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6)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6장 쏘련에서 수정주의의 발생과 전개

 

 

1.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발생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쿠데타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차례의 쿠데타가 아니라, 연속하는, 단계를 밟아 나가는 쿠데타였다. 쓰딸린이 1953년 3월 4일 사망한 이후 말렌꼬프가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고 국가보안부와 내무부를 합병한 내무부의 부장에 베리야가 선출되었다. 당시 흐루쇼프는 당의 중앙의 서기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이 당시 베리야는 국가의 부주석, 당 중앙의 간부회(이전의 정치국에 해당) 성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부장을 맡은 내무부는 단순한 행정 기관의 성격을 넘어서서 사법, 보안 기관을 관장하고, 수도 모쓰끄바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이었다. 즉, 베리야는 중앙의 쏘비에트 권력과 당 중앙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쓰딸린의 장례식이 끝나고 새로운 권력의 형성이 완료되고 난 후에 흐루쇼프에 의한 쿠데타, 즉 흐루쇼프가 군을 동원하여 베리야를 불법적으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차 대전의 과정에서 전리품을 개인적으로 빼돌려 착복했다는 이유로 쓰딸린에 의해 비판받고 강등되었던 주꼬프가 이 쿠데타에 가담했다. 흐루쇼프 측은 모쓰끄바에서 하계 군사 훈련이 열려 모쓰끄바 군구의 부대가 움직이고 또 씨비르(시베리아)의 군대가 합법적으로 모쓰끄바에 진입하는 시기를 노려, 즉 베리야의 경계심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불법적으로 베리야를 체포했고 이후 베리야가 반당분자라는 발표를 하였다(≪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했다≫의 저자 그로버 퍼(Grover Furr)는 베리야의 체포 과정에서 그가 현장에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쿠데타의 과정인데 이 과정을 통해 흐루쇼프는 실권을 장악하고 말렌꼬프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과정을 밟아 갔다.

흐루쇼프는 당의 제1 서기직을 다시 만들어 취임하여 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는데, 쓰딸린 말년에 당으로부터 쏘비에트로 실권을 이양하던 경향을 역전하여 당 기구에 다시 실권을 부여하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이는 흐루쇼프가 쓰딸린과의 논쟁 과정에서, 그리고 베리야를 제거하는 쿠데타의 과정에서 지방 공화국의 당의 제1 서기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말렌꼬프를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말렌꼬프가 소비재 생산을 늘리려고 하는 방침을 비판하며 중공업 우선 정책을 주장했고, 또 당시 부진한 상태에 있었던 농업 문제에 관하여 말렌꼬프를 비판하고 스스로는 까자흐쓰딴 등지의 처녀지를 개간하여 농업 생산을 늘릴 것을 주장하였다. 이 처녀지 개간 운동은 흐루쇼프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는데, 광활한 쏘련 영토에서 방치되었던 토지들을 개간하여 경작 면적을 30% 가까이 늘리고 개간 초기에는 개간지에서 획득된 농산물이 쏘련 전체 곡물 생산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음모적 방식, 쿠데타적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던 흐루쇼프는 대중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고, 말렌꼬프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업 문제를 처녀지 개간이라는 양적 방식, 조방적(粗放的)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흐루쇼프의 정책은 곧 한계를 드러냈는데, 개간지에서 3-4년이 지나자 토질이 급격히 악화하여 생산성이 낮아졌고 또 모래 폭풍 등의 영향으로 인해 개간된 토지 수백만 헥타르가 사라지기도 했다. 당시 몰로또프 등은 쏘련이 집약 농법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집약 농법을 위해서는 선진적인 노동력과 거대한 물자가 필요하지만 쏘련에서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처녀지 개간을 강행했었다.1) 그러나 흐루쇼프의 이러한 피상적이고 즉흥적인 정책 결정은 이후 쏘련 농업을 오랜 기간 침체에 빠뜨리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후 흐루쇼프는 1956년 20차 당 대회 전까지 쓰딸린 시기 재판을 받고 사망했거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석방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조치들은 부분적이고 임의적인 것이었고 쓰딸린 시기 노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955년 말렌꼬프가 흐루쇼프의 압력에 밀려 국가 주석의 직에서 사임하고 흐루쇼프의 권력이 가일층 공고화되었을 때, 흐루쇼프는 비밀리에 준비 작업을 거쳐 20차 당 대회에서 소위 비밀 연설을 통해 쓰딸린과 쓰딸린 노선을 전면 탄핵하는 일종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베리야의 제거 과정이 군을 동원한 쿠데타의 과정이었다면, 20차 당 대회에서의 비밀 연설은 당원들과 당 지도부 간에 사전 토론과 합의에 기초한 과정을 결여한 상태에서, 음모적 방식으로 쓰딸린 하에서 쏘련의 30여 년의 혁명적 노선을 전복하고 수정주의적 노선을 내리꽂는 쿠데타의 과정의 하나였다.

비밀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쓰딸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쓰딸린을 전면 탄핵하는 과정을 밟았다. 비밀 연설의 내용은 쓰딸린이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무고한 사람들을 증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체포, 고문, 처형했다는 것이었다. 비밀 연설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쓰딸린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이기는커녕, 한 사람의 공산주의자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비밀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1930년대 후반 재판을 통해 심판되었던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블록, 부하린 우익 그룹의 음모, 뚜하체프쓰끼 등 군부의 쿠데타 음모 등이 쓰딸린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권력욕에 사로잡힌 쓰딸린의 타인에 대한 의심증이 심해져서 사건들이 조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 연설에서 그리고 이후 과정에서 흐루쇼프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증거에 의한 판단과 분석, 재판의 과정을 밟는 것이 아니라 음모적인 비밀 연설을 통해 쓰딸린 노선에 대한 탄핵을 시도한 것이 비밀 연설의 실체였던 것이다.2)

