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레닌주의 문학․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

 

최상철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운영위원

 

 

―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복원을 위한 시론이 되길 바라며

 

 

I.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치적 예술이라는 전도된 관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의 독자성과 가치중립성에 대한 환상이 만연하다. 그리고 그와 대비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문화 예술에 대한 당의 검열과 다를 바 없다는 식의 속류적인 이해가 넘쳐난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의 쓰라린 패배 이후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원인은, 내적으로는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호한 수정주의와, 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진영의 포위 압살에 의한 붕괴책동으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내외적인 상호작용이 결국 쏘련 해체라는 결과로 나타났고 그 이후 변혁운동 진영은 사상․이론적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며 지지부진하고 있다.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붕괴공작은 비단 군사전략과 자유노조 공작 등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책략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미술에서 행한 공작의 예를 들자면 미중앙정보국(CIA)은 뉴욕현대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의 약자) 출신의 인사를 중용하여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며, 양식상으로 추상적인 미술인 추상표현주의를 비밀리에 막대한 예산을 할애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들이 추상표현주의에 착목한 것은 그것이 사회주의 진영에 대항한 개인주의․자유․순수성 같은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순수를 표명하는 추상표현주의가 어느 정치미술보다

[그림 1] 잭슨 폴록: <넘버 5>

더 정치적인 미술이 되었다. 질질 흘리는 잭(Jack the dripper. 잭슨 폴록의 뿌리기와 번지기 기법을 풍자한 것이다. 이는 19세기 영국에서 벌어진 미궁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가상의 잭—Jack the ripper를 변형한 것이다)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화가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의 작품 <넘버 5> 가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1억4천만달러에 낙찰된 것은 CIA의 오래된 추상표현주의 지원이라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1) 추상표현주의 미술 뿐만이 아니다. 초기 재즈음악에 대해 경계하던 미국 지배계급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세계에 재즈 음악을 보급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재즈와 록음악을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미국의 대중음악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마셜플랜과 전세계 도처에 주둔한 미군의 존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찰하지 않고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이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적대적이고, 재즈2)와 록 음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유를 체제의 경직성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일면적인 비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전도된 예술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문예 운동의 지침은 무(無)라는 진공상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변혁운동은 이념적으로 좌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으며 이는 문예운동에 있어서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노동의 새벽≫으로 1980년대 독자적인 노동문학의 시작을 알린 박노해는 준법서약서를 쓰고 나온 이후에 지리멸렬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을 비판하며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문예이론을 전면적으로 선언하였던 박노해의 동지 조정환3)은 자율주의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 외 1980년대 이후 영민한 시각을 보여주던 많은 이론가들은 현재의 노동자계급운동과 긴밀히 결부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당양한 분야에서 치열한 실천을 통해 문예활동을 전개하는 동지들이 있다. 다만 이러한 운동을 이론적으로, 체계적으로 뒷받침하고 문예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긴밀한 결합을 모색하는 것, 이론과 실천을 부단히 통일하려는 작업은 여러 어려움에 부딪치고 있다. 이제 그 작업을, 자칫 ‘훈고학(訓詁學)’처럼 보일지라도, 맑스-레닌주의 고전을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아니, 이데올로기적으로 과거의 유산을 ‘분서갱유(焚書坑儒)’한 지금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더욱 ‘훈고학’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후 노동자계급 문예운동의 실천적 전진이 처음의 걸음마를 도약으로 바꾸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II.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레닌주의 문학․예술론의 시작

 

맑스-레닌주의 미학은 단지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투쟁이다.4) 맑스․엥엘스와 레닌은 미학과 관련한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여러 곳에서 단편적인 언급을 하였다. 그럼에도 맑스-레닌주의 저작에서 등장하는 문학․예술론은 일관된 발전의 흐름을 견지하고 있다. 맑스-레닌주의 예술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엄격한 구별과 분리에 기초한 학문체제나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척점에 있다. 문학․예술에 있어서도 일면적인 인과관계를 거부하고 원인과 결과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맑스․엥엘스가 자연․사회․사유 등의 발전을 통일성이 있는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통일과학(einheitliche Wissenshaft)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바는 문학․예술의 분야에 있어서도 타당하다.

여기에서 맑스-레닌주의 문학․예술론과 관련한 160여년 역사를 두루 개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주요한 맥락을 정리하기 위해 주요 쟁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하겠다. 맑스는 1845년 ≪신성가족≫에서 으젠 쉬(Eugène Sue)의 ≪빠리의 신비(Les Mystères de Paris)≫에 대해 저자의 계급적 편견이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는가에 관해서 여러 장을 할애하며 비판한 바 있다.5) 귀족이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유행 소설가 으젠 쉬의 책을 읽는 이는 오늘날에는 거의 없기에 굳이 그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다음해인 1846년 ≪독일이데올로기≫에는 본격적인 문제의식이 등장한다. 명시적인 형태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인격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관철을 위해서는 ‘국가’를 타도해야 함을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또한 맑스와 엥엘스가 문학․예술을 허공에 스스로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물질적 관계 속에서 자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맑스와 엥엘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으로 인한 인간 개인의 파편화를 극복하기 위한 발본적인 고민을 진행하고 있는데, 곳곳에서 자본주의 분업체제가 남긴 인간 파편화의 결과물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주요모순이라고 할 수 있기에 더욱더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산쵸(청년 헤겔파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를 세르반떼스의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산쵸로 풍자한 것이다—인용자) 자신은 모차르트의 진혼곡 대부분을 작곡한 것은 모차르트 자신이 아닌 그 밖의 어떤 사람이었으며6) 라파엘 스스로는 자신의 프레스코(회벽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물에 안료가루를 개어서 그리는 벽화의 기법—인용자)들 중 최소한의 부분만을 ‘완성했다’는 점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산쵸는 라파엘로가 그 당시 로마에 존립했던 노동분업과 무관하게 자신의 회화작품을 생산했다고 상상한다. (중략) 여타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라파엘로 역시 그에 앞서 이루어진 예술상의 기술적 발전에 의해, 또한 사회조직 및 노동분업,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이 속해있던 지역과 교류가 있었던 모든 나라에서의 노동분업에 의해 규정되었다. 라파엘로 같은 한 개인이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수요에 의존하며, 그 수요는 다시 노동분업과 그로부터 창출되는 인간의 도야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슈티르너는 여기서 과학 및 예술노동의 독자성을 선언함으로써 부르주아지에 훨씬 못 미쳐 있다. (중략)

특정 개인으로의 예술적 재능의 배타적인 집중과, 이것과 연관을 맺고 있는 광범한 대중의 예술적 재능의 억제는 바로 노동분업의 결과이다. 그러나 설혹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 모든 사람이 뛰어난 화가라 할지라도, 그러한 상황이 결코 그들 각각이 또한 독창적인(origineller) 화가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적” 노동과 “독자적” 노동간의 차이는 벌거벗은 헛소리(bloßen Unsinn)가 되어버린다. 어쨌든 하나의 공산주의적 사회조직의 등장과 함께 예술가가 전적으로 노동분업으로부터 야기된 지역적, 민족적 편협성에 포섭되는 상황이 자취를 감추게 되며 또한 각 개인을 전문적인 화가나 조각가 등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한정적인 예술에 그들이 포섭되는 상황 역시 사라지게 된다. 바로 화가니 조각가니 하는 명칭 그 자체가 이미 그의 전문적 발전의 협소성과 노동분업에의 의존성을 충분히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화가란 있지도 존재하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여타 행위들 가운데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7)

                      《그림 2》라파엘로: <폰스 밀비우스 전투>, 프레스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이 오히려 인간을 부분적이고 일면적인 존재로 만든다. 자본주의적 분업이 인간을 얼마나 인간을 파편화시키는가에 대해서는 ≪자본론≫ 1권에서 좀 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8) 프랑스 철학자 쿠쟁(Vitor Cousin)이 처음 쓴 이래 널리 퍼져있는 관념인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란 자본주의적 분업노동이라는 토대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유미주의는 예술가를 위한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예술은 엘리트만이 향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예술을 위한 예술’9)이다.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가 12음기법을 도입하며 20세기 음악의 혁신적 변화를 몰고 온 스승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반발한 것도 바로 그가 정치적으로 너무나 보수적이며 ‘예술을 위한 예술’의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아이슬러는 노동자 계급운동과 긴밀히 결부된 음악활동을 통해 실천을 전개하며 스승을 넘어선다. 사회주의적 예술가는 고립적이며 분업적인 개인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자이다. 그리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고립적이고 독립적인 예술가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이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관념이 설 자리는 이미 없어져 버린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의 한 개인이 자신만의 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을 생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오늘날 횡행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관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III. ≪잉여가치 학설사≫: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적 노동과 예술

