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다시, 민족 문제의 계급적 본질에 관하여―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채만수 | 소장

 

 

* 이 글은, 8월 15-16일 연구소 영남지역 수련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입니다.

 

 

평생을 민족 해방과 통일을 위해 투쟁ㆍ헌신해 오신 한 노혁명가 동지께서 일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연구소에 보내오셨다. (내가 받은 원문 그대로다.)

 

<2019년 조국통일촉진대회 관련 주장과 반론 글 모음>의 글을 읽고 핵심적으로 강조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는 <나의 단상>을 말씀드리니 참고 했으면 합니다.

 

우선 노사과연 운영위원회의 범민련의 온 민족이 하나 되어 반미자주의 목소리를 내자것이 기만이고 좀 독하게 말하면 범죄입니다라고 말 하는 것을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으며 우리 진보진영 내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새삼 놀랬습니다.

 

90년대에서 범민족대회 할 때 우연한 기회를 갖고 모 강당에 가서 참여 인원이 몇 십 명 되는데 내가 묻기를 지금 한참 범민족대회를 하고 있는데 왜 여기 모인 분들은 참여하지 않고 회의 하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들은 범민족대회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계급혁명만을 추구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한 말이 연상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nl, pd 라고 말하는 pd계통임을 확인했던 지난날을 회상하게 됩니다.

 

나는 지식이 짧아 여러분들이 논한 글을 쓰라면 쓸 수 없는 사람이지만 단 이것은 아닌데 라고는 분명히 평가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몇 가지 점만 제기하려 합니다.

 

첫째 맑스 엥겔스 레-닌 주의에서 제시한 혁명론과 그 방법이 교조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창조적으로 발전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 민족해방론과 계급해방론(일명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있어서 어느 것이 선차적이고 후차적인가를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서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편집국이 좀 더 강조적으로 서술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 조국의 현실(미제가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에서 과연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급해방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둘째 현재 노동자들의 투쟁을 노동조합적인 투쟁단계를 넘어서 혁명투쟁단계라고 보는지요?

셋째 남쪽의 노동계급이 미제를 몰아내지 않고 선차적, 단독적으로 계급혁명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넷째 지금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고 있는지요?

다섯째 주체 혁명론에서 혁명의 성격을 읽어 보았는지요? (이는 노사과연 운영위원회에 질문 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조국의 현실에서 미제를 구축하지 않고 계급혁명론을 논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며 이는 내부를 분열시키고 반미자주화 투쟁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적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우리민족끼리라는 기치 하에 반미자주화 투쟁에 한 사람처럼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투쟁의지를 다지고 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우리 내에 적폐세력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국의 자주 통일에 대한 범민련 남측본부의 투쟁 로선은 지당한 것이며 단 역량의 한계로 범민족 단결에 모든 대중들을 하나로 결속시키지 못한 점을 항상 자성하면서 대중화에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은, 선생에 대한 당연한 예의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들 문제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에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ㆍ민중 운동 내부의 편향과 분열ㆍ대립을 극복하고 한국 사회를 옥죄고 있는 근본적 모순들을 지양하기 위한 투쟁ㆍ운동에 복무해야 할 우리의 의무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만, 제기된 문제와 그 문제를 제기하게 하는 상황의 성격상 격렬한 논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해야 선생에 대한 예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참으로 난감한 과제로 되고 있는데, 표현이나 서술의 격식보다는 내용에 충실한 답변을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답변을 드리려 합니다. (따라서 표현의 형식만을 보면 심히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을 서술이나 표현이 적지 않을 것인데, 모두가 오로지 문제를 명확히 해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미리 말씀드리는바, 량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I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 조국의 현실(미제가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에서 과연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급해방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하고 물으셨을 때의 문제의식, 즉 우리 조국의 현실(미제가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에서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계급해방을 할 수 없다는 관점을 빼놓고는,1) 위에 제기된 문제에 관한 한, 선생께서는 모든 것이 다 그릇된 관점 위에 서 계시다고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 자체에 대해서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도 철저히 잘못 인식하고 있고, 그러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상을 그 자체대로가 아니라 멋대로 파악ㆍ설정하고, 비판이라고 가하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격이지요.

그리하여, 저희를 가리켜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하셨지만, 저의 입장에서는 정말,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우리 진보진영 내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새삼 놀랬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로서는 자본의 지배가 조성하는 이 사회의 지적 황폐가 평생을 민족 문제 해결에 헌신해 오신 노혁명가조차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새삼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누구의 눈에나 빤히 보이는 사실, 빤히 보일 수밖에 없는 사실에서부터 얘기해 봅시다.

작년에 우리 연구소가 제기한 주요한 문제는 우리 민족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라고 강변함으로써 노동자ㆍ민중 운동에서 발생하는 분열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지금 당시의 유인물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만, 거기에서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이 묻고 있었습니다:

 

짐짓 외면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 봅시다.

온 민족이 하나 되어 반미자주의 목소리를 낸다? ― 도대체 가능한 일입니까? 아주 벌거벗은 어투, 무식한 어투로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고개를 들어 여기 광화문 광장을 둘러보십시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광란하고 있는 저 무리들은 우리민족입니까,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늘날 조ㆍ중ㆍ동ㆍ문ㆍ매 … 등등으로 열거되는 극우언론, 그 안의 언론인들, 극우지식인들, 어느 당, 어느 정권이랄 것도 없이, 당장 문재인 정권을 포함해서, 오늘날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세력들, 등등등. 그들은 우리민족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누군가가 무언가 혹여 어떤 정신적 기준을 들이대면서, 그들은 “‘우리민족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심오함을 당할 재간은 없습니다만!) 분명 우리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들이,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은 그만두고, 천지가 개벽한들 반미자주의 목소리를 내겠습니까? 반미자주의 목소리를 내겠습니까?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온 민족이 하나되어 반미자주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조국통일을 촉진시키는 가장 힘 있는 방법이요 지름길입니다.? ― 아무리 투지와 의기ㆍ기상이 넘쳐나도, 이 얼마나 공허한, 아니 허망한 외침입니까?

