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4)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4장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농업의 전반적 집단화: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확립

―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확립 과정(3)

 

 

1. 국민 경제 개조의 준비기(1926-1929년)

 

1925-26년의 시기는 전후 경제의 회복이 일단락되고 공업의 생산량이 전전 수준에 접근한 해였다. 그리하여 1925년 말의 14차 당 대회는 현대적인 기술에 입각한 공업의 건설, 나라를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전환시키는 결의를 할 수 있었다. 1926-1927 경제 연도에 약 10억 루블이 공업에 투자되었고 2년 뒤에는 50억 루블이 투자될 수 있었다. 이러한 쏘련의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외채를 끌어다 공업화를 추진한 것과 달리, 내부 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외채를 쓸 경우 경제의 대외적 종속이 불가피하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이 쏘련에 대해 경제적 봉쇄 전략을 펴면서 신용의 제공을 거부한 점도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비에트 정부는 국유화된 사회주의 공업 기업과 상업 기업의 이윤, 국유화된 거대한 운수망에서 나오는 이윤으로부터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외에도 국유화된 은행, 국가독점의 무역에서 나오는 이윤도 상당하였다.1) 그리고 혁명을 통해 지주와 자본가의 기생적인 소비가 사라졌다는 점, 경제 발전의 계획성으로 인한 물자의 집중과 절약, 자본주의와 달리 경제 위기에서 나타나는 손실이 없다는 점, 외채로 인한 대외적인 이자 지불이 없다는 점 등이 공업에 대한 자금 투입을 증가시킬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2) 또한 경제가 회복됨에 따라 소비재에 붙이는 매상고세의 액수가 상당하였으며 농민 또한 국가에 세금을 일정하게 지불하였다. 그리고 각종의 비용을 절약하는 것을 통해 투자되는 기금의 양은 서서히 증가하였다.

그런데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른바 초공업화 정책을 주장했는데, 이는 공산품 가격의 인상, 농민에 대한 세금 중과, 지폐의 발행 증가를 통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농민을 수탈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노농 동맹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공산품 판매 시장의 축소, 경제 발전 속도의 감속을 초래하는 것이었다.3) 이러한 초공업화 주장은, 뜨로쯔끼가 빈농과 중농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동자계급의 동맹자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농민을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반동 세력으로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소생산자로서의 농민이 한편으로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라는 점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결정적으로 빈농과 중농은 부농과 달리 착취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도외시하는 것이었다. 빈농은 물론 중농 또한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하여 자신이 그 이익을 가져간다는 점에서 착취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중농이 소생산자로서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협소한 관점이다. 그런데 중농의 협소한 관점의 극복은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국가가 한편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농업에서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트랙터 등 농기계와 농업 기술, 농업 노동의 조직 등을 담보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들이 현실화될 경우 중농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막대한 이익을 누리게 된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계급은 중농을 사회주의 건설의 동맹자로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인데,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빈농만이 아니라 중농 또한 사회주의 건설의 동맹자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레닌과 쓰딸린의 정책은 정확한 것이었다.

한편 쏘련이 사회주의적 공업화, 농업의 전반적인 집단화라는 국민 경제의 개조를 준비하던 시기는 대외적으로 엄혹한 국제 정세가 펼쳐지던 시기였다. 1926년 영국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이 발생했다. 쏘련의 노동자계급은 이에 대해 파업 기금을 보내는 등의 연대를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쏘련이 영국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구실을 붙여 쏘련에 대한 도발을 감행했다. 1927년 베이징, 런던과 그 밖의 각지의 쏘비에트 대표부를 습격하고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쏘련 대사를 살해했다. 그리고 쏘련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영국은 또한 독일을 끌어들여 반쏘련 블록을 강화하려 했다. 이에 대해 쏘비에트 정부는 독일과 중립 조약을 체결하여 쏘련에 대한 봉쇄망을 균열시키고 터키, 아프가니스탄, 이란, 리투아니아와 중립ㆍ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영국 정부도 1929년에 다시 쏘련과 외교 관계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렇듯 1920년대 후반 쏘련의 대외 관계는 살얼음을 걷는 형국이었으며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라도 쏘련에 대한 군사 개입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후 경제의 회복이 마무리되고 쏘련이 공업화의 도약을 준비하던 시기의 대외적 조건은 이렇게 엄혹하였고, 그에 따라 쏘련은 중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의 속도를 높여서 경제적 자립과 국방력의 강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쏘련의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관건적인 문제인 속도의 문제는 이렇게 대외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속도의 문제에 대해 레닌은 일찍이 이러한 속도는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대내외적인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다. 시간을 획득하면, 모든 것을 획득하는 것이다4)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파 투쟁에서 연이어 패배했던 뜨로쯔끼 세력과 지노비예프 세력은 연합하여 다시금 볼쉐비끼 당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1926년 여름 뜨로쯔끼와 지노비예프의 연합 블록이 형성되었다. 이 블록은 기본적으로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회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쉐비끼 당의 노선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 블록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의 결렬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쏘비에트 권력의 근간을 공격하는 행위였다. 반대파 블록은 대공장의 당 조직들의 회의에서 논쟁을 일으켰는데 논쟁의 결과 철저히 패배하였다. 그럼에도 반대파 블록은 비밀 인쇄소를 갖추는 등 사실상 별도의 당을 구성하였다. 1927년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어 쏘련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반대파 블록은 83인의 강령을 들고나왔는데, 이것은 볼쉐비끼 당의 정책을 왜곡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합동 총회에서 뜨로쯔끼와 지노비예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하는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당원으로서의 자격은 유지시킨 상태였다. 그리고 볼쉐비끼 당은 정강을 당원 토론에 부쳤는데, 그 결과 중앙위원회의 정강에 대한 찬성은 72만 4000명이었고 반대파 블록의 정강에 대한 찬성은 4000명(1% 미만)에 지나지 않았다.5) 이렇게 수세에 몰린 반대파 블록은 1927년 10월 혁명 10주년 대회에서 난폭하게 가두로 진출하여 대회 참가자들과 충돌하였다. 이러한 반대파의 가두시위는 그들이 이제는 당내의 틀이 아니라 당 밖에서 당에 반대하는 그룹으로 전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반대파가 당내 분파에서 반체제 활동으로 그 성격을 전화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뜨로쯔끼와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제명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들 반대파의 출현은 신경제 정책의 시기에 존재하던 소부르주아 부문, 사적 자본주의 부문 등이 당내에 반영된 결과였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회의하고 적대하는 세력을 정치적으로 대변한 것이 이들 반대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반대파는 철저히 패배하였고 볼쉐비끼 당은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길에 매진할 수 있었다. 1926-1927년도에 대공업의 생산이 전년도에 비해 18% 증가했다. 또한 1927년 말경에는 공업에서 사회주의적 부문이 86%가 되고 사적 자본주의 부문은 14%로까지 그 비중이 떨어졌다. 또한 1926-1927년도에 국민 소득은 11%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공업에서 발전이 순조로운 것과 달리 소농 생산 체제였던 농업은 발전에서 뒤처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업의 노동자계급과 도시에 공급할 식량과 공업 원료가 부족한 상황이 나타났다. 곡물 경작 부문의 상품화율은 전쟁 전에 26%였는데 1926년 당시는 13%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농업의 발전이 공업의 발전에 뒤처지는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던 시점에 15차 당 대회가 개최되게 되었다. 1927년 12월 2일 개최된 15차 당 대회는 공업이 계획성의 원칙에 따르고 있지만 농업은 자연성장성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소농 경영에서 더 이상 생산성이 높아질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농업을 농업 기계와 현대적 기술에 입각한 대규모의 집단적 생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결의했다, 이것이 15차 당 대회의 농업 집단화의 결의였다. 또한 15차 당 대회는 제1차 5개년 계획 작성에 대한 지시를 채택했다. 그동안 국가계획위원회가 각종의 계획을 수립하여 실시했지만 이제는 부분적, 단기적 계획을 넘어서서 5년간에 걸친 장기 계획을, 그리고 모든 부문을 포괄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또한 5개년 계획의 작성은 1920년대를 규정했던 계획과 시장의 모순이 계획의 주도성으로 결말지어지고 쏘련에서 과도적 시기가 지나가고 본격적인 계획 경제의 시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2. 제1차 5개년 계획

 

