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부르주아 정치와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정치

문영찬 │ 연구위원장

  1. 부르주아 정치의 본질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본질을 권력의 문제로 파악한 바 있다. 심지어 시민은 곧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 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권력에 접근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기술과 과정이 곧 정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국가권력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국가가 소멸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면 정치 또한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부르주아 정치는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권력에 접근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벌이는 기술과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권력의 장악은 곧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치권력, 국가권력은 계급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지배 도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주아 계급, 자본가계급은 정치적 지배계급이기 전에 이미 경제적 의미에서 지배계급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축으로 하여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질서가 존재하는 한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미 경제적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부르주아 정치는 이와 같은 경제적 관계,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의 재생산을 정치적으로 보장하고 국가권력의 힘을 빌어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법적인 보장,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계급 대립과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질서를 벗어나는 것을 저지하고, 한편에서는 사적 소유를 다른 한편에서는 무산자라는 분열된 구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 이것이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정치의 역할이다. 즉, 계급 분열의 재생산(!)을 정치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곧 부르주아 정치의 역할이다. 자본가계급에게 국가가 필요하고 또 수많은 정치적 기술과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위해 부르주아 국가는 겉으로는 사회의 계급 분열로부터 초연한 듯한 자태를 취한다. 시민 사회의 영역에서 유산자와 무산자로의 분열은 그 자체로는 국가와 무관한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사회의 계급 분열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겉으로는 사회의 계급 분열과 무관한 공적 영역으로, 공적 권력으로 자태를 취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부르주아 국가인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가 이러한 모습을 취하는 것은 지배계급으로서 자본가계급의 특성과 연관이 있다. 과거 중세 시대는 신분적 질서였고 국가와 시민사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경제의 영역은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혁명 이후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면서 일차적 요구로 내세웠던 것은 소유권의 보장이었고 이를 위해 국가로부터 시민사회의 분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의 신분이 아니라 계급으로서 지배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사회전체적인 보편성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유, 평등 등의 보편적 구호가 헌법에 담기고 부르주아 정치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 평등의 보편적 구호는 형식적 구호에 지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법 앞에서는 (형식적으로) 평등하지만, 생산수단 앞에서는 전혀 평등하지 않으며 유산자와 무산자로 나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편성의 형식,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의 구호 아래 자본가계급의 지배도구로서 부르주아 국가가 작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본가계급,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도구로서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인데, 그것은 자신들의 사적 소유의 보장, 자신의 자본 축적 과정과 그 조건의 보장이다.

