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0)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10장 맑스주의 민족 이론과 쏘련의 민족 문제

 

 

민족 문제는 쏘련의 해체에 있어서 외형상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1년 쏘련 해체의 과정에서 직접적인 발단은 까프까쓰 지역의 나고르노-까라바흐 지구에서 민족적 분규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쏘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우위에 서고, 각 공화국의 독립 선언이 이어지면서 쏘연방이 해체되었던 것이 쏘련 해체의 직접적인 모습이었다. 여기서 직접적인 모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민족 문제에 있어서도 흐루쇼프, 브레쥐네프의 수정주의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즉, 수정주의는 쏘련의 해체에 있어서 전방위적 영향을 끼친 본질적 요소이며, 민족 문제는 그러한 본질적 요소가 나타나는 하나의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민족 문제는 그 자체로 고찰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지금 시대는 여전히 제국주의 시대이고 세계 각국의 약소민족들은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인 민족 국가를 형성하고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타난 신식민지주의로 인해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민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사회의 경우 분단 사회로서 미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적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의 영역에서 미국의 헤게모니하에 놓여 있고, 따라서 분단의 극복과 민족의 통일은 미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주의적 지배와의 대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 사회는 여전히 민족 문제가 사활적인 문제이며, 민족 문제에 대해 올바로 대처하는 것이, 민족 문제에 있어서 과학적인 노선을 수립하는 것이 긴요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 민족 이론의 원형이 어떠한가,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 문제는 어떠한 변형을 겪어 왔는가, 쏘련의 민족 문제는 어떠한 왜곡을 겪어 왔는가를 고찰함을 통해, 지금 시기 한국 사회에서 필요로 되는 민족 문제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는 길로 갈 수 있다.

 

 

1. 맑스, 엥엘스의 민족 이론

 

맑스와 엥엘스가 활동을 하던 1800년대 중, 후반의 시기는 독일, 이딸리아 등에서 민족 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상승하던 시기였는데, 따라서 이 시기에 민족 문제는 봉건적 관계와 수십 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상태를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독립적인 민족 국가를 형성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맑스와 엥엘스의 관심은 주로 유럽 내의 민족 문제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당시 자본주의가 아직 제국주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뽈쓰까(폴란드)는 약소민족으로서 러시아, 독일 등에 의해 분할되어 있어서, 유럽 내의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고 있었다. 뽈쓰까(폴란드)의 민족 통일과 민족 국가의 수립이 유럽 내 진보적 세력의 기치가 되었던 것이다. 맑스와 엥엘스는 “폴란드에 대한 연설들”에서 유럽 내의 민족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개진했다. “민족들이 현실적으로 단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가 공통의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들의 이해가 공통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재의 소유관계들이 폐지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현재의 소유관계들이 민족들의 상호 간의 착취를 조건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1]칼 맑스, “폴란드에 대한 연설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이하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340. 여기서 맑스는 민족들이 대립하는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경제적 이해관계의 공통성을 확보해야 민족 간의 대립이 사라진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 민족 간의 대립이 존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혹은 봉건적 소유관계들 때문이며, 따라서 착취를 배제하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수립이 민족 문제 해결의 근본적 방안이라는 것을 맑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민족 문제에 대해 지배적인 견해들은 민족 문제가 민족성, 민족적 특질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지만, 맑스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공통의 (물질적인, 경제적인) 이해를 확보해야만 민족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맑스의 이러한 입장은 20세기를 관통하는, 그리고 21세기 지금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동시에, 오늘날 다양한 민족들을 적대적으로 서로 대립시키는 국민적, 산업적 분쟁들에 대한 승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동시에 모든 피억압 국민들의 해방의 신호이기도 한 것입니다.”[2]같은 곳. 여기서 맑스는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의 통일성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피억압 민족들의 해방의 신호가 된다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피억압 민족의 민족 해방 투쟁을 고무한다는 점을, 그리고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운동과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운동의 동맹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입장은 민족 문제의 발생이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비롯되며 적대적 이해관계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 민족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은 동맹이 가능하다는 점을 정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의 이러한 입장은 레닌에 의해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으로 전면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한 국민이 자유롭게 되면서 동시에 다른 국민들을 계속해서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이 행하는 억압으로부터 폴란드의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독일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폴란드와 독일은 공동의 이해를 지니고 있으며, 또 그런 까닭에 폴란드와 독일의 민주주의자들은 양 국민들의 해방에 공동으로 복무할 수 있습니다.”[3]프리드리히 엥겔스, “폴란드에 대한 연설들”, 같은 책, p. 341. 스스로 자유로운 자는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 없다는 것! 타인에 대한 억압은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독일 민족이 뽈쓰까(폴란드) 민족을 억압하는 한 독일 민족 또한 해방될 수 없다라는 통찰이 엥엘스에 의해 피력되고 있다. 이는 독일이 뽈쓰까(폴란드)를 억압하는 한, 독일 내의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독일의 노동자계급은 뽈쓰까(폴란드)의 민족 해방을 지지해야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또한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의 긴밀한 상호 연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두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은 계급 문제이지만 양자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족 문제의 해결, 민족 해방의 문제는 노동자계급 해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엥엘스는 정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가리켜 “독일은 이웃 민족들을 자유롭게 하는 그만큼 그 자신 자유로워진다”[4]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의 대외 정책”, 같은 책, p. 469.고 엥엘스는 정식화하고 있다.

