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책 소개(7)] ≪프리드리히 엥엘스의 생애와 사상(Life and Teachings of Friedrich Engels)≫

 

김병기 | 회원

 

* 원문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ucf.digital.flvc.org/islandora/object/ucf%3A5400

 

 

올해는 엥엘스 탄생(1820년 11월 28일) 200주년이자 서거(1895년 8월 5일) 125주년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책(40쪽)은, 엥엘스 서거 40주년(1935년) 기념으로 출판되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미국 작가 올긴(M. J. Olgin, 1878–1939)은 쏘련을 여러 번 방문했고,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올긴의 책 ≪왜 공산주의?(Why Communism?)≫(1933년, 76쪽)[1]https://ucf.digital.flvc.org/islandora/object/ucf%3A5579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50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미국 좌파 진영에서 쓰딸린 지지자로, 반뜨로쯔끼 투사로 잘 알려져 있는 언론인이다. 널리 읽힌 ≪뜨로쯔끼주의: 위장한 반혁명(Trotskyism: Counter-revolution in disguise)≫(1935년, 161쪽)[2]https://palmm.digital.flvc.org/islandora/object/ucf%3A5486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전기는 연대기적으로 엥엘스의 생애를 기술하기보다, 맑스ㆍ엥엘스의 사상을 함께 집중적으로 다룬다. 제1장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에서는 “맑스와 엥엘스는 몽상을 과학으로 대체했다”는 레닌의 탁월한 정의를 설명한다. 제2장에서는 엥엘스의 생애를 간단히 다룬다. 제3장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한 엥엘스의 관점과 ‘신’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제4장 “사적 유물론”에서는, 맑스와 엥엘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이론’과 상부구조인 정치 체제가 변화하는 이유를 규명한다. 제5장 “노동과 자본―계급 투쟁”에서는, ‘잉여가치 이론’과 경제 공황을 언급하면서 사회주의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제6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사회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수와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착취계급을 억압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제7장 “국제주의”에서는, 넓게 보면 노동 해방 투쟁은 전 세계 착취계급과 싸우는 것이므로, 노동계급의 국제적 유대와 단결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맑스주의는 맑스와 엥엘스의 사상 체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주의는 ‘맑스ㆍ엥엘스주의’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만, 편의상 간단하게 맑스주의로 부르는 것이다.[3][편집자 주] 맑스주의의 공동 창시자로서, 엥엘스의 기여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조금 길지만, 관련 부분을 인용해 본다. “나는 … Continue reading 맑스ㆍ엥엘스의 전기 작가들은 두 사람을 늘 같이 다룬다. 그들이 ‘이론과 실천 투쟁’을 언제나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와 엥엘스를 억지로 분리ㆍ대립시키려는 사이비 지식인과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그런 속물적 시도에는 맑스주의를 왜곡ㆍ변질ㆍ타락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하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제1장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 꾸바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한다: 양키 제국주의로부터의 자유! 자본가와 지주로부터의 자유!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비밀 회합을 마친 나찌 치하의 독일 노동자들이 도로 위에 큰 글자로 구호를 적는다: 파씨즘을 타도하자!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총파업으로 단결력을 과시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노동자들이 힘차게 외친다: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모쓰끄바와 전국 곳곳에서 노동절(May Day)을 기념한다. 쏘련에서 노동절은 ‘노동의 자유’을 표현하는 축제다.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현수막이 붉은 광장에서 펄럭인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엘스가 외친 그 유명한 구호를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함께 외친다.

 

2. “맑스와 엥엘스는 몽상을 과학으로 대체했다.” 레닌의 탁월한 표현이다. 무슨 의미인가? 맑스와 엥엘스 이전에도 노동계급은 있었다. 자본가의 착취도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있었다. 로버트 오웬ㆍ생시몽ㆍ샤를 푸리에 같은 노동자의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더 좋은 사회’를 꿈꾸고 계획했다. 사유 재산을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3. 그들은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부자들이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들의 소유를 포기하고 더 좋은 사회 건설에 협력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착취는 착취자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다. 노동자는 착취자에 맞서 싸우면 안 된다고 믿었다. 노동자 스스로가 더 좋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들이 공상가로 불리는 이유다. 공상가(Utopian)는 몽상가(Dreamer)와 같은 종류다.

