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사회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

 

천연옥 | 부산지회장

 

* 이 글은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이 발행하는 ≪현장과 광장≫ 제3호(2020년 11월)에 실린 글입니다.

 

 

 

1. 글을 시작하며

 

노동자계급의 해방 사상으로서 맑스주의 여성 해방론은 맑스의 ≪공산당 선언≫, 엥엘스의 ≪가족, 사유 재산 및 국가의 기원≫,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 등의 저서를 통해 확립되었다. 이후 이 저서들에 서술된 입장들은 클라라 쩨트킨,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와 같은 여성 혁명가들에 의해서 여성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에 적용되었고, 사회주의 여성 운동의 지침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성립된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이전의 인류가 걸어가 보지 못한 새로운 역사의 첫발을 떼게 되는데,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후 쏘비에트 사회는 70년간 존재했고, 이를 20세기 사회주의라고 명명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 수립된 쏘련이라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떠했으며,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쏘련 해체 이후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또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쏘련에서 맑스주의 여성 해방론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어떤 굴곡을 겪으며 전진해 나갔는지, 또 수정주의의 발생과 함께 어떻게 정체되었는지, 그리고 쏘련 해체라는 반혁명으로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

 

미국의 여성 운동가 헬렌 버제스가 쓴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우리의 삶, 우리의 꿈≫은 작가가 직접 3개월 동안 두 차례 쏘비에트 연방을 여행하면서 각기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진 거의 100명에 달하는 쏘비에트 여성을 만나 그들의 일과 생활을 관찰하고 그들과 인터뷰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모쓰끄바에서 1988년에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1989년에 번역되었다. 쏘련 해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쏘련의 모습을, 70년 동안 걸어온 사회주의를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제1장 또 하나의 삶, 또 하나의 문화

레닌이 뻬뜨로그라드(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바뀌었으나 1991년 9월 이후 다시 예전의 이름인 쌍뜨뻬쩨르부르크로 불리게 됨)의 쓰몰늬이에서 쏘비에트 권력을 천명한 직후, 처음으로 채택한 두 개의 법령은 러시아의 참전 중단과 농부에게의 토지 분배였다. 그 다음 법령은 여성에게 법적인 동등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혁명은 러시아 제국 내의 모든 여성들에게 철저한 사회적ㆍ경제적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여성들의 지위가 쏘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와 같이 극적으로 변화된 곳은 없었다.

 

끼르기지야 공화국의 여성들은 유목 생활의 고통과 이슬람의 영향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새로운 정부는 끼르기지야 여성의 법적 지위에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곧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봉건적인 정신 상태는 아직도 모든 삶이 신에 의하여 정해져 있고 그러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회적 지위는 보다 높은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지어져 있고, 그 지위를 함부로 고치는 것은 신성한 법칙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변화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며, 두려워해야 하고 맞서 싸워야 할 어떤 것이었다. 농부들의 희생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슬람의 성직자와 세리들, 타락하고 부패한 러시아의 지배자들 그리고 농노 제도가 붕괴되었는데도 그들의 땅에 농노를 부리고 있는 부유한 농부들―에게는 새로운 정부는 현실적인 경제적 위협이었다. 이들 중에 바쓰마치 혹은 산적 떼라고 불리는 집단들은 무지한 농부들의 공포에 편승하여 내란을 조장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끼르기지야와 중앙아시아의 모든 여성들을 봉건 제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도적들은 내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쏘비에트 여성위원회 위원인 자밀라는 끼르기지야의 여성들이 깊게 뿌리박힌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싸우고 죽었는지 설명했다. 자밀라의 이모는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하여 여성의 새로운 권리, 즉 재산 소유권, 교육받을 권리, 포악한 남편으로부터 벗어날 권리, 직업을 가질 권리 등을 알려 주다가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28년 마을 쏘비에트 지도자로 선출된 여성 살리바는 여성으로서 전통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자밀라의 이모는 새 정부의 특수 학교를 거쳐 당의 일꾼으로서 여성을 위한 특별 부서에서 일을 계속하였다. 자밀라는 내년이 혁명 70년이 되는 시점이며, 끼르기지야를 비롯한 쏘비에트 어디에도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끼르기지야와 인접한 우즈베끼쓰딴도 19세기에 이르러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무슬림 여성에게 인권은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노예였다. 성적 노리갯감이었고, 일하는 동물이었으며, 많은 부인을 거느릴 수 있는 남자들에 의해 매매되는 물건이었다. 이것은 러시아의 기본 법규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짜르 행정부는 무슬림 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관용적이었다. 1927년에 베일을 벗어던지는 행위로 상징되는 후줌 운동이라는 여성 운동이 시작되었다. 후줌 운동은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도 모든 개인에게 부여되어 있는 권리를 지닌 완전한 인간임을 믿게 하고자 시도한 운동이었다. 1927년 3월 8일 레기쓰딴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는 불기둥에 베일을 벗어던졌다. 그 후로 그들은 학교에 가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공장에 나가 일을 하였다.

 

예상한 바대로 여성 해방 운동은 남편들이나, 아버지, 형제들에 의한 반발과 폭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역할을 거부하는 여성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아주 극단적이었고, 당시 영국의 원조를 받던 바쓰마치가 이러한 반응에 편승하였다. 그 도적 떼에게 붙잡힌 여성들은 죽거나 몸이 망가진 채로 돌아왔다. 뉴로브칸이란 여배우는 베일을 벗고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오빠에게 살해당했다.

