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1)*

 

일렌코프(Evald Ilyenkov)**

번역 : 노준엽 │ 회원

 

*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ilyenkov/works/abstract/index.htm/ 이 번역물은 일렌코프의 저서인 ≪맑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을 분량을 나누어 연재하는 것이다.

 

** 역주: 쏘련의 철학자로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연구사, 1990) 등의 저서가 있으며, 변증법적 논리학의 문제를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제1장 구체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과 형이상학적 개념

 
 1. 변증법적 논리학과 형식논리학에서 추상과 구체의 개념

“추상”과 “구체”라는 용어는 일상적 언어에서 그리고 특수한 문헌에서 다소 모호하게 쓰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구체적 사실’과 ‘구체적 음악’, ‘추상적 사고’와 ‘추상적 회화’, ‘구체적 진리’와 ‘추상적 노동’에 대해 듣는다. 이러한 사용은, 각각의 경우에 이 단어들의 의미의 뉘앙스의 존재에 의해 명백하게 정당화되고 사용법의 완전한 통일을 요구하는 것은 우스울 정도로 현학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단어나 용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용어들과 역사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과학적 범주의 내용을 다룰 때는 사태가 달라진다. 논리학의 범주로서 추상과 구체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과학의 틀 내에서 안정적이어야 하고 모호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과학적 사고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수립하는 데 있어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들을 통하여 변증법적 논리학은 그것의 많은 근본적 원칙들을 표현한다(‘추상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한다’는 테제 등등). 그러므로 추상과 구체라는 범주는 변증법적 논리학에서 매우 명확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진리, 실재에 대한 사고의 관계, 사고에 있어서 실재의 이론적 재생산 방식 등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개념 등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단어 그 자체라기보다는, 단어와 연결된 변증법의 범주들을 다루는 한, 그것들의 정의에서 명확성의 결여 혹은 불안정성(부정확성은 말할 것도 없이)은 필연적으로 사태의 본질에 관한 왜곡된 개념으로 이끌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추상과 구체의 범주를, 전통에 의해 여러 저작에서 수 세기에 걸쳐 그것들과 연관된 내포된 의미들로부터, 관습의 영향으로부터, 혹은 단순히 변증법적 논리학의 명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종종 끼어들었던 오류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형태에서 추상과 구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형식논리학에서 제기되거나 해명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형식논리학의 능력의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서, 순수한 철학적, 인식론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개념들을 분류하는 문제일 때, 즉 개념들을 ‘추상’과 ‘구체’로 나누는 문제일 때, 형식논리학은 필연적으로 상응되는 범주들에 대한 매우 명확한 해석을 취한다. 이러한 해석은 구분의 원칙으로 나타나며, 그리하여 분석적으로 수립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하여, 형식논리학에 관한 책의 대부분의 저자들은, 비록 약간의 유보나 수정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전통을 어느 정도 만장일치로 지지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개념(혹은 관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추상과 구체로 나뉜다.

‘구체적 개념은 실제로 현존하는 명확한 대상 혹은 대상들의 종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추상적 개념은 대상 자체에서 정신적으로 추상화된 대상의 성질을 반영하는 것이다.’[N. I. 콘다코프]

 

‘구체적 개념은 사물들, 대상들, 그리고 현상들의 그룹들, 종류들과 관계되거나, 혹은 분리된 사물들, 대상들 또는 현상들과 관계되는 것이다. … 추상적 개념은 대상이나 현상의 성질―이 성질이 사고의 독립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때―에 대한 개념이다.’ [M. S. 스트로게비치]

 

‘구체적 개념은 대상이 실제로 물질적 세계에서 사물로서 존재하는 개념이다 … 추상적 개념은 대상 자체라기보다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파악된 대상의 성질을 반영하는 것이다.’ [V.F. 아스무스]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예들은 대부분 동일한 유형이다. 구체적 개념들은 ‘책’, ‘강아지’, ‘나무’, ‘비행기’, ‘상품’과 같은 개념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흔히 말한다. 반면에 추상적 개념은 ‘하얀 색’, ‘용기’, ‘미덕’, ‘속도’, ‘가치’ 등으로 묘사된다.

예들을 통해 판단해 볼 때, 그 구분은 사실상 잘 알려져 있는 G. I. 첼파노프의 논리학 교과서와 동일하다. 첼파노프 정의에 대한 개선들은 대부분 구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철학적–인식론적 토대와 관련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첼파노프는 철학적으로 전형적인 주관적 관념론자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념들의 추상과 구체로의 구분에 대한 그의 해석이 있다.

 

‘추상적 단어들은 사물들의 질들 혹은 성질들, 상태들, 혹은 행동들을 가리키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물과 별개로 그 자체에 의해 고려되는 질들을 나타낸다. … 구체적 개념들은―우리가 그것들을 명확한 존재를 가지는 것으로 간주한다면―사물들, 대상들, 사람들, 사실들, 의식의 상태의 개념들이다. …’ [논리학 교과서]

 

‘용어(term)’와 ‘개념(concept)’의 구별은 첼파노프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식의 상태들’은 그의 견해에서는 사실들, 사물들, 그리고 사건들과 같은 범주에 있다. ‘명확한 존재를 갖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개인의 직접적인 의식에서 명확한 존재를 갖는 것’과 동일하다. 즉, 개인의 숙고, 생각, 혹은 적어도 상상 속에서.

그러므로 첼파노프는 구체를, 분리되어 존재하는 단일한 사물, 혹은 이미지로서 인식(상상)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는 추상을 그렇게 상상될 수 없고,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만 간주한다.

어떤 것을 사실(寫實)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 혹은 무능력이 사실상 추상과 구체의 구분에 대한 첼파노프의 기준이다. 이 구분은,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무리 충격적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명확하다.

일부 저자들이, 관련된 예시들의 실제적 유형을 바꾸지 않고 분류에 대한 철학적-인식론적 해석을 교정하려 노력하는 한에서, 그 분류는 비판의 여지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물질적 세계의 대상에 속하는 것만을 구체적 개념 가운데 포함한다면, 센타우르(반인반수의 괴물-역자)나 아테네 팔라스는 용기 혹은 미덕과 더불어 명백히 추상적 개념으로 간주될 것이며, 반면에 강아지(Fido)는 가치와 함께 구체적인 것들에 포함될 것이다.

논리적 분석에 대한 이러한 분류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전통적 분류는, 이러한 종류의, 완전히 이질적인 요소를 그 분류에 도입하는 수정에 의해 파괴되거나 혼란스러워진다. 다른 한편으로 어떠한 새로운 엄격한 분류도 획득되지 않았다.