이러한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은 당시에 당 대회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비밀 연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자본주의 국가들에도 널리 알려졌고 제국주의 세력은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국가와 진영을 약화시키려는 음모에 착수했다. 또 당 대회에는 해외의 공산당과 노동자당의 대표들이 참가했는데 이들을 통해 비밀 연설의 내용이 알려졌고 이를 접한 많은 공산당과 노동자당들의 지도부는 한편으로 개인숭배 비판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쓰딸린이 과오보다는 공적이 크다는 입장을 표명했는데 중국 공산당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이 단순히 개인숭배를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노선 자체에 대한 탄핵이었기 때문에 세계 사회주의 진영은 균열되기 시작했고 중국과 쏘련 간에는 간극이 벌어지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비밀 연설로 인한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균열,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1957년과 1960년 두 차례에 걸쳐 세계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회의가 열려 선언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1963년, 64년에 이르면 중국 공산당과 쏘련 공산당 간에 격렬한 공개적 논전이 전개되는 상황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20차 당 대회 이후 비밀 연설에 반대하는 동유럽의 공산당, 노동자당의 지도부를 전복하여 수정주의적 지도부로 교체하기도 했다. 20차 당 대회 이후 동유럽은 격랑에 휩싸였는데, 뽈쓰까(폴란드)와 마쟈르(헝가리)에서 사회주의 제도를 전복하려 하거나 반쏘련적인 시도가 발생하였다. 뽈쓰까(폴란드)의 당 제1 서기는 20차 당 대회의 기간에 쏘련에서 돌연 사망했었는데, 이후 뽈쓰까(폴란드)에서 쏘련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뽈쓰까(폴란드) 당에서 민족주의 경향으로 비판되어 실각했던 고무우까가 다시 당 제1 서기가 되자 흐루쇼프는 뽈쓰까(폴란드)의 초청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뽈쓰까(폴란드)를 방문했고 군을 동원하여 뽈쓰까(폴란드)를 압박하는 가운데 담판을 하여 뽈쓰까(폴란드)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남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 물러났다.3) 마쟈르(헝가리)에서는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이후 제국주의 세력이 개입한 폭동이 발생했다. 대중들은 쏘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했고 시위가 확대되는 가운데 정부가 교체되어 점차 무정부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에 대해 쏘련과 마쟈르(헝가리) 측의 교섭이 결렬되었을 때 쏘련군은 마쟈르(헝가리)의 수도 부다뻬슈트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상황을 종식시키게 되었다.4) 이러한 뽈쓰까(폴란드)와 마쟈르(헝가리)에서의 정치적 위기는 흐루쇼프 스스로의 비밀 연설의 결과 발생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무력을 동원하거나 무력에 의한 압박을 통해 해결을 도모한 것이었고 이후 쏘련과 동유럽의 관계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에 밀리고 있던 제국주의 세력을 자극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것을 계기로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공하여 무력 점령하였다. 이에 대해 이집트 인민이 항전하는 가운데 쏘련은 성명을 발표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쏘련은 핵미사일을 동원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철수하였고 이스라엘도 수에즈 운하로부터 철수하였다. 이는 2차 대전 전에 세계 자본주의에서 헤게모니 세력이었던 영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세계 질서가 미국과 쏘련의 양대 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비밀 연설을 통해 쓰딸린 노선을 탄핵했는데, 이는 대내외 정책에서 개량주의 노선으로의 방향 전환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20차 당 대회에서 3가지의 평화를 주장했다.5) 첫째는, 제국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평화 공존, 둘째는, 양 체제 간의 평화적 경쟁, 셋째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의회제적 방식을 포함하는 평화적 이행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노선은 쓰딸린 하의 30여 년에 걸친 혁명적 노선, 레닌주의적 노선을 전복하는 것이었다. 먼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은 명백히 개량주의적 노선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흐루쇼프가 이러한 방향 전환의 근거로 든 것은 2차 대전 이후 세계적 차원의 역관계가 변화하여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제국주의 진영을 압도하고 있어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세계정세는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제국주의 진영을 압박하고 있었고 세계 식민지 체제가 붕괴되면서 제국주의 진영이 수세에 몰리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적대적 계급 모순이 평화적으로 해소되어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전망은 근거가 없는 주관주의적 낙관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적대적인 계급 모순은 그것이 무력을 동반한 격렬한 형태를 취하든, 아니면 평화적 형태를 취하든 그것은 사회구성체의 질적인 전환, 즉, 혁명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명백한 것이었는데 흐루쇼프는 이러한 기본적인 변증법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흐루쇼프는 혁명의 변증법을 진부한 진화적인 사고로 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흐루쇼프의 이러한 주장은 서유럽의 각국의 공산당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어,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폐기하고 개량주의적인 유러꼬뮤니즘으로의 길을 걷게 했다. 프랑스 공산당과 이딸리아 공산당 등 서유럽의 공산당들은 2차 대전 직후에는 제1 당의 위치에 있었으나 서서히 혁명성을 상실해 갔고, 결정적으로는 1960년대, 70년대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폐기하여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지리멸렬한 상태에 내몰렸던 것이다. 그리고 쏘련이 해체되어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한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 볼 때, 그리고 극단으로 심화되고 있는 세계적 차원의 계급적 모순을 볼 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의회를 통한 평화적 이행이 얼마나 허망한 환상이었는가는 명백하며, 이러한 관점과 노선을 세계 사회주의 진영과 운동에 내리꽂은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해악이 얼마나 컸던가를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양 체제 간의 평화 공존과 평화적 경쟁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심각한 오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는 현실로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진영 모순을 왜곡하여 그 해결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모순은 평화적 경쟁을 통하여 해결 혹은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진영 모순은 오직 계급 투쟁을 통해서만 해소, 혹은 해결이 가능할 따름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이기를 멈추지 않는 한, 사회주의와의 모순은 해결될 수 없다. 여기서 진영 모순의 해결은, 자본주의 나라에서 반제 민족 해방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통해 자본주의에서 이탈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고도화에 기초한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의 강화와 그러한 단결을 정치 노선으로 구체화하는 세계 변혁 전략의 정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안이하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평화적 경쟁, 예를 들면 누가 경제적으로 더 발전하는가, 누가 강철을 더 많이 생산하는가, 누가 과학 기술을 더 발전시키는가 등으로 진영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이는 평화적 전술 또한 계급 투쟁의 하나의 형태이며 진영 모순의 해결 자체는 반드시 혁명이라는 질적인 전환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모순에 대한 흐루쇼프의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평화 공존에 대한 관점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흐루쇼프는 평화 공존이 쏘련의 대외 정책의 근간이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었다. 레닌도, 쓰딸린도 제국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를 절실히 추구하였다. 그러나 레닌과 쓰딸린은 평화 공존을 쏘련의 대외 정책의 근간으로 놓지 않았다. 레닌과 쓰딸린 당시 쏘련의 대외 정책의 제1 원칙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였다. 그렇기 때문에 레닌과 쓰딸린은 제3 인터내셔날을 심혈을 기울여 결성하고 지지, 지원했던 것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 사이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평화 공존은 단지 제국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의 문제로 국한하는 것이 레닌과 쓰딸린 당시의 대외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평화 공존을 대외 정책의 제1 노선, 총노선으로 삼음에 따라 곧바로 개량주의 노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하여 제3 세계 약소국, 식민지에서의 민족 해방 투쟁을 희생하면서 제국주의 국가와의 협력을 추구하고 제국주의 국가 내의 노동자계급의 계급 투쟁에 대한 지지와 원조를 외면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1960년대 초반 중-쏘 논쟁 당시에 중국 측이 쏘련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던 내용이기도 하다.6)

그런데 대외 정책에서 이러한 오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에서의 수정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20차 당 대회 이후 흐루쇼프는 당과 국가의 노동계급적 성격을 타격하는 공격을 감행했고 이로써 이후 수정주의라 불리게 되었다. 먼저 당의 성격을 보면, 흐루쇼프는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라는 쏘련 공산당의 성격을 전 인민당으로 바꾸었다. 이는 당의 본질적 역할인, 노선의 정립에 있어서 과학적 관점의 지표가 되는 노동자계급적 관점을 거세하여 당을 무당파적인 당으로 전환하여 당의 전위적 역할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쏘련 사회에서 요구되는 노선의 정립에서, 노동자계급과 전체 인민의 선두에 서서 이끌고 싸워 나가는 전위로서의 당의 성격이 거세된다면, 쏘련 사회의 노동자계급과 인민은 뇌사 상태에서 노동하고 생활하고 투쟁하는 것이 된다. 이는 비단 노선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며 당장의 경제 건설에서도 계획의 마비를 불러오는 것이 되었다. 실제로 20차 당 대회 이후 얼마가 지나지 않은 1957년 경제 지도에 있어서 부문 원칙에서 지역(지구) 원칙으로 전환하여 중앙의 성(省)들을 폐지하고 지방의 각 지구별로 105개의 국민경제회의(쏘브나르호쓰)를 설치하여 지역 중심의 경제 지도로 전환했는데7) 이는 업종별 전문성과 협업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쏘련 경제에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났는데 이는 쏘련에서 경제 계획의 마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쏘련에서 계획 경제가 실시되고 난 후 최초로 계획이 완수되지 못하고 1959년 제21차 임시 당 대회를 긴급히 소집하여 6차 5개년 계획을 7개년 계획으로 변경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 사회주의 건설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인데, 사회주의 건설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자연 발생적 발전과 달리 의식적, 계획적 지도와 건설을 필요로 하는데,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이러한 의식성과 계획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거꾸로 그러한 의식성과 계획성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당의 노선에 반영되어 당의 성격이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에서 무당파적인 전 인민당으로 변경된 것이었다.