 

맑스는 ≪잉여가치 학설사≫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적 노동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는 부분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노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상품에 있어서 그의 관심사로 되는 것은 그 상품에는 그가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교환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본가에게 있어서 노동의 사용가치는 그가 임금 형태로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노동시간을 도로 받는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10)

 

작가가 생산적 노동자인 것은 그가 사상을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출판하는 서적상을 부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떤 자본가의 임금노동자인 한에서 생산적이다.11)

 

동일한 종류의 노동이 생산적일 수도 있고 비생산적일 수도 있다. 예컨대 ≪실낙원≫을 쓰고 그 댓가로 5파운드 스털링을 받은 밀턴은 비생산적 노동자였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출판업자를 위하여 공식적으로 일하는 작가는 생산적 노동자이다. 밀턴은 ≪실낙원≫을 누에가 명주실을 생산하는 것과 동일한 필요성에서 창작하였다. 이것은 그의 본성의 효과적인 발현이었다. 다음에 그는 자기의 작품을 5파운드 스털링으로 판매하였다. 그러나 자기 서적(예컨대 정치경제학 입문)의 출판업자의 지시에 의하여 일하는 라이프치히의 문필가—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적 노동자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산은 최초부터 자본에 종속되어 있으며 이 자본의 가치의 증대를 위해서만 수행되기 때문이다. 자기 셈으로 노래를 파는 여가수는 비생산적 노동자이다. 그러나 같은 여가수도, 돈을 벌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는 기업주에게 고용된 경우에는 생산적 노동자이다. 왜냐 하면 이 여가수는 자본을 생산하기 때문이다.12)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 생산적인 노동인가는 그 생산자가 임금노동자로서 자본을 생산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고 명확히 한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더 이상 신의 선물로 재능을 받은 초인적인 천재로 추앙받는 존재가 아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예술적 자유는 천재의 특권적 소유물이 아니라 보편적인 권리가 되었다. 예술가들이 아카데미, 교회, 궁정, 패트런 등에 대해 벌인 투쟁은 예술가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다.13) 그런데 이러한 자유를 위한 해방투쟁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교회, 왕실과 귀족의 후원자, 패트런이 없는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가는 직접적으로 자본․임노동 관계에 노출되며, 예술가들의 계급분화가 급격히 촉진된다. 극소수의 예술가는 그 자신 스스로 자본가가 될 수도 있지만, 대다수는 하층 소부르주아 또는 예술 프롤레타리아트로 활동해야 한다.

맑스는 ≪잉여가치 학설사≫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노동이 ‘비물질적 생산’으로 드러나는 경우에 대한 언급도 남겼다. 그런데 이것은 네그리가 말하는 ‘비물질노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잉여가치 학설사≫에서는 ‘비물질노동’에 대한 비판의 전거를 찾을 수 있는데 짤막하게 언급하겠다.

 

비물질적 생산에서는—오직 교환을 위해서만 진행되며 따라서 상품을 생산하는 경우에서까지도—다음과 같은 두 경우가 있을 수 있다. 1) 비물질적 생산의 결과 다음과 같은 상품, 사용가치를 가지게 되는 경우, 즉 생산자에 대해서도 소비자에 대해서도 자립적인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생산과 소비 중간기간에 자체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이 기간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유통할 수 있는 것인데, 예컨대 서적, 그림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창작하는 예술가의 예술활동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모든 예술 작품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중략)

생산되는 생산물과 그것을 생산하는 행위를 분리할 수 없는 경우, 예컨대 무대 예술가, 강사, 배우, 교원, 의사, 승려 등등의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소규모로서만 적용되며 또 바로 사물의 본성으로 보아 약간의 분야들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중략) 또한 극장, 오락장 등등의 경영주도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치부한다. 이 경우에 배우는 관중에 대하여는 예술가로서 나타나나 자기의 기업가에게 있어서는 생산적 노동자이다. 이 영역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 모든 현상들은 전체로서의 생산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혀 무시할 수 있다.14)

 

≪다중≫의 저자는 뭉뚱그려 말한다.

 

20세기의 마지막 수십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적 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서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15)

 

네그리의 ‘비물질노동’의 개념에서는 예술활동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작품의 존재는 무시된다. 또한 예술가의 생산이 ‘생산되는 생산물과 그것을 생산하는 행위를 분리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가 자신의 기업가에 대하여 생산적 노동자임을 무시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 모든 현상들이 전체 생산에서 극히 적은 부분이라 지적한 것을 19세기의 현실로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독점자본의 권리인 ‘지적재산권’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맑스주의가 이제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네그리의 선언은 그가 맑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을 호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의 귀결은 자본의 천년왕국과 ‘제국’에 대한 찬양이다.

 

 

IV. 엥엘스의 ‘발자끄론’: 본격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예술가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는 ‘발자크론’으로 알려진 엥엘스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엥엘스는 영국 노동소설가이며 여성주의자인 마가렛 하크니스(Margaret Harkness)에게 1888년 4월초에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리얼리즘의 책무에 대해 언급한다. 엘리너 맑스(Eleanor Marx)의 친구이며 <사회민주동맹>의 일원이었던 마가렛 하크니스는 당대에 존 로(John Law)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출판하였다. 1887년에는 ≪도시 소녀(City girl)≫를 출간하였고, 엥엘스의 편지는 이 작품에 대한 답례와 서평 형식의 것이다. 엥엘스는 편지의 서두에서 “현실의 진실(realistic truth)”과 “참된 예술가의 용기”를 볼 수 있었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행사 꽤나 하는 사람들의 잰체하는 말씨(the teeth of supercilious respectability)”를 쓰는 구세군이 인민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형상화한 것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주인공인 프롤레타리아트 ‘도시 소녀’가 부르주아 출신의 아써 그랜트(Arthur Grant)에게 유혹에 빠진다는 오래된 이야기(old, old story)를 꾸밈없이 다루고 있는 점에 찬사를 보내며, 당신의 아써 그랜트는 걸작이라며 칭찬한다. 엥엘스의 비판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데 소설이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엥엘스는 편지의 말미에서 실제로 런던 이스트엔드의 노동자계급이 세계 다른 어떤 곳보다 수동적이며, 하크니스가 다음 작품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적극적인 측면을 묘사할지도 모른다는 양보를 하고 있지만 비판 자체는 상당히 신랄하다.

 

내가 무언가 비판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 소설이 결국에 가서는 충분히 현실적이지(realistic) 못한 것이 아니냐는 점이겠습니다. 내 생각에 리얼리즘이란 세부의 진실성 외에도 전형적 환경에서의 전형적 인물들을 진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인물들은 그들 나름으로는 충분히 전형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싸고 그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환경은 어쩌면 그만큼 전형적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도시 소녀≫에서 노동자계급은 스스로를 도울 능력이 없고 심지어 스스로 도우려는 노력조차 보여주지(행하지) 않는 수동적인 대중으로 그러져 있습니다. 그들을 무기력한 곤궁에서 끌어내려는 모든 시도는 밖으로부터, 위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쌩씨몽과 로버트 오웬의 시절이던 1800년이나 1810년경에는 정확한 묘사일 수 있었겠지만, 거의 50년 동안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들 대부분에 동참해온 영예를 지닌 이 사람들에게 1887년 시점에서 그렇게 보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들을 둘러싼 억압적 환경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항거,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시도들은 엄연한 역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리얼리즘의 영역에서도 자기 자리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16)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 “공공연한 사회주의 소설, 우리 독일인들이 ‘경향소설(Tendenzroman)’이라 부르는 것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고 언급한다. 엥엘스는 경향문학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지도 또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지도 않았다. 그는 작품 내적으로 현실의 변증법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리얼리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경향문학을 비판하였지만, 경향문학 그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이미 1885년 11월 26일 엥엘스가 민나 카우츠키(Minna Kautsky)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나는 결코 그와 같은 경향문학(Tendenzpoesie)의 반대자가 아닙니다. 비극의 아버지 아이스퀼루스와 희극의 아버지 아리스토파네스 두 사람은 확고한 경향시인이며 단테와 세르반떼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중략) 그러나 나는 그 경향이 명시적으로 지적되지 말고 상황과 행위 자체로부터 저절로 드러나야 하며 작가는 그가 서술하는 사회갈등의 미래 역사적 해결을 독자들의 손에 쥐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17)

 

하크니스에게 보낸 편지는 유명한 ‘발자끄론’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발자끄의 ≪인간희극(La Comédie humaine)≫을 예로 들며 그를 사실주의(혹은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보다 훨씬 더 위대한 리얼리즘의 대가로 거론한다.