 

연구소가 문제의 유인물을 낸 후에 종파주의적 동기에서 참으로 악의적으로 좌익적 계급지상주의니, 계급환원론이니 하며2) 언죽번죽 초들고 나선 인간도 있었지만, 악의적이든, 선의적이든, 우리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이의ㆍ비판은 맨 먼저 우리가 제기한 위 문제에 대해서 답하는 것으로부터, 즉 우리 민족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우리의 적시ㆍ판단을 사실에 기초해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까지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무턱대고 민족은 하나고, 온 민족이 하나 되어고, 우민끼(우리민족끼리)(!)입니다!

직설적으로 얘기해서, 저는 도무지 그런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뻔히, 사실상 누구의 눈에나, 하나이기는커녕, 떼를 지어 극한적ㆍ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데, 그리하여 그 엄청난 학살ㆍ법살(法殺)까지 벌어져 왔는데, 그러한 현실, 그러한 역사에 눈 꼭 감고, 귀 꼭 막으면서, 민족은 하나고, 온 민족이 하나 되어고, 우민끼라니요?!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혹시 주문 외우듯 그렇게 외워 대다 보면, 언젠가 하나가 되기라도 할까요?

극히 당연하게도, 문제가 무엇이든, 허위ㆍ환상에 기초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책임 있는 활동가라면, 사실이 아닌 것, 아니 사실과는 정반대의 것을 주문 외우듯 하면서 자신을 기만하고, 자기만족에 빠지고, 자기 최면에 빠지고, 대중을 오도하는 대신에, 극한적인,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인 분열ㆍ대립을 직시하고, 그 원인ㆍ실체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그에 기초해서 문제 해결의 방책ㆍ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극히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조국통일 운동,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히 우리가 진정 조국통일을 촉진ㆍ달성하려면, 우리는, 우리민족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 우리민족은 계급적 이해로 적대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들 반응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땅히 해야 할 대답은 안 하면서 엉뚱한, 참으로 엉뚱한 말들로!

묻건데, 민족은 하나다민족이 하나 되어우민끼 같은 허위의 구호로 계급적 분열과 대립ㆍ적대를 은폐할 때,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렇게 적대적 분열ㆍ대립을 은폐하는 것이 과연 미제 축출에, 조국 통일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분열ㆍ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요? 우리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요?

(우리민족은 하나라는 등의 허위의 주장이 노동자ㆍ민중 운동에 끼치고 있는 부작용 혹은 분열은, 물론 예의 유인물에서 충분히 분석ㆍ논의되진 못했지만, 재론하지는 않겠습니다.)

 

 

II

 

선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첫째 맑스 엥겔스 레-닌 주의에서 제시한 혁명론과 그 방법이 교조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창조적으로 발전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서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편집국이 좀 더 강조적으로 서술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극히 간략하게만 말씀된 것이어서 그 진의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유추하자면, 문제의 맑스 엥겔스 레-닌 주의에서 제시한 혁명론과 그 방법과 관련, 혹 맑스 엥겔스 레-닌 주의에서 제시한 혁명론과 그 방법은 그들의 이론적 경향(과 시대적 제약) 때문에 민족 문제, 즉 민족 해방, 민족 해방 투쟁의 문제가 경시되거나 논외에 있는데, 그러한 혁명론과 그 방법이[원문대로] 교조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창조적으로 발전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 이외의 어떤 다른 말씀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나중에 묻고 계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관련된 질문이라면, 뒤에서 대답드리겠습니다.)

아무튼, 만일 그렇게 맑스-엥엘스-레닌주의에서의 민족 해방(투쟁)과 관련된 문제 제기라면, 우선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 그것은,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맑스 엥겔스 레-닌 주의에서 제시한 혁명론과 그 방법일 뿐이지, 맑스ㆍ엥엘스ㆍ레닌의 그것은 결코 아니라고!

민족 문제에 관한 한 레닌은 비타협적인 민족 자결주의자여서, 그의 생존 중에는 물론, 그의 사후에도 레닌주의를 직접적으로 체현하고 있던 코민테른과 쏘련 등이 식민지ㆍ종속국의 민족 해방 투쟁의 강력한 동맹자ㆍ후원자였고, 그 풍부한 전략ㆍ전술의 지도ㆍ조언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감히 “‘민족은 하나우민끼를 부인해?! 하는 노여움 때문에, 잠시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신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금하기 어렵군요.

레닌은 그렇고, 그러면, 맑스와 엥엘스는?

우선 간단히 다음 구절들을 인용해 봅시다:

 

빠리의 6월 투쟁, 빈의 함락, 1848년 11월 베를린의 비희극(悲喜劇), 폴란드ㆍ이딸리아ㆍ헝가리의 필사적인 노력, 아일랜드의 아사(餓死) ― 이것들이 유럽에서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계급 투쟁을 총괄하는 주요 계기들인바,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혁명적 봉기는, 그 목표가 아무리 계급 투쟁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혁명적 노동자계급이 승리할 때까지는 좌절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모든 사회 개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봉건적 반혁명이 하나의 세계 전쟁에서 무기를 들고 승패를 다툴 때까지는 공상(Utopie)에 머문다는 것을 증명했다.3)

 

유럽의 모든 민족(Nation)의 독립과 통일의 부활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단결도,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이들 국민의 평온하고 분별력 있는 협력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4)

 

이렇게 맑스와 엥엘스에 의해서도 민족의 독립과 통일의 문제는 결코 경시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맑스와 엥엘스의 이 발언들은 현재의 우리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발언들 속에서 어떤 교조적(!) 의의를 발견하고 있는지는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III

 

선생께서는 또한 이렇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 민족해방론과 계급해방론(일명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있어서 어느 것이 선차적이고 후차적인가를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서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편집국이 좀 더 강조적으로 서술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셋째 남쪽의 노동계급이 미제를 몰아내지 않고 선차적, 단독적으로 계급혁명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이는 명백히 어느 것이 선차적이고 후차적인가를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감히 단호히 답변해 드립니다.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그릇된 사고에 기초한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그릇된 질문이라고!

