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3)

 

문영찬 | 연구위원장

 

 

 

제3장 신경제 정책(NEP)하에서 계획과 시장의 모순 그리고 전후(戰後) 경제의 회복

― 쏘련에서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확립 과정(2)

 

 

1. 내전의 종식과 신경제 정책(NEP)으로의 전환

 

내전이 볼쉐비끼의 승리를 향해 가는 가운데 레닌은 1920년 초에 쏘비에트 러시아의 전기화(電氣化)라는 웅대한 계획을 제출한다. 향후 10년에서 15년 사이에 150만kw에서 175만kw의 발전소 30여 개를 건설하는 구상이었다. 이러한 전력의 규모는 1913년에 비해 9배 증가한 수치였다.1) 쏘비에트 러시아의 이러한 전기화는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계획에 따른 경제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공산주의는 쏘비에트 정권 더하기 전국의 전기화이며, 전기화는 우리의 제2의 강령이라고 규정했다.2) 그리하여 1920년 3월에 러시아 전기화 국가위원회(고엘로, ГОЭЛРО)의 창설이 인민위원회에서 승인되었다. 혁명 초기 자본가들을 수탈하여 자본주의적 기업을 전 인민의 소유로 전화시켜 사회주의 생산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을 거쳐,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쏘비에트 러시아의 경제를 계획에 입각하여 조직하는 단계가 본격 시작된 것이다. 전기화 계획은 1921년 12월 28일 제9차 쏘비에트 대회에서 정식으로 비준되었다. 이 전기화 계획은 레닌 사후 쓰딸린하에서 현실화되었다.

한편 내전이 마무리되어 갈 때 쏘비에트 러시아의 경제 상태는 참혹한 것이었다. 1920년대 초에 대공업의 생산고는 전쟁 전의 거의 1/7로 떨어져 있었다. 특히 야금 공업은 완전히 없어질 처지에 놓였다. 선철 생산은 전쟁 전의 약 3%, 석탄은 전쟁 전의 약 1/3, 석유는 반으로 크게 줄어들었다.3) 그리하여 1920년에 공업 노동자는 1913년의 약 1/3 이하로 줄어들었다. 농업에서는 경작 면적이 전쟁 전에 비해, 1920년 7.4% 감소했다. 특히 경제 작물들의 생산의 감소 폭이 컸는데, 면화는 85.8%, 사탕무는 69.8%, 아마는 36.7%가 감소했다.4)

이러한 상태에서 식량 거래의 국가독점과 잉여식량 징발제로 인하여 농산물 거래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던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농민들의 대표들이 직접 레닌 앞으로, 잉여식량 징발제로 인해 고통받는 농민의 현실을 토로하는 편지들을 무수히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0월 혁명의 요새였던 끄론쉬따트 기지에서 1921년 3월 초에 군사 반란이 발생했다. 볼쉐비끼 없는 쏘비에트 정권을 요구하는 이 반란은 사실 그동안 쌓여 왔던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군복을 입은 농민들이 쏘비에트 정권에 대한 무력 항거를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한편으로 반란을 진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농민들의 불만에 응답하는 정책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잉여식량 징발제를 폐지하고 현물세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잉여식량 징발에 비해 약 절반 정도가 적은 양의 식량을 현물로 농민들에게 세금으로 징수하고, 나머지 잉여식량은 농민들이 자유롭게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이는 농촌에서 다시금 거래, 상품 교환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쏘비에트 러시아 경제 전체에 걸쳐서 사적 자본주의를 일정하게 허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의 신경제 정책(NEP)이 서서히 형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신경제 정책으로의 전환은 1921년 3월 8일에 열린 제10차 당 대회에서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전환은 농민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농민에 대한 일정한 양보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단지 농민에 대한 정책 전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쏘비에트 러시아에서 전반적인 사회주의 건설의 방향을 세우는 것이었다. 레닌은 쏘비에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긍정하였다. 비록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폭발이 지연되는 상황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정권과 쏘비에트 공화국은 능히 생존해 갈 수 있다.5) 또한 레닌은 러시아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필요한 일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농 동맹, 이 동맹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 기본적인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일컫는 것이었으며, 레닌은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지만, 이것은 사회주의 건설에 필수적이며 또 충분한 일체의 것이다라고 파악했다.6) 이러한 레닌의 관점은 서유럽 혁명의 지원이 없다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뜨로쯔끼의 견해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신경제 정책이 단지 농민에 대한 정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전반적인 방침의 수립이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레닌은 계급은 공수표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을 이용해야만 비로소 계급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7)고 보았다. 레닌은 이렇게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정치적 동맹을 넘어서서 물질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근거한 동맹으로 파악했고, 이러한 인식이 거래, 유통의 자유를 포함한 농민에 대한 양보 정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레닌은 통상의 매매, 거래가 상품 교환(전시 공산주의 시기의 조직된 상품 교환을 의미)을 대체했다고 보면서, 상업이라는 우회로를 통할 것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레닌은 상업은 천백만의 소농과 대공업 간의 유일하게 가능한 경제적 연계이며, 상업을 장악해야만 현 단계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순조롭게 할 수 있는 기본 고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당과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8)라고 파악했다. 상업이 주요 고리가 된다는 것은 쏘비에트 러시아 경제에서 상품-화폐 관계가 시장을 형성하는 차원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사회주의 건설이 시장을 활용하면서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경제는 국유화된 사회주의 경제 부문, 소농민의 소부르주아 경제 부문, 사적 자본주의 경제 부문, 국가자본주의 경제 부문, 전(前) 자본주의적인 자연 경제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부르주아 학자들 그리고 소부르주아 세력은 네쁘(NEP)를 혼합 경제로 파악하는데 이는 피상적인 접근이다. 네쁘(NEP)에서 사회주의 경제 부문은 주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계획과 시장의 관계를 보면, 계획의 주도성이 보장되고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상에서, 전체 신경제 정책 시기에 계획 원칙의 주도적 작용을 강화하여 시장으로 하여금 이 원칙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특징적이다9), 레닌은 통일적인 계획을 철회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계획의 방법을 변경했다는 파악이 정확하다.10) 실제로 1920년대의 신경제 정책의 시기 전체에 걸쳐 사회주의 경제의 계획적 운용은 점차 발전하여 1920년대 말의 제1차 5개년 계획으로까지 나아갔고, 시장은 단지 활용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신경제 정책은 필요한 물질적 조건을 건립하여 점차적으로 사회주의의 생산과 교환으로써 자본주의의 생산과 교환을 대체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비타협적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국민 경제의 회복, 상품 유통의 발전을 위하여 자본주의를 이용한다는, 이 두 개의 측면을 결합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11) 이것이 시장과 자본주의적 관계를 활용하면서 경제를 재건한다는 방침의 내용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사회주의 부문과 계획의 주도성은 관철되고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네쁘(NEP) 당시에 자본주의적 부문이 강하게 나타났던 상업, 특히 소매 상업의 경우 점차적으로 국유 상업 등 공유 부문에 의해 대체되면서, 1920년대 말이면 국유 상업과 협동조합 상업이 자본주의적인 사적인 상업을 압도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신경제 정책은 농민에 대한 양보였지만, 이 양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양보의 범위 내12)였다고 레닌은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경제 정책으로의 전환에 대해 부하린, 뜨로쯔끼 등 다양한 분파가 반대하기 시작했다. 뜨로쯔끼는 신경제 정책이 소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투항이라고 주장했고, 국유 기업의 사회주의적 성질을 부정했으며 그것을 일종의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했다. 그리고 뜨로쯔끼는 농민의 이중성을 부정하면서 소생산적인 중농과 자본주의적 요소인 부농을 동일시하여 노농 동맹을 기초로 한 사회주의 건설 방침을 반대했다.13) 이러한 뜨로쯔끼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를 위해 농민에 대한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거래, 상업이라는 우회로를 통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다가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볼쉐비끼 당은 거래, 상업, 자본주의적 관계, 상품과 화폐 관계의 현실 속에서 서서히 사회주의적 부문을 강화하고 경제에서 계획의 작용을 강화하는 길을 갔던 것이다. 이는 뜨로쯔끼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불신함에 따라 사회주의 건설의 구체적 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부하린은 과거 좌익 공산주의자로서 초(超)좌익적 입장을 보였던 것에서 선회하여 신경제 정책을 매우 우편향적인 입장에서 파악했다. 부하린은 자본주의적인 사적인 상업에 대한 감독을 반대하고 사적 상업의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다. 또한 부농에 대한 양보를 주장하면서 부농을 인민의 범주에 넣고는 사회주의 건설에 따라 부농 등 자본주의 요소가 점차 자연 발생적으로 사회주의로 전화해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14) 부하린은 또한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반대하고 그것을 관세에 의한 조정 정책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부하린의 입장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장기간 존재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활용하면서도 그것의 위험성을 인식하면서 그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을 부하린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요소가 사회주의적 요소로 자연 발생적으로 성장ㆍ전화할 것이라는 입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는 부하린이 자본주의적 요소와 소부르주아 요소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들은 사회주의 경제 부문의 성장을 조건으로 점차 노동자계급의 편으로 올 수 있지만, 자본주의 요소는 의식적으로 사회주의 부문의 성장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부문과 자본주의 부문 간의 투쟁은 불가피한데 부하린은 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후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이라는 농촌의 자본주의 요소의 격렬한 저항은, 집단 농장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의 형성과 발전이 부농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부농이 사회주의적 요소로 발전하는 것은 부농 자신이 자본주의적인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포기할 때만 가능한 것인데, 부하린은 이를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은 그 자체가 계급투쟁을 수반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특히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건립은 그 본질이 계급투쟁의 문제라는 것을 부하린은 놓쳤던 것이다.

