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정세]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관계와 당면 과제

 

신재길 | 교육위원장

 

* 이 글은 지난 9월 26일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에서 진행되었던 “노동전선 하계 수련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1.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상호 관계

 

1) 토대와 상부구조

맑스주의는 사회를 생산관계인 토대와 이데올로기 관계인 상부구조로 나누어 본다. 이렇게 토대-상부구조의 이층 구도로 사회를 분석할 때 장점은 생산관계의 유물론적 기반을 설명하는 데 용이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분야의 독자적 성격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맑스주의가 경제 결정론이라는 부당한 비판을 받는 일단의 원인 제공도 이러한 이층 구조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쏘련은 혁명이 일어나고 노동자 권력이 들어선 이후 20여 년이 지나서야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되었다. 즉 사회주의 생산관계라는 토대에 기초해서 노동자 정부라는 상부구조가 수립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자 정부가 먼저 수립되고 그 국가 권력의 힘을 이용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다른 사회주의 사회의 수립 과정도 마찬가지였고, 그 붕괴 과정도 국가 권력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현실은 토대-상부구조론의 재검토를 요구한다.

 

그러면 새로운 경제와 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경제(토대)와 정치(상부구조)가 어떤 메커니즘하에서 경제는 토대로 작용하고 정치는 상대적 독자성을 갖는가?

 

2) 발현 이론과 수직적 층위론

토대-상부구조론은 건축학의 토대-상부구조 개념의 비유적 차용에서 유래한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검토해 보자.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를 자연 과학의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비유해 보는 것이다. 토대로서의 물리와 상부구조로서의 화학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이런 상호 관계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각 분야의 독자성과 환원 문제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물리 현상과 화학 현상을 구분한다. 토대로 작용하는 물리 법칙으로부터 독자적 법칙을 이루는 것이 화학의 자율성이다. 물리 법칙에 지배를 받는 원자나 입자들이 어떻게 화학적인 다른 법칙을 이루어 내는가? 이 지점에서 창발(emergence) 내지 발현 개념이 대두된다.

예를 들어 H2O(물)를 보자. H와 O의 결합인 H2O는 우리가 잘 아는 물의 화학식이다. H와 O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H2O에는 H와 O의 속성에는 없는 성질이 나타난다. 이렇게 구성 요소의 속성에 없는 새로운 성질이 결합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발현이나 창발이라고 한다. 이런 창발성은 개별 물질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과학의 분야에도 나타난다. 물리적 운동에 토대하지만 화학에는 화학의 독자적 운동 법칙이 발현된다. 이런 창발성 때문에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생물학도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를 자연 과학의 물리, 화학, 생물에 대응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연 과학은 각 분야별로 창발성에 기초하고 보다 더 기초적인 토대 학문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리고 각 분야별 관계는 무작위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위계구조를 갖는다. 이런 발현 이론과 수직적 위계론을 사회에 적용해 보면, 생산이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므로 경제가 가장 심층의 토대가 되고 그 위에 정치 제도가 서고 이런 생산과 정치 제도 위에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다. 경제-정치-이데올로기 관계는 물리-화학-생물의 관계와 같이 창발적 관계로 환원 불가능성이 관철된다.

 

이런 관점에서 경제와 정치 관계를 살펴보자. 정치는 경제의 집약, 집중이라고 할 때 이 집약ㆍ집중의 내용이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의 고유한 영역을 형성한다. 이를테면 경제가 욕망의 체계라면 국가는 공공의 체계이다. 경제가 개별 자본가의 이윤 욕구에 기초한다면 국가는 총자본의 입장에 기초하고 나아가 전 사회의 공공성에 기초한 원리가 작동한다. 여기에 국가의 모순적 역할이 부여된다. 국가는 자본주의에서 총자본을 대변하는 계급 지배 도구의 역할과 전 사회의 공공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것이 국가의 모순이다. 경제가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의 모순이라면 국가는 국가 권력 소유의 계급성과 국가 기능의 공공성(사회성) 간의 모순이다. 경제가 개별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면 국가는 총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총자본은 개별 자본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국방, 외교, 조세, 교육, 치안 등등은 총자본의 요구이면서 동시에 전 사회적 요구를 국가가 담당하는 것이다. 이런 기능은 공공성의 원리가 적용된다. 따라서 국가의 계급성은 폐지해야 하고 국가의 공공성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 경제에서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생산의 사회성이 강화되듯이 국가의 계급성이 폐지되면 국가의 공공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를 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이다.