 

전형적인 농민들은 “암탉이 새가 아니듯 여자도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러시아에서 문맹은 1930년대에 없어졌다. 여성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에서 출발해서 문자해독학교와 전문행정학교에 갔다. 교육받은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을 가르치고 지방 정부와 노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은 세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여성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하며, 또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이 권리의 사용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 물질적 조건은 이러한 권리의 사용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마련되어져야 한다. 셋째, 그 조건들은 남성들의 정신 상태를 포함한 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 마련되어져야 한다.

 

현대의 여성들은 그들의 권리를 알고 있고,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권리를 완전하게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을 발전시키고자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이제 동등한 무상 교육에의 접근 기회와 똑같은 노동에 똑같은 임금, 광범위한 탁아 시설, 기숙 학교와 여름 캠프, 무상의 소아과 병원, 확장된 산전 산후 휴가, 그리고 이미 확대된 가사 서비스 체계 등을 누리고 있다.

 

제2장 당당한 목소리

혁명 초에 당은 오늘날 여성평의회의 전신인 줴노쩰을 설치해서 여성을 위한 권익 옹호 활동을 벌였다. 줴노쩰 조직자들은 우선적으로 여성들의 문맹 퇴치 운동을 조직하고 새로운 정부 하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알려 주는 일에 전념했다. 어떤 남성이 여성에게 불법적인 행동을 고집하면 줴노쩰은 그를 체포할 권한이 있었다. 예컨대 중앙아시아에서 줴노쩰은 남성에게 팔려 가지 않도록 여성들을 보호했고 그런 짓을 하려는 부모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일할 수 있고 시장보다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협동 농장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깨닫게 해 주고 그것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했다. 1929년에 줴노쩰은 해체되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들의 권리를 깨닫게 되었고 일, 교육, 사회적 활동 등에 완벽하게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여성평의회는 줴노쩰처럼 당의 일부가 아니지만 그들은 당과 그리고 변화를 추구하는 다른 단체들과 함께 일한다. 어떤 여성이 문제를 갖고 평의회에 오면 그녀의 주장은 노동조합, 행정부, 당 위원회, 혹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기관에 전달된다. 또 다른 형태의 조직인 여성위원회는 지방에서 국가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정부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여성들의 작업 조건 및 생활 조건을 위한 위원회, 그리고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한 위원회라고 불린다.

 

여성평의회와 여성위원회 외에 쏘비에트 여성위원회가 있다. 그것은 모든 공화국에서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된다. 쏘비에트 여성위원회는 2차 대전 전에 파씨즘에 대항하여 여성들을 국제적으로 결속하려는 시도 속에서 출발했다. 전후에 쏘비에트 여성위원회는 평화와 군비 철폐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쏘비에트 여성위원회는 국제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젊은 여성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1986년에 쏘련 내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에 입학하고 있는 66개국 1,000명 이상의 여성에게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쏘비에트 여성위원회는 국내적으로 여성들을 위해 일한다. 그곳에는 전국에서 들어오는 편지들을 읽고 답하는 특별부서가 있다. 일 년에 약 20만 통의 편지가 온다고 한다. 일단 문제가 분석되고 조사단이 해결책을 제시하면 위원회는 고위 입법부서에 그 제안의 심의를 의뢰한다. 일례로 전 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편지에 대해 국가의 양육 보조를 건의했다. 그러한 기금은 만들어졌고 남성들이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자녀 양육비가 제공되었다. 여성들이 그들의 권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주요한 수단은 사회단체인 여성평의회, 정부 기관인 여성위원회, 그리고 쏘비에트 여성위원회이고, 그 속에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도 여성위원회가 있다.

 

마야와 같은 방송 작가이면서 당원인 여성은 여러 여성 조직과 클럽을 통해 활동한다. 이외에도 여성들은 정부의 공식 기관과 공산당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1984년에 선출된 최고회의에는 여성이 1/3(32.8%)이다. 최고회의는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연방의회로서 똑같은 인구를 가진 선거구에서 선출되며, 다른 하나는 민족의회로서 소수 민족의 이익을 위해 각각의 공화국, 자치구나 자치 지역에서 온 특정 대표들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각 의회는 750명씩으로 전체 1,500명의 선출 대표들로 이루어진다. 전체적으로 4만 6,582개의 쏘비에트들이 쏘련 내의 모든 수준들에 있다. 1982년 현재 지역 쏘비에트에는 여러 공화국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의 50%, 혹은 114만 6,000명이 여성이었다.

 

여성 참여의 측면에서 보면 당내의 여성의 비율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역대 당 대회 대표 중에서 여성의 비율을 보면 1952년에 19%, 1973년에 23%, 1981년에 26.1%였다. 공산청년동맹의 경우 회원의 50%가 여성이다. 공산청년동맹에 비해 당에서 여성의 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지역 내의 평균 자녀 수가 다섯이고,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은 시간을 자녀 양육에 보내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의 최고 지도층에 여성의 수가 적다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70년이나 계속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낡은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쏘비에트 여성들은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더 나은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3장 부엌살림

벨소리가 나따샤를 침대에서 흔들어 깨운다. 나따샤는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걸치면서 그날 할 일을 생각한다. 남편인 빅또르는 벌써 일어나서 한 시간 전부터 책을 읽고 있다. 빅또르는 아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의자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차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직장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산 둥근 빵을 데우려고 오븐에 집어넣는다. 막 옷을 입고 일할 준비를 끝낸 나따샤는 12살 난 아들 유리를 깨우고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부엌으로 가기 전 나따샤는 걸레를 꺼내서 거실 가구를 닦는다. 파란 영 파이오니어 유니폼을 입은 유리가 방에서 공책을 찾느라고 엉망진창 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 그녀는 막 일을 끝낸다. 약간 귀찮아 하면서 그녀는 유리가 찾는 것을 도와준다. 공책을 찾자 둘은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빅또르에게 간다. 나따샤와 빅또르는 지하철 정거장까지 함께 걸어가서 시내의 직장으로 가는 전철을 탄다. 나따샤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그리고 진공청소기로 거실과 침실, 유리의 방을 청소한다. 세 식구가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는 빅또르가 한다. 빅또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나따샤는 테이블을 닦고, 유리에게 가서 다음 날 학교 갈 준비를 도와준다. 나따샤와 빅또르는 함께 TV를 보다가 칫솔질을 하고 침대에서 독서를 하다가 잠이 든다. 이것이 쏘비에트 여성의 하루 생활이다.

