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위대한 사랑≫을 읽고

 

천연옥 │ 부산지회장

 

 

1. 글을 시작하며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는 스스로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왔다. 러시아혁명 이후 초기 쏘비에트 사회에서의 그의 행적을 근거로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게 의해 그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규정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한정숙 교수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여성주의 : ‘부르주아’ 여성주의 비판에서 사회주의적-급진적 여성해방론으로>라는 2008년에 쓴 논문에서 이런 입장을 보여주고 있고, 1980년에 콜론타이의 전기를 쓴 판스워드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사회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볼세비키 혁명≫이란 책에서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 페미니즘을 ‘여성억압을 철폐하고자 하는 사상’으로 이해한다면 콜론타이를 어떻게 불러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여성의 억압을 다른 모든 억압에 앞선 사회의 기본모순으로 바라보는 사상’으로 이해한다. 콜론타이는 사회주의자였고, 사회주의를 통해 여성해방이 가능함을 믿었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으니, 나는 콜론타이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 않고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이론을 세우고 실천한 혁명가로 이해하고자 한다. 아래에서 콜론타이의 삶과 정치적 입장, 그리고 혁명 직후 쏘비에트 사회에서의 그의 분투 과정과 그의 소설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콜론타이가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콜론타이의 삶과 정치적 입장

 

1)어린 시절과 결혼

콜론타이는 1872년 4월, 성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술자였던 첫 남편과 헤어져 육군 대령이었던 미하일 알렉셰비치 도몬토비치와 살았는데, 이혼이 성립되기도 전에 콜론타이를 낳았다. 첫 남편과 사이에 두 딸과 한 아들이 있었던 상황에서 콜론타이의 어머니는 교양과 독립적인 정신을 지닌 당시의 ‘신여성’이었다. 동거 후 결혼한 콜론타이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의 오랜 지주 가문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이후에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콜론타이의 부모는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콜론타이는 영국인 유모가 있었고, 충분한 언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영어, 불어, 독일어를 깨우칠 수 있었다. 콜론타이는 언니 제니아의 가정교사인 마리아 스트라호바를 통해 여성혁명가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아홉 살인 1881년, <인민의 의지> 당원인 당시 28세의 귀족 여성 소피아 페로브스카야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콜론타이는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언니 제니아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스트라호바가 창백한 얼굴로 뛰어 들어와 “처형됐어”라는 한 마디를 외치고 기절해 버렸던 것이다. 15세가 될 때까지 콜론타이는 여성에게 개방된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입학자격과 함께, 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스트라호바와 열심히 공부했다. 언니 제니아는 당시의 명문 가문의 젊은 여성으로서는 전통을 깨고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콜론타이를 극장에서 ‘0000의 동생’으로 알아보게 되는데, 콜론타이는 ‘나는 0000의 동생만으로 있기는 싫다. 나 또한 내 생에 어떤 일을 이루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콜론타이는 <인민의 의지>의 여성들처럼 ‘인민에게로 가는 것’만이 아니라 작가가 되기를 원했다. 단순히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 쓰는 작가가 되기를 원했다. 이런 콜론타이를 위해 스트라호바는 도몬토비치 부인을 설득해 유명한 문학 선생을 매주 초빙해서 콜론타이에게 작문을 가르쳤다.

풍부한 독서를 하고 작가가 되기를 열망했던 이 젊은 여성은 1890년에 공학도인 블라디미르 콜론타이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려고 한다. 어머니는 가난한 청년과의 결혼에, 아버지는 책과 철학적 세계와 담을 쌓은 이 청년이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것, 정신적 친밀함이 없다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 결혼을 반대했다. 결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하자 결국 부모는 동의했고, 그는 1893년에 결혼했다. 결혼은 아버지의 우려대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혼 후에 맑스주의를 알게 되었다. 어린 아들을 유모에게 맡기고 단편소설을 썼지만 잡지사는 문학이 아니라 선전물이라고 돌려보냈고, 남편은 농담으로 아내를 놀렸다. 화가 난 콜론타이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노라고 선언까지 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 성인으로서의 자아를 찾고 있었던 콜론타이는 노동자계급의 절박한 경제적 상황과 접촉하게 된다. 1896년에 니르바에 여행 갔을 때 방문한, 12,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거대한 크론호름 직물공장에서 죽어 있는 아이를 보게 된다. 부유한 가정에서 안락하게 자란 콜론타이는 비참한 노동대중의 참상을 확인하고,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소설 대신에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2) 유학과 결혼생활의 종말, 부모의 죽음

