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변혁주체의 자유와 결정론 ― 맑스・엥겔스와 지젝의 주체론 소고

 

홍승용 │ 현대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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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경기가 조금 좋아졌다거나 재벌 회장 아무개가 다른 누군가로 바뀌었다고 해서, 또는 친-재벌 극우 정권이 친-재벌 보수 정권으로 교체되었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회질서의 근본적 변화, 곧 변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지배관계의 변화를 염두에 둔다. 궁극적으로 변혁운동은 과거의 지배자 자리에 새로운 지배자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지배관계 자체가 사라진 상태를 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본질적인 지배관계는 경제적 지배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제적 지배관계에 근거하는 자본권력은 경제영역에 머물지 않고 정치권력과 문화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하며, 우리의 의식만 아니라 무의식적 감수성이나 욕구를 주물러서 현재의 지배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기도 한다. 지배의 양태는 다양하지만, 피지배자들이 지배관계를 지배관계로 의식하지도 못하고 감각과 욕구 차원에서도 길들여져 자발적으로 지배받기를 원하는 상태야말로 지배자들의 영원한 희망사항일 것이다.1) 그런데 이는 단순한 희망이나 우려가 아니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재벌들과 그 대리자들을 걱정해주고 정치적으로 지지하며 심지어 노동자라는 말을 기피하는 것은 기괴한 예외 현상이 아니다. 자본권력의 입맛에 맞는 위계질서는 범사회적으로 당연시되고 평등과 단결의 의의는 흔히 천대받는다. 그로 인해 노동자 민중은 국가권력에서 소외되고, 노동자 민중의 권익을 대변할 정치세력은 존재감조차 희미하다.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인 국가, 즉 진정한 의미의 민주국가인 노동자국가에 대해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를 근거로, 자본주의적 지배관계 속에서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이 지니는 현실적 중요성이나 변혁운동에서 노동자 민중이 수행할 수 있는 중심적 역할을 부인한다면, 이는 눈앞의 역사적 현상을 불변의 진리나 피할 수 없는 숙명 따위로 위조하는 전형적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나 그 근거로 동원되는 현상들은 어떤 자연의 섭리에 의해 저절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본권력의 전면 공세에 노동자 민중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투쟁의 중간 결과다. 변혁주체의 발전이 답보수준에 머물고 체념적 결정론이 팽배해지는 현상은 변혁운동이 해결해야 할 당면문제이지, 변혁운동의 불가능성이나 불필요성을 입증해주는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자본이 엄청난 생산력 발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주기적 위기와 축적의 한계에 부딪치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임금삭감, 노동시간 연장, 대량해고 등의 방식으로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 드는 것이 필연인 한에서 그렇다. 제국주의적 자본권력들이 생산력 불균등 발전으로 인해 시장・자원・영향력을 놓고 경제전쟁을 넘어서 군사적 충돌과 전면전도 불사할 위험이 점증하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또 무절제한 자연 약탈로 인한 환경 재앙이 인류문명의 총체적 파멸을 우리 코앞에 몰고 온 한에서 그렇다. 그리하여 자본독재가 초래하고 있는 제반 위기에 맞서 자본주의 너머의 대안질서를 만들어낼 필요성이 절박해졌고, 이를 위해서는 자본과 적대적 모순에 처해 있는 노동자 민중이 변혁주체로서 자본권력과의 전쟁에서 주력부대 역할을 떠맡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이 변혁운동의 주요 전제라는 점에서 그렇다.2)

 

 

2

 

맑스는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운동의 결과인 동시에 출발점이기도 한’ ‘주체로서의 인간’을 염두에 두면서, ‘사회 그 자체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인간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3)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맑스와 엥겔스는 인간이 환경의 산물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환경을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시한다.4) 인간의 주체적 활동적 실천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맑스는 자신의 ‘새로운 유물론’을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는 ‘구태의연한 유물론’ 혹은 ‘직관적 유물론’과 구별한다.5) 따라서 맑스의 유물론에서 주체의 활동적 실천적 요인을 빼버리면 그것은 구태의연한 직관적 유물론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에서 주체의 활동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위의 원론 수준 너머로 풍부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유물론의 기본 명제들은 주체의 의식적 활동성에 대해 상론하기보다 주로 주체의 의식이나 감성 혹은 욕구가 어떻게 규정되고 형성되는지를 밝히는 데에 집중된다. 예컨대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피지배계급의 구성원은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기에 앞서 이미 지배계급의 사상에 의해 규정받는다는 점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맑스는 흔히 천부적인 인간 본연의 능력으로 여기는 오감 역시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산물’로 파악한다. 또 “단순히 오감뿐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인 감각, (의지나 사랑 등의) 실천적 감각, 한 마디로 인간적인 감각, 여러 감각의 인간성은, 그에 알맞은 대상의 존재, 즉 인간화된 자연에 의해 비로소 생기는 것”(경철101)이다. 뿐만 아니라 맑스는 욕구 역시 어떤 불가해한 궁극의 실체가 아니라 제반 대상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고 본다. “소비가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욕구는 대상에 대한 감지를 통해 창출된다. 예술의 대상−다른 모든 생산물도 마찬가지로−은 예술 감각이 있고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공중을 창출한다. 따라서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을 위한 주체도 생산한다.”6) 유물론의 공리로 받아들여지는 명제, 즉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7)는 명제에서, 주체의 의식은 규정하는 쪽이라기보다는 규정받는 쪽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내지 상부구조의 관계에서도 토대가 일차적이고 상부구조는 이차적이다.

