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9)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9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상과 쏘련에서의 현실

 

 

1. 맑스, 엥엘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

 

맑스와 엥엘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은 한 번에, 일거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맑스와 엥엘스는 1848-1851년의 유럽 혁명을 목도하면서 서서히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수립해가기 시작했고, 1871년의 빠리 꼬뮨의 경험을 평가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맑스와 엥엘스의 이러한 국가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상은 1917년 러시아의 볼쉐비끼 혁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레닌이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제기하여 현실로서, 실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이 수립되게 하는 데 사상적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면 맑스와 엥엘스의 국가론의 형성,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형성 과정을 추적해 보자.

맑스와 엥엘스의 국가론은 사적 유물론에 기초하는 것이다. 사회가 경제적 토대와 그에 기초하는 상부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 상부구조는 국가와 이데올로기 등으로 구성된다는,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이 맑스주의 국가론의 기본 바탕이었다. 그리고 사적 유물론적 차원을 넘어서서, 맑스주의 국가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당 선언≫부터였다. 맑스와 엥엘스는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계급으로의 고양, 민주주의의 쟁취”[1]맑스ㆍ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이하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420.라고 파악하였다. 이는 노동자 혁명이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민주주의 쟁취는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올라서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맑스와 엥엘스는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2]같은 곳.라는 주목할 만한 정식화를 이루었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를 통해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국가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악은 노동자 혁명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이후에도,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은 즉각적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단계 동안 지속될 것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 도달한 맑스와 엥엘스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발전 과정 속에서 계급적 차이들이 소멸되고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면, 공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정치권력이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폭력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단결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만들고, 또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폭력적으로 폐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 대립의 존립 조건들과 계급 일반을 폐기하게 될 것이고, 또 이를 통해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기하게 될 것이다.”[3]같은 곳. 아직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정식화는 이루고 있지 못하지만 여기에는 맑스, 엥엘스의 국가론 사상이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하에서 공권력이 정치적 성격을 상실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에서의 부르주아 국가 권력과 사회주의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국가 권력의 성격의 차이를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은 계급 지배의 도구라는 것이 선명히 나타나 있고, 또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여 낡은 생산관계를 폐기하여 계급 대립을 소멸시킨다면 국가는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는 뛰어난 정식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이른바 준(準)국가, 본래적 의미의 국가가 아닌 국가로 불리는 이유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맑스와 엥엘스는 계급 대립, 계급의 폐지와 국가의 문제를 연관시켜서 국가의 본질,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성격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급 일반이 폐기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으로서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기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은 국가의 소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당 선언≫에서의 정식화는 아직 맑스주의 국가론의 완성은 아니지만, 그 국가론의 제반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맹아적 형태의 맑스주의 국가론이라 할 수 있다.

맑스와 엥엘스의 국가론의 사상은 1848년 발발한 유럽 혁명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구체화의 길을 걸으면서 획기적인 진전을 보인다. 맑스는 프랑스에서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이 비록 패배했지만 “부르주아지의 전복! 노동자계급의 독재!”[4]칼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저작 선집≫ 제2권), p. 30.라는 혁명적인 전투 구호를 내놓았다고 분석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 과정에서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환상 속에서 많은 오류를 범한 결과 패배했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전복을 이루어야 하며,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실현해야 함을 노동자계급이 깨우쳤다는 것을 맑스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1848년 혁명의 패배의 분석 속에서 다음과 같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독재라는 정식화를 끌어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더 혁명적 사회주의의 주변에, 즉 부르주아지 자신이 블랑끼라는 이름을 고안하여 붙여 준 공산주의의 주변에 집결하고 있다. 이 사회주의는 혁명의 영속 선언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독재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독재는 계급 차별 일반의 철폐로 가기 위한, 이 계급 차별이 근거하고 있는 전체 생산관계들의 철폐로 가기 위한, 이 생산관계들에 조응하는 전체 사회적 연관들의 철폐로 가기 위한, 이 사회적 연관들로부터 기인하는 전체 이념의 변혁으로 가기 위한 필연적 경과점이다.”[5]같은 책, p. 94. 계급 대립의 철폐로 가기 위한 경과점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독재! 이것이 혁명의 패배 속에서 맑스가 건져 올린 혁명의 교훈이며, 맑스주의 국가론의 정식화였다.

또한 맑스는 1848년의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외적 평화가 필요함이 드러났다는 것, 그리고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열강이 유럽의 약소민족들을 침해하는 것을 분석하면서 민족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관계에 대한 주목할 만한 분석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민족 혁명의 운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운명에 종속되었으며, 민족 혁명의 외관상의 자립성, 거대한 사회적 변혁으로부터의 독립성은 사라졌다. 노동자가 노예로 머물고 있는 한, 헝가리 인도 폴란드 인도 이탈리아 인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이다!”[6]같은 책, p. 31. 이러한 분석은 일국 내의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립과 발전이 대외적 평화, 대외적 조건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19세기 중반 당시의 유럽의 정치 지형에 대한 분석이지만, 중요한 것은 민족 문제, 나아가 민족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분리되지 않고 연관되어 있다는 통찰로서, 이러한 통찰은 21세기 지금도 보편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운명에 종속되었다는 맑스의 분석은, 분단 사회로서 민족적 과제와,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중첩적으로 안고 있는 한국 사회의 변혁의 전망의 문제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것이다.

맑스는 1848년부터 진행된 프랑스 혁명을 총괄한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정식화를 이루고 있다. “끝으로 의회 공화제는 혁명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탄압 수단들을 강화함과 아울러 정부 권력의 수단을 강화하고 더욱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변혁들은 이 기구를 파괴하는 대신에 그것을 완성하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배권을 다투던 당파들은 이 거대한 국가 건물의 점유를 승리자의 주요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7]칼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저작 선집≫ 제2권), p. 381. 여기서 맑스는 기존의 모든 변혁, 즉 혁명들이 이 기구, 즉, 국가 기구들을 파괴하는 대신에 그것을 완성하였고 지배권을 다투는 당파, 정치세력들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는 대신에 국가 기구들을 전리품으로 획득하려고 했다는 것을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달리, 기존의 국가 기구를 혁명의 전리품으로 획득할 수 없으며, 우선적으로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했던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독재는 기존의 국가 기구를 인수하고, 획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기존의 국가 기구를 철저히 파괴하는 기초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기한 것이었다. 사실, 관료제와 상비군을 핵으로 하는 부르주아 국가 기구는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의 계급 지배의 도구라는 점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이익에 봉사할 수는 없으며, 정반대로 반혁명 세력의 집결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기존의 국가 기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계급 지배를 실현할 수 없다는 인식은 맑스주의 국가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발전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맑스는 1848년 혁명의 파고가 지나간 후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1852년 3월 5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 관해서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계급들의 존재를 발견한 공로도, 그 계급들 사이의 투쟁을 발견한 공로도 나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네. 부르주아 역사 서술가들은 나보다 훨씬 앞서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하였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 계급들의 경제적 해부학을 서술하였네. 내가 새로이 한 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증명한 것이네. 1. 계급들의 존재는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들과 연결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 2.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결된다는 것; 3. 이러한 독재 자체는 단지 모든 계급의 지양으로 가는, 그리고 계급 없는 사회로 가는 이행기를 이룰 뿐이라는 것.”[8]칼 맑스, “맑스가 뉴욕의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저작 선집≫ 제2권, p. 497.

