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5)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5장 제2차 세계 대전과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성립

 

 

1. 파씨즘의 등장과 전쟁 위기의 격화

 

쏘련에서 1차와 2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어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국제 정세는 매우 엄혹하게 전개되었고 파씨즘의 등장으로 전쟁 위기가 직접적으로 격화되어 갔다. 1차 5개년 계획의 말기인 1933년에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찌당이 집권하였다. 나찌는 극우 이데올로기를 공공연히 표방했는데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를 기초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고 특히 쏘련을 침략하여 식민지화, 노예화하겠다는 의도를 공언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씨즘의 등장에 대해 쏘련의 볼쉐비끼 당은 파씨즘은 금융자본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라고 규정했는데 1920년대 말의 세계 대공황의 발발에 대한 금융자본의 대응 양식의 하나로 파악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5년에 개최된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는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이 채택되었는데 파씨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여 반파쑈 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은 노동자계급을 구성하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연합에 기초하여 연합의 범위를 파씨즘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에게까지 확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은 부침은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갔고 결정적으로는 2차 대전에서 나찌에 반대하는 영국과 미국, 쏘련의 연합을 통해 군사적 차원으로까지 관철되어 2차 대전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런데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러한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에 대해 계급 협조 노선이라고 규정하고 스페인에서는 파씨스트 군대의 반란으로 공화국이 위험에 처한 순간에 공화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극좌적 행동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뜨로쯔끼주의자들이 통일전선 전술의 참된 계급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통일전선은 자본가계급과 협조 노선을 걷는 사회민주당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계급 협조를 멈추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이루는 데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노선이었고 그것이 1920년대 코민테른이 제시한 노동자 통일전선이었다. 즉, 계급 협조를 비판하며 노동자계급의 통일과 단결을 추구한 것이 통일전선의 알맹이였던 것이며 반파쑈 인민전선은 이러한 통일전선의 범위를 파씨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즉, 계급 협조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통일에 기초하여 때로는 반파쑈 인민전선으로, 때로는 반제 민족통일전선 등으로 다양하게 관철된 것이 통일전선 전술의 실제였다.

독일의 나찌, 이딸리아의 무쏠리니, 일본의 군국주의 등 유럽과 세계적 차원에서 파씨즘 세력이 확대되어 가는 상황은 국제 정세를 긴장시키고 전쟁 위기를 격화시키는 것이었다. 독일과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자신들의 패권적 행보를 시작했다. 이에 대해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쏘련을 국제연맹에 끌어들여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고 쏘련 또한 국제연맹이 제국주의 세력의 도구에서 전쟁을 억지하고 평화를 보존하는 도구로 변화될 수 있다고 보고 1934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쏘련은 유럽의 집단 안전 보장 체제의 구축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1933년 미국과 쏘련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는데 주요 국가들 중에서 미국은 쏘련에 대한 외교 관계 수립을 거부해 온 마지막 국가였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적 행보에 따라 미국은 쏘련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렸던 것이다. 1935년 이딸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또한 1936년 7월 파씨스트 프랑꼬가 스페인 공화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고 독일과 이딸리아는 프랑꼬 세력에 대해 무기와 병력을 보내 지원을 하였다. 이에 대해 쏘련은 공화국을 지원하여 무기를 원조하고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세계 각국에서 반파쑈 세력이 결집하여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하는 국제여단을 창설하여 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불개입주의를 천명하여 독일의 스페인 내전에 대한 무력 개입을 사실상 방조하였고 쏘련의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무기 수송 등을 방해하였다. 그리하여 스페인 내전은 향후 발발하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축소판, 리허설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파쑈 인민전선 전술은 서서히 관철되기 시작했는데 1934년 프랑스에서 공산당과 사회당 사이에 반파쑈 통일행동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선거에서 인민전선 측이 승리하여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어 프랑스에서 파씨즘 세력의 집권을 일정 기간 저지할 수 있었다. 이때 독일과 일본은 반공협정, 즉,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하여 자신들이 쏘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임을 내세워 자신들의 패권적, 군국주의적 행보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파씨즘 세력과 반파쑈 인민전선 세력이 세계 정치의 양대 구도로 서서히 형성되게 되었고 중간에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세력이 자리 잡는 형국이 되었다.

쏘련은 유럽의 집단 안전 보장 체제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개별 국가와의 협정을 맺었는데 1935년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히틀러와 야합하는 세력이 강화되면서 조약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937년 동아시아에서는 중-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중국 측에서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공산당과 국민당이 연합하는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였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의미하였다. 유럽에서도 스페인 내전이 격화하는 가운데 독일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고 이어서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하여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의 할양이 그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쏘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협정에 따라 군사적 원조를 포함한 원조를 제의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 측이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고 또 쏘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 가기 위해 경과해야만 하는 폴란드 또한 쏘련군의 통과를 거부하였고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권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1938년 뮌헨에서 독일과 회담하여 수데텐 지역의 합병을 용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뮌헨 회담은 2차 대전의 역사에 있어서 독일의 침략 야욕을 용인하여 부추긴 회담으로 악명이 높은데 영국과 프랑스가 이러한 행보를 하였던 것은 히틀러와 타협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또 독일의 침략의 예봉을 동쪽으로, 쏘련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수데텐 지역을 합병한 독일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는 프랑꼬의 파씨스트 세력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공화국을 전복하고 파씨스트 체제를 수립하였다. 쏘련의 동쪽에서도 상황은 긴박해졌는데 1938년 하싼호 지구에서 일본의 관동군이 쏘련 측을 무력으로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다. 또 1939년에는 쏘련과 동맹 관계였던 몽고에 대해 일본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쏘련군에 의해 참패하고 퇴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쏘련의 입장에서 서쪽의 유럽 지역과 동쪽의 아시아 지역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될 수도 있다는 것, 독일과 일본의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쏘련은 전쟁의 발발을 늦추고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적, 정치적 노력에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었다.

1939년 3월 10일 제18차 당 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쓰딸린은 제국주의 세력의 술책으로 인해 쏘련이 전쟁에 끌려 들어가는 상황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쏘련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최후의 담판을 하게 되었는데 히틀러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의 형성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소극적이었고 히틀러를 자극하여 쏘련을 침공하게 하려는 의도가 명백해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련은 독일과 비밀 교섭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 1939년 8월 쏘련과 독일 간에 불가침 협정이 체결되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쏘련으로부터의 공격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는 서유럽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쏘련으로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맞선 집단 안전 보장 체제의 형성을 사실상 거부하고 독일의 공격 방향을 동쪽으로 돌리려고 하는 시도에 맞서 쏘련과 독일과의 전쟁 발발을 최대한 늦추고자 함이었다. 한편 쏘련은 동쪽 아시아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과의 교섭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 1941년 4월 25일 쏘-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당사자 일방이 전쟁 상태에 들어갈 경우 상대국은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아시아 쪽에서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저지한 것으로서 쏘련 측이 유럽 쪽의 전쟁 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쏘련은 일본과 이러한 조약을 맺었지만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 측의 항일 투쟁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였다. 이에 대해 마오쩌뚱은 일본에 맞선 중국 인민의 투쟁에 대해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쏘련만이 충심 어린 지원을 하였다고 서술한 바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한 후에도 군사 작전을 전개하지 않고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즉, 폴란드를 공격한 독일이 이어서 쏘련을 공격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쏘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방향을 서유럽으로 돌렸고 벨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그리하여 나찌 독일은 영국을 제외한 거의 전 유럽을 석권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독일의 군사적 행동에 대해 쏘련은 기민하게 대응했는데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쏘련군은 폴란드 영내로 진격하여 쏘련의 서부 국경 지역을 군사적으로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독일의 군사적 행동에 대응하여 서벨로루씨와 서우끄라이나를 쏘련은 확보하였는데 이는 쏘련의 국경에서 독일군과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군사적 조치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또한 1939년 11월 30일 쏘련과 핀란드와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핀란드와 인접한 레닌그라드 지역의 안전을 담보하고 또 부르주아 핀란드가 독일 측에 가담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프랑스 빠리에 입성했을 때 쏘련 측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에 대해 정치적, 군사적 조치를 취했는데 이들 나라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이들 나라가 대쏘 침략의 발판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발트 3국에서 인민들의 투쟁과 쏘련 측의 지원이 결합되어 부르주아 정부가 전복되고 쏘비에트 공화국이 성립되어 이후 쏘연방에 가입하게 되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히틀러는 공격의 방향을 발칸 반도로 돌려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유럽 대륙 전역이 파씨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독일은 이후 병력을 대거 동쪽으로 이동하여 쏘련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2. 1930년대 후반 쏘련 내부의 계급투쟁과 3차 5개년 계획

 

제1차 5개년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쏘련 내의 부농계급은 소멸하였다. 그리하여 쏘련에서 착취계급은 사라졌고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완성되어 쏘련은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계급의 격렬한 저항은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낳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1920년대 노선 투쟁에서 패배한 뜨로쯔끼, 지노비예프, 부하린 세력이 다시 비밀 결사로 결합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반대하는 반체제 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 후반의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들 반대파 세력의 비밀스런 결집은 1932년경에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이후 나찌 독일과 결탁하여 나찌의 쏘련 침공이 이루어질 경우 나찌와 연합하여 쏘련의 쏘비에트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활동을 하였다.