신경제 정책(NEP)은 새로운 조건하에서 노농 동맹의 경제적 영역에서의 형식이었다.15) 그리하여 신경제 정책 시기에 실질적 골격으로 작동했던 체제, 즉 노농 동맹의 강화를 통한 사회주의 건설의 전략 방침, 계획적으로 상품-화폐 관계를 활용한다는 방침, 물질적 자극과 경제 계산제를 사회주의 건설에 활용한다는 방침은, 1930년대 전면적인 계획 경제의 수립,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확립 이후에도 의연히 관철되는 것이 되었다.

1921년 3월 8일에 제10차 당 대회가 개최되어 레닌이 제출했던 신경제 정책으로의 전환을 승인했다. 그런데 10차 당 대회는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건설로 나아가는 대회였다는 점에서 많은 논쟁을 수반하고 많은 결의가 이루어졌다. 민주집중제파는 공장과 기업에서 1인 책임제를 반대하고 위원회제의 지속을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 개조에서 부르주아 전문가의 활용을 반대하고 철저한 평균주의의 실시를 주장했다. 노동자 반대파는 정치는 쏘비에트가, 경제는 노동조합이 담당해야 하며, 경제 관리에서 전문가의 활용과 1인 책임제를 반대하고 위원회제를 주장했다. 노동자 반대파의 이러한 주장에서 경제를 노동조합이 맡아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생디칼리즘이었다. 이는 국유화된 기업, 전 인민 소유 기업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고 각각의 기업을 그 기업의 노동자 집단이 맡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국유 기업의 전(全) 계급적, 전국적 계획에 따른 생산과 조직화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논쟁과 더불어 뜨로쯔끼에 의해 한차례 평지풍파가 일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노동조합 논쟁이었다. 뜨로쯔끼는 전시 공산주의를 노동조합의 영역에서 한층 더 강화하여 노동의 군사화, 노동조합의 국가 기관화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그것은 노동조합이 대중 조직으로서, 당과 국가가 노동자 대중과 연결되는 벨트라고 하는, 노동조합의 고유한 역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레닌은 이 논쟁이 대중을 대하고, 대중을 장악하고, 대중과 연계하는 방법의 문제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분기점이다. 문제의 관건은 바로 여기에 있다16)고 규정하였다. 뜨로쯔끼는 전시 공산주의에서 행해졌던 방침을 새로운 정세, 새로운 조건하에서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산주의에서의 정책을 극단화하여 노동조합의 국가 기관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달리 국가의 영역과 시민사회의 영역의 통일을 추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통일은 구분 속의 통일이며, 따라서 대중 조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 단계에서 엄밀히 구분될 필요가 있는데, 뜨로쯔끼는 이를 간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 상태, 전쟁의 참화 속에서 경제의 재건과 인민의 생활을 돌보면서 사회주의 건설에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다양한 분파들이 각종 분파 투쟁에 나서는 양상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되었고, 10차 당 대회는 레닌의 제안에 따라 당내의 일체의 분파 조직의 해산, 향후 당내의 분파 조직의 금지를 결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의는 민주집중제 원칙을 구체화한 것인데, 어떤 쟁점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쟁한다 할지라도 행동에 있어서는 통일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민주집중제의 원리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내의 분파는 정치적으로 당내의 당이 된다는 점에서, 즉 분파 조직원들이 당의 결의보다 분파 내의 결의를 우선시하게 된다는 점에서, 역시 민주집중제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분파의 금지가 당내에 다양한 견해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당내에 일정한 경향성이 존재하고 쟁점에 따른 의견 그룹이 존재하는 것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견 그룹이 독자적 의사 결정 기구를 갖는 조직으로 되어 당의 결의보다 자신들의 결의를 우선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내 분파의 금지에 위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뜨로쯔끼는 내전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노동조합 논쟁을 통해 당내의 분파 투쟁을 시작했다. 이것은 1920년대 내내 이어졌던 뜨로쯔끼의 분파 투쟁 그리고 30년대를 거쳐, 194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이어지는 일탈, 반(反)볼쉐비끼 투쟁의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10차 당 대회는 쏘비에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방침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거대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전기화 계획의 승인, 잉여식량 징발제의 폐지와 현물세로의 전환, 사적인 거래의 허용, 자본주의적 요소를 사회주의 건설에 활용하는 것, 사회주의 부문과 계획의 주도성의 강화 등을 통해 이후 쏘비에트 러시아는 사회주의 건설의 대장정으로 나설 수 있었다.

 

 

2. 신경제 정책(NEP)하에서 계획과 시장의 모순

 

신경제 정책의 시기, 과도 시기에서 기본적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건설 중에 있는 사회주의와, 타도되었지만 아직 소멸되지 않고 또한 소상품 경제의 기초 위에서 부활하고 있는 자본주의 간의 투쟁, 이것이 과도 시기의 기본 내용이다.17)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농민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경제에 있어서 사회주의 건설에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가 소생산의 기초 위에서, 농민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부활할 것인가의 문제가 1920년대를 관통하는 기본적 모순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누구를이라는 문제가 1930년대 사회주의 생산 관계가 확립되기까지 지배적인 문제로 작동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경제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부문의 계획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적인 자연 발생적 세력, 즉 시장이 경제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로 나타났다.