맑스는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해 그러한 지배가 인도에서의 혁명을 야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게 된 동기로 작용한 것이 천하기 그지없는 이익일 뿐이었고 또 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의 근본적 혁명 없이 인류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영국은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5]칼 맑스, “영국의 인도 지배”, ≪저작 선집≫ 제2권, p. 417. 영국의 인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인도의 기존의 봉건적 사회의 해체를 촉진함으로써 인도 사회의 모순을 격화시키고, 그것이 끝내 인도의 사회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맑스는 가리키고 있다. 물론 영국의 인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봉건적 질서를 해체하면서도 동시에 봉건적 질서를 온존시키고 인도의 봉건적 지배계급과 결탁하는 것을 통해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지배는 인도의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을 늦추고, 방해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사회를 해체함으로써 인도에서 사회 혁명의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견해 또한 식민지 지배, 민족 문제를 그 사회에서의 계급적 혁명의 문제와 연관 지어 고찰한 것으로서 민족 문제에 대한 사적 유물론적 접근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맑스와 엥엘스에 있어서 민족 문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었다. 즉, 민족 문제 지상주의가 아니라, 민족 문제가 그 사회의 계급 문제와 사회 혁명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가 그들이 민족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엥엘스는 ‘민족체의 원리’에 대해 분석하면서 민족 문제의 상대성에 대해 접근한다. “민족체의 원리는 두 가지 종류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째는 이들 역사적으로 중요한 거대한 인민들 사이의 경계선 문제이며, 둘째는 역사의 무대에 긴 기간 동안 혹은 짧은 기간 동안 등장하였다가 결국은 더 큰 생활력으로 인해 더 큰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더 강력한 민족들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구성 부분으로 흡수된 인민들의 수많은 작은 잔해들이 독립하여 민족으로서 존재할 권리에 관한 문제입니다.”[6]프리드리히 엥겔스, “노동자계급은 폴란드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작 선집≫ 제3권, p. 125. 민족체는 하나의 민족 국가로 수립되기에는 너무 작은 소수 민족들,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소멸의 길을 걸어서 현재는 단지 그 잔존물만 남아 있는 민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엥엘스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민족체의 원리는 그러한 민족체들이 모두 하나의 민족 국가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엥엘스는 이러한 주장과 선을 긋고 있다. 즉, 엥엘스는 민족 지상주의 혹은 민족 절대주의와 명확히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러시아 주도로 제기되었던 범슬라브주의는 동유럽 각국, 뛰르끼예(터키)와 독일에 잔존하는 슬라브인들을 한데 묶자는 것으로서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엥엘스는 폭로하고 있다. 이 또한 맑스주의의 창설자들이 민족 문제의 진보적 측면과 민족 문제의 반동적 측면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민족 문제는 언제나 동일한 성격의 것이 아니며, 그 사회가 어떠한 발전 단계에 처해 있는지, 어떠한 혁명을 앞두고 있는지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하는 것이며, 특히 그를 위해 민족 문제와 해당 시기의 계급 문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맑스와 엥엘스가 민족 문제에 대해 접근하기 위한 기본 전제였던 것이다.

민족 문제에 대한 반동적 접근의 하나의 사례로서 엥엘스는 범슬라브주의를 들었지만 반유태인주의 또한 민족 문제에 대한 반동적 접근의 하나의 사례로서 엥엘스는 분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반유태인주의는, 주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로 구성되는 현대 사회에 저항하는 몰락해 가는 중세적 사회 계층들의 반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반유태인주의는, 겉보기로는 사회주의적인 가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반동적 목적들에만 봉사하는 것입니다.”[7]프리드리히 엥겔스, “반유태인주의에 관하여”, ≪저작 선집≫ 제6권, p. 312. 유태인들은 카톨릭이 지배적이던 중세 유럽에서 유태교를 가짐으로써 봉건적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주로 상업 등에 종사하면서 중세 유럽의 농촌 공동체의 변경에서 존재해 왔는데, 자본주의 등장 이후 화폐가 주요한 경제적 권력이 되면서, 인민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자본가에 대한 분노를 주로 유태인을 표적으로 삼아 분출해 왔고, 이에 대해 몰락해 가는 봉건적 당파들이 반유태인주의로써 자본주의 발전에 저항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유태인주의는 겉으로는 공동체, 자본주의 비판 등을 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발전에 대해 저항하는 반동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엥엘스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또한 민족 문제가 반동적 목적에 봉사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와 같이 맑스와 엥엘스의 민족 이론은 당시 상승하던 자본주의의 발전기에 민족의 통일과 민족 국가의 수립이 당면 과제였던 시기에 정립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론의 특징은 민족 문제를 경제적 이해관계, 계급 관계와 연관 지어 고찰하여 사적 유물론의 토대 위에서 민족 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민족 문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 단계, 혁명의 성격에 의해 변화하는 것으로서 그 진보적 측면과 반동적 측면이 구분되어야 함을 맑스와 엥엘스는 제기하였다.

 

 

2. 레닌의 민족 이론과 실천

 

레닌의 민족 이론은 레닌의 활동 초기부터 형성, 발전되어 왔다. 이미 1903년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약소민족의 분리와 독립적인 민족 국가 형성의 자유를 의미하는 민족 자결권이 강령상에서 승인되고 있었다.