국가의 성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 인민 국가로의 전환은 더욱더 심각한 것이었다. 쏘련에 더 이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전 인민 국가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인데, 이는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의 폐기와 관료주의 국가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쏘련에서 자본가계급과 부농계급 등 착취계급은 폐지되었지만 노동자계급과 농민계급의 구분이 생산관계 차원에서 국유(전 인민 소유)와 집단적 소유의 차이로 남아 있었으며, 또한 자본-임노동의 착취 관계는 폐지되었지만 상품-화폐 관계가 온존하는 것을 기초로 계급 사회의 유물,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우선 계급의 지배 도구로서 국가가 대내외적인 조건에 의해 사멸되지 못하고 있었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의연히 존재했고 도시와 농촌의 대립과 차이는 심각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1950년대 당시 집단 농장의 농민 중 12%가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농촌의 사회적 편의 시설들은 도시와 비교할 때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쏘련의 농업이 공업에 비해 지속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도시와 농촌의 모순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의 반영이었다. 특히 상품-화폐 관계가 잔존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인민일지라도 소유자적 관점을 배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었고, 심지어 상품과 화폐의 집적을 통해 자본이 불법적이나마 소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브레쥐네프 시기에는 국유 기업의 공장장이 자재와 인원을 빼돌려 공장을 사기업처럼 운영하는 사례도 발생했는데 이는 불법적 형태로, 체제 바깥에서 자본-임노동 관계가 복고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착취계급이 폐지되고 난 후 국가는 곧바로 소멸할 수 없는데,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이라는 대외적 조건과 국내에서 계급 사회의 잔재가 존재한다는 점, 특히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하여 자본주의 복고의 위험이 남아 있다는 점이 계급적 억압 도구로서 국가의 즉각적인 소멸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흐루쇼프는 국가의 계급적 억압 도구로서의 성격을 거세하고 사회적 관리 기구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갖는 전 인민 국가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사회주의 사회가 발전하면 사회의 관리 역할은 국가로부터 시민 사회 영역의 대중 조직들로 이관되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계급적 억압 기능이 줄어드는 것에 비례하여 점차 그 영역이 축소되고 궁극적으로는 소멸하는 것이다. 흐루쇼프가 제기한 전 인민 국가는 실제로는 전 인민에 대한 국가, 전 인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 관료주의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국가에게서 계급적 성격을 거세하면 남는 것은 사회의 관리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전문적으로 사회의 관리를 수행하는 관료들이 지배하는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수립한 이후 사회주의 건설이 더욱더 고도화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계급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회의 관리에 해당하는 영역을 시민 사회의 조직으로, 대중 조직으로 점차 이관하고, 계급적 억압의 기능의 측면에서는, 잔존하는 상품-화폐 관계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복고를 시도하는 경향을 억압하고 또 관료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초하여 제어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정확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올바른 노선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흐루쇼프 수정주의는 당과 국가에 있어서 그 노동자계급적 성격을 타격함에 의해 쏘련 사회주의를 내부에서 균열시키고 해체하는 길을 열었다. 즉,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에 있어서 단순한 편향을 넘어서는 것이며, 계급성 자체를 타격하여 사회주의 사회와 운동을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은 맑스-레닌주의 운동의 발전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는데, 일찍이 레닌은 맑스주의와 수정주의라는 논문에서 수정주의는 맑스주의 그 자체의 내부에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조류이며 과학적 사회주의가 노동 운동에서 다수가 됨에 따라, 이전에 맑스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조류들이 형태를 바꾸어 더 이상 자신의 독립적인 기반 위에서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일반적 토대 위에서, 수정주의로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8)고 분석한 바 있다. 즉, 수정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조류가 맑스주의 외부에서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에 실패하자, 맑스주의 진영 내부에 들어와서 내부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 세계관 등에서 부르주아적 요소를 주입함에 의해 사회주의 사회와 운동을 내부에서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운동 내에 있을 수 있는 편향과 구별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중간층으로서 소부르주아들의 몰락을 가져오며, 이들 몰락하는 소부르주아들이 노동자계급의 대열 내에 편입됨에 의해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각종 좌, 우편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들 편향에 대한 맑스주의 당의 방침은 비판을 통해 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정주의는 이러한 편향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는 철학에서 신칸트주의라는 부르주아 철학, 경제학에서 카르텔 등 독점에 의해 공황의 발생이 저지된다고 하는 주장, 심지어 운동이 전부이고 궁극적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장까지, 독일 사회의 부르주아 요소를 사회주의 운동에 이식시켜 운동을 해체시키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 수정주의는 당과 국가에 있어서 단순한 편향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성 자체를 거세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내부에서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단순히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 경제를 강화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본-임노동의 착취 관계를 전면 도입하면서 그 계급적 본질을 가리기 위해 사회주의 시장 경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기만책을 폈다. 이와 같이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와 운동 내부에서 부르주아적 요소를 주입하고 노동자계급성 자체를 타격함에 의해 사회주의 사회와 운동을 내부에서 해체시키는 조류이며, 운동 내의 단순한 좌, 우편향을 넘어서는 해체적 요소라는 점에서 수정주의로 규정되는 것이다.9)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중-쏘 논쟁에서 중국은 처음에는 흐루쇼프를 수정주의로 규정하는 데 신중했으나 이후 논쟁이 심화되고 논쟁의 쟁점이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 세계 변혁 전략의 수준에 이르면서 흐루쇼프를 수정주의로 규정했던 것이다.

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이 있은 지 몇 개월이 안 되어 쓰딸린 생전에 그와 함께했던 주요 당 지도자들은 흐루쇼프 노선의 심각한 오류를 인식하고 흐루쇼프를 경질하려고 했다. 1956년 6월 18일 당 중앙의 간부회에서 다수는 흐루쇼프의 오류를 비판하고 흐루쇼프를 당 제1 서기에서 경질하려는 시도를 했다.10) 그런데 이에 대해 흐루쇼프가 반발하여 제1 서기는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선출하므로 경질 또한 중앙위 전체 회의를 소집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비상한 상태가 며칠간 이어지면서 흐루쇼프 친위 세력이 결집하여 쏘련 전역에서 당 중앙위원들을 긴급 소집하여, 역으로 흐루쇼프에 반대한 세력들을 반당 분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때 몰로또프, 불가닌, 까가노비치 등 주요 세력이 반당 분자로 몰려 숙청되고, 전국의 중앙위원을 긴급 소집하여 흐루쇼프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브레쥐네프는 이후 흐루쇼프의 오른팔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흐루쇼프의 쿠데타적 권력 장악의 과정은 최종 완성되고 이후 쏘련 공산당은 수정주의적 노선을 거리낌 없이 전개하게 된다.

흐루쇼프는 미국을 방문하는 등 화려한 외교를 전개했으나 오히려 핵, 미싸일 프로그램 등 국방비는 증대했고, 또 경제에서 계획이 마비되고 농업이 위기에 처하여 중앙은행의 금 보유를 동원하여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또 당 조직을 공업 당 조직과 농업 당 조직으로 이원화하는 등으로 당과 국가가 혼란한 상태에 이르자 권력의 지반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또한 중국과의 노선 논쟁이 격화되어 중국 측에서 10차례의 공개서한을 발표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1964년 10월 브레쥐네프 주도의 궁정 반란이 일어나 흐루쇼프는 사임을 강요당하고 사퇴하게 된다.

 

 

2.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경제적 측면

 

1951년부터 1955년까지의 5차 5개년 계획은 순조롭게 달성되었다. 국민 소득이 68% 증가하였고 소매가격이 인하11)되고 화폐 수입이 증가하면서 실질 임금은 39%가 증가하였다.12) 그러나 1956년부터 1960년까지에 이르는 6차 5개년 계획은 원래의 계획대로 완수되지 못하고 1959년에 7개년 계획으로 수정되어 실시되게 된다. 이는 1957년에 실시되었던 계획 관리 기구의 개편, 즉 중앙의 성(省) 중심의 부문 관리 지도에서 지역(지구) 중심 지도로의 전환이 쏘련 경제에 혼란을 가져오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개편의 명목은 경제에 대한 관리를 간소화하고 지역과 밀착된 경제 지도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지구 국민경제회의(쏘브나르호쓰)가 지역별로 105개나 설치되고 또 그 산하에 수많은 기구가 설치되어 과거에 비해 관리 기구가 3배나 증가하게 되었다.13) 또한 지역 중심의 경제 지도로 전환하자 지방주의가 발전하여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고 지방의 이익에 몰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육류 수매 계획이 전체적으로 111% 달성되었지만 국가의 육류 수매는 계획의 28%만 달성되었고 반면에 지방 공화국의 계획은 95%가 달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부문 중심의 경제 지도에서 지역 중심의 경제 지도로의 전환이 사실상 중앙의 통일적인 계획의 마비를 불러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계획의 마비는 건설에 있어서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야금과 화학 공업의 경우, 단지 23%만이 건설이 완료되었고 대부분의 건설 공정이 지연되어 미완성된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가 빚어지게 된 것은 건축 자재가 기한 내에 공급되지 못하고, 도착한 자재도 완전한 제품이 아니라 모자라거나 불량인 제품이 많아 공사 기한이 연장되고 공사 비용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14) 이러한 현상은 전형적으로 계획의 부실화, 마비로 인한 것이었고, 흐루쇼프 시기에 계획 경제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럼에도 쏘련의 공업 생산량은 1950년부터 1960년까지의 10년의 기간에 160% 증가하였고 농업의 생산량은 60% 증가하였다. 공업에서 일정한 생산의 증가가 달성된 것은 흐루쇼프에 의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계획 경제의 체계가 여전히 일정하게 작동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에서는 상황이 다른데 흐루쇼프의 농업에 대한 정책은 심각한 결과를 낳았으며 이후 흐루쇼프 실각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면 흐루쇼프 시기 농업 정책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쏘련에서 전후 농업 생산이 전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1950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는 전쟁에 의해 파괴된 농업의 회복과 발전이 공업과 달리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기 때문인데, 흐루쇼프는 말렌꼬프와 권력 투쟁을 하면서 농업의 긴급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계획보다 처녀지를 개간하여 경작 면적을 늘려야 함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1954년부터 4-5년간 대대적인 처녀지 개간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경작 면적이 30% 증가하는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새로 개간된 토지는 토질이 열악하여 몇 년이 지나자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이후 처녀지 개간 운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흐루쇼프는 집단 농장의 농민들에게 수매하는 농산물의 가격을 인상하는 조치를 취하여 농민들의 소득이 일정하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는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농민과 농업에 대한 보조금을 늘려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즉, 흐루쇼프 시대에 농업은 생산력 발전이 매우 더디거나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흐루쇼프는 집단 농장의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 중 20% 정도를 국가에 의무적으로 교부하는 의무 수매제를 1958년 폐지하였다.15) 의무 수매제는 국가가 정한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국가에 의무적으로 교부하는 것인데 이는 세금의 성격과 지대 납부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흐루쇼프는 의무 수매제를 폐지하는 대신에 지역별로 수매가에 차이를 두어 국가와 집단 농장 간에 경제적 거래의 성격을 갖는 수매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흐루쇼프는 집단 농장 농민의 개인 부업―일정한 텃밭에서 야채를 재배하거나 제한된 규모의 가축과 가금을 키우는 것 등―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 당시 집단 농장 농민이 개인 부업을 통해 얻는 소득은 전체 수입의 26% 정도였다. 그러나 개인 부업의 확대가 집단 농장의 공유 경제를 약화시키는 문제가 드러나자 흐루쇼프는 다시 개인 부업을 제한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집단 농장은 규모의 경제를 위하여 합병한 결과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또 1957-58년에 사이에 7,000여 개의 집단 농장이 국영 농장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집단 농장의 국영 농장으로의 개조는 집단 농장의 생산력 발전에 기초해야 하는데 이렇게 급격히 많은 수의 집단 농장을 국영 농장으로 개조한 것은 무리한 측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1957년 이전에는 단지 1,500개의 집단 농장이 국영 농장으로 개조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16)

