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맑스주의 세계관에 대한 공격과 과학의 속류화―신재길 동지에 대한 세 번째 비판

 

문영찬 | 연구위원장

 

 

 

1. 사적 유물론의 일원성과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

 

신재길 동지는 사적 유물론이 2원 구조가 아니라 일원론이라는 필자의 비판에 대하여 사적 유물론이 일원론임은 상식이며 자신의 의도는 토대-상부구조가 2층 구조임을 가리키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가 용어의 맥락에 따른 의미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 용어의 사전적 의미를 중시했다고 하면서 이를 용어물신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가 필자에게 자신의 의도에 따라 비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논쟁은 주관적 의도가 아니라 용어와 개념의 객관적 의미에 따라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재길 동지가 이를 용어물신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용어와 개념의 객관적 의미보다 자신의 주관적 의도를 더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그런 점에서 신재길 동지의 글에서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주관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신재길 동지의 주관주의는 단순한 주관주의가 아니다. 단순한 주관주의라면 그에 대한 적절한 지적과 비판을 통해 교정될 수 있을 터이지만 신재길 동지의 주관주의는 주관적 관념론으로까지 나아가는 주관주의이다. 즉, 신재길 동지의 주관주의는 세계관의 차원에서 비롯되는 주관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 세계관에 대한 공격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격에 맞서 한편으로 맑스주의 세계관을 옹호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을 주관주의적으로 속류화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과학적 인식의 심화를 대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세계관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검토하기에 앞서, 사회이론의 영역에서 사적 유물론이 일원론이라는 것과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의 문제를 연관 지어서 검토해 보자. 왜냐하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의 문제에서 신재길 동지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사적 유물론이 일원론이라는 것의 의미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재길 동지는 상부구조의 핵심인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이 무장력을 소유하고 장악한 것이 바로 지배도구의 본질이다. 그리고 정치(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은 그 무슨 형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무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1)

 

무장력이 국가의 본질적 측면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국가의 본질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 즉 토대의 규정력에 대한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을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에 대한 토대의 규정력은 토대, 즉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계급적 규정력을 말한다. 이러한 토대의 규정력으로 인해 국가는 생산관계 상의 지배계급의 정치적 지배도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공공연히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이기만 하다면 국가는 토대의 규정력에 대해 상대적 독자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된다. 국가가 이렇게 토대에 대해 상대적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것이 공공연히 드러난다면 그것은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계급관계, 지배-피지배 관계에서의 역할은 극도로 제약될 것이고 사회는 항상적인 내전 상태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공적 권력이라는 외피를 갖는 것은 국가가 지배계급의 정치적 지배도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자유, 평등 등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계급대립에 대해 외면적으로 초연한 모습을 갖추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규정력은 근원적이고 일차적이기 때문에 국가는 내용적으로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이지만 형식상으로는 공적 권력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토대의 규정력으로부터 상대적 독자성을 갖는 것은, 즉,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규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그 외피, 형식, 즉, 자유, 평등의 이념과 공적 권력의 형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 토대의 규정력으로부터 상대적 독자성의 의미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을 무장력으로부터 찾는다. 이것은 대단히 속류적인 인식인데 국가의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은 무장력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장력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공적 권력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것이 공공연히 드러난다면 국가가 무장력을 독점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신재길 동지는 이와 같은 필자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왜곡하고 있다.

 

정치(국가)의 상대적 독자성경제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이다. 그리고 정치(국가)의 형식이 갖는 상대적 독자성은 정치(국가)의 내용 즉 계급 지배도구에 갖는 독자성이다. 따라서 정치(국가)의 상대성을 정치(국가)의 형식에서 찾는 것은 오류이다.2)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경제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정치(국가)의 내용 즉, 계급 지배도구에 대해 갖는 독자성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경제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정치(국가)의 내용, 즉, 계급 지배도구에 대해 갖는 상대적 독자성은 동일한 것이다. 국가의 경제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국가가 경제라는 토대의 규정력으로부터 상대적 독자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토대라는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계급적 규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갖는다는 것, 다시 말하면 국가가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규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을 비유라는 말로써 간단히 청산한 신재길 동지는 국가의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을 토대의 계급적 규정력으로부터,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규정으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정치) 영역의 경제 영역으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형식논리인데 토대-상부구조의 변증법을 비유라는 말로써 청산한 결과 불가피하게 형식논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해 이렇게 형식논리적으로 파악하는 신재길 동지는 국가의 내용, 즉,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점과 국가의 형식 즉, 공적 권력이라는 것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국가는 자본주의에서 총자본을 대변하는 계급지배 도구의 역할과 전 사회의 공공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것이 국가의 모순이다. … 국방, 외교, 조세, 교육, 치안 등등은 총자본의 요구이면서 동시에 전 사회적 요구를 국가가 담당하는 것이다. 이런 기능은 공공성의 원리가 적용된다. 따라서 국가의 계급성은 폐지되어야 하고 국가의 공공성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 경제에서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생산의 사회성이 강화되듯이 국가의 계급성이 폐지되면 국가의 공공성이 강화되는 것이다.3)

 

국가의 토대로부터의 규정력을 형식논리적으로 파악한 신재길 동지에게 국가는 한편으로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이고 다른 한편으로 공공성을 갖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를 신재길 동지는 국가의 모순이라고 하지만 그때의 모순 개념은 변증법적 모순 개념이 아니라 형식논리적으로 파악된 모순 개념이다. 그리하여 그 모순의 운동의 결과는 국가의 지양, 즉, 국가의 사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국가의 계급성이 폐지되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공공성이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맑스주의의 국가 소멸론은 부정되고 있다. 이러한 신재길 동지의 견해는 변증법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형식논리의 한계와 오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변증법적 관점에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국가의 내용은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이며 국가의 형식은 그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신재길 동지가 말하는 국가의 공공성의 원리는 그러한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가 갖는 성질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관계를 올바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에서 형식은 내용에 의해 규정된다. 즉, 국가의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 공공성의 원리는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국가의 내용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용이 바뀌면 형식도 바뀌게 된다. 즉, 국가의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성격이 폐지된다면 국가의 공적 권력이라는 형식도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적 성격은 국가라는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의 수중에, 주요하게는 대중들의 자치조직, 대중조직으로 이관되게 된다. 이것이 국가의 내용과 형식을 둘러싼 변증법적 내용이라면 신재길 동지의 형식논리에서는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성격과 공공성의 원리가 병렬되고 그에 따라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성격이 사라져도 국가의 공공성은 강화된다는 결론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그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 공공성의 원리를 띠는 것은 오직 국가가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며 이 두 측면을 병렬시켜서 국가의 소멸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모순 개념을 희화화하는 것이고 실천적으로는 맑스주의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재길 동지는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개념들을 비유라는 간단한 말로써 청산한 후 소위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라는 3분법의 형식논리를 펼쳤다. 그리고 이렇게 분해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를 다시 관념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소위 지배성과 집단성의 개념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역사는 관념적인 지배성과 집단성의 논리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을 둘러싼 인간들의 모순적 투쟁,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발전한다는 것을 맑스는 이미 180년 전에 과학적으로 논증한 바 있고 그것이 바로 사적 유물론인 것이다. 따라서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은 이와 같이 토대-상부구조의 개념에 입각할 때만 그 참다운 의미가 드러나며 형식논리를 넘어서서 변증법을 전면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의 특수한 성격

 

필자는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 바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 영역은 물질적 관계로부터 자립성을 갖지 않지만, 그 관계는 직접적인 반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매개를 거쳐서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매개의 고리들이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립성을 규정하는 것이다.4)

 

필자의 이러한 파악에 대하여 신재길 동지는 이데올로기는 의식 형태이며 의식을 물질과 매개하는 것은 인간의 실천이며, 의식이 언어라는 표현 형태를 갖게 되면 객관화되고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5)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신재길 동지의 비판은 올바른 점과 잘못된 측면이 뒤섞여 있다.