제1차 5개년 계획은 단지 국가계획위원회가 전문적 지식을 동원하여 작성한 관료적인 지침이 아니었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작성한 계획 초안은 전 인민적인 토론에 부쳐졌는데, 중앙, 지방의 공화국, 말단 국유 기업에 이르기까지 5개년 계획에 대한 토론과 의견 제시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말단의 국유 기업의 노동자들은 5개년 계획을 기업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하였고 그 결과 각 기업에서 5개년 계획의 실현에 참여하는 호응 계획을 작성하였다. 호응 계획은 5개년 계획에 대해 노동자 대중이 생산자로서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5개년 계획의 효과적인 실시를 담보하고 그 실행 과정에서 많은 물자를 절약하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처음에는 2가지 안으로 제시되었다. 초보적 안과 최선의 안이 그것인데 초보적 안은 최초로 5개년 계획을 실시한다는 점에서 그 목표치를 약간 보수적으로 낮게 잡은 것이었고, 최선의 안은 국제 정세의 안정성, 농업에서 흉작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조건으로 목표치를 약간 높게 잡은 것이었다. 이 2가지 안에 대한 토론 과정에서 속도의 문제가 부각되었고 그 결과 최선의 안을 채택하게 되었다. 최선의 안은 1929년 5월 전 쏘련 제5차 쏘비에트 대회에서 통과되어 법률로 확정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전체 공업에서 고정 기금이 1배 증가하고 중공업은 고정 기금이 2배로 증가하였다. 이는 전국에 걸쳐 수천 개의 대공장이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4년 3개월 만에 달성되었는데, 중공업은 목표의 109%를 달성하였다.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1부문은 연평균 28.5% 성장하였고 소비재를 생산하는 2부문은 연평균 11.7% 성장하였다. 그 결과 1부문은 5개년 기간에 생산이 1.7배 증가하였고 2부문은 56%가 증가하였다. 농업과 공업의 상대적 비중을 보면 1928년 공업의 비중이 51.5%였으나 1932년에는 70.7%로 증가하였다. 농업에서는 이 기간에 국영 농장과 집단 농장 등 공유 부문이 전체 파종 면적의 78%를 점하게 되었고 상품성 곡물의 84%를 생산하게 되어 도시에 공급하는 식량과 공업 원료를 안정적으로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국민 소득은 90% 증가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노동생산성은 41%가 증가하였다. 사회적 측면을 보면 이 기간에 초등학생 수가 배로 증가하였고 중등, 고등교육 기관의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1차 5개년 계획의 실시는 1920년대 당내 논쟁에서 나타났던 오류, 즉 사회주의에서 즉각적으로 상품-화폐 관계가 소멸한다는 견해를 실천적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1931년 4월 14일 ≪쁘라브다≫는 직접적 상품 교환으로 상업을 대체한다는 관점을 비판하며 쏘비에트 상업을 발전시켜 사적인 자본주의적인 상업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 엄격한 재무 관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화폐가 곧 소멸될 것이라는 관점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17차 당 대회에서는 화폐는 우리에게 공산주의의 1단계, 즉 사회주의 단계의 완성 때까지 줄곧 존재할 것이다6)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와 같이 1930년대 쏘련에서 계획 경제는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계획 경제를 보여 주고 있고 계획 경제의 이러한 성격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러 상품-화폐 관계가 소멸할 때까지 유지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계획 경제가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는 것임을 쏘련의 경험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이 사회주의 경제 관리 원칙을 제정할 때의 총방침은 광범하게 상품-화폐 관계를 이용하고, 가치를 조절 지렛대로서 운용하고, 그 이용 방법을 개선하고 그것을 경제를 계획적으로 지도하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7), 상품-화폐 관계는 사회주의의 계획적인 사회적 생산의 특징의 하나가 되고 있으며,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하나의 구성 부분으로서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총체에 포함되게 된다.8)

이렇게 상품-화폐 관계를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도구로 승인함에 따라 개별 국유 기업에서는 기업 간의 관계에서 계약을 거래 업무의 기본 형식으로 삼게 되었고 계약은 기업 간의 공급, 생산, 노무 제공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또한 유동 자금을 기업 자체 내의 자금과 차입 자금으로 나누어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운용하였는데, 이에 따라 각각의 경제 기구들은 내부 축적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유동 자금의 회전율을 높이고 지출을 절약하고 내부 잠재력을 발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상품-화폐 관계에 기초한 경제계산제가 국유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커다란 자극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기업에 대한 세금 정책에 있어서 각종의 세금을 매상고세로 통일했는데 매상고세는 주로 소비재 기업의 상품에 붙이는 세금으로서 원가와 일정한 이윤에 더하여 국가가 붙이는 세금이었다. 이러한 매상고세를 통하여 국가는 상품 가격에 대해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기업의 입장에서 매상고세는 기업으로 하여금 원가를 낮추도록 하는 자극으로 작용하였다. 원가를 낮출수록 기업의 순수입은 증가하고 기업이 지배할 수 있는 유동 자금이 증가하고 이러한 기업 내부의 자금의 증가는 생산 발전 기금과 노동자에 대한 물질적 장려금, 복지 기금으로 쓰이는 것이었다. 국가는 이러한 매상고세를 통해 기업이 너무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제한할 수 있었고 원가 절감을 통한 이윤 획득을 자극할 수 있었다.9) 매상고세에서 드러나는 국가와 국유 기업의 이러한 관계를 통해, 사회주의의 국유 기업에서는 이윤이, 자본주의 기업과 달리 기업의 1차적 목적이 아니게 되며, 단지 기업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하나의 지표로 전환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의 임금 정책에서 두드러진 것은 누진성과급제의 채택이다. 1927-28년도 당시는 임금을 평균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에 따라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하는 사업장과 공장으로 노동자들이 이동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즉, 이직률이 1920년대에는 매우 높았다.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고 노동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 일정 목표량을 초과하는 성과를 낼 경우 초과분에 대한 임금을 누진적으로 증가시켜 지급하는 것이 누진성과급제였다. 이러한 누진성과급제의 도입은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는데 노동생산성이 급속히 향상되고 이직률이 떨어지는 성과를 내었다. 그리고 경공업에 비해 임금이 낮았던 제철, 기계제조, 채탄 공업 등에서 임금이 급격히 상승하여 중공업의 급속한 발전이라는 5개년 계획의 목표의 실행을 뒷받침하였다. 이 시기에 노동자의 생활 수준과 복지 수준도 급속히 향상되었는데 이윤에서 10%를 공제하여 복지 기금으로 쓰고 재료 절약분의 50%, 사회주의 경쟁에서 취득된 절약분의 40%를 장려금으로 쓰게 되었다. 이러한 장려금을 받는 노동자는 행정 당국, 공장위원회, 생산회의가 추천하고 노동자 대회의 토론을 통해 최종 결정되었다.10)

노동자 내부의 구성도 크게 변화했는데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구호 아래 기술 숙련의 문제가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1929-1939년까지의 기간에 기술 노동자는 9배 증가하였고 엔지니어는 5배가 증가되었다. 이러한 기술 숙련의 문제는 공업화의 과정에서 절박한 것이었다. 거대한 공장을 완공하고서도 그것을 가동할 충분한 기술을 가진 인력이 부족하여 공장 가동이 1년 이상 늦추어지는 일이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다반사로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쏘비에트 정부는 다양한 접근을 했는데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중등교육 기관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또 노동자가 공장에서의 생산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과 기술 교육을 병행하는 학습 과정을 강화하였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공업화 과정에서 1930년에 실업이 소멸하였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서 실업자의 존재는 자본 축적의 하나의 필수적인 조건인데, 사회주의에서는 이와 달리 경제 발전의 조건으로 실업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경제의 계획적인 조직화 과정에서 실업자는 소멸하게 되는데, 쏘련은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이를 달성하였다. 이러한 실업의 소멸은 사회주의의 위대한 성취, 위대한 승리를 나타내는 표지였다.11)