한편 농업 정책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집단 농장의 형성기에 만들어졌던 MTS(기계ㆍ트랙터 기지)의 해체였다. 흐루쇼프는 생산 수단인 토지에 2명의 주인이 있어서 농업 발전이 더디다고 파악했다. 즉, 집단 농장 농민과 MTS를 각각 토지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불협화음이 농업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1958년 MTS를 해체하고 MTS 소유의 트랙터와 기계들을 집단 농장에 매각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로 인해 집단 농장은 기계와 트랙터 대금 지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른 긴급한 사업을 유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 MTS에서 일했던 트랙터 기사들 중 절반은 집단 농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트랙터 기사의 입장에서는 국영의 MTS에서 일하는 것과 집단 농장에서 일하는 것은 근로 조건과 사회적 위치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한 MTS의 해체는 농업 생산력 발전에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트랙터 등의 수리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원래는 MTS를 농기계 수리점으로 변경한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집단 농장 스스로 농기계를 수리해야 했다. 그리고 1964년에 이르러서야 농업 기술 써비스점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농기계 수리 수요의 절반 정도를 만족시키게 되었다.17) 그리고 농민들의 자금 부족으로 농기계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자 쏘련에서 농기계 산업의 발전 자체가 위축되게 되었고, 이는 역으로 농업에서 농기계 부족 현상을 심화시켰고 쏘련에서 농업 생산력 발전이 정체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18)

사실 MTS는 해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집단 농장의 형성기에 만들어진 MTS는 쏘비에트 국가와 집단 농장의 농민이 연결되는 핵심 고리였다. 집단 농장은 소유의 측면에서 보면 협동조합적 관계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적 소유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며 그러한 협동조합적 소유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동자계급의 국가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노동자계급은 MTS, 그리고 국가를 통해 집단 농장 농민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아가 협동조합적 소유인 집단 농장이 공업과 같이 국유, 즉 전 인민 소유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MTS의 강화를 조건으로 하는 집단 농장의 생산력 발전이 필요한데, 흐루쇼프는 소위 토지에 대한 2명의 주인이라는 부르주아적 관점을 도입하여 집단 농장의 국유로의 발전의 매개가 되는 MTS라는 고리를 끊은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집단 농장의 입장에서 쏘비에트 국가와의 관계는 사회주의적 관계라기보다는 거래의 상대방에 지나지 않게 되고 농업 생산력 발전의 전체적 전망은 흐려졌던 것이다.

농업 문제에서 흐루쇼프의 거듭된 실책은 시간이 지나자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다. 1955년-1959년 사이 농업 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7.6%였지만 1960년-1964년의 기간은 연평균 1.9%에 불과했다. 특히 1963년에는 곡물 수확이 20억 푸드나 감소하여 외국에서 식량을 긴급히 수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위해 중앙은행에 비축해 두었던 황금 860톤을 동원하여 식량을 수입하게 되었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국방용으로 비축되었던 비상식량을 동원한 후에야 식량에 대한 배급제의 실시를 면할 수 있었다.19)

농업에 있어서 흐루쇼프의 즉흥성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실책은 쏘련에 옥수수 심기 캠페인을 광범히 벌였으나 실패한 사실이다. 미국을 방문한 흐루쇼프는 미국에서 옥수수가 널리 재배되어 축산업 발전을 지지하는 것을 목격하고 쏘련에서도 옥수수를 널리 재배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캠페인이 벌어졌으나 몇 년 만에 다 실패하고 옥수수 심기 캠페인은 사라졌다. 이는 옥수수가 쏘련의 토양과 기후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옥수수 캠페인으로 인하여 쏘련에 맞는 전통적인 목초의 재배가 방기되면서 쏘련은 사료 작물의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20) 옥수수 캠페인의 이러한 실패는 흐루쇼프의 위신을 깎아내리며 그의 실각의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흐루쇼프의 즉흥성은 조직의 문제에서 심각한 결과를 낳았는데 흐루쇼프는 1962년에 농업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당 조직을 공업 당 조직과 농업 당 조직으로 이원화하였다. 그러나 이는 생산 원칙에 따른 기구의 재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관료주의를 전제로 하고 관료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으로서 경제 문제에 있어서 사업의 중복과 기구의 중첩을 불러오는 것이었다.21) 예를 들면 농산물 가공과 관련하여 농업 당 조직과 논의할지, 아니면 공업 당 조직과 논의할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그리고 이는 지구와 촌의 쏘비에트의 통일적인 사업을 가로막고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생산 원칙에 따라 분할되어야 하는 것은 당 조직이 아니라 국가 기구의 경제 지도 기관일 텐데, 흐루쇼프는 당과 국가를 혼동하고, 당이 행정을 대신해야 한다고 사고하면서 당 조직을 생산 원칙에 따라 분할하는 어이없는 악수를 둔 것이었다. 이 또한 흐루쇼프의 실각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는데 흐루쇼프가 실각한 직후 당 조직을 공업과 농업 당 조직으로 이원화하는 방침은 폐지되었다.

그런데 흐루쇼프 하에서 경제에 있어 자본주의적 방향으로의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이론적 시도가 시작되었다. 1962년 9월 9일 ≪쁘라브다≫에 계획, 이윤, 상여금이라는 리베르만의 논문이 실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논문은 1965년 실시되어 쏘련 경제를 균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의 이론적 원형이 되는 것이므로 비교적 자세히 인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의 견해로는, 품목별 생산고와 납입 기한에 관한 계획만 기업이 철저히 수행하게 하면, 이것은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 기업은 수령한 품목별 생산고의 과제를 토대로 하여, 노동 생산성, 종업원 수, 생산물 원가, 축적, 투자, 신기술에 관한 계획을 포함하는 완전히 일관된 계획을 스스로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원칙은 첫째로는, 수익률이 높으면 높을수록 보상 금액도 커진다는 점이다. … 이것에 의해 수익률을 높이려는 강력한 물질적 자극이 기업에 보장된다. … 이것에 의해 사회적 부를 한층 더 급속히 증대시키는 것이 보장된다. … 그 기업은 즉, 계획 수익률과 실제 수익률의 평균에 의해 보상을 받게 된다. 요컨대 계획을 낮게 작성하면 기업에게는 현저하게 불이익이 된다. … 높은 수익률을 얻기 위해서 기업은 계획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제 조건과 계획 가격의 토대 위에서, 능력과 설비를 최대한 가동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기업은 스스로의 이익을 고려하여, 현존 설비의 가동 교대율과 조업률을 높여서, 여분의 투자와 기계를 요구하는 것을 멈추고, 불필요한 스톡을 만드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 수익률(이윤을 생산 기금으로 나눈 비율)22)

 

이러한 리베르만의 구상은 품목별 생산 총량과 국가에 대한 이윤 상납액을 빼고는, 쏘련의 국유 기업에게서 국가로부터의 지령적 계획에 따른 구속을 제거하여 기업 자율로 경영 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 구상은 개별 국유 기업을 이윤 추구를 중심에 놓는 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기업이 계획상 작성한 이윤율과 실제 달성한 이윤율의 평균을 토대로 기업의 종업원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하는 기준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계획상 작성한 이윤율과 실제 달성한 이윤율의 평균으로 상여금의 기준을 삼으면 기업이 계획을 가능한 높게 잡으려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계획 경제에서(특히 흐루쇼프 하에서) 개별 기업이 계획 목표를 낮춰 잡던 경향을 제어하고 또 기업 자체의 잠재력(인원과 설비)을 최대한 가동하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수익률(이윤율)의 개념 규정을 변경했다. 즉, 기존에 이윤율 개념은 총이윤을 총상품의 생산 원가로 나누던 것(이 방식에서는 고정 기금의 상당 부분은 생산 원가에서 제외된다)이었다면, 새로운 이윤율 개념은 총이윤을 총생산 기금(즉 고정 기금과 유동 기금의 합)으로 나눈 비율로 변경된 것인데, 이는 이윤율 개념을 자본주의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윤율을 단순한 생산 원가가 아니라 고정 자본을 포함하는 총자본(생산 기금)으로 나누어 구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고정 기금과 유동 기금을 절약하고 잠재력을 최대한 가동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리베르만이 제안하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 기업의 설비와 인원을 자본으로 간주하고 최대한의 이윤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국유 기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국유 기업을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구상과 제안에 다름 아니었다.

