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1)

 

문영찬 | 연구위원장

 

 

 

머리말

 

 

1991년 쏘련이 해체된 지 어언 30여 년이 다 되어 간다. 그간 세계는 극소수의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세계화의 구호 속에 자본주의적 통합의 길을 걸어갔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 지구를 휩쓸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7년의 세계 대공황의 발발, 금융 위기의 폭발은 자본주의가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 자본주의가 치유할 수 없는 모순을 앓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자본론≫이 읽히고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조건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모색하는 것, 나아가 변혁 운동의 재정립의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노동자계급은 쏘련의 해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소멸로 말미암아 사회주의의 기치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뜨로쯔끼주의, 좌익공산주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등의 온갖 잡사상들이었다. 이들 사상적 조류들은 20세기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공통분모로 한다. 그리하여 쏘련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니, 국가자본주의니 하면서 부정하는 온갖 잡설들이 노동자 대중의 뇌리를 흐리게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과학적 사회주의 혹은 맑스-레닌주의의 지반은 매우 협소해진 것이 현실이다.

현재 세계 자본주의는,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는 위기 국면을 경과하고 있다. 그에 따라 사회주의를 기치로 하는 변혁 운동의 재정립이 노동자계급의 당면 과제로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쏘련의 해체를 핵심으로 하는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수행되어야 한다. 꺾여진 사회주의의 기치를,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통해 다시 치켜들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를 평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이와 같이 사회주의 기치를 재정립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론적 측면에서는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오류는 무엇인가, 그리고 쏘련의 해체 원인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레닌은 10월 혁명을 수행하면서 1871년의 빠리 꼬뮌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단 2개월간 존재했던 빠리 꼬뮌이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의 정신적 자산으로 역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약 70년간 존재했던 그리고 아직 극소수지만 일부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와 건설의 경험을 앞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이 경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70년의 기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향후 한국 사회와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의 전망, 앞날이 갈린다는 것은 명확하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뜨로쯔끼가 1920년대 노선 투쟁에서 패배한 후부터 쏘련이 사회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본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극좌적 노선이 패배한 1920년대 초부터 쏘련이 사회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 공산당의 수정주의자들은 시장 경제로 건너뛰면서, 계획 경제 자체를 쓰딸린적 모형이라고 규정하면서 신경제정책(NEP) 이후의 시기를 부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해서 극히 일부 맑스-레닌주의 진영을 제외하고는 온갖 비과학적 주장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의 문제는 단순한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 21세기의 조건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성립, 변혁 운동의 재정립을 위한 사활적 문제이며, 무수한 이론적 쟁점들을 규명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진경의 경우 쏘련 해체 뒤 청산주의의 길을 걸었는데, 맑스주의자라면 맑스주의의 틀로 쏘련의 해체를 해명할 수 없다고 토로한 뒤, 부르주아들의 품에 안겼다. 쏘련의 해체가 겉으로 보였던 경과와 성격, 즉, 사회주의 사회의 인민이 스스로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역사적 현실을 맑스주의자로서는 이해할 수도, 해명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면서 이진경은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왜곡하고 해체하고 청산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원인과 결과, 인과율이라는 과학의 기초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쏘련의 해체의 원인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쏘련이 사회주의 사회인가, 아니면 국가자본주의 사회인가의 문제, 혹은 기형적 노동자 국가인가의 문제 또한 과학에 의지하여 접근할 수 있고 해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 쏘련의 해체의 원인에 대한 접근을 위한 유력한 무기이자 방법론은 맑스와 엥엘스가 정립한 사적 유물론이다. 쏘련에서 계급이 폐지되었는지,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되었는지, 쏘련에서 수정주의의 발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쏘련에서 이루어진 자본주의적 경제 개혁이 쏘련의 생산관계에 대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등등, 무수한 이론적 쟁점들에 대해 우리는 사적 유물론의 관점과 방법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변증법적 관계,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통한 역사의 발전을 주장하는 사적 유물론은 쏘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역사의 발전 법칙이다. 즉, 사회주의 사회의 발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적 유물론은 적용되는 것이다. 나아가 오직 사적 유물론의 방법을 따를 때만 쏘련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명이 가능하다.

사실 20세기 사회주의 사회, 쏘련이 이룩했던 성과는 거대한 것이다. 인류 최초로 착취의 폐지, 계급의 폐지를 실현했다는 것,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양성평등을 이루었다는 것,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점,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필요에 따른 분배를 일정하게 실현했다는 점, 인류의 최대의 적인 파씨즘을 군사적으로 패배시켜 인류 전체의 노예화의 위험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성립을 이루어 냈다는 점, 중국 혁명의 성공을 지원하고 세계 여러 민족의 민족 해방 투쟁을 지원하여 세계 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이끌어 냈다는 점 등등, 쏘련을 핵으로 하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는 인류의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와 오류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면 파씨즘의 침략의 위협 속에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고 농업 집단화를 하면서 농민의 자발성을 침해하여 노농 동맹을 약화시켜서 쏘련의 농업을 오랜 기간 침체하게 했다는 점, 1930년대 숙청에서 일정한 오류를 범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침식했다는 점, 당 건설에서 일정한 한계와 오류로 인해 쓰딸린 사후 수정주의가 당내 최고 지도부에서 발생했다는 점, 사회주의 세계 체제 성립 이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실현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와 오류, 1965년의 꼬씌긴의 수정주의적 경제 개혁으로 인한 쏘련의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균열과 경제의 침체 등등, 쏘련의 역사에는 분명 일정한 한계와 오류가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객관적인 한계와 오류가 아니라 제국주의자, 수정주의자, 뜨로쯔끼주의자들에 의한 악선동적인 왜곡이 지금 쏘련의 문제에 대한 언설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쏘련에 대한 악선동과 왜곡은 사실 히틀러의 나찌의 선동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쏘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온갖 왜곡과 악선동을 해 왔다. 그리고 쏘련의 해체 뒤에는 중국 공산당의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미국 등의 제국주의자들이 쏘련을 무덤에 완전히 묻기 위해 온갖 악선동을 해 왔다. 이러한 주장들을 담고 있는 무수한 자료와 책자들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상당수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자료로서의 가치를 상실할 정도이다. 따라서 쏘련에 대한 진실, 객관적인 사실이 무엇인가를 재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쏘련에 대한 평가는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쏘련에 대한 주장의 객관성이 의심되는 경우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대립하는 주장들을 개괄하는 선에서 평가를 할 것이다.

