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1)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11장 쏘련의 대외 정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1. 10월 혁명과 쏘비에트 러시아의 대외 정책

 

10월 혁명이 승리한 다음 날인 1917년 10월 26일(구력) 쏘비에트 러시아는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였다. 무병합, 무배상의 민주주의적 강화 제안이었지만, 쏘비에트 러시아의 이러한 제안은 협상국 측에 의해 거부당했다.[1]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3권, 거름, p. 34. 그리하여 쏘비에트 러시아는 독일과의 단독 강화 협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쏘비에트 러시아는 전쟁에서 철수하여 평화를 쟁취하여 휴식기를 갖고, 또 혁명을 수호할 적군(赤軍)을 창설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독일과의 강화가 절실한 상태였다. 물론 독일의 강화 조건은 가혹한 것이었다. 독일은 뽈쓰까(폴란드)와 발트 3국의 할양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레닌 등 볼쉐비끼 당 지도부는 쏘비에트 러시아가 전쟁을 수행할 무력이 없다는 점을 들어 굴욕적이지만 독일에 양보하여 강화할 것을 강화 협상의 대표인 뜨로쯔끼에게 지시한 상태였다. 그러나 뜨로쯔끼는 이러한 지시를 거부하고 1918년 1월 28일 단독으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뜨로쯔끼는 쏘비에트 러시아는 싸우지도 않고 강화하지도 않는다, 일방적으로 전쟁 상태의 종결을 선언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러시아 병사들의 동원 해제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독일은 2월 18일 전면적 공세를 재개하였고 레닌은 러시아의 노동자와 인민에게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조국을 보위하여 일어설 것을 호소하였다. 2월 23일 독일군은 최후통첩을 보내왔는데, 이는 이전보다 더욱더 가혹한 강화 조건을 포함한 것이었다. 즉, 쏘비에트 러시아가 우끄라이나와 쑤오미(핀란드), 까프까쓰의 일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혁명의 수호를 위해 이러한 요구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처음에는 레닌의 안이 소수였고 부하린 등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혁명전쟁을 수행할 것을 주장하는 안이 다수였으나, 레닌의 끈질긴 설득으로 2월 24일 전 러시아 쏘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강화 협상을 결정하였고 3월 3일 독일과의 강화가 성립되어 브레쓰트-리또프쓰크 조약이 발효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쏘비에트 러시아는 많은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수호할 수 있었고, 인민들에게 휴식기를 가져다줄 수 있었고, 또 혁명 무력인 적군(赤軍)을 창설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브레쓰트-리또프쓰크 조약은 3월 14일-16일 전 러시아 쏘비에트 4차 비상 대표자대회에서 비준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당시 혁명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던 사회혁명당 좌파가 반발하여 인민위원회를 탈퇴하고 반(反)볼쉐비끼로 입장을 전환하였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의 이러한 입장 전환은 소부르주아 세력이 위기의 시기에 동요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볼쉐비끼 당은 브레쓰트-리또프쓰크 조약을 통해 평화를 쟁취하여 러시아 내의 혁명을 밀고 나갈 수 있었고,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배하고 독일 내에서 혁명이 발발함에 따라 브레쓰트-리또프쓰크 조약은 사실상 무효화되었고 쏘비에트 러시아는 잃었던 국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쏘비에트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을 겪으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으나, 빈농, 중농 등 농민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공고히 하면서 내전의 전세를 서서히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쏘비에트 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에게 제국주의 국가의 러시아에 대한 무력간섭의 부당성을 호소하였고, 이들 국가에서는 쏘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무력간섭을 반대하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국제적 연대와 지지를 조건으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제국주의 군대에 대항할 수 있는 적군(赤軍)을 수백만 명 창설하면서 볼쉐비끼 당과 쏘비에트 국가는 약 3년간에 걸친 내전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내전 승리 후 쏘비에트 러시아는 대외적으로 평화 공존을 제창하였다. 레닌은 상이한 체제 간에도 평화적인 공존이 가능하다는 사상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부하린 등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전쟁 노선을 비판하는 가운데 도출된 것이었다. 그리고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1차 대전의 결과 경제 상태가 피폐해졌기 때문에 러시아라는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고, 서방과 쏘비에트 러시아 간에는 서서히 무역 관계가 재정립되게 되었다. 1921년 영국에서 경제 위기가 폭발하여 대외 무역이 1/2로 감소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3월 16일 영국과 쏘비에트 러시아 간에는 통상 협정이 체결되었다.[2]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236. 그리고 이 협정은 쏘비에트 러시아가 서방의 대국과 맺은 최초의 협정이었다. 1921년 5월 6일 독일과 쏘비에트 러시아 간의 무역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어서 1921년 1년 동안 쏘비에트 러시아는 12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한편 이렇게 쏘비에트 러시아가 대외 무역 관계를 회복함에 따라 대외 무역에 대한 쏘비에트 러시아의 방침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부하린 등은 대외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은 전시 공산주의의 산물이며, 따라서 대외 무역에 대해 관세를 통해 조정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면서 대외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레닌 등 볼쉐비끼 당 다수는 외국 자본에 맞서 쏘비에트 러시아의 경제를 보호하고 쏘비에트 경제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대외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12차 당 대회에서 대외 무역의 국가독점 원칙은 변경 불가능하다고 천명하는 결의가 통과되었다. 사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대외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이 필요한 것은 사회주의 경제 자체가 계획 경제라는 성질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산과 교환에서 자본주의적 무정부성을 극복하고 나라의 경제 전체가 계획적으로 조직되기 위해서는 대외 무역에서도 ‘계획적 조직화’가 필요하며 이는 대외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대외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은 외환에 대한 국가독점을 포함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는 대외적으로도 무정부성을 극복하고 질서 정연하고 계획적으로 대외적 관계를 발전시키게 된다. 물론 사회주의 경제의 발전이 성숙하게 되면 대외 무역의 국가독점의 구체적 정책은 한층 유연하고 다면적이고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대외 무역 전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계획적인 조직화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발전이라는 전략적 목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쏘비에트 러시아의 대외 정책의 근간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였다. 10월 혁명의 승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의 혁명 운동이 고양되는 계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민족 해방 운동이 고양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중국, 조선, 인도, 뛰르끼예(터키) 등에서는 10월 혁명 후에 민족 해방 운동이 고양되어 제국주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레닌의 민족 자결권 테제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레닌의 민족 자결권 테제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 (해방)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제국주의에 맞서는 세계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과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운동의 동맹을 기초 지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혁명 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을 총괄하는 제3 인터내셔널이 창립되게 되었다. 그전의 제2 인터내셔널은 사회민주당 대부분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조국 방위 노선을 걸음으로 인해서 파산했는데, 10월 혁명의 성과와 볼쉐비끼 당의 노선에 기초하여 세계적 차원의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제3 인터내셔널, 약칭하여 코민테른은 1919년 3월 30개국의 공산당과 사회주의 좌파 조직이 모쓰끄바에 모여 창설했다. 그리고 1920년 7월에는 코민테른 2차 대회가 열렸는데 볼쉐비끼 당의 경험으로 신생 공산당들을 무장시키고 과거의 사회민주당 유형과 다른 새로운 유형의 당 건설을 제시하였고 코민테른의 가입 조건을 규정한 21개항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레닌은 이들 신생 공산당들의 발전을 위해 볼쉐비끼 당의 경험을 총괄한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썼다.

