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미 제국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침탈사 훑어보기(중)

 

김형균 | 회원, 철도노동자

 

 

[차례]

I. 미 제국에 대한 한국 인민의 인식

1. 해방 후

2. 80년 광주 민중 항쟁

 

II. 미 제국의 탄생과 성장

1.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의 무덤 위에 세워진 미합중국

2. 독립(반역) 전쟁의 진실(1776-1789)

3. 독립 후 영토 확장, 서부 개척 시대(1803-1848)

4. 남북 내전(1861-1865)

5. 대륙 횡단 철도(서부 개척) 건설과 원주민의 봉기

6. 제국주의 시대, 해외로 팽창(1800년대 중반 이후)

7. 제1차 세계 대전

8. 제2차 세계 대전

9.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미 제국의 세계 지배

 

III.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

쿠바,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니카라과, 과테말라, 파나마,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페루,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이티, 온두라스)

ㆍㆍㆍ <이상 (상)>

 

IV. 미 제국의 중동ㆍ아프리카 침탈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팔레스타인, 리비아, 콩고, 르완다, 수단, 소말리아, 앙골라

ㆍㆍㆍ <이상 (중)>

 

V. 미 제국의 동남아ㆍ태평양 침탈사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서뉴기니, 하와이ㆍ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한국)

 

 

IV. 미 제국의 중동ㆍ아프리카 침탈사

 

1. 아프가니스탄

 

1)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발단 배경

1973년 사촌인 자히르 왕을 축출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다우드 대통령은 입헌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초기에는 쏘련의 지원을 받으며 전력을 현대화하는 한편, 당시의 미 제국의 속국이던 이란의 팔레비 왕과 친미적인 파키스탄의 부토부토 대통령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양면 정책은 친미ㆍ친쏘로 양분된 아프가니스탄 군벌들에게 배척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5년에 결성되어 급진파와 친쏘파로 양분된 인민민주당(PDPA)은, 반(反)다우드 연대를 결성하여 1978년 4월에 유혈 쿠데타로 다우드를 제거했다. 인민민주당은 타라키를 대통령 겸 수상으로, 부수상과 외무장관을 친쏘파로 배치하여 친쏘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종교개혁 조처와 친쏘정책은 이슬람 보수세력과 친미 우익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특히 이들의 반발은 미 제국의 지원 때문에 반정부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이를 위해 CIA는 이슬람 보수주의자와 우익 군벌 등을 규합하여 반정부 무장세력을 조직했는데, 이 세력이 바로 성전용사(聖戰勇士)라는 뜻의 무자헤딘이다.

한편 타라키 정부 내의 권력 투쟁도 치열했는데, 결국 쏘련 브레쥐네프에게 아민의 암살 음모를 경고받은 뒤 타라키 대통령은 살해되었다. CIA의 첩자로 의심받던 아민 부수상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을 뿐, 사실 여부는 확인된 바 없다.

 

2) 미 제국이 유발한 제1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당시 타라키 대통령은 쏘련 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유는 무자헤딘 게릴라의 무차별적인 파괴와 학살을 막고 지속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쏘련군의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쏘련군을 파병하면 미국 책략에 말려든다는 판단(브레쥐네프 서기장, 꼬씌긴 수상)에 따라 파병 요청은 거부되었다.

한편 미국은 쏘련의 개입을 유도했는데, 이는 1997년 6월 CNN에 출연한 카터 대통령의 보좌관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고전했듯이 쏘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능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이 미국의 목표였다고 했다. 결국, 1979년 12월 24일 쏘련은 지상군을 파병한다(파병 여부를 둘러싼 내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쏘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하자, 미 제국은 무자헤딘에게 최저 30억 달러에서 6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하고, 그 밖에 아편 밀매까지 도와주며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CIA와 MI6가 모집한 무자헤딘의 수는 43개국에 약 3만5천 명에 달했다(Washington Post, 1992. 7. 19.). 쏘련군과 연합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을 한편으로 미 제국 등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 사이의 10년에 걸친 내전은 쏘련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1988년 4월 아프가니스탄, 쏘련, 파키스탄, 미국이 서명한 제네바 협약에 따라 쏘련군은 1989년 2월에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나 무자헤딘은 제네바 협약에 서명을 거부하고 나지불라 정부의 연정 제안도 일축했다. 미 제국은 무자헤딘을 도와 나지불라 정부의 전복에만 몰두했다. 1990년 발생한 쿠데타까지 진압한 나지불라 정부는 쏘련이 해제되고 러시아 대통령 옐찐이 원조를 중단함으로써 1992년 4월에 무너졌다.

 

3)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한 탈레반

1992년 6월 과도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국가수반 자리는 친미 성향의 북부동맹의 몫이 되었다. 통치권은 주요 거점을 장악한 군벌들이 행사했으므로 과도정부의 통치권은 유명무실했다. 혼란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한 세력이 탈레반(Taliban)이다. 탈레반은 파슈툰족(42%의 최대 종족) 수니파 지도자와 이를 지지하는 군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정치ㆍ종교집단이다. 이들을 이끌어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하고 국가의 수반이 된 자가 바로 물라 오마르이다. 그리고 2000년 말에는 북부동맹을 물리치고 국토의 90% 이상을 장악함으로써 명실공히 정부의 형태를 갖추었다.

탈레반이 무자헤딘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데는 무엇보다도 사우디의 자금 지원과 파키스탄 정부의 군사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다(Time, 2001. 9. 18.). 이들 뒤에는 미국 정부가 있었다. 당시 우드로 윌슨 국제센타에서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던 해리슨 박사는, 1991년 탈레반의 조직 강화를 위해 CIA에서 30억 달러의 거금을 파키스탄에 건넸고, 당시 자신은 CIA 고위층에게 이는 괴물을 키우는 격이라며 적극적으로 말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The Times-India, 2001. 3. 7.).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엄격한 사회통제와 극단적인 신정일체정책을 폈다.

 

4)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빈 라덴은 사우디 부호의 아들로서 쏘련군의 진입이 시작된 1979년 무자헤딘의 한 그룹에 참가했다. 1984년에는 아잠과 함께 모병, 선무, 병참을 담당할 맥(MAK)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우디 등 이슬람권에서 자금을 모아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에게 공급했다(New Yorker, 2000. 1. 24.). 1998년에는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전사들을 선발하여 알카에다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었다(AP, 2003. 2. 29.). 알카에다가 출범할 당시 CIA에서 직접 무기를 공급했고, 알카에다에 테네시주에 있는 총기 공장까지 소개해 주었다. 이는 1998년 케냐 등지에서 발생한 알카에다의 미국 대사관의 폭탄 테러 사건을 다룬 미 법원의 심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다(Boston Globe, 2004. 6. 27.).

빈 라덴은 199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단으로 캠프를 옮겼다. 그는 현지 무장단체를 만들어 알카에다 조직과 공조체계를 구축하고 이들을 기반으로 국제적인 테러단을 키웠다. 이 테러단은 수단에서 작전 중이던 미 제국의 블랙호크 헬기를 스팅어 미사일로 격추, 뉴욕 무역센터 지하실에 폭탄을 실은 차량을 돌진, 이집트 관광지 룩소르의 관광객 폭사 사건, 사우디의 미군 시설 등에 대한 폭탄 공격 등을 했다. 미국뿐 아니라 이슬람권인 이집트와 사우디에서도 빈 라덴을 추방하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결국, 빈 라덴은 사우디 정부로부터 국적 박탈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 탈레반에 합류했다.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이후, 1998년 케냐 주재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사건, 2000년 10월 예멘의 아덴항에서 발생한 미 군함 폭탄 테러 사건 등이 터지자, 미국 정부는 빈 라덴을 테러 주범으로 지목하고 탈레반 정부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오마르 수반이 증거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그리고 미 제국은 1998년 발행한 케냐의 자국 공관 폭파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알카에다의 훈련 캠프라고 지목한 아프가니스탄 한 지역과 빈 라덴의 근거지라고 지목한 수단의 알 쉬파 제약회사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 무렵 탈레반 정부도 파키스탄 ISI와 사우디의 실권자 압둘라 왕자 등을 통해 미 제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가능성을 간파했다. 겉으로는 증거 제시를 요구하면서도 안으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빈 라덴의 신병 인도 의사를 미 정부에 타진했다(Washington Post, 2001. 9. 23.). 그러나 침공 명분을 축적하는 데 몰두한 미국 정부는 이러한 탈레반 정부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5) 9ㆍ11 사건은 사기극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반부터 약 2시간 동안 민항기를 이용한 테러가 발생하여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잿더미로 변하고, 국방성 건물도 일부 파손되는가 하면 4대의 민항기도 폭파되었다. 이 사건으로 건물과 비행기 탑승객 등 2,97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24명이 영구 실종되었다. 사건 3주일 뒤 CNN 방송에서 보도한 사망자 수는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보다 두 배가 많은 6,000명이 넘었고, 또 현장에서 수거한 뼛조각 등을 분석한 의료진은 최소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CBS News, 2005. 2. 23.).