1934년에 쏘련 공산당의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던 끼로프가 레닌그라드에서 암살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이전의 반대파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자기비판하고 공개적인 직책에서 활동을 하는 모습을 취하였다. 그러나 끼로프 암살 배후에 대한 조사의 결과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블록이 깊이 관여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이들 세력은 1936년의 재판을 거쳐 심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후에 비밀 연설을 통해 끼로프의 암살에 쓰딸린이 관여되어 있다는 식의 암시를 하였으나 그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블록의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공개된 재판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고 또 재판에 참관했던 서방측 인사와 대사관원들 등은 재판 과정이 공정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1) 그리고 1937년에는 뚜하체프쓰끼 등 군 장성들이 관련된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재판이 진행되어 심판받았다. 이들 군 인사들은 나찌의 침공이 시작될 경우 쏘련 내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쏘비에트 정부를 전복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재판 결과 밝혀졌다.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후일의 비밀 연설에서 이들 군 장성들의 혐의가 쓰딸린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고 이들 피고인들은 재판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고 또 이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었다.2)

그리고 뜨로쯔끼-지노비예프 블록, 그리고 뚜하체프쓰끼 재판과 성격이 다른 숙청이 1937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각 지역의 주요 당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혁명 후 있었던 많은 숙청의 경우는 밑으로부터 대중들의 비판을 통해 출세주의자와 관료주의자들을 걸러 내는 것이었는데 대부분 하급 당 관료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역의 당 지도부들, 당의 고급 관료들은 이러한 숙청의 흐름을 피해 나가는 데 능숙했는데, 사회주의 건설이 일정하게 이루어지고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수립되어 사회 전체의 사회주의적 지향이 강화되어 가던 흐름을 기초로 거물급 관료주의자들을 밑으로부터 비판을 통해 숙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숙청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재판과는 성격이 다르며 밑으로부터 대중들의 비판을 통해 교정 가능한 관료주의자들은 교육 등을 통해 교정하고 교정 불가능한 관료주의자들은 직책에서 물러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서방측의 제국주의자들은 숙청의 성격을 구분함이 없이 한데 몰아서 1930년대의 대숙청이라고 선동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숙청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료주의자들에 대한 숙청과 다른 또 다른 반역 사건이 재판되었는데 그것은 1938년의 부하린 그룹에 대한 재판이었다. 부하린, 라데크 등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고 공개적인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모습을 취하였으나 비밀스럽게 조직을 결성하고 뜨로쯔끼-지노비예프 그룹과 연계를 갖고 나아가 나찌 등장 이후에는 나찌의 침략의 경우 쏘비에트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계획한 것으로 재판 결과 밝혀졌다. 이 재판의 피고인들은 공개된 재판에서 자신들의 유죄를 인정하였고 재판의 공정성은 서방측 참관자들에 의해 인정된 바가 있었다.

그러데 이렇게 대외적으로 국제 정세가 악화되어 가고 전쟁 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상황에서 국내적으로 반체제, 반역을 도모하는 음모들이 발각되고 재판이 진행되자, 이는 쏘비에트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고 과거의 반대파 전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검거와 조사, 재판 등의 거대한 바람이 되었다. 특히 지방 공화국들의 제1 서기들의 주도에 의해 대량 검거와 재판, 그리고 심지어 처형이 진행되었는데 흐루쇼프 또한 우끄라이나 공화국 제1 서기로서 당시에 대량의 체포와 진압, 처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38년에 격화된 이러한 체포와 재판, 처형의 흐름은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측면이 상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상황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당 지도부에 의해 숙청을 주도하던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책임자인 예조프가 베리야로 교체되어 상황을 바로잡게 되었다.

베리야가 NKVD의 책임자가 되어 진상을 조사한 결과 상당수의 사람들이 무고하게 혐의가 조작되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힌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하여 1939년, 1940년 2년간에 걸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옥에서 석방되었다.3) 그리고 추후 조사에서 이러한 무모하고 불법적인 조사 혹은 조작을 자행한 NKVD의 전(前) 책임자인 예조프가 부하린의 우익 그룹의 음모의 가담자이었음이 재판 결과 밝혀졌다. 예조프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법적인 고문을 받아 혐의가 조작되었다는 것이 재판 결과 드러났고 불법적인 고문을 자행한 자들 또한 재판을 받아 심판받았다.

이러한 것이 1930년대 모쓰끄바 재판과 대량 숙청이란 일컬어지는 것의 실제 내용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수백만 명이 무고하게 숙청, 처형되고 감옥, 노동수용소에 갇혔다고 조작을 하여 반쏘 선전을 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에 거주하는 망명 활동가인 마리오 소사는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에서 자신이 직접 조사, 분석한 바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39년 노동수용소와 노동이주지, 구치소 전체에는 약 2백만 명의 수형자가 있었다. 이 중 정치적 범죄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콘퀘스트가 주장하는 9백만 명이 아니라, 약 45만 4천 명이었다. 그리고 1937년-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그가 주장하는 3백만 명이 아니라, 16만 명이었다.4) 즉, 마리오 소사에 의하면 1939년 당시 정치범의 숫자는 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백만 명이 아니라 45만 4천 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는 쏘련의 형사법적 자료에 대한 조사에 근거한 것으로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리오 소사는 각종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37-38년 사이에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수는, 서방의 선전이 주장해 온 것처럼 수백만 명이 아니라, 대략 1십만 명 정도5)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전부가 사형 집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후에 감형이 상당수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실제 1930년대 후반 정치적 이유로 사형이 이루어진 사람은 10만 명 미만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10만 명이라는 이 숫자는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는 숫자이다. 이와 같이 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당시의 정세가 극도로 긴장이 격화되고 있던 시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쏘련이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수립에 성공하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날이 성취를 이루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쏘련 내부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회의하고 심지어 나찌와 결탁하려던 세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쏘련이 자본주의에 포위된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당시의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여기서 1930년대 후반 정치적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아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1939년, 1940년에 베리야에 의해 무고함이 입증되어 석방된 사람이 10만 명이 넘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재조사되고 확인될 필요가 있을 것이며 이는 또 다른 차원의 연구, 조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조프 하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혐의가 조작되어 처벌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10만 명에 달한다는 것은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의 행사가 정확성과 정교함에서 일정하게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어디까지가 당시 쏘련 사회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의 한계이고, 어디까지가 오류인지는 보다 정확한 연구와 조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1930년대 후반의 모쓰끄바 재판과 숙청은 쏘련 사회 내에 존재하는 반역 세력을 제거함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내부적으로 통일된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성을 갖는다. 실제로 나찌가 침공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 내부의 친나찌 세력이 호응하여 나찌는 쉽게 점령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쏘련은 1930년대 후반의 반역 세력의 제거로 인하여 이것이 불가능하였다는 점이 쏘련이 전쟁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주요한 조건의 하나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모쓰끄바 재판과 숙청의 부정적 영향을 보면, 쏘련 사회 전체를 경직화시켰다는 점, 특히 당내에서 자유로운 사상적 토론과 견해의 표출, 이견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하는 등 당을 경직화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경직된 상태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부정적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전후 복구 시기 그리고 1950년대 초반 쓰딸린의 사망을 전후하여 볼쉐비끼 당이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노선을 정립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더 높은 수준으로 개혁해 나가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보수적인 관료들의 반동을 허용한 결과 흐루쇼프의 수정주의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즉, 당원들, 당 활동가들은 관료형 인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며 당은 그러한 사람들의 집합체로서 사상에 기초한 노선의 정립을 자신의 생명으로 하는데, 2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당 활동가의 전형은 경제를 비롯한 행정에 관여하는 기능적 인간으로 어느덧 변모하고 있었던 것이다.6)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숙청의 부정적 측면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2차 대전 발발 전까지의 국제 정세와 쏘련 내의 정세는 긴장의 연속이었고 전쟁의 발발을 최대한 늦추면서, 그럼에도 불가피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이 경주되던 시기였다. 경제의 영역에서 쏘련은 3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력의 강화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고 국가 예산에서 국방비의 비중, 그리고 전체 경제에서 군수 산업의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한 시기였다. 제3차 5개년 계획은 화학과 특수강의 5개년 계획이라 불렸다. 지난 1차와 2차 5개년 계획이 중공업, 특히 기계제조업의 건설을 강조했다면 산업의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여 화학 산업의 건설이 강조되고 있었고 또한 무기의 제조에 쓰이는 특수강 산업의 건설이 중시되었다.