 

나는 심지어 경제적인 세부사항(예컨대 혁명후 동산 및 부동산의 재분배)에 관해서도 이 시대를 연구했다는 역사가․경제학자․통계학자들 모두를 합친 것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거기서 배웠습니다. 물론 발자끄는 정치적으로 왕당파(Legitimist, 당시의 국왕이 아니라 7월혁명으로 실각한 부르봉왕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정통주의자’—역주)였지요. (중략) 그리고 그가 항상 조금도 아낌없이 예찬하는 유일한 인간은 그의 가장 철저한 정치적 반대파인 쌩메리 수도원의 공화주의자 영웅들인데, 이들은 당시(1830-1836년)에 실제로 인민대중의 대변자였습니다. 이처럼 발자끄가 자신의 계급적 공감과 정치적 편견에 역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자신이 애착을 가진 귀족들의 몰락의 필연성을 그가 실제로 보았고 그들을 몰락해 마땅하는 족속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진정한 미래의 인간들을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그들이 존재했던 그러한 곳에서 실제로 보았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나는 리얼리즘의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 발자끄 선생의 가장 멋들어진 특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18)

 

발자끄에 대한 평가는 엥엘스만의 것이 아니라 맑스와 함께 공유한 것이다. 두 동지는 모두 발자끄를 탐독했으며 자신들의 저서에서 발자끄를 인용했다. ≪자본론≫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온갖 종류의 탐욕을 철저하게 연구한 발자끄는 늙은 고리대금업자 곱세끄(Gobseck)가 상품을 퇴장시킴으로써 축재하려고 했을 때 그를 벌써 노망기에 들어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19)

 

발자끄는 자기의 최후의 소설 ≪농부들≫에서, 한 소농이 고리대금업자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에게 온갖 노동을 무료로 해주면서도, 자기 자신의 노동이 자기에게는 아무런 현금지출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자기는 고리대금업자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고리대금업자로 봐서는 이것은 일석이조이다. 그는 임금에 대한 지출을 절약할 수 있으며, 그리고 자기 자신의 밭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몰락하여 가는 소농을 고리대의 그물에 점점 더 깊이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20)

 

리얼리즘은 사실 그 자체의 투명한 기술과는 궤를 달리한다. 졸라는 현실을 훌륭하게 기술하는 작가였으나 그에게 결여되어 있고 발자끄에게 있었던 것은 변증법이었다. 현실의 내적 연관성과 모순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것이 위대한 발자끄의 업적이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상호작용을 알지 못하고 환경이 인간을 좌우한다는 식의 주장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기계적 유물론자들21)은 발자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질 뿐이다. 발자끄의 위대성은 다종다기한 사실 자체의 기술이 아니라, 그것들의 역사적인 맥락과 내적 연관성을 밝혀내어 총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현실의 변증법적 모순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부르봉 왕당파 발자끄의 의도와는 무관한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이다.

 

 

V. ‘미식가 맑스와 정치적인 엥엘스’라는 허구의 이데올로기

 

엥엘스의 ‘발자크론’ 이외에도 라쌀레와 맑스․엥엘스 간에 이루어진 이른바 ‘지킹엔 논쟁’은 너무나도 유명하지고 또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도의 주제로 독립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22) 대신에 여기서는 ‘지킹엔 논쟁’을 다루면서 맑스․엥엘스와 레닌을 분리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비판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를테면 박설호는 “지킹엔 논쟁 연구”에서 맑스와 엥엘스 간의 “근소한 차이점”이 있음을 언급한 후에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흔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술론적 입장을 동일시하고 있지만, 이들의 입장은 엄밀하게 따진다면 아주 근소한 범위에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가 어린 시절부터  아이스퀼로스, 괴테 등 문학작품을 섭렴하고 ‘미식가적인(kulimarisch) 독자로서 문학과 예술에 접근하였다면, 엥겔스는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정치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와는 달리—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문학을 경시하고 루드비히 뵈르네(Ludwig Börne)를 높이 평가한 것은 엥겔스가 문학의 정치적 비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르크스는 문학과 예술을 (철학과 경제학의 영역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인정하려고 노력한 반면 엥겔스는 그것을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직결시켰다. 20세기 초반에 정식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레닌과 엥겔스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입장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 내의 유물론적 미학 이론 및 예술적 원칙은 마르크스보다는 엥겔스의 영향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23)

 

박설호 교수는 맑스․엥엘스와 레닌을 분리하기 위해서 맑스와 엥엘스를 분리하며 과도하게 나아갔는데 이것은 사회주의진영의 패배 이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며, 1980년대 서독유학파인 박설호 교수도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세심한 필자는 “아주 근소한 범위에서”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주안점이 “근소한 범위”가 아니라 “차이점”에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반박의 여지는 너무도 많다. 그리고 곳곳에서 드러나는 맑스의 문학, 예술에 관한 언급은 ‘순전한 미식가의 것’이 아니다. 맑스의 ≪빠리의 신비≫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이지 않은 순전히 미식가적인 견해인가? 빅또르 위고에 대한 언급은 어떤가?24) 셸리와 바이런에 대한 평가는 어떻고.25) 또한 엥엘스는 뵈르네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지 않았다. 뵈르네의 청년헤겔파에 대한 영향을 분석하면서 그가 공화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며 “독일 자유의 기수”이며 “불로써 세례를 할” “강력한 이”가 오기 전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26) 이런 식의 예를 들자면 한둘이 아니라서 과감히 생략하겠지만 엥엘스가 하이네의 문학을 경시했다는 것은 당치않은 왜곡이며, 하이네가 정치적으로 많은 부분을 맑스와 엥엘스와 공유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아래에 다소 길지만 엥엘스가 직접 남긴 하이네와 관련한 두 편의 글을 인용하겠다.

 

그러한 것들 외에 모든 살아 있는 독일 시인들 중에 가장 출중한 하인리히 하이네는 우리의 대열에 동참했고, 사회주의를 설파하는 몇몇 단편을 포함한 정치시집을 출간했다. 그는 그 유명한 <슐례지엔 직조공의 노래>의 저자이며 그에 대해서 나는 여러분께 산문체로(prosaic) 번역하겠는데 그것이 영국에 모독이 될까 두렵다. 어쨌든 나는 번역을 할 것이며 단지 그것이 충성스러운 당이 특별히 사랑하는 말이며 그 이후 1813년 프러시아의 표어(battle-cry)가 된 “왕과 조국을 위하여 신과 함께”를 언급하고 있음을 주의하라. 그러나 그 노래는 이렇다. (이하에 나오는 <슐레지엔 직조공의 노래>는 너무나 유명하므로 생략한다.)27)

 

18세기의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의 독일에서도, 철학의 혁명은 정치적 붕괴의 서곡을 울렸다. 그러나 둘은 어떻게 이렇듯 다르게 보였는가! 프랑스인들은 공인 학문 전체, 교회, 번번히 국가와도 공공연하게 투쟁하였다. 그들의 저술은 국경 저편의 네델란드와 영국에서 인쇄되었고, 그들 자신은 여차하면 바스띠유 감옥에 갇히기 일쑤였다. 이에 반해 독일인들은 —교수들이며 국가가 임명한 청년 교사들이었고, 그들의 저술들은 공인된 교과서였으며, 모든 발전의 완결된 체계인 헤겔의 체계는 더욱이 어느 정도는 프로이센 왕국의 국가 철학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런 교수들 뒤에, 그들의 현학적이고 애매한 글 뒤에, 그들의 답답하고 지루한 문장 안에 혁명이 숨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시 혁명의 대표자로 여겨진 사람들은, 바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 철학의 가장 격렬한 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어느 정부도 어느 자유주의자도(뵈르네 또한 마찬가지다 —인용자) 보지 못한 것을 이미 1833년에 적어도 사람이 보고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 하이네였다.28)

 

이런 식의 무리한 비판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 식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쏘비에트에서의 ‘공식 관변예술’일 뿐이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얼마나 위대하였던가! 막심 고리끼, 미하일 숄로호프,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 쇼스타코비치, 포스터로 혁명에 참가한 무어(Д. С. Моор)와 데니(В. Дени)뿐만이 아니다. 브레히트와 아이슬러, 덴마크의 마틴 안데르센 ?쇠(Martin Andersen Nexø), 빠블로 네루다와 실비오 로드리게즈(Silvio Rodríguez) 그리고 1946년 대구 총파업을 배경으로 한 <인민항쟁가>의 작곡가 김순남29)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의 위대한 대변자이다. 20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한계와 오류로 그 무수한 위대한 성과를 뒤덮을 수는 없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편협한 예술관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20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남긴 결과물을 좁은 시야로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림 3》무어: <세계제국주의에 죽음을>, 1919.