국가의 또 다른 속성은 사람을 지배하는 속성이다. 생산관계는 동등한 개인 간의 평등한 계약 관계이다. 그러나 권력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지배-피지배의 관계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계급은 다른 계급을 지배한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배 집단(개인, 계급)은 다른 사람들, 계급, 계층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한다. 지배자의 의사에 맞게 사회에서 차지하는 각자의 지위와 역할을 강제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국가 권력의 핵심에 무장력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기존의 무장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무장력을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권력을 새로 장악한 계급은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는 무력(폭력)을 이용해 기존의 생산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정치권력이 갖는 경제권력에 가하는 반작용이며 능동적 역할이다. 새나 비행기가 양력을 이용해 중력을 극복하고 날 수 있듯이 인간은 국가 권력을 이용해 경제 법칙이 관철되는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치와 이데올로기 부분을 보자. 정치는 그 핵심에 국가 무력이 있다. 무장력은 물질적 성격을 갖는다. 무장력이 경제적 토대의 파생적 성격인 것은 맞지만 이데올로기적 성격인지는 의심스럽다. 따라서 상부구조를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의 총체라고 규정하고 사회 제도와 이념을 포함시킨다면,1) 정치(특히 무장력)의 물질적 성격을 간과할 수 있다. 무장력이나 정치 제도 등은 사람의 의식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성격을 띠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이데올로기적 관계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 의식의 체계인 이데올로기와 별도로 정치적 제도적 권력관계를 따로 분리해 독자적 운동 원리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정치 분야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토대-상부구조라는 이층 구조의 분석틀에 경제-정치-이데올로기라는 3층 구조의 분석틀을 보충할 필요가 있겠다. 경제는 생산관계가, 정치는 권력관계가, 이데올로기는 세계관(계급 의식)이 핵심이다.

 

국가 제도나 권력관계가 어떻게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고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가? 전(前)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폭력이 직접적 의례 행위가 되어 화려한 폭력을 보여 주는 방식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반면에 자본주의에서는 징병제 등을 통해 무장력이 형식적으로 민주화되고 화기의 발달로 일부 집단이 무장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즉, 검술 등은 많은 훈련과 전문적 기술이 필요하지만 소총을 다루는 데는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국가 권력이 폭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체제가 확립된다. 이 국가 폭력은 외적에 대항하거나 질서 유지라는 외피를 쓴다. 즉 폭력의 대상에서 소위 국민이 배제되는 형식을 취한다. 계급 지배 방식에서 일상적이고 직접적 폭력은 약화되고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방식이 강화된다.

 

원형 감옥은 감시자가 은폐된 곳에서 수감자를 감시하는 형태이다. 이 원형 감옥의 효과는 감시자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감시자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내면화한다. 규율은 내면화되어 결국 감시자가 없어도 규율적 행동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규율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이 노리는 효과도 이와 같다. 북의 실질적 위협이 줄어들어도 아니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아도 국가보안법이 유지되는 이유이다. 보안법에 고초를 겪어 본 사람이나 주변에 그런 사람을 본 사람들은(우리는 주기적으로 공안 사건을 접한다) 내면적으로 자기 검열을 수행하게 된다. 자기 검열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사고 자체를 제한한다. 진보적 의제를 표현하고자 할 때 종북주의자라고 비난받지 않을까? 국가보안법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심리적 압박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받게 된다. 이런 압박은 한 사람의 사고 형성을 제약한다. 따라서 진보적이고 의식적인 사람일지라도 무의식적으로 반북 이데올로기에 친화력을 갖게 된다. 이는 개인의 자기 보존 욕구에 기반하고 있기에 매우 막강한 이데올로기 장치의 역할을 한다.

 

이렇듯 경제와 정치, 즉 생산과 폭력이 분리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갖는 사회적 역할이 더욱 강화된다. 현대의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데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과거보다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도 그 자체의 작동 원리를 경제, 정치와 분리하여 분석할 필요가 생긴다.