미국 정부는 이를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발표는 상당한 의문점을 일으켰다. 첫 번째 의문점은 사전에 테러 정보를 알았는지 여부인데,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전면 부인했다. ①1998년 12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빈 라덴 일당이 워싱턴이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대규모 테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②당시 CIA도 FBI와 별도로 이들이 항공기로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테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상부에 보고했다고 미 상원 정보위에서 증언했다(CNN News, 2002. 5. 20.). ③2001년 6월부터 8월 사이 독일 정보기관은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이 공중 납치와 미국의 시설을 공격하기 위해 비행훈련을 하고 있다고 CIA에 통보했고, ④영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도 이 사실을 미국에 경고했다. ⑤아울러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9ㆍ11 사건을 빌미로 미 제국이 침공한 탈레반의 당시 외무장관 무타와킬도 미국 정부에 빈 라덴의 대규모 공격이 8-9월에 있을 것이라고 은밀히 통보했고, ⑥요르단 정보기관도 9ㆍ11 사건 한 달 전에 이를 통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1)

그리고 과연 민항기 충돌로 110층의 거대한 빌딩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①세계무역센터의 설계감리에 관여했던 브라운 공학박사 등은 세계무역센터와 같이 ASTM E119 규격 철제를 사용한 거대한 구조물이 녹아내리려면 화씨 2,000도 이상에서 여러 시간 노출되어야 하는데, 일반 석유를 쓰는 민항기 연료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녹여 재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②당시 뉴욕 소방관 루이 칵치올리는 무역센터 건물이 내부 폭발에 의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③9ㆍ11 조사위에서 나온 세계무역센터의 용역직원 로드리게스는 지하실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린 몇 초 뒤 비행기가 돌진해 왔다고 증언했다. 특히 이 폭발음은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들어서 증언만 해도 30명이 된다고 말했다. ④폰 뷰로 전 독일 국방장관은 TV 등 각종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무역센터 건물이 원격조종에 의해 폭파되었다고 단언하며 용역직원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9ㆍ11 사건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본 쪽은 테러 척결이라는 미명으로 거침없이 신제국주의 패권전략을 실행에 옮긴 부시와 신보수주의자(Neo Con)들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답은 테러와의 전쟁은 석유의 보고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차지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며, 동시에 이것은 빈 라덴은 무역센터 빌딩을 폭파한 테러 정황범들의 수괴가 아니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정황들만으로는 9ㆍ11 사건을 미 제국의 음모로 단정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철근콘크리트로 된 120미터 높이의 쌍둥이 빌딩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수 있는가라는 과학적 의문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17년 7월 말기 암환자로서 임종을 앞둔 CIA 요원의 양심 고백은 이러한 정황을 분명히 해주었다. 폭파 전문 엔지니어로 36년간 CIA에서 일해 온 하워드(76세)의 입을 통해 그간의 의혹이 해소되었던 것이다. 이는 앞서 증언한 한 소방관의 발언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6) 석유 약탈과 전략 거점 확보를 위한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1년 9월 11일 뉴욕 무역센터 두 동이 폭파된 사건에 대해, 미 제국은 빈 라덴을 주범으로 지목했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직전까지 내건 명분은 이러한 테러의 주범인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제거였다. 그러나 침공 다음 날 미 중부군 사령관 프랭크스 장군은 우리의 목표는 빈 라덴과 알카에다보다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온 탈레반 정부다(Guardian, 2001. 9. 21.)라며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기 위한 미 제국의 속뜻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 The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려면 대외적인 침공 명분이 절실히 필요하다라는 9ㆍ11 이전의 보고서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부시 캠프의 엘론사는 아프가니스탄 침공 수개월 전부터 탈레반과 원유 이권 협상을 벌였다. 영국 ≪가디언≫지는 엘론사가 탈레반 정부가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여 협상이 여의치 않자 아프가니스탄을 황금으로 뒤덮든지 아니면 폭탄으로 뒤덮든지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 제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최근까지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사망자 집계는 언론사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가디언≫의 조나단 스틸 기자는 최소 2만에서 최대 4만9,600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또 유엔 구호 기관에서는 난민만 해도 100만을 헤아리며, 당장 아사 지경에 이른 주민이 150만 명이 넘는다고 추산했다.

미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석유의 보고인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함으로써 원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독점적 지위는 물론,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생산된 원유와 천연가스의 수송로도 확보했다. 아울러 탈레반 정부를 붕괴시킴으로써 사우디와 파키스탄이 공조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삼각 축도 와해시켰다.

 

7) 실패한 아프가니스탄 침공

2014년 12월 28일 미 역사상 최장기 전쟁인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3년 만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2016년 미군은 9천 명 정도 남아 있었다. 10만 명이 넘는 병력도 아프가니스탄 평정에 실패한 마당에 의미가 없다. 아프간 전쟁은 2019년까지 18년째 이어지면서 베트남 전쟁의 14년을 넘어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하는 전쟁이 되고 있다.

지배권을 아프간 정부와 35만 아프간 군ㆍ경에 넘겼으나, 탈레반과 정부군 간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나토군의 전쟁 종료식은 미국과 나토의 임무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준다라는 성명을 냈다.

미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계속 지배할 수 있다고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과거 쏘련은 이곳에서 10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으나 부담만 안은 채 성과를 내지 못했던 곳이다. 과거 쏘련 주둔군을 상대로 한 반군은 당시에 미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었다. 지금 탈레반 지하정부는 당시 미 제국과 같은 강력한 후원자가 없다. 그러나 탈레반의 힘은 과거 어느 반군세력보다도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 제국이 급조한 아프간 대리 정부는 미 제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8) 빈 라덴의 사망

2008년 10월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민주당 대선 공약대로 알카에다와 그 지도자 빈 라덴을 미국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국제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알카에다의 최고 지도자 빈 라덴 제거를 위해 CIA를 주축으로 네이비실 등이 참가한 기획단팀을 구성했고 작전명을 넵튠(Neptune)으로 정했다(Los Angeles Times, 2011. 5. 14.).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 수도인 이슬라마바드 외곽 고급주택가에 은신해 있던 빈 라덴을 생포한 미 특공대는 비무장 상태였던 그를 사살한 후 시신은 곧바로 심해에 수장했다고 발표했다.

 

 

2. 이라크

 

이라크는 몽골, 오스만투르크, 대영제국에 복속되었다가 형식적으로나마 영국의 위임통치에서 벗어난 시기는 1932년이다.

 

1) 카심 대통령 제거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터키로부터 이라크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은 뒤, 1922년 12월 이라크에서 쿠웨이트를 강제로 분리했다. 그리고 석유의 보고 쿠웨이트는 1961년까지 자신들이 통치하면서, 인종과 종파가 다른 쿠르드족은 이라크에 병합시켰다. 이 때문에 쿠르드족이 독립투쟁을 벌이자 영국군은 쿠르드족이 모여 사는 이라크 북부에 화학무기를 살포하여 학살했고, 또 쿠웨이트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한 이라크에도 혹독한 제재를 가하였다.

당시 이라크의 석유자원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이 각각 23.5%씩 차지한 뒤 나머지 6%만 이라크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또한, 군사적 지배력을 확보하고자 중앙조약기구(CENTO, Central Treaty Organization)를 만들었다. 이는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터키를 하나로 묶어 통제했다.

그 뒤 1958년 7월 인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카심 장군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이어서 미ㆍ영이 주도하는 조약기구에서 탈퇴한 뒤 반제국주의 정책을 펴면서 영국계 석유회사 등이 거의 독점하고 있던 토지를 환수하여 저소득층에게 분배하고, 그들을 위한 주택 공급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과거 서구 제국들과 체결한 불공정한 석유협정 등을 무효로 하고 공정한 협정을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자국의 중동지역 이익을 침해하는 카심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스라엘ㆍ영국 등과 함께 카심 제거에 나선 미국 정보기관은 쿠웨이트에 작전본부를 두고 반(反)카심 군 지휘관을 양성하여 쿠르드족의 무장봉기도 지원했다. 동시에 CIA는 이라크 건강증진위원회라는 유령단체를 설립한 뒤 치명적인 독이 묻은 손수건으로 그를 독살하려는 공작도 벌였다(New York Times, 2003. 3. 14.).

카심 대통령은 영국이 강제로 분리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함께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ㆍ영군의 철수도 요구했다. 1963년 2월 카심 대통령은 프랑스 ≪르몽드≫와의 회견에서 미국 정부로부터 만약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재미없을 것이다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카심 대통령은 CIA의 후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난 뒤 곧바로 살해되었다. 아울러 교사, 의사, 언론인, 법조인 등 카심 대통령의 반제국주의 노선을 지지한 수천 명도 학살되었다.

카심 대통령의 제거와 추종자 학살에 CIA가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이듬해 4월 덜레스 CIA 국장의 의회 증언, 존슨과 닉슨 행정부 시절 미 국가안보회의 간부를 지낸 로저 모리스의 증언, 중동ㆍ아프리카 CIA 책임자를 지낸 아취볼드 구스밸트의 입을 통해서 확인되었다.2) 특히 미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약소국 요르단을 지켜온 후세인 국왕은 ≪야만적인 우정≫이라는 저술에서 미국 정부의 개입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주소까지 상세히 기록된 5,000명에 달하는 살생부는 쿠데타 당일 쿠웨이트에 있는 CIA 작전 지휘소에서 무선통신을 통해 쿠데타 군부에 전달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피의 목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2) 미 제국이 키우고, 미 제국이 죽인 사담 후세인

1968년 미 제국의 지원 아래 청년 장교단의 일원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킨 사담 후세인은 이후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거쳐, 1979년 대통령에 올랐다. 집권 이듬해인 1980년 9월부터 만 8년 동안은 이란과 전쟁을 벌이는 등 미 제국의 충견 노릇을 했다.

