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마오는 대약진 운동 시기에 정말로 수백만 인민들을 학살했는가?

 

조셉 볼(Joseph Ball)

번역: 김의진(회원)

 

*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onthlyreview.org/commentary/did-mao-really-kill-millions-in-the-great-leap-forward

 

 

 

지난 25년 동안 마오쩌둥의 위상은 그 스스로한테 책임이 있다던 전대미문의 사망자 추정치 통계들로 인해 상당 부분 실추됐다. 마오쩌둥은 생전 중국 인민의 복지를 개선시키고, 가난과 기아를 타파했으며, 무상의료와 교육을 제공한 공로로 극진히 대우받았다. 마오쩌둥 이론은 또한 전 세계 반제국주의 투사들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마오에 대한 우익 진영의 맹렬한 적의를 설명해 주는 이유는 십중팔구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경향은 네팔 및 인도 마오주의 운동의 성장과 세계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파급력에 따라 극심해졌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을 격하하려는 시도의 대부분은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 운동에 초점을 맞춘다. 이 시기는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때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1950년대에 이미 공동경작을 개시했으며, 대약진 운동 도중 수천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인민공사에 가담했다.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경작 사업이 입안됐다. 마오의 계획은 농업 및 공업 생산량을 대규모로 증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1959년에서 1961년 동안 기근을 불러일으켰다고 (몇몇은 1958년에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알려져 있다. 기근에는 국가에 의한 곡물의 대량 수취나 공동취사장에서 무계획적으로 낭비된 식량들처럼 다양한 이유들이 언급된다. 경작 사업이나 널리 알려진 “토법고로”(농촌에 지어진 소규모 용광로)에서의 근무 태만도 요인으로서 지목됐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 시기에 문제점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문제의 대부분이 기상악화와 자연재해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한편으로는 정책 오류에 대한 책임도 시인했다.

 

마오쩌둥 사후에 나온 중국 당국의 공식 지표들은 대약진 운동 시기에 1,65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통계 수치들은 덩샤오핑 정부가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해 격하 운동을 벌인 시점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통계들이 어떻게 수집됐으며 세간에 공개되기까지 20년 동안 축적된 경위에 대한 진위 여부는 확인할 방도가 없어 보인다. 미국 연구자들은 중국 통계와 1953년-1964년 인구 추정치를 합산하여 사망자 수치를 3천만 명으로 늘렸다. 창롱(张戎, Jung Chang)과 존 할리데이(Jon Halliday)는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Mao: the Unknown Story)≫에서 대약진 시기 3천 8백만 명을 포함하여 7천만 명이 마오쩌둥에 의해 학살됐다고 주장했다.

 

서방 연구가들은 대약진 운동에 대해 극도로 편향된 시각을 취하며,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사망률 통계 수치들에 매료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악영향에 대한 관점은 지나치게 과장됐을 공산이 크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본격적으로 추진된 몇몇 정책들이 초기 진통을 이겨낸 후 중국 인민들한테 실제적으로 어떠한 이익을 주었는가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

 

미국 국가기관들은 전후 마오주의(일반적으로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인사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베테랑 역사가인 로더릭 맥파커(Roderick MacFarquhar)는 일례로 1960년대에 ≪차이나 쿼터리(The China Quarterly)≫ 잡지 편집을 맡았었다. ≪차이나 쿼터리≫지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기근에 관한 의혹들을 출판물로 펴냈다. ≪차이나 쿼터리≫지는 맥파커 본인이 ≪런던 리뷰 오브 북스(The London Review of Books)≫에서 시인했듯 CIA 연계조직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사실이 추후에 드러났다. (맥파커는 ≪차이나 쿼터리≫지를 편집하던 도중 CIA에게서 자금이 들어왔는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재스퍼 벡커의 대표 저작인 ≪굶주린 유령들(Hungry Ghosts)≫에 수록된 증언들처럼 방대한 자료들을 제공하는 학자들은 진위 여부를 충분히 가려내지 못했다. 창롱과 할리데이에 의해 인용된 대약진 운동에 대한 주요 자료들은 명실상부하게 왜곡된 방식으로 개진됐다.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 당시 수백만을 아사시켰다는 덩샤오핑 정권의 추정치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농민들의 진술은 대약진 운동 시기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이 마오쩌둥한테 있다는 주장과 서로 상충된다.

 

미국 통계학자들은 사망률 통계와 기타 인구통계학적 수치들을 사용하여 대약진 운동 시기에 “대규모 사망자”가 존재했다는 가정을 증명하려고 했다. (“사상 최대 기근”이나 “대규모 기근들 중 하나”가 대약진 운동 시기에 일어났다는 가설이라던가) 그러나 상호 모순되는 진술들과 증언의 원출처에 대한 전반적 불확실성은 “대규모 사망자”가 존재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잃게끔 한다.

 

 

대약진 운동에 대해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진실

 

“학살의 책임이 마오한테 있다”는 발상은 마오쩌둥 시기에 중국 인민들이 이뤄낸 모든 성취들을 폄훼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하지만 대규모 아사설의 유력한 옹호론자로 손꼽히는 주디스 배니스터(Judith Banister)마저도 마오 시기의 성과물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1973-1975년간 중국에서의 평균 수명이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보다도 우위에 서게 된 경위를 다뤘다.[1]J. Banister, Chinas Changing Popul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7. 1981년에 그녀는 사망률 감소 측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초인적 성취자”로 묘사하는 논문을 집필했다.[2] J. BanisterㆍS. Preston, “Mortality in China” in 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ume 7, No. 1, 1981. 중국에서의 평균 수명은 1949년 35세에서 마오쩌둥 시기가 끝나는 1970년대에 65세로 증가했다.[3]M. Meissner, The Deng Xiaoping Era. An Inquiry into the Fate of Chinese Socialism, 1978-1994, Hill and Way, 1996.

 

마오쩌둥 시기에 대한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4]예를 들면, J. Becker, Hungry Ghosts. Chinas Secret Famine, Murray, 1996을 보라. 당대 농업 및 산업 정책들이 경제적 대참사를 불렀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경제학자 피터 놀란(Peter Nolan)처럼[5]J. EatwellㆍM. MilgateㆍP. Newman(eds), Problems of the Planned Economy, Macmillan Reference Books, 1990을 보라. 보다 중도적인 평론가들마저도 중국에서 삶의 질이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기까지 높아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삶의 질 향상만이 평균 수명 증가에 있어 유일무이한 요인은 아니다. 그러나 마오쩌둥 시기 평균 수명이 삶의 질 향상 없이도 증가할 수 있었다는 논지는 터무니없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 시기 통계 자료들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마오쩌둥 시기에 1인당 식량 생산량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6]ibid. 그런데 이러한 통계들과 동일 저자들이 인용한 평균 수명 자료들의 일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궈슈톈(Guo Shutian) 중국 농업부 정책법규사 전(前) 국장은 덩샤오핑 “개혁” 이전 농업의 전체적 실적에 대해 매우 상이한 시각을 제공한다. 물론 “자연재해와 인위적 실수들”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감소했다고 서술했던 바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1949년에서 1978년 사이 헥타르당 농경지 면적이 145.9% 증가했으며, 식량 총생산량은 169.6%로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마오쩌둥 당대에 중국의 1인당 식량 생산량이 204kg에서 328kg으로 증가했다는 주장에 미뤄볼 때 덩샤오핑 시기 통계의 신빙성은 의문으로 남는다.[7]Guo Shutian, “China’s Food Supply and Demand Situation and International Trade”, Can China Feed Itself? Chinese Scholars on Chinas Food Issue, Beijing Foreign Languages Press, 2004를 보라.

 

덩샤오핑 정권 시기에 나온 통계들마저도 1952년에서 1976년간 공업 생산량은 연당 11.2%씩 증가했다고 말한다. (소위 “문화대혁명 대참사” 시기에는 10%씩 증가.) 1952년에 공업 부문은 전체 GDP의 36%를 차지했다. 1975년경에 이르면 공업 부문은 75%를 점했으며, 농업은 전체 GDP의 28%였다. “재앙”이라던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경제 정책이 포스트마오 시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위한 발판을 상당 부분 마련한 것이 분명하다.[8]M. Meissner, The Deng Xiaoping Era. An Enquiry into the Fate of Chinese Socialism, 1978-1994, Hill and Wray, 1996.