먼저, 의식과 물질의 매개는 실천이라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 필자 또한 이를 부정한 적이 없으며 인간은 실천하는 만큼만 인식의 폭이 확대된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이를 통해, 물질적 관계가 매개를 통하여 이데올로기에 반영된다는 필자의 언급이 마치 물질과 인식의 매개고리로서 실천을 부정한 듯이 왜곡하고 있다. 그렇지만 물질적 관계, 예를 들면, 생산관계 영역에서 계급적 대립은 무매개적으로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투쟁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인식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투쟁이 실천의 한 종류임은 명확하다. 그런데 그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무매개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대립, 계급의식, 계급투쟁, 계급의 폐지 등의 일정한 매개적 개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철학의 영역에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이 기계적으로, 무매개적으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으로 등치되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관계, 계급관계는 물질과 의식의 대립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매개 개념으로 하여 반영되게 된다. 그리하여 물질이 의식보다 일차적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답변은 현실 사회에서 물질적 생산을 수행하는 노동자계급이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며,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보다 일차적이라는 사회적, 계급적 의식이 발전할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예술의 영역에서는 예술 작품의 사상적 내용과 예술의 형식이라는 대립 구도가 그대로 물질적 생산에서의 계급적 대립관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관념론적 입장과 유물론적 입장이 물질적 생산의 영역에서의 대립 구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과학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법칙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그러한 철학적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 과학, 예술 등등의 각각의 영역은 물질적 생산에서 형성되는 계급적 대립관계가 직접적으로, 기계적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의식의 대립, 사상적 내용과 예술적 형식, 과학적 법칙들이라는 매개를 통해 굴절되면서 반영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영역은 물질적 관계로부터 자립성을 갖지 않지만 물질적 관계의 직접적 반영이 아니라 철학, 예술, 과학 등등의 이데올로기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매개들을 통해 반영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이에 대해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토대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러한 이데올로기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매개가 아니라 언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의 문제를 혼란시키는 주장이다. 신재길 동지는 사고가 언어 형태를 통해 객관화되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분리되면 의식은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한다6)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데올로기의 성립과정과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의 문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언어가 사고의 현실태라는 것도 맞는 말이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로부터 신학, 철학, 예술 등등이 성립했다는 것도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이 분화되어 성립했다는 사실과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로부터 상대적인 독자성을 갖는다는 문제는 서로 다른 것이다.

사고의 현실태는 언어라는 말로써는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를 반영한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반영이 직접적 반영이 아니라 매개를 통한 반영이라는 점이 해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고의 현실태는 언어라는 명제로써는 사고가 인간의 실천을 매개로 외적 세계를 반영하며 언어로 구체화, 객관화된다는 것은 드러나지만 그러한 사고가 경제적 토대의 반영이라는 점은 드러나지 않는다. 나아가 직접적 반영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개념들, 법칙들을 통한 매개라는 점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사고의 현실태는 언어라는 명제는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의 반영이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며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토대로부터 상대적 독자성을 근거 지울 수 없다.

이에 대해 맑스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들이 물질적 관계로부터 자립적인 가상을 갖지 않는다고 하여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제적 토대의 전면적 규정력을 해명했다.7) 그리고 이 점만 갖고는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이 해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각 영역의 특수한 성격이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매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각각의 영역의 특수한 매개를 놓치면 그것은 속류 유물론이 된다. 예를 들면 민중시를 짓는다거나 민중가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사상적 내용만 중시하고 예술적 형식이라는 매개를 놓치면 그 시와 노래는 운동적으로도 도움이 안 되고 예술적으로도 저평가될 것이다. 따라서 민중시를 짓거나 민중가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예술의 형식을 중시하는 것이 운동적으로도 기여하는 것이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고의 현실태는 언어라는 말로써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예술의 형식은 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 영역에 고유한 매개이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언어는 사고의 현실태라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며 이데올로기의 각각의 영역의 특수한 성격을 해명하는 가운데 그 영역을 규정하는 매개 개념과 법칙들의 파악을 통해 비로소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이 해명된다고 할 수 있다.

 

 

3. 전쟁의 문제에 대한 왜곡

 

신재길 동지는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삼단논법을 통해 주장하는 것에 대해 필자는 삼단논법은 형식논리이며 따라서 그 명제의 참임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했었다. 그러자 신재길 동지는 최근의 글에서 전쟁은 현상이며 전쟁의 본질은 계급투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전쟁의 본질이 왜 계급투쟁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전쟁의 본질이 계급투쟁이었다는 엥겔스의 언급을 드는 것으로 설명을 대체하고 있다. 사실 본질 개념은 변증법적 개념이 되기 이전에 형이상학의 전유물이었다. 본질, 존재 등등의 관념으로 마치 모든 것이 설명되는 양 주장했던 중세의 스콜라학에 대해 근대 철학자들은 많은 비판을 했고 그에 따라 다수의 철학자들이 유물론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쟁의 문제는 실천적으로 그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수고스럽더라도 전쟁의 문제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견해를 상세히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신재길 동지는 다음과 같이 삼단논법의 논리로 자신의 견해를 전개했다.

 

경제의 집약집중이 정치이고 정치의 연장이 전쟁임을 인정한다면 당연한 논리로서 전쟁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의 가장 격렬한 양상임을 인정해야 한다.8)

 

여기서 잘못된 것은 당연한 논리로서라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는 삼단논법이기에 참이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필자는 삼단논법이 논리의 형식을 따지는 것을 넘어서서 내용적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이행할 경우, 언제나 그 명제의 참이 성립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경우에 구체적으로 올바름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9)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 이러한 필자의 비판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형식논리가 사칙연산이라면 변증법은 미적분의 문제라고 하면서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절대적으로 대립시킨다면 잘못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논리는 논리 형식상의 참, 거짓을 가리는 문제에 국한되며 변증법은 그 실질적 내용에 대한 판단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당연한 논리로서라는 구절을 통해, 즉, 삼단논법을 통해 전쟁의 본질이 계급투쟁이라고 주장했던 신재길 동지의 오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전쟁의 원인이 경제관계라고 할 경우, 그것은 계급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고, 계급적 관계가 아닌 경제적 원인에 의해서일 수도 있다10)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여기서 전쟁의 원인에 계급적 관계가 아닌 경제적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 그 예로 부의 획득 등의 경제적 원인을 들고 있다. 부의 획득이란 무엇인가? 잉여가치의 착취나 약탈이다. 이제 잉여가치의 착취나 약탈이 계급적 관계가 아닌 그 어떤 경제적 원인이 되었다. 이런 주장을 부르주아 사회학자라면 모를까 맑스주의자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기괴하고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가?11)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잉여가치라는 경제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의 획득=잉여가치의 착취나 약탈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신재길 동지가 잉여가치 개념에 대한 초보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필자를 비난하려는 주관적 의도가 지나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논리가 엉터리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잉여가치라는 개념은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자본-임노동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임노동 관계의 영역 밖의 수공업자의 생산물이나 아니면 자본-임노동 관계 이전, 즉, 자본주의 발생 이전의 영역에서는 잉여가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때의 부는 잉여가치로 규정되지 않는다. 노예제나 농노제에서는 잉여가치가 아니라 잉여생산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며 잉여가치는 잉여생산물이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형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원인으로서 계급적 관계가 아닌 경제적 원인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우선 민족 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대 사회에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간의 전쟁을 들 수 있다.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은 일상적 시기에는 교환을 통하여 경제적 거래를 한다. 유목민족은 곡식을 얻고 농경민족은 가축을 얻는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교환관계가 장애에 부딪힐 경우, 예를 들면, 한파나 가뭄에 의해 가축과 농산물의 생산이 순조롭지 못하고 그에 따라 경제적 교환이 순조롭지 못할 경우 그것은 쉽게 전쟁위기로 전화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원인에 의할 경우에도 전쟁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유목민족들이 통합하여 정치적 힘이 커질 경우, 반대로 농경민족이 분열하여 하나의 국가에서 여러 국가로 나뉠 경우 전쟁은 쉽사리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고대 중국사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간의 이러한 관계, 이러한 종류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민족 간의 관계와 전쟁에서 계급관계, 혹은 계급투쟁이 본질로 작용했다 할 수 있는가?