 

쏘련 헌법 35조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으며, 입법부에서는 결혼 관계에 있어서 배우자들의 완전한 평등을 설정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권리를 찾고 행사했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들과는 헤어졌으며, 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그들은 재산을 갖게 되었고, 낙태를 했다. 그들은 교육받게 되었고, 지역 정부와 산업의 요직으로 진출했다.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공식적, 법적인 평등은 그들의 생활 실태와 부합하지만, 가사 부문에서는 아직도 여성들이 대부분의 가사 노동을 하고 있다. 각종의 사회학적 자료에 의하면 비교적 젊은 남성들은 가사와 양육에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했다.

 

쏘련에서 여성을 육아에서 해방시켜 주는 기본 제도는 탁아소이다. 전형적인 탁아소는 120명의 아이들과 35명의 직원들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의사, 간호원, 치과의사 및 기타 전문가들이 포함된다. 모쓰끄바의 탁아소 내에 있는 실내 수영장 수영 선생과 같은 전문 교사들은 제외된 것이다.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일 년에 두 번 신체검사를 받으며, 신경과 전문의 등 많은 전문의들로부터 진찰을 받는다. 어떤 이상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지방 종합병원으로 보내진다. 대규모 탁아소에는 의사가 한 명 있지만, 소규모 탁아소에는 보통 2명의 풀타임 간호원과 일주일에 두 번씩 오는 의사가 한 명 있다. 지진아는 원인이 시력 장애인지 발육 부진인지 아니면 어떤 복잡한 문제 때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에게로 보내진다. 만약 문제점이 교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아이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 특수 탁아소로 보내진다. 그곳에는 특수 아동들을 대상으로 일하도록 훈련된 직원들이 있고, 거기서 특수 아동들은 좀 더 개별적인 배려를 받는다. 소년 소녀들은 같은 프로그램으로 같은 반에서 공부한다. 소년 소녀들은 함께 차 시중 놀이를 하며 함께 식탁을 꾸몄다.

 

탁아소의 직원은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풍자만화 하나를 소개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남편은 집에서 파자마를 입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아내가 서 있다. 그녀의 팔에는 식료품 한 꾸러미가 안겨져 있고, 양손에 각각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발로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와 곧장 부엌으로 간다. 아이들은 울고 있고, 그녀는 음식을 만들고 고기를 갈고 있으나 너무 지쳐서 마루 위에 쓰러진다. 다음 화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숙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바쁘니 엄마에게 가서 부탁해 봐”라고 말한다. 만화는 남편이 부엌으로 가서 아내를 마루에서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그의 육체적 힘을 과시하면서, 그녀를 부엌 테이블에 앉히고는 “저녁 식사를 언제하지?” 하고 묻는 것으로 끝난다.

 

제4장 일하는 여성들

에이너는 18세 때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봉제 일을 하면서 공장의 공산청년동맹 활동에 참가했다. 공산청년동맹 회원의 자격은 28세까지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녀는 28세를 넘기자 공산청년동맹을 떠나 노동조합에 관여하게 되었다. 봉제 공장의 노동자들은 약 250명으로 구성된 교대조들로 나누어져 있다. 에이너는 이 중 한 교대조의 노동조합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그녀는 그 지위를 계속 지켜 오고 있다. 노동조합은 주로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노동자의 대부분(93%)은 쏘련 내 30개 조합 중 하나에 속해 있다. 여성들은 이들 조합의 30개 중앙위원회 중에 9개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전체 노동조합원의 50%가 여성이고, 전체 중앙위원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4.5%이지만, 전체 위원회에서 지도자 격인 여성의 비율은 66.4%에 이른다. 에이너가 이끄는 노동조합의 위원회는 다섯 가지 다른 분야들(주택, 생활 조건, 노동안전, 학교와의 연락, 스포츠)을 책임지고 있는 13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조합은 작업장 내의 민주주의의 현장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조합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은 혹은 그에 못지않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초과 달성을 해야 할 필요성은 서구 여성들이 익히 아는 바이다. 이러한 문제들 중 약간은 쏘련에도 존재한다. 혁명이 일어난 지 70년이 채 안 지나서, 쏘비에트 여성들의 지위와 여성 자신들은 급격히 변화했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과 국가와 사회의 업무를 다루고 있다. 사회과학, 자연과학 양 분야에서 연구자들의 40%가 여성이고, 전문직의 60%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들은 산업, 통신, 수송과 건설 등에서 고위직의 20%를 점하며, 그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여성들은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을 하고, 의사의 68%, 인민판사의 37%, 예술인의 30%를 차지한다. 쏘련에서 남녀 임금격차는 차별의 증거가 아니라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에 낮은 임금을 주는 사회 제도 속에서 여성이 덜 힘든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제5장 함께 가꾸는 건강 생활