 

4. 몽상을 과학으로 대체한 맑스와 엥엘스는 노동계급 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자 이론가였다. 그들은 노동 운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논리적으로 분석했다. 사회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법칙을 밝혀냈다. 노동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노동계급이 실천해야 할 과제를 명확하게 제시했다. 그들의 올바른 과학적 노선을 따르자, 엥엘스 서거 22주년인 1917년에 쏘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제2장 엥엘스의 생애

 

5. 1820년 11월 28일 독일 바르멘(Barmen)에서 태어났다. 자본가인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 17세인 엥엘스를 브레멘(Bremen)에 있는 상업회사에서 일을 하도록 강요했다. 타고난 머리와 지적 욕구로 엥엘스는 평생을 거쳐 스스로 폭넓게 학습했다. 철학, 경제학, 역사, 자연과학, 사회학 그리고 군사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언어 습득에 뛰어나서 독일어와 영어를 포함해 러시아어, 페르시아어 그리고 유럽 국가의 여러 언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6. 19세 때(1839년), 독일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21세 때(1841년) 포병으로 입대했다. 22세 때, ≪라인 신문≫(맑스가 편집장이었다)의 기고가로 활동했다. 같은 해에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방직회사(엥엘스 아버지가 공동 소유자였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24세 때(1844년), 처음으로 맑스를 만났다.[4][편집자 주] 정확하게는 두 번째 만남이다. 이 만남은 엥엘스가 영국에서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맑스가 거주하고 있던 빠리를 방문함으로써 … Continue reading 그 이후, 역사상 유례없는 두 사람의 우정과 동지애는 맑스가 운명할 때까지 이어졌다.[5][편집자 주]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대의 우화들은 우정에 얽힌 매우 감동적인 얘기들을 많이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 Continue reading

 

7. 25세 때(1845년), 널리 알려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출간했다. 영국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노동자가 계급 의식으로 무장하고, 그들 자신의 정치 투쟁을 조직할 때, 사회주의는 달성된다고 주장했다. 1845–47년, 맑스와 엥엘스는 영국,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계급을 조직했다. 혁명적인 노동 운동의 철학을 담은 ≪독일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전이에 필요한 노동계급의 전술과 방침들을 기술한 ≪공산당 선언≫을 저술했다.

 

8. 1948년, 혁명이 유럽을 강타했다. 억압적인 낡은 체제가 흔들렸다. 신흥계급인 자본가는 정치적 권력에 관심을 보였다. 민중은 봉건 잔재를 폐지하는 정치적 자유를 위해, 왕족과 귀족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맑스ㆍ엥엘스 역시 이 혁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전 단계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9. 1849년, 엥엘스는 독일 남부에서 ‘혁명민주운동’의 혁명군 사령관 참모로 전투에 참여했다. 패배한 뒤에, 스위스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 1848–49년, 엥엘스는 편집장인 맑스와 함께 ≪신라인 신문≫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1849년 반혁명 세력은 그 신문을 강제로 폐간했다.

 

10. 맑스와 엥엘스는 영국에서 다시 만났다. 맑스 가족의 삶은 아주 곤궁했다. 엥엘스는 맑스 가족을 돕기로 결정하고,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맑스를 위해 ‘제2 바이올리니스트’ 삶을 선택했다. 엥엘스의 재정적 지원으로 맑스는 ≪자본론≫ 저술에 집중할 수 있었다.

 

11. 엥엘스는 일을 하면서도 집중해서 글을 썼다. 맑스의 이름으로 미국 ≪뉴욕 트리뷴≫에 기고된 글 중에 1/3은 엥엘스가 쓴 글이었다. ≪데일리 뉴스≫와 ≪뉴 아메리카 백과사전≫에 다수의 글을 기고했다. 미국 남북 전쟁에 관해 수많은 글을 썼다. 1864년, 맑스와 함께 ‘제1 인터내셔널’로 알려진 ‘국제 노동자 협회’를 결성했다.

