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민족문제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위하여

 

박문석 │ 연구위원

 

노동운동 내에 만연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그 정도가 심각하다. 이러한 상황은 정세분석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업 전반에 걸쳐서 몰계급적 결과들로 이어진다. 특히나 자본주의 체제의 전반적 위기인 현재의 시점에서 노동자계급 해방의 전망은 이로 인해 불투명하기만 하다. 정세의 엄중함에 비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조직적・사상적 대응 상태도 너무나 허술하다. 이 글의 내용은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에 경도된 의식과 실천을 보이고 있는 노동운동 내 자주진영(NL)의 동지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투박한 내용이어서 논쟁의 지점 또한 많을 것이나,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그만큼 운동의 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1. 소부르주아 사상은 노동자계급의 것이 아니다

 

먼저 몇 가지 개념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민족이란 동일한 언어, 일정한 영토, 일정한 경제생활 및 문화의 공통성과 전통적 심리 등 다섯 가지 모두를 포함시켜 구성된 집단으로서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첫째, 이 다섯 가지는 하나하나 따로 떼어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또 어느 하나를 특히 강조할 수 없다. 둘째, 민족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즉 자본주의의 성립, 발전과 함께 역사상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셋째,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민족의 개념과 인류학적 의미와 성질을 갖는 인종 또는 종족의 개념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넷째, 민족의 개념과 국민의 개념은 다르다.1)

한(조선)반도의 민족문제, 곧 민족모순은 부르주아 독재 국가로서의 남쪽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로서의 북쪽의 (계급)분단모순이 한 축으로 존재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미 제국주의와 국내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의 동맹관계와, 이와 대립하고 있는 노동자 인민 간의 모순이 있다. 이 두 개의 모순은 계급모순을 기본으로 한다.

민족주의란 일반적으로 민족의 생활・전통・문화를 보존하여 자결이 가능한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성립 후에는 그 독립성・통일성을 유지 발전시킬 것을 추구하는 사상이나 움직임으로서, 역사적으로 배외주의와 국수주의, 종족갈등, 대량학살과 전쟁, 파시즘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국내 민족주의 운동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특징으로 하면서 한(조선)반도 통일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삼는다. 이들은 민족모순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취급한다.

다음으로 ‘소부르주아’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중간계급, 쁘띠 부르주아, 소시민계급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규모가 작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생산수단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아니다. 그들은 자본가로 성공하기 위한 주관적인 바람과는 달리 독점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몰락의 과정에 놓이게 되고 대부분 프롤레타리아화 된다. 이들 집단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방황한다. 엥엘스는 이들에 대해 그의 저서 ≪혁명과 반혁명≫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 계급에 속하는 개인은 부르주아의 지위를 동경하면서도, 아주 사소한 불운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로 몰락해 간다. … 그러므로 이 계급은 부유한 계급에 속하고자 하는 희망과 프롤레타리아 심지어는 영세민의 상태로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또 공무(公務)에 뛰어들어 자기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싶은 욕망과 정부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소유한 재산은 근소한 것이고, 그 소유의 불확실함은, 소유에 따라 그들은 심하게 동요하게 된다. 강력한 봉건 정부나 군주 정부 하에서는 허리를 굽혀 순종하지만, 일단 중등계급의 세력을 얻으면 곧 자유주의의 편에 선다. 그리고 중등계급이 지배권을 확립하면 격렬하게 민주주의를 주창하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독자의 운동을 시작하면 두려움 때문에 의기소침하여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기회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이들 소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이다. 사전에서 기회주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기회주의는 노동계급 운동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를 비(非)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지와 쁘띠 부르주아지) 계층의 이익과 필요에 적응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회주의는 대개 수정주의나 교조주의와 연결되어 있으며, 우익적일 수도 있고 좌익적일 수도 있다.

우익기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운동과 함께 등장했다(조합주의, 라쌀레주의, 경제주의 등). 우익기회주의는 혁명적 방식의 투쟁을 거부하고 부르주아지와 화해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개량주의를 지지하는 쁘띠 부르주아 계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좌익기회주의는 표면상으로는 우익기회주의의 대극에 위치하고 있다. 좌익기회주의는 가장 단호하면서도 초혁명적인 투쟁방식을 주장하고, 모든 타협을 거부하며, 개량주의적인 조직과는 어떠한 협조도 거부하고, 또한 근로민중의 부분적 요구를 옹호하는 투쟁을 경멸한다. … 좌익기회주의도 우익기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쁘띠 부르주아 계층의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우익기회주의는 계급화해의 방향으로, 좌익기회주의는 모험주의적인 방향으로 운동을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2)

 