1941년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쏘련의 경제 건설은 순조롭게 전개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3차 5개년 계획의 3년간에 쏘련의 공업 총생산은 45% 증가하였고 소매상품 유통액은 1937년 144억 루블에서 1940년 204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또 7시간 노동제가 중지되고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전환하고 주 7일 노동이 되었다. 또 공장과 작업장에서 자의적인 이탈, 이직이 금지되었고 병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부족한 노동력을 여성과 청소년의 참가를 늘려 보충하였다. 여성의 경제 참가율은 1937년 36%에서 1940년 39%로 증가하였다. 18세 이하 청소년의 노동 참가는 1939년 6%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난 직후인 1942년에는 15%로 증가하였다. 1940년에 전체 경제에서 군수 산업의 비중은 15%였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942년에는 국민소득의 57-58%가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기간에 국가 예산에서 국방비의 비중은 18.6%에서 32.6%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쏘련은 독일과 불가침 협정을 맺고 있어서 독일의 쏘련에 대한 침공의 시기를 늦추어 잡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예상보다 빠른 1941년 6월에 전격전을 감행하여 침공했는데 이때는 쏘련의 대부분의 산업이 전시 생산으로 전환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러한 전환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쏘련과 독일의 경제적 실력을 비교하면 독일은 자체만으로도 철강과 석탄 등에서 쏘련을 앞서고 있었고 또 유럽 전역을 석권한 상태에서 그들 나라의 자원을 지배하고 있어서 경제적 실력 면에서는 쏘련이 객관적으로 열세였다. 그러나 쏘련은 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기업, 대공장들의 설비와 인원을 동부 지역으로 소개하여 생산력을 보존하였고 또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동부 지역에 수많은 공장 등을 건설하여 군수 산업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쏘련은 독일에 비해 적은 물자로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 내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질적으로도 독일보다 우수한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어 1943년부터는 무기에 있어서 독일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전시 경제의 조직화에 있어서 단지 자원이 많은가 아닌가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결정적 의의를 갖는 것은 생산 방식, 사회 제도, 국가 제도의 성질과 특징, 각 계급 간의 관계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7) 실제로 독일은 전시 경제에 있어서조차 독점자본들에게 이윤을 보장해야 했지만 쏘련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3.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전시 경제의 조직화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독일군은 발트해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수천 킬로미터의 전선에서 쏘련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전격전이라 불리는 독일군의 공세는 탱크 등 기계화 사단을 앞세워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상대방의 방어선을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 개전 초기에 독일군의 기습 공격으로 쏘련은 비행장에 있는 비행기 수백 대가 그대로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고 또 전선에 비축해 놓았던 수많은 무기와 군수 물자들이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던 독일군은 쏘련과의 전쟁에서도 처음에는 불패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7월 하순 독일군은 쓰몰렌쓰크에서 쏘련군과 맞붙었는데 이 전투는 무려 2개월간이나 전개되었고 독일군의 전격전이 최초로 저지된 전투였다. 이로 인해 쏘련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전선을 꾸릴 수 있었고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전략과 전술, 군수 지원 등 전쟁에 따른 대비를 완수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있고 나서 며칠 후인 1941년 6월 30일 쓰딸린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방위원회가 수립되어 전쟁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집중하고 물자의 집중과 분배, 병력의 동원, 군수 산업의 조직화 등을 수행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1년 7월 3일 쓰딸린이 라디오에서 쏘련 인민에게 연설을 하였고 볼쉐비끼 당은 모든 것을 전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승리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제기하였다.

쓰몰렌쓰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25만 명의 병력을 상실하는 등 일차로 저지되었지만 탱크 등 기계화 사단을 앞세우고 또 수백만 명에 이르는 독일군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고 독일군은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로 진격하여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기에 이르고 중앙에서는 모쓰끄바로 진격하였고 남쪽에서는 우끄라이나로 치고 들어가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500일간의 나날을 견디어 내었는데 호수 하나를 통해 간신히 식량과 물자가 보급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닌의 도시를 독일군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볼쉐비끼 당과 레닌그라드 시민의 결의는 독일군에 대한 인민 전쟁을 가능하게 했다. 레닌그라드 시민은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가운데에서도 폐허 속에서 노동을 하여 무기를 만들어 내었고 독일군과 맞섰다.

독일군의 주력은 중앙부의 모쓰끄바로 집중되고 있었다. 1941년 10월 10일 독일군의 주력 부대는 모쓰끄바로부터 100km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독일군은 수도인 모쓰끄바를 점령하여 쏘련군과 인민의 저항 의지를 꺾고 연말까지 쏘련 점령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른바 전격전에 따른 전쟁의 신속한 수행과 승리의 획득이 독일군의 원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선두 부대는 모쓰끄바 근교 20km까지 진격하여 모쓰끄바의 함락이 곧 이루어질 것 같았지만 독일군의 진격은 여기까지였다. 쏘련군은 후방에서 군대를 보충하였고 또 모쓰끄바 시민 50만 명은 민병 사단 12개를 결성하여 결사 항전을 결의하였고 탱크의 진격을 저지할 반(反)탱크 참호를 수없이 건설하였다. 병력을 집중한 쏘련군은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독일군 38개 사단을 격파하였고 독일군은 병력 50만 명의 손실을 입고 100-250km를 후퇴하여야만 했다. 이 모쓰끄바 근교 전투는 독일군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나서 최초로 겪은 참패였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자신이 직접 육군 총사령관을 겸임하고 전투를 독려했으나 쏘련군에 밀린 독일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쓰끄바 방어전의 승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에서 거대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쏘련이 독일의 전격전을 저지할 힘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쏘련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독일이 쏘련을 무너뜨리고 그 과정에서 독일과 함께 쏘련을 분할 점령할 계획까지 세웠던 영국은 모쓰끄바 근교 전투에서 쏘련이 승리하자 전략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또한 파씨즘 블록에 맞서는 연합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영국, 쏘련 등 26개국이 1942년 1월 1일 워싱턴에 모여 연합국가 선언을 발표하였다.8) 이로써 독일과 일본에 맞서는 연합국 진영이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성격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파씨스트 세력과 반파씨스트 세력의 전쟁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전쟁은 인민 전쟁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계급이 철폐된 사회에서 국유 기업, 집단 농장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꼬뮨의 성격을 일정하게 띠게 되고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병사와 인민은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결사 항전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러한 양상이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개전 초기 유럽 전역에서 쉽게 승리하고 점령을 달성했던 독일군은 쏘련군과의 전투에서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개전 초기 전선의 독일군 부대가 상급에 보고한 것에 따르면 쏘련군은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내용이 있었다. 실제로 개전 초기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서 전선이 쓰몰렌쓰크에 이르렀을 때에 독일군 후방 깊숙이 있었던 브레쓰트 요새의 쏘련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요새를 지키던 쏘련군은 모두 전사했는데 그 요새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죽어도 항복할 수 없다. 잘 있거라 조국이여.9) 그리고 모쓰끄바 근교의 공방전이 한창일 때 빤필로프가 지휘하는 28명의 병사들은 독일군 탱크 50대와 맞섰는데 이 부대의 정치 지도원 꼬로치꼬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는 넓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 우리 뒤에는 모쓰끄바가 있지 않은가.10) 이러한 결사 항전의 자세는 단지 기층의 병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이 모쓰끄바의 코앞까지 밀어닥쳤을 때 정부의 기관들, 연구 기관, 외교 사절 등은 후방으로 소개되었지만, 국방위원회,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 그리고 쓰딸린 등의 지도부는 모쓰끄바에 남아서 결사 항전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혁명 24주년이었던 1941년 11월 6일 마야꼬프쓰끼 지하철역에서 기념집회가 거행되었고 쓰딸린이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모쓰끄바의 붉은 광장에서 전통적인 열병식이 거행되었고 열병식을 마친 부대는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독일군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모쓰끄바의 대공 방어망이 우수했기 때문인데 독일군 전투기들은 출격을 해도 목표 지점에는 단지 3%만이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혁명 기념집회와 열병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쏘련의 전쟁이 인민 전쟁이었다는 것의 또 하나의 사례는 독일군의 전격전으로 인해 독일군 후방에 비교적 광범한 점령지가 형성되었을 때 약 100만 명이 넘는 쏘련 인민이 독일군 후방에서 무기를 들고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독일군의 수송을 방해하기 위해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고 식량을 불태우고 쏘련 정규군의 작전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이 빨치산 투쟁의 사례인데 이에 대해 독일군은 민간인들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였다.