그러한 자본축적의 과정과 조건을 보장하는 것의 대전제는 사회의 계급 분열의 재생산이다. 한편에서는 부가 축적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산자가, 빈곤이, 몰락과 파탄이 재생산되는 체제를 정치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부르주아 국가의 근본적 역할이고 부르주아 정치의 본질인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가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사회의 계급 분열과는 마치 무관한 듯이, 국가는 사회의 계급 분열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는 듯이, 시민사회 내의 계급 대립과는 초연한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의 조건으로 필요한 것이다. 만약 부르주아 국가가 단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것이 공공연히 드러난다면, 국가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도구로 작동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는 부르주아 지배의 근본적 조건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정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국가로부터 시민사회의 분리는 겉으로 개인의 정치적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이는 곧 이데올로기에서 자유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 자체 내에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의 발전을 배태할 수밖에 없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의 역사는 곧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등장과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국가에 대하여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그것이 곧 영국 노동자계급의 차티스트 운동, 참정권 획득 운동이었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의 발전은 자본주의 내의 틀을 넘어 혁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화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중, 후반부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자본가계급이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는 것,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강화하는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모순적 성격을 갖는데,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분파들의 단결을 통한 자본가계급 지배의 강화, 고도화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측면과,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투쟁을 통해 획득되었다는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의 무기로서 쓰이는 측면이 다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역사적 등장은,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계급 투쟁이 사회의 하나의 현상, 현실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러한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자본가계급의 필사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자유주의 세력과 반동적인 세력의 양대 분파로 존재하고 있다. 박근혜의 파시즘 정권이 등장했을 때 부르주아 정치는 세계대공황의 발발로 취약해진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폭력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의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사실상 부정하는,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또한 사실상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에 의존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발전을 폭력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 반동적인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지배는 계급투쟁의 격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박근혜 정권의 탄핵으로 귀결된 바가 있다.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또 하나의 분파인 자유주의세력은 개인의 정치적 자유, 사상적 자유 등을 승인하며 또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옹호하는 것을 기초로 자본가계급의 안정적 지배를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력은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을 저지하는 데 있어서 반동적 세력과 이해가 일치하는데, 그 결과 이 양대 세력의 타협의 산물로서 파쇼적인 국가보안법이 유지되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세계적 차원에서 존재했던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일종인데 한국의 경우 특수하게 그것이 분단 질서와 맞물려 있다. 그리하여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 불가피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계급투쟁의 존재를 승인하면서도, 분단질서에 기대어 국가보안법이라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수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보안법,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한편으로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요구와 모순된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의 발전이 역사의 필연이라는 점에서 그 극복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부르주아 정치는,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이든 아니면 반동적인, 파쇼적인 폭력적인 통치의 형태이든, 그것은 사회의 계급 분열을 재생산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보장을 축으로 하여, 한편에서 부의 축적을 다른 한편에서 빈곤과 무권리, 파탄을 가져오는 체제를 재생산하는 것!, 이것이 곧 부르주아 정치의 역할이다.

 

 

  1. 노동자계급의 계급으로서의 형성과 한국 사회의 진보정치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 진보정치의 출현은 1980년대 운동의 성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80년대 운동이 쏘련의 해체 뒤에 급격하게 소멸하는 길을 걸었지만 그 정치적 성과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결성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 날개 전략, 즉, 한편에서 진보적 합법정당과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이라는 전략이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유럽에서 사회민주당과 산별노조의 양 날개 전략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쏘련의 해체,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몰락이 사회민주주의 전략의 발흥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양 날개 전략은, 1980년대 운동이 실제적인 성과, 진보적 성과를 가져온 것에 비하면 매우 실망스런 것이었다. 1980년대 운동은 군사파쇼 체제의 종식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가져왔는데, 이는 1980년대 운동이 사회주의 이념, 맑스-레닌주의 이념에 기초한 변혁운동으로서 전개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하여 진보정당-민주노총이라는 양 날개 전략은 한국 사회에 이렇다 할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진보정당-민주노총 체제 하에서 악화되었다.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공세와 비정규직의 확산, 노동운동의 무력화, 조합주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었고 2020년 현재 노동자계급은 전망을 잃고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매고 있다. 이는 진보정당-민주노총 체제가 그 내용에서 변혁성을 잃고 변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진보정당-민주노총 체제가 한 가지 기여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세력의 집권에 일조하였다는 점, 자유주의 세력이 어부지리로, 우연한 사례로서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언제라도 집권할 수 있는, 집권 가능한 세력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는 노동운동이, 그리고 나아가 진보정당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속물로 전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운동이, 진보적 정치세력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망을 가지지 못할 때, 계급 대립 철폐의 전망을 상실할 때, 그것은 불가피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속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으로 이어지는 세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운동적 성격을 상실하고 소부르주아 정당으로 전락해 갔다. 그리하여 최근 정의당의 경우, 문재인 정권의 충실한 협조세력으로 변신하였다. 이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계급투쟁 노선을 청산하고 계급 협조의 길로 가는 데 있어서 진보정당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의 의식에서 계급투쟁의 열망과 원칙을 지워버리고, 대신에 계급 협조의 사상, 체제 내 개량의 사상, 자본주의와 자본가계급에 대한 비굴한 굴종의 사상으로 오염시키는 데 진보정당들은 주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자본가들의 억압과 기만을 폭로하고, 사회 곳곳에서 썩어가는 자본주의의 부패상을 폭로하고, 노동자계급의 단결에 기초하여 새로운 해방 세상을 향한 투쟁을 호소하는 대신에, 자본가 정권이 던져주는 약간의 개량에 일희일비하는 모습들! 이것이 민주노동당 이래 명멸해간 진보정당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진보정당-민주노총 체제 하에서 민주노총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충실한 한 부속물로 전락해 갔다. 노동운동에서 변혁의 전망이 사라진 결과, 노동운동은 조합주의와 경제주의에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 전 계급적 관점은 사라지고 각각의 개별 기업이나, 아니면 개별 부문의 이익의 관점이 절대화되었고, 계급적 단결의 건강한 기풍은 사라지고 조합주의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또 경제주의적 관점도 전반적으로 급속하게 퍼졌는데, 자본가계급의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투쟁은 감히 꿈꾸지 못하는 상태, 약간의 경제적 이익의 획득으로 노동운동, 노동조합의 본령이 달성된 양, 의기양양한 상태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이렇게 조합주의와 경제주의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정치는 한편으로 조합주의 정치, 다른 한편으로 개량주의적인 진보정당 정치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조합주의 정치는, 노동운동에서 변혁성이 사라지면서 그것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노동자계급의 부르주아 정치를 의미한다. 이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망과 그에 대한 선전, 선동은 고사하고, 계급적 단결에 기초한 투쟁의 원칙마저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노동법 개악의 국면에서도 이를 법제도 개선투쟁으로서 규정하고 광범한 계급적 단결을 조직하여 투쟁하는 대신에, 국회 일정에 맞춘 퍼포먼스로 노동법 개악에 맞선 대중적 반대투쟁을 대체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단결을 강화할 절호의 계기를 허망하게 유실하고 자본가계급의 행동, 정책 하나하나의 변화에 목을 매는 이러한 모습에서 계급, 전망, 단결, 대중투쟁, 변혁이라는 개념들은 공허하게 된 것이다.