“혁명적 투쟁방식을 거부”하고, 노자 간 “계급화해의 방향”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우익 기회주의’이자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쁘띠 부르주아와 사민주의자는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계급 간 적대성은 부정하고 상호 협력 속에 조화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만이다. 노자간 계급모순은 양자의 공공연한 투쟁에 의해 새로운 사회가 성립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운동 조류가 많다 보니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는 노동운동 내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다.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어느 순간 소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노예가 되어 과학적인 전망을 갖지 못하고 계급협조 노선에 경도되어 갈팡질팡하는 등 혼란을 겪게 된 것은, 오랜 세월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정치・사상에 대한 파쇼적인 탄압과 더불어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에 따른 영향이 크다. 그리고 주체적으로는 1980년대 불붙었던 운동진영 내에서의 사회구성체 논쟁이 1990년대 쏘련의 몰락으로 중단되어 ‘NL(우파)’과 ‘PD(좌파)’로 분열된 채 결과를 보지 못하고 계속 지속되어 오고 있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쏘련의 몰락은 ‘포스트 맑스주의’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하는 온갖 기회주의적 잡사상과, 역사 왜곡과 ‘청산주의’를 초래하였고, 만연한 이들 기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 하에 노동운동이 포섭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의 집권 시 그들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운동 내 기회주의자들과 출세주의자들을 양산해 내곤 하였다. 아직까지도 과학적 세계관으로서의 사적 유물론과 맑스-레닌주의 혁명노선은 시대변화에 어울리지 않은 케케묵은 구닥다리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 소부르주아 사상은 반동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 이 사상은 몰계급적이고 노사협조주의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가져야 할 사상은 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맑스주의 사상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계급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사상・조직적 발전을 억압하기 위해 72년간, 길게는 95년간 존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3)을 폐기하는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혁을,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고 실천해 가야 한다.

 

 

2. 노동자계급 내의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노동자계급의 사상과 이론의 부재는 노동운동이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조건임을 드러낸다. 과학적인 정세 인식이 부족하고 따라서 당연히 대안이라는 것도 미흡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지금은 부르주아국가와 언론에서 쏟아 내는 ‘코로나19’와 관련한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 공세와 파시즘적 통제를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칼 맑스의 가르침이 절실한 시기이다. 아래의 글은 민주노총의 통일(반제 평화)운동 사업에서 드러나는 소부르주아적 접근들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이다.

 

1) 과학적(변혁적) 전망 부재와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경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힘입어 많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 반제민족해방 운동이 본격화되었었다. 당시의 농업을 중심으로 한 중국과 베트남 등의 반(半)봉건적 생산관계는 혁명의 주력을 농민(소작농/빈농)으로 하였고, 노동자계급의 당(공산당/노동당)에 의한 지도로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수행되었다. 그렇게 세운 권력은 곧 두 번째 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로 이행하였다.4) 각 국가마다의 특수한 조건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경로를 다르게 한다. 그러나 그 핵심 원리는 기존의 지배체제를 전복하고 노동자 인민의 독재 권력을 세우고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더불어 착취가 폐지되는 사회주의적 단계로 이행해 간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시대의 생산을 담당하는 주력이 어느 계급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혁명의 주력과 보조역량으로의 배치가 결정된다. 더불어 그러한 혁명의 전 과정에서 비 프롤레타리아 근로 인민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엔엘진영의 동지들은 혁명의 단계 구분을 2단계로 나누고, 첫 번째 단계로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그다음 단계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설정한다. 한국사회를 (신)식민지 반봉건(반자본)사회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전후의 시기라면 농민(소생산)이 다수를 점하였기에 이러한 설정이 옳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도로 발전한 독점자본주의 사회이고,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구성이 다수를 점하기에 혁명의 주력 또한 노동자계급을 중심에 두고 계급동맹으로 보조역량을 형성하여 사회주의 혁명 투쟁으로 곧장 나서야 하는 것이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채만수 소장은 1980년대 한국의 사회구성체 논쟁과 관련하여 ‘반봉건’적 관점의 오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지주-소작관계 자체는 생산관계의 성격상 봉건제이고 나아가 자본제적 시장에 포위되어 본래적인 봉건제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특징을 보이는 봉건제 즉 반봉건제이다. 하지만, ‘지주-소작관계’자체가 봉건적 성격의 것이라고 해서 198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가 ‘(식민지)반봉건사회’인 것은 아니었다. 지주-소작관계의 성격은 (반)봉건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지배적인 경제제도’일 수는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5)

 