그러면 신재길 동지가 전쟁의 본질은 계급투쟁이라는 주장의 사례로 인용했던 것들을 살펴보자. 신재길 동지는 16세기의 종교전쟁들에서는 … 꼭 마찬가지로 계급투쟁들이었다는 엥겔스의 ≪독일 농민전쟁≫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고 또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논하는 레닌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12) 앞의 ≪독일 농민전쟁≫에서 엥겔스가 종교전쟁의 본질을 계급투쟁으로 파악한 것은 과학적인 것이다. 중세에 있어서 모든 정치적 요구, 심지어 과학에 관한 주장조차 신학의 외피를 써야만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데카르트가 새로운 과학적 탐구를 하고 발견을 했으면서도 그 결과, 그 성과를 그 자체로 발표하지 못하고 신의 섭리를 끌어들여야 했던 것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 심지어 계급투쟁 또한 신의 섭리를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전쟁의 본질이 계급투쟁이었다는 엥겔스의 파악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다라고 하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레닌이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그 계급적 성격을 논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것이지 제1차 세계대전 자체가 계급투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보면 러시아 혁명이라는 계급투쟁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것은 러시아 혁명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다. 전쟁의 본질은 계급투쟁이다라고 일면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엉터리 같은 논리와 역사에 대한 왜곡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면 이러한 일면성을 피하면서 전쟁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체적인 경우에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기 때문에 어떤 정치의 연속인가에 따라 어떤 전쟁인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본질은 계급투쟁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야기하는 정치의 성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물론 정치의 상당 부분은 계급의 문제, 계급투쟁의 문제이지만 계급투쟁의 문제가 아닌 정치 또한 존재한다. 예를 들면 민족 간의 모순관계, 외교관계의 상당수는 그것이 정치적 현상이지만 곧바로 계급투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성질의 것도 많이 있다. 그러면 이 점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문제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예로 들어 보자. 중일전쟁 발발 전에 중국 공산당은 반제반봉건 혁명을 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토지 혁명이 수행되고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중국에 대한 전면적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에 중국 공산당은 토지 혁명을 멈추고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의 연합, 통일전선을 주창했다. 그리고 그 귀결로서 중국의 지주계급 또한 반일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는 중국과 일본 간의 민족적 모순이 전쟁으로 폭발되었을 때 그것은 중국 내부의 계급투쟁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반일을 표방하는 여러 계급 세력들의 연합을 촉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만약 신재길 동지와 같은 주장을 따랐다면 중일전쟁에서 항일 세력의 필연적 분열로 말미암아 중국 공산당의 승리, 중국 인민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 변증법을 형식논리로 전화시키고자 했고 또한 소위 본질 개념을 끌어들여 모든 전쟁은 계급투쟁이라는 주장을 밀고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귀결은 자신의 논리가 엉터리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실천상의 수많은 오류를 낳게 되는 편향된 것이었다.

 

 

4. 철학의 근본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논증의 대상이다?

 

철학의 근본문제는 철학적 사고, 즉 이론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입장은 과학의 길을 걸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가르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철학의 근본문제, 즉 물질과 의식 중에서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의 문제에서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논증의 대상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재길 동지의 혼란한 의식이 집약되어 있는데 왜 그런지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어가 보도록 하자.

레닌은 철학의 근본문제가 선택의 문제인지 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인식론의 두 개의 궁극적 개념에 대해 그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정의 이외에는 어떠한 정의도 본질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한 개념을 그보다 더 포괄적인 다른 개념 속에 포섭시키는 것을 의미한다.13)

 

여기서 레닌은 인식론의 두 개의 궁극적 개념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정의 이외에는 어떠한 정의도 본질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정의는 두 개의 개념 중에서 하나가 일차적이라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질과 의식이라는 두 개념 중에서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선택 이외에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물질과 의식이 인식론의 궁극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물질과 의식은 인식론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으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공통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한 개념을 다른 개념에 포섭시키는 일반적 정의가 불가능하고 단지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를 선택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다. 일반적 정의는 코끼리는 동물이다와 같이 코끼리라는 개념을 동물이라는 더 넓은 개념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코끼리와 동물은 일정한 공통적 성질이 있다. 그러나 인식론의 궁극 개념으로서 물질과 의식은 인식론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에 그러한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이며 따라서 한 개념을 다른 개념에 종속시키는 일반적 정의가 불가능하고 단지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를 선언하는 것, 선택하는 것 이외에는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레닌은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정의의 문제, 선택의 문제의 의미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논증의 대상이라고 하고 있고, 또 맑스가 실천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여 유물론의 필연성, 즉, 물질이 일차적이라는 것을 논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혼란한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측면을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신재길 동지가 해석하기에 맑스가 유물론의 필연성을 논증했다는 구절을 인용해 보자.

 

의식의 초기 단계는 물질적 행위와 구분되지 않았다. 즉 실천의 직접적인 주관적 형식이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과 함께 의식은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했다. 「물질-의식」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맑스는 인간의 실천이 의식의 원천임을 입증했다. 이로써 「물질-의식」의 관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유물론의 필연성 문제임이 논증되었다. 그러나 의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로 하는 「물질-의식」의 인식론적 틀에서는 의식의 생성을 설명할 수 없고, 순수한 의식도 설명되지 않는다.

… 이상과 같이 의식은 실천, 즉 물질(인간)에 의해 생성, 발전하는 것으로 「물질-의식」의 관계의 선차성 문제는 논리적으로 해결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14)

 

위 인용문에서 신재길 동지는 맑스가 실천이 의식의 원천임을 입증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의 실천, 실천을 통한 의식의 생성은 인식론적 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틀에서의 논증이다. 그리고 「물질-의식」의 인식론적 틀에서는 의식의 생성을 설명할 수 없고라는 신재길 동지의 파악은 유물론의 필연성의 논증이 인식론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닌은 물질과 의식의 대립에 대해 인식론적 영역에서는 선택 이외의 다른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신재길 동지는 엉뚱하게도 존재론의 영역에서 유물론의 필연성을 논증하고서는 그것을 인식론에서 논증된 것으로 왜곡하면서 인식론의 영역에서 선택을 통한 정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재길 동지가 인식론의 영역의 문제와 존재론의 영역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은 신재길 동지가 이전에 물질과 의식의 선차성의 문제는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고 했던 자기 자신의 주장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물질의 선차성 문제는 인식론적 문제도 아니고 존재론적 문제도 아니다. 이는 철학사적 대립의 문제이다.15)

 

신재길 동지가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수정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글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라는 글에서 신재길 동지는 명확하게 물질의 선차성 문제는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최근의 글의 위 인용문에서는 유물론적 필연성, 즉, 물질의 선차성을 존재론의 영역에서 논증하고 있다.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는가? 그게 엉터리가 아니라면 소위 실천을 통한 의식의 생성이 존재론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인가?

이와 같이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신재길 동지는 인식론의 영역과 존재론의 영역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인식론의 영역과 존재론의 영역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혼동은 위의 사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물질이면서 동시에 의식적 존재라는 이중적 속성은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물질-의식」의 인식론적 기본 명제와 모순되게 되었다.16)

 

여기서도 신재길 동지는 인식론의 문제와 존재론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인식론과 존재론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인간이 물질이면서 동시에 의식적 존재라는 이중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즉, 현실의 인간을 논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물질-의식이 인식론적 명제로 파악되는 한 이것은 위의 존재론적 명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론과 존재론은 상이한 차원, 상이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식론과 존재론의 영역을 혼동하고 그것을 모순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신재길 동지의 오류는 시작하고 있다.

신재길 동지가 인식론과 존재론을 혼동하는 것이 그의 오류의 하나의 원천임은 다음의 인용에서도 확인된다.

 

물질은 의식에 포함되지 않고 의식은 물질에 포함되지 않는 독립적 대립항에서는, 물질이 먼저인지, 즉, 물질에서 의식이 파생된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먼저인지 즉 의식에서 물질이 파생된 것인지 논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물질-의식」이 인식론적 공리 체계의 최고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공리 체계, 즉 「물질-의식」의 대립항을 뛰어넘는, 이를 포괄할 수 있는 보다 더 추상적 개념을 전제로 세워야 해결된다. 「물질-의식」의 대립항을 뛰어넘는 개념으로, 맑스는 살아있는 인간의 생존을 제시한 것이다. 맑스ㆍ엥엘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어떻게 의식이 인간 실천으로부터 발생하고 발전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17)

 

물질은 의식에 포함되지 않고 의식은 물질에 포함되지 않는 독립적 대립항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식론의 영역에서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엉뚱하게도 물질에서 의식이 파생된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먼저인지 즉 의식에서 물질이 파생된 것인지 논증이라는 존재론적 문제에 대해 인식론이 답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을 한다. 사실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파생적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을 인식론의 영역에서 구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며 단지 존재론의 영역에서 답을 구하면 된다. 그리고 그 답을 구하는 과정은 실천적으로, 현실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과학과 실험, 인간의 실천을 통해 그 파생성을 증명하면 되는 문제이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의식의 탄생 이전에 지구라는 물질이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고 또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내적 성질이라는 것을, 즉 물질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엉뚱하게도 「물질-의식」의 대립항을 뛰어넘는 이를 포괄할 수 있는 보다 더 추상적 개념을 전제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영역의 의미를 혼동한 결과 유물론적인 존재론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존재론,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의 늪에 신재길 동지가 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재길 동지가 인식론과 존재론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사고 전반에 걸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그 혼동을 확인할 수 있다.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명제인간 실천은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는 사실 간의 모순을 실천 중심 철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18)

 

여기서도 신재길 동지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영역을 혼동하면서 그것을 모순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명제는 인식론 영역에서의 명제이고 실천은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존재론상의 영역의 문제이다. 물질과 의식을 절대적으로 대립시키는 인식론의 영역에서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영역,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실천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지 않으며 의식에 의해 조종되는 실천을 통해 현실의 물질적 대상들이 개조되는 노동과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이를 모순이라고 하고 있는데 인식론이라는 추상의 영역과 존재론의 현실의 영역이 상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두 가지의 명제와 사실 간에 모순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면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혼동, 잘못된 인식 위에 기초하는 신재길 동지의 실천 개념이 어떤 잘못된 결과를 낳고 있는지 살펴보자. 신재길 동지는 실천이 의식의 원천임을 맑스가 논증했다고 주장하면서 실천이 의식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직접 인용해 보자.