첼파노프에 의해 제시된 것에, 구분의 새로운 원칙 혹은 기초를 대립시키려는, 어떤 저자들에 의한 시도들은 또한 거의 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콘다코프는 개념들의 추상과 구체로의 구분이 ‘개념들의 내용에서의 차이’를 표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 개념들이 사물을 반영하고, 추상적 개념들이 이 사물의 성질 혹은 관계들을 반영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콘다코프에 따르면, 그 구분이 완전하려면, 사물들의 성질들 혹은 관계들은 구체적 개념에서 인식될 수 없다.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들의 성질들과 관계들을 통하지 않고서, 어떤 사물 혹은 종류를 인식할 수 있는지는 불명확한 채로 남아 있다. 사실 한 사물에 대한 어떤 생각은 불가피하게 이 사물의 어떤 성질에 대한 생각임이 입증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의 성질들과 관계들의 완전한 총체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물에 대한 생각에서 이 사물의 성질들에 대한 모든 생각을 제거한다면, 그 생각에서 이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념을 그것의 내용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실제로는 다음을 의미한다: 어떤 구체적 개념은 내용이 없는 개념이다. 반면에 추상적 개념은 매우 빈약할 지라도 어떤 내용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구분은 완전할 수 없고 그리하여 부정확한 것이 될 것이다.

아스무스가 제시한 구분의 원칙, ‘이 개념들의 대상의 실제적 존재’는 마찬가지로 한심스러운 것이다.

이 공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추상적 개념들의 대상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구체적 개념들의 대상들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러나 추상적 개념들의 범주는 미덕뿐만 아니라 가치, 무게, 속도도 포함한다. 즉, 그것의 존재가 비행기 혹은 집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대상들을 포함한다. 만약 연장(extension), 가치 혹은 속도가 하나의 집, 하나의 나무, 하나의 비행기 혹은 다른 어떤 개별적 사물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말하려 한다면, 확실히 그 개별적 사물들은 역시 오직 머릿속에서만, 오직 주관적 추상에서만, 연장, 무게 그리고 물질적 세계의 여타의 속성이 없이 존재한다.

실재적 존재는 결과적으로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개념들의 추상과 구체로의 분할의 기준이 될 수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 점은, 개별적 사물들이 이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보편적 법칙들과 형태들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그릇된 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어떤 저자들에 의해 도입된, 첼파노프의 구분에 대한 수정이 지극히 부적절하고 형식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논리학 저서들의 저자들이 이 구분에 대한 비판적인 유물론적인 분석을 하는 데 실패했으며, 전통적 분류를 개선함이 없이 단지 혼란시켰을 뿐인 사소한 교정에 스스로를 한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러므로 추상과 구체의 개념들의 역사에 약간의 명확성을 도입하기 위해, 그 역사로의 작은 여행에 착수해야만 할 것이다.

 

 

2. 추상과 구체 개념들의 역사로부터

 

첼파노프가 공유하는 추상 개념의 정의는 크리스티안 울프에 의해 명백하게 정식화되었다. 울프에 따르면, 추상 개념은, 사물로부터 정신적으로 고립되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표현되는, 사물의 성질들, 관계들 그리고 상태들을 그것의 내용으로 한다.

울프가 원래의 출처는 아니다. 그는 중세 스콜라학의 신학 논문에서 나타난 견해를 단지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사물들의 성질들과 관계들을 나타내는 모든 이름/개념(그들은 이름과 개념을 구별하지 않는다)은 추상이라고 불렀고, 반면에 사물들의 이름들은 구체라고 불렀다.

이 용법은 원래 단순히 어원에 의해 결정되었다. 라틴어에서 ‘구체(Concretus)’는 단순히 ‘섞임’, ‘융합된’, ‘복합’, 화합물을 의미한다; 반면에 라틴어에서 ‘추상(abstractus)’은 ‘끌어냄’, ‘~에서 꺼내다’, ‘추출된’ (혹은 ‘분리하다’), 또는 ‘떼어놓다’를 의미한다. 이것이 이 단어들의 원래의 어원적 의미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다. 나머지는 그것들을 통해 표현되는 철학적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중세의 실재론(realism)과 유명론(namianlism)의 대립은 ‘추상’과 ‘구체’라는 단어의 직접적인 어원학적 의미와 연관은 없다. 유명론자들과 실재론자들 모두 ‘구체’라는 용어를,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직접적으로 관찰되는 ‘사물들’, 개별적 대상을 분리하기 위해 적용한다. 반면에 ‘추상’이라는 용어는 그것들의 일반적인 ‘형태들’을 가리키거나 표현하는 모든 개념과 이름에 적용된다. 그 차이점은 유명론자들은, 이름이 단지 개별적인 구체적 사물의 주관적 명칭이라고 믿고 있는 반면에,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추상적인 이름들이, 영원하고 불변의 ‘형태들’,―신성한 이성의 자궁에 자신의 존재를 갖고 있는―신성한 힘이 그것에 따라 개별적 사물을 창조하는 원형을 표현한다고 믿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사물의 세계, ‘육체’에 대한 경멸―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특징적이며 특수하게는 실재론에서 명확하게 표현되는―은, 추상(육체로부터, 감각으로부터 떼어내어진, 순수한 인식)은 구체보다 (윤리학과 인식론적 차원 모두에서)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정하고 있다.

여기서 구체는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개별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것(복합적이고, 따라서 분해되고 사라질 운명인 것)과 완전한 동의어이다. 추상은 영원하고, 불멸하고, 불가분이며, 신성하게 세워지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 등과 완전한 동의어이다. 개별적인 ‘둥근 몸체’는 사라질 것이지만, ‘둥근 몸체’ 일반은 형태로서, 새로운 둥근 몸체를 만드는 생명력으로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구체는 일시적이고, 쉽게 사라지고, 휙 날아가는 것이다. 추상은 불변하는 상태로 존재하고, 본질을 구성하며, 세계를 건축하는 보이지 않는 계획을 구성한다.

훗날 헤겔이 그토록 신랄하게 조롱했던, 추상에 대한 골동품 애호적인 존중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추상과 구체에 대한 스콜라적인 개념이다.

자연과학과 동맹을 형성하면서, 종교적이고 스콜라적인 세계관의 토대를 파괴하기 시작한 16세기와 17세기의 유물론 철학은, 실제적으로 추상과 구체의 범주를 재해석하였다.