카심 대통령도 이란에 영토 문제를 제기했듯이, 양국 사이의 영토 다툼은 페르시아 제국을 복속시킨 오스만투르크가 이라크를 이란에서 강제분리시키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아랍족인 이라크와 페르시아 민족에 근원을 둔 이란은 인종과 문화의 뿌리가 전혀 다르다. 또 이란은 시아파가 주류를 점하고 있으나 이라크는 60% 이상을 점하는 시아파의 절반에 불과한 수니파가 주류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대립적인 두 나라를 동시에 파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나라가 미 제국이다.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정부를 붕괴시키는 동시에, 급증하는 석유 판매대금을 기반으로 중동의 맹주를 노리던 이라크의 영향력도 약화시키는 것이 미 제국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미 제국은 이 전쟁을 지원하려고 이라크에 첨단 무기와 생화학 무기, 심지어 핵물질까지 공급하고 식량을 포함한 재정지원도 병행했다. 이는 이라크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주라고 CIA에 지시한 레이건 대통령의 메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3)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비밀리에 노리에가 등 중남미 지도자와 카쇼기 같은 무기상을 중간에 내세워 이란에도 무기를 판매했다. 이는 무기를 팔면서 두 나라 모두를 파괴하겠다는 의도를 증명하는 것이다.

 

3) 미 제국의 걸프전 음모

걸프전의 실마리가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1922년 영국이 이라크 핵심 유전 지대를 독점하려고 이라크 바스라 주에서 강제로 쿠웨이트를 분리한 데서 유래한다.

이라크 정부는 쿠웨이트를 점령하기 직전, 이란과 전쟁 때 양국 국경에 접한 이라크의 루마일라 유전 지대에서 쿠웨이트가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원유를 도굴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이라크가 이란과의 전쟁 때 자국에 진 수백억 달러의 빚을 갚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린다면서, 그동안 이라크가 석유생산을 줄여 유가를 올리자고 제안한 것을 거절하여 불화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1990년 7월 회담을 열었으나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1일 회담에서도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자 1990년 8월 2일 새벽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7월 25일 후세인 대통령은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 그래스피와 긴급회동을 하여 두 나라 간 영토분쟁에 대한 미국의 의중을 물었다. 그래스피 대사는 아랍 내부 문제에 미국은 별다른 관심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틀 뒤(1990. 7. 27.) 미 상원 합동회의에서 이라크 정부의 인권유린 실태를 문제 삼아 경제제재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부시 대통령은 즉각적인 거부권을 행사하며 사담을 두둔했다(New York Times, 1990. 9. 23.).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이틀 전(7. 31.)에 하원 외교 분과위 산하 유럽ㆍ중동 소위원회 청문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해밀턴 의원은 미 국무부 켈리 차관에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예상되는데 미국의 대응은 어떤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켈리 차관은 우리는 중동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개입의 의무가 없다라고 밝힘으로써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용인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 국경을 넘자 미 제국은 종래의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미 제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뒤, 실제로 침공하자 이를 이라크 침공의 빌미로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아랍 정상 회담에 참석한 후세인 대통령은 미국의 음모설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중동 근해로 몰려들고 있는 미 항모의 군사적 위협은 이 기회를 이용해 중동 전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PLO 의장 아라파트 역시, 미국이 쿠웨이트에 이라크의 협상 제안에 일절 응하지 말도록 지시함으로써 양국 분쟁에 대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고 주장했다(Christian Science Monitor, 1991. 2. 5.). 그리고 요르단 국왕 후세인도 1991년 2월 19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라크의 침공 직전 쿠웨이트 외무장관이 우리는 이라크의 침공 등 점령군을 이곳에 하루만 묶어둔다면 미국이 그들을 물리칠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걸프전은 미 제국의 음모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증거와 정황 자료는 무수히 많다. 미 제국은 이라크와 쿠웨이트 양측에 대해 국경분쟁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공격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것을 이라크 침공의 빌미로 삼았다.

 

4) 미 제국의 제1차 이라크 침공

1991년 1월 17일 새벽, 미 제국은 영국 등 서방국가와 한국 등 속방을 불러모아 이라크군 섬멸을 위한 사막의 폭풍(Desert of Storm) 작전을 개시했다.

부시 정부는 침공 명분을 조작했고, 근소한 차이로 미 의회의 파병결의안이 통과되자, 이라크 바그다드에 대한 초토화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의 선전처럼 군사 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이나 쿠웨이트에 주둔 중인 이라크 군대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스라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하던 이라크군을 집단학살했다. 또 도로ㆍ교량ㆍ전기ㆍ통신ㆍ수도ㆍ댐ㆍ유전 지대 등 군사 시설과 관계없는 공공시설도 초토화했다.

아울러 민간인 거주지역과 곡물 저장고 그리고 병원과 학교까지 모조리 파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미 제국과 유엔의 경제 봉쇄로 인해 식량과 의약품의 절대 부족 사태에 직면함으로써 수많은 아사자와 병사자가 속출했다. 미 제국은 석유 이권이 필요할 뿐 이라크 인민의 목숨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의 인명피해에 대해, 미국 정부의 공식집계를 인용한 CNN 방송은 1991년 6월 현재 사망 10만 명, 부상 30여만 명, 실종 및 탈영 15만 명, 포로 6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국제 인권단체는 인명피해가 그보다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특히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라카(Laka) 재단은 미국이 사용한 우라늄 폭탄 때문에 300-800만 톤에 달하는 방사능 찌꺼기가 토양과 대기와 물을 오염시켰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유엔을 비롯한 관련 기관들도 이로 인한 각종 질병으로 최소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는데, 그 가운데 60만 명 이상이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곡물 창고 파괴와 유엔의 경제 봉쇄 조치로 비롯된 아사자, 그리고 상하수도 파괴에 따른 식수원 오염으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숫자까지 합하면 희생자 규모는 이보다 훨씬 많다. 1998년에 유니세프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로 인해 죽은 아동만 해도 매년 9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미군 등 다국적군의 전사자 또는 사고사로 생명을 잃은 수는 300명도 채 되지 않으며, 부상자는 500명 미만이라는 것이 미국 정부의 공식집계다. 걸프전은 전쟁이 아니라 미군 등에 의한 일방적인 인종학살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의 피해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 피해는 자신이 사용한 우라늄 폭탄과 화학무기 등으로 인해 참전 미군의 4분의 1이 넘는 18만여 명이 장애인이 됐고, 약 20만 명은 병명을 알 수 없는 전쟁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AP, 2006. 8. 12.).

 

5) 미 제국의 제2차 이라크 침공

2003년 3월 20일 새벽, 미 제국은 선전 포고와 동시에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파괴 무기의 개발과 은닉, 알카에다를 비롯한 국제 테러조직과의 연계, 그리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후세인 정부의 인권 탄압이라는 세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미 제국의 침공 직전 이미 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 무기 사찰단에 의해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파괴 무기의 개발 은닉 의혹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미 제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직전 사담 후세인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제한 없는 무기 사찰도 수용하겠다며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 상태였다. 이라크를 침공한 뒤 콜린 파월도 자신이 제시했던 증거 자료는 가짜였다고 시인했다. 미 상원 조사위원회도 2008년 6월에 발표한 최종 보고서를 통해 부시 행정부가 강변하던 이라크 침공 명분은 모두 사실무근임을 확인했다.4) 이라크를 점령하고 18개월 동안 정밀조사를 벌인 CIA에서조차 대량파괴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하자 궁지에 몰린 아들 부시도 마지못해 이를 시인한 것이다(Washington post, 2004. 4. 3.).

알카에다 관련 의혹에 대해서도 사담 후세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올브라이트(클린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냄)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나는 사담 후세인이 빈 라덴이나 알카에다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도 사담 후세인 정부는 결코 테러를 지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Melbourne Herald Sun, 2003. 10. 21.).

이처럼 줄곧 강변해오던 침략 명분이 모두 허위로 판명되자 미국 정부는 1998년 3월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쿠르드족을 집단 학살한 전적을 트집 잡아 이라크 침공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의 쿠르드족 학살을 지원한 것은 미국이었고, 이란과 전쟁할 때에도 미국이 생화학 무기를 포함하여 핵무기 관련 원료와 기술을 제공했다(Guardian, 2003. 3. 6.).

 

6) 인권이라는 미 제국의 사기극

미국은 왜 오랫동안 자국의 충견 노릇을 한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는가? 그것의 주된 이유는 석유 매장량 세계 3위로 알려진 이라크에서 석유 이권을 독식하려는 미 제국의 탐욕, 그리고 이란과의 전쟁 이후 중동의 군사 대국으로 떠오른 이라크와 이 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는 사담 후세인을 방관할 수 없다는 이스라엘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유국들의 달러 결제거부 방침이 확산된다면 강압적으로 지탱해온 달러의 기축통화 체제는 와해될 수밖에 없고, 이는 제국의 붕괴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7)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성공한 것인가?

이라크 침공 명분이 모두 허위로 밝혀졌음에도 미국은 사담 후세인은 물론 그의 두 아들과 최측근 참모들까지 모두 죽였다. 군정청(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이 지명한 이라크 임시정부 각료회의, 그리고 친미 그룹들의 충성 경쟁이었던 2005년 1월 선거를 통해 쿠르드족 출신을 대통령으로, 시아파 출신을 수상으로 하는 대리 정권을 세웠다.

