. 파샤(파벨)가 군인이 되어 혁명과 전쟁에 뛰어든 것이, 프롤레타리아 해방과 같은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라라와 코마로프스키의 관계에 대한 의혹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겠다. 혁명은 모순의 첨예화로 발생하며, 혁명은 과학적 사상의 기반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는 이 장면에서는, 볼세비키가 주도한 러시아의 혁명과 사회주의화 과정 자체를 희화화하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는 인생을 군사 원정으로 받아들였고,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해 돌을 움직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안겨 준 게 고통뿐이었다 해도 상처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난이 그들보다 훨씬 컸으니까요. (같은 책, p. 377.)

 

여기서 그가 앞날의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린,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거야. 시대의 징후를, 사회적인 악을 가정적인 현상으로 착각한 거야. (같은 책, p. 281.)

 

파샤가 지바고와 마지막 밤 나눈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행보를 그럴듯한 말로 설명하려 하지만, 라라는 그의 일탈이 개인사와 역사를 착각한 것으로 일축한다. 시대의 징후, 사회적인 악을 가정적인 현상으로 착각하여 혁명에 투신한다는 것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아내의 일탈과 착각을 해서 혁명에 투신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궤변에 불과하며 혁명에 투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일 수 있는 언급이다. 이러하기에 쏘련 당국은 이 소설의 출판을 금지했고 전작가 동맹이 파스테르나크를 제명했던 것은 아닐까?

넷째, 라라와 지바고의 사랑은 숭고한 것일까? 라라와 지바고의 사랑은 어찌 보면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으로 볼 수 있지만, 엄연히 따지면 불륜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음란한 욕망과 타락의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품을 읽으며 라라가 지바고의 죽음 앞에서 고백하는 그런 사랑으로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어 그들의 사랑을 숭고한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오, 이것은 자유분방하고 유례없는,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사랑이었다. … 그들이 서로를 사랑한 것은 그들 아래의 땅, 그들 머리 위의 하늘과 구름, 그리고 나무 등 주변의 모든 것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어쩌면 그들 자신보다 주변의 마음에 더 들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책, p. 445.)

 

그들의 사랑은 어쩌면 그들 자신보다 주변의 마음에 더 들었을지도 모른다라고 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라라의 남편이나 유리의 아내 등)에게는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역지사지를 고려하지 않은 자유로운 감정의 사랑은 본능적인 것이지 숭고한 것이 아니다. 본능적 행위와 숭고한 행위는 구분을 해야 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인을 혁명기의 어수선함으로 돌리고 그 운명적 사랑을 찬양할 수는 있겠지만, 혁명기의 숭고한 사랑은 인민에 대한 사랑, 고리끼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이 소설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내세우는 자유로운 개인과 사랑이라는 주제 때문이었다. 이 소설이 던지는 개인의 자유와 사랑, 구원, 혁명에 대한 환멸 등이 사회주의 쏘련의 인민들의 의식을 갉아먹게 하여 그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CIA가 공작을 벌였던 것이다.

다섯째, 문학과 현실의 반영에 대해서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시적인 언어로 그려진 한편의 풍경화와 같은 느낌을 주는 서정적 소설이다. 러시아의 인민들은 전쟁과 혁명으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지만, 조국 러시아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인민들이 흘린 피 위에서 한 발 한 발 노동해방과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해 역동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흰 눈 위에 흩뿌려진 스트렐리니코프(파샤의 다른 이름)의 선혈은 어쩌면 혁명기를 살았던 청년들의 혁명에 대한 열정과 희생이었지만, 이 소설은 그 죽음을 순수의 파국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혁명은 순수의 파괴가 아니라 착취와 억압 속에서 경제적 조건과 개인적 의식 사이의 상호 연관을 인간 역사의 전체 과정을 바라보며 깨달은 피억압계급이 분노로 구체체를 부셔버리는 것이다. 미(美)는 상이한 사회 계급 출신의 사람들이 상이하게 해석하는 상대적 개념일 수 있기에, 파샤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문학은 작가 자신이 처해있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회적 실천의 행동 요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반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작품 속 지바고의 생각을 통해, 혁명은 지지하지만 유혈낭자한 살육은 반대한다는 것, 볼셰비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 부분, 적군(赤軍)보다는 백군(白軍)의 승리를 바라는 모습에서 이 소설의 반혁명적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 눈 내리는 러시아의 대자연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역시 그러한 의도의 반영일 것이다.