 

 

VI. 레닌의 ‘똘스또이론’: 위대한 고전과 현실 투쟁의 원칙

 

맑스․엥엘스의 예술관은 레닌에게 계승․발전된다. 엥엘스의 발자끄론처럼 레닌도 일맥상통하는 관점에서 똘스또이의 유산을 재평가했다.30) 레닌의 똘스또이에 대한 입장은 똘스또이가 인민적인 작가였냐 혹은 아니였느냐 같은 식의 이분법적인 화두로 전개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쁠레하노프는 똘스또이를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귀족”의 대변자일 뿐이라고 보았다. 레닌이 주목한 것은 똘스또이 작품의 어떤 요소들이 본질적으로 인민적인 성격을 지니느냐하는 변증법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똘스또이 작품에 내재한 모순과 그것의 연원에 대해서 파헤친다. 쁠레하노프에게 있어 과거의 문화에 대한 연구는 단지 역사의 과정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열쇠에 불과했다. 하지만 레닌에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문화를 건설할 때 이용될 수 있는 ‘진보적인’ 요소들을 선택하고 채용하는 극히 실제적인 작업이었다.31) 레닌의 “러시아 혁명의 거울인 레프 똘스똘이”를 보자.

 

똘스또이는 부르주아혁명이 러시아에 다가오고 있던 당시 수백만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서 출현한 이념과 정서의 대변자로서 위대하다. 똘스또이는 독창적(original)이다. 왜냐하면 그의 온갖 견해를 총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농민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우리 혁명의 구체적인 특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똘스또이의 견해들에서 나타나는 모순은 농민계급이 우리 혁명에서 수행해야 했던 그 역사적 역할을 둘러싼 당시의 모순된 조건의 진정한 거울이다.32)

 

레닌의 똘스또이론은 혁명운동의 과정에서 반동적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 과거 유산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수용하는 면에서 엥엘스의 발자끄론과 같은 문제의식을 같고 있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똘스또이는 귀족출신33)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로 인해 사회주의 혁명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했지만, 발자끄와 같은 반동적인 왕당파가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농민의 아픔을 공감하였다.34) 그리고 레닌의 글은 엥엘스의 글보다 좀더 실천적․혁명적인 과제에 구체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레닌은 농민의 대의와 토지문제35)에 공감한 1905-6년 병사폭동이 실패한 원인을 “투쟁에 대한 비준비성 및 악에 대한 똘스또이의 무저항”에서 찾아낸다. 레닌은 똘스또이로부터 1905년 혁명의 패배의 원인을 이끌어내고 스똘리삔 반동기를 극복할 무기를 찾아낸다.36) 1910년 똘스또이의 죽음이 알려지자 레닌은 열흘도 되지 않아 긴급히 ≪사회민주주의(Сотсиал-демократ, 소찌알-데모끄라뜨)≫ 18호에 “L. N. 똘스또이”를 기고하였다. 그무렵 짜르 정부 신문은 “거짓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똘스또이에 대한 존경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성(聖)’ 씨노드(그리스도교 대표자들의 공식회의. 여기서는 러시아 정교의 최고 행정기관)를 옹호하였다. 씨노드는 성직자들을 죽어가는 똘스또이에게 보내 한편으로는 똘스또이가 “회개”했다고 말하도록 하면서, 똘스또이를 파문했다. 또 한편으로 자유주의자 신문은 입에 발린 말로 “진(眞)과 선(善)의 이념”과 같은 찬사를 내뱉지만 국가, 교회,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똘스또이의 견해에 명확한 입장을 밝힐 수 없었다. 레닌은 오히려 검열이 “그들을 구원해주고 있다!”고 혹평한다. 똘스또이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으로부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대중과 수백만의 사회주의적 투사의 단결된 군대의 결합을 배우도록 요청한다.37) 이러한 레닌의 똘스또이론은 러시아의 주요한 인텔리겐치아이며 민주주의자인 게르?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게르?이 1840년대의 러시아 그 자체에서 혁명적 인민을 볼 수 없었던 것은”은 그의 불운이었지만, “60년대에 혁명적 인민을 보자” “두려움없이” “짜리즘에 대한 인민의 승리를 위해 싸웠다.”38)

그런데 레닌의 글은 곡해한다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민주의자인 똘스또이 작품의 위대함을 근거로 하여 레닌이 사상적 경향성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규정하는데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39)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이라면 그 근원을 엥엘스부터도 찾을 수 있을 것인다. ‘반동적인 발자끄를 보라. 위대한 그의 작품을 보면 예술성이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한 것 아니냐?’ 저들은 엥엘스가 “발자끄가 자신의 계급적 공감과 정치적 편견에 역행”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의 작품을 “저자의 의견과는 상관없는” “리얼리즘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자신있게 발언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곡해하는 것이다. 또 이들은 똘스또이가 당시 러시아 사회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을 전개하고 있음을 간과한다. 레닌이 똘스또이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지적하고 있고, 똘스또이의 인민주의와 정치에 대한 거부 그리고 “악에 대한 무저항”과 같은 세계관을 철저히 비판하였음을 무시한다. 이들은 무엇이 똘스또이의 계승해야 할 유산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정치적 사상과 상관없는 예술성’의 옹호만을 바라본다. “러시아혁명의 거울인 레프 똘스또이”의 첫 문단은 이렇게 끝난다. “만약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위대한 예술가라면, 그는 혁명의 본질적인 면의 어느 정도를 그 작품 속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40)

 

똘스또이는 출신성분과 교육에 있어서 러시아 최상층 토지귀족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환경의 모든 관습적 견해와 결별했으며, 후기 작품에서 대중의 노예화, 대중의 빈곤, 농민과 소부르주아지 일반의 몰락,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당시의 모든 생활에 관철되고 있었던 강제와 위선 등에 기초하는 당시의 모든 국가 교회, 사회․경제 제도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공격했다.41)

 

레프 똘스또이의 문학을 연구함으로써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신의 적들을 보다 잘 아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똘스또이의 교의를 검토함으로써 전 러시아 인민은 자신의 약점, 즉 해방운동의 완결을 허용하지 않는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한다.42)

 

 

VII. “당 조직과 당 문학”: 당파적 문예 창작의 원칙

 

레닌의 문학․예술론을 보면서 피할 수 없는 글은 1905년에 발표한 “당조직과 당문학”이다. 레닌의 “당조직과 당문학”은 맑스-레닌주의 문학예술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또한 논쟁적인 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레닌은 1905년 혁명 이후에 다소간의 열린 정세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당문학의 원칙을 표명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문학을 뜻하는 литература(literatura. 영 literature)는 문학과 비문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문헌’이라는 뜻이다.43) 이 때문에 레닌의 글이 공식적인 당 문헌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주장이 등장했으며 이와 관련한 지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레닌은 같은 글에서 “화폐의 힘에 기초한 사회에서 작가양반 당신은 출판업자와의 관계에서, 대중들 간의 관계에서 자유로운가”를 묻는 한편, 부르주아 예술가의 자유란 “가면을 쓴(혹은 위선적인 가면을 쓴)”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비계급적인 문학과 예술”은 오직 “무계급의(extra-class) 사회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위선적인 자유로운 문학”과 “실제적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을 대비한다.44) 글 내적으로 보아도 레닌의 글이 문학과 예술을 포괄하지 않는 공식 문헌에만 한정된 것이라는 말은 근거가 없다. 물론 고려해야 하는 것은 1905년 레닌의 글이 사회민주주의당의 기관지만을 염두에 두었느냐 아니냐 식의 논점이 아니라, 혁명이 승리하여 러시아의 지배정당이 된 이후에도 레닌의 원칙이 유효한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설령 레닌이 1905년에 당 기관지에 한정한 논의를 전개했던 것이라고 양보를 하더라도, 혁명 이후 모든 쏘비에트의 신문에 레닌의 원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45)