레닌의 민족 이론의 주요한 내용은 “민족 자결권”이라는 논문에 압축되어 있다. 뽈쓰까(폴란드)의 사회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민족 자결권의 승인이 뽈쓰까(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강화시킬 것을 이유로 들면서 민족 자결권을 반대하였던 것을 비판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이 논문에서 레닌의 관점의 특징은 민족 자결권의 개념에 대해 법률적 정의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 운동들에 대한 역사-경제적 연구”[8]레닌, “민족 자결권”,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벼리, 1989, p. 65.로부터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민족 자결권은 형식적으로는 권리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민족 (해방) 운동의 강령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일종의 정치 운동의 슬로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맑스주의자가 이러한 민족 자결권을 지지해야 하는 근거로서 레닌은 민족 운동의 역사적, 경제적 기초를 들고 있다. “전 세계에 걸쳐, 봉건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결정적 승리의 시기는 반드시 민족 운동과 연결되어 왔다. 상품 생산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부르주아지는 국내 시장을 획득해야 하며, 단일한 언어를 발전시키고 문헌 속에 단일한 언어를 고정시키는 데 대한 온갖 장애가 제거되고 주민들이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적으로 통일된 영토가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민족 운동의 경제적 기초가 있는 것이다.”[9]같은 곳.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봉건적 관계하에서 흩어져 있던 인민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점, 그에 따라 자본주의 발전은 반드시 민족 운동을 발전시키고 독립적인 민족 국가의 성립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레닌이 말한 “민족 운동들에 대한 역사-경제적 연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운동의 발생의 필연성을 인식하면서, 민족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를 분석하고, 이로부터 맑스주의자들은 민족 자결권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가 도출되는 것이다.

레닌은 “민족 자결권”이라는 논문에서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주의자로서 접근하고 있다. 민주주의자로서 레닌은 각 민족들의 보편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평등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민족 자결권에 접근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을 억압할 때 그 민족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10]같은 책, p. 80.고 하고 있다. 이는 맑스와 엥엘스가 독일 민족과 뽈쓰까(폴란드) 민족의 관계에 대해 논한 것과 동일한 관점으로서 민주주의적 평등의 관점에서 민족 문제를 접근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민주주의자로서 레닌은 민족적 억압을 반대하고 피억압 민족의 분리와 독립적인 국가 형성의 자유를 지지해야만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레닌은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민족 자결권에 접근하고 있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민족 자결권을 반대하는 논리를 비판하고 있는데, 다름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의 관점에서 비판을 하고 있다. 즉,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족 자결권의 승인이 뽈쓰까(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피억압 민족 내부의 사정에만 시야가 국한된 것으로서 억압 민족의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임을 레닌은 비판하고 있다. 억압 민족의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피억압 민족의 분리와 독립 국가 형성의 자유를 승인하지 않으면, 피억압 민족의 노동자계급과의 진정한 연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레닌은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뽈쓰까(폴란드)의 민족 자결의 권리를 승인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뽈쓰까(폴란드)의 민족 자결의 권리를 거부하는 것은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러시아의 민족주의 세력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1905년 쓰베리예(스웨덴)로부터 노르게(노르웨이)의 분리를 예로 들면서 쓰베리예(스웨덴)의 노동자는 노르게(노르웨이)의 분리의 자유를 인정해야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입장에 서는 것이며, 만약 쓰베리예(스웨덴)의 노동자가 노르게(노르웨이)의 분리의 자유를 거부했다면, 그것은 쓰베리예(스웨덴)의 반동적인 귀족과 자본가계급에게 굴복하는 것과 동일한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노르게(노르웨이)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분리를 주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쓰베리예(스웨덴)와의 통합(예를 들면 쓰베리예(스웨덴)에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는 경우에)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레닌은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레닌은 부부 사이에 이혼의 권리를 승인하는 것이 구체적인 부부의 이혼을 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파악했다.

이러한 레닌의 입장은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 자결은 불가능하거나 반동적이라는 견해들을 반박하면서 발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를 자칭하면서도 유럽에서는 민족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고 식민지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독립하여 민족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들이 민족 자결권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닌은 “맑스주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라는 논문에서 이러한 견해를 논박하고 있다. “만일 위와 같은 법칙이 공식적으로 표현되고 소생산이 대생산에 의해 구축된다는 법칙과 나란히 소규모 국가가 대규모 국가에 의해 구축된다는 또 다른 ‘법칙’(첫 번째 법칙과 연관되었거나 그것과 나란히 존재하는)이 제시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 놀라운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 조소를 보낼 것이다!”[11]레닌, “맑스주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같은 책, p. 255. 원래 경제주의는 경제적 토대가 상부 구조를 규정한다는 사적 유물론의 명제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정치 투쟁은 경제적 투쟁에 기초해서만 전개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러한 경제주의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철저히 비판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민족 문제를 논하면서, 경제의 영역에서 소생산이 대생산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 필연적이므로, 정치의 영역에서 작은 국가들은 큰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구축당하거나 종속될 수밖에 없으므로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 자결권을 논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출현했던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정치적 영역(민족 자결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경제적 영역(대생산이 소생산을 구축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법칙에 의해 규정당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라고 조소를 보낸 것이었다.

한편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에서는 맑스주의자들이 민족 자결권을 왜곡하여 ‘문화적-민족적’ 자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오토 바우어 등이 중심이 된 이러한 견해는 민족 문제의 범위를 문화적인 문제나 교육의 문제에 국한시키는 것이었다. “하나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들이 경제적 끈으로 묶여 있다면 ‘문화적인’ 문제와 특히 교육의 문제에서 그들을 영구히 분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합리하고 반동적인 것이다.”[12]레닌, “‘문화적-민족적’ 자치”, 같은 책, pp. 13-14. 즉, 문화적 자치 견해의 주창자들은 약소민족들의 민족 자결의 범위를 독립 국가 형성의 권리로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단지 문화적 측면에서만 자결을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치 공화국이나 자치주 등의 지역적 자치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약속민족 구성원들에 대해 민족적 지구의 형성을 단념하고, 단지 민족 성원으로만 정부 기관에 등록되어 행정의 대상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가 당시 다민족 국가로서 복잡한 민족 구성을 갖고 있다는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었지만, 자결의 범위를 문화에 국한하고 지역적 자치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민족 자결권을 심대하게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는 소수 민족, 약소민족들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지속하려는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의 지배계급의 입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와 같이 민족 자결권의 승인이라는 맑스주의적 민족 강령을 반대하거나 왜곡하는 입장들에 맞서서 민족 자결권의 개념을 옹호하고 심화시키는 길을 걸었다. 레닌은 자신의 민족 이론을 실천에 그대로 반영하여 러시아 10월 혁명의 승리 이후 사회주의 건설에 적용하였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승리한 직후인 1917년 11월 2일(러시아 구력) 쏘비에트 정부는 “러시아 각 민족 인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였다.[13]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110. 이 선언에는 민족적 억압의 소멸, 각 민족의 평등과 자유, 민족 자결의 실시 등이 담겨 있었다. 또한 쏘비에트 정부의 민족 정책의 주요 원칙이 개진되었는데, i) 각 민족의 평등과 주권 ii) 각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과 독립 국가 수립의 권리 iii) 민족적 및 민족 종교적인 일체의 특권과 제한의 폐지 iv) 러시아 영토에서 소수 민족과 민족 집단의 자유로운 발전 등이 선언되었다. 1917년 11월 20일(구력)에는 “러시아와 동방의 전체 이슬람 노동 인민에게 고하는 서”가 발표되었다.[14]같은 곳. 여기에는 이슬람 인민의 신앙, 풍속, 민족 및 문화 제도는 자유롭고 불가침이라는 것이 선언되었다.