한 시대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생산관계가 공존하며 나타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1980년대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독점자본주의 사회이며, 노동자계급이 생산의 다수를 점하고 있어 사회혁명에 있어서도 노동자계급이 주력일 수밖에 없고, 혁명의 성격 또한 봉건사회를 타도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고도로 발전한 독점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노동자계급이 아닌 농민(소생산자)이 담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엔엘진영의 동지들은 미제의 (신)식민지 지배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국내 자본가계급까지를 포함하는 민족적 단결에 기초하여 미제와 맞서는데 방점을 찍자니 계급적 구분을 배제하고 몰계급적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1단계로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말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미제에 의한 신식민지 지배하에 있지만, 그것 역시도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 지배계급에 의해 대리통치 되고 있다. 이러한 대리통치는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자발적으로, 제국주의와 이해를 함께하는 민족내부의 동맹세력에 의해 실행된다. 그들 반동적인 국내 지배세력을 노동자・인민으로부터 구분해 내지 않고, 또 지배적인 생산의 담당자로서 노동계급에 대한 고민이 없으니 시대에 뒤떨어진 몰계급적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것이다.

민족 내부의 노자간 계급모순이 기본모순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제국주의 자본과의 동맹관계인 국내 독점자본과 노동자・인민 간의 계급모순이 기본모순인 것이다. 남과 북의 모순 또한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 계급모순이 바탕을 이룬다. 다음의 글은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채만수 소장의 글이다.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에서의 국가권력의, 말하자면, 현지의 계급적 기반 여부는 애초부터 논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 기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대리 지배형태인 ‘신식민지’ 체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직접적 지배 형태인 이른바 구식민지 체제에서도 식민지 국가권력은 당연히 현지에 그 계급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이 제국주의 종주국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또한 동시에 그 제국주의 종주국의 무력에 의해서 보증되고 있다고 하는 점도 물론 이의가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식민지의 점령조차도 사실 일반적으로는 피점령지의 일정한 세력의 협조에 힘입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령 점령이 제국주의적 침략군의 무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점령지의 ‘지배’는 피점령지의 일정 세력, 그 지배계급의 협력과 동맹적 관계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 문제의 핵심은 (신)식민지 인민의 종속과 그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강화)의 문제이고, 그들 인민의 해방과 생활조건의 개선 혹은 그를 위한 투쟁이 제국주의와 그들의 현지 권력(직접적 통치 형태의 것이든, 대리통치 형태의 것이든)에 의해서 억압되고 저지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이때 현지의 지배계급은 언제나, 즉 말 그대로의 구식민지에서도 신식민지에서도, 제국주의적 지배의 (하위)동맹자이고, 그 지배의 주요한 지렛대이다.“6)

 

위 글에서 말하는 바대로 (신)식민지에서의 지배와 통치는 현지의 지배계급을 통한 대리형식을 취한다. 노동쟁의 현장에서든, 미군기지 반대 투쟁이나 사드철거 투쟁의 현장에서든, 어디서든 투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상대는 한국의 경찰과 군대이다. 미제의 무력과 직접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대리 권력이 노동자・인민의 투쟁을 진압하려 나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주의적 지배의 하위 동맹자이자 현지 지배계급인 이들 민족 내부의 적대세력을 척결하는 것이 선차적일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세력에 의존하며, 행여나 떠날 새라 제국주의 군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는 자들도 이들이다.

엔엘진영의 동지들은 과학적 세계관으로서의 사적 유물론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나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론’과 마찬가지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도, 아니 나아가 1980년대 논쟁을 통해서 제시된 사실상 거의 모든 변혁론이, 현격하게 다른 형식의 입론과 격렬한 상호비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성숙의 결과로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비조응 혹은 모순에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의해 규정되는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의 ‘특수성’에서 변혁의 필연성 혹은 가능성을 찾는다고 하는, 사적 유물론으로부터의 일탈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7)

 

이리하여 사적 유물론의 핵심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계급모순에서 변혁의 필연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지배에 의한 ‘(신)식민지’의 특수성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다 보니 몰계급적 민족주의로, 몰계급적 반외세(반제)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운동(발전)의 동력은 모순 관계이고, 사회변혁의 동력 또한 모순 관계에서 비롯된다. 마오쩌뚱은 ≪모순론≫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점유의 사적 성격과의 모순”이 기본모순이라 하였고, 이 모순의 계급적 표현은 “자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의 모순”이라 하였다. 또, “복잡한 사물의 발전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있는데 반드시 그 중 한 가지가 주요한 모순”이라 하면서, “그것의 존재와 발전이 기타 모순의 존재와 발전을 규정하거나 또는 그것에 영향을 준다”고 하면서 “전력을 다하여 그 주요모순을 찾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주요모순은 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엔엘 동지들은 모순에 대한 이해를 달리한다.

