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뚱(毛泽东)
* ≪모택동 선집≫ 제1권(조선문), 민족출판사, 북경, 1992에서 옮겼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표현은 한국어에 맞게 수정하였습니다.
시국에 대한 평가와 이에 따르는 우리의 행동 문제에서 우리 당내의 일부 동지들은 아직 정확한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혁명의 고조가 불가피적으로 닥쳐오리라는 것은 믿으나 혁명의 고조가 속히 닥쳐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강서성 탈취 계획은 찬성하지 않고, 다만 복건성, 광동성, 강서성 사이의 세 개 접경지대에서 유동적인 유격전을 할 것만 찬성한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유격 지역에 홍색정권을 수립하려는 심각한 관념도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홍색정권의 공고화와 확대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혁명의 앙양을 촉진하려는 심각한 관념도 없다. 그들은 혁명의 앙양기와는 아직도 거리가 먼 시기에 정권 수립과 같은 이런 간고한 사업을 수행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처럼 여기면서 비교적 경편한 유동적인 유격의 방법으로 정치적 영향을 확대하다가 전국 각지에서 대중을 쟁취하는 사업이 성공되거나 어느 정도까지 된 다음에 가서 전국적으로 무장봉기를 단행하고 그때에 홍군의 역량을 첨가함으로써 그것이 전국적 범위의 대혁명으로 되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일체 지방을 포함하여, 먼저 대중을 쟁취하고 후에 정권을 수립한다는 그들의 이론은 중국 혁명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이론은 주로 중국이 여러 제국주의 국가가 서로 쟁탈하는 반식민지라는 이 사실을 똑똑히 알지 못하는 데 그 근원이 있다. 만일 중국이 여러 제국주의 국가가 서로 쟁탈하는 반식민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안다면 첫째로, 전 세계에서 어찌하여 중국에만 지배계급 내부에서 서로 장기적으로 혼전하는 이런 괴이한 현상이 있는가, 또 이 혼전이 어찌하여 나날이 더 치열하여지며 나날이 더 확대되어 가는가, 어찌하여 통일적 정권이 종내 서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둘째로, 농민 문제의 중대성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농촌봉기가 어째서 지금과 같이 전국적 규모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셋째로, 노농민주정권이라는 이 구호의 정당성을 알게 될 것이다. 넷째로, 전 세계에서 중국에만 지배계급 내부에 장기적 혼전이 존재한다는 이 괴이한 현상과 관련하여 발생되는 또 하나의 괴이한 현상, 즉 홍군 및 유격대의 존재와 발전 그리고 홍군 및 유격대와 함께 산생되어 백색정권의 사면포위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작은 홍색 지역의 존재와 발전(중국 이외에는 이러한 괴이한 현상이 없다)을 알게 될 것이다. 다섯째로, 홍군과 유격대와 홍색 지역의 창설, 발전은 반식민지 중국에서 무산계급의 영도하에 진행되는 농민투쟁의 최고 형태이며 반식민지 농민투쟁 발전의 필연적 결과이며 또한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전국적으로 혁명의 앙양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여섯째로, 단순한 유동적 유격 정책으로는 전국적으로 혁명의 앙양을 촉진하는 과업을 완수할 수 없고 주덕(朱德)-모택동(毛澤東)적, 방지민(方志敏)적 정책, 즉 근거지를 가지며 계획적으로 정권을 수립하며 토지 혁명을 침투시키며 그리고 향(鄕) 적위대, 구(區) 적위대대, 현(縣) 적위총대, 지방 홍군을 거쳐 정규적 홍군에로 발전시키는 노선을 통하여 인민의 무장력을 확대하며 파상식 확대를 통하여 정권을 발전시키는 등등의 정책이 의심할 바 없이 정당하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쏘련이 전 세계에서 신뢰를 쟁취한 것처럼 우리도 전국적으로 혁명적 대중의 신뢰를 쟁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반동적 지배계급에게 심대한 곤란을 조성하여 주고 그 근저를 뒤흔들어 그 내부의 와해를 촉진할 수 있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만 앞날의 대혁명의 주요한 무기로 될 홍군을 진정으로 창건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혁명의 앙양을 촉진할 수 있다.
