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자료] 4월 혁명과 노동자계급

 

채만수 | 소장

 

 

* 이 글은 사월혁명회의 요청으로 집필되어, 2020년 3월 14일 ≪민플러스≫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http://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18>.

 

 

4월 혁명의 놀라움

 

4월 혁명이 일단 승리로 끝났을 때, 즉 이승만 정권의 퇴진으로 끝났을 때, 나의 외딴 향촌에까지도 이 4월 혁명에 세계가 놀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나는 아직 1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대단한 일을 해내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을 뿐, 그 놀람, 혹은 놀랐으리라는 자부심의 진정한 의미를 짐작하기까지는 꽤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후에 미군정을 거쳐 대한미국이 건국되고, 다시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미국이 공고화되기까지,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저 끔찍한 비극ㆍ살육의 현대사를 대략이나마 알게 되고 나서였다.

대략이나마? 그렇다, 대략이나마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미군이 점령군으로 상륙한 이후 미군과 미군정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고 미제의 대리통치기구로 탄생한 이승만 정권이, 그 군과 경찰ㆍ우익테러단체 등이 저지른 4ㆍ3 학살이나 전쟁 중의 좌익학살들은 아직도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근현대 세계사에서, 예컨대, 1871년 빠리 꼬뮌의 빠리 시민에 부르주아 티에르(Adolphe Thiers) 정권이 저지른 대학살,1) 1947년 2ㆍ28 대항쟁을 진압하며 장개석 국민당 군이 저지른 대만의 대학살이 자국민에 의한 자국민의 학살로, 즉 지배계급에 의한 인민의 학살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들 대학살도 그 규모에서 보면 이승만 정권이 신식민지 대리통치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서 저지른 인민대학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 규모를 비교할 만한 학살이라면, 어쩌면, 1965년 가을에 역시 친미 정권을 세우고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좌익대학살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학살은 그 규모가 몇십만 명인지 몇백만 명인지 밝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 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인도네시아의 인구는 한국의 인구의 5배 정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대학살조차 인구비례에서는 비교가 안 된다.

미군정기에 시작되어 1950년 전쟁 중에 그 극에 달한, 좌익ㆍ사회주의자들 및 그 동조자들을 주요 희생대상으로 삼은, 군ㆍ경과 우익단체들의 대학살은 전국 도처의 산야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 양태도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동네 우물 속에 인간을 젓 담그듯이 죽이는 등 실로 잔학하기 그지없어서, 누가 보기에도 일체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자주적인 노동자ㆍ농민적 분자들을 사실상 말살하는 것이었다. 4월 혁명에 대한 당시 세계인들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나로서는 추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가 놀랐다는 당시의 소문이 실제였는지, 아니면 혁명을 해낸 당사자들의 자부심에서 발로한 췌마억측일 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면 췌마억측일 뿐이든, 그 배경에는 그러한 일체의 자주적인 노동자ㆍ농민적 분자들의 사실상의 말살 바로 그것이 있었다. 즉, 세계인의 놀라움이었든, 혁명 주체 스스로의 췌마억측으로 나타난 놀라움이었든,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불과 10년 전에 그토록 말살되다시피 했는데, 어떻게 저런 민중혁명을?! 하는 놀라움이었던 것이다.2)

4월 혁명의 전개양상과 성격, 그 성과와 한계, 그리고 그 혁명이 박정희ㆍ김종필 등의 군부 쿠데타에 압살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 등을 분석하는 데에는, 신식민지 경제파탄으로 인한 당시 노동자ㆍ농민을 위시한 절대다수의 인민의 절망적 빈곤,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 및 그로 인한 대대적인 부정선거 등3)과 더불어, 노동자ㆍ농민 계급의 좌익적ㆍ저항적 분자들에 대한 위와 같은 대대적 학살과 그에 뒤이은 철저한 억압을 주요하게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주어진 주제 혹은 과제가 4월 혁명과 노동자계급일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혁명이 전개되는 동안 내내 보여준 노동자계급의 동태와 그 특징은 주로 이 학살과 억압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4월 혁명과 노동자계급(1)

 

혁명의 초기단계, 즉 이승만이 퇴진할 때까지는, 농민들도 그랬지만, 노동자계급은, 단적으로 말해서, 혁명에 계급으로서는 사실상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물론 노동자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동력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주요 동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굳이 이런저런 전거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많은 문헌, 많은 연구자들이 4월 혁명을 분석할 때, 그 주요 주체로서 청년 학생과 더불어 민중, 시민들, 도시빈민들을 들고 있는 것도, 그리고 신식민지 경제파탄에 의한 실업과 절망적 빈곤을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혁명은 처음 대구와 마산의 시위에 의해 촉발되어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것은 그들 도시민들에 의해서 수행된 것인데, 굳이 그 주체를 학생과 구별하여 민중 혹은 시민들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단지 학생 신분이 아닌 사람들이란 뜻일 뿐이며, 그들의 계급적 성분은 대개가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빈민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실업과 빈곤에 찌든 도시 거주 노동자계급의 최하층, 즉 산업예비군의 정체적 형태이다.