 

“이른바 ‘NL’혹은 ‘우파’쪽은 ‘계급모순’에 대해서 얘기하면서도 사실상 ‘민족모순’과 관련한 문제・투쟁에만 매달리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회는 분명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이고 따라서 누구나 ‘계급모순’이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엔엘’측 인사들의 경우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이구동성으로 투쟁을 집중해야 하는 현 시기의 ‘주요모순’은 ‘민족모순’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때의 ‘현 시기’는 전술적인 당면 시기라기보다는 사실상 ‘민족이 통일되고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적 처지로부터 해방되기까지’, 말하자면 전략적인 시기이다.”8)

 

엔엘 동지들은 민족모순을 주요모순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미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연속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당면시기 주요타격 방향을 결정하는 전술로서의 주요모순의 위치가 아니라 ‘전략적인 시기’로 잘못 이해하면서,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주요모순을 “전력을 다하여” 찾아내야만 한다는 사고 자체를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구장창 같은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정작 집중해야 할 투쟁 과제(주요모순)를 비켜 가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4대 모순에 대하여 정리된 글을 보자.

 

“‘전반적 위기 시대의 4대 모순’이란, 다름 아니라 1) 자본과 노동 간의 대립・모순, 2)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대립・모순. 3) 제국주의와 식민지・종속국(인민)간의 대립・모순, 그리고 4) 제국주의 열강 상호 간의 모순이다.

문제는 이러한 4대 모순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인데, 그 답은 다름 아니라 2), 3), 4)의 세 모순은 모두 ‘자본과 노동 간의 모순’이라는 기본모순의 현상형태 혹은 외화형태라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모순도, 제국주의와 식민지・종속국 간의 모순도, 그리고 제국주의 상호간의 모순도 사실 모두 잉여노동・잉여가치의 착취와 전유를 둘러싼 대립・모순이며, 그 가장 기본적인 본원적인 형태가 바로 자본과 노동 간의 모순이기 때문이다.”9)

 

제국주의 시대의 모순은 그 바탕에 계급모순이 기본모순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점자본이 자본수출을 통해 제국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며, 자본은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모순을 부정하면 제국주의 시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제국주의 시대의 4대 모순 중에서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오류가 야기하는 혼란이 핵심적인 문제의 지점임을 같은 글에서 지적한다.

 

“제국주의 시대의 4대 모순과 민족문제: 위 4대 모순은 사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모순’ 그 자체, 즉 계급모순 그 자체와 그 현상형태, 그 외화형태이다. 예컨대 ‘제국주의와 식민지・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은 일반적으로 수정주의자들, 기회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과 같은, 제국주의와 식민지・신식민지 간의 모순, 즉 제국주의와 식민지・신식민지 국가 간의 모순이 아니라, 바로 자본, 특히 독점자본과 노동자계급 간의 모순이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인민, 즉 그 노동자・민중 간에 드러난 형태의 모순이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은 당연히, 제국주의의 하부 동맹자인 (신)식민지 현지의 (독점)부르주아 지배계급, 지주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민족모순이며, 따라서 민족모순이란 계급모순의 하나의 표현형태, 하나의 현상형태, 하나의 외화형태인 것이다. 민족모순을 둘러싼 분열은 바로 이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낸 것. 그리고 소위 엔엘, 혹은 ‘우파’는 이 문제를 ‘제국주의와 식민지・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으로서, 즉 계급모순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수정주의적으로, 기회주의적으로, 그리고 민족주의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국가주의, 애국주의로 전락하고, 사민주의・개량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10)

 

채만수 소장은 수정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지・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을 ‘제국주의와 식민지・신식민지 국가 간의 모순’으로 잘못 이해하면서 몰계급적인 운동으로 빠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신)식민지 내 계급분열을 보지 못하고 단지 제국주의로부터 억압받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몰계급적 국가주의, 애국주의로 전락하고, 사민주의・개량주의’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민족모순’이 사실은 제국주의 자본과 국내 (독점)자본을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신)식민지 노동자・인민들을 적대적인 나머지 한편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제대로 구분되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면서 몰계급적 민족주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발전이 지체되고 있는 것이다.