 

대약진 운동이 초기 부침에서 벗어난 후 전체적인 경제적 성장세를 실질적으로 공고화시켰다고 할 만한 논거는 실존한다. 1950년대 말엽 중국이 쏘련에서 들여온 기술적 노하우와 대규모 기계들 없이도 내부적 자원들을 이용하여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1950년대 후반 중국과 쏘련은 분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쓰딸린 사후에 나타난 사상적 불화에 따른 것이다. 쓰딸린과 마오에게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무엇보다도 쓰딸린이 농민들을 불신했고, 중공업 발달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오는 흐루쇼프가 쓰딸린주의 격하를 사회주의 이념과 쏘련에서의 진보적 성취들을 깎아내리기 위한 구실로 이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중쏘 분열은 또한 쏘련식 사회주의를 동맹국들에게 강요하려는 흐루쇼프의 정책 기조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흐루쇼프는 저개발 국가들을 대할 때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정신이 아닌 위성국처럼 대우했다. 외세로부터 해방을 위해 처절히 투쟁했던 중국과 같은 나라에게 있어 이러한 처사는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마오는 설령 스스로가 원했을지라도 인민들한테 체면을 구길 수 없었다.

 

1960년에 양국 사이에 갈등은 정점으로 치솟았다. 쏘련은 중국의 산업화 계획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고 있었다. 쏘련 기술진은 1960년에 전부 중국을 떠났다. 장래에 지어질 터였던 각종 산업 단지들에 관한 청사진들도 함께 들고 갔다.

 

마오는 대약진 운동 초창기부터 보다 독자적인 경제 정책을 심화시키고자 했다. 대(對)쏘련 의존의 대안은 산업 발달과 연계하여 농업 발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오는 중국이 대중적 열성과 풍부한 노동력이라는 자원들을 활용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자원들의 활용은 자본 및 선진 기술의 결핍을 상쇄시킬 터였다.

 

난관과 정책 변동이 비록 나타났지만, 대약진 운동은 농업의 지속 가능한 발달에 있어 매우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수지와 관개 시설의 정비는 흉작이 끝나자마자 농업 생산량에 있어 부단한 성장세를 추동했으며, 그러한 조치들은 농촌으로 하여금 가뭄 위험에 대처할 역량을 구비하도록 도왔다. 제방 시설도 역시 발달했다. 계단식 논밭 경작은 농경지 면적 점증에 일조했다.[9]예를 들면, the report of the American Rural Small-Scale Industry Delegation, Chair Dwight Perkins, Rural Small-Scale Industry i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Continue reading

공업 발전은 “자력강생”의 슬로건하에서 치러졌다. 이는 중공업 발전과 연동된 중소규모 농촌 공업의 발달을 뜻했다. 토법고로를 비롯하여 많은 작업장들과 공장들이 농촌에 들어섰다. 농촌 공업이 지역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리라는 기대에서였다. 농촌 지역 공방들은 농사법 현대화를 위한 인민공사의 기획을 도왔다. 지역 공방들은 종자와 농기계, 기타 농기구들, (저수지 건설에 필요했던) 시멘트 자재들의 제공에 있어 극도의 효율성을 발휘했다.[10]ibid.

 

쏘련에서 주를 이룬 경직된 중앙 계획 경제에 비교해 볼 때 대약진 운동은 창발성이 고도화된 운동이었다. 시멘트와 비료는 보통 농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도시의 대규모 공장들에서 생산되기 마련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최신식 기술을 사용하는 기계들과 같이 가공품 생산에 필요한 물품들과 자본재를 획득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도시와 농촌을 이어줄 인프라는 갓 만들어진 공산품들을 수송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는 대규모 지출이 따르기 마련이다. 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의 산업 발전은 제반 조건상 어려움으로 인해 매우 느리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

 

대약진 운동 중에 형성된 지역 공업은 기술집약적 방식보다 노동집약적 방식을 사용했다. 지역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한, 농촌은 공정이 끝난 완성 제품들을 수송할 방대한 전국적 도로 및 철도망 개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혼돈과 마찰로 점철됐다던 대약진 운동 시기의 정책들은 초반부 난관들이 지난 뒤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지역 차원에서의 시멘트 생산은 저수지 착공 작업을 용인하게끔 했다. 대규모 경작은 이전보다 많은 종자들을 퍼뜨리도록 기여했다. 종자는 지역 공장들로부터 제공됐다. 대규모 농업 생산량은 많은 농업 노동력을 제조업 부문으로 전환시키며 국가 전반의 발전을 촉진시킬 것이었다.[11]ibid. 이러한 접근법은 종종 마오쩌둥의 경제적 무지(노동의 분배와 향촌 공업화로 얻는 이익 등)에 대한 예시로서 언급된다. 그러나 복지와 경제 발전 측면에서 마오쩌둥 시기 정책의 순기능들이 보여 주듯 대약진 운동은 중국에게 있어 옳은 선택이었다.

 

농업과 소규모 농촌 공업만이 사회주의 중국에서 유일하게 성장했던 부문은 아니었다. 중공업도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대규모 성장을 경험했다. 대약진 운동 당시 다칭(Taching) 유전의 발견과 같은 사건들은 중공업을 대폭 성장시켰다. 중국 국내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달됐다.[12]W. BurchettㆍR. Alley, China: the Quality of Life, Penguin, 1976을 보라. 1960년 이후 생겨난 유전 지대는 쏘련이나 서구의 기술보다 고유한 방식을 활용했다. (특히 노동자들은 석유 채굴을 돕기 위해 하향식 압력을 전개했으며, 유전 지대에서 일반적인 유정탑 건설에 의존하지 않았다.)

 

생산량 지표들에 대한 논거들은 대약진 운동이 중국 인민들의 인식 체계 변화에 있어 미미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주장이 거짓말이었음을 폭로하였다. 농민들이 소규모 제련소에서 철강을 생산하려 했다던 “토법고로”는 조악한 품질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토법고로는 농민들을 철강재 제련 작업 루틴에 따라 숙련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 마오쩌둥이 평소에 말한 “대약진”의 함의가 생산량의 양적 대약진이 아니라 인민의 의식과 지식 습득에 있어 대약진이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눈여겨볼 만하다. 과오는 벌어졌고,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몇몇 부문들이 기대치에 못 미쳤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많은 이들이 의기소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중국 경제의 성공은 모든 교훈들이 헛되이 낭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대약진 운동과 질적 증거

 

대약진 운동이 세계사 최악의 재앙이었다는 서방측 시각에 대한 대항 논리 확립은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의 기저는 무엇인가? “대규모 아사설”의 옹호론자들은 증언이나 기록물처럼 공신력 높은 질적 증거를 통해 자신들만의 가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질적 증거에는 정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중국학자 칼 리스킨(Carl Riskin)은 극심한 기근이 닥쳤어도 “기아와 식량난이 고대 중국에서 발생했던 기근들에 견줄 만큼(비록 동급은 아니더라도) 연쇄적인 대규모 기근으로 치닫지 않았다”고 여긴다. 리스킨은 현대 서방에서 출판된 증언들 대부분이 횡설수설에 그치며 우익 측 자료들에서 기인했던 만큼 시대사적 맥락을 간과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중국 정부의 억압 정책이 기근에 대한 정보 유출 차단을 불렀는지에 대해 검토하지만, “충분한 내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고 밝혔다.[13]C. Riskin, “Seven Questions About the Chinese Famine of 1959-61”, China Economic Review, vol. 9, no. 2, 1998.

 

로더릭 맥파커(Roderick MacFarquhar)와 재스퍼 벡커(Jasper Becker), 창롱(Jung Chang)처럼 자신들이 살펴본 증거 자료가 대기근설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존재한다. 대기근을 다룬 주요 저작들[14]R. MacFarquhar, 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3 vols, 1974, 1983, 1997.; J. Becker, 1996.; J. ChangㆍJ. Halliday, Mao: The Unknown Story, Johnathan Cape, 2005를 … Continue reading이 증거 자료를 인용함은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대기근설에 대한 참고 자료들이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맹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충분히 규명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들 저자들에 의해 제시된 자료들이 서방에서 왜 기정사실로 취급받는지는 미궁 속에 남는다. 중국에 관한 명저인 1965년작 ≪무지의 장막(A Curtain of Ignorance)≫에서 펠릭스 그린(Felix Greene)은 1960년 당시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배급이 매우 엄격했어도 대규모 아사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린은 위와 같은 현상을 읊은 여타 증인들의 증언도 인용한다. 기근은 실제로 몇몇 지역에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린(Greene)의 목격담은 기근이 재스퍼 벡커(Jasper Becker)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종말론적인 전국적 현상이 아니었다는 바를 보여 준다. 기근은 어디서나 나타났지만 저자 자신이 여행한 지역들에서 대규모 아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펠릭스 그린과 그린이 인용한 저자들의 자료에 무관심을 표하면서 벡커 같은 학자들에게는 관대한 것인가? 물론 마오쩌둥 체제를 향한 그린의 동정적 서술은 문제시될 공산이 있고, 정치적 이유에 따라 진상을 왜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벡커나 맥파커, 창롱도 그들만의 관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저자들이 강경 반공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 진중하게 의문을 품었기라도 했던가?