이 질문은, 둘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조건일 수는 있으되, 이 두 문제, 이 두 모순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별개의 문제라는,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그릇된 사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문제, 이 두 모순은 과연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별개의 문제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고, 즉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별개의 문제이며, 선차적ㆍ후차적 문제라는 사고의 만연이야말로 바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노동자ㆍ민중 운동의 발전을 제약ㆍ저지하고 있는, 소위 NL 대 PD, 혹은 자주파 대 평등파라는 양 진영으로의 운동의 분열ㆍ대립ㆍ갈등의,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주요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IV

 

이 두 문제, 두 모순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잠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선생의 관점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선생께서는 문제를 제기하시는 모두(冒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선 노사과연 운영위원회의 범민련의 온 민족이 하나 되어 반미자주의 목소리를 내자것이 기만이고 좀 독하게 말하면 범죄입니다라고 말 하는 것을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으며 우리 진보진영 내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새삼 놀랬습니다.

90년대에서 범민족대회 할 때 우연한 기회를 갖고 모 강당에 가서 참여 인원이 몇 십 명 되는데 내가 묻기를 지금 한참 범민족대회를 하고 있는데 왜 여기 모인 분들은 참여하지 않고 회의 하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들은 범민족대회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계급혁명만을 추구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한 말이 연상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nl, pd 라고 말하는 pd계통임을 확인했던 지난날을 회상하게 됩니다.

 

이는 명백히, 우리 연구소 운영위원회가 발표한 유인물을 읽어 보시고, 이들은 명백히 소위 nl, pd 라고 말하는 pd계통임을 확인했으며, 진보진영 내에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새삼 놀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ㆍ관점은 여러 면에서 명백히 그릇된 것입니다.

우선, 우리 진보진영 내에서도?

저는 이 대한미국 사회에서의 진보진영이라는 규정ㆍ표현을, 그것을 소극적으로 용인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 개념의 모호성과 그 경계의 모호성 때문에, 즉 그러한 모호성 때문에 사실은 결코 진보적이지 않은 자들과 집단들까지가 진보적이라고, 그것도 요란하게, 규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좋아하진 않지만, 일단 그것을 수용한 위에서 말씀드리자면, 소위 nl, pd라든가, pd계통 등의 문제는, 우리 진보진영 내에서도가 아니라, 사실상 우리 진보진영 내에서만의 문제가 아닌가요?

다음에, 우리 진보진영 내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집단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새삼 놀랬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현실적으로는 분명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역시 명백히 오류입니다.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라며, 새삼 놀라시는 소위 pd 계통은 그저 그런 사람과 집단이 …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량으로 강고하게 존재하며 그렇게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소위 pd 계통의 이러한 존재와 재생산은, 소위 nl 계통이 소위 nl 계통으로서 존재하고 재생산되는 한, 소위 그 nl 계통의 대립물로서 계속해서 그렇게 존재하고 재생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두 진영이 이 대한미국 사회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지 않고, 서로 그릇된 편견에 집착하는 한, 이 두 진영은 그렇게 계속 존재하고 재생산되면서 민족 모순ㆍ계급 모순의 해결ㆍ극복을 위한 노동자ㆍ민중 운동의 발전을, 따라서 그들 모순의 해결ㆍ극복을 계속 제약하고 저지할 것입니다. ― 작년에 연구소가 문제의 유인물을 내게 된 근본적인 문제의식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에서 짐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따라서 선생께서 우리 연구소를, 그 운영위원회를, 표현은 넌지시지만 사실은 명확히, 소위 nl, pd 라고 말하는 pd계통이라고, 즉 민족 문제 따위엔 관심조차 없고, 계급혁명만을 추구 하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신 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민족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 분열되어 있고, 그것도 적대적으로 분열되어 극히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에 민족은 하나다민족이 하나 되어우민끼를 되뇌고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기초하는 대신에 선생의 후진적ㆍ비과학적 사고와 편견에 기초한 판단에 불과합니다.

우리 연구소는, 민족 문제 따위엔 관심조차 없고, 계급혁명만을 추구 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이 대한미국에서 그 어느 누구, 어느 집단에 못지않게 민족 문제, 즉 미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주의적 지배의 문제와 통일 문제를 중시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ㆍ극복하기 위해서 사상ㆍ이론적으로 천착하고, 실천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집단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굳이 표현하자면, 소위 NL이면서 소위 PD이고, 소위 PD이면서 소위 NL이지, 서로 분리ㆍ분열되어 대립하고 있는 그 어느 한쪽도 아닌 것입니다. (저 앞에서 제가, 연구소가 문제의 유인물을 낸 후에 종파주의적 동기에서 참으로 악의적으로 좌익적 계급지상주의니, 계급환원론이니 하며 언죽번죽 초들고 나선 인간도 있었지만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그 인간은 우리 연구소가 바로 그러한 성격의 집단임을 오랜 인연을 통해 번연히 알면서도, 번연히 알 수밖에 없으면서도, 해묵은 뜨로쯔끼적 행태를 벗지 못하고, 참으로 사악한 동기에서 그렇게 초들고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구소가 추구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고, 무엇인가는 이후의 논의에서 명확해질 것입니다.