노사과연은 2019년 8월 15일 조국통일촉진대회 시 “문제가 무엇이든, 허위・환상에 기초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책임 있는 활동가라면, 사실이 아닌 것, 아니 사실과는 정반대의 것을 주문 외우듯 하면서 자신을 기만하고, 자기만족에 빠지고, 자기최면에 빠지고, 대중을 오도하는 대신에, 극한적인,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인 분열・대립을 직시하고, 그 원인・실체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그에 기초해서 문제 해결의 방책・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진정 조국통일을 촉진・달성하려면, 우리는, ‘우리민족’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 ‘우리민족’은 계급적 이해로 적대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는 내용을 선전물에 담아서 배포한 바 있다. “민족은 하나”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허위의 구호로 계급적 분열과 대립・적대를 은폐할 때,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렇게 적대적 분열・대립을 은폐하는 것이 과연 미제축출에, 조국통일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분열・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요? 우리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요?”라고 표현하며, 노동자・인민을 향한 허위의 주장이 운동에 끼치는 부작용 혹은 분열을 강하게 문제제기한 바 있다. 민족분단은 곧 계급분단의 표현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순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따른 극복방식을 찾고자 하지 않고 대중을 오도하는 민족주의적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류이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다. “미국 반대!” “일본 반대!” “양키 고홈!” “쪽발이 …!” 운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훼손한다. 미국에서도 착취 받는 노동자계급이 있고, 일본의 독점자본으로부터 고통 받는 일본의 노동자계급이 있다. 이들 노동자계급과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국제적인 연대 하에서 자국의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자본에 맞서 함께 투쟁을 할 때,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노동해방을 쟁취할 수 있으며 통일 또한 한걸음 진전될 수 있는 것이다. 반미・반일구호가 아니라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의 실현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우리가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라는 맑스의 가르침을 잃지 말자.

 

2) 주체적 관점의 결여

주체성을 강조하는 엔엘 동지들은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에서 ‘주체적’인 입장을 스스로 결여하고 있다. 한(조선)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완전히 분리된 2개의 국가이다. 그 계급적 성격도 상호 적대적이다. 그러하기에 남과 북은 전혀 다른 조건과 상황에서 다를 수밖에 없는 투쟁노선을 갈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발 딛고 선 토대 위에서 그에 걸맞은 주체적인 관점과 입장으로 운동노선을 수립하고 실천으로 이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적 관점이 비어있다는 말이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인 남쪽에서의 변혁노선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혁명일 것이다. 물론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문제가 선차적이다. 계급적 성격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국가인 북은 남쪽에 있어서는 ‘외부’일 수밖에 없다. 내부모순이 1차적이고 외부모순은 2차적인 것이라면, 남쪽 내부의 계급모순이야말로 1차적인 것이며, 외부모순인 남북간 모순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의 관점에서 대할 수밖에 없다. 남쪽의 계급모순보다는 몰계급적 관점에서의 민족분단 모순에 집착하는 엔엘 동지들의 비주체적인 태도가 문제이다.

엔엘 동지들이 맑스-레닌주의에 대해 관심 갖기보다는 “주체사상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통일이 되면 노동해방은 자동으로 된다.”, “민족문제 안에 계급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식의 주장은 주관적 관념론이자 비과학적인 주장일 수밖에 없다. ‘주체사상’ 또한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그리고 국제정치적 악조건과 특수한 필요 때문에 굴절되어 버린 이북의 주체사상”을 몰주체적으로 재단하고 있기에 이러한 인식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노동운동 속에서의 문제 또한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해야 한다. 자본으로부터의 이데올로기적・조직적・정치적 독자성을 노동자계급이 확보해야만 답이 보인다.

또한 민주노총은 계급조직이다. 계급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접근해야 한다.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간혹 생산되고 제출되는 정세 인식이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무 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문제다. 이것은 내부(이데올로기)역량의 부족과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바로 서서 민중운동과의 관계에서도 계급적 관점이 관철되면서 지도적 헤게모니를 가져야 한다. 계급적 지도역량이 부족하다면 민주노총 내부에서만큼이라도 계급적 관점과 내용으로 과학성을 복원하여 논의 실천하며, 그러한 과학성이 전선체로 확장되도록 전선체 내에서의 지도력을 확보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지도력의 확보는 조합원 대중의 압도적 동원과 실천력이다. 그리고 계급적이고 과학적인 입장과 내용이 아니라면 조합원 대중을 모아낼 수 없다. 정파적으로 분열된 계급 내부의 모순 극복이 먼저다. 노동자계급의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계급적 관점을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할 일이다.

국제연대의 관점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지난 4.15총선 시기 미래통합당을 견제하고 더불어민주당의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반일구호가 등장한 바 있다. 아베의 ‘코로나19’ 관련한 한국에 대한 무역 봉쇄 조치가 문재인 정권을 타격하고 미래통합당을 유리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노동운동진영 일부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공조하는 태도가 잠시 나타난 바 있으나, 곧 ‘반일’이 아닌 ‘반(反) 아베’로 기조가 바뀌어 일본의 노동자계급과 함께 군국주의를 지양하는 ‘반(反) 아베 투쟁전선’에 함께 했던 바 있다.