 

출처의 진위 여부 판별에 앞서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공산주의는 막대한 반작용이 뒤따르는 운동이다. 서방 국가들은 막대한 반공 선전전을 펼쳤다. 공산주의 정권은 많은 인자들로부터 자본과 토지를 몰수했다. 전체 지주 및 자산계급은 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곳에서 사회적 권력과 지위를 잃어버렸다. 놀랍지 않게도 이는 비통을 자아냈다. 이들 국가들에서 태어나서 교육받은 인자들은 공산주의를 폄하했으며 여전히 그렇다. 사실을 말하며 왜곡되고 반공주의 편향으로 점철된 증언을 제공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며 공산주의 당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편집증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국 정부는 한술 더 떠서 중국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전반에 대한 악선전에 관심을 보였다. 이에 대한 논의는 종종 “음모론”으로 치부됐으며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가에 대해 광범위하게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깎아내리기 위한 미국의 물밑 작업은 통계 기록에 있어 벌어진 문제였다. 미국 정보당국은 공산주의 체제에 관한 출판물을 펴낸 저자들과의 연계를 추구했다. 하찮은 선정성 도서들을 찍어내기 위해 저자들이 단순히 매수됐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차이나 쿼터리≫지는 1960년대에 지금도 여전히 중국 내 생활 수준이나 정책 성공 여부에 대한 증거로서 종종 인용되는 논문들을 출판했으며, 1962년에는 마오쩌둥이 경제 정책을 촉진하기 위해 중국 인구 1/3을 아사시키려 했다는 조셉 올솝(Joseph Alsop)의 논문을 펴냈다![15]J. Alsop, “On China’s Descending Spiral”, The China Quarterly, No. 11(July-September, 1962.) 해당 논문은 차후 나오게 되는 대약진 관련 도서들에서 “대규모 아사설”의 기초가 된다. (밑에서 이야기할 “중국에서의 기근(Famine in China)”이라는 제목의 논문 등.)

 

≪차이나 쿼터리≫지의 편집장은 중국 공산정부에 대해 중요한 저작들을 남긴 로더릭 맥파커(Roderic MacFarquhar)였다. 맥파커는 1949년에서 1965년을 다룬 ≪케임브리지 중국사(Cambridge History of China)≫ 제14권 편집을 맡았다. 그는 1956년 및 1957년 사건들과 대규모 아사설을 반영하여 대약진 운동에 지면을 배분한 ≪문화대혁명의 기원(The Origins of the Cultural Revolution)≫이라는 책을 펴냈다. 맥파커는 ≪마오의 비밀 연설(Maos Secret Speeches)≫을 공동으로 저술하기도 했다. ≪차이나 쿼터리≫지 지면에 나온 맥파커의 책은 문화자유회의(CCF, The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를 대표하는 인포메이션 불레틴사에 의해 출판되었다. ≪램파츠(Ramparts)≫지의 폭로에 따라 문화자유회의는 1967년 5월 13일 CIA한테서 자금 제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기자 회견을 내놓았다.[16]F. Saunders, Who Paid the Piper? The CIA and the Cultural Cold War, Granta, 1999.

 

맥파커는 질의를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CQ[≪차이나 쿼터리≫]지 초대 편집장이 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문화자유회의(CCF)의 사명이 자유로운 의사교환에 충실한 단체를 형성하도록 서구권 지식인들을 지원하는 줄로 알았다. 실질적인 지향점은 다양한 연계조직들을 통해 서방 지식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으려는 쏘련 당국의 시도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였다. … 그간 전해들은 바로는 CCF가 포드재단을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재단들로부터 지원받았고,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면 CIA와 연계했던 포드재단이 아직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지 2006년 1월 26일판에서 맥파커는 “편집장으로 있던 시기 ≪차이나 쿼터리≫지의 반박할 수 없는 진상들”에 대한 기고문을 남겼다.

 

그는 또한 “CIA의 비밀 지원금 일부가 (파필드재단으로부터 CQ의 모체인 문화자유재단을 통해 이뤄졌다) ≪차이나 쿼터리≫지로 흘러들어갔고 1960년대 후반 세간에 공개되기까지 알지 못했다”고도 썼다.

 

문제는 문화자유회의(CCF)와 주기적으로 연계를 가졌던 맥파커와 같은 학자들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타 잡지들도 CIA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빅터 마체티(Victor Marchetti)는 CIA가 아시아재단(Asia Foundation)을 통해 “반공주의적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중국 본토와 북베트남, 조선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아시아 전역에 퍼트리기 위해 8백만 달러를 지급했다고 밝혔다.[17]V. Marchetti, The CIA and the Cult of Intelligence, Johnathan Cape, 1974.

 

모든 사안은 물론 흑백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맥파커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잡지에 각기 다른 정치적 스펙트럼에 입각한 광의의 시각들도 용인했다고 진술했다. 맥파커는 올솝(Alsop) 스스로가 거부했을지라도 저자의 논문이 지면에 기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논문주제에 대해 부정적인 논평을 펴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CIA가 출판물들을 펴낸 맥파커와 같이 학자들의 대부분은 호의적으로 대우받는다. (그렇지 않다면 CIA가 자금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이 되는가?) 요점은 이들이 정반대 시각을 가진 학자들에게 부족한 서방 당국의 지원금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수년 동안 일군의 신진 학자들은 “대규모 아사설”에 대한 구술적 증거들과 증언들을 출판했다. 여기서 핵심적 관건은 출처의 진위 여부이다. 이들 학자들은 출처들이 신뢰할 만한지에 관한 충분한 증거들을 제시하지 않았다.

 

재스퍼 벡커(Jasper Becker)는 대약진 운동을 다룬 그의 저서 ≪굶주린 유령들≫에서 대기근과 식인 행위에 대한 방대한 증거들을 인용한다. 여기서 관련 자료는 1990년대에 와서야 공개됐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식인 행위에 대해 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들은 대약진 운동 당대나 그 이후에 실재했던 자료 어느 곳과도 명백히 상충된다. 벡커가 인용하는 대규모 아사와 식인 행위에 대한 설명 대부분은 600페이지 분량의 책인 ≪농촌에서의 30년(Thirty Years in the Countryside)≫으로부터 기인한다. 벡커는 해당 문서가 1989년 중국에서 밀수된 비밀 문건이라고 언급했고, ≪굶주린 유령들≫의 출처들이 해외로 망명한 지식인들에 의해 1989년 중국에서 빼돌려진 문건들을 포함한다고 썼다. 독자는 해외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이 1989년보다도 30년 전인 사건에 관한 공식 문건들을 빼낼 수 있었던 경로가 어떻게 되는지 알 권리가 있다.

 

또한 벡커는 ≪농촌에서의 30년≫과 여러 저작들이 신빙성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보다 총체적으로 논의했어야 했다. 2001년에 벡커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지 지면에서 ≪천안문 페이퍼(Tiananmen Papers)≫를 검토했다.[18]London Review of Books, Volume 23, no. 10, 24 May 2001. ≪천안문 페이퍼≫는 반체제 운동가에 의해 국외로 빼돌려진 당내 문건으로 추정되며, 천안문 학살 당시 지도부의 인식을 들춰낸다고 여겨졌다. 벡커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지 논평에서 페이퍼가 거짓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했다. ≪굶주린 유령들≫에서 벡커는 다른 학자들이 밀수한 공식 문건들에는 진위 여부가 결여되어 있지만, 손수 자료로 인용한 문건들이 신빙성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던 이유를 설명했어야 했다.