이러한 맑스의 정식화는 계급의 존재와 그 개념 그리고 계급 대립과 계급투쟁에 대한 승인만으로는 맑스주의를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며 계급투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립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승인할 때만 온전히 맑스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말 제2 인터내셔널의 개량주의화, 20세기 쏘련에서 흐루쇼프 수정주의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부정과 전 인민 국가론의 출현, 20세기 유로 꼬뮤니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와 개량주의화 등을 볼 때, 혁명의 근본 문제인 국가 권력의 문제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승인 여부는 개량주의, 수정주의인가, 아니면 혁명적 세력인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점은 앞으로 21세기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의 시금석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면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 완성되는 계기가 되었던 빠리 꼬뮨의 경험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맑스는 빠리 꼬뮨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것은 국가 권력을 지배계급의 한 분파로부터 다른 한 분파로 이전시키기 위한 혁명이었던 것이 아니라, 계급 지배의 이 무시무시한 기구 자체를 부수기 위한 혁명이었다.”[9]칼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첫 번째 초고”, ≪저작 선집≫ 제4권, p. 16. 이것은 맑스가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파악한 점,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인수할 수 없으며 우선적으로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해야 한다는 점을 빠리 꼬뮨이 실행했다고 파악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꼬뮨―그것은 사회를 통제하고 제압하는 대신에 사회 자신의 살아 있는 힘으로서 사회가 국가 권력을 다시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억압의 조직된 힘 대신에 자기 자신의 힘을 형성하는 인민 대중 자신이 국가 권력을 다시 흡수하는 것이다”[10]같은 책, p. 18.라고 맑스는 꼬뮨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다. 엥엘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국가는 사회로부터 나왔지만 사회 위에 서서,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소외되는 조직이라고 파악한 바 있었는데, 맑스는 빠리 꼬뮨에 대한 분석에서 사회가 국가 권력을 다시 흡수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다시 국가를 흡수한 결과로서의 빠리 꼬뮨이기에, 그것은 준(準)국가 즉, 더 이상 국가가 아닌 국가가 되는 것이며 계급 대립의 철폐의 결과, 소멸의 길을 걷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꼬뮨의 성격에 대해 맑스는 “사회적 해방의 정치적 형태”라는 뛰어난 정식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것이 꼬뮨이다―사회적 해방의 정치적 형태, 즉 노동자 자신에 의해 창조되었거나 자연의 선물인 노동 수단의 독점자들에 의한 찬탈(노예제)로부터의 노동 해방의 정치적 형태.”[11]같은 책, p. 20. 맑스는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에서 사회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의 관계를 심도 깊게 분석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정치적 해방을 이루는 것이 곧 사회적 해방은 아니라는 것, 국가 차원의 정치적 해방은 시민사회 차원의 사회적 해방, 즉, 계급의 철폐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맑스는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자에서 사회적 해방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자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빠리 꼬뮨은 자본과 임금 노동의 착취관계를 철폐하는, 계급을 철폐하는 사회적 해방을 내용으로 하며, 꼬뮨이라는 형식은 이러한 사회적 해방을 이루는 정치적 형식이라고 맑스는 정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노동자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이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12]같은 책, p. 61.라고 파악하면서, 빠리 꼬뮨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한 후 무엇을 건설했는가를 분석한다. “따라서 꼬뮨의 첫 번째 훈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꼬뮨은 빠리의 다양한 구에서 보통 선거권을 통해 선출된 시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책임이 있었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당연히 노동자들이거나 노동자계급의 공인된 대표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꼬뮨은 의회 단체가 아니라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단체이어야 했다. 이제까지 국가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즉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속성을 벗어 버리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꼬뮨의 도구로 전환되었다. 다른 모든 행정 부문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뮨 의원들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 꼬뮨은 교회가 재산 소유 단체인 한에서 모든 교회의 해산과 교회 재산의 몰수를 포고하였다. … 모든 교육 기관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개방되었고, 동시에 국가와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깨끗해졌다.”[13]같은 책, pp. 64-65. 이러한 맑스의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교회를 포함한 기존의 국가 기구가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선출된 꼬뮨의 대표들이며, 그들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꼬뮨의 일을 수행하였고, 꼬뮨 자체는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입법의 기능과 행정의 기능이 통일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꼬뮨은 군대와 관료라는 양대 지출 원천을 중지시킴으로써 모든 부르주아 혁명의 슬로건―값싼 정부―을 현실로 만들었다.”[14]같은 책, p. 67. 또한 “꼬뮨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계급에 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계급의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음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15]같은 곳. 이러한 맑스의 분석은 빠리 꼬뮨이 자본과 임금 노동의 착취관계를 철폐하는, 계급 대립을 철폐하는 정치 형태이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실현하는 정부가 어떠한 성격과 형태의 정부인가를 마침내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의 경우도 그 과정에서 일정한 변형은 있었지만 쏘비에트 권력은 기본적으로 빠리 꼬뮨형의 정부였던 것이다. 빠리 꼬뮨에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의 완성된 정치 형태를 발견함으로써 맑스는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론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러시아 혁명을 통하여 실천적 형태로, 쏘비에트 권력으로 전화될 수 있었다.

맑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식화를 완성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16]칼 맑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저작 선집≫ 제4권, p. 385. 이것은 맑스의 원숙한, 완성된 형태의 정식화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정치적 이행기라는 개념이 나타나 있다. 1960년대 중-쏘 논쟁에서 이 이행기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까지의 시기인가, 아니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기인가가 논쟁되었을 정도로 이 이행기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행기라는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후에 즉각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고, 그리고 자본주의의 유물이 남아 있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와, 자본주의의 유물을 청산하고 자신의 두 발로 서는 무계급 사회,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라는 단계 구분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행기라는 개념을 포착함으로써, 맑스주의의 과학성은 한층 정교하고 풍부하게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혁명과 20세기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엥엘스는 국가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인민 국가’라는 제2 인터내셔널의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였다. 이 개념은 20세기 중반 흐루쇼프의 ‘전 인민 국가론’과 사실상 동일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인민 국가론에 대한 엥엘스의 비판은 흐루쇼프의 전 인민 국가론에 그대로 적용되는 비판이기도 하다. 엥엘스의 자유로운 인민 국가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자유로운 인민 국가가 자유로운 국가로 변합니다. 문법적으로 볼 때, 자유로운 국가는 국가가 그 시민들에 대해서 자유로운 것, 따라서 전제 정부를 가진 국가입니다. 국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며, 특히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가 결코 아닌 꼬뮨 이래로는 그렇습니다. 프루동에 반대하는 맑스의 저술과 그 후의 ≪공산주의당 선언≫이 사회주의적 질서의 도입과 함께 국가는 저절로 해소되며 소멸된다고 이미 직접적으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 국가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넌더리가 나도록 우리 면전에 던져졌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이 투쟁에서, 혁명에서, 적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쓰이는 일시적인 장치일 뿐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인민 국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순전히 난센스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여전히 국가를 사용하는 한, 그것은 자유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자유가 화제로 될 수 있게 되자마자 국가로서의 국가는 현존하기를 중단합니다.”[17]프리드리히 엥겔스, “엥겔스가 쯔비까우의 아우구스트 베벨에게”, ≪저작 선집≫ 제4권, pp. 458-459.

국가는 계급적 억압의 도구이기 때문에 억압이 아닌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국가는 인민 국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이기를 멈추게 된다는 점이 엥엘스에 의해 설득력 있게 논증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 국가라는 단어에 자유라는 단어를 수백 번 갖다 붙이더라도 그 개념의 비과학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인민 국가는 개념적으로 엄밀히 분석하면 인민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국가가 인민에 대해 자유로운 국가, 즉, 전제적인 국가라는 점이 엥엘스의 논리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흐루쇼프의 전 인민 국가는 전 인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 즉, 전 인민 위에 서서, 전 인민으로부터 멀어지는 국가이며, 결국은 관료주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점이 엥엘스의 논리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계급 억압의 도구이기 때문에 전 인민 국가는 인민과 구분되는 관료 집단이 전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쏘련에서 흐루쇼프 이후 관료 집단을 중심으로 한 특권층(노멘끌라뚜라)의 발생, 그리고 쏘련의 해체에서 관료 집단의 주도적 역할은 전 인민 국가론이 엥엘스의 비판과 같이 전 인민에 대한 억압 국가였음을 실증한 것이다.

