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미 제국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침탈사 훑어보기(하)

 

 

김형균 | 회원, 철도노동자

 

 

[차례]

I. 미 제국에 대한 한국 인민의 인식

1. 해방 후

2. 80년 광주 민중 항쟁

 

II. 미 제국의 탄생과 성장

1.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의 무덤 위에 세워진 미합중국

2. 독립(반역) 전쟁의 진실(1776-1789)

3. 독립 후 영토 확장, 서부 개척 시대(1803-1848)

4. 남북 내전(1861-1865)

5. 대륙 횡단 철도(서부 개척) 건설과 원주민의 봉기

6. 제국주의 시대, 해외로 팽창(1800년대 중반 이후)

7. 제1차 세계 대전

8. 제2차 세계 대전

9.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미 제국의 세계 지배

 

III.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

쿠바,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니카라과, 과테말라, 파나마,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페루,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이티, 온두라스)

ㆍㆍㆍ <이상 (상)>

 

IV. 미 제국의 중동ㆍ아프리카 침탈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팔레스타인, 리비아, 콩고, 르완다, 수단, 소말리아, 앙골라

ㆍㆍㆍ <이상 (중)>

 

V. 미 제국의 동남아ㆍ태평양 침탈사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서뉴기니(혹은, 서파푸아), 하와이ㆍ괌ㆍ푸에르토리코ㆍ사모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한국)

 

VI. 자본주의와 함께 몰락하고 있는 미 제국

1. 전 세계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 미 제국

2. 위기에 처한 달러 패권

3. 임박한 파국에 직면한 미 제국

4. 경제 위기ㆍ달러 패권의 약화, 군사제국의 붕괴 위기

ㆍㆍㆍ <이상 (하)>

 

 

 

V. 미 제국의 동남아ㆍ태평양 침탈사

 

 

1. 필리핀

 

1521년부터 3백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아온 필리핀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독립에 눈뜨기 시작했다. 독립투쟁이 식민 통치권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자 1896년 스페인 정부는 호세 리살(José Rizal)을 공개 총살하며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그러나 아귀날도(Aguinaldo)가 결성한 지하조직 카티푸난 해방군의 투쟁은 전국 규모로 확산되었다.

 

1) 미 제국의 필리핀 점령

홍콩에 망명 중이던 아귀날도는 미국 함대와 함께 필리핀에 귀국하여 스페인 군대와 독립전쟁을 재개했다. 마닐라만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함대가 미군에 의해 격퇴된 직후인 1898년 6월 필리핀 독립을 선포했다.

한편 필리핀 독립투쟁에 개입한 미 제국은 이미 항복 상태에 있던 스페인과 파리조약(1898. 12.)을 맺으며 2,000만 달러의 권리금까지 얹어 주었다. 이를 통해 필리핀과 쿠바는 물론 푸에르토리코와 괌 등 식민 통치권도 함께 양수받았다. 스페인 군대가 항복을 선언한 1898년 8월 미 제국은 필리핀 해방군의 마닐라 진입을 금하는 등 점령군의 본색을 드러냈다.

미 제국의 침략에 맞서 필리핀 해방군도 1899년 1월 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미 제국을 상대로 해방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아귀날도의 국가 선포는 효력이 없으며 필리핀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마닐라에 주 사무소를 둔 필리핀 주재 미 점령군 사령부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마닐라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흩어진 필리핀 해방군의 대미 항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 해방 전사들의 치열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낙후한 전투력과 강ㆍ온파로 갈라진 지휘관들의 내분 때문에 그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어 갔다. 미 군정이 실시된 이후에도 민다나오 섬은 물론 루손 섬 남단의 비콜 지역 등지에서도 대미 항쟁이 이어졌고 형식적인 자치정부가 구성된 1946년 이후로도 민다나오를 근거지로 하는 이슬람계 게릴라의 대미 항쟁은 지속되어 왔다.

현재까지도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 등 이슬람 저항세력은 대미 종속적인 필리핀 정부를 상대로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미군이 필리핀을 점령한 이후 1946년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2) 미 제국의 독재 정부 수립과 비호

1946년 필리핀은 비록 형식적으로나마 독립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 마누엘 로하스(Manuel Roxas)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상ㆍ하 양원이 구성되었다. 개혁 인사에 대해서는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의회 진출조차 막았다.

개혁성향의 인사들을 배제한 가운데 필리핀 의회는 천연자원 개발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었다. 또 필리핀에 있는 23개의 군사기지를 99년 동안 미국에 조차하고 미국의 승인 없이는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할 수 없다는 내용의 군사주권 포기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막사이사이(Magsaysay)를 사령관으로 앉힌 뒤 시민군을 소탕하도록 지원했다. 이후 수만 명의 훅스(Huks) 관련 혐의자들이 살해되고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농촌 마을이 황폐화되었다. 미군정 치하에서부터 단정 수립 직후의 한국 사회와 동일한 모습이다.

개혁 성향의 인사를 축출하려는 공작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1998년 6월 대중혁명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가 첫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기득권 세력이 씌운 부패 올가미에 걸려 2001년 1월 권좌에서 쫓겨난 조지프 에스트라다(Joseph Estrada)의 경우가 그러하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축출하고 대통령에 오른 마카파갈 아로요(Macapagal Arroyo)는 각종 부패와 비리뿐만 아니라 선거부정까지 저질러 탄핵 위기에 몰렸다. 필리핀 소수 지배층은 전기ㆍ통신ㆍ건설 등 주요 산업을 독점하며 끊임없이 비리와 부패를 자행해 왔다.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대다수 필리핀 지배층은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한 돈을 미국 등 외국으로 빼돌렸다. 단적인 예가 바로 미 제국의 비호 아래 장기간 독재하며 모은 약 1,000억 달러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전 대통령 부처의 부패 행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아시아의 부국이던 필리핀이 오늘날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극빈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세계 각처에 나간 해외 노동자 수는, 2006년 필리핀 정부 통계에 의하면, 거의 1,000만 명에 달한다.

 

 

2.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석유와 고무 등 풍부한 천연자원과 2억 3,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동남아의 섬나라다. 13세기 경 스마트라 북부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왕국이 건설되어 오늘날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19세기 초부터 자바 전쟁과 아체 전쟁 등의 대규모 독립전쟁을 거쳐 1920년대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전국 규모의 노동조합이 결성됨으로써 반제국주의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네덜란드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독립혁명이 무산된 뒤로는 수카르노(Sukarno)를 주축으로 하는 국민당이 인도네시아 해방을 위한 비협조, 비폭력을 제창하여 크게 세력을 확장했다.

 

1) 수카르노의 비동맹 자주 노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일본군이 점령(1942. 3.-1945. 8.)했던 인도네시아는 종전과 함께 수카르노를 수반으로 하는 독립 국가를 수립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부정하며 지속적인 식민통치를 주장했고 이 때문에 양측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이에 대해 국제 사회는 네덜란드를 규탄하고 특히 인도네시아의 좌경화를 우려한 미 제국이 네덜란드를 강력히 압박하게 된다. 결국,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의 연방으로 둔다는 합의(1949. 12.) 후 직접지배를 포기했다. 그러나 1950년 8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연방제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네덜란드와의 종속 관계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350년 가까이 서구 제국의 지배를 받아온 인도네시아 역시 식민지 시절부터 기득권층으로 군림해 온 수구 우익세력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인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어 수카르노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수카르노는 미국과 쏘련을 상대로 등거리 외교를 전개하면서 비동맹 자주 노선을 추구했다. 또한, 1955년 4월 18일에는 반둥 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는 아시아ㆍ아프리카 신생 독립 국가들에게 비동맹 자주 노선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비동맹 노선은 조선의 김일성을 비롯해 베트남의 호치민,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 유고의 티토, 가나의 은크루마 등 각국 수반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국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 제국은 수카르노의 이러한 행보를 차단하기 위해 그를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반둥 회의는 제국주의 국가에 굴종해 온 약소국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했고, 1954년에 창설된 동남아조약기구(SEATO)의 취지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조약기구는 동남아 국가들을 미 제국의 패권 아래 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2) 미 제국의 반둥 회의 방해 테러

1955년 4월 11일 오전 승객 11명과 승무원 8명을 태우고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홍콩을 경유하여 자카르타로 향하던 인도 항공 소속 카시미르 프린세스 전세기가 인도네시아 상공에서 폭파되었다. CIA와 타이완의 장제스 정부의 소행으로 밝혀진 민항기 테러로 16명이 사망하고 3명은 해상에서 구조되었다. 승무원을 제외한 탑승객 모두는 반둥 회의에 참석하려고 자카르타로 향하던 중국(중공), 베트남, 오스트리아 등지의 대표단과 기자였다.

이 사건 직후 중국 정부는, 반둥 회의를 무산시키는 동시에 이 비행기에 탑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저우언라이 수상을 암살하려고 CIA와 타이완의 정보기관이 꾸민 짓이라고 발표했다. 뒤이어 기체 잔해를 인양해 사고 원인을 조사한 인도네시아 정부도 기내에 설치된 시한폭탄의 뇌관이 미국제(MK-3)이며, 이는 약소국을 침탈해 온 미 제국의 음모라고 밝혔다. 아울러 두 개의 시한폭탄은 사고 비행기가 홍콩에 잠시 머물 때 설치되었고 설치한 범인은 타이완 국적으로 사건 직후 CIA 전용기를 타고 타이완으로 도주했다는 사실도 홍콩 당국의 합동 조사에서 밝혀졌다.

 

3) 미 제국의 비열한 공작

그 뒤에도 수카르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은 계속되었다. 전 CIA 간부인 조지프 벅홀터 스미스도 1955년 인도네시아 선거 당시 미 정보기관이 수카르노의 민족주의당과 그를 지지했던 공산당을 몰아내려고 이슬람 정당인 마슈미 당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57년 11월 말에는 수카르노가 방문한 자카르타 시내의 시키니 구역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폭탄이 터져 6명의 학생이 현장에서 폭사하고 많은 어린이가 중상을 입었다.

