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19)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Ⅳ. 이슬람 정치의 시작


최종적으로 국민회의 출범으로 귀렬된 1857-59년 봉기와 반영투쟁 초창기에, 무슬림 공동체는 힌두 공동체보다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우리는 이미 지적하였다. 그들은 국민회의의 성장과 함께 일어난 대중운동과 ‘급진주의자’에게 점점 냉담하게 되었다. 그런 몇몇 개인적인 무슬림을 제외하고는, 그런 운동에 지도력과 대오를 제공한 사람들은 힌두인들이었다.

게다가 훗날 급진주의자들과 대중운동이 고삐가 풀린 것처럼 탄압받았을 때 성장하는 급진주의자들과 대중의 힘이 “위험”하다고 청원하면서 영국 지배자들을 지지한 이들이 무슬림 엘리트들이었다. 그리고 무슬림 대중들은 그런 엘리트들의 입장 때문에 반제국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이 인도 전체를 지배하자, 델리의 황제와 그의 제후들이었던 나와브들은 지배권력을 잃었다. 영국이 인도에서 권력을 빼앗자 무슬림 대중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몇 세기 동안 권력을 갖고 무슬림을 통치했던 지배자들을 권좌에서 몰아냈다는 감정이 일어났다1). 그런 반영 감정들이 발전된 결과 1857-59년 봉기로 최고조에 달한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런 맥락에서 특별히 언급할 만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인도 서쪽에 있는 나라의 통치자들은 무슬림들이었다. 그 나라의 인구 다수 역시 무슬림들이었다. 그 중 터키는 전체 이슬람 세계에서 지도자로 숭배받는 칼리프(Khalif)2)에 의해 통치되었다. 영국과 서구세계의 기타 제국주의 국가들은, 터키를 포함하여, 그런 이슬람 국가들을 반대하는 공격적인 전쟁들을 벌였고, 그들을 힘으로 점령하였다.

영국이 제국주의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터키, 이집트, 아랍 국가들, 이란, 북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을 뒤흔들었다.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기타 자본주의 열강 역시, 비슷한 경로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무슬림들의 분노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과 특히 영국에 대한 저항을 일으켰다. 바로 그 점이, 1857-59년 봉기를 포함하여, 무슬림들이 여러 반영 봉기들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또한 그로 인해 무슬림들은 영국이 세운 근대 교육기관에 자녀를 보내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기타 공동체의 부자 계층들은 근대 교육을 통해서 교양 계층의 생활 양식을 받아들이며 부르주아 금융 기업의 영역에 진입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삶을 근대화 시키려고 분투했다. 반면에, 무슬림 공동체의 부유층은 그런 노력들에 냉담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은 전통적인 마드라사3)에서 계속 교육을 받았다. 부유층의 삶의 양식과 세계관 역시 그런 낡은 봉건적 사회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람 모한 로이, 라나데, 나로지 같은 사회 개혁가와 지도자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요컨대, 무슬림 공동체에 의해서 세워진 사회 개혁과 문화 부흥운동들은 없었다. 그런 사회 문화운동들의 생산물로써 근대 정치·경제 사상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손에 꼽을 만큼의 몇몇 개인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인도국민회의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여러 지역들에서 만들어진 조직들로부터 멀어져 있었고 국민회의가 만들어진 이후부터는 국민회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물론, 무슬림 중에 그런 태도가 위험하다고 인식한 몇몇이 있었다. 그들은 영국과 기타 제국주의 국가의 힘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그런 힘을 획득하는 환경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1857-9년에 일어났던 형태의 봉기들이 반복되었을 때의 비참함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근대 교육을 위해서 그들 자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근대화를 위한 기타 수단을 도입한다면 공동체가 선진화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들과 예전의 삶을 원하는 사람들 간의 충돌이 자주 나타났다.

싸예드 아메드 칸(Syed Ahmed Khan)은 정통파(orthodox section)와 싸운 진보진영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라자 람 모한 로이처럼 싸예드 아메드 칸 역시 사회 개혁과 문예 부흥에 앞장섰다. 그는 무슬림 공동체에 근대화를 도입하였고 그 결과로 부흥을 일으킨 사람으로 유명했다. 교육 분야에서의 그의 기여는 특히 중요했다.