부르주아 학자들은 1920년대 쏘련에서 계획이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18) 쏘련은 이 시기에 국가 전기화 계획에 기초하여 계획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이는 상설적인 국가계획위원회(고쓰쁠란, Госплан)의 건립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국가계획위원회는 통일적인 경제 계획을 서서히 수립하기 시작했는데, 생산과 건설의 계획, 상품 유통에 대한 계획, 운수 계획, 노동에 대한 계획, 재정 계획 등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획은 각종의 경제적 비례를 보장하는 것이었는데, 부문과 지역 간의 연계, 채굴 공업과 가공 공업, 농업과 공업, 운수업과 국민 경제 간의 상호 협력을 보장하고, 생산과 소비, 생산에 대한 자금 공급과 물질적 공급 간의 협조, 원료 산지와 소비 지구에 대한 기업의 접근성에 따른 합리적 배치 등을 포괄하는 것이었다.19) 국가계획위원회 수립에 대한 결정이 정부에서 통과된 날, ≪쁘라브다≫는 통일적인 경제 계획을 논한다라는 레닌의 글을 발표했다. 레닌은 국민 경제 계획의 거대한 작용은, 바로 노동 대중의 목표와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국가 계획의 성질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 강령의 구체적 체현이라고 했다.20) 레닌은 개개의 생산 부문의 일체의 계획은 엄밀하게 협조하여 일치해야 하고, 상호 연계를 가져야 하고, 공동으로 우리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통일적인 경제 계획을 구성해야 한다21)고 하였다. 그리고 11차 당 대회의 결의는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경제생활 각 방면의 협조를 이루어 내는 것,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특징이다22)라고 규정하였다. 경제에서 계획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관점과 볼쉐비끼 당의 결의는, 경제에서 계획이 자의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경제, 즉 사적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극복하고 경제의 공유화, 사회화를 이룬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화된 경제에서는, 자본주의와 달리 이익의 배타적인 충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에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이 걸려 있다는 점에서, 각 부문의 통일적인 계획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쏘련이 국가계획위원회를 설치하여 전체 경제에 대한 통일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회주의 경제,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본성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덩샤오핑의 경우 시장 경제로 건너뛰면서, 계획은 사회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있으며, 시장 또한 자본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에도 있으며, 계획과 시장 모두 생산력 발전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는데,23) 이러한 사고의 결과가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 경제론이다. 그런데 이것은 덩샤오핑의 사고에서 사회주의가 이미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가 편제하는 경제 계획은, 단지 추측상의 계획일 뿐이며, 이것은 누구라도 그에 따라 집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계획으로는 전국적인 경제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쏘련의 계획은 지령적 성질을 갖는 계획이다. 그것은 장래에 전국적 범위에서 우리나라 경제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24) 이러한 언급은 자본주의에서 경제 계획은 대략적인 방향의 설정, 추정상의 계획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경제 주체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반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획은 지령적 성질, 즉 경제 주체들에 대해 구속적 성질을 갖는 것, 나아가 쏘비에트에서 비준됨을 통해 법령적 성질을 갖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레닌은 경제에서 계획이 노동 대중의 목표와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경제 계획은 자본가들에게 있어서조차, 참고 사항에 불과한 것이며 나아가 노동 대중의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에 따라 시장 경제 혹은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주기적으로 경제 공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주의의 계획 경제에서는 축적과 소비, 생산 부문 간의 비례성 등이 관철되기 때문에 생산의 무정부성이 제거되며, 따라서 경제 공황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레닌은 신경제 정책은 결코 통일적인 국가의 경제 계획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계획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는 방법을 변경시키는 것이다25)라고 규정했다. 이는 전시 공산주의하에서 나타났던 상품-화폐 관계의 사실상의 소멸, 극단적인 평균주의와 군사적인 지령의 방법을 변경하여, 농민에 대한 사적인 거래의 허용, 사적 자본주의의 일정한 허용, 시장의 형성을 조건으로 하여, 상품-화폐 관계를 활용하면서 계획을 관철해 나가는 것으로 볼쉐비끼 당의 사회주의 건설 방침이 수정되어 수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시 공산주의에서 상품-화폐 관계가 사실상 소멸되었을 때, 그것은 농민에게 중대한 타격이 되었으며, 거래의 자유를 상실한 농민은 쏘비에트 정권에 대해 이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는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의 강화를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적인 길은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계획 경제의 길이라는 점이 도출되었고, 이를 가리켜 레닌은 계획의 방법의 변경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길, 신경제 정책의 길은 당시에 가능했던 유일한 과학적인 노선의 수립을 의미했으며, 신경제 정책의 러시아는 사회주의 쏘련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나아갔다. 1920년대의 경제 건설은 신경제 정책에 따라, 우선적으로 농업을 회복시키고 이후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소공업을 회복시키고, 마지막으로 대공업과 중공업을 회복시키는 단계를 거치며 전후 경제를 회복하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게 된다.

신경제 정책의 초기 단계에서 쏘련의 중공업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 속에서 처음에는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중공업 기업들은 적자를 면치 못했는데, 이에 대해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적자인 중공업 기업들을 팔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26) 그러나 이는 사실상 당장의 어려움에 굴복하여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파괴하자는 주장이었고, 나아가 그 기업들에 종사하는 노동자 대중들을 방기하자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에 의해 거부되었고, 적자의 중공업 기업들은 국가의 보조를 받으며 서서히 회복되는 길을 가게 된다. 중공업은 규모의 거대함으로 인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데, 신경제 정책 초기의 어려운 조건에서, 당시에는 중공업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자금이 없었다. 중공업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자금은, 농업과 경공업이 회복되어 그로부터 세금이 일정하게 징수되고 또 국유화된 경공업 기업이 국가에 이윤을 상납함에 의해 국가에 축적된 자금이 생기는 1920년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담보되게 되고, 이후 쏘련은 전반적인 공업화의 건설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쏘련에서 공업의 재건은 연료 공업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석탄과 석유 등 연료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공업과 운수 등 여타 부문의 조업이 중단되고 노동력의 낭비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돈바쓰의 탄전과 바꾸의 석유 공업 기지에 대해 전략적 지원이 집중되어 쏘련의 연료 공업은 서서히 회복되는 길을 걷게 된다. 신경제 정책 초기에 국유화된 사회주의 공업 부문은 여러 공장들이 연합한 트러스트를 형성하여 발전하기 시작한다. 섬유와 방직, 피혁 등 경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한 트러스트는 생산 공장들에 대한 연료와 원료의 공급을 담당하고 생산에서 계획을 실현하며 서서히 경제적 주체로 작동하게 된다. 트러스트는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계획 경제의 원칙에 따라 상당한 경제적 자주성과 독립성을 띠게 되는데, 트러스트 자체가 하나의 법인이 되었고, 반면에 그 산하의 공장들은 법인이 아니라 생산 단위로 기능했다. 트러스트는 경제 계산제의 원칙에 따라 독립적인 회계 단위가 되어 상품의 생산과 판매, 이윤의 획득 등에 있어서 자립적인 결정 단위가 된다. 그리고 이 당시 경제에서 계획은 아직 미숙한 상태였는데, 국가는 트러스트에 대해 총생산량만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트러스트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상품-화폐 관계의 승인에 따라 상품의 판매의 문제가 현실적인 과제로 대두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트러스트들이 연합한 신디케이트가 나타났는데, 신디케이트는 트러스트들이 생산한 상품들에 대한 판매를 주로 담당하였고, 트러스트들의 유동 자금의 결핍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신디케이트의 형성은, 사적 자본주의가 일정하게 허용된 결과 나타나기 시작한 사적 자본주의적 상인들에 대한 국유 기업의 경쟁을 용이하게 하였다. 레닌은 볼쉐비끼 당을 향해 상업을 배우자고 호소하였고 상업이 주요 고리임을 역설했는데, 신경제 정책에 따른 경제 건설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상업이 서서히 출현하게 되었다. 레닌은 자유 거래라는 이 보물과 무기를 사용하여 자유 거래를 패배시키는 것이 필요27)하다고 했는데, 상업의 영역에서 국유 상업과 협동조합 상업 등 공유 부문이 사적 자본주의적 상업을 점차 밀어내고 축소시키고 극복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공업 부문에서는 사회주의적 국유 부문이 1924/25년에 전체 공업생산고의 76.3%를 차지하고, 사적인 공업은 23.7%를 차지했다. 상업에서는 도매 부문은 국유와 협동조합 등 공유 부문이 우세를 접했으나, 소매 부문은 신경제 정책 초기에 사적 부문이 90% 가까이 차지했다. 1924/25년에 도매 부문에서 국유와 협동조합 등 공유 부문은 91.5%, 사적 부문은 8.5%를 차지하였고, 소매 부문은 공유 부문이 51.5%, 사적 부문이 48.5%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소매 상업에서 사적 부문은 점차 축소되고 국유 상업과 더불어 협동조합 상업이 크게 발전하여, 1920년대 말경에는 사적 상업을 완전히 극복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신경제 정책의 시기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투쟁이 경제적 방식으로 전개되는 시기였음을 말해 준다. 즉, 전시 공산주의 시기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투쟁이 정치, 군사적 방법으로 전개되었다면, 1920년대의 계급투쟁은 주로 경제의 영역에서 경제적 수단을 매개로 행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사적 자본주의 기업과 자본가계급에 대해서, 사회주의 부문이 그와 경쟁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사적 부문을 제한하고 점차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밟았다. 자본가들은 자기 자본의 사용 범위를 선택할 자유가 없었고, 경제의 명맥을 장악할 수 없었으며, 자본을 이동시킬 가능성은 매우 제한되었고, 그들의 축적은 국가에 의해 조절되었고 계급적인 세금 정책에 의해 몰수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축적을 이용하여 대형의 생산수단을 구입할 수 없었다.28) 이는 사적 자본주의 기업이 허용된 부문이 경제의 기간산업이 아니며, 주로 인민의 부족한 생필품을 공급하는 일정한 영역, 그리고 사적인 상업의 영역이었음을 말해 주며, 그리고 그러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자본 축적 또한 가격 정책을 통한 조절, 그리고 세금, 운수 운임, 연료와 원료 공급 등에서 사회주의 부문에 비해 불리한 조건을 적용함에 의해 매우 제한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공업과 상업 부문에서 사적인 자본주의 기업과 상인들은 이러한 제한 정책 속에서 1920년대 말부터 쏘련에서 사회주의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쏘련의 경제에서 계획과 시장은 긴장된 모순 관계였고, 쏘비에트 국가는 상품-화폐 관계를 활용하면서 계획을 관철시키는 길을 걸었다. 이 시기에 상품 생산은 이미 보편적이지 않았는데, 노동력은 상품이 아니었으며, 공장의 생산물은 상품이었지만, 토지, 매장물, 공장, 광산, 운송수단 등은 상품 유통의 영역 밖에 있었다.29) 이에 따라 가치법칙 또한 그 보편성을 상실했는데, 생산수단이 사회화되고 생산수단의 매매가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법칙의 적용 영역은 매우 축소되었던 것이다.30) 또한 사회주의 경제 부문과 국가의 주도적 작용에 의해, 가치법칙의 자연 발생적 작용과 가격의 자연 발생적 파동이 제한되었다.31) 예를 들면 자본주의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이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인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으로 규정되지만, 사회주의에서 노동력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임금은 이미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라는 제한과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넘어서서 자본주의에서의 잉여가치(사회주의에서는 잉여노동)의 상당 부분도 수취하는 주체가 된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거의 무상에 가까운 저렴한 주택 비용, 무상 의료, 무상 교육, 공공시설에 대한 무상에 가까운 사용, 휴양시설 등 기업에서 제공하는 각종의 복지 혜택 등이 임금 이외에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예들이며, 이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명백히 넘어서는 것이다. 임금 이외에 임금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가 사회적 소비기금이라는 범주로 규정되어, 위에서 언급된 사례를 포함하여 각종 명목으로 노동자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가격의 결정에 있어서도 가치법칙이 고려 사항이 되지만,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경제 전체의 비례적 발전과 인민에 대한 복지의 제공을 위해, 등가 교환이 아닌 가격 정책을 수행하게 된다. 예를 들면 중공업이 생산하는 생산수단에 대한 낮은 가격의 설정, 인민에게 필요한 일정한 필수품에 대해 가치 이하의 저렴한 가격 정책을 수행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렇듯이 쏘련에서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가치법칙의 적용이 제한되며 경제 전체를 주도하는 것은 계획이 된다. 가치법칙은 그러한 계획의 설정과 집행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하나의 참고가 될 뿐이다.