 

특정 의식의 절대적 타당성에 대한 회의와, 의식을 규정하는 조건들에 대한 반성은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고 있다. “우리는 물 그 자체로서의 대상을 인식할 수 없고 오직 감성적 직관의 객관, 즉 현상으로서의 대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8)는 칸트의 주장에서 ‘현상’ 개념은 인식의 주체적 조건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유물론적 관점에서도 의미 있다. 칸트 자신은 시간・공간・순수오성 개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의 인간학적 형식적 조건에 논의를 집중하고 있지만, 그 후의 인문학은 인식 및 의식을 규정하는 제반 조건들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펼쳐왔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론의 공리 역시 그러한 논의의 일환이다. 인식의 주체적 조건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실체 자체에 대한 과학적 규명으로 끊임없이 확산되어 왔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과학적 규명이 심화・확대되어 이데올로기적 환상들이 깨어지고, 인간의 자발성이나 무의식적 욕구 등도 비판적 인식의 영역에 끌려 들어옴에 따라, 인간의 주체적 위상까지 동반 하락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지젝은 코페르니쿠스・다윈・프로이트가 초래한 ‘인간의 굴욕’을 언급하면서 “최신의 과학적 쇄신이 처음 세 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일련의 더욱 많은 ‘모욕들’을 첨가하는 듯하다”9)고 주장한다. 경제학・사회학・심리학・언어학・역사학・인류학 등의 전통적 인문사회과학의 성과들이 축적됨에 따라, 또 유전공학・생화학・분자생물학・인지과학・뇌과학 등 실증과학들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비밀들이 끊임없이 더 밝혀질수록, 인간의 주체적 본질이라고 여겨지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사고・감정・행위 등은 제반 조건들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질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인간의 주체적 지위를 강화하기보다 인간을 분석대상, 즉 객체로 대하는 태도를 부추겨왔고, 그 극단에서 ‘주체 사망’이라는 성급한 구호가 유행하기도 했다.

 

만일 모든 것이 빈틈없는 인과적 필연의 그물 속에 존재하고 인간 역시 그 필연의 일부라면, 인간의 자유나 자발성 혹은 주체성은 그러한 필연에 대한 무지 내지 착각의 효과일 뿐인가? 아니면 ‘현실 그 자체의 존재론적 불완전함’, ‘존재론적 틈새, 균열’10)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자유의 공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아무리 심화・확대되더라도, 인간의 주체성 내지 자유나 자발성은 그러한 인식과 무관하게 엄연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더 적절한 방법이 있는가? 또 아니면 사실상 주체로서의 인간은 사망선고를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주체의 존립 가능성에 대한 이 물음들에 합당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수시로 숙명론・결정론으로 무장한 체념의 벽에 부딪치고, 변혁 주체에 대한 비하 및 변혁 자체에 대한 조소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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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에 대한 회의론에 대응하는 방안의 일환으로,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맑스의 유물론적 명제로 돌아가 보자. 이때 맑스의 유물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맑스의 명제에서 ‘아니라’라는 말은 변증법적 사유를 부추기기보다 차단한다. 이 명제를 비변증법적으로 읽으면,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바는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그들의 사회적 존재만이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적극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받아들이기 쉽다. 이러한 수사적 효과에 구애받지 말고 변증법의 정신에 따라 논의를 한 걸음 더 밀고가 ‘사회적 존재’에서 인간의 의식이 빠질 수 있는지 따진다면, 아무도 ‘의식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에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위 명제의 후반부는 ‘의식을 포함하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로 변형될 필요가 있다. 즉 유물론의 공리 자체에서 의식은 단지 규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의식 자체와 더불어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기도 하는 부분적 재귀구조를 형성한다고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 속에서 의식이 수행하는 역할 및 비중은 구체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코 ‘아니라’는 말이 유발하는 것처럼 의식의 적극적 규정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관념론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의식을 절대화하지 않고 의식을 넘어서는 여타의 물적 요인들을 함께 고려하더라도, 의식의 적극적인 규정적 역할도 또한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을 위한 주체도 생산한다’는 명제와 관련해 앞에서 우리는 주체의 욕구가 대상을 통해 규정되는 측면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때 변혁주체 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맑스가 생산・소비・분배・교환 과정의 변증법적 상호관계와 차이점들을 지적하면서, 결론적으로 운동의 출발점을 생산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과정은 언제나 생산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된다.”(요강1,69) 맑스의 이러한 지적에서 주체적 운동의 중요성을 추론해낼 수 있어 보인다. 대중들의 소비욕구가 생산물에 의해 창출되고 규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욕구 역시 이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미래상・사상・운동・선례・대안정책 등을 통해 창출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변혁주체는 노동자 민중의 현재 의식이나 욕구 상태를 알리바이 삼아 현재의 지배질서에 안주할 수 없고, 새로운 사회상 내지 설득력 있는 구체적 대안정책들을 생산하고 이를 노동자 민중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에 대한 욕구도 만들어내고자 적극 활동할 의무를 지닌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에서 토대의 일차성을 인정하더라도, 토대가 일방적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상부구조도 토대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주체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맑스에 따르면 상부구조, 즉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간단히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서문478)은 수동적으로 토대에 조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토대에서 벌어지는 “충돌들을 의식하고 싸워 끝장내게(ausfechten)”(서문478) 되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다. 루카치는 상부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모든 상부구조는 현실을 반영할 뿐 아니라 낡은 토대 혹은 새로운 토대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적극적 입장을 취하며, 상부구조가 이 적극적 역할을 포기하면 그것은 이미 상부구조가 아니다.”11)

 

