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이 | 전교조 조합원
국내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확산되고 있던 3월 초, 2014년 세월호참사의 희생자인 단원고등학교 학생의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아버지는 세월호참사 이후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뉴스에서는 사망자가 손 모 씨로, 단원고 2학년 7반 희생 학생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었다. 2학년 7반은 남자반이고 손 씨 성을 가진 희생 학생은 손찬우 학생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손찬우 학생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찬우는 위로 13살 많은 형이 있는 늦둥이 막내입니다. 전혀 생각도 못했던 때에 태어난 찬우가 부모님에게도 특별했지만 형에게도 아주 특별했다고 합니다. 형은 찬우가 먹고 싶다고 하거나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사 줬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동생 찬우를 형은 정말 예뻐하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찬우는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꿈을 위해 요리 학원도 다녔으며 한식과 일식을 학원에서 배웠는데 생선 다루는 것이 어렵지만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가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찬우가 음식을 만들어 줬는데 음식 간도 제법 잘 맞춰서 맛있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도 찬우는 성격도 좋아서 친구가 많았고 일단 한번 알게 된 친구와는 깊이 사귀었습니다.1)
늦둥이 막내인 찬우가 부모님과 형에게 어떤 존재였을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들이 세월호참사로 인해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고, 이후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만약 세월호참사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고 책임자들이 철저하게 처벌받았다면, 찬우 아버지가 우울증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진상규명이 가장 큰 치유이자 추모이기 때문이다.
벌써 6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1기 특조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이하 선조위)가 활동을 하였고, 현재는 사회적참사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와 검찰 특별수사단(이하 검찰 특수단)이 활동을 하고 있다.
■1기 특조위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태생적인 한계에, 박근혜 정권의 탄압으로 그 제한적 활동마저 조기 중단되었다. ■선조위는 주로 세월호 침몰의 원인에 대한 조사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열린안과 내인설로 갈리며 사실상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2018년 12월 활동 개시를 선언한 사참위 역시 1기 특조위와 비슷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올해 말 활동이 종료되는데, 현재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 갑작스럽게 검찰이 특별수사단을 발족하며,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뛰어들었다. 검찰 특수단장은 출범 기자 회견에서 ‘백서를 쓰는 심정으로 어떤 의혹도 남지 않도록 수사하겠다’고 천명했지만,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보자면, 박근혜 정권 당시 검찰의 결론을 기반으로 해양경찰청장을 비롯한 해경 윗선을 추가 기소하는 정도로 수사를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특수단장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진실을 덮기 위한 마지막 특별 임무를 맡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검찰 특수단 수사 활동 종료 후 진상규명 운동은 장기화되고 더욱 험난한 길을 걸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그저 느낌적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어려운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찬우와 찬우 아버지, 그리고 수많은 비극적인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첫째,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은 반자본주의 운동이다. 세월호참사는 생명과 안전보다는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 체제가 ‘배경’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세월호는 원래 일본이 만든 배였고, 나미노우에(波の上)라는 이름으로 18년간 운항하고, 20년이 선령 연한이었던 일본에서 항해를 종료하였다. 그러나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를 사서 국내에 들여왔다. 이명박 정부가 선령 연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 즉 규제를 완화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 체제가 ‘원인’이 아니라 ‘배경’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윤 추구의 사회 체제가 세월호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세월호가 과적과 증축, 고박 부실로 복원성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조타 미숙(혹은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으로 급변침이 일어나며 침몰했다는 박근혜 당시 검찰과 선조위의 내인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는 분명 규제 완화와 증축으로 다시 태어난 배였고, 과적과 고박 부실은 세월호에 늘상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앞으로 이윤 추구로 발생할 다른 참사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이 규제 완화와 비정규직 문제(선원), 직고용이 아닌 하청을 주는 방식(고박 업체) 등의 자본주의 폐해에 제동을 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은 반제국주의 운동이다. 세월호의 화물칸에는 제주해군기지로 가는 철근이 다량 실려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 철근 때문에 세월호가 침몰한 것 아니냐고 얘기하는데,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세월호가 과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사고 당시 복원성인 GoM 값이 0.6 정도로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2)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잠깐만 생각해 보면, 배가 적당히 무거운 것이 안정감이 있고, 화물이 실리는 위치에 따라 복원성은 달라질 수 있는데, 세월호는 4월 15일 출항 당시 만재흘수선(화물선에 화물을 실을 수 있는 한계를 표시한 선)을 넘기지 않았고, 그러하기에 인천항만 운항관리자가 세월호의 출항을 허가한 것이다.