 

이제 이데올로기의 능동성, 다시 말해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반작용 메커니즘에 대해서 살펴보자. 자연에서는 상층위가 하층위에 반작용하는 방식이 하층위의 작용 조건을 제한하는 방식이거나 길항 작용을 부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어떤 물리적 법칙이 원자들이 작용하는 조건, 예를 들면 일정 온도나 압력 등에서 작동한다고 한다면 이런 온도나 압력 등에 제한을 가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토대층위의 작용 조건을 상위층위의 작용을 통해 제약 변화시켜 반작용을 가할 뿐 아니라 구성 요소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도 반작용을 미친다. 자연에서는 발현적 현상이 일어나면 새로운 객체가 형성되면서 그 발현된 객체의 구성 요소의 특성은 사상된다. 예를 들어 H2O를 보면 H와 O의 특성은 무시되거나 사상된다. 그러나 사회는 다르다. 사회의 구성 요소는 사람이다. 사람은 개인으로 가족, 계급, 사회, 국가 등의 새로운 객체의 구성 요소로 기능한다. 하지만 개인의 개별적 고유한 특성이 무시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즉 개인적 고유한 특성이 남아 있으면서 그리고 그러한 특성이 작용하면서 새로운 객체를 발현시킨다. 이것이 자연의 요소 결합과 사회의 요소 결합의 결정적 차이이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사회에서는 층위 간 규정과 반작용에 있어서 자연에서와 같은 조건 변화라는 외적 방식 외에 구성 요소 자체의 변화라는 다른 차원의 작용 방식이 부가된다. 이는 사회 각 층위의 공통적 구성 요소인 사람의 유연성과 적응성에 기반한다. 자연의 구성 요소인 원자나 소립자 등은 자신의 속성을 변화시키면 그 자체로 존립이 손상된다. 즉 속성은 곧 존재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관이나 가치관, 행동 규범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의 각 층위의 작용은 개인적, 집단적 인간의 구체적 세계관 등을 변화시킴으로써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생각이나 행동은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형성된다. 사람은 세계관이 바뀌면 사회적 행동도 달라진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세계관, 가치관, 행동 규범 등을 형성한다.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 현존하는 경제나 정치적 토대를 기반해서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산과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다양한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입된다. 그리고 대개는 그것을 내면화하게 된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현재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각 계급 계층의 염원과 요구를 반영해서 이를 통과해서 형성된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처지에서 자신의 염원과 요구를 반영해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이제 개인도 계급도 그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목적의식적으로 계급 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는 정치 경제에 반작용을 가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행동 규범이고, 사람은 행동 규범이 어떤 계기를 통해 변할 때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행동 규범으로 기능하면서 정치 경제에 반작용을 미치는 것이다.

 

경제는 가장 심층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물질적 토대를 이룬다. 정치는 경제에 기초하여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사회적 지배를 행한다. 이데올로기는 지배 질서를 사람들의 행동 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러나 경제가 그 자체의 모순을 안고 있듯이 정치와 이데올로기도 자체의 모순을 안고 있다. 경제적 모순이 첨예화되어도 정치적 모순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치적 모순이 먼저 폭발하면서 경제적 모순이 첨예화될 수도 있다. 경제가 가장 심층에서 작용한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정치와 이데올로기 층위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세 영역의 상호 관계에 대한 보다 실증적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세 영역은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위계를 갖는다. 이 점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2. 경제 토대(전제 조건)―코로나발 대공황의 역사적 위치

 

공황은 일반적으로 순환적 공황과 구조적 공황으로 나뉜다. 물론 순환적 공황이 따로 있고 구조적 공황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공황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 상황에서 터질 때 순환적 공황은 구조적 공황으로 나타난다. 구조적 공황은 공황 발생 당시의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을 바꾸지 않고는 극복할 수 없는 자본주의 구조 변화 사이클의 마지막에 발생하는 공황이다. 역사적으로 1870년대 대공황, 1930년대 대공황, 그리고 1970년대 대공황이 있었다. 1870년대 대공황은 자유주의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의 변화를 나았고, 1930년대 대공황은 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그리고 1970년대 대공황은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국제독점자본주의(의제자본주의)로의 변화를 촉발하였다. 이번 코로나발 공황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의제자본주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는 구조적 공황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발 대공황은 국제독점자본주의(의제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패권의 이행기와 겹치면서 공황의 진행이 보다 격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본주의 패권 이행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두 번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의 이행기는 약 백 년간으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각축을 벌였고, 결국 영국이 승리하였다.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이행기는 약 50여 년간으로 영국, 독일, 미국은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켰다. 결과는 알다시피 미국의 승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국의 패권이 유지되고 있다. 이런 자본주의 패권 이행은 자본주의 성격의 변화를 동반한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의 이행은 상업자본주의에서 산업자본주의의 변화를,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이행은 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변화를 동반하였다. 그리고 이런 패권 이행기는 혁명적 시기이기도 한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행기에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독립)이 있었으며,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이행기에 러시아 혁명과 민족 해방 혁명이 있었다. 이제 제3의 이행기에 접어들었다.