레닌은 방식은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는 지점을 우회하지 않고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 점은 레닌의 문학․예술론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나며 “당조직과 당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레닌은 “비당파적인 작가”에 대한 “타도”를 선언하며 “문학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대의의 일부분(강조는 원문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어서 유명한 “톱니바퀴와 나사”라는 비유가 등장한다. 문학이 조직적․계획적․통일적인 사회민주당 작업의 구성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부르주아들은 이것을 위선적으로 거부한다. 톱니바퀴와 나사는 기계의 핵심적인 장치이며 그것 없이 작동할 수 있는 기관은 없다. 또한 레닌은 문학에 있어 “개성적인 창의력과, 개인적 경향, 사고와 상상, 형식과 내용에 있어 많은 여지가 허용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톱니바퀴와 나사라는 불완전한 비유46)는 문필활동과 문학창작을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 조직을 위한 적극적인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47)

이에 대해 백낙청은 레닌이 “‘당파성=당성=당명복종’이라는 공식과 ‘문헌=문학=예술일반’이라는 공식을 슬그머니 곁들”이는 것이 “가당찮”다고 언급한다. 학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백낙청 선생이지만 그의 예술론은 결코 철저한 계급적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래로 수많은 백낙청 비판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백낙청은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내부에서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라는 민주집중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당 내에서 부르주아적 견해를 옹호하는 자들의 숙청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레닌 스스로 “톱니바퀴와 나사”라는 것이 불완전한 비유라는 것을 간과하며 행간을 읽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속류적이며 비변증법적인 이해도 백낙청 식의 이해와 그 연원이 같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독재(dictatorship)에서 민주주의의 부정과 억압만을 바라본다. 그런 이들은 민주주의도 사실상 지배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란 부르주아 독재의 한 형태임을 간과한다.48)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같은 언어와 동일한 사건을 둘러싼 투쟁이다. 피지배계급의 투쟁을 심정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똑같이 쓰고 있는 ‘독재’라는 언어를 피해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폭력’의 문제도 그러하다. ‘비폭력’ 투쟁이었고 경찰의 ‘폭력’에 의해 우발적으로 폭력이 등장한 것이라고. 그런 식이라면 ‘독재’와 ‘폭력’은 지배계급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 버린다. 인민 대중의 봉기가 일어나는 지점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똑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바로 그 지점이다. 2009년 5월 16일 토요일 대전에서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의 투쟁이 위력적으로 전개된 후 5월 18일 월요일 조간신문들의 1면을 보았더니 확연하게 대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중․동은 모두 집회 참가자들이 만장깃대로 무장하고 경찰을 몰아붙이는 사진을 전면에 실었다. 반면 ‘진보언론’이라 불리는 ≪한겨레≫와 ≪경향≫은 그 사건이 부각되지 않도록 피해갔다. 부딪치고 있는 쟁점을 회피하는 것은 벌써 패배의 시작이다. 박종태 열사가 왜 죽었고 노동자들이 무장하고 투쟁했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은 묻혀져 버렸다. 결국 논쟁은 죽창이냐 죽봉이냐 만장깃대냐는 지엽적인 것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용산참사 사건 때도 마찬 가지다. ‘화재의 원인’이 신나와 화염병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쟁을 한다면 그것은 시작하기도 전에 져 있는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고해 볼만한 책으로 브레히트의 사진시집 ≪전쟁교본≫이 있다. 전후 브레히트는 2차 대전 당시의 언론에 등장한 사진과 함께 4행시를 배치하였다. 이 책의 부제는 ‘사진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이다. 사진으로부터 행간을 읽어내는 브레히트의 노력은 똑 같은 사진으로 부터 파시즘 전쟁의 본질을 폭로해낸다. 패배한 독일 병사들이 남기고 간 철모가 물 웅덩이에서 굴러다니는 사진 아래에 쓴 브레히트의 4행시는 다음과 같다.

 

보아라 패배한 자들이 썼던 이 모자들을! 그러나

우리의 쓰라린 패배의 순간은 이 모자들이

마지막 벗겨져 내려 땅 위를 굴렀던 때가 아니었어.

우리가 그 모자들을 고분고분 머리 위에 썼을 때였어.49)

                

《그림 4》 브레히트: ≪전쟁교본≫ 표지. 사진은 쏘비에트 지역의 독일 패잔병들.

 

 

VIII. 쁘롤레트꿀뜨 대(對) 레닌: 부르주아 문화 유산

     계승의 문제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 이후 사회주의 건설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의식과 실천을 요구하게 되었다. 레닌은 1919년에 발표한 “쏘비에트 정부의 업적과 곤경”에서 굳건한 프롤레타리아가 피억압 농민의 지지를 받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대다수의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철저히 물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다수의 인민은 아직도 문맹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모든 농학자, 기술자, 학교 교사는 유산계급으로부터 재충원되었다. 이 때 부르주아 전문가를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서도록 설득해야 하며, 이것은 폭력의 사용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과학기술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것으로 조직하는 것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제국주의에 포위된 러시아에서 그것은 촌각을 요하는 일이다. 레닌은 “완전무결한 공산주의자의 첫 세대를 양성하기 위해서 20년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바로 2개월 안에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본주의가 창조한 것 이외에는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다른 재료가 없는 상황에서 수십만의 부르주아를 몰아내는 것은 쏘비에트 정부에 해악만을 끼칠 뿐이다. “깨끗한 공산주의자의 손”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자는 “허풍선쟁이”일 뿐이고 부르주아의 봉사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혁명의 승리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로부터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취해야만 하고, 또 그 과학과 문화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배우기 위한 교육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용했던 부르주아 문화, 부르주아 과학 및 기술을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결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레닌은 그것의 성패여부는 근로인민의 선진적 부분의 조직과 규율에 달려있으며, 근로인민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부르주아 문화를 인수하는 과제의 중요성을 설명해주고 확신시키지 못한다면 공산주의의 대의는 희망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서 레닌과 쁘롤레트꿀뜨(Пролеткульт)51)와의 논쟁에 관해 접근해야 한다. 보그다노프(А. А. Богданов)가 주도한 쁘롤레트꿀뜨는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주장하며 과거의 문화적 전통을 부정하였고, 부르주아가 남긴 성과들을 배척했다. 그런데 맑스와 엥엘스는 부르주아 시대의 가치 있는 업적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2천년 이상에 걸친 인류의 성과와 유산을 적극적으로 소화해내고 개조하였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인텔리겐치아가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을 유기적으로 계승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쁘롤레뜨꿀뜨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허공에 뜬 성과 같은 것이다. 1920년 10월 8일 레닌은 쁘롤레뜨꿀뜨를 교육인민위원회 산하의 연락망 하에서 활동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임무를 일부분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을 명령한 결정을 신속하게 집필하였고 이를 발표하였다.52) 이에 앞서 1920년 10월 5, 6, 7일 열린 러시아 공산주의 청년연맹 제3차 전러시아대회에서 했던 연설에서도 같은 여지의 발언이 드러난다. 레닌은 “인류의 발전에 따라 창조된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그 변혁만이 우리에게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53)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21년에 5월 6일에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닌은 미래파 경향의 마야꼬프스끼의 시집 ≪150,000,000≫을 일만 부 인쇄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짧고 단호하게 비판을 가한다. 한정된 재원과 충분치 못한 생산력으로 사회주의 문화와 교육을 집행하는데 있어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 출판을 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했기에 마야꼬프스끼의 ≪150,000,000≫은 일만 부가 아니라 도서관 괴짜들을 위해 많아야 1,500부 정도 출판해야 한다고 썼다.54) 20세기 러시아에서 등장한 미래파 경향은 새로운 형식적 실험과 작품으로 많은 자극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대의 조건은 미래파적인 경향의 예술을 오랜 기간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후일 마야꼬프스끼는 자살을 하였고 이는 분명히 비극적인 일이었다. 당대에 마야꼬프스끼의 예술은 지나치게 앞서나간 것이었지만 오늘날 그것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렸다. 그 외에도 20세기에는 여러 불행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21세기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는 형식을 위한 형식실험만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를 새로운 형식에 담아내는 실험을 장려하고 권장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사회주의는 20세기와 달리 높은 생산력이라는 조건 하에서 건설하는 것이며, 새로운 예술을 위한 물적 토대가 20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한 조건에서 건설할 수 있기 때문에 예상은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IX. 진행중인 혁명, 긴급하며 정세적인 조치들

 