이 시기 레닌과 볼쉐비끼 당은 공산당들의 전술 노선의 주요한 것으로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을 제창했다. 이는 사회민주당이 제1차 세계 대전과 10월 혁명 이후 많이 약화되었고 심지어 자본주의의 주요한 한 축으로 전락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국가에서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고려하여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연합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대오의 통일을 제창한 것이었다. 즉, 사회민주당이 자본가계급과의 협조 노선을 버리고 노동자계급의 대오의 통일에 함께할 것을 제창한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민주당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공산당들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키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대오 전체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일전선 전술은 공산당이라는 혁명적 주체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며, 당 건설에 기초한 전선의 강화를 꾀한 것이었다. 즉, 노동자 통일전선은 당과 전선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사례인데, 이는 1930년대 파씨즘의 등장 이후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이 성립하게 한 주요한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당과 전선의 관계에 대한 볼쉐비끼 당의 이러한 방침은 21세기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21세기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도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체현하는 당 건설의 문제를 한편으로 하고, 이와 달리 노동자계급의 단결, 나아가 전 인민의 단결에 기초한 전선(체)을 성립시키는 문제는 상호 간에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당 건설이 전선의 건설의 근본적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 그리고 전선의 성립과 발전은 당의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당과 전선의 관계는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의 주요한 이론적, 정치적 고리가 되는 것이다.

10월 혁명 후의 쏘비에트 러시아의 대외 정책은 첫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근간으로 하며 이는 코민테른의 성립과 발전으로 표현되었다. 둘째, 쏘비에트 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평화 공존을 제창하였는데, 이는 혁명전쟁 혹은 혁명의 수출이라는 노선에 반대하는 것이며, 제국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평화가 쏘련 내부의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하고 또 제국주의 국가 내의 혁명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국가와의 평화 공존 노선은 1930년대 파씨즘의 등장 이후 유럽에서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이라는 노선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이 노선은 2차 대전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견지되었다. 즉, 쓰딸린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냉전을 개시하고 또 NATO라는 군사 기구를 창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응하는 군사 기구를 창설하지 않고 서유럽,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 쏘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 간의 집단적 안전 보장 체계 구축을 주장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평화 공존과 집단 안전 보장 체계라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유산은 21세기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만약 한국 등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고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진다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혁명 수출이 아니라 평화 공존을 제창하면서, 예들 들면 동아시아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대외적인 정치, 군사 노선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쏘비에트 러시아의 대외 정책의 주요한 한 축은 세계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과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운동의 동맹이었다. 이러한 동맹이 가능한 경제적 기초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해명된 바가 있으며, 그러한 동맹의 정치적 근거는 레닌의 ‘민족 자결권’ 테제에서 확인된 바가 있다. 즉, 제국주의 시대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이 극대화되고 독점이 발달한 결과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가 된다는 점, 그리고 약소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의 억압과 착취, 수탈이 식민지의 민족 혁명을 야기한다는 점이,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과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운동의 동맹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21세기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21세기 지금의 제국주의 시대 또한 여전히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이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대화하고 있고, 전 세계의 약소민족들은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주의적 억압으로 인해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쏘비에트 러시아의 대외 정책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평화 공존을, 약소민족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지하고 민족 해방 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운동과의 동맹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2. 2차 대전 전 사회주의 건설 시기의 쏘련의 대외 정책

 

1922년 4월 쏘비에트 러시아와 독일과의 외교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는 쏘비에트 러시아가 자본주의 열강과 최초로 맺은 수교였다. 그 이전 1921년에는 아프가니스딴, 이란, 뛰르끼예(터키)와 쏘비에트 러시아의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이들 동방 국가가 대국과 맺은 최초의 평등한 조약이었다. 쏘비에트 러시아는 짜르 러시아가 이들 국가 내에서 가졌던 이권과 특권을 포기했다.

그런데 쏘비에트 러시아의 대외 관계가 언제나 순탄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정세와 제국주의 국가 측에서의 상황에 의해 악화와 회복을 반복하였다. 1923년 영국 정부는 쏘비에트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 이란과 아프가니스딴에서 쏘비에트 대표를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영국이 이란과 아프가니스딴은 자신들의 세력권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1924년 영국에서 노동당 정부가 들어섰을 때 영국은 쏘련과 국교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딸리아, 노르게(노르웨이), 엘라다(그리스),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 쓰베리예(스웨덴) 등이, 그리고 동방에서는 중국이 쏘련과 국교를 수립했다. 1925년에는 쏘련과 일본이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주요 열강 중에서는 미국만이 쏘련과의 외교 관계를 거부하는 국가로 남았다.

1924년 6월 코민테른 5차 대회가 열렸는데, 10월 혁명 이후 서유럽에서 불붙었던 혁명 운동이 실패로 귀결되었으며, 1924년부터 자본주의가 상대적 안정기로 접어들었다는 정세 보고가 있었다. 이 대회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들의 볼쉐비끼화와 통일전선 전술을 견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중국 혁명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인도, 인도네시아, 모로코, 이집트 등에서 민족 해방 운동이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해방 운동의 성장은 제국주의 측에 위기의식을 불러왔는데, 영국은 베이징과 텐진의 쏘비에트 대표부를 습격했으며, 바르샤바에서는 쏘비에트 대표를 살해했다. 그리하여 1927년 영국과 쏘련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 이전에 1925년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딸리아, 벨기에 등이 로카르노 협정을 맺어 반(反)쏘련 블록을 형성하였다. 이는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쏘련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쏘련은 1926년 독일과 중립 조약을 맺어 제국주의 국가 측의 대쏘련 봉쇄망에 대해 파열구를 내었다. 뿐만 아니라 쏘련은 1925년-1927년에 걸쳐 쏘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뛰르끼예(터키), 아프가니스딴, 이란, 리뜨바(리투아니아) 등과 중립 및 불가침 조약을 맺어 중대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상황이 이렇게 쏘련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영국은 1929년에 쏘련과의 외교 관계를 재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8년 8월에 코민테른 6차 대회가 열렸는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계급 투쟁이 성장하고 있으며 식민지에서 민족 해방 운동이 성장하고 있다는 정세 보고가 있었고, 중국 혁명에 대한 지지가 결의되었다. 또한 대회는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모순이 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쏘련을 방위할 것을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호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미국을 시작으로 대공황이 발발하여 세계정세가 급격하게 변동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1932년 공산당이 선거에서 600만 표를 획득하여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도 했는데, 대공황과 공산당의 성장에 대해 독일의 독점자본가계급은 히틀러의 나찌를 내세우게 되었다. 1933년에 독일에서 나찌가 집권하였고 이후 전 세계는 전쟁 위기의 격화를 겪고 끝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1933년 파씨즘과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독일과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이는 일본과 독일이 전 세계에 대해 침략의 길을 걸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제국주의 열강은 쏘련을 국제연맹에 가입시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고, 쏘련 측에서도 국제연맹이 제국주의 연합이었으나 이제는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고 1934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쏘련은 나찌가 집권했던 1933년에 이미 유럽에서 집단 안전 보장 체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었다.[3]같은 책, p. 427. 미국 또한 나찌 집권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여 1933년 쏘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렇게 나찌의 등장 이후 유럽과 전 세계는 반파쑈 연합을 통하여 전쟁을 저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 전쟁의 발발인가의 갈림길에 처하게 되었는데, 영국, 프랑스 등과 쏘련과의 연합이, 즉, 반파쑈 연합이 끝내 무산되었을 때 제2차 세계 대전은 발발하게 되었다.