이라크를 침공한 후 불과 7주 만에 공식적으로 승전을 선언하고 그들의 의도대로 정권까지 교체했음에도, 표면적인 성과와는 달리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제2의 베트남전과 같은 꼴이 되었다. 2008년 12월 말 현재 미군 사망자는 4,200명을 넘었고, 공식 발표된 부상자만 3만여 명에 달한다(CNN News, 2008. 12. 31.). 또 그동안 퍼부은 전쟁비용은 무려 1조 달러가 넘으며(CNN NewsBBC News, 2008. 11. 30.), 참전 장병에 대한 보상 비용과 이라크 대리 정권 지원 비용 등을 다 합치면 거의 3조 달러에 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8) 미국이 얻은 것과 잃은 것

미국이 잃은 것은 도덕성의 상실이다. 20세기 말까지는 나름대로 정치 선전과 자금 살포 등을 통해 그들의 추악한 탐욕을 가려왔으나, 21세기 벽두부터 시작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불법 침공으로 제국의 치부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미국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지난 20년 동안 세계의 금융을 움직인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의 지적대로, 석유 때문에 일으킨 이라크 침공에서(Sunday Times, 2007. 9. 16.) 미국은 1,120억 배럴로 추정되는 이라크의 유전을 독식했는가?

당장은 이라크 유전을 독식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는 결코 항구적이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지구촌 25개국의 주민 2만5,000명을 상대로 벌인 여론조사에서 73%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부정적 의사를 표출했고, 이라크 인민 78%도 미군의 침공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BBC News, 2007. 1. 23.). 미국이 세운 이라크 대리 정권의 의회조차 외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고(AP-FOX News, 2007. 5. 10.),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도 철군을 서둘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실패와 더불어 2008년 9월 중순에는 미국발 금융대란이 터졌다.

 

 

3. 이란

 

20세기 초반까지 페르시아로 불렸던 이란은 약 1만 년의 역사를 가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랜 페르시아 문명을 자랑한다. 최초의 시아파 왕조이며 오늘날 이란의 모태이기도 한 사파비드 왕조는 이웃 아프가니스탄, 제정 러시아, 대영제국, 터키 등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 1906년에 입헌 군주국이 되었으나, 1921년 러시아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카자크 병단 대장 리자 샤(Reza Shah Pahlavi)가 영국과 쏘련의 비호를 받으면서 군사 반란을 일으켜 사파비드 왕조를 폐하고 팔레비 왕조를 세웠다.

 

1) 리자 샤 팔레비 추방ㆍ독살, 그의 아들 모하메드 팔레비로 교체

팔레비 왕조 수립의 주역을 담당한 영국이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세우는 등 자원 수탈과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리자 샤는 제3국 독일과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등 서방 진영보다 이란의 건설을 위해 철강 등을 공급하며 호의를 베푼 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41년 8월 영국 등 연합군은 석유자원을 강탈하기 위해 이란을 침공하여 중립을 선언한 리자 샤를 국외로 추방하고, 미국은 그의 아들 모하메드 팔레비를 이란의 왕으로 세웠다. 이처럼 모하메드 팔레비는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와 한통속이 되어 40년 가까이 이란을 공포와 빈곤의 땅을 만들었다. 한편 추방된 리자 샤는 그의 재기를 우려한 영국 정보기관에 의해 194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독살되었다.

 

2) 독재 왕정 수립과 모사데크 축출

모사데크는 리자 샤 정부의 법무장관과 재무장관 등을 두루 거치고, 모하메드 팔레비 시절인 1951년 개혁세력과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의회에서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란의 원유를 착취해온 영국계 앵글로-이란 석유회사 등 외국기업이 지배하던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다. 아울러 극소수가 독점하던 농지를 농민 집단이 공동 경작하도록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책에 대해 영국은 이란의 석유 수출을 봉쇄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했다. 영국의 경제제재로 곤경에 처한 모사데크는 제국주의의 부당한 압박에 당당히 맞설 것을 천명한 뒤 자신에게 장관 및 군 장성 임명권 등 비상대권을 달라고 팔레비 왕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던 팔레비는 모사데크를 즉각 해임했다.

1952년 7월 모사데크의 후임으로 임명된 아흐마드 콰범은 인민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취임 닷새 만에 사퇴하고 모사데크가 다시 총리로 복귀했다.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로 총리에 복귀한 모사데크는 영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분석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의 처칠 수상과 함께 이란의 석유 이권을 독식하기 위해 모사데크를 축출할 음모를 구체화해 나갔다. 이를 위한 비밀 작전이 1953년 3월 아이젠하워의 지시에 따라 CIA가 수행한 아작스(Ajax) 작전이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비밀공작의 핵심은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과거 나치 비밀 부대원이었던 자헤디 장군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작전 책임자는 중동 아프리카 CIA 책임자였던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조카 커밋 루스벨트였으며, 작전본부는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이었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한편 모사데크 총리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팔레비 왕과 미ㆍ영국의 음모를 눈치채고, 국민투표를 하여 99%가 넘는 인민의 지지를 확보했다. 인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팔레비 왕의 망명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제국의 비호를 받는 왕정파와 반제국주의를 내세운 모사데크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모사데크를 지지하던 수백만 명의 시민이 자헤디 장군 등 미 제국의 개 노릇을 해온 친미 우익 군부에 의해 학살되었다. 모사데크는 내전 위기에 직면한 이란을 구하고자 1953년 8월 자진사퇴함으로써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충돌은 종결되었다.

모사데크를 제거한 팔레비는 주요 기간산업 국유화 등의 개혁을 전면 백지화하고 미국과 영국에 각각 40%의 석유산업 지분을 넘겨주었다. 팔레비 왕조는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국가의 부는 이들 제국과 팔레비 일당이 독식하고, 이에 불평하는 세력에게는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다. 이를 주도한 대표적인 기관이 1959년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도로 설립되어 세계적인 악명을 떨친 비밀 정보기관 사바크(SAVAK)이다.

 

3) 혁명정부 전복을 위한 쿠데타 음모

팔레비 왕조는 1979년 2월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이끄는 민중 혁명으로 붕괴하였다. 이로써 이란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지배권도 상실되었다.

미 제국은 이란 민중 혁명의 기운이 주변 국가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군부의 친미 쿠데타를 기획한다. 팔레비 왕조 붕괴 이듬해인 1980년 7월, 미국은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을 요르단으로 파견하여 후세인 국왕과의 비밀회담에서 이를 구체화했다. 그러나 미 제국의 쿠데타 음모는 쏘련의 첩보기관을 통해 호메이니 혁명정부에 미리 알려져 실패로 끝났다.

한편 호메이니 혁명정부가 출범하던 1979년 11월 이란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여 52명의 대사관 직원을 인질로 잡았다. 이 대학생들은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팔레비 왕의 이란 송환과 미국 내에 동결되어있는 이란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1980년 7월 팔레비는 사망하고, 미국 정부에서 동결재산을 해제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1981년 1월 20일 444일의 인질 소동은 종결되었다. 국가 간 약속에 따라 인질들은 석방되었으나 새로 들어선 레이건 정부는 약속을 깨고 이란 재산에 대한 반출을 금지했다.

 

4) 이란ㆍ이라크 전쟁의 본질

팔레비 축출 이후 미국의 이란에 대한 적대 정책은,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이란을 침공하도록 부추긴 사실로 알 수 있다. 1980년 9월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1988년 8월 유엔 중재로 종전될 때까지 8년간의 전쟁을 통해, 양측의 인명과 산업시설 등은 초토화되었다.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분쟁이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호메이니 혁명정부를 붕괴시키고,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내분을 통해 이슬람 세력의 약화를 도모하여 미 제국의 패권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려는 미 제국의 계략이 있었다. 또한, 군수품을 팔아먹으려는 군산복합체의 욕심도 함께 작용했다. 1987년 3월 이란-콘트라 게이트로 세상에 알려진 바와 같이, 미 제국은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이란에도 무기를 밀매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추악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전쟁 기간에 요르단ㆍ사우디아라비아ㆍ아랍에미리트ㆍ쿠웨이트 등 친미 국가들과 미ㆍ영ㆍ독ㆍ불 등이 이라크를 지원했다. 반면 시리아ㆍ리비아 그리고 통일 이전의 남예멘 같은 반미 성향의 국가는 이란을 지원했다. 그 결과 미 제국의 의도대로 이슬람권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1988년 7월 3일에는 성조기를 게양한 이라크 선박을 호위하던 미 순양함 빈센스호가 이란 영해인 페르시아만 상공을 비행하던 이란 민항기(이란 항공 655편 에어버스)를 향해 미사일 두 발을 발사하여 290여 명이 몰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들끓자, 미국 정부는 민항기를 미그-25기로 오인했다는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5) 이란 핵의혹의 진실

미 제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자칫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면서 지구촌 사회를 협박해 왔다. 그러나 이란의 핵에너지 개발 역시 미 제국의 주도로 시작된 것이다. 아랍 인민의 해방 운운하며 무자헤딘과 알카에다를 양성한 것이 미 제국이듯이, 강력한 동맹 관계 구축을 강조하며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권장한 것도 바로 미 제국이라는 것은 명백하다(Chicago Tribune, 2007. 1. 28.).

