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숙 | 편집위원
1949년 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박흥식, 최남선, 이광수, 김연수 등 거물 친일파를 검거하고, 악질 친일경찰에 이어 미군정의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활약하며 고문치사사건을 일으키고 도망 중이던 노덕술 등을 체포하였다. 이는 5ㆍ10 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의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한 친일 반민족행위의 처벌을 위한 활동의 결과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부와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파의 격렬한 반대와 탄압으로 1949년 6월에 와해되고 만다. 2020년 1월, 이 달의 역사에서는 반민특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 건설, 즉 일제 청산의 좌절
한국의 민중들은 해방 직후부터 일제 식민 통치 시스템의 청산과 더불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독립 국가의 건설을 열망하며 실천에 나섰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치안대, 국군준비대, 조선인민공화국1) 건설, 각종 노동조합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농민조합들과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민주주의민족전선2) 등의 결성과 활동이 그 실천의 과정이었다. 특히,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은 당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던 농민의 조직으로서, 강령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해 빈농에게 분배할 것,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이외의 조선인 지주의 소작료는 3ㆍ7제로 할 것,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의 산림, 하천, 소택 등을 몰수해 국유로 하여 농민이 사용하게 할 것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토지 개혁에 대한 민중들의 광범한 요구는 친일지주ㆍ자본가 정당인 한민당도 기만적인 유상개혁안을 내세우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열망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3주 후인,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이틀 후인 9월 8일에 조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미군정을 실시하자마자 이남 전체 재산의 80퍼센트에 달하는 구 일본인 재산을 모두 군정청에 귀속시켰다.3) 따라서 해방 직후, 농민과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던 구 일본인 소유의 토지4), 공장, 은행 등과 각종 자원이 미군정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친일지주ㆍ자본가ㆍ관료ㆍ경찰 등과 결탁하고 그들과 한편이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이 이남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한 친일파를 자신의 권력의 기반으로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바탕 위에서 친일파들 역시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철저히 은폐하거나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쥔 채 친미파로 변신하여 살아남았다. 따라서 이후 한국 민중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 건설과 친일 청산을 위한 노력은 9월 총파업, 10월 항쟁, 2ㆍ7 구국투쟁, 4ㆍ3 항쟁 등의 처절한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동자 민중의 열망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1948년 5월 10일, 이남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제헌 국회와 이어서 친미(친일)지주와 자본가를 대변하는 이승만 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제헌 국회의 특성과 소장파 의원들
한편, 제헌 국회5)가 반민법을 제정하고 친일파 처리를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소장파’들이 주도하는 제헌 국회 초기의 특성 때문이었다. 민중의 열망에 반하여 실시된 5ㆍ10 선거 결과, 미군정하에서 강권을 휘둘렀던 한민당이 참패하고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었다. 이 무소속 당선자 가운데에는 ‘소장파’라 불리는, 이승만과 한민당에 대해 비판적이고 농민과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1948년 12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원내 비판세력으로 활동하면서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또한 농지개혁법 제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국가보안법 제정을 반대했고 민족 통일과 미군 철수 등을 주장했다.
반민법 제정, 반민특위의 구성과 그 활동, 그리고 와해
1948년 6월에 제헌 국회에서 소장파들이 중심이 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문을 헌법 제101조에 삽입하였다. 이어서 8월에는 ‘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안이 채택되었다. 반민법은 친일파에 대한 처벌규정을 강화하고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부의 구성을 채택하여, 전문 3장 32조로, 제1장 죄, 제2장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 특별재판부 구성과 절차, 부칙으로 구성되어 9월에 가결되었다.
그런데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다루는 이 법을 만든 소장파들은 친일관료가 주축인 이승만 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충돌은 ‘정부 내 친일파 숙청 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국회가 반민법을 통과시켜 정부로 이송시키자 국무회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만장일치로 거부를 결의하였다. 더욱이 이승만 정권은 반민법을 반대하는 대규모 국민대회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대한 민중의 절대적 지지는 9월 22일 이승만에게 법률을 공표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고, 10월 12일 국회는 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반민특위는 각 도별로 10인의 특위위원 선출, 부속법의 통과 그리고 이러한 법률들에 근거한 특별재판부 재판관과 검찰관의 선거, 중앙사무국의 설치와 조사관의 임명, 반민특위 각 도 조사부의 구성 등으로 그 구성을 완결시켰다.
뒤이어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고 거물 친일파들을 차례로 체포하고 재판도 시작하였다.
▲ 1949년 3월 18일, 정동 특별재판소 대법정에서 열린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 제1차 공판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상단 사진의 인물들은 왼쪽에서부터 친일경찰 노덕술, 경성방직 김연수,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최린, 일제밀정 이종형이다.)