사실 진보정당이 1990년대에 등장할 당시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으로서의 형성이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전략을 바탕에 깔고 있던 이러한 명분, 원칙은 진보정당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공허한 것이 되었고, 노동자계급은 거꾸로 계급으로서 해체되는 길을 걸어왔다. 계급의 형성과 정반대되는, 계급으로서의 해체가 이들 사회민주주의 전략의 현실적 결과였던 것이다. 진보정당들, 그리고 민주노총까지 포함하여, 계급 협조의 길을 걷는 것이 전반적 현실이 됨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가일층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왜 계급 협조의 길을 걸으면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해체의 길을 걷게 되는가?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라는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산자, 재산이 없는 사람, 생산수단의 결여로 인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노동자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을 철폐하는 새로운 사회, 계급 없는 사회, 사회주의 사회에 이를 때만 해방될 수 있는 계급이다. 이러한 길에 이르는 유일한 무기는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서 단결하고 계급의식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급적 단결, 계급으로서 형성의 의미이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 일정한 개량을 위해 계급 협조의 길을 걸으면, 그것은 자본주의 질서의 유지를 전제하게 되고, 따라서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승인하게 될 때, 문제는 더 이상 해방이 아니라 개별적인 이익이 되며, 그에 따라 단결이 아니라 경쟁이 노동자 내부에서 지배적으로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계급 협조는 계급적 단결이 아니라 계급으로서의 해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계급적 단결의 껍질들, 외양들이며, 단결은 조합주의적인 이익의 추구를 위한 조합주의적 단결에 국한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계급의 해체는 완성되게 된다. 이것이 진보정당-민주노총 체제 하에서 노동자계급이 걸어온 길이다.