엥엘스는 ≪반듀링론≫에서 맑스주의 국가론을 대중적으로 평이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정식화하는 공헌을 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생산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전화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양하며, 그리하여 모든 계급 차이와 계급 대립을 지양하고, 그리하여 국가로서의 국가도 지양한다. … 국가는 마침내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가 되면서 자기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 국가가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서 취하는 최초의 행동―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점유 획득하는 것―은 동시에 국가로서의 최후의 자립적 행동이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은 한 분야 한 분야에서 차례로 불필요하게 되어 나중에는 저절로 잠들게 된다. 사람들에 대한 통치 대신에 물건들의 관리와 생산 과정의 지휘가 등장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18]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듀링 씨의 과학변혁(반듀링)≫(≪저작 선집≫ 제5권), pp. 308-309. 국가가 사회 전체를 대표하게 되면, 즉, 전 인민을 대표하게 되면 국가는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 점에서도 흐루쇼프의 전 인민 국가론의 비과학성을 알 수 있다―이 엥엘스에 의해 명료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사회 전체를 대표하여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은, 계급 억압 도구라는 의미의 국가로서 행하는 최후의 자립적 행동이며, 이후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정은 자본가계급의 잔재와 그 유물에 대한 억압이 본질이며 여타의 사회관계, 즉, 시민사회 차원에서는 국가의 개입이 점차 불필요하게 되며, 억압해야 할 자본가계급의 잔재, 유물이 사라지는 것에 비례하여 국가는 점차 잠들게 된다는 것, 즉,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 엥엘스에 의해 정식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인민 국가 혹은 흐루쇼프류의 전 인민 국가는 비과학적이며 그것이 현실화될 경우 관료주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국가의 발생을 보면, 원시공동체에서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으로 사적 소유가 발생하여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하고 그 계급 분열이 치유될 길이 없을 정도로 심화되었을 때, 계급 대립의 비화해성의 결과로, 사회와 구분되는 특수한 도구, 계급 억압 도구로서 국가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계급적 본질은 자본주의 사회, 나아가 사회주의 사회에도 의연히 관철되는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이 일정 단계 이루어져 더 이상 억압해야 할 자본주의의 잔재가 없게 된다면,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 인민 국가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게 되며, 사회는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인민 스스로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조금 더 분석해보자. 엥엘스는 ≪반듀링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에 의한 생산수단의 점유 획득과 함께 상품 생산은 제거되며, 그럼으로써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제거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화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19]같은 책, p. 311. 생산수단이 자본가계급으로부터 탈취되어 사회화되면, 상품 생산은 그 존재 기반이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상품 생산은 사적 생산자의 생산물이 화폐를 통해 교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은 사적 생산이 아니라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이며 또 생산수단의 경우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고 직접 국유 기업에서 국유 기업으로 이전되기 때문에 상품이 아니다. 그런데 쏘련의 경우 화폐가 존재했는데, 이는 쏘련에서 상품 생산이 잔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쓰딸린은 쏘련에서 가치법칙이 존재한다는 점을 승인했고 또 노동자계급의 공업에서의 국유, 전 인민 소유의 생산물과 농민의 집단 농장의 협동조합적 소유의 생산물의 교환은 상품 교환의 성격을 띤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쏘련에서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에서와 같이 생산을 규제하는 조절자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잔존하는 것이었다. 쏘련에서, 계획 경제에서 생산의 조절자 역할을 한 것은 가치법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경제 계획이었고 가치, 가격, 신용대출, 화폐, 임금 등의 범주는 계획의 하위에 있는 범주였다. 그런 점에서 쏘련에서, 나아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건설 단계에서는 잔존하는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계획 경제라는 점이 도출된다. 그러나 그때의 상품-화폐 관계는 자본주의와 달리 잔존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경제적 범주들은 계급성을 탈각하고 사회주의적으로 변형된다. 예를 들면 임금이라는 범주는 사회주의 사회에도 존재하지만 노동력 자체가 이미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라는 규정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넘어서게 되며 노동자는 임금으로 잉여노동의 상당 부분도 수취하게 되고 나아가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렴한 주택 비용 등 필요에 의한 분배도 상당 부분 수취하게 된다.

이와 같이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기로서 논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의 유물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사회이며,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 소생산적 사적 소유가 극복된 이후에도 잔존하는 상품-화폐 관계의 영향을 일정하게 받게 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제국주의에 의한 반혁명의 가능성 이외에도,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수립된 이후에도 잔존하는 상품-화폐 관계로 인해 사회주의 사회가 이행기의 사회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흐루쇼프의 주장과 같이,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 이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종식되고 전 인민 국가로 전환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행기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집단 농장의 협동조합적 소유가 공업과 같이 전 인민 소유로 발전하여 상품-화폐 관계가 소멸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실천

 

레닌은 맑스, 엥엘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을 제국주의 시대에 맞게 심화하고 발전시켰다. 레닌이 유명한 ≪국가와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을 정리하고 심화시켰던 것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 께렌쓰끼 정권의 체포령을 피해 도피하고 있을 때였다. 즉, 레닌은 10월 혁명을 목전에 두고 혁명과 국가의 문제, 노동자계급의 국가론을 총괄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국가론,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문제가 심화되어 있고 직접적인 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이었다.

레닌은 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념 규정한다. “국가란 계급 적대감의 화해불가능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그러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란 계급 사이의 대립이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경우에, 그리고 화해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 반대로 국가라는 존재는 계급 간의 적대감이 화해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20]레닌, ≪국가와 혁명≫, 논장, 1988, p. 18. 국가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규정은 엥엘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전개되었던 국가의 발생에 대한 이론을 기초로 한 것이다. 여기서 레닌은 엥엘스의 견해에 기초하여 ‘계급 적대감의 화해불가능성’의 산물로서 국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레닌의 견해는 타당한데, 국가는 사적 소유의 발생으로 인한 계급의 발생과 동시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발생한 계급들의 대립이 화해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의 발생과 국가의 발생 사이에는 장구한 기간이 존재하며 중국의 경우 그 기간은 약 천 년에 달하기도 한다(曾宪义 主编, ≪中国法制史≫, 北京大学出版社ㆍ高等教育出版社, 2001). 그런 점에서 계급의 대립이 화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국가가 발생했다는 레닌의 분석은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국가 권력의 존재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이, 독점자본과 민중의 대립이 화해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립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대규모 생산에서 담당하게 되는 경제적 역할 덕분에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모든 노동 대중과 피착취 대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 이외의 노동 대중과 피착취 대중은 프롤레타리아트보다도 어떤 때는 더 많은 착취와 탄압과 억압의 대상이 되면서도 자신의 해방을 위한 독자적인 투쟁을 수행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것은 지배계급으로 되어가면서, 부르주아지의 필연적이고 결사적인 저항을 억누를 능력을 지니고, 새로운 경제 체제로 모든 노동 대중과 피착취 대중을 조직화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 …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할 중의 최고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이다.”[21]같은 책, p. 40. 노동자계급은 모든 민중들 가운데 생산에서의 지위에 의해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투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적일 수 있다는 점, 그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여타 민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점,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투쟁 중 최고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의 장악, 정치적 지배이며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기본 골간이다.

레닌의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러시아만의 상황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걸치는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와 싸우면서 정립되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레닌은 “단지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확장하는 사람만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22]같은 책, p. 49.고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의주의적 조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라는 맑스와 엥엘스의 사상을 흐리면서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혁명적 파괴를 회피하던 것과 연관이 있다. 레닌은 10월 혁명 전야에 이러한 제2 인터내셔널의 조류와 선을 그으면서 맑스와 엥엘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복원했던 것이다.

레닌은 맑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정식화했던,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이라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응용하고 있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23]같은 책, pp. 50-51.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한편으로 맑스의 주장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행기에 있어서 다양한 정치적 형태의 창출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20세기 사회주의만 보더라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쏘련의 쏘비에트 권력이라는 형태, 동유럽 사회주의 여러 나라의 다양한 형태, 중국의 인민민주독재 등 다양하게 관철되었는데, 이 모든 형태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던 것이다.