이 용어들의 직접적인 의미는 동일한 채로 유지되었다: ‘구체’라는 용어는, 스콜라적 교리에서처럼, 개별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사물들 그리고 그것들의 사실(寫實)적인 이미지로 언급된다. 반면에 ‘추상’이라는 용어는, 이 사물들의 일반적 형태를, 어구들, 이름들, 그리고 수에서 표현되는, 이 사물들의 불변하면서 다시 상기되는 성질들과 법칙-지배적인 관계들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범주들의 철학적-이론적 내용은 스콜라적인 내용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감각적인 경험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구체는, 주목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실재로 이해되었고, 추상은 실재에 대한 단지 주관적인 심리적 그림자, 그것의 빈약한 정신적 윤곽으로서 이해되었다. 추상은 감각적인 경험적 자료를 단어와 도형으로 표현하는 것의 동의어, 구체의 기호적 표현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유물론 철학의 최초의 단계에서 특징적인, 추상과 구체 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연구의 실천과 모순되게 되었다. 16-18세기의 자연과학과 유물론 철학은 점점 더 기계론적 견해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특성과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들이 사물들과 현상들의 유일한 객관적 질들과 관계들로 승인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머지는 단지 인간의 감각 기관이 창조한 주관적 환상으로 비쳐졌다.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인 모든 것은, 감각 기관들의 활동의 산물로서, 주체의 심리-물리적인 어떤 상태로서, 무색의 추상적 기하학적 원본에 주관적으로 색을 입힌 모사로서 인식되었다. 인식의 우선적인 과제가 또한 새롭게 조명되었다: 진리를 얻기 위해 감각적으로 지각된 사물의 이미지 위에 감각에 의해 덧씌워진 모든 색을 지우거나 씻어내야 했고, 추상적인 기하학적 뼈대, 윤곽을 드러내야 했다.

그리하여 구체는 주관적인 환상으로서, 단지 감각 기관의 상태로서 해석되었다. 반면에 의식 외부에 있는 대상은 완전히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므로 사태는 다음과 같다: 인간 의식의 외부에는, 동일하고, 영원하며, 그리고 불변의 추상적인 수학적인 도식에 따라 결합하는 기하학적 조각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구체는, 추상적 기하학적 몸체들에 대한 지각 기관의 지각의 형태로서, 단지 주관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진리로 가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은 구체(불합리한, 거짓된, 주관적인 것)에서 추상(몸체를 건설하기 위한 영원하고 불변하는 도식의 표현으로서)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통한 것이다.

이것이 16-18세기의 철학에서 강력한 유명론적인 편견을 결정한다. 수학적 개념을 제외하면, 어떤 개념도 단지, 인위적으로 창조된 기호로서 기억에 도움을 주고, 다양한 경험적 자료에 질서를 주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등에 도움을 주는 이름으로서 해석될 뿐이었다.

그 시대의 주관적 관념론자인 조지 버클리와 데이비드 흄은, 직접적으로 개념을 이름, 명칭, 관습적인 기호나 상징으로 축소시켰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그들이 믿기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일련의 감각적 인상들, 경험의 공통된 요소들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내용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 경향은 특히 영국에서 굳게 뿌리 내리고 있고 신실증주의 개념의 형태로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그것의 완벽한 형태에서는 주관적 관념론의 특성을 띠는 이러한 접근의 약점은, 그 시대의 많은 유물론자들에게도 또한 특징적이었다. 이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존 로크의 연구들이었다. 홉스와 엘베시우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작업에서 이러한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유물론적인 입장들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극단적으로 보면, 이러한 견해는 논리학적 범주들이 심리적 그리고 심지어는 언어학적, 문법적인 범주들로 해체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엘베시우스는 추상의 방법을, ‘우리 기억 속에 많은 수의 대상들’을 고정시키는 수단으로 정의한다. 그는 ‘단어들의 남용’을 오류의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간주한다. 홉스도 비슷한 추론을 따른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올바른 추리를 하는 것은 언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은 또한 언어를 그릇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이성적 인식이, 자료에 대한 순전히 양적이고, 수학적인 처리 과정으로 전락했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감각적인 이미지의 정리와 구두 기록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논리학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한편에서는 수학에 의해, 다른 한편에서는 용어와 명제들의 결합과 분리에 대한 학문에 의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들의 정확한 사용에 대한 학문에 의해, 탈취 당했다.

개념을 단어, 용어로, 사고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단어들을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유명론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유물론적 원칙 자체를 침식한다. 이러한 견해의 고전적인 대표자이자 창시자인 로크는 이미 실체 개념이 단지 ‘경험 일반’으로서, ‘가장 광범위하게 가능한 보편’으로서, 개별적인 사물로부터의 추상으로서 설명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버클리는 이 첨예한 쟁점으로 돌진했는데, 유물론에 반대하여 그리고 실체 개념 자체에 반대하여, 개념 구성에 대한 로크의 이론을 이용했다. 그는 실체 개념을 무의미한 이름이라고 선언했다. 흄은, 철학의 기초적 개념에 대한 분석을 계속하면서, 인과관계와 같은 개념의 객관적 성격은 그것이 ‘경험 일반’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언급함에 의해 증명되거나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왜냐하면 감각적으로 주어진 개별적 대상과 현상으로부터의, 구체로부터의 추상은, 사물 자체의 동일성보다는 사물을 지각하는 주체의 심리-물리적 구조의 동일성을 또한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념을 개별적인 현상들과 지각으로부터의 단순한 추상으로 축소시키는, 개념에 대한 협소한 경험론은, 이성적 인식에 대한 피상적인 심리적 측면만을 반영할 따름이다. 표면적으로, 사고는 물론 점차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추상들로 상승하는 것으로서, 개별적인 사물들로부터 ‘동일성’의 추상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은 가장 중요한 논점, 즉, 보편적 개념들의 객관적 진리의 문제를 회피하는 정반대의 철학적 개념에도 동일하게 봉사할 수 있다.