신경제 정책의 시기에 있어서 계획과 시장의 관계는, 시장의 자연 발생적 세력과 무조직적인 시장의 반항에 대해 항상적인 투쟁을 조직하면서 계획적으로 경제를 조직해 나가는 것이었고, 시장을 계획에 복종시키는 것이었다.32) 그런데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사회주의 건설과 상품-화폐 관계의 병존을 부정하면서 가격 문제를 등한시하였다.33) 그리하여 공업 제품의 높은 가격을 통해서 농민을 수탈하자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자계급과 농민과의 동맹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노동자계급만을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로 설정하고 농민을 반동적 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부농이라는 자본주의 세력과 빈농과 중농 등 소생산 농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시 인구의 80%가 넘는 농민들을, 공업 제품의 높은 가격 정책을 통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적대적이게 만든다면, 사회주의 건설이 실패할 것임은 명확한 것이었는데, 뜨로쯔끼의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적 이해가 농민에 대한 경시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신경제 정책의 본질은 전시 공산주의와 달리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계획 경제이며 사회주의 건설노선이라는 점에서, 상품-화폐 관계에서 비롯되는 각종의 범주와 수단은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가 된다. 예를 들면 화폐, 가격, 신용대출, 이윤 등은 계획의 도구로 전화되는 것이었다.34)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경제 계산제하에서 각각의 기업 혹은 트러스트는 일정한 이윤을 달성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납부하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이 모든 기업 활동과 생산의 제1차적 목적이 되지만, 신경제 정책과 사회주의 조건에서는 이윤이 기업 활동의 일차적 목적이 아니게 되며 단지 기업의 효율성을 판단하는 지표가 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1923년에 공업 제품의 높은 가격과 농산물의 낮은 가격의 격차가 가위 모양으로 벌어지는 협상(鋏狀) 가격차 현상이 나타났을 때, 볼쉐비끼 당은 13차 당 대회의 결의를 통하여 공업 제품의 가격의 인하와 농산물 가격의 인상을 결의하고 집행했다. 협상 가격차가 나타났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농업의 회복이 빠르게 나타났던 반면에, 공업의 회복 속도는 느렸다는 점, 그리고 트러스트들이 각 부문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함에 따라 독점 가격을 설정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의 결정에 따라 공업 제품의 가격 인하가 이루어졌는데(1923년 10월부터 1924년 10월 1일까지 공업 제품의 가격이 25.3% 인하되었다35)), 그 인하분의 2/3는 생산 비용의 절감을 통한 원가의 인하분이었고, 나머지 1/3은 이윤의 축소액이었다.36)