≪국가와 혁명≫에서 두드러지는 레닌은 공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통일시켜서 다루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승인하는 하나의 국가,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강제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대중의 한 부류가 여타 다른 부류에 대하여 권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체 이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24]같은 책, p. 104. 이러한 레닌의 접근은 민주주의를 그 내용을 떠나, 즉,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가와 무관하게,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시하는 속류적인 접근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레닌은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가를 전제로,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라고 정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국가를 전제로 하고 또 부르주아 국가를 산출하게 되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산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속류적 견해(예를 들면 카우츠키의 민주주의론)를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통일성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상호 간에 서로를 전제하고 서로를 규정한다는 점이 레닌의 위의 언급에서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이다.

레닌의 민주주의론은 형식적 평등에서 실절적 평등의 문제로 전진하는 것이다. 레닌은 민주주의는 평등을 의미하지만 그 평등이 형식에 머물지 않으려면 계급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제기한다. 또한 계급이 폐지되어 생산수단과 관련되어 평등이 실현되자마자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라는 실질적 평등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의 실질적 평등은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민주주의의 구호 아래 형식적 평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용으로, 실질적 평등으로 전진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완전해지면 완전해질수록 민주주의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25]같은 책, p. 125. 이와 같이 민주주의의 발전은 그 극한에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계급적 억압과 계급 사회의 잔재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다한 후에 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즉, 10월 혁명 전에 혁명 후 과제의 주요한 것으로서 회계(account)와 통제(control)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회계와 통제―이것은 최초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순탄한 노동’과 적절한 기능을 위해 필요한 주된 것이다.”[26]같은 책, p. 124. 회계와 통제는 10월 혁명 후에 레닌이 가장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로 제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회계가 정확해야 생산의 조직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며, 노동자 통제는 자본가들의 사보타지를 분쇄하고 생산에서 노동자의 지배를 실현하는 주요 고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레닌은 10월 혁명 전에 이미 혁명 승리 이후의 긴급한 과제에 대한 주요한 상을 그리고 있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분석하고 구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상은 10월 혁명을 통해 러시아 전역에서 실현되게 되었다. 레닌과 볼쉐비끼 당은 10월 혁명 직후에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국유화하여 지주계급을 폐지하였고, 이어서 은행, 철도, 공장 등 자본가들이 장악하고 있던 생산수단과 주요 관제고지를 몰수하고 사회화하여 농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본가계급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에서 노동자계급은 농민계급과 동맹하여 백위군에 맞서게 되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고 원칙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다”[27]레닌,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3권, 거름 출판사, p. 165에서 재인용.라고 파악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일 계급의 권력임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여타 계급과의 동맹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피억압 근로 대중과의 동맹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여 작동하는 체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제국주의의 간섭과 백위군과의 내전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과의 동맹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볼쉐비끼 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레닌은 혁명 첫날부터 농민과의 동맹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사회혁명당 좌파에게 양보하여 토지의 농민에 대한 평균적 분배를 실현했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토지의 평균적 분배 자체는 사회주의적 조치가 아니지만,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전제된다면, 사회주의로 가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레닌은 파악했다. 그리고 내전 과정에서 볼쉐비끼 당은 농민들에게서 잉여 식량을 징발하면서도, 전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공장에서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용품과 농기구 등을 생산하여 잉여 식량과 일용품의 교환을 실현하려 노력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백위군의 점령지가 확대되면서 백위군이 토지 혁명의 성과를 무력화하고 토지를 이전의 원소유주에게 반환하는 조치를 시행함에 따라, 농민들은 이전의 관망하던 태도에서 전환하여 자신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볼쉐비끼 당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농민에 대한 동맹 정책이 내전의 승리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혁명 후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한 레닌의 노선은 1918년 4월에 쓴 ≪쏘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라는 글에서 잘 드러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정립했던 회계와 통제의 문제를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전면에 내세웠다. “결정적인 것은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전국적 규모의 회계와 통제의 조직화이다.”[28]Lenin, The Immediate Tasks of The Soviet Government, Selected Works(Three Volumes), Vol. 2, Progress Publishers, p. 592. 이러한 레닌의 견해는 혁명 후에 가장 긴급한 것은 자본가계급을 폐지하고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생산과 분배를 노동자계급이 조직하는 데 성공할 때만 노동자계급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지배계급으로 역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자본가계급에 대한 수탈이라는 과제와 회계와 통제의 조직화라는 과제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것과 동일한 속도로 자본을 계속해서 수탈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패배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적인 회계와 통제가 명백하게―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직접적으로 “수탈자를 수탈하는” 사업보다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29]Ibid., p. 593. 이러한 레닌의 견해는 혁명이, 한편으로 수탈자를 수탈하는 사업을 지속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으며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를 위한 회계와 통제의 문제와 수탈자에 대한 수탈의 문제가 상호 균형을 맞추면서 전개되어야 함을 제기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탈자를 수탈하더라도 생산과 분배의 문제에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반혁명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우리는 억압의 방법에 의해 승리를 얻었다; 우리는 또한 관리(행정, administration)의 방법에 의해 승리를 얻어야 한다.”[30]Ibid., p. 594.고 제기했던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관점에서 부르주아 전문가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자 임금보다 높은 봉급을 주면서 활용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예를 들자면, 빠리 꼬뮨의 원칙들로부터 후퇴하고 이탈하는 이러한 조치는 많은 부르주아 전문가에 대한 높은 봉급이었다. … 이러한 종류의 타협은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자신의 발로 전국적 규모의 회계와 통제를 굳건하게 세울 때까지 필요할 것이다”[31]Ibid., p. 621.라고 말했다. 또한 레닌이 빠리 꼬뮨의 원칙으로부터 이탈하는 타협의 또 하나의 사례로 든 것은 인민무장과 구별되는 상비군, 정규군을 창설한 점이었다.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에서 쏘비에트 권력은 점차 정규군을 창설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백위군,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는 인민무장으로 충분하지만, 제국주의의 간섭과 맞서는 데는 인민무장만으로는 부족하며, 정규군을 창설해야만 제국주의 군대와 맞설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권력의 성격이 문제되었을 때 레닌은 다음 세 가지로 쏘비에트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제기했다. 첫째, 선거권자가 노동, 피착취 인민이며, 부르주아지는 선거에서 배제된다는 것, 둘째, 선거에 대한 모든 관료적 형식과 제한이 폐지되고 인민 스스로가 선거의 절차와 시기를 결정하며, 자유롭게 선출된 자를 소환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노동인민의 전위, 즉, 대규모 산업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상의 대중적 조직이 창출되었다는 점 등이 쏘비에트의 사회주의적 성격의 근거로 제시되었다.[32]Ibid., pp. 613-614.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심화, 발전시켰다. “쏘비에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러시아적 형식이다.”[33]Lenin, The Proletarian Revolution and The Renegade Kautsky, Selected Works(Three Volumes), Vol. 3, p. 40. 이러한 레닌의 규정은 쏘비에트가 빠리 꼬뮨형의 국가 권력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쏘비에트의 성격이 노동자계급의 독재, 정치적 지배의 형식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이를 기초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민주주의 일반을 대립시키는 카우츠키의 주장을 폭로하면서 계급을 떠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자본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계급의 대중조직인 쏘비에트가 왜 국가 기구로 전화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카우츠키가 외면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카우츠키가 노동자계급의 최상의 민주주의 조직인 쏘비에트 조직의 국가 기구로의 전화,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구로의 전화에 대해 모른 체한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34]Ibid., p. 43. 여기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전화라는 정식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레닌은 계급을 떠난 민주주의는 없다는 전제 하에, 볼쉐비끼에 의한 제헌의회의 해산을 비난하는 카우츠키를 반박하고 있다. 레닌은 혁명의 이익이 부르주아 의회인 제헌의회의 형식적 권리보다 높다고 주장하며, 러시아에서 제헌의회는 어느 계급의 기관인가에 대해 카우츠키가 회피하고 있음을 폭로했다.[35]Ibid., p. 49. 또한 레닌은 부르주아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불가피한 특징은 아니며 그것은 러시아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고 분석하면서, 부르주아에 대한 선거권의 허용 문제는 향후 발발할 각국의 혁명의 특수성에 따라 해결될 성질의 것임을 제기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심도 깊게 분석하는데, 부르주아 의회의 지역 단위 선거구와 다른, 공장 등 생산 단위 선거구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쏘비에트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른 한편으로 노동인민이 정부 기구에 가깝게 다가서도록 조직되어 있다. 국가의 쏘비에트 조직 하에 입법과 집행의 권위를 결합시키고, 지역 선거구를 생산 단위―공장―선거구로 대체한 것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36]Ibid., p. 105.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지역 선거구를 공장 등 생산 단위 선거구로 변경한 것이, 쏘비에트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입법과 집행의 통일과 같은 성격의 조치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생산 단위 선거구는 쏘비에트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보장하기 위한 계급적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쓰딸린이 1936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생산 단위 선거구를 지역 선거구로 변경한 것은 실책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레닌은 관료주의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는 전체 인민이 정부의 사업에 참여할 때만, 관료주의에 대해 가장 철저하고 완전한 승리를 할 수 있다. … 법률과 별도로, 어떤 법률에도 종속될 수 없는, 문화 수준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낮은 문화 수준의 결과는, 강령 상으로는 노동인민에 의한(by) 정부 기관인 쏘비에트들이 사실상 전체로서의 노동인민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적 부문에 의한 노동인민을 위한(for) 정부 기관이라는 점이다.”[37]Ibid., p. 127. 관료주의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견해는 첫째, 관료주의가 노동인민의 민주주의의 철저한 발전에 의해서만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이라는 점을 말하며, 둘째, 노동인민의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철저히 발전하려면 단기간의 사업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노동인민의 문화 수준을 제고해야만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료주의에 대해 단기간의 정치 혁명의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뜨로쯔끼의 견해는 레닌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이다. 또 쏘련에서 수정주의가 발생하여 관료주의 국가가 성립하고 끝내 관료들에 의해 쏘련이 해체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관료들에 대해 정치혁명의 방식을 통하여 관료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은 좌편향적인 것이며,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성립을 전후하여 당시 조건에 맞게 관료에 대한 노동대중의 선출, 소환, 파면을 철저히 시행하고 그 범위를 확대하는 노력, 즉,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고도화를 통하여 관료주의를 극복해 가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의 문제, 사회주의 건설과 계급투쟁의 연관의 문제에까지 미치고 있다. 레닌은 “사회주의는 계급의 폐지를 의미한다”[38]Lenin, Economics and Politics in Era of Dictatorship of Proletariat, Selected Works(Three Volumes), Vol. 3, p. 234.고 정식화하고 있다. 이러한 레닌의 견해는 사회주의 건설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즉, 사회주의 건설은 계급의 폐지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레닌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본가계급의 부활을 통해 생산력 발전을 도모하는 현대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론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가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건설의 관점에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중국 수정주의와는 정반대되는 견해인 것이다.