따라서 혁명의 초기단계에 노동자계급이 혁명에 계급으로서는 사실상 참여하지 못했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자들이 혁명에 주요 동력의 일부로 참여했으되, 그것은, 그야말로 도시민으로서 참여한 것이었지, 자신들의 정치적 지도부에 의해서 지도되는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 즉 대자적 계급의 성원으로서는 물론 아니었고, 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로서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참여형태 때문에 관찰자들과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그들은 대개 민중, 시민 내지 도시빈민들로 표상되었다. 1980년대에 노동자ㆍ청년ㆍ민중운동의 일환으로 고양된 저항적 학술운동의 한 성과로 탄생한 한 연구서는 4월 혁명의 주요 동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ㆍ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마산시위를 시발로 학생의 주도 아래 수만의 민중이 합세하면서, 서울ㆍ부산 등지로 확산되었다. 경찰은 무차별 발포로 이에 대응하였다. … 4월 19일에는 2만 이상의 학생과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 / 한편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학생의 뒤를 이은 민중들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도시빈민층이었다. 이들은 50년대 한국경제가 낳은 모순의 직접적 산물로서 생존 그 자체의 극한적 상황과 존재의 부동성(浮動性)으로 말미암아 혁명과정에서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도시빈민층은 노동자ㆍ농민과 함께 별개의 독립된 계층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당시 민중의 기층부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도시빈민과 노동자는 그 생성기반을 농촌에 두고 있으며, 이농현상에 따라 형성된 광범한 실업자 및 불완전 취업자들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형성, 노동자의 임금 및 근로조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4)

 

그런데 노동자계급이 혁명에 이렇게 계급으로서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인구 중 아직 소농민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5) 있어서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는 사회구성상의 시대적 특성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폭압ㆍ학살과 그 공포에 의해서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거세ㆍ압살된 때문이었다.6) 방금 인용한 글은, 소박하게지만,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들은 미국의 원조경제 아래 전개된 관료독점자본의 직접적인 피해당사자였으나, 각 계층 나름의 특수성과 독재체제의 탄압에 의해 조직화되거나 상호연대를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혁명과정에서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7)

 

노동자계급의 4월 혁명 참여가 이러한 형태밖에 취할 수 없었던 것이 총인구 대비 소수라는, 당시의 사회구성상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억압ㆍ학살과 지속적인 탄압 때문이었다는 것은 해방 직후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온 대중투쟁 속에서 1945년 11월 5일에 결성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조직과 활동ㆍ투쟁을 보면 명확하다. 전평은 그 결성 당시 이미 남북을 합하여 16개 산업별 노동조합, 1,194개의 분회, 11개 지방평의회, 217,073명의 조합원을 가진, 정치의식과 조직력ㆍ투쟁력이 강한 조직이었고, 1946년 2월 15일 시점에서는 235개의 지부 및 1,676개의 분회에 57만 4,479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남쪽만의 조합원수 역시 31만 5,100명에 이르고 있었다.8) 2018년에는 유승민ㆍ안철수 주도의 바른미래당 대구시장 후보로 출마하는 김형기 교수는 1985년에, 고 박현채 교수도 인용하면서, 전평과 관련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해방직후 지배적이었던 민중의 좌경화 경향을 소멸시키고 우익적 정치질서를 형성시키는 것을 자신의 기본과제로 하고 있었던 미군정청은 좌익정치세력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던 전평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미군정청은 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우익세력에 의해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대한노총)을 육성ㆍ지원하는 한편 전평의 활동을 제한하였다. 1946년 3월 10일에 결성된 대한노총은 그 강령과 조직과정 및 그 활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이라기보다는 좌익 노동조합인 전평을 타도하고 노동자들 속에 우익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정치적 필요성에서 조직된 반공정치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미군정청과 우익정치세력 및 기업주들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서 대한노총은 그 본래의 사명인 전평타도를 위해 단위조합결성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 이러한 상황전개 속에서 전평은 미군정청과 정면으로 대립하여 1946년 9월 총파업을 비롯해서 1947년 3월 총파업, 1948년 2ㆍ7총파업, 5ㆍ8총파업 등 대대적인 정치적 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 그러나 전평은 1947년 6월에 와서 미군정청에 의해 불법화되고, 동년 8월 좌익단체에 대한 대량 검거가 진행됨에 따라 비합법적 지하투쟁으로 운동방향을 전환하였다.9)