한편, 1920년대 내내 지속되었던 사적 자본과의 투쟁, 소부르주아적인 수공업의 협동조합화의 과정이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일단락되어 공업과 상업, 제조업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수립이 완성되게 되었다. 사적 자본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비중은 1925-26년도에는 전체 노동자의 18.8%였는데 1차 5개년 계획 말기에는 0.8%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927년 말 개최된 15차 당 대회는 사적 자본을 배제하는 결정을 채택했는데, 쏘비에트 정부는 이 결정에 근거하여 사적 자본을 제한하고 배제하는 다양한 정책을 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배제 정책은 직접적인 수탈이 아니라 경제적 관계, 경제적 조치를 통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가격 정책에서 쏘비에트 정부는 국영 상업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가격을 인하하는 정책을 폈는데, 1927-28년도에 국영 상업과 협동조합 상업의 상품 가격은 사적 자본주의 상업의 상품 가격에 비해 33% 저렴하였다. 그에 따라 사적인 상업 자본은 경쟁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신용 공급 측면에서 1929년 국가가 사적 자본에 대여한 신용은 전체의 1%에 불과하였다. 신용을 이렇게 제한한 것은, 사적 자본의 유동 자금을 압박하고 고정 자본의 확대를 제어하는 것이었다. 또한 상품을 실어 나르는 운수 운임에서 국유 기업은 우대된 반면에, 사적 자본은 몇 배의 운수 운임을 지불해야 했다. 세금 정책의 측면에서 네쁘맨들은 노동자보다 1.5배가 높은 세금을 국가에 납부해야 했다. 그리하여 도시의 공업과 상업에서 자본가들은 그 존재와 확대재생산의 물질적 기초가 사라졌고 자본가가 착취를 통해 취득한 대부분의 잉여가치는 쏘비에트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리하여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네쁘맨들, 사적 상인들, 자본가들은 서서히 소멸하는 길을 걸었다. 또한 1920년대 신경제 정책 당시 도입한 국가자본주의의 형식의 하나였던, 중소형의 국유 기업을 사적 자본가에게 임대했던 임대 기업들은 대부분 임대 기간을 연장하지 않음을 통해 국가에 회수되었다. 국가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형식이었던 외국 자본가에 대한 이권 부여 기업들은 대부분 투기성과 계약 위반, 쏘비에트 법률 위반 등으로 청산되었고 1936년 1월 1일 아직 11개의 이권 부여 기업이 영업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소공업과 수공업자들은 협동조합화를 통한 사회주의 생산 관계로의 전환의 길을 걸었다. 쏘비에트 국가는 수공업자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하면 세금에서 우대하고 또 각종 신용을 제공하는 등의 정책으로 수공업의 협동조합화를 촉진했다. 자본주의에서 수공업은 대자본과의 경쟁 과정에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수공업은 협동조합화를 통한 대공업으로의 변신의 길을 걸은 것이다. 수공업은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공업화가 시작되기 전에 인민에게 필요한 일용품의 생산을 주로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정부는 대공업을 통해 이들 수공업을 밀어내고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화를 통한 대공업화의 길을 추진한 것이었다. 제1차 5개년 계획 전야에 소공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취업 인구의 57.1%였고 공업 총생산의 22.4%를 차지하였다. 협동조합화의 결과 1933년 1월 1일 수공업 협동조합은 14,811개로 증가하였고 그에 소속된 인원은 160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공업은 단지 형태상에서만 협동조합화를 달성한 것만이 아니라 내용상에서, 생산의 내용에서 비약을 했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주로 농기구를 만들던 수공업이, 협동조합화 이후에는 사회주의 대공업과 연계를 맺고 그를 보조하는 역할로 변신했는데, 예를 들면 자동차와 트랙터 부품의 생산, 농업 기기의 생산, 수입 대체품의 생산, 염료, 실험 기기, 정밀계측기 등의 생산으로의 전환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에서는 대공업에 의해 수공업이 파산의 길을 걷게 되지만, 사회주의에서는 수공업이 협동조합화의 과정을 거쳐 대공업화를 이룬 것이었다.12) 그리하여 1932년 말에 이르면 수공업 협동조합의 72%가 대규모의 집단적인 공장에서 노동을 하였다. 이러한 협동조합화를 통해 수공업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크게 개선되었는데, 하루 12-14시간 노동에서 7-8시간 노동으로 노동 시간이 크게 감소되었다. 노동생산성을 보면, 가내 노동보다 수공업 협동조합의 노동생산성이 50-100% 증가하였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에서는 변방에 위치했던 수공업자가, 사회주의하에서는 협동조합화를 통해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하나로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1차 5개년 계획의 기간은 이렇게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사회주의 생산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쏘련의 생산력 또한 비약을 했는데 과거 기계를 수입해야만 하는 후진적인 농업국에서 기계를 생산하는 대공업의 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에 따라 이 기간에 쏘련에서 기계제조업의 건설은 특히 중시되었다. 기계제조 공업의 핵심인 선반 제조에 있어서, 과거 거의 전적으로 선반을 수입하던 상태에서 자체적으로 선반을 제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에 따라, 1932년에는 선반의 수입 의존도가 58.7%로 낮아졌다. 그리고 각종 기기와 설비의 생산이 이 기간에 3.3배 증가하였고, 최초로 자동차와 트랙터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트랙터의 대량 생산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를 통해 비로소 농업 집단화의 물적 조건이 확보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차 5개년 기간에 쏘련의 기계제조업은 약 10만대의 트랙터를 농촌에 공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경공업은 1928년에 비해 생산량이 50% 증가하였고 식품 공업은 58% 증가하였다. 특히 쏘련 자체적으로 기계를 제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경공업과 식품 공업에 필요한 기계 설비를 자체적으로 제작하게 되어 경공업과 식품 공업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식품 공업이 생산하는 식품의 종류도 수백 종이나 증가하게 되어 쏘련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경과는 쏘련이 중공업 우선 정책을 폄에 따라 인민의 소비를 등한시하였고 쏘련 인민은 제대로 소비를 할 수 없었고 내핍 정책을 폈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들, 제국주의자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발생적인 성장과 달리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성장을 본질로 하는데, 그에 따라 소비재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수단의 생산, 중공업의 발전에 우선 점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차 5개년 기간에 쏘련이 소비재 생산에서 달성한 성취는 웬만한 자본주의 나라들은 따라오기 힘든 것이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불과 5년도 안 되어 나라 전체에서 소비를 50% 이상 증가시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 기간에 노동자의 1인당 임금은 배 이상 증가되었고 또 노동자의 수가 배로 증가함에 따라 전체적인 임금 기금의 규모는 4배로 되었다. 이는 경제 전체에서 노동자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는 것을 분배의 영역에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금의 증가는 상품 가격의 실제적인 인하의 추세 속에서 달성된 것이어서 노동자의 구매력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는 1927년 1월 소매가격의 10% 인하, 농산품 수매가격의 4.5% 인상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소비재 판매량을 가리키는 국영 상업의 유통액은 1929-30년도에 1926-27년도에 비해 1.1배 증가하였고 협동조합 상업의 상품 유통액은 2.2배 증가하였다. 이렇게 모든 영역에서 1930년대 초 1차 5개년 기간에 노동자와 인민의 소비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기간에 쏘련은 배급제를 도입하는데 처음에는 식량에 대해서, 이후에는 여타의 식품에 대해서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배급제의 실시는 이전의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 생산력이 파괴되고 식량이 부족하던 상태에서 실시되었던 배급제와 달리, 소비재의 생산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던 상황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즉, 1929년 1월부터 실시된 배급제는 노동자와 인민의 구매력의 성장이 소비재의 생산의 증가를 앞섰기 때문에 실시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이 인민의 수요의 증가를 따라가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던 2차 5개년 계획의 시기에 대부분의 배급제는 폐지되게 된다.

이렇게 제1차 5개년 계획의 실시를 통해 인민과 나라 전체가 풍요로워지는 길이 시작되었다. 주민의 저축을 보면 예금자 수가 1926년 10월 1일에 120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33년 1월 1일에는 그 수가 2,39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 저축액도 크게 증가되었는데 같은 시기에 6,400만 루블에서 9.74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부의 증가는 나라 전체의 예산에도 반영되었는데 1932년의 국민 경제 예산은 1925-26년도에 비해 19배 증가하였고 중공업 예산은 49배가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7시간 노동제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7시간 노동제는 2차 대전의 발발 전까지 실시되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노동 시간은 다시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쏘련이 다시 7시간 노동제로 돌아간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노동 시간은 1913년에 9.9시간, 1928년 7.8시간, 1932년 6.98시간으로 각각 감소하였다. 이 시기에 여성의 경제 참가도 증가하였는데 1932년 여성의 경제 참가율은 27.4%에 이르렀다. 사회보험도 크게 발전했는데 사회보험금 수령자가 1925-26년에 810만 명에서 1932년 2,07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주택 건설도 상당히 진척되었는데 1932년 노동자가 집세로 지불해야 되는 액수는 총지출의 5.8%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 전에 노동자는 총지출의 18-20%를 집세로 지불해야 했었다. 그리고 사망률은 보건 상황의 개선으로 저하했는데, 1932년에는, 혁명전인 1913년에 비해 31.5%가 감소하였다.

이와 같이 1차 5개년 계획의 실시는 쏘련의 생산력을 한 단계 상승시키며 쏘련을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공업과 상업에서 사적 자본이 소멸되었고, 한편으로 수공업자의 협동조합화를 통한 사회주의 생산 관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전은 임금, 노동 조건, 사회보험, 주택, 소비 수준, 교육, 사망률 등 사회적인 모든 부문에서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업과 도시에서는 발전이 순조로웠던 반면에 농업과 농촌에서는 격동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는 공업에서는 사회주의적 생산 관계가 이미 수립되어 있었던 반면에, 농업에서는 소농 생산이 지배적이었고, 그에 따라 농업의 전반적인 집단화를 통한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수립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3. 농업의 전반적인 집단화 과정

 

신경제 정책은 전시 공산주의에서의 왜곡을 시정하고 또 농민에게 일정한 양보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경제는 국유화된 사회주의 공업 부문, 국가자본주의 부문, 소농민 등 소부르주아 부문, 사적 자본주의 부문, 전(前) 자본주의적 자연 경제로 구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신경제 정책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부문이 사적 자본주의와 농민의 획득을 놓고 투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농민을 획득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사적 자본주의 부문이 농민과 연합하여 자본주의를 복고할 것인가가 각축하고 있었다. 즉, 누가 누구를이라는 것이 당시의 관건적 요소였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은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사회주의 공업 부문을 서서히 회복해 나가는 것을 기초로 사적 자본주의 부문을 제한하고 서서히 배제해 나가는 정책을 폈는데, 여기서 부하린은 신경제 정책을 우익적으로 해석하였다.

부하린은 이미 1925년에 부자가 되라(enrich yourself)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이는 사실상 농민들에게 부농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신경제 정책으로의 전환 전에 부하린은 좌익 공산주의의 대표자였는데 좌익 공산주의는 심지어 화폐의 소멸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내전이 승리로 끝나고 신경제 정책이 실시되자 부하린은 과거의 초좌익적 입장을 접고 쏘련의 경제를 사회주의 부문과 자본주의 부문이 장기간 공존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을 하였다. 부하린은 뜨로쯔끼의 초공업화 주장을 비판하면서도, 쏘련에서 부농 등 사적 자본주의 요소가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적 부문으로 전화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특히 부농이 판매와 신용 협동조합의 형식으로 조직되어 가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했다.13) 여기서 부하린은 협동조합의 수준이 판매와 신용, 소비 협동조합을 넘어서서, 생산의 영역에서 협동조합의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었다. 1928년에 곡물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 곡물을 쏘비에트 국가에 팔기를 거부하는 부농의 곡물 파업이 전 사회적인 쟁점이 되었을 때, 부하린은 공개적으로 부농을 옹호하고 쏘비에트 정부를 비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부하린은 곡물 위기의 발생은 부농 때문이 아니라 계획의 오류 때문이라 주장했다. 부농의 투기 행위는 곡물 위기의 원인의 하나이지만 중요한 원인은 아니며, 쏘비에트 정부가 정책에서 오류를 범할 때 부농은 위험한 세력이 되며, 농업에서 협동조합, 집단 농장을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개인농의 축적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14) 부하린의 이러한 주장은 집단 농장 운동을 추진하되 부농의 자본 축적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쏘비에트 정부는 곡물 위기에 대해 부농의 투기 행위를 단속하고 법령에 근거하여 투기적 곡물 비축분을 몰수하여 곡물 위기를 타개하는 길을 걸었다. 농촌은 풍년이 들지만 도시와 노동자는 굶주려야 하는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하에서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1928-1929년 당시 최대의 쟁점은 농업에서의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였다. 공업이 사회주의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노동자 등 도시 인구가 급팽창하고 있어서 상품성 곡물의 증대가 절실하였고 또 공업 원료를 공급하는 농업의 발전이 절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농업에서는 소농 생산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부농이라는 농촌 부르주아들은 소농 생산에 기대어 곡물 투기와 곡물 판매의 사보타지, 고리대금업, 고농과 빈농에 대한 착취 등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쉐비끼 당은 이미 1927년 말의 15차 당 대회에서 농업의 집단화를 대중적 운동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한 바 있었다. 공업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 관계와 농업에서의 소농 체제가 더 이상 병존하기 어려운 상태, 특히 농업에서 생산력 발전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던 상태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모범적 사례로서 농업 집단화를 제시하는 것을 넘어 대중적 운동으로 농업 집단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반우파 투쟁, 부하린과 쓰딸린의 논쟁의 배경이었다.