 

벡커는 1961년 중국 국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군사 평론지를 대약진 시기 인위적 대재앙의 증거로서 인용한다. 군사 평론지에 담긴 보고 서류들은 중국군 장병들의 사기에 영향을 준 대재앙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러한 평론지가 중국에서 출판된 것이 사실인가? 평론지는 1963년 미국 국무부에 의해 공개됐으며 1966년 ≪중국 홍군의 정치학(The Politics of the Chinese Red Army)≫이라는 모음집 형태로 후버재단에서 출판됐다. 영국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에 따르면[19]Daily Telegraph, 06/08/63. “어떻게 얻었는지 아무도 밝히지 않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미국 측 수중에 있었다”고 한다. 벡커와 내로라하라는 저자들은 본인들이 인용한 대약진 관련 평론들을 검증된 출처로 여기는 이유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벡커의 책은 대약진 운동 당시 기근을 다룬 구술사적 자료들도 인용한다. 1990년대 중반에 그는 중국 본토는 물론 홍콩과 서방에 거주하던 중국 이민자들과 인터뷰를 나눴다. 벡커는 중국 본토에서 “농민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할 기간은 극히 적었다”고 썼다. 지역 관리들은 인터뷰 시작 전 농민들을 “교육”시키며 문답 예행연습을 수행했다. 대약진 운동에 부정적인 덩샤오핑 노선과 부합하여 진상을 곡해하려는 절호의 기회가 관료들에게 있었음을 감안할 때 상기한 조건하에서 인터뷰 중 어느 것이 인용됐는지 사리 분별이 지극히 중요하다. 책 속 어느 곳에도 저자는 자료들의 신뢰 여부에 관해 충분한 설명을 내놓지 않는다.

 

마오에 대한 비판이 효력을 발휘할 동안 ≪굶주린 유령들≫은 수년 동안 베스트셀러였다. 하지만 2005년에 이르러서는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출판되어 서방에서 매우 중점적으로 보도됐다. 책에서 제기하는 의혹은 오히려 벡커의 저서보다도 매우 극단적이었다. 사망자 7천만 명 중 3천 8백만 명이 대약진 운동 당시에 사망했다고 한다. 책은 지지자들에 의해 쓰였으며 은밀한 경로로 서방에까지 전해졌다던 마오의 비공식 연설 자료집에 지나치리만큼 의존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자료집 모음을 통해 마오쩌둥의 광기와 인명 경시 풍조를 설명하려 한다. 자료집들은 1980년대에 처음으로 미국의 중국자료연구소(CCRM, the Center of Chinese Research Materials)에서 볼 수 있게 됐다. 그중 일부는 영어로 번역되어 ≪마오의 비밀 연설≫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됐다.[20]R. MacFarquharㆍT. CheekㆍE. Wu(eds), The Secret Speeches of Chairman Mao. From the Hundred Flowers to the Great Leap Forward, The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티모시 칙(Timothy Cheek)은 비공식 연설 자료집의 진위 여부를 검토하는 에세이를 썼다. 그는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 당도한 연설집의 정확한 기원은 문서화될 수 없다”고 썼다. 칙은 두 가지 이유로 문건들의 진위 여부를 가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중국자료연구소(CCRM)가 받은 문건들 일부가 중국 본토에서 다른 판본들로 출판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연구소에 의해 제공된 자료집 문서들이 최소한 다른 자료집 한 권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들 두 가지 사실이 문서들의 총체적 공신력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로서 되는 이유는 확실치 않다.

 

더욱이 눈여겨봐야 할 점은 대약진 운동을 다룬 지면에서 창롱과 할리데이가 비공식 자료집 문구들을 선택적으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창롱은 마오가 1958년에 “전국 각지를 배회하는 통제 불능인 농민들”에 대해 단속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 다음 문장에서 저자들은 “기근에서 탈피할 고전적 활로는 식량 수급이 어려운 장소를 떠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통제 불능의” 농민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던 “비밀” 연설 일부는 중국 국내 인구 이동 예방과 어떠한 관계가 없다. 저자들이 선택적으로 인용한 전체 구문을 읽을 때 자료를 왜곡한다는 것이 관찰된다. 마오가 말했던 바의 진의는 다음과 같다.

 

[허베이성] 한단(Handan)에서 [농민공사원 중 누군가는 ― 인용자] 안산(Anshan) 철강[공장]으로 향했고 철강재를 얻기까지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각지에 지나치게 산재해 있다. 농민공사(APC, Agricultural Producers’ Co-operative)에서 현으로, 현에서 지구(地區)별로, 지구에서 성(省)급으로 이어지는 상급 단위로의 보고와 함께 [우리는] 각 급 단위별로 균형을 맞춰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회주의 질서이다.[21]ibid.

 

마오쩌둥이 여기서 논한 주제는 지역 단위 소규모 생산력의 일정한 사용을 통한 철강 생산량 증산 운동에 대한 것이었다. 자격이 없는 인민공사 소속원이 철강 생산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 철강재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자생적 접근법이 틀렸다고 말하는 모양새다. 그는 생산 목표치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원자재를 얻기 위해 상급 단위에 청원하는 보다 체계적인 사회주의 계획 체계를 옹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오답지 않아 보이나 사실은 사실이다.) 그는 분명히 중국 인민들의 이동을 금지하는 전국적 여행 금지령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곡해된 마오쩌둥의 연설은 대약진 운동 말기에 나왔다. 창롱과 할리데이는 “우리는 마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이제 말할 수 있다”고 첫 문단에 썼다. 그러면서 전시에 사망자가 얼마만큼 받아들일 만한지에 대해 마오가 논했다던 구문 몇 가지를 예시로 든다. 그 다음 이어지는 문단은 “마오는 그저 전시 상황만 염두에 두지 않았다”로 시작되며, 저자들은 “중국 인구 절반이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모든 사업들에서 이렇게 일하십시오”라고 한 마오의 우창 회의 발언을 인용한다. 해당 발언은 창롱과 할리데이의 대약진 운동 관련 저서의 목차 제목으로도 쓰였다. 저자들이 해당 발언을 제시하는 방식은 마치 마오쩌둥이 공업 생산량 증산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국 인구 절반을 희생시켜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 연설 전문은 비록 약간의 수사를 사용하지만 대약진 운동에서 초과노동과 과도한 열성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마오는 어느 누구도 본인의 산업화로 인해 사망하기 바라지 않는다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마오는 대규모 산업과 농업을 일거에 발전시킨다는 발상을 논하고 있다. 저자들이 선택적으로 인용한 연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사업을 한꺼번에] 진행하면 중국 인구의 반수가 희생될 것이고, 절반이 아니라 해도 3분의 1이나 10%인 5천만 명이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을 것이다. 광시성 지방민들이 [1955년에 ― 인용자] 아사했을 때 첸만위안(陈漫远, Chen Manyuan)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가? 만에 하나 5천만 명의 사망자가 속출해도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내가 손수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최소한 책임을 져야 하겠다. 안후이성은 많은 작업들을 수행하길 원하고 그렇게 할 모든 권한이 있으나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2]ibid.

 

마오는 이후 나오는 문장들에서 “철강 30만 톤이 그렇게까지 필요한 양인가? 우리가 [그만큼] 생산할 역량이 되는가? 죽음을 부를 수 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창롱과 할리데이가 공동으로 쓴 도서의 출처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실린 그 책에 대한 니콜라스 D.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의 서평은 몇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크리스토프는 창롱과 할리데이가 인용했던 마오의 영어 전담교사 장한지(章含之, Zhang Hanzhi)에 대해 논한다. 그러나 장한지는 크리스토프(그녀의 친구들 중 한 명이다)에게 두 저자를 만났지만 인터뷰에 응답하지 않았고 별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23]New York Times, 23.10.05. 크리스토프는 객관성을 판별하기 위해 도서에 수록된 자료들의 온라인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덩샤오핑의 마오쩌둥 반대 운동

 

대규모 아사설의 옹호론자들은 1960년대에도 소수 존재했다. 그러나 펠릭스 그린이 ≪무지의 장막≫에서 지적했듯 반공주의자들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매년마다 대기근에 관한 의혹들을 만들어 냈다. 대약진 운동 기근설은 중국 신(新)지도부가 이를 지지하기 시작한 1980년대에 와서야 진중하게 다뤄졌다. 서방에서 벡커와 창롱 같은 학자들한테 공신력이 부여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중국 지도부는 1979년 대약진 운동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덩샤오핑은 공영 언론을 통해 마오쩌둥 지지자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24]M. Meissner, 1996. 이는 ‘초좌익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적 운동 형태를 취했다. 마이스너(Meissner)가 덩샤오핑 시대를 다룬 연구물에서 밝히듯,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소부르주아’ 사회사상적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학자 및 이론가 다수가 동원됐다.”[25]ibid.