상부구조의 적극적 역할과 관련해서는 사회적 존재와 의식의 관계에서와 유사한 논의가 가능하다. 상부구조가 토대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의식하고 싸워 끝장 낼 때, 또는 현실을 반영하고 토대에 대해 적극적 입장을 취할 때, 그 상부구조는 현실 전체가 아니지만 현실의 일부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특정 상부구조가 현실을 반영할 때, 그 상부구조는 현실 바깥에서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서 초연하게 객관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현실의 일부로서 적극적 당파적 주체적 입장을 취하면서 반영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반영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무관한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사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면서 경우에 따라 사건의 중요한 일부가 된다.12) 예컨대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마녀들의 예언은 적중해서 맥베스는 왕이 되지만, 이 예언은 맥베스의 사건을 바깥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 예언이 없었으면 아마 맥베스는 충실한 신하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예언에 대한 확신에 따라 그는 왕이 되는 방법을 찾고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실제로 왕이 된다. 예언의 자리에 상부구조・이론・의식・활동・주체를 대입하면 왜 안 되겠는가. 마녀의 예언들과 맥베스 사건 사이의 관계는 희귀한 사례가 아니라, 일상에서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는 현상이다. ‘객관적’ 여론조사를 통한 여론조작, 언론노출을 통한 스타 만들기, 긍정적 혹은 부정적 규정을 통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인격・사태 형성 등등을 생각할 수 있다. 여론조사, 언론노출, 긍정적 부정적 규정 등은 결코 대상에 대한 수동적 반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적극적 현실 개입 방식이며, 그 타당성이나 효능은 눈앞의 사실과의 직접적 일치 여부가 아니라 미래진행형으로 일정한 과정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물론 객관적 조건들 전체가 어떠하냐와 무관하게, 특히 개인 주체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객관적 조건 전반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효과적 개입방법 내지 전략 전술 없이 주체의 의지를 앞세울 경우 그에 따른 희생이 늘어나고 의도했던 변화도 이룰 수 없게 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나 이때 객관적 조건에 대한 인식에서 인식주체 자신을 포함하여 그와 인식을 공유하고 함께 움직일 수도 있는 집단주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느냐 하는 요인을 빼놓는다면, 그만큼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인식상의 오류가 커질 수밖에 없고 결정론에 빠질 위험도 따른다. 이와 관련해서는 ‘혁명의 교육학’에 관한 지젝의 주장을 참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반(反)-결정론적 관점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누군가 혁명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혁명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미성숙한’ 시도에서 시작하여 겨냥한 목적 달성의 실패 바로 그 안에서 −거기에 ‘혁명의 교육학’이 있다− ‘정확한’ 순간을 위한 (주체적) 조건들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13) 때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고 주체적 조건들을 창조해야 된다는 지젝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론은 이론 자체를 포함하는 주체적 요인을 배제함으로써 객관주의적 결정론을 유포해서도 안 되지만, ‘미성숙’과 ‘실패’를 최소화하고 성공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의무를 잊고 주체적 요인을 절대화하여 주의주의에 귀의해서도 안 될 것이다.

 

사정에 따라서는 주체적 개입의 효과가 사태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수준에 이를 수도 있고, 사태를 결정적으로 바꾸지는 못해도 의미 있는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으며, 미미한 수준에 머물 수도 있다. 물론 그 경계선은 유동적이다. 개인주체가 만들어내는 미미해 보이는 변화가 집단주체의 적극적 실천으로 발전해 상당히 의미 있는 수준의 변화나 사태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단계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볼셰비키들조차 처음에는 받아들지 않았던 레닌의 <4월 테제>나, 그란마호로 쿠바에 상륙한 카스트로와 게바라 등 한줌의 혁명가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 개입의 폭발적 잠재력 때문에 지배자들은 지배관계를 건드리는 직접적 행동만 아니라 그 이전의 발언・이론・이념, 심지어 놀이나 상상 혹은 망상 등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대응하고 검열과 탄압의 칼을 휘둘러 왔다. 이는 단순히 공안당국의 직업본능이나 과잉충성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주체적 개입이 통상적 계산을 뛰어넘는 현실 변화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식의 무기력감이 찾아올 때, 개인 주체의 적극적 개입에서 시작하는 현실변화의 예측하기 어려운 폭발적 발전 가능성을 상기하면 탈출구가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주체에서 시작하는 현실의 폭발적 변화 혹은 변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변혁적 의식과 욕구를 개인이나 소수집단만 아니라 다수가 공유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이 변혁의식・욕구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지속적인 조직적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 노동자 민중이 공감할 수 있는 대안적 미래상과 그 효과적 실현의 전략을 세우는 일이 필요한데, 이는 한 두 개인의 천재성에 의존해서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과제이다. 물론 이때에도 소수 개인들로부터 이 복잡한 과제의 풀이가 시작될 수 있다. 이 경우 개인주체를 집단주체나 사회 전체와 단순히 대립하는 존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설혹 개인주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요구를 얼마나 포괄적으로 깊이 있게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보편적 의미를 얻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4월 테제>는 볼셰비키들 사이에서조차 고립된 개인 의견이었지만, 당대 러시아 사회의 주요 요구들에 적극 부응함으로써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은 사회와 격리되거나 대립하는 경우에조차 이미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의 내밀한 (무)의식을 구성하는 언어부터가 이미 사회적 역사적 산물이다. 격리나 대립조차 사회적 조건과 관계의 결과물이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다. 따라서 개인의 삶의 표출은−비록 그것이 타인과 함께 동시에 수행되는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삶의 표출이라고 하는 직접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사회적 삶의 한 표출이자 확증이다.”(경철98)

 

이처럼 개인의 의식・욕구・감각・행위 등을 사회적 산물로 파악할 때, 우리는 다시 결정론의 그림자 속으로 한 발 들어서게 된다. 만일 개인의 의식・욕구・감각・행위 등이 생물학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제반 조건들의 필연적 산물이라면, 아니 우주사의 필연적 산물이라면, 나아가 만물이 필연적 인과 그물 속에 존재하며 사실상 모든 것이 그 인과 그물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한다면, 주체의 자유와 자발성이 차지할 공간은 없지 않으냐 하는 물음에 다시 부딪치는 것이다.