부하린은 1928년 5월에 볼쉐비끼 당 정치국에 서신을 보내 쏘비에트 정부의 곡물 정책이 부농만이 아니라 중농 또한 쏘비에트 정부를 반대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쓰딸린은 곡물 위기의 원인은 곡물 수요의 증가에 비해 상품성 곡물 생산의 성장이 늦은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답을 했다. 부하린은 1928년 9월 30일 ≪어느 경제학자의 일기≫를 발표하여 쓰딸린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15) 부하린은 1929년 1월 말의 당 중앙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쓰딸린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패배하고 직책의 사임을 당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부하린은 당내 분파 투쟁에서 패배했던 카메네프와 비밀 회동을 하여 세력 연합을 모색했다. 이러한 세력 연합은 쓰딸린 등에 의해 비판을 받았고 1929년 11월 부하린은 정치국 내에서의 직위가 해제되었다. 이후 부하린, 꼬프, 쓰끼 등 우파 지도부들은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였고 이로써 당내 논쟁은 일단락되고 볼쉐비끼 당은 농업 집단화의 대중적 전개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당내 논쟁에서 부하린이 오류를 범한 근본 원인은 신경제 정책을 우익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경제 정책은 사적 자본의 허용, 농민에 대한 양보가 본질이 아니며, 농민을 가운데 두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총이 아니라 화폐를 무기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정책이라는 점, 계급 투쟁의 또 하나의 형식이라는 점을 부하린은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근거도 없이 사적 자본주의 요소가 협동조합의 형식을 통해 사회주의로 자연스럽게 성장ㆍ전화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그러나 노동자계급을 무장 해제시키는 전망―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서 자본주의 요소의 극복, 생산의 영역을 포함하는 농업에서의 협동조합화, 집단화는 단순한 행정적 정책의 문제 혹은 경제적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수립의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곧 계급 투쟁의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부하린의 오류의 모든 점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농업에서 집단화는 사회주의 생산 관계 수립의 문제라는 점에서 결코 자연성장적으로, 진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농민과 농업에 있어 그것은 새로운 질적인 도약의 문제였다. 여기서 부하린에 대한 레닌의 평가, 즉 부하린은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레닌의 평가가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레닌은 농업에서 집단화, 협동조합화의 문제에 대해 자발성의 원칙을 강조했다. 자발성의 원칙은 첫째, 농업의 사회주의 개조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 둘째, 자발적 참가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조건에서만 비로소 농업의 사회주의 개조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발성의 원칙이 자유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당이 농민의 자발적 연합을 위한 조건, 특히 물질적 조건을 창출해야 함을 레닌은 강조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당이 농민과 농업에 제공해야 하는 이러한 도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 물질적 원조(농기계, 신용 대출, 비료 등), 둘째, 조직적 원조(노동자계급이 대형의 국영 농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얻었던 경험의 전수 등), 셋째, 정치적, 문화적 원조(부농과의 투쟁, 문맹 퇴치 등 문화적 수준의 제고) 등이었다.16) 농업 집단화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방침은 농업 집단화와 관련한 거의 모든 부분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특히 자발성의 원칙, 그리고 트랙터 등 물질적 원조를 통한 집단화 운동의 원조는 그중의 핵심적인 정책이었고 쓰딸린 또한 레닌의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29년 말까지 집단화 운동의 대중적 전개를 이끌어 나갔다. 1930년대 초반의 급격한 집단화의 고양 전까지는 한편으로 부농을 제한하고 배제해 가면서 국영 농장의 모범적 사례를 통한 집단화의 자극, 그리고 트랙터 등 현대적 농업 기계의 도입을 통한 집단화의 자극을 조건으로 집단화를 대중적 운동으로 전개하는 것이었다.

농업의 집단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사회주의 부문이었다. 특히 국영 농장은 주변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자극으로 작용했다. 현대적인 농업 기계를 대량 보유하고 현대적인 농업 기술로 대규모의 농업을 시행하는 것 자체가 소농민들에게 자극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국영 농장 중심으로 주변에서 원을 그리며 집단 농장들이 형성되어 갔다.17) 국영 농장이 집단화의 구심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쏘비에트 국가가 농민들에게 실시한 예약 매입제도 집단화의 커다란 자극으로 작용하였다. 1928-1929년도에 농가의 약 1/3 이상이 예약 매입제에 참여했다.18) 쏘비에트 국가는 예약 매입제에 참여한 농가에 대해 높은 가격으로 수매하였고 수매량을 낮추어 주어 농민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농민들은 농업에서 계획이 가능하다는 것, 농업의 사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배워서 이 과정에서 집단 농장이 15,000개가 증가하였다.19) 그리고 주로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었지만 농기계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농민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중세 이래 수백 년 동안 나무 쟁기로 농사짓던 농민들에게 트랙터의 등장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것이었다. 쏘비에트 국가는 농기구 임대소, 트랙터대(隊), 기계ㆍ트랙터 기지(MachineㆍTractor Station, MTS)를 농촌에 대량으로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이 트랙터대와 기계ㆍ트랙터 기지는 농업 집단화의 지렛대로 작용하였다. 이것들은 농민들에게 소생산을 탈피한 현대적인 대규모 농업의 장점을 선전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으로 끌어들이는 구심이었다.

또한 농업 집단화를 대중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볼쉐비끼 당은 약 25만 명의 선진 노동자를 농촌에 파견하여 집단화 운동을 원조했다. 이들 노동자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한 적군(赤軍) 출신의 농민들은 이후 집단 농장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28-1929년의 곡물 위기에 대한 투쟁이었다. 부농들이 곡물 투기를 하고 곡물 판매를 사보타지하는 것에 대해 당시 쏘비에트 국가는 징발대를 농촌에 보냈는데 징발대는 빈농, 중농과 연합하여 부농의 곡물을 몰수하는 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은 1920년대 농민에 대한 양보 정책으로 인하여 강화되어 갔던, 농촌에 대한 부농의 지배력을 전복하는 것이었다.20) 농촌에서 부농의 지배력의 이러한 전복은 농업 집단화가 대중적 운동으로 전개되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 작용하였고 중농이 집단화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볼쉐비끼 당이 15차 당 대회 결의를 통해 대중적인 집단화 운동을 결의하고 또 행정적, 경제적, 정치적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집단화 운동은 빈농 이외에 중농까지 끌어들이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1929년 7월부터 9월까지 100만 호의 농민이 집단 농장에 가입했는데 이는 중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뒤 3개월 기간에는 이미 240만 호의 농가가 집단 농장에 가입했다.21) 또한 예약 매입제에 기초하여 파종을 협동하여 수행하는 파종 협동조합이 광범하게 발전했다. 예약 파종 면적은 1929년 전체 파종 면적의 22%에 달하였고 1930년에는 70.2%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600-700만 호의 농가, 즉 전체 농가의 1/4이 가장 간단한 생산 협동조합의 형식으로 조직되어 농촌에 집단주의의 요소가 인입되고 있었다.22) 전반적 집단화의 전야에 집단화 운동은 이미 이렇게 대중적 운동의 궤도에 올라 있었다. 이러한 것이 1930년 집단화 운동이 전반적으로 전개되기 전까지 농업 집단화 운동의 대중적 전개의 대략적인 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집단화 운동이 대중적으로 전개되고 성과를 내기 시작했을 때, 볼쉐비끼 당은 집단화 운동에서 중대한 정책의 전환을 결의한다. “공산당은 농촌의 계급 역량의 대비와 농업 경제의 근본적 변화를 고려하여, 1930년 초에 부농을 제한하고 배제하는 정책으로부터 전반적인 집단화에 기초하여 부농계급을 소멸시키는 새로운 정책으로 전환했다.”23) 그리하여 1930년 1월 5일 당 중앙위원회는 ≪집단화의 속도와 국가가 집단 농장을 원조하는 방법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통과시킨다. 이 결의에서 볼쉐비끼 당은 “5개년 계획 기간에 원래 5개년 계획에서 규정되었던 파종 면적의 20%의 집단화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농가의 집단화라는 임무를 완성할 수 있다”24)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전환은 1차 5개년 계획이 확정되었을 당시 향후 5년 동안 전체 파종 면적의 20%를 집단화한다는 방침을 수정하여, 집단화 운동의 대중적 전개의 성공에 기초하여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대부분의 농가를 집단화하는 것으로 변경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볼가강 중류와 하류, 북까프까쓰 등 주요 식량 생산 지구는 1930년 가을부터 1931년 봄까지, 기타 식량 생산 지구는 1931년 가을부터 1932년 봄까지, 여타의 지구는 1933년까지 집단화를 완성한다는 결정을 하였다.25)