 

12. 1869년, 엥엘스는 마침내 직장 생활을 정리할 수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와 맑스와 함께 연구하고 토론했다. 큰 틀에서, 둘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맑스는 ≪자본론≫ 집필에 집중했고, 엥엘스는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썼다. 1878년 엥엘스의 유명한 저서 ≪반뒤링론≫이 간행되었다. 그 책의 일부분은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으로 따로 출판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또한 엥엘스는 ≪자연의 변증법≫을 집필[6][편집자 주] 미완성 유고인 엥엘스의 ≪자연의 변증법≫은 모쓰끄바의 맑스-엥엘스 연구소에 의해, 1925년 처음 독일어와 러시아어로 출판되었다.하였고, 이전에 썼던 ≪독일 농민전쟁≫, ≪주택 문제≫ 등을 새로 출판했다.

 

13. 1883년, 맑스가 운명했다. 1876년, 맑스는 ≪자본론≫ 제1권을 출간했다. 평생 동지인 맑스가 남긴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엥엘스는 1885년에 ≪자본론≫ 제2권 그리고 1894년에 ≪자본론≫ 제3권을 출간했다. 엥엘스는 1884년에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을, 1886년에는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를 출판했다.

 

14. 맑스 사후, 엥엘스는 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큰 존경을 받았다. ‘독일 사회민주당’과 유럽의 여러 사회주의 당들,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이 요청하는 지도와 자문 역할에 성실하게 응답했다. 1895년 8월 5일, 75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제3장 변증법적 유물론

 

15. 노동계급이 생각하고 답해야 할 철학적인 질문들이 있다: 무엇이 세계인가? 세계는 인식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언뜻 생각하면 노동자의 삶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관련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16. 노ㆍ사 화합을 해치기 때문에 파업은 나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평화로운 노ㆍ사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노동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세계는 투쟁 없이 평화롭게 발전한다고 추론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고등 이성(Higher Reason)’을 언급한다. 영적인 존재가 모든 사물의 근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마침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신(God)’이라는 관념이 창출된다.

 

17. 혁명가는 노동자에게 사회주의가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노동자에게 ‘획득과 지배’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을 영원히 고정된 어떤 것, 태곳적부터 존재해 왔던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신성(Deity)’이라는 관념이 나온다. 본질적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떤 것, 즉 ‘신(God)’이 창출된다.

 

18. 맑스와 엥엘스는 모든 계급에게 모두 공정하고 공평한 철학은 없다고 단언한다. 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내는 관념론 철학은 투쟁적인 노동계급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 기여한다. 다양한 사회적 계급에 조응해서 철학은 다양한 학파로 나누어진다.

 

19. 엥엘스가 유물론과 관념론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자연보다 정신이 먼저 존재한다고, 세계는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면 관념론 진영에 속한다. 반대로, 자연이 정신보다 먼저이고, 스스로 존재하고,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인 세계가 외부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유물론 진영에 속한다.

 

20. 물질은 인간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이고 끊임없이 운동한다. 외부 세계는 계속해서 변하고 움직인다. 엥엘스는 “운동하지 않는 물질은 물질 없는 운동처럼 생각할 수 없다. 운동은 물질의 존재 형태”라고 정의한다.

 

21. 착취계급의 철학인 관념론은 피착취계급의 철학인 유물론의 주장과 정반대다. 전자는 세계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산물이고, 정신이 근본적이고, 그러므로 물질이 없어도 운동은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이런 주장은 전지전능한 초인간적인 정신의 존재와 연결된다.