현재 제국주의자들, 중국 공산당의 수정주의자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주장의 공통점은 전력을 다하여 쓰딸린을 부정하고 매장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쓰딸린은 역사의 진실, 그 역사적 위상으로 인하여 다시금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쏘련 해체 뒤 성립한 러시아의 반동적 체제하에서도 쓰딸린은 인민 상당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그에 따라 뿌찐조차 쓰딸린 현상을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민의 쓰딸린에 대한 존경심을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쓰딸린의 이른바 숙청과 만행을 인류 보편적 가치의 견지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식이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인데 마오쩌뚱의 혁명 노선을 사실상 거세한 후에 중국 공산당의 수정주의자들은 인민의 마오쩌뚱에 대한 존경심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들이 여전히 사회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양 포장을 한다.

그러면 쓰딸린이 이렇게 지금도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쓰딸린이 걸었던 길이 지금도 여전히 자본가계급을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사회주의 사회가 거대한 성취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의 생생한 사례로서의 쓰딸린이기 때문에, 나아가 쓰딸린은 자본가계급을 폐지하고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분쇄한 주역이라는 점에서,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지금도 전 세계 자본가계급, 제국주의자들, 수정주의자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쓰딸린을 집중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매장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쓰딸린에게도 한계와 오류가 존재하며 이는 앞으로 분석되고 규명될 것이다. 그러나 쓰딸린 전체를 매도하는 것, 쓰딸린을 권력욕에 사로잡힌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는 것 등은 과학적 접근이 아니며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매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국가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체가 부정되어서 혁명의 근본 문제인 국가 권력의 문제에 대한 노동자계급 자신의 대안이 없게 된다면 노동자계급이 혁명에서 승리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쏘련 해체 뒤 30여 년 동안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 속에서 속절없이 밀리고 위축되어 왔던 것이다.

쏘련의 경험은 혁명의 과정 또한 어려운 길이지만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은 그보다 더 많은 노력, 더 다방면의 노력과 투쟁을 요구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말해 준다. 레닌은 2개월간 존재했던 빠리 꼬뮌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약 70여 년에 걸쳐 존재했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경험이 놓여 있다. 따라서 이 경험, 역사적 성공과 좌절, 실패의 경험을 단지 패배의 역사로 놓아두는 것, 심지어 청산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자산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를 위한 작은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운동의 발전에 따라 이와 같은 시도는 더욱더 성장할 것이며 그 과학성의 정도는 점점 더 정밀해질 것이다.

 

 

 

제1장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의 승리

 

 

1.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러시아는 1861년 농노제를 폐지했다. 이는 밑으로부터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압력 그리고 서유럽적 발전을 추구하는 짜르의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불철저한 해방이어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경작하던 땅에 대한 소유를 획득하는 대가로 지주에게 수십 년간에 걸쳐 대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지주의 땅 중에서 비옥한 땅은 여전히 지주의 소유로 남아 있었고 그 이외에 열악한 토지들이 주로 농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농촌에는 여전히 촌락 공동체가 남아 있어서 농촌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는 비교적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대도시가 급속히 발전했고 돈바쓰 탄전과 바꾸 석유 공업 지구 등이 발전했다. 1860년에는 4000km이던 철도의 길이가 1890년에는 2만 9000km로 늘어났다. 1890년 대공장ㆍ광산ㆍ철도에 종사하고 있던 노동자 수만도 143만 2000명으로서, 그것은 1865년의 두 배 이상이며, 그 반 정도는 500명 이상의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1) 이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의 후발 주자로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하여 뻬뜨로그라드, 모쓰끄바 같은 대도시에 노동자가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노동 운동의 발생과 성장에 유리한 것이었다.

한편 농촌은 여전히 농노제의 유물이 지배적이었는데 농민과 지주 사이의 모순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했고 지주계급은 러시아 사회의 실질적 지배계급으로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 농촌 경제에서 상품 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농촌에서의 자본가 즉, 부농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이 부농계급은 비교적 많은 토지와 농기구 등 생산도구를 소유하면서 빈농이나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부를 축적했고 고리대를 통하여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하여 꿀라끄(러시아어로서 주먹을 의미)라는 경멸적 어조로 불리기도 했다. 즉,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지주계급을 온존시킨 상태에서 부농과 가난한 농민 사이의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농민은 전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농민 중 2/3 이상이 가난한 농민, 즉 빈농의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그 상당수는 문맹이었고 교회 세력의 압제로 인해 정신적으로 찌들어 있었고 또 짜르를 자신들을 보호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사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상황에서 1890년대 이전에 러시아의 사회 운동에 있어서 나로드니끼 운동이 지배적이었다. 농촌의 촌락 공동체를 기초로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을 경과하지 않고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였다. 초기의 나로드니끼 세력은 짜르를 무너뜨리면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아 짜르를 암살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짜르를 암살하고 나자 새로운 사람이 짜르로 다시 등장하였다. 레닌의 형 또한 짜르의 암살에 나섰다가 처형된 바가 있는데 이에 대해 레닌은 자신은 형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맑스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즉, 나로드니끼가 대중적인 정치 투쟁의 길을 걷지 않고 음모적인 비밀 결사의 길을 걷는 것을 비판하면서 레닌은 계급 투쟁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2. 당 건설을 위한 투쟁

 

러시아에서는 1870년대부터 노동자의 파업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초보적인 노동자 조직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880년대를 거치며 맑스주의가 러시아에 보급되기 시작하는데 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세력은 쁠레하노프가 이끄는 노동해방단이었다. 노동해방단은 ≪공산당 선언≫ 등 맑스주의 문헌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보급했으며 쁠레하노프 스스로는 사적 유물론을 선전하는 저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러시아에 맑스주의적 흐름이 생겨났으며 러시아의 맑스주의는 나로드니끼주의와 투쟁하면서 대중적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레닌은 학생 시절에 맑스주의를 접하고 나서 1890년대부터 운동에 투신한다. 러시아는 1890년대 들어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10년 동안에 공업 생산량과 노동자 총수가 2배로 늘어났다.2) 그리하여 노동 운동과 노동자 파업이 고양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레닌은 ≪인민의 벗이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자와 싸우는가?≫라는 저작을 써서 나로드니끼주의를 사상적으로 분쇄하였다.