집단화 운동의 대중적 고조와 당의 이러한 결정이 상호 맞물리면서 1930년 초반에 집단화 운동은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그리하여 1930년 3월경에는 전체 농가의 57.6%가 집단화에 참여하였다.26)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집단화에서의 자발성의 원칙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강제로 주택과 가축, 가금을 공유화하고 농민들에게 부농으로 간주하여 수탈한다고 위협하고 중농들에게 선거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다.27) 또한 많은 지역에서는 집단 농장이 서류상에서만 존재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리고 부농들은 중농의 상당수를 선동하여 가축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이때 말, 소 등 가축 수천만 마리가 도살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해 가자 쓰딸린은 1930년 3월 2일 “성공에 현혹되어”라는 글을 ≪쁘라브다≫에 발표하여 상황을 교정하는 작업에 나섰다.28) 이 글에서 쓰딸린은 집단화에서 자발성의 원칙이 침해되고 있고 행정적 강제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서로 다른 지역들의 특성이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며 농민들에게 집단 농장에서 탈퇴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을 밝혔다. 쓰딸린이 이 글을 발표하고 나서 집단 농장에 참여했던 농민들의 약 절반이 집단 농장에서 탈퇴를 하였다. 그리하여 집단화율은 전체 농가의 23.6%로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집단 농장의 대중적 전개에 고무된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가 원래의 계획을 수정하여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집단화를 완성한다는 방침으로 전환한 것이 각 지방 공화국과 지역들에서 행정적 강제를 수반하는 무리한 집단화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쓰딸린 자신이 “성공에 현혹되어”라는 글을 발표하여 자발성 원칙의 침해를 비판했지만, 오류를 범한 것은 각 지역의 행정 당국, 집단화 활동가들만이 아니며, 무리한 계획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던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 또한 오류를 범한 당사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집단 농장에 참여했던 농가 중에서 약 절반의 농가가 탈퇴했다는 것은 중농들이 집단 농장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쏘련에서 트랙터의 대량 생산은 1930년 말에 쓰딸린그라드의 트랙터 공장의 완공, 1931년에 또 하나의 트랙터 공장이 완공된 이후에 가능해졌다. 레닌은 농업 집단화에서 자발성의 원칙과 트랙터를 포함하는 농기계 등 물질적 원조를 강조한 바 있었는데,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는 트랙터의 대량 생산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1929년 말까지의 집단화의 일정한 성공에 도취되어 급작스레 1차 5개년 계획을 변경하여 무리하게 집단화를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성공에 도취”된 것은 지방의 행정 당국과 집단화 활동가들만이 아니라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 자체였던 것이다.

1929년 말까지 약 240만 호의 농가가 집단화에 참여한 것은 중대한 성공을 의미했다. 특히 중농이 집단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의 명백한 징표였다. 그러나 중농이 집단화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서, 계급으로서 중농이 집단화에 전반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조건, 특히 트랙터의 대량 생산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1930년 초 당시에 트랙터의 대량 생산은 1-2년이 걸리는 문제였다. 1-2년의 시간 차이는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사소한 것이고 종이 한 장의 차이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인해 농업 집단화에서 자발성 원칙이라는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이 침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볼쉐비끼 당은 이러한 오류를 범하였지만 쓰딸린의 “성공에 현혹되어”라는 글의 발표를 기점으로 신속히 자신의 오류, 집단화 운동에서의 오류를 극복해 가기 시작했다. 쓰딸린의 글이 발표되었던 1930년 3월 2일 같은 날에 집단 농장의 장정(章程)을 발표하여 주택, 가축 등을 공유하는 꼬뮌형 집단 농장을 비판하면서 농기구와 노동을 집단화하는 아르쩰형 집단 농장을 집단 농장의 보편적인 형태로 채택하였다. 아르쩰형 집단 농장에서는 농민들이 우유를 생산할 수 있는 암소를 비롯한 일정한 가축과 가금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또 1헥타르 미만의 일정한 양의 텃밭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는 집단적 이익과 농민의 개인적 이익의 통일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농민들이 대거 집단 농장에서 탈퇴한 이후 볼쉐비끼 당의 오류의 교정에 따라 집단 농장 운동은 1930년 가을부터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농민의 자발성 원칙이 특히 강조되었는데 농민으로 하여금 집단 농장 가입 신청서를 직접 작성하게 하고 농장 관리위원회의 토론을 거치고 농장원 대회를 거쳐 가입이 결정되게끔 가입 절차를 강화하였다.29)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집단 농장은 서서히 확대되었는데, 1933년에는 1520만 호, 전체 농가의 60%가 가입하였고 2차 5개년 계획 시기인 1937년에는 1850만 호, 전체 농가의 93%, 경작 면적의 99.1%가 집단화되었다.

이러한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에 대한 제한, 배제의 정책에서 계급으로서 부농의 소멸 정책으로의 전환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도시의 공업과 상업의 영역에서 사적 자본가들, 네쁘맨들은 볼쉐비끼 당의 사적 자본에 대한 제한과 배제 정책에 따라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소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농촌에서 꿀라끄들, 부농들은 이렇게 조용히 소멸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격렬한 저항을 하였다. 부농들은 집단화 활동가를 살해하고 집단 농장의 건물에 방화하고 국유 재산과 집단 농장 재산을 파괴하고 절취하는 등의 테러 활동과 말과 소 등 가축 수천만 마리를 도살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부농들이 이렇게 집단화에 대해 이렇게 격렬하게 저항한 것은 집단 농장 운동의 전개와 부농의 계급적 이익이 적대적으로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부농들, 꿀라끄들은 농촌에서 유지로 행세하며 곡물 투기, 고리대금업, 농기구를 빈농과 중농에 비싸게 대여하는 것, 고농과 빈농을 고용하여 착취하는 것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빈농과 중농이 집단화되어 더 이상 부농에게 농기구를 임차하지 않고 돈을 빌릴 필요가 없게 되고 부농에 고용될 필요가 없게 된다면 부농의 자본 축적의 기반은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농의 격렬한 저항은 부농을 집단 농장에 가입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부농을 집단 농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농에 대한 볼쉐비끼 당의 대응은 부농의 종류를 3가지로 나누는 것이었다. 먼저 집단화 운동가를 살해하는 등의 테러를 한 부농은 쏘비에트 법률의 심판을 받고 그 가족은 변경 지구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유형은 집단화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부농과 과거 지주 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은 변경 지구로 추방되었다. 세 번째의 유형은 부농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집단 농장에서 배제된 상태에서, 변경 지구로의 추방이 아니라 일정한 주거에 모여서 ‘부농촌’을 형성하여 집단 거주하게 되었다. 첫 번째 부류의 부농은 7.7만 호였으며 두 번째 부류의 부농은 15만 호였고 세 번째 부류의 부농은 81.5만 호였다.30) 변경 지구로 추방된 부농은 약 24만 호였는데, 변경 지구로 추방된 부농에 대해 쏘비에트 정부는 생활을 보장하여, 추방된 부농은 그 지역에서 임업, 건축, 광산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서시베리아와 까자흐스딴 지역에서는 국영 농장의 노동자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31)

부농에 대한 쏘비에트 정부의 이러한 대응을 검토해 본다면 부농을 3종류로 나누어서 대응했다는 점은 적절한 것이다. 쏘비에트 법률을 위반했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부농을 나누어 분리 대응하는 것은, 구체적 혐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적 법치주의에 합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부농을 변경 지구로 추방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법치주의에 합치하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물론 형사법적 처벌의 한 유형으로서 추방 혹은 유형(流刑)은 존재할 수 있다. 과거 짜르 시대에 유형은 형벌의 공공연한 한 종류였다. 그러나 쏘비에트 법률을 명백히 위반한 당사자를 제외한 그 가족, 그리고 정치적으로 집단 농장을 반대하는 견해를 표명했다고 하여도 쏘비에트 법률을 직접적으로 위반하지 않은 부농을 변경 지구로 추방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법치주의에 합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집단화가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확립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계급 투쟁의 문제이며, 따라서 부농에 대한 수탈과 진압이 수반될 수밖에 없지만, 이미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성립하여 통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수탈, 진압과 통치, 행정, 관리를 적절히 결합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검토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 농업 집단화는 이러한 격동 속에서 그리고 오류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발전해 갔다. 농업 집단화에서 농민들을 견인하는 결정적 역할, 구심적 역할을 한 것은 사회주의적 부문인데, 기계ㆍ트랙터 기지(MTS)와 국영 농장이 그것이다. 트랙터, 연합수확 기계, 파종기, 탈곡기 등 다량의 농기계를 보유한 MTS32)는 한 곳당 주변 집단 농장 34곳을 맡아 복무하였다. 1차 5개년 기간에 MTS 사업에 15억 루블이 투자되었고 집단 농장에는 32억 루블이 투자되었다. 1932년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MTS는 2,446개로 늘어났다. 집단 농장은 그 구성에 있어서 노동 조직을 생산대로 나누어 구성했는데 생산대는 농민이 과거 개인농 시기와 달리 계절성에 구애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고정적 단위였고 또 개인적 영농이 아니라 집단적 영농을 하는 데 있어서 세포와 같은 것이었다. 또 생산대는 분배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단위였다. 생산대에서 행한 공동 경작이 노동일 단위로 평가되어 수확 시에 곡물 등 현물과 화폐 수입 중에서 개인 몫을 분배받게 되는 단위였다. 또한 집단 농장에서는 부농의 가축 도살로 인한 손실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는데 가축의 상당수를 개인적인 부업의 몫으로 돌렸다. 그리하여 1932년에 소의 38.4%, 양의 37.8%가 개인적 부업의 형태로 존재했고 나머지는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의 공유 부문의 형태로 존재했다. 집단 농장은 1932년에 이르면 21.06만 개로 늘어났다.

