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7)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7장 쏘련의 해체 과정

 

 

1. 고르바쵸프의 우편향적 개혁 노선

 

브레쥐네프가 사망하고 안드로뽀프가 쏘련 공산당의 총서기가 되어 일정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에서 청부생산제를 실시하고 공업과 건축업에서 작업대를 조직하여 분권화된 노동 조직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금주 등 노동 기율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드로뽀프는 1년여 만에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사망하게 되고 이어서 체르넨꼬가 뒤를 이었지만 체르넨꼬도 얼마 못 가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당시 쏘련 지도부 대부분이 고령이었는데 이는 브레쥐네프 시기 간부종신제로 인하여 지도부의 연령이 급속히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안드로뽀프, 체르넨꼬의 뒤를 이은 사람은 당시 지도부로서는 젊은 연령이었던 고르바쵸프였다.

고르바쵸프가 처음 당 총서기로서 등장했을 때 그는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가속화 전략을 추구했다. 이는 브레쥐네프 시기가 이른바 정체의 시기로 불리며, 경제 건설이 벽에 부딪혀 있었던 당시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1986년 2월 25일 개최된 27차 당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고르바쵸프는, 브레쥐네프가 발달한 사회주의가 이미 건설되었다고 선언한 것을 비판하며, 쏘련은 발달한 사회주의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쏘련의 현실 때문이었는데 1981-1985년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단지 3.2%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르바쵸프가 가속화 전략을 채택한 것은, 브레쥐네프 시기의 수정주의적 경제 건설 전략 자체는 문제가 없으며, 문제는 사회적으로 느슨해져 있는 기율과 상태를 재차 강화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치는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속화 전략하에서 경제 건설은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악화되었다. 1986-1988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8%로 저하되었는데 이는 가속화 전략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 벽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에서 고르바쵸프는 브레쥐네프 시기의 수정주의적 경제 건설 노선을 비판하고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재건하는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약화시키고, 사실상 경제에서의 계획을 방기하고 시장 경제, 즉 자본주의적 경제로의 개혁을 추구하는 길을 채택했다. 1986년 11월 9일 개인의 경제 활동을 보장하는 개인 노동법이 제정되었다. 개인 노동은 생활 써비스 등의 영역에서 개인의 독자적인 경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당시는 개인 경제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령의 채택을 통해 쏘련은 국유 기업의 주변에서 개인적인 경제 활동이 번성하는 양상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개인 노동법보다 더욱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국영 기업법이 1987년 7월 1일 제정되어 국유 기업의 경제 활동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영 기업법은 기업의 매년의 연도계획의 작성을 기업이 스스로의 책임으로 담당하게 함으로써, 중앙의 경제 관리 부문이 지령성 계획을 통해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한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중앙 차원의 계획을 폐지하는 것으로서 브레쥐네프 시기에 일정하게 남아 있던 중앙에서의 계획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개별 기업이 전면적으로 이윤 추구 단위로서 활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고르바쵸프의 이러한 조치는, 명목은 중앙의 관료주의적 기업 지배를 종식시키고 기업의 자율성을 강화하여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이러한 조치를 통하여 국유 기업의 경영층은 전면적인 이윤 추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나아가 기업의 시설, 자재, 인원을 빼돌려 기업을 사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지배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또한 1988년 5월에는 협동조합법이 제정되었는데 협동조합은 당시 명목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틀 내에 존재하는 것이었지만, 실은 국유 기업의 재산을 횡령하고 절취하는 통로와 수단이 되는 것이었다. 협동조합법 자체는 생산 협동조합과 소비 협동조합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고르바쵸프 하에서 협동조합은, 중앙의 계획이 마비 혹은 무력화됨에 따라 국유 기업의 경영층이 국유 기업의 재산을 협동조합으로 빼돌리고 협동조합을 사실상 사기업처럼 운영함으로써, 국유 기업의 전 인민 소유를 형해화시키고 그로부터 사적 자본주의적 기업을 형성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자연 발생적 사유화(私有化), 즉 전 인민 소유의 사적인 탈취를 의미하였다.

고르바쵸프는 가속화 전략의 실패를 경제 개혁으로 만회하려 했지만 경제 개혁하에서 경제 성장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쏘련 경제를 지탱해 왔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자체가 균열되고 침식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자본주의적 경제가 독버섯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중앙의 사회주의적 경제 계획의 마비 혹은 무력화, 개별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운동, 그리고 전 인민 소유의 국유 기업 재산의 횡령과 절취, 탈취에 의한 사적 자본주의적 축적의 발생, 이것이 1980년대 후반 고르바쵸프 하에서 이루어진 경제 개혁의 현실적인 내용과 모습이었다.