종합진료소와 병원에서의 의료 치료는 누구에게나 무료이며, 외국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약값은 대부분 몇 센트로서 아주 적다. 아동과 성인들의 종합진료소 외에 여성진료센터라 불리는 여성진료소가 있는데, 이곳은 산부인과 및 부인과 전문이다. 낙태는 혁명 직후에 합법화되었다가 1930년대 여성들의 요구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출산통제책이 필요해짐에 따라 1955년부터 다시 합법화되었다. 임신 중절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최고 5루블(6.25달러)을 내야 하며, 수입이 적은 여성들은 무료이다. 여성이 낙태를 원하면 남편이나 가족과의 상의 없이도 여성진료소를 이용할 수 있다. 출산이 임박해 오면 여성들은 “산원”이라 불리는 임산부 진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으로 간다. 임신 후기 단계에 이르면, 여성들은 각기 특별히 마련된 산모용 구급차를 전화로 부를 수 있는 번호를 받는다. 산부인과 의사 한 명과 조산원 한 명으로 구성된 구급 차량이 여성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산원이나 본인이 원하는 산원으로 운송한다. 그녀는 진료소나 산원에서 특정한 의사를 요청할 수 있지만, 출산 담당 의사는 산전 진료를 담당했던 의사와 다르다. 쏘련에서는 의료실 직원들이 감염과 청결을 염려해서 방문자들을 임산부 병동에 들여보내지 않는다. 남편이 옆에 있기를 원하는 쏘련 여성들도 있지만 대부분 출산은 남편 없이 완전히 여성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쏘련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상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강간이나 폭행을 걱정하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돌아다닌다. 쏘련에서 배우자 학대는 본인이 신고하든 제3자가 신고하든 다 가능하고 형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배우자 학대는 일어나기는 하지만 서구에서처럼 널리 만연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상환청구를 위한 많은 방법들에 있다. 첫째, 여성은 인민재판소로 갈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여성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이루어진다. 고발된 남자가 당에 속해 있다면, 여성은 그렇다고 말해야 하며, 타박상 같은 증거가 있으면, 그는 여성이 자치대에게 호소하지 않더라도 당 조직에 의해 처벌될 것이다. 대개 그 남성이 속한 사회적 관계망에서 사회적 비난을 불러일으키고 그를 굴욕적으로 만들며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이 된다. 남성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면 주변 사람들의 사회적 비난을 낳을 것이며 그의 생활은 힘들다는 차원을 넘어 보다 훨씬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비난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았다.

 

혁명 직후 당은 줴노쩰을 통해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완전하고 평등한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지시켰다. 줴노쩰이 담당한 일의 한 부분은 아내 구타를 방지시키는 것이었고, 남성들은 그 때문에 감옥소로 갔다. 남성들이 아내를 구타할 권리를 주장하다가 즉시 구속된 많은 사례들이 있다. 새 정부의 법령들과 줴노쩰은 여성들에게 권력을 부여했고 여성 학대는 용납되지 못한다는 분위기를 창출시켰다. 여성 학대를 방지하는 중요한 방책들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다. 쏘련이 아닌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여성 학대를 참고 사는 여성들은 구타를 경제적 안정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인다. 쏘련의 여성들은 좋지 못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성의 93%가 일을 하며, 그들은 고용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기혼 쏘비에트 여성의 2/3가 자기 남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번다. 기초 필수품의 가격이 저렴하고 집세는 수입의 3%에 불과하고 교육과 의료가 무상이다.

 

쏘련에서는 여성 동성애는 불법이 아닌데 남성들 간의 성관계는 불법이다. 외설물은 쏘련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쏘비에트 여성에게는 외설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21년 외설 금지법이 대중적 발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이후 사회는 외설물의 유입을 통제하고 그것을 국내에서 발생하지 않게 함으로써 외설을 국가로부터 몰아내고자 성실하게 노력하였다. 쏘련 내로 들어오는 모든 비디오를 감시한다. 외설물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 존재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하였을 때 쏘비에트 여성들은 놀라며 왜 그러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가를 물었다. 쏘비에트 매체에는 성폭력물과 폭력이 전혀 없다. 광고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외설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서로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여행의 전 기간 동안 내가 여성이라는 왜소한 생각을 느낀 적이 없다. 이곳 소년들은 소녀들을 성적 노리갯감으로 생각하도록 자라지 않는다.

 

제6장 “삶을 창조하며”, 제7장 “희망찬 미래를 위하여”에서는 여성으로서 화가, 조각가, 작가, 영화감독, 성악가, 발레리나, 비행기 조종사 등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혹함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여성들이 한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 쏘련의 예술가동맹과 젊은 예술가동맹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재능 있고 의욕 있는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는 열정 페이를 강요당하며 착취당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가 지망생들과 대조를 이룬다.

 

 

3. ≪소련기행≫, ≪쏘련인상≫

 

≪소련기행≫은 월북한 작가 이태준이 1946년 8월 10일에서 10월 12일까지 약 2개월 동안 <평양 조쏘문화협회>의 쏘련 방문단의 일행으로 쏘련을 방문한 후 쓴 책이다. 초판은 1947년 5월 1일에 발행되었다. 한국에서는 2001년 이태준문학전집 18권 중에서 4권으로 ≪소련기행≫만이 아니라 북의 토지 개혁 과정을 그린 소설 ≪농토≫, 해방 후 남북의 정치 상황을 그린 소설 ≪먼지≫가 같이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전체적으로 ≪소련기행≫은 쏘련의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찬사와 북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그리고 특이하게는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가 1930년대 쏘련을 방문하고 나서 쓴 ≪쏘련방문기≫(러시아 혁명과 쏘련을 지지했던 앙드레 지드는 쏘련을 방문하고 나서 실망을 나타냈다. 조악한 공산품과 상점에 늘어선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을 보고, 국민들의 가장 소박한 욕망도 채워 주지 못하는 국가와 무관심과 기강 해이에 빠진 노동자들의 자세 비판, 기차의 일등석이 남아 있음에 불평등한 사회라고 비판하였다)에 대한 비판이 군데군데 들어 있다. 그리고 쏘련의 여성들이 밝고 명랑하며 모든 직업의 분야에서 많이 일하고 있음에 놀라워하고 있다.