 

대약진 운동에 대한 비방의 기저는 마오쩌둥 사후 권력투쟁과 1949-76년 시기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되돌리려는 암투와 상당 부분 궤를 같이한다. 1976년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华国锋, Hua Guafeng)은 “마오쩌둥의 모든 정책과 구호를 사수한다는” 기치하에 1인자가 됐다. 덩샤오핑에게 있어 1978년 권좌 찬탈과 지도부 장악을 위한 정치적 정당화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에 대한 덩샤오핑의 “공칠과삼” 노선은 과거사와 전임자들의 사상을 “실용적” 접근법과 구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덩샤오핑의 친시장적 정책 시행은 마오쩌둥이 실제로 80% 틀렸다고 내심 생각했음을 짐작케 한다.)

 

중국 공산당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대약진 운동이 초좌익적 정책으로 인해 초래된 대재앙이었다는 노선을 선전했다. 예젠잉(叶剑英, Ye Jian Ying) 원수는 1979년 연설에서 대약진 운동에서 좌익적 오류로 초래된 재난들에 관해 말했다.[26]ibid. 1981년 중국 공산당의 “당사(黨史)에 관한 결의안”은 “1959년에서 1961년 사이 국가와 인민에 있어 심각했던 손실들”을 언급했다. 학자들도 공격에 가세했다. 1981년에 류젠(Liu Zhen) 인민대학 인구학연구원 소장은 1954-78년 사망률 수치를 선택적으로 골랐다. 이러한 통계 수치들은 서방측의 관심이 보다 더 컸던 대중적 학술회의에서 공개됐다. 류젠이 제공했던 1968-61년 통계들은 1,650만여 명의 사망자가 해당 시기에 나타났음을 보여 줬다.[27]A. Coale, “Population Trends, Population Policy and Population Studies in China”, 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ume 7, No. 1, 1981. 같은 무렵 중국의 유명 경제학자 쑨예팡(孙冶方, Sun Yefang)은 대약진 운동의 오류들에 “유혈로써 엄청난 대가를 치뤘다”고 발표하며 대중적으로 이목을 끌었다.[28]J. Aird, “Population Studies and Population Policies in China”, 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ume 8, No. 2, 1982.

 

당내 암투와 더불어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혹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도입한다는 명목하에 마오의 긍정적 업적 전반을 뒤엎길 원했다. 대약진 운동에 대한 공격은 마오의 “좌익적” 정책들을 뒤집는 사상적 정당화에 일조했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초반 농촌 인민공사를 해체했다. 대약진 운동 이후 인민공사는 무상보건 및 무상교육과 같은 복지를 제공해 주기 시작했다. 인민공사의 해체는 이러한 복지 체계의 종말을 의미했다. 대약진 운동에 관한 논문에서 한둥핑(Han Dongping) 워렌 윌슨 칼리지 부교수는 고환염 증상으로 인해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었던 허난성 농민에 관한 뉴욕 주재 중국계 신문 ≪세계일보(世界日報)≫의 “해학적인” 기사를 평론했다. 그는 통증으로 인해 고통받은 나머지 고환 양쪽을 칼로 잘라냈으며 자살할 뻔했다.[29]H. Dongping, “The Great Leap Famine, the Cultural Revolution and Post-Mao Rural Reform: the Lessons of Rural Development in Contemporary China”, 2003. <http://chinastudygroup.net> 이러한 사건 사고야말로 시골에서 벌어진 덩샤오핑 “개혁”의 진정한 유산이다.

 

흔히들 덩샤오핑의 농촌 개혁이 농민 복지를 개선시켰다고 한다. 인민공사를 해체시키면서 5년 동안 농업 생산량이 늘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곧 1인당 식량 생산량 하락이 뒤따랐다.[30]M. Meissner, 1996. 서구권 평론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공사 해체를 유례없는 경제적 성취로 인식하곤 한다.

 

농촌 인민공사 해체는 농민들에게 고난의 실질적 토대를 만들어 냈다. 중국 지배층으로 하여금 수백만을 죽인 재앙으로서 대약진 운동을 언급하도록 장려하면서, 덩샤오핑은 합법의 탈을 쓴 채 농촌에서 퇴보적 조치들을 만들어 낸 정치적 기조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덩샤오핑, 기근 사망자 수로 마오쩌둥을 비난하다

 

덩샤오핑은 스스로의 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해 1959-61년간 대규모 아사자 수치뿐만 아니라 정책 오류의 결과도 주로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야 했다. 대약진 운동 이후 기근에 대한 중국 당국의 공식 기조는 “천재가 7할이면 인재는 3할”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덩샤오핑 체제에 의해 뒤집혀졌다. 1980년대에 중국 공산당은 “천재가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행위가 수백만 농민들의 죽음을 초래했다면 이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이 대약진 운동 시기에 나타난 문제 대부분을 마오쩌둥에게 돌리지 않았다는 반증은 실재한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한참이 지난 뒤 한둥핑 교수는 1959-61년 기근 당시 최악의 상황이 연출됐던 산둥성과 허난성을 탐방했다.

 

한둥핑은 인터뷰에 응답한 농부들의 대부분이 2차적 해석보다 대약진 운동 당시 손수 겪은 고통이 마오쩌둥에게 주로 책임이 있지 않다고 여기는 1차적 해석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31]H. Dongping, 2003. 물론 비극적인 실수들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함이 아니다. 한둥핑은 농촌 인민공사의 공동식사에 대한 소개문을 작성했다. 공동식사는 농민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던 정책이었다. 게다가 많은 농민들은 1958년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풍족하게 먹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문제는 전에 없던 풍족함이 식량 소비와 추수에 있어 부주의를 낳았다는 점에 있다. 인민들은 정부가 식량 공급을 보장할 여지가 있었다고 여겼으며 식량 안전에 있어 스스로한테 책임이 없다고 보기 시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50년대 말 중국의 빈곤을 고려하면 이는 심각한 문제들로 이끈 오류였으며, 공산당 지도부는 재빠르게 대처했어야 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자연재해 3년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기근 여파가 심각했던 지역들에서 인민공사 소속원 간 연대는 수확이 끝나기도 전에 개개인들이 곡물 수취를 시도함으로써 풍비박산이 났다. 이러한 행동은 좋지 않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러나 농민들이 한둥핑에게 공동식사 조직화에서 발생한 오류들이 손수 겪은 기근의 주요 원인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둥핑 본인은 마오쩌둥의 “경솔한” 정책 결과를 놓고 격렬하게 성토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도 썼다. “산둥성과 허난성에서 수많은 노동자 농민들과 인터뷰를 나눴으며, 마오쩌둥이 나쁘다고 말한 이들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안후이성 향촌 지대에서 자라 연구를 지속하던 한 학자와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마오쩌둥이 나쁘다거나 덩[샤오핑]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농부들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습니다.”[32]ibid.

 

마오쩌둥에 대한 한둥핑의 동정적 서술이 농민들로부터 전해 들은 증언의 해석을 조금이라도 윤색시킬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한둥핑의 조부모들이 대약진 운동 당시 아사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야 하며, 인터뷰한 농민들보다도 마오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때가 많다.

 

 

대규모 아사설에 대한 인구통계학적 증거

 

대약진 운동을 회고할 때 마오쩌둥에 대한 농민들의 상대적 동정심은 수백만 명이 아사했다는 인구통계학적 증거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서구권 학자들은 증거의 타당성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이는 듯했다. 칼 리스킨(Carl Riskin)처럼 의문을 지닌 학자들조차도 항상 모든 “가용할 수 있는 증거들”은 대규모 기근이 당대에 출현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며 끝맺는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기근이 나타났다는 말은 명백히 사실이다. 그런데 핵심은 3천만 명을 죽인 기근이 실존했느냐는 것이다. 실로 유례없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기근 아사에 직면한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지역민들” 류의 신문 헤드라인을 읽곤 해도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실제로 사망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기근(1974-75년)은 해당 국가 역사에서 매우 비극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비공식 자료들이 10만 명으로 집계했던 것과 달리 공식 사망자 수치는 (7천 6백만 명 중) 3만 명이었다.[33]R. Sobhan, “Politics of Food and Famine in Bangladesh”, E. Ahmad(ed), Bangladesh Politics, Centre of Social Studies, Dacca University, 1979. 이를 전체 인구 6억 6천만-6억 7천만 명 중 3천만 명이 죽었다던 대약진 운동 사망자 수치와 비교해 보자. 대약진 운동 당시 사망자 수치는 방글라데시 기근 사망자 추정치보다 비율적으로 약 35배 정도나 높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이 대규모 아사설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는 소리는 왜곡에 다름 아니다. 진실은 수백만 명이라던 대약진 운동 사망자에 대한 모든 추정치들이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 사망률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들 도표에는 지극히 불명확한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1940-82년간 사망자 수치가 중국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통계학적 정보들처럼 1980년 초반까지 중국 당국에 의해 극비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수집 경위에 대한 불확실성은 구체적인 증거로서 이들 통계들의 지위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1950년대-60년대 사망자 수치는 1982년에 와서야 세간에 공개됐다([표 1]을 보라).