 

이렇게 맑스는 인간의 실천이 의식의 원천임을 논증했다. 이로써 「물질-의식」의 관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유물론의 필연성 문제임이 논증되었다. … 달리 말해, 실천의식의 실체이다. … 구체적(시원적) 추상 개념으로 볼 때, 실천의식의 실체이지 의식실천의 시원일 수는 없다. 즉 실천이 더 상위 개념이다.19)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실천의식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과감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쉽게 논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천이 의식의 원천, 혹은 실천이 의식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신재길 동지가 인용한 맑스의 언급들은 실천이 의식의 원천이라는 것의 설명이 아니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화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실천이 의식을 자립화시키고 신학, 철학, 도덕 등을 형성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역사적 진보가 인간의 의식, 의식형태들을 고도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과 의식의 원천이라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에서 의식의 원천은 실천이 아니라 외적 세계, 자연과 사회이다. 그리고 실천은 인간의 인식이 외적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하는 만큼만 인식의 폭이 확대된다는 명제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실천이 의식의 원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의 원천은 오직 하나, 외적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외적 세계는 인간의 실천 속에서 감각적 인식의 단계, 이성적 인식의 단계를 거치며 감각적 표상, 이성적 개념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의 인식에 반영된다. 이러한 것이 인간의 인식 혹은 의식의 형성과정이다. 그리고 의식의 원천과 의식의 실체라는 개념은 엄밀하게 따지자면 결이 다른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의식의 실체라는 표현을 쓰자면 그것은 맑스와 같이 의식은 의식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즉, 의식된 외적 세계가 곧 의식의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실천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의식과 물질의 상호 작용에 지나지 않으며 그에 따라 당연히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최고 물음의 하위 범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실천 개념과 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의 구분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비판을 검토해 보자. 필자는, 신재길 동지가 맑스가 철학에 실천 개념을 도입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점을 비판하며 실천 개념은 주관(의식)과 객관(물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철학의 근본문제를 혼동시키는 것이며 철학의 근본문제는 실험과 산업, 계급투쟁 등의 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을 기초로 한 선택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실천 개념과 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을 구분하는 것은 유물론이 아니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지 검토해 보자.

 

실증주의자들은 물질은 감각 경험만을 인정하고 감각 경험을 넘어서는 개념화 작업을 형이상학이라고 거부한다. 따라서 이들은 감각 경험을 뛰어넘는 개량화, 수량화, 감각화되지 않는 모든 개념들을 형이상학이라고 부정하게 된다. 이들의 모토는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이다. 개념이 실재를 반영한다는 유물론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이다.20)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필자를 실증주의자라고 비판하며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유물론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증주의라는 말은 과학을 운운하지만 그때의 과학은 가상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비과학을 주장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근거가 되는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에 대한 해석에서 신재길 동지는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찾고 있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는 말은 스피노자에게서 유래한 말인데 스피노자가 유물론자라는 것은 철학사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개와 개념으로서의 개를 나누는 것 자체는 비유물론이 아니라 정확히 유물론적인 구분이다. 객관적 실재와 그 실재가 인식에 반영되는 형식으로서 개념을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유물론적 인식론에 부합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은 대상,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지만 개념 자체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물론적 인식론의 명제를 유물론을 공격하는 명제로 오해하고 있다. 이는 신재길 동지가 유물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나 다를까 신재길 동지의 개념과 객관적 실재에 대한 비유물론적 인식, 관념론적 인식은 곧 드러나고 있다.

 

개념을 그 자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구체적 사물이나 사태의 속성으로 실재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추상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적 속성인 추상적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구체적 사물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21)

 

신재길 동지의 이러한 언급에는 올바른 점과 잘못된 점이 뒤섞여 있다. 개념을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추상적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구체적 사물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하여 정반대로 관념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 따라서 전까지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따라서 이후의 말은 관념론적인 주장으로서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부정하는 것과 자본주의를 구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의 부정은 자본주의 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규명하는 것, 자본주의가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로 필연적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구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현실적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예를 들면, 밭에서 자라는 밀을 부정한다고 해 보자. 이때에 밀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이 밀은 잘 자라지 못했고 올해의 농사는 흉작이며 이쪽 편의 밀은 솎아 내는 것이 좋겠어라는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밀을 구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현실의 그 밀을 실제로 뽑아내어 불태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개념에 대한 부정과 구체적 사물에 대한 부정의 차이이다. 스피노자의 뛰어난 점은 바로 이러한 차이를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고 갈파하여 개념에 대한 관념론적 인식을 봉쇄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며, 신재길 동지는 이러한 유물론적 명제가 자신을 공격한다고 판단하여 스피노자의 명제가 유물론을 공격하는 것이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물론적 명제를 관념론적으로 왜곡하여 유물론을 공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5.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의미에 대하여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재길 동지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영역을 혼동하여 많은 측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관계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론과 존재론이 어떠한 관계인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료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의식과 물질의 대립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문제에서 출발해 보자. 레닌은 의식과 물질의 대립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물론 물질과 의식 간의 대립은 극히 국한된 범위 내에서만 ―이 경우에 있어서는 무엇이 일차적이고 무엇이 이차적인가 하는 인식론상의 범위 내에서만―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를 넘어서면 이 대립은 물론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22)

 

여기에서 레닌은 의식과 물질이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극히 국한된 범위, 즉, 인식론의 영역에서만 그러하며 인식론의 영역을 벗어나면 의식과 물질의 대립은 상대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인식론적 영역을 벗어난 범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식론은 추상의 영역이다. 인식론이 추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의식과 물질은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추상적인 인식론의 영역을 벗어나서 물질과 의식이 상대적으로 대립하는 영역은 추상이 아닌 영역, 즉, 현실의 영역이 된다는 것은 레닌의 언급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만 있다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내적 성질이다라고 할 경우 이때 의식과 물질의 관계를 현실에서, 존재론의 영역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때 의식과 물질은 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물질과 의식의 대립의 상대성의 의미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의식과 물질의 대립의 상대성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레닌의 언급을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주관적 의도에 맞춰 왜곡하는 것이다. 먼저 신재길 동지 자신의 언급을 인용해 보자.

 