혁명 조급증에 걸린 동지들은 부당하게도 혁명의 주관적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반혁명 역량을 과소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태반이 주관주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맹동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타방으로 만약 혁명의 주관적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반혁명 역량을 과대평가한다면 이것도 부당한 평가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다른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중국의 정치 정세를 판단할 때에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알 필요가 있다.
(1) 지금 중국 혁명의 주관적 역량은 비록 약하지만 그러나 중국의 낙후하고 취약한 사회 경제적 조직에 기초하고 있는 반동적 지배계급의 일체 조직(정권, 무장력, 정당 등)도 역시 약하다. 이로 보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지금 서유럽 나라들의 혁명의 주관적 역량이 비록 지금 중국의 혁명의 주관적 역량보다 좀 강할는지는 모르지만 서유럽 나라들의 반동적 지배계급의 역량이 중국의 반동적 지배계급의 역량보다 몇 배나 더 강대하기 때문에 서유럽 나라들에서는 의연히 혁명이 즉시 폭발될 수 없고 현재 중국 혁명의 주관적 역량이 비록 약하지만 반혁명 역량도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중국 혁명은 틀림없이 서유럽보다 더 빨리 고조에로 나아갈 것이다.
(2) 1927년에 혁명이 실패한 후 혁명의 주관적 역량은 확실히 많이 약화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작은 역량은 그것을 일부 현상에만 근거하여 볼 것 같으면 물론 동지들(이렇게 보는 동지들)에게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로부터 본다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한 점의 불꽃이 들판을 태울 수 있다’는 중국의 속담이 들어맞는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비록 아주 작은 역량에 지나지 않으나 그 발전은 매우 빠를 것이다. 중국의 환경에서는 그것이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발전의 필연성까지 가지고 있다. 이 점은 5ㆍ30 운동 및 그 이후의 대혁명 운동에서 여실히 실증되었다. 우리는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서 그 본질을 보아야 하며 그 현상은 입문의 길잡이로만 보고 문안에 들어서면 곧 그 본질을 파악하여야 한다. 이것만이 믿음직한 과학적 분석 방법이다.
(3) 반혁명 역량을 평가하는 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코 그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보아야 한다. 호남-강서 접경지대에서의 할거 초기에 일부 동지들은 당시의 호남성위원회의 부정확한 평가를 곧이듣고 계급적 원수들을 한 푼어치도 못 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았다. 지금까지도 웃음거리로 전하여지고 있는 소위 ‘심한 동요’니, ‘극도의 공포’니 하는 말은 그 당시(1928년 5-6월) 호남성위원회가 호남성의 통치자 노척평(魯滌平)을 평가한 형용사이다. 이러한 평가에서는 필연적으로 정치상의 맹동주의가 나오게 된다. 그러다 그해 11월부터 작년 2월(장개석(蔣介石)파와 광서파 간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4개월 동안 적의 제3차 ‘협동토벌’이 정강산에 닥치자 일부 동지들은 또 ‘대체 붉은 기를 얼마 동안이나 휘날릴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기실 당시는 중국에서의 영국, 미국, 일본 간의 투쟁이 아주 노골적인 정도에 이르렀고 장개석파, 광서파, 풍옥상(馮玉祥)파가 혼전할 형세도 이미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실질상으로는 반혁명 조류가 저락되기 시작하고 혁명 조류가 다시 앙양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홍군과 지방당 조직 내에 비관적 사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중앙에도 이러한 표면적 정세에 미혹되어 비관적 논조가 생겼다. 중앙의 “2월 서한”이 바로 당시 당내의 비관적 분석을 대표하고 있는 증거물이다.
