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정세] 미국의 대선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

 

채만수 | 소장

 

 

I

 

주지하는 것처럼, 미국의 이번 대선은, 그 투표율이 1900년의 대선(73.7%) 이후 120년 만에 최고(66.9%)를 기록했다고 보도될 만큼, 근래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뜨거운 열기 속에서 치러졌다. 그리하여, 세계 경제와 국제 정치에서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영향력 때문에뿐 아니라 바로 그 뜨거운 열기 때문에도 세계의 이목이 비상히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치러진 미국의 이번 대선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비상히, 실로 무섭도록 비상히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역시 그 어느 선거보다도 여실히 증명해 보여 주었다.

일반적 평가와는 물론이요, 우리 연구소 내부에서 제출된 평가들[1]“바이든은 자신의 승리 선언 연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회복된 것인가?”(문영찬, “미국 대통령 … Continue reading과도 사뭇 다른 이러한 평가를 많은 사람들은 혹시 빈정거림이거나 반어적 표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빈정거림도, 반어적 표현도 아니다. 내가 관찰한 바의 평가ㆍ판단을 가감 없이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걱정을 해 줄 것이다. “저 노인네가 도대체 무얼 잘못 먹었기에 저러지?” 하면서. 그리고 물론 “맛이 갔군, 맛이 갔어. 드디어 완전히 맛이 가 버렸군!” 하면서 고소해 할 사람들도 꽤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나 고소해 함이 진하면 진할수록, 그 역시 그만큼, 미국의 민주주의는 물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일반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징표일 뿐이다. 그러한 걱정도, 고소해 함도 모두 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점, 부르주아적 표방에 얼마나 깊이 함몰되어 있는가를 보여 주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II

 

일반적으로 들고 있는, 이번 미 대선의 특징적 현상은, 승패의 문제를 제외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지난 1백 수십 년간의 어느 선거보다도 투표율이 높았던 점, 즉 선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과 참여의 도(度)가 어느 선거에서보다도 높았던 점, 2) 관심과 참여의 도가 높았던 것 이상으로 민주당 바이든 지지자들과 공화당 트럼프 지지자들 간의 대립도 부분적으로 폭력 사태가 일어나고 총기로 무장한 일방의 지지자들이 상대방을 협박할 만큼 격렬했으며, 그들의 열정도 투표일에 임박해서는 개표 결과 패자 측의 지지자들에 의해서 벌어질지도 모를 파괴ㆍ폭동에 대비하여 뉴욕이나 워싱턴 등지의 상가에 널빤지 방어막을 쳐야 할 만큼 광적이었다는 점, 3) 그러한 격렬하고 광적인 지지에 기대어 트럼프가 패배라는 선거 결과에 상당 기간 승복하지 않고 개겼다는 점 등등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제2, 제3의 특징적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 민주주의의 타락’이니,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니, “미국의 민주주의 씨스템이 위기에 봉착”이니 하며 떠들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이 모든 특징적 현상들은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좌익적 계급지상주의자’ 혹은 ‘계급환원론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들은, 다름 아니라, 미국의 노동자ㆍ인민의 그만큼 심각한 계급 정체성의 몰각(沒覺)에서 기인하고, 바로 그 몰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타락’이나 위기의 증표이기는커녕, 그 민주주의가 얼마나 강하고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증표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적 작동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들이다.

우선, 제2의 특징적 현상, 즉 부분적이지만 폭력 사태가 일어나고, 파괴ㆍ폭동을 대비해야 할 만큼 격렬하고 광적이었던, 독점부르주아지의 두 분파 지지자들 간의 대립은, 그것이 아무리 무법적으로 보일지라도, 사실은 제1의 특징적 현상의 한 양상이다. 즉 어느 선거에서보다도 높았던, 선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과 참여의 한 양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그 민주주의의 꽃으로서의 선거란 무엇인가?

그 민주주의란, 누가 뭐라고 해도, 부르주아들끼리의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이고, 그 선거란 부르주아 중 누가, 부르주아지 중 어느 분파가 부르주아지 전체를 대표하여 부르주아적 지배ㆍ착취 체제를 유지ㆍ관리ㆍ공고히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구ㆍ절차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피지배ㆍ피착취 인민에게 있어서 그 선거는 자신들을 지배ㆍ착취하는 자들의 대표를 선출하는 기구ㆍ절차일 뿐이다.