고르바쵸프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내세웠던 것은 개혁(뻬레쓰뜨로이까)과 공개성(글라쓰노쓰찌)이었다. 이러한 고르바쵸프의 기치는 다수 대중의 환영을 받았는데 이는 브레쥐네프적인 노선과 사회적 상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인식이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는 브레쥐네프의 수정주의 노선의 오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사실상 맑스-레닌주의적인 사회주의적 원칙을 방기하는 길을 걸었고 이를 화려하게 개혁 노선이라 포장한 것이었다. 고르바쵸프는 정치 노선만이 아니라 사상 자체에서 우편향적인 노선을 걸었다. 1987년 11월 고르바쵸프의 저서 ≪개혁과 신사고≫가 출판되었는데, 그 책에서 고르바쵸프는 인류의 이익이 다른 어떤 것보다 높고 인류의 생존이 다른 어떤 것보다 높다1)는 견해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고르바쵸프의 견해는 사실상 계급적 접근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신사고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방기하고 인류 보편이라는 기치하에 자본가계급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노선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고르바쵸프의 이러한 견해는 흐루쇼프, 브레쥐네프 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이 폐기되고, 그것이 무당파적인 전 인민 국가론으로 전환되었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을 더욱더 심화시켜 계급적 접근, 계급적 관점을 완전히 폐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르바쵸프의 관점에 대해 많은 논자들은 고르바쵸프가 사실상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이루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르바쵸프는 1987년 10월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를 통해 역사 결의를 이끌어 냈는데, 그것은 쓰딸린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 즉 쓰딸린에 대한 탄핵을 다시 한 번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연상선상에서 고르바쵸프는 1988년에 부하린과 지노비예프를 복권시켰다. 이러한 고르바쵸프의 방침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칙을 철저히 무력화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쏘련이라는 국가, 쏘비에트 연방의 정치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길을 걷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향후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수많은 세력, 맑스-레닌주의 자체에 반대하고 공산당을 부정하는 많은 반체제 세력, 자본주의 복고 세력의 등장의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고르바쵸프가 이러한 길을 걸었던 것의 원인을, 사상의 영역을 제외하고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른바 경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고르바쵸프는 경제 개혁만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없으며, 정치적 개혁을 통해 사회를 일신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르바쵸프의 행로는 ① 브레쥐네프 시기의 정체 상태를 비판하는 개혁(뻬레쓰뜨로이까)의 제기 단계, ②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가속화 전략, ③ 가속화 전략의 실패와 경제 개혁의 제기, ④ 경제 개혁의 실패와 정치 개혁으로의 이행이라는 단계를 밟아 갔다. 그리고 정치 개혁의 실패는 곧바로 쏘련 자체의 해체, 쏘비에트 연방 체제의 해체와 각 민족 공화국의 독립으로 귀결되게 되었다.

1987년 10월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옐찐이, 개혁의 속도가 늦고 성과가 없다고 비판하며 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 사임을 발표하였다. 이는 쏘련 지도부 내에서 개혁의 속도와 방향을 둘러싸고 노선의 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1988년 3월 13일 ≪쏘비에트 러시아 신문≫에 레닌그라드 공학원 교사였던 안드레예바가 우리는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글을 발표하여 고르바쵸프의 10월 혁명 70주년 기념 연설의 내용을 비판하였다. 이 글은 고르바쵸프 노선의 우편향에 반대하여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세력이 형성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88년 6월 28일 개최된 쏘련 공산당 19차 대표회의는 정치 체제의 개혁을 전면화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기존의 쏘비에트 선거와 달리 복수 후보의 경쟁 선거를 허용하는 쏘비에트 인민 대표 대회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 선거를 통하여 쏘련은 정치 개혁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반체제 세력, 자본주의 복고 세력을 포함하여 각 세력이 각축하는 격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민 대표 대회 선거는 1989년 3월에 실시되었는데, 당선자의 80%가 공산당원이었지만 선거 과정에서 공산당원임을 내세우지 않아야 당선이 가능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하고 있었고 전략적인 30여 개의 주요 지구에서 당 지도부들이 대거 낙선하였다. 이들 당선자 중 이른바 민주파, 즉 자본주의 복고 지향의 (부르주아) 민주파들 400여 명이 옐찐을 대표로 하는 연합 조직을 결성하여 이른바 급진 개혁 세력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쏘련 공산당은 고르바쵸프의 주류 개혁파, 옐찐 등의 급진 개혁파, 그리고 전통적인 사회주의 고수파로 갈리게 되었다.

 

 

2. 쏘비에트 연방의 해체 과정

 