전쟁 초기 특기할 만한 것은 쏘련의 서부 지역의 대공장과 발전소들에 대한 소개 작전이었다. 1941년 7월에서 11월에 이르기까지 1523개의 공업 기업의 설비와 인원이 동부의 우랄과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으로 소개되었고 그중 1360개는 대공장이었다.11) 공장의 거대한 기계 설비와 발전소의 발전기를 분해하여 기차에 실어 동부로 소개하고, 소개한 지 불과 3-4주 만에 설비를 재조립하여 공장을 가동하고, 심지어는 트랙터를 만들던 공장이 탱크를 제조하는 생산의 전환까지 이루어졌다. 미처 공장 건물을 건축하지 못해 허허벌판에서 눈보라에 맞서며 공장을 가동하는 영웅적 투쟁이 전쟁 초기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쏘련은 주요한 생산력을 보존할 수 있었고 또 동부 지역의 기존의 공장을 개선하고 또 전시임에도 수천 개의 대공장을 동부 지역에 건립하여 독일군에 맞서는 군수 산업을 조직하고 무기를 개량하여 서서히 독일군과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모쓰끄바 근교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1942년 봄 정비 기간을 가진 후에 전선의 주공을 남동쪽으로 바꾸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바꾸의 석유 공업 지역을 장악하고 볼가강 유역의 곡창 지대를 수중에 넣고 모쓰끄바를 남쪽에서부터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1년 우끄라이나 지역을 점령할 당시 독일군은 도시 하나하나를 점령하는 데 수개월이 걸릴 정도로 쏘련군의 치열한 저항을 경험했는데, 쓰딸린그라드를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를 공략함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쏘련은 쓰딸린그라드를 최후까지 방어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도시 방위전을 준비해 갔다. 100만이 넘는 독일군이 쓰딸린그라드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쓰딸린그라드의 인민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공장에서 노동을 하여 무기를 생산하고 또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하는 인민 전쟁을 전개했다. 쓰딸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 인류의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투인데 독일군은 골목 하나를 빼앗기 위해 한 달을 소모해야 했을 정도였다. 시가전에서 독일군과 쏘련군 및 쓰딸린그라드 시민이 한데 엉키게 되어 전후방이 없는 상태에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빠블로프 중사가 지휘하는 그룹은 하나의 가옥을 58일간 방어하기도 했다.12) 1942년 여름경에 시작된 쓰딸린그라드 전투에서 11월이 되어 겨울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군들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쓰딸린그라드가 방위되고 있는 것에 기초하여 쏘련군은 쓰딸린그라드 전역의 독일군 전체를 포위하는 작전을 은밀히 폈고 기습 돌격으로 독일군 33만 명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포위된 독일군이 항복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포위망을 풀기 위한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 지원군 부대는 쏘련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리하여 포위된 독일군은 쏘련군에 의해 대부분 섬멸되고 항복하게 되었는데 쓰딸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섬멸된 직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장송곡으로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 방송되었다. 쓰딸린그라드 전투 전체에서 독일군이 입은 병력 손실은 150만여 명에 이르렀고 탱크 3,500대가 상실되었다.

쓰딸린그라드 전투에서 쏘련군의 승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독일과 쏘련의 전쟁에서 독일이 쏘련을 이길 수 없다는 것, 심지어 독일이 쏘련에 의해 패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적 차원에서 반파쑈 세력의 투쟁을 고양시키고 독일 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반히틀러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독일과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영국과 미국에서도 쓰딸린그라드 전투에서 쏘련의 승리 이후 쏘련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영국과 미국 내의 반파쑈 세력의 압력하에서 영국과 미국은 쏘련과의 연합을 강화하게 되었다.

쓰딸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독일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1943년 여름에 꾸르쓰크 지역에서 100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을 해 왔다. 쏘련 또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이에 맞섰는데 쏘련과 독일 각각 탱크 수천 대를 동원한 탱크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참패하였는데 이후 쏘련은 독일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고 2차 대전은 쏘련의 승리로 기울기 시작했고 이딸리아가 이때 연합국 측에 항복을 하였다. 이렇게 쏘련의 승리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1943년 11월 28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쏘련과 영국, 미국의 수뇌가 모여 회담을 하였다. 쓰딸린, 처칠, 루즈벨트는 유럽에 제2의 전선을 열어서 독일을 압박하는 문제, 독일에 대한 분할 점령, 쏘련의 대일 참전, 폴란드 독립과 국경선의 조정,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의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44년에는 쏘련이 독일에 대해 유명한 10차례의 타격을 가하여 독일군을 쏘련의 국경선 밖으로 몰아내고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쏘련군은 국경선을 넘어 남쪽에서는 발칸 반도의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으로 진격하고 서쪽에서는 폴란드로 진격하였다. 1944년 하반기부터 1945년 상반기에 걸쳐서 쏘련군은 동부 유럽, 발칸 반도를 각각의 나라의 빨치산들과 협력하여 해방하였고 1945년 4월 30일 쏘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 국회 의사당 지붕에 붉은 기를 꽂을 수 있었다. 며칠 후에 독일군은 정식으로 항복을 하였고 유럽 지역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연합국 측의 수뇌 회담의 결과에 따라 쏘련은 유럽에서의 승리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1945년 8월 초 쏘련은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물밀 듯 진격하여 일본 관동군을 격파했다. 일본군은 대부분 쏘련군에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 미국이 일본에 두 차례 원자탄을 투하하고 나서, 일본의 천황이 1945년 8월 15일 항복 선언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함으로써 2차 세계 대전은 정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쏘련은 약 2,700만 명의 인민이 사망하였다. 그중 1,000만 명은 병사였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이는 히틀러의 나찌가 유태인만 대량 학살한 것이 아니라 쏘련에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나찌 당은 2차 대전 종전 후에 해체되었고 전범들은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독일은 군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되었고 군수 산업은 해체되었다.

쏘련이 2차 대전에서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후방에서 전시 경제가 효과적으로 전개되어 우수한 무기와 군수 물자를 생산하여 전선의 병사들을 뒷받침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쏘련은 독일에 비해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군수 물자와 무기를 생산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보다 우수한 탱크와 비행기, 야포, 기관총 등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잘 나타내는데 이 점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쏘련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보다 강철은 2/3-3/4이 적었고 석탄은 2/3-5/7가 적었지만 배 이상의 무기와 전투 기술 장비를 생산했다.13) 또 2차 대전 후에 서방의 제국주의자들은 쏘련의 승리는 미국 등 서방의 지원에 의한 바가 크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전시에 쏘련에서 생산된 대포는 49만 문이었지만 연합국 측의 지원은 9,600 문, 즉 2% 이하에 지나지 않았고 탱크와 자동화포는 쏘련에서 10.4만 대가 생산되었지만 연합국 측의 지원은 1.08만 대에 지나지 않았다. 비행기는 쏘련에서 13.7만 대가 생산되었지만 원조는 1.87만 대에 지나지 않았다.14) 이러한 점은 미국 등 연합국 측의 쏘련에 대한 원조가 전쟁의 승리에 일정하게 기여하였지만 그 정도는 미미한 수준이며 결정적인 것은 쏘련 자체 내에서 생산한 무기들이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쏘련의 전시 경제의 효율성과 우수성을 말하는 것이다.

전시에 수많은 노동자와 집단 농장 농부가 병사로 전쟁에 참가함에 따라 노동력의 상당 부분은 여성과 청소년 그리고 노인, 심지어 장애인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공업에서 여성의 비중은 1940년 41%에서 1944년 52.9%에 이르렀고 심지어 탄광의 갱도 작업자 중에서 여성의 비중은 1942년 3월 1일 26.8%에서 1943년 1월 1일 35.5%로 증가하였다.15) 여성의 이러한 경제 참가의 증대는 유치원과 탁아소 등 생활 시설이 확대된 것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특성의 하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후방의 전시 노동에서 인민들의 열정과 희생은 노동 생산성의 증가로 표현되었는데 1942년 4월에서 1943년 10월까지의 1년 반 동안 노동 생산성은 39.2%가 증가되었다.

