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3)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13장 중국에서 수정주의의 등장

그리고 중국 사회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의 전환

 

 

1. 등소평 수정주의의 등장과 전개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후계자로 등장한 화국봉은 ‘두 개의 무릇(两个凡是)’을 내세워 모택동의 정책과 노선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점을 표방하였다. 무릇 모 주석의 뜻을 따르고 무릇 모 주석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두 개의 무릇은 문화대혁명을 긍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등소평 등 주자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등소평은 당 중앙으로 서신을 보내 두 개의 무릇은 교조주의이며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보면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는 등소평의 주장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고 화국봉의 두 개의 무릇은 교조주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등소평이 모택동의 노선과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기 위해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점이다. 이 논쟁에서 화국봉은 등소평에게 패배했는데, 이는 교조주의는 수정주의 앞에 무력하며, 좌편향은 우편향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우편향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리표준 논쟁을 통해 화국봉을 사상적으로 제압한 등소평은 이후 사상해방을 기치로 내세운다. 이것 또한 일반적으로는 교조주의와 좌편향의 사상적 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사상해방의 기치가 맑스-레닌주의 원칙과 모택동 노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상해방, 머리를 움직이는 것, 실사구시; 앞을 향해 일치단결하는 것, 우선적인 것은 사상해방이다. 사상이 해방되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정확히 맑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을 지도지침으로 삼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 출현하는 일련의 문제를 해결하고, …”[1]邓小平, ≪邓小平文选(등소평문선)≫ 第二卷, 人民出版社社, 1994, p. 141. 이에 대해 중국의 대학 교과서인 ≪등소평이론개론≫에서는 사상해방과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변증법적 관계이며 상호 전제하지만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사상해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田克勤 主编, ≪邓小平理论概论(등소평이론개론)≫, 高等教育出版社, 2000, p. 34.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사상을 해방한다는 것은 관념을 일정하게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실사구시는 실제에서, 현실에서 출발하여 진리와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상호 전제하지만 그중에서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사상해방이 아니라 실사구시이다. 그리고 이것이 관념과 실제, 현실의 관계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이다. 왜냐하면 사상을 어떻게 해방해야 하는지, 관념을 어떻게 변형시켜야 하는지의 기준, 준거는 현실, 실제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등소평은 사상해방이라는 구호를 관념론적으로 제기한 것이며, 이를 통해 중국의 사회주의 현실을 수정주의적으로 개조하려는 사상적 근거를 확보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등소평의 잘못된 방침이 당시 중국 공산당과 중국 사회에서 관철된 것은, 주자파가 권력을 이미 장악했다는 것을 논외로 하면, 문화대혁명 당시 4인방 등의 좌편향과 교조주의의 해악으로 인해 등소평의 엉터리 논리가 먹혀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좌편향은 우편향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상해방의 구호를 통해 맑스-레닌주의의 원칙, 모택동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등소평은 이후 수정주의 노선을 거리낌 없이 펼쳐 나간다. 등소평은 1980년부터 1981년에 걸쳐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에 관하여≫에 대한 의견의 기초에 대하여”[3]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二卷, pp. 291-310.라는 글에서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하고, 심지어 1950년대 후반 대약진 운동 등 중국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부정하는 견해를 제기했다. 이 역사결의를 기초하는 작업에서 주자파 상당수는 모택동에 대해 전면 부정할 것을 제기했으나, 등소평은 그렇게 하면 문화대혁명과 같은 동란이 일어난다고 하며 모택동을 부분 부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주자파로서 노회한 등소평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현대 중국의 모택동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에 대한 이러한 부정은 중국이 반제반봉건 혁명을 수행한 이후 행해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과정에 대한 부정이었고, 이러한 역사결의를 통해 등소평 등 주자파들은 중국 사회를 자본주의의 길로 서슴없이 이끌고 갈 수 있었다.

등소평은 먼저 사회주의 국유 기업을 쏘련의 꼬씌긴 개혁과 같이 독립채산제의 이윤 추구 중심의 기업으로 개조하는 길을 1970년대 후반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는 유지하면서 개별 기업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운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소평은 198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농업에서 집단적 관계,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표현이었던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그것을 소농 체제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단 농장에 묶여 있던 거대한 잉여 노동력이 풀려나게 되어, 이들은 이후 도시로 나가 농민공으로서 도시의 저임금 업종에 취업하여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한편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해체되고 개인적인 이윤 추구 활동이 허용되면서 소자영업자를 일컫는 개체호(个体户)가 생겨났는데, 개체호 밑에 7인 이하의 피고용자를 고용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피고용자가 8인 이상이 되면 사적 자본가를 의미하는 사영(私营)이라 불렸다. 이들 사영은 전형적인 사적 자본가로서 이후 급속히 성장하면서 현대 중국의 자본가계급이 되었다.

등소평은 이렇게 먼저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이어서 1980년대 후반부터 공업에서 국유 기업들을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개조하기 시작했고, 1992년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제창하여 결정적으로 공업의 사회주의 국유 기업을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으로 개조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하여 중국 사회는 농업과 공업, 그리고 상업 등 일체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게 되었는데, 이는 등소평의 노선이, 등소평 이론이라 불리는 것이 실은 사회주의를 해체하고 자본주의의 복고의 길을 열은 반혁명의 노선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등소평이 자본주의 복고의 길을 어떻게 이론화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등소평의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론을 분석해 보자.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착취를 소멸시키고, 양극분화를 제거하고, 최종적으로 공동부유에 도달하는 것이다.”[4]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三卷, p. 373. 이러한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론은 등소평이 사회주의 시장 경제론을 제창하여 결정적으로 자본주의로 건너뛰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거로서 쓰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 본질론에는 등소평이 생산력주의자임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위의 정식화된 논리에서 강조점은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에 두어져 있고, 착취의 소멸과 양극분화의 제거는 단지 지향해야 할 목표 정도로서 제시되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수많은 정부들이 착취를 인정하지 않고 또 양극분화를 저지하기 위해 재정 정책, 부동산 정책, 사회 보장 등을 말하는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등소평은 결정적으로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를 공동부유로 제시했는데, 이는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사회주의를, 나아가 공산주의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단지 부르주아적 색안경을 통해서만 대략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들 부르주아들에게 공산주의 사회는 단지 생산력이 발전하여 부가 넘쳐 나고, 또 계급이 사라져서 공동으로 부유한 상태로 비쳐진다. 등소평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딱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 사회를 인식하는 수준에 멈추어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는 단지 부가 넘쳐 나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회인 것만이 아니다. 물질적 부는 단지 공산주의 사회의 기초일 뿐이며, 공산주의 사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레닌은 10월 혁명 후에 사회주의 건설에 임하면서 사회주의는 계급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러한 레닌의 파악은 정확한데, 계급의 폐지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 계급의 폐지를 통한 생산력의 해방이 바로 맑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관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해방 세상으로서 공산주의 사회는 맑스의 표현대로 ‘각 개인의 개성의 발전이 사회 전체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이다. 계급이 폐지되어 해방된다면, 각 개인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정적 조건은 제거되기 때문에, 각 개인의 발전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리게 된다. 또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각 개인의 발전과 사회 전체의 발전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하면서 개인의 발전과 사회 전체의 발전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사회주의 혁명 이후 즉각적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잔재, 계급 사회의 잔재와의 부단한 투쟁, 계급투쟁의 지속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등소평에게서는 이러한 모든 것은 깡그리 무시되고, 단지 공동부유를 향한 생산력 발전만이 사회주의의 본질로 치부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현실에서 유리된 관념론적인 것이며 속류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런 점에서 등소평은 생산력주의자로서 평가될 수 있고, 그의 노선은 현실에서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착취 관계의 도입을 통한 생산력의 발전으로, 자본주의의 복고를 가져온 반혁명 노선으로 평가될 수 있다.