1988년부터 쏘련 경제는 위기 상황에 돌입해 있었다. 1990년에는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했는데, 전체 국민 소득은 4% 감소하였고 국민 총생산은 2% 감소, 노동 생산성은 3%가 감소하였다.2) 또한 1989년 7월에는 씨비르(시베리아)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발생했는데, 상품의 부족에 항의하고 생활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파업은 씨비르(시베리아)만이 아니라 우끄라이나, 까자흐스딴 등지로 확대되었고 50만여 명이 참가했다. 최고 쏘비에트에서는 15개월간 파업 금지를 결의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파업은 지속되었다. 1990년 1월-4월의 기간에는 124개 도시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이러한 파업의 확산은 기존의 질서의 급격한 변동을 자극하는 것이었으며 각축하는 세력 중에서 옐찐 등 급진 개혁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88년부터 인가받지 않은 조직이 수없이 결성되었는데, 인민전선, 민주연맹 등 반체제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그중에는 10월 혁명 후에 불법화되었던 입헌민주당, 사회혁명당 등도 있었다. 또한 민족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는데, 1989년 9월 아제르바이쟌과 아르메니야 사이에 나고르노-까라바흐 자치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 분쟁이 격화되었다.3) 이렇게 경제가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개혁의 방향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또한 개혁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성장하고 반사회주의적인 각종 세력이 등장하는 가운데 쏘련 공산당의 구심적 역할은 약화되고 있었고 쏘련 사회는 점차 와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1990년 2월 5일 쏘련 공산당은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어서 당의 혁신을 논의했지만 당의 지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당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부르주아적인 삼권 분립을 실현하는 대통령제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고 1990년 3월 15일 고르바쵸프가 인민 대표 대회에서 쏘련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부르주아적인 삼권 분립을 통해 정치 위기의 해소가 가능할 것이라는 주류 개혁파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권력 분립 제도의 시도는 실제로는 공산당의 약화와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옐찐을 선두로 하는 급진 개혁파는 1990년에 쏘련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규정한 쏘련 헌법 6조의 폐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헌법 조항은 1977년 브레쥐네프의 헌법에 삽입된 것인데 당의 지도적 역할을 헌법에 명시하는 것은 사실 부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과 국가의 통일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관료주의 체제를 당의 권위를 빌려 정당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은 국가 기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은 헌법에 삽입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당은 권력의 담당자가 아니라 사상에 기초한 노선의 정립을 통해 국가 기구를 지도해야 하며, 나아가 국가 자체의 소멸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점에서 브레쥐네프 헌법 6조의 존재는 부적절한 것이었고, 이 점이 자본주의 복고를 지향하는 급진 개혁파의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쏘련 공산당은 1990년 7월 2일 28차 당 대회에서 쏘련 공산당의 헌법상의 지위를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단순히 당의 헌법상의 지도적 역할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쏘련에서 공산당의 유일당 체제가 종식되고 다당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 당 대회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인도적,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제기하여 사회주의 개념을 맑스-레닌주의적 개념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으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또한 이 대회는 쏘련 공산당의 마지막 당 대회가 되었는데 사회주의 개념의 전환과 더불어 다양한 형식의 소유제의 병존을 승인하였다.4) 이는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승인한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었는데, 이로써 쏘련은 자본가계급의 계급적 존재를 승인하는 사회가 되었다.

28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은 고르바쵸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부 직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쏘련 공산당의 국가 기구에 대한 영향력이 현격하게 축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옐찐은 당 대회에서 당명을 민주사회주의당으로 변경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 대회에서 옐찐은 쏘련 공산당으로부터 탈당을 결행했고, 이는 급진 개혁파들 전체의 공산당 탈당으로 이어졌다. 옐찐 등 급진 개혁파들이 공산당에서 탈당한 것은, 급진 개혁파들이 이전까지는 공산당 내에서 체제 변화를 도모했다면, 이제는 공산당 밖에서 공산당을 타도하고 체제를 변화시키겠다는 노선으로 전환한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1990년 10월에 이르면 고르바쵸프 정부의 사퇴를 요구하며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렇게 쏘련 공산당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이 균열되고 급격히 약화되면서 쏘련의 각 공화국들을 묶어 주고 있던 연방제 또한 흔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르바쵸프는 1990년 12월 소집된 제4차 인민 대표 대회에서 기존의 연방을 주권 쏘비에트 공화국 연방으로 개조할 것을 제시했는데 이에 대해 발트 3국, 그루지야, 아르메니야가 신연방조약에 참가할 것을 거부했다.5) 그리하여 이 대회에서는 연방의 존속 여부에 대해 투표했는데, 1657표가 찬성했고, 70표가 반대했으며, 61표가 기권했다. 이러한 표결 결과는 당시까지는 쏘련 공산당과 쏘비에트 연방이 흔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방향을 견지하고 쏘비에트 연방을 유지하려는 흐름이 다수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옐찐은 연방 권력의 존속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쏘비에트 연방의 균열을 부채질하였다.