 

학자들은 1957년 사망률이 1,000명당 10.8명에서 1960년 25.4명으로 치솟았다가 1961년 14.2명, 1962년 10명으로 감소했다는 통계 수치를 내놓았다. 이들 통계는 1958-61년 대기근으로 사망자 1,500만여 명 이상이 나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공개됐다.[34]J. Banister, Chinas Changing Popul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7.

 

[표 1] 1955-1964년 중국의 공식 사망률

연도

사망률(1,000명당)

1955

12.3‰

1956

11.4‰

1957

10.8‰

1958

12.0‰

1959

14.6‰

1960

25.4‰

1961

14.2‰

1962

10.0‰

1963

10.0‰

1964

11.5‰

 

 

미국 인구통계학자들과 중국 공식 통계 조사 결과들

 

기근 아사자 수치에 대한 중국 측 자료들은 일군의 미국 통계학자들에 의해 연구용으로 쓰였다. 이들이 바로 앤슬리 코에일(Ansley Coale)과 존 에어드(John Aird), 주디스 배니스터(Judith Banister)였다. 이들은 서방에서 “대규모 아사설”을 대중화시킨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앤슬리 코에일은 미국 통계학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1980년대(對)중국 관련 연구물들을 출판하던 때에 록펠러재단에게서 후원받는 프린스턴 대학교 통계연구소(Office of Population Research)에 의해 임용됐다. 존 에어드는 미국 통계국(U.S. Bureau Of The Census)의 중국 전문가였다. 1990년에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 홍보에 앞장섰던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에서 출판된 책 한 권을 썼다. 도서명은 ≪무고한 인명의 대량 학살(Slaughter of the Innocents)≫이었으며 중국의 1가구 1자녀 산아제한 정책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었다. 주디스 배니스터 역시 마찬가지로 미 통계국에서 일했다. 그녀는 대약진 사망자 관련 논의가 들어간 책을 쓰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35]ibid. 존 에어드는 배니스터의 책 초고를 읽고 피드백을 제공했다.

 

주디스 배니스터는 대약진 운동 당시 3,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지표를 만들었다. 이는 중국 당국의 공식 통계보다 2배나 되는 숫자다. 그녀는 대약진 운동 전체 사망자 수 누락을 근거로 중국 공식 통계가 사망률을 낮게 잡는다고 간주한다.

 

배니스터는 대약진 시기에 보고되지 않은 전체 사망자 수를 1953년과 1964년 통계 조사 사이에 태어난 전체 신생아 수치와 합산한다. 배니스터는 1982년에 시행된 출산율 통계 조사로부터 추출된 자료들을 이용했다(조사 참가자들은 1940년에서 1981년 사이 아이를 얼마나 출산했는지에 대한 질의응답을 요청받았다). 1953년과 1964년 인구가 알려지고 전체 신생아 수가 공개된 이상 대약진 시기 사망자 추정치는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는 11년간 전체 사망자 수를 계산하기 위해 이 정보를 이용했고, 공식 사망률이 보여 주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치가 나왔다.

 

배니스터는 대약진 운동 당시 얼마나 많은 사망자가 속출했는지 추산하기 위해 중국 측 공식 사망률 통계들로 재차 관심을 돌린다. 그녀는 사망률 통계들이 비록 절대항에서 현저히 낮게 나왔지만 당대 중국의 실질적인 사망자 추이 변동을 반영한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1960년에 공식 통계상 사망률은 1000명당 25명이었으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배니스터는 1960년에 1000명당 45명이 사망했다고 결론내기 위해 1953-1964년 미보고 사망자 수치와 공식 통계를 합산한다. 기근이 없던 때조차도 사망자 추정치는 “미보고” 통계와의 합산으로 불어나기 일쑤였다. 배니스터는 1957년 공식 사망자 지표를 1000명당 10.8명에서 18명으로 늘리며, 수정된 호황기 및 기근 시기 사망률을 비교한다. 배니스터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대약진 운동 사망자가 3천만 명 이상이었다는 결론을 산출해 낼 수 있었다.[36]ibid.

 

 

중국 공식 통계 지표에 대한 의문점들

 

다양한 층위의 인구 지표들은 기근 발생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된다. 마오쩌둥이 비판받아야 한다는 투의 통계들도 마찬가지로 인용된다. 여기에는 대약진 운동 시기에 증가한 각 성(省) 사망자 추정치와[37]P. Xizhe, “Demographic Consequences of the Great Leap Forward in China’s Provinces”, 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ume 13, no. 4, 1987. 식량 생산량의 대규모 감소세를 보여 주는 지표들,[38]ibid. 천재가 기근의 원인이 아니라는 바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수치들이 포함된다.[39]ibid. 이들 지표들은 덩샤오핑 “개혁” 때인 1980년대 초반에 공개되었다.

 

그런데, 모든 통계 지표가 얼마만큼의 신뢰성을 지니는가? 공식 통계 지표는 주지하듯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에 대해 격렬한 비판이 전개되던 1980년 초반에 공개됐다. 덩샤오핑 하의 중국은 정보를 엄격하게 통제하려는 독재 국가였다. 매체에 의한 사회 문제 공론화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정부가 통계 제작에도 간섭하기 마련이라고 판단함이 온당할 것이다. 존 에어드가 1982년에 썼듯,

 

전국적 인구 통계 자료가 매우 희소한 주요인은 당국의 검열에 있다. 단 하나의 국가 인구 지표도 중국 국무원의 사전 허가 없이 공개될 수 없다. 국가통계국(SSB) 성원들조차도 검증이 이뤄지기까지 통계들을 이용하지 못한다.[40]J. Aird, 1982.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국가통계국에 의해 사망률 지표들이 제출됐던 시점에 관해서다. 미국과 중국 본토 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대약진 운동 당시 전체 사망자 수 지표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전부 사망률 통계들에 기초했다.

 

만일 대약진 운동 당시 사망률 관련 정보들이 어떻게 수집됐는지 상세히 알았더라면 보다 분명하게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들이 가용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공식 지표들이 사실이라는 중국 당국의 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에어드와 배니스터의 주장은 사망자 지표들이 추정치고, 문서화된 실제적 수치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에어드는 “[대약진 운동] 위기 국면 당시 [출산 및 사망률] 인구 동향은 추정치에 해당되나 출처가 불명하다”고 말한다.[41]ibid.

 

배니스터는 1954년에 중국이 인구 조사를 개시하려 했지만 미완에 그쳤다고 쓰고 있다. 또한 “사망자 등록 체계가 1955년에서 1957년을 통틀어 모든 사망률 추정치들의 토대로 쓰였다고 해도 사망률 통계 지표들은 등록 체계가 확립된 도심부나 인근 개발지에 한해 산출된 것이다”라고도 말한다.[42]J. Banister, 1987.

 

배니스터는 대약진 운동 전후로 상황이 현저하게 개선되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적 제도는 1960년대 후반과 이전에 국가 및 성(省)급 통계 조사관들이 인구 전체나 그 일부분만 추산해야 했을 정도로 불완전했고 불규칙적이었다. 정기적인 호적 조사 체계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시행되려는 참이었고, 당초에는 전체 인구를 포괄하지 않았다. 전국적 인구 조사를 제외한 1950년대 전체 인구는 추정치로 채워진 지역 보고서들에 의거했을지도 모른다.[43]ibid.

 

그녀는 또한 “1973-75년 이전에 나온 조사망률(粗死亡率)과 영아사망률, 평균 수명, 사망 원인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자료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무익하며, 실질사망률을 낮게 추산한다”고 주장한다.[44]ibid.

 

독자는 에어드와 코에일, 배니스터가 공식 사망률 지표에 근거한 통계 수치를 의기양양하게 강조하는 배경을 탐색하기 위해 이들의 논문이나 책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저자들은 공식 지표들이 어떻게 수집됐는지 알지 못하며, 특히 배니스터 같은 경우 불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대약진 운동 당시 아동의 사망자 추정치

 

일부 인구통계학자들은 “대규모 사망설”을 증명하고자 영아사망률 추산에 힘썼다. 하지만 이들 통계학자들의 자료들은 사실 관계를 정립시키기는커녕 혼란만 초래하기 일쑤다.