그런데 그 노동자ㆍ인민의 절대다수가 서로 경쟁하는 부르주아지의 어느 분파인가를 지지하여 분열된 채 서로 그토록 결렬하고 광적으로 대립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들을 지배ㆍ착취하는 자들의 우두머리를 선출하는 선거ㆍ투표에 대한 노동자ㆍ인민의 그만큼 격렬하고 광적인 관심과 참여의 도(度), 다시 말해서 이들 노동자ㆍ인민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의 극도로 몰계급적인 몰입의 한 양상이 아닌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만큼 무섭도록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던가?

무릇 계급 사회에서 분파적 이해를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의 격렬한 분열과 대립은 일반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착취와 수탈에 대한 피지배 인민의 투쟁이 미약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그러한 분열과 대립은 당연히 자본주의라는 착취 체제를 폐절하려는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투쟁이 미약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권력에 수반하는 이권 및 피지배 인민으로부터 착취ㆍ수탈하는 잉여가치ㆍ노략물의 분배를 둘러싼 지배계급 분파들 간의 경쟁ㆍ대립이야 언제나 있는 것이고,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그것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피지배ㆍ피착취 인민, 노동자계급의 계급 의식과 투쟁이 치열할 경우, 저들 지배ㆍ착취계급은, 자신들 간의 경쟁ㆍ대립을 일정한 한도 내에 제한하면서, 피지배ㆍ피착취 인민, 노동자계급의 도전에 응전하여 그들 노동자ㆍ인민의 정치적 행동, 정치적 활성화를 억제ㆍ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미국 대선의 경우, 사실상 언제나 그래 왔지만,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지배계급의 양대 분파가, 노동자ㆍ인민의 정치적 행동과 그 활성화를 억제하기는커녕, 어느 때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부추겨 자신들의 전투 병력으로 동원했다. “불복을 선언”한 트럼프를 지지하며 “부정 선거의 증거들을 긁어모으고 있”는 것도 “트럼프 지지층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여론 조사에 의하면 바이든 지지자들도 바이든이 낙선하면 불복하겠다는 지지층이 40%에” 이르고, “폭력을 불사하겠다는 지지층도 20%에 달한다”는[2]신재길, 같은 글, p. 54. 것도 당연히 그러한 부추김과 동원의 결과다.

그리하여 당연히 “이는 기존의 정치 체제에 대한” 노동자ㆍ인민 대중의 “불신이 얼마나 깊은가를 말해” 주는[3]신재길, 같은 곳.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씨스템이 위기에 봉착”한[4]신재길, 같은 글, p. 45. 것도 절대 아니다. 또한, “트럼프의 패배는 미국 민중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5]문영찬, 앞의 글, p. 67. 것도 결코 아니다. 그리고 “미국의 민중”이 “트럼프의 ‘법과 질서’, 인종주의 정책을 거부”한 것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 트럼프의 패배가 세계사적 반동의 흐름을 일정하게 제어할 가능성”이 “자라고 있”는[6]문영찬, 같은 글, p. 72. 어떤 화려한 수사로 가리든 ‘법과 질서’는 지배계급의 무기이고, 의식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짐 크로우 조(Jim Crow Joe; … Continue reading 것도 결코 아니다.

모두가 그 정반대다.

그것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빈곤과 실업, 생활의 불안정과 그 개선 전망의 부재에 강한 고통과 불만을 느끼고 있는 다수의 노동자ㆍ인민이 그 고통의 원인을 자본주의라는 착취 체제의 본성, 그 운동 법칙 속에서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그리하여 그 해결의 전망과 방도를, 착취 체제 그것의 폐절에서 찾는 대신에, 거꾸로 그 착취ㆍ지배계급의 어느 분파에서 찾고 있다는 것, 즉 그만큼 기존의 정치 체제에 대한 환상과 신뢰 위에서 헛된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 대선은, “미국 민중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계속되고 강화되는 한, 미국 노동자ㆍ민중의 승리 가능성은 그만큼 요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 미국 독점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 체제는 무섭게 강고하고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제3의 특징적 현상, 즉 선거 결과에 대한 트럼프의 ‘불복’은, 그것이 아무리 볼썽사납더라도, 부르주아 지배 체제에 어떤 생채기를 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 판세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의 패배가 확정되고, 그리하여 그가 아무튼 그에 승복하는 것으로 끝나든, 그럴 리야 전혀 없지만 현재의 판세 진행과 반대로 개표 결과가 뒤집히는 것으로 끝나든, 그것은 독점자본의 지배 체제에 어떤 생채기도 내지 않으면서 정리될 작은 해프닝일 뿐인 것이다.