 

 

V

 

저는 이 글의 모두에서 감히, 우리 조국의 현실(미제가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에서 과연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급해방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하고 물었을 때의 문제의식, 즉 우리 조국의 현실(미제가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에서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계급해방을 할 수 없다는 관점을 빼놓고는, 위에 제기된 문제에 관한 한, 선생께서는 모든 것이 다 그릇된 관점 위에 서 계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국의 현실(미제가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에서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계급해방을 할 수 없다는 관점조차, 유감스럽지만, 사실은 대체로만 올바른 것이지, 전체적인 연관 속에서 보면, 그릇된 것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민족해방론과 계급해방론(일명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있어서 어느 것이 선차적이고 후차적인가를 분명하게 핵심적으로 서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든가 셋째 남쪽의 노동계급이 미제를 몰아내지 않고 선차적, 단독적으로 계급혁명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하시면서, 그 두 문제, 두 모순, 두 과제를 선차ㆍ후차의 문제로, 즉, 그 중 어느 것의 해결이 다른 것의 해결의 전제 내지 조건으로 볼지언정, 기본적으로 별개의 문제로 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대한미국에서 그 두 문제, 두 모순, 두 과제는 결코 분리할 수 있는 별개의 문제가 결코 아니며, 따라서 그 해결도 결코 그 어느 것이 선차적이거나 후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미제의 조선 남부의 점령이야 그들의 단독 행동,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덧씌워진 족쇄이지만, 그 점령이 항구적인 지배ㆍ억압ㆍ착취 체제로 고착되고, 고착되어 있는 것은 결코 미제의 일방적인 행위,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덧씌워진 멍에가 결코, 결코 아닙니다. 이 민족 내부에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그들과의 동맹 세력이 강고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배ㆍ억압ㆍ착취 체제의 고착화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그 체제는 결코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 사실, 우리에게 실소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우리의 이러한 관점ㆍ판단이 그릇된 것임을, 사실에 의해서든, 논리적으로든, 입증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어떤 민족, 어떤 국가가 어떤 다른 민족ㆍ다른 국가를, 일시적인 정복ㆍ약탈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배ㆍ억압ㆍ착취하기 위해서는 그 정복자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그 피지배 민족 내부의 동맹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입증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제국주의의 대리지배ㆍ대리통치 체제인 신식민주의 체제에서는 그것은, 짐짓 눈을 감으려 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의 눈에나 확연히 드러나는 것 아닌가요? 예컨대, 오늘날 행여나 미군이 철수할까 봐, 아니 감축이라도 될까 봐 눈에 쌍심지를 켜는 사람들이 선생의 눈에는 안 보인단 말입니까?

그러나 사실은 외세지배의 조건으로서의, 계급적 이해에 따른 이 내부 동맹 세력의 존재는, 신식민지 체제에서는 누구의 눈에나 명확하지만, 제국주의의 직접지배 체제인 구식민지 지배에서도 필수적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통칭 친일파라고 부르는 군상들을, 민족적 양심 운운하며 개인들의 개별적인 문제로 파악하는 대신에, 그들이 어떤 계급적 이해관계로 소위 친일파인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세ㆍ정복자에의 내부 동맹 세력의 존재는 사실은 근ㆍ현대의 제국주의 지배에만 필수적인 게 아닙니다. 그러한 제국주의 체제가 아직 고착화되기 전, 예컨대, 18-19세기 아프리카 흑인 사냥을 돌아보십시오. 바로 아프리카 현지인 사냥꾼들, 주로 현지 지배계급과의 동맹 없이 그 수백만ㆍ수천만의 흑인 사냥과 그들 흑인의 아메리카에서의 노예화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제국주의의 지배는 동시에 그 자체가 계급적 지배ㆍ착취이고, 따라서 민족 모순이란 계급 모순의 하나의 현상 형태, 즉 그 외화 형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 조국의 현실에서 미제를 구축하지 않고 계급혁명론을 논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며 이는 내부를 분열시키고 반미자주화 투쟁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대략 진실이지만,5) 우리 조국의 현실에서 계급혁명을 수행함이 없이 미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앞에서, 우리를 가리켜 맑스 엥겔스 레-닌 주의에서 제시한 혁명론과 그 방법이 교조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창조적으로 발전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신 말씀을 받아, 맑스와 엥엘스의 몇 마디 발언을 인용한 후, 인용된 발언들 속에서 우리가 어떤 교조적(!) 의의를 발견하고 있는지를 나중에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맑스의 발언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으로 아마 충분할 것입니다. 다시 인용하자면, 맑스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빠리의 6월 투쟁, 빈의 함락, 1848년 11월 베를린의 비희극(悲喜劇), 폴란드ㆍ이딸리아ㆍ헝가리의 필사적인 노력, 아일랜드의 아사(餓死) ― 이것들이 유럽에서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계급 투쟁을 총괄하는 주요 계기들인바,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혁명적 봉기는, 그 목표가 아무리 계급 투쟁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혁명적 노동자계급이 승리할 때까지는 좌절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모든 사회 개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봉건적 반혁명이 하나의 세계 전쟁에서 무기를 들고 승패를 다툴 때까지는 공상(Utopie)에 머문다는 것을 증명했다.