미국 정부는 수카르노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1957년 말부터는 수카르노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비밀 군사작전(Haik 작전)에 돌입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닉슨 부통령이 주재한 비밀 국가안보위원회의 541/2호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실무 총괄을 담당한 CIA 부국장 와이스너는 싱가포르에 작전본부를 설치했다. 작전에 투입될 미군과 특공대, 수만 명에 달하는 현지 반군 용병들을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 다바오시 외곽기지에서 훈련을 받았다. 병력을 실어 나를 C-54s 수송기와 공중 폭격에 사용될 B-26 소형 폭격기, 그리고 4만 2,000정의 라이플 소총과 2,800기의 토우 미사일 등 각종 화기는 타이완, 필리핀,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조달했다.

1958년 2월 9일 미군의 지시를 받은 인도네시아인 말루딘 심보론(Maluddin Simbolon)은 수마트라 혁명위원회를 구성한 뒤 수마트라 섬을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시켜 새 정부를 구성한다는 성명과 함께 반란을 선언했다. 미군의 엄호 공습과 해상 지원에도 불구하고 나수티온(Nasution) 장군(그는 후일 수하르토(Soeharto)와 함께 친미 쿠데타를 주도한다)이 이끄는 반란군은,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밀려 끝내 궤멸한다.

반란군을 앞세운 미군의 작전이 실패하자 미국은 직접 폭격기를 보내 여객선과 이슬람 사원과 시장까지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한다.1) 이러한 폭격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는데, 마카사르 해안을 저공비행하다가 인도네시아 해군 대공포에 격추된 폭격기 조종사 엘런 포프(Allan L. Pope)가 휴대한 신분 증빙 자료를 입수하게 되면서 미 제국의 테러 행위는 꼬리가 밟히게 되었다.2)

결국,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수천만 달러를 배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는 1963년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을 탈퇴하고 쏘련 및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비밀 군사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 제국은 그 원인을 인도네시아 군부의 충성심에 있다고 파악했다. 따라서 수카르노를 상대로 한 정면돌파 전략에서 인도네시아 군부를 분열시키고 친미 지휘관을 양성하는 우회 전략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군 지휘관들의 자질을 향상시킨다는 명분으로, 연간 200명 이상의 인도네시아군 장교를 미국에 초청하여 교육했다. 유사시 이들을 이용해 수카르노 지지층인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세력을 발본하고 나아가 수카르노를 제거하겠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Guardian, 1966. 4. 7.). 1963년 인도네시아의 유엔 탈퇴로 미 상원에서 원조를 중단하기로 결의한 뒤에도 미 행정부는 친미 우익 군부를 양성하기 위한 위탁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힘을 쏟았다(UN NSC 회의록, 1960. 12. 19.).

 

4) CIA의 공작과 우익 쿠데타 배경

수카르노 대통령의 유엔 탈퇴 선언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을 부정하는 것이자 미 제국의 약소국 줄 세우기에도 도전하는 일이었다. 수카르노에 동조하는 제3 세계 국가들의 동반 탈퇴를 초래할 수도 있는 중대한 사태였다. 특히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있던 미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쏘련과 중국 다음으로 많은 약 300만 명의 공산당원과 1,500만 명 이상의 동조 세력을 보유한 인도네시아의 반제국주의 행보는 인도차이나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미 제국은 이에 대응해 친미 군부를 양성하여 이들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와해시킨다는 목표 아래 각종 비밀공작을 벌였다. 여기에는 군부세력 사이의 상호 견제와 반목을 조장하고 또 친미 장성들 사이에도 충성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각종 전술이 있었다. 이는 수하르토의 쿠데타에 얽힌 복잡한 배경과 쿠데타 발생 반년 전부터 CIA가 유포한 것으로 알려진 루머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 사례로 당시 말레이시아의 친미 정치인 채룰 살레는 기자회견을 통해 출처 불명의 자료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인도네시아 우익 장성 협의회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분쇄하려는 모종의 공작을 꾸미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우익 군부를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려고 중국에서 다량의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루머는 날이 갈수록 구체성을 띠었다.

우익 군부가 과연 그런 비밀 회동을 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중국에서 다량의 무기를 밀반입했다는 설은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조작된 루머였다. 이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원들이 군부에 의해 학살당하는 과정에서 전혀 무장 저항을 하지 않았고 밀반입된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해 준다. 이 모든 과정은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CIA가 유포한 괴문서 사건과 흡사하다.

이러한 CIA의 개입 징후는 1976년 수하르토에 대한 록히드사의 뇌물 공여 사실을 조사하던 미 상원 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서도 드러났다. 쿠데타 발생 5개월 전인 1965년 5월 초 록히드사는 군용기를 구매하려고 미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군 간부들 가운데 수하르토에게 구매 커미션으로 일정액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상관인 합창의장과 국방장관을 제쳐 두고 굳이 수하르토에게 뇌물 공여 의사를 밝힌 것은, 최고위 장성 가운데 그만이 직속 부대를 관장하고 있는 친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주재 경제 담당 영사는 수하르토에게 커미션을 전달한 이면에는 모종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는 수하르토의 쿠데타와 미국 정부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음을 뜻하는 단서다(San Francisco Chronicle, 1983. 10. 24.).

 

5) 수하르토의 쿠데타와 민간인 학살, 그리고 미 제국의 역할

1965년 10월 1일 새벽, 6명의 우익 군 장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수카르노 경호부대 소속 운퉁(Untung) 중령 등 중 하급 지휘관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수카르노의 지시나 사전 양해 때문에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군부 내에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발생한 것인지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사건 직후 기동타격대 사령관을 맡고 있던 수하르토 장군은 이를 즉각 공산주의자의 쿠데타로 단정하고 각종 매체를 통해 공산주의자의 잔혹성을 선전하면서 정적 제거에 나섰다. 그는 먼저 대통령을 대통령 궁에 연금하고 평소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던 고위 관료와 군 지휘관을 처형했다. 이어서 공산당원 색출을 명분으로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만에 약 100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했다.

수하르토의 쿠데타 성공 직후 미 정보기관이 핵심 좌익 5천 명의 명단을 수하르토 군부에 넘겨주었고, 이들의 학살 여부를 사후에 확인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희생된 사람들은 주로 영세 소작농 등 기층 민중이 주류를 이루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원들과 이들의 무고한 희생에 동정을 보내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다.

 

6) 미 제국의 병기들

자국민을 학살하는 광란을 끝낸 수하르토는 자국을 방문한 포드 대통령 일행에게 한 해 동안 1만여 명의 좌익분자를 죽였다고 자랑했다. 미 제국의 충견이 된 수하르토는 과거 수카르노 시절에 국유화한 유전 지대 및 광산 등을 미국과 네덜란드 등 서방 기업들에게 넘겨주었다.

 

 

3. 동티모르

 

티모르 섬은 16세기 후반부터 동서로 나뉘어 각각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 직후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함께 그 일부로 병합되고, 동티모르는 1975에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비호를 받아온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부는 독립의 감격에 젖어 있던 동티모르를 무단 침공하여 20만 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한 뒤 이듬해인 1976년 이곳을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선포했다.

 

1) 미 제국의 동티모르 학살 지원

1975년 12월 유엔 안보리는 모든 국가는 동티모르 인민의 양도 불가한 자결권과 그들의 영토권을 존중해야 한다라며 인도네시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은 기권했을 뿐만 아니라 유엔 회원국들에 압력을 행사해 제재 결의를 방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은 미 제국의 지원과 비호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001년에 비밀이 해제된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들을 간추려 보자.

1975년 12월 초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방문했다. 그때 수하르토가 동티모르를 무력 점령하는 것에 대해 미국 대통령의 의중을 물었다. 포드는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이해한다. 미국은 이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답변을 했다. 이어 키신저 국무장관은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충분히 알겠다. 미국제 무기를 사용하면 자칫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우리가 떠난 뒤 신속하게 해치우는 것이 좋겠다. … 우리도 이 문제에 최선을 다하겠다. … 당신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우리도 주변에 함구를 지시하겠다(National Security Archive)며 적극적인 협조 의사를 표명했다. 당시 유력 일간지와 대담을 한 미 국무부 한 고위 관리는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위해서나 … 미국과 인도네시아 사이에는 여러 사업도 있기 때문이라며 동티모르 주민 학살에 미국이 지원한 사실을 시인했다(Washington Post, 1979. 11. 9.). 뿐만 아니라 미 제국은 학살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99년까지도 필요한 무기를 인도네시아에 공급했다.

 

2) 동티모르 독립

무려 25년이나 계속된 독립투쟁 끝에 1999년 8월 20일 유엔 선거 감시단의 감독 아래 동티모르의 독립을 묻는 주민 투표가 시행되었다. 그 결과 주민의 78.5%가 독립을 찬성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동티모르 전역에서는 인도네시아군과 그 수하의 민병대에 의해 자행되는 강간ㆍ방화ㆍ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1999년 4월 리퀴차 성당 학살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동티모르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만행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1975년부터 25년 동안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학살된 동티모르인은 최소 6만에서 20만으로 추정되고 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02년 4월 동티모르는 샤나나 구스망(Xanana Gusmão)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21세기의 첫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에 이르기까지 동티모르 주민들이 겪은 정확한 피해 규모와 희생자 수 등은 미 제국의 공공연한 방해 등으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 제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 온 인권과 인도주의는 상투적인 정치 선전에 불과할 뿐 그들이 추구하는 진짜 가치는 물질적인 탐욕과 패권의 추구이다.