 

교육, 의료, 주택, 문화, 노동조합, 소수 민족에 대한 정책, 레닌 묘지, 혁명 박물관, 고리끼 박물관, 붉은 광장, 지하철 등에 대한 묘사와 감상을 적었다. 도시로서는 모쓰끄바, 쓰딸린그라드, 레닌그라드에 갔는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쓰딸린그라드와 레닌그라드의 참혹한 피해 상황과 복구를 위한 쏘련 인민들의 노력을 묘사하고 감상을 적었다. 그리고 쏘연방으로 아르메니야 공화국, 그루지야 공화국을 둘러보고 쏘련에서 민족 문제가 가장 신중히 논의되었던 때가 1923년에 있었던 12차 당 대회였음을 지적한다. 당 대회 기록에 의하면 쓰딸린 동지는 민족 문제에 대한 보고ㆍ연설에서 민족 문제에 대한 쏘비에트 정책의 국제적 의의를 역설하였고, 피압박 민족들은 민족 문제의 해결과 민족 억압 절멸의 표본을 쏘비에트 동맹에서 발견하게 할 것이라 하였다.

 

‘붉은 광장’에서 이태준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이만큼 번화한 거리엔 더 다채한 진열창들과 더 포장 고운 상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양찬란한 도시엔 슬픈 이면이 있다. 이 도시엔 저녁먹이를 위해 인륜을 판다거나 병든 부모가 창백한 여공딸의 품삯이나 기다리고 누워있는 그런 불행한 식구나 암담한 가정은 없다. 단순한 영양적 시각으로 상품진열창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는 어느 사회가 그 원칙에 있어, 그 제도에 있어 더 정의요, 더 진보요, 인류의 문화와 평화를 위해 더 위대한 가능성을 가졌는가 그것일 것이다.”

 

≪쏘련인상≫은 월북한 역사학자 백남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상으로서 1949년 3월 김일성과 함께 <조쏘문화협정> 체결을 위해 쏘련을 방문한 후 쓴 책이다. 이태준의 방문기는 작가의 개인적 서술이었다면, 이것은 북의 관료가 공식 일정 후 작성한 공식보고서와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에 현대한국학연구소에 의해 출판되었고, 해제는 연세대 사학과 방기중 교수가 썼다.

 

백남운은 쏘련 인상을 총괄적으로 정리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쏘련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계급적인 대립이 근절된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착취도 압박도 없고 실업도 기아도 공황도 있을 수 없는 인민의 나라이다. 그 쏘련 인민들은 노동의 질과 양에 의한 보수로서 자유롭고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나는 가는 곳마다 목도하였다. 또한 강도 파쑈 도당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고 생산부문의 생산 발전이 전전의 공업 총생산 수준을 41% 초과하였고, 전후 4년 동안 대기업소가 5,200개소나 신설되었다. 공업 수준은 전전의 3배로 제고되었다. 미제는 1년 동안 22% 생산이 감퇴한 것에 비교된다. 쏘련 정부는 배급 제도를 폐지하고 일용생필품의 가격을 3차에 걸쳐 인하했다. 이 저물가 정책으로 쏘련 인민은 이익을 보았고, 노동자는 24%, 농민은 30%의 수입이 증가되었다. 미국 노동자의 수입은 인플레와 공황, 실업 등으로 17% 감소하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주의 체제의 제도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둘째, 쏘련은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공산주의 국가로 이행하는 쓰딸린적 계획을 수행함으로써 더욱 높은 단계를 지향하여 발전되고 있다. 이것은 유일당인 볼쉐비끼 당의 혁명적 원칙과 유일관리제의 조직적 집행의 세계사적 승리이므로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러시아 황제를 타도하고 위대한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끈 쏘련 인민은 내전과 반파쑈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헌신성과 조국애를 발휘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등질적으로 발전된 혁명적 근로 인민들이다. 훈련되고 교양된 사회주의적 인간형이다. 우리 인민에 대한 사상적, 정치적 교양을 높여야 한다.

 

넷째, 쏘비에트 인민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풍요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예술이 결부되었고, 생활의 문명이 예술화하는 점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생활인이며, 가장 고도의 문명 생활인이다. 인민 예술의 발전은 조각, 음악, 무용, 건축물에 잘 표현되어 있다. 쏘련은 인류의 새 역사를 창조한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나라인 동시에 진정한 과학의 나라이며 인민 예술의 나라이다.

 

백남운은 방문 기간에 모쓰끄바 대극장에서 개최된 부녀절 대회(3ㆍ8세계 여성의 날 대회)를 참관하게 되었는데, 당시 쏘련 공산당 중앙위의 결정문을 인용했다. 쏘련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쏘비에트 사회주의 문화의 적극적인 활동가이다. 남자들과 함께 그들은 우리 인민의 정신적 자원을 증가시키는 데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권한을 광범히 이용하면서 여성은 쏘비에트 사회의 거대한 문화력으로 성장하였다. 고등교육을 마친 모든 전문가의 44%는 여성이다. 과학 발명 문학예술에서 있어서의 훌륭한 공적에 대해 237명의 여성이 쓰딸린 상을 받았다. 인민 교육 및 보건 부문에 있어서 여성은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쏘비에트 제도가 전취한 쏘비에트 여성들의 동등권과 그의 고상한 사상 및 정치적 향상은 노동자들의 행복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전 세계 여성들을 고취 격려하는 모범으로 되어 있다.