 

모든 혁명적 봉기는, … 혁명적 노동자계급이 승리할 때까지는 좌절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모든 사회 개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봉건적 반혁명이 하나의 세계 전쟁에서 무기를 들고 승패를 다툴 때까지는 공상(Utopie)에 머문다는 것! ―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발견한 그 교조적(!) 의의입니다! ― 노동자계급의 승리 없이도(!), 이 민족 내부에 존재하는 (선생 같은 분의 생각에는 결코 존재하지도 않는) 제국주의의 하부 동맹 세력을 박살내지 않고도(!), 미제를 몰아낼 수 있고, 조국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과는 전혀, 전혀 다른 교조적(!) 의의 말입니다!6)

이러한 교조적(!) 의의를 저와 우리 노동사회과학연구소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실은 우리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조직되기도 전부터 발견ㆍ견지해 왔고, 선전해 왔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 우리 운동 내부에서는, 참으로 지조ㆍ절개도 굳건하게 소위 nl 계통, 소위 pd 계통이 굳건하게 유지ㆍ재생산되고 있어서, 저도 연구소도 이 주제에 거듭거듭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기회에, 이런저런 표현으로 발표했던 글만을 모아서 묶어도, 족히 수백 쪽이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아주 오래전에 쓴 글들에서 몇 구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7) (선생께서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오해하시고 계신가도 보여 드려야 하기 때문에, 인용은 예사 글쓰기에서는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울 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V-1

 

제국주의의 지배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두 가지의 결정적인 형태변화를 겪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지배ㆍ경영 형태의 신식민지적 형태로의 전환이다. 구 식민지 지역에서, 많은 경우 쏘련의 지원을 받아, 치열하게 전개된 민족해방투쟁의 결과, 제국주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직접적인 식민지 경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그런데 이 신식민지적 지배는 당연히 제국주의 종주국의 독점자본과 그 현지 대리인으로서의 신식민지의 지배계급의 강한 유착, 신식민지 지배계급의 제국주의 종주국에 대한 강한 종속적 동맹을 전제로 하고 있다.8) 그리고 그 지배는, 어떤 형태의 제국주의적 지배에도 저항하는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억압 위에서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 새로운 독립국가에서는 제국주의를 대리하는 지배계급, 신흥 자본가계급과 노동자ㆍ민중 사이의 계급투쟁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그 정치체제는, 부르주아 정치학자들이 제3세계의 권위주의 정치체제라고 규정했던 것과 같은 억압적ㆍ파쇼적인 것으로 된다. 그것은 당연히 식민지 종주국의 지시와 정치적ㆍ경제적ㆍ군사적 지원에 의한 것으로서, 상황에 따라서는 내전이나 수만에서 수십만ㆍ수백만의 참혹한 대량 학살로 발전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지배계급이 노동자ㆍ민중의 저항과 반란을 제압하지 못할 경우에는 물론 제국주의 종주국의 군대가 직접 나서고, 그 현지 주둔이 그 지배를 보증하는 장치가 된다.

신식민지 지배는 이렇게 제국주의의 현지 대리인으로서의 그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와의 유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지난해 미국이 이라크에 침략한 후 그 지배를 안정화시키지 못하고 수렁에 빠져 있는 이유도, 이라크에는, 주민 가운데 아랍 민중의 다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그만두고라도, 그들의 어떤 신망을 받는 믿을 만한 미국의 동맹자가 없기9) 때문이다.

신식민지적 지배는, … 이렇게 현지의 지배계급에 의한 대리통치이다. 그런데 민족문제 혹은 자주의 문제를 민족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지배와 대립을 민족에 대해서는 외재적(外在的)인 것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민족 내부의 제국주의 동맹자를 보지 못하거나 간과하고, 투쟁의 대상을, 즉 그 현지 지배계급과 지배도구를, 자주롭게 세워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반해서, 다른 한편에서, 계급 대립을 단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앙상한 추상 속에서만 바라보게 되면, 그 계급관계를 강제하고, 그 지배ㆍ착취를 가혹하게 만들고 있는 제국주의, 민족문제를 간과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노동운동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편향이 바로 그러한 것들일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갖은 모략과 함께 불량국가, 깡패국가, 테러 지원국가, 악의 축 등으로 규정하면서 적대하고, 침략하고, 침략과 전쟁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국가들이란, … 미국의 그러한 신식민지 지배를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물론 그 사회체제는 다를 수 있어서 어떤 나라는 초급 사회주의 체제이거나 그것을 지향하고 있고, 어떤 나라들, 특히 중동의 몇몇 나라들은 민족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어떠한 형태의 식민지적 지배와 착취도 거부하면서 자주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가, 특히 미국이 여러 이유를 날조하면서 그들 국가를 봉쇄하고, 공격ㆍ침략하는 것은 그들 국가를 자신의 (신)식민지로 삼아서 그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것은 최근의 이라크 침략에서 드러난 대로이다. …

우리가 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그리하여 우선 자주를 지향하는 그들 민족ㆍ인민과 연대하는 것이고, 그러한 과정과 투쟁을 통해서 제국주의적, 그리고 계급적 지배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확대ㆍ심화하고, 그에 대한 투쟁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해방을 향해서 진군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반미ㆍ반제ㆍ반전을 노동자ㆍ민중운동의 주요 부분으로 포용함으로써 노동자ㆍ민중운동의 정치적 통일과 비약을 획득해 내자.10)

 

 

V-2

 

여기서 분단과 전쟁이, 그리고 나아가서 미국과의 민족모순이 계급모순의 외화형태임을 확인하는 주요한 목적이 이른바 계급 환원론을 공박하려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주요 목적의 하나는, 민족모순은 사실은 계급모순의 외화형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자체에 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등 민족모순은 현 시기 계급모순의 주요한 외화형태의 하나이며 그것은, 그것의 해결 없이는, 혹은 그것과의 대결 없이는 계급모순의 직접적 형태인 노-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 말하자면 노동자ㆍ민중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NLPD 양측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라는 이 양대 모순의 통일적ㆍ일원론적 관계를 파악하여 그것을 자신들의 이론과 전술ㆍ전략에 반영하지 않는 한, 양자 간의 소모적 분열과 대립은, 따라서 오류는 지양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주요 목적은, 지난해 이른바 6ㆍ15 선언 이후에 더욱 심화되고 있는 NL 측의 일반적 편향과 오류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른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통일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PD 측은, 일반적으로 민족모순 및 그와 대결해야 하는 실천적 요구의 의의를 경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북(北)을 포함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적ㆍ정치적 의의를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NL 측은, 자신들이 대결하고 있는 민족문제, 민족모순의 기초에 계급모순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그 민족모순이 계급모순, 즉 계급적 적대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 민족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편향ㆍ오류를 범해오고 있다.