이란의 핵발전 시설 개발은 모사데크 내각을 몰아내고 팔레비 정부를 앉힌 미 제국이 1957년에 이란과 핵 개발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 1960년 미 제국은 5메가와트급 실험용 원자로 등 핵 재처리 시설에 필요한 기자재를 이란에 제공했으며, 이듬해 미 합참은 이란과 유대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이란에 핵무기 개발도 제안했다.5) 그리고 1967년에는 5.545kg의 농축우라늄과 112kg의 플루토늄을 제공했다. 1967년 이란 정부는 1979년 2만3,000메가와트급 핵발전 시설이 완공되면 핵무기도 생산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어서 1975년 1월,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이란의 재무장관 안사리는 향후 5년 동안 약 150억 달러가 소요되는 이란의 원자력 발전소 건립 및 소요 자재 수급에 합의하고, 일차적으로 64억 달러 상당의 1,200메가와트급 경수로 재처리 시설 2기에 대한 수급계약도 체결했다. 또 6개의 경수로 재처리 시설도 추가로 공급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이란의 핵발전 시설 용량을 총 8,000메가와트급으로 끌어올리기로 했다.6)

그러나 1979년 2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자, 미국은 이란 핵에너지 개발사업 지원을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라크(사담 후세인)가 이란을 침공하도록 지원했다. 이라크의 침공에 맞서 벌인 전쟁이 8년 만에 끝이 나자, 1989년 7월 이란은 러시아와 핵물질과 관련 장비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다시 핵에너지 개발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 아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의혹 제기와 함께 노골적인 침공 위협을 계속했다.

2007년 11월 1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엘라데이 박사는 IAEA 이사국에 제출한 최종 보고서를 통해 이란의 핵시설이 군사용으로 전용됐는지에 대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7) 아울러 2007년 12월 초, CIA 등 16개 미 정보기관의 정보 평가 보고서에서도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2003년 가을에 이미 중단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즉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하려고 미국 정부가 강조했던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 은닉설이 허위였듯이, 이란을 침공하려고 유포한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도 허위로 판명된 것이다. 그런데도 부시 정부는 이란 죽이기에 몰두해 왔으며, 미국과 함께 이란을 협박해 온 이스라엘 역시 CIA 보고서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이란에 대한 침공 위협을 계속해 왔다.8)

한편 2003년 이란은 유럽연합에서 이란의 안보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 농축작업을 중단하는 등 가시적인 조처를 취하며 미국과의 대화를 원했다. 그러나 유럽연합에 대한 미국의 압력으로 유럽연합과 이란의 외교적 노력이 진전을 보지 못하자, 이란은 다시 우라늄 농축작업을 재개했다. 2008년 5월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실물의 뒷받침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한 달러는 더는 받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미 제국의 속뜻은 이란의 핵 포기가 아니라 석유 주권의 포기에 있다. 이란을 굴복시키고 싶겠지만 만만치 않다. 유럽연합과 일본을 포함하여 온 세계가 반대하는 침략 전쟁을 벌이더라도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으며, 아울러 시아파의 중심지인 이란을 무단 침공할 경우 전쟁은 중동 전체로 확대되어 주요 산유국들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3차 대전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특히 이란은 험준한 산악이 많아 게릴라전의 최적지이다. 이란은 미제의 기습 침공에 대비해 기름을 가득 채운 대형 유조선 수십 척을 호르무즈 해협에 띄워 놓았다. 대형 유조선이 폭격당하면 호르무즈 해협은 선박의 운항이 불가능해진다. 특히 유효 사거리 2,000km에 달하는 미사일은 이스라엘 핵무기 시설은 물론이고 중동지역에 흩어져 있는 미 제국의 군사 시설을 모두 초토화할 수도 있다. 미 제국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는 이런 점들 때문이다. 결국,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과 핵 협상을 타결했다. 그런데도 지금의 트럼프 행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4.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숙적관계는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많은 역사적 이야기들은 건너뛰고, 서기 135년 로마 제국이 그들의 통치권에 저항한 유다 민족을 추방함으로써, 이 지역은 로마가 지배하는 팔레스타인의 땅이 되었다. 그 뒤 7세기 중반에는 팔레스타인 민족이 아랍 제국의 일원으로 동로마(비잔틴)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독립을 쟁취했다. 아랍 제국의 일부가 된 팔레스타인은 제1차 십자군 전쟁에 패함으로써 12세기 벽두부터 예루살렘에 세워진 기독교 왕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후 약 800년 동안 이슬람권인 시리아, 터키(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강점에 뒤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살던 땅 대부분을 빼앗긴 채 고초를 겪었다. 복잡한 역사 때문에 지금도 이곳에는 이슬람교와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의 성지가 뒤섞여 있으며,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도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 안에 속하게 되었다.

 

1) 제국의 횡포가 부른 팔레스타인의 비극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제1차 세계대전에 이용하려던 영국은, 양쪽 모두에게 전후에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협조하겠다는 모순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은 애초의 약속을 저버리고 계속하여 이 지역을 자신의 위임통치지역으로 유지했고, 이때부터 유대인의 집단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11월, 영ㆍ미 등 서구 제국은 팔레스타인 등 이슬람권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엔 총회의 결의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땅을 대략 절반으로 나누어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도록 지원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영토분쟁을 일으켰다.

2002년 11월 당시 영국 외무장관 잭 스트로는 제국주의의 이중적 행태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도ㆍ파키스탄 사이의 불씨인 카슈미르 분쟁까지 일어나게 되었다고 시인했다(BBC News, 2002. 11. 15.).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예방 차원의 선제공격이라는 구실로 팔레스타인과 이웃 이슬람 국가들을 침공하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또 이러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국가폭력을 지원하거나 비호해 온 나라가 바로 미국과 영국이다.

 

2) 테러의 원천 이스라엘

이스라엘에 의한 국가테러 가운데 몇 가지 주요 사건을 연대별로 정리해 보자.

1948년 7월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이르군(Irgun)이라는 무장 테러단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호텔을 폭파하여 팔레스타인 투숙객 91명을 사망케 했다. 1948년 4월 이르군은 데이르 야신 민간인 주거지역을 급습하여 250여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 선포에 즈음하여 일어난 제1차 아랍ㆍ이스라엘 전쟁은, 아랍권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미ㆍ영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은 애초 유엔이 제시한 분할 선을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 거주지역 대부분을 강점했다. 1953년 10월 아리엘 샤론(후일 수상이 됨)이 지휘한 특공대는 비무장지대로 지정된 퀴비아 마을을 급습하여 민간인 주택 42채를 파괴하고 60-7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

1956년 10월 이스라엘의 국가폭력에 맞서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자 미 제국 등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지역은 물론 시나이반도와 운하의 관문인 요르단의 아카바항까지 점령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여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등 유엔에 의해 팔레스타인 영토로 지정된 전역을 강점했다. 이어 시리아의 영토인 골란 고원과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그리고 요르단도 침공했다. 1973년 2월에도 이스라엘 특공대는 북부지역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파괴하고 난민 70-80명을 살상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이스라엘 전투기는 시나이반도 상공을 비행하던 리비아 민항기를 격추해 최소 100명 이상의 탑승객과 승무원을 죽였다. 1982년 7월 이스라엘 전폭기들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민간이 주거지역을 폭격하여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스라엘은 수십 차례에 걸쳐 레바논의 사브라, 샤틸라 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 폭격하여 어린이와 부녀자 등 2,500명을 학살하고 수천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2002년에는 전투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웨스트 뱅크 북쪽 제닌의 난민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아울러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치정부 격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무력화하고 요르단강 서안의 민선 시장 등을 살해하고, 이스라엘의 테러를 피해 PLO 본부를 튀니지로 옮기자 그곳까지 쫓아가 공습을 가하기도 했다. 미국의 테러리즘과 이스라엘의 테러리즘이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3) 이스라엘 국가테러의 배후 미 제국

2004년 12월 초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 모인 아랍국가 정상들은 성명을 통해, 중동지역 평화를 깨는 이스라엘의 도발 행위는 미국의 지원과 비호에서 기인한다며,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자세 전환을 촉구했다(Washington post, 2004. 12. 11.).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같은 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재점령하는 등,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점령에 발맞추어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Al Jazeera, 2004. 12. 11.).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비호하는가?

가장 주된 이유는 미국의 정계와 재계를 움직이는 정예권력자의 상당수가 바로 유대계라는 사실이다. 정ㆍ관계 고위직을 지낸 이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더러운 전쟁을 주도한 헨리 키신저, 그와 같은 시기에 CIA 국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제임스 슐레진저, 이집트를 친이스라엘 국가로 만든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산파 헤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 더치 CIA 국장,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와인버거 국방부 장관 등이 있다.

이미 경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이스라엘이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경제ㆍ군사 원조를 받고 있다는 점과 핵확산 금지조약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세계 6위의 핵무기 보유국으로 만든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4) 누가 팔레스타인 내분을 부추기는가?

2006년도 말부터 표면화된 팔레스타인 내분은 끝내 파타(PATAH) 그룹과 하마스(HAMAS) 그룹의 유혈 충돌로 비화하여 약 600명의 사망자를 냈다(Reuters, 2007. 6. 6.).

지난 30년 동안 팔레스타인은 1950년대 말에 결성된 파타 그룹을 모체로 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통해 대(對)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엔과 아랍연맹 등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선 PLO 의장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을 강점하고 그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려 한다. 이러한 아라파트의 온건 노선을 거부하고 1987년 설립된 무장단체가 바로 하마스다.