게다가 이 해프닝은, 부르주아 지배 체제에 어떤 생채기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의 부르주아 지배 체제, 즉 그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작용할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자ㆍ인민의 관심을, 자신들의 문제로가 아니라, 부르주아 간의 그 분파 투쟁으로 이끌면서 그들을 더욱더 열정적인 몰계급적 대립과 ‘비판’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자본의 이데올로기ㆍ지배 체제에의 그들의 몰입ㆍ복속을 그만큼 더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태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대선의 전개 양태를 보면서 ‘민주주의의 타락’이니, ‘민주주의의 위기’니 하고 판단하는 데에는, (물론 ‘좌익적 계급지상주의’ 혹은 ‘계급환원론’의 관점에서의 발언이지만!) 민주주의의 역사적ㆍ계급적 형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일반으로 간주 혹은 혼동하는, 명시적 혹은 부지불식간의 사고방식이 놓여 있다.[7]예컨대, 저 앞의 주 1)에서 지적한 바 있는, “바이든은 자신의 승리 선언 연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 Continue reading 혹은 적어도 그 역사적ㆍ계급적 성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불철저하고, 전후(前後)의 사고가 자가당착적이고 혼란스럽다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자.

 

‘최고의 민주주의 나라’,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든 나라가 3류 정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러 복잡한 요소들이 원인으로 작용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정치 제도, 즉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의 한계가 노정되고 있는 것이다. 보수당과 진보당의 양당 체제에 기초한다지만 두 당 모두 독점자본가들의 분파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이익을 대표할 정치 세력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진보적이라는 민주당이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버림받는 이유이다. 트럼프와 샌더스가 대중적 지지를 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소위 사민주의 정당들이 모두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신자유주의로 돌아섰다. 그 빈 공간을 좌우 포퓰리즘이 차지하고 있다.[8]신재길, 앞의 글, pp. 53-54.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든 나라”라는 식의 사고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 대선에서 보여 주고 있는 “3류 정치의 모습”이나 “두 당 모두 독점자본가들의 분파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것 등은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정치 제도, 즉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의 한계”가 결코 아니다.

우선 이른바 “3류 정치의 모습” 그것은 대한미국의 정치 제도, 대한미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렇듯이, 그리고 어느 부르주아 민주주의나 그렇듯이, 약간씩 형태와 정도를 달리하면서 나타나는 부르주아 정치 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희비극적 양태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노동자ㆍ인민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인 양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희비극적 양태인 것이다.

그리고 두 당이든 3당이나 4당 등등이든 “모두 독점자본가들의 분파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결코 “부르주아 정치 제도, 즉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의 한계”가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 제도,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근본적 목적이자 그 본질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는, 그것이 역사적이며, 따라서 그 토대인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 그 생산관계와 더불어 조만간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민주당도 공화당도 “두 당 모두 독점자본가들의 분파 이익을 대변하고 있”어서 “미국에서 진보적이라는 민주당이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 그것이 “트럼프와 샌더스가 대중적 지지를 받는 원인이”다? “소위 사민주의 정당들이 모두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신자유주의로 돌아섰”고, “그 빈 공간을 좌우 포퓰리즘이 차지하고 있다”?

“진보적이라는 민주당이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면, 투표자의 과반을 득표했을 뿐 아니라 “미 대선 후보 중 ‘역대 최다’ 득표”를 했다는 바이든을 지지한 자들의 대부분이 ‘노동자계급’에 속하지 않고 도대체 어느 계급에 속한단 말인가? 트럼프나 샌더스는 독점자본의 양대 정당인 공화당이나 민주당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포퓰리스트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사민주의 정당들이 독점자본의 좌익이 된 지가 언제인데, 새삼 “소위 사민주의 정당들이 모두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신자유주의로 돌아섰다”며, “그 빈 공간을 좌우 포퓰리즘이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 모두 얼마나 자가당착적이고, 혼란스러운 사고인가?