 

그리고 대한미국의 건국과 특히 1950년의 전쟁을 거치면서 소멸된다. 그리고 그 이후 자주적 노동자계급 운동에 대한 지속적 탄압으로 노동조합이라기보다는 좌익 노동조합인 전평을 타도하고 노동자들 속에 우익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정치적 필요성에서 조직된 반공정치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한 대한노총만이 노동자계급을 대표하게 된다. ― 이것이 개략적으로 본, 4월 혁명에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는 참여하지 못하게 된 전말이다.

 

 

4월 혁명과 노동자계급(2)

 

그러나 당연하게도 4월 혁명으로 노동자계급 운동도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반제ㆍ민족통일투쟁이나 양민학살 진상규명투쟁 등이 그러했던 것처럼, 피의 억압이 이완되고, 그에 따라 대중의 정치적 공간이 열리고, 공포가 옅어짐에 따라 그동안 억눌렸던 욕구, 활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4월혁명 후 노동조합의 결성은 정부수립 후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어, 1959년 말 현재 558개 노동조합에 280,438명의 조합원이, 1960년에는 914개 노동조합에 조합원 321,097명으로 급증했다. … 또한 이러한 양적인 증가와 함께 쟁의건수도 1961년 4월부터 1961년 5월까지 282건에 이르러 1953-59년의 연평균 41건의 6.8배가 넘을 정도였고, 동맹파업도 연평균 7% 미만에서 1960년에는 발생쟁의의 19% 이상이 동맹파업을 수반하여 개별단위사업장 차원을 넘어선 연대투쟁으로 전개되었다.10)

 

쟁의원인을 보면, 임금관계, 해고반대 등이 가장 많아 당시 경제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한미행정협정(行政協定) 반대, 밀수근절 촉구 등 민족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의사를 제시하고 그 방법도 가두진출을 택하는 등 노동자의 현실적인 정치참여와 정치의식의 점진적인 성장을 보여주었다.11)

 

한편,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인 전평을 파괴하고 노동자 파업을 파괴ㆍ억압하기 위한 극우정치깡패들의 조직으로 출발한 대한노총이었지만, 그것은 신식민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모순의 심화에 기인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봉쇄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비교적 민주적인 노동조합 간부들 사이에 그 어용성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발생, 1950년대 말이 되면 이미 대한노총의 어용성을 탈피하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전개를 목적으로 전국 37개 노동조합연합체 중 24개 연합체 대표 32명이 모여 가칭 전국노동조합협의회(노협) 설립위원회를 구성(1959. 7. 11.)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4월 혁명을 계기로 어용노조민주화 투쟁이 터져 나와, 부산부두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인천자유노조, 철도노조, 경전(京電)노조, 섬유노조 등에서는 어용화된 집행부를 속속 개편해나갔고, 전국노협은 1960년 5월 한 달 동안에 170개 단위노조를 포섭 개조하여 16만 명의 조합원을 흡수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 정권이라는 대부가 없어진 대한노총이 더 이상 전국노협과 양립하는 것은 무의미해져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은 발전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르러, 1960년 11월 25일 두 단체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이 결성되었다.12)

뿐만이 아니었다. 노조결성 움직임은 기자ㆍ교사ㆍ교수 등 이데올로기 직종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교원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이미 1958년부터 교육계 일각에서 결성 움직임이 있었지만 정부의 금지로 중단됐던 교원노조 결성운동은 1960년 4월 29일 대구에서의 어용 대한교련(대한교육연합회. 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약칭 한국교총의 전신) 배척운동에서부터 본격화되었는데, 5월 7일 대구시 중ㆍ고등학교 교원노조 및 초등학교 교원노조의 결성을 시발로 8개 시도에서 교원노조가 잇달아 조직되어, 7월 29일에 전국적인 규모의 대한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초ㆍ중ㆍ고 교사 및 대학교수의 총수가 10만 명이 채 안 되었던 당시에 그 조합원수가 단기간에 4만여 명에 이르렀다.13) 그리고 그 활동의 중심을 교원의 권익향상보다는 어용 대한교련의 해체, 교육행정관료의 숙청, 사학재단비리의 척결을 포함한 학원과 교육의 민주화 투쟁에 두고 있었다. 교원노조는 노동법 개악을 통해 교원노조를 금지하려는 정부와 자본의 언론에 맞서 교원노조 합법성 수호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을 뿐 아니라, 민주당 정권의 양대 악법으로 불리던 반공임시특별법집회ㆍ시위운동에 관한 법률(데모 규제법)의 입법화 시도에도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였다.