또 다른 쏘련 학자는 직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업 활동의 모든 측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표―기업의 이윤―를 높이는 것만이 필요하며, 또한 그것으로 충분하다.23) 이 또한 사회주의의 국유 기업을 자본주의와 같이 이윤 추구를 중심에 놓는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 쏘련의 계획 경제에서 계획이 지령적(구속적) 성격을 갖는 것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생산관계하에서 계획은 통일성을 가져야 하고 각 부문의 비례적 발전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와 같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제거하기 위해 사회주의에서 경제 계획은 지령적 성질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 생산성, 종업원 수, 임금, 투자 등에서 전국적인, 전 계급적인 통일적인 계획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전부 개별 기업의 자율로 맡겨 버리면 아무리 품목별 총생산고를 규정한다 해도 생산의 무정부성이 점차로 확대되는 것은 불가피하며 이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균열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리베르만의 방식을 채택한 1965년의 꼬씌긴 개혁 이후 쏘련 경제가 균열되는 과정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개별 기업의 자본주의적, 무정부적 운동이 충돌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 리베르만의 제안은 1961년 22차 당 대회의 결정에 의한 새로운 경제 방향에 따른 것이었다. 즉, 쏘련 경제의 이윤 중심으로의 재편이라는 리베르만의 구상은, 흐루쇼프 수정주의로 인한 중앙의 경제 계획의 마비 사태, 농업의 위기 등 경제 전반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된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희생하는, 중앙의 통일적인 경제 계획을 희생하는, 수정주의적 대안으로서 제출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사회주의 사회의 국유 기업이 이윤 추구를 활동의 중심에 놓는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기업과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비록 기업 활동에서 이윤 개념이 있었지만 이윤 자체가 기업 활동의 중심은 아니었다. 기업 활동의 중심은 이윤이 아닌 계획이었고 그 계획은 전 인민의 늘어나는 복지 요구의 충족(사회주의의 기본적 경제 법칙)을 목표로 하여 각 부문의 비례적 발전(균형 있는 발전 법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윤은 단지 기업 활동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지표에 지나지 않았고 결코 기업 활동의 중심이 아니었다. 실제로 기업이 계획을 달성한다면 비록 적자가 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며, 기업의 적자는 국가의 예산에 의해 보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리베르만의 제안, 그리고 1965년의 꼬씌긴 개혁은 이윤을 기업 활동의 중심에 놓는 방향으로의 전환이었고, 개별 국유 기업이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되고 쏘련 경제 전체가 거대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전환의 결과, 처음에는 기업 간의 경쟁으로 인해 얼마간의 생산의 증가, 경제 성장률이 담보되었지만 사회주의 생산관계 자체가 균열되면서, 불법적인 자본주의적 기업이 출현하고 상당수의 건설 공정이 한없이 늘어져서 거대한 자금이 미완성된 건설 사업에 잠기게 되고, 부패와 독직, 특권층의 발생 등 쏘련 사회주의 자체를 침몰시키고 해체시키는 요소의 성장으로 귀결되게 되었던 것이다.

 

 

3. 흐루쇼프의 연속으로서 브레쥐네프 수정주의

 

브레쥐네프는 1964년 10월 궁정 반란을 통해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흐루쇼프가 휴가를 간 틈을 노려 당 지도부 회의를 소집하여 흐루쇼프 실각을 결정하고 이후 흐루쇼프에게 통보하는 식이었다. 흐루쇼프는 이후 풍족한 연금 생활자로 살아가다 생을 마쳤다.

브레쥐네프는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초기에 흐루쇼프 하에서 혼란스러웠던 당과 국가 그리고 경제를 수습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공업 당과 농업 당으로 당 조직을 분리한 결정을 폐지하였고 1965년에는 꼬씌긴 개혁을 실시하여 경제를 이윤 중심으로 운영하는 새로운 체제, 이른바 신경제 체제를 수립하기 시작했는데, 쏘련 경제의 이윤 중심의 신경제 체제로의 이행은 1972년경에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중국 공산당은 쏘련 공산당의 노선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1964년 10월 혁명 47주년 기념식에 저우언라이 총리를 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여 쏘련의 입장을 탐색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의 기대는 빗나갔는데, 쏘련 측은 쏘련 공산당의 입장은 흐루쇼프 당시의 20차 당 대회부터 21, 22차 당 대회에 걸쳐 결정된 노선을 고수하는 것임을 밝혔다. 심지어 쏘련 측은 중국 대표단에게 마오쩌둥이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조차 했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 중국과 쏘련의 대립은 더욱더 격화되었고 중국 측은 쏘련이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주의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 중국과 쏘련의 대립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차원을 넘어 군사적 갈등으로까지 나아갔다. 중국이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직후 마오쩌둥이 문화 대혁명을 발동하면서 쏘련과의 갈등은 심화되었는데, 쏘련 측은 중국과 쏘련의 국경에 병력을 10배 증강하여 40개 사단을 배치하였다. 1969년 3월에는 중-쏘 국경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는데, 이후 쏘련은 중국의 핵 시설에 대한 핵 공격 계획을 세우고 미국의 입장을 타진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였다.24) 이것은 브레쥐네프 수정주의가 패권주의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브레쥐네프의 외교 정책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1982년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쏘련은 브레쥐네프 시기에 제3 세계 국가와 군사적 합작을 통해 해외에 40여 개의 군사 기지를 두기도 했다. 또한 브레쥐네프 시기에는 군사비의 지출이 1965년 326억 달러(전체 국민 소득의 15.2%)에서 1981년 1550억 달러(전체 국민 소득의 21%)로 격증하기도 했다.25) 이러한 군사비의 격증은 한편으로 브레쥐네프의 패권 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쏘련 경제 전체에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브레쥐네프에게서 이론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발달한 사회주의라는 개념이다. 브레쥐네프는 1967년 11월 10월 혁명 50주년 기념일에 쏘련이 발달한 사회주의에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977년의 브레쥐네프 헌법은 발달한 사회주의 개념을 담기도 했다. 발달한 사회주의 단계라는 개념은 사회주의 건설이 일정하게 완료되고 발전되어 적대계급이 소멸하고 따라서 계급 투쟁이 소멸하는 사회이며,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이 일치하고 전체 사회는 단일한 사회로 되었다는 이론이다. 브레쥐네프는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전 인민 국가는 발달한 사회주의의 상부 구조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발달한 사회주의 진입 이후 민족의 구분이 없는 통일적인 경제체가 형성되었고 민족의 경계가 없는 신문화가 형성되어 인류의 새로운 역사공동체가 생겨났다고 주장했다.26) 이러한 이론이 18년간에 이르던 브레쥐네프의 시기에 관료주의적 통치를 뒷받침했던 내용이다.

그러나 브레쥐네프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은 계급, 계층적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노동자의 국유, 전 인민적 소유 관계와 농민의 집단적 소유는 계급적 구분을 가져오는 것이었으며 또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으로 인해 노동자와 지식인의 구분 또한 상당했으며,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일치하는 단일한 사회라는 것은 희망 사항을 객관적 현실로 오인하는 주관주의적 주장이었다. 또한 단일한 사회, 민족을 넘어서는 인류의 새로운 역사적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인식은 실제로는 민족 문화, 민족 감정을 억누르는 역할을 함으로써 민족 문제가 브레쥐네프 시대에 새롭게 악화되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브레쥐네프는 러시아가 전체 인민의 큰형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대러시아 민족주의적 관점을 드러낸 것이었다.27) 또한 경제적 측면을 보면 중앙 러시아와 지방의 민족 공화국 간의 경제적 격차는 여전히 상당한 편이었다. 1960년-1970년 사이에 1인당 국민 소득의 공화국 간 격차는 매우 컸는데, 대략 1 대 2.2-2.6의 비율이었다.28) 이러한 상태에서 민족적 차이를 넘어서는 단일한 사회, 새로운 역사적 공동체 운운하는 것은 기만적인 것이었고 소수 민족 공화국의 발전을 억누르는 구실이 되는 것이었다.