 

필연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엥겔스는 헤겔을 끌어들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헤겔에게 있어서 자유란 필연성에 대한 통찰이었다. ‘필연은 다만 인식되지 않은 한에서만 맹목이다.’ 자유라는 것은, 흔히 몽상하는 바와 같이 자연법칙에서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법칙에 대한 인식에, 또 인식에 의하여 이 법칙을 일정한 목적에 계획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곳에 있는 것이다.”14) 엥겔스는 이러한 관계를 자연법칙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육체적 및 정신적 존재를 규제하는 법칙’에도 적용하며, 이런 관점에서 ‘의지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에 관한 지식을 갖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듀링125) “그러므로 특정한 문제에 관한 인간의 판단이 자유로울수록 이 판단의 내용은 더욱더 필연성에 의하여 규정된다. 이와 반대로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많은 결단가능성 가운데서 얼핏 보아 임의로 선택하는 것과 같은 무지에 입각한 불확실성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지배해야 할 대상에 의하여 도리어 지배당한다는 점에서 자기의 부자유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것은 자연필연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과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듀링125-126)

 

자유를 ‘자연필연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지배력의 확대에서 찾음으로써 엥겔스는 자유를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파악한다.(듀링126) 물론 모든 인식이 지배욕구 및 합당한 행위 없이 직접 지배력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알면서도 지배하지 못하고 지배당하는 역학관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제반 법칙들을 ‘일정한 목적’에, 즉 이 역학관계의 변화에, ‘계획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그 법칙들에 대한 면밀한 인식을 통해 확대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또 확대된 가능성을 실제로 구현하는 과정, 예컨대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유의 확대 과정은 그러한 인식과 아울러 자유의 확대를 향한 욕구와 행위가 적합하게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져 왔다. 이 점에서 자유는 역사발전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지배력 내지 힘의 문제로 파악하는 입장은 ‘자유로운 작가’에 대한 레닌의 역설적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당 조직과 당 문학>(1905)에서 사회주의 작가들에게 ‘거대한 사회주의 메커니즘의 작은 톱니바퀴와 나사’가 되라고 권고하면서, 이를 작가의 진정한 자유와 직접 결부시킨다. 즉 부르주아 작가 또는 예술가들의 자유라는 것은 돈주머니와 경력에 대한 예속이고 위선일 뿐이며, 나라의 꽃이고 힘이며 미래인 노동자 대중과 공공연히 연대하는 작가들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작가들이라고 단언한다.15) ‘작은 톱니바퀴와 나사’와 작가의 자유를 결합하는 근거는, 미래 권력인 노동자 대중과의 연대를 통해 작가들이 자본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날 힘을 얻으리라는 판단이다. 실제로 독일의 경우 18세기에 등장하는 이른바 ‘자유작가’들이 겪어야 했던 검열과 경제적 난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16) 레닌의 주장을 결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유가 힘의 문제라면, 부르주아 작가들에게는 ‘없고’ 사회주의 작가들에게는 ‘있는’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작가들 역시 검열과 시장에 대한 예속과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속박 등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각자 다양한 수준에서 자유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 그러한 투쟁 없이는 사회주의 작가들에게 보장된 자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자유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 자유만 아니라 주체성・존엄성 또한 각 주체들이 집단 차원에서, 또 개인 차원에서, 제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억압이나 제약에 맞서 투쟁하여 얻어내는 만큼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자유와 주체성의 확대를 위해 분발하고 다양한 억압에 맞서 투쟁할 수 있지만, 이 투쟁을 통해 확대한 자유나 주체성도 영구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제약과 갈등 혹은 사회적 적대관계 속에서 다시 위축될 수 있다. 온갖 모순과 적대로 가득 찬 사회에서 누군가의 자유 확대는 대립 세력의 자유 축소를 의미하기 쉽다. 예컨대 식민지 피지배민중의 해방은 제국주의적 지배권의 폐지를 전제하며,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자본축적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이성적 제어와 지배관계의 해체 없이 불가능하다. 인류가 공동으로 사이좋게 자유를 확대하는 경우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공동의 자유 확대는 자본권력이 야기하는 적대적 지배관계가 해소된 단계에 이르러야 풍부히 구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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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결정론자들은 이러한 건전한 상식적 논의에 만족하지 않고, 엥겔스나 레닌의 자유 개념에 다시 반론을 제기할 듯하다. 즉 자연필연에 대한 인식 및 이에 근거한 지배력의 확대과정 자체가 이미 제반 조건의 산물이므로 필연적 인과 그물 안에서 진행된다는 생각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무지에 입각한 불확실성’과 ‘사실에 관한 지식을 갖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의 실천적 차이를 부인하지 않겠지만,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지식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무지에 머무는 상태, 나아가 결단을 내리게 된 조건들을 면밀히 살피면 나름으로 모두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볼 것이다. 즉 주체의 자유로운 결단이나 활동을 세계사의 필연 속에 흡수함으로써 다시 주체를 결정론의 늪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런 악성 결정론에 맞서 자유로운 주체의 지위를 옹호하는 지젝의 논의는 흥미롭다. 인과적 필연성의 완벽한 연쇄를 전제로, 자유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인과성에 대한 오해 내지 착각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을 지젝은 전근대적 우주론적 사고라고 비판하며, 이 경우 자유로운 주체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자유의 지위를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실’ 자체의 존재론적 미완결성을 주장하는 것뿐”이며, ‘스스로를 정립하는 주체성’은 ‘오인의 효과가 아니라’ ‘사실상으로 자발적인 것’이라고 본다.17)