쏘련과 볼쉐비끼 당은 나찌의 등장 이후 각국에서 반파쑈 연합의 성립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34년 프랑스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 간에 반파쑈 통일행동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후 프랑스의 반파쑈 연합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에서 파씨즘 세력의 집권을 일정 기간 저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가 열렸을 때 세계적 차원에서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을 전개할 것이 결의되었다. 반파쑈 인민전선은 1920년대 초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의 성과에 기초하여 통일, 단결의 범위를 파씨즘에 맞서는 전 인민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술이 가능했던 것은 10월 혁명 이후 세계 각국에서 볼쉐비끼적인 공산당 세력이 성장했다는 점, 그리고 파씨즘의 등장과 전쟁 위기의 격화가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단결의 기운을 높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은 부침은 있었지만,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 및 미국과 쏘련의 연합을 통해 군사적 차원으로까지 관철되어 2차 대전에서 쏘련과 연합국 측의 승리에 대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러한 반파쑈 통일전선은 중국의 경우 반제 민족 해방 전선으로 변형되어 관철되었는데, 실제로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 합작의 형태로 관철되어 중-일 전쟁에서 중국의 인민이 일본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쏘련은 반파쑈 연합을 통해 전쟁의 발발을 억지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1935년 프랑스,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이 이들 나라를 침공할 경우 군사적 지원을 포함한 원조를 하기로 했다. 에쓰빠냐(스페인)에서는 1936년부터 공화국 측과 프랑꼬의 파씨스트 군대 간에 내전이 발발했는데, 에쓰빠냐(스페인) 내전은 한편으로 쏘련과 반파쑈 세력이 공화국 측을 지원하고 독일과 이딸리아의 파씨즘 세력이 프랑꼬의 파씨스트 반란군을 지원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리허설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에쓰빠냐(스페인) 내전에 대해 불간섭 정책을 취하면서 독일과 이딸리아의 반란군에 대한 지원을 방조하였고, 쏘련 측이 보내는 무기 등 원조 물자가 에쓰빠냐(스페인)에 반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939년 프랑꼬의 파씨스트 군대가 에쓰빠냐(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에쓰빠냐(스페인) 공화국은 전복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나찌의 등장과 전쟁 위기의 격화에 대해 유럽의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통해 대응하여 전쟁 발발을 막을 것을 제안하는 쏘련 측에 대해 무시하고 보이콧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영국의 경우 독일의 총구를 동방으로, 쏘련 측으로 돌리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유럽에서 반파쑈 연합 혹은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1935년 이딸리아가 이티오피아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1938년 3월 독일은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독일은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는데,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에 독일인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을 들어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할양할 것을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에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쏘련 측은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와의 조약을 근거로 군사적 원조를 포함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쏘련의 군대가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를 원조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뽈쓰까(폴란드)가 쏘련군의 통과를 거부하였고, 이에 대해 영국 등은 뽈쓰까(폴란드)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를 원조하는 대신에 최악의 외교적 사례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악명 높은 뮌헨 회담이다. 1938년 10월 28일 영국, 프랑스, 이딸리아, 독일은 독일 뮌헨에서 회담하여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할양하는 합의를 하였다.[4]같은 책, p. 441. 즉,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 파씨즘에 대한 용인 정책이, 나찌에 양보하여 독일의 총구를 쏘련 측으로 돌리게 하려는 정책이, 약소국인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의 희생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를 통해 쏘련이 나찌 등장 이후 주창해 왔던,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통하여 전쟁을 억지한다는 전략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고 유럽에서 반파쑈 세력은 중대한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은 수데텐 지역을 손에 넣은 후 얼마 안 가서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였고 이어서 뽈쓰까(폴란드)를 넘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련과 영국, 프랑스는 최후의 담판을 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쏘련과 손을 잡아 독일의 침략을 방지하자는 쏘련의 제안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여 이 담판은 몇 개월을 끌다가 무산되게 되었다. 이로써 유럽에서 반파쑈 연합의 구축을 통한 전쟁 억지는 최종적으로 무산되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련 측은 전쟁의 발발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독일과 비밀 회담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쏘련과 독일 측은 1939년 8월 23일 쏘-독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경우 쏘련과의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여 유럽에서의 전선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려는 것이었고, 쏘련은 서부 국경에서 전쟁의 발발을 일정하게 늦추어서 서쪽의 독일과 동쪽의 일본의 양면 협공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쏘련은 1941년 4월 25일 쏘-일 중립 조약을 체결하여 동쪽에서 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일정하게 감소시킬 수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쏘-독 불가침 협정의 결과 일본 단독으로 쏘련을 침략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고, 또 유럽에서 전쟁의 기운이 높아져서 동남아시아에 대한 유럽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력이 공백 상태가 되어 일본이 쏘련 등 북쪽이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 등 남진 전략을 펴는 것이 유리했던 사정이 있었다.

한편 쏘련은 2차 대전의 발발 전에 1차, 2차, 3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경제에서 생산력의 비약적인 성장과 국민 경제의 자립, 인민의 사회 복지 수준, 문화 수준의 비약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1920년대 초반 내전에서 승리하고 신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경제를 회복하면서 쏘련의 대외 무역은,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과 수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공업 부문의 성장을 초점으로 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1차 5개년 계획 시기 쏘련의 대외 무역은 기계와 원료의 수입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1년 전 세계에서 수출되는 기계의 1/3이 쏘련을 향했고, 1932년에는 수출되는 기계의 1/2이 쏘련을 향했다.[5]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三卷, 北京: 生活ㆍ读书ㆍ新知三联出版, 1979, p. 399. 이를 통해 쏘련은 기계 제조업을 발전시켜서 경제적 자립의 길로 갈 수 있었다. 기계를 수입하는 농업국에서 기계를 자체 생산하는 공업국으로의 전환이, 그리고 대외적 의존을 줄이고 경제적 자립의 물질적 기초를 놓는 것이, 1차와 2차 5개년 계획 시기에 달성되었다. 또한 원료 수입의 비중도 크게 줄어들고 쏘련 자체적으로 공업 원료를 생산하게 되었다.

쏘련 경제의 비약적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계획적인 경제의 조직화라는 요인 이외에, 1929년 자본주의 세계의 대공황이 발발하여 쏘련에 대한 경제 봉쇄망이 느슨해지고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장을 필요로 함에 따라 각종의 기계와 전략적 물자들이 쏘련으로 대거 반입될 수 있었던 것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즉, 쏘련은 혁명 초기 자본주의 국가들의 봉쇄를 이겨냈으며, 그 이후에는 결코 경제적 고립 상태에 처해 있지 않았으며, 대외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경제 계획의 달성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향후 21세기에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고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질 경우, 내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을 유지,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평화 공존 노선에 입각하여 정확한 대외 무역 전략을 편다면, 능히 고립을 탈피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쏘련의 대외 무역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형제적 연대에 기초한 대외 무역, 둘째, 자본주의 열강들과 평화 공존에 입각한 대외 무역, 셋째, 제3 세계의 개발도상국과의 대외 무역이 그것이다. 이 중 첫 번째의 사회주의 국가 간의 대외 무역은 2차 대전 후에 크게 발전했는데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간의 대외 무역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것으로서 이들 국가들에게 있어서 전체 무역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은 상호 간에 국제적 분업을 실시하고 나아가 ‘국제적 생산관계’의 정립을 도모하는 상태로까지 발전했다.

