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배반당한 사회주의: 쏘련 붕괴의 배후(23)

 

로저 키란(Roger Keeran)ㆍ토마스 케니(Thomas Kenny)

번역: 신재길(교육위원장)

 

 

[차례]

서문

1. 서론

2. 쏘련 정치에서의 두 가지 경향

3. 제2경제

4. 약속과 불길한 예감, 1985-86

5. 전환점, 1987-88

6. 위기와 붕괴, 1989-91

7. 결론과 영향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

               ㆍㆍㆍ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끝 맺음말 ― 쏘련 붕괴의 설명들에 대한 비판(2)

 

다섯 번째 이론은 쏘련이 민주주의의 부족과 과도하게 중앙 집권화된 행정 체계 때문에 붕괴했다는 주장이다. 쏘비에트 붕괴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사회주의 결함 이론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사회주의 결함 이론이 모든 사회주의 체제가 파멸할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민주주의 부족 이론가들은 쏘비에트 사회주의만이 파멸할 운명이라고 믿는다. 민주주의 부족 이론가들에 의하면 민주 제도의 부족과 경제의 과도한 집중화는 쓰딸린이나 쓰딸린 및 레닌에게서 유래한다. 이러한 견해는 사민주의 좌파와 유럽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지지되고 있다. 또한 역사학자 스티븐 F. 코헨과 쏘비에트 작가 로이 메드베제프, 그리고 몇몇 오늘날의 공산당들도 이런 견해에 영향을 받고 있다.1)

이러한 설명은 얄팍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쏘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한 어떠한 방어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쏘비에트 붕괴를 민주주의의 부족이나 과도한 중앙 집권화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심리적 또는 정치적 거리 두기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사회주의 이상은 쏘련에서 일어난 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말한다.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주의 국가의 실제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이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쏘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망쳐버렸지만, 우리는 다르고 더 현명하다. 그들은 너무나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이고 과도하게 중앙 집권화되었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다 알고 그들의 실수로부터 배웠다.

이러한 견해가 유인물, 시위, 강연, 책 선전 혹은 언론 인터뷰를 그 다음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설명을 한다는 점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누군가 이 고매한 문구들을 실제 사건에 적용하려고 하자마자, 그 설명력은 사라지고 만다. 실증이나 논박을 빠져나가기 위한 정확성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쏘비에트 연방이 민주주의의 부족과 과도한 중앙 집권화 때문에 붕괴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의미한다. 쏘련의 붕괴가 스웨덴 같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형태와 실천(즉, 자유민주주의와 혼합 경제)이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지금까지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민주주의와 혼합 경제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 모두 역사적 설명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어떤 이상향에 부합하는가 아니면 부합하지 않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역사를 설명하려고 하는 이상주의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이라면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맑스주의자이건 아니건 간에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설명이 사실의 구체적 내용과 역사적 모순, 사건의 내적 논리에 충실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역사 외적 기준으로 역사를 재단하여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쏘련이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따르지 않아 붕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분명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고르바쵸프가 이들과 같은 이상을 공유했고, 쏘련을 혼합 경제의 자유민주주의로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정치적 경제적 붕괴로 이어졌다. 이것은 어떤 민주주의 부족 이론가들도 설명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쏘비에트의 붕괴가 새로운 종류의 사회민주주의와 혼합 경제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또한 문제가 있다. 먼저 이 관점에 대한 양보가 필요하다. 가장 엄밀한 사적 유물론자조차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의 이상을 향해 발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이상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각자의 능력에 따른 [생산] 각자의 필요에 따른 [소비]라는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배급제는 불필요하고 임노동 착취와 사적 생산 및 시장의 무정부 상태를 공유 및 계획에 의한 의식적 통제로 대체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풍요로운 사회, 계급, 상품 생산, 국가가 사라지고 더불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도 도시와 농촌의 구분도 사라진 사회이다. 이와 같이 맑스-레닌주의자들도 사회주의의 발전을 이끌고 평가할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 접근하지 못한 것이 사회주의 사회를 붕괴시킨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부족 이론가들의 말이며, 그들의 이상주의적 역사 설명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민주주의 부족 이론가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의미와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였고 자본주의도 자유주의도 그것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19세기의 후반부 이전까지, 민주주의는 하층계급이나 억압받는 사람들이 통치하는 것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미국의 건국 인사들까지 거의 모든 주요 정치사상가들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특히 자유주의는 선택과 경쟁을 중시했다. 정치 영역에서는 정당 간의, 시장에서는 상품 간의 선택과 경쟁에 가치를 두었다. 민주주의는 미국과 다른 자유공화국들에 점차 들어왔고, 이제는 하층계급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선거에 하층계급이 참여하는 것으로 들어왔다. 참정권은 처음으로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그런 다음 이전의 노예들, 여성, 젊은 층으로 확대되었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더 강했다. 자유주의는 점진적으로 단지 하나의 가치로서만 민주주의를 주장한 반면,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하층계급에 의한 지배로서의 그 전통적 의미를 받아들였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세우는 것, 즉 민주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2)라고 말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우월성의] 선택을 숭배했지만,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평등에 가치를 두었다. 평등은 자본가계급의 우월성, 지배, 착취를 폐지한다는 의미이다. 자유주의가 민주적 형식을 흡수한 만큼, 사회주의는 민주적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레닌은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 조직은 자연 발생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따라서 전위당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위당의 지배는 노동자ㆍ농민 스스로의 지배와 같은 것은 아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회주의는 노동자ㆍ농민의 참여와 지배를 강화하는 길로 발전해 갔다. 공산당 입당을 확대하고, 쏘비에트, 노동조합, 그리고 여타 대중 조직을 발전시켰다.3)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쏘련은 대중이 참여하도록 설계된 다양한 정치 제도와 수단들을 발전시켜 왔다. 이후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쏘비에트의 혁신들을 채택하고 적용했다. 쏘비에트가 실천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신문을 새로운 소식뿐 아니라 고충 처리(ombudsmen) 용도로 사용하는 것, 노동조합에 노동자의 권리와 생산 규범에 대한 권한 및 사회 기금의 처분권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쏘비에트, 생산 위원회, 지역 위원회, 생활단지 관리 위원회와 기타 당 및 정부 기관들을 창설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많은 대중 단체들이 2차 세계 대전을 둘러싼 고난의 시기에는 위축되었지만, 그것들은 1950년대에 부활했고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브레쥐네프 하에서도 대중의 정부 참여는 많은 활력을 보여 주었다. 쏘비에트가 2억 6천만 명의 인구를 가졌던 1978년에, 쏘련 작가 그룹은 쏘련의 정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공했다. 1천 6백 50만 명의 공산당원, 1억 2천 1백만의 노조원, 거의 3천 8백만의 청년 공산주의자들, 2백만 명 이상의 쏘비에트 대표자들, 3천 5백만 명의 쏘비에트 인민 대표단, 9백 5십만 명의 인민이 통제하는 기관의 회원, 5백 5십만 명의 산업기업 생산회의 회원 등이다.4) 물론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쏘비에트에 참여하는 것이 대중이 지배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일종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노력을 보여 준다.