 

3) 몰계급적 국가관과 남북선언의 계급적 한계 간과

“코로나 이후 사회대개혁 시대로의 전환”, “코로나 이후 국가의 개입으로 시장 만능 기조가 위기다”, “민족자립적 경제체제 구축 등 새로운 사회 대안 물색”, “내정간섭 반대하는 반미투쟁” 등. 민주노총의 정세 관련 자료에 들어가 있는 문구들이다. 부르주아 독재로서의 국가권력에 대한 혼란스러운 사고가 묻어나고 있다. 박근혜 정권 퇴진투쟁 시 유행했던 노래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가사는 헌법 제1조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아쉽게도 가사와는 달리 대한민국은 (독점)자본의 국가이고, 권력 또한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헌법 또한 피지배계급인 노동자계급을 억압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국가의 계급적 속성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민족국가로서의 사고를 우선시하면서 발생하는 오류가 있다.

 

“국가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계급지배의 기관이며,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이 ‘질서’라는 것은 그 시대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필요한 억압을 법률로까지 고도화시킴으로써 견고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즉 공적 권력(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과 같은, 특수한 강제적 권한과 무기를 가진, 사회의 위에 선 인간의 특수집단 및 그 시설)을 이용하여 계급 간의 충돌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국가는 이러한 사회의 위에 선 특수한 공적권력 및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납, 징세, 국채 및 지폐발행 등의 강제적 재정권이 필요하다. 즉 지배계급은 자기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부담을 피지배계급에 대해 강제로 부담시키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는 단지 피지배계급에 대한 압력기관일 뿐만 아니라 착취기관이기도 하다. 또한 절대주의 국가 및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대다수에 대한 압제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위에 선 통치기관인 관료제가 중요성을 가진다.11)

 

국가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계급지배의 기관”이라는 사실. 국가의 계급성을 중요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국가에 대한 몰계급적 환상으로 빠져들게 하는 지름길이다. 그리하여 그 몰계급성은 자본주의 착취계급의 국가에 대해 환상으로 빠져든다.

“지배계급의 폭력기구”로서의 국가. 지배계급은 언제나 ‘생산수단을 가진 계급’이다. 잉여의 발생과 더불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나타나면서 계급 관계가 발생하고 지배계급에 의한 지배계급을 위한 ‘국가’의 발생이 나타났다. 국가는 철저히 지배계급만을 위한 폭력 도구이다. 이것이 맑스주의 국가관이자 노동자계급의 국가관이다.

대한민국은 자본가계급의 국가이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배 도구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자본가 독재 국가일 뿐이다. 대한민국을 ‘우리의 국가’로 잘못 사고한다면 모든 것들이 꼬이기 시작한다. ‘헌법’ 또한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을 위한 도구이다. ‘군대’ ‘경찰’ ‘언론’ 등도 상부구조로서 노동자계급의 위에서 군림한다. 아직 ‘우리’의 것은 없다. 우리의 국가, 우리의 법, 우리의 군대를 가지려면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극복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을 조직해 가는 것이다. 주입된 몰계급적인 (소)부르주아 국가관에서 기인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환상부터 걷어내자. 그래야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2개의 독립적인 국가이다. 국가의 계급적 속성은 부르주아 독재(남)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북)로 구분된다. 상호 적대적인 국가와 정권이 몇 차례(8.4, 6.15, 4.27 공동선언 등) 공동선언을 한 바 있다. 이러한 공동선언에 대한 엔엘 동지들의 집착이 대단하다.

노사과연의 채만수 소장은 ‘남북공동선언’과 관련하여 그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그 ‘선언’의 한계를 보지 못한다면 심각한 정치적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엔엘’ 측의 상당수 사람들이,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적인 권력에 불과한 김대중 정권에 기생・협력하고,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남북화해정책’에서 변신의 구실을 찾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남북 간 ‘공동선언’의 한계는 그 ‘선언’의 성격상 당연한 것이다. 그 ‘선언’이란 다름 아니라 전적으로 계급적 성격과 지향을 달리하는 두 정치집단의 ‘공동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선언’에는, 독점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다면, 노동자・민중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언’ 그것과 그 안의 이른바 “민족대단결”의 원칙이 지상의 것인 양하는 인식과 그에 기초한 실천이 일부에 강하게 존재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계급적 관점을 견지한 주체적인 태도와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12)

 

남과 북이 두 개의 국가로서 계급적 속성을 달리하고 있는데, 이러한 적대적인 관계를 기초로 두 정치집단이 무언가를 합의하여 ‘공동선언’을 하였다면, 그 합의 또한 한계가 분명할 것이다. “독점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노동자・민중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선언)이 “지상의 것인 양하는 인식과 그에 기초한 실천”은 문제임에 분명하다. 요구되는 것은 국가와 정권의 계급적 속성을 간파한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태도와 실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언’의 의미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덧붙인다.