쏘련은 국토가 넓고 또 사회주의 경제의 계획성과 집중성으로 인해 전시에도 수많은 공장을 건설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점은 군수 물자 생산에서 쏘련이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독일을 점차 앞설 수 있었던 요인이다. 탱크의 생산량을 보면 개전 초기인 1941년 4,649대에서 1942년 2.47만 대로 증가하였고 1943년에는 3.49만 대로, 1944년에는 4.03만 대로 증가하였고, 1945년에는 2.65만 대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양적인 측면에서 증가만이 아니라 전투를 거치며 쏘련의 탱크는 점차 개량되어 독일의 탱크보다 우수한 모델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러한 전시 경제의 조직은 쏘련이 전쟁 발발 전에 3차 5개년 계획에 따라 후방에 해당하는 우랄과 시베리아,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지에 수많은 중공업 기지, 기계제조 공장들을 건설한 것에 따라 가능했던 것이다. 이 점 역시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는 단지 경제 체제의 우월함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며, 변방의 각 민족 공화국에서도 중앙 러시아와 평등하게 중공업을 발전시킨다는 전략, 각 민족의 평등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정치적 노선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농업을 보면 독일군의 점령 지역이 곡창 지대로 확대됨에 따라 1943년 쏘련 농업의 파종 면적은 전전의 63%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적인 생산량은 전전의 37%에 지나지 않았다.16) 이는 상당수의 트랙터가 전시 징발되었고 집단 농장원 상당수가 병사로 전쟁에 참가하여 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 농장의 노동력 이용은 매우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인당 파종 면적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비해 3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1944년 전체 농업 생산은 전전의 54%에 이르렀고 1945년에는 60%에 이르렀다. 이는 쏘련이 곡창 지대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양의 식량을 생산하여 전선에 식량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고 또 전시 산업에서 노동하는 노동자와 인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농업에서 부족한 노동력은 수확기에 도시의 노동자와 시민이 농촌에 내려가 집단적으로 수확을 거드는 등으로 보충할 수 있었던 것도 전시 농업의 특징이다. 그리고 1941-1942년간에 원조법에 의해 미국과 영국, 캐나다로부터 획득한 식량은 254.5만 톤이었는데 이는 전체 식품 중에서 미미한 양이었다.

소비재 생산은 모든 물자가 군수 지원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가 있었지만 전선의 상황이 호전되었던 1943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동부로 소개된 경공업 기업의 생산, 동부 지구의 기존의 기업의 확대, 점령에서 해방된 지구의 기업의 회복으로 인한 것이었다. 또한 소비재의 유통액도 서서히 증가했는데 1945년 국영 상업과 협동조합 상업의 유통액은 1940년의 43%였다.

1943년부터 독일군이 열세에 몰리고 쏘련군이 진격하여 피점령 지구의 해방이 이루어짐에 따라 해방 지구의 경제 회복이 시작되었다. 쏘련군이 진격할 때 해방 지구의 경제적 부흥을 조직할 인원들도 따라서 같이 진격하여 해방과 동시에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에 이르면 한편으로 전시 경제가 절정을 이룬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전시 경제의 평화 경제로의 전환이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에 공업 생산은 이미 전전의 수준을 4% 초과한 상태가 되었다.17)

이와 같이 쏘련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경제적 토대는 곧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전시에 맞추어 조직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전시 독점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한 쏘련의 사회주의 전시 계획 경제는 쏘련의 군사적 승리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전시 경제는 전후 복구 시기에 신속히 평화 경제로 전환되었고 그리고 이를 기초로 동구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 사회주의 혁명이 전개되어 사회주의 세계 체제가 형성될 때 그것을 물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다.

 

 

4.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조건

 

전쟁이 종료되었던 당시 쏘련의 경제는 철저한 파괴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동부 지구에서의 경제 건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 피점령 해방 지구에 대한 신속한 경제 부흥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종료한 1945년 당시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1부문은 전전 수준을 12% 초과하고 있었고, 소비재를 생산하는 2부문은 전전의 59%, 농업 생산은 전전의 60%, 소매 유통액은 전전의 45%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이 제4차 5개년 계획의 전제가 되는 당시의 경제 상태였다.

제4차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전후 회복을 이루어내고 전전 수준을 상당히 초과하는 발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하에 쏘련의 노동자와 인민의 영웅적인 노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에 이미 군수 산업의 민수 산업으로의 개조가 대체로 완료되었고 1948년에 이르면 공업 생산고가 이미 전전 수준을 18% 초과하게 된다. 그리고 4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50년에 이르러서는 공업 생산고가 전전 수준을 73% 초과하게 된다.

그런데 공업에서는 전후 회복과 경제의 발전이 순조로웠던 반면에 농업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쟁 기간 중에 농업에 대한 투자는 매우 감소되어 있었고 농업은 노동력의 감소, 그리고 트랙터 등 농기계의 징발과 완전한 소모로 인해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그리고 1946년에 대규모의 가뭄이 닥쳐서 농촌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트랙터 등 농기계를 시급히 생산하여 농촌에 보급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파괴된 트랙터 공장을 복구하고 새로운 트랙터 공장을 건설하여 1940년 당시 농촌이 보유하였던 수준의 트랙터가 1950년까지 새로 공급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50년 4차 5개년 계획이 종결될 즈음에 농업의 생산고는 1940년의 99%에 이르게 되었다.