레닌은 1895년 말에 뻬뜨로그라드에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조직 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 조직은 짜르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는데 이때 레닌은 재판을 받고 씨비르(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된다. 그러나 레닌은 감옥과 유형지에서 지속적으로 동맹에 대해 편지 등을 통해 연락하고 관여하는데 이 동맹은 1896년 총파업을 조직하여 러시아 노동 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킨다. 그리고 레닌은 유형지에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 연구≫라는 저작을 집필하여, 나로드니끼의 주장과 달리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이미 현실적 추세로 자리 잡고 있으며 따라서 농민이 아닌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혁명의 주도 세력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레닌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의 문제를 제기했는데 러시아의 사회 현실, 자본주의 발전의 문제,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의 구체적 현실에 기초하여 러시아에서의 변혁 노선을 정립하는 길로 나아간 것이었다. 또한 투쟁동맹은 노동자의 경제 투쟁과 짜르에 맞서는 정치 투쟁을 결합시키면서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의 결합의 길로 나아갔는데 이러한 투쟁은 당 건설의 싹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러시아에서 맑스주의의 흐름이 성장하고 또 노동 운동과 결합이 강화되면서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설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의 1차 대회 직후 짜르 경찰에 의해 지도부를 비롯한 많은 성원들이 체포되어 당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짜르의 탄압 이외에도 당시 당은 중앙집권적 지도부의 결여, 단일한 강령, 규약, 전술이 없는 상태였다. 당시 당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그 틈을 비집고 경제주의가 나타났다. 경제주의는 노동자는 경제 투쟁, 자유주의적 지식인은 정치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항의를 유형지에서 발표하여 경제주의에 타격을 가하였다. 경제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시야를 협소한 노-자 관계에만 묶어 두고 노동자계급 이외의 계급에 대한 시야를 가리고, 특히 국가 권력과의 투쟁의 과제를 배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계급의 철폐를 통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이라는 위상,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유형지에서 풀려난 1900년부터 해외로 망명하여 ≪이쓰끄라≫(불꽃이라는 뜻의 러시아어)를 발간하기 시작한다. ≪이쓰끄라≫는 전국으로 은밀히 배포되는 비합법 신문으로서 전국 각지의 노동 현장과 생활 현장의 소식을 실으면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이 시기에 레닌의 뛰어난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가 발표되어 당 건설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노동조합주의 정치와 구분되는 사회주의 정치, 전국적인 모든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폭로하는 정치, 노-자 간 경제적 관계만이 아니라 전 계급을 아우르는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사회주의적 전위, 그러한 사회주의 정치를 실현하고 당 건설의 토대가 되는 매개체로서 전국적 정치 신문이라는 조직적 수단 등이 책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저작 그리고 ≪이쓰끄라≫의 활동을 통해 레닌은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하여 1903년 런던에서 사실상 당을 재창건하는 제2차 당 대회가 열렸다. 그전까지 당은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당으로서의 내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제2차 당 대회에서 비로소 당은 실체를 갖는 당이 되었다.

당 대회는 당원의 자격을 규정하는 규약 1조를 둘러싸고 다수파(볼쉐비끼)와 소수파(멘쉐비끼)로 갈리게 되었다. 레닌은 당원 자격에 대해 강령에 동의하고 당을 지지, 협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당의 한 조직에 참가하여 활동할 것을 주장했고 반면에 멘쉐비끼는 강령에 동의하고 당의 활동에 협조하면 모두 당원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 조직의 상에 대해 현격한 차이를 내포한 것이었는데 레닌은 당을, 당원들이 직접 조직적으로 참가하여 강고하게 결합되는 전위당으로서 사고하고 있었던 데 반해, 멘쉐비끼는 학생들이나 교수 등과 같이 당의 조직에 직접 참가하지 않더라도 모두 당원으로 하는 느슨한 당 조직 상을 사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멘쉐비끼는 파업 참가자들이 스스로 당원임을 선언하는 것을 인정하자고까지 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그것은 당과 계급을 혼동하는 것이며 당은 계급의 전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2차 당 대회의 결과 볼쉐비끼와 멘쉐비끼는 사실상 2개의 서로 다른 조직으로 활동하면서 다만 당의 명칭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으로 같이 사용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인데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일치를 이룬다 하더라도 조직 노선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분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내용에 조응하는 조직적 형식, 틀의 문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적 대상으로 사고될 필요가 있다.

 

 

3. 1905년 러시아의 제1차 혁명

 

1900년대 들어 러시아는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레닌은 러시아가 군사적ㆍ봉건적 제국주의라고 이후에 규정한 바 있다. 당시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여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업 생산고에서 대략 중등적 위치를 차지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주계급과 농노제의 유물 속에서 반(半)봉건적인 사회 상태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의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이 또한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짜르 정권은 제국주의로서 팽창 정책을 펼쳤는데 짜르의 동아시아로의 팽창 정책이 당시 제국주의로서 발흥하고 있던 일본과의 무력 충돌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고 이어서 육상에서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짜르 정권의 허약함을 목도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정치적 조건이었다. 또한 러시아는 1900년부터 1903년까지 경제 공황을 겪었는데 이로 인한 노동자 실업의 증대, 형편의 악화가 혁명 발발의 또 하나의 조건이었다.