인식론에서 유물론이 맑스에 의해 논증된 이상, 존재는 물질만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존재론의 대상에서 의식은 배제된다. 존재론에서 의식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맑스 이전, 즉 맑스가 유물론을 논증하기 이전에 의식을 진정한 존재로 취급하던 낡은 존재론이다. 오이저만이나 비판문에서 존재론에 의식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낡은 존재론, 즉, 관념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존재론에서 의식은 물질과 절대적으로든 상대적으로든 대립하지 않는다. 존재론의 대상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23)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레닌을 관념론자로 변모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레닌은 의식과 물질의 존재론적 상대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론상에서 의식과 물질의 상대적 대립을 인정하는 것은 낡은 존재론, 즉, 관념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내적 성질이다라는 명제, 즉, 의식과 물질의 존재론상의 상대적 대립을 인정하는 이 명제는 의식이 뇌라는 물질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의식보다 물질을 일차적으로 놓는 유물론적 명제이다. 또한 이 명제는 의식이 뇌라는 물질의 내적 성질이라고 규정하여 의식과 뇌라는 물질의 상호 연관에 대해 전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명제이다. 즉, 이 명제는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 명제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이를 낡은 존재론, 즉, 관념론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인식론에서 유물론이 맑스에 의해 논증된 이상, 존재는 물질만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존재론의 대상에서 의식은 배제된다라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은 대단히 기계론적인 사고를 보이는 것이다. 인식론상에서 유물론이 맑스에 의해 논증되었다는 것이 엉터리 주장이라는 것은 앞에서 논증한 바 있지만 설사 그 주장이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주장이 존재는 물질만을 의미하게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인식론상의 문제와 존재론상의 문제를 혼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서 유일한 과학적 입장은 의식과 물질의 대립의 상대성을 존재론의 영역에서 승인하는 것뿐이다. 이는 현실의 사례에서 무수히 증명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뇌사 상태의 환자가 의식이 없다가 기적적으로 의식이 깨어났다고 해 보자. 이때 의식은 존재하지 않다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즉, 의식에 대해서도 존재라는 개념의 적용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때의 존재는 뇌라는 물질의 내적 성질로서 존재일 뿐이지만. 또 사회적으로도 저 사람은 의식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규정할 경우 이때 사회적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존재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노동자에 대해 계급의식이 있다, 없다라는 평가를 할 경우 그때의 의식은 분명히 존재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신재길 동지가 자신의 주관주의로부터 깨어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점들이다. 이와 같이 의식에 대해 존재라는 규정이 가능한 것은 관념론적인 신비화된 존재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내적 성질이라는 규정 자체가 의식에 대해 존재라는 규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뇌라는 물질성에 의해 규정되는 의식이라는 점에서 의식에 대해 존재라는 규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다.

그러면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자. 만약 인식론과 존재론이 분리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인간의 인식과정이, 존재론의 영역, 즉, 현실의 영역의 대상, 물질, 존재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인식이 현실의 대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외적 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했을 때 인식은 자기 내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식 자체의 영역이라고 흔히 생각될 수도 있는 자기의식조차도 외적 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하면 형성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타인과 구분하며, 그러한 구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자아로서, 인격으로서, 개인으로서 의식하게 된다. 주변 세계에 대한 지각은 지각되는 대상과 자기 자신이 다르다는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의식(우리가 의식의 기본적인 외적 표현을 도외시한다면)은 동시에 자기의식이다. … 따라서 이로부터 자기의식은 단지 고유한 자아에 대한 의식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자기의식은 그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반영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다.24)

 

이 구절은 쏘련의 철학자인 오이저만의 주장인데 여기서 오이저만은 자기의식은 자아에 대한 인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 외적 세계의 구분을 통해 성립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식에 대한 의식조차 외적 세계, 객관적 실재와의 관련을 상실하면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오이저만의 언급은 인간의 인식의 본질의 한 단면을 가리키는 것이며 나아가 인식과 외적 세계의 관련,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문제에 대한 오이저만의 또 다른 언급을 살펴보자.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그 책[≪유물론과 경험비판론≫: 필자]의 처음 세 장에서 레닌은 인식의 과정뿐만 아니라 보통 존재론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범주들을 검토하고 있다. 바로 인과성, 필연성, 공간 등등에 대한 인식론적 분석은 그것들의 객관적 내용에 관한 결론을 도출하는 토대가 된다. 이를테면 물론 사유의 형식이 존재의 형식과 일치하지 않지만 전자는 후자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결론은 인식론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형이상학적 대립을 거부하며 그것들의 통일성을 근거 짓는다.25)

 

여기서 오이저만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분석하면서 사유의 형식이 존재의 형식과 일치하지 않지만 전자는 후자를 반영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근거가 됨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유의 형식이란 무엇이고 존재의 형식이란 무엇인가? 존재의 형식 중 가장 으뜸인 것은 공간과 시간이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은 인간의 인식에 반영되어 주관이 객관세계를 인식해 가는 주관의 형식, 사유의 형식이 되기도 한다. 원인과 결과의 경우도 존재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인식, 사유의 형식이기도 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필연성, 필연적 관계 또한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 가는 사유형식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존재의 형식과 사유의 형식은 서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유의 형식은 존재의 형식을 근사치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이와 관련된 레닌의 언급을 인용해 보자.

 

여기서 실제로 객관적인 세 개의 항이 있다. 1) 자연, 2) 인간의 인식=인간의 두뇌(바로 상술한 자연의 최고의 산물로서의 두뇌), 그리고 3) 인간의 인식 안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 그리고 이러한 형식이야말로 다름 아닌 개념, 법칙, 범주 등등이다. 인간은 자연을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그 직접적 총체성을 파악=반영=모사할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추상화나 개념이나 법칙이나 과학적 세계상 기타 등등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자연으로 끊임없이 가까이 접근해 갈 뿐이다.26)

 

레닌은 여기서 존재의 형식을 반영하는 사유의 형식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무매개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 자연을 인식해 가는 사유의 형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개념, 법칙, 범주 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형식, 개념, 법칙, 범주 등은 인간의 사고에서 자의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으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사유의 형식은 자연의 형식, 존재의 형식을 근사치로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을 가리켜 오이저만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근거가 발견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식론과 존재론이 통일되는 근거는 인식의 본질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인식은 자연, 외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반영론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맑스가 의식은 결코 의식된 존재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으며27)라고 했던 것도 다름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정의 반영적 성질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영은 인식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식이란 사유가 객관에로 끊임없이 무한히 접근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 속에 자연을 반영하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끊임없는 과정, 모순의 발생과 그 해결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28)

 

이와 같이 레닌은 인간의 인식과정의 본질로서 반영론을 승인하면서도 그것을 수동적 반영,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운동 속에서, 모순의 해결과정 속에서 객관에로 무한히 접근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운동 속에서의 반영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이 대상의 수동적 반영이 아니라 능동적 반사, 즉 실천 속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대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영의 의미에 대해 오이저만은 심화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인공두뇌학 분야에서의 최근의 연구와 특히 객관적 과정으로서의 정보의 개념은, 반영을 물질 현상 사이의 일정한 상호 작용 형식들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존재론적 해석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식과정으로서의 반영은 물질에 내재하는 반영의 성질의 고차적인 발전단계의 소산이다.29)

 

물질에 내재하는 반영의 성질은 다양한 사례를 들 수 있다. 거울이 인간의 모습을 비추는 것도 반영의 하나이며 쇠망치로 돌을 내리치면 돌의 파편이 튀는 것도 돌이 쇠망치라는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반영을 영어로 표기하면 reflection인데 이는 반사, 반응, 반영 등의 개념이 같은 성질의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반영이 물질의 상호 작용 형식들의 속성이라고 보는 오이저만의 분석은 일리가 있다. 그리고 오이저만은 인간의 인식 자체는 물질에 내재하는 반영의 특수한 형식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인식의 대상이 인식 자체일 경우에도 반영의 개념이 유효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식의 대상이 인식 자체인 경우에도, 반영 개념은 유효하다. 왜냐하면 탐구의 대상이 되는 인식은 탐구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30)

 

예를 들면 어떤 목표를 세웠다고 할 경우 그 목표 자체가 분석의 대상,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럴 경우 목표라는 인식 대상이 분석과 비교라는 사고의 형식을 통해 다시금 인간의 인식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으로서 반영 개념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을 근거 지운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반영 개념에 대해서도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에 대한 인식을 그르치고 있다. 먼저 신재길 동지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반영 개념을 매우 협소하게 인식하고 있다.

 

의식은 존재의 반영 내용뿐만 아니라, 감각, 판단, 추리라는 의식하는 활동 기능도 의미하기 때문에 단지 존재의 반영 내용만을 가리키는 의식된 존재로 번역하기 보다는 의식적 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맞고 앞뒤 문맥도 맞다.31)

순수한 의식이란 경험과 관계없는 사고의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감각 형식, 오성 형식(판단, 범주), 이성(추리, 상상력)이 포함된다. 판단이나 추리능력은 반영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반영 이론 자체가 판단 능력이나 추리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물질과 의식을 최고 개념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의식은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32)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감각, 판단, 추리는 반영의 내용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는 반영 개념을 수동적 반영으로 국한하여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순수한 의식 즉, 사고의 형식은 반영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반영 개념은 단지 존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능동적 반사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며 실천은 그러한 의식의 능동적 반사의 표현 형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가 사고의 형식을 반영 개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의식은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의식의 형식, 사고의 형식 또한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있고 따라서 반영 개념 이전의 개념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서 지적되었던 인식론적 접근과 존재론적 접근을 마찬가지로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문제가 물질과 의식의 대립으로 나타난다고 할 경우 그때의 의식은 추상으로서의 의식이다. 따라서 사고의 형식, 개념, 법칙, 범주 등도 당연히 추상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사고의 형식은 전제되지도, 주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의 형식, 판단과 추리, 개념, 법칙, 범주 등은 실제적인 사고과정의 내용인 반영에 있어서의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레닌이 ≪철학노트≫에서 자연, 인간, 인간이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으로 개념, 법칙, 범주들이라고 규정했던 것의 내용이다. 따라서 신재길 동지가 사고의 형식과 반영 개념을 분리시키는 것은 사고 활동이라는 내용과 사고의 형식을 분리시키는 것으로서 인간 사고의 변증법적 성격을 보지 못하게 하며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성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인 반영 개념을 기초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의 문제에 접근해 보자. 여기서도 신재길 동지는 많은 혼란을 보이고 있는데, 철학의 근본문제의 2차적 부면인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문제, 즉, 인간은 이 세계, 외적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동일성의 문제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식 가능성의 문제인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의 문제가 물질과 의식의 존재론적 동일성의 문제와 혼동된 채 제기되고 있다. 먼저, 신재길 동지의 언급을 인용해 보자.