그리고 6ㆍ15 선언 이후 그러한 편향과 오류가 더욱 심화돼가고 있는데,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6ㆍ15 선언 속의 이른바 민족 대단결의 원칙과 관련해서다.11)

민족 대단결! ― 일견 거부하기 어려운 명제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와 역사는 무엇에 의해서 추동되는가, 혹은, … 지금 민족 대단결 그것을 말하게 하는 분단과 적대는 무엇에 의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 명제가 전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며, 자칫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함정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6ㆍ15 선언(7ㆍ4 공동선언도 물론)과 이른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은 분단과 적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계급, 계급적 분열, 계급적 적대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은, 물론 바로 그 침묵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통해서이지만, 분단과 적대의 기초에 있는 계급적 분열과 적대를 은폐하고, 그 문제의식조차 기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론 6ㆍ15 선언이나 7ㆍ4 공동선언,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남북 합의로서의 민족 대단결의 원칙 등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들은 남ㆍ북 간의 긴장과 적대를 완화시키고, 따라서 남과 북이 외부로부터의 과도한 압력으로부터 다소라도 자유로워져서 각자의 사회운동 법칙에 따라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그것은 긍정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선언의 한계를 보지 못한다면, 심각한 정치적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NL 측의 상당수 사람들이,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적인 권력에 불과한 김대중 정권에 기생ㆍ협력하고,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남북 화해정책에서 변신의 구실을 찾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남ㆍ북 간 공동선언의 한계는 그 선언의 성격상 당연한 것이다. 그 선언이란 다름 아니라 전적으로 계급적 성격과 지향을 달리하는 두 정치집단의 공동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선언에는, 독점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다면, 노동자ㆍ민중계급의 정치적 요구도 담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언 그것과 그 안의 이른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이 지상의 것인 양하는 인식과 그에 기초한 실천이 일부에 강하게 존재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계급적 관점을 견지한 주체적인 태도와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12)

 

 

V-3

 

…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 같다는 기대가 일부 대중에게 주는 흥분은 …

{2000년} 4월 21일자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지상의} 강정구 교수의 남북정상회담, 눈앞 이해보다 통일터전 닦아야라는 논설 역시 그러한 기대와 흥분을 반영하고 있는데, 더구나 이 글은 이번의 합의를 자주적 합의라고 규정하면서 1994년 그것 등과 대비시킴으로써 우리 근대사와 분단문제에 대한, 따라서 정상회담의 의의와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드러내고 유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분단은 외세에 의해서 강제되었으며, 남과 북이 아무리 협력하더라도 … 외세의 위력 때문에 통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는데, 이번 합의는 (남쪽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나름대로의 포용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목적의식적 정책의 성과물자주적 합의로서 앞으로 통일문제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남북이 앞장서서 풀어나가는 초석을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의도했든 아니든, 역사적 사실과 분단ㆍ통일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고, 분단을 초래하고 거기서 단물을 빨아온, 강 교수 식의 민족주의적 용어로 하자면, 민족반역자들에게 부당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그것도 이중으로!

분단은 단지 외세에 의해서 강제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분단은 명백히 국내적ㆍ국제적 계급투쟁의 결과였고, 외세로 불리는 미ㆍ쏘 간의 대립이란 다름 아니라 노ㆍ자 간 계급투쟁의 국제적 전선이었을 뿐이다. 또한 분단은 미ㆍ쏘 냉전만이 아니라 동시에 민중에 대한 파쇼적 억압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남북문제는 주요하게 국내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햇볕정책이나 이번의 합의도 결코 자주적이거나 주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철저히 페리 프로세스로 알려진,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조는 인용하면서.]

결국 분단문제의 본질은, 분단의 동기ㆍ발단에서 그 유지나 통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계급문제이다. 제국주의적 억압과 미ㆍ쏘 대립이 그렇듯이, 분단이란 계급적 대립의 외화형태인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몰계급적 민족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으로서, 그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주관과 무관하게 많은 부분에서 결국 반민중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분단 및 통일 문제를 민족문제나 국제문제로서만 보는 피상적이고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이 팽배해 있고, 강 교수의 글 역시 그것을 극대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 합의된 남북 정상회담은 명백히 이중의 의의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남북 간에 냉전적 적대를 청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평화적 통일로 나아갈 가능성을 여는 긍정적 측면이다. 그러나 노동자ㆍ민중이 국가보안법의 철폐나 군축, 정치적 자유의 확대와 같은 민중적 요구를 내걸고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대신에, 강 교수가 당부하듯, 김대중 대통령은 … 민족의 대통령으로, 김정일은 … 민족의 총비서로 승화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요구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지원하기만 한다면, 분명 이러한 가능성조차 열리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대통령이나 총비서는 국가나 당의 기관일 뿐이지, 민족의 그것일 수 없다.)

… 부르주아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 운운은 결코 빈소리가 아니며, 남북 정상회담과 독점자본에 의한 남북 경협 등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독점자본의 새로운 형태의 공격이자 위협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실제로, 계급적 시각의 진지한 경계와 투쟁이 없다면, 몰계급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운동이 정세를 철저히 주도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거침없이 심화ㆍ관철되는 등, 노동자ㆍ민중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질 것임에 틀림없다. 노동자ㆍ민중운동 조직의 근본적 재정비를 포함한 철저한 대응작업이 시급히 요청되는 때이다.

노동자ㆍ민중적 통일만이 선이다!13)

 

 

VI

 

선생께서는 아주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이도 묻고 계십니다:

 

넷째 지금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고 있는지요?