혁명의 직접적 발단은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1905년 1월 9일 비밀경찰의 앞잡이였던 가뽄 신부가 14만여 명의 대중을 이끌고 교회의 성상과 짜르의 초상화를 들고 노동자와 인민의 처지를 짜르에게 호소하고 탄원한다는 목적으로 집회와 행진을 조직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짜르 정권은 군대를 동원하여 발포하여 수천 명의 노동자가 사상하였다. 이 사건에 연이어서 모쓰끄바, 리가, 바르샤바 등지에서 총파업이 발생했고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1905년 1월에만 44만 명, 즉 지금까지 수십 년간 참여한 노동자의 숫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사건은 폭풍우와 같이 격화되어 갔다. 국내에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3)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4월에 런던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3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볼쉐비끼만이 참여했는데 멘쉐비끼는 별도로 협의회를 개최했다. 볼쉐비끼는 대회에서 임시 혁명정부의 수립,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ㆍ전화,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수립을 결의했다. 반면에 멘쉐비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간에 간극이 있다고 보면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도성을 인정하고 노동자계급과 농민 간의 동맹을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두 개의 상이한 전략과 전술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혁명이 시작되자 대중들은 거세게 진출하기 시작했다. 파업의 물결이 일었으며 그것은 때때로 무장 충돌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지주 토지의 몰수와 농민에 대한 분배를 요구하면서 봉기하였다. 1905년에 시작된 이바노보-보즈네쎈쓰끄 파업은 72일 동안 지속되었는데 파업을 지도하기 위해 노동자 전권 대표자(대의원) 소비에트(평의회)가 선출되었는데 이것은 최초의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되었다.4) 이리하여 역사적 성격을 갖는 대중의 자치 기관으로서 쏘비에트가 탄생한 것이다. 이 쏘비에트는 처음에는 파업의 기관으로 나타났으나 혁명의 과정에서 투쟁의 지도 기관으로 발전했으며 나아가 향후 1917년의 10월 혁명을 통해 국가 권력의 기관으로 발전되었다. 이는 혁명의 과정에서 대중 스스로 대안적 권력 기관을 창출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역사의 주체는 인민 대중이라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군대에서도 동요가 나타났는데 1905년 6월에 전함 뽀낀 호에서 병사와 수병의 반란이 발생했다. 이 반란은 그 지역의 당 조직들이 그동안의 탄압으로 약화되어 있어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군대의 동요와 혁명적 행동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9월에 모쓰끄바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쉐비끼 모쓰끄바 위원회는 10월에 정치 총파업을 결의하고 실행으로 옮겼다. 이렇게 상황이 격화하자 짜르는 입법권을 갖는 의회의 설치를 발표하고 혁명의 불길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은 입헌민주당을 결성하여 군주제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에 노동자 쏘비에트들이 확산되었는데 볼쉐비끼는 모든 곳의 쏘비에트에 참여하면서 쏘비에트를 봉기의 기관, 권력 기관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볼쉐비끼 모쓰끄바 위원회는 12월 들어 총파업을 봉기로 발전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정치적 총파업은 무장봉기로 발전하였고 군대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노동자와 군대가 정확하게 결합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대는 다시 짜르 정권에 의해 장악되었고 모쓰끄바의 봉기 노동자들은 고립되게 되었다. 멘쉐비끼가 봉기한 노동자 대오의 해체를 주장하는 등 혁명 대오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모쓰끄바 봉기는 실패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모든 혁명적 행동이 끝난 것이 아니라 대중의 혁명적 흐름은 1907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볼쉐비끼 당은 크게 성장하는데 레닌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905년 봄까지만 해도 우리 당은 지하 서클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을에는 수백만 명이나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으로 되었다.5) 혁명의 과정에서 볼쉐비끼 당이 대중적 당, 대중을 정치적으로 실제로 이끄는 당으로 전화한 것이다.

이어지는 혁명의 퇴조와 반동기는 볼쉐비끼의 전술을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이 되었는데 짜르가 설치한 의회에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가 주요한 전술적 쟁점이었다. 볼쉐비끼는 짜르의 의회에 대하여 보이코트를 주장했는데 레닌은 이에 대해 그것은 잘못된 전술이었다고 이후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이는 혁명의 퇴조기에는 합법적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을 펴서 대중과의 결합을 유지,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혁명이 사그라들자 짜르 정권은 피의 보복을 하였는데 주로 봉기에 참가하고 봉기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던 볼쉐비끼가 수천 명이나 처형되었다. 또한 당 조직들이 와해되기 시작하고 동요 분자들이 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일부 인리겐찌야들은 사상적으로 흔들려서 맑스주의 세계관을 버리고 부르주아 철학에 경도되기도 했다. 반동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막대한 것이었다.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를 평가하면서 1905년 혁명의 리허설이 없었다면 1917년의 혁명의 승리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비단 러시아 국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은 전 유럽적인 저항 운동을 가져왔고 나아가 뛰르끼예(터키), 중국과 같은 반식민지 나라의 민족 해방 운동을 고양시켰으며 인도 등 식민지 나라의 민족 운동 또한 고취시켰고 멀리는 중남미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905년 혁명이 그동안의 평화적 발전의 시기를 끝내고 20세기가 혁명의 시대로 되는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리허설! 그리고 세계 피억압 민족과 인민의 저항 운동의 불쏘시개와 마중물이 된 것이 바로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4. 반동기 그리고 새로운 고양

 

1907년부터 대략 1910년까지에 이르는 반동기는 볼쉐비끼에게 시련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볼쉐비끼는 이 시기를 견디어 내면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였다. 반면에 멘쉐비끼는 당 조직이 거의 와해되어 실체가 없게 되는 정도가 되었는데 볼쉐비끼는 비합법 당 조직이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상당수 지역에서 당의 골간 조직을 유지했으며 또 의회, 협동조합 등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을 강화하여 새로운 고양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짜르 정권은 반동기에 쓰똘삔의 반동적인 개혁 정치를 폈는데 이는 짜르 정권 스스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짜르 정권과 부르주아지의 동맹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입헌민주당을 결성하여 짜르 체제에 참가하였다. 한편 쓰똘삔의 개혁은 농촌에서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농촌에서 상품 경제,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부농계급이 크게 발전하였고 농촌의 촌락 공동체가 거의 와해되었다. 짜르 정권은 지주와 더불어 부농을 농촌에서 짜르 정권을 지탱하는 축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농촌에서는 지주와 농민 간의 계급적 모순 이외에 부농과 빈농과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계급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러시아 경제는 크게 발전하여 공업 생산고와 노동자 수가 크게 증대되었으며 1913년에 이르면 러시아의 공업 생산고가 이딸리아와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5위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정도가 되었다.