레닌은 “계급은 한 방의 타격으로 폐지될 수 없다. 그리고 계급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독재는 계급이 사라질 때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없다면 계급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계급들은 남아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에 모든 계급은 변화를 겪고 있으며, 계급들의 관계 또한 변화하고 있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다른 형태를 띨 뿐이다”[39]Ibid., p. 236.라고 분석했다. 계급투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에 사라지지 않으며 단지 다른 형태를 띨 뿐이라는 레닌의 견해는 계급투쟁의 종식을 근거로 전 인민 국가론을 선언한 흐루쇼프와 또 계급투쟁의 시대는 지나갔다며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 건너뛴 중국의 덩샤오핑을 반박하는 것이다. 또한 향후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질 경우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에도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다양한 내용과 형식에 대한 준비와 노력이 이루어질 때, 사회주의 건설은 순조로울 것이다.

한편, 브레쥐네프 시대의 공식적 입장을 반영하는 ≪소련공산당사≫ 제3권(거름 출판사)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에 대한 주목할 만한 서술이 있다. “새로운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국가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강화하고, 근로자의 국가적 단체나 그 밖의 사회 단체와 당의 정확한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1918년 봄에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권력 기구가 거의 완성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는 당, 소비에트, 노동조합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당과 소비에트의 올바른 관계였다. 당은, 국가 권력인 소비에트에 자주적으로 활동할 여지를 주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 안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보장하는 형태로 서로의 관계를 완성했다.”[40]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57.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라는 개념은 레닌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쓰딸린에 의해 계승된 것인데 그것에는 당, 쏘비에트, 노동조합이 포괄되며, 그중에서도 당과 쏘비에트의 관계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기구는 쏘비에트이며, 따라서 쏘비에트 권력은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실태가 된다. 그러면 당은 무엇인가? 위 인용문에서는 당의 지도적 역할의 보장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 안에서 당은 권력 기관이 아니라, 국가 기구인 쏘비에트와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지도 기관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즉, 당의 본질은 권력 기관이 아니라 지도 기관인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제 내용은 쏘비에트 기구에서 수행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쏘비에트는 강제력을 담보하는 권력 기구로서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국가 기구가 아니라 대중조직으로서의 본질을 가지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에서 국가 기구인 쏘비에트와 구분되는 시민사회의 조직으로서 당이 결정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권력으로써, 강제력으로써 수행하는 사안과 내용을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헤게모니적으로 수행하고 실행하는 위상을 갖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에서 당은 지도적 역할, 쏘비에트는 권력을 통한 실행, 노동조합은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당과 쏘비에트의 관계를 정리하면, 특히 쓰딸린 말년에 당과 쏘비에트 중에서 어디에 실제적인 권력의 소재를 둘 것인가의 논쟁을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당원이 권력을 갖는 것은 그가 당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 하에서 노동자계급의 일원이라는 점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 그 당원이 국가 기구의 성원이라면 당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 기구의 성원이라는 점 때문에 권력을 갖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당원으로서 역할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사상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고 지도할 수 있는 노선의 정립에 기여하고 또 그 노선을 관철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과 쏘비에트, 즉 국가의 관계를 정리하면, 당은 사상에 기초한 노선을 정립하고 관철하는 지도 기관이며, 쏘비에트 국가는 권력 기구로서 자본가계급과 그 유물에 대한 계급적 억압을 중심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내용과 원칙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이 이렇게 국가와의 관계를 정립해 가는 것은 결정적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럴 때만 국가 기구가 계급적 원칙에서 벗어나고 관료주의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고, 또 당 스스로는 출세주의 분자, 관료주의 분자들이 당에 스며들어 성장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당원의 관료화, 당의 관료주의화가 저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쓰딸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실천

 