 

 

4. 코민테른과 줴노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0년 11월, 코민테른 2차 대회의 위임을 받아 국제 여성 조직의 서기였던 클라라 쩨트킨이 작성한 “공산주의 여성 운동을 위한 지침”을 채택했다. 여기에서 여성이 형식적으로 작성된 사문화된 법조문 위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남성과 완전한 사회적 동등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전인격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적 소유로 바꾸는 것, 착취 없고 예속 없는 제도하에서 여성의 활동이 사회적 재화 생산에 편재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실현될 때 비로소 여성이 가족 내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다거나 혹은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계급대립의 결과로서 경영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 직업여성으로서 자본가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고 착취당하는 일이 없어진다. 또한 그렇게 될 때만, 가사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나 직업 활동에서 일면적이고 과도한 요구 때문에 여성의 귀중한 능력과 자질이 위축되지 않고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국가 권력을 획득하여 쏘비에트 제도의 형태로 자신의 지배를 구축한 나라들에서는 사회주의 제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모든 경제적 또는 사회적 잔존물을 청산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이기주의적인 도덕성을 남김없이 극복하기 위해 여성의 광범위한 이해와 협력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제까지 가정에서의 가사 노동을 일반적인 사회 경제 내로 끌어들여 주부를 작은 개별 경제의 노예로부터 커다란 사회 경제의 자유로운 직업여성으로 전화할 것, 종래 가족에서의 여성의 경제적 임무를 떠맡고,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줄이고 그것을 보충하고 보완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회 시설을 설립할 것, 모성과 청소년 보호를 위해 모범적인 사회 시설을 설립할 것, 병자ㆍ허약자ㆍ노인ㆍ노동불구자를 원호하기 위한 사회 복지 시설을 만들 것, 부르주아 제도의 유산인 매춘부를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지위에서 근로자의 공동 사회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경제적 및 교육적 방책을 강구할 것, 교육적인 노동 과제와 남녀 공학에 기초하여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연대 정신의 함양에 적합하고 또한 여성을 위해 전면적인 인격 발달의 조건들을 보장할 수 있는 교육ㆍ훈련제도를 창출할 것, 주부와 어머니의 부담을 줄일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사회 복지, 특히 여성과 청소년의 복지에 유용한 방책들의 결정과 실시 및 그러한 시설의 설립, 형성과 운영에 여성을 광범위하게 협력시킬 것을 주장했다.

 

1919년 8월에 쏘련 공산당 내의 여성 사업을 위한 전담 기구인 줴노쩰이 출발했다. 처음에는 분리주의적 여성 조직이라는 우려 속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꼴론따이와 같은 여성 혁명가들의 주장이 관철되어 출발할 수 있었다. 코민테른 3차 대회는 여성 속에서의 활동은 특별한 방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며, 모든 공산당 내에 이 활동을 실시하기 위해 전문적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점을 확인한다. 이것은 기존에 당과 노동조합 내에 각종 독립적인, 별도의 여성 단체를 만든다거나, 특별한 여성 조직을 만드는 데 단호하게 반대했던 것과는 달라진 점이었다. 쏘련에서의 줴노쩰의 경험과 성과는 코민테른을 통해 국제적으로 전파되었다.

 

 

5. 수정주의의 대두와 여성 해방의 정체

 

쓰딸린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는 이후 쏘련 사회가 붕괴될 때까지 그동안의 성과를 갉아먹으면서 역사의 발전이 단선적이고 직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쏘비에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붕괴 직전인 1980년대의 각종 통계 자료를 보면 노동 참여도는 남성과 동등하나, 여성들의 집중 부문이 대부분 평균 임금의 수준이 낮은 곳이다. 또한 여성들은 책임자나 관리자적 지위에서 남성보다 낮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1985년 경영책임자급에서 여성의 비율은 11%, 중간관리자급 이상에서는 아직 30%의 수준에 불과하다.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임금이 낮은 경제 부문에 취업하고 있다는 사실과 여성들의 직위가 평균적으로 남성에 비해 낮은 부분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점은 남성에 비해 여성이 평균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쏘련의 성별 임금 격차는 70% 수준으로 60%대인 보통의 자본주의 국가보다는 덜하지만 77%에 달하는 스웨덴보다는 오히려 높은 수치를 보여 준다.

 

이에 대해 우수한 모성 보호 제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적 지위를 가진 쏘련 여성의 현실의 원인을 차인순은 “소련여성의 경제적 지위와 문제”(≪학술지여성연구≫, 1992년 가을호)에서 국가와 여성만의 여성 해방론이라는 쏘련 사회의 특수성에서 찾기도 한다. 남성의 봉건적 의식 변화는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국가와 여성만이 여성 해방을 위해 달려왔다는 것이다. 혁명 당시 80%가 농민이었던 후진국 러시아는, 농민과 동맹이 아니면 쏘비에트를 발전시킬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내전 시기에 전시 공산주의를, 내전 이후 신경제 정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농촌에 뿌리박힌 봉건적 성차별적 관념, “암탉이 새가 아니듯, 여자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남성들,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확실한 제도적, 정책적 방법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이 강구되는 것 대신에 흐루쇼프 이후에 강화된 수정주의는 쏘련 사회에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강화시켰고, 성차별과 계급대립은 잔존했고, 결국 쏘련은 해체되고 말았다. 고르바쵸프는 그의 저서 ≪뻬레쓰뜨로이까≫에서 이혼, 청소년 비행, 노인 문제 등 가족의 불안정 문제가 여성 해방의 역기능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여성들이 더 많은 가사와 양육과 기타의 가정일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법적으로 평등한 권리의 공포, 토지 개혁에서 여성의 동등한 재산권, 노동권에서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 법 해설과 문맹 퇴치, 무상교육, 무상의료, 공공 주택, 여성을 육아와 가사 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실시했는데, 이것들은 아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시하지 못한 우수한 제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여전히 육아와 가사 노동은 여성의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여성은 낮은 임금을 받는 생산 부문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으며, 그래서 성별 임금 격차도 자본주의보다는 덜하지만 존재한다. 그러나 만약 20세기 사회주의가 붕괴되지 않았다면, 수정주의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회주의 건설로 나아갔다면, 남성들의 봉건적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제도적, 정책적 방법들이 강구되었다면, 지속적인 인민에 대한 교양으로 점차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급 사회의 모든 잔재가 남아 있는 한, 남성의 성 역할에 대한 낡은 의식도 남아 있었을 것이다. 베벨이나 엥엘스가 말했듯이 완전한 여성 해방은 모든 계급이 폐지될 때 가능한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계급이 완전히 폐지된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6. 반혁명과 여성 해방의 좌절