2004년 아라파트가 사망하자 팔레스타인 당국 내의 기득권세력인 파타와 강경세력인 하마스의 대립이 표면화되었고, 2006년 1월 인구 150만의 가자지구에서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하마스가 압도적인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수반은 파타 출신이 맡고 총리는 하마스 출신이 맡는 연정이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물론 미국 등 서방 진영은, 하마스가 연정에 참여할 경우 팔레스타인에 대한 봉쇄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이 선거로 가자지구의 통치권을 하마스가 행사하자, 이곳으로 반입되는 생필품을 통제하여 주민들을 압박했다(Tehran Times, 2007. 8. 25.). 또 아들 부시 대통령은 하마스 출신들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집단이라고 비난하면서 파타에 대해 8,640만 달러 상당의 특별 군사 원조를 했다.9) 파타를 시켜 하마스를 박멸하려는 계략이었다.

파타 쪽은 하마스를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여 맹비난하고, 하마스 쪽은 파타야말로 CIA의 사주를 받는 반민족적이고 부패한 집단이라며 대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12월 말 이스라엘이 하마스가 지배하고 있는 가자지구 전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했다. 이 공격으로 개전 23일 만에 1,300여 명이 사망하고 5,3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아울러 2만 채 이상의 주택이 파괴되는 등 도시가 폐허로 변했다.

 

5) 이스라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선포

2017년 12년 6일, 미국 정부(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다고 선포했다. 현재 수도인 텔아비브에 소재한 미 대사관도 이곳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3대 종교의 성지이다. 이 때문에 이곳은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러한 곳을 이스라엘에 단독으로 귀속시킨다는 것은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온 중동의 화약고에 불씨를 던지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2018년 5월 14일, 미국은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공식 이전했다.

 

 

5.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는 인구 600만에, 크기는 한(조선)반도 면적의 8배가 넘는, 풍부한 석유자원을 보유한 나라이다. 7세기 이전까지는 그리스ㆍ로마 등의 지배를 받았고, 16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가혹한 식민 통치를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석유자원을 노린 미ㆍ영ㆍ프 등 서구 제국의 침탈에 시달렸다.

 

1) 가다피의 리비아식 사회주의 채택

1969년 9월 가다피(Muammar al Gaddafi) 대위는 무혈혁명을 일으켜 부패한 국왕을 축출하고 왕정도 폐지했다. 가다피는 이슬람 교리와 사회주의 이념이 혼합된 리비아식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그동안 서구 제국의 비호를 받는 외국기업과 토착자본이 독식해온 석유산업의 국유화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엑손ㆍ텍사코ㆍ쉘 등 서방의 거대 석유회사와 맺은 불평등 계약의 개정을 요구하고 외국자본이 점유하고 있던 은행 주식의 과반수를 국유화했다. 대외적으로는 동서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중립을 취했다.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이 제창한 범아랍 민족주의, 유고의 티토이즘, 쿠바의 카스트로식 사회주의, 그리고 콩고의 전 수상 루뭄바가 주창한 범아프리카주의와 같은 이슬람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한때 이집트와 시리아를 합친 아랍연방 창설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면서 무산되었다. 그 뒤에도 이란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지원하는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항해 이슬람권의 주권 회복과 결속을 위한 행보를 계속했다.

 

2) 미 제국이 날조한 테러 혐의

미 제국은 지난 30년 동안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가로 규정하여 경제를 봉쇄하고, 무시로 리비아의 주요 도시를 공습해 왔다. 각종 공작과 음모를 통해 국가 전복과 가다피의 암살도 시도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리비아가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리비아의 반제국주의 정책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의 반(反)가다피 정책은 케이시(W. Casey) CIA 국장이 가다피 암살과 그 정부의 전복을 위해 다양한 공작을 지시했다는 보도에서 잘 드러난다(Newsweek, 1981. 7. 27).

1986년 1월 미국은 자국 내 리비아 자산을 동결하고 리비아와의 무역을 전면 금지하는 한편, 리비아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을 철수시키는 등 본격적인 대(對)리비아 압박 작전에 돌입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리비아 연안에 머물러 있던 미 해군 6함대에서 폭격기를 출격시켜 리비아 해안 순시선을 침몰시키고 50여 명의 승무원도 살해했다. 다음 달에는 엘도라도 캐니언(El dorado canyon)이라는 작전명으로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 시를 폭격하여 민간인 100여 명도 살상했다. 1992년 3월에는 유엔 안보리를 통해 리비아에 대한 항공기 운항 금지와 무기 금수 조치를 결의함으로써 리비아 봉쇄를 한층 강화했다. 1993년 11월에는 유엔을 통해 해외 리비아 자산을 동결시키고, 원유 관련 장비의 수출입을 금지하는 추가 제재도 단행했다. 1996년 2월에는 리비아의 시르테에서 가다피가 탄 차량이 피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 언론들도 영국의 MI6가 저격수를 고용한 사실을 상세히 보도했다(Sunday Times, 1996. 2. 13.).

그렇다면 이러한 공작의 명분이 된 테러, 즉 리비아가 지원했다고 미국이 주장하는 테러는 어떤 것인가?

첫째, 1972년 9월 뮌헨 올림픽 기간에 검은 9월단이라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한 채 리비아가 팔레스타인을 돕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사건을 리비아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둘째, 1986년 4월 발생한 서베를린의 라벨 디스코텍 폭파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미군 사병 2명과 터키 여성 1명이 사망하고, 약 20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이란 정부의 지원을 받은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의 소행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리비아 소행으로 몰아 12일 만에 리비아 공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2년이 지난 1998년, 독일의 유력 TV 방송사가 다시금 사건을 재조명함으로써 마침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결론은 리비아 요원의 테러가 아니라 미국,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공작한 음모라는 것이었다. 결국, 라벨 디스코텍 폭파 사건은 리비아를 테러의 온상으로 지목하여 무력 침공할 명분을 만들려는 미 제국과 이스라엘의 자작극이었다.10)

셋째,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가로 낙인찍으면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 사건은, 1988년 12월에 발생한 미국 민항기 팬암 103편 폭파 사건과 1989년 9월에 발생한 프랑스 민항기 UTA 772 폭파 사건이다. 사건 발생 직후 미국 정부는 이를 가다피 정부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자신이 지목한 리비아인 용의자 두 명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가다피가 이를 거절하자 미국은 군사 보복 및 유엔과 공조하에 전면적인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며 압박했고, 가디피는 결국 용의자를 넘겨주게 된다.

피고인 측은 이 사건이 그해 7월 초 미 순양함 빈센스호가 이란 민항기를 격추한 데 대한 이란의 보복이라며 FBI의 비밀 파일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나, 피고인 측이 청구한 FBI 내사 자료의 공개는 재판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한편 리비아를 침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서방 첩보기관이 팬암기를 폭파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 근거는 지중해에 있는 몰타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가는 항로가 미 첩보기관의 상용 마약 밀수 루트였기 때문인데, 탑승객의 수화물에 검사필 식별 표를 부착하는 일은 정보기관의 일상업무였다는 점이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미 국방성에서 대테러 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국무부에서 대테러 전문가로 일한 코치(Noel Koch)는 이 사건은 리비아의 소행이 아니라 시리아와 이란이 공모한 일이다. 리비아는 단지 속죄양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1990년까지 CIA에서 이란과 시리아를 담당한 캐니스트라로(Cannistraro) 역시 리비아는 종범에 불과하며 시리아와 이란이 주범이라고 밝힌 바 있다(Sunday Herald, 2000. 2. 27.).

그리고 1990년 2월 이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영국을 방문한 미국의 항공기 대테러 팀장에게 영국의 노동당 하원의원 다니엘은 당신네 정부와 우리 정부 모두는 이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Guardian, 1995. 7. 29.). 여하튼 미국이 리비아를 주범으로 지목한 것은 사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에서 비롯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석유자원도 풍부하고 범아랍주의의 맹주로 부상하고 있는 리비아를 꺾는 편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BBC, 2001. 1. 11./2. 5.).

2011년 초 튀니지에서 일어난 색깔 혁명의 들불이 이집트를 거쳐 리비아 등지로 확산하자, 리비아의 석유자원에 눈독을 들여온 서구 제국들은 색깔 혁명을 지원한다는 핑계로 리비아를 침공했다. 이에 맞서 마지막까지 전투를 벌인 가다피는 미제와 NATO의 지원을 받는 반군들에 의해 2011년 10월 10일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6. 콩고

 

백인들의 아프리카 침탈은 미 제국을 건국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노예선에 강제로 실려 아메리카와 유럽으로 끌려가 멸시와 혹사를 당하며 살아온 흑인들의 수난사가 말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미 제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 제국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1) 해방과 내전

콩고 민주공화국은 서유럽보다 넓은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지닌 인구 6,500만을 헤아리는 아프리카의 대국이다. 제2차 대전 종전 이후부터 벨기에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우리는 더는 백인의 원숭이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대규모 민중 봉기를 주도한 루뭄바(Lumumba)의 해방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보고, 콩고는 독립을 챙취하게 된다(Guardian, 1960. 7. 1.).

1960년 6월 30일, 콩고는 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의원 내각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초대 대통령은 카사부부(Kasa-Vubu)가 선출되었고 수상은 루뭄바가 맡았다. 루뭄바는 수상에 취임한 직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유엔에 협조와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콩고의 정치 안정과 경제발전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구리, 코발트, 천연 우라늄 등 풍부한 자원을 탐내는 약탈자들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뭄바 수상은 이러한 미 제국 등 서구 제국의 자원 약탈에 맞서 쏘련에 경제ㆍ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자 미국, 영국, 벨기에는 친서방계인 카사부부 대통령에게 루뭄바를 해임하도록 사주하는 한편 각 지방 토착 군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지원했다. 자원의 보고인 카탕가 주와 카사이 주가 분리 독립하도록 비밀리에 무기를 제공하여 내전을 조장했다. 벨기에는 현지의 자국민과 자국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6,000명의 병력까지 파견하였다. 이에 맞서 루뭄바 수상은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을 요청했으나, 콩고에 진입한 평화유지군은 카탕가 등지의 반군을 지원했다.