콜론타이는 이후에 자서전 등에서 “나는 그토록 비참한 노동대중의 참상을 목도했을 때 더 이상 나의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나는 반드시 그 운동에 참여해야만 했다.”고 밝혔다. 콜론타이는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옛 선생 스트라호바를 찾아가, 남편을 사랑했지만 결혼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는 자신의 불행을 호소하였다. 스트라호바는 노동자들의 야간학교에 교육 자료를 공급하기 위하여 계획된 이동박물관의 업무에 참여하도록 권했다. 콜론타이는 이 일에서 평생의 친구인, 러시아 내에 <이스크라>를 운반, 배포하는 이스크라 요원 엘레나 스타소바를 만나게 된다. 때때로 스타소바는 콜론타이에게 낯선 아파트에 편지나 소포를 전달하는 일을 부탁했다. 콜론타이는 자신이 소포를 운반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정도에서만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콜론타이는 이론적 인물, 생산적인 사상의 저술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5살 된 아들을 부모에게 맡기고 아버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서 스위스 쮜리히로 유학을 떠난다. 떠나면서 두 통의 편지를 썼는데, 하나는 남편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가를 전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친구 조야에게 무엇이 자신에게 가족까지 버리게 하면서 노동계급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 속으로 뛰어들게 했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아들 마샤에 대한 그리움으로 1년 만인 1898년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왔지만 남편에게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1901년에 어머니, 1902년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콜론타이는 자산계급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독립하였다.

 

3)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1890년대 후반 운동에 뛰어든 콜론타이는 스타소바와 함께 볼셰비키 활동도 함께 진행하였다. 그러나 1905년 혁명 후 두마에 대해 보이콧 전술을 채택했던 볼셰비키보다 노동자들의 자발성을 촉진시키기 위해 두마에 참여해야 한다는 멘셰비키에 더 끌렸다. 그래서 콜론타이는 1915년이 될 때까지 멘셰비키로 활동하게 된다. 콜론타이에게는, 러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은 노동자계급 여성들에게까지 조직화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당은 여성문제에 별다른 주의가 부족해 보였다. 독일의 클라라 제트킨의 활동에 크게 감명 받은 콜론타이는 국제여성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콜론타이는 직물노동조합과 노동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양자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노동여성 상호부조협회>라는 합법적 모임을 만들었다. 이 클럽은 도서관과 강좌를 통해 매일 저녁 집회를 열었는데, 어떤 때는 200-300명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1908년 봄, 콜론타이는 그 해 가을 전 러시아 여성대회를 개최하여 이를 전국적인 러시아 여성의 당으로 귀결시키려는 러시아 페미니스트들의 계획에 대해 반대하여, 이 계획에 노동계급 여성들이 찬성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여성대회 참여가 문제로 되어 경찰에 쫓기게 된 콜론타이는 독일로 망명하였고,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게 된다.