하지만 쏘비에트 민주주의는 일부 영역에서 발전하고 있었던 반면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발생했다. 제2 경제의 몇몇 부유한 수혜자들의 성장뿐 아니라,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특히 당 상점과 특권은 사회주의 평등을 헛되게 만들었다. 당의 주된 권한은 잘해 봐야 쏘비에트 자문 기구를 만드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 고무도장[무조건적으로 인가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제2 경제로 인해 당과 정부의 일부는 부패했다. 요점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부족이 쏘비에트 사회주의를 무너뜨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실제 상황의 복잡성을 알지 못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침략이나, 경제 위기, 대중적 불만에도 위기를 격지 않았던 사회가 붕괴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설이다. 이제 여기에 또 다른 역설이 추가되어야 한다. 수백만 명이 참여한 정치 단체들에도 불구하고 붕괴했다는 것이다.5)

중앙 집권화가 붕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발상은 민주주의 부족 이론만큼이나 문제가 많다. 쏘련은 (비국유 기업의 몇몇 요소를 가진) 국유 기업들과 (제한된 시장을 가진) 중앙 집권화된 국가 계획을 중심으로 경제를 조직하려고 시도한 역사상 첫 번째 나라였다. 계획 경제의 강력한 중앙 정부만이 사회주의 목표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재산을 사회화하고, 내부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혁명을 보호하고, 신속한 전기화와 산업화를 달성하고, 모두를 위한 교육, 의료 및 주택을 향상시키고, 국가에서 가장 낙후되고 억압받은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한 청사진도 없었고, 이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쏘련의 전체 역사는 국유 재산과 중앙 계획의 맥락하에서 다양한 종류의 계획 메커니즘, 가격 차이, 임금, 투자 정책 그리고 중앙 집권화와 분권화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과 관계가 있었다. 쏘비에트가 중앙 계획과 관련된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직면했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다. 그들은 중앙 집권적인 계획 경제의 맥락 안에서 분권화된 의사 결정을 위한 적절한 역할을 찾기 위해 거듭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가 단순히 중앙 집권화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문제가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덧붙이자면 이는 고르바쵸프가 계획 경제를 허물고 사기업에 문호를 개방했을 때 도달한 지점이다. 다시 말해, 중앙 집중화에 여러 문제가 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중앙 집중화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 부족 이론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비장의 카드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쏘련이 노동자계급의 의지와 이익을 진정으로 나타낼 중요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가졌었더라면, 그리고 공산당이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선봉에 섰었더라면, 공산당을 포함한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전복, 사회주의의 폐지, 그리고 자본주의로의 회귀에 저항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노동자계급뿐 아니라, 공산당원들도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쏘비에트 민주주의에는 어떤 점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쏘비에트 붕괴의 실제 역사는 이러한 논리의 망을 벗어나 있다. 우리가 6장에서 본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저항은 있었다. 이 저항이 사회주의의 해체를 막을 만큼 크지 않은 이유는 물론 큰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부족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이를 사실상 축소한다. 발전된 산업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굴복했다. 반면에 극소수는 공동의 부를 자신들의 사유 재산으로 바꾸고, 나머지 사람들을 곤궁하게 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화된 사회를 해체했다.6) 명백히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에 대해 사람들이 묵인하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다. 쏘비에트 사회주의도 관성을 초월할 수 있는 시민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도적 무지와 사무적 태도로 대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망스럽지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만큼이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폐단이기도 하다.