쓰딸린은 30여 년간 쏘련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또 일정한 오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쓰딸린은 이론보다도 실천이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쓰딸린의 실천은 이론과 분리된, 이론과 무관한 실천이 전혀 아니었으며,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은 쓰딸린만이 아니라 볼쉐비끼 당 전체, 그리고 쏘비에트 국가 기구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쓰딸린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쓰딸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은 레닌의 이론을 계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쓰딸린은 뜨로쯔끼에 맞서 레닌주의를 수호하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발전시켰다. 쓰딸린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인 ≪레닌주의의 기초≫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격이 세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에 대해 쓰딸린은 혁명이 특정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를 지닌 기관을 창출하지 않으면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할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둘째,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에 대해 쓰딸린은 쏘련의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지를 배제한다는 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평화로운 발전의 결과 생성될 수 없다는 점, 즉, 부르주아 국가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셋째,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 형태로서의 쏘비에트. 쏘비에트는 모든 노동자 대중이 포괄되고 있고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41]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스탈린 선집≫ 제1권), 전진, 1988, pp. 99-106. 여기서 앞의 두 가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계급적 내용을 말하며 마지막 셋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을 의미한다. 또한 쏘비에트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라고 한 것은 쏘련의 쏘비에트 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쓰딸린은 레닌의 관점을 계승하여, 부르주아 혁명은 대개 권력의 장악으로 완수되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권력의 장악은 시작일 뿐임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투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지속이라고 하였다. 이 또한 레닌의 관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쓰딸린이 레닌의 이 관점을 수용, 계승한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데, 바로 이 점으로 인하여 1920년대, 1930년대에 걸친 쏘련 내에서의 계급투쟁, 농업 집단화와 숙청 등이 이론적 근거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근로인민의 전위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많은 비프롤레타리아 계층의 근로인민(소부르주아지, 소소유자, 농민, 인쩰리겐찌야 등) 또는 이들의 다수 사이의 계급동맹의 특수한 형태이다”[42]레닌, ‘자유와 평등이란 슬로건들로 인민을 기만함에 관하여’의 서문, ≪스탈린 선집≫ 제1권, p. 206에서 재인용.라고 말한 바 있었다. 레닌의 이러한 규정은 당시 쏘련의 현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립과 발전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기초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자, 농민의 연합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규정되는 것은 그 동맹의 지도력이 노동자계급의 단일한 지도력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쓰딸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특수한 동맹 형태는 동맹의 지도력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수한 동맹 형태는 국가의 지도자,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의 지도자가 하나의 당, 프롤레타리아 당, 공산주의자들의 당으로서 다른 당들과 지도력을 공유하지 않으며, 또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43]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스탈린 선집≫ 제1권), p. 206.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쏘련의 현실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계급동맹의 특수형태로 기능하지만, 그 동맹의 구성에서 지도력이 노동자계급의 단일한 지도력, 즉, 볼쉐비끼 당의 지도력이라는 점에서, 다른 계급, 다른 당들과 지도력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연합 독재가 아니라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쓰딸린은 유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 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동맹의 지도세력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조건 아래서, 자본을 타도하고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근로대중들 사이의 동맹이다.”[44]스탈린, ≪10월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스탈린 선집≫ 제1권), p. 207에서 재인용. 이와 같이 쏘련에서 쏘비에트 권력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근간으로 하고 그 동맹을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성립하고 작동하였지만, 그 동맹의 지도력은 단일한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점, 당시의 조건에서는 볼쉐비끼 당의 지도력이었다는 점이 그 동맹의 특수한 성격을 규정했던 것이다.

쓰딸린은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한 세 측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한 세 측면은 다음과 같다. 1) 착취자들의 억압, 조국의 방어, 다른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유대의 강화, 모든 나라에서 혁명의 발전과 승리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활용. 2) 피착취 근로대중을 즉시 부르주아지로부터 분리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러한 대중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며, 이러한 대중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사업에 끌어들이며,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적 지도력을 보장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지배의 활용. 3) 사회주의의 조직화, 계급의 폐지, 계급 없는 사회,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 등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활용.”[45]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스탈린 선집≫ 제1권), p. 209. 이러한 쓰딸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 측면에 대한 분석은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천적 운용의 경험을 녹여서 정리한 것이다. 이전에 ≪레닌주의의 기초≫에서는 단지 레닌의 견해를 계승하면서 이론적 개념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격을 분석했다면,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격이 한층 더 풍부한 형태로 제출되고 있다. 쓰딸린의 위의 규정 중에서 첫 번째는, 계급투쟁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며,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여타의 피착취 근로대중의 동맹의 도구로서, 그리고 그 동맹에서 근로대중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며, 세 번째는, 사회주의 건설의 무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한다. 이러한 쓰딸린의 규정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규정을 넘어서서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을 녹여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러면 당의 지도적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연관에 대한 쓰딸린의 견해에 접근해 보자. 앞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에서 당과 쏘비에트의 관계를 논한 바 있는데, 쓰딸린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당과 국가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의 지도적 역할(당의 “독재”) 사이에 등호(=)가 놓여 질 수 있으며, 전자가 후자와 동일시될 수 있고, 전자는 후자로 대체될 수 있다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46]같은 책, p. 214. 이러한 쓰딸린의 언급은 당의 독재라는 규정이 제기되고 있고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실제로는 당 독재가 아닌가 하는 제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지노비예프 등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당 독재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쓰딸린은 이러한 견해와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지노비예프의 주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 하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곧 당의 독재로 인식하는 것이었는데, 쓰딸린은 이를 반박하면서 당의 독재라는 개념은 당의 지도적 역할을 잘못 인식하는 것으로서 당의 지도적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구분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영역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보다 보다 광범하고, 보다 풍부하다는 것을 굳이 증명할 필요는 없다.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지, 어떤 다른 종류의 독재를 수행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지도적 역할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독재”로 대체한다.”[47]같은 책, p. 215. 이러한 쓰딸린의 언급은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와의 관계를 정확히 정리한 것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 하에서 단지 지도적 역할, 지도 기관으로 작동하는 것이며 권력 기관이 아니다. 그리고 국가는, 쏘비에트는 권력 기관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내용을 수행하는 것, 자본가계급과 그 유물, 잔재에 대한 계급적 억압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 그리고 경제의 재건, 파씨즘의 등장과 전쟁 위기의 격화, 그리고 2차 대전의 발발 등으로 쓰딸린 시기의 쏘련은 비상한 시기의 연속이었으며 이로 인해 당과 국가는 정확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융합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당은 숙청과 전쟁으로 인해 경직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노선의 정립이라는 당의 본질적 역할의 수행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원들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위로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대의에 헌신하기보다 관료형 인간으로 서서히 변모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향후 21세기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서 당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노선의 정립이 관건적 요소로 작용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과 국가의 관계의 문제에서 당은 사상을 본질로 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는 계급적 폭력의 조직화를 본질로 한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하여 당과 국가의 관계의 정립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쓰딸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화신으로 불릴 수 있다. 러시아의 자본가계급을 폐지하고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분쇄한 주역이라는 점, 그리고 나아가 러시아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정립해가고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세계적 차원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씨즘 세력을 궤멸시켜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쓰딸린과 쏘련의 노동자계급이 걸었던 사회주의 건설의 길은 인류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오류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쓰딸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천을 평가해 보면서 일정한 교훈을 끌어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쓰딸린은 러시아 혁명과 내전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러시아에서 반동기가 끝나고 1912년부터 새로운 고양기가 시작되었을 때, 쓰딸린은 스위스에 망명하고 있던 레닌을 대신하여 러시아 국내의 볼쉐비끼 당의 비합법 조직을 이끌었다. 이것이 이른바 러시아 국내 뷰로로서 쓰딸린은 이 뷰로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일간신문으로서 ≪쁘라브다≫를 발간하면서 짜르 정권의 폐간에 맞서 재발간 투쟁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쓰딸린은 짜르가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치른 두마 선거에 볼쉐비끼 당이 참여했을 때, 선거 투쟁을 주도하여 대부분의 노동자 지구에서 볼쉐비끼 당 후보들을 당선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고 난 후 10월 혁명에 이르는 기간에 쓰딸린은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레닌이 께렌쓰끼 정권의 체포령을 피해 은신해 있을 때, 쓰딸린은 께렌쓰끼 정권에 맞선 무장봉기를 결정했던 제6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정치 보고를 하였다. 이 점은 쓰딸린이 1917년 2월에서 10월에 이르는 혁명적 정세에서 레닌 다음 가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 내전이 발발했을 때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은 뜨로쯔끼가 맡았지만, 쓰딸린은 짜리쯴 전투 등 내전의 고비마다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짜리쯴이라는 도시는 이후 쓰딸린그라드로 불리게 되었다.