 

 

4. 서뉴기니(혹은, 서파푸아)

 

뉴기니 섬(동경 141도를 기준으로, 동부는 파푸아뉴기니, 서부는 인도네시아 영토(서뉴기니))은,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섬(785,753㎢)으로 한(조선)반도 전체 면적(220,847㎢)의 3배가 넘는다. 금과 구리의 매장량은 세계 최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원유와 천연가스의 매장량 또한 엄청나다. 19세기 중반 이후 남동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로, 북동 지역은 독일의 식민지로, 서쪽은 네덜란드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후 100년 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아온 서파푸아는 1952년 유엔 결의에 따라 독립국 수립에 착수했다.

1959년에는 정부 수립을 위한 원주민 대표단이 선출되고, 1961년에는 주민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로 구성된 첫 의회가 열렸다. 1971년 서파푸아 독립운동가들이 서파푸아 공화국의 독립을 다시 선포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1970년 이 지역을 군사작전지역으로 지정해 독립운동을 군사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120만 명 이상의 인도네시아인을 이주시켜 식민화하고 있다.

 

1) 미 제국의 서파푸아 독립 방해

2차 대전 직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는, 과거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인도네시아로 귀속되어야 한다며 서파푸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유엔은 서파푸아를 자주독립국으로 만든다는 결의를 했고, 과거 종주국이던 네덜란드도 서파푸아 독립을 지원하며 인도네시아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나 미 제국은 이해관계가 완전히 달랐다. 1960년대 초부터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고, 인도차이나반도에 이어 동남아의 대국 인도네시아마저 좌경화된다면 동남아에 대한 미 제국의 패권 전략은 큰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파푸아를 마치 제 것처럼 인도네시아에 넘겨주고 인도네시아의 공산화를 억제하는 지렛대로 이용했다. 또 그 대가로 서파푸아의 금광 등 지하자원에 대한 독점 채굴권도 챙겼다.

미국과의 빅딜로 힘을 얻은 인도네시아는 특공대를 투입해 국가 수립을 준비하던 서파푸아 의회 대표들을 감금ㆍ고문하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에 네덜란드 정부에서 서파푸아를 지원하고 나서자 미국 정부는 네덜란드 쪽에 손을 떼라고 강요했다.

이런 내용은 1962년 4월 2일 케네디 대통령이 드 콰이(De Quay) 네덜란드 수상에게 보낸 비밀 서신과 미국 정부의 동남아 관련 외교문서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3) 미국은 만약 네덜란드가 유엔의 결의 사항을 내세워 서파푸아뉴기니의 자주독립을 강행한다면 인도네시아는 쏘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활동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단지 서파푸아뉴기니뿐만 아니라 타이를 포함한 주변국의 안보에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 제국의 강권에 대해 네덜란드는 서파푸아를 일정 기간 신탁 통치한 뒤에 주민의 뜻을 물어 인도네시아 병합 여부를 결정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미국의 제안에 반대하여 네덜란드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미국은 네덜란드의 신탁 통치안 대신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가 철수하고 유엔 임시행정관의 관리 아래 주민들의 뜻을 따라 정부 수립 여부를 결정하자고 자유 선택안(Free Choice)이라는 속임수를 제시했다.

미국의 제안대로 1962년 8월 15일 미국,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사이의 뉴욕협정이 발효되어 네덜란드가 철수하고 미국이 세운 유엔 행정관이 들어왔다. 그러자 인도네시아는 즉각 전투부대를 파견하여 원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5월에 인도네시아는 유엔 행정관이 철수하자 파푸아 의회를 해산하고 지도자를 감금ㆍ살해한 뒤 사전 각본대로 서파푸아를 자국에 귀속시켰다.

이처럼 폭압적인 방법으로 신생 독립국 서파푸아뉴기니가 인도네시아의 부속 섬으로 강제 병합되었음에도 유엔은 이를 외면했다. 인도네시아군의 침공에 서파푸아 인민이 저항했으나 현지 주민이 가진 무기는 낫, 창, 손도끼, 활, 그리고 구식 소총이 전부였다.

 

2) 미국 기업의 자원 착취

미 제국은 1967년 이미 인도네시아로부터 서파푸아의 금광과 구리 광산에 대한 30년 독점 채굴권을 획득하여 대대적인 작업이 시작했다. 30년 채굴 기한이 다가오자 또다시 30년을 연장했다. 매장량 세계 1위의 금과 구리,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각종 천연자원은 프리포트 맥모란을 비롯한 세계적인 규모의 광산 업체와 유니온, 텍스코, 엑슨 모빌, 쉘, 아집 같은 굴지의 정유 회사들이 독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원주민들에게 많은 일자리가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맥모란 종업원 1만 8,000명 가운데 현지인은 잡급직 11%에 불과하다. 무차별 개발로 만년설이 쌓여 있던 산봉우리는 하나둘 사라졌다. 광산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독성 화학 물질과 중금속 폐수가 그대로 방류되는 바람에 인근 하천은 물론 근해까지 오염되었다. 인근 연안 어획량도 지역에 따라 50-80%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강압에도 서파푸아 주민들의 독립 요구가 계속되었다. 2000년 새 국가 서파푸아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는 주민대회가 인도네시아 정국을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미 제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주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국의 이해득실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실이다.

 

 

5. 하와이ㆍ괌ㆍ푸에르토리코ㆍ사모아

 

1) 하와이

(1) 하와이 탈취의 첨병, 개신교 선교사들

8개의 큰 섬과 13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 하와이는, 영국의 영향력 아래 1810년 단일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그렇게 입헌 왕국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하와이를 파멸시킨 자는 바로 미 제국의 첨병 역할을 해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다.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미국인들은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터를 빼앗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뉴잉글랜드 기독교연합 소속 선교사 6명과 소수 상인이었다. 이후 하와이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여 1850년경에는 선교사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 1849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사이에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75년 양국의 관세조차 철폐됨에 따라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미국의 농장주와 이들이 불러들인 아시아계 노동자의 이민이 급증했다.

 

(2) 하와이 왕국을 무력으로 전복과 합병

그 뒤 미국은 자국의 경제 공황을 이유로 하와이 농산물에 대한 무관세 조치를 취소했다. 1891년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 농장주들의 면세 혜택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여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 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해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졌다.

1893년 1월, 마침내 미국 스티븐스 장관은 하와이 왕국의 전복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하와이에 대기하고 있던 미 전함 보스턴호의 해병대원 약 200명과 선교사 등 현지 미국인들은 하와이 왕궁을 점령하고, 왕국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워 대리 정권으로 교체했다. 결국, 1897년 6월 16일 미국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조약을 체결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했다.

 

(3) 전복 100주년에 채택한 사과 결의안과 독립 목소리

1993년 11월은 간악한 계략과 폭력으로 하와이 왕국을 전복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미국 의회는 제103회 상ㆍ하원 합동회의에서 하와이 왕국의 주권과 원주민의 자결권을 침해한 사실을 시인하고, 이를 사과하는 공식적인 결의안(결의안 제1923호)과 함께 미 공법 제103-150호를 의결 공포했다.4)

사과 결의안으로 이름을 붙인 미 정부의 공식 사과 이후 하와이 원주민의 후손들 사이에는 오히려 독립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침공과 미국이 세운 임시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 합병조약은 무효라는 것이다. 더구나 영토를 규정하는 자연법과 국제법 등의 사례를 고려할 때, 가장 인접한 미국 본토의 로스앤젤레스에서 2,600마일이나 떨어져 있으며 중간이 공해라는 사실로도 하와이를 미국의 영토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노이 주립대 로스쿨의 프랜시스 보일(Francis Boyle) 교수는 2004년 12월 28일에 열린 강연회에서 미국이 하와이를 적법하고 정당하게 취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와이 역사가 미국 역사의 일부라는 미국 정부의 주장은 억지라고 단정했다. 또 ≪트리뷴 헤럴드≫의 피터 수르(Peter sur) 논설 주간은 과거 프랑스는 알제리를 자국 영토의 일부로 선포했으나, 본국과의 지정학적 이질성으로 인해 국제법상 프랑스 영토로 인정받지 못하자 알제리 독립을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4) 왕조 전복 123년 만에 자치정부 수립

하와이주를 대표해 대니럴 아카카 전 상원의원이 의회에서 하와이 원주민의 자치정부 설립을 인정해 달라는 아카카 법안을 10년 이상 주창했지만 번번이 표결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지원으로 2016년 9월 24일, 하와이 원주민의 자치정부 수립을 승인한 규정을 마무리되었다.5) 물론 자치정부 수립이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괌ㆍ푸에르토리코ㆍ사모아

미국의 해군기지이자 관광휴양 도시인 괌의 법적 지위는 하와이보다 못한 실정이다. 괌은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과 쿠바를 빼앗으며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덤으로 넘겨받은 뒤 지금까지 미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다. 비록 1950년부터 자치령으로 선포되어 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이 주어지기는 했으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는 식민지에 불과하다.

2008년 5월 하와이 대표와 함께 유엔 총회 경제사회이사회 원주민 포럼에 나온 괌 주민 줄리안 아권(Julian Aguon)은 괌에 대한 미 제국의 식민지 정책 폐지를 요구했다. 그녀는 괌의 해군기지로 인해 원주민이 겪고 있는 고통과 인권유린 실태를 성토했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푸에르토리코 역시 괌과 같은 역사를 갖고 있다. 인구 400만 명 중 대다수는 과거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의 후손들이다. 이들의 법적 지위 역시 모호하다. 미국 시민이면서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고 자치권은 있으나 그들의 대표는 미 의회의 일원이 될 수도 없다. 이에 대해 미 연방법원은 미국 영토에 편입되지 않은 미국 영토라는 궁색한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하와이와 뉴질랜드 사이의 태평양에 위치한 사모아 역시 현재까지도 미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다.