그러나 2007년의 세계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는 심각한 모순을 앓고 있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고 자본주의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선진부대는 진보정당-민주노총 체제와는 결이 다른,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꿈꾸는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우선은 이론적 측면에서 발전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서서히 정치적 발전의 전망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1.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사회주의 전위당의 건설

 

사실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라는 것은 과학적인 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은 경제적 의미의 범주이며 경제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 체제 하에서 자본가는 노동자라는 무산자를 고용하여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자본축적을 이루어 간다. 따라서 생산에서 차지하는 위치,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라는 계급의 고전적 의미에서 볼 때, 노동자계급은 이미 형성되어 있고 또한 발전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이다. 문제는 경제적 의미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보유하고 또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즉자적 계급에서, 즉, 존재적 의미의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건적인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형성이다. 대자적 계급으로 되기 위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를 의식하는 것,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를 객관화하는 것,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위치인지, 노동자계급과 여타 민중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 노동자계급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의 형성인 것이다.

그러한 의식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계급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사상적, 정치적 구심이 필요하며, 바로 이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사회주의 당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통일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 없이,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의 차원에서, 민주노총의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정치적 행동은 조합주의 정치를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계급투쟁이기는 하되 온전한 계급투쟁이 아니며 자본주의 틀을 넘어설 수 없는 한도 내에서의 투쟁일 뿐이고 정치적 행동일 뿐이다. 따라서 조합적 영역, 조합주의적 행동을 넘어서서 계급으로서 단결하여 자본가계급과 투쟁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의 폐지, 계급 대립의 철폐를 자신의 목표로 하는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 필요하다.

맑스는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레닌은 이론투쟁, 정치투쟁, 경제투쟁을 계급투쟁의 3대 영역으로 꼽은 바 있다. 언뜻 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이 명제들에서 우리는 계급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의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론 투쟁은 선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포괄 범위는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소수의 선진분자들에 국한된다. 따라서 이론 투쟁은 노동자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며 온전한 의미의 계급투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경제투쟁은 주로 노동조합의 영역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개별 기업의 노동자, 개별 부문의 노동자를 주체로 하는 것이며 이 역시 노동자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포괄하는 것이며 따라서 온전한 계급투쟁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치투쟁은 국가권력을 상대로 노동자계급 전체가 단결하여 투쟁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계급투쟁의 본령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맑스는 모든 계급투쟁, 즉, 계급 전체가 단결한다는 양적 의미에서, 그리고 계급의 근본적 이해가 걸려 있다는 질적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곧 정치투쟁이라고 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근본적 이해를 위해, 단결하여 행동하고 투쟁한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위해서는 사상적으로 통일된 정치적 당이 필수적이며 이는 곧 사회주의적 전위당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근본적 이익은 사적 소유의 폐지, 계급대립의 철폐라는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당은 사회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적 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에 동조하는 일반적 시민의 당임에 반해, 노동자계급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길을 앞장서서 헤쳐 나갈 전위로서 당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동조와 지지를 넘어서서 노동자계급 해방의 정치적 실천을 책임지고 수행해가는 전위들의 집합체로서의 당을 노동자계급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이 필요로 하는 당은 사회주의 전위당이다.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존재, 즉자적 존재를 넘어서서 계급의식에 기초하여 대자적으로, 정치세력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당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발전의 과정에서, 당이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노력이 당 건설에 집중되어야 한다. 사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발전은 주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러한 주체의 노력의 성공 가능성은 객관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객관적 조건은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 만들어지는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창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의 심화, 노동자계급의 처지의 악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축적,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을 약화시키고 중화시키는 중간계급들이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 몰락하여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한 사회의 기본적 모순일 뿐만 아니라 주요한 모순으로 전화된다는 점 등등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전위당이 건설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은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당 건설을 위해 관건적인 것은, 첫째, 변혁적 이론에 기초한 변혁노선의 발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회, 사회주의 사회의 상을 대중들에게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회주의 이론의 정립 등 이론적 측면과, 둘째, 그러한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운동과의 결합, 노동자 대중과의 결합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당의 정치적 행위를 의미하는 전술노선과 전술원칙의 발전, 그리고 이러한 정치활동을, 대중과 결합이 가능하도록 대중 노선으로 발전시키는 것 등등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분단과 전쟁, 그리고 국가보안법의 존재로 인하여 198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이 사회주의 전위당으로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정파라는 형태로 머무른 채 운동의 쇠퇴기를 맞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많은 진보적 역량이 존재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정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당적인 형태로 실현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매우 후진적인 상태에 있었고 지금도 일정하게 그러하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 노동자계급 전체의 통일로서 당이라는 관점은 현재 매우 취약해져 있는 상태이며 정파, 분파와 당의 구별이 모호해지기까지 한 정도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정파, 분파의 질을 넘어서서 노동자계급의 해방, 사적 소유의 철폐, 계급 대립의 철폐를 열망하는 노동자계급의 모든 선진 분자들의 결집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상, 정치 노선 상의 일정한 차이는 있을 지라도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대의 하에 하나로 결집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일 것이다.