 

물질과 의식의 일치 문제는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물질과 의식은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모두는 만족스런 설명이 되지 못했고, 맑스가 실천 개념을 인식론에 도입하면서 해결되었다. 즉 물질과 의식의 동일성 문제는 물질과 의식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는데, 실천의 주체는 인간이고 인간은 의식 있는 물질로 의식과 물질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점을 인식론에 도입하여 이 난점을 해결한 것이다.33)

 

신재길 동지는 여기서도 인식론과 존재론을 혼동하고 있다. 물질과 의식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은 인식론상의 문제이다. 인식론상에서 물질과 의식은 절대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식과 물질이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인식론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론의 영역의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과 의식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는 것은 인식론과 존재론을 혼동하는 잘못된 문제 설정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신재길 동지가 맑스가 의식과 물질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을 갖고서, 그러한 인간의 실천 개념을 철학에 도입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또한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왜냐하면 인식론의 문제에 대해 존재론적 개념으로 답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실천 개념이 의식과 물질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천 개념은 철학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혼란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재길 동지는 철학의 근본문제의 1차적 측면과 2차적 측면을 뒤섞어 놓아 문제를 혼란시키고 있다. 즉,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의 문제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인간의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 가능성의 문제를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제 철학의 근본문제의 1차적 측면인 물질과 의식의 선차성 문제는 앞의 논증에서 일정하게 해명되었으므로, 이제 철학의 근본문제의 2차적 측면, 인식 가능성의 문제를 검토해 보자.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은 신재길 동지와 같이 물질과 의식의 동일성 혹은 사유와 존재의 존재론적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에 맺힌 대상에 대한 인식의 상이 객관적 대상과 일치하는가의 문제이다. 인간은 이 세계, 이 외적 세계를 정확히 혹은 근사치로 인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엥겔스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정식화했던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을 했으며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불가지론자라고 규정했었다. 예를 들면 칸트는 인간의 인식 주관 너머의 외적 세계를 물자체라는 개념으로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 물자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외적 세계의 객관적 대상이 자신의 인식 주관에 의해 정확히 인식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첫 번째, 이론적 측면에서 인간의 인식의 본질은 외적 세계, 자연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이 자연의 반영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 밖에 객관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인간의 인식이 자연의 반영, 모사라는 점은 인식 주관이 객관적 대상에 대해 근사치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개념, 법칙, 범주들은 인간의 인식이 대상에 대해 보다 가깝고 정확하게 접근하게 하는 역할을 하며, 나아가 과학적 인식을 획득하는 것을 돕는다. 이와 같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인 반영 개념은 인간의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전적으로 승인하는 개념이다. 그러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가? 그것이 두 번째의 측면으로서 실천의 문제이다.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인식과 인식 대상의 일치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인데 이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과 맑스주의는 진리의 검증 기준으로서 실천이라는 명제를 정립하고 있다.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고 인식을 풍부히 하면서 나아가 실천을 통해 인식과 대상의 일치, 진리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의 문제, 인식과 인식 대상의 일치의 문제, 진리의 문제의 측면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철학의 근본문제의 2차적 측면, 부차적 측면으로서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철학의 근본문제의 1차적 측면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인데 신재길 동지는 이를 뒤죽박죽 섞어 놓고는 실천 개념을 통해 철학의 근본문제(즉, 의식과 물질에서 어느 것이 선차적인가라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엉터리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재길 동지가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혼란된 인식을 하고 인식론과 존재론을 혼동하는 결과, 즉, 유물론적 인식론에서 이탈하고 있는 결과 주관적 관념론으로 나아가고 있는 측면을 분석해 보자. 먼저 신재길 동지는 의식은 의식된 존재라는 맑스의 언급에 대해 매우 혼란된 분석을 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비판 글에서 맑스의 의식은 의식된 존재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는 인간의 인식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의 본질로 인해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근거가 주어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인식론과 존재론을 분리시켜 존재론에서 별도의 철학의 근본문제를 구하고자 하는 신재길 동지는 맑스의 이 구절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의식된 존재가 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존재, 물질을 가리키는 것인지 스스로 헷갈려 하고 있는데 이는 신재길 동지 스스로 유물론적 인식론을 상실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헷갈림의 책임을 필자에게 뒤집어씌워 필자를 절충주의라고 비난했었다. 필자가 의식은 의식된 존재가 의식의 본질이라고 한 것은 맑스의 이 구절이 의식은 존재의 반영이라는 점을 훌륭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의식된 존재라는 것은 의식된 외적 세계와 같은 것이며 그것은 의식의 실체, 즉,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바로 반영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외적 세계와 분리된 의식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외적 세계의 반영으로서 의식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유기적 통일을 보여준다. 즉, 인식론과 존재론은 영역이 상이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인식은 존재의 반영이라는 원리에 의해 견고한 통일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반영 개념의 결정적 역할을 알 수 있는데 맑스는 이것을 의식은 의식된 존재라는 한 마디로 압축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의식된 존재라는 표현이 번역상 맞지 않으며 그것은 의식하는 존재 혹은 의식적 존재로 번역을 교정해야 한다고 했다.34) 그러나 이는 신재길 동지가 유물론적 인식론을 상실한 결과, 주관적 관념론으로 건너뛰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의식은 의식하는 존재, 혹은 의식은 의식적 존재라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이 맞다고 해 보자. 그러면 어느새 의식 자체가 실재를 의미하는 존재가 된다. 이는 지각이 곧 존재라 했던 버클리와 같이, 의식이 객관적 존재의 반영, 상이 아니라 의식이 곧 존재가 되는 주관적 관념론을 의미한다. 신재길 동지의 극도의 주관주의가 이렇게 주관적 관념론으로 질적인 전환을 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재길 동지는 맑스주의적 언설을 동원하더라도 그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 의도를 우선하면서 맑스주의적 언설로써 맑스주의를 공격하고 유물론적 명제를 관념론적으로 왜곡하여 유물론을 공격했던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필자에 대해,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비판했던 마하주의자라고까지 비난하였다. 심리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요소 개념을 마하가 전개하는 것에 대하여 레닌은 그것은 겉으로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실은 관념론의 한 변종일 뿐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의식된 존재라는 개념이 의식의 요소와 존재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고 보고 그에 대해 필자를 마하주의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신재길 동지의 말이 맞다면 맑스 또한 마하주의자일 것이며 의식된 존재라는 말이 의식하는 존재 혹은 의식적 존재라고 번역이 교정되어야 한다면 맑스 또한 주관적 관념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6. 변증법에 대하여

 

신재길 동지는 철학의 근본문제의 의미를 그르친 결과 인식론, 존재론과 달리 방법론의 영역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별도로 구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는데, 그 방법론에서의 철학의 근본문제는 소위 변증법의 근본문제가 되며 그것은 곧 존재와 무의 문제라 하고 있다. 신재길 동지의 존재론이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이라는 점은 이미 위에서 논증된 바가 있으므로, 변증법의 문제를 별도로 철학의 근본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만 검토해 보자. 먼저 신재길 동지 자신의 언급을 인용해 보자.