 

이 질문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히, (지금)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하는 것은 틀렸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제가 아주 흥미롭게도라고 말씀드린 것도 이 질문에서 바로 그러한 의미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답은, 감히, 그리고 필시 선생의 예상에 부합해서, 그렇습니다!입니다. 그것도, 그것도 단호히! 대단히 단호히!

설마, 자본가계급이 어느 날 노동자계급에게 패배했다고 해서 그들이 사회의 통합, 착취와 억압의 철폐에 고분고분 응하고, 협력하리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과도기적 독재 없이 어떻게 계급과 착취ㆍ억압 없는 고도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설마,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부르주아) 독재와 같은 독재이지 않은가 하는 유치한 반론이야 하시지 않겠지만, 이 대한미국 사회가 원체 지적으로 천박한 사회여서 독재라는 말만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자면, 그 양자 사이에는 가히 천양지차보다도 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르주아 독재가 착취 관계를 유지ㆍ확대하기 위한, 소수 착취자들에 의한 절대 다수의 노동자ㆍ인민에 대한 독재임에 반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착취 관계를 폐절하기 위한, 절대 다수의 노동자ㆍ인민에 의한 소수 착취자들에 대한 독재, 따라서 과도기적 독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고 선생께서는 또한 이런 질문도 하고 계십니다.

 

다섯째 주체 혁명론에서 혁명의 성격을 읽어 보았는지요?

 

정말 놀랍습니다. 이런 기회, 이런 정황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이런 질문은 정보ㆍ수사 기관의 수사관들이나 하는 것 아닌가요?!

 

 

VII

 

이제 대략 정리하자면, 분명한 것은 우리 조국의 현실에서 미제를 구축하지 않고(도) 계급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그 성공 없이도 환상적인 민족대단결을 통해 미제를 축출하고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말장난에 불과하며 이는 내부를 분열시키고 반미자주화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투쟁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운동에 책임감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모든 선입과 편견을 초월해서 과학적 기치 하에 반미자주화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투쟁에 한 사람처럼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고 투쟁의지를 다지고 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우리 내에 적폐세력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국의 자주 통일에 대한 범민련 남측본부의 투쟁 로선은, 민족은 하나라는 주관적 환상과 아집이 아니라, 과학적 관점에 따라 수정되어야 지당한 것이며, 단순히 역량의 한계로 범민족 단결에 모든 대중들을 하나로 결속시키지 못한 점을 항상 자성하고 있는 것으로 넘어갈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과학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한 그 역량의 한계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제를 축출하고 조국 통일을 이루겠다는 그 충정과 열정은 현재의 조건에서는 그 주관적 의도와는 정 반대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우리 연구소가 얼마나 민족문제, 민족모순, 조국의 통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계급혁명만을 추구 하는 사람들인지를 보여 드리기 위해서, 오래전에 제가 발표했던 글 하나를 부록처럼 여기에 게재하는 것으로, 제기하신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하겠습니다.14)

 

반전ㆍ반미ㆍ반제 투쟁에 떨쳐나서자

 

신자유주의는 지금 드디어 죽음의 전쟁으로 우리 머리 위에 어른거리고 있다.

미국 주도 제국주의 연합의 이라크 전면 공격은 초읽기에 들어가 있고, 워싱턴의 전쟁광들은 지금, 두 개의 전쟁이니, North Korea에 대한 핵 선제공격 가능이니 하면서 조선(이북) 침공의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본 역시, 동해상에 이지스함을 배치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제국주의의 약탈ㆍ정복 전쟁의 향연에 숟가락을 들고 덤비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국 등의 이라크 침공 명분은 이라크가 UN 결의를 위반하여대량살상무기를 개발ㆍ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장기간의 유엔무기사찰단의 조사와 보고에서도 명백한 것처럼, 미국의 일방적인 날조ㆍ주장 이외에는 어떤 증거도 없다.

미국과 친미 사대 언론은 조선이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여 핵 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에 제재ㆍ응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여 조선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핵 선제공격 운운으로 그 생존을 위협해온 것은 미국이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북의 핵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전력(戰力)과 자위 차원에서라고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핵무기나 생ㆍ화학무기 등 이른바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확산을 반대한다.

하지만, 도대체 미국이나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슨 논리와 권한으로 그것들을 문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이야말로 사실 핵무기나 생ㆍ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 최대 생산ㆍ보유국이자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국가 아닌가? 50년 전 전쟁에서는, 무차별 융단폭격으로 North Korea를 석기시대로 되돌렸다며, 악마의 얼굴로 의기양양하던 바로 그 나라 아니던가? 1980년대 초 이란의 반제국주의 회교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이라크에 생ㆍ화학무기 제조용 물질을 공급한 것도 바로 미국 자신 아닌가? 그리고 영국은 민중의 해방투쟁을 억압하기 위해서 1925년에 이라크 북부 쿠르드 도시 술라이마니야(Sulaimaniya)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공중살포한 국가가 아니던가?

미국과 그 동맹국 독점자본에 의한 세계 재분할을 위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는 국가와 그 정권을 정복ㆍ전복시키기 위한 전쟁을 저지해야 한다.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은 남북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 전쟁을 예방하겠다고 다짐하고 있고,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노력을 지지한다.

하지만, 미국이 종용하는 대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고, 또 이라크 파병을 예정하고 있는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이 얼마나 미국의 전쟁 의지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인지? 전쟁은 사실상 전적으로 미국 정부에 의해 결정될 터인데, 노무현 당선자의 말대로, 전쟁이 나면 한국의 대통령은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조차 없다.