 

22. 사고ㆍ정신ㆍ의식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물질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은 물질에 의존하고, 물질이 근본적이고 의식은 부차적이다. 의식은 유기체의 특성이므로, 두뇌ㆍ신경조직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정신ㆍ의식과 같은 것은 없다. 의식은 존재하는 외부 세계의 반영일 뿐이다. 의식 자체도 인류의 지식 성장과 외부 세계의 변화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23. 세계는 최종적이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한다. 엥엘스는 어느 것도 최종적, 절대적, 신성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사고는 노동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회 제도나 기구들의 불변성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엥엘스”라는 글에서 레닌은 이런 의문을 던진다. “만약에 모든 사물이 발전한다면, 또는 어느 한 사회 제도가 다른 제도로 바뀐다면, 왜 프로이센 왕과 러시아 황제의 독재 정치가, 또는 절대 소수가 향유하는 부와 부르주아의 지배가 영원히 지속돼야 하는가?”

 

24.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 투쟁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엥엘스는 여러 책에서 변증법에 관한 법칙들, 즉 자연의 발전 법칙들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중에서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법칙을 얘기해 보자. 예를 든다. 여기에 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가 있다. 10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5, 6, 7, 8, 9, 10톤까지 차례대로 무게를 올려도 그 다리는 끄떡없을 것이다. 그런데 1톤을 더 올려 11톤이 되면 다리는 무너진다. 이렇게 양적인 변화(무게의 증가)는 질적인 변화(다리의 붕괴)를 초래한다.

 

 

제4장 사적 유물론

 

25. 사회에 적용된 변증법적 유물론이 사적 유물론이다. 맑스ㆍ엥엘스에 의하면, 사회는 자연의 일부분이고, 인간 자신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인간은 생존 수단을 생산하기 위해서 자연과 투쟁한다. 이런 투쟁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관계하고 결합한다. 생산관계라고 부른다. 각 시대마다 특정한 생산 양식이 존재한다. 그것에 조응해서 특정한 생산관계가 결정된다. 이런 생산관계를 사회의 경제 구조라고 한다.

 

26. 맑스ㆍ엥엘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이론’에 의하면, 사회의 경제 구조는 모든 사회 구조의 토대이다. 정치ㆍ사상ㆍ관념 등은 상부구조에 속한다. 각각의 시대마다 다른 형태의 정치권력이 존재해 왔었던 이유를 규명하려면, 그 시대의 토대가 되는 경제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27. 천 년 전에는 봉건 영주가 최고 권력자였다. 그 시대는 농경 사회였고 다른 지역과의 상품 교환은 미미했다. 모든 지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자급자족적인 ‘세계’였다. 봉건 군주는 그런 경제 구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 체계였다.

 

28. 오백 년 전에는 ‘상업 자본’이 발전하고 있었다. 상업 자본을 소유한 새로운 계급이 등장했다. 산업 생산은 급속하게 발전했고, 시장 활동은 국내를 넘어 국외로까지 진출했다. 봉건 영주가 지배하는 독립적인 지역 사회는 이제 상업 자본의 장애물이 되었다. 봉건 군주 체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왕이 최고 권력자로 등장했다.

 

29. 18세기 말에 프랑스 혁명이, 19세기 중엽에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유가 뭘까? 자본가계급이 강력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회 경제 구조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등장했다. 자본주의에 적합한 부르주아 정부가 세워지고, 낡은 봉건 체제의 왕족ㆍ귀족 정치 체계는 무너졌다.

 

30. 맑스ㆍ엥엘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라고 선언했다. 피억압계급은 투쟁을 하면서 그들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그것에 맞는 조직을 결성한다. 궁극적으로는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그들 자신이 지배한다. 노동 해방의 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하는 사회 혁명이다.