 

 

  1. 선전에서, 선전과 전술적 실천의 통일로!

 

2007년의 세계 대공황 이후 ≪자본론≫이 다시 대중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쏘련 해체 뒤의 반동기를 버텨온 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운동의 초기 상태에서 당연히 그런 것처럼 선전 단계의 활동이었다. 맑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 그람시 등등의 저작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되었고 또 반동기 동안 지배적이었던 온갖 잡사상들, 즉, 뜨로츠끼주의, 좌익공산주의, 푸코, 들뢰즈, 지젝, 알튀세르 등에 대한 비판이 수행되었는데, 이 모든 활동은 선전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당의 정치적 행위를 가리키는 전술의 영역에서는 진보정당들의 개량주의적 전술, 주로 선거 전술 등이 행해졌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공세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전술적 영역이 개척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맑스주의 진영에서는 선전 활동이 이루어지고 개량주의 진영에서 선거 전술을 중심으로 한 전술적 활동이 전개되는 양상이었다.

과학적이고 변혁적인 이론에 대한 학습과 선전 활동은 지금도 턱없이 부족하고 운동진영의 상당 부분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지배적이었던 반동적인 사상들, 소부르주아 사상들이 행세를 한다. 유럽에서 흘러들어온 썩은 사상들이 마치 새로운 대안인 양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전 활동은 앞으로 질과 양의 면에서 더욱 더 확대되어야 한다. 수많은 학습 써클이 생겨야 하며 과학적 이론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야 한다.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이, 특히 그 선진 부분이 선전 단계를 지나 전술의 영역을 개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진보정당-민주노총 체계에서 행해지는 개량주의적 전술을 비판하는 것,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이익, 정치적 이익을 수호하는 투쟁에서 전술의 영역이 발전될 것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당 건설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 행위로서 전술의 영역, 전술 원칙들이 발전될 것이 요구된다. 현실적으로 전술을 구사하는 정치 활동의 과정에서 서서히 당 건설의 전망을 구체화할 수 있고 또 선진 부위의 결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선전을 통해 결집된 부분의 질과, 전술적 실천의 전개를 통해 결집된 부분의 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선전은 이론적 이해, 개념적 이해를 본령으로 한다. 이러한 이론적 인식의 발전은 활동가들의 인식 수준을 비약시키고 또 운동의 전망이 수립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을 형성한다. 운동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은 선전과 이론적 이해의 증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맑스주의자들의 선전활동은 앞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론에 의해, 선전에 의해 현실이 변혁되는 것은 아니다. 이론, 선전은 현실을 변혁할 가능성을 키우는 것이지만 현실 자체를 변혁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변혁하는 것은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곧 전술적 실천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지금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칠 경우 그것은 직접적 실천의 목표로서 제시되는 전술적 슬로건이 아니라 선전 상의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을 촉진하지만 대중들에게 지금 자본주의 타도를 위해 행동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당시 박근혜 정권 타도와 이를 위한 반파쇼 전선의 형성을 촉구하는 것은 하나의 전술이었다. 즉,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현실을 변혁하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전술노선의 발전은 박근혜 정권 이후 정체를 겪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를 반대하고 분쇄한 것은 일정한 전술적 실천의 성공이었지만 문재인 정권에 맞서는 총체적인 전술 노선, 반(反)문재인 정권의 전선의 형성을 위해 필요한 주체의 면에서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전술은 단지 그것을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선전과 차이가 없는 것이다. 전술은 단지 과학적인 내용과 슬로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정세에 맞추어 끊임없이 내용을 변화시켜야 하며, 또 그 과정에서 전술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그러한 전술적 실천을 담당하는 주체를 건설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즉, 전술은 주체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 지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조직적 성장의 가능성과 공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 사태 이후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급격하게 공황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국면이 얼마나 지속될지, 또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으나 자본주의 경제 공황의 발발은 계급 대립과 계급투쟁의 조건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술의 영역에서의 발전이 시급한 상황이 되었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선진 부분 전체가 선전 활동의 영역을 넘어 전술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될 필요가 커진 것이다.