한편 1990년 경제 위기 상황에서, 공산당의 주류 고르바쵸프 세력 그리고 옐찐 등 급진 개혁파 모두 쏘련 경제의 시장 경제로의 이행, 즉 자본주의 방향으로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1990년 10월 8일 쏘련 공산당은 쏘련 국내 정세와 시장 경제로의 과도 시기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시장 경제로의 이행을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르바쵸프와 옐찐은 시장 경제로의 이행의 속도와 방식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고르바쵸프는 1990년 10월 19일 시장 경제로의 이행을 4단계로 나누어 점진적으로 실시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옐찐은 고르바쵸프의 안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500일 계획을 발표하고 러시아 공화국 의회에서 비준을 받았다. 옐찐의 안은 500일의 단기간 내에 대부분의 생산물의 가격 자유화(즉, 물가의 대폭적인 인상), 주요 국유 기업들의 사유화를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1991년에는 1990년보다 더욱 심한 마이너스 경제 성장의 국면이 전개되어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민족 문제, 쏘비에트 연방의 존속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어 갔다. 1991년 1월 11일 리뜨바(리투아니아)에서 연방 이탈 움직임이 발생했을 때, 연방군이 리뜨바(리투아니아)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대해 옐찐은 고르바쵸프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비에트 연방의 존속 여부를 묻는 전 쏘련 국민 투표가 1991년 3월 17일 실시되었는데, 투표자의 76.4%가 연방의 존속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후 쏘련에서 현실적인 정세의 전개는 이러한 인민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민주주의적 요구가, 그러한 요구를 담보할 정치 세력과 국가 조직이 없다면 언제든지 배반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1991년 6월 12일 옐찐이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옐찐은 같은 해 6월 18일에 러시아 공화국 정부가 연방의 내년 경제 계획을 집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러시아 최고 쏘비에트에 의해 승인받았다. 그리고 7월 20일 옐찐은 대통령령을 발동하여 러시아의 군대와 국가 기관에서 정당이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공산당의 당 조직이 군대와 국가 기구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여 공산당의 활동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7월 24일 쏘련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의 대외 경제 부문 대표가 회동하여 각 공화국이 쏘련의 대외 부채를 분담하고 연방의 황금 비축분, 외환 보유고, 유가 증권을 분할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8월 20일 신연방조약이 서명될 예정이었다. 신연방조약은 명칭을 쏘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방으로 하였는데, 연방의 중앙은 각 구성 공화국 법률보다 하위에 있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연방의 실질을 상실하는 것으로서 쏘비에트 연방이 사실상 와해되고 단지 명칭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이 8ㆍ19 정변(政變)의 배경이 되는 상황이었다. 8ㆍ19 정변은 쏘비에트 연방이 사실상 와해되고 단지 껍데기만 남게 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전통적 세력이 상황의 역전을 시도한 것이었다. 고르바쵸프는 신연방조약의 준비 작업을 마무리하고 8월 5일 휴가를 떠났다. 이 상황에서 부통령, 국방부 부장, KGB 의장, 내무부 부장 등이 모의하여 휴가지의 고르바쵸프에게 사람을 보내어 계엄 실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고르바쵸프가 계엄의 선포를 거부하자, 이 세력은 국가긴급상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부통령이 성명을 발표하여 고르바쵸프가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으며 자신이 대통령직을 대행한다는 것과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8월 19일 새벽 탱크와 공수 부대가 모쓰끄바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주요 인물과 세력을 즉각 체포하거나 진압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며, 19일 저녁 무렵에야 옐찐의 근거지였던 러시아 최고 쏘비에트 건물과 러시아 대통령궁을 포위하였다. 옐찐은 상황을 분석한 후 전면적인 대항을 결정했고 기자 회견을 열어 긴급 사태가 반헌법 행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광부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고 수만 명이 러시아 대통령궁을 둘러싸고 옐찐을 지지하는 시위를 하였다. 옐찐은 또한 서방측이 자신을 지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쏘련의 국가긴급상태 위원회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군부 내의 분열 또한 발생했는데, 공군과 공수 부대, 해군과 전략 로케트 부대가 국가긴급상태 위원회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쓰끄바 군구의 참모장이 옐찐 지지로 돌아서면서 상황은 기울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국가긴급상태 위원회 측은, 21일 새벽 옐찐이 있는 러시아 대통령궁을 점령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실제 진입 임무를 맡은 돌격 부대가 진입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부대를 교체하여 다시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이 부대 또한 진입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국방부장은 모쓰끄바 시내에 동원하였던 부대들의 원대 복귀를 지시하였고 8ㆍ19 정변은 실패로 귀결되게 되었다. 이후 국가긴급상태 위원회를 구성했던 주요 인물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쏘련의 정세는 급변하게 되었다.

모쓰끄바로 돌아온 고르바쵸프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새로운 연방조약과 시장 경제의 길로 매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8ㆍ19 정변의 실패의 결과 고르바쵸프가 주도하는 혹은 관여하는 새로운 연방조약의 길은 물 건너가게 되었고, 이후 정세는 옐찐 주도하의 쏘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귀결되게 되었다. 옐찐은 공산당의 청산, 공산주의 사상 체계와 실천의 통치의 종식, 그리고 비공산주의화 임무를 선언하였다.6) 8월 22일 옐찐은 쏘련 군대 내의 공산당 기층 조직을 불법화하였으며, 23일에는 러시아 공산당 활동의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25일에는 쏘련 공산당의 모든 재산을 러시아 공화국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발동하였다. 8월 24일 고르바쵸프는 쏘련 공산당 총서기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쏘련 공산당 중앙의 해산을 제안하고 지방당의 당 조직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것을 제안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29일 쏘련 최고 쏘비에트 비상회의는 쏘련 공산당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결의를 하였고 지방당 조직들은 쏘련 공산당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혹은 당명을 개정하거나 혹은 활동을 금지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91년 11월 7일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 최초로 10월 혁명 기념식이 붉은 광장에서 열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집회들이 열렸는데 이 집회들에서 고르바쵸프와 옐찐은 반동 집단이라는 구호가 외쳐졌다.7)

이리하여 연방은 유명무실화되었는데, 1991년 9월 11일 옐찐은 쏘련의 석탄 공업부, 석유, 천연가스, 원자력 공업부 등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그 재산을 러시아 공화국에 귀속시켰다. 1991년 8월 30일 우끄라이나에서는 경내의 모든 쏘련 기업을 우끄라이나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91년 연말까지 쏘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의 독립 선언이 이어졌다. 1991년 12월 7일 러시아 공화국, 우끄라이나 공화국, 벨로루시 공화국의 수뇌들이 회동하여 독립 국가 연합안을 발표하였고, 쏘비에트 연방이 법적으로 정지되었고 1922년의 쏘비에트 연방 건립 조약이 폐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12월 12일 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 수뇌가 회동하여 독립 국가 연합에 가입 의사를 표명하였다. 12월 18일 러시아 의회는 쏘련의 재산이 러시아에 귀속되고 쏘련 의회가 종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12월 21일 11개 공화국 수뇌들이 회동하여 독립 국가 연합안에 서명하였고 UN에서 쏘련의 지위는 러시아 공화국이 계승한다고 발표하였다. 12월 25일 고르바쵸프가 쏘련 대통령직의 사임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 즉 1991년 12월 25일 저녁 7시 38분, 끄레믈 궁에서는 70년간 나부끼던 낫과 망치가 그려진 쏘련의 국기가 하강되었다.8) 다음 날 12월 26일 쏘련 최고 쏘비에트가 최후의 회의를 열어 쏘련이 법률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3.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 과정