 

일관된 유물론자들은 개념에 대한 유명론적 관점의 약점을, 즉, 유명론적 관점이 관념론적 이론과 오류에 대해 취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제1 원리’를 표현하는 실체 개념은 추상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그것이 현실에서 그러한 것보다, 이해에서 더 확장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스피노자, 지성 개선론, 에티카와 서신, 영문판, 1901]

 

스피노자 논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상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보편들’, 이름들과 용어들에서 기록된, 단순히 감각적으로 주어진 복합체들로부터의 단순한 추상들은 단지 모호한 상상적인 인식의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과학적인, ‘올바른 관념’은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물의 차이, 일치, 대립’의 수립은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경험’의 양태이다. ‘더욱이 그것(인식의 방법-편집자)의 결과는 매우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문제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 먼저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방식으로는 자연현상에서, 우연적인 성질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먼저, 보편들을 형성하는 ‘혼란스러운 경험’은 결코 완성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떤 새로운 사실이 그 추상을 전복할 수 있다. 둘째로, 그것(혼란스러운 경험-역자)은, 주어진 보편이, 단순한 주관적인 허구가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진정한 보편적인 형태를 실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전혀 보증하지 못한다.

‘혼란스러운 경험’, 그리고 경험론적 개념에서 그것의 철학적 정당화에 반대하며, 스피노자는 엄격하게 입증된 원칙들과 ‘사물의 적절한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들에 기초하는 보다 높은 인식의 방식을 수립한다. 이것들은 더 이상 ‘보편들’이 아니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복합체로부터의 추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논점에 대한 언급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이 관념들(원칙들, 보편적 개념들)은 선험적인 인간 지성에 포함되어 있으며, 직관 혹은 자기 숙고의 행위에 의해 끌어내어진다. 이러한 해석에서는 스피노자의 입장은 라이프니츠나 칸트의 입장과 매우 같은 것이 되고, 유물론과는 거의 관계가 없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사실상 상당히 매우 다르다. 스피노자가 취급하는 사고는 인간 개인의 사고가 결코 아니다. 이 개념은 그의 이론에서 결코 개인적 의식의 모델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인류의 이론적 자기의식을, 전체로서의 정신적-이론적 문화를 지향하고 있다. 개별적 의식은, 이러한 사고, 즉 사물의 본질과 일치하는 사고를 개별적 의식이 체현하는 한에서만 고려되고 있다. 개인의 지성은 이성의 관념들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며, 그리고 어떤 자기 숙고도, 비록 그것이 아무리 거친 것일지라도, 그 안에서 이성의 관념들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이성 자신의 완벽함을 목표로 하는 이성의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을 통해, 단지 점진적으로만 인간의 지성 속에서 성숙하고 결정화된다. 이 개념들은 이런 종류의 작업을 통해 발전되지 않은 어떤 지성에게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그것들은 그것 안에는 그저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오직 전체로서의 합리적 지식만이―그것이 발전하면서―이러한 개념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스피노자는, 육체적 노동의 도구의 완벽성과의 유추에 의해 이러한 견해를 확고히 주장한다.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에 관한 한, 문제는 물질적 도구의 제작과 같은 발판 위에 서 있다 … 왜냐하면 제철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해머가 필요하고 그리고 해머는 그것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해머와 다른 도구가 필요하고, 그리고 등등 무한히 계속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이 철을 만들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헛되이 노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처음에는 매우 쉬운 약간의 제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연이 제공한 도구를 힘들고 불완전하게 이용하고, 그리고 그때, 이것들이 끝났을 때, 더 적은 노동과 더 큰 완벽함으로 더 어려운 다른 것을 작업했다. … 그러므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 지성은, 자신의 천성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지성의 도구들을 만들고, 그것에 의해 다른 지적인 작업들을 수행할 힘을 획득하며, 이러한 작업들로부터 다시 새로운 도구를 얻거나 혹은 그것의 탐구를 더 밀고 갈 힘을 얻으며, 그리고 이렇게 그것이 지혜의 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점차적으로 진행된다.” [같은 책]

 

아무리 시도를 할지라도, 이 주장은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의 견해와 유사하게 될 수는 없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직관의 보다 높은 관념들은 직접적으로 지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 관념들은 대리석의 무늬결과 같은 어떤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들은 매우 특수한 의미에서, 즉, 자연적인 것으로서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손이 원래 ‘자연적 도구’인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적인 능력들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지성의 도구’의 선천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유물론적 해석을 시도하는데,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의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기관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해 낸다.

스피노자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본래적으로 불완전한 ‘지성의 도구’는 자연이 아니라 육체적노동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것들이 자연의 산물이라고 믿었고, 그리고 이 점에, 오직 이 점에 그의 입장의 약점이 있다. 그러나 이 약점은 심지어 포이에르바하도 공유하고 있다. 이 결점은 결코 관념론적인 동요로서 간주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저 낡은 유물론 전체의 근본적인 단점일 뿐이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는, 그러므로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합리주의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사고하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에서 타고난 것이며, 그리고 명백하게 유물론적 방식으로 해석된 실체로부터 설명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사고를 속성으로 부를 때, 그것은 틀림없이 이 점을 의미한다: 실체의 본질은 단지 연장으로만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는 연장이 속하는 자연 그 자체에 속한다―그것은 연장과 육체로서의 자연(혹은 실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성질이다. 그것은 분리하여 생각될 수 없다.

‘추상적 보편’에 대한, 스콜라주의자들, 우인론자(偶因論者)들, 그리고 유명론적인 경험주의자들이 실체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방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에 동기를 준 것은 바로 이 관점이다. 그것이 스피노자가 구체적 존재에서 추상적 보편으로 가는 길을 낮게 평가한 이유이다. 이러한 방식은 실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언제나 스콜라적이고 종교적인 해석에 틈을 남기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구체적 존재에서 공허한 보편으로 이끄는 방식, 공허한 추상으로의 축소를 통해 구체를 설명하는 방식은 과학의 견지에서 거의 가치가 없다고 올바르게 믿었다.

 

“그러므로, 존재가 더 일반적으로 인식될수록, 그것은 더 혼란스럽게 인식되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주어진 대상에 속하는 것은 더 쉽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이 더 특수하게 인식될수록, 그것은 더 분명히 이해되고, 그리고 그것이, 그것의 타당한 대상을 제외한 어떤 것에 속하게 될 가능성―자연의 질서에 대한 무시를 통하여―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같은 책]

 

이 견해가,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인식의 본질이 점차적으로 더욱 일반적이고 공허한 추상으로의 규칙적인 상승에 있다고 주장하는, 그리고 탐구되고 있는 사물의 구체적인 특수한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는 협소한 경험주의의 견해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언급도 필요하지 않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방식은 모호함에서 명확함으로 이끌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방식은 (우리들을-역자) 목표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성적 인식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그것은 명확하게 수립된 일반적 원칙(하지만 결코 추상적 보편이 아니라)을 가지고 시작되고, 그리고 어떤 사물에 대한 한 걸음 한 걸음의 정신적 재구성으로서, 그 사물의 특수한 성질들을 그것의 보편적 원인으로부터(궁극적으로는 실체로부터) 연역하는 추론으로서 진행된다. 단순한 추상적 보편과 구별되는, 하나의 참된 관념은 필연성―그 필연성을 따라가면서, 그 사물의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모든 성질들을 설명할 수 있다―을 포함해야 한다. ‘보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들은 다소간 우연적인 성질들의 하나―그로부터 다른 어떤 성질들도 연역될 수 없는―를 반영한다.