(4) 현시의 객관적 정세도 역시 눈앞의 표면적 현상만을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동지들을 미혹시키기 쉽다. 특히 홍군 내에서 사업하고 있는 우리 동지들은 일단 패전을 당하거나 사면포위를 당하거나 또는 강한 적의 추격을 당하면 흔히 자기도 모르게 이러한 일시적인, 특수한, 국부적 환경을 전반적인 것으로 확대하여 마치 전국의 정세, 전 세계의 정세가 모두 낙관을 허락하지 않으며 혁명 승리의 전도가 아주 아득한 듯이 느끼게 된다. 이과 같이 표면에 사로잡혀 본질을 포기하는 관찰은 그들이 일반적 정세의 본질에 대하여 과학적 분석을 가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 중국의 혁명 고조가 곧 닥쳐오겠느냐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혁명의 고조를 일으키는 여러 가지 모순이 정말 발전하고 있느냐 어떠냐를 상세하게 관찰한 뒤에야 확답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제국주의 상호 간,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 제국주의와 자국의 무산계급 간의 모순이 발전하고 있는 이상 제국주의는 중국을 쟁탈할 필요성이 더욱 절박하게 된다. 제국주의의 중국 쟁탈이 일단 절박하게 되면 제국주의와 전체 중국 간의 모순, 제국주의자들 상호 간의 모순이 동시에 중국 경내에서 발전하며 따라서 중국의 반동적 통치배 각파 간의 나날이 확대되고 격화되는 혼전을 조성하게 되고 중국의 반동적 통치배 각파 간의 모순이 나날이 더 발전하게 된다. 반동적 통치배 각파 간의 모순―군벌의 혼전에 따라오는 것은 조세의 증가이고 조세의 증가는 광범한 납세자와 반동적 통치배 간의 모순을 나날이 발전시키게 된다. 제국주의와 중국 민족공업 간의 모순에 따라오는 것은 중국의 민족공업이 제국주의의 양보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고 이 사실은 중국 자산계급과 중국 노동계급 간의 모순을 발전시키게 된다. 즉 중국의 자본가는 노동자에 대한 필사적인 억압과 착취에서 자기들의 출로를 찾게 되고 중국의 노동자는 이에 저항하게 된다. 제국주의의 상품에 의한 침략, 중국 상업자본의 침식, 정부의 조세의 증가 등에 따라오는 것은 지주계급과 농민 간의 모순의 가일층의 심각화이다. 즉 소작료와 고리대에 의한 착취가 더욱 가혹하여지고 농민은 더욱더 지주를 증오하게 된다. 외국 상품의 압박, 광범한 노농 대중의 구매력의 고갈, 정부의 조세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국산품 상인과 독립적 생산자는 파산의 일로를 걷게 된다. 반동정부가 군량과 비용이 부족한 조건하에서도 무제한으로 군대를 증가하고 또 이에 따라 전쟁이 나날이 더 많아져서 병사 대중은 항상 곤경에 빠져 있게 된다. 국가의 조세의 증가, 지주의 소작료 및 이자의 인상, 전쟁 재난의 확대 등으로 인하여 재해와 토비난리(土匪亂離)가 전국적으로 만연되어 광범한 농민과 도시 빈민들은 아사선상에서 신음하게 된다. 돈이 없어서 학교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재학생들은 실학할 우려가 있고 생산이 낙후하기 때문에 수많은 졸업생들은 취직할 가망이 없다. 만약 이상의 모순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중국이 얼마나 한심한 국면에 처하여 있으며 얼마나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제, 반군벌, 반지주의 혁명의 앙양이 불가피적이라는 것과 그것이 곧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국은 온 나라가 마른 나무로 뒤덮여 있으니 곧 세찬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한 점의 불꽃이 들판을 태울 수 있다’는 말은 시국의 발전을 적절히 묘사한 것이다. 허다한 지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농민들의 폭동, 병사들의 반란, 학생들의 동맹 휴학 등이 발전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한 점의 불꽃’이 ‘들판을 태울 수 있는’ 날이 틀림없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술한 것은 작년 4월 5일에 중앙에 보낸 전적위원회(前敵委員會)의 서한에 이미 그 대의가 서술되어 있다. 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중앙은 이 서한(1929년 2월 7일부의)에서 객관적 정세와 주관적 역량을 너무나 비관적으로 평가하였다. 정강산에 대한 국민당의 3차 ‘토벌’은 반혁명의 초고조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까지였고 그 후부터 반혁명의 조류는 점차 퇴조되고 혁명의 조류가 점차 고조되고 있다. 당의 전투력과 조직력이 중앙에서 지적한 그 정도까지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반혁명의 조류가 점차 퇴조되는 정세하에서 그 회복이 반드시 빠를 것이며 당 간부들의 소극적인 태도도 곧 없어질 것이다. 대중은 반드시 우리 편에로 쏠릴 것이다. 학살주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기를 깊은 못으로 쫓아 버리는 것과 같으며 개량주의도 더는 대중을 끌 수 없게 되었다. 국민당에 대한 대중의 환상은 반드시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장래의 정세하에서는 어떠한 정당도 공산당과 군중을 쟁탈하지 못할 것이다. 당 제6차 대회에서 제시한 정치 노선과 조직 노선은 옳은 것이다. 