생산력주의자로서 등소평은 진리표준 논쟁에서 보였던 맑스주의 변증법에 대한 약간의 밑천을 곧 바닥내면서 실용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등소평의 실용주의적 사고가 잘 드러나는 것은 ‘3개의 유리함(三个有利于)’이라는 이론에서이다.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여겼다. 개혁, 개방은 커다란 시험이고 과감하고 대담하게 시도하고 부딪혀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지,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국력의 증강에 유리한지, 인민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유리한지를 각각의 사업의 성패 득실을 판단하는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5]田克勤 主编, 앞의 책, p. 11. 여기서도 등소평은 생산력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고 또 어떤 문제와 사안에 대해 그 옳고 그름(是非)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유리, 불리를 따지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3개의 유리함(三个有利于)이라는 이론은 생산력 발전을 표준으로 하여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시키고, 자본주의의 도입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또한 등소평 이론에서 두드러지는 실용주의적 접근은 한 개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이라는 논리이다. 한 개의 중심은 (경제적) 발전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모든 정책과 노선의 초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기본점은 첫째, 개혁과 개방, 둘째,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의 유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해 등소평이 고안해 낸 것이 이른바 4개항의 견지 노선이다. 4개항은 사회주의의 길의 견지, 무산계급의 독재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맑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의 견지를 말한다.[6]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二卷, pp. 164-165. 이러한 4개항의 견지는 문화대혁명 당시 유소기와 등소평 자신이 대중들에 의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로 규정되어 타도되었다는 것을 의식한 것으로서, 단지 말뿐인 수식어에 지나지 않고, 사회주의의 변질과 사회주의의 길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을 제어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위 4개항은 현실적 발전의 과정에서 철저히 무력화되는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주의 견지는 1992년 중국 사회가 시장 경제로, 자본주의로 건너뜀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정되고 사회주의는 단지 수식어로 전락되었다. 둘째, 중국은 무산계급의 독재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부르주아 독재 국가가 되었다(2007년의 사적 소유 보호법(물권법) 제정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공식 승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의미의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을 정치적 의미의 지배계급으로 승인한 것이었다). 셋째, 공산당의 영도의 본질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프롤레타리아 노선의 견지를 의미하는데, 중국 사회는 이미 부르주아 사회로 변질되었고, 공산당은 2001년 강택민의 3개 대표론을 통해 사적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것을 통해 부르주아 정당으로 변질되어 공산당의 영도는 의미를 상실했다. 넷째,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의 견지는 단지 구호로 전락되었고, 현실적인 중국 사회의 발전, 수많은 정책은 반(反)맑스-레닌주의, 반(反)모택동 사상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4개항의 견지가 단지 대중들의 혁명적 행동을 제어하기 위한 가림막이었으며, 중국의 주자파가 노련한 반혁명적 세력임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끝으로 등소평의 이론 중에서 가장 ‘창조적인’(궤변적인!)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 당의 13차 당 대회는 중국 사회주의가 어떤 단계에 처해 있는지를 천명했는데, 말하자면 초급단계에, 초급단계의 사회주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자체는 공산주의의 초급단계이지만, 우리 중국은 사회주의의 초급단계, 즉, 미발전된 단계에 처해 있다. 일체의 것은 이러한 실제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러한 실제에 근거하여 규칙을 제정해야 한다.”[7]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三卷, p. 252. 언뜻 보면 그럴듯한 등소평의 이러한 논리는 맑스의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서 사회주의, 그리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라는 구분, 그리고 이행기로서 사회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왜곡이며 궤변이다. 맑스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서 사회주의 단계를 설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여 도래하는 사회는 무계급 사회라고 보고 그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라 불렀다. 그런데 1800년대 후반 유럽에서 사회민주당들이 발전하며 당 강령이 문제되었을 때,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문제 그리고 이행기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구분할 필요에 직면했다. 여기서 맑스의 사고의 핵심은 이행기라는 개념이다. 자본주의의 자궁으로부터 막 태어났지만 자본주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는 사회로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서 사회주의 사회는 그 자체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의 과도기 사회, 이행기의 사회이다. 따라서 그 사회는 한편으로 생산력을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흔적, 즉, 자본주의의 잔재, 계급 사회의 잔재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그 사회는 이행기 사회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행의 과정의 성공을 위해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기제로 설정하였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하여 계급이 완전히 소멸하면, 계급 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로서의 국가는 소멸한다는 정식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점이 사회주의 사회, 이행기 사회의 본질적 의미이다. 그런데 등소평의 초급단계 사회주의론에서는 이러한 이행기의 혁명적 성격이 거세되어 있고, 단지 진화론적으로 발전이 낮은 사회라는 점만이 강조되고 있다. 나아가 등소평과 중국의 주자파들은 이행기를 맑스와 같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는 사회주의 사회의 전체 과정으로 보지 않고, 단지 사회주의 사회의 성립까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성립까지로 보고 있고, 사회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의 주된 과제는 생산력 발전으로 치부한다. 그에 따라 계급 사회의 잔재와의 투쟁, 계급투쟁의 지속의 과제는 사라지고 만다. 실제로 등소평은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계급투쟁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평화적인 발전의 시대라고 천명한 바 있었다. 물론 계급투쟁을 문화대혁명 당시의 4인방과 같은 좌편향적이고 교조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되지만, 계급 사회의 잔재와 싸워 나가는 것은 사회 전체의 발전, 나아가 등소평식으로 이해하면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 혁명 이후 자본-임노동의 착취 관계는 가능한 한 즉각적으로 폐지되는 것이지만, 계급 사회의 잔재로서, 사적 소유 사회의 잔재로서 상품-화폐 관계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즉각적으로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자본-임노동의 착취 관계로 전화될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상품-화폐 관계를 활용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상품-화폐 관계가 자본-임노동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고, 궁극적으로 상품-화폐 관계를 극복하고 그것을 소멸시키려는 노력과 투쟁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등소평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사회를 절단하여 초급단계의 사회주의 사회와, 그리고 아마도 (발달한) 고차적인 사회주의 사회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는 등소평이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혁명적 성격을 거세하는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의 임무를 생산력주의적으로 이해하여 착취의 부활을 마다하지 않는 생산력 발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등소평 이론을 해설하고 있는 중국의 대학 교과서인 ≪등소평이론개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사회주의라는 전제는 우리나라의 사회 생산력의 본질이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임을 규정했다. 이러한 전제하에, 대담하게 여러 종류의 비(非)공유제 경제 성분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사회화, 시장화, 현대화 정도를 제고하고 더 많은 외자를 흡수하여 현대화 건설을 하는 등의 것은 사회주의의 기본 제도를 위험하게 하지 않는다”[8]田克勤 主编, 앞의 책, p. 71., “비공유제 경제를 우리나라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 간주하고 장기간 존재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이왕에 일정한 범위와 정도의 비공유제 경제가 존재한다면, 그러면 국부적인 착취와 분배의 불균형 현상이 존재할 수 있다.”[9]같은 책, p. 54. 이것은 사영(私营) 등 비공유제 경제 관계가 착취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중국 측이 승인하고 있는 구절이다. 현재 중국에서 국유 부문은 공업 생산액에서 25% 내외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사실상 비공유제 경제이다. 그렇다면 중국 노동자의 태반이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 속에서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 사회가 실은 자본주의 착취 사회이며 사회주의는 단지 허울뿐이며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등소평의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이러한 착취 관계의 부활을 합리화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는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상실하고 실천적으로는 사회주의 사회가 이행기로서 갖는 혁명적 성격을 거세하는 것이다.