 

2) 미 제국 대통령의 루뭄바 암살 지령

루뭄바는 수상의 자리에 오른 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CIA 등 서방 진영의 지원을 받은 카사부부 대통령과 모부투와 촘베 등 군벌들에 의해 실각했다. 루뭄바는 1961년 1월 중순 불과 36세의 젊은 나이로 보좌관 두 명과 함께 빙초산에 담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루뭄바는 유엔 평화유지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감시였다. 집권한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루뭄바가 왜 실각되었는지, 또 이미 권좌에서 쫓겨나 연금 중이던 그를 암살하도록 지시한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던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0년 8월에 있은 한 안보 관계 회의에서 CIA 국장 덜레스에게 루뭄바를 제거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다.11) 미국 정부의 루뭄바 암살 관련설은 1965년 케네디 암살 관련 브리핑 도중 로버트 존슨의 실언(?) 때문에 우연히 언급되었다. 이후 그가 1975년 미 상원 정보위원회에 출석하여 그 실언이 사실임을 증언함으로써 재확인되었다.12) 루뭄바 암살에 미 제국뿐만 아니라 영국의 MI6도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후일 공개된 영국의 비밀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으며, 루뭄바 암살과 시신 유기는 벨기에 특수 부대원들이 실행한 것으로 알려졌다.13)

미국과 영국, 그리고 벨기에는 무엇 때문에 실각한 지도자를 살해했을까? 먼저 독립 투쟁 당시부터 범아프리카주의를 제창한 루뭄바를 살려둘 경우, 아프리카 전역이 과거 종주국인 서방 진영에 반기를 들고 아프리카 전역에 민족주의가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양질의 우라늄이 매장되어 있는 콩고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할 경우, 미 제국의 핵무기 개발에도 중대한 차질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콩고는 20세기 말까지 세계 우라늄 수요 절반 이상을 공급해 왔으며, 그 대부분은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3) 콩고 유혈 분쟁 확대

루뭄바가 살해된 뒤 콩고는 사분오열되었다. 수도권은 카사부부가 장악했으나, 카탕가 주는 모이세 촘베가 대통령을 참칭했다. 루뭄바 아래서 부수상을 지낸 기젱가는 콩고 동부를 장악했다. 1965년 11월에는 CIA 등 서방 진영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군사 반란에 성공한 모부투 소장은 스스로 대통령이라 칭하며 권좌에 올랐다. 이로써 콩고는 서방 제국에 기생하려는 보수 우익과 주권을 찾으려는 민중이 벌이는 분쟁에 휩싸였다.

32년에 걸친 모부투 정권의 극심한 학정과 부패를 비호해 온 미 제국은, 동서 냉전이 종식되자 뒤늦게 그의 학정과 부패를 문제 삼아 원조를 중단하는 등 모부투 정권에 대한 우산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모부투 정권은 르완다와 우간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좌익계 반군 지도자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에 의해 무너졌다. 권좌에 오른 카빌라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했으나, 그 역시 부패와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르완다와 우간다의 공격을 받고, 2차 콩고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제2차 콩고 전쟁은 아프리카 세계대전으로 불릴 정도로 범위가 넓고 희생자도 많았다. 아프리카 9개국의 정부군을 포함하여 25개 무장 집단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진 채 벌어진 6년(1998-2003)의 전쟁에서 최소 400만에서 최대 1,000만 명이 사망했다.14)

그러다가 그 역시 2001년 1월 우파세력에게 살해되었다. 그 직후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29세의 그의 아들 조셉 카빌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로랑 카빌라를 살해한 배후가 미국 정부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다만 카빌라의 아들과 동생은 친미 성향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7. 르완다

 

아프리카 주민들은 동서 냉전이 끝난 후에도 공공연히 자행되어온 잔혹한 인종청소의 제물이 되었다. 최신예 총기를 공급하며 인종청소를 부추긴 자는 서구 제국이며, 이들의 살육 광란을 방조해온 것이 유엔이다. 유럽 제국이 침입하기 이전까지 목축업을 위주로 하던 투치족과 농작물 생산에 주력하던 후투족은 한 왕조 아래서 같은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며 살아왔다. 투치족과 후투족의 종족 갈등은 1885년 독일이 현재의 르완다 등 동부 아프리카 일부를 자국의 식민지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1) 르완다 인종학살의 전말

투치족을 르완다의 현지 통치세력으로 내세운 것은 독일이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로부터 이 지역 식민통치를 이어받은 벨기에 역시 소수의 투치족을 전면에 내세워 다수의 후투족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투치족과 후투족에게 각기 다른 신분증을 발급하고, 교육도 투치족 위주로 받게 했다. 그러나 종족 불평등은 1950년대부터 루뭄바 등에 의해 주도된 아프리카 해방운동과 맞물리면서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의 유혈 저항으로 발전했다.

1961년 유엔이 개입하여 실시한 총선거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후투족이 집권하자, 그동안 르완다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오던 투치 왕조는 르완다와 분리하여 부룬디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 이후 게릴라를 앞세운 두 나라의 충돌로 1961년에는 수천 명이 사망했고 1963년에는 거의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1972년에는 부룬디 정부군이 후투족 주민 20만 명을 학살하는 등 인종청소가 이어져 왔다. 이 때문에 수많은 후투와 투치족 민간인들은 인종청소를 피해 인접한 우간다 등지로 집단 이주함으로써 제2차 콩고 전쟁을 비롯하여 인접 국가들에서 발생한 유혈 내분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이 불씨는 1년도 안 되어 약 100만 명의 투치족이 학살되는 르완다 정부군의 인종청소를 야기했다.

이러한 충돌은, 1993년 7월, 우간다에 이주해 살던 투치족과 우간다 정부군의 지원을 받는 르완다 애국전선(RPF, 반군)이 르완다 정부와 3년의 전쟁을 종식하기로 합의하고 아루샤(Arusha) 협약을 맺으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의 르완다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투치족의 미사일에 피격됨으로써 갈등은 재발되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부룬디ㆍ탄자니아ㆍ콩고ㆍ우간다ㆍ수단 등 인접 아프리카 국가로까지 확산되어 무차별적인 학살과 보복이 이어졌다.

르완다 학살 역시 밑바탕에는 미 제국의 이해가 깔려 있다. 그에 대한 증거를 요약해 본다.

 

2) 르완다 인종학살을 조장한 미 제국

미 제국은 과거 프랑스ㆍ영국ㆍ벨기에가 균점하던 아프리카지역에 대한 패권을 독점하고자 역내의 소요와 내전을 조장해 왔다. 미 제국은 투치족 군 지휘관들을 미군기지로 초청하여 훈련시켜 그들을 미 제국의 병기로 활용해 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1990년대 초 캔자스시티 레번워스 군사기지에 훈련을 받고 귀국한 뒤, 르완다 애국전선이라는 반군을 조직하여 후투족을 제압하고 2003년 르완다 대통령이 된 폴 카가메(Paul Kagame)이다.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를 저격한 미사일도 걸프전 당시 미군이 이라크에게 압수한 프랑스제로 우간다를 통해 카가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Le Figaro, 1998. 3. 31.).

당시 미 제국은, 인종청소를 예방하려고 르완다 주재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관 달레르(Dallaire) 소장이 요청한 5,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 건도, 유엔 안보리를 통해 거부함으로써 르완다의 대학살을 방기ㆍ방조했다.

 

 

8. 수단

 

중동과 아프리카 경계에 자리한 수단은 홍해를 포함해 이웃 9개 국가와 국경을 접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또한 중동ㆍ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인구는 3,700만 명에 불과하나, 서유럽 전체 면적에 맞먹은 넓은 영토에, 지하에 매장된 원유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버금갈 정도이다. 그 밖에도 구리, 우라늄 등의 매장량이 세계에서 순위를 다툴 정도로 풍부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수단은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된 내전의 참화로 여전히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머물고 있으며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 국가라는 오명까지 얻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등 서구 제국의 탐욕과 이를 배격하려는 수단 정부 등 이슬람 근본주의세력들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단의 내분은 자원의 보고이며 기독교가 주류인 남부 수단과 이슬람이 주류인 북부 수단을 분할하여 차별적 관리를 해온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 통치 정책에서 기인한다.

 

1) 독립, 그리고 내전의 격화

남북의 갈등, 즉 내전은 영국과 이집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하기 1년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1955년 시작하여 1972까지 계속된 제1차 수단 내전은 북부에 기반을 둔 수단 정부를 지원하는 아랍세력 대(對) 남부의 기독교 반군을 지원하는 이스라엘과 미 제국 등 서방세력의 충돌이었다.

1972년 국제사회의 중재로 남북 양쪽이 국가 권력을 균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아디스아바바 협정이 체결된 후 18년간의 1차 내전은 종식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대통령은 북부 출신이 맡고 국회의장은 남부 출신이 맡는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BBC News, 2007. 6. 1.).