 

 

제5장 자본과 노동―계급 투쟁

 

31. 자본주의 사회는 크게 두 계급으로 나누어진다―자본가와 노동자.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부를 축적한다. 맑스ㆍ엥엘스 이전에도 착취를 언급하는 노동자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본가의 착취, 이윤의 발생, 계급 투쟁의 필연성 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맑스ㆍ엥엘스의 ‘잉여가치 이론’에 의해서만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32.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원한다. 자본가는 적게 주려고 한다. 전자는 노동 시간을 단축하려고 한다. 후자는 늘리려고 한다. 전자는 노동 강도를 줄이려고 한다. 후자는 강화하려고 한다. 자본가가 이윤으로 취득하는 잉여가치를 둘러싼 노ㆍ자 간의 그러한 긴장ㆍ대립ㆍ다툼은 궁극적으로 노ㆍ자 간의 ‘힘’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33. 엥엘스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에서 자본주의 모순을 상술한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전유ㆍ취득의 사적 성격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 모순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유는 뭘까?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가에 의해서 착취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는 노동, 즉 잉여가치에 기반해서 유지된다. 생산자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생산 수단의 소유자는 생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즉 일하지 않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구조이다.

 

34.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적인 성격과 이윤을 위한 대량 생산은 ‘과잉 생산’을 낳는다. ‘산업 공황’과 ‘경제 공황’의 원인이다. 자본가는 한편으로는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거나, 노동 절약형 기계를 구매해서 노동자를 해고한다. 그로 인해, 소비자인 노동 대중의 구매력은 줄어든다. 상품은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인다. 이것이 경제 공황이다. 엥엘스는 이런 현상을 “생산 방식이 교환 방식에 반항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해결책은 생산 수단의 사회화와 계획 경제를 실현하는 사회주의다.

 

 

제6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사회주의

 

35.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프롤레타리아는 국가 권력을 잡아야 하고, 생산 수단을 국가 소유로 해야 한다”고 엥엘스는 단언했다.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수와 지속을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가는 지배계급이 다른 계급들을 지배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도구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수인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 과거의 착취자인 소수를 억압하는 권력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과거의 착취자들을 위한 ‘자유’는 없다.

 

36. ‘사회 개량주의자들(Socialist reformists)’은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잡으면,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로 평화스럽게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엥엘스는 그런 입장을 논박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고, 그들 자신의 국가 기구를 건설해야 한다.” ‘쏘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의 국가 기구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점차적으로 계급을 폐지한다. 적절한 시기에, 계급은 사라진다. 국가도 점차적으로 사라진다. 계급 없는 사회는 자유 그 자체다. 인류는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 상승한다.

 

 

제7장 국제주의

 

37. 노동계급은 국제적인 시야를 가져야만 한다. 넓게 보면, 노동 해방 투쟁은 전 세계의 자본가와 싸우는 세계적 차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의 성공적인 노동 투쟁은 다른 나라의 노동계급을 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맑스ㆍ엥엘스는 프랑스 ‘빠리 꼬뮌’을 열렬히 지지했고, 지원 투쟁을 성실하게 조직했다. 엥엘스는 빠리 꼬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형(Prototype)으로 간주했다.

 

38. 국제주의자인 맑스ㆍ엥엘스는 억압당하는 국가, 식민지 민족 그리고 전쟁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을 노동계급이 지지하는 진보적인 전쟁과 반대하는 반동적인 전쟁으로 구분했다. 식민지 민족 해방 전쟁은 진보적인 전쟁이다. 원자재와 상품 시장 확보를 위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자본가계급의 전쟁은 반동적인 전쟁이다.

 

39. 엥엘스는 노동계급에게 자본가의 반동적인 전쟁과 함께하는 ‘애국심’을 경고했다. 전쟁으로 자본가 국가가 약해질 때, 혁명적 활동을 더욱 강화하라고 역설했다. 레닌은 엥엘스의 입장을 따랐다. 러시아가 전쟁으로 약해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혁명을 일으키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인 쏘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했다. 레닌의 러시아 혁명은 세계 노동자의 표지등(Beacon light)이다.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사과연

 

 

 

 