둘째, 자본주의 열강과의 평화 공존에 입각한 대외 무역은 자본주의 열강 스스로의 필요에 기초한 것이었다. 영국이 경제 위기 발발로 인해 쏘련과 통상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쏘련과 무역 관계, 나아가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쏘련이 자본주의 국가들에 취한 평화 공존 노선이 성공한 사례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제3 세계, 개발도상국과의 대외 무역은 21세기 현재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 등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고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질 경우, 제3 세계의 주요 국가들과 연대하여 대외 무역을 발전시킨다면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원료와 물자 등을 획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향후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세계적 차원에서 반(反)제국주의 전선이 발전한다면 한국 등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은 순조로울 수 있다. 그리고 21세기 지금의 조건에서 특이한 것은 수정주의 국가와의 대외 관계이다. 사회주의 건설이 역전하여 자본주의 혹은 시장 경제로 된 나라들의 경우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당적 차원에서 비판을 견지하면서도 경제에서, 대외 무역에서는 얼마든지 협력자가 될 수 있다. 이들 국가와는 사회주의 건설 전망에 있어서는 대립할 수 있지만, 대외 무역에서는 제국주의 열강과 마찬가지로 평화 공존에 입각한 협력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사회주의 세계 체제 성립 시기의 쏘련의 대외 정책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수천 킬로미터의 전선에서 쏘련에 대한 전면 침략을 감행했다. 전격전이라 불린 독일군의 진격은 기계화 사단을 앞세워 빠른 속도로 전선을 돌파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전선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쏘련은 전쟁 초기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밀릴 수밖에 없었으나 개전 후 1개월이 지나 쓰몰렌쓰크에서 최초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약 2개월간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고 독일군은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중앙에서는 수도 모쓰끄바를 향해 진격하고 남쪽으로는 우끄라이나로 치고 들어가고 있었다. 독일군은 전격전을 통해 수도 모쓰끄바를 점령하고 1941년 말까지 쏘련 점령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모쓰끄바 근교 수십 킬로미터까지 진격하여 모쓰끄바 함락을 눈앞에 둔 것 같았던 독일군은 쏘련군의 반격에 밀려 100-200킬로미터를 후퇴해야 했다. 이 모쓰끄바 근교 전투에서 쏘련군의 승리는 쏘련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이 쏘련을 점령할 때, 함께 쏘련을 분할 점령할 계획을 세웠던 영국은 전략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고, 1942년 1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쏘련, 미국, 영국 등 26개 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연합국가 선언”을 발표하여 2차 대전의 구도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파씨즘 세력 대 반파씨즘 세력의 전쟁으로 재편되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 구도의 전환은 1938년 뮌헨 회담과 이어지는 영국, 프랑스와 쏘련 간의 담판의 결렬 이후 무너졌던 반파쑈 연합이 다시 복구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합류로 인해 반파쑈 연합이 더욱더 강해졌고 정치적 차원을 넘어 군사적 차원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제창되었던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이 2차 대전에서 군사적 차원으로까지 관철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차 대전의 전세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것은 194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어진 쓰딸린그라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참패하여 150만 명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쏘련군은 이후 독일군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꾸르쓰크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서 10차례의 대대적 타격을 독일군에게 가하여 독일군을 쏘련 영토에서 몰아내었다. 이후 쏘련군은 국경을 넘어서 서쪽으로는 뽈쓰까(폴란드)로 진격하고 남쪽으로는 로므니아(루마니아), 유고쓸라비야로 진격하여 동유럽을 파씨즘에서 해방하고 1945년 4월에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쏘련 측의 승리로 기울기 시작했을 때 1943년 쏘련, 미국, 영국의 수뇌들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을 하여 유럽에서 제2 전선을 여는 문제, 독일에 대한 분할 점령 등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은 2차 대전 이후 세계의 질서를 논의하고 확정한 것이었으며, 발깐반도에서 엘라다(그리스)에 대한 영국의 점령, 한(조선)반도의 분할 점령 등이 이때 논의, 결정되었다. 이러한 논의와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쏘련군이 독일군에 대해 우위를 보이고 쏘련의 독일에 대한 승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쏘련의 헤게모니하에 영국, 미국이 반파쑈 연합에 가담하고 있어서, 상이한 체제 간에도 일시적으로 연합 질서, 동맹이 성립했다는 점에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개전 초기인 1941년 여름과 가을에 쏘련 측에 대해 원조다운 원조를 거의 하지 않았고 모쓰끄바 방어전에서 쏘련이 승리한 이후 비로소 원조다운 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미국의 군수 물자의 원조는 북쪽의 무르만쓰크항을 통해 주로 이루어졌고, 이는 독일 해군의 공격을 피해가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남쪽으로는 이란을 통해 쏘련군에 대한 원조가 이루어졌는데, 이 루트는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규모적 원조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1942년 6월 11일 쏘련과 미국 간에 상호 원조를 규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쏘련과 미국 간에는 4차에 걸친 의정서가 교환되어 전쟁 기간 동안 원조가 이루어졌다.[6]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五卷, p. 698.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측의 이러한 원조는 쏘련군의 전투력의 유지와 발전에 일정하게 도움이 되었으나, 쏘련군에 있어서 원조 물자의 비중은 제한된 것이었고 무기와 식량 등 군수 물자의 대부분은 쏘련이 자체적으로 생산, 조달한 것이었다.

쏘련의 전시 경제의 조직화는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고, 1945년 전쟁이 끝날 무렵 쏘련 경제는 이미 상당히 복구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쏘련은 2차 대전 종전을 전후하여 동유럽 국가들과 협정을 맺어 전후 복구를 위한 원조를 할 수 있었다. 쏘련은 1945년 3월 3일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와 우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식량과 원료, 기계 설비 등을 제공하였다. 1945년 4월 11일에는 유고쓸라비야와 우호 원조 조약을 맺었고 1945년 4월 21에는 뽈쓰까(폴란드)와 우호 원조 조약을 맺었다. 1945년 8월 27일에는 마쟈르(헝가리)와 우호 원조 조약을 맺었고 1945년 9월 22일에는 슈치퍼리아(알바니아)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2차 대전 후 동유럽에 대한 쏘련의 원조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뽈쓰까(폴란드)에 대한 원조였는데, 이는 뽈쓰까(폴란드)가 전쟁에 의해 가장 막대한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 * *

 