닥터 지바고는 쏘련 당국이 발표를 허락하지 않아 195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어 번역본으로 초판이 발행되었다. 그 후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 소개되었으며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지만, 쏘련 당국의 압력으로 수상을 거부한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또한 쏘비에트 작가 동맹은, “노벨상을 대가로 소비에트 민중과 사회주의와 평화 및 진보 사업을 배신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파스테르나크를 작가 동맹에서 제명하였다. 쏘련에서 그를 추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책의 출판이 금지되자,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관심과 동정을 보냈다. 그 뒤 그는 흐루쇼프에게 고국을 떠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여 쏘련에 남아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 얻은 병으로 고생을 하다 그는 1960년 5월 30일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다.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특정 이념에 집착한 전체주의 사회에서 인위적, 비인간적, 강제적 물리력으로 사회와 국가를 개조한다는 집단적 망상에 사로잡힌 공산당 세력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노래한 천재 작가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간 비극이라고 선전을 해댔다. 과연 그럴까? 계급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망상이며, 생명의 존엄이 물신의 그늘 속에서 무시되는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이며, 맑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인간 해방의 과학적 사상이다. 파스테르나크는 그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모순과 발전의 변증법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허상의 현상에서 내적 갈등을 겪은 나약한 지식인이자 순수 문학을 주장하는 상징파의 한 작가일 뿐이다.

결국 파스테르나크는 사후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쏘련 사회의 개방성과 비판성 제고>를 표방하면서 주창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정책으로 작가 동맹의 제명 처분이 취소되었으며, 1989년 ≪닥터 지바고≫는 쏘련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게 된다. 1990년에는 볼쇼이극장에서 쏘련 작가동맹 주최로 세계 각국의 작가, 비평가, 예술인들이 대거 참여한 파스테르나크 탄생 100주년 기념 축제도 열렸다. 유네스코(UNESCO)는 참을 수 없는 압력과 추방에 대한 고통, 쏘련 당국의 질시와 박해 속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가치를 끝까지 믿고 스탈린 시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완강히 저항했던 위대한 예술가 탄생을 기리기 위해 1990년을 ‘파스테르나크의 해’로 선포한다고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명예 회복은 쏘련의 몰락 후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이루어지는 당연한 조치일 것이며, 유네스코의 선포는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우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파겐다로서 이루어졌다.

 

3. 혁명기 러시아의 문학

20세기 초 혁명기 러시아 문학(1917-1930)은 문학의 역할, 현실과 문학, 리얼리즘에 대한 문제가 다양하게 논쟁되고 그것이 문학으로 표현되던 시기였다. 혁명이라는 대격변기에 놓였던 러시아 문학은 사회,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혁명과 내전(적군과 백군)이라는 혼란한 사회는 기존 작가들에게 세 가지 태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혁명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길과, 혁명을 인정하지 않고 망명을 택하는 길, 그리고 혁명을 인정하되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동반 작가(同伴作家)의 길이 그것이다. 파스테르나크는 세 번째의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문학의 경향은 기존 가치관과 문학적 성과를 완벽히 부정하는 니힐리즘적 아방가르드 경향과, 변화한 가치관과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 문학 창조를 목적으로 당대 러시아 문학과 유기적, 진화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려 했던 네오리얼리즘 경향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932년 쏘련의 공식적인 문학에 대한 정책이 쏘련 작가동맹에 의해 결정되기 전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정치, 사회, 미학에 관한 가치관을 고수하기 위해 서로 맞부딪치며 끊임없이 충돌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문학 논쟁은 다른 시대, 공간에서 벌어졌던 문학 논쟁과는 달리 목숨을 건 자기 주장이었기 때문에, 어떤 문학 논쟁보다 더욱 맹렬한 양상을 보였다.

쏘련의 문단은 하나로 모아지기 시작하여, 1930년대 중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유일한 국가 차원의 문예 창작 원칙으로 선포된다. 이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수용하지 않았던 작가들은 강제적인 침묵을 강요받기도 했으며, 고난과 고독 속에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이것은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기의 과정 속에서 벌어진 선택 과정이었고, 물론 사소한 오류들은 있었다. 이 시기에 박해와 고통을 받았던 작가들은 주로 반동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들이며, 그들은 새로운 시대보다는 구질서를 옹호하거나 자본주의 진영의 순수 문학의 경향성을 보이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반혁명과 자본주의로의 회귀인 페레스트로이카의 실시를 계기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들의 부활은 바로 쏘련의 붕괴를 말하는 것이었다.