콜론타이가 1909년에 쓴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는 이 여성대회 직후에 출판되었다. 여기에서 콜론타이는 맑스의 ≪공산주의 당 선언≫,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을 이론적으로 계승하였다. 여성 억압의 기원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아니라, 사적 소유의 발생・발전에 따른 사회의 경제적 관계에 있다는 것,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립하는 여성을 전제하여 “모든 계급의 여성이여, 단결하라”라고 외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에 대립하는 남녀노동자의 단결을 전제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극복에 의해서만 여성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이 책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아무리 노동자계급 여성들에게 여성일반의 이익이라고 속삭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요구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색깔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권리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목적으로 부르주아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다. 눈앞의 임무가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무엇이라 하든, 계급적 본능은 ‘계급을 넘어선’ 정책이라는 고상한 열망보다 항상 훨씬 더 강력하게 드러난다. 부르주아 여성들과 그 ‘어린 누이들’이 불평등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한, 부르주아 여성들은 온전히 신실하게 여성들의 보편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일단 그 장벽이 무너지고 부르주아 여성들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되자, 근래의 ‘모든 여성을 위한 권리’의 수호자들은 어린 누이들에게는 한 점의 권리도 남기지 않은 사실을 만족스러워한 채로, 부르주아 계급의 혜택을 열정적으로 수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들이 노동자계급 여성들에게 ‘여성일반’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의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 노동자계급의 여성들은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4) 볼셰비키가 되다

독일로 망명한 콜론타이는 클라라 제트킨과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국제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참여하여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국제여성 사회주의자 회의에서 클라라 제트킨과 함께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지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대회에서 콜론타이는 여성사회주의 운동을 담당하는 국제 서기단의 성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제2 인터내셔날 8차 대회에 참가하였다. 1911년 2월에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막심 고리끼가 조직한 멘셰비키 학교에서 핀란드 문제, 가족의 진화 등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러시아와 접촉하였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을 다니면서 모금을 하고 프랑스 사회주의당에도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사회주의당으로부터 선동을 요청받아 수많은 연설을 하였다. 영국을 방문하여 공부하기도 하였다. 1913년에는 볼셰비키 합법신문 <프라우다>에 세계여성의 날에 대해 기고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여성의 날의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사민당의 배신과 멘셰비키의 애국주의적 태도에 실망한 콜론타이는 볼셰비키에 가담하게 되고 반전활동에서 뛰어난 선동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레닌은 4월 테제를 통하여 임시정부와 쏘비에트라는 이중권력 상태에 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는 임시정부에서 철수하고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다수의 볼셰비키들은 레닌의 주장을 반대하였으나 콜론타이는 즉각적으로 레닌을 지지했다. 볼셰비키 군사위원회에 의해 페트로그라드 쏘비에트 부의장으로 선출된 콜론타이는 정열적으로 레닌의 4월 테제를 지지하고 대중 사이에서 이를 선동하였다. 7월 초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독일 첩자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을 당시 발틱 함대의 쏘비에트 수병들이 콜론타이를 응원하는 쪽지와 식빵, 소시지 등을 보냈으며, 8월 21일 콜론타이는 막심 고리끼와 레오니드 크라신이 지불한 5,000루블의 보석금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투옥 당시 진행된 회의에서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당의 중앙위원회의 유일한 여성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 제노텔의 지도자에서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로

10월 혁명으로 임시정부는 타도되고 모든 권력은 쏘비에트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콜론타이는 여성문제를 초기 쏘비에트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분투 과정에 돌입하였다. 수많은 회의에 참여하여 모성보호와 양육에 관련한 연설을 하였고, 첫 쏘비에트 사회복지 인민위원이 되었다. 이혼법, 결혼법, 여성문제에 대한 여러 법안을 준비하면서 콜론타이는 발틱 함대 쏘비에트를 주도하던 17살 연하의 파벨 디벤코와 재혼하였다. 당내에 여성문제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전담할 여성 부서를 만들 것을 제안하여, 분리주의적 여성조직이 될 것으로 우려한 많은 반대를 극복하고 당시의 주변의 많은 여성혁명가들의 지지 속에서 제노텔을 탄생시켰다. 1920년에서 1922년까지 콜론타이는 제노텔의 수장을 맡아서 1930년 제노텔이 해체될 때까지 제노텔 활동의 중요방향을 정립하는데 헌신했다.