 

1) ≪쏘비에찌까≫의 저자 이리나 말렌꼬

이리나 말렌꼬는 22세까지 쏘련에서 살았다. 모쓰끄바의 역사기록대학을 졸업하고 개인적 사정으로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서 8년을 살며, 레이덴대학에서 슬라브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직장을 찾아 아일랜드로 가게 되었고, 현재 아일랜드에 살면서 번역과 통역을 하면서 정치활동가로 살고 있다. 2013년 당시 45세였던 이리나 말렌꼬는 스리랑카의 사회주의 청년 조직 Socialist Youth Union of Sri Lanka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 내용을 <전국노동자정치협회>에서 번역해서 2014년에 ≪노동자정치신문≫에 실었다. 2009년도에 이리나 말렌꼬는 ≪쏘비에찌까≫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며 쏘비에트 여성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리나 말렌꼬는 쏘련에 대한 진실과 오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쏘련이 해체되기 전의 언급들은 위에서도 충분히 나온 내용들이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행복했던 어린 시절, 안전하고, 실업도 스트레스도 범죄마저 거의 없었던 사회에 대한 그리움, 무료 스포츠클럽, 무료 도서관과 저렴한 도서, 연극, 콘서트, 박물관, 전시회. 아주 문화적이고 교양 있었던 쏘비에트 사회를 회상한다. 여성들은 안전했고, 성차별은 용납되지 않았고, 성폭행이나 강간 같은 범죄는 거의 드물었고, 포르노 따위의 외설물이 없었다. 이런 것들이 ≪쏘비에찌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이미 알지 못하게 되었고, 믿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공격과 함께 여성 모욕은 1988-1989년 경, 고르바쵸프 정권 하의 쏘련의 마지막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규제되었던 포르노물들이, 영화에서 ‘성애의’ 장면들과 ‘성애의’ 잡지들로 허용되었다. 우리의 소녀들이 매춘부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사는 것인지에 대한 문구로 집중 공세를 당했는데, 그 공세는 고르바쵸프가 이끄는 당 지도자들과 반역자 무리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쏘비에트 사회에서 사랑은 “죽을지언정 사랑 없는 키스는 하지 마라!”라는 유명한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작가인 체르늬쉐프쓰끼에 의해서 표현되었다. 오늘날의 러시아 젊은이들 다수는 열악한 교육과 자본주의 미디어에 세뇌당하여 사실상 쏘련에서의 삶과 쏘비에트 가치에 대해 실제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조금씩 오늘날의 비극적 현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쏘비에트 여성들은 자존감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쏘련에서는 소년과 소녀들 사이에서 갈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여전히 러시아에서 축하 행사가 개최되고 있는 국제 여성의 날은, 서방에서의 어머니의 날과 달랐다. 국제 여성의 날은 우리 사회에 대한 여성의 기여와 여성의 평등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남성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평등이 아니었다. 우리는 평등했지만 특별했는데, 이것이 우리의 남성들 다수가 여성들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다. 쏘련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서방 사회는 이리나 말렌꼬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극단적인 성차별을 가했다. 이리나의 꿈은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볼 때까지 오래 사는 것이고, 활발하게 사회주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리나 말렌꼬는 2013년 8월에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레디앙≫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대부분 스리랑카에서의 인터뷰와 동일하지만 쓰딸린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소개한다. 질문자가 쓰딸린 격하 사업 이후 지지도가 하락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최근 여론 조사에서 과반 이상으로 지지도가 높게 나왔는데, 쓰딸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이리나 말렌꼬는 이렇게 대답했다. 쓰딸린에 대해 재평가 작업이 되어 왔는데 그 과정에서 쓰딸린 시대에 쏘련 사회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쓰딸린과 쏘련 사회가 성취한 것을 연관 지어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1920-30년대 문맹률, 실업률이 많이 낮아졌고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바뀌었고 집단 농장도 만들어졌고 나찌에 맞서 싸워 승리한 성과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쓰딸린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2) 미국 진보노동당의 분석

미국의 진보노동당은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라는 글을 통해서 쏘련 및 동유럽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이후 20년 동안 인민들의 삶이 얼마나 붕괴되었는지를 생활 수준과 건강의 쇠퇴, 여성에 대한 공격과 여성의 권리의 후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1995년까지, 구(舊)쏘비에트 국가 전체에 걸친 기대 수명의 저하 때문에 연간 50만에서 100만 정도의 추가 사망자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헝가리에서 시장 개혁은 남성 심장 질환 증가를 유발했고, 자살률이 50% 상승하기까지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사망률은 출생률의 두 배에 달한다. 이러한 건강의 쇠퇴의 근본 원인은 사회주의적인 의료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결핵, 콜레라, 디프테리아, 이질과 같이 이미 오래전에 근절되었던 질병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부활하였다.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은 여타 공공 서비스가 사라진 것이다. 난방연료 보조 폐지, 공공기업 사유화, 2007년 뿌찐에 의해 통과된, 벌목을 통한 사적 이익 추구와 부패한 지방 관료들의 손에 러시아의 광대한 산림을 넘겨주는 산림법. 이와 같은 것들로, 사람들이 깨끗한 물이나 전기, 난방을 저렴하게 이용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삼림의 훼손에 의한 산불의 발생은 두 배로 증가했다.