 

 

III

 

이번 미 대선의 양태나 결과는 “세계사의 반동이 극복될 가능성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의 징표”가 결코 아니다. “세계사적 반동이 현실로서 극복되는 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민주주의 투쟁을 강화하고 단결을 강화하면서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재생되고 혁명 운동이 발전되고, 끝내 21세기를 새롭게 여는 사회주의 혁명이 세계 제국주의 질서의 약한 고리에서 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9]문영찬, 앞의 글, pp. 72-73.고 말하는 것도, “이제 노동자 민중 민주주의를 당면 요구로 내걸어야 할 때이다. 노동자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제도의 수립을 고민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선 노동자 민중이 단일한 정치 조직으로 단결해야 한다”[10]신재길, 앞의 글, p. 54.고 말하는 것도, 미국의 이번 대선이라는 구체적 사건ㆍ정세를 고찰하면서 끌어내야 하는 결론이나 교훈, 방침이 결코 아니다.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언설은 그저 그럴듯한, 극히 일반적인, 이현령비현령의 상투어들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분자라면, 이번 미국 대선에서 보아야 할 것은, 이른바 ‘3류 정치의 모습’이나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혹은 ‘민중의 승리’ 등등이 아니다. 보아야 하는 것은, 경제 위기와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 광범한 실업과 빈곤, 그리고 특히 ‘세계 최강ㆍ최부국’에서 불과 수개월 사이에 수십만이 전염병으로 죽어 가는 공공의료의 철저한 부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ㆍ인민의 절대다수를 자신들의 의제(議題) 속으로 끌어들여 열광하며 서로 대립케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지배 체제의 무섭도록 강고한 지배력 그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출발하여, 그 무섭도록 강고한 지배력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를 보아야 하고, 그리하여 그 지배력을 극복할 방법ㆍ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앞에서 나는 이번 미국 대선의 “모든 특징적 현상들은” “다름 아니라, 미국의 노동자ㆍ인민의 그만큼 심각한 계급 정체성의 몰각(沒覺)에서 기인”하며, “바로 그 몰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만일 그들이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몰각하고 있지 않다면, 어찌 그들이 자신들을 지배ㆍ착취하고 있는 독점자본의 두 분파의 총알받이가 되어 그토록 광적으로 서로 대립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경제 위기와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 광범한 빈곤, ‘세계 최강ㆍ최부국’에서 불과 수개월 사이에 수십만이 전염병으로 죽어 가는 공공의료의 철저한 부재에도 불구한, 노동자ㆍ인민의 계급 정체성 몰각은, 구태의연하게 들릴지 몰라도, 결국 지배계급에 의한, 즉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에 의한 이데올로기 지배에 의한 것이다. 일찍이 맑스와 엥엘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배계급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권력인 바의 계급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권력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 지배적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의 관념적 표현, 사상의 형태로 표현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실로 하나의 계급을 지배계급이게 하는 관계의 관념적 표현, 따라서 이 계급의 지배의 사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11]K.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MEW, Bd. 3, S. 46.) (굵은 글씨에 의한 강조는 맑스ㆍ엥엘스. 밑줄에 의한 강조는 인용자.)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상태의 내부에서는 비자본가적 생산자 역시 자본주의적 관념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12]K. 맑스, ≪자본론≫ 제3권(MEW, Bd. 25, S. 49.)

 

실로 미국의 이번 대선은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사유(私有)하여 그것들을 마음대로 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에 의한 이데올로기 지배와 그에 대한 노동자ㆍ인민의 종속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관철되고 있는가를, 그리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얼마나 무섭도록 고도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종속이 숙명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맑스와 엥엘스가 도처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가계급은 그 자본뿐 아니라 노동자계급도 갈수록 거대한 규모로 생산ㆍ재생산ㆍ집적ㆍ집중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과 그 계급적 적대성은 바로 그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과학적 사상과 사회의식으로, 계급 의식으로 무장하여 투쟁하도록 끊임없이 자극ㆍ훈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매장인을 거대한 규모로 양성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배와 도전ㆍ투쟁 끝에 결국은 노동자계급이 저들을 매장하게 될 터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하여 그러한 과정을 합목적적으로 지배할 것이며, 어떻게 하여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그 매장의 날을 앞당길 것인가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제는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고도로 발달하여 그 지배 규모도 그 영향력도 거대화한 대중 매체들, 즉 자본에 의한 대중 의식 조작 매체들의 가히 절대적이기까지 한 이데올로기 지배에 파열구를 내지 않고는, 그리하여 그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다.