민주주의를 마치 전매특허처럼 이용해 온 미 제국은, 21세기 들어서도 자치령이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으며, 남의 땅을 강제 병합한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반환하지 않고 있다.

 

 

6. 베트남

 

베트남은 18세기 중반에 지금의 호찌민시(사이공)까지를 병합한 왕국을 이루고, 19세기 초에 현 베트남 반도 전체를 통일한 단일 왕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로마 가톨릭 선교사 박해 사건을 구실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 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트남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통치하였다.

1943년 11월 하순, 미ㆍ쏘 정상은 2차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테헤란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는 과거의 식민지를 회복하려는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역시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복원을 희망한다고 운을 띄었다. 쓰딸린은 연합국들이 다시 피를 흘릴 수도 있는 식민지 회복 정책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면서, 과거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종전과 함께 해방되어 각기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1) 베트남 전쟁의 비극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그동안 식민 지배를 받아온 제3국들을 해방하기로 한 루스벨트와 쓰딸린 사이의 확약을 무시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복원을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은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킨다는 구실로 베트남을 북위 16도로 나누었다. 그리고 장제스의 중국군과 영국군에게 북부와 남부 지역을 접수케 했다. 특히 남부 베트남에는 애초 16도 분할을 합의한 포츠담 회담의 내용에도 없는 영국과 프랑스 혼성부대를 들여보냈다. 프랑스의 식민지 복원을 통해 인도차이나를 간접 지배하려는 미 제국의 의도가 드러난 것이다.

한편 베트민(Việt Minh, 월맹)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 일본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수했다. 이러한 무혈혁명을 거쳐 1945년 9월 초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점령군과 베트민 정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프랑스는 베트민 정부의 저항을 차단하고자 특별한 제안을 한다. 그것은, 북부 베트남의 군사ㆍ외교ㆍ재정ㆍ의회 구성권을 존중하며, 과거 식민지 시절 안남(남부 베트남)과 통킹(북부 베트남)으로 분리된 베트남을 통합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협조하겠으니, 베트남 전역을 프랑스 연방에 편입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46면 3월 6일, 북베트남(베트민)과 프랑스는 프랑스 연방 결성에 합의하고, 뒤이어 3월 18일에는 영국과 프랑스 혼성부대가 점령하고 있던 남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도 형식적인 협정이 체결되었다.6)

이 협정을 통해 합법적인 주둔권을 확보한 프랑스는 과거 자신의 토착 동맹세력이었던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복귀시키고 내무대신에 응오 딘 디엠(Ngô Ðình Diệm)을 비롯하여 프랑스와 일제 통치에 충견 노릇을 했던 군과 경찰 등을 다시 자리에 복귀시켰다. 이러한 프랑스의 식민 통치 계략에 대한 북베트남의 반발이 고조되자, 프랑스는 하노이와 하이퐁 등을 무차별 공습하여 1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에 북베트남 지도부는 산간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 프랑스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이때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트루먼과 미 국무부에 8차례 서신을 보냈다. 이는 호찌민의 착각이었다. 호찌민 역시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미국을 정의의 사도로 오인한 것이다. 미국은 호찌민의 간청에 대해 베트남 민족에게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50년 동안 서구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면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 통치를 옹호했다.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북베트남과 이를 막으려는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었는데 프랑스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 제국이 프랑스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자신이 전면에 나섰을 때 국제 사회 비난과 쏘련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1951년 1월 11일의 제100회 국가안보위원회 회의록과 같은 해 1월 말에 개최된 트루먼 대통령과 프랑스 르네 플레뱅(René Pleven) 총리의 회담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미 제국은 프랑스를 통해 인도차이나반도를 간접 지배함으로써 동남아와 서남아 국가들의 민족주의 도미노 현상을 차단하고, 아울러 미 제국의 패권을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또 석유를 비롯한 상당량의 천연자원과 풍부한 노동력을 착취하려면, 민족 자결을 주장하는 북베트남 정부를 전복해야만 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인도차이나를 재침하고 아프리카 식민지를 관리했다. 실제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소요된 비용의 80% 이상을 미국이 부담했으며 참가한 프랑스 병력의 대다수는 아프리카 식민지 및 인도차이나 지역의 프랑스 연합군과 여러 나라의 용병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였다.

이러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패배를 거듭하자 미 제국은 한(조선) 전쟁을 끝내면서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통제ㆍ관리하기 시작했다. 동남아조약기구 구축과 인도차이나에 대한 직접 개입이 그것이다(NSC Report, 1954. 4. 26.). 미 제국은 베트남 정글에서 빠져나오려는 프랑스를 묶어 두고자 4억 달러의 지원금을 약속했는데, 그 이유도 바로 약소국 침탈을 통하여 부와 패권을 지키려는 미 제국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발언, 1953. 8. 4.).

 

3) 디엔 비엔 푸 전투

디엔 비엔 푸 전투는 1954년 3월 중순에 시작하여 5월 초까지 50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투는 사상자가 4만 명에 이를 정도로 격렬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군이 패배를 거듭하며 전의를 잃어 가던 1953년 후반부터 1만 6,000명의 증원군과 각종 보급품을 디엔 비엔 푸의 전장으로 공수했다. 각종 화기는 물론 전함과 폭격기까지 제공하며 프랑스의 패배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편 호찌민은 프랑스군이 항복했다며 기뻐하는 지압 장군을 보면서 이는 작은 승리일 뿐이다. 이제 미국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라면 미국의 직접 개입을 예측했다.

 

4) 미 제국의 제네바 협정 파기 공작

제네바 회담은 북부 베트남, 남부 베트남, 프랑스, 캄보디아, 중공, 쏘련, 영국, 미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5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열려 7월 20일 최종 서명을 마쳤다.

그 내용은,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잠정 분단한 뒤, 1956년 7월 이전까지 국제 감시위원단 아래 남북 베트남의 동시 총선거를 실시한다. 지역 내 모든 국가와 각종 무장단체의 적대 행위를 종식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군과 관련 인원을 철수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신규 진입 및 무기 반입도 금지한다. 아울러 지역 내 무력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국과의 군사 동맹을 금하고, 상호 합의된 기한 안에 프랑스 군대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협정 체결에 강력히 반발하여 서명을 거부했고, 외세의 비호 없이는 지탱할 수 없던 남부 베트남 정부 역시 미 제국과 행동을 같이했다. 1954년 5월 6일 제195차 국가안보위원회를 주관하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협정의 내용을 수용한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며 적극적인 무력 개입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1954년 5월 9일 본스틸 준장은 국방부 차관에게 프랑스에 가능한 모든 압력을 행사하여 제네바 협상을 중단시켜야 한다. … 점증하는 쏘련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인도차이나에 대한 무력 개입을 포기할 경우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미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미국은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한편 지역 분쟁을 지속시킴으로써 협정이 파기되도록 비밀 테러공작에 착수했다. 주요 공작으로는 북베트남 민심을 교란하고 교량, 항만, 상수도, 발전소 등 주요 시설을 파괴하며, 아울러 요인 암살 등을 위한 테러리스트도 양성했다. 또한, 북부 베트남의 대중교통을 마비시키려고 버스의 엔진오일에 이물질을 혼합하고, 열차 선로를 파괴하는 등의 사보타지 공작도 전개하며, 제네바 협정에 명백히 금지된 살상 무기를 반입했다.7)

 

5) 미 제국의 베트남 분단 공작

1954년 7월 베트남이 제네바 협정에 따라 1956년 7월에 실시하기로 한 총선을 준비하자, 미 제국은 제네바 협정이 베트남 주민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제네바 협정에 명기한 시기보다 1년 앞선 1955년 10월에 북위 17도선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강행하여, 고 딘 디엠을 수반으로 하는 대리 정부를 수립했다. 남부 베트남 정부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 지배 당시의 충견들이었다.

응오 딘 디엠은 남부 베트남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분단의 고착화를 위해 공산주의자는 물론 민족주의자와 반미주의자 등 반체제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그 수는 1957년 한 해에만 1,000여 명에 달했다. 이에 학생과 지식인들이 반정부 운동이 전개되고 여기에 승려들이 합세하여 분신자살 행렬로 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민중의 저항은, 1960년에 이르러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본격적인 무력투쟁으로 이어졌다.

케네디는 1961년 5월 5일과 이듬해 2월 14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게릴라의 공격에서 남베트남을 지키기 위해 전투부대의 파병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내용은 1961년 5월 13일에 케네디의 친서를 가지고 남베트남을 방문한 존슨 부통령에 의해 재천명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병력은 1962년에 1만 2,000명으로 늘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1만 5,000명으로 증원되었다.8)

케네디 정부는 승려의 분신자살 등 사회 혼란이 극심해지자, 민중 장악력 부족과 부패를 문제 삼아 응오 딘 디엠 대통령의 축출을 결심한다. 1963년 11월 2일, 응오 딘 디엠과 응오 딘 누 형제는 미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일단의 장교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로써 남부 베트남은 더더욱 폭압적인 군부 독재 사회로 치닫게 되었다.