 

 

2.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와 소농 체제로의 전환

 

중국에서 농업 집단화는 1950년대 순조롭게 이루어졌었다. 처음에는 호조조(互助組, 품앗이와 유사한 형태)에서, 초급합작사(합작사는 협동조합의 중국식 표현, 초급합작사는 토지와 농기구 등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유지한 상태로 출자하여 출자분의 지분에 따라 보수가 지급되는 형태)로, 그리고 이어서 고급합작사(완전한 생산에서의 협동조합으로 생산수단은 출자자의 공동 소유)로 발전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불과 1-2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첫째, 중국 공산당이 농촌을 근거지로 혁명을 하여 농민들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다는 점, 둘째, 당시 2차 대전에서 쏘련의 승리로 인해 쏘련을 따라 배우자는 점이 전체 중국 인민에게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농업 기계화 이전에 집단화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집단화를 진행했다. 물론 집단화라는 생산관계의 변화 자체가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나마 일정하게 생산을 자극하고 생산력을 고양시킨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는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여기서 더 나아가 농(農)ㆍ공(工)ㆍ상(商)ㆍ학(學)ㆍ병(兵)이 일체화된 하나의 공동체로서 인민공사를 농업 집단화의 전형으로 채택하고 인민공사화 운동을 벌였다. 여기서 공사(公社)는 영어의 commune을 중국어식으로 번역한 것으로 일종의 꼬뮨 형태의 집단 농장을 의미했다. 즉, 중국은 쏘련의 아르쩰형이 아니라 꼬뮨형을 집단 농장으로 채택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공산풍(共産風)이 불었는데, 무료의 공동 식당 등이 채택되었고 농업 생산물은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게 되고 공동의 몫이 많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신의 노동의 산물이 아니고 자신의 기여분이 아니지만, 공동 소유의 몫에서 무상으로 분배받는 일이 행해졌고 이는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저하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부각되자 모택동은 즉각 교정에 들어가서 인민공사의 소유는 전 인민 소유가 아니라 집체적(집단적) 소유임을 분명히 하고 농민들에게 텃밭에서의 부업을 허용하고 일정한 수의 가축과 가금을 기를 것을 허용하여 사실상 쏘련의 아르쩰형 집단 농장과 같은 성격의 집단 농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수천 호에 달하는 인민공사는 단계를 나누어 수백 호 규모의 생산대대로, 그리고 그 밑에 수십 호 규모의 생산대로 3단계 구조로 나누고 생산대가 채산 단위로 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1950년대 후반 농업 생산은 대폭적으로 감소되어 중국 경제 전체가 어려움에 빠지고 유소기의 이른바 조정 정책이 실시되게 되었다.

이러한 경과는 모택동 등 중국 공산당이 농촌 중심의 혁명을 한 결과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는 일정하게 경험이 미숙하고 좌편향을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택동은 인민공사를 아르쩰형으로 교정했지만, 그 명칭에서 꼬뮨을 의미하는 공사라는 명칭은 고수했고 농ㆍ공ㆍ상ㆍ학ㆍ병의 일체화된 체계도 유지했다. 그리하여 인민공사 체제에서 중국의 농업은 일정하게 발전을 지속했지만, 그러한 체계와 형식은 당시의 생산력의 수준과 걸맞지 않는 과도한 측면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등소평이 권력을 재장악한 이후 인민공사가 쉽사리 해체되게 된 요인의 하나였다.

1978년의 중국 공산당 11기 3중 전회 이후 등소평은 집단적 농업의 해체에 착수하는데, 먼저 안휘성의 10여 호의 농가에게 농가 매호가 생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청부생산제를 실시하여 생산량의 대폭적인 증가가 있었다. 이러한 실험을 기초로 등소평은 단계적으로 인민공사의 해체, 소농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어 갔다. 먼저 농민의 소집단에게 생산을 청부하고 생산량에 연동하여 보수를 지급하는 연산도조(聯産到組)를 실시하고, 2단계로 개별 농가에 생산량과 농업 경영을 청부하는 농가생산청부제(包産到組)와 농가경영청부제(包幹到組)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1983년 12월에 이르면 농가경영청부제가 전체 농가의 98.3%에 이르러 인민공사 체제가 사실상 해체되고 소농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토지는 여전히 국가 소유이었기 때문에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 사용권을 일정 기간 보유하게 하였는데, 토지 사용권의 임대는 허용되지만 토지 매매가 제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지가 국유라 하더라도 사실상 소농 체제로의 복귀인 이상 농민층의 분해는 불가피했고, 농촌과 도시의 소득 격차, 농민층 내의 소득 격차는 나날이 확대되게 되었다.

그런데 집단 농업의 해체는 집단 농장 체제에 포괄되어 있던 거대한 잉여 노동력을 배출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배출된 잉여 노동력은 도시로 흘러 들어가 이른바 농민공으로서 비(非)국유의 저임금 업종에 취업하여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농민공의 숫자는 정확히 추정하기 어렵지만 1-2억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들은 도시 호구를 가지지 못하여 사회 보장이 거의 없고 자녀의 교육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농민공 대부분은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임금을 받고 있고 초과 노동시간은 매월 36시간이 넘으며 열악한 주거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방 1개에 수십 명이 생활하고 길거리나 지하실에서 숙식하는 사람이 많다.[10]김익수 외, ≪현대중국의 이해≫, 나남, 2005, p. 250. 농민공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는 이중적인데, 농민공의 도시 유입을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하여 이들을 단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들을 저임 노동력의 저수지로서 도시의 불안정 노동자층으로 활용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11]같은 책, p. 274.

중국은 모택동 시기 도시와 농촌의 이중적 호구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는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급격히 유입하여 도시의 식량 사정과 여러 환경을 압박하는 것을 방지하고 농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호구 제도는 인민공사의 해체,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한 노동력의 필요 등의 사정으로 흔들리게 되었는데, 지금의 조건에서 도시와 농촌의 이중적 호구 제도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저해하고 농민공들이 열악한 생활 조건과 근로 조건에 처하게 하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농민공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하더라도 주택, 안정적인 직장 등 엄격한 요인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도시 호구를 쉽사리 얻을 수 없는데, 농민공은 도시 호구가 없기 때문에 정규적인 직장에 취업할 수 없고, 의료보험, 실업보험, 양로보험 등 사회 보장에서 배제되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는 호구 제도가 현대 중국에서 농민을 이등 국민으로 차별 대우하게 하는 요인임을 말한다. 또한 이는 농민공들을 저임 노동력으로서 쉽사리 착취하고 수탈하려는 중국 자본주의의 필요가 농민공들의 열악한 처우를 야기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후 북경, 상해 등 특대도시를 제외한 일정한 대도시와 중소도시에서 호구 제도가 완화되고 있으나 저임 노동력으로서 농민공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중국 자본주의의 계급적 정책 자체가 농민공의 열악한 처지를 지속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호구 제도는 여전히 중국의 커다란 사회적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농민공 문제는, 인민공사의 해체 이후 농민들이 소농 체제로 전환되면서 중국 자본가계급에 의한 거대한 수탈에 직면해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는 1980년대 1.8:1에서 1990년 2.2:1로 벌어졌고 2000년대는 3.5:1로 더욱더 확대되었다. 그런데 농촌은 도시와 달리 의료보험, 실업보험, 양로보험 등 사회 보장의 혜택이 거의 없다. 1998년 전국 위생서비스 조사에서 87.44%의 농촌 주민이 어떠한 사회 보장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따라서 도시 주민의 사회 보장을 감안하면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는 5:1을 초과한다고 볼 수 있다.[12]같은 책, p. 240. 이러한 수치는 농업에서 집단적 생산관계,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가,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농민을 수탈의 대상으로 전환시키고, 농촌 노동력을 도시 공업의 발전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등소평의 개혁, 개방과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의 전환은 농민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 사회의 인민에서 피수탈자로의 전락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인민공사의 해체 과정은 중국적 특색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인민공사에 포함되어 있던 사대(社隊) 기업이 향진(鄕鎭) 기업으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쏘련에서는 1950년대 들어서면서 집단 농장이 발전하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농업과 공업이 융합하는 농공복합체가 광범하게 출현했었다. 그런데 중국의 인민공사는 생산력의 수준에 조응하지는 않았지만, 출발부터 농ㆍ공ㆍ상ㆍ학ㆍ병이 일체화된 체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의 농촌 곳곳에 농산물 가공, 유통 등을 담당하는 기업들이 광범하게 창출되었다. 이들 기업은 인민공사 체제에서는 그 내부의 사대(社隊) 기업으로서 존재했지만,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향진(鄕鎭) 기업으로 전환되어 발전을 시작했다. 향진 기업은 중국의 개혁, 개방 과정에서 커다란 발전을 했는데, 한때 9000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중국 농촌의 잉여 노동력의 커다란 흡수처가 되었고, 중국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집단적 기업으로 시작되었던 향진 기업은 이후 중국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사적 자본주의 기업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이르면 주식제와 합작제(협동조합)가 혼합된 형태로 발전했는데, 이는 사실상 집단적 기업으로 출발한 향진 기업이 사적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그 과정에서 권력자들의 친인척들에게 향진 기업이 헐값으로 불하되는 특혜가 만연하기도 했다.[13]정재호 편, ≪중국 개혁 개방의 정치경제 1980-2000≫, 까치, 2002, p. 161.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향진 기업, 즉 농촌 기업의 주력은 향과 촌의 정부가 관장하는 향촌 기업에서 사적 기업으로 그 주도성이 이전되게 되어 인민공사에서 갖고 있었던 집단적 성격은 지금의 향진 기업에서는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3. 사회주의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으로의 전환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의 전환, 즉,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크게 3-4단계로 나뉜다. 그리고 그것은 미시적으로 사회주의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의 전환으로 나타나고 있고, 또 그에 상응하여 국유 기업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사회의 인민으로서, 국유 기업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점차 상실하고 단순한 자본주의적 피고용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수반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대전환, 혹은 반혁명의 과정, 자본주의 복고의 과정을 단계를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의 한 경제학자는 국유 기업의 ‘개혁’을 4단계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1단계는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쏘련의 꼬씌긴 개혁과 유사하게 개별 국유 기업에서 독립채산제를 실시하고 국유 기업을 이윤 추구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계획이 주된 것이고 시장 조절은 보조적인 것이었다. 2단계는 1984년부터 대략 1992년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즉, 자본주의로!) 건너뛰기 전까지의 단계로 국유 기업에서 국가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을 분리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점진적으로 노동계약제를 실시하여 자본주의 제도의 전면 도입을 예비하는 단계였는데, 이 단계를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상품 경제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했다. 그리고 계획과 시장의 관계를 보면 이 단계에서는 ‘계획이 있는 상품 경제’라고 하였다. 3단계는 1992년 등소평의 남순 강화로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제창된 이후 사회주의 국유 기업이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으로 전환되고 개별 국유 기업에 대해 주식제를 실시하여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개조를 완성하는 단계였다. 이 단계에서 계획은 경제 조절의 기능을 시장에 넘겨주고 국가는 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와 같이 단지 거시적인 조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4단계는 국유 기업의 재조직 단계(즉, 구조조정!)로서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준다’는 방침(抓大放小)에 따라 대형의 전략적 국유 기업은 국유를 유지하고, 중대형의 국유 기업은 국유와 민영의 혼합 형태로 개조하고, 작은 국유 기업은 민영화, 사유화하는 단계였다.[14]康静萍 主编, ≪中国社会主义经济体制改革理论与实践(중국사회주의경제체제 개혁의 이론과 실천)≫, 经济管理出版社, 2001, pp. 66-68. 이 4단계에서 국유 기업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와 같은 단순한 피고용자로 전락했는데, 이것의 표현이 수천만 명에 이르는 국유 기업 노동자들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 사태였다. 그리고 이러한 실업 사태는 199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신자유주의 물결의 중국판이었다. 그러면 각각의 단계적 발전에 대해 보다 상세히 접근해 보자.