2차 대전 후에 쏘련의 대외 정책의 근간은 2차 대전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연합국 측과의 동맹을 유지하여 제국주의 진영과 평화 공존을 이루어 쏘련의 전후 복구를 달성하고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2차 대전의 결과 형성되어 가는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확장과 발전에 위협을 느끼고 이른바 냉전을 개시하게 된다. 1946년 3월 5일 처칠은 쏘련과 동유럽을 철의 장막으로 묘사하는 연설을 하여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냉전적 관점을 표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쏘련은 상응하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쏘련의 입장에서는 연합국 측과의 동맹을 깨지 않고 평화 공존을 이루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유럽에서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자신의 전략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차 대전 후의 구도의 변화, 냉전의 실질적인 개시를 가져온 것은 미국의 국무장관 마샬이 발표한 미국의 유럽에 대한 원조 계획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마샬 플랜이었다. 1947년 6월 5일 마샬은 연설을 통하여 전후 유럽의 부흥을 위한 미국의 원조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마샬 계획은 유럽 질서에서 쏘련의 배제를 겨냥한 것이었고, 나아가 원조를 받는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종속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체꼬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처음에는 마샬 계획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마샬 계획이 동유럽 국가들에서 자본가계급을 고무하여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장애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마샬 계획에 대한 참여를 거부했다. 이후 동유럽은 쏘련과 연합하여 사회주의 진영 공동의 시장을 형성하는 길로 나아갔는데, 그것이 1949년 1월 성립한 경제상호원조위원회(코메콘)이었다. 이로써 세계 시장은 2개로 분할되게 되었고 냉전적 질서가 경제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한편 정치의 영역에서 2차 대전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연합 질서가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2차 대전 후 프랑스와 이딸리아의 공산당들은 연합정부 노선에 따라 내각에 참여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이딸리아의 공산당들은 2차 대전 과정에서 레지스땅스 등 반파쑈 투쟁을 통해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제1 당의 지위에까지 오른 상태였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이 냉전 노선을 채택하면서 프랑스와 이딸리아의 연합정부 내에서 공산당들이 다른 당들과 불화를 겪게 되고 이어 연합정부로부터 축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쏘련은 프랑스, 이딸리아 공산당 등과 제대로 된 협의를 하지 못했고 사태를 사후에 확인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유럽의 공산당들 간의 협의 조직이 필요함이 제기되었고 쏘련과 동유럽의 공산당, 노동자당, 서유럽의 프랑스 공산당, 이딸리아 공산당을 포괄하는 국제 조직이 모색되었다. 그리하여 1947년 9월 28일 각국 공산당의 경험을 교류하고 행동을 협의하는 조직으로서 정보국(코민포름)이 결성되게 되었다.[7]沉志华, ≪冷战时期苏联与东欧的关系(냉전시기 쏘련과 동구의 관계)≫, 北京大学出版社, 2006, p. 19. 코민포름은, 2차 대전의 과정에서 해소되었던 제3 인터내셔널이 세계 혁명을 기치로 각국 공산당, 노동자당에 대해 구속력을 가진 것과 달리, 유럽의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정보 교류와 협의를 주된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마샬 플랜을 기초로 유럽에서 냉전 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에 속도를 내었는데, 그 결과가 미국과 유럽의 주요 국가 간의 군사동맹으로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과 독일의 분단이었다. NATO는 1949년 4월 4일 결성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쏘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해 서방 제국주의 진영이 군사적 대결을 선언하고 유럽에서 새로운 전쟁의 불씨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쓰딸린은 NATO와 대결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진영의 군사 기구를 만들지 않고 기존의 평화 공존 노선과 유럽에서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주장하였다. 즉, 서방 제국주의 진영이 군사적 대결을 선언하고 NATO를 결성하였음에도 그에 대해 맞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2차 대전의 교훈을 고려하고 전후 질서의 안정을 위해 미국, 서유럽과 동유럽, 쏘련의 연합 질서인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이라는 전략 노선을 고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쓰딸린의 이러한 전략은 정확한 것이었는데, 서방 제국주의 진영의 군사적 대결 노선에 대해 평화 노선으로써 대응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측면에서 쏘련과 동유럽이 서방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NATO의 결성으로써 냉전의 군사적 태세를 갖추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독일에 대한 분단에 착수하여 1949년 8월 14일 서독 단독의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같은 해 9월 20일 서독 정부를 수립했다. 이에 대해 동독에서는 같은 해 10월 7일 동독 정부가 수립되었다.[8]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539. 독일의 이러한 분단은 잠정적인 군사적 분할 점령이 영구적인 정치적인 분단으로 전화한 것인데, 이는 영국과 미국이 독일 민족을 희생하여 유럽에서 냉전적 대결 구도를 수립한 것이었으며, 이로써 유럽에서 분쟁의 불씨가 구조화되었다. 쏘련은 독일의 분단에 반대하면서 독일 내에서 파씨즘 세력을 숙청하는 것을 기초로 독일을 쏘련, 동유럽과 서유럽, 미국 간의 중간 지대로, 중립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은 냉전적 대결 구도를 만들기 위해 독일의 분단을 강행한 것이었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전개되고 있었다. 쏘련은 동유럽에 쏘련군이 진주한 상태에서 동유럽에 정치, 군사적 원조와 경제적, 물질적인 원조를 통하여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발전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유럽에서 냉전이 개시되면서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또한 곡절을 겪게 되었는데, 마샬 계획의 거부에 대해 동유럽의 자본가 정당들이 반발하면서 정치 위기가 발생하였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반혁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동유럽의 공산당, 노동자당들은 대중의 궐기를 호소하여 정치 위기를 극복하고 동유럽에서 공산당, 노동자당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면서,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파씨즘 세력의 제거,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지주 소유 제도의 폐지 등의 민주주의 단계를 넘어서 사회주의 변혁으로 성장, 전화해 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유럽에서 중대한 균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쏘련과 유고쓸라비야의 불화의 발생이었다. 유고쓸라비야의 찌또(티토)는 2차 대전의 과정에서 쏘련과 협력하여 반파쑈 투쟁을 수행했고 전후에는 쏘련의 지원에 기초하여 유고쓸라비야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전개했다. 그런데 찌또는 전쟁 직후인 당시 정세에 맞지 않게 유고쓸라비야와 벌가리야(불가리아)의 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쏘련과 불화를 빚었다. 특히 유고쓸라비야와 인접한 소국인 슈치퍼리아(알바니아)와의 관계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슈치퍼리아(알바니아)와 불화를 빚었다. 당시 동유럽의 발깐반도에서 연방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찌또는 이를 매우 조급하게 추진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유고쓸라비야의 소(小)패권주의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쏘련 공산당과 유고쓸라비야 공산당 간에 문서를 통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그 결과 쏘련이 유고쓸라비야에 대한 군사 원조와 차관 제공 등을 철회하였고, 1948년 3월 18일에는 쏘련이 유고쓸라비야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했던 전문 기술자들과 작업 인원을 철수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후 찌또는 쏘련과 유고쓸라비야의 불화 문제를 논의하려 한 1948년 6월 8일의 코민포름 회의 참석을 거부했고, 이후 유고쓸라비야 공산당은 코민포름에서 제명되게 되었다.