더욱이 쏘련의 소극성에 대한 책임을 사회주의 정치 제도에서만 찾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전통적인 쏘비에트 정치 형태들(신문, 쏘비에트, 공산당 그 자체)의 상당수가 1985년 이후 고르바쵸프에 의해 손상되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쏘비에트 인민들은 재산의 사유화, 가격 통제의 제거, 쏘련의 해체,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전통적 방식이 사라지고 있는 것에 반대했지만, 인민 대표자 회의와 같은 새로운 기관은 이러한 대중 정서를 집행하는 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고르바쵸프와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레닌으로 돌아가 더 좋은 사회주의를 발전시킨다는 허황된 확신을 가지고 전통적 제도의 약화와 자본주의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다시 말해서, 고르바쵸프와 다른 공산주의자 리더들이 인민의 생활 수준, 경제 안정, 사회주의 자체를 침식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이들은 노동자에게 더 좋은 사회주의를 약속하고는 노동자에게서 이전에 노동자의 관점을 대변하던 제도를 박탈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수동성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 이론은 쏘비에트 붕괴가 주로 고르바쵸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거의 모든 설명은 고르바쵸프의 역할에 큰 무게를 둔다. 그러나 어떤 설명들은 그에게 책임을 지우는 데 있어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치 브라운(Archie Brown)에 따르면, 쏘비에트 사회가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은 고르바쵸프 요인, 주로 공산주의 교리로부터의 고르바쵸프의 이탈이었다.7) 브라운에게, 이 변절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체제를 손상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쵸프는 현대판 뾰뜨르 대제(Peter the Great)와 같은 영웅적인 서양주의자의 역할을 했다. 고르바쵸프를 결정적 요인으로 보는 다른 이들은 브라운보다 그를 더욱 타산적으로 본다. 제리 허프(Jerry Hough)는 고르바쵸프를 자유시장주의자로 생각한다.8) 예브게니 노비꼬프(Euvgeny Novikov)와 패트릭 바시오(Patrick Bascio)는 고르바쵸프는 그람시적 유로공산주의자라고 한다.9) 앤토니 다고스띠노(Anthony DAgostino)는 고르바쵸프는 마키아벨리주의자로 그에게 사상은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것보다 부차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10)

우리는 고르바쵸프의 이념적 일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러한 관점들의 공통적 요소에 동의하지만,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여러 요소들도 있다. 이는 브라운이 긍정적으로 본 곳에서 우리가 부정적인 것을 보아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르바쵸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설명은 그가 혼자 움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모호하게 한다. 고르바쵸프가 안드로뽀프에서 일단 멀어졌을 때, 공산주의 운동에서 선례가 있었던 사상, 즉 부하린과 흐루쇼프의 사상과 쏘련 사회의 일부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는 사상을 대표했다. 당과 정부의 중앙 권력 약화, 사유 재산의 합법화, 시장에 대한 더 많은 자유의 허용과 같은 사상은 1980년대에 세력을 형성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법적인 사기업과 유착된 역동적인 (기생적인 경우) 부문의 이익을 뚜렷하게 반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르바쵸프는 역사를 만드는 단독의 요인이 아니라 특정 전통의 유산이자 시대의 산물이었다.

더욱이 어떤 저자들은 고르바쵸프 요인을 강조하면서 그의 행동에서 장기적이고 사전에 준비된 계획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증거의 추는 경솔하고 충동적이며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얄팍한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결국 국내의 쁘띠부르주아와 자유주의자, 부패한 이익 집단과 해외의 제국주의자들에게 항복하는 원형을 만들어 냈지만, 처음부터 분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준비된 계획이나 목표보다는 기회주의가 길을 밝히는 신호등이었다.