농업에 대한 투자는 전전에 전체 투자의 13% 수준이었고 전쟁 기간 동안은 11% 수준이었는데 4차 5개년 계획의 기간에는 15%로 상승하였다. 특기할 것은 농촌의 전기화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인데 이 시기에 농촌의 발전소가 2배로 증가하였고 농촌이 소비하는 전력량은 3배로 증가하였다. 1948년-1950년 사이에 38,500개의 집단 농장, 4,300개의 MTS, 3,210개의 국영 농장, 514개의 농업부 직속 육종장에 전기화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며 일정하게 흐트러진 집단 농장의 체제를 다시 복구하는 작업이 경주되었는데 1946년 9월 11일 집단 농장의 장정(章程) 위반에 대한 당 중앙의 결의를 통해 공유 토지 낭비, 집단 농장 재산을 헤프게 쓰는 것, 부적절한 노동일의 사용, 집단 농장 민주주의의 파괴, 행정 당국의 지나친 간섭, 번잡한 규정 등을 비판하였다.18) 그리고 전쟁과정에서 개인 부속지로 돌려졌던 토지가 공유 재산으로 원상 복구되는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하여 집단 농장은 전쟁 기간에 흐트러졌던 체제를 정비하면서 다시금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4차 5개년 계획 말기에 집단 농장이 안정화되고 농업 생산고가 수준에 오른 것을 기초로 집단 농장의 합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1월 1일 집단 농장은 12.3만 개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는 합병 전보다 절반 정도 줄어든 수치였다. 이러한 합병 운동은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여 생산관계를 개선한다는 성격을 띠는 것이었는데 새로 개량된 트랙터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집단 농장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 많이 작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4차 5개년 계획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쏘연방에 새로 가입한 공화국들에서 농업 집단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의 발트 3국 그리고 서벨로루씨와 서우끄라이나, 그리고 몰다비아 등에서 토지 개혁이 실시되어 지주 소유제를 제거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단계를 거쳐 1949년경이면 이들 신생 쏘비에트 공화국에서 집단화가 대체로 완료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1930년대 초의 쏘련과 같은 부농의 격렬한 저항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쏘련의 국가적 위상이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자본주의에 의한 포위를 풀고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형성을 주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었다는 점, 그리고 쏘련에서 집단 농장 운동의 실제적 발전이 신생 공화국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모범적 사례로 작용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이 시기에 화폐 개혁과 가격 개혁 또한 이루어졌는데 1947년 신화폐가 발행되어 구화폐와 10:1의 비율을 기준으로 교환되었는데 그 교환 비율에서 화폐를 적게 소유한 인민에게 유리한 비율이 적용되었다. 또 전쟁 기간에 중공업은 원가가 인상됨에도 가격을 올리지 못하고 국가 보조로 지탱되었으나 1948년 7월 8일 중공업 제품의 도매가격을 인상하면서 국가 보조금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중공업 기업들은 원가 절감 노력을 경주했고 이에 따라 중공업 제품의 가격은 다시 인하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가격 개혁의 흐름 속에서 1947년 12월 14일 배급제가 폐지되었고 1947년부터 1950년까지 3차례 소비재의 가격이 인하되었다.19) 이러한 가격 인하는 전쟁 기간에 가격이 일정하게 인상되었던 것을 원상태로 돌린다는 점, 그리고 4차 5개년 계획 기간을 거치며 노동 생산성의 증가로 인해 원가 인하 요소가 발생했다는 점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가격 인하로 인해 노동자와 인민의 실질적 구매력은 높아졌고 이는 역으로 농업과 소비재 공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쏘련 내부의 정치적 측면을 보면 전후에 이데올로기 투쟁이 강조되었다. 전쟁 기간에 파씨즘 세력의 점령으로 인한 파쑈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입에 맞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당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이 시기에 당의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쥐다노프는 쏘련 내부의 저작이었던 ≪서양 철학사≫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의 문제 등에서 오류가 있음을 비판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쓰딸린은 언어학에서 잘못된 편향을 비판하는 글을 저술하여 쏘련의 언어학에 대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언어가 계급적 성향을 띤다는 좌편향적 견해를 비판하며 언어는 민족어로서의 성질을 띠는 보편적인 것임을 강조하여 쏘련의 학문에서 과학적 발전의 방향을 일정하게 제시하였다. 또한 1952년에 쏘련에서 30년간의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총괄하는 대규모 토론회가 열렸다. 10여 일이 넘게 진행된 토론회에는 경제 계획의 담당자들, 이론적 연구자들, 지방 연구기관들 등 대규모 인원이 결집하여 열띤 토론을 하였는데, 쓰딸린은 이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글을 작성했는데 이 답변들을 모아 출판한 것이 유명한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이었다. 이 저작은 쏘련의 계획 경제를 총괄한 것으로서 각종 편향을 극복하고 쏘련에서 가치 법칙의 존재, 사회주의 사회에서 경제 법칙의 객관성,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적 경제 법칙의 존재, 사회주의 사회에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혔다는 점20)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 정치적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1951년 10월 19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쏘련 공산당(볼)이라는 명칭에서 볼(쉐비끼)라는 명칭이 삭제되어 당명은 쏘련 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멘쉐비끼와의 대립을 나타내는 볼쉐비끼라는 명칭이 역사성을 다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19차 당 대회를 전후한 시기에 쏘련 사회에 있어서, 그리고 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쏘련 사회의 정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발전의 문제, 나아가 당과 국가의 관계의 문제 등이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새로운 정세에 맞는 새로운 노선의 정립의 문제였다. 브레쥐네프 시대의 공식적 입장을 보여 주는 ≪소련공산당사≫ 제5권(거름 출판사)에서는 이 시기 당의 활동 방식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당시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으므로 그대로 인용해 보자. 중앙위원회와 당 협의회는 조직 활동과 정치 활동이 부진한 당 위원회를 비판했다. 비판을 받은 당 위원회는 자기가 맡을 것이 아닌 직무를 맡아서 경영 활동가의 일을 알선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원회는 콜호스와 소프호스, 기계 트랙터 기지, 공업 기지 등의 지도자들이 모든 경제 문제를 당 기관에만 의논해 당 기관의 지도만을 받는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 소비에트의 역할이 작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사정 때문에 일부 당 활동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 지도자에서 관료형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일부 당 기관은 전투적 당 조직에서 색다르게 바뀌어 행정 처리 기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 조직은 지방주의적인 욕구와 협소한 소집단주의적 욕구에 반드시 저항할 수도 없었다.21) 이러한 인용문의 요지는 당원, 당 활동가가 정치 지도자에서 행정을 처리하는 관료형 인간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건설이 이루어지고 경제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그와 관련된 행정적 처리의 문제에 당 기관과 각급의 당 지도자들이 매달리면서 어느새 관료형 인간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치 지도자인가 아니면 관료형 인간인가라고 제기되어 있는 문제는 실은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반 쓰딸린에 의해 제기되고 주도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로버 퍼(Grover Furr)는 자신의 저서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했다(Khrushchev Lied)≫(Erythros Press and Media, LLC Corrected Edition, July 2011)에서 이 문제를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다소 길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쟁점 그리고 쓰딸린의 정치적 입장이 상세히 드러나 있으므로 그로버 퍼의 서술을 자세히 인용해 보자.

 

역사학자 유리 주꼬프는 제3의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흐루쇼프의 목표는, 쓰딸린이 관여되어 있는, 그리고 간부회(1952년 10월까지는 정치국으로 불렸던)에서 쓰딸린의 이전의 동맹자들이, 특히 말렌꼬프가 여전히 촉진하고자 애쓰고 있던 민주주의적 개혁에 대해 결정적으로 문을 걸어 닫는 것이었다. 그 개혁들은 당을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에 대한 통제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었으며 이것들을 선출된 쏘비에트들의 손에 맡기는 것이었다. …

주꼬프는 당을 권력의 지렛대로부터 떼어 내기를 원하는 쓰딸린과 그의 동맹자들과, 이에 대해 확고히 맞섰던 정치국의 나머지 사람들 간의 투쟁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해 상세히 묘사를 하고 있다. 1953년 5월, 쓰딸린의 사망 직후에, 쏘비에트 정부의 집행 부문, 쏘비에트 각료회의는 당의 지도적 인물들에게서 그들의 봉투들 혹은 별도의 수입을 제거하는, 그리하여 그들의 수입을 그들과 상응하는 정부 인물들보다 한두 단계 낮은 수준으로 감축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주꼬프에 따르면, 말렌꼬프는 이 개혁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것은 권력을 쏘비에트 정부로 넘겨주고 당의 역할을 격하하면서, 당으로 하여금 나라의, 경제와 정치의 운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계획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

주꼬프는 결론을 내린다: 20차 당 대회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당 기구들의 권력으로의 복귀에 있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확신이다. 동시대의 사건들로부터 관심을 떼어 내고 사람들이 비밀 연설의 도움으로 과거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을 필요로 한 것은 … 이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쓰딸린과 그의 지지자들은 경쟁 선거를 통하여 쏘련을 민주화시킨다는 계획을 옹호했다. 그들의 계획은 쏘련에서 권력의 소재를 흐루쇼프 같은 당 지도자들로부터 선출된 정부 대표자들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하는 것은 당을, 출세주의 혹은 개인적 이득을 위하기보다는 공산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헌신적인 사람들의 조직으로 복구하기 위한 토대를 놓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당의 제1 서기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이 계획을 사보타지하고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영구화할 결의가 되어 있었다. …22)

 

여기서 그로버 퍼가 역사학자 유리 주꼬프의 견해를 들어 서술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소련공산당사≫ 제5권(거름 출판사)에서 단순히 당원, 당 활동가가 정치 지도자인가 아니면 관료형 인간인가라고 제기되어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그로버 퍼는 권력의 소재를 당에 둘 것인가 아니면 선출된 쏘비에트 대표자들에 둘 것인가로 쓰딸린파와 반대파가 대립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쓰딸린파는 쏘비에트 대표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해 쏘비에트 대표자들에 대한 경쟁 선거를 도입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쟁점은 쏘련의 정치 체제와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있어서 근본적 지점으로 다가서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당과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회주의 건설에서 당의 본질적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발전되어야 하는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어떤 관계이고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하는가 등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에 대해 쓰딸린파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당의 역할은 통치, 행정이 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대의에 헌신하는 것, 즉 사상을 바탕으로 한 노선의 정립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고 당원은 관료형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며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통제, 행정, 관리, 통치는 선출된 쏘비에트 대표자들, 쏘비에트 기구들에 넘겨서 권력을 이양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쏘비에트 기구들이 실제적인 권력을 가지기 위한 조건으로서 경쟁 선거를 통한 선출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 공화국들의 당 제1 서기들의 지지를 받은 당시 중앙당 서기였던 흐루쇼프는 이러한 민주적 개혁에 대해 반대하고 당이 여전히 권력의 소재가 되어야 하며 당 서기들이 행정을 직접 통제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흐루쇼프의 입장은 전형적으로 당 관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쏘련이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경제의 규모가 거대해지고 국가 기구가 팽창한 것에 기인하는 당 관료 집단의 성장에 기초한 관료주의 국가를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흐루쇼프의 입장은 20차 당 대회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폐기와 그것의 전 인민 국가로의 전환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전 인민 국가는 곧 전 인민에 대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전형적인 관료주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쓰딸린 사후 흐루쇼프가 당시 보안 기관을 책임지고 있던 베리야를 군을 동원하여 쿠데타적으로 체포하고 이후 처형하고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것은 당 관료주의 집단의 쿠데타의 과정, 반동의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관료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무사태평한 관료들의 지배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쓰딸린에 대한 탄핵,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부정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흐루쇼프는 20차 당 대회에서 소위 개인 숭배를 비판한다는 구실로 쓰딸린 하의 30여 년의 혁명적 노선을 전복시켰던 것이다.