쏘련과 불화를 빚고 끝내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찌또는 이후 매우 반동적인 입장으로 전환했는데, 당시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엘라다(그리스)의 빨치산에 대해 국경을 봉쇄하여 타격을 가했고 미국으로부터 원조와 차관을 받기 시작했고 심지어 1951년 11월에는 미국과 군사 원조 협정을 체결하여 막대한 원조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군사 기구인 NATO에 서독이 가입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찌또는 1950년대에 네루, 나세르 등과 비동맹 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조선) 전쟁에서 미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비엣남(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찌또는 또한 국내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역전시켰는데, 1953년 연방계획위원회를 해산하고 연방경제계획연구소로 전환하여 사실상 경제에서 계획을 방기하였다. 그리고 농업에서 집단화를 중지 내지는 철회하였는데, 생산 영역에서의 집단화를 방기하고, 단지 유통과 가공에서만 농업 협동조합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유고쓸라비야는 혁명의 중지와 후퇴를 겪게 되었는데, 찌또는 이를 노동자 자주관리, 시장 사회주의라고 합리화했지만, 실제로는 유고쓸라비야가 거대한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4. 흐루쇼프, 브레쥐네프 시기의 쏘련의 대외 정책

 

쓰딸린 당시 쏘련의 유럽에 있어서의 정치, 군사 노선은 미국, 서유럽의 제국주의 진영과 평화 공존의 길을 걷고 이를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통해 뒷받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3년 쓰딸린의 사망 이후 쏘련의 대외 정책은 일정한 변화를 겪게 된다. 1954년 10월 서독이 NATO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는 전범국으로서 서독이 새로운 군사동맹에 가입하는 것으로서 쏘련과 동유럽의 커다란 반발을 사는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쏘련과 동유럽은 1955년 5월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하여 NATO에 대항하는 군사적 대응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2차 대전의 과정에서 쏘련군과 영국, 미국 등의 군대가 분할 점령하고 있던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가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독일 문제와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 문제를 연동시켜 서방과 동방의 중립 지대를 창설하려 했던 쏘련 측은 양보를 하여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가 외국 군대의 기지를 허용하지 않고 또 영세 중립국으로 남는 것을 조건으로 미국, 영국, 쏘련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에 합의하였고, 1955년 5월 15일 조약을 체결하여 군대 철수가 완료되어 중부 유럽의 분쟁의 불씨 하나가 사라지게 되었다.[9]같은 책, p. 690. 이러한 대결 완화의 분위기를 기초로 1955년 9월 13일 쏘련과 서독이 수교를 하였고 쏘련 측은 2차 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서독 측에 석방하였다. 그러나 당시까지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았고 동독과의 대결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흐루쇼프의 대외 노선은 1956년 2월에 열린 20차 당 대회에서 명료하게 표명되었다. 쓰딸린 노선을 개인숭배를 명목으로 탄핵하고 수정주의적 노선을 공식화한 20차 당 대회의 노선은 대외 정책에도 수정주의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2차 대전 이후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제국주의 진영을 압도하면서 의회를 통한 평화적 방식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핵무기가 등장하면서 평화 공존은 쏘련의 대외 정책의 제1 원칙이 되었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흐루쇼프의 노선은 쓰딸린 당시와 비교해서 중대한 수정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쓰딸린 사망의 시기까지 쏘련의 대외 정책의 제1 원칙은 평화 공존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였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핵무기의 존재로 인하여 인류 절멸이 문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 공존이 다른 모든 쟁점을 압도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중-쏘 논쟁에서 중국 공산당은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노선이 레닌주의적 평화 공존 노선이 아니며 평화 공존은 제국주의 진영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며, 사회주의 국가의 대외 정책의 근본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임을 주장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흐루쇼프가 평화 공존을 대외 정책의 제1 원칙으로 삼게 됨에 따라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투쟁을 희생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면 1950년대 전개되었던 알제리의 민족 해방 투쟁에 대해 흐루쇼프는 그것은 내정 문제라고 하여 종주국인 프랑스의 입장을 사실상 지지하는 견해를 표명하여 중국 측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흐루쇼프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에서 의회를 통한 평화적 경로를 상정한 것은 서유럽의 공산당들이 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되는 촉매제가 되었다. 프랑스 공산당, 이딸리아 공산당은 2차 대전의 과정에서 레지스땅스 등 반파쑈 투쟁을 통하여 제1 당의 위치에까지 올라섰는데, 흐루쇼프의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 노선은 이들 당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어 이들이 개량주의적인 유러꼬뮤니즘으로 전락하게 했던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1970년대 초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포기하여 사실상 혁명 노선을 폐기했으며, 이후 쏘련의 해체 과정에서 지리멸렬한 존재로까지 전락했다. 즉, 흐루쇼프의 사회주의로의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 노선은 서유럽 공산당들의 변절과 몰락의 길을 닦은 것이었다.

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의 쓰딸린 노선에 대한 탄핵과 수정주의 노선의 공식화는 대외적으로 심각한 파장을 몰고 왔다. 마쟈르(헝가리)와 뽈쓰까(폴란드)에서 정치 위기가 발생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합세하여 이집트를 침략하였다. 마쟈르(헝가리)에서는 미 제국주의가 개입하여 대중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이 시위는 정부 지도자의 퇴진, 쏘련군의 철수 요구 등으로 발전하였다. 마쟈르(헝가리)는 2차 대전에서 나찌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나라였는데, 그에 따라 파씨즘의 뿌리가 깊고 파씨즘의 잔당들이 많았는데, 흐루쇼프의 쓰딸린 탄핵을 계기로 마쟈르(헝가리)에서의 사회주의를 전복하려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쏘련 측은 최초에는 정치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다 결국 2번에 걸쳐 쏘련군을 투입하여 반혁명적 시위를 진압하게 되었다.

뽈쓰까(폴란드)에서는 20차 쏘련 공산당 대회에 참석했던 뽈쓰까(폴란드) 당 총서기가 병으로 급사한 상태에서 1956년 6월 뽀즈난에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대중 시위가 발생하였고 새로 등장한 당 지도부가 쏘련과 갈등을 빚게 되면서 정치 위기가 발생하였다. 1956년 10월 19일 뽈쓰까(폴란드) 당 대회에서는 쏘련 출신의 국방부장을 경질하는 등 탈쏘련 정책을 취했는데, 이에 대해 흐루쇼프가 군대를 동원하여 뽈쓰까(폴란드)를 압박하는 가운데 뽈쓰까(폴란드) 당 지도부와 담판을 벌여 뽈쓰까(폴란드)가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남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 군대를 철수시켰다.[10]같은 책, pp. 679-681. 이러한 뽈쓰까(폴란드)의 정치 위기는, 한편으로 뽈쓰까(폴란드)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일정한 한계와 오류가 드러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흐루쇼프의 20차 당 대회에서의 수정주의 노선이 불러온 국제적 파장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이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문제였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침략은 쏘련의 20차 당 대회의 쓰딸린 탄핵이 제국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세계에 불러온 파장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합작하여 이집트를 무력으로 침략하였다. 이에 맞서 이집트 인민이 항전하는 가운데 쏘련은 성명을 발표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이집트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핵미사일로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이스라엘 또한 군대를 철수시키게 되었다. 마쟈르(헝가리) 사건, 그리고 이집트에 대한 침략은 제국주의 진영이 쏘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의 쓰딸린에 대한 탄핵을 활용하여 은밀히 혹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으로 개입한 사례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노선은 사회주의 진영 자체를 분열시키게 되었는데, 중-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20차 당 대회 다음 해인 1957년 11월 모쓰끄바에서 공산당, 노동자당 국제회의가 열려 중국 공산당과 쏘련 공산당 간에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경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이 대회는 견해차를 봉합하여 공동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논쟁이 심화되었고 1960년 7월 쏘련은 중국과 합작하여 건설 중이던 많은 계약을 파기하고 1390명에 이르는 전문가들을 철수시켰다. 이후 중국 측과 쏘련 측은 상호 간에 공개적인 논전을 하게 되었는데, 중국 공산당은 1963년 9월 6일부터 1964년 7월 14일 사이에 ≪인민일보≫와 ≪홍기≫에 9편의 평론을 발표하여 쏘련 공산당의 수정주의적 노선을 비판하였다.[11]같은 책, pp. 685-688. 이후 흐루쇼프가 실각하였지만 그 뒤를 이은 브레쥐네프는 중국 측에 의해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주의라고 비판받았고, 중국과 쏘련의 대립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넘어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로까지 발전하였다. 심지어 쏘련은 중국의 핵시설에 대한 핵공격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대한 미국 측의 입장을 타진하기도 했다.