국영 농장은 1928년 1,407개에서 1932년 4,337개로 증가하였다. 국영 농장이 보유한 농기계는 1932년 국영농장 한 곳당 100대의 트랙터, 50대의 연합수확기, 20량의 화물차 등이었다. 국영 농장은 처음에는 곡물 농장, 면화 농장 등 대규모의 경작을 지나치게 전문적으로 추진했는데, 이후 운영의 기술과 방법이 개선되면서 곡물 국영 농장이 가축을 기르는 축산업을 같이 하는 종합적 국영 농장으로 발전했다. 이는 농업의 특성에 따른 것인데 곡물 재배를 잘 하기 위해서는 가축의 거름이 필요하고 또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서는 사료 작물 재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농업은 한편으로 전문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합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차 계획 기간의 말기인 1932년 사회주의적 부문은 곡물 생산의 76%, 원면의 84%, 사탕의 84%를 점유했고, 특히 사회주의적 공유 부문이 상품성 곡물 생산의 84%를 차지하게 되어 도시에 공급하는 식량 공급의 안정성이 확보되게 되었다. 공업 원료에 있어서는, 1927-28년도에 공업에 필요한 면화의 46.5%를 수입해야 했지만 1차 5개년 계획 기간을 거치며 대부분 자체적으로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1933년 7월 1일 집단 농장 돌격대 1차 대회가 개최되어 그동안 집단 농장 운영에 있어 문제점을 토론하여 새로운 결의를 이끌어 내었다. 노동력의 이용에서 안배가 적절하지 않았고 노동 과정에서 책임질 사람이 없는 현상이 나타나서 작물 재배와 목축업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 평가되었다. 또 집단 농장 재산의 등기가 잘 되지 않아 재산의 횡령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지적되었다.33)

집단화 과정이 쏘련 농업에 미친 영향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쏘련 농업 전체의 생산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3년의 농업 총생산고는 1932년의 94.4%였는데 이는 기후 등 객관적인 조건을 제외하면 집단 농장 운영의 미숙함, 그리고 집단화 과정에서 자발성 원칙의 침해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저하 등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1934년에는 생산고가 소폭 증가했는데 축산업이 10.8% 증가하였고 곡물 재배가 3.3% 증가하였다. 이는 집단화 과정 초기의 오류와 어려움을 서서히 극복하면서 집단 농장의 생산성이 향상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1935년은 집단 농장 운동에 있어서 ‘전환의 해’로 불리는데 집단 농장 운영이 안정화되고 곡물 재배가 10.4% 증가하고 축산업에서 19.4%의 증가가 있었다. 그리고 기술 작물 생산이 크게 성장했는데 면화가 45%, 사탕이 43% 증가하였다. 이리하여 1935년을 기점으로 집단 농장의 생산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2차 5개년 계획 말기인 1937년의 경우 농업 총생산이 1차 5개년 말기인 1932년에 비해 곡물은 20% 증가하고 축산업은 45.3% 증가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2차 5개년 계획의 시기는 농업 생산이 1차 5개년 계획 시기보다 4.8% 높았고 3차 5개년 계획 시기는 2차 5개년 계획 시기보다 농업 생산이 8.3% 높았다.34) 이러한 수치는 집단 농장이라는 생산 관계가 안정화되어 생산력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중요한 점은 농업 전체가 기계화된 생산으로 전환함에 따라 약 1,000만 명 이상의 노동력이 절감되어 그 노동력이 공업의 성장의 필요에 따라 도시 노동자로 전환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집단 농장의 운영이 초기에 미숙한 상태에서, 쏘비에트 국가는 집단 농장 간부들의 발굴과 훈련, 지도력의 상승을 위해 MTS에 정치부를 설치했다. MTS 정치부는 1933년 5월 1일에 출범하여 집단 농장의 공고화라는 임무를 완수하고 이후 지역의 구(區) 당 조직과 통합된다. MTS는 단순히 농기계를 집단 농장에 대여하는 역할을 넘어서서 작물 재배와 축산업의 기술 전반을 끌어올리고 또 MTS의 기계 대여와 기술자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집단 농장이 보수로 제공하는 곡물을 국가에 납입함에 의해 국가가 곡물을 획득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집단 농장 운동의 전환의 해인 1935년 2월에 제2차 집단 농장 돌격대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집단 농장의 장정(章程)을, 그동안의 집단 농장 운영의 경험을 반영하여 수정, 보완하였다. 집단 농장 공유 재산의 1/2-1/4은 공적 적립금으로 하고, 나머지 공유 재산은 집단 농장 성원의 지분에 따른 기금으로 하여 집단 농장 탈퇴 시 탈퇴 성원에게 반환하는 것으로 하고, 가입비는 공적 적립금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하는 등 집단 농장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분배의 체제도 정비되었는데, 화폐 수입의 경우 공제분을 빼고 공유 부문에서의 노동일에 따라 분배하였다. 집단 농장에서의 노동일은 공업에서 생산 노르마와 같은 보수 지급의 기준으로서 역할했는데, 노동일을 7종으로 분류하고 그 최고와 최저 비율은 4:1로 하여 평균주의를 극복하고 물질적 자극을 강화하였다. 즉,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차등적인 보수 지급을 강화하여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자극한 것이었다.

집단 농장이 안정화됨에 따라 농장원들은 개인 부업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 줄이고 공유 부문에서의 노동일을 증가시켰다. 공유 부문의 노동일은 1932년에 148일이었는데, 1937년에는 194일로 증가하였다. 이는 농장원의 수입의 비중 면에서 개인 부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공동 작업, 공유 부문에서의 비중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분배의 측면을 구체적으로 보면, 1937년의 경우, 집단 농장 총생산물 중에서 26.1%는 국가에 납부하고 29%는 생산 기금으로 사용하고 35.9%를 노동일에 따라 농장원과 트랙터 기사에게 분배하였다. 그리고 화폐 수입의 경우, 20%는 생산 기금으로, 14%는 공적 적립금으로, 1/2 정도가 노동일에 따라 농장원과 트랙터 기사에게 분배되었다. 노동일당 곡물 분배량은 1932년 2kg에서 1937년 3.9kg으로 증가하였다. 화폐 수입도 농가당 1932년 108루블에서 1937년 376루블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개인 부업에서 얻는 소득을 합하면 농장원들은 집단화 이전보다 훨씬 높은 소득을 얻게 되었다.

개인 부업은 텃밭 경작 외에 소 등 가축의 사육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개인 부업으로 소유하는 소의 숫자가 1932년 1,020만 두에서 1938년 2,510만 두로 증가했고, 돼지의 경우 300만 두에서 1,280만 두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개인 부업 소유의 가축과 공유 부문의 소유의 가축은 대략 각각 절반의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축산에 대한 이러한 정책을 통하여 쏘련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1930년 초 부농의 가축 대량 도살로 인하여 발생했던 축산업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게 되었다. 집단 농장의 안정적 발전은 그 인원 구성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왔는데 트랙터 기사, 연합수확기 기사, 운전사, 수리공 등 기술 인원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는 쏘련의 농촌이 중세의 모습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사회주의 농촌으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2년에서 1937년에 이르는 2차 5개년 계획 시기에 트랙터의 공급은 3배로 늘어났는데, 트랙터의 수가 14.8만 대에서 56.1만 대로 증가하였고 그에 따른 기술 인원의 증가도 상당하였다.

국영 농장의 경우 그 구성 노동자에게 개인 텃밭과 가축의 보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1937년에 국영 농장 노동자의 64%가 자신의 가축을 보유하고 있었고 60%가 자신의 텃밭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영 농장이 전체 농업 생산고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꾸준히 증가했는데 1928년 1.5%에서 1937년 12.8%로 증가하였다. 혁명 직후 국영 농장이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한 것에 기반하여 창설되었다면 1930년대 이후 국영 농장의 꾸준한 증가는 노는 땅을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집단화 과정에서 국영 농장과 집단 농장의 비중의 증대는 전체 파종 면적의 확대를 가져왔다. 러시아 공화국의 경우 1937년 파종 면적이 1913년에 비해 34.1% 증가하였고 그루지야는 35.4%, 까자흐스딴은 39.0%가 증가하였다.35)

이러한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의 성장은 그 설비와 고정 기금의 증가를 가져오는 것이었는데, 농업에서 고정 기금은 1928년 11억 루블에서 1937년 90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그 고정 기금들에서의 비중을 보면 1937년 MTS는 19.9%, 국영 농장은 20.0%, 집단 농장은 60.1%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기계, 건물 등 고정 기금이 이렇게 증가한다는 것은 농촌과 농업의 모습이 급격히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력의 경우 그렇지 못했는데, 농촌의 전기화는 부진하여 1936년 3%의 집단 농장, 30%의 MTS, 10%의 국영 농장만이 전기화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농업의 기계화, 집단화로 인해 농업의 노동생산성은 크게 증가하였다. 곡물 재배의 경우 집단 농장의 노동생산성이 소농 체제하에서보다 2배 이상 증가하였다. 1노동일당 수확량을 보면 개인농의 경우 30kg이었지만, 집단 농장은 100kg, 국영 농장은 590kg에 달하였다. 이러한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기계의 도입과 집단화의 요소 때문만이 아니라 화학 공업의 발전으로 비료의 공급이 가능해졌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광물성 비료는 이 시기에, 혁명 전과 비교하여 16배 증가하였다. 화학 비료 생산은 1927-1928년도에 17.5만 톤에 불과했으나 1932-1933년도에는 800만 톤에 달하였다.