10월 혁명의 승리 이후에 예술작품의 보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과제였다. 모스끄바 쏘비에트는 의장 산하에 특별 분과를 설치하였고, 작가 베레사예프(Вересаев)와 건축가 말리노프스키(Малиновский)55)가 이 문제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 조치의 성과로 문화유산의 상당수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56) 물론 혁명의 과정에서 인민이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레닌은 지주의 서가에 있던 책을 자신의 집에 몰래 가져간 농민의 예를 들며 그가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단정한다. 그의 행위는 그가 근로인민의 공동소유인 국가소유에 관해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모든 러시아의 도서관이 합병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문맹자들을 교육할 충분한 책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혁명 발전에 관한 매우 정당하며 불가피한 단계라는 것이다.57) 1918년에는 1월에는 <폴란드 인민 소유의 골동품과 예술작품의 보호에 관하여>라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폴란드 문화재를 보호하고 양도하는데 있어 충분한 지원과 적극적인 협조를 해야 함을 명문화하였다.58) 같은 해 3월에는 <뜨레찌아꼬프 미술관의 국유화에 관하여>라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모스끄바 시립미술관을 국유화하여 노동자계급의 교육을 수행하는 국립박물관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 활동을 교육인민위원회가 지도하게 하였다.59) 또 9월에는 <예술품과 골동품의 수출을 금지하는 데 관하여>라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포고령은 발표하는 날 즉시 효력을 지닌 것이었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구속하는 강력한 것이었다.60)

레닌의 펼친 정책은 언제나 긴밀하게 정세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었며, 네프(NEP)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내전은 경제를 비롯한 모든 쏘비에트 인민의 활동을 둔화시켰다. 일례로 당시 낙후된 영화산업에 대한 기록은 열악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61) 1921년 10월 17일에 레닌은 2차 러시아 쏘비에트 인민의회의 정치교육분과에서 한 “신경제정책과 정치교육분과의 임무”라는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문화적 문제는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문제처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심화된 진보를 위한 조건은 더 이상 이전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위기가 격화된 상황에서는 몇 주일 만에라도 정치적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몇 달 만에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승리를 그렇게 단시일 내에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화는 본성을 고려할 때 오랜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오랜 기간에 적응해야 하며, 적합한 계획을 수립하고, 최대한의 인내심과 집요함과 규율을 보여야 합니다. 이러한 자질이 없다면 정치교육을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정치교육의 결과에 대한 판단기준은 공업과 농업에서 획득한 개선입니다. 우리는 단지 문맹의 토양에서 잔존하고 있는 문맹과 뇌물수수를 철폐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인민들이 우리의 선동과 지도와 팜플렛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국가 경제의 개선으로 귀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신경제정책과 결부된 정치교육분과의 기능이며, 나는 이번 의회를 통해 우리가 이 분야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둘 있기를 희망합니다.62)

 

이 무렵 영화산업 부흥을 위한 활동에 있어서 스딸린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스딸린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간과하는 경우가 많기에 일부를 인용 하겠다.63)

 

네프가 실시되기 전에 이미 제민족인민위원회는 쏘비에트 영화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인민위원인 이오시프 스딸린은 단지 입에 발린 말 이상의 것을 영화에 베푼 몇 안되는 당국자 중 한 사람이었다. 비러시아계 소수민족을 위한 문화적 자율성에 관한 프로그램 속에서, 스딸린은 선포만 요란하게 해대는 소란을 피우지 않고서도 영화에 대해 여타의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정부의 포괄적인 제의를 활용한 그루지아공화국에서 최초로 국립영화제작소가 설립되었다. 1921년 4월 그루지아 인민교육위원회 안에 영화부가 신설되었으며, 코카서스 출신으로 러시아 영화계에서 활약하던 뻬레스찌아니의 감독하에 곧바로 제작활동을 가동시켰다. 뻬레스찌아니 감독, 미하일 차우엘리(Mikhail Chiaureli, 아르센역, 그의 처녀출연작64)) 주연의 <아르센 그루지아쉬빌(Arsen Georgiashvili)> 또는 <그리아즈노프 장군의 살해>(The Murder of General Griaznov)가 바로 그것이다.65)

 

 

X. 레닌의 고리끼 비판: 비판과 숙청의 문제

 

레닌은 함께 하는 동지들의 과오를 눈감지 않고 철저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고리끼와 레닌 간의 관계도 그러했다. 초기에 레닌과 고리끼 간의 서신을 보면 레닌이 고리끼의 창신주의적 경향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지만 문학에 관련한 많은 부분은 고리끼의 입장을 존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지적인 관계가 깊어지면서 레닌은 고리끼의 오류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어조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1919년 7월 31일 막심 고리끼에게 보낸 편지는 너무나도 솔직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편지는 “고리끼의 생각이 병적이라는 확신”이 든다는 극언으로 시작한다. 고리끼가 머물던 뻬쩨로그라드가 그 당시 병적인 경향의 근거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식량의 부족과 군사적 위험이 심각한 것에 기인한 것이고, 그곳의 노동자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뻬쩨로그라드는 부르주아지(및 “인텔리겐치아”)가 예외적으로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비백위군 인텔리겐치아”를 부르주아에 대한 투쟁으로 이끌기 위한 시도를 볼 수 없는 도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레닌은 고리끼에게 동지적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조언을 한다. 그곳이 아니라 “농촌이나 지방공장(혹은 전선)의 어떤 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생활을 건설하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예술가로서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것은 그 시점의 러시아가 부르주아지와의 전방위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더욱더 긴급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레닌이 고리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서 있었던 예술가 개인에 대한 비판과 숙청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예술가 또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적극적인 조력자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부적합한 행위를 했을 때는 다른 동지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비판을 가해야 하며 오류를 바로잡도록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며, 때에 따라서 예술가에게도 관료나 정치가에게 행해지는 그것처럼 숙청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실제로 해당 예술가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정정하게 하며, 그의 가능성을 더욱 더 풍부하게 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비판과 숙청이 관료주의적인 것이어서는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20세기 사회주의는 파시즘의 침략으로 인한 2차 대전과 끊임없는 제국주의의 포위 위협이라는 한계적 상황에서 이를 수행해야 했고, 때로는 긴급한 방식으로 토론이 진행되고 지침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원칙은 끊임없이 굴곡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때로는 예술가들에게 가혹한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고, 이는 부르주아들에게 좋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20세기 사회주의 예술에서 행해진 과오만을 바라보며 그 성과를 무시한다.

20세기 사회주의는 그 오류와 한계가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20세기 사회주의가 남긴 위대한 문화․예술의 성과를 부정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게는 숄로호프 뿐만이 아니라 브레히트도 있으며, 프로꼬피에프 뿐만이 아니라 아이슬러도 있으며, 보리스 요간슨66) 뿐만 아니라 파블로 피카소도 있다! 우리는 20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성과를 계승하고 당대의 과오와 한계를 명확하게 평가해 내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자양분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림 5》보리스 요간슨: <우랄의 낡은 공장에서>, 캔버스에 유채.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맑스․엥엘스와 레닌이 남긴 문학․예술론에 관해서 몇 가지 쟁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서술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이 글만으로는 충분한 내용을 담지 못하였다. 추후 기회가 생기면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도록 하겠고, 또 오류가 있다면 정정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강력하게 변론하고 있는 미하일 숄로호프의 연설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다른 나라에 있는 사나운 적들은 우리 쏘비에트 작가들이 당의 지시에 따라 쓴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다르다.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명령에 따라 쓰고 있다. 단 우리의 가슴은 당과 인민—우리가 예술로서 봉사하는—에 속하는 가슴인 것이다.67)

 


 

1) 이주헌, “CIA와 추상표현주의 —냉전 문화전쟁의 무기로 이용된 ‘전위’”, ≪한겨레≫, 2009년 3월 17일자, 18면.

 

2) 사회주의 예술가 중에 동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같은 이는 재즈의 방법론을 수용하였다. 일례로 그의 20~30년대 투쟁가는 초기 스윙 재즈의 당김음 사용과 같은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가 남긴 글들 중 일부만을 보더라도, 그의 일관된 지향성에 비추어 판단할 때 그가 급속하게 상업화된 재즈 그 자체를 옹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장르의 형식과 이것의 수용에 관하여 이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조정환, ≪노동해방문학의 논리≫, 노동문학사, 1990, pp. 50-68.

 

4) 러시아 민족악파 5인조의 일원인 무쏘르그스키의 발언은 이와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아름다움만을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유아적, 유년기 예술이다. … 단지 예쁜 소리들만 낼 수는 없다. 현대인이 예술에서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며, 그것으로 예술가의 노력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삶이 어떤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진실이 아무리 쓰다 해도, 삶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 이런 것들이 나의 입맛에 맞는 것들이며, 내가 원하는 것들이다.” C. V. James,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기원과 이론≫(연희원 옮김), 녹진, 1990. p. 58에서 재인용.