 

지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원인(직접적이고 냉혹한 자연적 원인 또는 동기)들에 의해 결정되며 자유의 공간은 이러한 첫 번째 층위의 인과 연쇄의 마술적 간극이 아니라, 원인들이 나를 결정하게 될 방식을 사후적으로 선택/결정하는 나의 능력이다.”(시차408) 그의 논의를 좀 더 따라가 보자. “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지만 사후적으로 어떤 원인이 나를 규정하게 될 것인가를 결정한다(할 수 있다). 우리, 주체들은 수동적으로 병리학적 대상들과 동기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반성에 의하여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영향 받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거절하는) 최소한의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사후적으로 우리를 결정하도록 허락된 원인들을 결정하거나, 또는 적어도 이 선형적 결정 양식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자유’란 본래적으로 사후적인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그것은 단순히 불현듯 새로운 인과관계를 시작하는 자유행동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 관계/절차가 나를 결정하게 될 것인가를 승인하는 사후적 행위이다.”(시차410)

 

‘사후적 결정’이라는 처방을 통해 이제 우리는 결정론의 고질병에서 말끔히 치유되었을까? 아마 악성 결정론자는 이때 잠시 혼란에 빠질지 모르지만, ‘사후적 결정’ 역시 어떠한 인식・반성・결정・행위와 다름없이 제반 조건의 산물로서 인과적 필연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우기면서, 지젝의 사후 구성에 의거한 자유와 주체를 다시 필연의 그물에 가두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필연적 관계/절차가 나를 결정하게 될 것인가를 승인하는 사후적 행위’ 혹은 ‘인식을 통해 구성된 필연’이라는 생각은 결정론 극복에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결정론이 전제하는 필연과 지젝의 사후 구성된 필연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인간의 인식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실재 차원에서 무한한 연관을 뜻한다. 반면에 ‘인식된 필연’이나 ‘사후 구성된 필연’은 모두 그 가운데 주체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서 선별된 요인들로 구성된 부분적 필연이다. 따라서 사후 구성된 필연은 구성 주체에 따라 다른 성격이나 양상을 띨 수 있다. 어제 혹은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 필연적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그 필연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기술할 때 또는 사후 구성할 때면 얼마든지 다른 범위・양상・의미를 제시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진실투쟁 및 의미투쟁의 형태로 혹은 상부구조로서 나타날 것이며, 그 진리치나 실천적 의의에 따라 주체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비판받을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필연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왜 그러한지 그 필연의 내용을 제시할 경우, 현실 사회주의를 그와 다른 시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다른 사후 구성들과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필연을 사후 구성하는 서로 다른 방식은 다시 미래의 필연을 구성하는 다른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다. 지젝의 사후 구성론은 조잡한 상대주의를 피할 수 있는 한, 기존의 필연에 대한 어떤 구성물이든 그것이 누군가의 독점물일 수 없음을 명시하고 진실투쟁・의미투쟁을 촉발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진실투쟁・의미투쟁을 원칙적으로 회피하고 구성물들의 가치를 동등한 것으로 전제하는 추상적 사유방식에 머물 때 조잡한 상대주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악성 결정론이 전제하는 필연적 인과 그물은 이 진실투쟁 및 의미투쟁에 등장하는 구체적 내용과 별 관계없는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상정이며, 논증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반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 자체의 ‘존재론적 미완결성’ 혹은 빈틈과 우연을 강조하는 입장 역시 논증도 반증도 될 수 없다. 양쪽에 대한 단정적 주장은 모두 우주사적 무한대와 미립자 이하의 무한소에 대한 신적 인식을 전제하며, 현실적으로 인간은 그러한 인식을 추구할 수는 있을지라도 달성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연의 그물을 현실적 인식이 아닌 인식 생산에 유용한 ‘규제적 이념’으로서 상정하는 것은, ‘아직’ 빈틈으로 남아 있는 부분들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 현실의 부분적 필연들 내지 법칙들에 대한 끊임없는 발견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결정론에 무조건 백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결정론자들을 향해서는 ‘당신이 말하는 필연의 실제 내용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도 결정론을 효과적으로 논박하는 데에 쓰일 수 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그들이 어떤 실제적 내용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결정론이 전제하는 무한한 필연적 인과 그물에서 한 부분을 떼어내 구성해낸 부분적 필연일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견실한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논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결정론자들이 어떤 부분적 구성물조차 내놓지 않으려 든다면 그러한 결정론은 공허한 추상 수준에 머물도록 버려두고, 우리는 실천적으로 유용한 부분적 필연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들을 존중하면 될 것이다.

 