사실 10월 혁명 이후 권력의 소재가 당에 있었던 것은 당과 국가가 직접적으로 밀접하게 통일되어야만 했던 대내외적인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혁명 후 제국주의의 간섭과 내전 그리고 경제의 재건의 시기를 거치자마자, 히틀러의 파씨즘이 등장하여 쏘련에 대한 침략을 공언하고 제2차 대전을 겪고 전후 복구를 마치는 등 쓰딸린 하의 30여 년은 비상 시기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비상한 상황에서 당의 결정의 공고한 집행을 위해 당은 국가 기구를 강하게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 등의 상황을 제거한다면, 즉, 일종의 추상을 한다면,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되고 나서 당은 새로운 상황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새로운 노선의 정립에 혼신을 힘을 기울이는 것이 타당하며 당은 이를 위해 행정으로부터, 통치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쓰딸린은 바로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소재를 당이 아니라 선출된 쏘비에트 기구에, 즉 국가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어 보자.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통일된 하나의 전체이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고전적 정의를 인용해 보자.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승인하는 하나의 국가,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강제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대중의 한 부류가 여타 다른 부류에 대하여 권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체 이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23) 여기서 레닌의 견해는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 접근을 넘어서서 내용적인 접근, 실질적 접근을 보여 주고 있고 계급을 떠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곧 조직체, 즉 국가라고 보는 레닌의 견해는 민주주의와 독재의 통일을 가리키고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통일임을 레닌은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본가계급의 선거권을 제한하고 프롤레타리아들이 다수가 되어 실시하는 선거 과정을 통해 권력의 담당자를 선출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립을 의미한다. 또한 국가 권력의 핵인 군대의 문제에 있어서 부르주아적인 관료적인 상비군을 해체하고 그것을 노동자계급 대중으로 구성된 민병대 혹은 자치 병력으로 대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곧 프롤레타리아 권력,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전환되는 사례이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통일로서 존재한다.

1930년대 후반 숙청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의 행사가 정확하지 못하여 무고하게 조작되고 고문받고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이 정확히 행사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이 그 행사에 있어서 오류를 줄이고 정확성과 정교함에 있어서 제고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고도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고도화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고도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이고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고도화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문화 수준의 제고, 행정적 참여 능력의 제고, 사회주의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시민 사회 차원의 다양한 대중 조직의 발달, 자유로운 사상적 토론의 확산, 과학적 연구 수준의 제고와 대중적 확산 등등 수없이 많은 항목과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1940년대 후반 쓰딸린파와 흐루쇼프 등 당 관료주의자들의 대립에서 드러난 당과 국가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당은 사상을 기초로 새로운 상황에 맞는 노선을 정립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혁신하고 개선하고 적용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국가는 권력의 소재이고 또 폭력의 담지자로서 계급적 억압을 수행하고 또 사회주의 건설에서 행정의 역할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당과 국가의 관계에서 당은 권력의 담지자로서의 강제가 아니라 사상에 기초한 노선의 올바름으로 국가 기구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수정주의화된 현대 중국의 공산당은 흐루쇼프적인 관료주의화된 당의 전형을 보여 준다. 현대 중국의 공산당의 당원과 당 활동가, 당 지도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대의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행정적 통제와 통치, 관료형의 기능적 인간으로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베이징 시나 상하이 시에서 시장은 그 시의 당의 제2 서기이고 제1 서기는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그 시의 국가 기구를 통제하고 행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사상에 기초한 노선의 정립 역할은 찾아볼 수 없고 관료적 조정을 통한 행정의 수행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당과 국가의 관계에서 중국은 소위 집권당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관료주의적 통치를 합리화하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혁명당으로서의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고 흐루쇼프적인 관료주의적 당, 당 관료들의 당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인민대표자 대회는 형식적으로는 헌법에서 최고 권력 기관이지만 이 기관은 공산당의 결정을 통과시키는 거수기에 지나지 않게 되어 중국에서 민주주의는 형해화되고 있는 것이다.

 

 

5.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형성

 

제2차 세계 대전의 과정에서 쏘련군은 독일군을 쏘련 영토 밖으로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동유럽과 발칸 반도로 진격하고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쏘련군은 동유럽 각 나라의 반파쑈 인민전선 세력과 연합하여 독일군과 반동 세력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의 상황에서 나찌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동유럽 각국의 반파쑈 인민전선 세력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불가리아의 경우 조국전선이 새로운 국가 창설의 주역이 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동유럽 각국에서는 쏘련군의 지원하에서 이들 전선체들의 주도로 자본주의에서 이탈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나라에서는 공산당 혹은 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연합하거나 합당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은 미국과 서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의 방해와 국내의 반동 세력의 저항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동유럽의 나라에서는 일차적으로 파씨즘 세력, 반동 세력의 제거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토지 개혁을 수행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주 소유제를 제거하고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구축했으며 서서히 이러한 개혁은 사회주의적 개혁으로, 즉,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쏘련군의 존재는 제국주의 세력과 국내 반동 세력의 음모와 기도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고 동유럽 나라들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수립으로 나아갔다. 쏘련은 국내에서 전후 복구의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1940년대 후반 동유럽 각국에 약 150억 루블의 원조를 하였고 전후 피폐해진 상황에서 산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설비와 원자재, 그리고 인민들의 식량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세계 체제가 서서히 형성되어 갔는데 이 과정은 언제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서방의 제국주의 세력과 쏘련 사이에 향후 유럽의 질서를 구축하는 문제에 있어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독일 문제였는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자신들의 독일 점령지에서 독자적인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독일을 분단시키려는 행보를 시작하였다. 특히 베를린은 쏘련군 점령 지역에 있었으나 쏘련군과 서방의 군대가 공동으로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서독일의 새로운 화폐가 유입되어 경제를 혼란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이로 인해 베를린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쏘련은 베를린과 서독일의 교통을 차단하여 베를린의 혼란을 수습하려 했고 이에 대해 서방측이 반발하여 긴장 상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서방의 이런 행보는 독일을 분단시키려는 목적과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1949년 8월 14일 서독에서 총선거가 치러졌고 1949년 9월 20일 독일연방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즉, 서독이 분단국가로 성립하였다. 이에 맞서 사회주의 세력은 194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의 성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군사적인 분할 점령 상태에서 정치적인 분단국가의 상태로 이행하게 되었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이러한 행보는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반파쑈 연합을 해체하는 것이었고 쏘련과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대결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미 1947년 3월에 미국의 트루먼은 쏘련을 전체주의라 비난하는 연설을 한 바 있었다. 그리고 1947년 6월에 미국의 국무장관 마셜이 유럽에 대한 원조 계획, 즉, 마셜 계획을 발표하여 서유럽을 미국의 세력권에 두고 미국에 종속시키려는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쏘련은 마셜 계획이 쏘련을 배제하고 고립시킨다는 점을 인식하고 동유럽 국가들과 공통의 사회주의적 경제 관계의 형성을 추진했으며 1949년 1월에 쏘련과 동유럽의 경제 관계를 포괄하는 경제상호원조위원회(코메콘)가 성립하여 세계 시장은 2개로 분열하게 되었다.