콜론타이가 1922년 국내의 주요한 여성문제의 결정권자의 직위가 아닌 노르웨이의 공사로 발령을 받게 되고, 1923년에 노르웨이에서 외교와 무역에서 전권을 가지게 되고, 결국 1924년 노르웨이 쏘련 대사가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콜론타이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판스워드가 쓴 콜론타이의 전기에 의하면 콜론타이는 1915년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옮길 때도 레닌의 ‘제국주의 전쟁 반대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입장에 대해, 전쟁반대에는 찬성했지만 내전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콜론타이의 평화주의는 내전을 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쇼비니즘으로 전화한 제2 인터내셔날의 당들과 멘셰비키의 존재 앞에서 콜론타이가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정치집단은 볼셰비키 밖에 없었다. 콜론타이는 레닌의 4월 테제를 찬성한 거의 유일한 볼셰비키였지만, 1918년 독일과의 전쟁중단 교섭, 즉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는 반대 입장을 가졌다. 이 문제에 대해 부하린, 야코블레바와 함께 좌익공산주의 반대파의 입장에서, 국제혁명을 위해 쏘비에트는 일개 분견대이며, 쏘비에트의 파괴는 서구의 혁명을 야기할 것으로 보았다. 쏘비에트 국가의 보전이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최선의 봉사라는 레닌의 입장이 1918년 3월의 7차 당 대회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콜론타이는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했고, 그의 남편 디벤코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 일로 콜론타이는 후생성 인민위원직을 사임했다. 1918년 여름부터 본격화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내전으로 인하여 볼셰비키 당은 좌익공산주의자 그룹과 타협을 하게 되고, 콜론타이도 중요한 연설자로 당 활동에 다시 투입되었다.

볼셰비키 당이 내전 동안에 진행한 전시공산주의 정책은 농촌에서의 징발과 도시에서의 배급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남녀노동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의무노동제에 대해 콜론타이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여성을 공동체적 사업에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찬성했다. 1918년 11월에 열린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를 조직하면서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가족은 해체되고 공동체가 공동 육아를 통해 새로운 가족을 창조할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가족과 공산주의 국가≫라는 팜플렛으로 정리되어 배포되었다. 이전에 쓴 논문들을 재편집하여 1918년에 발행한 ≪새로운 도덕과 노동자계급≫에서 콜론타이는 전통적인 결혼관계를 논박하고 이 관계를 갖지 않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을 묘사함으로써 가족에 대한 반론을 완성시켰다. 1921년에 ≪결혼관계 영역에서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들≫, ≪매춘과 그 대책≫,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 등을 펴내면서 부르주아 가족 및 결혼 비판,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아동 양육의 사회화, 여성의 공적 노동 참여, 모성 보호를 주장하였다.

콜론타이는 1921년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들을 위해 여성사를 강의했다. 열네 번에 걸친 강의에서 여성의 지위변화를 역사적으로 개관하고 여권 운동, 여성노동자 운동, 러시아 혁명 이후의 변화 등을 살핀 후 여성노동의 미래를 전망하였다. 콜론타이가 성매매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이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노동력이 있으면서도 유용한 사회적 생산노동이나 자녀양육 등의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섹슈얼리티를 제공하는 대가로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생활하는 것을 매춘이라고 보았다. 여성이 성매매에 종사하는 데는 경제적 곤궁이 일차적 원인임을 지적하면서, 여성의 경제적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술교육을 시킬 것을 제안하고 여성의 정치적 의식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 8월에 출발한 제노텔에서 첫 번째 국장이었던 이네사 아르만드가 사망하자 1920년 10월부터 콜론타이가 수장이 되었다. 제노텔의 사업은 많은 남성들로부터 거부되었고, 제노텔 사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인들을 구타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에서, 여성노동자와 여성농민들 사이에서 제노텔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어야 함을 선전하고 조직했다. 1921년 콜론타이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의해 국제여성사업국의 부국장으로 선임되었다. 국장은 클라라 제트킨이었다. 제2차 국제공산주의 여성회의에서 제노텔의 성과를 보고하였다. 제노텔은 전시공산주의 동안 낙후되고 정치에 무관심한 여성들을 혁명에 끌어들이는 활동을 하였다.