 

이러한 계산법은 1984년에 쓰인 논문 “중국에서의 대기근”에서 관찰된다.[45]B. AshtonㆍK. HilㆍA. PiazzaㆍR. Zeitz, “Famine in China 1958-1961”, 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ume 10, no. 4, 1984를 보라. 논문은 에어드와 코에일, 배니스터의 이전 연구를 평가하며, 대약진 운동 당시 대규모 사망자가 전국적으로 속출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저자들은 동시대 영아 및 성인 사망자 수치도 따로 계산하고자 했다. 논문의 주요 주장은 대약진 운동에 관하여 글을 남긴 학자들에게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

 

“중국에서의 대기근”의 저자들은 1982년 출산율 추이 조사를 통해 영아 사망자들을 추산한다. 저자들은 대약진 운동 시기 매년당 신생아 숫자를 계산하고자 해당 조사 결과를 이용한다. 신생아 수에 대한 정보가 어렴풋이 잡히면 1958년에서 1962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생존자들이 1964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집계됐는가에 대한 계산이 용이해진다. 이는 기근이 일어나지 않았다던 시기에 태어난 신생아들의 생존율과도 비교할 수 있다.

 

저자들은 1964년 인구 조사 이전 시기인 기근에서 사망한 신생아 숫자 추산을 위해 생명표를 이용하며, 만 10세 미만 사망자 수치로 이내 변환시킨다. 최종적인 통계 수치는 생명표와 시기별 사망률 단계표를 통해 결론에 이른다.

 

글쓴이들은 1958-9년에 기근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들은 10살 미만 초과 사망자가 기존 사망률의 2배인 ​426만 8천여 명이었다고 추산한다([표 2]를 보라). 그러나 같은 시기 10살 이상 초과 사망자는 21만 6천여 명에 그쳤다고 한다. (6억 명이 넘는 인구를 지닌 나라에서 이러한 통계 수치는 오차가 아니고서야 설명될 수 없다.) 이른바 효율적 배급 체계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이 굶어죽도록 방치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근 도중에는 전통적으로 아동 및 노인들이 주로 피해를 입기 일쑤다. 그런데, 오로지 아동 연령대에 속한 인원들만이 당대에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1960-61년에 이르면 10살 미만 초과 사망자 추산치는 55만 3천명으로 감소되며 10살 이상은 900만 명으로 급격히 치솟는다. 보다 더 기이한 것은 1961-62년 사이 아동 초과 사망자 추산치가 442만 4천명으로 집계됐는데 10살 이상 사망자 수치는 전혀 집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표 2] 1958-1962년 기근으로 인한 초과 사망자 추정치

연도

10세 미만

사망자 추정치(천 명)

10세 이상

사망자 추정치(천 명)

1958-59

4,268

216

1959-60

2,291

7,991

1960-1961

553

9,096

1961-1962

4,424

0

 

여기에는 역설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중국 당국에 의해 제공된 사망률 수치에 따르면 1960년은 가장 최악의 해였다. 사망률은 기근 이전 1000명당 10.8명에서 아사자 최대치 연도로 꼽히는 1960년에 25.4명으로 증가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우리는 1959-60년과 1960-61년을 영아 사망자 수치에 있어 최악의 해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들에 따르면, 이들 연도에 10살 이상 초과 사망자의 98.75%가 발생했던 반면에, 아동 초과 사망자의 경우에는 24.6%밖에 되지 않았다!

 

1958-59년, 어떤 이유에서 영아사망률이 그렇게 높을 수가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과장됐어도 곡물 생산량 수치가 1958년이 풍작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중국 작물의 대부분은 가을에 수확되기 때문에,[46]C. Riskin, 1998을 보라. 1958년 말이나 심지어 1959년 초창기 3달에 아사자가 속출한 이유가 무엇인지 근거가 희박하다. 상술했듯 한둥핑 워렌 윌슨 칼리지 정치학부 부교수는 1959-1961년 당시 기근 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산둥성과 허난성 농민들과 질의응답을 나눴다. 농민들은 1958년 풍작 이후처럼 풍족하게 식사한 때가 없었다고 진술했다.[47]H. Dongping, 2003. 공식 사망률 지표는 1957년 1000명당 10.8명에서 1958년 1000명당 12명으로 소폭 증가했다. 인구통계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지표에서 1958-59년 영아사망률이 최악을 달린 이유는 무엇인가? “대기근” 시기에 상황이 개선된 이유는 왜인가?

 

이는 “중국에서의 대기근” 저자들에 따르면 노인을 제외한 노동 가능 연령대와 청소년, 아동한테 배급제가 도입됐기 때문이었다. 노동 인구 중 젊은 연령대는 육체노동에 참여했기에 장년층보다 많은 배급량을 받았다는 증거들 일부는 명백하게 존재한다.[48]ibid.

 

그러나 기근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고 저자들이 말하던 1961-2년에 10살 미만 사망자 수는 442만 4천 명으로 치솟고, 10살 이상은 0명으로 줄어든다. 당시 아동들을 아사시키도록 방치할 만큼 배급제가 느슨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같은 시기 장년층에서 사망자가 전혀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기근 당시 중국의 일반적인 가정에서 노령 인구가 아니라 아이들을 죽도록 방치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들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저자들은 1953년에서 1964년 인구 조사들 사이 노년층 인구 감소를 나타내는 지표들로 논점을 뒷받침하려 한다. 건실한 발전도상에 있던 나라에서 노령 인구는 줄기보다 늘어났어야 했다는 요지다. 저자들은 노인들이 대약진 운동 당시 배급을 받지 못했기에 노령층 인구 지표가 하락세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들이 인용한 도표는 성년 이상 노동 인구에 지급되는 배급량 급락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사망자 수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1953년과 1964년 인구 조사 사이에 45세 이상 남성과 65세 이상 여성 비율이 급락했다고 말한다. 어떤 유형의 배급제가 그와 같은 차이를 불렀는가? 45-65세 여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한 배급제가 같은 연령대의 남성들한테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일까. 65세 이상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지표조차도 마찬가지다. 75-79세 연령대의 여성들은 지표상으로 0.51%로 성장했다. 75-79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수치는 65세 이하 연령층의 성장률과 비교하면 괜찮은 편이다. 예를 들어 20-24세 여성들은 0.57%, 45-49세 여성들은 0.55% 증가했다. 여성 관련 지표들은 노령층 대상으로 차등을 둔 배급제와 일치된 패턴을 보여주지 않는다. 허위로 쓰인 통계들은 배급제 관련 가설들을 입증하기엔 혼동을 주는 통계들에 그럴싸한 부연을 붙인다.

 

[표 3] 1953-1964년 연령별 및 성별 인구 성장률

연령(세)

남성(%)

여성(%)

10-14

3.83

4.58

15-19

1.30

1.61

20-24

0.66

0.57

25-29

1.42

1.13

30-34

2.07

1.47

35-39

1.13

0.91

40-44

0.90

1.02

45-49

0.48

0.55

50-54

0.47

0.83

55-59

0.16

1.27

60-64

0.00

0.96

65-69

-0.64

0.11

70-74

-1.02

-0.37

75-79

-0.08

0.51

80+

-0.54

-0.22

 