 

 

3. 정치 지형(결정적 힘)―계급 투쟁의 조건

 

1) 사회주의 위신의 추락

소위 사회주의 위신의 추락의 책임을 쏘련식 사회주의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동 대중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반은 직접적으로 유럽의 여러 사회민주당들의 배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럽 노동 대중은 쏘련 붕괴 이전 이미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한 유럽의 각국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노동자계급을 대변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를 집행하는 담당자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노동당은 70년대 초반에 이미 국제독점자본에 굴복했고, 프랑스 사회당도 80년대에 굴복했다. 그리고 독일 사민당은 계급정당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버리며 질서자유주의라는 독일식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 것은 노무현 정권보다 유럽의 주요 사회당 정권이 모범적으로 먼저 행했다. 이를 쏘련의 고르바쵸프가 이어받았다. 고르바쵸프는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하에 유럽식 사민주의를 쏘련에 실현하고자 했다. 고르바쵸프는 85년 이후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를 포기하였다. 즉 쏘련의 붕괴는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의 붕괴가 아니라 서구식 사민주의의 붕괴이다. 결국 사회주의 위신의 추락은 서구식 사민주의 반혁명의 성공이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2) 노동계급의 구성과 위상의 변화

급진좌파당의 신좌파 의제의 수용 나아가 생태사회주의나 급진민주주의 전략 등의 배경에는 모두 포스트포드주의 사회와 복지 국가의 성립으로 인한 산업노동자계급(블루칼라)의 축소와 신중간계급의 성장이 있다는 진단이 있다. 물론 이는 유럽에서는 일정 타당한 진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을 한국이나 아시아에 적용할 수는 없다. 80년대 유럽에서 노동 운동이 패배하고 쇠퇴할 때 한국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 운동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후 케인즈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의 국제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세계적 분업 체계의 일환 때문이다. 소위 선진제국의 제조업이 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선진제국은 제조업 기반이 축소되는 반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제조업이 급속히 성장했다. 따라서 산업노동자계급(블루칼라)의 축소와 신중간계급의 성장은 세계적 차원에서 본다면 보편적 현상이 아니다.

 

3) 신자유주의 지구화

유럽 통합으로 유럽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 투쟁이 나타났다. 유럽 통합으로 새로운 대중 투쟁의 귀환이 갖는 의미는 대중 운동이 상반된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우파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남부 유럽에서는 좌파 포퓰리즘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유럽 통합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유럽 통합은 유럽 내부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것이었고, 그 결과 대중 운동의 양상도 각기 다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파든 좌파든 그 공통적 성격은 포퓰리즘적 성격이라는 점이다.

 

유럽의 기존 정당들이 모두 신자유주의를 대변하거나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여 그것을 수용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불만을 갖는 세력을 대변할 정치 세력이 부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득세하게 되는 기반이다.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이다. 하나는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희화화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각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흐름의 밑바탕에는 기존의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근원적 변화의 요구가 있다.

 

원래 민주주의란 하층계급이나 피지배계급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다. 노동자의 참정권 운동과 징병제의 도입으로 자유주의자들도 민족주의를 매개로 민주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이때 민주주의를 선거 참여로 제한하게 된다. 자유 개념과 민주 개념의 통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유는 재산권의 자유이면서 선택의 자유이다. 선택의 자유는 우월한 것, 효율적인 것의 선택이다. 근본에 엘리트주의가 깔려 있다. 이는 민주 개념과 결합하면서 우월성의 선택에 참여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해석했다.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이다. 이제 이런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대안은 피지배계급이 지배하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4) 개량과 혁명의 이분법의 폐기

개량과 혁명의 이분법이 유효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다. 개량주의의 대표적 입장인 사회민주주의가 이미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이래, 개량주의의 입지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개량과 혁명의 이분법이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 개량주의의 소멸이라는 의미라면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즉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면 잘못이다. 개량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복지 등을 통해 약화 내지 순화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고, 혁명이란 자본주의 모순을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민주의가 그동안의 행태를 통해 개량주의의 귀결이 무엇인지 이미 분명하게 보여 주었는데, 개량ㆍ개혁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의아할 뿐이다. 혹시 노사 대타협을 통한 케인즈식 개량을 염두에 두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국제독점자본주의하에서는 불가능하다. 케인즈식 개량은 일국 차원의 독자적 재정 금융 정책이 가능해야 한다. 이는 자본의 이동을 제한 통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금융자본을 일정 정도 제한하여 산업자본과 노동자의 타협을 이끌어 낸 것이다. 국제독점자본주의는 이런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면서 수립되었다. 소위 신자유주의이다. 따라서 케인즈식 개량이나 소위 뉴딜은 국제독점자본 체제를 벗어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국제독점하의 뉴딜이나 대타협은 모두 기만적 술책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5) 다원주의와 민주집중제