 

4. 파스테르나크의 시 세계

파스테르나크의 시 세계에서 그의 시집 ≪나의 누이 나의 삶≫과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유리 지바고의 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햄릿>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소설인≪닥터 지바고≫의 주인공 유리 지바고의 시-

 

떠들썩함이 멎었다. 나는 무대로 나섰다.

문 기둥에 기대 서서

멀리 울려오는 산울림에 생각을 더듬어 본다.

나와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밤의 어둠은 나를 겨누어 보고 있다.

천을 헤아리는 쌍안경의 눈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시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술잔을 내게서 앗아가 주소서

 

나는 당신의 꺾을 수 없는 뜻을 사랑하며

나에게 맡겨진 역할을 기꺼이 수락하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연극이 공연되고 있으니

이번만은 나를 배역에서 빼주소서

 

하지만 막의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어

마지막 커튼이 내리는 것을 막을 길 없다.

나는 외롭고, 모든 것은 거짓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삶을 이어가기란 벌판을 가듯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작품에는 파스테르나크의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햄릿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다. 햄릿형 인간에 대해서는 ≪국어국문학 사전≫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창백하고 우울한 가운데 우유부단하고 어떤 일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는 타입. 내성적인 사색형(思索型).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유래된 것인데, 괴테와 콜리지 등이 관심을 가지고 해석하였으며, 투르게네프의 명명으로 돈키호테형(型)과 짝을 이룬다. 근년에 와서 햄릿을 행동형의 인간으로 무대 위에 올리는 새로운 견해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이렇게 ‘햄릿형 인간’과 ‘돈키호테형 인간’을 최초로 구분한 사람은 러시아의 문학가 이반 뚜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였다. 그는 “돈키호테 같은 인물은 대중으로부터 우롱당하고 조소를 당하지만, 이를 잘 감당해내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 결국은 신뢰를 받는다”라고 했지만, “햄릿형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일로 머리가 꽉 차 있고 늘 고립되어 인류를 위해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뚜르게네프는 돈키호테 같았으면, 즉 자신이 이상과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헌신하여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면, 유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 숙부를 해치웠으리라고 비평했다. 햄릿보다는 돈키호테를 높이 산 것이다.

햄릿을 복수의 화신으로 보든,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혁명의 순간에는 어떤 인간형이 더 필요할까? 갈등하고 고뇌하는 나약한 지식인과 절실하고 분노하는 노동자. 누가 더 혁명을 갈망할까? 파스테르나크는 유리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혁명에서 비켜서고 싶은 마음을 ‘이번만은 나를 배역에서 빼주소서’라고 적고 있으며, 혁명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하지만 막의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어 커튼이 내리는 것을 막을 길 없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는 외롭고, 모든 것은 거짓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라고 하여 혁명을 거짓이라고 폄훼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기를 관통하는 자신의 심경을 ‘삶을 이어가기란 벌판을 가듯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물론 혁명의 전선에 서 있지 않아도 혁명기의 삶은 누구에게나 힘든 시절일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제의 모순을 타파하고 착취와 억압을 뚫고 새 여명을 열고자 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힘들고 피를 흘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노동자의 노예와 같은 삶은 그치지 않을 것이며 해방의 공간을 열어갈 수는 없다. 혁명은 지배계급의 반동적 저항이 당연히 일어나는 과정이기에, 피지배계급과의 피의 싸움이 (모순의 해소 과정으로서) 발생할 수밖에 없을진대, 이 과정을 두루뭉술하게 모든 인간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부각시킨다면, 이만큼 몰계급적인 사고가 어디에 있으며, 나아가 이 과정의 해소를 하느님께 호소하는 것만큼 관념적 사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파스테르나크는 유리 지바고의 시를 통해서 보면, 분명히 혁명을 반대한 것은 아니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지식인 특유의 우유부단함 속에서 계급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구원의 하느님과 자연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혁명기와 사회주의 건설기의 인민들에게 그의 시는 새 세계를 알리는 진군의 나팔 소리가 되지 못하고, 순수 예술이라는 주술에 걸린 종이 조각이 되어 날려 버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시의 정의>

-파스테르나크의 시집 ≪나의 누이 나의 삶≫에 실린 시-

 

그것은 급격히 채워진 휘파람 소리,

그것은 짓눌린 얼음조각 튀는 소리,

그것은 잎사귀를 얼리는 밤,

그것은 두 마리 꾀꼬리의 결투.