흐루쇼프는 1959년 9월 15일 미국을 방문하여 화려한 외교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위기가 발생하여 동독에서 서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월경하게 되자 쏘련과 동독 측은 이른바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여 베를린을 동서로 분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베를린 장벽의 건설은 사실상 흐루쇼프 대외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2차 대전 후 쓰딸린 시기에 쏘련과 동유럽 측이 미국과 서유럽의 제국주의 진영을 압도하던 형세가 역전하여 쏘련과 동유럽 측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당시 쏘련과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것은 꾸바 위기였다. 1959년 까스뜨로 등이 중심이 된 혁명이 성공하자 미국 측은 꾸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꾸바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꾸바로서는 미국으로부터 자신의 나라와 혁명을 보위하는 것이 필요했고, 쏘련으로서는 꾸바에 (핵)미사일을 설치하여 미국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 그런데 꾸바의 미사일 기지가 미국에 의해 포착되고 이후 케네디가 꾸바를 해상 봉쇄하자 위기가 표면화되었다. 미국은 꾸바에 대한 폭격 계획을 세우고 쏘련 측에 대해 미사일 철수를 요구했고 흐루쇼프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꾸바에 대한 미국의 침략 포기 약속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흐루쇼프의 대외 정책이 과학성을 결여하고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한 결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진영에 밀리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브레쥐네프 시기 쏘련의 대외 관계는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중국과의 대립,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의 1968년 위기에 대한 진압으로 대표되며, 제국주의 진영과의 관계는 미국과의 핵무기 경쟁과 핵감축 협상 등으로 표현되었다. 쏘련은 브레쥐네프 시기에 1965년 꼬씌긴의 자본주의적 경제 개혁으로 국유 기업들이 이윤 추구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1970년 말 경제가 완전히 균열하게 되는데, 그전의 1970년대 중반까지는 비교적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중반 쏘련의 GDP는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 독일, 이딸리아, 네덜란드를 합친 것을 초과하고 있었다.[12]같은 책, p. 762. 브레쥐네프는 이러한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장을 기초로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열을 올리고 이를 통해 쏘련을 이른바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브레쥐네프 시기 쏘련의 군사비 지출은 1965년 370억 불에서 1981년 2000억 불로 증가하였는데, 군사비 지출은 전체 재정의 1/3을 차지하였다.[13]같은 책, p. 763. 이는 브레쥐네프 또한 흐루쇼프를 계승한 수정주의 노선으로 말미암아, 대외 정책에서 레닌주의적인 평화 공존 노선이 아니라 패권적인 대외 노선을 추구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브레쥐네프는 미국에 대해 핵감축 협상을 제기했다. 1969년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의에서 데땅트 정책을 제기하여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양대 군사 기구를 포함하는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건설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1969년 브레쥐네프는 미국을 방문하였고 1972년 5월 미국의 닉슨과 키신저가 쏘련을 방문하여 전략핵탄두 제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후 미국과 쏘련 양국의 수뇌 회담이 빈번해졌고 1975년 7-8월에 헬싱키에서 유럽안전보장회의가 개최되어 유럽에 집단 안전 보장 체계의 구축을 논의하였다.[14]같은 책, p. 778. 이는 쓰딸린 이래 집단 안전 보장 체계에 대한 쏘련의 전통적인 입장이 일정하게 관철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대한 진전이었으나, 냉전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키기에는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레이건의 등장 이후 스타워즈 등 군사적 대결 태세를 강화하여 쏘련을 군비 경쟁으로 몰아넣는 전략을 폈고, 이러한 군비 경쟁은 쏘련의 해체에 있어서 일정한 대외적인 악조건으로 작용했다.

브레쥐네프의 대외 정책의 패권적 성격은 중국과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잘 드러났다. 브레쥐네프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더욱더 심화시키는 길을 걸었는데, 중국과의 관계에서 흐루쇼프 당시의 이데올로기 논쟁을 넘어서서 군사적 대결을 추구했다. 브레쥐네프 집권 이후 쏘련은 중-쏘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10개 사단에서 40여 개의 사단으로 증강시켰고 이러한 군사적 긴장은 끝내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 전반기까지 중-쏘 국경에서의 충돌 사건은 1.3만여 회에 달할 정도였다. 사실상 중국과 거의 단교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브레쥐네프 이후 고르바쵸프에 이르러 쏘련이 패권 정책을 거두어들이면서 해소되게 되었다.

브레쥐네프의 대외 정책의 패권적 성격은 1968년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서도 잘 드러난다. 둡체크 등 이른바 개혁파가 집권한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는 당 주도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시장 중심 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기업은 시장의 수요에 따라야 하며 노동력의 배치도 시장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5]같은 책, pp. 766-767. 이러한 둡체크의 행동 강령은 사실상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본주의 복고를 꾀하는 것이었다. 노동력이 시장에 의해 배치된다는 것은, 노동자가 더 이상 사회주의 인민으로서 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과 같은 의미였다. 이에 대해 브레쥐네프는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의 당 지도부와 정치적 협상을 하여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여러 나라의 군대를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시켜 해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해결을 합리화하는 브레쥐네프의 논리인데, 브레쥐네프는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사태를 진압하고 나서 이른바 주권 제한론, 국제적 독재론을 폈다. 사회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진영을 이탈하려 할 경우에 다른 형제 사회주의 국가는 상대국의 주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개입하여 상대국을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반혁명이 기도될 경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다면 해당 국가의 노동자계급을 지원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반혁명의 진압에 참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상대방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는 방식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며 브레쥐네프의 패권주의를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국제적 독재론은 더욱더 가당치 않은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국적 차원의 문제이며, 해당 국가 내부의 계급 대립의 문제를 반영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국제적인 초국가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제적 독재론은 허구적인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 독재론이 아니라 국제주의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적 연대가 사회주의 형제 국가에 대한 최선의 대응책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브레쥐네프 시기 쏘련은 표면적으로는 초강대국의 면모를 보이며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수정주의의 심화로 인해 경제가 균열되고 있었고 특권층이 만연하여 사회가 부패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등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하지 못하고 패권적인 행보를 보여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을 돌이킬 수 없게 하고, 결국은 사회주의 진영 자체가 몰락하게 되는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분열하지 않고 단결이 유지되었다면, 1970년대 세계 공황을 맞이한 제국주의 국가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새로운 혁명들이 발발했을 것이지만,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분열한 결과 제국주의 진영은 1970년대 세계 공황의 위기를 넘기면서 역으로 사회주의 진영에 대해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흐루쇼프, 브레쥐네프 시기 쏘련의 대외 무역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이는 쏘련이 더 이상 고립된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주도자였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쏘련의 대외 무역은 사회주의 국가 간의 무역,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무역, 제3 세계 개발도상국과의 무역으로 나뉘어진다.