1874년에 설립된 이슬람 영국-동방 학교(Mohammedan Anglo-Oriental School)는 1878년에 대학(college)으로 승격되었다. 이 학교는 이후에 무슬림 공동체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교(Aligarh Muslim University)4)로 발전하였다. 이 대학교의 선생들과 젊은 무슬림 세대들은 교육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적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후에 ‘알리그라 운동’으로 알려진 그런 노력은, 브라마 사마즈로부터 인도국민회의를 포함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인도 전체에 변혁을 일으켰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무슬림 공동체 내부의 변혁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그러므로 이 교육기관은 무슬림 공동체의 사회개혁과 문화적 부흥 운동들의 중심이었다.

아메드 칸의 관점과 세계관은 당시의 무슬림 학자들 및 무슬림 공동체의 다른 지도자들과 분명히 달랐다. 종교와 관련된 문제들에서조차, 그와 이슬람 신학자들(Ulemas)의 관점은 서로 충돌하였다. 그의 이슬람 종교 사상의 해석과 이론은 이슬람 공동체의 신학자와 정통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터키의 술탄이 칼리프로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칼리프의 권리는 없다면 반대 의견을 표출하였다.

싸예드 아메드 칸이 종교에 대한 근대적 관점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가 이런 관점을 견고하게 지속한다면 공동체의 일반 대중들로부터 소외될 것임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 결과로 그는 스스로를 교육 부문 내의 활동에 국한시켰다. 그는 교육 부문에서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고 알리가르 운동이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운동으로 발전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메드 칸은 또한 무슬림 엘리트들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려고 애썼다. 그는 다른 공동체 지도자들처럼, 1857-59년 봉기로 그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지도자들처럼 봉기에 대해 보복하는 정부의 탄압에 실망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봉기로부터 끄집어낸 교훈과 그 이후의 사건들에 집중하였다.

싸예드 아메드 칸은 영국 지배자들과 대결을 끝내고 협력에 기초한 관계를 수립하여 자신들의 지도력에 변화를 주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국 권력자들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공동체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공동체가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게끔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아메드 칸은 비무슬림 공동체들과도 협력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정치적 접근을 발전시켰다. 그는 1857-59년 봉기의 원인을 분석한 책에서, 인도인을 대하는 영국 권력자들의 정책과 고위층에 있던 무슬림과 비무슬림 양쪽 모두를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인도 국민회의 결성 이전에 비무슬림 공동체 지도자들이 내세웠던 정치구호는 무슬림 공동체의 구호이기도 하였음을 분명히 밝혔다.

마찬가지로 그는 유명한 많은 연설을 통해 힌두-무슬림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1883년 1월 27일, 빠뜨나5)에서의 연설에서, 그는 청중들에게 힌두, 무슬림은 단지 종교를 지칭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힌두, 무슬림 또는 기독교인들이든지 간에 인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국민으로 구성되었다. 종교에 기초해 다른 국민으로 간주하던 주민 국가의 시대는 지났다. 이런 비슷한 주제를 표현한 강연과 글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싸예드 아메드 칸은 1885년 인도국민회의가 결성되자 정치적 견해를 바꾸었다. 아메드 칸은 만약 국민회의의 요구에 따라 행정권력이 인도 대중들을 대표하여 선출된 사람들에게 넘어가면 무슬림 같은 소수 공동체에는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런 불상사를 피하려면, 무슬림을 위한 독립 조직을 만들고 국민회의가 요구하는 민주적 틀 내에서 무슬림을 위한 특별 지위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앞서 이야기 했던 입장에서 싸예드 아메드 칸이 후퇴했음을 보여준다.