 

스피노자는 그의 이 개념을, 기하학에 대한 하나의 예시―원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만약 우리가 원을 ‘중심에서 원주까지 그은 직선의 길이가 모두 동일한’ 도형이라고 정의한다면, ‘모든 사람은 이 정의가 원의 본질을 조금도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원의 성질의 하나를 설명할 뿐임을 알 수 있다.’ 올바른 정의의 방식에 따르면, 원은 ‘한 끝이 고정되어 있고 다른 끝이 자유로운 어떤 직선에 의해 그려지는 도형’이다. 이 정의는―하나의 사물의 기원의 양태와 ‘가장 가까운 원인’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며, 그리고 그것에 의해 그 사물의 정신적 재구성을 내포하면서―위에서 지적된 것을 포함하여, 그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성질들을 연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같은 책]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사물의 실제적인, 현실적인 원인을 표현하는 개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기에 스피노자의 방법의 요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탐구와 관련되어 있을 때는, 추상으로부터 어떠한 결론도 결코 이끌어낼 수 없다; 우리는 사물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 어떤 것이 유일한 것인지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 극히 주의하게 될 것이다.” [같은 책]

 

진리로 이끄는 것은,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축소”나 혹은 구체를 보편에 포함시키는 것을 통해 구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특수한 성질들을 실제적인 보편적 원인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피노자는 두 종류의 일반적 관념을 구별한다: 공통 관념 혹은 한 사물의 기원에 대한 실제적인 보편적 원인을 표현하는 개념들, 그리고 많은 개별적 사물들의 단순한 유사성 혹은 차이를 표현하는 보다 단순한 추상적 보편, 일반적인 보편 관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 ‘보편’을 내세워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콜라 학자들의 공허한 편견이기도 했다. 더욱 더 나쁜 것은 ‘보편으로부터’ 추상적인 삼단논법이라는 형식적 규칙에 따라 사물들의 성질들을 연역하는 것이다.

공통 관념에 의하여 지성에서 표현되는 아주 동일한, 현실적으로 보편적인 실제적 원인으로부터, 한 사물의 모든 특별하고 특수한 성질의 출현의 전 과정을, 연구하고 정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연역’은, 단지 자연으로부터, ‘실체’로부터 한 사물의 출현의 실제적 과정에 대해 지성에서 재구성하는 한 형태일 뿐이다. 이 연역은, 삼단논법의 규칙에 따라 형성되지 않으며, ‘진리 규범’, 일치의 규범, 사고와 연장의 통일, 지성과 외적 세계의 통일에 따라 형성된다.

스피노자의 개념의 결함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그것을 논의하는 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사고와 대상과의 실천적 활동 간의, 이론과 실천 간의 연계를, 구체적 개념에 대한 진리의 유일한 객관적 기준으로서 실천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다. 형식적인 견지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견해는, 로크의 견해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심오하고 진리에 더 가까운 것이다.

로크의 이론은, 단지 그 명제들을 해석하는 것을 통해, 어떠한 본질적인 변경 없이 버클리나 흄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했다. 스피노자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대의 실증주의자들이 로크에게는 때때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반면, 스피노자의 이론에 대해서는 ‘지독한 형이상학’으로 낙인찍는 것은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자연에 대한 개념, 그리고 단순한 추상적인 보편들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개념들에 대한 형식적 구성(그것은 그의 공통 관념이라는 용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식인 것 같다)은, 변증법에 대한 찬란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개념의 전형적이고 주요한 예로서, ‘실체’의 개념은, 상호간에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상호간에 가정하는 두 개의 정의들의 통일로서 명백하게 간주된다.

사고와 연장, 즉, 실체의 두 가지 속성이며 실체의 실현의 두 가지 양태는, 추상-일반과 전혀 공통점이 없으며, 그런 종류의 것과 어떤 공통된 점도 가질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사고에 대한 정의의 부분과 외적 세계(‘연장된 세계’)에 대한 정의의 부분을 동시적으로 형성하는 추상적 특징은 전혀 없다.