또한 민족 자결권은 단지 선언만 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행되기도 했다. 1917년 12월에 쑤오미(핀란드)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1918년 7월에는 짜르 러시아의 뽈쓰까(폴란드)에 대한 분할 조약이 폐기되어 뽈쓰까(폴란드)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그리고 우끄라이나에 대해서도 독립이 승인되었고 우끄라이나가 자주적으로 분리 혹은 연방 관계의 건립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승인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내전이 종식될 당시 러시아 공화국, 우끄라이나 공화국, 백러시아 공화국, 그루지야 공화국, 아제르바이쟌 공화국, 아르메니야 공화국이 각각 쏘비에트 공화국으로서 존재하고 있었고 뽈쓰까(폴란드)와 쑤오미(핀란드)는 부르주아 국가이지만 이미 독립 국가로서 승인된 상태였다. 그리고 라뜨비야, 리뜨바(리투아니아), 에쓰또니야 등 발트 3국의 독립이 승인되어 각각 부르주아적인 민족 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공화국 내에 존재했던 많은 소수 민족들은 민족 자결의 권리에 입각하여 자치 공화국을 형성하거나 자치적인 조직을 구성했다(바쉬끼르, 따따르, 끼르기쓰 등 19개). 그리고 러시아 혁명 직후 내전이 발발했음에도 러시아의 소수 민족들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된 신문과 자신들의 민족어로 수업하는 학교가 대대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국가 차원, 정부 차원, 행정의 차원에서는 민족 자결에 입각하여 독립하거나 자치 공화국 등을 형성하였지만, 볼쉐비끼 당 내부에서는 국제주의 원칙이 적용되어 각 민족 공화국의 볼쉐비끼 당 조직은 독립된 조직이 아니라 러시아 공산당(볼)의 중앙과 통합된 단일한 당으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당은 국가와는 조직 원리를 달리한다는 것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의 조직 원리는 민족 자결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한편 내전이 종식되고 1922년에 이르면 러시아를 비롯한 각 쏘비에트 공화국들은 연방의 형성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단일한 노선을 걷고 있던 러시아 공화국, 우끄라이나 공화국, 백러시아 공화국, 까프까쓰의 여러 공화국들이 통합된 연방 국가 형성에 뜻을 같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2년 말에 연방 조약이 채택되어 쏘연방이 정식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와병 중이었던 레닌과 민족 문제를 담당했던 쓰딸린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 쓰딸린은 러시아 공화국에 다른 공화국들이 자치 공화국으로 참여하자는 안을 내었지만 레닌은 대민족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며 다른 공화국들이 자치 공화국이 아니라 독립된 국가로서 쏘연방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쓰딸린은 곧 자신의 안을 철회하였고 다른 공화국들은 러시아 공화국과 대등한 조건에서 쏘연방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까프까쓰 지역의 아르메니야, 아제르바이쟌, 그루지야는 자까프까쓰 연방을 구성하고 그 연방이 쏘연방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그루지야에서는 반대 의견이 강하였고 일정한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자까프까쓰 연방이 쏘연방에 참가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그리하여 1924년 1월 제2차 쏘비에트 대회에서 헌법이 비준되어 연방 체제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 공화국의 자치 공화국이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1920년대 중, 후반에 독립된 국가로서 쏘연방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까프까쓰 연방도 1930년대 후반에는 해소되어 그 구성 공화국들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서 쏘연방에 참여하게 되었다.

 

 

3. 쓰딸린의 민족 이론과 실천

 