영국 지배자들이 이런 무슬림 분리주의 사상을 고무하는 태도를 받아들인 것은 매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영국 지배자들에게 있어서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립운동을 제압하고, 그들 지배에 저항하며 급격히 대두되는 민주주의를 억제하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운동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무슬림과 힌두 사이의 상호 의심과 모순들을 교활하게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인도 총독 듀퍼린 경은 무슬림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과거 인도에서 대단한 통치자의 지위에 있었던 이들의 후손들이기에, 통치자들에게 부여된 책임감을 이례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6)

영국은 스스로 델리 황제와 나와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무슬림 엘리트들에게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그것과 비슷한 대우를 해주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자부심이 일어나게끔 각별히 신경썼다. 싸예드 아메드 칸의 중심활동지였던 알리가르 대학의 영국인들 역시 무슬림들의 그런 감정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런 모든 것들이 무슬림 공동체의 교양계층에서, 국민회의가 요청하는 민주적 행정체제가 수립되면 소수 공동체인 자신들이 위험해지며,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영국 편에 서야 한다는 감정을 점진적으로 갖게 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감정들이 결과적으로 무슬림 연맹의 결성을 이끌었고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된 국가로 막을 내린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 사이의 잦은 충돌을 불러왔다.

여기서 비무슬림 공동체에 속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책임도 똑같이 언급해야 한다. 그들은 무슬림 공동체의 부르주아와 영국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황을 전개시킨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인도 국민회의 부르주아 정치의 등장과 발전에는 힌두 부흥주의와의 밀접한 협력관계가 작동했다. 종교와 카스트를 넘어선 것으로 간주되던 띨라크와 간디까지도 포함한 모든 부르주아 정치가들은 정치 선전을 위해 힌두의 개념과 상징물들을 이용하였다.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좋은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독립이 힌두가 지배하는 고대 인도의 부활이라는 인상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비힌두와 힌두 공동체의 비카스트 계층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그 결과 무슬림들은 미래에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뒤를 이어 기독교인, 시크교도들 그리고 힌두인들 사이에서 억압받고 뒤쳐진 계층들이 따랐다. 그리고 영국 지배자들은 각자 그들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 하는 다양한 계층들 사이의 모순들과 차이들을 교묘히 활용하였다. 그런 것들이 이후에 ‘공동체 문제’를 발전시킨 숨은 요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현실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되어 막내린 공동체 문제는 무슬림 엘리트들과 영국 지배자들이 만든 일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노사과연>



1) 편집자주: 정통성이 있는 자신들의 지배자들을 영국이 부당하게 몰아냈다는 의미로 보인다.



2) 편집자주: 아랍어 발음은 할리파(خليفة). 제정일치제 이슬람 세계의 보편군주. 무함마드 사후에는 칼피프는 선출되었고(정통 칼리프 시대) 그후 우마미야 왕조에서는 세습되었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한 이후에는 오스만 술탄이 칼리프를 겸임하였다. 1922년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케말 파샤)가 메흐메트 6세(VI. Mehmed Vahideddin)를 추방한 후 1924년 봄 완전 폐지되었다. 현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이 칼리프를 세워 이슬람 세계의 단결을 도모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3) 편집자주: Madrassa. 그 외 madrasah, madarasaa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아랍어는 مدرسة. 마드라사는 배우거나 연구하는 장소를 의미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모든 종류의 학교를 의미한다.



4) 편집자주: 알리가르는 인도 북부 우따르 쁘라데쉬 주의 서부의 도시이다. 영문 위키페디아 항목에 따르면 이 대학은 싸예드 아메드 칸이 Madrasatul Uloom Musalmanan-e-Hind을 1875년에 설립하여 훗날 이슬람 영국-동방 학교가 되고 1920년에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이 되었다고 한다.   http://en.wikipedia.org/wiki/Aligarh_Muslim_University



5) 편집자주: Patna. 인도 북부 내륙 지역의 네팔 접경 지역인 비하르 주의 주도. 비하르는 고대에 마가다(Magadha)로 불렸는데 당시 파트나는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라고 불렸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거주지 중 하나이며 시크교의 성지이다. 현재는 행정, 교육 및 의료 중심지이다.



6) 원주: Tara Chand, Ibid, p.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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