1920년대 뜨로쯔끼, 부하린에 대한 쓰딸린의 노선 투쟁은 직접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와 무관한 것이다. 즉, 1920년대 노선 투쟁은 당내 분파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하여 뜨로쯔끼가 당 규율을 위반하면서 분파 투쟁을 전개했을 때, 쓰딸린과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의 방침은 뜨로쯔끼에 대해 ‘비판을 통한 교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뜨로쯔끼의 분파 투쟁이 정도를 더해 가고 지속적으로 당 규율을 위반해 갔을 때, 볼쉐비끼 당은 뜨로쯔끼의 당원 자격을 유지시킨 상태에서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직에서의 해임, 이후에는 중앙위원직에서의 해임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당내 분파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뜨로쯔끼의 당원 자격은 유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뜨로쯔끼 등 반대파가 당의 규율을 위반하면서 난폭하게 가두로 진출하여 10월 혁명 기념식에서 그 참가자들과 충돌했을 때, 이것은 뜨로쯔끼 세력이 당내 분파에서 당 자체에 반대하는 반체제 세력으로 전화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볼쉐비끼 당은 비로소 뜨로쯔끼의 당원 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뜨로쯔끼가 당원 자격을 박탈당하기 전에 뜨로쯔끼의 분파 투쟁은 기본적으로 당내 문제로서 당 내부의 토론과 정치적 결의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뜨로쯔끼가 당에서 제명된 이후는 당내의 토론과 결의가 아니라 반체제 세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억압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의 전환은 1936년의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블록에 대한 재판을 통하여 드러났다.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블록은 나찌 독일이 쏘련을 침공할 경우 나찌와 협력하여 쏘비에트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재판 결과 밝혀졌다. 뜨로쯔끼가 당내 투쟁에서 철저히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오류를 교정하지 못하고 끝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억압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뜨로쯔끼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불신한 결과였다. 이러한 뜨로쯔끼의 행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반면교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쓰딸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농민 등 근로 대중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도구라고 파악한 바 있었다. 농업 집단화는 바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격이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한편으로는 농촌의 부르주아지인 부농을 제한, 배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빈농만이 아니라 중농계급을 노동자계급의 주위로 결집시키면서 농업 집단화는 1929년 말까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집단화의 성공에 도취된 볼쉐비끼 당은 노선을 급격히 전환하여 부농의 제한, 배제 정책에서 계급으로서 부농의 소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농업 집단화 과정에 폭력과 협박 등 강제력이 사용되고 부농의 격렬한 저항으로 소와 말 등 가축 수천만 마리가 살해되어 쏘련 농업을 장기간 침체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농업 집단화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연관시켜 본다면, 쏘비에트 국가는 부농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동맹 세력인 중농에게까지 일정하게 강제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근로 대중, 농민에 대해 동맹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고, 그 과정에서 동맹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도구로 역할한다는 쓰딸린의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즉, 쏘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주와 자본가계급에 대한 수탈은 정확히 수행했지만, 중농을 부농으로부터 분리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와의 동맹으로 견인하는 점에서는 지도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오류가 빚어진 근본 원인은 당시 쏘련에서 농업의 현실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달리 소생산자들이 다수를 점하는 쏘련의 농업과 농촌에서는, 급격한 정치 혁명의 방식이 아니라 트랙터의 대량 생산 등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여 점차적으로 부농을 배제하면서 중농을 노동자계급의 편으로 끌어들여 집단화의 정도를 확대하는 장기적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점은 쓰딸린이 근로 대중과의 동맹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점을 이론적으로는 올바로 정식화했지만 실천의 과정에서는 일정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6년부터 이어지는 1930년대 후반의 정치 재판은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실을 잘 보여준 것이었다.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블록에 대한 재판, 그리고 뚜하체프쓰끼 장군 등의 쿠데타 음모의 적발, 그리고 부하린 그룹의 음모의 적발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권력을 정확하게 행사한 것이었다. 이들 음모적 블록들은 나찌와 협력하여 쏘련의 쏘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려했다는 것이 재판의 결과 드러났다. 그런데 문제는 1930년 후반 당시의 정세가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나찌가 등장하여 쏘련에 대한 침략을 공언하고 있었고 이딸리아의 무쏠리니,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 등 파씨즘 세력의 패권적 행보가 전 세계를 전쟁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2차 대전 발발 전에 이미 파씨즘 세력과 공화국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쏘련 내에서는 과거의 반대파들에 대한 일제 검거와 재판의 돌풍이 불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이 많이 체포되고 고문을 받고 희생되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이 교정에 들어가 숙청을 주도하던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책임자 예조프를 베리야로 교체하여 진상조사를 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체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어, 1939년과 1940년 2년간에 걸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모한 체포 그리고 심지어 고문을 자행한 책임자인 예조프가 부하린 음모 그룹의 가담자였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의 행사가 충분히 과학적이지 못하고 정확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억압을 본질로 하는데, 정세가 극도로 긴장된 탓으로 그리고 숙청의 조직화에서의 오류로 말미암아 무고한 희생자들이 다수 발생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의 행사 과정에서의 이러한 오류는 많은 후과를 남겼는데, 흐루쇼프의 수정주의가 쓰딸린을 전면 탄핵하는 구실이 되었고, 또 쏘련 사회와 볼쉐비끼 당을 경직화시켰다는 점이 주요하다. 특히 볼쉐비끼 당이 경직화된 점은 커다란 후과를 남겼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당의 대열이 크게 흐트러지고 당이 경직화된 결과, 2차 대전 후의 새로운 정세 속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정립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키지 못하고, 쓰딸린 사후에 관료들의 반동을 허용한 결과, 흐루쇼프의 수정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원은 경제 문제나 행정의 문제에 시시콜콜 개입하여 지도 혹은 간섭하는 관료형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며, 당은 정세의 변화, 사회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노선을 정립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데, 2차 대전 이후 쏘련의 볼쉐비끼 당은 이 점에서 한계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볼쉐비끼 당의 한계의 원인으로,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관계를 정확히 정립하지 못했던 것을 주요하게 들 수 있다. 쓰딸린 말년의 논쟁, 즉, 실제적인 권력의 소재를 당에 둘 것인가, 아니면 쏘비에트에 둘 것인가의 논쟁은 쏘련 사회와 볼쉐비끼 당이 비약의 순간에 있었지만 끝내 비약하지 못하고 좌초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에서 지도 기관으로서의 당, 권력 기관으로서의 쏘비에트, 시민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는 대중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 청년조직, 여성조직 등등의 관계를 정확히 정립하는 것은 향후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사활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4. 흐루쇼프, 브레쥐네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폐기와 전 인민 국가로의 전환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 그리고 이후의 행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부에서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흐루쇼프는 당시 중앙의 쏘비에트 권력과 당 중앙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보안기관을 관장하던 베리야를 쿠데타적 방식으로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흐루쇼프는 당시 당과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던 말렌꼬프를 무력화시키면서, 당 제1서기 직을 다시 신설하고 그 직에 취임하여 당의 최고 지도자로 올라섰다.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하는 이러한 과정은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고, 부르주아적, 음모적인 것이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부에서 파괴하고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말렌꼬프를 밀어내고 쏘련의 최고지도자가 된 흐루쇼프가 이후 보인 행보는 어이없는 수준으로 매우 속류적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1956년의 20차 당 대회에서 이른바 비밀연설을 통하여 쓰딸린을 전면 탄핵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뜨로쯔끼, 뚜하체프쓰끼, 부하린의 음모에 대한 쏘비에트 국가의 정당하고 정확한 대응, 재판의 결과를 뒤집고 이러한 사안들이 쓰딸린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악선전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이러한 쿠데타적 행위는 쏘련에서 거대하게 성장한 관료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이 폐기되어야, 관료주의적인 관료들에 대한 숙청이 사라져야만, 관료집단은 쏘련에서 안정적인 지배를 실현하고 또 권력을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루쇼프를 대표로 하는 쏘련의 관료 집단의 이러한 이해관계는 이론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폐기와 전 인민 국가론으로 표현되었다. 쏘련에는 더 이상 억압해야할 자본가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논거였다. 그러나 쏘련에는 여전히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하여 자본주의의 복고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또 제국주의 세력의 냉전은 외부로부터 자본주의 복고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즉, 대내외적 조건 모두를 보아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폐기되어야 할 근거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료주의적 통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폐기되어야 했고 이를 위한 전제로서 소위 개인숭배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쓰딸린 하에서의 30여 년에 걸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전복시켰던 것이다.