양대 악법은, 혁명이 열어젖힌 정치적 공간 속에서 다시 태동하고 있던 민중적ㆍ좌익적 정치운동ㆍ사상과 노동운동 및 반정부운동을 통제하기 위해서 당시 민주당 정권이 입법하려던 것으로서, 교원노조는 혁신계 정당들과 더불어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벌여 1961년 4월 9일에는 전국적인 파업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단기간에 정치적으로 급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14)

각계 민중운동의 급속한 발흥과 급진화, 특히 노동자계급의 그것은 신식민지 배후 지배자 미제나 자본가계급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좌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대량학살로부터 불과 10년 내외밖에 지나지 않는 때인지라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 때여서, 언제 혁명이 보다 더 고차원의 사회ㆍ정치 혁명으로 비약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미제로서도, 토착 자본가계급으로서도, 대한미국의 정치ㆍ관료 조직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던, 이제는 당연히 친미파도 변신한 친일파 세력으로서도 4월 혁명으로 개시되어 급속히 급진화되고 있는 상황을 반전시킬 극단적인 조치가 절실히 그리고 시급히 필요했다. ― 5ㆍ16 군사쿠데타!

심지어 당시 민주당 정권의 대통령 윤보선까지 환영하고 나섰다. ― 올 것이 왔다고!

 

 

좌절과 재생, 그리고 오늘

 

반공을 국시의 제1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한다며 나선 5ㆍ16 군사쿠데타는 일체의 민중적ㆍ진보적 그리고 민주적 운동과 분자들을 일거에 일소했다. 수천 명이 검거되어,15) 그중 많은 수가 소급형법인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군정(軍政)은 계엄포고령,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민주당 장면 정권의 무능으로 그 입법이 늦어지던: 인용자] 반공법, 노동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집회에 관한 임시조치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을 비롯한 각종 탄압법을 잇따라 공포하여 민중의 저항을 봉쇄… 하였다.16) 자유 대한미국은 그렇게 법치국가임을 과시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했지만, 강요된 동면에서 노동운동이 깨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60년대 10년은, 물론 기층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예 가사(假死)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미제와 자본의 앞잡이 박정희 정권의 가혹한 억압도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대량화와 그 빈곤의 심화에 따른 노동자들의 투쟁을 계속 잠재워둘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투쟁을 거치고 나서 1970년대의 반유신ㆍ반파쇼 민주화 투쟁과 함께 노동자투쟁도 빈번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 광주학살의 충격으로 80년대 중반에 본격화된 치열한 민주화투쟁과 함께 노동자투쟁도 비약적으로 발전,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그 부활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노동자수가 2천만 명을 훨씬 넘고, 민주노총은 그 조합원이 100만을 넘게 되었고, 과거 국가와 자본의 노동운동 탄압기구에 불과했던 어용 한국노총도 더 이상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어용일 수 없게 된 지금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과연 지금 한국의 노동자계급 운동은 노동자계급 운동다운 길을 가고 있는가?

널리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임금 격차의 심화 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억압과 학살에 의해서 말살되고, 4월 혁명이 전개되면서 부활의 조짐을 보이자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다시 말살된 노동자계급 운동의 변혁성을 지금의 운동은 과연 담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 변혁성은 부활의 조짐을 보였던 4월 혁명으로부터 60년 세월이라는 망각의 늪 속에 던져두고, 혹시,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역사적 임무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혹시, 이미 역사적 시효가 지나 박물관에나 보내야 할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고쳐 쓰려는 불모의 소부르주아 진보사상에 영혼을 내맡긴 채 경제주의ㆍ조합주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보안법 하에서 여태껏 신음하면서 자신의 변변한 정치참모부 하나 건설하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노사과연

 

 


 

1) 이 학살의 지휘자 막마옹(Patrice de MacMahon) 장군은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된다.