1978년부터 1984년까지의 1단계는 쏘련의 꼬씌긴 개혁을 모방한 것이었다. 쏘련 수상 꼬씌긴은 그전에 리베르만 교수가 제안한 ‘개혁’을 수용하여 1965년 국유 기업을 이윤 추구 중심으로 전환하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 ‘개혁’으로 인해 국가는 국유 기업에 상당량의 이윤을 유보하고 또 국가가 무상으로 기업에 제공하던 투자 자금을 기업으로 하여금 은행으로부터 유상으로 대출받아 투자에 사용하도록 했다.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중심의 이러한 개혁으로 인해 쏘련은 1970년대 중반까지 일정한 경제 성장을 하였으나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개별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운동은 심각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충돌하였고,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쏘련 경제는 완전히 균열되어 경제 성장률이 거의 ‘0’에 가까워졌다. 중국의 국유 기업의 ‘개혁’의 1단계는 바로 이러한 쏘련의 방침과 상태를 모방한 것이었는데, 중국은 쏘련과 달리 1980년대 초반 인민공사라는 집단적 농업을 해체하면서 쏘련보다 더 진전된 시장 중심, 자본주의적 방향으로의 ‘개혁’으로 나아간 것이었다.

1984년부터 1992년 시장 경제로의 전환 전까지의 2단계는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로 건너뛸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진통을 겪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중국은 기업에 대해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의 국유 기업에 대해 소유는 여전히 국가 소유를 유지하지만, 국가는 기업의 경영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서 시장 기제를 확대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시장 기제에 적응하도록 하는 단계였다.[15]정재호 편, 앞의 책, p. 92. 그리고 이 단계에서 기업은 국가에 이윤을 상납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 대신 세금을 납부하는 것(利改稅)으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 공산당은 1987년 13차 당 대회의 결의를 통해 ‘계획이 있는 상품 경제’라는 이론을 세웠다. 1단계의 ‘개혁’이 계획의 주도성을 유지하고 시장 기제가 보조하는 성질이었다면, 2단계의 ‘계획이 있는 상품 경제’라는 것의 내용은 계획과 시장을 절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절충은 생산력주의자로서 등소평이 3개의 유리함(三个有利于)이라는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제기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노동에 대한 ‘개혁’ 또한 진행되었는데, 우선은 국유 기업에 대한 신입 노동자부터 종신고용제를 철회하고 노동계약제를 실시하여 이른바 노동 시장의 형성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쏘련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노동 시장을 통하여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하여 사회주의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노동자가 노동력의 판매자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기업의 주인으로서 진입하는 기제였다. 그런데 등소평은 바로 이러한 기제를 무너뜨리고 노동자를 자본주의와 같이 노동력의 판매자로 전락시키는 노동계약제를 도입하고 노동 시장의 형성을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의 길로부터 이탈하는 이러한 시장화의 경향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불러왔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시장화의 흐름이 강화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졌고 또 부문 간 불균형의 현상이 발생하여 중국 정부는 1988년부터 긴축 정책으로 들어갔다.[16]같은 책, p. 150. 1989년 6월의 천안문 시위와 그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력 진압은 바로 이러한 시장화의 모순이 불러온 위기였던 것이다. 천안문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은 중국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전위가 아니라 인민에 대한 폭력적 진압자로 전화했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었고, 이후 중국에서 민주주의는 거의 질식되는 상태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위기의 폭발로 인해 경제 또한 상당한 침체에 빠져서 중국은 개혁, 개방 이후 최초로 심각한 저성장을 기록했다.