볼쉐비끼는 1905년 혁명 과정에서 대중적 당으로 발돋움하였지만 반동기에 급속히 위축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비합법 당 조직의 골간은 상당 부분 유지되었지만 많은 지역에서 당 조직이 와해되고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쉐비끼 당내에서 두 가지의 편향이 발생하였다. 하나는 해당파(解黨派)로서 당의 비합법 조직을 해체하고 당을 합법적 정당으로 전환시키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1905년 혁명 실패의 결과 낙담하여 혁명의 기치를 내리자는 것이었고 실제로는 당을 해체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편향은 해당파와 정반대로 당의 의회 의원단을 소환하여 합법적 활동을 중지하자는 것이었다. 소환파(召還派)라 불린 이 경향은 당이 반동기라는 상황에서 대중과 연결되고 결합될 수 있는 고리를 끊자는 것으로서 당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 두 가지의 편향에 대해 결연히 맞서서 투쟁하였고 그 결과 비합법 당 조직을 유지하면서도 의회, 노동조합, 협동조합, 심지어 보험 조직 등등의 합법적 공간의 활동을 강화함을 통해 대중과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지식인들은 크게 동요하였는데 사상 자체가 흔들려서 맑스주의 철학과 세계관을 청산하고 부르주아 철학, 심지어 신앙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람은 보그다노프로 그는 한때 레닌의 동지이기도 했지만 부르주아 철학으로 개종하여 공공연히 맑스주의 세계관을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철학 서적을 집필했는데 이 저작은 단지 반동적 철학에 대해 비판하고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서 당시 자연과학 진영에서 나타났던 과학의 위기를 해명하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을 심화시킨 것이었다. 이 저작에서 레닌은 물질에 대한 유명한 정의 즉,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이다라는 정식을 확립하였다. 이는 원자가 물질의 실체라는 과거의 인식이, 방사능, 전자 등의 발견으로 무너지는 상황에서 물질의 본질은 원자가 아니며 객관적 실재성만이 물질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임을 규명하여 전자, 방사능 또한 물질로 포괄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과학의 위기를 치유할 수 있었는데 레닌의 이러한 물질에 대한 정의, 그리고 유물론적 인식론의 발전은 맑스주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면서 향후 쏘련의 과학적 발전의 철학적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철학 영역에서의 이러한 투쟁의 결과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정치 노선은 그 철학적 기초와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관해 있다6)라는 관점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에 볼쉐비끼의 전술은 더욱 정교화되었는데 혁명의 퇴조기에 의회 선거를 보이코트한 것은 잘못된 전술이었다고 자기비판하며 반동기에 있어서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의 올바른 결합이라는 전술 방침을 세워 나갔다. 이러한 정확한 전술 방침으로 인해 볼쉐비끼는 반동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고, 멘쉐비끼 조직은 대부분 와해되어 실체가 없어진 것과 달리 볼쉐비끼는 골간 조직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정세의 새로운 고양을 대비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반동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10년을 넘어서면서 노동자의 파업과 농민의 저항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2년에는 100만 명 남짓, 1913년에는 127만 2000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 1910년부터 1914년 사이에, 숫자를 고의로 적게 잡은 것이 분명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만 3000건이 넘는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7) 이렇게 다시금 고양기가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가 짧은 반동기를 거쳐서 다시금 고양기로 접어든 것은 무엇보다 쓰똘삔의 개혁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농노제의 유물을 온존시킨 상태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하고 도시와 농촌의 부르주아지를 육성하여 짜르 체제를 강화한다는 쓰똘삔의 정책은 계급적 모순의 심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농민의 경우 지주와의 모순, 부농과의 모순이라는 이중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는 러시아가 반(半)봉건적인 사회 상태에서 자본주의를 급속히 발전시킨다는 정책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이 초래하는 생산력의 급속한 성장이 낡은 생산관계와 충돌하는 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때문에 1910년 이후에 노동자의 파업의 물결이 일고 농민 폭동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체적으로는 볼쉐비끼 당 조직이 유지되었다는 점, 그리고 1905년 혁명의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의 모든 계급이 정치적으로 이미 각성된 상태였다는 점 등이 새로운 고양기의 도래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쉐비끼 당은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된다. 합법적인 일간 신문인 ≪쁘라브다≫(진실이라는 뜻의 러시아어)가 창간되어 노동 현장과 생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싣게 되어 볼쉐비끼의 대중적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이에 대해 짜르 정권은 여덟 번이나 이 신문을 폐간시켰지만 그때마다 볼쉐비끼는 이름을 바꾸어 가며 ≪쁘라브다≫의 발간을 지속했고 이러한 상태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전까지 이어졌다. 다른 한편 볼쉐비끼는 의회 선거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데 대부분의 노동자 지구에서 볼쉐비끼 의원들이 당선되게 된다. 멘쉐비끼는 노동자 지구가 아니라 소부르주아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선거구에서 의원을 당선시킨다. 이렇게 볼쉐비끼 당은 새로운 고양기를 맞아 일간 신문의 창간, 의회 선거에서의 성공 등 커다란 발전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러시아의 볼쉐비끼 운동을 지도한 것은 볼쉐비끼 당의 러시아 국내 뷰로였다. 레닌은 당시 해외에 망명 중이었고 러시아 내의 볼쉐비끼의 활동은 비합법적인 러시아 국내 뷰로가 담당했는데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쓰딸린이었다.

쓰딸린은 새로운 고양기가 시작될 무렵, 레닌과 직접적 연결을 갖기 시작했는데 레닌의 지도와 레닌과의 토론 과정을 통해 ≪맑스주의와 민족 문제≫라는 논문을 쓰게 된다. 이 논문은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러시아가 다민족 국가이며 무수한 민족이 짜르 체제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매우 긴요한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볼쉐비끼와 멘쉐비끼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같이 쓰고 있었지만 사실상 별개의 당으로 활동하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멘쉐비끼의 대부분은 비합법 당을 해체하는 해당파의 길을 걷고 있었던 데 반해 볼쉐비끼는 당의 비합법 골간 조직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여 그 둘은 조직 자체가 별도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뜨로쯔끼는 당의 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볼쉐비끼가 별도의 조직을 꾸리는 것을 분파적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뜨로쯔끼 스스로는 당의 통일을 내세우면서 별도의 조직을 꾸렸는데 이것은 실은 뜨로쯔끼 자신의 분파 조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통일의 외침을 핑계로 한 통일의 파괴라는 글을 써서 뜨로쯔끼야말로 분열주의자임을 폭로하였다. 이는 뜨로쯔끼가, 멘쉐비끼적 해당파에 맞선 볼쉐비끼의 비합법 당의 유지와 강화라는 실제 내용을 덮어 가리면서 볼쉐비끼와 멘쉐비끼의 분열이라는 형식, 현상적 상태만을 핑계로 자신의 분파적 행동을 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뜨로쯔끼가 이렇게 볼쉐비끼를 비난하고 나선 것은 볼쉐비끼가 이미 독자적 당으로서 노동 대중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5.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2월 혁명

 