 

구쏘비에트 국가들에서 건강에 대한 최후의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적 관계가 노동자계급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다. 자본주의에서 항상 존재하는 스트레스와 소외감으로 심장병 발생이 증가했고, 약물 중독과 알콜 중독은 동유럽 전체에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시장 전환 2년 만에 약물 남용이 80% 증가했다. 쏘련 붕괴 후 러시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용하였다. 쏘비에트 지역의 금주 프로그램을 없애고 값싼 술을 대거 시장에 도입했다. 보드카의 가격은 노동자의 임금보다 더 빨리 하락했다. 최근 러시아상공회의소는 러시아에서 매년 알콜 중독으로 50만 명이 사망한다고 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담배 판매가 부진해진 1990년대에 쏘련 붕괴는 담배 산업의 생명줄처럼 보였다. 미국 자본은 즉시 새롭게 사유화한 동구권의 담배 공장을 모두 사들였고, 무차별적으로 광고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동유럽은 담배와 말보로맨의 사진으로 넘쳐 났다. 이 결과 구쏘비에트 국가들에서 흡연자의 수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 혁명의 승리는 전 세계 여성들의 거대한 승리이며 마찬가지로 쏘련의 붕괴는 중대한 패배를 의미한다. 여성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해서, 1996년 러시아에서 실업의 80%가 여성이었다. 그들은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 일이나 낮은 기술의 일에 고용되었고, 어느 회사에서나 가장 먼저 해고되고 가장 늦게 고용되었다. 쏘련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유급 임신ㆍ출산 휴가, 남성과 동등한 승진과 임금, 특별훈련 기회, 작업장에서 특별한 안전장치와 같은 모든 권리는 박탈되었고, 직장에서 무수한 성희롱을 당하게 되었다. 한 폴란드 여성은 이제 취업하기 위해서는 “젊고, 아이가 없고, 가슴이 커야 한다”고 통탄했다. 동독 사람들의 88%는 자본주의 5년 동안 생활에 비해 과거 동독의 여성 조건이 훨씬 나았다고 한다. 동독 출신 한 여성은 “여성이 빼앗긴 것은 단지 보육 시설과 수입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삶, 인간 관계, 일터로 집중되어 있는 공동체적 연대감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와 함께하고, 자본주의의 한 부분인 성차별은 동유럽 여성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회주의에서 강력하게 금지되었던 외설물과 성매매는 독일 통일과 쏘비에트 붕괴 이후 성산업이 퍼지고, 포르노 가게는 온 나라에 생겨났다. 성차별의 부활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끔찍하게 증가했다.

 

 

7. 글을 마치며

 

이 글을 쓰는 동안 사회주의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라는 주제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70년에 이르는 쏘련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되었다. 혁명 초기와 코민테른이 활동하던 시기, 2차 세계대전과 전후 복구의 시기, 쓰딸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 브레쥐네프 수정주의의 폐해 등을 연관시켜서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문영찬 동지가 ≪정세와 노동≫에 연재하고 있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쏘련이 완전하게 양성이 평등하고 여성 해방이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쏘련에서 수정주의가 대두하기 전에 여성 문제는 꾸준히 해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그 성과는 자본주의 국가, 식민지ㆍ반식민지 국가들의 여성들의 처지와 비교하면 놀랄 만한 것이고 훌륭한 것이다. 수정주의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쏘련이 붕괴하기 이전까지 모성 보호 제도 등은 어느 복지 국가도 따라오지 못할 우수한 수준이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여성 해방은 사회주의를 통해서, 사회주의는 여성 해방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 클라라 쩨트킨은 “여성 해방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통해서, 사회주의 승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했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수백만, 수천만 근로 여성이 투쟁에 참가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는 다양한 계급의 여성들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착취자의 공동 투쟁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혁명의 끝은 아니었다. 혁명은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ㆍ인민에 의해서 추진되어야 했고, 전진해야 했다. 그 전진을 위해 수많은 인민이 피를 흘려야 했다. 그리고 현재 역사는 반동기를 경과하고 있다. 노동 해방, 여성 해방, 인간 해방의 과제가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한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헬렌 버제스,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 여성한국사회연구회 역, 앎과함, 1989.

이태준, ≪소련기행ㆍ농토ㆍ먼지≫, 깊은샘, 2001.

백남운, ≪쏘련인상≫, 선인, 2005.

문영찬,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7)”, ≪정세와 노동≫ 제159호-165호, 노사과연.

레디앙, “소비에트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소련은 지옥이었는가’…이리나 말렌코 씨와의 간담회”, ≪레디앙≫, 2013. 8. 4.

Socialist Youth Union of Sri Lanka, “쏘비에티카(Sovietica)의 저자 이리나 말렌코(Irina Malenko)와의 인터뷰”, ≪노동자정치신문≫ 제102호-103호.

진보노동당,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2)”, ≪노동자정치신문≫ 제90호.

≪코민테른 자료선집≫ 제2권, 동녘.

차인순, “소련여성의 경제적 지위와 문제”, ≪학술지여성연구≫ 제36호(1992년 가을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천연옥 부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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