미국은 또한 쏘련을 적대시하고 대결을 추구하는 군사적 블록을 형성했는데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주축이 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결성하여 쏘련에 대한 군사적 대결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대해 쏘련과 동유럽은 NATO를 반대하면서 유럽에서 집단적인 안전 보장 체계를 갖출 것을 주장하였다. 쓰딸린은 NATO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군사적 블록을 만들지 않았는데 이는 쓰딸린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과 전략에 있어서 상이한 제도를 가진 국가들 간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아 유럽에서의 집단적 안전 보장 체제 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24) 그리고 쓰딸린이 사망하고 일정한 시점이 흐른 1955년 5월에 이르러서야 쏘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하여 NATO에 대항하는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쏘련은 미국의 원자탄 독점을 깨뜨리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여 핵실험에 성공하여 원자핵 무기를 가진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게 되었다. 이리하여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1949년 중국에서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의 홍군이 국민당 군을 패배시켜 국민당 세력을 중국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당시 국가의 성립을 선언한 주체는 정치협상회의였는데 이는 반제 민족통일전선 조직이었으며 이는 동유럽에서 국가 창설의 주역이 조국전선 등 통일전선 조직이었다는 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쏘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중국에서 국민당 정부가 성립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연합 정부를 거부하고 내전을 도발함에 따라 약 3년간의 내전이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승리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 민족의 저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쏘련의 승리, 동유럽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전개 등의 세계정세가 중국에 있어서 중국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중국 혁명의 성공은 전 세계적인 세력 관계를 바꾸는 것이었으며 또한 중국 혁명이 민족해방 투쟁의 승리라는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이후 제국주의 세력의 약화와 세계 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의 구심이었던 제3 인터내셔날, 즉 코민테른은 1943년 전쟁 과정에서 해소되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반파쑈 연합전선의 강화가 절실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이 쏘련과의 연합에 참가하고 또 세계적으로 반파쑈 인민전선이 강화되기 위해 코민테른의 해소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반파쑈 연합이라는 전술적 목표를 위해 노동자계급의 최고의 대의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유보되어야 하는가는 논쟁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이론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실천적, 정치적 측면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반파쑈 연합을 강고하게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침은 정확했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쏘련의 승리와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중국 혁명의 성공이었고 그로 인한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형성이었다.

전쟁 직후에 쏘련은 코민테른을 재건한다는 계획을 갖지 않았다. 전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반파쑈 연합의 성과를 유지하고 쏘련의 전후 복구를 위해 필요로 되는 국제적 평화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사회주의 진영에 반대하는 대결, 냉전을 개시하고 세계가 제국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형성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결정적으로는 독일의 분단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진영, 사회주의 국가의 연합을 위한 조직이 필요함이 제기되었다. 특히 이러한 필요성은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나서던 동유럽 국가 측에서 더욱더 요구되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과거 코민테른과 같이 전 세계 공산당과 노동자당에 대해 규정력을 가진 인터내셔날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노동자당이 교류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조직체로서 공산주의 정보국(코민포름)이 형성되게 되었다. 코민포름은 자신의 기관지를 갖고 정보를 교류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순조롭게 사회주의 세계 체제가 형성되어 갈 때, 커다란 갈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쏘련 공산당 간의 갈등이 불거지고 심화된 것이 그것이었다.

티토는 전쟁 과정에서 나찌에 맞서는 빨치산 투쟁을 하였고 쏘련군이 진주하기 전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봉기를 일으켜 자주적으로 나찌를 몰아낸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 후반 티토와 쏘련 공산당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나 상황이 진전되면서 갈등의 요소가 쌓여갔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전쟁 과정에서 아드리아해에 접한 드리야스트를 티토의 인민해방군이 해방하고 점령했으나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그 지역은 이딸리아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쓰딸린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쓰딸린은 영국과 프랑스와 협의하여 해결했는데 이에 대해 티토가 불만을 가졌다. 둘째, 티토는 유고슬라비아가 중심이 되어 주변의 나라들과 함께 발칸 연방공화국을 수립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인접한 소국인 알바니아와 갈등 관계를 빚었다. 이에 대해 쓰딸린은 발칸 연방이 당시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가졌고 실제로 발칸 연방 문제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25) 그런데 연방공화국의 수립은 매우 높은 수준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각 나라의 자발적 연합을 조건으로 하는 것인데, 혁명 직후 발칸 연방을 추진하는 것은 유고슬라비아 민족의 소(小)패권주의를 추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쏘련과 유고의 무역 문제, 경제적 관계에서 일정한 갈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갈등이 심화되었고 쏘련 공산당과 유고슬라비아 간에 몇 차례의 문서로 된 서신이 교환되었고 갈등이 폭발한 결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코민포름에서 제명되게 된다.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공산당 내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분류되는, 티토주의자들로 간주된 사람들이 제거되는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의 과정인데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티토는 이후 최악의 길을 걸었다. 유고는 1951년 미국과 군사조약을 맺어 제국주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당시 내전 중이었던 그리스의 빨치산들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타격을 입혔고 한국(조선) 전쟁에서 미 제국주의를 지지하였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편을 들었으며, 인접한 소국인 알바니아의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기 전까지 견지하였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또한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 기업에 지나지 않았고 기업에서 노동자의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른바 시장 사회주의라 불렸던 유고의 체제는 실제로는 거대한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지나지 않았다.26)

이러한 경과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사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자본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이익의 통일성, 보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가계급을 폐지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동자계급은 연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이론적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이론적 측면과 더불어 실천적, 정치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당시의 정세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구체적 표현은 무엇인가를 사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40년대 후반, 전쟁 직후의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동유럽 국가들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성공을 지원하고 그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을 지지하고 또 대외적으로는 냉전을 개시하고 있던 제국주의 진영에 맞서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정세에 있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였는데, 반면에 티토가 쏘련 공산당과 갈등을 빚게 되었던 쟁점인 영토 문제, 발칸 연방의 문제, 쏘련과의 무역과 경제적 관계의 문제 등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아래에 존재하는 하위 범주의 문제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티토는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놓치게 된 것이었다.

민족 문제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관계는 고도의 이론적, 정치적 판단과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10월 혁명 전에 레닌은 민족 자결권이라는 논문에서 원칙적 접근을 한 바 있다. 당시 유럽에서 폴란드 등 약속 민족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폴란드인이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격렬히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는 민족 자결권의 승인이 폴란드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약소민족의 민족 자결권, 즉, 대(大)민족의 국가로부터 분리의 자유와 독립적인 민족 국가 형성의 자유를 승인할 때만, 약소민족의 노동자계급과 대(大)민족 국가의 노동자계급 간에 진정한 의미의 연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를 반박하였다. 그리고 레닌의 이러한 견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민족 문제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원칙을 형성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각 민족의 노동자계급 간의 자유로운 연대이며 또 그 연대의 수준은 최고도의 높은 수준의 연대이고 진정한 연대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티토의 행보, 이후 유고가 보인 노동자 자주관리와 시장 사회주의는,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도 어렵지만 사회주의 건설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더욱더 고도의 이론적, 정치적 판단과 내용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향후 21세기 새로운 혁명이 발발하고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질 때,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20세기의 교훈을 분석하면서 한편으로 원칙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당시 정세에 조응하는 구체화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1) 이들 재판 과정에 대한 서방측 증언은 마리오 소사가 지은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노사과연)을 참조하시오.

 

2) 뚜하체프쓰끼 등 군사 반란 모의에 대한 증거의 존재에 대해서는 Grover Furr가 지은 Khrushchev Lied (Erythros Press and Media, LLC Corrected Edition, July 2011)를 참조하시오.

 

3) Grover Furr, Khrushchev Lied, Erythros Press and Media, LLC Corrected Edition, July 2011, p. 75.

 

4) 마리오 소사,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노사과연, 2010, p. 47.

 

5) 같은 책, p. 54.

 

6) 이 부분의 필자의 서술은 Khrushchev Lied (Erythros Press and Media, LLC Corrected Edition, July 2011), pp. 194-195에서 Grover Furr가 흐루쇼프가 쓰딸린을 왜 공격했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서술한 것을 기초로 한 것이다.

 

7)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五卷, 北京: 生活ㆍ读书ㆍ新知三联出版, 1979, p. 235.

 

8)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480.

 

9)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5권, 편집부 역, 거름, 1991, p. 32.

 

10) 같은 책, pp. 37-38.

 

11)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219.

 

12)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46.

 

13)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235.

 

14) 같은 책, p. 236.

 

15) 같은 책, p. 257.

 

16) 같은 책, p. 496.

 

17) 같은 책, p. 432.

 

18)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 第六卷, p. 142.

 

19) 같은 책, p. 22.

 

20)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565.

 

21)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141.

 

22) Grover Furr, op. cit., pp. 194-195.

 

23) V. I. 레닌, ≪국가와 혁명≫, 논장, 1988, p. 99.

 

24)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527.

 

25) 같은 책, p. 549.

 

26) 문영찬, “쏘련 수정주의의 등장과 중-쏘 논쟁”, ≪20세기 사회주의와 반혁명(노동사회과학 제4호)≫, 노사과연, 2011, pp. 48-67을 참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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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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