 

그것은 달콤한 쭈그러진 만두,

그것은 콩코뚜리 속의 우주의 눈물,

그것은 보면대와 플루트에서 피가로가

우박처럼 화단 위에 떨어지는 것.

 

밤이 깊은 목욕탕의 물 밑에서

꼭 찾아내어

떠는 축축한 손바닥으로

새장까지 별을 날라야 하는 모든 것.

 

물 속의 널빤지보다 판판한 것―무더위

창공은 오리나무처럼 무너지고

이 별들에는 파안대소가 어울린다.

하지만 우주는 인적이 없는 곳.

 

-≪나의 누이 나의 삶≫, 박형규 옮김, 열린 책들

 

파스테르나크는 1917년에 완성된 이 시집을 그가 존경했던 선배인 마야코프스키에게 가장 먼저 낭독을 해주었다. 시집의 배경은 1917년 여름 로마노프카와 발라쇼프를 여행하면서이며, 옐레나 비노그라트(1897-1987)와의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시집의 주제는 이루지 못한 이 여인과의 사랑은 아니다. 시집의 특징은, 시인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어휘를 사용했다는 점과, 옐레나 비노그라트와의 이야기를 마치 소설 같은 스토리로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시 하나하나에 독립적인 동기를 부여하면서 시 본연의 특징을 살리고 있다. 그는 단어 선택에 자연물, 그 중에서 식물을 많이 차용했고 계절적인 이미지를 두루 담았다. 그래서 이 시에서도 ‘잎사귀’ ‘콩꼬뚜리’ ‘오리 나무’ 등의 식물이 상징의 도구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파스테르나크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만, 이러한 천착이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인민의 삶과 계급적 모순에는 눈을 감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탈린도 인정할 정도로 4차원 기질의, 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시인이었던 그에게 시대의 아픔이나 계급적 모순은 자신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우주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1917년에 여행을 다니면서 여인을 만난 것이다. 레닌은 <당 조직과 당 문학>에서 “문학은 프롤레타리아의 공동 대의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 의식화된 전위에 의해 가동되는 단일하고 거대한 사회민주주의적 기계장치의 톱니바퀴와 나사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문학의 기반은 경제적 조건인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하며, 문학의 성격은 상부구조로서 노동자계급의 노동해방과 계급 없는 세상의 창조라는 대의에 복무해야 한다. 최소한의 인민성과 계급성도 없기에, 혁명이라는 모순이 충돌하는 시기에 그 소용돌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파성도 없었기에 이러한 상징파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서정적 낭만을 쫓았던 것이며, 당연히 마야코프스키가 겪었던 혁명적 낭만과의 갈등을 이해하지 못해 그와 결별을 했던 것이다. 그의 시와 문학 세계는 상징파의 시인으로서, 시적 서사 소설의 작가로서 뛰어남을 보여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 시대의 모순을 읽고 그 시대의 모순과 불화하며 모순의 해소를 위해 피지배계급의 해방을 향해 뿜어 나오는 감성의 언어로 노래하는 전사가 되어야 함을 알지 못하고, 그냥 자신의 뛰어난 천재성을 자연과 사랑, 구원으로 노래한 가객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닥터 지바고≫는 자본주의 진영의 먹잇감이 되어 쏘련을 붕괴시키 데 이용되는 문학적 도구가 되어버렸고, 그의 순수 서정은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버렸다.

 

 

6. 닥터 지바고의 출간을 위한 CIA의 공작

CIA가 못하는 짓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냉전 시대 CIA는 사회주의 진영을 흔들기 위해, 제3세계의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 여론 조작, 선거 개입, 요인 암살과 인민 학살, 군사 쿠테타 지원, 내전 개입과 전쟁 유발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공작들을 저질러 왔었다. 그것도 모자라 문학 작품의 출판에도 공작을 벌였다. 바로 ≪닥터 지바고≫의 출판과 관련해서인데, CIA는 쏘련 붕괴의 도구로 ≪닥터 지바고≫를 이용하고자 고도의 치밀한 공작을 벌였다.