다른 한편에서, 세계의 자원과 시장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과 대립, 침략 전쟁과 그 위협은 인류를 핵전쟁에 의한 절멸의 가능성이라는 극한적 위험에 빠뜨린 지 오래인데, 최근에는 특히 극도로 격화된 과잉생산 공황의 중압으로 언제 어느 나라가 불장난처럼 전쟁을 벌이고, 그것이 결국 인류의 사실상의 절멸을 초래할 핵전쟁으로 비화할지 모르는 상황인바, 그러한 파멸적 전쟁ㆍ핵전쟁을 예방ㆍ저지해야 하는 것은 인류의 절박한 시대적 과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과제, 즉 그러한 파멸적 전쟁ㆍ핵전쟁을 저지하는 주체는 당연히, 자원과 시장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ㆍ대립ㆍ투쟁하는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착취ㆍ억압당하고 있는 노동자ㆍ인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후자, 즉 노동자ㆍ인민이 (핵)전쟁을 예방ㆍ저지하는 문제 역시 다시 독점자본에 의한 이데올로기 지배의 극복이라는 문제, 그리하여 노동자ㆍ인민이 자본의 총알받이가 되는 대신에 해방의 전사가 되는 문제로 좁혀진다. 이는 특히 노동자ㆍ인민이, 일국 내에서 서로 대립하는 자본 분파 간의 대립과 투쟁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아야 하는 문제를 넘어, (독점)자본이, 그리고 그에 종속된 소부르주아지 이데올로그들이 조장하고 선동하는 국민주의(Nationalism),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배격하고 노동자 국제주의를 확립강화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국민주의국가주의에 빠져 있는 한, 노동자인민은 그 계급적 정체성을 자각확립하지 못하고 국가 즉 자본의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하여 독점자본의 저 막강한 이데올로기 지배를 극복해 갈 것인가? 혹은 노동자ㆍ인민은 어떻게 하여 그 막강한 이데올로기 지배를 극복해 갈 수 있는가?

위선적 혹은 선의의 평등주의자들은 엘리트주의니, 구제불능의 엘리트 의식이니 하는 비난ㆍ비판을 쏟아 내겠지만, 그것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선진분자들의 노동자 대중 속에서의 이데올로기 작업, 즉 자본의 이데올로기 및 그에 종속된 소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한 이데올로기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시작된 이데올로기 투쟁이 노동자ㆍ인민 대중에게 설득력을 갖고, 그리하여 널리 노동자ㆍ인민 대중을 획득할 때,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극복될 뿐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성취되는 것이다.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서 전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론 또한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그것이 사람들에게(ad hominem) 입증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이론은 그것이 근본적(radikal)으로 되자마자 사람들에게 입증된다. 근본적이란 사물을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13]K. 맑스, “헤겔의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MEW, Bd. 1, S. 385.(최인호 역ㆍ김세균 감수,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칼 맑스 … Continue reading

 