운동의 발전이 처한 현 단계는, 한편으로 선전 활동,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적 내용을 한층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선전하는 활동을 요구하며, 다른 한편으로 경제 공황으로 인한 정세의 발전에 따른 전술적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주체의 발전의 측면에서 보자면 선전 영역에서 전술적 실천의 영역으로 발전하는 것은 합법칙적이다. 나아가 당 건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선전 활동의 강화와 나란히 전술적 실천의 강화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선전과 전술의 두 날개를 가져야 하며 선전 활동과 전술적 실천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선전의 관점을 넘어서서 정치적, 조직적 관점에서 요구되는 바를 탐구하고 준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 써클 질서에서 당적 질서로!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선전 단계에서 정치적 활동의 단계로, 선전 활동과 전술적 실천의 통일로 발전할 것을 요구하는 현실은 조직의 측면에서 과학적인 평가와 전망을 요구한다. 한국의 운동은 1980년대 정파 운동의 단계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 단계까지 발전한 경험을 갖고 있다. 쏘련의 해체라는 격변, 그리고 국가보안법의 존재로 인하여 1980년대 운동은 사회주의 전위당의 건설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좌초되었지만, 맑스-레닌주의 이념의 광범한 확산, 선전의 단계를 넘어선 전술적 실천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파적 질서를 넘어서는 당적 질서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현실은 지금까지도 우리 운동을 질곡에 빠지게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운동 질서를 보면 사회민주주의적 진보정당이 일부 존재하고 또 다양한 정당들이 변혁을 표방하며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당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사상적 통일로서의 당과는 거리가 멀다. 즉, 당의 실질이 없는 형식으로서, 프레임으로서 당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객관적으로 정파 중에서 규모가 큰 정파가 당을 표방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에 따라 당이 과연 무엇인지, 당적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노동자계급을 혼란시키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적 전위당은 이념의 측면에서, 조직의 측면에서 당적 성질을 가져야 한다. 즉, 이념의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 사적 소유의 철폐, 계급 대립의 철폐를 표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당적 내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직적 측면에서 당은 정파적 질서를 넘어서는 당적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노동자계급의 선진 부위, 전위들의 조직적 통일의 담지자로서 당이어야 한다.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볼쉐비끼 당과 멘쉐비끼 당은 철학, 정치적 전술, 조직적 노선 등에서 많은 차이를 가졌지만 다 같이 당 대회를 치렀고 하나의 당적 질서 속에서 활동했다. 볼쉐비끼와 멘쉐비끼가 두 개의 당적 질서를 가지게 된 것은 1912년 이후 새로운 고양기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볼쉐비끼와 멘쉐비끼는 노선상의 근본적 차이가 있었음에도 똑같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법적으로(물론 비합법의 조건이었지만) 하나의 당으로서 존재했다. 레닌과 볼쉐비끼가 이러한 정책을 취했던 것은 노선 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적 통일을 지키는 것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이후의 반동기에서 멘쉐비끼들이 비합법 조직을 청산하는 해당파(解黨派)의 길을 걷게 됨에 따라 비합법 조직의 볼쉐비끼와 청산주의적 합법적 조직으로서 멘쉐비끼는 별개의 조직을 갖게 되었고, 1912년에 시작된 새로운 고양기에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두 개의 당적 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운동에서는 당적 질서를 위한 이러한 치열한 노력이 거의 없었다. 웬만한 정파가 당을 표방하는 현실은, 그들이 당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적 질서를 이루어내고 그것을 고수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길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자명한 정치적 원리를 조직적 측면에서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실제적 의미에서 당적 질서의 형성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 정당한 것이고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다.