농업 집단화는 1937년 2차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던 시점에 이미 확고한 안정적 발전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 초의 급격한 집단화로의 방향 전환, 그에 따른 행정상의 강제와 자발성 원칙의 침해는 쏘련 농업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었고, 축산업의 경우 거의 10년의 노력을 통해 부농에 의해 도살된 가축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측면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업 집단화에서 자발성 원칙의 침해에 따른 정치적 파장의 문제였다. 노동자계급과 중농의 동맹이 공고하지 않다는 것이 1930년 초 농민들의 집단 농장으로부터 대거 탈퇴에 의해 드러났다. 그런데 브레쥐네프 시대의 당의 공식적 입장을 보여 주는 ≪쏘련 사회주의 경제사≫의 저자들은 1930년 초 집단화 운동에서의 오류를 에피소드라고 치부한다. “사실상, 당과 중앙위원회가 완성한, 집단화를 실현하고 건립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거대한 적극적인 사업과 비교해 보면, 오류와 지나친 행위는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36) 그러나 이는 철저히 잘못된 입장이다. 집단화에서 농민의 자발성 원칙이라는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위반하고 침해한 사건을 단지 에피소드라고 평가하는 데서, 1930년대 당시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가 범했던 오류가 브레쥐네프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교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격히 평가해 보면, 볼쉐비끼 당 중앙원회가 1929년 말까지의 집단화 운동의 성공에 고무되어 1930년 초에 부농의 제한, 배제 정책에서 계급으로서 부농의 소멸 정책으로 전면 전환한 것은 오류였다. 그에 따라 온갖 행정적 강제가 자행되고 농민, 특히 중농들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고, 표면적으로는 수년 동안 노동생산성이 저하되는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농 동맹은 깊이 균열되었다. 노농 동맹의 균열은, 단지 집단 농장 체제하에서의 농업 생산고가 소농 체제보다 더 상승한다고 해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정치적인 문제로 전화되는 것이었다. 즉, 노농 동맹이 균열되고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침식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띠는 것이며, 볼쉐비끼 당에 대한 반대 세력, 반쏘비에트, 반체제적인 세력이 음으로, 양으로 활동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1920년대 노선 투쟁에서 패배했던 뜨로쯔끼 세력과 부하린 세력은 1930년대 음모적이고 비밀 결사적인 반쏘비에트 활동으로 나아갔는데, 이들이 이런 비합법적인 비밀 결사를 할 수 있었던 정치적 조건이, 1930년대 초반의 농업 집단화에서 볼쉐비끼 당 중앙위원회의 오류로 말미암아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쓰딸린의 1920년대 뜨로쯔끼와 부하린에 대한 노선 투쟁은 정확하고 정교한 것이었다. 그러나 농업 집단화 운동의 대중적 전개에 고무되어 1930년 초 급격한 방향 전환을 하여 집단화에서 자발성 원칙의 침해를 초래한 것은 쓰딸린의 오류이다. 그리고 이 오류는 노농 동맹의 균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침식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대한 것이며, 쓰딸린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첫 번째 실책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4. 제2차 5개년 계획

 

제2차 5개년 계획은 국민 경제의 개조를 완성하는 시기였다. 즉,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수립을 완성하는 시기였다. 농업에서 집단화가 절대다수 농민을 포괄하게 되었으며, 공업과 상업에서 사적 자본이 완전히 사라지고 또 수공업자의 협동조합화를 통한 사회주의 생산 관계로의 인입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생산 관계에서의 완성은 생산력의 고도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고, 역으로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완성은 생산력 발전을 추동했다.

그런데 2차 5개년 계획의 시기는 국제 정세에서 악화를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파씨즘이 등장하여 배외주의적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고 쏘련에 대한 침략을 공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절실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소비재 생산과 주택 건설에 들어가는 자금의 상당 부분이 국방력 강화에 돌려졌고 또 공업에 있어서도 국방력의 강화하기 위한 기계제조 공업의 건설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기계제조와 전기화는 기술 개조의 중요 요소였다. 1934년에 개최된 17차 당 대회는 공업 생산을 연 16.5% 증가로 잡았는데 이는 1차 5개년 계획의 시기보다 낮은 수치였다. 이는 기술을 효과적으로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차 5개년 계획은 투자 증대와 노동력 투입의 증대를 통한 조방적(粗放的) 성장을 추구한 것이었다면, 2차 5개년 계획의 시기는 최신 기술의 장악을 통한 노동생산성 제고와 원가의 절감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었다.37)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국민 소득이 82% 증가했는데, 2차 5개년 계획에서는 국민 소득이 112% 증가하였다. 소비재 생산은 배로 증가했는데 혁명 전인 1913년에 비해 5배가 증가한 수치였다. 노동생산성은 꾸준히 향상되어 1933-1937년의 기간에 연평균 12.7%가 증가하여 기간 전체적으로 82% 증가했다. 반면에 1차 5개년 기간에 노동생산성은 전체적으로 41% 증가에 그쳤었다. 2차 5개년 계획의 시기에 공업 생산은 1.2배 증가했고 농업 생산은 50% 증가하였다. 축적과 소비를 보면 소비의 경우 국민 소득에서 그 비중이 72.9%를 차지했는데 1차 5개년 계획의 소비 수준보다 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전체 경제에서 사회주의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확고해졌는데 공업은 99.8%, 농업은 98.5%가 사회주의 부문에서 생산이 이루어졌다.

1차 5개년 계획 당시 중공업은 적자를 면치 못하는 기업이 많았다. 거대한 설비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기술을 가진 인력이 부족한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그에 따라 중공업 기업은 초기에 노동 소모량이 많았다. 그러나 차츰 기술을 익히고 숙련화되면서 노동 소모량은 크게 낮아지고 원가 절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CT3 트랙터 공장은 노동력 소모량이 1932년 329.0이었는데 1937년에는 105.5로 크게 낮아졌다.38) 그리하여 중공업 기업들이 원가를 절감하고 적자를 벗어남에 따라 국가의 중공업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철폐되었다. 1937년이 되면 중공업 기업의 이윤이 전체 공업 이윤의 40%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공업 기업의 상품의 가격이 가치에 접근하게 되어 전체 경제에서 경제계산제를 시행하는 데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경제가 이렇게 안정적으로 발전하자 밑으로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사회주의 경쟁이 그것이다. 자본가를 위한, 타인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사회를 위한 노동을 하게 된 사회주의 노동자는 사회주의적 경쟁을 통해 노동 영웅주의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35년 8월 31일 돈바쓰의 탄부 쓰따하노프는 102톤이라는 목표액을 13배를 초과하는 성과를 내었다. 이러한 혁신적인 성과는 노동 조직과 노동 도구를 개선하여 전문적인 분업화를 강화한 결과였는데, 쓰따하노프의 뒤를 이어 돈바쓰의 탄부들이 앞다투어 쓰따하노프의 성취를 넘어서는 성과를 내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경쟁이 불붙었는데, 이러한 경쟁은 돈바쓰 탄전을 넘어서서 전국으로, 전 부문으로 확산하여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쓰따하노프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쓰따하노프 운동은 노동생산성을 결정적으로 향상시켰으며, 2차 5개년 계획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공업 내적인 구조도 변화를 겪었는데,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1부문의 생산에 있어서도, 생산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의 생산에 강조점이 두어졌다. 또 이를 위해 필요한 기계제조업의 발전, 특히 선반 제조에 있어서 획기적 진전이 있었는데, 약 172종의 새로운 종류의 선반 제작이 이루어졌다. 선반에 있어서 수입 의존도는 1928년 66.4%였는데 1937년에 이르면, 단지 10%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기계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공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차 5개년 계획 시기의 18.1%에서 2차 5개년 계획에서는 29.5%로 증가하였다. 이는 기계제조업의 급속한 발전이 국방력의 강화와 밀접히 연관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1937년 기계제조업의 생산고는 전체 공업의 25.5%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국민 경제에서 필요로 되는 기계의 공급에서, 수입품의 비중은 1932년 12.7%에서 1937년에는 0.9%로 낮아졌다. 이러한 기계제조업, 중공업의 발전에 기초하여 경공업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는데, 1937년 경공업의 생산고는 1932년에 비해 73%가 증가하였다. 특히 방직품의 생산은 1932년의 수준을 1.7배 초과하였다.

2차 5개년 계획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계제조업의 발전에 기초하여 러시아의 민족 공화국들과 지구에서 중공업과 경공업의 배치를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레닌그라드, 모쓰끄바 등 중앙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 발전이 지배적이었는데, 2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중앙아시아, 까자흐스딴, 우랄, 시베리아 등 변방 지역에 경공업뿐만 아니라 중공업이 배치, 발전되기 시작하여, 나라 전체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고 민족 지구들에서 사회주의 경제 부문을 강화하고 노동자계급의 대오를 강화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방의 측면에서 보면 우랄에 제2의 철강, 석탄 기지를 건설하여 서부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후방에서 경제의 건설과 유지, 무기와 군수품의 생산 등 국방력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점은 2차 세계 대전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는데, 쏘련이 개전 초기 열세에 있다가 차츰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저력은 전선 후방에 강력한 공업 기지들이 있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2차 5개년 계획의 사회적인 측면을 보면, 1932-1937년 기간에 소매 상업 유통액이 404억 루블에서 1,259억 루블로 3배 이상이 되었다. 이는 쏘련 인민의 소비 수준이 2차 5개년 계획 시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매 상업에서 국영 상업의 비중은 77%를 차지하였고 협동조합 상업의 비중은 23%로 저하되었다. 이는 상업의 영역에서도 사회주의적 경향성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집단 농장 농민들이 생산물을 내다 파는 집단 농장 시장은 1933-1934년에 전체 상품 유통액의 1/5을 차지하였다.