그럼 제주해군기지로 가는 철근은 세월호참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무리한 출항 관련이다. 아시다시피 세월호는 4월 15일 오후 6시 반 인천에서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안개가 심한 관계로 9시가 되어서야 출항이 이루어졌다. 당시 출항한 배는 세월호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당시 선박들을 조사해 봐야 할 일이지만, 세월호 역시 출항 여부에 대해 이견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혹시 제주해군기지에 보낼 철근 납품 시기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출항을 한 것이 아닌지 조사해 봐야 한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으로 강력하게 대두되는 것은 바로 세월호참사 초기에 SNS에 떠돌던 잠수함 충돌설이다. 나는 잠수함 충돌을 의심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세월호가 보인 알 수 없는 급변침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조타수의 조타 미숙으로 인한 조타기 전타로도,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조타 미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설사 타기 펌프 두 개를 모두 켠 상황에서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착되었다고 하더라도, 세월호는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급변침의 속도를 모두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급변침은 그만큼 단시간에 이루어졌다. 기억을 떠올려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침몰 후 며칠간 뉴스에 출연한 전문가들이 보인 반응들은 ‘배가 그렇게 빠르게 급변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는 바로 세월호에 실린 차량 블랙박스이다. 내인설은 세월호가 급변침으로 인해 좌현 횡경사를 일으키며 기울었고, 고박이 부실한 화물들이 미끄러지며 배가 더 기울었다는 것이다. 즉 배가 단계적으로 기울었다는 것인데, 세월호에 실린 차량 블랙박스의 영상은 이런 내인설을 부정하고 있다. 영상에서 차량들은 (아쉽게도 차량이 C데크에 실려 있었으므로, D데크는 확인할 수 없다) 배가 기울어서 미끄러져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침몰과 거의 동시에 날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세월호 3층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던 단원고 양승진 선생님도 침몰과 동시에 배 밖으로 떨어지셨고, 시신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충격’이 아닌 다음에야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당시 진도관제센터 모니터에는 세월호와 충돌을 일으킬 만한 위치에 있었던 선박은 없었으므로, 세월호에 충격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잠수함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JTBC 뉴스룸에서 소개된 레이더 영상의 주황색 괴물체는 컨테이너일 수 없으며,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그 주황색 괴물체가 바로 잠수함이 아닐까.
세월호참사 당시에 한미해상합동훈련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세월호가 막 침몰하기 시작했을 시각인 4월 16일 오전 8시 58분경 해군의 한문식함이 세월호 근처에 있었다. 이는 잠수함 충돌을 주장한 우○○ 씨 재판에서 당시 해군작전참모처장인 조○○ 대령이 밝힌 사실이다. 세월호가 8시 49분경에 침몰하기 시작했으므로 10분도 안 되어서 구조함이 도착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세월호는 9시 3분경 처음으로 진도도 아닌 제주관제센터와 교신한다), 더구나 한문식함은 유도탄고속함으로 전투용 함정이다. 이 배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그리고 이후 왜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문식함이 합동훈련 중이었는지, 합동훈련에 잠수함도 포함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약 세월호가 제주해군기지에 철근을 납품하기 위해 무리하게 출항했고, 항해 도중 잠수함 충돌로 인해 침몰했으며, 당국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구조를 방기했다면, 그리고 정부가 이에 대한 진실을 덮고 있는 것이라면, 결국 이 정권 역시 동북아 군사패권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일 뿐이다. 우리는 군사패권주의와 제국주의가 아닌 평화 체제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셋째,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은 진정한 민중 권력을 쟁취하는 운동이다. 경찰은 왜 존재하고 정보기관은 왜 존재하는가. 자본주의 국가 기구는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로,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인민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 행정기관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인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경찰과 군대와 정보기관이 자본과 정권이 아니라, 인민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회 말이다.
세월호참사 당시 침몰 해역에 도착한 해경123정은 분명 ‘선원 신병 확보’의 명령을 받고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9시 35분경 침몰 해역에 도착한 해경123정은 도착하자마자 기관실 선원들과 선장을 포함한 조타실 선원들을 구조했다. 123정장은 이들이 선원인 줄 몰랐다고 하는데, 이는 정장에 대한 강도 높은 재수사가 필요함을 입증할 뿐이다.
만약 해경이 인민의 통제를 받는 인민을 위한 진정한 경찰 기구였다면, 설사 부당한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후 인민들의 비판과 역사의 평가가 두려워서라도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생명을 살리는 구조 활동을 펼치지 않았을까. 국정원, 기무사, 해군, 해수부 모두 마찬가지이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을 통해 이러한 기구들을 원래 주인에게, 즉 인민들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다. 사실 혁명과도 같은 일이다.
세월호 운동을 하며 알게 된 세월호 유가족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예은 어머니와 아버지, 경빈 어머니, 시연 어머니, 다영 아버지, 김초원 선생님 아버지, 영만 어머니, 성호 어머니, 애진 아버지, 영석 어머니와 아버지, 준영 어머니와 아버지, 동영 아버지, 시찬 아버지. 이분들 역시 찬우 아버지만큼 고통받고 계시다. 가끔 SNS에 올라오는 글을 통해 그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호참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4ㆍ3과 5ㆍ18만큼 장기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변혁 세력들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운동의 함의를 잊지 않고 함께 실천하기를 바란다.
노사과연
1) http://416family.org/index.php/remember-n1/?mode=view&board_pid=467
2) 이 복원성 값에 대해서 열린안과 내인설을 주장하는 선조위 조사위원들 간 이견이 존재하는데, 열린안 조사위원들은 내인설 조사위원들이 4번과 5번 평형수의 자유유동수 효과를 억지로 적용하여 복원성 값을 떨어뜨렸다고 주장한다. 열린안 조사위원 3명 중 서울대학교 조선해양학과 장범선 교수는 작년 시민사회단체가 주최한 세월호 침몰원인 열린 토론회에 나와 이러한 주장으로 발제하였는데, 민주당이 추천한 김창준 위원을 비롯한 내인설 조사위원들은 토론회에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러한 열린안 조사위원들의 주장에 대해 이후 반박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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