딘 디엠을 축출하기 위한 미 제국의 쿠데타 지원 공작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고한 여러 건의 전문과 미 국무부가 현지 대사에게 지시한 문건, 그리고 쿠데타 3일 전인 10월 29일의 백악관 회의록과 국가안보회의 의사록 등이 그것이다.9)

 

6) 케네디 암살과 베트남전 확대

1950년대 이래 베트남의 분단 체제를 굳히기 위한 미 제국의 지속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점차 악화하고 있음을 인식한 케네디 대통령은, 철수냐 확전이냐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1961년 6월 빈에서 케네디를 만난 흐루쇼프 쏘련 서기장은 여기 유럽은 유럽인의 손에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손에 맡기자며, 미 제국의 패권 확장 정책이 결코 인류의 자유와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1954년 싱가포르에 주재하던 한 영국 정보기관 간부조차도 CIA 간부 조지프 벅홀터(Burkhalter)에게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미국 고위 관료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베트남의 공산화가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일으키고, 이는 필리핀, 한국, 나아가 일본과 호주 등의 공산화로 이어져 결국 미국의 세계 지배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면서 확전을 주장했다.10) 이러한 가운데 케네디는 피살되고, 대신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미국의 대(對)베트남 정책은 확전의 길로 치달았다. 이에 미국의 일각에서는 케네디 암살이 베트남 전쟁 확대를 주장한 미국 내 매파의 조직적인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7) 미 제국의 통킹만 사건 날조

케네디 암살 이후 존슨 행정부는 1964년 8월 5일, 미 의회에 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북부 베트남군이 통킹만 근해의 공해에서 미 해군 함정 매독스호(Maddox)에 어뢰를 발사하여 피해를 주었다는 보고다. 미 의회는 하원의원 414명 전원과 상원의원 90명 가운데 88명의 찬성으로 상ㆍ하 양원 합동결의안 제1145호(1964. 8. 7.)를 통과시킴으로써, 존슨 행정부에 제한 없는 무력 사용을 승인했다. 미국 주류 언론들 역시 전쟁을 선동하는 기사를 내보내 자국의 청년들을 베트남 전쟁으로 내몰았다.11)

그러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촉발한 통킹만 사건 역시 미 제국의 날조였다. 사건의 실체를 간추려 보자.

1964년 7월 30일 타이완의 기륭 항을 출발한 매독스호는 이틀 동안 데소토(Desoto)라는 비밀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의 주요 목적은 북부 베트남의 통킹만 부근 전략기지인 혼미 섬과 혼구 섬에 대한 남부 베트남 특공대의 해상 침투 공격(34A 작전)을 지원하고, 이울러 북부 베트남의 해안 경비 태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그리고 이틀 뒤인 8월 2일 오후, 북베트남 영해인 혼미 섬 부근에서 작전을 벌이던 매독스호는 북부 베트남 해군의 소형 선박들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다.

8월 3일 오후, 북부 베트남 빈손의 레이더 시설과 론강 남강 남안의 보안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남베트남 초계함 4척이 다낭 항을 출발했다. 매독스호의 보호를 받으며 각기 목표 지점에 침투하여 심야 공격을 마치고 6-7시경에 다낭으로 돌아왔다.

8월 4일 밤 10시경 매독스호를 비롯한 두 척의 함정은 적의 어뢰정으로 추정되는 미확인 물체를 포착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부근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스카이호크 폭격기와 F8 전투기 3대가 도착하여 200-500미터의 저공비행으로 주변 해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적함은커녕 어선 한 척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존 헤릭(John Herrick) 함장은 7월 31일과 8월 3일 실시한 3A 작전을 미 함정의 직접적인 소행으로 오인(?)한 북부 베트남이 보복 공격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중 음파 역시 이로 인한 과민반응에서 야기된 해프닝이었다면서, 사실 자신이 들은 것은 매독스호의 프로펠러 소리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 4일 밤, 전국에 방송된 TV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북부 베트남 어뢰정이 아무런 도발행위도 하지 않은 미군 함정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폭격기로 북부 베트남의 주요 군사시설과 정유기지를 폭격하도록 명령했다고 말했다.

비밀이 해제된 존슨 행정부의 문서에 따르면 사건 진상은 그 반대였다. 남부 베트남 해병대가 독단적으로 감행한 3A 작전은 존슨 정부의 국무차관 조지 볼(George Ball)에 의해 통킹만 사건 2개월 전부터 준비된 전쟁 도발 각본의 일부였다. 북베트남 보복 공격을 유도한 뒤 이를 빌미로 베트남을 침공한다는 전쟁 도발 계획이 세워졌는데, 북베트남이 반격하지 않자 이를 날조한 것이다.

또한 풀브라이트(William Fulbright) 상원위원회 위원장은 몇 년에 걸친 집요한 요청 끝에 맥나마라 국방장관으로부터 통킹만 사건 관련 문서를 넘겨받아 분석했는데, 8월 4일 북베트남군의 미군 함정 공격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존슨 대통령 자신도 회고록을 통해 우린 함정이 쏘아댄 목표물은 고래뿐이었다면서 통킹만 사건이 날조된 것이었음을 시인했다.12)

 

8) 피닉스 작전과 미 제국의 잔혹성

가공할 피닉스 작전은 1976년부터 CIA의 지휘 아래 전개되었다. 이 작전의 내용은 남베트남 신식민지 파씨즘 정부에 저항하는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인권 운동가, 양심적 지식인을 비롯하여 이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민중을 제거함으로써 베트남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것이었다.

피닉스 작전에는 미 해군 특수부대(Navy Seal)와 육군 특전단(Green Beret), 그리고 남부 베트남 비밀경찰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공산 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납치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남녀 생식기에 전기 고문,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물고문, 얇은 대나무 껍질을 손톱 밑으로 삽입하는 고문, 6인치 나사못을 한쪽 귀에 삽입한 뒤 반대편 귀를 향해 절명할 때까지 뇌를 관통시키는 등 그 잔혹한 수법은 말로 다 표현할 수조차 없다.

당시 작전에 관여했던 CIA 간부 오스본(Barton Osborn)은 1971년 7월의 미 상ㆍ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와 1973년의 미 하원 군사재판소위원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피닉스 작전으로 체포되어 조사받은 사람 가운데 생존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털어놓았다.

미 국방성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닉슨 대통령 재임 당시 피닉스 작전에 의한 사망자는 2만 6,369명이고 불법 구금자는 3만 3,353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콜비는 1971년 7월 19일 상원 소위에 출석하여, 1968년 1월부터 1971년 5월까지 불과 3년여 동안 2만 1,587명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피닉스 작전의 중단을 결의한 후 미국 정부에 의해 집계된 숫자일 뿐,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수백, 아니 수천 배 많다고 보아야 하며, 그중에도 미군 다음으로 많았던 한국군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된 민간인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9) 미라이 학살 사건의 진실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과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에게 저지른 수많은 학살 사건 가운데 서방 사회에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은 바로 미라이 대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아침 7시, 미 11여단 소속 찰리 부대의 한 소대가 인구 700여 명의 농촌인 광나이성 손마이촌 미라이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베트콩을 색출한다며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가 대다수인 주민들을 동네 한가운데 불러 모아 놓고 무차별 학살했다.

미라이 대학살은 사건 발생 1년 반 만인 1969년 11월, ≪라이프≫의 허쉬(Seymour Hersh) 기자가 사진과 함께 그 경위를 폭로하면서 세간에 공개되었다. 미라이 대학살에 참가한 병사가 사건 몇 달 뒤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로널드 라이든아워(Ronald Ridenhour)가 관련 증인을 수소문하고 자료를 모으고 진상 조사 청원 등을 하면서, 언론을 통해 사건을 공개한 것이다.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던 1970년 ≪뉴욕 타임즈≫는 왜 이 사건을 초급 지휘관의 단순한 실수로 은폐하려 하는가?라는 사설을 통해, 미라이 학살이 피닉스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폭로했다.13)

 

10) 미군의 본색 타이거와 한국군의 학살 만행

베트남 전쟁 기간, 주로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다반사였다. 당시 베트남 인민에게 미라이 학살 사건은 별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 제2, 제3의 미라이 민간인 학살 사건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타이거 부대는 게릴라전 수행을 위해 1965년 말경에 창설된 소규모 부대로서, 미 육군 제101공수여단 소속이다. 이들의 학살 만행은 악마의 광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범죄 행각이 군 내부에서 문제가 되자, 미 육군 범죄수사대(CID)는 1971년부터 약 4년에 걸쳐 내부조사를 벌였다. 이를 최종 보고받은 포드 대통령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묻어 버렸다(New York Times, 2003. 12. 28.).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가 한국이다. 1966년 11월 한국 해병대(청룡부대)는 노약자와 부녀자가 대다수였던 광나이성 푸옥빈 마을에 침입하여 100여 명을 한곳에 몰아넣고 집단 학살했다. 이는 청룡부대 장교로 베트남전에 나갔던 김기태 씨가 국내 언론에 진실을 공개하며 알려졌다(UPI, 2000. 4. 19.). 또 1966년 12월 초 광나이성 빈호아 마을을 습격하여 비무장 주민 430명을 한곳에 모아 놓고 집단 학살했다. 그리고 1969년 10월 베트남 남부 판랑 지역의 한 사찰에서는 승려와 신도 등 4명이 한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찰에 온 부녀자를 성추행하려던 한국군 병사를 승려가 말리자 그는 동료 부대원들을 데리고 와서 승려는 물론 여승과 동자승 등도 모두 죽였다.

 

11) 고엽제(Agent Orange)의 망령

1961년 8월 초부터 1971년 10월 말까지 만 10년 동안 미 제국은, 베트남을 비롯해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경 지역에 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했다. 주로 에이전트 오렌지라 불리는 물질인데 미 상원의원 게일로드 넬슨의 표현대로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의 다이옥신을 퍼부은 셈이다. 남부 베트남 정부는, 오히려 미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고엽제를 살포하라고 주장하며 자국민과 자국의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정글을 초토화시켜 적의 이동로나 은신처를 파괴하고, 농작물의 씨를 말림으로써 최소한의 비용과 노력으로 적의 저항 의지를 손쉽게 꺾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14)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는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 선천성 기형아 출산 등을 유발하는 다이옥신을 주성분으로 인명을 살상하거나 생태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변형시켜 세대를 이어가며 치명적인 재앙을 퍼뜨린다. 베트남전 당시 살포된 고엽제 때문에 300만 명 이상의 현지 주민들이 암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려 왔고, 1960대 이후 출생한 약 50만 명의 2세들, 그리고 최근에는 약 5만 명의 3세들까지 피부암과 혈액암을 비롯해 각종 암과 기형으로 고통을 겪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미군과 한국군 등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 피해자는 참전 장병과 그 자녀들을 포함하여 수십만 명에 이른다.