이와 같이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치, 가격, 이윤, 임금, 화폐 등의 범주가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계급적 성격을 상실하고 그것의 실제 내용은 사회주의적으로 변형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적 범주의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경제 계획이며, 그러한 경제적 범주는 계획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한 유력한 도구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레닌은 10월 혁명 직후부터 국가자본주의를 사회주의 건설의 유력한 수단으로 파악했었다. 심지어 러시아에 존재하는 다양한 경제 부문들 사이의 구도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공업 부문+국가자본주의> 대(對) <소농민의 소생산+사적 자본주의>. 즉, 레닌은 국가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에 유리한 수단, 사회주의에 대해 유용한 수단이라고 파악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권력의 임무는 자본주의를 국가의 궤도에 놓는 것, 국가의 지도를 받고 국가에 봉사하는 일종의 자본주의를 건립하는 것37)이라고 파악했다. 이러한 레닌의 인식은 국가에 의해 회계와 경영이 통제되는 자본주의적 기업, 국가와 일정하게 결합된 자본주의적 기업은 당시 소농민 생산에 비해 사회주의에 보다 가까운 기업이며, 사회주의에 유용한 수단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견해에 입각하여 신경제 정책 시기에 국가자본주의가 실제로 시행되었는데, 그 유형을 보면 1) 외국의 자본가에게 일정한 이권을 제공하여 러시아 국내에 자본을 투자하여 경영을 하게 한 것, 2) 국유화한 중소형 기업 중 국가가 그것을 경영할 여력이 없는 기업들을 원소유주나 기타 사인 혹은 협동조합에게 임대하여 일정 기간 경영하게 하는 것, 3) 국가와 사적 자본가가 같이 출자하여 공동 경영하게 하는 것 등이 있었다. 1)의 이권 제공의 유형의 경우 주로 외국의 자본가가 러시아의 광산 등에 투자하는 사례가 있었고, 1925년 91개의 이권 부여 계약이 효력을 발생했다. 2)의 임대의 경우 비교적 광범하게 실시되어 신경제 정책 초기 피폐한 경제를 되살리고 인민에게 일용품을 제공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1923년 말에 7,500개의 중소기업이 임대되었는데, 그 기업들은 평균 17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외에 유통 영역에서 국가자본주의를 보면, 국가가 사적 상인으로 하여금 국유 기업의 생산물을 대신 판매하게 하는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자본주의 부문은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를 위한 이권의 제공 유형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쏘련에 대한 경제적 봉쇄 정책으로 인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레닌이 파악한 바와 같이 농민이 인구의 80%가 넘는 사회에서 소생산의 위험을 제어하고 사회주의적 부문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자본주의를 광범하게 발전시킨다는 전략은 매우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1920년대 당시 러시아에서 이 부문이 제국주의 세력의 봉쇄 등으로 인해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은 역사적 한계이다. 중국의 경우 1949년 혁명 후에 레닌이 구상했었던 국가자본주의가 일정하게 발전했는데, 혁명을 지지하고 혁명에 같이 참여했던 민족자본가계급을 사회주의 건설로 끌어들이는 방책으로 국가와 자본가가 기업을 공동으로 경영하는 합영(合營) 기업이 광범하게 발전했었다. 소유는 국유로 하되 운영은 원소유주인 자본가가 경영하게 하고 국가는 자본가에게 일정 기간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유지, 발전한다는 조건에서 이러한 유형의 국가자본주의 방식은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뜨로쯔끼는 당시 신경제 정책하의 사회주의 국유 부문을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했다.38) 이는 사회주의 국유 부문이 신경제 정책하에서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운영된다는 점을 그릇되게 파악한 것이었다. 상품-화폐 관계, 가격 등을 수단으로 국유 기업이 운영된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국가자본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유 기업이 자본주의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이윤이 일차적 목적이 되고, 임금, 가격 등의 범주가 계급적 성격을 띠고, 국가 전체의 계획보다 기업의 이익, 이윤이 우선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경제 정책하의 국유 기업은 계획이 가격, 이윤, 임금, 화폐 등의 범주보다 우선하는 기업이었고, 기업의 그러한 성격과 그러한 운영 방침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에 의해 보장되었던 것이다. 뜨로쯔끼의 이러한 오류는, 신경제 정책하에서는 전시 공산주의와 달리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계획 경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의 계급적 의미, 전략적 의미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21세기 지금, 쏘련의 해체 뒤에 많은 논자들은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뜨로쯔끼가 네쁘(NEP)에 대해 그릇되게 파악했던 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건설과 상품-화폐 관계의 병존, 상품-화폐 관계를 매개로 수행되는 계획, 계획의 도구로 쓰이는 가치, 가격, 임금, 이윤, 화폐라는 현실을 왜곡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1930년대 이후 쏘련에서 사회주의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가 이루어져 사회주의 생산 관계가 전면적으로 확립된 이후에도, 네쁘(NEP)의 기조, 즉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계획 경제라는 점은 의연히 관철되었다. 쏘련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쏘련에서 상품-화폐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만 보고, 그것이 계획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되며, 계급적 성격을 상실하고 사회주의적으로 변형되는 상품-화폐 관계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쏘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잘못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품-화폐 관계는 21세기의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도 유력한 도구로 쓰일 수밖에 없다. 대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임노동의 착취 관계는 혁명 후 가능한 한 즉각 폐지되지만, 상품-화폐 관계는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즉각 폐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생산력이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업에서 협동조합적, 집단적 생산 관계가 공업과 같이 전 인민 소유로 발전할 때, 생산물의 상품적 성격이 사라짐에 따라 화폐를 통한 교환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며, 상품-화폐 관계는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에 따른 분배가 아닌, 필요에 따른 분배의 영역이 확대되고 주된 위치를 차지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즉,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상품-화폐 관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때의 사회주의 건설은 상품-화폐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계획 경제가 될 수밖에 없다.

신경제 정책은 노농 동맹의 회복과 강화를 초점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농민에 대한 정책은 매우 중시되었는데, 볼쉐비끼 당은 농민을 빈농과 중농, 그리고 자본주의적 요소인 부농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여 계급적 정책을 실시하였다. 전시 공산주의의 잉여식량 징발제가 현물세로 전환되었는데, 1924/25년에는 현물세를 화폐로 납부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현물세는 토지 국유화로 인한 지대를 농민이 국가에 납부한다는 성격과 과세의 성격이 동시에 있었다. 볼쉐비끼 당은 빈농에 대하여는 세금을 면제하거나 적게 매겼고, 부농에 대하여는 소득의 10% 이상을 세금으로 거둬들였다. 1925/26년에 540만 호의 빈농이 세금을 완전히 면제받았고, 440만 호가 감세의 혜택을 입었다. 이때 최고세율은 최저세율의 9배가 넘었는데, 이러한 계급 원칙에 따른 납세는 농촌에서 자본주의 요소의 성장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1922/23년에 농업은 국가 수입의 약 1/4을 납세하였다.39)

농업은 당시에 소농 생산 체제였기 때문에, 국가가 농업에 대해 직접적 계획을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협동조합을 발전시키고, 가격 정책, 신용대출, 수매 정책과 농기계의 제공, 토지 사용의 조절, 지대, 고용노동의 조절 등을 통해, 쏘비에트 국가는 농업에 대해 간접적으로 계획을 실행했다.40) 이러한 정책의 초점은 한편으로 농업에서 생산력을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요소인 부농을 제한하고 배제하는 것이었다. 볼쉐비끼 당은 농촌에 있어서 협동조합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협동조합이 자본주의하에서는 자본주의적 관계에 봉사하는 것이지만, 사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 협동조합은 소생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봉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된다. 레닌은 신경제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상품-화폐 관계를 이용하는 기초 위에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하는 것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협동조합은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시장, 상업, 신용대출을 이용하는 것을 자신의 사업의 기초로 하는 협동조합 속에서, 필요로 되는 개인의 이익, 개인의 매매의 이익과 국가의 이 이익에 대한 검사ㆍ감독을 상호 결합할 수 있는 척도를 찾게 되었다. … 개인의 이익을 공동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척도41)라고 파악하여, 협동조합을 농촌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유력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경제가 안정적으로 회복됨에 따라 쏘비에트 국가는 개별 농민에 대해 예약 구매제를 실시한다.42) 특히 면화, 아마 등의 경제 작물에 대해 사전에 구매를 예약하여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자극하고 농업에서 계획의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용대출은 자본주의에서는 농민을 노예화하는 수단이지만, 사회주의하에서는 농민이 농기구와 역축 등을 구입하여 생산력을 높이고, 협동조합화, 집단화를 촉진하는 요소로 기능하였다. 이 시기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 등 농업에서 사회주의 요소는 아직 크게 발달하지 못하고 모범적 사례를 농민들에게 선전하는 기지로 역할했는데, 1924/25년 집단 농장은 총농업생산의 1.04%를 생산하고, 상품성 농산물의 경우 2.84%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3. 전후(戰後) 경제의 회복 그리고 공업화의 결의

 

신경제 정책하의 쏘련 경제는 1921년 가뭄이 크게 들어 흉작을 겪는 등 어려운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파종 면적이 오히려 줄어들기도 했다. 이는 공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연료와 원료의 부족으로 공장이 멈추는 일이 다반사였고, 노동자는 전쟁 기간에 기아를 피하기 위해 농촌으로 흩어진 사람이 상당하여, 노동자계급의 대오는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후 농업의 생산량이 조금씩 회복되고, 공업에서도 연료와 원료의 공급, 운수가 회복되면서 경공업을 중심으로 생산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공업이 먼저 회복되기 시작하자 노동자 수가 상대적으로 증가하였다. 1921-25년까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1부문은 노동자가 43.3% 늘어났지만, 소비재 부문은 노동자가 98.7% 증가하였다. 또한 1925/26년이 되면 사회주의 공업 부문은 전체 노동자의 97.5%를 차지하였고, 사적인 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2.5%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는데, 집단 임금제가 그중 하나이다. 국가가 기업에 대해 임금 총액을 정하고, 생산량을 초과 달성 시 임금을 추가 지급하였다. 그리고 노동자의 편제를 축소하여도 생산량을 달성하면 임금 총액이 줄어들지 않아 1인당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자극하였다. 개별 노동자에 대해서는 개수(個數) 임금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일종의 성과급 제도로 전시 공산주의의 평균주의를 탈피하여 노동생산성 향상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1925년 9월 대공업의 60.1%가 개수 임금제를 실시하였다.43) 임금의 지급 형태도 전시 공산주의의 현물 지급에서 화폐 지급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는데, 1923년 9월에 이르면 현물 지급의 비율은 8.9%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또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했는데, 통일적인 17등급의 임금표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 예를 들면, 현장의 생산 노동자는 5-9등급 사이에 위치하였다. 시간당 임금은 전체 노동 시간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1925/26년도에 1913년 수준의 116.9%에 달하였다. 1922/23-1925/26년도 기간에 실질 임금은 80% 증가했는데, 이는 전시 공산주의로 인해 임금의 절대적 수준이 낮은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노동자의 최소한의 소비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초과하고 있었는데, 이는 축적과 확대 재생산에는 불리한 요소였고, 따라서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한 원가 절감에 기업들이 집중하게 되었다.