흐루쇼프의 전 인민 국가 노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복이고 파괴라는 점은 이후의 흐루쇼프의 실천에 의해 드러났다. 흐루쇼프는 1957년 당시 경제에서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중앙의 성(省)들을 폐지하고 경제 지도를 지역 중심으로 전환하여 전국에 걸쳐 100여 개가 넘는 지역중심의 국민경제회의(쏘브나르호쓰)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중앙의 계획이 약화되자 쏘련의 경제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는데, 계획 경제가 실시되고 난 후 최초로 5개년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1959년 긴급 당 대회를 소집하여 5개년 계획을 7개년 계획으로 변경해야만 했다. 그리고 100여 개가 넘는 지역 중심의 국민경제회의는 그 산하에 수많은 기구를 설치하여 과거에 비해 경제 지도 기관이 3배나 팽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루쇼프의 정책은 중앙의 계획을 통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그 기구를 파괴하고, 대신에 관료들의 이익을 위한 수많은 국가 기구의 팽창을, 즉, 관료들의 자리 보장을 위한 국가 기구의 팽창을 시도한 것이었다. 여기서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내부에서 파괴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은 곧 관료주의 통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내걸지만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의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수정주의의 본질을 흐루쇼프 수정주의는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흐루쇼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부에서 파괴한 것의 또 하나의 사례는 1958년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집단 농장을 연결하는 고리인 기계ㆍ트랙터 기지(MTS)를 폐지한 것이었다. 집단 농장은 생산력이 발전해도 그 소유 관계가 협동조합적 수준에 머무는 것이었다. 따라서 MTS는 집단 농장의 협동조합적 소유를 공업의 노동자계급의 전 인민 소유로 끌어올리기 위한 주요 조건이었고, 또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실현하고 보장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농민이 연결되는 주요 고리였는데, 이 고리를 폐기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본 조건인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약화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쏘련 농업의 발전의 전망을 흐린 것이었다. 흐루쇼프가 MTS 폐지의 이유로 든 것은 생산수단인 토지에 MTS와 집단 농장이라는 두 명의 주인이 있어서 농업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국유, 전 인민 소유와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두 개의 상이한 소유관계를 부르주아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소유의 성격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MTS와 집단 농장 사이에서 일정한 갈등 관계, 모순 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모순의 해결 방향은 국유, 전 인민 소유의 MTS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적 소유인 집단 농장을 MTS와 같은 전 인민 소유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농업의 생산력이 발전하고 농업과 공업이 융합하는 농공복합체가 출현하면서, 농공복합체를 기초로 하는 꼬뮨의 형성과 발전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방향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흐루쇼프가 토지에 두 명의 주인이 있다는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MTS를 파괴한 것은 전 인민 소유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 프롤레타리아적 관점을 상실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흐루쇼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를 파괴한 또 하나의 사례는 자신의 수정주의로 인해 초래되었던 농업의 위기에 대해 당을 농업당 조직과 공업당 조직으로 분할하여 대처하려 했다는 점이다. 당을 농업당 조직과 공업당 조직으로 분할했다는 것은 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체계에서 이미 지도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관료주의적 권력 기구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는 농업의 문제, 공업의 문제에 대해 쏘비에트 기구가 아니라 당이 시시콜콜하게 간섭하고 행정을 처리해야 하는 것으로 이미 당과 쏘비에트의 관계가 변화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이는 전 인민 국가 하에서 당이 전면적으로 관료화되었다는 것, 대중이 선출하는 권력 기관인 쏘비에트의 역할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농업 문제에 대해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정책을 내오는 것은 당이 아니라 연구기관과 전문적인 국가 기구가 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당은 농업 문제에 대해 사회주의 건설 노선이라는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하여 전체 사회주의 건설 노선 속에 농업의 위상을 정확히 배치하는 것이 농업 문제에 대한 당의 역할일 터인데, 흐루쇼프는 농업 문제에 대해 당의 전문적 역할, 행정적 역할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는 흐루쇼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에서 당과 쏘비에트의 관계를 망치고 파괴하고 오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엉터리 접근으로 인해 쏘련 농업은 흐루쇼프 이후 오랜 기간 정체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레쥐네프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로 인한 파괴적 영향을 수습하고 통치 체계를 정돈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적 노선을 계승했다. 이미 흐루쇼프 당시인 1961년 22차 당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로 발생한 국가는 현대에서 전 인민 국가로 전화된다는 것으로 강령이 개정되었다. 또한 규약 상으로 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 아니라 전 인민당으로 전화된다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브레쥐네프는 이러한 흐루쇼프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브레쥐네프는 쏘련이 이미 발달한 사회주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하였는데, 발달한 사회주의에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 인민 국가로 전화하며, 전 인민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사실상 브레쥐네프 하에서 관료주의 통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흐루쇼프가 주요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파괴적인 수정주의적 정책을 폈다면, 브레쥐네프는 쏘련 경제를 구조적으로 수정주의화하여 쏘련 경제를 침몰시켰다. 1965년 당시 수상이었던 꼬씌긴이 주도한 경제 개혁은 중앙의 경제 계획에 대한 역할을 대폭 약화시키고 개별 국유 기업을 이윤추구 단위로, 즉, 자본주의적 방식의 활동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은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점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쏘련 사회를 거대한 관료주의 체제,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재편하려 시도하는 것이었다. 쓰딸린에 대한 탄핵,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부정과 전 인민 국가로의 전환이 끝내 쏘련의 경제를 파탄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80년대에 쏘련 자체의 해체, 쏘비에트 연방의 해체, 사회주의 생산관계 자체의 해체로 이어졌는데, 이는 수정주의가 단순한 편향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성 자체를 타격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내부에서 해체시킨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맑스ㆍ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이하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420.
2, 3, 15 같은 곳.
4 칼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저작 선집≫ 제2권), p. 30.
5 같은 책, p. 94.
6 같은 책, p. 31.
7 칼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저작 선집≫ 제2권), p. 381.
8 칼 맑스, “맑스가 뉴욕의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저작 선집≫ 제2권, p. 497.
9 칼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첫 번째 초고”, ≪저작 선집≫ 제4권, p. 16.
10 같은 책, p. 18.
11 같은 책, p. 20.
12 같은 책, p. 61.
13 같은 책, pp. 64-65.
14 같은 책, p. 67.
16 칼 맑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저작 선집≫ 제4권, p. 385.
17 프리드리히 엥겔스, “엥겔스가 쯔비까우의 아우구스트 베벨에게”, ≪저작 선집≫ 제4권, pp. 458-459.
18 프리드리히 엥겔스, ≪오이겐 듀링 씨의 과학변혁(반듀링)≫(≪저작 선집≫ 제5권), pp. 308-309.
19 같은 책, p. 311.
20 레닌, ≪국가와 혁명≫, 논장, 1988, p. 18.
21 같은 책, p. 40.
22 같은 책, p. 49.
23 같은 책, pp. 50-51.
24 같은 책, p. 104.
25 같은 책, p. 125.
26 같은 책, p. 124.
27 레닌,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3권, 거름 출판사, p. 165에서 재인용.
28 Lenin, The Immediate Tasks of The Soviet Government, Selected Works(Three Volumes), Vol. 2, Progress Publishers, p. 592.
29 Ibid., p. 593.
30 Ibid., p. 594.
31 Ibid., p. 621.
32 Ibid., pp. 613-614.
33 Lenin, The Proletarian Revolution and The Renegade Kautsky, Selected Works(Three Volumes), Vol. 3, p. 40.
34 Ibid., p. 43.
35 Ibid., p. 49.
36 Ibid., p. 105.
37 Ibid., p. 127.
38 Lenin, Economics and Politics in Era of Dictatorship of Proletariat, Selected Works(Three Volumes), Vol. 3, p. 234.
39 Ibid., p. 236.
40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57.
41 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스탈린 선집≫ 제1권), 전진, 1988, pp. 99-106.
42 레닌, ‘자유와 평등이란 슬로건들로 인민을 기만함에 관하여’의 서문, ≪스탈린 선집≫ 제1권, p. 206에서 재인용.
43 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스탈린 선집≫ 제1권), p. 206.
44 스탈린, ≪10월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스탈린 선집≫ 제1권), p. 207에서 재인용.
45 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스탈린 선집≫ 제1권), p. 209.
46 같은 책, p. 214.
47 같은 책, p. 215.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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