지난 2002년 3월 초 하노이에서 베트남과 미국 당국자 사이의 첫 회담이 열렸는데, 고엽제가 환경과 보건에 끼친 문제점과 그 대책을 협의했다. 양쪽은 이러한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긴밀한 연구와 협조가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였던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과학적인 근거를 찾으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며 미 정부의 책임을 회피했다.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 더글러스 피터슨 역시 고엽제가 베트남 주민에게 미친 영향을 규명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며, 이미 의학적으로 입증된 피해 사실조차 외면했다.

2004년 1월 베트남 희생자연대는 맹독성 화학 물질을 제조 공급한 몬산토 등 37개 회사를 상대로 미국 연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희생자들의 질환과 고엽제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입증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반면, 미국의 종자ㆍ농약 대기업인 몬산토의 제초제와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미국인들이 최근에 제기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은 잇따라 승소했다. 2018년 8월 에드윈 하드먼의 경우, 몬산토가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리스크를 사전에 알리지 않았으며 소홀하게 대응한 점이 인정된다며 590만 달러의 징벌적 배상금을 포함해 모두 8천100만 달러(920억 원)를 지급해야 한다고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 배심원단이 평결했다.

베트남 온라인 매체 ≪VN익스프레스≫에 따르면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협회 부회장인 쩐 응옥 토 소장은, 최근 미국 법원에 2004년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기각 판결을 뒤집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토 부회장은 서한에서 몬산토의 제초제를 사용한 탓에 암에 걸렸다고 주장한 미국인 피해자들이 법원에서 지난해 8월과 지난달 잇따라 승소한 점을 거론했다(≪연합뉴스≫, 2019. 4. 20.).

1999년 국내 고엽제 피해자 1만 7,000명은 한국 법원을 통해 다우 케미컬 등을 상대로 50억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국립과학아카데미가 보고서를 통해 폐, 후두, 전립선 질환 등과 고엽제의 인과관계를 인정했음에도, 이에 상반되는 미 환경보호청 등의 자료와 환자들이 고엽제에 노출된 정도 등을 근거로 청구를 기각했다. 이어서 이 사건을 다룬 항소심 재판부는 고엽제와 질환과의 대체적인 인과관계는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밝히지 못함으로써 청구인 가운데, 6,800명에 한하여 6,200만 달러(1인당 약 1,000만 원)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한겨레≫, 2002. 5. 23.).

다우 케미컬 등은 이미 1984년에 고엽제가 인체에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을 시인하고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참전 미국인에게 총 1억 8,000만 달러를 지급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도 이들에 대한 의료 지원을 해 왔다(AFP, 2007. 6. 10.). 그러나 이들 고엽제 제조회사는 한국 법원이 결정한 최소한의 배상금 지급명령은 불복하고 있다.

 

12) 8년 전쟁, 미국의 패배와 토착 대리정권의 종말

북베트남군과 베트남 해방전사(베트콩)의 끈질긴 공세와 민심을 거스르는 남부 베트남 대리정권의 만연한 부정부패, 그리고 날로 격화되는 미국 내 반전 여론 등으로 존슨 행정부의 고민은 점점 깊어 갔다. 설령 집중적인 화력으로 북부 베트남 정규군을 궤멸시키더라도 베트남 해방전사들의 저항은 오히려 더더욱 강화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미국은 도미노 논리 때문에 쉽사리 철군을 결정하기도 힘든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에 존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다시 핵무기 카드를 들고나왔다. 그러나 당시 키신저 국무장관조차 핵무기를 쓰더라도 베트남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으며, 오히려 국제적으로 여론만 악화시킬 뿐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여 포기했다(AP, 2002. 3. 1.).

키신저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타이완 독립을 고집할 의향이 없다고 하면서, 미국과 북부 베트남 사이의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호찌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명예롭게 철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New York Times, 2002. 2. 28.).

이를 위한 양국 외교에도 불구하고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북베트남의 강경 자세 때문에 협상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1973년 1월, 미 제국은 남베트남, 북베트남, 인민해방전선과 함께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이로써 1964년 8월에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하고 1965년에 미국과 한국 등이 군을 파병하여, 그 이후 8년 동안 전쟁이 이어진 끝에 1973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그해 3월 말까지 미군은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은 통일을 이뤄내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3) 미 제국 군대의 패주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은, 한(조선)반도 정전협정과 달리 미군 등 외국군의 전면 철수는 협정 내용에 포함되었지만, 17도선 이남에 진입해 있던 10만의 북부 베트남군의 철수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아울러 미국은 북베트남의 재건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32억 5,000만 달러의 전쟁 배상금까지 물기로 했다(그러나 서명 직후 미 의회는 전쟁 배상금 지급 건을 부결시켰다).

남부 베트남은 그 뒤 2년 동안 미국의 지원으로 간신히 버텨오다가 미국이 완전히 손을 뗀 1975년 4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한편 미 제국주의자들과 동맹이 되어 인민 탄압에 앞장섰던 보수 우익세력의 핵심에 있던 자들은 부정부패로 모은 재물을 챙겨 앞다투어 미국으로 도주했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일부 잔당은 북베트남에 목숨을 구걸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한국(조선) 전쟁과 맞먹는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가운데 미군 사망자는 58,721명, 남부 베트남군 사망자는 183,528명, 한국군 사망자도 5,0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북부 베트남 정규군 사망자는 약 925,000명,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사를 포함한 민간인 사망자는 3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인근 캄보디아 민간인 피해자까지 합치면 희생자는 대략 500만 명에 육박한다.

 

 

7. 캄보디아

 

캄보디아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였던 9세기 초부터 13세기 초까지 4세기 동안에는 베트남은 물론 인근의 말레이시아 등지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인도차이나 최강의 왕국으로 군림했다. 이 시기는 앙코르와트 사원 등 크메르인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절정기였다. 이후 내분과 외침으로 쇠락의 길에 들어선 앙코르 왕조는 15세기 초 타이와의 거듭된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겨우 크메르족의 명맥만 있는 소국이 되었다.

캄보디아는 1863년 프랑스 보호국이 된 이후 1887년에는 베트남에 이어 인도차이나 연합국이 됨으로써 1883년에 병합된 라오스와 함께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1940년에는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 침공하였고, 이 기회를 틈타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독립은 소멸되었다. 1949년에 프랑스 연합 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1953년에는 경찰권ㆍ군사권을 회복하여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1) 온건파 시아누크 국왕의 중립 노선, 쿠데타로 교체

시아누크 국왕은 미국과 중ㆍ쏘 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비동맹 중립 외교 정책을 표명했다. 미국은 캄보디아의 중립 노선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를 무시로 침범하여 대대적인 공습을 하거나 남베트남 군대와 연합해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했다. 이러한 침공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속출하자 온건파에 속했던 시아누크 국왕조차 미 제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8년 1월 캄보디아를 방문한 미 대통령 특사 체스트 볼은 미군의 폭격을 중단해 달라는 시아누크 국왕의 요청을 받아들였다(New York Times, 1969. 5. 9.). 아울러 미군은 1970년 6월 말까지 캄보디아 영토에 무단 주둔한 지상군을 철수시키겠으며, 부득이 적군을 추격하더라도 캄보디아 영토의 20마일을 넘지 않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약속은 음모를 감추기 위한 비열한 속임수였다. 왜냐하면, 약속 이후로도 미군의 캄보디아 침공은 줄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시아누크 국왕을 축출하는 공작까지 진행했기 때문이다. 미 제국은, 1970년 3월 중순 시아누크 국왕이 중국과 쏘련을 순방하는 중에 총리로 있던 론 롤(Lon Nol) 장군이 시아누크 국왕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지원했다.

 

2) 미 제국의 전쟁 범죄

2000년 가을,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지 4반세기 만에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베트남 침공을 사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찾지 못한 미군 장병의 유해를 거두기 위해서였다. 이때 공개된 캄보디아에 대한 미군의 불법 침공 자료를 살펴보면,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피해 규모는 종래에 알려졌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천문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New York Times, 2007. 5. 3.). 또한 캄보디아에 대한 미군의 침공 시기도 1969년이 아니라 베트남전을 일으킨 이듬해인 1965년 10월부터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1970년 4월 키신저 보좌관의 건의에 따라 단행된 닉슨의 공개적인 캄보디아 침공이 미 의회와 사회 각계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자, 닉슨은 캄보디아에 대한 공습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The Nation, 2004. 6. 25.). 그러나 비밀리에 캄보디아를 공습하도록 키신저에게 명령하면서 캄보디아 국경 20마일 제한선을 지킬 필요도 없이 무제한 공습을 가하라. 예산 지원은 걱정하지 말라며 확전을 독려했다. 쏘련 공군이 개입하면 어떻게 하냐고 키신저가 반문하자 쏘련은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라. 여하튼 출격해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파괴해야 한다며 무차별 공습을 명령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약 8년간 미 공군의 B-52 폭격기가 캄보디아의 도시와 농어촌에 퍼부은 폭탄의 양은 종전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졌던 물량의 5배에 달하는 약 276만 톤이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지구촌 전역에 투하한 물량인 200만 톤을 웃도는 것으로서 세계 전쟁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양이다.

이러한 미 공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희생된 캄보디아 민간인은 최소 60만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금까지도 미군이 투하한 클러스터 폭탄과 캄보디아 곳곳에 매설해 놓은 수백만 개의 지뢰 때문에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고 있다. 미군은 폭탄 투하뿐만 아니라 고엽제(에이전트 오렌지)도 살포했다. 1969년 봄, 캄보디아 동쪽 국경 지대에 위치한 캄퐁 참 지바에 집중 투하된 에이전트 오렌지 때문에 캄보디아 전체 고무 재배량이 3분 1로 감소했다.