쓰딸린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전에 레닌과 협력하여 “맑스주의와 민족 문제”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총괄한 것으로서 이후 러시아와 전 세계의 민족 (해방) 운동의,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과 민족 운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 이 논문에는 민족에 대한 정의가 규정되어 있다. “민족이란 공통의 언어, 지역, 경제적 생활, 그리고 공통의 문화 속에서 발현되는 공통의 심리적 기질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안정된 공동체이다.”[15]스탈린, “맑스주의와 민족 문제”,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p. 308. 이 정의에는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하여 형성되고 있던 민족들의 공통적 특징이 압축되고 있다. 경제적 공통성이 전제되어야만 민족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은 봉건적 관계 속에서의 종족적 공동체와 구별되는 지점이며, 민족이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공통의 언어가 민족의 구성 요소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자신의 독자적 언어를 가지지 못한 민족체의 경우 하나의 민족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민족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소수 민족의 민족어의 사용을 보장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이어지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지역적 공통성은 유태인과 같이 지역적 공통성이 없는 상태에서는 유태교라는 고유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민족으로 볼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또한 오토 바우어와 같이 문화적-민족적 자치라는 구실하에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지역적 자치 혹은 자결을 회피하는 견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적-민족적 자치는 당시 외스터라이히(오스트리아)에서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 민족들이 단지 정부 기관에 민족으로 등록되어 행정적 통제의 대상이 되고 자치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기도 하였다. 공통의 문화에 기초한 공통의 심리적 기질은 흔히 민족성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의 민족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일정한 심리적 특질이 있는데, 민족의 심리적 특질을 인정해야만, 해당 소수 민족을 존중하게 되고 민족적 분쟁을 회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쓰딸린이 “맑스주의와 민족 문제”에서 규정한 민족의 정의는 민족 운동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고, 당시 논쟁되고 있던 민족 문제에 있어서의 여러 쟁점들에 대해 일정한 답변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쓰딸린은 위 논문에서 레닌과 같이 민족 문제에 대해 한편으로 민주주의적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의 관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형태(언어, 학교 등)에서의 민족들의 동등한 권리는 민족 문제의 해결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결국, 예외 없이 모든 민족적 특권을 금지하고 소수 민족의 권리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무력화나 제한도 금지하는, 나라의 완전한 민주화에 기초한 국가법이 요구된다.”[16]같은 책, p. 357. 이러한 쓰딸린의 언급은 민주주의적 평등의 관점에서 민족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평등의 관점에서 특권의 금지, 차별의 금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쓰딸린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민족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체에 따른 노동자의 구분이 어디로 귀결되는지 알고 있다. 통일된 노동자당의 붕괴, 민족체에 따른 노동조합의 분열, 민족적 불화의 심화, 민족적인 파업 파괴 행위, 사회민주주의 대오 내의 완전한 도덕적 타락 ― 이러한 것들이 조직적 연방주의의 결과이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러시아에서의 분트파의 행위에 의해서 웅변적으로 확증되고 있다. 이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국제주의에 입각한 조직뿐이다. 러시아의 모든 민족체들의 노동자들을 단일하고 통합적인 집단적 조직체로 지역적으로 결합시키는 것, 이러한 집단적 조직체들을 단일한 정당으로 결합시키는 것 ― 이것이 임무이다. …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근본적으로 상이한 유형의 조직에 직면한다: 국제적 연대에 기초한 유형과 민족체에 따른 노동자들의 조직적 ‘구분’에 기초한 유형.”[17]같은 책, pp. 358-359. 이러한 쓰딸린의 언급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민족 간 평등을 실현해야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단결은 민족적 구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단일한 조직, 단일한 당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민족 자결은 민족적 차원, 국가적 차원의 문제이며,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의 문제는 민족 자결의 범주를 뛰어넘어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에서 민족적 구분에 따른 유태인의 분파 조직이었던 분트파에 대한 비판을 담는 것이며,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의 발전, 당 건설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한편 쓰딸린은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어 간 주요 지도자라는 점에서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민족 문제에 대해 어떠한 이론을 세우고 어떠한 민족 정책을 취했는가가 주목의 대상이 된다. 러시아 혁명 이후 쓰딸린은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어 가면서 그 경험과 성과에 기초하여 민족 문제에 대해 새로운 내용을 정리하는 논문을 썼다. 그것이 “민족 문제와 레닌주의”라는 논문인데, 1929년에 쓰였다. 이 논문에서 쓰딸린은 두 가지 유형의 민족을 구분하고 있는데, 자본주의에서의 부르주아적 민족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쏘비에트 유형의 민족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 민족은 부르주아지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음에 반해, 사회주의 사회, 쏘비에트 사회에서 민족은 새로운 유형의 민족 개념을 체현하고 있고 부르주아지가 아닌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민족 개념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에 대해 쓰딸린은 “낡은 부르주아적 민족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민족이 발생하여 발전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떠한 부르주아적 민족보다도 강하게 단결하고 있다”[18]스탈린, “민족 문제와 레닌주의”, 같은 책, p. 367.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쓰딸린의 주장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민족적 구분이 즉각적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기 동안 민족적 구분이 유지되며, 오히려 짜르 러시아에서 억압받던 민족들이 민족적 억압이 제거됨에 따라 비로소 참다운 민족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쓰딸린은 이러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는 민족과 민족어의 융합에 필요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전에는 짜르의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쏘비에트 혁명에 의해 민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민족들의 부활과 번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던 것이다.”[19]같은 책, p. 370. 즉,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을 즉각적으로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공산주의로의 이행기 혹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단계 동안)에는 민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민족의 발전의 길이 열리고 사회주의 건설은 그러한 다양한 민족들의 발전을 보장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쓰딸린 시기 쏘련에서는 다양한 민족들이 쏘연방 내의 독립 공화국 혹은 자치 공화국, 자치주를 형성하여 지역적 자결을 보장받았고, 또 수많은 민족어의 발전이 이루어져서 신문, 학교 등등이 민족어를 사용하고 민족어로 수업을 하게 되었고 민족어로 된 출판물들이 급격히 증가하여 쏘련에서 문맹 퇴치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계급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면 민족적 구분이 소멸하고 민족 간 융합이 실현될 것이지만,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민족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억압받던 민족들이 비로소 참다운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은 이러한 다양성을 전제하고 조장하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쓰딸린은 이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당신들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와 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를 동일시하고, 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뿐만 아니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에도 민족적 차이와 민족어의 소멸, 민족들의 융합과 단일한 공통어의 형성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 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는, 우선 모든 나라에서 제국주의를 일소하고, 타민족을 정복하려는 의도나 민족적 노예화의 위협에 대한 공포를 없애며, 민족적 불신이나 민족적 적의를 근본적으로 타파하고, 단일한 세계 사회주의 경제 체제 속으로 민족들을 통합시킴으로써, 모든 민족이 점차적으로 단일하게 융합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와는 다르다.”[20]같은 책, pp. 368-369. 이러한 쓰딸린의 정식화는 사회주의 건설의 조건에서 민족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할 때, 세계적 차원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성립할 때, 비로소 민족어가 소멸되고 세계 공통의 언어가 형성될 수 있으며, 민족적 구별이 소멸하고 민족들이 융합될 수 있는 조건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적 차원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성립될 때만 민족적 구별을 넘어서는 국제적 교류가 전면화되고 일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사회주의 건설의 조건에서 민족적 구별을 유지하고 또 민족적 다양성을 장려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풍요롭고 다면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향이 타당하다는 것이 쓰딸린의 위의 정식화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쓰딸린은 20세기 사회주의 건설에서 민족 정책의 기본적 관점이 되었던 정식화를 다음과 같이 수행하고 있다. “… 우리의 새로운 쏘비에트 민족의 민족 문화가 그 내용면에서 사회주의적 문화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21]같은 책, p. 376. 이러한 쓰딸린의 언급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민족 문화는 그 형식에서는 민족적이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사회주의 사회의 민족들의 문화는 형식에서는 민족적 전통과 특질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세계 노동자계급 공통의 국제주의적 내용을 담는 것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쓰딸린의 이러한 정식화는 쏘련의 현실에서 민족 문제의 해결을 사회주의 건설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쓰딸린은 쏘련에서 볼쉐비끼 당의 민족 정책을 다음과 같이 총괄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당이나 노동조합에서부터 국가나 경제 기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정 기관을 민족화하는 것, 즉 그 구성을 민족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22]같은 책, p. 377. 여기서 “그것을 위해서는”은 당시 쏘련에서 문맹의 비율이 70-80%가 되는 현실에서 문화 혁명을 이루어내면서, 모국어, 민족어를 사용하는 간부를 양성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쓰딸린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문화 혁명의 관점에서,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소수 민족 자신의 민족어의 광범한 보급 이외에는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학교, 경제 기관, 행정 기관 등에서 민족적 간부의 양성과 민족어 사용의 장려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쓰딸린은 “그 구성을 민족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쓰딸린의 이러한 주장은 그렇지만 민족주의적 접근과는 거리가 있다. 민족주의는 해당 민족의 배타적 이익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쓰딸린은 사회주의 건설의 관건적 요소인 문화 혁명의 관점에서, 문화 혁명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 수단으로 민족어의 보급과 민족적 간부의 양성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쓰딸린은 내용은 사회주의, 형식은 민족적 문화라는 정식화를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확한 민족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쏘련에서 문화 혁명은 거대한 성취를 이루었고 10여 년이 지난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쏘련에서 문맹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쓰딸린에 대해 악마화하는 제국주의자들이 쓰딸린을 공격하는 하나의 쟁점이 되는 것은 2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일부 소수 민족들을 거주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한 정책이다.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까자흐쓰딴 등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 끄림반도의 따따르족, 까프까쓰의 체첸-잉구쉬족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에 대해 제국주의자들, 반공주의자들은 쓰딸린의 강제 이주 정책이라고 보면서 쓰딸린이 소수 민족을 탄압한 사례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라는 책을 쓴 그로버 퍼이다.