브레쥐네프의 발달한 사회주의 개념 그리고 민족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류 역사공동체의 형성이라는 인식은,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 사회주의 진영의 일체화, 국제적 분업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되어 전체 사회주의 진영을 포괄하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관념적인 헛소리인데 수정주의화된 쏘련과 동유럽의 현실을 잘 드러낸 것은 1968년의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사태였다. 1968년 4월 5일 두브체크가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당 제1 서기로 선출되었고 이후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는 시장 친화적인 개혁과 쏘련의 영향력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브체크는 인간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라는 관념적인 이론을 들고나왔는데, 실제로는 시장의 역할 확대, 노동력의 배치 또한 시장에 의할 것 등을 추진하였다.29) 이는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사회가 자본주의로 역전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1968년 6월 27일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들의 2000인 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자본주의 복고 프로그램이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해 쏘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국가들과 함께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진압하였다. 이후 브레쥐네프가 내세운 것이 주권 제한론이며 국제적 독재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었다. 쏘련 스스로의 수정주의로 인해 동유럽에서 자본주의 복고 경향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쏘련의 영향력으로부터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한 것이 객관적 현실이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주권 제한론은 이론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각 민족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또한 각 민족의 민족 국가의 형성의 권리, 민족적 주권의 승인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각 민족의 노동자계급의 자유로운 연합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주권 제한론은 브레쥐네프의 패권주의를 합리화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하물며 소위 국제적 독재라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의 대외 원칙, 대외 정책의 근본은 국제적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발생하는 반혁명, 자본주의 복고 경향의 대두에 대해서는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노동자계급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제어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타당하며, 그 과정에서 민족적 주권은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존중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흐루쇼프 이후 쏘련과 동유럽의 관계는 정상적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관계가 아니라, 쏘련이 쏘련군의 동유럽 주둔을 토대로 하여 경제적으로는 국제적 분업이라는 명목하에 각 국가의 경제적 발전을 통제하는 측면이 강했다. 물론 쏘련은 동유럽 각국에 많은 경제적 원조를 하였고 또 석유 등 주요 원자재를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관계는 대민족 국가에 약소민족 국가가 종속되는 토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는 각 민족 노동자계급의 자유로운 연대를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해서 형성,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68년의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있어서 주권 제한론, 그리고 브레쥐네프의 발달한 사회주의 개념, 인류의 새로운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은 실제로는 수정주의가 초래하는 국내외적인 모순을 은폐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브레쥐네프 하에서 이루어진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은 초기에는 기업 간의 경쟁, 그리고 그동안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주의적 자산을 갉아먹으면서 일정한 경제 성장률을 보였지만,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공업과 농업 모두에서 위기 상태에 놓이게 된다. 공업에서는 경제 성장률이 1970년대 후반 거의 제로 상태로 정체하게 되고 농업에서는 외국에서 수천만 톤의 식량을 수입해야만 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 이래, 중앙의 경제 계획이 겉핥기에 머물고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 개별 기업의 자본주의적 운동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국유, 전 인민 소유와 충돌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암시장, 그림자 경제가 성행하여 불법적인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부패와 향락주의가 성행하고 특권층이 형성되어 인민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의 직접적 원인이 된 1965년의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4. 1965년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과 쏘련 경제의 균열

 

1965년 9월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는 공업 관리 개선, 계획 사업의 완성과 공업 생산에 대한 경제적 자극을 강화하는 것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4일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각료회의는 계획 사업의 완성과 공업 생산의 경제적 자극을 강화하는 것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30) 이 두 결의는, 당시 수상이었던 꼬씌긴이 주도하였다 하여서 이후 꼬씌긴 개혁이라 불렸던, 쏘련에서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꼬씌긴 개혁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 모두를 상품으로 간주하는 이론적 전환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이전에 쓰딸린은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의 문제들≫에서 생산 수단은 쏘련에서 상품이 아님을 밝혔었다. 이는 생산 수단의 생산이 사적 생산자가 아닌 국유 기업의 생산물이며, 또한 생산 수단은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고 국유 기업에서 국유 기업으로 직접 이전된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리베르만의 제안, 그리고 수정주의적 이론은 계획이 아니라 가치 법칙을 경제 규율의 주요 지렛대로 파악하고 소비재만이 아니라 생산 수단 또한 상품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꼬씌긴 개혁은 이러한 이론적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품목별 생산량과 국가에 대한 이윤 상납액만 중앙의 계획에서 결정하고 노동 생산성, 종업원 수, 임금 기금, 투자 등에 대해 개별 국유 기업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이른바 신경제 체제로의 이행이 시작되었다. 국유 기업의 이윤 중심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사실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의 시작이었는데, 왜 그러한가, 어떠한 것이 자본주의적 요소였는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1965년 이전에 국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생산 수단, 설비, 그리고 유동 자금은 국가가 직접 국유 기업에 제공 혹은 조달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제공 혹은 조달은 대가 없이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쏘비에트 국가는 기업에 생산 계획, 투자 계획, 노동 생산성, 임금 기금 등을 계획상의 지표로 지령의 방식으로 내려보냈는데, 이는 생산 기금(고정 기금, 유동 기금의 합)의 무상 제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생산에 필요한 기계 설비만이 아니라 원료, 재료 또한 국가의 조달 계획에 따라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었고 노동자에 대한 임금 기금 또한 국가의 계획에 의해 무상으로 지급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이 꼬씌긴 개혁 이후 전면적으로 변화했다. 국가는 더 이상 국유 기업에 무상으로 기계ㆍ설비와 원료, 임금 기금을 제공하지 않게 되었고 국유 기업은 은행으로부터의 대출을 통해 고정 기금과 유동 기금을 충당하게 되었다. 기업의 투자 자금 또한 더 이상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충당해야 했으며, 단지 투자 규모가 5년 이상의 자금 회수 기간을 필요로 하는 대형 투자만 국가가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31) 즉, 생산 수단, 생산 기금의 무상제가 유상제로 변경된 것이었다. 이는 경제 원칙에서의 중대한 변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상제로의 전환은 국유 기업의 자재와 설비, 기계 등의 생산 수단만이 아니라 노동자 또한 자본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자본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즉 노동자가 단순한 피고용자로 전락한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자재와 설비, 기계 등 생산 수단의 유상제로의 전환을 통해, 생산 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면서, 국가는 고정 기금에 대한 사용료를 국유 기업으로부터 징수하기 시작했다. 국유 기업은 대략 이윤의 6%를 고정 기금 사용료의 명목으로 국가에 지불했다.32) 고정 기금에 대한 사용료를 국유 기업이 국가에 지불한다는 것은 자재와 설비, 건물, 기계 등의 고정 기금이 자기 증식하는 자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고정 기금 사용료의 징수는 국유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이른바 신경제 체제가 수정주의적 혹은 자본주의적 개혁이라고 규정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동 기금이 무상제에서 유상제로 변경된다는 것은, 전 인민 소유제에 따라 국유 기업의 주인이었던 노동자가 피고용자로,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꼬씌긴 개혁에 따라 기업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 지불하는 임금의 크기를 기업 자율로 결정(실질적으로는 기업의 경영층이 결정)하게 되면 기업 내에서 노동자의 권력, 현장 권력은 무력화되는 것이었다. 1965년 꼬씌긴 개혁 이전에 노동력의 배치, 임금 기금의 크기 등은 국가의 통일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었고, 또 기업 내에서 노동자는 공장 쏘비에트를 통해 실질적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주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꼬씌긴 개혁은 전복시킨 것이며 노동자는 실질적인 피고용자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이 노동 위에 서서 노동을 착취하는 관계를 전복시켜서 노동이 자본 위에 서는 관계이며, 이에 따라 자본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단순한 생산 수단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꼬씌긴 개혁은 이러한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재역전시켰던 것이다.

고정 기금을 자기 증식하는 자본으로 간주하여 국가가 국유 기업에서 고정 기금 사용료를 징수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국유 기업은 새로운 기술에 입각한 설비의 채용을 꺼리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새로운 기술 설비를 채용하면 고정 기금의 양이 늘어나 국유 기업이 국가에 더 많은 고정 기금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33) 또한 은행 대출에 대해 대출금을 상환하기 전에는 국유 기업에게 고정 기금 사용료를 면제해 주었는데 기업들은 이러한 면제를 받기 위해 은행에 대한 대출 상환을 회피하게 되었다. 또한 새롭게 공장을 건설할 경우 기업의 경영과 설비의 가동이 공장의 설계 능력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기금 사용료를 면제했는데, 이는 기업이 설계 능력에 빠르게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였다.34) 이와 같이 고정 기금의 사용료를 징수하는 전환은 생산력 발전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개혁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기업이 고정 기금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당시까지 매우 낮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중공업 기업의 생산물의 가격을 인상하게 되었다. 1967년의 도매가격 인상이 그것인데, 1966년에 비해 공업 기업의 도매가가 9% 인상되었고 그중에 중공업 제품은 17.5% 인상되었다. 이러한 인상은 중공업 기업이 사회주의 기업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73년 1월 경공업 제품의 도매가가 5% 인상되었다.35) 이로써 이른바 신경제 체제는 완성되게 되었다. 인민의 입장에서 볼 때 쓰딸린 시기는 한 번의 5개년 계획을 거칠 때마다 임금이 거의 배로 증가하고 또 물가가 지속적으로 인하되어 인민의 구매력이 높아졌었다. 그런데 흐루쇼프 수정주의 이후로는 임금의 인상 폭이 줄어들었고 또 물가도 인상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1962년에는 식료품 가격이 강압적으로 인상되어 몇몇 도시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이는 전국적 사태로 발전되기도 했다. 1965년의 꼬씌긴 개혁 그리고 도매가격 인상은 인민이 물가 인상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꼬씌긴 개혁이 생산력 발전에 역행하는 반동적 성격임은 미완성된 건설 공사의 규모가 거대하게 증대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쏘련에서 미완성된 건설 공사에 투입된 자금의 규모는 1965년 296억 루블에서, 1975년 767억 루블, 1982년 1089억 루블로 증가하였다.36) 이렇게 미완성 건설 공사의 규모가 증대한 것은 건축 자재와 설비 조달의 문제라는 기술적 측면도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 건설 계획을 입안하여 자재, 자원, 자금을 획득하고는 고의적으로 건설의 완공을 늦추었기 때문이었다. 기업에서 무엇보다도 이윤이 1차적이 되면서 국가로부터 자금과 자재를 획득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건설 공사를 계획하고 동시에 공사의 완공을 미루어 자금 유통의 여지를 확보하기 위해 공사의 미완성이라는 방법이 널리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형적으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개별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운동이 충돌하는 사례이며, 꼬씌긴 개혁이 생산력 발전에 역행한다는 것의 증거였다.