 

5) ≪빠리의 신비(Les Mystères de Paris)≫에 대한 맑스의 비평과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문학비평가인 벨린스키의 비평이 유사하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Ш. М. Левин, С. Н. Валк, В. И. Дякин,  Редколлегия(편),  В. И. Ленин и руссукая общественно‐политическая мысль ⅩⅨ‐начала ⅩⅩ в.(V. I. 레닌과 19세기-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정치사상), Наука, 1969, p. 35-40. C. V. James,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기원과 이론≫(연희원 옮김), p. 45에서 재인용.

 

6) 모차르트는 <레퀴엠>, 라단조 K. 626을 완성하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건강 문제로 제자인 쥐쓰마이어(Franz Xavier Süßmeyer)에게 구술하면서 작곡을 계속했고, 죽기 직전에 유언을 남겨 완성하지 못한 남은 부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소상하게 지시했다. 안동림, ≪이 한 장의 명반≫, 현암사, 1997, pp. 259-260.

 

7) MEW, Bd. 3, SS. 377-379. 번역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9, pp. 185-187. 이하의 번역 인용에서 번역 원문을 수정한 부분이 있는데 일일이 표시하지는 않겠다.

 

8) “만약 노동자들의 타고난 재능이 분업의 토대라고 한다면, 매뉴팩쳐는, 일단 도입된 뒤에는, 일면적이고 특수한 기능에만 적합한 새로운 능력(노동자의 능력)을 발전시킨다. 집단적 노동자는 이제 생산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같은 정도로 우수하게 구비하게 되며, 그리고 집단적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기관 개별 노동자나 노동자의 집단을 오직 그 기관의 독특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만 사용함으로써 그 자질을 가장 경제적으로 지출한다. 부분노동자의 일면성과 불완전성조차도 그가 집단적 노동자의 한 기관일 때는 장점으로 된다. 한 가지 일만을 수행하는 습관은 부분노동자를 결코 실수할 일이 없는 기관으로 만들며, 그리고 전체 메커니즘과의 관련은 그로 하여금 기계의 일부와 같은 규칙성을 가지고 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MEW, Bd. 23, SS. 369-370. ≪자본론 Ⅰ(상)≫(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2, pp. 472-473.

 

9) 물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현상은 결코 단일한 운동이 아니다. 플로베르, 르꽁뜨 드 릴르, 보들레르와 같이 자신만의 상아탑 속에 칩거하여 세상사에 개의치 않음으로써 부르주아의 이익을 증진시킨 자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띠에, 스땅달, 메리메와 같이 예술을 자주적 유희로 여기며 부르주아적 가치에 반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Arnold Hauser, The Social History Of Art, Volume Three, Routledge & Kegan Paul, 1977, p. 184. 번역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창작과 비평사, 2008, pp. 251-252. 그런 이들조차 “평범한 인간들에게 금지된 비밀의 낙원(a secret paradise forbidden to ordinary mortals)”인 자신들만의 예술을 즐기며 예술가를 위한 예술을 옹호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적 분업체계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관념인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0) MEW, Bd. 26.1 S. 126. 번역은 ≪잉여가치학설사 1≫, 아침, 1989, p. 170.

 

11) 같은 책, S. 128. 번역도 같은 책, p. 171.

 

12) 같은 책, S. 377. 번역도 같은 책, pp. 448-449.

 

13) Arnold Hauser, The Social History Of Art, Volume Three, p. 143. 번역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p. 202.

 

14) MEW, Bd. 26.1 SS. 385-6. 번역은 ≪잉여가치학설사 1≫, pp. 458-459.

 

15)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다중≫(서창현, 정남영, 조정환 옮김), 세종서적, 2008, p. 145.

 

16) MEW, Bd. 37. SS. 42-43. 편지 원문이 영어로 되어 있고 영문은 Karl Marx․Friedrich Engels, On Literature and Art, Progress, 1976, pp. 90-91.을 보라. 인용한 번역은 백낙청, “민족문학과 리얼리즘론”,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하≫, 창작과 비평사, 1990, pp. 708-709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다른 번역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9, p. 88-89

 

17) MEW, Bd. 36, S. 394. 번역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p. 86.

 

18) On Literature and Art, pp. 91-92. 번역은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하≫, pp. 710-711.

 

19) MEW, Bd. 23, S. 615. ≪자본론 Ⅰ(하)≫(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8, p. 802.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p. 344.에서는 “그를 어린아이로 표현한다”라고 오역했다.

 

20) MEW, Bd. 25, S. 49. ≪자본론 Ⅲ(상)≫(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6, p. 42

 

21) “이 신사들 모두에게 부족한 것은 변증법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여기에서는 원인만 보고 저기에서는 결과만 봅니다. 이것은 공허한 추상이라는 것,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한 형이상학적이고, 극단적인 대립은 공황기에만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전체적인 진행은 —비록 경제적 운동이 훨씬 가장 강력하고 가장 본원적이며 가장 결정적인 운동이 되는 매우 불균등한 힘의 상호작용이기는 하지만— 상호작용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 여기에서는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 이러한 것을 그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하며, 그들에게 헤겔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890년 10월 27일 엥겔스가 베를린의 콘라트 쉬미트에게 보낸 편지, MEW, Bd. 37, S. 494. 번역은 박영호, ≪칼 맑스의 정치경제학≫, 한신대, 2008, p. 255에서. 박종철출판사판 ≪저작선집≫, 6, 2000, p. 518. 의 번역은 어색한 부분이 종종 있다. 다만 박영호의 번역에서 ‘이 사람들’은 ‘이 신사들(Herren)’로 수정하였다.)

 

22) 이와 관련한 논쟁을 다룬 단행본으로 ≪맑스주의 문학예술논쟁≫, 돌베개, 1989.을 보라. 맑스와 엥엘스가 비판을 하고 있는 라쌀레의 희곡 ≪프란츠 폰 지킹엔≫이 아직도 번역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 필자의 능력으로는 기존의 논의를 소개하는 것 이상을 할 수가 없다.

 

23) ≪이론≫, 12호, 2005. p. 116. 인용에서 주석은 생략한다.

 

24) “거의 같은 시기에 내 책과 동일한 주제(옮긴이 주: 1851년 2월 루이 보나빠르뜨의 꾸데따를 말한다.)를 다룬 저작들 가운데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다음의 두 저작뿐이다. 빅또르 위고의 ≪소(小) 나뽈레옹(Napoléon le petit)≫과 프루동의 ≪꾸데따(Coup d’état)≫가 그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꾸데따를 초래한 장본인에 대해서 신랄하고 재치 있는 비방을 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에게는 사건 자체가 청천벽력처럼 보였다. 그 사건 속에서 그는 한 개인의 폭력 행위만을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묘사 속에서 이 개인에게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적 주도력을 부여함으로써, 그를 소(小) 나뽈레옹은커녕 대(大) 나뽈레옹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닺지 못하고 있다. 프루동은 그 나름대로 꾸데따를, 앞서 진행된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서 서술하려 한다. 그러나 꾸데따의 역사적 구성은 그 꾸데따의 주인공에 대한 역사적 변명으로 변하여 그에게 돌아온다. 그리하여 그는 이른바 우리의 객관적 역사 기술가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와 반대로 나는, 평범하고도 우스꽝스러운 한 인물이 주인공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정세와 상황이 프랑스에서 계급투쟁에 의해 어떻게 창출되었는가를 증명한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제2판 서문. MEW, Bd. 16, SS. 358-359. 번역은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2005, pp. 281-282.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pp. 322-323.의 번역은 오역이 심하다.

 

25) “철학자들과 경제학자들만큼이나 시인들을 잘 알고 이해했던 맑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바이런과 셸리의 진정한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이 두 시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이런이 36살에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반동적인 부르주아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셸리가 29살에 요절한 것을 애석해 한다. 셸리는 변함없는 혁명가였으며 살았더라면 사회주의의 전위대와 함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출처 Edward Aveling and Eleanor Marx-Aveling, “Shelley as Socialist”, Die Neue Zeit(신시대), Ⅵ, Jg, 1888, S. 541. 재인용은 On Literature and Art, Progress, 1976, pp. 320-321.에서. 번역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pp. 354-355.

 

26) Friedrich Engels, “Alexander Jung, Vorlesungeun über die moderne Literatur der Deutschen(알렉산더 융, 현대 독일문학 강의)”, MEW, Bd. 1. SS. 437-438. 번역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pp. 422-423.

 

27) 엥엘스는 1844년에 영국의 동지들에게 흥분에 찬 어조의 영어로 하이네를 소개하고 있다. “Rapid Progress of Communism in Germany”, MECW, Volume 4, p. 232. 번역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p. 416.