사실, 미국 등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을 저지할 수 있는 길은 노동자ㆍ민중의 강력한 반전ㆍ반미ㆍ반제 투쟁밖에 없다. 전세계 노동자ㆍ민중과의 광범한 반전ㆍ반미ㆍ반제 연대투쟁밖에 없다. 노동운동은 시급히 반전ㆍ반미ㆍ반제국주의 투쟁전선의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현 정세의 요구이다.

혹시 반전ㆍ반미ㆍ반제 투쟁이 민족주의적NL적이라며 나서지 않는 노동운동의 활동가가 있다면, 그는, 우리의 민족문제민족분단이 다름 아니라 계급적 대립ㆍ투쟁의 다른 표현임을 모르는 것으로서,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으로 달려간 수많은 몰계급적 민족주의자들에 못지않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전쟁을 막지 못하면, 노동자ㆍ민중의 생존권도 없다.15)

노사과연

 

 


 

1) 그렇더라도,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민족 문제의 해결이 ‘계급 해방’에 앞서 ‘우선적ㆍ선차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거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2) “‘좌익적 계급지상주의’니 ‘계급환원론’”이니 하는 모략, 용어는 본래, “사회적 제 사상(事象)의 상호 연관과 역사 발전에서의 계급 혹은 경제의 중심성을 부인하고 사적 유물론에 적대하는 (소)부르주아 정치ㆍ사회학자들이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다원론을 합리화하는 한 수단”(≪피억압의 정치학≫(상), 노사과연, 2008, p. 99.)입니다.

 

3) K. 맑스, “임금 노동과 자본”, MEW, Bd. 6, SS. 397-398.

 

4) F. 엥엘스, “이딸리아의 독자들에게. ≪공산단 선언≫ 이딸리아어 판(1893) 서문”, MEW, Bd. 22, S. 366.

 

5) “대략 진실”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정확하게는 “우리 조국의 현실에서 미제를 구축하지 않고도 계급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 그런데 사실은 맑스와 엥엘스는, 계급 문제와 민족 문제의 상호 관계에 관해서, 이미 1848년에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는 것도 상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 개인에 의한 다른 개인의 착취가 폐지됨에 따라서, 한 민족(Nation)에 의한 다른 민족의 착취도 폐지된다. 민족(Nation) 내부의 계급 대립이 없어지면, 민족들 상호의 적대적 상태도 없어진다.” (≪공산당 선언≫, MEW, Bd. 4, S. 479.) 인용문 중에 “민족”이라고 번역한 곳들은 대개는 “국민”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을 ‘민족’으로 바꿔치기하여 왜곡했다”며 목청을 높이며 나서고자 할 사람들을 위하여 원어 “Nation”을 병기합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Nation”은 또한 “국가”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덧붙여 말하자면, “민족”ㆍ“민족” 하고 외치시는 분들은 자신들이 사실은 “국민”ㆍ“국민” 하고, 혹은 “국가”ㆍ“국가” 하고 외치고 있다는 사실을, 즉 자신들이, 민족주의자일 뿐 아니라, 국민주의자가주의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사실도 자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7) 본래의 발표 지면을 찾는 게 번거로워, 재게재했던 ≪피억압의 정치학≫(노사과연, 2008)에서 인용합니다.

 

8) [인용하면서 추가한 주] 지난해에 범민련의 문제 제기에 답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히 했음을 여기에 다시 밝힌다: “무엇보다도 신식민지주의적 지배의 형태 혹은 그 특징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토착 자본가계급에 의한 대리 지배이다. / 그리고 이 대리 지배는 물론, 범민련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미국은 신자유주의와 대북 적대와 패권 지배 유지를 위한 무소불위의 전가의 보도인 한미 동맹을 내세우고, 주한미군과 경제 종속과 정치 개입을 통해 이남은 미국의 승인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예속 상태”의 그것이다. / 그런데, 범민련 등, “민족대단결”을 주장하는 동지들이 잊고 있는, 혹은 경시하고 있는 중요한 점은, 그 “예속 상태”의 대리 지배가 결코 미제에 의해서 저들 대리 지배자들에게 강제된 대리 지배가 아니라는 점, 그것은, 강제되기는커녕, 자발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ㆍ적극적이며 필사적인 예속동맹적 대리 지배라는 점이다! ― 이것이야말로 핵심적으로 중요한 점이다!”

 

9) Gilbert Achcar, “U.S. Imperial Strategy in the Middle East”, Monthly Review, Vol. 55, No. 9, Feb. 2004, p. 32.

 

10) 채만수, “반미ㆍ반전과 노동자ㆍ민중운동”, ≪피억압의 정치학≫(상), pp. 91-95.

 

11) 이는, 주지하듯이, 1972년의 “7ㆍ4 남북 공동선언”에서의 원칙들을 확인한 것이다.

 

12) 채만수, “분단, 전쟁 그리고 ‘6ㆍ15 공동선언’”, 앞의 책, pp. 100-103.

 

13) 채만수, “남북 정상회담의 겉과 속”, 같은 책, pp. 105-107.

 

14) 참고로, 지난 8월 13일에 ≪한겨레≫의 박찬수 선임논설위원은 “진보정부에서 국방비가 더 늘어나는 까닭”이라는 칼럼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안보에선 보수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 심리는 여전히 진보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하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도,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도,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도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비는 더 늘었다’고 자랑한다.” ― 그런데, 그들의 이른바 “6ㆍ15 선언”이나 “4ㆍ27 선언” 등에 소위 “nl 계통”이 열광하고 있기도 한 이른바 ‘진보정부’에서는 도대체 왜 그런 강박 관념이 생기는 것이며, 도대체 왜 소위 국방비(―누구에 대한 누구의 국방?―)를 늘리고 그걸 자랑하는 걸까요? 바로 “민족은 하나”이기 때문이고, 그 말과 이율배반적이게도 “민족이 하나 되기” 위해서고, “우민끼”를 위해서!!!???

 

15) 채만수, 앞의 책, pp. 133-135.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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