 

3) 크메르 루주의 몽상과 킬링필드의 진실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는 붉은 크메르라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크메르 공산당의 별칭이다. 20세기 초반 베트남 공산당의 지도 아래 설립된 크메르 공산당을 집권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폴 포트(Pol Pot)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간 폴 포트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는 한편 파리 학생그룹이라는 캄보디아 유학생으로 구성된 소규모 공산주의 청년단을 조직하여 해방운동을 벌였다. 1953년에 귀국하여 1963년에 크메르 공산당 서기장이 된 그는, 공산당을 미국의 인도차이나 침공에 저항하는 무장세력으로 양성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수의 무장집단에 불과했던 크메르 루주의 군대가 세력을 확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캄보디아 농촌 지역에 대한 미군의 무차별 공습이었다.

미군 때문에 가족을 잃고 농경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크메르 루주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뒤 1970년 론 놀 반동정부에 의해 축출된 시아누크 국왕이 지원하면서부터 이들의 게릴라 투쟁은 범국민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75년 4월, 론 놀 정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던 크메르 루주는 미군이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론 놀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키우 삼판을 형식적인 국가원수로 하고 폴 포트 총리를 실권자로 하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새 정부를 구성한 크메르 루주는 프랑스 치하에서부터 론 놀 정부에 이르는 동안 외세에 빌붙어 부패와 비리를 저질러 온 공무원을 비롯해서 서구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해 온 교사 등 지식인과 악덕 자본가계급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본주의 흔적을 일소하는 급진적인 사회 개조 운동을 전개했다.

이상적인 공산 사회를 꿈꾼 크메르 루주는 화폐 제도와 금융기관을 철폐하고, 서구식 학교 제도도 없앴다. 종교를 인민의 정신을 좀먹는 해악으로 규정한 뒤 교회당은 물론 그들의 전통 종교인 사찰조차 폐쇄했다. 또한, 캄보디아 원년을 선언한 크메르 루주는 인민을 3개 그룹으로 나눠 인민의 적에 해당하는 자는 바로 처단하고, 개조가 필요한 자는 집단농장에 보내 강제노역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는데, 미 국무부는 약 12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계하고 국제사면위원회는 140만 명으로 추계한다.

그러나 그 실상은 헐리우드 영화나 소설에서 기정사실로 하고, 미국과 그 속국들이 일반적으로 진행한 정치 선전과는 달랐다. 미국 언론조차도 실제로 처형된 수는 2만여 명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다수는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기근 때문에 식량과 의약품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아사하거나 병사했다고 보도했다(Seattle Times, 2006. 3. 3.). 따라서 킬링필드의 주역은 단기간에 사회를 개혁하려던 몽상가 폴 포트와 그 일행이 아니라, 농촌 마을에 8년 동안이나 무차별적인 융단폭격을 가하여 약 100만 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이들의 농토를 황무지로 만든 미 제국이다(New York Times, 1997. 6. 20.).

더구나 1978년 크메르 루주 정부와 베트남 정부의 잦은 국경 충돌로 전면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친쏘련계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하여 폴 포트 정부에 재정을 지원했고, 타이를 통해 무기도 공급했다. 또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이 폴 포트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는 반정부 3대 파벌 세력인 시아누크, 크메르 루주,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을 돕도록 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동남아조약기구(SEATO) 그리고 유엔 등에 압력을 가했다.

크메르 루주는 타이 국경 지대로 근거지를 옮긴 뒤 미국 등의 지원을 받으며 10여 년 동안 게릴라전을 벌여 왔으나 캄보디아 총선을 거치면서 민심이 떠났다. 특히 1996년에 발생한 크메르 루주의 내분으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폴 포트마저 반대파에 의해 숙청된 뒤, 이듬해에 사망했다. 2인자였던 키우 삼판도 정부군에 투항함으로써 이상적 공산 사회를 주관적 의지만으로 만들고자 했던 크메르 루주의 꿈도 좌절되었다.

 

 

8. 라오스

 

라오스는 베트남, 캄보디아와 함께 인도차이나 3국 가운데 하나다. 인구는 약 700만여 명이다. 베트남,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라오스는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나 프랑스의 재침으로 다시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다. 1954년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이웃 두 나라와 함께 독립국이 되었으나, 왕정을 지키려던 수구세력에 이해 여전히 프랑스의 군사 보호국으로 남았다. 이듬해부터 미국이 이를 승계했다.

한편 제네바 협약에 따라 1955년 12월에 치른 선거에서 그동안 프랑스와 일본을 상대로 해방투쟁을 벌여 온 좌익계가 결성한 파테트 라오(Pathet Laos, 라오인의 땅)가 압승을 거두었다. 1957년에 출범한 새 정부는 왕족 가운데 중도 성향의 수반나 푸마(Souvanna Phouma) 왕자를 총리로 입헌 군주제를 시행했다. 좌ㆍ우 진영의 중립을 천명한 새 정부는 라오스 동쪽에 위치한 두 개의 성을 점령하고 있던 파테트 라오 군대의 무기를 회수하고 이들을 정부군에 합류시키는 등 통합 노력도 기울였다.

 

1) 미국의 라오스 분열 공작

인도차이나 3국의 자주독립과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영국, 프랑스, 중국, 쏘련, 북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서명한 제네바 협약의 사항이 하나둘씩 실천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를 거부해 온 미국은, 1955년 1월부터 남베트남에 유솜(USOM,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사무소 등을 설치한 뒤 인도차이나 전역에 대한 본격적인 분열 공작에 들어갔다.

공작의 일환으로 1959년에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실질적인 통치권을 상실한 라오스 왕실을 부추겨 수반나 푸마 내각을 해산시키는 동시에, 수구 우익 무장세력을 양성ㆍ지원하여 파테트 라오 출신 각료를 포함해 고위 간부를 살해하거나 체포케 했다. 이로 인해 라오스 정부군에 합류했던 파테트 라오도 새로 들어선 친미 정부에서 이탈하여 반격에 나섰고, 그 이듬해는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친미 정부를 몰아내고 중립 정부를 출범시켰다.

미국은 라오스가 중립을 선언하자 공개적인 침공 대신 수구세력 등을 지원하여 대리전쟁을 벌였다.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한 미국의 무력 개입으로 촉발된 라오스 내전은 미군이 이곳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미군의 임무는 주로 호찌민 루트로 불리는 라오스 동부 지역에 대한 융단폭격과 CIA의 조종을 받던 라오스 산간의 몽족(Hmong) 등 친미 세력을 양성하여 이들이 호찌민 루트를 파괴하고 파테트 라오에 대한 게릴라전을 벌이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CIA 국장을 지낸 헬름스(R. Helms)는 라오스에서 수행한 작전은 정보부의 주요 임무였으며 … 특히 많은 정예 인력이 필요했고, 또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15) 아울러 CIA는 이에 소요되는 자금의 상당 부분을 몽족의 아편 사업을 통해 충당했다. 이 아편은 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과 미국 내에서 소비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Golden Triangle)에서 재배되는 아편의 생산량 증가와 유통로를 추적한 위스콘신 대학의 아시아 역사학 교수 맥코이(Alfred W. McCoy)가 공개한 연구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2) 미 제국의 라오스에 대한 무차별 공격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1973년까지 미 공군은 호찌민 루트를 파괴한다면서 총 58만 번 출격하여 최소 200만 톤 이상의 폭탄(네이팜탄과 클러스터 폭탄 등)을 라오스에 퍼부었다. 라오스에 퍼부은 면적당 폭탄 투하량은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규모로서 캄보디아와 함께 가장 많은 양이었다(Washington Post, 20014. 12. 27.). 그러나 나중에 미 제국이 라오스 정부에 폭탄 제거비로 건넨 돈은 불과 100만 달러였다(US Today, 2003. 12. 11.). 또한 1970년 9월 미군 특수부대가 침략 전쟁을 거부한 탈영 미군 장병들이 모여 사는 라오스의 한 마을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CNN과 ≪타임≫지의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미 제국의 침략 전쟁의 라오스 내의 동맹세력은 바로 라오스의 왕실 등 보수 우익세력이었다. 이들은 캄보디아와 남베트남의 친미 정권과 함께 1975년에 붕괴했다.

 

 

 

ⅤI. 자본주의와 함께 몰락하고 있는 미 제국

 

 

1. 전 세계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 미 제국

 

모국 영국에 대한 반란으로 세운 나라 미국은, 원주민 인디언의 삶터를 짓밟으며 확장했다. 건국 직후인 1803년에는 프랑스 식민지 루이지애나를 반강제로 차지했고, 1812년에는 캐나다를 빼앗고자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1846-1848년에는 멕시코에 시비를 걸어 지금의 캘리포니아 등 멕시코 영토의 절반을 차지했다. 1867년에는 러시아령 알래스카도 헐값에 인수했다. 또한, 1896년에는 하와이를 강탈하고 1898년에는 미-서 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와 필리핀 등도 빼앗았다. 그 뒤 20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미국은, 제1ㆍ2차 대전을 통해 제국주의 맹주가 되었다. 1991년 쏘비에트연방 해체와 함께 유일한 세계 제국의 자리에 섰다. 미제는 각국의 반민중세력, 친미세력을 육성ㆍ연합하여 무력공작으로 약소국의 자원과 인민의 피땀을 수탈해 왔다.