이 특징은 외적 세계와 사고에 대한 정의보다 더 광범위한 하나의 보편일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사고의 성질 혹은 연장의 성질과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성 밖의 어떤 실제적인 것도 반영할 수 없다. 스콜라학에 특징적인 ‘신(神)’ 개념의 성격은 정확히 이러한 특징으로 구성된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연장된 것과 관념적인 것은 ‘신에 의해 숙고’되는데, 신은 관념과 사물 간을―중간의 요소로서, 양 자에 공통된 특징으로서―중재하는 일반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와 연장 간에 공통적인 요소(추상적 보편이라는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두 개에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근원적인 통일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그러므로 사고를 더한 자연과 동일하며, 대립물의 통일, 두 속성의 통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전통적인 신에게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상 그것의 본질적인 측면으로서의 사고와 더불어 전체로서의 연장된 자연이다. 오직 전체로서의 자연만이 자연의 속성으로서의,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성질로서의 사고를 갖고 있다. 연장된 세계의 분리된, 제한된 부분은 이러한 성질을 필연적으로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양태로서 돌은 전혀 ‘사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하는 ‘실체’의 일부를 형성하며, 그것(돌-역자)이 그것(실체-역자)의 양태이고 그것(실체-역자)의 조각이다. 그리고 그것(돌-역자)이 예를 들면, 인간 육체의 조각이 되는 적절한 구조의 일부를 형성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점이 디드로가 스피노자의 가르침―돌이 사고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의 주요 사상에 대해 해석한 방식이다. 당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은 그것을 갈아서, 그 돌가루 위에 식물을 기르고, 그리고 그 식물을 먹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이라는 물질을 지각능력이 있는 육체라는 물질로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인 견해와 결합된, 스피노자의 변증법의 찬란한 번뜩임은, 17세기와 18세기의 형이상학적 사고의 일반적 물결에 의해 침수되면서 묻혀버렸다. 유명론에 치우친, 로크의 추상에 대한 이론은, 어떤 이유로 인해 그 시대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게 더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스피노자의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독일고전철학에 의해 비로소 표면으로 드러났으며, 오직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서만 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발전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식에 대한 주관적 관념론적 견해에 기초하여, 합리론과 경험론의 원칙들에 따라 애를 쓰면서, 개념들의 두 종류, 추상과 구체로의 견고하고 빠른 분할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칸트의 표현대로, 만약 분리된 개념이 다른 개념과의 고리 밖에서, 그것의 사용법 밖에서 고려된다면, 그것이 추상적인지 구체적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추상과 구체라는 표현은 개념들 그 자체보다는―왜냐하면 어떤 개념이든지 추상적 개념이므로―그것들의 사용법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용법은 다시 상이한 등급이 있을 수 있다:하나의 개념을 지금 더 추상적으로 혹은 덜 추상적으로, 더 구체적으로 혹은 덜 구체적으로 취급하는가에 따라, 즉, 그 개념에 대해 정의를 더하는지, 혹은 빼는지에 따라.’라고 칸트는 그의 논리학에서 쓰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한 개념은, 만약 그것이 정말로 공허한 호칭, 개별적인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인 개념이라면, 언제나 일반적인 어떤 것, 어떤 사물의 포괄적인 혹은 특수한 정의를 표현하며, 그리고 그리하여 그것은 실체 혹은 분필이건, 흰색 혹은 미덕이건 간에, 언제나 추상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어떤 개념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것의 많은 특징들을 통하여, ‘그것 자체 내에서’ 정의된다. 이러한 특징/정의들이 한 개념에 더 많이 더해질수록, 칸트의 견해에서는, 그것이 더 구체적으로 된다. 즉, 정의에서 더 명확해지고, 더 풍부해진다. 그것이 더 구체적일수록, 그것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개별적 사물들을 더 충분히 특징짓는다. 만약 하나의 개념이, ‘논리적 추상’을 통하여, ‘더 높은 종류’에 포함되는 것을 통해 정의된다면, 그것은 추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것은 더 많은 수의 개별적 사물과 종류에 적용될 수 있지만, 그것의 구성에서 정의들의 수는 더 적어진다.

 

‘하나의 개념은 추상적인 사용법을 통하여 더 높은 종류에 접근한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의 개념은 구체적 사용법을 통하여 개별적인 것에 접근한다. … 매우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서는, 우리가 많은 것들에 대해 거의 알 수가 없다. 매우 구체적인 개념을 통해서는, 우리가 적은 수의 것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한편에서 획득하는 것을 우리는 다른 한편에서 다시 잃어버린다.’ [칸트 op. cit.]

 

구체성의 한계는 그러므로 감각적으로 숙고되는 개별적인 사물, 분리된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의 개념은 결코 이 한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른 한편으로, 가장 높고 가장 추상적인 개념은 언제나 그 구성에서, 그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혹은 그것을 이렇게 파괴하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정의를 정식화함을 통하여) 파괴할 수는 없는, 어떤 통일성, 상이한 정의들의 어떤 종합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심지어 가장 높은 종류의 개념도 일정한 구체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경험론적 경향, 로크의 전통이 느껴진다. 그러나 칸트는 그것을, ‘한 개념의 정의들의 종합’의 성질에 대한 극도로 합리주의적인 견해와 결합시킨다. 그 개념에서 정의들의 종합 혹은 결합(즉, 개념의 구체성)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상의 경험적 복합체를 자연스럽게 단순히 지향할 수는 없다. 이론적 중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종합은 또 다른 원칙, 즉, 정의들을 경험론적 경험과는 독립적으로, 선험적으로 결합하는 능력에 기초해야만 한다. 한 개념의 구체성(즉, 다양성 속의 통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는 상이한 정의들의 통일)은 그리하여 칸트에 의해, 원래적인 통일, 통각의 초월적 통일을 갖고 있다고 하는 인간 의식의 본성으로부터 설명되고 연역된다. 이 후자는 정확히 한 개념의 구체성의 진정한 기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 개념의 구체성은 ‘사물 자체’와,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구체성과 어떤 견고한 고리도 갖지 못하게 된다.

헤겔 역시 어떠한 개념도 추상적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추상성이, 한 개념이 그것의 정의들에서 감각적으로 숙고되는 실재를 그 전체로서 결코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해석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의미에서 밀이나 중세의 유명론자들보다 로크에게 훨씬 더 가까웠다. 그는, 개념들의 정의는 언제나 일반적인 어떤 것의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단지 개념들이 언제나 단어들에 체현되어 있으며 단어들은 언제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단어들이 언제나 일반적인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고 절대적으로 개별적이고 독특한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잘 깨달았다.

그러므로 누구나 추상적으로 사고한다. 그리고 누군가 사용하는 개념들이 정의들에서 빈약할수록, 그 사고는 더 추상적으로 된다. 추상적 사고는 결코 미덕이 아니라 오히려 결점이다. 이것이 전체의 요점이다―구체적으로 사고하는 것, 추상 개념을 통하여, 단순한 유사성보다는, 단순히 상이한 것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것보다는, 사물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성질을 표현하는 것.

구체는 헤겔에 의해, 다양성 속의 통일로서, 상이하고 대립되는 정의들의 통일로서, 유기적 고리들에 대한 정신적 표현으로서, 한 대상에 대한 분리된 추상적인 정의들을 주어진 특수한 대상 내부에서 융합하는 것의 정신적 표현으로서, 해석되었다.

추상에 대해 말하자면, 헤겔은 (밀이나 스콜라 학자들이 아니라 로크가 한 것과 같이) 일반적인 어떤 것으로, 단어와 개념으로 표현되는 어떤 유사성으로, 그것이 집이든 흰색이든, 사람이든 가치든, 강아지든 미덕이든 간에, 많은 사물들의 다른 것들과의 단순한 동일성으로 해석했다.

‘집’이라는 개념은 이런 의미에서 ‘친절’이라는 개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둘 다 그것들의 정의에 개별적인 사물, 현상, 정신적 상태 등의 전체적인 종류, 계열, 류, 종에 내재하는 공통적 요소들을 나타낸다.

만약 단어, 용어, 상징, 이름이 오직 그것만을―많은 개별적 사물, 현상 혹은 의식의 이미지의 추상적 유사성만을―표현한다면,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아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인 일반적 관념 혹은 표상에 지나지 않으며, 경험적 지식의, 의식의 감각적 단계의 형태일 뿐이다. 이 허위 개념은 그것의 의미에 대해 어떤 감각적으로 주어진 이미지를 언제나 갖고 있다.