결정론의 세속적 형태로 등장하는 필연적 숙명에 대한 어떤 예언들이든 부분적 자의적 구성물의 지위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것들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들을 아예 모르거나 무시하면서도 얼마든지 건강하게 장수를 누릴 수도 있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결정론 혹은 숙명론보다 훨씬 광범하고 끈질기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달라붙어 있는 결정론적 반응방식은 예컨대 살아남기 위해서, 더 가지기 위해서, 더 누리기 위해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혹은 대세 속에 몸을 숨기기 위해서 등등의 전제를 반쯤 숨겨둔 채,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런 반응방식들과 부딪칠 때면, 또 자신이 그런 반응방식에 빠져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것은 실제의 필연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저 필연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사이비 필연이 아닌지 잠시 돌아보고, ‘~하기 위해서’라는 전제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그것을 폐기하는 데에 따르는 위험까지 감수한다면 자유와 주체성의 확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죽음 충동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됨’은 적응의 요구를 무시하는 특정 자동성을 따르며, 환경으로의 함몰에서 ‘분리’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죽음 충동’이 궁극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정신분석은 ‘결정론적’(‘내가 하는 것은 무의식적 과정에 의해 결정된다’)이지 않다: 자신을 파괴하는 구조로서의 ‘죽음 충동’은 최소한의 자유, 단일한 공리주의적 생존주의적 태도로부터 분리된 행동의 극소값을 나타낸다. ‘죽음 충동’은 유기체가 더 이상 그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자율적인 행동의 순환 속으로 ‘폭발/내파’한다는 것을 뜻한다.”(시차462) 유기체가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단일한 공리주의적 생존주의적 태도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행동의 순환 속으로’ ‘폭발’하는 것은 우리를 일상적 자체 보존의 논리에 묶어놓는 사이비 필연의 환각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 충동에 의거하는 자율적 행동의 순환이 맹목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진정한 주체적 물음인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동시에 제기하면서 다시 부분적 필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지젝은 책임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즉 주체의 행위가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나는 다르게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그에게 필연으로 나타나는 좌표 자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시차484-485) 이처럼 필연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주체의 자유 경험을 확대해 줄 수 있다. 그 극단은 자신의 생물학적 사회적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지젝은 ‘사라지는 매개자’ 개념으로 그러한 태도를 요약하기도 한다. “궁극적인 혁명적 윤리적 자세는 혁명에 대한 단순한 헌신과 충실의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사라지는 매개자’의 역할을, 혁명이 궁극적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반역자’로서) 처형 집행되어야 할 과잉적 집행자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이다.”(주체617-618)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책임’이 야만적 지배질서에 대한 노예적 복종과 구분되기 위해서는 ‘필연으로 나타나는 좌표’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불가피한데, 이 구체적 인식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인과적 사슬을 대상으로 전제한다.

 

 

5

 

지젝은 ‘우리가 우리를 결정할 인과적 관계’ 내지 ‘윤리적 필연’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말로 필연적 인과 그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를 구출해내고자 한다. 이때 그는 ‘윤리적 정체성의 기본 형태를 선택하는 시원적, 무시간적, 초월론적 행동’이라는 칸트의 개념을 동원하며, 이를 통해 자기-의식을 무의식 문제와 관련 짓는다. “칸트와 셸링은 시원적 선택의 비현상적이고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인 행동을 가정한다. 우리 각자는 이를 통해 시간적이고 신체적인 현존재에 우선하는 자신의 영원한 속성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적이고 현상적인 현존재 속에서 이 선택의 행위는 부과된 필연으로 경험되며, 이는 주체가 그의 현상적 자기 인식에서 자신의 특성(그의 윤리적 ‘본성’)의 근거를 형성하는 자유 선택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시차491) 또한 지젝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칸트의 관점을 받아들여 주체를 실체 없는 형식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는 칸트의 자기-의식이 ‘나의 실체적인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이 아니라 ‘논리적인 허구이며 비실체적인 준거지점’, ‘빈 논리적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칸트가 말하듯이) 나의 본체적 차원에서 나는 ‘생각하는 사물’로서 결코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S̸로서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이다.”(시차488)

 

여기서 ‘우리를 결정할 인과적 관계’ 또는 ‘윤리적 필연’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의 실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자유로운’ 선택을 규정하는 요인은 아무것도 없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규정 요인들을 우리가 알지 못할 수도 있고 알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더 알아가고 바꾸고자 할 수도 있다. 즉 그 규정 요인들 역시 절대화될 수 없으며 실천적 필요와 인식 능력에 의거하여 부단히 다시 파악되고 이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무의식적인 상태에 꼭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원적 무시간적 초월론적 행동’이라는 것 역시 이제는 의식하지 않게 된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의 산물 혹은 축적된 경험의 산물일 것이다. 즉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만으로는 결정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또 만약 예컨대 헤겔처럼 물자체를 알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인식의 불완전성과 과정성을 인정한다면, 자기-의식을 ‘빈 논리적 기능’으로 받아들이거나 ‘S̸로서의 주체’라는 개념으로 주체를 필연적 인과 그물로부터 구해내려 과도하게 에너지를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젝은 이 ‘S̸로서의 주체’를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주체’와 연결한다. ‘기표의 주체’는 실체로서 인과 사슬에 얽혀 있지 않다는 점에서 칸트의 자기-의식과 마찬가지로 ‘비실체적 준거지점’을 이룬다. “내가 ‘나’라고 말할 때−내가 ‘스스로’를 ‘나’라고 지칭할 때−의미화하는 바로 이 행동이 (그 정신적 상태, 욕망, 태도의 내용을 포함하여) ‘실제로 살아 있는 실체’에 무엇인가를 덧붙이고 지칭하며, 주체는 이 자기-참조적 지시 행위에 의해 지칭된 내용에 덧붙여진 X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통일성을 그 기저에 다양한 비일관적인 정신 과정들이 있는 ‘단순히 허구’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요점은 이 허구가 ‘실재 속의 효과’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일련의 ‘실제’ 행위들에 대한 필연적인 전제로서 기능한다.”(시차489)

 

‘실재 속의 효과’를 ‘생성한다’거나 ‘실제’ 행위들에 대한 ‘필연적 전제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통해 ‘비실체적 준거지점’인 ‘기표의 주체’가 필연의 그물에서 풀려나 변혁주체의 위상을 확보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지젝이 제시하는 사례는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다. “자신이 타자에 의해 어떻게 교환의 대상으로 환원되었으며 착취되고 조종되고 희생되었는가를 불평하는 히스테리적 주체의 전형적인 태도를 생각해보자. 이에 대한 라캉의 답은, 상황의 수동적 희생자라는 이러한 주체의 위치는 결코 바깥에서 단순히 주체에게 부가된 것이 아니며, 적어도 최소한도로 그에 의해 인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주체는 자신이 당하는 희생에 그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정확히, 단순히 상황의 수동적 희생자가 되는 주체의 의식적 경험의 ‘무의식’적 진실이다.”(시차490-491) 라캉과 지젝의 이런 논의가 변혁운동에서 멀어진 노동자 민중의 의식상태에 대한 냉소적이고 현학적인 야유를 벗어나 변혁주체의 형성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6