 

위와 같은 쏘비에트 연방의 해체 과정은 단순한 정치적 실수 혹은 오류, 나아가 정치 노선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상 자체가 변질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르바쵸프 등 주류 개혁파는 수정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사상이 변질된 결과, 소위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로의 방향으로 쏘련 사회를 이끌었다. 흐루쇼프, 브레쥐네프 수정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 인민 국가론으로 전환하는 등 계급적 관점을 무당파적 관점으로 대체했었다. 그러나 이들 수정주의는 외면상으로는 맑스-레닌주의의 견지를 표방했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 단계에 이르면 이들 수정주의가 단순한 무당파적 관점을 넘어서서 계급적 관점을 완전히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방향 전환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르바쵸프는 중앙의 경제 계획을 마비 혹은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공공연히 수행했고, 나아가 시장 경제로 즉, 자본주의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을 먹고 자라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주의 건설은 의식성, 계획성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에 기초하여 노선을 정립해 가는 당의 역할이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쏘련의 노동자계급과 인민 대중이 당에 대해 거의 무한의 신뢰를 보냈던 사실, 그리고 쏘련의 해체가 공산당의 해체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더라도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에서 사상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요소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쏘련의 해체를 이끌었던 사상의 변질의 시작은 흐루쇼프 수정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른바 쓰딸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부정한 것이 쏘련 공산당의 사상적 변질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변질에 기초하여 수정주의 세력은 계획 경제 체제를 좀먹어 갔고 브레쥐네프에 이르면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개혁을 수행하고 관료주의 체제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국유 기업의 이윤 추구 운동의 충돌이었고, 그 결과 쏘련 경제 전체가 균열되었던 것이다. 고르바쵸프는 이에 대해 개혁을 내세웠지만,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주의적 의식성을 상실한 결과 고르바쵸프의 개혁 노선은 계획 경제를 해체하고, 나아가 우편향적 정치 개혁으로 인해 쏘비에트 연방 자체를 해체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해체, 그리고 쏘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인민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살펴보자. 그것은 여러 차원의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핵심적인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했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해체되어 노동자와 인민이 다시금 착취의 사슬에 매이게 되었다는 점인데, 사회주의 생산관계 해체의 각각의 단계를 살펴봄으로써 고르바쵸프 개혁의 의미, 옐찐의 급진 개혁과 반공산주의 노선의 현실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사회주의 생산관계 해체의 핵심은 전 인민 소유의 국유 기업이 국유 기업을 지배하던 경제 관료들과 국유 기업의 경영층 등에 의해 사적으로 횡령, 절취, 탈취당하여 사적 자본주의적 소유와 축적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고르바쵸프의 이른바 개혁 노선은 전 인민 소유에 대한 이러한 사적인 탈취를 통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발생을 조장하고 나아가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 즉 전 인민 소유의 국유 기업의 사유화(私有化)를 단계를 나누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국유 기업의 사유화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 발생적 사유화 단계이다. 그것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15년의 기간인데, 이 시기에 국유 기업의 경영층에 의해 불법적으로 국유 기업의 재산이 유용되고 횡령되어 국유 기업이 마치 개인 기업처럼 운영되는 상황이 발생했다.9) 이는 권력으로써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以權謀私)으로서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으로 인해 국유 기업이 이윤 추구를 지상 목표로 삼게 됨에 따라 기업 경영층의 탈선과 부패가 조장되었던 시기이다. 처음에는 국유 기업의 유동 자금과 동산을 개인 재산인 양 유용했다. 예를 들면 기업의 자금으로 개인의 주택을 건축하거나 보수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를 지나면 국유 기업의 자재와 인원을 빼돌려 기업을 사적,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하는 사례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이러한 양상은 아직은 제한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빼돌린 재산을 유통하고 합법화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고, 나아가 부동산 재산의 주요한 부분인 토지는 모두 국유로서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유 기업 사유화의 두 번째의 단계는 고르바쵸프의 개혁이 이루어지던 1980년대 후반의 상황이다.10) 이 시기에 고르바쵸프는 개인 노동법을 제정하여 개인의 영업 활동을 허용하였고 국영 기업법을 제정하여 중앙의 지령성 계획을 폐지하고 개별 국유 기업이 전적으로 이윤 추구 단위로서 활동하도록 하여 사실상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화의 길을 열어 주었고, 이에 따라 국유 기업 경영층의 권력이 비대해지면서 해당 국유 기업을 사적,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특히 협동조합법이 제정된 1988년부터는 거의 80%의 국유 기업이 산하에 협동조합을 설립했는데 이 협동조합들은 국유 기업의 자산을 경영층이 사적으로 빼돌리는 창구가 되었다. 예를 들면 협동조합이 국유 기업의 자재와 시설, 원료, 인원을 갖고 영업 활동을 하면서도 그 이윤은 전적으로 협동조합에 귀속시키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국유 기업은 껍데기만 남게 되고 협동조합은 국유 기업 경영층의 사적 기업처럼 운영되었다. 이후 주식회사 설립이 자유화되면서 협동조합이 주식회사화되거나 주식회사 산하 기업으로 부속됨으로써 국유 기업 경영층의 횡령과 불법적인 사유화는 합법적 형식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협동조합 형식의 사유화 이외에도, 임대제법이 제정되어 국유 기업을 개인이나 협동조합에 임대하는 임대제를 통해서도 광범한 사유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쏘련이 존재하던 당시의 이러한 사유화는 공공연한 사유화가 아니라 은폐된 사유화였으며 그중 상당수는 불법적인 것으로서 이른바 지하 경제, 그림자 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고르바쵸프의 경제 개혁이 실시되던 시기는 경제 관료들의 부패가 극에 달한 시기였는데 과거 지령성 계획을 통해 경제를 통제하던 시기에는 권력으로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한계가 있었고, 소소한 선물, 뇌물, 써비스 등의 획득에 그쳤지만 고르바쵸프 개혁 이후에는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거액의 뇌물을 받거나 횡령해도 그 재산을 쉽게 유통시키고 합법화시킬 수 있었다.11)