제노텔의 국장으로서, 코민테른 국제여성사업국의 부국장으로서 여성사업을 해 나가기도 바쁘고 힘든 콜론타이는 1921년 3월의 제10차 당 대회, 6월의 코민테른, 1922년 11차 당 대회까지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에 있어서 노동자 반대파로서 레닌과 대립했다. 이러한 콜론타이의 정치적 행적이 1922년 노르웨이 공사로 발령을 야기했던 것이다. 노동자 반대파는 정치는 쏘비에트가, 경제는 노동조합이 담당해야 하며, 경제 관리에서 전문가의 활용과 1인 책임제를 반대하고 위원회제를 주장했다. 경제를 노동조합이 맡아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생디칼리즘이었다. 이는 국유화된 기업, 전인민소유 기업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고 각각의 기업을 노동조합이 맡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국유 기업의 전 계급적, 전국적 계획에 따른 생산의 조직화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1921년 3월에 ≪노동자들의 반대≫라는 팜플렛을 발표하면서 당을 1년 이상 논쟁하게 만들었다. 콜론타이가 여기에서 제기한 문제는 단순히 노동조합의 역할만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성, 대중과 유리되는 볼셰비키, 비판의 자유와 당내 민주주의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것이었으나, 너무나 열정적이고 급진적인 콜론타이는 당시의 정세에서 당의 선택을 인정하지 못했다.

내전이 끝나고 1921년에 시작된 신경제정책도 콜론타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다. 콜론타이는 전시공산주의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 반대파가 당 대회에서 패배하자 콜론타이는 코민테른에 볼셰비키 당을 제소했다. 신경제정책은 생산성은 제고시킬지 모르나 노동자계급의 공산당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경제정책(NEP)은 사회복지 활동을 줄이고, 여성의 실업을 증가시키며 경제적으로 자립한 ‘신여성’의 이미지를 약화시킴으로서 제노텔의 체면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콜론타이는 신경제정책에 분노했던 것이다. 결국 당은 1922년 10월, 뛰어난 외국어실력을 갖춘 인재 콜론타이를 국내에서 국외로 보냈다. 콜론타이는 정치적 패배와 함께, 5년간의 디벤코와의 결혼생활도 남편의 젊은 여성과의 새로운 사랑의 시작으로 파경을 맞게 되었다. 콜론타이는 여성운동의 지도자에서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로 변신하고, 1952년 사망할 때까지 외교업무에 혁혁한 공을 세워서 2번의 노동적기 훈장과 레닌 훈장을 받았다. 콜론타이가 여성대사로 간 것이 쫓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데, 전 세계 어느 남성 대사도 무역의 전권을 행사한 적이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콜론타이는 무역의 전권을 가진 여성 대사였다. 그리고 33년에 받은 레닌훈장은 그동안의 여성운동의 공로를 인정해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콜론타이는 쏘련의 젊은이들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이념과 새로운 세계관에 부합하는 새로운 성도덕, 사랑의 원칙을 제시하고자 했다. 성애에 대한 금욕주의적 태도도, 부르주아적 소유욕에 바탕을 둔 사랑 개념도 거부하였다. 그리고 소설들이 발표되었다. 이 소설들이 ≪붉은 사랑≫, ≪위대한 사랑≫이란 제목으로 2013년에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 출판된 것이다.

 

 

3. 콜론타이의 소설들

 

1) ≪붉은 사랑≫

≪바실리샤 말리기나≫는 1924년에 발표될 당시, ‘자유로운 사랑’, ‘일벌의 사랑’이란 부제를 달고 있었는데, 1927년 영어로 번역되면서 ‘Red Love’로 출판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적연(赤戀)이라는 제목으로, 해방 후에는 ‘붉은 사랑’으로 알려졌다.