또한 기업이 이윤 추구를 1차적 원칙으로 삼게 됨에 따라 이 시기에 단순히 이윤 추구를 위해 계획, 계약을 파괴하고 가격을 높이 올리는 혼란한 상황이 비교적 많이 출현했다.37) 이러한 상황은, 꼬씌긴 개혁으로 인해 기업이 이윤 추구 중심으로 활동과 체계를 재편하면서 자본주의의 기업과 같이 이윤 추구가 지상 목표가 되고, 이를 위해 자의적으로 생산물의 가격을 올리게 되고, 사회주의적 계획은 이윤 추구를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하여 계획 수행을 방기하고 또 국유 기업 상호 간에 맺었던 계약조차 이윤 추구를 위해 서슴없이 파괴하는 경향이 증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꼬씌긴 개혁 이후 신경제 체제하에서 국유 기업은 자본주의적 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품목별 생산물 총량을 규정하는 중앙의 계획은 사실상 무력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며 쏘련 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의 동력과 그 기준은 개별 기업의 이윤 추구의 욕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점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꼬씌긴은 1971년 24차 당 대회에서 보고를 하면서 지령성 계획은 주요하고 결정적 의의가 있다. … 시장의 조절을 이용하여 국가의 집중적 계획의 지도적 작용을 대체하려는 각종의 잘못된 관점을 비판해야만 한다38)고 하였다. 이는 꼬씌긴이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을 했지만 당시 유고쓸라비야와 같은 시장 사회주의는 부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꼬씌긴의 이러한 관점은, 스스로의 수정주의적 개혁으로 인해 개별 기업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으로 운동하게 만들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났던 중앙의 구심력, 중앙의 계획 자체가 이완되고 균열되는 현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모순적인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꼬씌긴의 이러한 입장은 지금의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와 비교해 볼 때, 당시 쏘련에서 관료들의 관료주의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중앙 계획의 존재를 고수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국가가 여전히 국유 기업으로부터 고정 기금 사용료뿐만 아니라 이윤의 상당액을 상납받는 경제적, 정치적 근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내부적으로 해체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해체적 작용을 사회주의의 토대 위에서 수행하는 것이며, 또한 맑스주의의 해체를 맑스주의의 틀 안에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쓰딸린 이래 확립되었던 중앙의 경제 계획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꼬씌긴의 이러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쏘련 경제 전체적인 통일적인 경제 계획은 균열되고 있었고 나아가 각 부문의 비례적인 발전은 점차 생산의 무정부성에 의해 침식되고 균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쏘련의 경제는 꼬씌긴 개혁 이후 잠깐 반짝하다가 이후 하강 곡선을 그리고 1970년대 말이면 완전히 정체하고 균열된 양상을 보인다. 경제 성장률은 1961년-65년에 연평균 6.5%, 1966년-70년에 7.7%, 1971년-75년에 5.7%, 1976년-79년에 4.4%로 하강하였다. 즉, 1966년부터 꼬씌긴 개혁의 영향으로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고 이윤 추구 동기가 강화되면서 경제 성장률이 상승했지만 1970년대 들면서 경제 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강했다. 특히 노동 생산성 증가율은 1960년-65년의 연평균 5.6%에서 1976년-79년에는 3.3%로 저하되었다. 이는 이윤 추구 동기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 자체가 균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짚어야 할 것은 1970년대가 되면서 자본주의 세계가 공황에 접어들고, 특히 석유 위기로 인해 국제적인 석유 가격이 몇 배나 인상되어 쏘련이 석유를 높은 가격으로 몇 배나 많은 물량을 수출하여 많은 이익을 얻고 있어서 1970년대의 쏘련 경제의 침체의 실상이 가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쏘련의 경제가 1970년대 말에 거의 정체 상태로 균열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 투자 증가율이 급격히 저하하여 1979년에 단지 0.7%의 투자 증가를 기록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39) 즉, 쏘련 경제는 확대 재생산이 멈추고 내적 균열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농업의 상황을 보면 더욱더 심각하여 농업 생산 증가율이 지속적으로 저하하여 1982년에는 마이너스 2%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3년에 1,904만 톤의 곡물을 해외에서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1981년-82년에는 거의 3,000만 톤의 식량을 수입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세계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40) 꼬씌긴 개혁을 필두로 한 브레쥐네프 수정주의의 경제 정책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이렇게 파산하고 있었다.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으로 인한 쏘련 경제의 이러한 균열은 쏘련 사회주의 자체를 위기에 처하게 했다. 그런데 흐루쇼프, 브레쥐네프 수정주의 세력의 지배는 경제를 균열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특권층이 형성되게 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제도를 전복하려 하는 반체제 세력까지 배양하였는데, 이제 이 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5. 특권층(노멘끌라뚜라)의 대두, 그리고 쏘련 사회주의 해체 요소의 성장

 

브레쥐네프는 발달한 사회주의 단계에 쏘련이 진입했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쏘련에서 노동자계급이 압도적 다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이면 쏘련에서 국유 기업의 직원과 노동자가 전체의 88.5%를 차지하고 집단 농장의 농민은 단지 11.5%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이 쏘련 사회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지고, 사회는 단일성의 사회로 변화했다는 브레쥐네프의 발달한 사회주의론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유의 노동자계급이 압도적 다수가 되었다 해도 집단 농장의 농민이 10% 넘게 존재하여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계급 구분이 존재했고 또 노동자계급과 지식인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에 기초하여 계층적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그런데 흐루쇼프에 의해 시작되고 브레쥐네프에 의해 계승된 전 인민 국가론은 실제로는 당 관료들의 관료주의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론에 불과했다. 전 인민 국가는, 곧 전 인민에 대한 국가, 관료주의 국가로 작동했던 것이다. 브레쥐네프 하에서 관료들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실현됨에 따라 관료들에 대한 대중의 감독과 파면이 소멸하고, 관료들은 간부 종신제에 기초하여 인민 위에 군림하게 되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보수적 사고가 지배하고 관료주의가 성행하였고 이로부터 이익 집단과 특권 계층이 형성되었다.41)

노멘끌라뚜라라고 쏘련에서 불렸던 특권층은 흐루쇼프 시기에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브레쥐네프 시기에 완전한 세력으로 형성되고 완성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특권층과 쏘련 사회에 존재하는 일반적 격차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의 문제가 그러하다. 1930년대-1950년대 초반까지 쓰딸린 시대에는 임금에서 평균주의를 제거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35년간의 시기에 업종 간, 업종 내부에서 임금 격차는 평균 1 대 2 정도에서 1 대 3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임금 격차의 확대는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은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 고급 기술 노동과 저급 기술 노동을 구분하여 숙련노동과 고급 기술 노동을 우대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생산력 발전의 방향에 부합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착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원칙은 사회주의적 제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흐루쇼프와 브레쥐네프 시기에 표면상의 임금 격차는 줄어들었다. 임금액에서 최저 10%의 노동자와 최고 10%의 노동자 간의 격차가 1946년 7.24배에서 1956년 4.44배, 1966년 3.26배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임금 격차의 축소로 인해 숙련, 고급 기술 노동자는 노동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고, 기업에서 전력을 다해 노동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1/3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노동 규율이 이완되어 이유 없이 결근하거나 조퇴하는 현상이 광범하였다.42)

흐루쇼프와 브레쥐네프 하에서 임금 격차는 줄어들었지만 임금, 수당과는 차원이 다른 부패가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권력을 지렛대로 하여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쏘련 공산당 20차 대회는 이후 탐오 수뢰의 전환점이 되었다. 중앙의 경제 관리 권한을 하방하는 개혁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지도 간부 중에서 이익 집단이 출현하였다. 동시에 지도 간부가 권력으로써 사적 이익을 도모하여 경제적 수입을 획득하는 방식이 출현했다. 브레쥐네프 시기 지도 간부가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수입의 방식은 더욱더 많아졌다. 직무와 관련이 있는 특수한 생활상의 대우의 확대와 더불어, 권력으로써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대규모로 범람하여 임금, 수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입을 제공했다. 비록 1950년대 하반기 이후 지도 간부와 대중 사이의 임금 격차는 줄었지만, 지도 간부는 특수한 생활상의 대우와 권력으로써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통해 대량의 경제적 이익을 획득했고, 대중과의 경제적 격차를 확대시켰다.43)