 

“냉전 시대, CIA는 쏘련을 붕괴시키기 위해 ≪닥터 지바고≫를 이용했다.” (Cold War, CIA used ‘Doctor Zhivago’ as a tool During to undermine Soviet Union.) 2014년 4월 5일 워싱턴 포스트(WP)에 피터 핀(Peter Finn)과 페트라 쿠베(Petra Couvée)에 의해 작성된 기사의 제목이다. 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쏘비에트 러시아 지부의 모든 부문장에게 보내는 CIA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은 내재적으로 감추어진 메시지와, 생각을 자극하는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이 출판되던 환경에 대해서, 훌륭한 선전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가장 위대한 생존하고 있는 러시아 작가로 인정받은 남자의 훌륭한 문학 작품이 그 자신의 나라에서, 그 자신의 언어로, 그 자신의 국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 쏘비에트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부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궁금해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This book has great propaganda value,” a CIA memo to all branch chiefs of the agency’s Soviet Russia Division stated, “not only for its intrinsic message and thought-provoking nature, but also for the circumstances of its publication: we have the opportunity to make Soviet citizens wonder what is wrong with their government, when a fine literary work by the man acknowledged to be the greatest living Russian writer is not even available in his own country in his own language for his own people to read.”)

 

내재적으로 감추어진 메시지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종교적 구원의 냄새, 사회주의적 현실에 대한 회의일 것이며, 출판 상황에 대해서는 사상의 통제로 인해 출판이 금지되어 있으니, 곧 쏘련에서는 출판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며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는 반공의 선전이 아니던가? 그 상황을 쏘련의 인민들에게 알려 쏘련 정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릴 기회를 잡았다고 보고를 하고 있다. 쏘련의 인민들을 쏘련 정부의 사상에 놀아나는 비주체적 인민들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쏘련의 인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무시하고 몰래 출간을 하여 몰래 반입을 하면, 쏘련의 인민들은 환영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CIA는 이 작품의 이용 가치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작품의 출간을 위한 공작에 착수한 것이다. 이 메모는 ≪닥터 지바고≫ 의 출간에 대한 CIA의 비밀스런 연루를 자세히 설명하는 130개가 넘는, 새롭게 기밀 해제 된 CIA 문서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에서 인쇄된 양장본 러시아어 판과 CIA 본부에서 인쇄된 미니어처 문고판을 발행하는 데 있어서의 CIA의 역할은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새로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한 작업은 CIA의 쏘비에트 러시아 지부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CIA 국장 알렌 덜레스(Allen Dulles)가 모니터링하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의 운영 조정위원회(Operations Coordinating Board)에 의해 재가를 받았으며, 그 내용은 백악관의 국가 안전 보장 위원회에 보고가 되었다. 은밀한 활동을 감독한 OCB는 CIA에게 이 소설의 “활용”에 대한 독점적인 통제권을 부여했다.

(The newly disclosed documents, however, indicate that the operation to publish the book was run by the CIA’s Soviet Russia Division, monitored by CIA Director Allen Dulles and sanctioned by President Dwight D. Eisenhower’s Operations Coordinating Board, which reported to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at the White House. The OCB, which oversaw covert activities, gave the CIA exclusive control over the novel’s “exploitation”.)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냉전 시대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쏘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위해 미국 정부와 CIA가 예술과 문학에 대해서도 얼마나 은밀하게 활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이 활용한 작가들은 조이스, 헤밍웨이, 엘리엇, 조지 오웰 등이었으며, 심지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도 활용하려고 했다. 책이 무기였던 시절 철의 장막 뒤에서 공작을 할 수 있는 CIA에게 ≪닥터 지바고≫는 절호의 기회였다. 파스테르나크는 쏘련 당국이 그의 작품을 상징적이고 난해한 외계인 어조, 명백한 종교성,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요구에 대한 무관심, 10월 혁명 이전 사회의 추종이라는 이유를 들어 금지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작품이 국가의 정치적 요구에 의해 재단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쏘련 당국은 그의 작품의 출판을 금지했다. 자본주의 진영의 구미에 당기는 주제에다가 탄압받는 작가의 이미지가 바로 CIA가 노린 점이었다. 개인의 희생이 없는 인본주의 사회를 추구했다는 그의 소설에 대해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자본주의가 개인의 희생이 없는 인본주의 사회란 말인가?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냉전 시대, CIA는 ‘닥터 지바고’를 쏘련을 붕괴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다. 피터 핀과 페트라 쿠비, “During Cold War, CIA used ‘Doctor Zhivago’ as a tool to undermine Soviet Union”, ≪워싱턴 포스트≫, 2014. 4. 5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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