 

2) 이에 비해서, 프랑스의 부르주아 정권은 장기간 지속되었고, 대만의 장개석은 종신총통을 지냈을 뿐 아니라 그에 의해서 1947년 5월에 선포된 계엄은 40년도 더 지난 1987년 7월에야 해제된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는 32년 가까이 동안이나 대통령을 지낸다. 40년도 넘게 계엄이 지속되고 있던 대만이 대한미국에게는 “자유중국”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1965년 사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관점도 소개해야 할 것이다. ― “수하르토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군부 인사 6명을 살해하면서 일으킨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 이른바 9ㆍ30 쿠데타를 진압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반공적 색채가 짙었던 군부는 점점 자본주의 진영과 멀어지던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립하던 상황이었고, 마침 공산당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수하르토가 이를 진압하면서 인도네시아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 그러나 9ㆍ30 쿠데타는 수하르토를 비롯한 군부 세력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매우 많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라는 게 고작 7명 정도의 사람들이 몇몇 고위 장성들을 암살한 것에 불과하며, 당시에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당원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고작 하루 만에 순식간에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주장이다. 또는 9ㆍ30 쿠데타는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권력을 잡으려던 수하르토와의 밀월관계에서 발생한 정치적 공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공산정책을 추구하던 수카르노를 축출하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반공세력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인도네시아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하고 수하르토의 집권을 도왔다는 것이다.”(<https://namu.wiki/w/수하르토>.)

 

3) 주지하는 것처럼, 이런 것들은 4월 혁명을 논할 때에 누구에 의해서나 거론ㆍ분석되고 있다.

 

4) 한국민중사연구회 편, ≪한국민중사 II, 근현대편≫, 풀빛, 1986, pp. 285-287. 당시 풀빛 출판사를 운영하던 고(故) 나병식과,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젊은 연구자들은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받았다.

 

5) 1960년 현재 총취업자 약 7,028,000명 중 농림ㆍ어업에는 약 4,632,000명(65.9%), 농촌의 비농림ㆍ비어업에는 약 811,000명(11.5%)이 취업해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배무기, “한국 노동경제의 구조변화”, ≪경제논집≫ 제21권 제4호, 서울대경제연구소, 1982, p. 573 및 이를 인용하고 있는 김형기, “노동자계급의 성장 및 내부구성의 변화와 주체형성”, 박현채ㆍ김형기 외 저,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문제≫, 돌베개, 1985, p. 66, <표 2> 참조.)

 

6) 농민의 경우에는 이러한 사정에 농민에 특유한 고립ㆍ분산성이라는 사정과 농지개혁으로 분할지를 ‘분배’받아 ‘자영 소농민’이 된 상당 부분이 보수화되었다는 사정이 덧붙여진다. 사실은 소농민이 된다는 것 자체가 분해, 즉 프롤레타리아화의 출발점인 데다가, 농지의 ‘유상분배’ 및 그 지가(地價)의 현물상환이라는 방식, 그리고 특히 미공법(美公法, PL) 480호에 의한, 신식민지 경영을 위한 대량의 잉여농산물 수입과 그에 의한 저곡가정책, 지속적인 악성 인플레이션, 가내수공업의 소멸 등은 농민들의 대량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그 몰락의 운명과 현실이 곧 사실상 명목상일 뿐인 농지소유자들의 농지소유자라는 자기기만적 만족감과 환상을 깨어 보수화를 멈추지는 않았는데, 이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이 글의 범위 밖에 속한다.

 

7) 한국민중사연구회 편, 앞의 책, p. 287.

 

8)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40_0010_0020_0010#ftid_470

 

9) 김형기, 앞의 글, pp. 55-56.

 

10) 한국민중사연구회 편, 앞의 책, p. 292. 보다 정확히 말하면, 1960년 4월에서 12월까지 증대한 조합수는 325개, 같은 기간에 증대한 조합원수는 19,206명으로, 중소기업에서 조합 결성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11) 같은 곳.

 

12) 이상, 같은 책, pp. 290-291.

 

13)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ㆍ19 교원노조’ 사건 ― 혁명군 군화에 짓밟힌 교육 민주화의 싹”, ≪신동아≫ 제541호(2004년 10월). <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3806>.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수 없더라도, 4ㆍ19 교원노조의 기세는 대한교육연합회(이하 대한교련ㆍ‘한국교총’의 전신)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조는 당시 대한교련의 해체를 요구한 바 있다. ‘교원노조로부터 어용단체로 몰린 교총은 일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8만2000명이었던 교총 회원은 4ㆍ19혁명 이후 5만 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교총 40년사≫.) 교총을 탈퇴한 교사들의 상당수가 교원노조에 가담했음을 짐작케 하는 자료다.”(같은 글.)

 

14) 다만, “당시 교원노조 강령에는 ‘우리는 4월 혁명 정신을 받들어 투철한 반공이념 하에 민주학원 건설의 선봉이 될 것을 기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같은 글.)

 

15) 1961년 5월 “당시 치안국에서는 용공분자 2,00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는데, 그중 75%가 교원노조 소속 교사들이었다.”(같은 글.)

 

16) 한국민중사연구회 편, 앞의 책, p. 309.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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