이러한 분석은 수정주의가 출현했던 20차 당 대회를 기점으로 이데올로기가 변질되기 시작하고 또 경제적 권한이 지방, 지역으로 많이 하방됨에 따라 권력을 이용하여 수뢰하고 이권을 챙기는 권력형 비리가 만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서서히 이익 집단이 특권층으로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특권층은 브레쥐네프 시기 완성되어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흐루쇼프의 위대한 십년의 개혁의 말기에, 정권을 지렛대로 이용하는 이익 집단들이 수없이 이미 생겨났다.44) 이러한 분석은 흐루쇼프의 10년이 노멘끌라뚜라라 불리는 특권층의 형성기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쏘련의 경제 규모가 거대해지고 또 국가의 성격 자체가 전 인민 국가론에 의해 관료주의 국가로 규정되면서 권력이 곧 돈이 된다는 인식이 광범하게 확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브레쥐네프 시기 상품-화폐관계를 이용하는 개혁은 간부의 사욕을 자극했다. …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요소의 작용하에서, 특권 계층이 흐루쇼프의 사임 이후 강대한 정치적 세력으로 최종 형성되었다.””45) 이는 흐루쇼프 수정주의, 브레쥐네프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이 권력으로써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부패 현상을 자극했으며 이로 인해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 이후 특권층, 노멘끌라뚜라가 최종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브레쥐네프 시기에 시작되어, 쏘련은 기층에서부터 중앙까지, 생산, 써비스, 교육, 위생 보건, 문화, 체육, 예술, 문학, 과학, 관리 등 각각의 사회 영역에서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이익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이들 이익 집단은 규모가 다르고, 집단의 이익을 구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그 성원들은 3가지의 공통점을 드러냈다. 첫째, 이념의 측면에서, 그들은 몸은 공산당원이었지만, 이미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었다. 맑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미 습관적으로 감동을 받지만 흘려버리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었다. 동시에, 몸은 공산당의 지도자였지만,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한다는 목표와 인민을 위해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회적 책임감을 이미 상실했다. … 둘째, 인민이 부여했고 인민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권력은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한 특권으로 변질되었다. … 그리하여 이익 집단의 대표적 인물이 담당하는 사업은 종종 자신의 능력에 부합하지 않았고, 자신의 재능에 부합하지 않는 직무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간에 집단 성원들을 비호했다. … 이외에 이들 소집단은 다른 사람이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재능이 발휘되는 것을 방해하고 그 일이 중도에 멈추도록 하였다.46) 이러한 분석과 서술은 쏘련에서 수정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사회가 부패하는 현상을 보여 주는데 수많은 영역에서 형형색색의 이익 집단이 형성되어 마치 마피아처럼 서로 비호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타인의 사업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이익 집단은 일반적인 관료주의자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관료주의적 부패는 권력을 통해 이익을 도모하더라도 그것이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것이지만, 이익 집단으로서, 특권층으로서, 이들은 권력으로써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정형화되는 단계로 발전하여 인민과 괴리된 배타적인 집단으로 형성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47)

흐루쇼프 하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브레쥐네프 시기에 완성된 이익 집단, 노멘끌라뚜라는 1980년 무렵에는 이미 정권의 기본 주체가 되었고 스스로를 쏘련 공산당의 정치국 위에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48) 이는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자본들이 자신들을 사회의 지배자로 규정하면서 인민들 위에 군림하며 인민과 괴리된 사회 집단을 형성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들의 부패의 사례를 들어 본다면 브레쥐네프의 사위를 들 수 있는데, 브레쥐네프 사망 후 부패 혐의로 체포된 브레쥐네프의 사위는 당시 노동자의 평균 연봉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러한 이익 집단, 특권층, 노멘끌라뚜라의 숫자는 대략 50-7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가족까지 합하면 300만 명에 이르는 수치였다.49) 이들은 호화 별장, 특권층만이 이용할 수 있는 상점, 각종 편의 시설 등을 향유했다. 이러한 특권층의 형성, 부패 현상의 확산 속에 브레쥐네프 시기에 향락주의가 성행했는데 브레쥐네프 스스로가 사냥과 자동차 수집에 열중했다.50)

노멘끌라뚜라의 형성, 사회적 부패 현상과 함께 경제 영역에서 암시장, 그림자 경제의 형성이 쏘련 사회주의 해체 요소의 성장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국유 기업 자체가 이윤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암시장 혹은 그림자 경제는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그림자 경제는 3가지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 비교적 가벼운 부분으로서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고 또 법률을 공공연하게 위반하지는 않으면서 법률 언저리에서 일정하지 않은 활동을 하는 것, 둘째, 쏘비에트 법률을 파괴하는 활동을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불법이 아닌 활동, 셋째, 쏘비에트 법률도 파괴하고 자본주의에서도 불법인 활동이 그것이다.51) 이러한 그림자 경제의 성장은 쏘련 내에서 체제 외적인 경제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 세력의 성장은 1980년대 고르바쵸프 시기에 자본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의 경제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이외에 수정주의가 각종 모순을 발생시키면서 배양된 반체제 세력이 쏘련 사회주의 해체의 요소로서 성장해 갔다. 상이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불렸던 이들 반체제 세력은 흐루쇼프의 쓰딸린 탄핵 이후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8년 체쓰꼬-쓸로벤스꼬(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대해 브레쥐네프가 무력으로 진압한 이후, 이에 항의했던 싸하로프가 중심이 되어 반체제 세력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권 운동, 민주주의 쟁취, 언론ㆍ출판의 자유 등을 요구하면서 저변을 넓혀 갔다. 이는 일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 브레쥐네프의 잘못된 민족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수 민족들의 불만이 높아져 갔고, 주요하게는 우끄라이나, 발트 3국, 그루지야, 아르메니야, 끄림의 따따르인 등이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들은 종교의 자유와 문화적 자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들 민족주의 세력은, 1980년대 말, 90년대 초 쏘련의 해체에서 연방의 붕괴 및 민족 공화국들의 독립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쏘련 사회주의 해체의 요소로 성장하는 조류였음을 알 수 있다.52)

노사과연

 

 


 

1) 陆南泉, ≪苏联经济体制改革史论(쏘련경제체제개혁사론)≫, 人民出版社, 2007, p. 167.

 

2)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원문은 인터넷을 참고하거나, 그로버 퍼의 저작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했다(Khrushchev Lied)≫를 참고하시오.

 

3)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人民出版社, 1993, pp. 678-681.

 

4) 같은 책, pp. 681-683.

 

5) 같은 책, p. 700.

 

6) 중-쏘 논쟁의 쟁점들과 그에 대한 평가는, 문영찬, “쏘련 수정주의의 등장과 중-쏘 논쟁”, ≪노동사회과학≫ 제4호, 노사과연, 2011을 참조하시오.

 

7) 陆南泉, 앞의 책, pp. 184-185.

 

8) Lenin, “Marxism and Revisionism”, Selected Works(Three Volumes), Vol. 1, Moscow: Progress Publishers, p. 50.

 

9) 사회주의 사회와 운동 내의 편향과 수정주의의 동일성과 차이성에 대해서는, 문영찬,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의 발전”, ≪노동사회과학≫ 제6호, 2013을 참조하시오.

 

10)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629.

 

11)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사회주의경제사)≫ 第六卷, 东方出版社, 1979, p. 703.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쏘련에서는 7차례 소매가격이 인하되어 전체적으로 소매상품의 가격이 56.3% 인하되었다.

 

12) 같은 책, p. 285.

 

13) 陆南泉, 앞의 책, p. 191.

 

14)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第七卷, p. 291.

 

15) 陆南泉, 앞의 책, pp. 146-147.

 

16)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第六卷, p. 532.

 

17) 陆南泉, 앞의 책, pp. 163-164.

 

18) 같은 책, p. 163.

 

19) 같은 책, p. 234.

 

20)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645.

 

21) 같은 책, p. 649.

 

22) 리베르만, “계획ㆍ이윤ㆍ상여금”, ≪ソヴエト經濟と利潤(쏘비에트 경제와 이윤)≫, 日本評論社, pp. 54-62.

 

23) 같은 책, p. 162.

 

24)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p. 771-772.

 

25) 陆南泉, 앞의 책, pp. 392-393.

 

26)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p. 735-736.

 

27) 같은 책, p. 755.

 

28)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第七卷, p. 603.

 

29)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p. 766-770.

 

30)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第七卷, p. 94.

 

31) 같은 책, pp. 128-129.

 

32) 陆南泉, 앞의 책, p. 301.

 

33) 같은 곳.

 

34) 같은 책, p. 302.

 

35)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第七卷, pp. 219-220.

 

36) 陆南泉, 앞의 책, p. 407.

 

37) 같은 책, p. 291.

 

38) 같은 책, p. 367.

 

39)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第七卷, p. 213.

 

40) 陆南泉, 앞의 책, p. 274.

 

41) 黄立茀, ≪苏联社会阶层与苏联剧变研究(쏘련사회계층과 쏘련급변연구)≫,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06, p. 274.

 

42) 같은 책, p. 269.

 

43) 같은 책, pp. 124-125.

 

44) 같은 책, p. 286.

 

45) 같은 책, p. 287.

 

46) 같은 책, pp. 282-283.

 

47) 같은 책, p. 280.

 

48) 같은 책, p. 289.

 

49) 陆南泉, 앞의 책, p. 384.

 

50) 黄立茀, 앞의 책, p. 287.

 

51) 같은 책, p. 309.

 

52)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p. 729-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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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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