국유 기업 ‘개혁’의 3단계는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자본주의로 건너뛰는 것을 통해 돌파하고자 했던 등소평의 남순 강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남부의 대외 개방 지역을 시찰하면서 등소평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제창했다. 이에 대한 등소평의 언급을 직접 인용해 보자. “계획이 많은가 시장이 많은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구별이 아니다. 계획 경제는 사회주의와 같지 않고, 자본주의 또한 계획이 있다; 시장 경제는 자본주의와 같지 않고 사회주의 또한 시장이 있다.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의 수단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착취를 소멸시키고, 양극분화를 제거하고 공동부유에 도달하는 것이다.”[17]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三卷, p. 373. 이러한 등소평의 사고 속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구별점은 이미 소멸되어 있다. 계획 경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등소평의 이러한 부정은 등소평의 사고에서 이미 사회주의가 떠나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이러한 엉터리 논리를 관념론적인 사회주의 본질론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그가 과학적 푯대를 상실하고 실용주의와 절충주의, 편의주의에 이미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레닌은 10월 혁명 후 사회주의 건설에 나서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획은 노동자 대중의 의지의 통일의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획 경제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의 주인으로 올라선 노동자계급의 상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에서 우러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등소평은 주자파로서 관료주의의 입장에서 계획을 이해하고 있다. 즉, 계획은 관료들이 입안하여 전체 경제를 ‘조절’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 그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의 계획과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의 계획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에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시장과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 기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그가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정치경제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자본의 운동의 공간이고 기제이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자본의 운동 공간이 아니라 잔존하는 상품-화폐 관계의 유통의 영역에 지나지 않으며,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은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주된 법칙이지만, 사회주의에서는 가치법칙이 단지 보조적인 척도에 지나지 않고 자원 배분의 주된 기제는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인데, 이 점에 대해 등소평은 매우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개혁, 개방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의 전환은, 이러한 몰(沒)과학에 입각하여, 단지 직관에 입각하여, 생산력의 발전, 혹은 정확히 말하면 이윤 추구를 위해 노동자를 피착취계급으로 전락시키고 농민을 피수탈자로 전락시키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시장 경제, 즉,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위해 중국 측은 시장 경제가 계획 경제보다 생산력을 더 발전시킨다는 엉터리 주장조차 서슴지 않는다. “시장 경제 체제는, 계획 경제 체제와 비교해 보면, 생산력의 발전을 더욱더 촉진시킬 수 있다. 이 점은 발전한 국가와 우리나라의 개혁, 개방의 실천에 의해 증명된다.”[18]康静萍 主编, 앞의 책, p. 58. 이러한 주장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쏘련이 존재할 당시 쏘련의 경제 성장은 자본주의 주요 국가에 비해 2-3배 이상 빨랐다. 그리고 중국의 소위 개혁, 개방의 시기와 관련해서 보면, 중국이 개혁, 개방 시기에 일정한 경제 성장 속도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모택동 시기에 쌓아 올린 사회주의 경제의 성과를 갉아먹으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중반 중국 농민의 소득은 당시 비교적 빠르게 증가했는데, 이것은 인민공사라는 집단적 소유에 통합되어 있던 자산이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과정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 과정이 끝나자 농민들의 소득 증가는 도시에 비해 엄청나게 뒤처지고 농민들은 비참한 빈곤의 처지에 내몰렸던 것이다. 또한 중국의 개혁, 개방의 시기 경제 발전이 빨랐던 이유 중의 하나는, 토지가 국유화되어 절대 지대가 소멸한 결과 자본의 축적 속도를 빠르게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토지 국유화는 등소평 등 주자파 노선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모택동 등이 주도했던 중국 혁명의 승리의 성과였던 것이다. 또한 1990년대 중국 경제의 빠른 발전은 국유 기업과 향진 기업 등 공유제 기업이 (사적)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어 자본의 축적으로 계산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 개방 시기, 시장 경제에 따른 경제 발전은, 한편으로 사회주의 계획 경제 시기의 성과를 갉아먹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과 농민에 대해 주요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욱더 가혹한 착취와 수탈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중국에서는 노동 운동이 전면적으로 탄압받고 있고 노조는 그 존재가 유명무실하다. 또 중국에서 농민공의 존재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생산자가 무산자로 전락하는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서, 농민공은 한 몸에 착취와 수탈을 동시에 떠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 즉, 자본주의로 건너뛴 중국은 이후 현대 기업 제도라는 명목하에 자본주의적 회사 제도를 도입하여 사회주의 국유 기업을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으로 전환시킨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국유 기업의 지배 구조였던 직공(노동자)대표대회, 당위원회, 노조의 역할은 유명무실화되고, 그것을 대신한 것은 자본을 대표하는 주주총회, 감사회, 이사회 등이었다. 이 과정은 기업에서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기업이 자본의 독재 구조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1981년 6월의 <국영공업기업 직공대표대회 잠정조례>가 1986년 9월 <전 인민 소유제 공업기업 직공대표대회 조례>로 바뀌면서 “기업 행정 영도 인원을 선출한다”는 의무 규정이 “공장장을 민주적으로 선출할 수도 있다”는 선택 규정으로 수정되었다.”[19]정재호 편, 앞의 책, p. 113. 이것은 국유 기업에서 최고권력기관인 직공(노동자)대표대회에서 공장장(기업의 대표)을 선출하던 것을 임의 규정으로 변경하여 직공대표대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거세하면서 기업을 자본의 독재로 전환시키는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현대 기업 제도, 주식제의 시행은 그러한 전환의 완성이었다. “주식제의 시행과 현대적 기업 제도의 실시 이후 직공대표대회의 기본적 기능은 모두 주주총회와 감사회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고, 민주관리 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20]같은 책, p. 121.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기존의 노조, 당위원회, 직공대표대회는 ‘이전의 3대 조직’(老三会)이라 부르고 현대 기업 제도, 주식 제도 도입 이후 등장한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회를 ‘새로운 3대 조직’(新三会)이라고 부르는데, 이 새로운 3대 조직이 이전의 3대 조직을 사실상 대체[21]김익수 외, 앞의 책, p. 283.하여 기업 내부에서 자본의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독재하에서 노조는 유명무실화되고 있고 노동 운동은 전면 탄압을 받고 있다. 노조가 있더라도 단체협상에서 임금협상이 배제되고 있고 단체협상은 노조위원장과 기업 관리자 간의 대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노조는 여전히 사회주의 사회 시절과 같이 반(半)국가 조직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노조의 역할은 노동자와 기업 사이의 중재자 역할에 머물러 있고, 노조 전임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노조위원장은 기업의 부사장급 관리직이 겸임하고 있다.[22]같은 책, p. 284. 또한 공식적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조를 결성할 자유는 금지되고 있다. 단체행동을 보면 1982년 헌법에서 파업권 조항이 삭제되어 이후 파업은 합법도, 불법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가 파업을 무기로 할 가능성은 법적으로 봉쇄되어 있어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언제나 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노동자의 저항은 대표가 없고, 조직가가 없고, 지도자가 없는 3무(三無)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23]같은 책, p. 285.

현대 기업 제도, 주식제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 중국의 국유 기업은 단위 체제로 묶여 있었다. 즉, 국유 기업 자체가 하나의 단위(單位)로 설정되었는데, 직장은 단순히 노동과 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포괄적인 사회적 기능을 했다. 예를 들면, 주택, 문화 시설, 상점, 자전거 수리소, 세탁소, 유치원, 양로 시설, 의료 시설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복지가 보장되는 단위 복지 사회주의였다.[24]정재호 편, 앞의 책, p. 97. 더구나 은퇴 후에는 단위에서 연금을 지급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단위 체제에 대하여 등소평은 그것이 기업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고 국유 기업을 비효율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현대 기업 제도, 자본주의적 기업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국유 기업의 현대적 기업 제도, 주식제 기업 제도로의 전환은 노동자에게 있어서 가혹한 구조조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국유 기업의 구조조정은 자본가들에게는 노동자들의 철밥통을 깨는 것으로서 환영받았지만,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실업과 빈곤 상태로의 전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유 기업에서 실업은 단위 체제의 영향으로 하강(下崗)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강된 인원은 일자리를 상실하지만 국유 기업과 노동계약 관계는 2-3년간 유지되고 그동안 기본생활비, 주택, 의료, 연금 등의 혜택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산업별, 지역별로 설치된 재취업센터로 보내져 완전실업 상태에 놓이게 된다.[25]같은 책, p. 122. 그리고 하강된 인원 중 재취업이 된 인원은 2002년 약 20% 정도에 머물렀다.[26]김익수 외, 앞의 책, p. 277.

1997년에 열린 중국 공산당 15차 당 대회는 주식제가 국유 기업 개혁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공유제의 개념을 변경시켰는데, 공유제는 국유와 집체 소유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제 같은 혼합 소유제 내의 국유 및 집체 부분을 포함하는 것으로 바뀌었다.[27]정재호 편, 앞의 책, p. 117. 또한 이 당 대회에서 강택민은 개체호, 사영, 외자 등 비공유 경제 또한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라고 선언하여 사적 소유를 중국 사회 경제의 중요 구성 부분으로 공식 승인하였다.[28]같은 책, p. 155. 이러한 과정에서 전 인민 소유제로서의 사회주의적 국유는 자본주의와 같이 국가 조직의 배타적 소유로서의 국유로 사실상 성격을 전환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전민 소유제=국가 소유제=국가 경영제’라는 등식에 기초한 전통적인 사회주의 소유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개혁파 경제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소유제 이론에 따르면, 이 세 가지 중 전민 소유제 개념은 사실상 폐기되어야 하고, 국가 소유제는 국가가 국유 기업 경영에 대한 직접적 통제권을 갖는 것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원칙에 기초하여 국가가 주식 지분에 따라 소유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29]김익수 외, 앞의 책, pp. 172-173. 이러한 사실은 등소평이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주장하면서, 즉, 자본주의로 전환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사회주의라는 수식어를 놓치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지금의 시진핑이 사회주의 중국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는 국가 조직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전 인민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국유는 국가 조직의 배타적 소유, 국가의 부르주아적 소유이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는 전 인민 소유로서 소유 자체를 철폐하는 과도기적, 이행기적 소유로서, 소멸하는 과정에 있는 소유라는 의미에서 전 인민 소유이다. 쏘련의 해체 과정에서 전 인민 소유의 국유 기업을 사유화할 때, 전 인민에게 무상의 바우처를 나누어 주어 기업의 주식을 일정하게 취득하게 했던 것은 국유가 국가 조직의 배타적 소유, 부르주아적 소유가 아니라 전 인민 소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 국유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곧바로 해고에 이은 실업이 아니라 하강이라는 제도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국유 기업이 국가 조직의 배타적 소유, 부르주아적 소유가 아니라 전 인민 소유의 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대 기업 제도, 주식 제도를 통한 국유 기업의 ‘개혁’ 이후 전 인민 소유는 의미를 상실했고, 중국에서 국유는 국가 조직의 배타적 소유, 국가의 부르주아적 소유로 전화했던 것이다.