1980년대 운동의 유산으로서 존재하는 정파적 질서는 그동안의 반동기를 버텨온 성과가 있다. 그러나 그 한계 또한 분명한데 지금의 정파적 질서는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가로막는다는 점, 그리고 정파의 틀 내에서 사회주의 이론과 정치노선의 발전은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은 정파적 질서를 넘어 당적 질서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의 선진분자들은 써클적 질서로부터 당적 질서로의 이행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써클적 질서의 특징은 전술적 실천보다 선전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선전은 운동을 버티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그 자체로는 현실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반동기를 극복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선전 활동을 강화하면서도 정치적 실천, 전술적 실천을 구사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하며, 이는 조직적 측면에서 써클적 질서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노동자계급과 그 전위로서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하는 전술적 실천은 민주주의적 성격을 넘어 자본주의에 맞서는 것을 본령으로 하는 것이다. 사적 소유에 맞서는 계급 해방의 실천이 지금 요구되는 전술적 실천의 실제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고도의 단결을 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써클적 틀을 넘어서는 당적 지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당적 지향, 당적 질서는 진보정당-민주노총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틀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사회주의적 지향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통일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틀 내의 개량, 자본가계급에 대한 협조 노선을 거부하고 계급투쟁의 원칙과 계급 대립의 철폐를 자신의 정치적 내용으로 하고 또 노선 상 일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조직적 통일로서의 당적 질서를 자신의 내용으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민주주의투쟁과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정치

 