1950년-1983년까지 코메콘 국가들의 GDP는 연평균 6.7% 성장을 했고 공업 생산은 연평균 8.3% 성장을 했다. 이 당시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연평균 GDP 성장이 3.8%, 공업 생산이 4.2% 성장에 지나지 않았다.[16]沉志华, 앞의 책, p. 217. 코메콘 회원국들은 전 세계 과학 기술자들의 1/3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코메콘 회원국 간의 무역은 1950년에 45억 루블에서 1972년 417억 루블, 1983년 1660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무역은 평화 공존 노선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쏘련의 국제적 지위의 향상, 그리고 쏘련 측에서의 데땅트 정책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 무역액의 증가, 차관 제공의 증대를 낳았다. 그리하여 쏘련과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무역액은 1960년 19.17억 루블에서 1979년 257.54억 루블로 증가했다.

 

 

5. 고르바쵸프 시기의 대외 정책과 쏘련의 몰락

 

고르바쵸프는 쏘련 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하여 1985년 3월 11일 군비 경쟁의 중지, 핵무기 동결, 핵미사일 배치 중지를 표방했다. 그리고 1985년 3월 13일 신사고라 불리는 새로운 대외 정책 구상을 발표했다. 고르바쵸프의 신사고의 특징은 첫째, 전쟁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최후 수단이 아니며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둘째, 세계는 이미 상호 의존의 전체이다. 셋째, 핵전쟁에서 승리자는 없고 핵전쟁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전 인류의 가치가 다른 일체보다 높으며, 인류 생존이 다른 일체보다 높다. 쏘련은 동유럽에 간섭하지 않으며, 서유럽과 함께 유럽이라는 큰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7]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p. 862-863. 이러한 고르바쵸프의 신사고 혹은 대외 정책은 흐루쇼프와 마찬가지인데, 핵무기를 논리의 초석으로 삼아 계급적 관점을 인류적 가치로 대체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자본가계급과의 화해, 협조 노선을 표방한 것이었다. 또한 고르바쵸프가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부정한 것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 제국주의의 성격에 대한 비과학적 관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핵무기는 제국주의 진영의 전쟁 위협의 최고의 수단인데, 이러한 전쟁 위협이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연속으로서 전쟁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제국주의 진영 앞에서 사회주의 진영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이었다.

고르바쵸프는 쏘련 공산당 총서기로 취임 이후 미국과 7차례의 정상 회담을 갖고 핵군축을 시도했다. 고르바쵸프는 198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40주년을 맞아 8월 6일부터 다음 해 1월 1일까지 핵실험 잠정 중지를 선언하고 미국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1985년 11월 19일 쏘-미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미국의 레이건은 전략핵 계획의 지속을 천명했다. 1986년 10월 11일 이슬란드(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쏘-미 정상 회담이 열렸지만, 이 회의 직후 미국은 주미 쏘련 대사관원 55명을 추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고르바쵸프가 미국과 정상 회담을 통해 핵감축을 시도하는 등 평화 노선을 걷고 있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 진영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1987년 12월 7일 고르바쵸프는 미국을 방문하여 정상 회담을 하여 유럽에 배치되어 있는 중ㆍ단거리 미사일을 철수하고 중거리 미사일을 감축할 것을 합의했다. 1988년 5월 29일 레이건이 쏘련을 방문하여 중거리 미사일 감축 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했으나, 전략핵 50% 감축 문제는 불발되었다. 고르바쵸프와 미국과의 정상 회담을 통한 핵감축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중ㆍ단거리 미사일에 대해서는 일정한 성과를 내기도 했으나 전략핵, 즉 대륙 간 탄도 미사일 문제에 있어서는 진전을 보지 못한 것이며, 이는 고르바쵸프가 평화 공세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냉전 질서하의 군사적 대결 구도를 변화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후 쏘련의 국내 정세가 악화하고 또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고르바쵸프는 미국의 부시와 회담을 통하여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를 승인하는 행보를 취했다. 1989년 12월 2일 고르바쵸프와 부시가 말타에서 회담을 했는데, 이때 동유럽의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고르바쵸프는 동ㆍ서독의 통일을 지지(혹은 용인)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를 통해 미국과 서방은 독일 통일을 밀어붙일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것이었고, 이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통한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 통일로 이어졌다. 1990년 9월 12일 4+2 회담, 즉 쏘련과 미국,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동독과 서독의 외상 회의가 열려서, “독일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조약”이 체결되었고, 같은 해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은 공식적으로 통일되었다.[18]같은 책, p. 874. 고르바쵸프는 독일 통일 직후인 1990년 11월 9일 독일을 방문하여 “쏘-독 선린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통일을 정치적으로 승인하였다.

1985년 4월 바르샤바조약기구 정상 회의가 열려 조약의 효력을 20년 연장하는 합의를 하였다. 그러나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해체되고 몰락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되게 되었는데, 1991년 2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외교부장과 국방부장 회의가 열려서 1991년 3월 31일 이전에 조약의 효력이 상실된다는 합의를 하였다. 이를 통해 유럽에서는 서방 제국주의의 군사 기구인 NATO만이 존재하게 되었고 유럽의 정치, 군사적 질서는 제국주의적 질서 일변도로 급변하게 되었다.

한편 쏘련과 중국의 관계는 고르바쵸프가 등장하면서 해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시위가 한창일 때, 고르바쵸프가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과 쏘련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 쏘련 공산당의 총서기 자격으로 방중한 고르바쵸프는 중국 공산당과 4개항의 원칙을 합의했는데, 독립 자주, 완전한 평등, 상호 존중, 상호 간에 내부 사무에 대한 불간섭이 그것이었다.[19]같은 책, p. 889. 그런데 쏘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를 규율하는 이러한 4개항은 민주주의적 평등을 천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내용은 결여된 것이었다. 즉, 쏘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외교적 관계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노사과연

 

References

1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3권, 거름, p. 34.
2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236.
3 같은 책, p. 427.
4 같은 책, p. 441.
5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三卷, 北京: 生活ㆍ读书ㆍ新知三联出版, 1979, p. 399.
6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五卷, p. 698.
7 沉志华, ≪冷战时期苏联与东欧的关系(냉전시기 쏘련과 동구의 관계)≫, 北京大学出版社, 2006, p. 19.
8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539.
9 같은 책, p. 690.
10 같은 책, pp. 679-681.
11 같은 책, pp. 685-688.
12 같은 책, p. 762.
13 같은 책, p. 763.
14 같은 책, p. 778.
15 같은 책, pp. 766-767.
16 沉志华, 앞의 책, p. 217.
17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p. 862-863.
18 같은 책, p. 874.
19 같은 책, p. 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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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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