개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들은 단지 일반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통일체 속에 포괄되는 풍부한 특수를 포함하고 있는 일반을 표현한다. 달리 말하면, 진정한 개념은 추상적(당연히 헤겔은 그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의들(낡은 논리학이 특징이라고 부르는 것)이 문법 규칙들에 따라 단순히 결합된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통일을 표현하는 단일한 복합체 속에서, 그 개념 속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구체적이다.

헤겔에 따르면, 개념의 구체성은 정의들의 통일에, 그것들의 의미의 응집―개념의 내용을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에 있다. 맥락에서 벗어나면, 어떤 개별적인 언어적인 정의는 추상적이며 단지 추상적일 뿐이다. 과학적-이론적 논의의 맥락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어떤 추상적 개념도 구체적으로 된다.

분리되어 취한 각각의 추상적 정의의 진정한 의미, 진정한 내용은, 동일한 종류의 다른 정의들과 그것의 연계를 통하여, 추상적 정의들의 구체적 통일을 통하여 드러난다. 어떤 문제의 구체적 본질은 언제나, 추상적 ‘정의’를 통하기보다는, 대상의 모든 필연적인 정의들을 그것들의 상호간의 연관들 속에 펼쳐 놓음을 통하여, 표현된다.

그것이, 헤겔에 따르면, 하나의 개념이 분리된 단어, 용어, 혹은 상징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명제 속에 펼쳐 놓은 과정에서만, 분리된 정의들의 연계성을 표현하는 추론 속에서만, 그리고 궁극적으로 명제들과 추론들의 체계 속에서만 통합되고 잘 발전된 이론 속에서만 존재한다. 만약 어떤 개념이 이 연관에서 끌려 나온다면, 그것에서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용어상의 외피, 언어적 상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개념의 내용, 그것의 의미는 그것 밖에서―일련의 다른 정의들 속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분리되어 취한 어떤 단어는 오직 대상을 지명하거나 그것을 이름 짓는 것만을 할 수 있고, 그것은 하나의 기호, 상징, 표지 혹은 징후로서만 기능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리된 언어적 정의의 구체적인 의미는, 그것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이미지이건, 혹은 문제의 본질, 대상, 현상 혹은 사건의 본질을 표현하는 이론적 정의들의 잘 발전된 체계이건, 항상 다른 무언가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만약 하나의 정의가, 머릿속에서 분리되어서, 감각적으로 숙고된 이미지로부터 독립한 채로, 그것 혹은 다른 정의들의 체계와 연관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으로 추론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추론은 확실히 아무것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단지 연관되지 않은 사고이며, 그것과 다른 성질과의 고리에 대한 이해가 없이, 현실에서 이 성질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한 사물의 개별적 성질을 사고하는 것이다.

‘누가 추상적으로 사고하는가?’라고 헤겔을 묻는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한 시장의 여인은, 모든 사람들을 오로지 그녀 자신의 협소한 실용적 관점에서만―그들을 오직 야바위의 대상으로만 보면서―배타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으로(즉, 일면적으로, 우연적이고 연관되지 않은 정의들 속에서) 사고한다;

규율에 엄격한 군인은 병사를 단지 두들겨 패야할 사람으로만 간주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으로 사고한다; 거리의 어떤 게으름뱅이는 어떤 사람에 대해, 그의 다른 성질들을 모두 무시하고, 그의 삶의 이력, 그의 범죄의 원인들 등에 관심을 갖지 않고, 단지 살인자로서 처형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추상적으로 사고한다.

반면에,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추상적 지표들―살인자, 병사, 구매자―이 덧붙여진 현상들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러한 일반적인 추상적인 지표를, 대상, 현상, 사람, 사건의 본질의 표현으로 훨씬 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사태의 본질을 드러내는 개념은, 오직 체계를 통하여, 개별적 대상의 분리된 순간들, 측면들, 성질들, 질들 혹은 관계들을 표현하는 일련의 정의들을 통하여 드러날 뿐이다. 그 개념의 이러한 모든 분리된 측면들은, 단지 어떤 형식적이고 문법적인 복합체 속에만 (‘그리고’, ‘혹은’, ‘만약 …라면’, ‘이다’ 등과 같은 단어들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연관에 의해 연계되어 있다.

추상과 구체에 대한 헤겔의 개념의 관념론은, 그가 추상적 정의들을 종합하는 능력을, 사고의 근원적인 성질로서, 의식에서 표현되는 보편적인 연관― 실제적인, 객관적인,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어떠한 사고와도 독립된 실재에 대한―이라기보다는 신성한 선물로서, 간주한다는 점에 있다. 구체는 최종적 분석에서 사고의 산물로 해석된다.

물론 그것은 관념론이지만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보다 훨씬 더 ‘지성적’이다.

19세기 후반 부르주아 철학은 점차적으로 실증주의로 미끄러지고 있었으며, 스피노자나 헤겔은 말할 것도 없고, 칸트와 로크의 견해조차 기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특히 명확한 하나의 예를 들자면, 밀은, 추상에 대한, 그리고 구체성에 대한 추상의 관계에 대한 로크의 이론이, 밀의 견해에 따르면,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에 의해 종국적으로 수립된 그러한 개념들의 ‘남용’이라고 믿었다.

 

“나는 구체와 추상이라는 단어를, 스콜라 학자들에 의해 부가된 의미로 사용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언어―그리고 그 언어의 정의들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거의 변경되지 않았으며 단지 망쳐질 수 있을 뿐이었다―의 구성에서 경쟁자가 없었다.” [밀, 논리학의 체계]

 

밀의 견해로는, 로크 학파는 ‘추상적 이름’이라는 표현을 모든 ‘일반적 이름들’로, 즉, 추상 혹은 일반화의 결과인 모든 ‘개념들’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같은 책]

 

종합하면, 밀은 선언한다:

 

‘그러면 추상이라는 것은, 타당한 논리에서 보면, 나는 언제나 구체의 대립물로 말하는 것이다; 하나의 추상적 이름은 하나의 속성의 이름이다; 하나의 구체적 이름은 하나의 대상의 이름이다.’ [같은 책]

 

밀의 이러한 ‘사용법’은, 사고와 객관적 실재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주관적 관념론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밀은, (개별적 이름들을 제외한) 모든 개념들이 추상적이라는, 그것들 모두는 어떤 동일한 성질을 추상하는 것의 산물이라는 것이라는, 많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일반적 형태라는, 로크의 견해를 좋아하지 않았다.