쓰딸린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시작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1956년 20차 쏘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비밀 연설을 통해 쓰딸린이 까라차이족, 깔미끄족, 체첸-잉구쉬족, 발까르족을 강제 이주시켰다고 고발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로버 퍼는 그것들이 민족 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2차 대전이라는 전쟁 상황하에서 독일군에 가담한 사람들, 그러한 소수 민족에 대하여 쏘련군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군사적 차원의 조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23]Grover Furr, Khrushchev Lied(LLC Corrected Edition), Erythros Press and Media, July 2011, pp. 97-101. 그로버 퍼는 체첸-잉구쉬족과 끄림반도의 따따르족의 경우 대규모적으로 심지어 주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독일군에게 가담했다는 것을 증거를 들어 입증하고 있다. 끄림반도의 따따르족은 1939년 인구가 218,000명이었고 그중 징집 연령의 인구는 22,000명이었는데, 쏘련군에서 탈영하여 나찌 군대에 가담하여 쏘련군에 맞서 전투를 한 따따르족이 20,000명에 이르렀다고 그로버 퍼는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감옥에 보낼 경우 따따르족은 젊은 세대 전체가 사라지게 되어 젊은 세대의 결혼과 인구의 재생이 불가능하게 되어 민족 자체가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쏘비에트 정부는 끄림반도의 따따르족을 이주시켜 쏘련군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 따따르족을 민족체로서 보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쏘련 정부는 이주한 소수 민족들에게 생활이 가능하도록 물자를 지원하였고 수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체첸-잉구쉬족의 경우 1943년 자치 공화국의 인구가 450,000명이었다. 징집 가능 연령의 숫자는 40,000-50,000명이었는데 1942년 독일군의 공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14,576명의 징집자 중에서 93%인 13,560명이 쏘련군에서 탈영하여 반쏘비에트적인 반란에 가담하거나 도적 떼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체첸-잉구쉬족이 민족 차원에서 반쏘비에트로 돌아서서 독일군에게 가담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게 되었는데, 이주 과정에서 사상자는 전체의 0.25%였다(자세한 내용은 그로버 퍼의 저작을 참조하시오).