 

그렇다고 물론 ‘6.15선언’이나‘ 7,4공동선언’,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남북합의로서의 “민족 대단결”의 원칙 등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들은 남북간의 긴장과 적대를 완화시키고, 따라서 남과 북이 외부로부터의 과도한 압력으로부터 다소라도 자유로워져서 각자의 사회운동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그것은 긍정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13)

 

남북공동선언, 특히 6.15 선언에 집착하는 민주노총 내 엔엘 동지들의 실천에 자각이 있기를 바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10월에 예정된 ‘통일 골든벨’ 제출 문제는 남북공동선언 내용으로 집중되는 모양이다. 아래의 글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공동선언’과 ‘민족대단결’도 좋지만,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남북분단은 곧 계급분단이라는 본질을 참가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일이다.

 

“‘NL’측은, 자신들이 대결하고 있는 민족문제, 민족모순의 기초에 계급모순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그 민족모순이 계급모순, 즉 계급적 적대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 민족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편향・오류를 범해오고 있다. 그리고 ‘6.15선언’ 이후 그러한 편향과 오류가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는데 … ”

“‘6.15선언’(‘7.4공동선언’도 물론)과 이른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의 분단과 적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계급’, ‘계급적 분열’, ‘계급적 적대’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은, 물론 바로 그 ‘침묵’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통해서이지만,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고, 그 문제의식조차 기각하고 있기 때문이다.”14)

 

남북 공동선언이 철저히 미제의 한반도 전략에 의한 것이고, 이러한 미제의 대북정책을 신식민지 대리정권이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리하여 수많은 합의와 선언이 있었지만 번번이 이행이 무산되고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던 인민들을 실망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2018-9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판문점을 넘나드는 회동과 평양방문으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가 넘쳤지만, 지금 어떻게 변해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관념론에 의한 판단과 실천은 운동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분단은 단지 ‘외세’에 의해서 강제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분단은 명백히 국내적・국제적 계급투쟁의 결과였고, ‘외세’로 불리는 미・쏘 간의 대립이란 다름 아니라 노・자 간 계급투쟁의 국제적 전선이었을 뿐이다. 또한 분단은 미・쏘 냉전만이 아니라 동시에 민중에 대한 파쇼적 억압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남북문제는 주요하게 국내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햇볕정책’이나 이번의 합의도 결코 ‘자주적’이거나 ‘주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철저히 ‘페리 프로세스’로 알려진,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15)

 

국가관에 대한 혼란과 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환상으로 헛다리 짚기만을 반복해 왔던 과정은 수많은 활동가들이 자유주의 정권으로 투항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몰계급적 관점과 더불어 유물론적 역사관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갖지 못한 결과는 참담하다. 지금도 민주노총 내 많은 간부들이 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환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 정권 또한 미 제국주의의 하위동맹 파트너이자 현지 대리통치세력이며,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는 타도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4)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노력 없어

한(조선)반도의 민족모순은 계급모순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엔엘 따로 피디 따로 분리된 실천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엔엘 동지들은 피디 동지들의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갈 길 간다. 그래서 피디 진영의 동지들은 엔엘 동지들을 ‘민족주의/패권주의’라 비판한다. 이래서는 노동자계급의 단결도 승리도 없을 것이다. 내부모순이 1차적임을 앞서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내부모순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계급적 단결도 운동의 비약적 발전도 가능하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엔엘 따로 피디 따로 각각 제 갈 길이라고 착각하고 잘못된 길을 계속 가서는 안 된다. 모순관계의 파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 채만수 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NL과 PD 양측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라는 이 양대 모순의 통일적・일원론적 관계를 파악하여 그것을 자신들의 이론과 전술・전략에 반영하지 않는 한, 양자간의 소모적 분열과 대립은, 따라서 오류는 지양될 수 없을 것. …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통일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PD’ 측은, 일반적으로 민족모순 및 그와 대결해야 하는 실천적 요구의 의의를 경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북을 포함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적・정치적 의의를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NL’ 측은, 자신들이 대결하고 있는 민족문제, 민족모순의 기초에 계급모순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그 민족모순이 계급모순, 즉 계급적 적대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 민족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편향・오류를 범해오고 있다.”16)

 

“대동단결”이라는 표현으로써 엔엘 동지들이 비프롤레타리아 세력과의 공동사업을 강조하기 이전에, 노동자계급 내 통일전선에 우선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쪽 동지들에게도 해당된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정파적 분열을 극복하는 문제는 세계 대공황과 장기침체의 정세 속에서 더욱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선차적인 계급적 단결과 투쟁만이 “민족통일”이든 “노동해방”이든 가능하게 할 것이다.