사실 다원주의의 수용과 민주집중제가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원주의가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요구와 이해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민주집중제는 모든 민주적 조직의 보편적 원리이다.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의 유기적 통일이다. 민주주의는 조직 내 노동자들의 창발성의 발현이며 노동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는 장치이고, 중앙집중제는 일단 총화된 결의의 행동 통일을 보장하는 장치이다. 민주집중제의 구현의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민주집중제를 폐기할 수는 없다.

 

민주집중제와 다원주의(다양한 요구)는 모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자계급 내부에 다양한 요구가 분화되어 있다. 이를 반영한 것이 다원주의로 표출되고 있다. 각계각층의 요구가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다기한 요구를 포괄하는 지점이 있다. 민주집중제는 이 지점을 찾고 공동 실천을 위한 담보이다. 임원의 순번제나 여성 할당제, 임기 제한 등등이 민주집중제의 폐기는 아니다.

 

민집제에 기초한 노동자 민중의 대중 조직은 의회민주주의를 대체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다. 민집제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월한 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에 머물고 말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라는 의미에서 우월한 자를 선거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왜곡시켰다. 이제 전선은 독재냐 민주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노동자 민중의 민주주의냐로 이동되었다. 가짜민주주의 대 진짜민주주의의 대결이다. 민집제는 진짜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진짜민주주의는 자치(자기 지배, 자기 통치)의 체제이다.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실현할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민중의 대표가 정책을 직접 실행하는 체제이다.

 

 

4. 이데올로기 지형(지속성과 강고성의 원천)

 

현재 변혁 진영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신좌파적 의제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신좌파적 사고는 부문 운동을 노동 운동과 대등하게 보고, 노동 운동의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으며, 운동의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노동 운동을 포함한 모든 부문 운동은 어느 하나가 중심이 될 수 없으며 네트워크로 결집하는 연대가 중요하다고 한다. 이런 사고방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게 대두된 지 오래다. 적녹보 연합 주장이 그 예이다.

 

물론 신좌파의 의제들은 노동자계급이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신좌파 의제들을 수용하여 노동 운동의 책임을 넓히는 문제와 노동 운동의 중심성을 파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노동 운동의 중심성은 당파성과 노동계급성에 관련되는 문제이고 다양한 의제를 수용하는 것은 노동 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민중성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이 두 문제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정권은 노동자계급만의 정권이 아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의 쏘비에트 정부도 농민이 참여한 정권이었고, 그 후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부도 대부분 인민 정권으로 노동자와 농민, 소부르주아, 지식인 등이 참여하는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부들은 모두 노동자 정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좌파 의제들도 여러 계급 계층의 요구와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이것들도 노동 운동의 중요한 의제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은 노동 운동의 기반에 관한 문제이다. 노동 운동이 노동자계급만의 운동이 아니라 다른 피착취계급과 계층의 운동을 포함하는 것은 노동 해방이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다른 피억압 계급 계층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자신도 해방될 수 없다. 노동자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독자적 사회 제도를 건설할 수 있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계급 계층도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 제도를 독자적으로 수립할 수 없다. 여기에 노동자계급 운동의 중심성과 민중성의 근거가 있다.

 

이 노동자 중심성(지도성)과 민중성을 이어주는 것이 헤게모니이다. 노동자 중심성은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객관적 조건의 문제와 구체적 실행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객관적 조건의 문제에서는 노동자 중심성은 사상이론의 문제이지만 실천의 차원에서는 전략전술의 문제이다. 각 계급 계층과 연합하고 지도하는 실천의 문제는 힘의 관계(역관계)가 문제시된다. 노동자계급이 독자적 정치력을 가지지 못하거나 정치력이 약하다면 노동자 투쟁의 성과는 다른 계급 계층의 부문 운동이나 심지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헤게모니가 넘어가게 된다. 그럼 노동자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오직 쪽수뿐이 없다. 노동자의 힘은 단결된 조직뿐이다.