논문은 대규모 아사자 숫자에 대한 의혹들을 규명하지 않는다. 물론 저자들이 손수 제시한 자료에서 몇 가지 확증을 집어낼 수 있었다는 바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82년 출산율 조사와 1953년-1964년간 수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표들 사이에는 합당한 접점이 존재한다. 또한 기근 도중에 태어난 신생아들의 1964년과 1982년 인구 조사 당시 생존율 지표들 사이에도 합당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만약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수집된 듯 보이는 증거들이 상관관계를 지닌다면 논문에서 제기된 아사설은 일정 부분 사실이라는 증거가 되고, 그럴 경우 교착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한편에는 이 증거들 간에 상관관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근으로 간주되는 시기에 영아사망률과 성인 연령대 사망률 사이의 커다란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쩌둥 사후 중국 정부에 의해 공개된 전체 인구 통계들의 중요성을 되새겨야 한다. 출산율 지표들과 출생률 조사 지표들 사이에 있는 상관관계는 불분명한 사실들을 바로잡는 데에 있어 결정적이지 않다. 중국 각지에서 집계된 인구 지표들과 통계학자들에 의해 검토된 지표들의 상관관계야말로 결정적인 요소다. 배니스터는 개별적으로 시행된 것처럼 보이는 중국 측 인구 조사 결과들의 “상호 의존성”을 논한다. 배니스터는 1982년 인구 조사와 생정통계(生靜統計)에서 나온 수치들이 개별적으로 추출됐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해당 지표들에는 매우 커다란 상관관계가 있다.[49]J. Banister, 1987. 출생률 조사 통계들과 출산 지표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의존성”의 가능성은 배제되어선 안 될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에서의 대기근” 저자들이 대약진 운동 중에 태어난 태아들의 생존추정치만 제시했다는 사실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같은 해에 출판된 앤슬리 코에일의 논문은[50]A. Coale, Rapid Population Change in China 1952-1982, Committee on Population and Demography Report, no. 27, 1984. 학술적으로 의의가 있지만, 1958-59년에 태어나 1982년 인구 조사에 집계된 생존자 수치를 “중국에서의 대기근”에서 나온 지표들보다 지나치게 낮게 잡는다. 더군다나 코에일의 지표는 1982년 인구 조사에 집계된 1961-1962년에 태어난 아이들의 생존율 측면에서 “중국에서의 대기근”에 제시된 통계들과는 달리 별다른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사망률 통계와 생존자 수치에 대한 이의 제기는 대약진 운동 시기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상당 부분 약화시킨다. 문헌에 대한 검토 작업은 지나치게 비실증적인 대규모 아사설이 전반적으로 어떠한 확증조차 결여된 채 절대적 진리로 변모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중국 당국의 인구 조사 결과에 대한 의문들

 

대규모 아사설의 마지막 근거는 인구 조사 원본들에 있다. 이는 1959년-61년간 신생아들이 얼마나 태어났고, 기근이 발생하지 않은 시기에 태어난 영아들의 생존율 지표와 비교해 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대약진 운동 이래 치러진 다양한 인구 조사 원본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삼년 대기근 연간에 태어난 영아들의 생존율은 다른 기간에 비해 많은 하락세를 보였다.

 

설사, 그와 같은 하락세가 나타났다고 해도 반드시 대규모 사망자 수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덩샤오핑 정권에 의해 공개된 출생률 지표들은 대약진 운동 당시 출산율의 대규모 감소세를 보여 준다. 수백만 명이 아사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출산율에 있어 대규모 감소세가 나타났다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출산율의 대규모 감소세가 나타났다면 그러한 이유에 대한 설명들이 들어갔어야 했다. 분명히 아사는 출산율 감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인민들은 먹여야 할 인원이 늘어나리라는 우려로 인해 식량 사정이 개선될 때까지 출산을 미뤘다. 인민들이 만일 그와 같은 우려를 품고 있었다면 출산율의 감소는 영아사망률에 정비례하는 영양실조의 증가로 표현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오쩌둥 시기에 “세계사상 최악의 기근”이 나타났다는 주장을 결코 입증할 수 없다. 1944-45년 네덜란드 기근은 50%의 출산율 감소를 낳았다. 1974-75년 방글라데시 기근도 50%에 가까운 출생률 감소를 불렀다.[51]J. Bongaarts, “Does Malnutrition Affect Fecundity?”, Science, 9 May, 1980. 이러한 수치는 덩샤오핑 시기에 나온 대약진 운동에서의 출생률 감소를 다룬 통계들과 유사하다. 비록 방글라데시와 네덜란드에서의 기근은 매우 비극적이었지만, 사망률 수치가 대약진 운동만큼 치솟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수천만 명이 아니라 수만 명에 그쳤다.

 

그러나 우리는 연령별 인구분포도가 사실이라고 섣불리 속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53년과 1964년 인구 조사 속 연령별 인구분포도로부터 정보를 모두 추출하기에는 전반적인 문제가 있다. 이들 지표들은 수백만 명을 아사시켰다고 마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온갖 통계들이 출현한 1980년대 초반에서야 공개됐을 뿐이다.[52]B. Ashton(et al), 1984. 추후에 실시된 인구 조사들도 (1982년과 1990년 인구 조사 등) 영아생존율의 하락세를 지적하나, 판단에 있어서는 신중해져야 한다. 배니스터는 통계에서 통계마다 연령별로 관찰되는 매우 그럴싸한 생존 형태와 1953년과 1964년, 1982년 인구 조사에 걸쳐있는 연령-성별 체계의 일관성을 논한다. 그녀는 “중국 측 통계 조사들 거개가 흠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썼다. “혹자는 1953년과 1964년 통계 조사들이 덜 이상적인 상황에서 실시됐던 만큼 많은 인원을 누락시켰다고 바라볼 것이다. 1953년 인구 조사는 국가통계국이 창설되자마자 6달 만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현대적 인구 조사였다. … 1964년 인구 조사는 극비로 시행됐으며, … 일각에서 거부감을 느낄 만한 인민들의 계급적 배경에 대한 문항을 포함시켰다.”[53]J. Banister, An Analysis of Recent Data on the Population of China, Indian Institute of Asian Studies, 1983.

 

허핑티(何炳棣, Ping-ti Ho)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교수는 1953년 인구 조사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실질 인구가 반영되지 않은 추정치들에 기초하며, “사전적 의미로서의 인구 조사가 아니었다”고 썼다.[54]Ping-ti Ho, Studies on the Population of China 1368-1953, Harvard East Asian Studies 4, University of British Colombia, 1959.인구 조사들마다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존 에어드는 1953년 중국 인구 조사 연령-성별 분포도와 1960년대 비공식 학술 자료들을 제공받았다. 그는 지표들에 공신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5-24세 연령대에 속한 인원 수치가 예상보다 적고 75세 이상이 지나치게 높다고 말했다. 에어드는 학술적 논쟁을 위해 이들 지표들에 연령-성별 분포도를 대입하자고 제안했다.[55]J. Aird, “Population Growth and Distribution in Mainland China”, Joint Committee of the U.S. Congress. An Economic Profile of Mainland China, Praeger, 1968. 1.

 

상술한 의문점들에 미뤄볼 때 안정적인 연령-성별 분포도가 지속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자료들 사이 일정한 “상호 의존성”에 따라 좌우되곤 한다는 주장은 명확해진다.

 

증거들을 낱낱이 조사하다 보면 정치적으로 논란거리인 역사 문제는 “학술 연구”나 “공식 통계들”로부터 그 해답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정치는 언제나 통계 제시 방식에 있어 영향을 끼치며 역사 서술은 승자에 의해 쓰이기 마련이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정책을 지지했던 이들은 분명히 승자가 아니었다.

 

 

결론

 

현 시기 대약진 운동에 대한 접근 방식은 부당하게도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 학자들은 대약진 운동의 공과 사이에 놓여 있는 관계를 포착하지 못하며, 중대한 문제들이 1959-61년에 나타났다는 점에만 집착할 뿐이다. 그들은 당대에 완수된 사업이 인민 복리 증진 측면에서 중국 사회주의의 지속 가능한 성과에 초석을 닦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또한 대약진 운동 시기에 발생한 아사자 대부분이 정책 문제가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자료들을 진중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대약진 운동에서 나타난 아사자 수치는 마오쩌둥 통치기 전반에 걸쳐 추가적인 사망자 속출을 사전에 막아낸 중국 인민들의 성취와 대조를 이룬다. 평균 수명의 증가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렸다.

 

쏘련과 외교적 균열이 생기자마자 채택된 자력자강 정책과 대약진 운동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중국은 농업과 공업을 발달시키기에는 쏘련이 원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가난했다. 이게 상황이 더 잘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논거는 아니다. 어쩌면 보다 나은 생산 계획과 더불어, 지나친 낙관주의를 지양하고, 더욱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다소간의 사망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 역경 속에서 했었던 바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수들로부터 배우는 자세도 물론 중요하다. 우리는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 도중에 만들어 낸 과오를 두고 자기비판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비판은 엉뚱한 사망자 수치들을 고집하는 일군의 학자들에게 면죄부로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진중한 논쟁이 언젠가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만일 인도의 평균 수명이 1949년 이후 중국처럼 큰 증가세를 보였다면 수백만 명의 죽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이를 인정한다. 이런 말들은 어쩌면, 네루와 그의 후계자들이 비(非)마오주의 정책을 채택해 “수백만 명의 죽음을 불렀”으니 “히틀러보다 더 나쁘다”고 규탄해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쩌면, 독립 이후 인도의 역사를 평가하는 유치하고 우둔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난 25년간 마오쩌둥에게 씌어져 왔던 것과 같은 어리석은 비난처럼.

 

Monthly Review,

2006년 9월 21일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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