2차 5개년 계획 기간의 국가 예산은 3,835억 루블이었는데 1차 5개년 계획 시기의 913억 루블에 비하면 4배 이상 증가한 액수였다. 예산에서 사회 문화 시설에 대한 투자액은 1차 때의 202억 루블에서 2차 때는 937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국가의 수입을 보면 1937년에 소비재 상품에 붙이는 매상고세가 759억 루블인 반면에, 국유 기업들이 상납하는 이윤 액은 93억 루블이었다. 이는 국가의 수입에서 매상고세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매상고세의 의미를 보면, 한편으로 중공업 등에서 생산하는 생산수단의 가격을 비교적 저렴하게 하여 경제 전체적으로 생산의 증가를 촉진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업이 이윤을 너무 높게 잡는 것을 억제하면서, 그로부터 비롯되는 가격과 가치의 차이에 대해 소비재 상품의 판매 단계에서 매상고세를 매겨서 가격을 가치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 쏘련의 조세 정책이었던 것이다.

교육 예산은 1933년에 49.3억 루블에서 1937년 164.5억 루블로 증가하였고 보건 관련 예산은 같은 기간에 9.6억 루블에서 69.2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국방 예산은 1933-1938년의 기간에 286%가 증가하였다. 국방 예산의 이러한 증가는 1930년대 후반 국제 정세의 긴장이 격화되고 전쟁의 기운이 높아져 갔던 것과 연관이 있다.

1932-1937년간 임금 기금의 총액은 327억 루블에서 823억 루블로 1.5배가 증가했다. 그렇지만 그 기간에 노동자 수는 18.1% 증가에 그쳐 노동자 1인당 임금 증가는 배가 넘게 증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임금의 증가는 식품과 공업 제품의 가격 인하, 낮은 세금, 저렴하면서도 불변하는 주택 비용을 전제로 증가한 것이었다.39) 그에 따라 노동자의 소비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는데, 고품질 빵의 소비, 육류, 소시지, 계란, 과일과 버터 등 음식 소비 구조의 변화가 일어났다. 임금 이외에 사회적 소비 기금도 증가했는데, 체육, 보건, 교육, 사회보장 및 사회보험 지출이 1932년 83억 루블에서 1937년 308억 루블로 증가했다. 사회적 소비 기금은 노동자와 인민이 실질적으로 그 소비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지만, 임금을 통한 개인적 지출이 아니라 국가 예산 등의 사회적 지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소비 기금의 액수가 커지는 것은 실질 임금이 상승한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쏘련에서 사회적 소비 기금의 비중은 전체 임금액의 약 절반 정도였다. 그리고 사회적 소비 기금의 성격을 사회주의 발전 전망과 관련해서 평가해 보면, 사회적 소비 기금은 노동에 따른 분배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측면이 강한 것이다. 임금과 사회적 소비 기금의 관계를 보면,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노동에 따른 분배로서의 임금보다 필요에 따른 분배로서의 사회적 소비 기금의 비중이 커지는 것을 통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서서히 접근해 가는 것을 전망할 수 있다.

이러한 2차 5개년 계획의 실시로 쏘련은 사회주의 생산 관계를 완성할 수 있었고 생산력의 수준에서 비약을 했다. 그리하여 1936년 대공업의 생산고는 1931년의 6.3배에 달하였다. 이는 유럽에서 1위, 세계적으로는 미국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특기할 것은 1936년에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완성을 반영하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헌법의 채택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되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새로운 헌법의 채택과 연관된 중대한 오류가 범해졌는데, 쏘비에트 대의원의 선거를 생산 단위로서의 공장을 선거구로 하여 선거를 진행하는 것에서, 지역구를 중심으로 선거를 하는 것으로의 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쏘비에트의 형식을 부르주아 의회제적 형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공장 단위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로 바뀌면 대의원이 오류를 저질렀을 경우 소환, 파면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지역구 선거를 하는 부르주아 의회에서 선거민이 의원을 소환, 파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선거구가 변경되면서 쏘비에트 대의원들이 노동자계급에 대해 책임지고 노동자계급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때 이후로, 노동 집단으로 조직된 유권자들의 믿음을 배신했던 대표들을 소환할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청산되었기 때문에, 관료주의와 출세주의에 의한 국가 기구의 더욱더 강력한 오염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과 국가의 기구가 흐루쇼프 같은 사람들과 고르바쵸프 같은 사람들을 키운 것은 또한 이러한 과정의 틀 내에서였다.40) 이 인용문은 현재 자본주의화된 러시아에서 뿌찐과 맞서면서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투쟁하고 있는 러시아 공산주의 노동자당의 글에서 인용된 것이다. 쏘련 당시를 살았던 인민으로서 그들은 쏘비에트가 부르주아 의회제와 형태상에서 차별성을 잃어 가고 있던 과정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한 형태상의 차이, 즉 공장 등 생산 단위 선거구인가 아니면 지역 단위 선거구인가의 문제가 아니며, 쏘련에서 국가 권력 기관으로 작동하는 쏘비에트가 차츰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상실하고 관료주의화되는 과정의 시작이 바로 생산 단위 선거구의 포기를 기점으로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쏘비에트는 대의원들의 구성을 보면 노동자 출신이 점점 줄어들고 당 관료와 지식인 출신이 점차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하여 관료주의와 출세주의의 토양이 강화되어 갔고 흐루쇼프를 대표로 하는 수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토양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 인민 국가론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청산하고 관료들의 무사태평한 지배를 꿈꾸었던 흐루쇼프, 브레쥐네프의 수정주의는 이렇게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쓰딸린의 두 번째 실책이 된다. 쏘비에트에서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적 성격의 약화를 가져오는 선거구의 변경을 통해 당과 쏘비에트에서 수정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는 것! 이것이 쓰딸린의 두 번째 실책이다.

1차와 2차에 걸친 두 번의 5개년 계획의 실시는 그 과정에서 일정한 한계와 오류가 있었지만 당시 쏘련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완성,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전환, 인민 생활에서 개선, 소비 수준의 향상 등 거대한 성취는 쏘련 국내적으로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쏘련이 두 번에 걸친 5개년 계획을 통해 거둔 성취는 쏘련 국내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 그리고 피억압 민족을 고무하는 것이었다. 지주와 자본가가 없어도 사회를 능히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의 생생한 사례로서 쏘련의 발전, 억압과 소외, 착취를 강요하는 계급 대립이 현실적으로 폐지될 수 있다는 것의 생생한 사례로서의 쏘련의 현실, 쏘련 내의 피억압 민족들의 평등한 발전 등 쏘련이 10년 동안 거둔 성취는 인류로 하여금 19세기와 다른 20세기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성취는 세계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의 고양, 세계 피억압 민족의 민족 해방 투쟁의 고양을 불러왔고 세계 정치의 지형을 변동시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성취는 자본주의 세계가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실업자의 격증, 생산의 감소를 겪던 시기에 달성된 것이었다.

쓰딸린과 볼쉐비끼 당은 이러한 성취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핵심적 지도 역량이었다. 인류가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던 길을 걸어가면서 이룬 성취라는 점에서, 그것은 일정한 오류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오류는 곤란에서 비롯된 오류가 아니라 성취에서, 승리에서 비롯된 오류라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곤란을 극복하고 성공과 성취를 이루었을 때, 볼쉐비끼 당은 과도한 판단을 하거나 일정한 자만을 하여 오류를 범했고 그러한 오류의 누적은 향후의 사회주의 건설에 장애로 작용하는 것이 되었다. 이 점은 앞으로 규명되고 분석될 것인데, 하나의 과정,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새로운 단계,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는 것은 새로운 모순의 발생과 전개를 의미한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할 때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다. 쓰딸린과 볼쉐비끼 당, 나아가 20세기 사회주의가 범했던 오류는 지금 21세기의 조건에서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의 자산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1)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4권, 편집부 역, 거름, 1991, p. 25.

 

2)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三卷, 北京: 生活ㆍ读书ㆍ新知三联出版, 1979, p. 115.

 

3) 같은 책, p. 601.

 

4) 같은 책, p. 126.

 

5)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33.

 

6)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73.

 

7) 같은 곳.

 

8) 같은 책, p. 74.

 

9) 같은 책, p. 82.

 

10) 같은 책, p. 85.

 

11) 같은 책, p. 634.

 

12) 같은 책, p. 370.

 

13)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298.

 

14) 같은 책, p. 312.

 

15) 같은 책, p. 315.

 

16)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423.

 

17) 같은 책, p. 444.

 

18)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68.

 

19)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438.

 

20)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69.

 

21) 같은 책, p. 70.

 

22)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440.

 

23) 같은 책, p. 472.

 

24) 같은 책, p. 473.

 

25) 같은 곳.

 

26) 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창작과 비평사, 1998, p. 193.

 

27)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474.

 

28) 같은 책, p. 475.

 

29)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앞의 책, p. 351.

 

30) 같은 책, p. 346.

 

31)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483.

 

32)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四卷, pp. 477-479. 한 곳의 MTS는 1936년 말에 70대의 트랙터, 16대의 연합 수확기, 15량의 자동차, 50대의 탈곡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전체 MTS에 소속된 인원은 200만여 명이었다.

 

33) 같은 책, p. 409.

 

34) 같은 책, p. 503.

 

35) 같은 책, p. 468.

 

36)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三卷, p. 477.

 

37)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四卷, p. 10.

 

38) 같은 책, p. 184.

 

39) 같은 책, pp. 611-613.

 

40) V. A. 튤킨ㆍM. V. 포포프, “레닌주의와 수정주의.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의 근본 문제(프롤레타리아 독재, 그것의 조직적 형식과 경제적인 실체)”, ≪노동사회과학 제7호: 과학적 사회주의의 어제와 오늘≫, 노사과연, 2014, p. 295.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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