이 작품은 볼셰비키 활동가인 여성노동자 바실리샤가 혁명 동지인 남편 블라디미르가 신경제정책의 진행과정에서 네프맨으로 타락해 가는 것에 고통 받고, 네프걸인 부르주아 출신 여성 매춘부 니나와 외도를 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편을 떠나오게 되는 과정과 남편을 떠난 후 알게 된 임신 사실에 공동체가 우리의 아이를 함께 키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끝나는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콜론타이가 지독히도 비판했던 신경제정책 시기였고, 그 정책의 부정적 부산물인 네프맨과 네프걸이 세 주인공 중에 두 명이다. 여주인공 바실리샤는 콜론타이가 바람직하게 여겼던 혁명 후의 새로운 도덕과 자유로운 사랑, 남편이나 가족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신여성’이다. 바실리샤는 공동주거 제도의 완비와 노동자계급 여성의 생활지원이라는 일에 전념하면서 아이를 혼자 키울 결심을 하는데, 이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만들어질 공동체와 공동육아제도를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바실리샤를 이렇게 묘사한다.

 

“바실리샤는 28세의 여성노동자로 직업은 편직공이었다. 야위고 빈혈기가 있는 전형적인 도시의 아이였다. 발진티푸스를 앓고 난 뒤 머리를 짧게 친 뒤에는, 곱슬머리가 되었다. 멀리서 보면 소년처럼 보였다. 가슴은 밋밋했으며, 셔트웨이스트 드레스에 낡은 가죽 허리띠를 맸다. 예쁘지는 않지만 눈은 아름다웠으며, 갈색의 다정다감하고 진지하고 사려 깊은 눈이었다. 이 눈동자는 다른 이들의 슬픔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다른 이들의 슬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바실리샤는 남편과 혼외관계에 있는 니나에게 질투심보다 여성으로서의 연대감을 보인다. 남편 블라디미르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아나키스트 그룹에 속했고,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와 볼셰비키에 합류하였으나 주위에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했다. 당 선동가요 연설가였던 바실리샤에게 반하여 열렬히 애정을 표현하여 5년 전에 결혼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는 아나키스트의 성향 때문에 회의에서 거칠게 말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이런 블라디미르에 대한 연민이 바실리샤의 마음을 움직였다. 블라디미르가 순결한 소녀를 위해 마음을 지켜왔다고 애정을 고백하는 순간 바실리샤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결국 남성은 자신의 연인이 순결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블라디미르가 바실리샤에게 키스를 하자 바실리샤는 자신이 순결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러자 블라디미르는 바실리샤에게 영혼이 순결하다고 말하고 키스한다. 그렇게 그들의 결합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네프 시기에 네프맨으로 전락하고 만다. 소설은 지루하게 블라디미르의 외도와 이를 조금씩 알아가는 바실리샤의 실망과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바실리샤를 정말로 사랑하고 그녀가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경영인의 안주인으로서 차려입고 손님을 접대하기를 원하는 블라디미르에게 바실리샤는 부르주아적 가족, 남편에게 완전히 종속당한 아내를 보게 된다. 바실리샤는 자신이 관리하는 공동주거주택에 살고 있는 페도세예프 부부가 애정없이 결혼생활을 지속하면서 만들어 내는 여러 상황을 보면서 블라디미르와 니나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편을 떠난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어떻게 혼자 아이를 키울 거냐고 묻는 친구 그루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나 혼자서라고? 조직이 길러 줄 거야. 우리는 탁아소를 세울 거야. 너도 거기 데리고 가서 일하게 할 거야. 너도 아이들을 좋아하잖아, 그렇게 되면 그 애는 우리들의 아기가 되는 거지. 누구나 아이를 갖는 셈이지.” 그들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서둘러 짐을 꾸려야 해, 그루샤. 기차가 아침에 떠나거든. 내일부터 일을 나가야 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챙길 참이야. 스쩨빤 알렉셰예비치(도시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볼셰비키)는 나를 축복해 줬어. 일로 돌아오라고! 구루샤, 그 때의 그 기쁨을 알겠지?”그녀는 그루샤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아이들처럼 방 안에서 춤을 추었다. 마네킹을 넘어뜨릴 뻔했다. 그들은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아래층 정원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살아야 해, 그루샤! 살아야 한다고.”