자본주의 세계는 20세기 들어서면서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자본주의가 19세기의 자유경쟁자본주의에서 20세기에는 독점자본주의로 전화되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으로 인한 금융 과두제의 형성, 자본의 수출, 식민지의 분할, 세력권의 분할 등을 제국주의 단계의 주요 표지로 규정하고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임을 논증했다. 이러한 인식하에 제국주의는 세력권, 식민지의 재분할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자본의 힘에 비례한 폭력을 통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인식은 단지 레닌만의 인식이 아니었으며 제2 인터내셔날에서도 1907년의 쉬투트가르트 대회,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이 위기를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앞당기기 위한 싸움으로 전화시킨다는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 전쟁의 필연성은 전 유럽적 인식이었던 것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최대로 보유하고 있는 영국과, 19세기 후반부터 중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히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이미 생산력에서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보이고 있던 독일과의 대립이 전쟁으로 발전할 것임은 충분히 예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하고 그것이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연루되는 세계 전쟁으로 발전했을 때, 제2 인터내셔날의 사회민주당들은 의회에서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져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는 각 국가와 민족의 노동자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것을 승인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2 인터내셔날은 사실상 붕괴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5년 8월 스위스 찜머발트에서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가 열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 대회는 제2 인터내셔날과의 절연도, 전쟁의 내전ㆍ혁명으로의 전화도, 자국 정부의 패배의 요구도 결의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레닌을 중심으로 한 찜머발트 좌파가 결성되었는데 이 모임은 제국주의 전쟁의 혁명으로의 전화, 자국 정부의 패배를 주장하며 이후 제1차 대전의 전 기간에 걸쳐 혁명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은 누가 지구상의 더 많은 지역을 약탈할 권리를 가질 것인가를 둘러싼 살육전이었으며 따라서 조국 방위가 아니라 전쟁 자체를 반대하고 자국 정부의 패배를 요구하며 전쟁을 계급 투쟁으로, 혁명으로 전화시키자는 것이 레닌이 주장한 전술이었고 이는 1917년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 혁명으로 실현되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레닌은 이 규정에 따라 제국주의 전쟁은 제국주의 정치의 연속이며 따라서 조국의 방위가 아니라 전쟁 자체를 반대하고 자국 정부의 패배를 요구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의 탐욕이 인류 전체에게 어떠한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생생히 보여 주었으며 수천만 명이 전쟁에 희생되고 인류 문명 전체가 수십 년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레닌은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혁명적 정세를 불러올 것을 예견하면서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전쟁으로 인해 나타나기 시작한 국가와 독점자본주의의 결합 즉,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생산의 사회화를 극대화시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에는 중간의 계단이 없으며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물질적 전제임을 밝혔다(≪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레닌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20세기에,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보편화되었던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최초의 맑스주의적 분석이었다. 이후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분석들은 레닌의 이 분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었다.

한편 레닌은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제국주의 질서의 발전의 특징을 불균등 발전으로 파악하고,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일국 혹은 몇몇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의 가능성을 밝혔다. 불균등한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몇몇의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8) 이후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이라는 논문에서 위와 같은 인식을 보다 분명히 발전시켰다. 세 번째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한 번에 모든 전쟁 일반을 제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들을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이한 나라들에서 극히 불균등하게 진행된다. 이로부터 사회주의는 모든 나라들에서 동시적으로 승리를 획득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반박할 수 없는 결론으로 도출된다. 그것은 처음에는 하나의 혹은 몇몇 나라들에서 승리를 획득할 것이며,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얼마간 부르주아적 혹은 전(前)부르주아적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9) 이러한 레닌의 인식과 분석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던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문제를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문제와 연관시킨 것이었으며 그 결과 일국 혹은 몇몇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도출한 것이었다. 이는 맑스 당시, 혁명의 승리를 전 유럽적인 동시 혁명으로 파악했던 것과 차이가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가 자유경쟁자본주의로부터 독점자본주의로, 제국주의 단계로 전화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레닌의 이러한 결론은 뜨로쯔끼가 이후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회의하고 유럽 혁명의 지원이 없다면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레닌의 이 결론은 이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기초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극적으로 드러난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면서, 제국주의 질서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의 모순을 분석하여 민족 문제에 대한 이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레닌은 민족 자결권이라는 논문에서 민족 자결권은 법적인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 운동의 발전의 견지에 파악되어야 하며 민족 자결권은 억압받는 약소민족이 분리하여 민족 국가를 독립적으로 세울 수 있는 권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약소민족의 이러한 민족 자결권을 지지해야 하는데, 약소민족의 민족 자결의 권리를 인정할 때만 약소민족의 노동자계급과 대(大)민족의 노동자계급 간의 진정한 연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이러한 레닌의 입장은 수많은 민족의 다민족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많은 약소민족들이 대러시아 민족의 압박을 받는 현실 속에서 약소민족의 자결의 권리에 대한 인정을 통해 대러시아 민족의 노동자계급과 약소민족의 노동자계급의 통일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답을 내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레닌의 민족 자결권 테제는 러시아 혹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의 민족들의 민족 해방 운동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은 곧바로 전 세계에 민족 해방 운동의 고양을 가져왔던 것이다.

레닌은 이렇게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론을 갈고닦으면서 혁명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반해 당시의 멘쉐비끼 그리고 일부 논자들은 당시에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멘쉐비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간에 커다란 간극을 두며 민주주의 혁명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전술을 폈다. 그리고 카우츠키 등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에서 혁명을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를 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쏘련이 해체된 21세기 지금도 재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앞서 레닌이 분석한 바와 같이 러시아는 전쟁 전에 이미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고 세계 5위의 공업 생산고를 갖고 있었다. 즉, 세계적 차원에서 러시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등적 발전 국가였다. 그리고 전쟁 기간에 러시아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이 사회주의의 물질적 조건, 객관적 조건이라면 주체적 조건 또한 러시아에는 마련되어 있었다. 즉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주력인 노동자계급이 1913년에 이미 공업에서 350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피고용된 전체 임금 노동자 수는 1,500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계급을 이끌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전위당으로서 볼쉐비끼 당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당은 이미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쌓고 있었다는 것 또한 주요한 조건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에서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은 서서히 혁명적 정세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전선에서 독일군에게 군사적 패배를 겪었고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었다. 또한 1916년에는 식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도시는 기아에 굶주리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되었는데 1916년에는 1,500건이 넘는 파업이 발생하여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참가했다. 병사들 또한 염전(厭戰) 분위기를 보였는데 상관의 명령에 대한 거부, 탈영, 적과의 교류 등이 일어났다. 농민 또한 지주를 공격하여 지주의 가옥을 불태우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1916년 중반기에 중앙아시아와 까자흐쓰딴에서 수백만 명이 가세한 봉기가 갑자기 발생했다. 피압박 소수 민족들이 짜르 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10)