1921-25년도 기간에 대공업의 생산고는 2.9배 증가했는데, 반면에 노동자는 0.6배 증가에 머물렀다. 이러한 생산성의 향상은 노동 강도가 강화되고 기계화, 합리화의 정도가 증대했다는 것에 기인하며, 또한 결근과 태만한 근무 등이 광범했던 노동 규율이 경제의 정상화, 회복에 따라 일정하게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경제 정책의 5년간 대공업의 총생산은 크게 증가했는데, 1925년에는 전전(戰前)의 75.5%에 이르게 되었고 1926년도에는 전전 수준을 8% 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7년에 이르면 모든 부문의 공업의 생산고가 1913년의 수준을 초과하게 되었다. 이러한 회복 속도는 유례가 없는 것이었는데, 프랑스의 경우보다 쏘련은 몇 배나 빠른 경제 회복 속도를 보인 것이었다. 유럽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당시 러시아의 경제가 전전(戰前) 수준에 도달하려면, 1935년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회복기에 쏘련의 대공업은 연평균 40.8%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러한 놀라운 성장과 회복이 가능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노동 대중의 노동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자본가가 없는 세상에서의 해방된 노동, 역사상 최초로 실현된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 그리고 노동자 간의 연대 속에 이루어지는 노동이 노동자 대중의 열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생산 관계에 조응하는 경제에서의 계획이, 각 부문 간의 비례적 발전이 가져오는 효율성과 집중성이, 경제 회복의 빠른 속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44)

공업에서 사적인 자본주의 부문은 1924/25년에 총생산고에서 3%를 차지하고 있었고, 노동자의 4.5%를 점했다. 그리고 대공업이 회복됨에 따라 소공업의 비중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는데, 1920년 52.3%에서 1926/27년도에 23.6%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대공업의 성장으로 전체 공업에서 사회주의적 부문은 압도적 비율을 점하게 되었다. 1925/26년도에 사회주의적인 국영 공업의 비율이 면방직은 97.4%, 모직 공업은 94.3%, 견직물은 89.0%, 마(麻)직물은 99.1%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공업에서 이러한 빠른 발전과 달리 중공업은 자체적으로 축적을 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였고, 국가 또한 중공업의 부흥을 위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1925/26년도에 회복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중공업은 기존의 시설을 보수하고 개선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새로운 중공업 기업의 건설은 1926년이 지나면서부터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레닌의 전기화 계획에 따른 전국 각지에서의 발전소의 건설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농업은 협동조합을 매개로 점차 회복, 발전하고 있었다. 1925년에 650만 호가 농업 협동조합에 참가했는데, 이는 전체 농가의 28%의 비율이었다. 면화 등의 기술 작물의 경우 협동조합에 대한 참가율이 전체 농가의 80%까지에 이르렀는데, 기술 작물은 상품성 작물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계획에 포괄되는 측면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조직화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네쁘(NEP) 초기에 농업, 농민에 있어서 공급과 판매의 협동조합이 상대적으로 중요했다. 농촌에 공업 제품, 농기구와 비료 등을 공급, 판매하는 망을 협동조합을 통해 건설하여 사적 상인을 점차 배제해 나가고, 또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협동조합이 구매하여 국유 부문에 공급하는 것은, 국가와 농촌의 연결 고리로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용 협동조합에는 1925년 320만 호가 참가했는데, 농기구와 역축이 부족한 빈농의 경우 국가의 신용대출은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1925/26년도에 이르면 협동조합을 통한 상품의 유통이 전국의 상품 유통액 총액에서 44.5%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협동조합 상업의 급속한 성장은 소매 영역에서 사적 자본주의적 상인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집단 농장은 당시에는 규모도 작고 숫자도 적었으며 주로 빈농들이 참가하였다. 빈농의 경우 농기구, 역축 등 생산수단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러한 결함을 집단적 농업을 통해 극복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출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빈농 이외에 중농의 경우 1925/26년도의 회복기가 끝날 때까지 집단 농장에 대한 참여가 거의 없었고, 회복기 이후에 점차 참여하기 시작했다. 농업의 생산량은 1925년에 전전의 5년 평균보다 4.45억 푸드, 11.2%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농업의 회복은 토지 개혁으로 인한 농민들의 생산 의욕의 증가, 전시 공산주의에서 탈피하여 신경제 정책하에 거래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잉여농산물의 생산에 대한 농민의 의욕이 증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곡물의 경우 상품화율은 13.4%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비율은 1913/14년도의 상품화율 29.3%보다 크게 낮은 것이었다. 짜르 시대에는 지주와 부농이 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품성 곡물을 크게 재배했지만, 신경제 정책하에서 농촌의 중농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자가 소비를 위한 생산이 주된 것이었으며, 따라서 판매를 위한 곡물의 생산의 비율이 매우 낮아졌던 것이다. 이는 소생산 농업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지주로부터의 해방, 부농에 대한 제한 정책 등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지지와 지원에 힘입어 소농 생산은 나름대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농산물의 상품화율이 크게 낮은 것은 도시의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공급할 식량, 그리고 공업 원료의 생산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모순은 1928-29년간에 걸친 곡물 위기의 발생으로 극적으로 드러났다. 농촌은 풍년이 들지만 도시와 노동자계급은 굶주리는 일이 반복되었고,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농업 집단화를 결의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신경제 정책하의 쏘련 사회에서 인민의 삶은 날로 변화, 발전하는 양상을 띠었다. 지주와 자본가의 주택이 재분배되어, 모쓰끄바의 경우 50만 명 이상이 지하실에서 거주하다가 번듯한 주거로 옮겨 살게 되었고, 뻬뜨로그라드의 경우 55만-60만 명이 지하실에서 번듯한 집으로 이사하였다. 과거 뻬뜨로그라드에서 지하실에 거주하는 인구는 16.7%였는데, 1923년이 되면 지하실 거주 인구는 1%로 줄어들었다. 또한 공공식당, 탁아소, 유치원 등이 늘어나서 여성들은 가사 노동의 중압에서 일정하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여성 해방의 물질적 조건의 형성을 의미하였다. 의료의 측면에서 보면, 1921-25년 사이에 의료 인력이 배로 증가하였고 그루지야의 경우 2.5배가 증가하였다.45) 이러한 보건 상태의 개선으로 평균 수명이 크게 늘어났는데, 남성은 10년, 여성은 13년이 늘어났고, 사망률도 크게 낮아졌는데, 특히 아동 사망률이 급격히 낮아졌다. 노동자 가정의 경우 성인의 하루 칼로리 섭취량이 1918년 1,786칼로리에서 1926년 3,445칼로리로 높아졌다. 1927년까지 1,000만 명의 성인이 문맹에서 탈피하였고, 1925/26년도에 1,000만 이상의 학생이 초ㆍ중ㆍ고에서 학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1914/15년도보다 30%가 증가한 수치였다. 그리고 각 민족 공화국에서 학교들이 대대적으로 증가되었고, 학생들은 자신의 민족어로 학습을 하였다.

이렇게 1925/26년에 이르는 전후 경제의 회복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있었고, 1925년 12월 18일에 개최된 14차 당 대회는 회복기 경제의 성공적인 성과에 기초하여 대공업의 발전, 중공업의 발전을 축으로 하는 공업화의 결의를 도출했다. 이는 쏘련을, 농업이 우위에 있는 농업국에서 현대적 기술에 입각한 공업 국가로 변모시키겠다는 결정이었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주도로 제1차 5개년 계획의 작성이 시작되었고, 약 3년에 걸친 연구와 토론, 기층에서부터 지도부에 이르는 검토를 거쳐 1929년 제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게 된다. 또한 1927년의 15차 당 대회는 농업 집단화를 결의하여, 기존에 모범적 사례로서의 선전 기지로서 역할했던 국영 농장과 집단 농장의 상태를 일신하여, 대중적인 농업 집단화 운동이 전개되게 되었다.