즉 혁명의 현 단계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권주의이며 당의(주: ‘큰 도시에서의’라는 몇 자를 첨가하여야 할 것이다) 당면 과업은 즉시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쟁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발전이 매우 빠를 것이므로 무장폭동에 대한 선전 및 준비에 있어서 적극적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대혼란에 빠져 있는 현 정세하에서는 적극적인 구호와 적극적인 태도로써만 대중을 영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의 전투력의 회복도 반드시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여야만 가능하다. … 무산계급의 영도는 혁명 승리의 유일한 열쇠이다. 당의 무산계급적 토대를 확립하며 중심 지역에 산업지부를 창설하는 것은 조직 사업면에서 당의 당면한 중요한 과업이다. 그러나 동시에 농촌에서의 투쟁을 발전시키며 작은 지역의 홍색정권을 창설하며 홍군을 창건, 확대하는 것은 특히 도시에서의 투쟁을 원조하며 혁명 조류의 앙양을 촉진하는 주요 조건으로 된다. 그러므로 도시에서의 투쟁을 포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농민의 세력이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장차 노동자의 세력을 능가하여 혁명에 불리하게 될 것이라고 여기는 이러한 견해가 당원들 가운데 존재한다면 이것도 역시 잘못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반식민지인 중국의 혁명은 오직 농민투쟁이 노동자의 영도를 얻지 못하여 실패할 수는 있어도 농민투쟁이 노동자의 세력을 능가하였다 하여 혁명 자체에 불리하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서한은 홍군의 행동 전술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답을 하였다.
중앙에서는 우리들에게 홍군을 보전하며 대중을 발동시킬 목적으로 부대를 아주 작은 단위로 나누고 농촌에 분산하며 주덕, 모택동이 부대를 떠나고 큰 목표를 감추라고 하였다. 이것은 실제에 맞지 않는 생각이다. 연(連) 또는 영(營)을 단위로 하여 단독적으로 행동하면서 농촌에 분산되어 유격 전술로써 대중을 발동시키며 목표로 되는 것을 피하는 등은 우리들이 1927년 겨울부터 계획도 하여 보았고 또 여러 차례 실시도 하여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주력 홍군은 지방 적위대와 그 내력이 달라 대부분이 당지 사람들이 아니다. (2) 작은 단위로 나누면 지도자가 불건전하고 악렬한 환경에 대처할 수 없게 되어 실패당하기 쉽다. (3) 적에게 각개 격파당하기 쉽다. (4) 악렬한 환경일수록 부대를 더 집중하여야 하며 지도자가 더 견결히 분투하여야 한다. 그래야 내부를 단결시켜 적을 대처할 수 있다. 오직 좋은 환경에서라야 병력을 분산하여 유격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지도자도 악렬한 환경에서처럼 한시도 떠날 수 없는 일이 없게 된다.
이 단락의 결함은 병력을 분산하여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모두 소극적인 데 있다. 이것은 매우 불충분하다. 병력을 집중하는 적극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집중함으로써만 좀 큰 적을 소멸할 수 있으며 도시를 점령할 수 있다. 좀 큰 적을 소멸하며 도시를 점령함으로써만 대중을 큰 범위에서 발동시키고 몇 개 현(縣)이 한데 연결된 정권을 수립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원근 각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으며(이것이 정치적 영향의 확대라는 것이다) 혁명의 앙양을 촉진함에 있어서 실제적 효력을 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재작년에 수립한 호남-강서 접경지대의 정권이나 작년에 수립한 복건성 서부의 정권은 모두 이러한 병력 집중 정책의 결과이다. 그러면 병력을 분산할 경우는 없는가? 그런 경우도 있다. 전적위원회에서 중앙에 보낸 서한에는 홍군의 유격 전술이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근거리 병력 분산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들이 지난 3년 동안의 투쟁에서 얻은 전술은 실로 동서고금의 전술과는 다 다르다. 우리의 전술을 사용하면 군중투쟁이 날로 넓게 발동되며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전술이란 바로 유격 전술이다. 그것을 요약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병력을 분산하여 군중을 발동시키고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대항한다’, ‘적이 진공하면 우리는 퇴각하고 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교란하고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 ‘고정구역의 할거에 있어서는 파상식 추진 정책을 쓰며 강한 적이 뒤를 따를 때에는 선회식 선환 정책을 쓴다’, ‘최단기간 내에 최선의 방법으로 최대의 군중을 발동한다’. 이러한 전술은 마치 그물을 치는 것과 같아서 수시로 쳐야 하며 수시로 걷어야 한다. 그물을 치고는 군중을 쟁취하고 걷고는 적에 대항한다. 지난 3년 동안에 사용한 것은 모두 이러한 전술이었다.