그리고 이는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선진분자들이, 언제나 계급적 대의와 과학적 원칙을 확고히 견지하면서, 추상적인 일반론을 넘어 그때그때의 정세에 구체적으로 절실하게 대응함으로써만, 그리하여 독점자본의 대중 조작 매체들, 독점자본의 정치적 대표자들에게 몰수당해 전적으로 사회적 의제로 되지조차 못하거나 왜곡되고 극히 부차적인 사회적 의제로만 되는,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역사적사회적 의제를 탈환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때그때의 정세에 구체적으로 절실하게 대응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의제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분자들 자신부터, 저들이 가리키는 곳을 저들의 관점 혹은 그 아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대신에, 노동자계급이 바라봐야 할 곳을 노동자계급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또한 소망을 현실인 것처럼 포장하는 대신에 현실을 현실 그 자체로서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그의 이론이 근본적ㆍ과학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미국의 이번 대선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리고 나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일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의 선거 일반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을 고찰하고 논하면서 부르주아지 분파들 간의 이해의 차이나 그들에 의해 표명되는 정치적 태도ㆍ방침의 차이를 주로 주목하는 것은,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선거를 고찰하고 논하되 노동자계급이 보아야 할 곳을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고찰하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가리키는 곳을 저들의 관점 혹은 저들이 조장하는 그 아류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착취ㆍ억압당하고 있는 노동자ㆍ인민의 이해(利害)ㆍ해방에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저들 간에는 치열하지만 사실은 사소한 분파적 차이ㆍ대립이 마치 노동자ㆍ인민의 이해에도 중대한 문제인 양 보이게 되고, 그렇게 노동자ㆍ인민 대중에게 선전함으로써 독점자본에 노동자ㆍ인민 대중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종속을 강화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논의의 뒷부분에 아무리 저들 부르주아 정당들은 모두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표ㆍ옹호한다고, 그러니까 노동자계급이 단결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덧붙여 보았자 그것은 공허한 구호, 공허한 관념일 뿐, 사실상 아무런 실천적 의의도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선진적 분자들 자신에게조차 그것들은 공허한 구호, 공허한 관념일 뿐이어서, 실제로 정세를 고찰ㆍ분석할 때에는 부르주아지가 제시하는 시각ㆍ관념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이번 미국의 대선과 같은 부르주아 선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고찰ㆍ분석할 때에는 그들 분파 간의 경제적ㆍ정책적 차이와 대립을 드러내 보이며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들 분파 간의 사소한 차이와 대립, 그리하여 노동자ㆍ인민에게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차이와 대립을 노동자ㆍ인민에게 중대한 차이인 양 기만적으로 과장ㆍ선전하는 부르주아지, 그들의 대중 조작 매체에 맞서 그 본질적 동질성, 그 공통의 반노동자성ㆍ반인민성을 폭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노동자계급 선진분자들의 임무는, 부르주아지 분파들 간의 차이와 대립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점)자본가계급과 노동자ㆍ인민 간의 근본적ㆍ계급적인 이해의 적대성을 폭로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바이든은 자신의 승리 선언 연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회복된 것인가?”(문영찬, “미국 대통령 선거와 노동자 계급”, ≪현장과 광장≫ 제3호(2020년 11월), 노동전선, p. 67.); “미 대선은 끝났지만 아직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확정되지 않고 있다. 일단 언론은 바이든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소송전으로 반전을 노리고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 씨스템이 위기에 봉착했다. … / … 미 대선은 혼란상황에 있다. 트럼프는 불복을 선언했고, 지지자들은 부정 선거의 증거들을 긁어모으고 있다. 최고의 민주주의 나라,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든 나라가 3류 정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러 복잡한 요소들이 원인으로 작용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정치 제도, 즉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의 한계가 노정되고 있는 것이다.”(신재길, “미 대선을 계기로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 전망”, ≪정세와 노동≫ 제167호(2020년 11월), pp. 45, 53.)
2 신재길, 같은 글, p. 54.
3 신재길, 같은 곳.
4 신재길, 같은 글, p. 45.
5 문영찬, 앞의 글, p. 67.
6 문영찬, 같은 글, p. 72. 어떤 화려한 수사로 가리든 ‘법과 질서’는 지배계급의 무기이고, 의식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짐 크로우 조(Jim Crow Joe; 흑인차별정책 조 바이든)”라고 불리는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이든의 50년에 가까운 정치 경력 역시 흑인차별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조직하고 있는 내각 등에 흑인들이나 아시아계 등을 배치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경력을 눈가림하고자 하는 수작의 일환일 뿐이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호전적 제국주의의 여느 대표, 여느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군사비 증액, 군비 증강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7 예컨대, 저 앞의 주 1)에서 지적한 바 있는, “바이든은 자신의 승리 선언 연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회복된 것인가?”라는 발언을 상기해 보라.
8 신재길, 앞의 글, pp. 53-54.
9 문영찬, 앞의 글, pp. 72-73.
10 신재길, 앞의 글, p. 54.
11 K.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MEW, Bd. 3, S. 46.)
12 K. 맑스, ≪자본론≫ 제3권(MEW, Bd. 25, S. 49.)
13 K. 맑스, “헤겔의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MEW, Bd. 1, S. 385.(최인호 역ㆍ김세균 감수,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2008, p. 9.)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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