 

 

4. 뜨로쯔끼의 분파 투쟁과 일국 사회주의 논쟁

 

1922년 3월 27일 제11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레닌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확고해졌으며,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음을 보고했다. 그리고 레닌은 주요 고리는 상업이며, 볼쉐비끼가 상업을 배우는 것을 통해 농민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경제를 장악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11차 당 대회에 의해 구성된 중앙위원회는 서기장으로 쓰딸린을 선출했다.

쏘비에트 국가가 안정됨에 따라 대외 관계도 호전되기 시작했다. 1921년 영국과 통상 협정이 체결된 것을 시작으로, 독일 등 몇몇 나라와의 통상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1922년 4월에는 쏘비에트 러시아와 독일과의 외교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는 혁명 러시아가 주요 국가와 최초로 맺은 국교였으며, 이를 통해 쏘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봉쇄망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쏘비에트 러시아는 유럽의 주요 나라와 무역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경제의 회복에 필요한 기계류, 원자재를 수입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외국에 수출했던 품목은 곡물, 목재 등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역에 대한 국가독점 원칙은 고수되었는데, 부하린 등 일부 세력은 무역의 국가독점을 폐기하고 그것을 관세에 의한 조절 정책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여 논쟁이 되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쏘비에트 러시아의 공업의 발전을 보호하고,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경제적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역의 국가독점 원칙이 고수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쏘비에트 정권이 안정되면서 러시아, 우끄라이나, 까프까쓰(코카서스) 등 각 지역과 민족의 쏘비에트 국가들의 연합이 일정에 올랐고, 새로운 쏘비에트 연방 국가의 수립이 논의되었다. 여기서 민족 문제 담당이었던 쓰딸린은 여타 민족의 쏘비에트 공화국들이 러시아 쏘비에트 연방에 자치 공화국으로서 합류하자는 안을 내었는데, 레닌은 이에 반대하여 각각의 민족의 쏘비에트 공화국들과 러시아 쏘비에트 공화국이 대등하게 연방으로 결합할 것을 주장하였다. 쓰딸린은 곧 자신의 안을 철회하였고, 모든 쏘비에트 공화국들이 연방으로 결합하는 안이 추진되었다. 1922년 12월 30일에 쏘비에트 연방 제1차 쏘비에트 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에서 쏘비에트 연방 수립이 선언되어 정식으로 사회주의 쏘련이 성립하였다. 그리고 1924년 제2차 쏘비에트 대회에서는 최초의 쏘련 헌법이 채택되었다.

1923년 4월 17일 제12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레닌이 와병으로 인하여 출석하지 못했다. 레닌은 격무와 암살 시도에 의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발작을 겪은 후 정상적인 활동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와병에도 불구하고 당 대회는 훌륭히 치러졌는데 대회에서는 경제에 집중할 것을 슬로건으로 결의했다. 그런데 뜨로쯔끼는 12차 당 대회를 위해 기초한 자신의 테제집에서 공업 독재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뜨로쯔끼는 신경제 정책이 노동자계급과 농민과의 동맹의 강화를 위한 것임을 수긍하지 못하고 농민에 대한 고려를 결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업 제품의 높은 가격을 통해 농민을 수탈하여 그 재원을 공업의 발전을 위해 쓰자는 주장을 하였다. 심지어 뜨로쯔끼주의자인 쁘레오브라줸쓰끼는 이를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이라는 개념으로까지 상승시켰다. 자본주의에서 본원적 축적은 농민을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내몰아서 무산자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자본-임노동 관계가 창출되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혹은 본원적 축적이라고 규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사회주의 건설의 시작 단계에서 유사하게 겪어야 한다며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이라는 개념을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제 내용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라는 점에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파괴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12차 당 대회는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이러한 요구를 부결시켰다.

그런데 뜨로쯔끼는 12차 당 대회 이후 본격적인 분파 투쟁을 시작하는데, 1923년 10월 초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중앙위원회를 공격하였다. 이어서 뜨로쯔끼주의 세력이 서명한 46인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는데, 당과 중앙위원회를 대립시키고 당내 분파 결성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합동 총회가 열려 뜨로쯔끼와 그 세력의 행동이 당의 단결을 해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뜨로쯔끼는 계속 분파 투쟁의 행보를 이어가는데, 신노선이라는 팜플렛을 발행하여 당 지도부가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청년층을 치켜세우며 이들을 고참 볼쉐비끼와 대립시켰다. 이러한 뜨로쯔끼의 행보는 당적 관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서, 당을 분열시켜 자신의 분파를 형성하고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당의 각 조직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뜨로쯔끼의 주장의 내용이 폭로되면서 뜨로쯔끼의 분파 투쟁은 패배하게 된다. 1924년 1월에 열린 13차 당 협의회는 뜨로쯔끼파가 볼쉐비즘을 수정하려 하고 레닌주의로부터 벗어난 소부르주아 편향이라는 비판을 수행했다.46)

레닌이 와병 중인 상태에서 당에 대한 뜨로쯔끼의 이러한 공격은 뜨로쯔끼가 볼쉐비즘으로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레닌이 온전했을 때는 레닌에 의해 뜨로쯔끼의 비(非)볼쉐비즘이 제어되고 있었지만, 레닌이 와병으로 활동력을 상실해 가자 뜨로쯔끼의 비볼쉐비즘이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당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당과 중앙위원회를 대립시키고 고참 볼쉐비끼 간부들과 청년층을 대립시키는 것으로는 어떠한 전진적 결과도 끌어낼 수 없으며 단지 당의 분열이 초래될 수 있을 뿐이었는데, 뜨로쯔끼가 이러한 공격을 감행한 것은 당의 분열을 통한 자신의 분파의 결성과 강화를 노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뜨로쯔끼가 1900년대 초부터 걸어온 비(非)볼쉐비즘의 길, 레닌에 대한 뜨로쯔끼의 수많은 공격과 비방의 사례들을 폭로하였고, ≪레닌 전집≫을 발간하여 이를 뒷받침하였다. 그리하여 뜨로쯔끼에 대한 레닌의 투쟁의 역사가 신참 당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뜨로쯔끼를 고립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뜨로쯔끼가 볼쉐비즘에 대한 반대 행보를 이어가는 가운데, 쓰딸린은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레닌주의를 대중적으로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사망하였다. 레닌의 상중에 많은 노동자들이 당에 입당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이 흐름의 규모가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중앙위원회는 노동자들에게 입당을 호소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약 24만 명의 노동자가 입당했다. 레닌을 잃게 된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 볼쉐비끼 당은 입당 운동을 통해 당과 대중의 연결을 강화하고 당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레닌이 사망한 후 얼마 안 되어 제13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제12차 당 대회 이후 13차 당 대회에 이르는 기간에 당원은 거의 배로 늘어났는데 새 당원은 주로 노동자였다. 당 대회는 중앙위원회가 뜨로쯔끼에 맞서 투쟁하여 레닌주의를 방어한 점을 승인하였다. 대회에서는 또한 부농의 영향력이 성장하는 점에 주목하고 빈농에 대한 면세, 부농에 대한 과세의 강화를 결정했고, 부농을 제어하기 위해 촌(村) 쏘비에트를 강화해 갈 것을 결의했다. 또한 국영 상업을 강화하여 사적 자본주의적 상업을 규제하고 배제해 나갈 것을 결의했다. 당 대회에서는 레닌의 유언이라 일컬어지는 레닌의 편지를 대의원들의 각 대표단에게 공개했다. 이 레닌의 유언은 볼쉐비끼 당의 주요 지도자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었고, 쓰딸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당 대회는 쓰딸린의 해임은 뜨로쯔끼 세력에게 도움이 되며, 또 쓰딸린이 레닌의 충고를 따를 것을 맹세한 점을 근거로, 쓰딸린의 서기장직 유임을 결정하였다.