 

변증법의 근본문제는 물질과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필연성을 해명하기 위한 문제인데, 비판문은 물질 운동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물질 운동이 왜 작용과 반작용과 같은 기계적 운동이 아니고 변증법적 운동이어야 하는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운동은 변증법이라는 선언으로 논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 운동이 변증법이라는 것을 논증하지 않고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을 논하는 것은 기계론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35)

 

변증법의 문제에 대한 신재길 동지의 이러한 접근은 유물론적 접근이 아니다. 신재길 동지는 변증법의 근본문제는 물질과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필연성을 해명하기 위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재길 동지의 이러한 주장과 엥겔스의 변증법에 대한 주장을 한번 비교해 보자.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변증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끝으로 나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변증법적 법칙을 구성하여 자연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법칙을 자연 속에서 찾아내어 자연으로부터 전개하는 것이다.36)

 

엥겔스는 여기서 변증법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변증법적 법칙을 구성하여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관념론적인 접근이며 변증법적 법칙을 자연에서 찾아내어 자연으로부터 전개하는 것은 유물론적인 접근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변증법의 근본문제는 물질과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필연성을 해명하기 위한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변증법의 필연성의 해명은 자연이 아니라 관념의 영역에서 변증법의 법칙을 구성하는 절차의 일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신재길 동지가 변증법의 문제에 대해 전형적인 관념론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신재길 동지의 관점은 마치 변증법이 물질의 운동을 떠나서 그 본성, 필연성이 해명될 수도 있는 것처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애초에 그 생성 자체가 물질의 운동을 해명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의 변증법이나 아니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공허의 변증법은 물질의 운동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신이나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영원히 타오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그 자체가 물질의 운동을 변증법적 직관으로 통찰한 것이었다. 그리고 원자라는 존재와 공허라는 비존재의 통일이 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이 세계, 그리고 물질의 운동을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로 파악하는 직관적 변증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사에서 변증법의 탄생은 물질의 운동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물질의 운동을 떠난 변증법은 상정조차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물질 운동이 왜 작용과 반작용과 같은 기계적 운동이 아니고 변증법적 운동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변증법적 운동의 필연성을 밝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재길 동지는 기계적 운동과 변증법적 운동을 대립시키고 있는데 이는 어리석은 것이다. 기계적 운동은 변증법적 운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운동, 생물의 유기적 운동, 인간의 사회적 운동, 정신적 운동 등과 대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용과 반작용은 기계적 운동이므로 따라서 변증법적 운동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작용과 반작용 자체가 대립물의 통일이지 않는가? 즉, 변증법적 운동이지 않는가? 그리고 기계적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인 역학적 운동을 예로 들어 보자. 화살이 날아가는 간단한 역학적 운동, 즉, 기계적 운동은 그 자체로 변증법적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운동을 한다는 것은 화살이 특정 시점에 특정 지점에 있으면서(비연속성) 동시에 그 지점에 있지 않다(연속성)는 것을 의미한다. 화살이 날아가는 간단한 역학적 운동, 기계적 운동은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성격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운동의 본질 자체는 이렇게 변증법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신재길 동지는 물질의 운동을 떠나 공허한 관념 속에서 변증법의 본성, 변증법의 필연성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변증법을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전락시키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신재길 동지는 변증법의 논리학이 최초로 포괄적으로 완성된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그 시작이 존재와 무라는 데에서 착안하여 변증법의 근본문제가 존재와 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변증법의 껍데기를 마치 변증법의 본질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오이저만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적절한 비판이 될 것이다.

 

철학 학설들의 객관적 내용과 주관적 형식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은 과학적 탐구의 변증법적-유물론적 원리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이 정식화한 이러한 원리를 꾸준히 적용했으며 발전시켰다. 특히 그들의 헤겔에 대한 태도는 이러한 의미에서 상당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했던 다른 철학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얼핏 보기에는 일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헤겔의 학설에 들어 있는 객관적 진리를 그 속에 끼어 있는, 종종 헤겔 자신의 탁월한 철학적 성과들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그러한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구분해 내고자 하는 일관된 태도이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확실히 이러한 변증법은 철학의 궁극적인 낱말이다. 따라서 더욱더 그것으로부터 헤겔에 의해 그것에 주어진 신비적 가상을 제거해 버릴 필요가 있다.37)

 

철학 학설의 실질적, 객관적 내용과 그러한 내용을 표현하는 주관적 형식, 헤겔의 경우에는 신비하기까지 한 가상의 형식을 구분하는 것은 오이저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중요하다.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합리적 핵심, 헤겔 철학, 헤겔 변증법의 객관적 내용은 그것의 형식이 아니라 변증법적 내용, 변증법적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헤겔이 변증법을 논증하는 방식, 형식, 절차는 관념론적 신비에 쌓여 있어서 버려야 할 것, 지양해야 할 것이며 맑스와 엥겔스는 이를 가리켜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을 신비한 껍질 속에서 구제해 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신재길 동지가 소위 변증법의 근본문제라 하는 존재와 무의 문제는 합리적 변증법을 전개해 나가는 그것의 비합리적, 관념론적 외피,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변증법의 객관적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헤겔의 주관적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변증법을 존재와 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관념론적이다. 존재, 순수 존재, 무, 순수 무 등의 관념의 사변적인 전개는 그 속에서 변증법적 관념의 일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과학으로서 변증법적 논리학의 출발점으로서는 전혀 부적합하다. 다시 말하면 존재와 무는 변증법적 논리학이라는 합리적 핵심에 대해 헤겔이 관념론적인 사변적인 형식을 입히는 장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이 사변적인 존재와 무의 의미이다.

그러면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그 초석이 되는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의 문제를 고찰해 보자.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고안되거나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고대 유물론자들이 직관적으로 파악한 바가 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데카르트 등에 의해 정식화된 바가 있고 이후 유물론 철학 발전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다.

물질과 운동의 통일은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운동 없는 물질은 없다라는 것이다. 즉, 모든 물질은 운동을 자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변증법이 유물론의 기반 위에 서는 것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둘째는 운동은 물질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즉, 물질 없는 운동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양이가 웃다가 사라졌는데 고양이의 웃음은 남아 있다라는 것과 같은 현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운동을 물질과 분리시켜서 운동에 대해 관념론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봉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세기 초의 에너지론은 에너지를 물질적 현상이 아닌 것으로 파악했는데 이에 대해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그것은 운동과 물질을 분리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며 운동에 대한 관념론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이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은 근대의 과학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토대로 작용하는 것이며 철학의 측면에서는 변증법과 유물론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변증법의 여타의 모든 범주들은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 물질의 상호 연관의 법칙은 세계의 만물이 그 물질성으로 인해 상호 간에 연관을 갖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개별-특수-보편이라는 변증법의 범주는 현실의 물질세계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상호 연관의 하나이며 또한 주관이 그러한 상호 연관을 인식하는 형식, 개념, 범주이기도 하다. 이렇게 존재의 변증법과 사고의 변증법은 사고와 존재 중 일차적인 것은 존재라는 점에서 사고의 변증법이 존재의 변증법을 반영하게 된다. 이리하여 존재를 설명하는 물질이라는 범주와 그 물질의 본질적 속성인 운동 그리고 물질과 운동의 통일이 변증법적 개념이 원천이 되는 것이다.

 

 

7. 철학에서의 추상

 

필자는 인간이 물질과 의식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철학적 추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이른바 존재론적 추상이라는 것을 제기했는데 그것은 “‘속성 개념인 물질이나 의식과는 추상 자체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38)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론적 추상의 실제 내용은 시원적 추상과 포괄적 추상이라는 것이었다. 시원적 추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모차르트 같은 예술가는 결코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노동을 통해 인류가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다는 점에서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인간라는 규정은 인간 본질을 규정하는 추상이라는 것이다. 또 발생적으로 보아 아버지도 두 자식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는 구체적인 개인이지만 동시에 두 자식 형제의 기원이 되는 시원적 추상이기도 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시원적 추상은 개별 인간과 사물의 동일성을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적 기원을 추적하여 보편성을 끌어내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포괄적 추상은 맑스의 포이에르바흐 테제 6번, 즉,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39)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 혹은 총체로서 인간이라는 것은 개별 속에 내재하는 속성의 추상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인간 본질을 파악하는 추상이다. 이러한 시원적 추상과 포괄적 추상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물질이나 의식에서 속성을 추상하는 것과 다른, 질적인 차원이 다른 존재론적 추상이라고 하고 있고 그 결과 인간이 물질과 의식이라는 철학의 최고 물음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신재길 동지가 여기서 시원적 추상과 포괄적 추상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사실은 쏘련의 철학자인 일렌코프가 자신의 저서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연구사, 1990)에서 구체적 보편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며, 신재길 동지와 일렌코프가 다른 것은 일렌코프는 위 사례를 유물론적 변증법의 개념인 구체적 보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데 반해, 신재길 동지는 그 사례를 사변적 형이상학의 개념인 존재론적 추상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재길 동지가 위 사례의 인용 출처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이와 같이 위 사례의 인용 출처를 밝히는 것을 기초로 시원적 추상과 포괄적 추상의 진정한 의미를 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 사례가 구체적 보편의 설명 사례라는 것은 일렌코프의 책을 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필자는 여기서 구체적 보편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기초로 신재길 동지를 비판할 것이다. 구체적 보편은 최초에는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헤겔은 보편이 형식논리학의 동일성, 공통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며 특수라는 풍부한 내용을 자신 속에 포괄하는 구체적 보편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보편은 구체적인 것에 내재하는 바로 이 구체적인 것의 혼일뿐이며…40)