 

28) 이는 저 유명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서두를 장식하는 명문이다. MEW, Bd. 21, S. 265. 번역은 ≪저작선집≫ 6, 2000, pp. 243-244. 엥엘스는, 독일에서의 철학의 혁명에 관하여 하인리히 하이네가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은 하이네가 1833년에 쓴 “독일에서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관하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라는 논문에 수록되어 있다. 같은 책 S. 580. 번역도 같은 책 p. 602.

 

29)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순남의 음반은 <해금작곡가 김순남 가곡집>, 성음, 1990.이 유일하다. 1988년 월북 작곡가 김순남의 작품 일부가 해금된 이후에 발표된 것으로서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에서의 일부 작품을 포괄하고 있다. 김순남 작품의 극히 일부분만을 소개하고 있는 음반이지만, 지루한 가곡을 연상하는 이들에게 파격적인 형식과 살아 있는 가사가 결합된 음악은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 더 많은 내용은 노동은, ≪김순남≫, 낭만음악사, 1992.를 보라. 단 노동은은 사회주의 작곡가 김순남의 측면보다는 지나치게 민족음악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30) V. I. Lenin, On Literature and art, Progress, 1978에 실린 일련의 글들에서 볼 수 있다. 한국어판은 ≪레닌의 문학예술론≫을 보라.

 

31) C. V. James,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기원과 이론≫(연희원 옮김), p. 83.

 

32)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5, Progress, 1963, p. 206. 번역은 백낙청, “민족문학과 리얼리즘론”,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하≫, p. 725. 그리고 ≪레닌의 문학예술론≫, p. 60.

 

33) 참고로 쏘비에트 작가 A. N. 똘스또이(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82-1945.)는 부계쪽으로 레프 똘스또이와 친척 간이며 똘스또이처럼 귀족 출신이다. 그럼에도 그는 똘스또이의 길이 아니라 주도적인 쏘비에트 작가의 길을 갔다. 그의 죽음은 막심 고리끼의 그것 만큼이나 큰 손실로 여겨졌다고 한다.

 

34) 백낙청, 같은 글, pp. 724-726.

 

35) “그러므로 우리의 정치적 조언을 농민들에게 각인시키려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즉 여러분은 토지를 얻고 나서도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지주와 대부르주아지에게 다시 억눌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정치적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면, 그리고 전체적으로 토지의 사적 소유에 보다 강한 일격을 가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토지를 얻을 수도 없고 그것을 보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회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여러분은 다시 후퇴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를 강화시킬) 민주주의혁명 이후에 강력해진 부르주아지가 노동자와 농민대중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획득물을 빼앗아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대중이 더욱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화국과 완전한 인민주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공화국이 창설되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최대 성과로서, 그리고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승리로부터 사회주의를 위한 실질적 투쟁의 시초로의 필연적인 이행으로서 모든 토지가 국유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닌, “노동자 당의 농업강령 개정”에서. V. I. Lenin, Collected Works, 1972, Vol. 10, pp. 190-191. 번역은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 백두, 1989, p. 259.

 

36)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5, pp. 207-209.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61-63.

 

37)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6, 1967, pp. 326-327.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87-89.

 

38)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8, 1968, pp. 30-31. ≪레닌의 문학예술론≫, p. 110.

 

39) 소련과학아카데미 편, ≪마르크스 레닌주의 미학의 기초이론 Ⅰ≫, 일월서각, 1988, p. 227. 이 책은 1960년 흐루쇼프 시대에 출간된 미학 교과서이며 그런 식의 견해를 수정주의자들의 견해라고 비판하고 있다.

 

40)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5, p. 202. ≪레닌의 문학예술론≫, p. 57.

 

41)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6, p. 331.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91-92.

 

42) 같은 책, p. 354. 번역도 같은 책, p. 95.

 

43) 백낙청, “민족문학과 리얼리즘론”,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하≫, p. 722.

 

44)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0, Progress, 1972, p. 48. 번역은 ≪레닌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8, pp. 55-56.

 

45) C. V. James,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기원과 이론≫(연희원 옮김), p. 39.

 

46) 여기서 레닌은 “모든 비유는 불완전하다(All comparisons are lame)”는 독일 속담을 거론하고 있다.

 

47)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0, pp. 45-46.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52-53.

 

48) 더 자세한 논의는 ≪노동사회과학≫ 제1호, 노사과연, 2008에 실린 김해인의 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행기”를 참조하라.

 

49) 브레히트, ≪전쟁교본≫(이승진 역), 한마당, 1996, 57번시. 원문을 확인해 보지는 못했는데 이 번역본에는 쪽 수가 없다. ≪전쟁교본≫은 파시즘 전쟁의 본질에 대한 폭로와 함께 막대한 피해를 입은 쏘비에트 인민들에 대한 애도와 러시아 빨치산 투쟁과 쏘련 적군에 대한 헌사가 드러난다. 이 책은 아쉽게도 현재 절판 중이다.

 

50)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29, 1965, pp. 69-71, 71-75.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171-177.

 

51) пролетарская культура(proletarskaya kultura)의 합성어로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뜻이다. 부르주아적 잔재를 일소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주창하며 1917년부터 1925년까지 활동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약 40만의 노동자를 확보하였고, 그 중 8만이 많은 문학과 예술 훈련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프로문학운동론 1≫, 화다, 1988. 홀거 지이젤, ≪소비에트 문화이론≫, 연구사, 1988을 보라.

 

52)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1, 1966, pp. 316-317.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207-208.

 

53) 같은 책, p. 287. 번역도 같은 책, p. 192.

 

54) Vol. 45. pp. 138-139. ≪레닌의 문학예술론≫, p. 285.

 

55) В. В. Вересаев. [1867-1945]. 쏘비에트의 작가로 혁명과 인텔리의 문제를 다루었다. 콤소몰의 자매 이야기를 그린 1933년작 ≪자매들(сестраы)≫같은 소설과 ≪푸쉬킨의 생애≫, ≪고골의 생애≫같은 저술을 남겼다.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라. http://www.sovlit.com/bios/veresaev.html

 

56) C. V. James,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기원과 이론≫(연희원 옮김), p. 77.

 

57)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29, p. 337. ≪레닌의 문학예술론≫, p. 181.

 

58) V. I. Lenin, On Literature And Art, pp. 243-244.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297-298.

 

59) V. I. Lenin, On Literature And Art, p. 246. ≪레닌의 문학예술론≫, p. 300. 이 당시 교육인민위원회는 크룹스까야와 루나차르스키가 지도하고 있었다.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볼셰비키 당에 해악을 가져온 창신주의를 공격하며 루나차르스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만을 기억하는 이들은 루나차르스키가 10월 혁명의 승리 이후 교육과 문화․예술 분야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루나차르스키는 문화․예술과 관련한 여러 분야의 실질적인 정책을 집행하였고 레닌은 그것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그에게 많은 부분을 맡겨 두었다.

 

60) V. I. Lenin, On Literature And Art, p. 248. ≪레닌의 문학예술론≫, p. 303.

 

61) 제이 레이다, ≪소련 영화사 1≫(배인정 역), 공동체, 1988. pp. 255-256.

 

62)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3, 1976, pp. 78-79. 번역을 찾지 못해 직접 번역하였다. 제이 레이다, ≪소련 영화사 1≫(배인정 역), p. 253.에서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63) 이 글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스딸린과 관련한 내용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자에게는 자료도 부족하고 또 스스로의 학습도 부족하다. 스딸린의 한계와 오류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또한 그 성과를 계승하는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추후에 진전된 결과물을 생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64) ‘처녀’ 출연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용문이고 또한 원문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부득이하게 그대로 인용한다.

 

65) 제이 레이다, ≪소련 영화사 1≫(배인정 역), p. 258.

 

66) 보리스 블라지미로비치 요간슨(Борис Владимирович Иогансон, 1893, 1973) 쏘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화가로 그의 기법에 있어 많은 부분은 이동전파 화가인 일리야 레핀으로부터 배웠다. 쏘비에트 회화에서 일리야 레핀이 했던 선구자적인 역할은 문학에서 파제예프에가 똘스또이로부터 배운 바, 음악에서 무쏘르그스키를 비롯한 민족악파 5인방이 프로꼬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에게 미친 영향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예술의 전당에서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이라는 이름의 러시아 회화 전시회가 있었다. 그 당시 전시회의 이름을 ‘레핀과 러시아 거장전’으로 바꾸는 게 더 좋았으리라 생각하는데,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였지만 여러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던 소중한 자리였다.

 

67) 1956년 제2차 전쏘비에트작가회의에서. C. V. James,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기원과 이론≫(연희원 옮김), p. 36.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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