 

 

4. 2000년대 이후 중국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완성

 

사회주의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으로의 전환을 통해 중국 사회는 사실상 자본주의로의 개조를 완성했다. 즉, 반혁명의 성공이 이루어진 것이며, 자본주의의 복고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과거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복고 과정과 다른 것은 중국 공산당 자체가 그러한 자본주의 복고의 주도 세력이었다는 점일 뿐이다.

중국에서 자본가계급은 이미 명실상부한 경제적, 정치적 지배계급이다. 현대 중국 자본가계급의 뿌리는 1950년대 공사합영의 경로를 통해 소멸하는 길을 걸었던 중국 민족자본가계급이다. 그러나 이들 민족자본가계급은 경영 능력, 그리고 유상몰수로 인한 이자 지급 등으로 경제적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 자신들의 자제들을 상급학교에 진학시켜 사회적, 경제적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중국 사회주의는 정치협상회의라는 통일전선 조직을 통해 이른바 붉은 자본가들을 승인하고 있었다. 정치협상회의에는 자본가계급을 대표하는 민주당파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지금도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 개방 이후 중국 자본가계급의 형성은 사영(私营)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개인의 이윤 추구 활동이 허용되자 1인 단독의 자영업자들이 개체호(个体户)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개체호들은 이윤을 얻고 자본을 축적하면서 밑에 피고용자를 두기 시작했는데, 개체호 밑의 피고용자가 8인 이상이 되면 사영이라고 규정되어 사적 자본가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 발생적 과정이었는데, 1980년대 후반 중국 공산당은 사영의 존재를 합법화시켰다. 그리하여 2000년에 이르면, 사영 기업의 수는 176만 개에 이르고 종업원 수는 2,407만 명에 달하였다. 사영 기업은 점차 대기업화했는데, 2000년경에는 종업원 500명 이상의 기업이 4만 800개에 달하고, 종업원 1000명 이상의 기업은 259개에 이르렀으며, 계열사를 보유한 사영 기업 집단(한국으로 치면 재벌에 해당한다)은 1999년 1,689개에 달했다.[30]정재호 편, 앞의 책, pp. 164-165. 이리하여 사영 기업은 단순한 소자영업자, 소자본가의 수준을 넘어서서 중국 경제의 주요 구성 부분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사적 자본가들 중 일부는, 최근 중국 경제에서 거대 재벌로 성장한 알리바바, 텐센트 등에서 보듯이 이미 독점 단계의 자본, 독점자본으로 성장했다.

한편 공유제 성분을 보면, 주식제 개혁을 겪은 국유 기업은 1997년 공업 총생산액 중 22.5%를 차지했다. 그리고 농촌의 향촌 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집체 기업의 비중은 1997년 38.1%를 차지했다. 그리고 비공유제 경제의 비중은 1999년 개체호와 기타 성분을 합쳐서 44.3%를 차지하고 있다.[31]같은 책, pp. 197-198. 이와 같이 국유 기업은 대폭적으로 양과 비중이 줄어드는 가운데, 사영 기업, 외자 기업, 향진 기업 등 다양한 소유제 형식의 기업들이 성장했다. 그런데 국유 기업은 대부분 대형 기업이고 또 국유 상업은행의 대출 등에서 우대를 받아 지속적으로 몸집을 불려서, 최근에는 국진민퇴(國進民退)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즉, 개혁, 개방 이래 민영 기업이 크게 성장, 진출하고 국유 기업이 퇴조, 위축되는 형세가 역전하여 국유 기업이 크게 성장하고 민영 기업은 위축되고 있는 것이 최근의 형세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 즉, 대형 기업과 전략적 산업에서 국유 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며 성장하고, 민영 기업, 사영 기업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소기업으로 머물고 있는 양상은 현재까지 일정하게 굳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 500대 기업에 드는 중국 기업들을 보면, 대부분 석유, 은행 등의 중국의 대형 국유 기업들이다. 민영 기업들은 IT 등 일부 첨단 산업에서 독점자본으로까지 성장했으나, 전체 독점자본들 중에서의 비중은 국유 기업이 압도적이다. 특히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중국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G2로 떠올랐는데, 이후 10여 년간 중국 경제는 대형의 국유 기업들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그 뒤를 민영 기업들이 따라가고 있는 양상이다. 중국은 2001년에 WTO에 가입하여 세계 시장의 흐름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후 대외 무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2012년경부터는 수출과 수입을 합한 대외무역 총액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서서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미국과의 격차를 벌여 나가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은 자본주의로, 정확하게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환한 자신들의 사회 상태를 반영하여, 공산당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이데올로기 작업을 벌였는데, 2001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 강택민은 3개 대표론을 발표하여 사영 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했다. 3개 대표론은 중국 공산당이 대표하는 3가지를 말하는데, 첫째 중국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고, 둘째, 선진 문화를 대표하고, 셋째, 광대한 인민 대중을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진 생산력의 범주에 사영 기업가를 포함시켜 사영으로 대표되는 사적 자본가들의 공산당 입당을 정식으로 허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중국의 사적 자본가들은 경제적 영역을 넘어서서 정치적 영역에서, 권력을 움켜쥘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사영 기업주 중 공산당원의 비율은 1993년 13.3%였지만 2002년에는 30.2%로 격증하였다.[32]김익수 외, 앞의 책, p. 320. 강택민의 3개 대표론은 중국이 시장 경제, 즉 자본주의로 전환한 가운데, 다양한 계급, 계층으로 분화되는 양상이 나타나자 i) 공산당의 1당 지배를 지속하고 ii) 개혁, 개방의 결과 나타난 사영 기업주와 인텔리 층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다.[33]같은 책, p. 188. 그런데 이러한 목적에 따른 3개 대표론은 당 건설 노선에서 중대한 변화의 함의를 내포한 것이었다. 즉, 3개 대표론은 공산당의 당 건설을 기존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적 당 건설론에서, 기능을 중시하고 기능에 따른 제도적 정당, 집권당 노선으로써 당 건설을 하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34]유세희 편, ≪현대중국정치론≫, 박영사, 2009, p. 89. 즉, 중국 공산당은 3개 대표론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한다는 본질적 성격을 버리고, 하나의 제도적 정당으로서, 집권 정당으로서 기능적 건설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이 무산계급 정당으로서의 자신의 역사를 지우고 부르주아 정당으로 변신한다는 의미였다.