 

지젝의 논의를 따라 ‘비실체적 준거지점’, ‘빈 논리적 기능’, 혹은 ‘기표적 주체’, ‘무의식적 주체’ 등의 개념들을 어떻게 배합해도 필연적 인과 그물에서 주체를 구출해낼 전망은 별로 없어 보인다. 차라리 주체를 규정하는 필연적 인과 그물을 인정하는 편이 주체에 대한 논의를 간명하게 해 줄 것이다. 단 이때 어떤 주체를 규정하는 필연적 인과 그물에 대한 현실적 인식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과도 마찬가지로 무한히 심화・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인정할 필요가 있다. 즉 필연적 인과 그물을 이미 현실적으로 완성된 인식이 아니라 인식을 도울 뿐인 ‘규제적 이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정 속에서 우리는 당연히 인간 주체도 객체로 다룰 수 있다. 이때 실천적 요구조건과 인식능력에 따라 인간 주체를 객체로 삼는 경제학적・정치학적・사회학적・문화학적・심리학적 혹은 생물학적 등등의 연구가 무궁무진하게 계속될 필요성을 부인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그러한 연구의 결과들을 포함한 인식들을 발판으로 삼아, 실천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다양한 정도로 자유로운 주체성을 발휘한다. 이처럼 우리가 주체성을 발휘한다고 해서 제반 과학들이 주체로서의 우리를 대상으로 하는 인식의 넓이와 깊이를 늘이고 불명확한 것을 더 명확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과학들은 이때 주체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의미 있는 착각 내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끝없이 폭로해갈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라고 여기는 자신의 의식이 실은 착각이나 가상임이 세세히 드러난다고 해도 주체의 입장에서는 간단히 그러한 가상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18) 이 점에서 구체적 조건 아래 주체로서 다양한 형태・범위・수준에서 자유로이 혹은 자유로운 듯이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경험방식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과학의 시각에서 필연적 인과 그물 속에 있는 객체로 파악되는 바로 그 동일한 인간이 주관적 경험방식의 측면에서는, 설혹 미미하거나 부도덕하거나 심각한 오류를 범할지라도,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과 결정과 행위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주체로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방식 역시 오랜 역사적 사회적 발전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 기원을 밝힐 필요도 없을 만큼 기정사실로 굳어진 인간의 본성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오감의 형성이 세계사의 업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형성과정을 일일이 증명할 필요 없이 우리는 오감을 우리 몸에서 떼어내 버리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활용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가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 일일이 의식하지 않지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는 자유로이 행위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이 행위를 규정하는 제반 요인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아무리 참신한 논리로 그 행위의 필연적 규정요인들을 들이밀어 주체의 착각 혹은 환상을 깨버리고자 해도 그러한 자유의 경험방식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주체는 그러한 과학적 인식의 불완전성 내지 부분성을 믿고 단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를 위해 필요한 만큼 참조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자유와 인과적 필연은 보는 각도에 따라, 즉 ‘시차적 관점’에 따라 병립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다양한 문제들에 시차적 관점을 무리하게 적용하며, 결정론의 함정으로부터 주체를 살려내는 일에 열성을 보이지만, 정작 필연적 인과 그물과 주체의 자유라는 문제에는 시차적 관점을 명시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있다.19) 그러나 주체 문제에 시차적 관점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결정론의 공격에 위축될 필요 없이 주체적 자유의 영역을 넓히고, 변혁주체로서 지배관계들을 해체해 가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객체로 면밀히 인식해가는 과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주체로서 변혁운동의 성공을 위해 과학의 성과들을 적극 받아들여 활용하고자 한다. 예컨대 객관적 정세에 대한 과학적 인식 속에 인식 주체의 의식과 욕구와 행위 등을 포함해 가변적인 주체적 요인들을 끌어들이는 셈법을 적용함으로써, 객관성의 이름으로 결정론에 굴복하거나 주체적 요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7

 

누구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주체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적 경험방식은 각자의 몸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의 몸 역시 물질대사 혹은 에너지대사를 비롯한 제반 환경적 조건과 생물학적 조건의 산물이며, 또 이제까지 먹고 마시는 음식물과 공기 등이 우리의 몸을 끊임없이 새로이 구성해가는 재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과의 공감이나 사회적 체험과 별도로 몸을 통해 직접 느끼는 통증이나 쾌감 등의 감각에 근거해 자신의 몸을 자신의 몸이라고 확신하면서 의식을 작동시킨다. 이 점에서 개인을 주체성의 출발점으로 삼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는 셈이다. 물론 개인 주체는 자체로서 이미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또 사회적 지배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변혁의 폭발적 구현을 위해서는, 변혁적 의식을 공유하고 함께 효율적으로 투쟁하는 집단주체가 조직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또 집단주체가 공유하는 변혁적 의식이 특정한 개인주체의 손을 통해 명확한 형태로 객관화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순수하게 개인주체의 것이라기보다 집단주체의 요구를 반영하고 집단주체에 의해 검증되고 개조되는 과정을 통해 공유물로 발전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집단주체 내에서도 개인주체들 사이에는 인식범위・욕구・감각 등의 차원에서 크고 작은 가변적 편차들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특정 시점에서 집단주체 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개인주체가 앞질러서 훌륭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변혁을 추구하는 집단주체는 당면 조건을 고려하는 가운데, 집단 내 개인주체들의 자발적 에너지를 적극 살려내는 민주적 조직문화를 만들어감으로써만 지배관계의 궁극적 해체를 향해 실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피지배집단 속의 개인주체들이 기존의 지배적인 관념들과 행동방식에 의존하여 새로운 자발성과 비판적 사고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할 때, 변혁운동은 첫발을 떼기조차 힘들어진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지배질서 속에서는 사이비 필연의 전형적 형태인 이른바 ‘대세’에 편승하지 않고, 대세의 성격을 바꾸어 가고자 도전하는 변혁적 개인주체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처럼 변혁적 개인주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편협한 이기적 본능에 매몰되어 공존과 공유의 가치를 비웃는 패권주의적 개인주의를 절대화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전적으로 대립한다. 지배관계의 궁극적 해체를 추구하는 변혁적 개인주체는 개인주체로 머물지 않고 기필코 집단주체로 발전하려들기 때문이다.  노사과연