국유 기업 사유화의 세 번째 단계는 1990년 3월의 소유제법 제정 이후부터 1991년 6월 사유화법 제정까지의 시기이다. 소유제법은 다양한 소유제를 인정하면서, 특히 생산 수단이 개인 소유의 대상이 됨을 명시하여 자본가계급이 쏘련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에 따라 소유제법 제정 이후 사유화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국가 기구인 관료들이 권력으로써 사유화를 한다고 하여 국가가 국가를 사유화한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의 사례로는 국기 기관인 부(部)가 통째로 사적 기업인 콘쩨른으로 전환된 것이 있다. 1990년-91년 기간에 중앙의 20개의 부가 폐지되고 그 기초 위에 연합체, 주식회사, 콘쩨른이 설립되었다. 예를 들면 야금 공업부가 폐지되고, 그것이 서방의 지주회사와 같은 지주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지주회사 혹은 콘쩨른은 부의 산하 국유 기업을 사유화 기업으로 전환시키면서 부의 수장이 콘쩨른의 최대 주주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국가 기구 자체가 권력으로써 국가 기구 자체를 사유화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 사유화는 그 영역이 광범해졌는데, 경공업, 지방 공업, 소매 상업, 공공 음식업, 생활 써비스 영역의 국유 기업이 매매, 임대 계약을 통해 해당 노동 집단에 이전되었는데 사실상은 개인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이외에도 주식제를 통한 사유화, 관리자에 의한 사유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화가 전개되었다.12)

국유 기업 사유화의 네 번째 단계는 사유화법이 제정된 1991년 7월 1일부터 쏘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던 1991년 말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광적인 자연 발생적 사유화13)의 시기라고 불리며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전 인민의 재산인 국유 기업들이 경제 관료와 기업 경영층, 그리고 지하 경제의 자본가들에 의해 뜯기고 탈취당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옐찐이 이끄는 러시아 공화국은 연방의 사유화법과 다른 독자적인 사유화법을 제정했는데, 독특한 점은 매 개인에게 7,000루블을 지급하여 사유화되는 기업의 주식을 구입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유화법이 인민의 민심을 얻지 못해 인민을 기만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모든 개인이 사유화 과정을 승인하고 동참한다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7,000루블을 지급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유 재산이 관료와 그림자 경제의 자본가들에게 귀속되어 인민은 무산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인민은 자신의 주식 대부분을 매도했고 그 주식은 기업의 새로운 주인에게 집중되었다.14) 더구나 이 시기는 통화 팽창으로 인플레이션이 급격하게 일어나던 시기15)로서, 인민들이 실제로 얻은 이익은 미미한 것이었고, 대신에 전 인민 소유의 수많은 국유 기업의 자산을 상실하고 무산 프롤레타리아로, 피고용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쏘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옐찐이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추진한 사유화는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은폐된 사유화가 아니라 공개된 사유화로서, 공산당의 해체, 쏘비에트 연방의 해체라는 조건에서 옐찐이 거리낌 없이 국유 기업의 사유화를 진행하고 러시아에 광범한 자본가계급을 창출한 시기였다.

옐찐이 쏘련 해체 후 진행한 국유 기업 사유화는 크게 3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가 증권에 의한 사유화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가 현금에 의한 국유 기업 사유화이며 이로써 국유 기업 사유화는 일단락된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대규모 사유화가 아니라 개별적, 선택적 사유화 단계이다.

그러면 먼저 첫 번째의 증권에 의한 사유화 단계부터 살펴보자. 증권에 의한 대기업의 사유화가 본격 시작되기 전에 옐찐은 우선 소기업을 사유화시켰다. 1992년 1월 1일 고정 자산 100만 루블 이하, 종업원 200인 이하의 기업을 사유화했는데, 그 방식은 i) 공개적인 경매, ii) 임대, iii) 판매의 3가지였다. 소기업의 사유화는 2-3년 내에 완료되었고 1994년 러시아의 소매 유통액 중 85%가 비국유였다.