이러한 내용이 이른바 쓰딸린의 강제 이주 정책이라고 악선동되는 것의 실제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연해주의 조선인, 끄림반도의 따따르족, 까프까쓰의 체첸-잉구쉬족 등의 이주는 정상적인 민족 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의 발발 가능성 혹은 실제적인 전쟁 상황에서 군사적 위협을 감소시키기 위해 취해진 군사적 조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쏘련 정부는 소수 민족들을 무차별적으로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독일군에 대한 가담 정도, 쏘련군에 대한 위협 정도 등을 고려하여 예외를 두면서 이주 정책을 폈고 또 이주한 소수 민족들은 중앙아시아 등의 이주지에서 집단 농장 등을 꾸리면서 평온하게 생활하였다. 그리하여 흐루쇼프에 의한 쓰딸린 탄핵 이후 이들 이주한 소수 민족들에게 원래의 거주지로 돌아갈 것이 허용되었을 때 실제 원래 거주지로 돌아간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언제 연해주를 비롯한 쏘련 영토를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사적 차원에서 이주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영락하고 있었고 조선의 민족주의자들 대부분은 일제의 동화 정책에 굴복하여 민족개량주의로 돌아서서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 지배하에서 상태의 개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일제가 쏘련을 침략할 경우 활용할 표적이 되고 있었다. 쏘련의 입장에서는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일본과 합세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꾸리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후에 고려인들이라 불린 이들은 쏘련 사회 곳곳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민족적 차별이나 억압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4. 흐루쇼프, 브레쥐네프에 의한 맑스주의 민족 이론의 수정

 

흐루쇼프는 20차 당 대회에서 쓰딸린을 탄핵하여 수정주의적 행보를 노골화하였다. 이어서 경제 정책에 있어서 성(省) 중심의 부문별 관리를 지역 중심으로 개편하여 100여 개의 국민경제회의(쏘브나르호쓰)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편은 지방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고 경제에서 계획은 균열되기 시작했다. 지방주의는 그 자체로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 지방 공화국에서 지방의 이익을 우선하고 배타시하는 민족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매우 크게 띠는 것이었다.

이어서 브레쥐네프 하에서 수상 꼬씌긴의 1965년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은 개별 국유 기업들을 이윤 추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운영하게 한 것으로서 각 지방에서 부르주아적인 민족주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68년 체쓰꼬(체코) 사태에 대한 브레쥐네프의 진압은 주권 제한론을 명분으로 한 것이었지만, 이에 반발하여 쏘련 내에서 싸하로프 등의 반체제 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지방 공화국에서는 민족주의 그룹의 운동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흐루쇼프, 브레쥐네프의 수정주의는 전 인민 국가, 전 인민당 노선하에서 당의 혁명적 성격을 거세하고 당이 관료들의 집단으로 전화하게 했는데, 이러한 흐름을 기초로 중앙에서 지방의 말단 기업과 기관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노멘끌라뚜라라고 불리는 특권층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쏘련은 내적으로 균열되고 있었고, 특히 경제에서 계획의 마비는 1970년대 후반 쏘련 경제를 완전히 균열시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민족 문제에 있어서도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는데, 쓰딸린 시기에 각 민족의 평등을 엄격히 지켰던 바에 비하여 대러시아 민족주의적 경향이 서서히 성장해 갔다. 특히 브레쥐네프에 이르러서는 흐루쇼프에 의해 왜곡된 맑스주의 민족 이론을 더욱더 노골적으로 수정하여 민족 문제가 악화할 가능성을 키우고 있었고, 이는 1980년대 고르바쵸프 시기에 민족 문제의 폭발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브레쥐네프가 정권을 잡은 후에, 민족 문제상에서 흐루쇼프의 ‘새로운 역사 공동체―쏘련 인민이 형성되었다’라는 관점을 이어받았고, 가일층 발전시켜서 ‘브레쥐네프주의’적인 민족관을 형성하였다.”[24]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753. 즉, 브레쥐네프는 흐루쇼프를 하야시키고 권력을 잡은 후에 흐루쇼프의 민족관 즉, 쏘련 인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관점을 계승하였다. 여기서 ‘쏘련 인민이라는 새로운 역사 공동체’에 대해 브레쥐네프는 “쏘비에트 애국주의가 민족 감정을 초월하였다”고 하였고 또 현실 생활에서 발생하는 민족 감정의 문제를 일괄하여 “지방 민족주의”라 칭하였다.

이러한 브레쥐네프의 민족관은 그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즉, 브레쥐네프는 쏘련 사회가 이미 “발달한 사회주의”에 진입하였다고 선언하였는데, 발달한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이미 적대적 계급과 계급 투쟁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전체 사회는 갈수록 “단일한 사회”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 인민 국가”로 되었으며, 전 인민 국가는 발달한 사회주의의 정치적 상부 구조라고 선언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은 민족 문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쏘련의 각 민족은 민족 구분이 없는 통일적인 경제체를 건설했으며, 민족적 경계가 없는 “신문화”가 형성되었고, 민족 간의 결혼이 증가하고 언어와 문자의 교류 확대에 따라 “인류의 새로운 역사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이었다.[25]같은 책, pp. 735-736. 이러한 브레쥐네프의 민족관은 민족 문제가 사실상 소멸하고 있으며, 민족 감정, 민족적 경계가 무의미해졌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과 정부의 관료주의화가 진행되면서 대러시아 민족주의적 경향이 발생하고 있었고 브레쥐네프 스스로 러시아를 쏘련 전체의 맏형이라 칭하기도 했다. 브레쥐네프는 민족 구분 없는 통일적인 경제체, 민족 경계를 넘어서는 신문화를 주장했지만, 브레쥐네프 사망 후 10년이 못 되어 쏘련은 민족 문제가 폭발하여 쏘연방 자체가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브레쥐네프는 쏘련에서 민족적 구분과 경계가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관념과 현실을 혼동하는 주장이었다. 브레쥐네프 당시 쏘련은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민족 간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변방의 지방 공화국은 중앙 러시아에 비해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상태였다. 즉, 민족 구분 없는 통일적인 경제체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 구분 없는 신문화를 주장했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소수 민족의 민족 문화에 대한 억압의 구실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 브레쥐네프가 소수 민족에게 러시아어 보급 확대 정책을 폈을 때 곳곳에서 소수 민족의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브레쥐네프 시기에 잘못된 민족관과 민족적 정책을 편 결과, 쓰딸린 시기 소멸의 길을 걸었던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부활하고 있었고 변방의 공화국을 중심으로 민족적 갈등이 재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브레쥐네프의 민족관은 쓰딸린 시기의 정확한 민족 노선에 대한 수정주의적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쓰딸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이후에도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이전까지는 민족적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 민족들의 참다운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했었다. 반면에 브레쥐네프는 여전히 세계 제국주의 질서가 강고한 상황에서 쏘련 내에서 이미 민족적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고 관념적으로 민족 문제에서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었다. 이는 흐루쇼프에서 비롯된 수정주의가 브레쥐네프에 이르러 더욱더 심화되어 상황을 근본적으로 그르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5. 쏘련에서 민족 문제의 폭발과 쏘연방의 해체