이렇게 정세가 혁명적으로 흐르기 시작하자 짜르는 혁명의 위험을 감지하고 독일과 단독 강화 교섭을 비밀리에 시작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러시아와 동맹하여 독일에 맞서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하게 하기 위하여 짜르를 교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또한 서유럽 자본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짜르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행동의 발전은 이러한 음모를 앞서 나갔다. 1917년 2월 17일 수도의 뿌찔로프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공장 측은 이에 대해 직장 폐쇄로 맞섰다. 그러나 파업의 대오는 확산되었고 볼쉐비끼 뻬뜨로그라드 위원회는 이러한 파업의 흐름을 정치적 시위로 발전시켜 나갔고, 총파업을 조직하여 봉기로 발전시킬 것을 결의했다. 2월 25일 총파업이 발생하였고 다음 날 그것은 봉기로 발전했다. 병사들이 동요하면서 6만 명이 넘는 수비대 병사들이 봉기의 대오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혁명의 향방은 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짜르는 며칠 만에 퇴위를 공표했고 이어서 새로운 짜르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이 혁명 세력에 의해 선포되었다. 2월 혁명이 승리한 것이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사실은 군복을 입은 농민들)은 혁명 과정에서 공고한 동맹을 맺었고 그리하여 혁명 과정에서 단일한 노동자ㆍ병사 쏘비에트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쏘비에트는 혁명의 승리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건설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볼쉐비끼 지도부 대부분은 망명하고 있거나 아니면 짜르에 의해 감옥 혹은 유형지에 고립된 상태에 있어서 혁명 초기 정확한 정치 방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부르주아지와 지주가 연합한 임시 정부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의 기관으로서 쏘비에트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임시 정부가 나란히 존재하는 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른바 이중 권력이 출현한 것이다.

 

 

6. 레닌의 4월 테제

 

레닌은 노동자ㆍ병사 쏘비에트에 대해 그것을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파악했다. 그러면서 임시 정부를 믿지 말 것과 유일한 보증은 노동자계급의 무장일 뿐이라고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편지를 보내 정치적 제언을 하였다. 한편 임시 정부는 제국주의 전쟁의 지속을 천명했고 짜르가 맺었던 비밀 조약들을 공표하지도 않았다. 권력의 주체가 짜르에서 임시 정부로 바뀌었을 뿐 전쟁에 관한 한 짜르 체제의 지속이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과 농민 등 전쟁에 지친 인민들의 요구를 배반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쏘비에트에서 집행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은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정책을 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들, 다른 한편으로는 쏘비에트의 지지를 받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의 상호 간의 대치 국면, 이중 권력의 상황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4월 3일 수도인 뻬뜨로그라드로 돌아왔다. 레닌은 돌아온 즉시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4월 테제라 불리는 것이었다. 현재의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혁명의 1단계가 이루어진 것이며 이제 사회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혁명의 2단계를 추진하는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이 레닌의 인식이었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가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멘쉐비끼의 인식 그리고 임시 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통해 전쟁의 종식, 강화의 체결을 이루어 내자는 당시 볼쉐비끼 국내 지도부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전쟁의 종식은 서유럽 자본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러시아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임시 정부로서는 불가능하며 오직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어 낼 때만 전쟁의 종식은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레닌의 이 견해는 혁명 과정에서 확증되었는데 2월 혁명 이후 10월 혁명에 이르는 전 기간에 걸쳐 계급 투쟁의 최대의 쟁점은 전쟁의 문제,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쟁취의 문제였다는 점에서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밝힌 견해는 향후 구도를 결정짓는 방침이 되었다. 그리하여 레닌 귀국 전에 애매한 입장을 가지고 있던 볼쉐비끼 지도부들은 대부분 레닌의 4월 테제에 동조하게 되었고 이후 볼쉐비끼 당은 장기간에 걸쳐 평화적인 선전을 통한 대중 획득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즉, 혁명의 평화로운 발전의 길이 4월 테제 이후 볼쉐비끼의 방침이었는데 이는 노동자계급과 농민(병사)들이 무장하고 있어서 실질적 권력을 쥐고 있다는 상황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레닌은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제기하면서, 대중이 전쟁 종식의 참된 가능성을 이해하고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의 부르주아 임시 정부에 대한 지지 정책의 계급적 성격을 깨닫기를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7월의 꼬르닐로프의 군사 반란 전까지 대략 4개월 가까이 이어졌는데 혁명적 정세하에서 4개월은 평상시의 수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라 할 수 있다.

2월에서 10월에 이르는 기간에 임시 정부의 위기는 3차례 찾아왔다. 첫 번째의 위기는 1917년 4월 18일 임시 정부가 전쟁의 지속을 천명한 것에 대하여 대중들이 분노하면서 수십만 명이 대규모 시위에 나섰을 때였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에 대하여 임시 정부는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의 성원을 내각에 입각시키는 것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는 길을 택했다. 즉 아직까지는 대중의 상당수가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 세력의 임시 정부에 대한 지지의 강화를 통해 위기를 해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멘쉐비끼와 볼쉐비끼 사이의 중간 분자들의 입지가 축소되었으며 대중의 볼쉐비끼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레닌이 제기한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ㆍ전화가 일정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 볼쉐비끼 주도로 6월 18일에 대규모 시위가 조직되는데 시위 대오는 대부분 볼쉐비끼의 구호를 내걸었다. 이에 맞서 께렌쓰끼 임시 정부는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공세를 재개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전선에서의 공세 재개는 실패하여 대부분 군사적 패배를 당했다. 그리하여 께렌쓰끼 정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반대로 볼쉐비끼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가속적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이것이 임시 정부의 2차 정치 위기이다.