 

2) ≪위대한 사랑≫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2013년에 ≪위대한 사랑≫이란 제목으로 출판한 책에는 <위대한 사랑>, <세 세대의 세 가지 사랑>이라는 두 편의 장편에 가까운 중편소설과 ≪자매≫라는 한 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먼저 ≪위대한 사랑≫은 1927년에 여러 작품을 엮어서 출판된 소설집이었는데, 2013년에 연구소의 기획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위대한 사랑, 그리고 삼십 이 페이지>, <대화 조각>이라는 두 단편이 같이 실려 있었다.

<위대한 사랑>은 1905년 러시아혁명의 실패로 외국으로 망명한 지식인들 속에서 여주인공 나타샤는 세묜 세묘노비치라는 기혼 남성과 대책 없는 비밀스러운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저술활동과 혁명 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세묜에게 이별을 고하는 이야기이다. ‘위대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위대한 사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콜론타이에게 ‘위대한 사랑’은 맹목적, 헌신적, 의존적 사랑과 동의어이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묜은 아내와 가정에 집착하면서도 독립적이고 지적인 여성 나타샤와의 혼외관계를 몇 년째 이어가고 있던 우유부단한 기혼 남성 지식인이다. 그는 나타샤에게 깊이 매료되고 정신적 동반자로서의 그녀에게 크게 의존하지만, 그러면서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청산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콜론타이는 세묜과 헤어져 독립한 나타샤를 소설 마지막에 이렇게 묘사한다.

 

“미래의 어느 날, 인생이 그들이 서로 협력해야 하는 일을 맡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 위대한 사랑은 사라져 버렸다. 다정함도, 애원도, 심지어 이해도, 그 무엇도 인생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너무 늦었어! 기차에서 그녀의 생각들은 세냐(세묜의 애칭)와 그를 향해 품어왔던 사랑으로부터 이미 멀어졌다. 여러 걱정거리들로 머리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문서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가서 훑어본 후, 일부는 없애버리고, 일부는 요약을 해 두거나 나중에 참고하기 위해서 정리해 둬야 했다 …

다시 일로 돌아왔다. 아주, 아주 오래전 위대하고 멋진,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사라져 버렸다. 그 사랑은 세냐가 남긴, 으레 남자들이 저지르는 이해 부족으로 만들어낸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상처들을 거쳐 그녀의 심장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세 세대의 세 가지 사랑>은 1923년에 ≪일벌의 사랑≫에 <바실리샤 말리기나>, <자매들>과 함께 <삼대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실린 소설이다. 중심인물 올가 세르게예브나는 콜론타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모범적인 여성노동자이다. 노동자 계급의식이 투철하고 독립적이고 에너지가 넘치고 성실하며 사회주의 건설에 헌신적이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그렇지만 공동체의 일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보다 중시하는 여성이다. 짜르 제정시대부터 10월 혁명 이후까지 러시아의 여성 삼대에 걸쳐 사랑과 양성관계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혁명 후 쏘비에트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정서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올가의 어머니 마리아 스쩨파노브나는 지역 공교육위원회의 중요한 인물이며 이동도서관 일을 맡고 있다. 1890년대의 전형적인 선동가이자 대중용 학술도서의 출간자이다. 정치적으로는 나로드니끼에 가까웠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지는 않았고, 가난한 이들과 농민들을 위해 책과 학교 도서관과 관련된 일을 하는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지방의 작은 연대의 지휘관인 남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나 교육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의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올가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마리아와 밀월관계를 원했으나 올가의 어머니는 이혼을 원했다. 남편이 이혼에 응하지 않자 짐을 싸서 사랑하는 남자에게로 간 마리아는 함께 교육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올가를 낳았다. 유배지에서 돌아와 대중교육을 위한 지원활동을 하던 중 아버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젖짜는 여인 아리샤와 불미스런 관계를 가졌고, 그 결과 아리샤가 임신한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된다. 올가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리샤와 아이를 잘 챙기라고 충고하면서 짐을 싸서 올가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올가는 나로드니끼인 어머니와 달리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올가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투쟁조직의 뛰어난 활동가와 함께 살았다. 둘은 결혼제도를 근본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수배자였고, 둘은 곧 구속되었고 유배되었다. 혼자 유배지를 벗어난 올가는 당의 임무를 위해 기술자 M의 집의 가정교사로 은신하게 된다. 다섯 아이를 가진 유부남 M과 사랑에 빠진다. 어머니의 충고대로 남편에게 사실대로 편지를 쓴다. 결국 두 사람을 다 사랑한다고 느낀 올가는 결국 두 사람 모두를 떠나려 했지만 올가와 M사이에서 딸 게니아가 태어나게 된다. 올가는 M을 사랑하면서도 남편 콘스딴진과 함께 친구로서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1905년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은 개인의 사소함을 국가적 격변으로 모두 삼켰다. 반동기 동안 M은 확실히 반혁명에 섰고, 콘스딴찐도 혁명에서 점점 멀어졌다. 결국 올가는 두 사람 모두와 헤어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1917년 혁명이 일어났고 연하의 타협할 줄 모르는 프롤레타리아 안드레이 랴브고프 동지와 올가는 함께 살고 있다.