 

그러나 그간의 신좌파는 다원주의라는 이름하에 노동자 중심성을 비판하였다. 이는 신좌파가 아무리 반자본주의를 주장한다고 해도 반자본주의의 주체를 세우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즉 좌파 운동이 반자본주의로 단결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각각의 운동은 각각의 영역에서 각개 격파되고 말 것이다. 이들을 형식적인 조직으로 묶는다고 해서 단결된 행동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이다.

 

노동자 중심성은 반자본주의의 핵심으로 어떤 의제하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좌파 운동의 핵심이어야 한다. 이를 포기할 시 그 운동은 필시 자유주의 운동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 주장이 아무리 급진적이고 그 투쟁이 아무리 과격해도 말이다. 노동자 중심성은 말이나 이론 주장이 아니다. 노동자의 힘이다. 노동자 중심성은 신좌파 의제를 노동자의 이익에 종식시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좌파 의제조차도 노동자가 중심에 서서 투쟁하지 않는다면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노동자 중심성과 신좌파 의제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자 중심성이 서야 신좌파 의제들도 실현될 수 있다.

 

 

5. 노동자계급정당의 필요성―당면과제

 

사회주의 위신의 추락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민주의의 배신에 그 책임이 있다. 그런데 한국적 상황에서는 사민주의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여 정착시킨 세력이 아니라 자유주의 세력이 수용하여 정착시켰다. 이 점은 어떤 면에서 미국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본산이면서 사민주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불만 있는 세력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샌더스 등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는 미국 유권자의 20ㆍ30대 층에서 사회주의 지지층이 급속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특수성은 자유주의 세력이 촛불의 성과를 흡수하며, 사회주의 세력이 오히려 축소되는 현상에 있다. 이는 사회주의 노동자 민중 세력이 분열되어 있다는 데 그 책임이 크다. 따라서 한국도 사회주의 세력이 단일한 세력으로 선다면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노동계급의 구성과 위상의 변화 문제이다. 이는 제조업 노동자의 비중이 중심에 있다. 유럽은 제조업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제조업 중심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5대 제조업 강국이다. 그리고 경제에서 차지하는 제조업 비율도 31%에 달한다. 이는 중국의 27%보다 높은 수준이다. 미국은 10%가 안 되고 독일이 20%, 일본이 18% 수준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10% 안쪽의 제조업 비중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구성과 위상의 변화는 한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한국에서 노동자 중심성이 특히 중요한 이유이다.

 

세 번째로 신자유주의 지구화 배경은 한국을 세계 경제의 밸류체인에서 중간재 생산 지대의 지위를 차지하게 한 계기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특징이 금융화이며 신중간층의 증가를 특징으로 한다지만 사실은 중간층의 몰락이다. 케인즈 국독자에서 중간층은 복지 혜택과 고임금의 산업노동자층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들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고 복지와 고임금 체계를 깼다. 그 결과 양극화는 1930년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신중간층 운운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신중간층에 기반한다는 신좌파 의제는 그 파급력에 비해 계급적 토대가 취약하고, 왜곡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과 한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제조업의 성장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산업노동자층의 감소로 진보적 의제의 다양화는 유럽과 다른 수준으로 전개될 것이다. 물론 노동자계급이 정치 세력화되지 못한 조건에서 신좌파 의제가 부각되는 점은 있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사회 경제적 토대가 약하다. 노동자계급이 단일한 세력으로 뭉치게 되면 이들 의제는 강력한 자석에 끌려드는 쇳조각처럼 노동자계급 주위로 뭉칠 것이다.

 

따라서 현 대공황 정세를 돌파하는 고리는 노동자계급이 계급정당 내지 노동자 통일전선이나 좌파연합 등 뭐라고 명명하든 단일한 세력으로 결집하는 것이다. 그 출발은 노동 운동 내 좌파 단위의 연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이미 파탄난 의회민주주의의 길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의회를 통한 변화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항상 대중 투쟁의 반영으로 소위 개혁이라는 것도 추진되었다. 이는 의회가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중의 의견을 대변하는 새로운 장치가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조직 내적으로는 다수결 원칙을 폐기하고 비례제 원칙을 수립하여 소수파를 존중하는 장치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자본가와는 투쟁을 노동자 세력과는 타협을.

노사과연

 

 


 

1) ≪철학대사전≫, 동녘, p.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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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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