이후 전개된 제2차 내전 역시 미 제국 등의 지원을 받으며 중앙정부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남부 반군과 분리 독립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중앙정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2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500만여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제2차 수단 내전(1985-2005)은 향후 6년 동안 남부 수단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그 뒤에는 주민투표로 독립 여부를 결정한다는 잠정 합의를 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2011년 1월 실시된 국민투표에 의해 분리 독립을 결정한 남부 수단은 같은 해 7월 수단 정부의 승인(?)하에 독립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서구 제국의 의도대로 수단은 분할되었다.

 

2) 미 제국의 알 쉬파 제약 공장 공습

1998년 8월 미 제국은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정부 시설물에 대한 폭탄 공격이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수단의 수도 카르툼(Khartoum)에 있는 쉬파 제약 공장에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했다. 폭격 직후 미 제국은 이 공장이 사담 후세인 정부의 지원을 받는 수단 정부가 신경 마비용 화학무기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AP, 1998. 8. 20.).

폭격이 있은 지 사흘 만에 유엔 조사 요원들이 이곳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조사 요원들은 제약 공장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곳에 무기가 될 만한 화학 물질을 생산한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사실은 이 공장의 생산 담당 책임자를 지낸 영국인 카나핀(Carnaffin)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15)

이에 대해 수단 정부는 미국에 공개 사과를 요구하며 아울러 공장 재건을 위한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자신이 지원하고 있던 수단 분리주의자들을 수단 정부가 무력 탄압하는 것을 트집 잡으며 거절했다(BBC News, 1999. 8. 20.).

 

3) 미 제국의 수단 분열 공작

남ㆍ북 수단 사이의 내전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이번에는 수단의 수도 카르툼 서쪽에 위치한 다르푸르에서 또 내전이 발생했다. 2003년 2월부터 본격화된 중앙정부와 반군 사이의 무력 충돌로 최소 20만에서 4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25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16) 이러한 내전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당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다르푸르 사태의 발단 배경을 종교 분쟁이나 이념 분쟁이 아닌 기후 변화로 인한 생존권 다툼으로 규정했다(Washington Post, 2007. 6. 16.). 반면 미국 정부는 이를 종교 및 이념 충돌에 근거한 인종청소로 규정하며 수단 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17)

근래 다르푸르의 사막화가 급속히 확대되자 현지 주민은 굶어 죽을 처지로 몰렸다. 이로 인해 북부지역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중앙정부에 대한 현지 농민들의 불만이 증대되었고, 2003년에는 수단 해방군(SLA)과 정의ㆍ평등행동(JEM) 무장단 등이 결성되어 중앙정부의 무관심 등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걸고 본격적인 반정부 무장 투쟁에 나섰다. 물론 그 배후에는 미 제국이 있었다.

 

 

9. 소말리아

 

유럽과 중동을 연결하는 홍해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 소말리아가 서구 제국에서 독립한 해는 1960년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서방 진영의 식민지 분할 정책에 따라 프랑스령(현재의 지부티)과 이탈리아령, 그리고 영국령으로 나뉘어 지배당한 과거 역사 때문에 독립한 이후에도 종족과 지역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1969년 미 제국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친쏘 성향의 민족주의자 샤르마르케(Shermarke) 대통령을 암살하고 권력을 잡은 바레(Barre)의 23년 군사 독재와 부정ㆍ부패는 소말리아 인민의 삶을 더욱 황폐화시켰다.

 

1) 미 제국의 독재 정권 지원과 내전 조장

1991년 쿠데타에 의해 바레 정권이 붕괴되면서 반미ㆍ친이슬람 계열의 아이디드(Aidid) 정권이 들어섰다. 이로써 미 제국의 지원을 받은 친서방계 반군과 이슬람권 정부 사이의 내전이 시작된다.

1993년 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소말리아에 파병된 약 3만 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은 소말리아 내전을 더욱 격화시켰다. 미군을 주축으로 한 평화유지군은 1995년 철수할 때까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분을 조장하였다. 이들은 주거지에도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소말리아 민간인 1만여 명이 사망하는 등, 종족 간, 지역 간의 적대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미군이 철수한 이후 한동안 불안한 평화가 지속되었으나, 9ㆍ11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소말리아가 알카에다와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소말리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었다. 미국 정부는 친미 기독교 국가인 인근 에티오피아군이 소말리아를 침공하도록 음모를 꾸몄다.18) 친쏘 정책을 펴던 에티오피아의 군사 정권은 미 제국 등 서방 진영의 지원을 받는 반군에 의해 붕괴되어 당시에는 다시 친미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소말리아 국경을 침공한 뒤 소말리아 반군과 합세하여 수도 모가디슈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Reuters, 2006. 12. 24.). 2006년 말 현재 수도 모가디슈(남부에 위치)를 포함하여 소말리아 북부 대부분은 친미계 과도정부가 들어섰으나, 이슬람권의 지원을 받고 있는 소말리아 저항세력들은 남부를 기반으로 하여 에티오피아에 대한 지하드(聖戰)를 벌이고 있다.

 

 

10. 앙골라

 

1) 앙골라 내전

앙골라 독립 투쟁은 종주국 포르투갈이 앙골라의 독립을 승인한 1975년까지 계속되었다. 앙골라 독립 투쟁을 주도한 세력은 좌익 성향의 앙골라해방 인민운동(MPLA, Movimento Popular de Libertação de Angola)이었는데, 앙골라는 해방과 동시에,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아프리카 국가들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신생 독립 국가의 내전을 부추긴 서구 제국들로 인해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앙골라해방 인민운동(MPLA)이 주도한 신생 앙골라 정부를 상대로 30년 가까이 게릴라전을 벌여온 집단이 바로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 União Nacional para a Independência Total de Angola)이다. 이들은 중ㆍ쏘 간의 이념 분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중국(중공)의 지원을 받아 친쏘적 정부를 상대로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를 벌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미 제국의 지원으로 앙골라 내전을 격화시켰다.

한편 미 제국은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던 남아공 백인 정부와 자이르(콩고)로 하여금 앙골라를 침공하도록 지원했다. 또 1986년 레이건 대통령은 UNITA의 군벌 사령관인 사빔비(Savimbi)를 백악관으로 불러 경제ㆍ군사 지원을 확약했다. 마치 친쏘적인 나지불라 정부를 전복하려고 자신과 상반되는 이념을 가진 무자헤딘을 지원했듯이 UNITA를 지원한 것이다. 1991년 유엔의 중재로 앙골라 정부와 UNITA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고, 국제기구의 감시하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총선 결과 MPLA가 승리하자 UNITA는 평화협약을 깨고 다시 게릴라전에 돌입했다(BBC News, 2002. 2. 25.).

결국 앙골라 내전은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약 200만 명의 피난민을 남긴 채 사빔비가 사망한 2002년에 종식되었다.

 

 

11. 아프리카 유혈 분쟁의 본질

 

아프리카 유혈 분쟁의 표면적인 원인에는 종족ㆍ종교 사이의 대립도 있고 기상 이변도 있다. 독재 정권과 이에 대한 반정부 무력 저항도 유혈 내분을 촉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은 단지 현상에 불과하고 본질은 아니다. 본질적인 원인은, 서구 제국들이 19세기 이후 아프리카를 임의로 나누고 무력으로 통제하면서 오로지 물질적 탐욕만 채우려고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해 온 것, 바로 야만적인 제국주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쟁의 불씨를 확대 재생산한 나라가 바로 미 제국이다. 아프리카의 기득권세력 역시 유혈 분쟁의 원흉이다. 또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도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노사과연

 

 


 

1) Fox News, 2002. 5. 17.; Independent, 2002. 9. 7.; Guardian, 2004. 1. 24.

 

2) New York Times, 2003. 3. 14.; Reuters, 2003. 4. 20.

 

3) National Security Archive.; AFP, 2004. 6. 9.; Washington Post, 1986. 12. 15.

 

4) CNN News, 2003. 3. 15.; New York Times, 2006. 1. 18.

 

5) <www.oxfordresearchgroup.org.uk/work/middle_east>

 

6) New York Times, 1975. 3. 5./3. 9./1976. 2. 29. <www.oxfordresearchgroup.org.uk/work/middle_east>

 

7) <www.oxfordresearchgroup.org.uk/work/middle_east>

 

8) New York Times, 2007. 12. 3.; AP, 2007. 12. 4.

 

9) Asia Times, 2007. 1. 9.; Los Angeles Times, 2007. 6. 19.

 

10) ZDF TV, 1998. 11. 27.

 

11) Independent, 2008. 1. 6.; BBC News, 2004. 11. 6.

 

12) CounterPunch, 2005. 8. 16.; Washington Post, 2002. 7. 21./2004. 11. 27./2004. 2. 16.

 

13) Guardian, 2001. 6. 28.; Washington Post, 2002. 7. 21.

 

14) 앙골라, 짐바브웨, 차드, 리비아, 나미비아, 수단 등 6개국 정부는 카빌라 정부를 지원했고, 반면 르완다, 우간다 정부는 콩고의 반카빌라 게릴라를 지원했으며, 각 무장세력들도 저마다 이해에 따라 친카빌라 진영과 반카빌라 진영으로 나뉘었다.

 

15) London Observer, 1998. 8. 23./12. 20.; Boston Globe, 1999. 8. 20.

 

16) The Times, 2006. 10. 24.; Washington Post, 2007. 4. 11. 수단 정부는 약 1만 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주장함.

 

17) Voice of America(VOA), 2007. 3. 20.

 

18) Wall Street, 2001. 11. 29.; Sunday Telegraph, 200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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