1) 초기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가들이 제기한 ‘관리되는 사회’(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나 ‘일차원적 사회’(마르쿠제)라는 개념이 이러한 문제를 명시하는 셈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맑스와 엥겔스의 테제 혹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와 관련한 헤겔의 설명, ‘노예의 행위는 본래 주인의 행위’이며, ‘주인이 노예에 맞서 행하는 바를 노예 스스로 행한다’는 주장에서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G. W. 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rankfurt/M. 1970, 150-151쪽 참조. 이하 ‘현상학’으로 약칭함.

 

2) 루카치의 논의를 끌어들이자면, 노동자 민중이 지금 당장 변혁주체로 나서지 않더라도 나설 가능성은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로 인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즉 그것은 ‘객관적 가능성’이다. G.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조만영 역, 거름 1986, 114쪽 참조. 이러한 관점은 변혁주체의 부재를 확인하는 데에 만족하는 냉소와 탄식의 여러 변형들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해 보인다.

 

3) 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97쪽 참조. 이하 ‘경철’로 약칭함.

 

4) K. 맑스/ F.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 2015, 80쪽 참조.

 

5) 같은 책, 37-38쪽(「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5, 9, 10번) 참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 ‘새로운 유물론’을 ‘실천적 유물론’ 또는 ‘공산주의적 유물론’이라고 지칭하는데, 그 실질적 내용은 ‘기계적 유물론’과 대조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6) K.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김호균 역, 그린비 2007, 61-62쪽. 이하 ‘요강1’로 약칭함

 

7) K. 맑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저작 선집 2≫,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478쪽. 이하 ‘서문’으로 약칭함.

 

8) I. 칸트: ≪순수이성 비판≫, 전원배 역, 삼성출판사 1999, 45쪽. 이하 ‘순수’로 약칭함. 이때 칸트는 인식 개념에 과도한 부담을 떠안기고 있는 셈이다. 인식은 대상의 온전한 물질적 재생산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의식을 통한 추상과 변형 내지 왜곡의 산물이다. 따라서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잠정적이지만 대상과 어느 정도 유용한 관계를 지니는 관념이라는 의미를 함의한다. 따라서 ‘인식’ 자체가 이미 현상적 성격을 띠므로,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에는 동어반복적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이다.

 

9) S.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역, 마티 2009, 329쪽. 이하 ‘시차’로 약칭함.

 

10) S.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b 2008, 106쪽. 이하 ‘주체’로 약칭함.

 

11) G. 루카치: ≪미학논평≫, 홍승용 역, 문화과학사 1992, 548쪽.

 

12) 이와 관련해서는 ‘묻혀 있는 의식’에 대한 지젝의 논의를 참조할 수도 있다. “사적 유물론은 (사회적) 존재의 과정과 집단적 실천 자체의 내재적 순간, 그 능동적 순간으로 사회현실에 (비록 오늘날, 이라크 침공 이후 우리가 이 동사를 사용하는 것이 수치스럽다할지라도) 묻혀(embedded) 있는 과정으로서의 사유(‘의식’)라는 개념을 통해 ‘객관적 현실’의 수동적 거울상으로서의 사유라는 사유와 존재의 외적 평행관계를 극복한다.”(시차18)

 

13) S. 지젝: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박정수 역, 그린비 2009, 539-540쪽. 이하 ‘대의’로 약칭함.

 

14) F. 엥겔스: ≪반듀링론≫, 김민석 역, 새길 1987, 125쪽. 이하 ‘듀링’으로 약칭함.

 

15) V. I. Lenin: Über Kunst und Lieteratur, Frankfurt/M. 1977, 59쪽 이하 참조.

 

16) W. 보이틴 외: ≪독일 문학사−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문학적 술화≫, 허창운 외 역, 삼영사 1989, 182쪽 이하 참조.

 

17) S.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한보희 역, 새물결 2008, 266쪽.

 

18) 칸트의 용어를 끌어들이면 그러한 착각 내지 가상은 ‘선험적 가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선험적 가상은 그것이 폭로되고 또 선험적 비판을 통하여 허무하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하더라도 의연히 종식하지 않는다.”(순수270)

 

19) 이에 반해 “직접적인 자의식에서는 단순한 자아가 절대적 대상이지만, 이 절대적 대상은 우리에게 혹은 즉자로서 절대적 매개다”(현상학150)라는 헤겔의 주장에서 유사한 양립성을 확인할 수도 있다. 즉 직접적으로 나는 나의 주체적 지위를 확인하고 절대적 대상으로 삼지만, 실질적으로 그 절대적 대상인 나는 절대적 매개 즉 인과적 필연의 그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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