밀의 견해에서는, 이러한 사용법은, 전체적인 종류의 단어들에서, 어떤 간략한 특수한 지시를, 즉, 속성들의 이름의 분류를 박탈하는 것이다. 속성들 혹은 성질들에 대해, 밀은 추상적으로, 즉, 특수한 대상으로서의 개별적인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인식될 수 있고 인식되어야만 하는, 개별적 사물들 간의 일반적 성질들, 질들, 혹은 관계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집’ 혹은 ‘불’, ‘사람’ 혹은 ‘의자’와 같은 개념들은, 개별적 사물들의 어떤 공통된 성질로서가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는 사고될 수 없다. ‘집’, ‘불’, ‘하얀 색’, ‘원’은, 언제나 그것들의 특성으로서 이러저러한 개별적 사물에 속한다. 우리는 ‘불’을 개별적 불들과 분리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할 수 없다. ‘하얀 색’은 역시, 개별적 사물 밖에서, 그리고 그것들과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사고될 수 없다. 이 모든 일반적인 성질들은 오직 개별 속에서만, 그리고 개별을 통하여, 개별적 대상들의 일반적 형태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것들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적인 이름들, ‘속성들’의 이름들은 매우 상이한 문제이다. 추상적 이름들(혹은 개념들, 이것은 밀에 따르면 아주 동일한 것이다)은 일반적 성질들, 질들 그리고 관계들―이것들은 개별적 대상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분리된 대상들로서 인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식되어야만 한다. 비록 직접적인 숙고에서, 그것들은 ‘하얀 색’, ‘목재’, ‘불’, 혹은 ‘신사’와 같은 개별적 사물들의 동일한 종류의 일반적 성질들로 나타나지만―을 표현한다.

이러한 개념들 가운데, 밀은 ‘하얀 색’, ‘용기’, ‘평등’, ‘유사성’, ‘정직’, ‘뚜렷함’, ‘가치’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은 또한 일반적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의 대상들(혹은 형식논리학에서 이 개념들의 내용으로서 언급되는 것)은 개별적 사물들의 일반적 성질들로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성질들, 질들 혹은 관계들은 단지 (개별적인) 사물들 자체에 대한 일반적 성질들로서 잘못 쓰이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밀은 말한다.) 실제로는 이 모든 ‘대상들’은 사물들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밖에서, 사물들과 독립적으로―비록 ‘대상들’이, 개별적 사물들의 일반적 성질로 나타나면서, 인식 행동 속에서 사물들과 융합하지만―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은, 개별적 사물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 존재하는가?

 

밀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 자신의 정신 속에서. 이것들은, ‘느낌 혹은 의식의 상태’이거나, 혹은 ‘이들 느낌을 경험하는 지성들’이거나, 혹은 ‘느낌 혹은 의식의 상태들 간의 연속성과 상호 존재, 비슷함 혹은 비슷하지 않음’이다. [같은 책]

 

이 모든 대상들은 또한 추상적으로, 즉,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인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 사물들의 성질들, 질들, 혹은 관계들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사물들로부터 분리하여 인식하는 것은 그것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한계를 정하는 것의 근본적인 결함은, 어떤 개념들이 마음속에서 개별적 사물들(현상들)―숙고 속에서 주어지는―과 연관되어야만 하고, 반면에 다른 개념들은, 이러한 연관 밖에서, 어떠한 개별적 현상들로부터도 확실히 독립적으로 인식되는 특수한 대상들로 고려되어야만 한다고,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가치 일반, 이러저러한 가치는, 밀에 따르면, 머리 밖에서의 그것의 존재의 어떠한 유형도 분석함이 없이, 추상 속에서 인식될 수 있다. 이것은, 그것이 머리 밖에서의 대상들의 실제적인 성질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추상 속에서 인식될 수 있고 인식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평가 혹은 측정의 인위적인 방법으로서만,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태도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으로서만, 즉, 어떤 도덕적 태도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머리 밖의, 의식 밖의, 사물들 자체의 성질로 고려될 수 없다.

밀이 고전적인 대표자인 이러한 종류의 논리에 따르면, 가치는 단지 개념으로서만, 머리 밖의 사물들의 객관적인 성질들로부터 독립적인 그리고 그것들과 대립되는 선험적인 도덕적 현상으로서만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가치는 단지 자기의식 속에서만, 추상적 사고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점이 가치가 ‘추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이유이며, 그리고 그것이 가치를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밀의 견해를 이렇게 상세히 다루었다. 그것은 단지 그 견해가 논리학의 범주들로서 추상과 구체에 대한 해석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더 반(反)변증법적인 전통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반변증법적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반철학적인 것으로서 표현되어 왔다. 밀은, 지난 수세기 동안 세계의 철학에서 발전되어 온 주장들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그에게는, 헤겔 혹은 칸트만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로크의 연구조차, 중세 스콜라 학자들에 의해 절대적으로 엄격하게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수립된 것들을 다룸에 있어 쓸모없는 궤변의 관점으로 나타난다. 그 점이 모든 것이 그에게 그렇게 단순했던 이유이다. 구체는 ‘개별적 사물’로서, 개별적 경험으로서,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구체적 개념은 개별적 대상의 이름으로서 사용될 수 있는 언어적 상징이다. 개별적 사물의 직접적인 이름으로서 사용될 수 없는 그러한 상징이 ‘추상’이다. 누군가는 ‘그것은 빨간 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것은 빨강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는 구체이고 후자는 추상이다. 이 점이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다.

모든 신실증주의자들은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유일한 차이점은, 추상과 구체(모든 철학적 범주들도 마찬가지다.)가 여기서 언어적 범주로서 취급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추상적 대상들’을 표현하는 용어들이 허용될 수 있는가, 허용될 수 없는가의 문제는, ‘언어적 틀’에서 그것들의 활용의 효과 혹은 편의성의 문제로 축소된다. ‘추상’은 여기서, 개별적 경험에서 개별적 사물로서 주어지지 않고, 경험에서 주어지는 그런 유형의 대상들에 대한 말로써 정의될 수 없으며, 더욱이 주관적 관념론적인 방식으로 해석되는 개별적 대상들의 직접적 이름이 될 수 없는 모든 것으로 일관되게 취급된다.

‘추상’과 ‘구체’라는 용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철학사의 전체적인 유산에 의해 그리고 맑스주의 철학에 의해 논박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의 취급을 맑스주의 철학이 어떻게 폭로하고 있는가로 지금 이행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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