References

References
1 https://ucf.digital.flvc.org/islandora/object/ucf%3A5579
2 https://palmm.digital.flvc.org/islandora/object/ucf%3A5486
3 [편집자 주] 맑스주의의 공동 창시자로서, 엥엘스의 기여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조금 길지만, 관련 부분을 인용해 본다. “나는 맨체스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종래의 역사 서술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거나 보잘것없는 역할만을 하는 경제적 사실들이 적어도 현대 세계에서는 결정적인 역사적 힘이라는 것; 이 경제적 사실들이 오늘날의 계급 대립이 발생하는 기초를 이룬다는 것; 대공업이 충분히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따라서 특히 영국 같은 데서는, 이 계급 대립이 다시 정당의 형성, 정당의 투쟁 및 전체 정치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맑스도 이와 같은 견해에 도달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독불 연보≫(1844년)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하였다. 대체로 국가가 시민 사회를 조건짓고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가 국가를 조건짓고 규제한다. 따라서 정치와 정치사는 경제적 관계들과 그 관계들의 발전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1844년 여름에 빠리로 맑스를 방문했을 때 모든 이론 영역에서 우리는 완전히 일치하였다. 바로 그때부터 우리의 공동 작업은 시작되었다. 1845년 봄에 브뤼셀에서 다시 만났을 때, 맑스는 이미 앞서 말한 기초로부터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이론의 기본 골격을 완전히 발전시켜 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이 새로이 획득한 견해를 각 방면에서 세세하게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 되었다.” (엥엘스, “공산주의자 동맹의 역사에 관하여”, ≪저작 선집≫ 제6권, 박종철 출판사, pp. 221-222.)

하지만 엥엘스는 늘 자신을 낮추고, 맑스의 공을 높였다. “여기서 나에게 개인적인 해명을 허용해 달라. 사람들은 요즈음 되풀이하여 이 이론에서 나의 몫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이 점을 설명하는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40년간에 걸친 맑스와의 공동 작업을 하기 이전이나 그 동동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이 이론을 기초하고 특히 그것을 완성하는 데에 나의 독자적인 몫이 일정하게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특히 경제학과 역사 영역에서 지도적인 기본 사상의 대부분과 그 최후의 날카로운 파악은 맑스의 것이다. 내가 기여한 일은 ―기껏해야 몇몇 전문 분야를 제외하면― 내가 없었더라도 맑스가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맑스가 한 일을 나는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맑스는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더 높이 서 있었고 더 멀리 보았으며 더 많이 더 빨리 통찰했다. 맑스는 천재였고 우리는 기껏해야 재주꾼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이 이론은 현재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이론은 당연하게도 그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엥엘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저작 선집≫ 제6권), p. 273.)

4 [편집자 주] 정확하게는 두 번째 만남이다. 이 만남은 엥엘스가 영국에서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맑스가 거주하고 있던 빠리를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 열흘 동안의 역사적 만남의 결과물이, 맑스와 엥엘스의 최초의 공동저작인 ≪신성 가족≫이다. 앞서 [각주 3]에서 살펴본 대로, 후일 엥엘스는 이때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1844년 여름에 빠리로 맑스를 방문했을 때, 모든 이론 영역에서 우리는 완전히 일치하였다. 바로 그때부터 우리의 공동 작업은 시작되었다.” (엥엘스, “공산주의자 동맹의 역사에 관하여”, 같은 책, p. 222. (MEW, Bd. 21, S. 212.) ) 그들의 짧은 첫 만남은, 1842년 말, 엥엘스가 독일에서 영국으로 가는 길에, 맑스가 있던 쾰른의 ≪라인 신문≫ 편집실을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때 맑스는 엥엘스를 브루노 바우어의 영향을 받고 있는 헤겔 좌파로 생각해서, 분위기는 냉담했었다고 전해진다.
5 [편집자 주]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대의 우화들은 우정에 얽힌 매우 감동적인 얘기들을 많이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간의 우정에 관한 선조들의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조차 무색하게 만들 만한 관계를 갖고 있던 학자요 투쟁가인 두 사람에 의해 자신들의 과학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Lenin, “Friedrich Engels”, Lenin Werke, Bd. 2, S. 12.)
6 [편집자 주] 미완성 유고인 엥엘스의 ≪자연의 변증법≫은 모쓰끄바의 맑스-엥엘스 연구소에 의해, 1925년 처음 독일어와 러시아어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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