중국에서는 2003년에 일반국민 여론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개혁의 수혜자는 누구인가의 질문에 대해, 당정 간부가 73%, 기술직이 12.8%, 사영이 6.4%, 노동자와 농민은 0.9%를 차지했다.[35]김익수 외, 앞의 책, p. 132. 이러한 여론 조사의 결과를 신뢰한다면, 중국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에서 가장 이익을 누린 자들은 바로 당 간부들이며, 바로 이들이 사회주의를 배신하고 노동자와 농민 등 인민을 착취, 수탈하는 세력이라는 것이 대중들에 의해 광범하게 인식되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영이 단지 6.4%를 차지한 것은 시사적인데, 사영 대부분이 중소 자본가로서 이들은 커다란 힘이 없고, 오히려 독점자본들을 대변하는 당정 간부가 실제적 권력의 주인이며, 부의 점유자들이라는 것을 중국의 인민 대중들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조화(調和)사회 이론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갈등과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등소평의 선부론(先富論) 대신 균부론(均富論)을 주창했는데, 이는 중국 사회의 계급 분열과 계급 대립이 일정한 수위를 넘었다는 판단 아래,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제기한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이 시기에 동부 연안의 발전 지대에 비해 낙후된 중서부 내륙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기치로 서부 대개발이 제창되기도 했다. 또 낙후한 중국의 사회 보장 체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중심에 놓는 과학적 발전관을 제창했고, 이를 위해 사람(인민)을 근본으로 삼는다(以民爲本)는 것을 원칙으로 제기했다. 이러한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은 중국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이데올로기와 정책 차원에서 시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진타오의 뒤를 이은 시진핑은 부패를 다스린다는 사정 정책을 내세워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이것은 이른바 사회주의적 법치를 강화하여 사회주의 제도 건설을 이룬다는 명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현대 중국은 혁명성과 사회주의의 운동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른바 제도 건설이 곧 사회주의 건설인 양 중국의 인민 대중과 세계 전체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중국은 G2로 떠오르면서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이른바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민족주의적 구호 이외에는 내용이 없는 빈곤한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1990년 전후 천안문 사태 당시 경제가 일시 침체한 것을 제외하면 중국은 2000년 정도까지 경제 공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하였다. 특히 1997년, 98년의 아시아 금융 위기 상황에서 중국은 자국 화폐인 위안화를 평가절하하지 않고 위기를 버텨 내어, 한국, 동남아 국가들이 신속히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은 위기를 모르는 경제 성장의 국가라는 신화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를 전후하여 양상이 달라졌다. 2008년의 위기 상황에서 중국은 4조 위안, 즉, 한국 화폐로 600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신속히 위기 상황에서 벗어났고 나아가 세계 경제 전체가 일정하게 위기를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4조 위안의 자금 투입을 통한 사회간접자본을 중심으로 한 건설 투자는 이후 중국 경제에 중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경제 위기를 극복한 직후였던 2010년 중국의 경제학자들은 중국 경제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과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매번의 경제 과열은 모두 투자 규모가 너무 크고 증가의 속도가 너무 빨라 일어났다는 점이다”[36]陈佳贵 李扬 主编, ≪2011年 中国经济形势 分析与预测(2011년 중국경제형세 분석과 예측)≫,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10, p. 3., “중국의 앞서의 경제 주기, 즉 신중국 성립 이후의 10번째의 경제 주기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인데, “8+2”의 양호한 궤적이다. 즉, 8년의 상승기와 2년의 침체기로서 합하여 10년이다.”[37]같은 책, p. 21. 이와 같이 중국의 경제학자들은 중국에서 10년의 경제 주기가 있고 그것은 투자 과열, 즉, 과잉생산 공황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경제학자들의 분석인데, 이와 달리 중국의 경제 관료, 당 간부들이 2008년의 금융 위기를 겪고 난 후 연설한 연설집에는 다음과 같이 현대 중국에서의 과잉생산 공황을 인정하고 있다. “6. 중국의 경제적 기현상(怪圈)을 돌파하는 것. 현재 중국의 많은 지방은 모두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는 요구가 있다. 그래서 투자 열기가 나타나고 신용대출이 따라서 팽창하고 신용대출 팽창 이후에는 생산능력의 과잉이 나타나고 이후에 다시 통화가 팽창하고 그 후에 중앙은 다시 긴축을 하고, 일단 경제를 긴축하면 어려움이 발생하고 이후 다시 투자 열기가 나타난다. …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언제나 이런 기현상 속에서 맴돌고 있다.”[38]张维迎 主编, ≪金融危机后的中国经济(금융위기 이후의 중국경제)≫, 世纪出版集团 上海人民出版社, 2010, p. 36. 중국은 발전 욕구가 크기 때문에 국가와 지방정부 주도의 투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이것이 시장 수요에 비하여 과잉의 생산능력을 낳고(즉, 과잉생산 공황으로 이어지는 물적 토대) 이후 긴축, 즉, 경제 침체가 나타나고 이후 회복기에 다시 투자 열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적 방식으로, 즉, 중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과잉생산 공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1990년대 후반의 침체기, 그리고 2008년을 기점으로 한 침체기에 중국 경제는 급격한 하강으로 접어들어서 뚜렷한 경제 주기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경제 침체기였던 1999년에 중국은 7.6%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2009년에는 9.1%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즉, 각 경제 주기에 있어서 저점이 상당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자본주의 사회로서 과잉생산 공황을 겪고 있지만, 사회주의 경제의 유산, 그리고 경제 전체에서 국유 기업의 비중이 30% 가까기 되는 정도로 높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은행이 모두 국가 소유여서 신용대출을 통해, 위기의 폭발을 일정하게 약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기존의 미국과 일본, 유럽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비해 젊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이며, 지금까지는 빠른 회복력을 보인 일정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유산은 거의 사라지고 있고 사회의 계급 분열과 계급 대립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더 심화되고 있다. 이는 빈부 격차의 정도를 나타내는 중국의 지니계수가 1982년 0.28에서 1990년 0.35로, 그리고 2001년에는 0.45로 증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39]샤오궈량ㆍ수이푸민, ≪현대중국경제≫, 해남, 2015, p. 442.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현대 중국에서 과잉생산 공황이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운동의 결과 과잉생산 공황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논증했는데, 이러한 과잉생산 공황의 존재를 중국의 경제 관료와 당 간부들이 시인하고 있다는 것은, 현대의 중국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실은 맑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운동 법칙이 관철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중국에서 과잉생산 공황의 정도가 아직까지 약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의 유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유 기업의 비중이 전체 경제의 30% 가까이 되는 구조, 즉, 중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구조의 특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5. 소결(小結)

 

등소평의 개혁, 개방 노선을 보면서, 중국 사회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보면서, 전 세계 부르주아들은 칭송에 입이 마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모택동 시기의 정치는 개인의 독재 시기이며 인치(人治)였다고 비난해 마지않는다. 그러면서 제도인가 인치인가를 화두로 던지고 있다.[40]고쿠분 료세이, ≪현대 중국의 정치와 관료제≫, 한울 아카데미, 2016, p. 44. 언뜻 보면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한 이러한 접근은 한편으로 사회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피상적 인식을 보여 주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사회주의를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과와 한계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택동은 개인적 독재의 인치이고 등소평은 사회주의 법치 제도를 비롯한 사회주의 제도를 건립한 합리주의자였다고 보는 이러한 견해는 부르주아들이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왜곡하는 악선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악선동은 아니며, 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길을 갈 수 있다.

사회주의는 제도인가, 인치인가는 쟁점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합리성에 따르면 인치보다 제도의 건설이 보다 진보적인 것이며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제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제도는 일정하게 고정된 체계, 시스템을 일컫는다. 사회주의 사회의 운영과 그 건설이 일정한 사회주의 제도라는 준거에 기초하여 건설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한 자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일정한 제도적 룰에 준거하여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제도와 혁명성, 혹은 운동성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사회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이행기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회가 이행기 사회로서의 혁명성을 상실하면, 그 사회는 현대 중국과 같이 자본주의의 복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제도의 건설을 존중하고 중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혁명성을 유지하고 그것을 사회주의 건설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 건설의 합법칙성이라는 점이 도출된다. 즉,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발전은, 한편으로 사회주의 제도, 체계의 건설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대중적인 운동성과 혁명성을 발전시키는 것의 통일이다. 모택동 시기 중국 사회주의의 뛰어난 점은,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계획 경제 체제의 건립, 사회주의적 민주주주 제도의 건립, 사회주의적 법률 제도의 건립을 추진하면서도, 대약진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중적인 혁명적 운동을 통해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혁명적 성격을 유지,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모택동 시기 중국 사회주의가 이러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등장으로 인한 것인데, 이는 수정주의의 등장이, 역으로, 반면교사로서 인류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기여한 점이다. 쓰딸린 시기 사회주의 건설에서 대중의 혁명적 운동은 쓰따하노프 운동, 문맹 퇴치를 비롯한 문화혁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노선 차원에서 대중의 혁명적 운동이 사회주의 건설의 본질적 요소라는 점은 뚜렷이 각인되지 못했다.