이승만 정권은 담화의 형태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담화의 주요한 요지는, 반민특위는 법률적으로 볼 때 입법부가 사법권까지 침해하는 것이기에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것이며, ‘제주 폭동’과 ‘여순 반란’ 등에 따른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에 경찰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사회 각 분야에 뿌리를 박고 있던 반민법 해당자들의 끈질긴 도전과 방해를 받았다. 그 가운데서도 친일경찰의 방해공작은 반민특위 간부들에 대한 중상모략과 군중데모의 선동, 테러, 특위 습격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반민특위는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6)과 ‘6ㆍ6 사건’을 거치면서 실질적으로 와해된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 의원 15명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보수세력이 국회를 주도하게 되는 분기점이 되었고 이에 따라 반민특위는 그 추진력을 급격하게 상실했다. 또한 15명 소장파 의원들의 구속을 빌미로 하여 반민특위 내에 ‘빨갱이’가 득실거린다는 구실을 들어 관제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반민특위는 서울시경 사찰과장이 배후에서 시위를 선동한 혐의를 포착하고 그를 즉각 구속함으로써 경찰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후 결국 서울시경 중부서장 등은 이승만의 뜻을 헤아려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출근하던 특위요원 35명을 불법 체포하였고 지방경찰 또한 각 도지부 특위사무실을 습격하였다. 이로써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차차 그 활동을 마감한다.6)
반민특위의 한계와 노동자 민중의 과제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처벌은 무산되었다.7) 반민특위가 취급한 인원은 총 688명이었고, 이 중 547명의 친일 경력을 확인하였다.
제헌 국회 내 소장파들은 농민과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며 친일 청산을 위해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미군정(미제)과 친미(친일)지주ㆍ자본가ㆍ관료ㆍ경찰들과 결탁한 이승만 세력이 정부를 장악한 이상, 국회 내 소장파들의 힘으로 친일행위자의 인적 청산은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특별법과 그에 따른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경우도 그러했다. 가해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데, 국회에서의 특별법과 특위로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각종 의문사 진상규명특별법과 특위도 대체로 그러했고 지금 우리 눈앞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열악한 노동현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대책수립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가해자들과 그들의 편이 최고의 권력을 잡고 있는 이상, 이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인 노동자 민중의 과제는 그들이 가진 권력을 뒤흔드는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좌절되었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의 건설,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국가의 건설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것이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제1권, 돌베개, 2015.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등.
1) “1945년 9월 6일 민중대표 1,000여 명이 서울에서 회합을 갖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했고, 이어서 일본 제국주의 법률의 완전한 폐기, 친일협력자 민족반역자의 토지 몰수, 철도 통신 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골간으로 하는 정책 시안을 공표했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제1권, 돌베개, 2015, pp. 44-45.)
2)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내건 원칙적 노선은 다음과 같다. 1. 특정 계급만이 아닌 조선의 모든 애국적 민주세력의 공동전선이고 2.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하수인 격인 일체의 매국도당에 대한 공동의 투쟁기관이며 3.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위한 공동의 준비기관이다.” (같은 책, p. 91.)
3) 같은 책, p. 80.
4) “일제하의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1910년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로 강점한 전후 식민지체제 수립을 위한 제1차적 작업으로 실시한 종합적 식민지 정책의 하나였다. 일제가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서둘러 실시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자본의 토지 점유에 적합한 토지소유의 증명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왕조 말기에도 토지는 사유권이 확립되어 상품으로서 자유롭게 매매되고 있었으나 등기제도 등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또한, 토지에 사유권 외에도 농민층의 각종 권리가 부착되어 있어서 일본자본의 토지 점유에 장애요소가 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의 사유권에서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그 밖의 농민의 각종 권리는 모두 배제해 토지매매를 더 자유롭게 하고, 토지등기제도와 지번제도 등으로 제도적 보장을 하려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제헌 국회는 5월 31일 소집되어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한다. 제헌 헌법은 주요 자원과 중요 산업의 국유, 국영 또는 공영을 규정하고 근로의 권리와 사기업에서 근로자의 이익 분개 균점 권리를 보장하는 등 경제 부문에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었고 평등과 공공복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 이러한 좋은 헌법이 제정된 것은 국회에 중도적 진보적 민족주의자가 적지 않았고 분단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이었으나 여전히 민족 혁명적 분위기가 강해 이승만 등 단정노선파의 발언권이 약했기 때문이다.”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pp. 105-110.)
6)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소장파’ 국회의원들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들이 기소된 이유는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퇴와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하는 진언서를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 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고문으로 인한 허위진술의 자백 내용과 신빙성이 검증이 되지 않은 암호 문서를 근거로, 검찰 측 주장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들의 행위에 대해 “결국 우리 동족 간에 비참한 살육전을 전개시키고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투쟁을 초래하여 우리 대한민국을 중대한 위기에 봉착케 하고 국가의 변란을 야기하여 마침내는 공산독재정권을 수립하려고 함에 그 의도가 있었다고 볼 것”이라며 “도저히 용허할 수 없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반역이요 단호히 배격하여야 할 이적행위”로 규정해 1950년 3월 14일에 국회의원 13명에게 모두 10년에서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다음백과≫.)
7) 예를 들어, 반민특위에 1호로 체포되었던 친일자본가 박흥식은 4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공민권 정지 2년을 구형받았지만 9월에 무죄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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