여기에서 ‘그물을 친다’고 하는 것은 근거리 병력 분산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남-강서 접경지대에서 1차로 영신을 점령하였을 때 제29단(團)과 제31단은 영신현 경내에서 분산하였다. 또 제3차로 영신을 점령하였을 때 제28단은 안복현 변경으로, 제29단은 연화로, 제31단은 길안현 변경으로 각각 분산하였다. 또 작년 4-5월의 강서성 남부 각 현에서의 병력 분산이나 7월의 복건성 서부 각 현에서의 병력 분산과 같은 것도 그 실례이다. 그리고 원거리 병력 분산은 두 가지 조건, 즉 비교적 좋은 환경과 비교적 건전한 지도 기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병력 분산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대중을 쟁취하며 더 효과적으로 토지 혁명을 침투시키고 정권을 수립하며 더 효과적으로 홍군과 지방 무장력을 확대하는 데 있다. 그렇게 때문에 만약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병력 분산으로 인하여 도리어 실패를 당하고 홍군의 역량이 약화된다면, 예컨대 재작년 8월에 호남-강서 접경지대에서 병력을 분산하여 침주를 치던 때처럼 된다면 차라리 분산하지 않는 편이 낫다. 만약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었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병력을 분산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조건 밑에서는 분산하는 것이 집중하는 것보다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앙의 “2월 서한”의 정신은 좋지 못하다. 이 서한은 제4군 당 조직 내의 일부 동지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중앙은 장개석파와 광서파 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고 통고까지 내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의 중앙의 평가와 지시는 대체로 옳았다. 부당한 평가를 한 그 통고에 대하여서는 중앙에서 이미 통고를 내어 시정하였다. 홍군에게 준 이 서한에 대하여서는 시정은 하지 않았으나 그 후의 지시에는 그런 비관적 논조가 없어졌고 홍군의 활동에 대한 주장도 우리의 주장과 일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의 이 서한이 일부 동지들에게 준 좋지 못한 영향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하여 의연히 해석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년 내로 강서성을 탈취한다는 계획도 작년 4월에 전적위원회에서 중앙에 제출한 것이고 그 후 또 우도에서 이에 대하여 결정을 지었다. 당시에 지적한 이유는 중앙에 보낸 서한에 서술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개석파의 부대와 광서파의 부대가 구강 일대에서 서로 다가들고 있어 큰 전쟁의 폭발은 눈앞에 박두하였다. 군중투쟁의 회복과 반동적 통치배의 내부 모순의 확대에 의하여 혁명의 고조가 곧 닥쳐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사업을 배치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느낀다. 즉 남방의 몇 개 성 가운데 광동성과 호남성은 매판, 지주의 군사력이 너무 크고 더욱이 호남성은 당의 맹동주의적 오류로 말미암아 당내ㆍ외의 군중을 거의 전부 잃고 말았다. 그러나 복건성과 강서성과 절강성은 정세가 다르다. 첫째로, 이 세 성은 적의 군사력이 가장 약하다. 절강성에는 장백성(蔣伯誠)의 성 방위군이 좀 있을 뿐이다. 복건성에는 5개 부대에 14개 단(團)이 있지만 곽봉명(郭鳳鳴) 려(旅)는 이미 격파당하고 진국휘(陳國輝) 부대와 로흥방(盧興邦) 부대는 전투력이 매우 약한 토비 군대이며 해안에 있는 륙전대(陸戰隊) 두 려(旅)는 한번도 싸워 보지 못한 군대이므로 그 전투력이 틀림없이 강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장정(張貞) 부대가 비교적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나 복건성위원회의 분석에 의하면 그것도 전투력이 비교적 강한 부대는 두 개 단(團)뿐이다. 뿐만 아니라 복건성은 지금 통일되지 못하고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 강서성에는 주배덕(朱培德)과 웅식휘(熊式輝) 두 부대에 도합 16개 단(團)이 있는데 복건성과 절강성의 군사력에 비하면 강한 편이지만 호남성에 비하면 훨씬 못하다. 