1924년 가을에 뜨로쯔끼는 새로운 도발을 감행했는데, 1917년의 10월 혁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레닌과 당이 아니라 뜨로쯔끼 자신이며 레닌이 뜨로쯔끼의 영구 혁명 사상을 받아들여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 당은 그것은 레닌주의를 뜨로쯔끼주의로 대체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하고 비판을 가하였다. 뜨로쯔끼는 10월 혁명의 과정에서 자신이 앞에 나섰던 것을 크게 평가하고 싶었겠지만, 10월 혁명의 전 과정에 걸치는 전략과 전술, 조직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쉐비끼 당이 해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었다. 여기서 뜨로쯔끼는 조직 운동을 무시하고 개인을 치켜세우는 소부르주아적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사실 뜨로쯔끼가 볼쉐비끼 당에 합류한 것은 1917년 7월이었는데, 이때는 대중의 압도적 다수가 볼쉐비끼의 기치를 따르게 된 때였다. 그리고 뜨로쯔끼의 볼쉐비끼 당으로의 합류는 뜨로쯔끼 자신의 비볼쉐비즘을 청산할 것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뜨로쯔끼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혁명사와 당의 역사를 위조하고 왜곡함으로써, 레닌 사망 후의 상황에서 레닌주의의 기치를 내리고 대신에 뜨로쯔끼주의의 깃발을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쓰딸린은 이에 대해 ≪쁘라브다≫에 “뜨로쯔끼주의인가 아니면 레닌주의인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뜨로쯔끼가 레닌주의를 뜨로쯔끼주의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분쇄하였다. 1925년 1월에 열린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합동 총회는 뜨로쯔끼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면서 뜨로쯔끼가 당의 규율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뜨로쯔끼는 쏘련 혁명군사위원회 의장 직위를 박탈당했는데, 당의 중앙위원의 직은 그대로 유지된 상태였다.

이 기간, 즉 1924/25년도의 기간에 신경제 정책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공업과 농업 모두에서 생산이 전전의 수준에 다가서고 있었고, 인민의 생활도 날로 개선되고 있었다. 1925년 말 농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는 600만 명을 넘어섰다. 노동자계급의 대오가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유화된 공업과 협동조합 공업의 생산고는 전체의 81%를 차지하여, 경제에서 사회주의적 부문의 주도성이 확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신경제 정책, 즉 상품-화폐 관계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계획 경제 노선의 올바름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5년 12월 18일 제14차 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14차 당 대회는 국가의 공업화 대회로 평가되는데, 신경제 정책으로 인한 경제의 성공적인 회복에 기초하여 전전 수준을 넘어서는 공업의 건설, 현대화된 기술에 입각한 중공업의 건설을 통해 나라를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전환시키자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런데 뜨로쯔끼가 분파 투쟁에서 패배한 후 잠잠한 사이에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를 중심으로 하는 신반대파가 형성되어 당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이들은 뜨로쯔끼의 정강을 사실상 그대로 채용하여 서유럽 혁명의 지원이 없다면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적 주장을 폈다. 또한 신경제 정책을 자본주의로의 후퇴라고 주장하고 신경제 정책하의 국유 기업을 사회주의 기업이 아닌 국가자본주의 기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전시 공산주의와 달리 새로운 조건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상품-화폐 관계의 활용이 필수적임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서유럽 혁명의 지원이 없다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배신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다면, 서유럽 혁명을 강화하고 그와 연대하는 것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성공시키는 길을 가는 것이었는데, 신반대파 그리고 뜨로쯔끼 세력은 이러한 변혁적 관점을 상실하고 패배주의적 나락에 빠져든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국제 정세는 엄중한 것이었다. 제국주의 세력은 한편으로 쏘련과 통상을 재개하고 국교를 맺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쏘련을 타격하고 군사적으로 침략할 계기와 구실을 찾고 있던 것이 당시의 국제 정세였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 정세이기 때문에 쏘련 내부적으로는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의 강화가 사활적으로 중요한 전략 방침이 되었는데, 이들은 이러한 전략의 ABC를 그르친 것이었다. 맑스주의에 대한 교조적 이해가 이들 신반대파와 뜨로쯔끼 세력을 그릇된 길로 이끈 것이었다. 또한 뜨로쯔끼는 농민을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반동 세력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러한 입장은 노농 동맹을 균열시키고 노동자계급을 고립시키는 것이며 패배주의를 유포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쓰딸린은 이에 대해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라는 저작을 발표하여, 뜨로쯔끼의 이러한 영구 혁명론을 분쇄하는 데 기여하였다. 쓰딸린은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가능성의 문제와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 즉 자본주의의 복고 가능성의 소멸의 문제를 구분하면서, 쏘련에는 사회주의가 승리할 가능성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다. 쏘련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존재하며,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공고하고, 또 사회주의화된 공업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승리할 가능성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가능성, 즉 자본주의가 복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최소한 몇몇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함을 밝혔다.47) 사실 일국 사회주의론이라 불리는 쓰딸린의 이러한 관점은 쓰딸린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레닌이 10월 혁명을 전후하여 밝혔던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레닌은 제국주의 발전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든 이후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 심화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몇몇의 나라, 심지어 단 하나의 나라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밝혔었다(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 등). 그리고 10월 혁명 후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는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갖고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일국 사회주의론을 쓰딸린의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 역사적 맥락을 왜곡하는 악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14차 당 대회를 전후한 신반대파의 분파 투쟁은 14차 당 대회에 의해 비판되었는데, 신반대파는 당 대회의 결정 사항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당 중앙위원회는 지도적 간부들을 신반대파의 근거지였던 레닌그라드로 파견하여 기층 당원들에게 당 대회의 결정 사항을 설명하였다.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당원들은 97%가 당 대회의 결정 사항에 찬성하며 지노비예프 등을 비판하였다. 지노비예프는 이후 레닌그라드 지도부에서 해임되었다. 이리하여 신반대파의 분파적 투쟁은 일단락되고 당은 14차 대회의 결의에 따라 공업화의 길로 매진할 수 있었다.

노사과연

 

 


 

1)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一卷, 北京: 生活ㆍ读书ㆍ新知三联出版, 1979, p. 558.

 

2) 같은 책, p. 554.

 

3)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3권, 편집부 역, 거름, 1991, p. 154.

 

4)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앞의 책, p. 403.

 

5)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二卷, p. 6.

 

6) 같은 책, p. 11.

 

7) 같은 책, p. 14.

 

8) 같은 책, p. 15.

 

9) 같은 책, p. 35.

 

10) 같은 곳.

 

11) 같은 책, p. 18.

 

12) 같은 책, p. 29.

 

13) 같은 책, p. 30.

 

14) 같은 책, p. 31.

 

15) 같은 책, p. 38.

 

16) 周尚文ㆍ叶书宗ㆍ王斯德, ≪苏联兴亡史(쏘련 흥망사)≫, 上海人民出版社, 1993, p. 100.

 

17)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二卷, p. 6.

 

18) 같은 책, p. 61.

 

19) 같은 책, p. 63.

 

20) 같은 책, p. 65.

 

21) 같은 책, p. 73.

 

22) 같은 곳.

 

23) 邓小平, “计划和市场都是发展生产力的方法(계획과 시장은 모두 생산력 발전의 방법이다)”, ≪邓小平文选≫ 第三卷, 北京: 人民出版社, 1993, p. 203.

 

24)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二卷, p. 72.

 

25) 같은 책, p. 77.

 

26) 같은 책, p. 79.

 

27) 같은 책, p. 117.

 

28) 같은 책, p. 110.

 

29) 같은 곳.

 

30) 같은 책, p. 70.

 

31) 같은 책, p. 111.

 

32) 같은 책, p. 113.

 

33) 같은 책, p. 115.

 

34) 같은 책, p. 116.

 

35) 같은 책, p. 49.

 

36) 모리스 돕, ≪소련경제사≫, 형성사, 1989, p. 205.

 

37) 苏联科学院经济研究所 编, ≪苏联社会主义经济史(쏘련 사회주의 경제사)≫ 第二卷, p. 213.

 

38) 같은 책, p. 30.

 

39) 같은 책, p. 45.

 

40) 같은 책, p. 87.

 

41) 같은 책, p. 122.

 

42) 같은 곳.

 

43) 같은 책, p. 291.

 

44) 같은 책, p. 308.

 

45) 같은 책, p. 585.

 

46) B. N. 포노말료프 편, 앞의 책, p. 231.

 

47) J. V. 스탈린, ≪스탈린 선집≫ 제1권, 서중건 역, 전진 출판사, 1988, pp. 230-241.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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