쓰딸린은 레닌 사후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어 갈 때, 서기장으로서 서기국의 서기들을 통해 당 조직을 장악하고 국가 조직을 통제하면서 사회주의 건설과 계획 경제 체제의 수립의 길을 걸어갔다. 그 과정에서 5개년 계획이 실시되던 초기에 쓰딸린은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구호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 계획 경제 체제의 건립 시기에 일정한 합리성을 갖고 있는 구호였다. 그런데 쏘련의 경제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특히 2차 대전을 전후하여, 당 간부들은 점차 혁명성을 상실하고 행정적 사무를 처리하는 관료 집단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쓰딸린은 이에 대해 2차 대전 이후의 시기에, 그의 말년에 권력의 실제적 소재를 당에 둘 것인가, 아니면 쏘비에트에 둘 것인가를 둘러싸고 흐루쇼프로 대표되는 당 간부 집단과 정치적 대결을 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에 흐루쇼프는 쓰딸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쓰딸린 당시의 혁명적 노선을 전복시켰고, 전 인민 국가와 전 인민 당을 내세워 쏘련 공산당을 수정주의적, 관료주의적 집단으로 변모시켰다. 모택동은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등장 이후 이러한 현실, 역사의 반동을 목도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에서 대중의 혁명적 운동이 본질적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어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고, 이어 유소기, 등소평 수정주의를 분쇄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발동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은 당시 중국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일정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중국에서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고, 또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한편으로 쏘련 수정주의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 미 제국주의의 침략 위협이라는 이중의 공세에 맞서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왜곡되기 시작했던 출발점이었던 임표의 사망을 분석해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임표의 사망 전까지 문화대혁명은 정확히 주자파를 타격하고 분쇄했고 중국은 사회주의 건설의 길로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표 사망 직전에 쏘련 측에서 중국 국경에 대해 무력 도발을 감행했고, 쏘련은 중국의 핵시설에 대한 핵공격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해 미국 측의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쏘련의 군사적 공격에 대비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미 제국주의가 언제 전선을 중국 쪽으로 확대할지 알 수 없는 이중의 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은 쏘련과 미국의 이러한 양면 협공의 위협 속에서 부득이하게 미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길로 갔는데, 바로 이 점이 임표를 고립시키고 끝내 임표가 사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임표의 쏘련 수정주의와 미 제국주의와 맞서는 인민전쟁론은 정세의 변화에 의해 힘을 잃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모택동 등 문화대혁명 추진 세력이 미제에 맞서고 또 쏘련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길을 가고자 했음에도, 끝내 수정주의 세력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는 역사의 한계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임표 사망 후 강청 등 4인방의 비림비공 등은 매우 좌편향된 것으로서 등소평 등 주자파 세력이 재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고 모택동 사후 끝내 권력이 주자파에 의해 장악되게 되었다.

그런데 쏘련 수정주의는 당시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상승기였다는 점에서 쏘련 해체 전까지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했었다. 즉, 꼬씌긴 개혁으로 개별 국유 기업은 이윤 추구 중심의 자본주의 운동을 했지만 거시적 측면에서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등소평의 중국 수정주의는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퇴조기에 발생하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쏘련 수정주의보다 더 반혁명적이고 자본주의 복고적인 모습을 보였다. 쏘련은 해체 전까지 농업에서 집단 농장 체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등소평은 권력 장악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980년대 초에 즉각적으로 인민공사라는 집단적 농업을 해체하고 소농 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 경제라는 기만적이고 속류적인, 비과학적인 이론을 내세우며 반혁명의 길을, 자본주의 복고의 길을 완성했고, 지금도 중국의 인민 대중을 기만하고 전 세계를 기만하고 있다.

다시금 원래의 쟁점으로 돌아가 인치인가, 제도인가의 문제를 정리해 보자.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이행기의 사회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의 이행기 사회로서의 혁명적 성격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본질적 요소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혁명적 성격을 유지, 발전시키는 것은 관료 집단의 ‘조정’이나 ‘조절’ 정책이 아니라, 대중의 혁명적 운동을 발동하고 조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대중의 혁명적 운동의 전개는,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잔재, 계급 사회의 잔재와 투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을 초점으로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계획 경제 체제의 건립, 공장 등 생산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선거 등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체계의 건립, 헌법과 법률에 따르는 사회주의적 법치 제도의 건립, 이데올로기와 문화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통해 문화혁명을 이루어 가면서 구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씻어 내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승리를 일구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요 고리마다, 사회주의 건설의 주요 고비마다 대중의 혁명적 운동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어려움을 돌파해 가야 한다.

제도는 일종의 형식이다. 즉, 제도는 사회주의 건설, 사회주의 사회의 형식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사회의 내용은 생산과 계급투쟁 등 대중의 혁명적 운동이다. 그리고 내용과 형식 중에서 일차적인 것은 내용이라는 점에서, 제도의 건립은 대중의 혁명적 행동과 운동에 토대하여 건립되고 작동되어야 하며, 이른바 관료들의 조정과 조절 작용은 대중의 혁명적 운동에 의해 제어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2차적인 것이다.

쏘련의 수정주의로 인한 해체 과정, 그리고 현대 중국에서 등소평 수정주의로 인한 자본주의의 복고 과정은 우리에게 위와 같은 역사적 교훈을 던지는 것이다. 모택동 등 중국의 노동자계급이 전개했던 대약진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지금 전 세계 자본가계급에 의해 매도되고 있지만, 자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21세기 지금의 노동자계급에게 풍부한 혁명적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의 핵심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대중의 혁명적 운동이 본질적 요소라는 것, 이것은 이행기 사회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혁명성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따라서 제도, 체계의 건립과 대중의 혁명적 운동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사회주의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며, 그 두 가지 요소 중에서 일차적인 것은 생산과 계급투쟁에서 대중의 혁명적 운동이라는 점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邓小平, ≪邓小平文选(등소평문선)≫ 第二卷, 人民出版社社, 1994, p. 141.
2 田克勤 主编, ≪邓小平理论概论(등소평이론개론)≫, 高等教育出版社, 2000, p. 34.
3 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二卷, pp. 291-310.
4, 17 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三卷, p. 373.
5 田克勤 主编, 앞의 책, p. 11.
6 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二卷, pp. 164-165.
7 邓小平, ≪邓小平文选≫ 第三卷, p. 252.
8 田克勤 主编, 앞의 책, p. 71.
9 같은 책, p. 54.
10 김익수 외, ≪현대중국의 이해≫, 나남, 2005, p. 250.
11 같은 책, p. 274.
12 같은 책, p. 240.
13 정재호 편, ≪중국 개혁 개방의 정치경제 1980-2000≫, 까치, 2002, p. 161.
14 康静萍 主编, ≪中国社会主义经济体制改革理论与实践(중국사회주의경제체제 개혁의 이론과 실천)≫, 经济管理出版社, 2001, pp. 66-68.
15 정재호 편, 앞의 책, p. 92.
16 같은 책, p. 150.
18 康静萍 主编, 앞의 책, p. 58.
19 정재호 편, 앞의 책, p. 113.
20 같은 책, p. 121.
21 김익수 외, 앞의 책, p. 283.
22 같은 책, p. 284.
23 같은 책, p. 285.
24 정재호 편, 앞의 책, p. 97.
25 같은 책, p. 122.
26 김익수 외, 앞의 책, p. 277.
27 정재호 편, 앞의 책, p. 117.
28 같은 책, p. 155.
29 김익수 외, 앞의 책, pp. 172-173.
30 정재호 편, 앞의 책, pp. 164-165.
31 같은 책, pp. 197-198.
32 김익수 외, 앞의 책, p. 320.
33 같은 책, p. 188.
34 유세희 편, ≪현대중국정치론≫, 박영사, 2009, p. 89.
35 김익수 외, 앞의 책, p. 132.
36 陈佳贵 李扬 主编, ≪2011年 中国经济形势 分析与预测(2011년 중국경제형세 분석과 예측)≫,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10, p. 3.
37 같은 책, p. 21.
38 张维迎 主编, ≪金融危机后的中国经济(금융위기 이후의 중국경제)≫, 世纪出版集团 上海人民出版社, 2010, p. 36.
39 샤오궈량ㆍ수이푸민, ≪현대중국경제≫, 해남, 2015, p. 442.
40 고쿠분 료세이, ≪현대 중국의 정치와 관료제≫, 한울 아카데미, 2016, p. 44.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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