 

보편은 결국 자유로운 힘과도 같은 것이어서 오직 이것은 바로 이 보편 자체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타자에게도 힘을 뻗치는 것이 된다.41)

 

이제야 비로소 논리적인 것은 주관적 정신에 대한 한낱 추상적 보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특수적인 것이 지니는 풍요함을 자체 내에 포함하는 보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42)

 

보편에 대한 헤겔의 이러한 파악은 보편을 추상적 동일성을 의미하는 추상적 보편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의 갖가지 풍요함을 포함하는 구체적 보편으로 파악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맑스는 헤겔에 의해 파악된 구체적 보편을 유물론적으로 개작하여 전면적으로 적용했는데, ≪자본론≫에서 가치 개념을 정립하는 과정이 바로 구체적 보편 개념을 적용한 과정이라는 것을 일렌코프는 자신의 저작에서 논증하고 있다.

 

(1) 여기서 가치 일반의 개념은 우리가 가치의 모든 특수한 형태(즉 상품ㆍ노동력ㆍ자본ㆍ지대ㆍ이자 등)의 구성요소에서 발견하고 싶어 하는 일반적, 추상적 속성을 총괄함으로써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한 상품과 다른 한 상품의 직접적인 교환관계,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단 하나의 특정한 인간관계를 아주 엄밀히 분석함으로써 얻어진다.43)

 

여기서 일렌코프가 파악한 맑스의 방법이 바로 구체적 보편의 방법이다. 맑스는 상품ㆍ노동력ㆍ자본ㆍ지대ㆍ이자 등의 공통적 속성을 추출하여, 즉, 추상적 동일성의 개념, 추상적 보편으로서 가치 개념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과 다른 상품의 직접적 교환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즉, 현실적인 직접적 상품 교환관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으로 접근한 것이며 또 그 방식의 면에서는 시원적, 기원적 접근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상품ㆍ노동력ㆍ자본ㆍ지대ㆍ이자 등을 다 적용되는 구체적인 보편 개념인 가치 개념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렌코프에 의해 구체적 보편 개념을 적용한 사례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는 타당한 것이다. 이는 참다운 과학적 개념의 발견은 추상적 보편의 개념을 통해서는 얻어질 수 없으며 구체적 보편의 개념과 방식을 따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체적 보편 개념의 유물론적인 적용을 맑스에게서 발견한 일렌코프는 구체적 보편의 사례로 앞서 언급한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인간 개념이 인간의 본질을 나타내는 구체적 보편의 개념이라는 점을 들고 있고 또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총체)이라는 맑스의 테제가 구체적 보편 개념을 적용한 것임을 들고 있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총체)이라는 것은 각 개인에 내재하는 공통적 성질을 추상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추상적 보편이 아니며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 대한 사회적 관계라는 구체적 접근, 참다운 보편적 접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일렌코프가 자신의 저서에서 파악한 구체적 보편 개념과 그에 이르는 방법의 문제들이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이러한 구체적 보편의 개념을 존재론적 추상이라는 개념으로 바꿔치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물론적 변증법의 구체적 보편 개념이 사변적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추상 개념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이러한 구체적 보편에서의 추상이 속성의 추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존재론적 추상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일반적 철학적 추상에는 속성의 추상만이 아니라 관계의 추상 또한 포함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추상과정은 구체적인 감각 자료를 가공하는 일련의 분석적 사유 작용을 통해 해당 대상의 일정한 특징이나 속성 및 관계들을 도외시하는 반면 다른 특징이나 속성 및 관계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부각시켜 변항으로 만듦으로써 성립된다.44)

 

이와 같이 철학적 추상에는 신재길 동지의 주장과는 달리 속성의 추상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추상 또한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며 이를 존재론적 추상이라고 불러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신재길 동지가 존재론적 추상이라고 파악했던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인간이라는 시원적 추상 또한 인간의 하나의 본질적 속성을 추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 추상과정이 형식논리적 추상적 동일성의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이라는 변증법적 방법을 따랐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시원적 추상 혹은 포괄적 추상을 소위 존재론적 추상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실 사변적 형이상학으로서 존재론이 아니라 유물론적 존재론이라면 그러한 존재론상의 대상과 개념의 추상은 당연히 인간의 인식과정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며, 곧 일반적인 철학적 추상의 과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러한 일반적 추상이 형식논리학적으로 추상적 동일성을 추출하는 죽은 추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변증법적인 구체적 보편에 이르는 추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형식논리학인가 아니면 변증법인가의 문제이지, 소위 인식론적 추상인가 존재론적 추상인가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즉, 추상 자체는 인간의 인식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인식론적 범주이다.

노사과연

 

 


 

1)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정세와 노동≫ 제153호(2019년 7/8월), p. 134.

 

2) 같은 글, p. 133.

 

3) 신재길, “헤겔과 맑스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방법론적 기초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48호(2019년 2월), p. 75.

 

4) 문영찬, “맑스주의 철학의 ‘수정’과 부르주아적 속류화”, ≪정세와 노동≫ 제149호(2019년 3월), p. 49.

 

5)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p. 135.

 

6) 같은 글, pp. 135-136.

 

7) K. 맑스ㆍF.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202.

 

8) 신재길, “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에 대한 반론”, ≪정세와 노동≫ 제147호(2018년 12월/2019년 1월), p. 50.

 

9) 문영찬, 앞의 글, p. 55.

 

10) 같은 글, p. 54.

 

11)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p. 132.

 

12) 같은 글, p. 124.

 

13) V. I.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아침, 1988, p. 153.

 

14)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pp. 118-119.

 

15) 신재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정세와 노동≫ 제119호(2016년 1월), p. 71.

 

16)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p. 105.

 

17) 같은 글, p. 116.

 

18) 같은 글, p. 105.

 

19) 같은 글, pp. 118-119.

 

20) 같은 글, pp. 113-114.

 

21) 같은 글, p. 114.

 

22) V. I. 레닌, 앞의 책, p. 155.

 

23)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pp. 109-110.

 

24) T. I. 오이저만, ≪철학의 근본문제≫, 세계, 1990, pp. 34-35.

 

25) 같은 책, p. 34.

 

26) V. I. 레닌, ≪철학노트≫, 논장, 1989, p. 134.

 

27) K. 맑스ㆍF. 엥겔스, 앞의 책, p. 202.

 

28) V. I. 레닌, ≪철학노트≫, p. 149.

 

29) T. I. 오이저만, 앞의 책, p. 116.

 

30) 같은 곳.

 

31)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pp. 110-111.

 

32) 같은 글, p. 118.

 

33) 같은 글, p. 104.

 

34) 같은 글, pp. 105-111.

 

35) 같은 글, pp. 122-123.

 

36) F.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p. 14.

 

37) T. I. 오이저만, 앞의 책, pp. 50-51.

 

38) 신재길,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 p. 121.

 

39) 같은 글, p. 120에서 재인용.

 

40) G. W. F. 헤겔, ≪대논리학(3)―개념론≫, 벽호, 1994, p. 58.

 

41) 같은 책, p. 59.

 

42) G. W. F. 헤겔, ≪대논리학(1)―존재론≫, p. 50.

 

43) E. V. 일렌코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1990, p. 268.

 

44)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동녘, 1989, p. 1252.

 

 

Avatar

문영찬 연구위원장

0개의 댓글

연구소 일정

11월

12월 2020

1월
29
30
1
2
3
4
5
12월 일정

1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3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4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5

일정이 없습니다
6
7
8
9
10
11
12
12월 일정

6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7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8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9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0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1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2

일정이 없습니다
13
14
15
16
17
18
19
12월 일정

13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4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5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6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7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8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19

일정이 없습니다
20
21
22
23
24
25
26
12월 일정

20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1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2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3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4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5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6

일정이 없습니다
27
28
29
30
31
1
2
12월 일정

27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8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29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30

일정이 없습니다
12월 일정

31

일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