증권에 의한 대기업의 사유화는 1992년 7월부터 1994년 6월까지 이어졌다. 이 사유화는 모든 공민에게 성별, 나이, 민족의 구분 없이 액면가 1만 루블의 사유화 증권을 발행하여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유화 증권 소지자는 그 증권으로 해당 기업의 주식을 구입하거나 아니면 사유화 증권을 경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었다.16) 당시 이 사유화 증권의 가치는 암시장 시세로 150달러 정도였으며 4개월 치 임금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화 팽창으로 이 가치는 지속적으로 저하되어 처음에는 소형 자동차 1대의 가치였다가 이어서 맥주 1박스의 가치로, 나중에는 보드카 1병의 가치인 5달러 상당으로 축소되었다.17) 즉, 쏘련 인민은 보드카 한 병에 사회주의 인민으로서 향유하던 수많은 전 인민 소유의 국유 기업들을 사적 자본가에 팔아넘기고 피고용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는 대단히 기만적인 과정인데 옐찐이 이러한 과정을 취한 것은 사유화에 정당성의 형식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서, 사유화 과정의 반동성을 은폐하고 사유화에 민주주의의 옷을 입히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유화 증권 대부분은 헐값으로 기업가와 투기꾼들에게 집중되어 이들이 폭리를 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옐찐 하에서 국유 기업 사유화의 제2 단계는 화폐를 통한 사유화였다. 이 단계는 1994년 7월 1일부터 1996년 말까지에 걸친다. 이는 시장 가격에 의한 국유 자산 매각으로서 기업이 점유하는 토지를 포함하는 매각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소수 자본가에 의한 국유 재산 탈취의 적나라한 과정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이 단계에서 저당물이 되었던 기업에 대한 경매가 실시되었는데 경매 절차는 투명성을 상실하여서 내부자 간 거래를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해당 국유 기업에 관련된 관료 혹은 경영층, 사적 자본가들이 헐값으로 폭리를 취하는 과정이었다.18)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유 기업 사유화는 1996년에 기본적으로 완료되었고 사유화된 기업은 GDP의 70%를 점하게 되었다. 이후 사유화의 3단계는 대규모의 사유화가 일단락된 상태에서 개별적, 선택적 사유화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전략적 산업 부문과 기업은 국유 기업으로 유지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유화 과정은 러시아에서 신흥 자본가계급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벼락부자가 된 이들 자본가계급의 출신은 i) 이전의 특권층(노멘끌라뚜라)과 그들의 자녀들, ii) 그림자 경제의 사장들, iii) 부분적인 임차인과 청부생산자들이었다.19) 그런데 자본가계급 중 대자본가들은 대부분 관료 출신들이었다. 즉, 1993년 대기업가의 61%가 관료 출신이었고 39%는 본인이 관료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관료 집안 출신이었다.20) 이러한 사실은 쏘련의 해체라는 역사적 반동의 주역이 바로 쏘련 관료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등장이 당 관료들에 의한 반동에 기초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부정(쓰딸린에 대한 탄핵)을 핵심으로 한다는 사실, 또 흐루쇼프와 브레쥐네프의 전 인민 국가론은 관료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관료주의 이데올로기였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기업가 중 은행 자본과 공업 자본의 융합에 의한 금융 자본 그룹들이 생겨났는데, 그중에서 7대 금융 자본 그룹이 러시아 경제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고, 그중에 4개 그룹의 지배자는 쏘련 당시의 관료 출신이었다.21)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쏘련 해체 이후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의 추이인데, 쏘련 해체 후에 공업과 상업, 은행 등에서는 거침없는 사유화의 과정이 이루어졌지만 농업에서는 집단적 경영 형태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즉, 1999년 당시 사적인 개인 농장은 식량 생산의 7.1%, 축산업에서는 암소 1.9%, 돼지 2.2% 보유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 농업 생산에서는 2.5%의 생산고를 차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22) 이는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의 대부분이 집단적 경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토지를 세분화하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쏘련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대량의 기계에 의한 집단적 생산의 장점을 쉽게 폐기하기 어려웠다는 점 때문이며, 농민들 또한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농업과 농민을 사적 개인농 경영으로 전환하려는 옐찐의 정책은 실패했지만, 2002년 6월 26일 러시아 연방 농업용지 유통법이 제정되어 농업용 토지의 거래가 자유화되어, 여전히 남아 있던 집단적 농업을 해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23)

이러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의 과정은, 전 인민 소유의 국유 기업이 쏘련 당시의 경제 관료들, 기업 경영층, 그리고 그림자 경제의 자본가들에 의해 탈취되고 약탈당하는 과정이었고, 이 과정을 고르바쵸프, 옐찐은 법으로 보장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본가계급의 착취에서 해방되어, 생산 수단 앞의 평등을 이루었던 쏘련의 노동자계급과 인민이 다시 피착취 임금 노동자로, 피고용자로 전락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의 성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국유 기업은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국유는 자본주의 국가의 배타적 소유를 의미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인민, 시민, 국민은 국가의 그러한 배타적 소유를 침해할 수 없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유 기업은 전 인민 소유가 아니라 국가 조직의 소유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는 사회주의 국가 자체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전 인민 소유이다. 즉, 전체 인민이 생산 수단 앞에서 평등을 누리고 그 과실을 향유하는 소유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의 형식을 띠는 전 인민 소유는 소유를 지양하는 소유 형태이다. 즉, 소유권이라는 제도, 개념, 가치가 지양되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적 형태의 소유이다. 그리고 농업에서 생산력이 발전되어 농업의 집단적, 협동조합적 소유가 공업과 같이 전 인민 소유로 발전하면, 상품-화폐 관계가 소멸하면서 소유 자체가 소멸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쏘비에트 연방의 해체, 그리고 그 결과로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의 과정은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중에서 몇 가지 교훈을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서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이다. 즉, 사회주의 혁명 후에 자본-임금 노동의 착취 관계는 가능한 한 즉각적으로 폐지되는 것이지만, 상품-화폐 관계는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의 한계로 인해 즉각적으로 폐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생산력의 한계로 인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모든 생산물이 즉각적으로 상품으로서의 성질을 탈각할 수는 없으며, 그에 따라 화폐 또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쏘련의 역사를 보면 잔존하는 상품-화폐 관계가 자본주의 복고의 가능성을 키우는 요소로 작동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화폐, 돈은 상품의 등가물로서 무엇이든지, 상품이 되는 것을 구매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며, 또 생산력의 한계로 인해 존재하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임금(보수)의 차이,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수입의 차이로 인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화폐는 강력한 작용을 하며, 그로 인해 소유자적 태도, 관습, 사고방식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복고의 가능성을 줄이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좌익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화폐를 즉각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생산력을 급속히 높여서, 특히 농업의 생산력을 급속히 높여서 상품-화폐 관계의 소멸의 조건을 확보하는 노력과 투쟁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생산력 발전에 기초하여 농업의 집단적, 협동조합적 생산관계가 공업과 같이 전 인민 소유로 발전할 때 상품-화폐 관계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며 더불어 자본주의의 복고 가능성 또한 사라질 것이다.