지난 촛불시위는 박근혜 정권의 파쇼적 통치에 맞서는 민중들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통합진보당 해산 등 민중 탄압으로 일관하는 박근혜 정권에 맞서는,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박근혜 정권에 맞서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반격이었고 그러한 투쟁은 박근혜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는 다시금 민주주의의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이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총이 주도하여 반박근혜 투쟁에 나섰으나, 계급으로서 투쟁한 것이 아니라 계급으로서는 해체되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투쟁한 것이었다. 촛불 시위 과정에 노동자계급은 계급으로서 각인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 결과 촛불시위의 투쟁의 성과는 전적으로 자본가계급에 귀속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자본주의는 이른바 개혁의 동력을 얻었고 그것이 문재인 정권의 ‘개혁’ 정책으로 표방되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문재인 정권의 개혁은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실제로 문재인 정권이 내세웠던 공약들은 대부분 파기되거나 왜곡되었다. 문재인 정권이 호기롭게 내세웠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는 대부분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화라는 기만적인 정책으로 귀결되었고 공기업들은 민간 기업보다도 더 비정규직을 탄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시점에서 민주주의 투쟁과 사회주의와의 연관, 관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수백만이 촛불을 드는 민주주의 투쟁을 벌였건만 노동자의 현실은 변한 것이 없고 수많은 약속들이 팽개쳐지고 오히려 상태가 악화되는 현실! 이것은 노동자와 민중으로 하여금 민주주의 투쟁 자체를 회의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애쓰고 투쟁해 보았자 소용없고 있는 자들만 배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론! 그러나 이런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비록 계급으로서는 아니지만 노동자계급은 반파쇼 민주화 투쟁의 주역이었고 박근혜를 퇴진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 자체가 아니라 그 정치적 성과가 자본가계급에게 전적으로 귀속되는 현실이며, 따라서 왜 그런가를 지금 시점에서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촛불 투쟁의 성과가 전적으로 자본가계급에 귀속된 것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독자성을 지키지 못하고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투쟁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이 반박근혜, 반파쇼 투쟁에 적극 나섰지만 민주노총으로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이 담보될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목표가 사적 소유의 폐지, 계급 대립의 철폐라는 점을 전 사회에 대해, 전 민중에 대해 선전, 선동하지 못했고 이러한 정치적 내용을 담보할 사회주의적 전위당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기존의 진보정당-민주노총의 사회민주주의적 틀로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이 담보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회민주주의적 틀은 민주주의 투쟁은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반파쇼 민주주의 전선의 주요 투쟁역량으로는 작동할 수 있었지만, 그 투쟁의 성과를 노동자계급에게 귀속시키는 정치적 역량은 전혀 아니었다. 그 성과를 자유주의세력에게, 즉, 자본주의 강화의 길에 귀속시키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따라서 진보정당-민주노총이라는 틀은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의 해체를 이끌어 왔다는 점이 촛불 투쟁에서 유감없이 확인된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과는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을 할 때에, 반드시 자신의 정치적, 조직적 독자성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말해준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점, 한국 자본주의의 개혁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을 위해서 민주주의 투쟁을 한다는 점을 전 사회에 선포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 선동을 멈추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투쟁의 성과를 사회주의 투쟁에 귀속시키는 전략과 전술이 없었다는 것, 이것이 촛불 시위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한계였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 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1980년대 운동의 성과, 민주노조운동의 성과이지만, 동시에 그때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점, 자본주의 틀 내의 민주주의이고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민주주의라는 점에 대한 의식의 결여가 결정적 한계로 작용하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계급과 무관하게, 계급적 내용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의 현실로, 체제로, 국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그러한 복종을 강제할 장치, 강제력이 없다면 공허한 것이다.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강제하는 국가 체제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가에 따라 어느 계급의 국가인가로 갈리게 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부르주아 국가를 전제로 하고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국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은 형식적 구호이며, 따라서 생산수단 앞의 실질적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계급의 지배, 그리고 그를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이라는 다수가 자본가계급이라는 소수를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복종을 강제할 노동자계급의 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를 쟁취한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국가 권력을 쟁취하여 지배계급으로 올라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한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함을 통해, 경제적 의미에서도 지배계급으로 되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키게 되는 것이다. 지난 촛불 시위에서는 노동자계급에게서 이러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그러한 정치적 내용을 선전, 선동하고 이끌어갈 정치적, 조직적 구심으로서 사회주의 전위당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발생 자체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그것이 비록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 틀 내의 민주주의일지라도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양적인, 질적인 진전은, 민주주의의 철저한 관철은, 불가피하게 사회주의적 내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관료에 대한 선출과 소환, 파면권을 일반화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이며, 관료들이 자본가계급의 눈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게끔 강제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경제투쟁을 보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변경할 경우 다수 노동자의 승인을 받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부합하지만 사적 소유의 원리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를 밀고 가면, 노동자의 경영 참가는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지만 사적 소유의 원리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자의 경영 참가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이는 공장 내에서 자본가의 권력을 제한하고 노동자계급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참가가 보편화된다면 혁명 후에 노동자계급의 경제에 대한 통제, 사회주의 건설은 매우 용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은, 그것이 비록 부르주아 민주주의 일지라도,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파시즘에 맞서 싸워야 한다.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 선동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당 건설의 길을 걸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양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나아가 그것의 질적인 전환, 즉,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로의 전환으로까지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실시된다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 즉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종속을 전제로 승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해방의 길을 승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해방의 길을 승인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며,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불가능하고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사회주의 전위당의 존재가 요구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개념 그리고 사회주의 전위당을 통해 계급으로서 훈련되고 조직되는 길을 가면서, 정치적 영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활용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전시키고 해방의 길, 계급 대립 철폐의 길을 개척해 가는 것! 이것이 곧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정치일 것이다.

지난 2007년의 세계 대공황의 발발은 자본주의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모색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2020년 현재 발발하고 있는 세계 공황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가 하나의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서, 선전의 영역을 넘어서서, 정치적 전술의 실천으로, 정치적 당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촉진할 것이다.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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