 

고르바쵸프는 브레쥐네프 하에서의 정체 혹은 상황의 왜곡을 극복하려 개혁을 내세웠지만 흐루쇼프, 브레쥐네프의 수정주의적 노선과 그 결과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반쓰딸린을 기치로 하여 우편향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경제에서 상황이 악화하고, 이를 정치에서의 개혁으로 만회하려 했지만, 정치에서도 개혁이 실패하면서 쏘련 자체의 해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즉 쏘련의 해체 과정에서 직접적 발단이 된 것은 아르메니야와 아제르바이쟌 사이에서 나고르노-까라바흐 지구의 민족 분규가 폭발한 것이었다. 나고르노-까라바흐 지구는 아제르바이쟌에 속해 있었지만 그 지구의 주민은 아르메니야인이 다수였다. 특히 아제르바이쟌인은 이슬람을 신봉하고 아르메니야인은 기독교를 신봉한 것이 민족 갈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88년 12월 민족 분규는 유혈 충돌로까지 확대되었고 이후 간헐적 충돌이 이어지다가 1990년 1월 20일 아제르바이쟌의 바꾸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사태는 쏘련 전역에서 민족적 감정, 민족주의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1989년 8월 23일에는 발트 3국에서 자신들의 쏘련에의 통합의 계기가 되었던 독-쏘 불가침 조약 50주년에 항의하는 대중 시위가 발생했다. 이는 발트 3국에서 쏘련으로부터 분리와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89년 4월에는 그루지야에서 대중 시위가 발생하여 독립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해 4월 8일에는 쏘련에서 그루지야의 탈퇴를 요구하는 대중 시위가 발생하여 무력 진압되었는데 16명이 그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990년 2월에는 따쥐끄에서 대중 시위가 발생했고, 6월에는 우즈베끄에서 대중 소요가 발생하여 방화를 하기도 했다. 6월에 끼르기쓰에서는 경내에 거주하는 우즈베끄족과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9월에는 우끄라이나 개혁 쟁취 인민 운동이 쏘련으로부터 탈퇴를 요구하였다. 10월 하순 몰도바에서는 쏘련으로부터의 탈퇴와 로므니아(루마니아)와의 합병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1988년 나고르노-까라바흐에서 민족적 충돌 이후 쏘련 전역에서 민족주의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지방의 민족 공화국들에서 민족적 분규가 급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다음 해인 1991년에 이르면 쏘연방을 구성하는 각각의 지방 공화국들이 쏘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사태로 이어졌고, 결국 1991년 하반기에 쏘연방은 정식으로 해체되게 되었다. 즉, 쏘연방 해체의 직접적인 양상은 민족주의의 물결이 고조되어 각 지방의 공화국들이 독립하면서 결국 연방의 해체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보다 근본적인 것은 흐루쇼프, 브레쥐네프의 수정주의의 결과 경제에서 계획이 균열되고 정치에서 관료주의가 지배적이 되면서, 사회적으로는 특권층이 만연하여 쏘련 사회를 내적으로 해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르바쵸프는 이에 대해 개혁을 내세웠지만 문제를 전혀 잘못 짚었고, 그 결과 쏘련 사회를 해체하고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반혁명을 앞장서서 추진한 주역이 된 셈이었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칼 맑스, “폴란드에 대한 연설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이하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340.
2, 9, 14 같은 곳.
3 프리드리히 엥겔스, “폴란드에 대한 연설들”, 같은 책, p. 341.
4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의 대외 정책”, 같은 책, p. 469.
5 칼 맑스, “영국의 인도 지배”, ≪저작 선집≫ 제2권, p. 417.
6 프리드리히 엥겔스, “노동자계급은 폴란드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작 선집≫ 제3권, p. 125.
7 프리드리히 엥겔스, “반유태인주의에 관하여”, ≪저작 선집≫ 제6권, p. 312.
8 레닌, “민족 자결권”,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벼리, 1989, p. 65.
10 같은 책, p. 80.
11 레닌, “맑스주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같은 책, p. 255.
12 레닌, “‘문화적-민족적’ 자치”, 같은 책, pp. 13-14.
13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110.
15 스탈린, “맑스주의와 민족 문제”,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p. 308.
16 같은 책, p. 357.
17 같은 책, pp. 358-359.
18 스탈린, “민족 문제와 레닌주의”, 같은 책, p. 367.
19 같은 책, p. 370.
20 같은 책, pp. 368-369.
21 같은 책, p. 376.
22 같은 책, p. 377.
23 Grover Furr, Khrushchev Lied(LLC Corrected Edition), Erythros Press and Media, July 2011, pp. 97-101.
24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753.
25 같은 책, pp. 735-736.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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