미 제국은 자신의 힘을, 정치ㆍ군사ㆍ경제ㆍ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유기적으로 행사해 왔다. 군사력과 기축통화로 공인된 달러를 이용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잉여가치를 빨아들여 왔다. 전 세계 150개 국가에 약 800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규모의 군대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세계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극심한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미 제국의 세계적인 패권도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구촌을 당근과 채찍으로 통제하는 주요 동력 역할을 해 온 달러 체제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2. 위기에 처한 달러 패권

 

미국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침략전쟁을 벌이며 지배 영역을 넓히고 이를 통해 국부를 증대시켜 왔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세계 최강 제국으로 부상했다. 이를 지속 가능하게 한 계기가 자국의 화폐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래튼 우즈 체제의 출범이었다(1944. 7.). 미국은 달러를 국제 사회의 기축통화로 정하는 대신 황금 1온스(troy ounce)를 미화 35달러에 고정하는 금 태환 제도를 도입했다. 이 체제가 가동되는 동안 제1 세계로 불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기록적인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 대전을 통한 5천만 명 이상의 대살육과 각국 생산수단의 파괴를 통해 과잉생산의 위기를 일시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미국 경제는 정체되기 시작했고, 대폭적인 적자를 누적시켜, 금 준비와 대외 단기 달러 채무에 대한 잔고 비율이 악화되었다.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해 미국의 국제 수지 적자가 커지고, 전비 조달을 위해 통화량을 증발함으로써 발생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달러 가치가 급락했다. 그러자 프랑스를 필두로 일부 국가들이 금 태환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에 닉슨은 1971년 8월 15일, 금 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금 태환 부도에도 불구하고 미국 달러가 거의 반세기 동안 국가 간 거래에서 기축통화의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군대를 앞세워 석유 시장의 통제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사우디를 비롯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오일머니를 금이나 다른 통화 자산 대신 미국 채권으로만 보유하도록 했다. 이로써 석유가 금을 대신하여 달러의 가치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미국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이용하여 엄청난 만성적 국제 수지 및 재정 적자 구조를 방어해 왔다.

그런데 현재 자칫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는 달러를 받고는 석유를 팔 수 없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이라크와 리비아가 석유에 대한 달러 결제 시스템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했으나, 중국이 도전에 나섰다. 중국은 2018년 3월, 상하이 국제에너지거래소(INE)에서 위안화 표시 원유 선물 거래를 시작했다. 상하이의 원유 선물 거래 대금으로 받은 위안화는 지상 최고의 안전 자산인 금으로 바꿀 수 있다. 굳이 미국 국채를 사서 보유 외환으로 쌓아 두지 않아도 된다. 달러 거부 추세에는 중남미 및 중동의 산유국들(이란, 베네수엘라, 카타르 등)은 물론이고 러시아 등도 가세했다. 또한, 유럽연합도 동조하고 나섰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등 주요 OPEC 회원국도 유로화를 OPEC 공용화폐로 사용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크게 주목되는 점은 사우디가 1974년 미국과 체결했던 페트로 달러(Petro Dollar) 협약을 조만간 깰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는 것이다.

 

 

3. 임박한 파국에 직면한 미 제국

 

미국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3차례의 걸친 양적 완화 정책을 통해 거대 은행의 줄도산을 막았다. 그러나 실물 경제에 드리운 과잉생산 공황은 전혀 극복하지 못한 채, 자산 시장(주식・채권 등 유가증권과 부동산)의 거품을 키워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2008년 금융 대란 이후 10년이 지난 2018년 2월 현재, 미국 국가 부채는 금액상 10년 전보다 50% 이상이 증가한 69조 6,000만 달러로, 미국 시민 1인당 21만 2,000달러의 채무를 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부담해야 할 사회보장연금 16조 8,100만 달러와 의료보장부담금 27조 8,700만 달러를 합하면 미국 정부가 부담해야 할 채무액은 총 114조 달러를 상회한다. 또한, 2017년 회계연도 기준 연방과 주 정부의 세입 총액은 5조 1,400억 달러인데 재정 적자는 세입 총액보다도 많은 6조 달러에 달한다. 아울러 국가 채무에 대한 이자 부담액도 2조 6,000억 달러가 넘는다.16)

지난 10년간 미국의 GDP도 19조 8,000억 달러로 부채 비율과 비슷한 53% 증가 폭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달러 남발에 따른 금융 투기 시장의 활황에서 비롯한 거품 성장에 불과하다. 빚으로 움직여 온 미국 경제는 이자를 갚기 위해 새로운 빚을 내거나 잉크와 종이로 찍어낸 달러로 버티고, 이자를 미끼로 국채를 발행하여 유동성을 조절해 왔다.

그런데 달러 가치는 국제 금 시세에 비추어, 계속 하락하고 있다. 금 1온스당 35달러로 확정한 금 태환 제도가 폐지된 1971년 이후 꾸준히 상승해 온 금값은, 2009년 3월 1온스당 1,000달러 선에 접근했으며 2018년 3월 현재는 1온스당 1,300달러 선에 육박했다. 미국은 금 태환 부도를 냈듯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천문학적 규모의 빚을 갚을 의사도 능력도 없다. 레이건 1기 행정부에서 레이거노믹스를 입안한 로버츠(Paul Craig Roberts) 전 재무차관보조차 학술 논문을 통해, 지금 미국은 지고 있는 빚을 갚을 의사도 능력도 없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외국에 진 빚 때문에 해외에 산재한 자산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17) 설령 모든 국채를 달러로 상환한다고 해도 이미 그때는 휴지 조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미국에 대한 수출이 급감하고 보유하고 있는 달러와 미 국채가 별 쓸모없는 종잇조각 취급을 받는다면 대미 수출의 최대 수혜국인 중국은 물론 일본과 한국 등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미국은 국가 부채만이 아니라 기업과 가계 부채 역시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2008년도에는 가계 부채가 주로 문제였지만, 지금은 국가ㆍ기업ㆍ가계 모두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다. 실물 경제에 기반하지 않은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고, 만성적인 경상 수지 및 재정 수지 적자로 인해 빚으로 연명하는 미국 경제는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파장은 전 세계를 휩쓸 것이다.

 

 

4. 경제 위기ㆍ달러 패권의 약화, 군사제국의 붕괴 위기

 

그동안 미국은 군사력과 달러를 이용하여 약소국의 자원을 약탈하는 등 광대한 신식민지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달러 패권의 붕괴는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2008년 미국의 군사력에 비해 10년이 지난 현재는 현역과 예비역을 합한 총병력이 30%나 줄었다. 해외 주둔 병력18)은 무려 60% 이상 줄었다. 또 10년 동안 달러 가치의 하락과 물가 상승 등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국방 예산은 오히려 축소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구촌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해 온 미 제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도 등을 보이는 형편이다. 달러 패권 수호와 유전 탈취 등을 목표로 벌인 아프가니스탄ㆍ이라크 침략전쟁도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오히려 국가 파산 상태를 앞당겼기 때문이다(Reuters, 2002. 7. 8.). 또한 그동안 막대한 달러를 뿌리며 미 제국이 주도해 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집단 군사 체제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하고 있다. 또한, 침략전쟁 위협을 지속해 온 미 제국의 폭압을 끝장낼 조선의 핵 무력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동북아에서뿐 아니라 지구촌 전역에서 미 제국의 힘은 급속히 퇴조하고 있다. 미 제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 질서는 미국 중심의 1극 체제에서 열강들의 다극 체제로 전환되었다.

 

*          *          *

 

가벼운 마음으로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황성환, 민플러스, 2018)을 요약하고 공유하고자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시작했으나 다루는 범위와 내용이 방대하여 줄이고 줄여도 긴 원고가 되었다. 아무리 유익한 글이라도 단행본 내용을 요약ㆍ발췌하는 데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 우려가 교차했다. 어쩌랴!

어쨌거나 미 제국은 전 세계 인민들의 공동의 적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했다. 미 제국은 극심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수습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도 분명하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무한정 발전하고 있는 현재의 생산력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없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시대이다.

노사과연

 

 


 

1) 이는 당시 CIA와 국방성 업무 조정을 맡았던 프라우티 공군 대령이 자신의 저서와 여려 대중매체를 통해 미 제국의 음모와 이를 비밀리에 실행한 CIA의 실상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2) News York Times, 1965. 8. 5., 1966. 4. 25., 4. 26., 5. 8., 8. 19., 1967.3. 1.; Boston Globe, 1990. 5. 23.

 

3) “The Secret Letter From US President John F. Kennedy To Holland Prime Minister Dr. De Quay”, 1962. 4. 2.

 

4) 당시 하와이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은 1870년대부터 이주를 시작한 일본인들이었다. 하와이를 강제로 합병하자 일본 정부는 군함까지 파견하면서 강력히 항의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5) https://m.yan.co.kr/view/AKR20160925003200075

 

6) “Accord Between France and the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1946. 3. 6.

 

7) “Document 95. Lansdale Team’s Report on Covert Saigon Mission in 1954 and 1955”,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ition, Vol. 1.

 

8)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1962. 1. 1.(The Pentagon Papers, Gravel Edition, Vol. 2.)

 

9) “Re. Coup possibility of Vietnam”,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ition, Vol. 2.

 

10) “NSC Action Memorandum 288”, 1964. 3. 18.

 

11) Washington Post, 1964. 8. 5.; Dept. of State Bulletin, 1964. 8. 24.

 

12) US News World Report, 1984. 7. 23.; Washington Post, 1995. 11. 23.

 

13) News York Times, 1970. 8. 25., 1971. 8. 18., 8. 19., 9. 9.

 

14) A Report by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William A. Buckingham Jr., Operation Ranch Hand: The Air Force and Herbicides in Southeast Asia, 1961-1971).

 

15) http:/history.wisc.edu/people/faculty/mccoy.htm.

 

16) CNN, 2008. 10. 7.

 

17) http://www.countercurrents.org/roberts120907.htm

 

18) 2017. 9. 현재, 미군 현역 128만 명(예비역 80만 명) 중 15만 명이 150개 나라에 산재한 800여 기지에 배치되어 있다. 그중 ①일본에 3만8,800명, ②독일에 약 3만4,600명, ③한국에 2만4,000명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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