이러한 2차 정치 위기에 대해 임시 정부는 전선에서 공세의 실패 책임을 볼쉐비끼에게 떠넘긴다는 음모를 꾸몄다. 그리하여 입헌민주당이 임시 정부로부터 탈퇴한다는 선언을 하여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이 위기감에 싸이게 하고 그로 인하여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이 볼쉐비끼에 맞서는 길로 나가면서 노동자와 병사의 무장을 해제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사들은 전쟁의 지속에 분노하면서 즉각적으로 임시 정부를 타도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볼쉐비끼는 아직은 전국 각지에서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을 지지하는 세력이 다수라는 점을 고려하여 임시 정부의 즉각적 타도가 아니라 혁명의 평화로운 발전 정책을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7월 4일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수십만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이에 대해 사관생도와 까자끄 부대를 동원하여 시위대에 발포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임시 정부는 볼쉐비끼에 대한 전면 탄압을 시작했는데 기관지인 ≪쁘라브다≫의 발행을 금지시키고 레닌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전선에서는 다시금 사형 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전방과 후방에서 혁명적 기운이 강한 부대들의 무장 해제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은 최종적으로 임시 정부 편으로, 즉, 반혁명의 편으로 옮겨 갔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대해 레닌은 7월 사건으로 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 즉, 이중 권력 상황이 종식되고 권력이 임시 정부로 집중되었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하면 혁명의 평화로운 발전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의 승리

 

그리하여 7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뻬뜨로그라드에서 볼쉐비끼 6차 당 대회가 열려 당의 정치 방침을 결정하게 되었다. 레닌이 지하에 은신한 상태에서 대회에서는 쓰딸린이 정치 보고를 하였고 반혁명적 부르주아 임시 정부의 완전한 타도를 방침으로 정했다. 즉, 더 이상 혁명의 평화로운 발전, 인내를 갖는 선전의 방식이 아니라 힘에 의한 임시 정부의 타도를 결정한 것이다. 볼쉐비끼가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의 다수가 볼쉐비끼의 지지로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볼쉐비끼는 전국 각지의 쏘비에트에서 집행부를 볼쉐비끼로 교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는 볼쉐비끼와 혁명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군사 행동에 나섰는데 이것이 꼬르닐로프 군사 반란이다. 전선의 군대를 수도로 이동시켜 수도의 혁명 세력을 진압하려 한 것이다.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은 이때 꼬르닐로프의 반란이 임시 정부 자체를 타도하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군사 반란에 맞설 것을 호소하였다. 볼쉐비끼 또한 노동자와 병사들을 동원하여 철도를 봉쇄하는 등 전선의 병사의 이동을 저지하여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꼬르닐로프 군사 반란은 실패하게 되어 지배계급인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운 정세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과 볼쉐비끼 당은 봉기를 일정에 올리게 된다. 레닌은 봉기는 기술(예술, art)이라는 맑스주의 명제에 따라 봉기에 대한 실제 기술적 준비에 착수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전 러시아 쏘비에트 2차 대회가 열리는 10월 25일 전에 봉기를 실행할 것을 결정한다. 한편 혁명적 정세는 더욱더 고조되어 갔는데 농민들의 토지를 위한 운동은 봉기로 전화해 갔고 전선과 수도의 수비대 병사 대부분이 볼쉐비끼를 지지하게 되었다. 멘쉐비끼 측에서도 전쟁의 지속을 반대하는 국제주의파가 형성되었으며 사회혁명당에서도 임시 정부에 대한 협조 정책을 반대하는 사회혁명당 좌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볼쉐비끼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권력 장악의 수단은 임시 정부와 멘쉐비끼 그리고 사회혁명당의 반혁명성이 굳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평화로운 방식이 아니라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봉기의 날은 쏘비에트 2차 대회가 열리는 25일의 전날인 24일로 정해졌고 이날 레닌은 은신처에서 돌아와 봉기를 직접 지도했다. 우체국, 전신국, 전화국, 주요 교량 등 주요 지점들이 봉기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고 임시 정부 내각이 최후로 도피한 동궁(冬宮)에 대해 25일부터 26일 사이에 공격이 가해져 임시 정부 각료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다. 이렇게 봉기는 정치적 조건이 무르익은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충분히 준비되어 실행된 결과, 사실상 거의 무혈로 진행되고 성공하였다. 이러한 봉기의 성공은 인류가 착취와 계급을 폐지하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24일 시작되어 25일 아침에 봉기가 성공했을 때 레닌이 작성한 포고 러시아 시민에게!라는 전단이 배포되어 임시 정부의 타도와 혁명의 성공을 알렸다. 그날 밤 열린 쏘비에트 2차 대회는 레닌이 작성한 노동자, 병사, 농민 여러분께!라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호소문은 모든 권력이 노동자ㆍ병사ㆍ농민 쏘비에트로 옮겨졌음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어서 26일 레닌은 평화에 대한 포고토지에 대한 포고에 관하여 쏘비에트 대회에서 보고를 했고 두 개의 포고가 공포되었다. 평화에 대한 포고는 무병합, 무배상을 조건으로 즉각적으로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실현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고, 토지에 대한 포고는 지주 토지의 무상 몰수, 모든 토지의 국유화, 국유화된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여 사용하게 하는 것 등이 담겼다. 레닌이 농민이 토지를 집단적으로 사용하고 경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결정하였던 것은 사회혁명당 좌파와 타협한 결과였다. 즉, 농업에서 사회주의 실현을 잠시 유보하는 것을 통해 노-농 동맹을 유지하고 강화할 것을 도모한 결과였다.

이렇게 10월 사회주의 혁명은 봉기가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권력은 쏘비에트로 넘어갔다. 레닌은 쏘비에트 정부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볼쉐비끼의 주요 인물들이 내각을 의미하는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사회혁명당 좌파가 쏘비에트 정부에 참여하여 주로 농업과 농민 관련하여 역할을 했다. 이로써 혁명의 근본 문제인 권력의 문제가 해결되고 이후 사회주의 러시아는 반혁명에 맞서 혁명을 공고히 하면서 사회주의적 개혁 조치들을 실행하게 된다.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근로 대중이 지배계급이 되는 새로운 사회, 계급 대립이 폐지되는 사회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노사과연

 

 


 

1)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1권, 편집부 역, 거름, 1991, p. 24.

 

2) 같은 책, pp. 67-68.

 

3) 같은 책, pp. 155-156.

 

4) 같은 책, p. 171.

 

5) 레닌, 같은 책, p. 189에서 재인용.

 

6) 레닌,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2권, p. 40에서 재인용.

 

7) 같은 책, p. 84.

 

8) “The United States of Europe Slogan(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 Lenin Selected Works, Vol. 1, Moscow: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1946, p. 632.

 

9) “The War Program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 Lenin Selected Works, Vol. 1, p. 742.

 

10) B. N. 포노말료프 편, ≪소련공산당사≫ 제2권, pp. 140-141.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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