 

 

3.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노사정위원회나 경사노위 등의 참여를 주장하는 계급협조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정치적 전망은 사민주의이다. 사민주의는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포로로 잡고 있는 독점자본의 정치노선, 독점자본 좌파의 정치노선”이기에 대안이 될 수 없다.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또한 몰계급적 관점이기에 계급협조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끝은 개량주의, 사민주의가 될 것이다.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맑스-레닌주의는 사적 유물론의 기초위에 있다. 따라서 사적 유물론과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는 주체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민족문제의 계급적 접근이야말로 지금 시기 노동운동이 취해야 할 태도이며, 이렇게 할 때만 통일운동에 있어서도 노동운동 내 계급적 단결에 기초한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먼저 활동가들의 과학적 세계관의 획득과 계급의식으로의 무장을 통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극복이 필요한 때이다.

마지막으로 채만수 소장의 운동 내 친자본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기 위한 다섯 가지 대책들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첫째, ‘진보적 지식인들’, 특히 부르주아 제도권 대학 등에 그 생활의 기반을 두는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이론상의 권위・기대・환상・의존을 최대한 청산 하면서, 노동운동 내부로부터의, 그리고 운동에 생활 기반을 두는 자주적인 활동가 지식인들의 목적의식적인 양성.

둘째, 투쟁과 일상 활동에서, 감성적 선동 못지않게, 상황과 문제를 가능한 한 이론적・논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선전과 교육의 강화.

셋째, 투쟁・파업의 목표와 평가 기준의 이중화. 임금 인상이나 기타 근로조건 개선 등, 당면의 과제만을 투쟁과 파업의 목표로 삼고, 또 그것의 쟁취 여부, 쟁취 정도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대신에, 투쟁과 파업을 통한 의식과 조직의 강화・확대‘도’ 주요한 목표와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넷째, 정치토론의 일상화와 철저화.

다섯째, “무언가 부르주아 정당의 꽁무니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독자적인 목표와 고유한 정치를 갖는 정당”으로서의 노동자 정당의 건설.17)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계급협조주의 노선을 밀어붙이다가 결국 사퇴하고만 김명환 집행부의 뒤를 이을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가 시작되었다. 선거가 정파적 분열을 확대하는 방향이 아니라 민주노총의 계급적 단결과 혁명적 전망을 올곧게 세우는 과정으로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노사과연


1) ≪사회과학 사전≫, 사계절 출판.

 

2) ≪현대 맑스-레닌주의 사전≫, 백산서당

 

3) 1948.12.1.일 국가보안법 제정으로부터 72년, 또는 1925년 일제하 치안유지법으로부터 95년.

 

4) 인민민주주의(신민주주의):

 -신민주주의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후에 걸쳐 발전한 혁명운동의 새로운 방식과 그 성과로서 구축된 새로운 국가형태를 말한다. 이 명칭은 1940년 모택동의 의해 신민주주의론이 발표되면서 주창되었다.

…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점을 보면, 식민지・반식민지 혁명의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에 의한 민족 억압과 국내의 봉건적인 중압을 배제하는 데 있다.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부정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 혁명의 성질상 소부르주아의 다수는 물론, 민족부르주아의 일부도 참가한다. 따라서 이 혁명으로 수립될 국가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님은 물론이고 또한 노동자・농민의 독재도 아니다. 그 국가는 모든 혁명적 계급이 연합한 통일전선적인 국가이다. 모택동은 이 국가를 신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고 그 계급적인 본질은 혁명적 계급의 연합독재라고 하였다.

…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 독립에 강경하게 반대하기 때문에 식민지의 혁명은 반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혁명을 지도할 힘은 민족부르주아에게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그들 가운데 대자본가측은 이미 외국자본에 종속되고 반동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의 지도력은 노동자와 농민 손에 넘어왔다. 동시에 이 혁명은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서 반대되고 사회주의 국가에 의해서 지지된다. 세계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 혁명은 사회주의 진영의 일부로 편입된다. 바로 이 두 가지 점. 즉 혁명이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일환으로 된다는 점과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지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 신민주주의가 구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점이다. 여기서 신민주주의혁명은 결코 그것으로 완결된 혁명이 아니라는 것이 도출된다. 당연히 이 혁명을 지도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신민주주의혁명을 달성한 뒤에는 새로운 사회 건설로 나아간다. 즉 혁명은 두 단계로 나눠지는데 그 제1단계는 신민주주의 혁명이며, 제 2단계는 사회주의 혁명이다. ≪사회과학사전≫, 사계절, p. 266.

 

5)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p. 323. 2008년 3월 발행.

 

6) 같은 책. p. 321.

7) 같은 책. p. 330.

 

8) 채만수, 노동운동과 민족문제, 기관지 노힘 제34호.

 

9)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p. 342.

 

10) 채만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노동자교양정치학 강좌 4강.

 

11) ≪사회과학사전≫, 사계절. p. 160.

 

12)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p. 102.

 

13) 같은 곳.

14) 같은 곳.

15) 같은책. p. 106.

16) 같은책. p. 101.

17) 같은책. p.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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