둘째, 쏘련에서의 반혁명,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는 전 인민 소유의 국유 기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유지,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쏘련에서 쓰딸린 탄핵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부정되고 그것이 전 인민 국가로 변형되어 관료주의 체제가 성장하자, 사회주의 경제는 균열되기 시작하였고, 그 관료들은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의식적으로 해체하고 국유 기업을 약탈하여 사적 자본주의적 착취를 부활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또한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핵은 전문적인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의식성과 계획성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는 그러한 의식성과 계획성을 담보하는 조직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가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전위당이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 사상에 기초한 노선을 굳건히 정립하여 국가 기구를 정확히 지도해 간다면,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흔들림 없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쏘련의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쓰딸린 시기 계획 경제의 위력적인 성과, 즉 나라 전체의 생산력의 급속한 성장, 제 부문과 영역의 균형 있는 발전, 노동자 임금의 급속한 증가와 물가의 지속적 하락 등을 향후 21세기의 조건에서 더욱더 높은 수준으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쏘련의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 과정은 역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사실 21세기의 사회주의 건설의 물질적 조건은 쓰딸린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이끌어 낸다면 사회주의 건설, 계획 경제의 발전은 쓰딸린 시기보다 훨씬 용이할 것이다.

셋째,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국가가 존재하는 한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관료들의 관료주의를 극복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레닌은 10월 혁명 후에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면서 관료주의 문제를 평가한 바가 있는데, 관료주의의 극복은 단기간의 정치적 혁명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진단했었다. 즉, 인민 스스로의 행정 참여 능력이 발전하고 사회 전체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관료주의는 서서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쏘련의 역사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가 발전하면서 경제 규모가 거대해지고 또 국가 기구가 팽창하면서 관료층이 비대해지면서, 이들이 사회의 혁명적 발전, 사회주의 건설의 방향을 왜곡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료주의의 대두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확립한 후에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가능한 한 광범하고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해, 관료에 대한 인민의 선출, 소환, 파면권을 광범위하게 실시하고, 특히 쏘비에트 혹은 인민 대표자 대회를 부르주아 의회적인 지역구 중심으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 집단 농장 등 생산 단위를 기준으로 경쟁 선거를 통해 선출하여 국가 기구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사상에 기초한 노선을 정립해 가면서, 매 시기, 매 단계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 전략을 발전시키고 스스로는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유지, 강화하려는 노력을 수행하고 그것을 위한 조건을 확보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건설 전략과 노선의 과학성을 보증하는 것은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쏘련의 역사는 당의 관료주의화를 저지하고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유지, 강화하는 것이 사회주의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당과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유지, 강화하는 것은 일국적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 세계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제국주의 진영에 맞서는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 건설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될 것이다.

노사과연

 

 


 

1)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820.

 

2) 같은 책, p. 843.

 

3) 같은 책, p. 828.

 

4) 같은 책, p. 834.

 

5) 같은 책, p. 838.

 

6) 같은 책, p. 856.

 

7) 같은 책, p. 857.

 

8) 같은 책, p. 926.

 

9) 陆南泉, ≪苏联经济体制改革史论(쏘련경제체제개혁사론)≫, 人民出版社, 2007, p. 688.

 

10) 같은 책, p. 692.

 

11) 黄立茀, ≪苏联社会阶层与苏联剧变研究(쏘련사회계층과 쏘련급변연구)≫,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06, pp. 399-400.

 

12) 같은 책, pp. 522-523.

 

13) 같은 책, p. 524.

 

14) 같은 책, pp. 576-578.

 

15) 陆南泉, 앞의 책, p. 632. 1991년의 소비재 물가 상승률은 101.2%였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은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는데, 1994년에는 인플레이션이 1991년의 83,200배로 증가되어 쏘련 인민의 저축액을 사실상 ‘0’으로 만들었다.

 

16) 같은 책, p. 695.

 

17) 같은 책, p. 711.

 

18) 같은 책, p. 700.

 

19) 같은 책, p. 716.

 

20) 黄立茀, 앞의 책, p. 420.

 

21) 같은 책, p. 417.

 

22) 陆南泉, 앞의 책, p. 720.

 

23) 같은 책, p.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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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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