딸 게니아는 스무살 전후의 젊은 쏘비에트 여성이다. 게니아는 남녀 간의 사랑이 독점적 소유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성적 관계는 감정적 이끌림과도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게니아는 남자들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아도 성관계를 가졌다. 심지어 어머니 올가의 연하의 연인인 안드레이와 성관계를 가졌다. 임신한 게니아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게니아와 안드레이의 관계를 올가가 알게 되면서 위기에 처한 모녀관계가 회복되고, 게니아가 어머니 올가에게 절절하게 사랑의 감정을 토로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콜론타이는 게니아를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니아를 통해서 ‘날개 없는 에로스’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로 콜론타이는 당시 쏘비에트 사회에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콜론타이는 1923년에 <날개 달린 에로스>라는 글을 발표하는데, 거기에서 쏘련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의 이념과 세계관에 부합하는 새로운 성도덕, 사랑의 원칙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콜론타이가 선택한 개념이 바로 ‘날개 달린 에로스’ 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 당사자의 몸과 영혼이 모두 상대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배타적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이념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랑과 섬세함이 결여된 거친 신체적 욕망에만 바탕에 둔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비판하였다.

<자매>는 여성노동자와 젊은 성매매 여성 사이의 자매애를 다룬 짧은 소설이다. 네프 시기에 남편이 돈을 벌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는 실직을 했고, 어린 딸을 잃는 아픔까지 겪었다. 네프맨이 된 남편이 돈맛을 알게 되면서 생활태도는 난잡해져갔고, 급기야는 가난과 실업, 노부모의 부양 때문에 성매매 여성이 된 열아홉의 소녀를 자유로운 몸이라는 거짓말로 집에 데려온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젊은 소녀의 절박한 경제적 처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락을 누리고자 한 남편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로 남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성매매 여성에게 연대감을 느낀다. 이 소설은 콜론타이가 정치적으로 격렬하게 반대했던 볼셰비키 당의 신경제정책(NEP)에 대한 소설적 비판이고 현실 고발이다. 실제로 네프 시기에 여성 실업이 증가하고 매춘이 부활했다.

 

 

4. 글을 마치며

 

콜론타이 소설 속의 여성주인공들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되기 위해서 <위대한 사랑>의 나타샤처럼, 때로는 대책 없는 유부남과의 혼외관계에서, 혹은 <붉은 사랑>의 바실리샤처럼 네프맨이 되어서 부르주아적 아내를 원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그 분투는 때로는 짜증날 정도로 지지부진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면 안타깝고 애가 탄다. 한 인간의 정신적 독립은 한 사회가 혁명으로 전진해가는 과정처럼 간단하지가 않은 것이다. 콜론타이가 가진 정치적 입장이 볼셰비키 당의 주류와 달랐다고 해서 콜론타이가 초기 쏘비에트에서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기여한 많은 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콜론타이의 삶과 분투과정과 소설들의 정치적 배경을 알고 난 뒤, 다시 읽는 콜론타이의 소설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소설들 속에 나타난 주체적인 여성들의 형상화는 아직도 여러 면에서 예속적인 현대의 한국 드라마 속의 여성들보다 더 현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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