 

결국 쏘비에트 붕괴 이야기는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에 뿌리를 둔 비극의 불가피한 전개 과정은 아니었다. 대중적 저항이나 외국의 적에 대한 패배도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혼합 경제를 실현하는 사회주의의 이상과 합치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한 남자의 의식적인 배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혁명 그 자체 내의 특정한 경향이 승리한 이야기였다. 이 경향은 초기엔 시골의 소농적 특성에, 나중에는 제2 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제2 경제는 한편으로 소비자들의 요구를 제1 경제가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정부 당국이 제2 경제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법적으로 막지 않았기 때문에 번창했다. 이러한 경향은 고르바쵸프 이전에 부하린과 흐루쇼프에서부터 나타났었다. 이 경향은 번영,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비전이 희생 없이도, 투쟁 없이도, 강한 중앙 권력 없이도 빠르고 쉽게 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경향은 제국주의와 자유주의, 사유 재산과 시장을 허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 경향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이들이 진정한 사회주의자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돈벌이와 사유 재산을 충실하게 지지하는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고르바쵸프 이후에야 혁명의 이러한 경향이 비로소 지배적이 되었고, 그 논리적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고르바쵸프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 경향의 어리석은 방향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그 방향은 새로운 사회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야만주의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시작 부분에서 제우스는 인간이 자신의 불행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을 비난한다. 인간들은 맹목적인 방식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스스로 눈감는다. 트로이의 파괴와 쏘련의 붕괴에는 긴 시간적 간격이 있다. 그러나 신, 자연, 다른 강력한 외부의 힘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유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쏘비에트의 경우에, 피델 가스뜨로(Fidel Castro)는 이러한 충동을 좀 더 산문적이지만 호메로스 못지않게 적절한 말로 비난했다. 사회주의는 자연사하지 않았다. 자살한 것이다.11) 우리의 설명이 지속적으로 가치가 있으려면,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한 것에 관한 맹목적 [설명] 방식들을 더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끝)

노사과연

 

 


 

1) 이러한 입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결론”을 참조.

 

2) 칼 맑스(Karl Marx)ㆍ프리드리히 엥엘스(Friedrich Engels),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저작 선집(Selected Works)≫, Moscow: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1962, p. 53.

 

3) 맥퍼슨(C. B. Macpherson), ≪민주주의의 실제 세계(The Real World of Democrac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2, 여러 곳.

 

4) 암바르쭈모프(E. Ambartsumov)ㆍ부를라쯔끼(F. Burlatsky)ㆍ끄라씬(Y. Krasin)ㆍ쁠레뜨뇨프(E. Pletnyov), ≪현실 사회주의…노동계급 추정치(Real Socialism…for a working class estimate)≫(reprint from New Times), New York: New Outlook Publishers, 1978, p. 10.

 

5) 쏘비에트 정치 제도에 대한 연구 요약으로, 알버트 지만스키(Albert Szymanski)의 “쏘련 정치 과정의 계급적 기반(The Class Basis of Political Processes in the Soviet Union)”, ≪과학과 사회(Science & Society)≫(Winter, 1978-79), pp. 426-457을 참조.

 

6) 스티븐 코헨(Stephen Cohen), ≪실패한 십자군: 미국과 공산주의 이후 러시아의 비극(Failed Crusade: America and the Tragedy of Post-Communist Russia)≫, New York and London: W. W. Norton, 2000, p. 41.

 

7) 아치 브라운(Archie Brown), ≪고르바쵸프 요인(The Gorbachev Factor)≫, Oxford, Englan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8) 로버트 V. 다니엘(Robert V. Daniel), “공산주의 개혁은 가능했는가?(Was Communism Reformable?)”, ≪네이션(The Nation)≫, 3 January 2000, p. 26.

 

9) 예브게니 노비꼬프(Euvgeny Novikov)ㆍ패트릭 바시오(Patrick Bascio), ≪고르바쵸프와 쏘련 공산당의 몰락(Gorbachev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Communist Party)≫, New York: Peter Lang, 1994, pp. 39-44.

 

10) 앤토니 다고스띠노(Anthony D’Agostino), ≪고르바쵸프의 혁명(Gorbachev’s Revolution)≫,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8, 여러 곳.

 

11) “1992년 까스뜨로의 쏘련 붕괴와 쓰딸린에 대한 인터뷰(1992 Castro Interviewed on Soviet Collapse, Stalin)”, El Nuevo Diario, Managua, 3 June, 1992.

 

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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