둘째로, 이 세 성에는 맹동주의적 오류가 비교적 적었다. 절강성의 형편은 잘 모르겠지만 강서성과 복건성의 당 및 대중의 토대는 호남성보다 나은 편이다. 강서성을 놓고 말하면, 강서성 북부는 덕안, 수수, 동고에, 아직도 상당한 토대가 있으며, 강서성 서부는 영강, 영신, 연화, 수천에, 당 및 적위대의 세력이 그냥 존재하고 있으며, 강서성 남부는 희망이 더 큰바 길안, 영풍, 흥국 등 현의 홍군 제2, 제4단(團)이 나날이 발전되고 있으며 방지민(方志敏)의 홍군도 소멸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남창을 포위하고 있는 형세가 형성되었다. 우리는 국민당 군벌들 간의 장기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에 장개석파와 광서파의 손으로부터 강서성을 탈취하며 동시에 복건성 서부와 절강성 서부에까지 손을 뻗칠 것, 이 세 성에서 홍군을 확대하고 대중할거를 조성하면서 1년을 기한으로 이 계획을 완수할 것을 중앙에 제의한다.
위에서 말한 강서성 탈취 계획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기한을 1년으로 규정한 점이다. 강서성을 탈취하려는 계획에는 강서성 자체의 조건 외에 또 전국적으로 혁명의 고조가 곧 닥쳐오리라는 조건도 고려되어 있다. 그것은 혁명의 고조가 곧 닥쳐오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1년 내에 강서성을 탈취한다는 결론을 도저히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제의의 결함은 기한을 1년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1년으로 규정한 데 있다. 이로 인하여 혁명의 고조가 곧 닥쳐오리라는 이 ‘곧’ 자(字)에도 약간의 조급성을 띠게끔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강서성의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주관적 조건은 중앙에 보낸 서한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거니와 객관적 조건에 대하여서는 지금 명백히 지적할 수 있는 점이 세 가지 있다. 첫째, 강서성의 경제는 주로 봉건적 경제이고 상업 자산계급의 세력이 비교적 작으며 지주의 무장력은 또 남방 각 성 중에서 제일 약하다. 둘째, 강서성에는 자체의 군대가 없고 본래부터 다른 성의 군대가 와서 주둔하고 있다. 다른 성에서 온 군대는 ‘공산당 토벌’, ‘비적 토벌’에 있어서 당지 사정을 모르고 또 본 성의 군대처럼 그렇게 이해관계가 절실하지 않으므로 흔히 성의가 그다지 없다. 셋째, 홍콩 곁에 있어 무슨 일이든지 거의 다 영국이 하라는 대로 하는 광동성과는 달라서 제국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점을 안다면 무엇 때문에 강서성의 농촌봉기가 다른 어느 성보다도 보편화되고 있으며 홍군 유격대가 다른 어느 성보다도 많은가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혁명의 고조가 곧 닥쳐오리라는 이 ‘곧’ 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은 많은 동지들에게 있어서 공통한 문제로 되고 있다. 맑스주의자는 점쟁이가 아니므로 미래의 발전과 변화에 대하여 대체적 방향만을 말하여야 할 것이며 또 대체적 방향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고 날짜와 시간을 기계적으로 규정하여서는 안 되며 또 규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중국 혁명의 고조가 곧 닥쳐오리라고 한 나의 말은 결코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닥쳐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같이 행동적 의의가 전혀 없는, 바라보기나 할 수 있을 뿐인 그런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안에 서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 저기 수평선에 이미 돛대가 보이는 배이며 높은 산 영마루에 서서 멀리 동녘 하늘을 바라보면 사방을 훤히 비추면서 막 솟아오르려는 아침 해이며 또 그것은 어머니 배 속에서 꿈틀거리며 미구에 태어나려는 어린아이이다.
1930년 1월 5일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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