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세계경제공황과 노동자계급 대투쟁의 역사 ― 1929-2009년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손미아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출판위원

 

 

 

I. 세계경제공황과 미국 노동자계급 대투쟁의 역사

 

1. 공황시기에 미국노동자계급 대투쟁의 교훈은 무엇인가?

 

1929년 이후 1939년까지의 시기는 대공황으로 인한 대량실업과 가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투쟁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이 공황 10년의 시기는 조직노동자가 전례가 없이 성장했던 시기였고, 노동자계급 급진화의 규모와 크기는 이전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 미국 공산당원들은 급격하게 증가했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또는 현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급진세력들이 파업의 핵심적인 지도자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기인 1940-1943년 시기에도 대규모의 노동자 파업이 벌어지긴 했으나, 미국정부의 전쟁에의 참여와 파업금지령, 노동조합 상층부의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로 인하여 전반적인 노동자계급투쟁은 위축되었다. 더욱이 전쟁 이후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국정부는 매카시즘 선풍을 조성, 반공주의 마녀사냥으로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좌파활동을 싹쓸이 하다시피 해버렸다. 이후 1967년과 1974년 사이에 또 다른 운동의 고양기, 즉 노동자계급 내부로 반향되는 전쟁ㆍ인종차별ㆍ부당행위에 대항하는 사회적 대격변을 맞게 되나, 매카시즘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어서 이 시기의 투쟁은 1930년대의 계급투쟁적 관점을 견지하지 못하였고, 노동조합들은 1970년 중반 이래 계속되어온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1980년 이래 신자유주의와 노사협조주의가 지속되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2008년 이후  또 다른 대공황을 맞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1929-2009년까지 경제공황의 시기마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관계는 어떠했으며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역사는 어떠했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투쟁사에서 이후 변혁운동 발전의 토대가 될 교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오늘날 노동운동을 노동자계급의 변혁운동으로 부활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변혁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인식의 확대를 위해 쓰여 졌다.

 

 

2. 공황기에 노동자계급투쟁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1) 연도별 시기별 자본과 정부의 태도와 노동운동의 전개양상

 

(1) 전환점: 1929-1934년

 

제1차 대전과 그 직후의 시기인 1914-1927년는 자본과 부가 집중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미국 자본가들은 1940-50년대의 매카시즘과 비슷하게 미국정부와 자본가 언론이 조장하는 적색공포에 힘입어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922년에서 1926년 사이에 약 688,538명의 노동자들이 약 1,100여 개의 파업에 참여했지만, 거의 모두 패배로 끝났다.

1929년 10월의 주식시장 붕괴와 함께 시작된 대공황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고통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그리하여 공황기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에는 15,000여 명의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 조직할 권리를 요구하면서 파업을 했다. 같은 해, 어스틴 미네소타의 호멜 정육공장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공장 점거파업을 승리로 끝냈다. 노동자 파업이 고조되자 1933년 5월 루즈벨트는 마지못해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NIRA)에 의거하여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조직할 권리를 공인했고, 이에 노동자들은 서둘러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33년에 1,695개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으며, 1934년에는 1,470,000여 명의 노동자를 포함한 1,856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전국산업부흥법이 강화되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결의를 하게 되었고, 이 시기의 투쟁은 기아(飢餓)와 실업에 대한 투쟁보다는 핵심 산업체의 노동조합 인정을 위한 파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공산당원은 약 8,000명에서 24,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1934년에 발생한 투쟁들―샌프란시스코, 톨레도, 미네아폴리스의 투쟁들―은 형세를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기 시작했고, 노동자계급의 단결이 자본가계급에게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Smith, 2006).

 

(2) 노사협조주의와 변혁노선의 부재: 1935-1939년

 

1935-1939년의 시기는 루즈벨트 정부가 법제정을 통하여 노동자계급에게 양보안을 던짐으로써 노사협력체제의 구축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민주당을 위해 상승하는 노동운동의 충성심을 포획하려는’ 계산된 움직임을 보였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미국노동총연맹(AFL)1)은 물론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2)를 포함한 많은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루즈벨트 연립내각을 지지하고, 1936년 루즈벨트의 재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루즈벨트의 노사협조주의에 적극 동참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즈벨트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노사협력관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급진화를 역행시키지는 못하였다. 특히, 1936년과 1937년 말, 아주 짧은 시기였지만,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조직의 선두에 서 있던 노동자들, 특히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 급진화되고 공세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은 공산당에 가입한 현장노동자들이었는데, 바로 그들이 1936-37년 겨울 수개월 동안 미국 전국을 뒤흔들었던 GM 플린트(Flint)공장 점거농성의 주역이었다. 이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으로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 노동자계급투쟁을 고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공황 시기에 계급운동의 전환점에서 노동운동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조직은 공산당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산업별노동조합회의를 설립할 때부터 산업노동자들 사이에 성실한 토대를 마련하였고, 산업별노동조합회의의 조직화와 투쟁을 이끌었다. 특히 이 시기 아크론 고무공장, 파이어스톤 공장, 굿이어 고무공장, 플린트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선도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노동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공장 점거투쟁의 물결이 1936년 고무공장의 중심, 아크론, 오하이오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1936-37년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을 위대한 노동자계급투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36년-37년 노동자계급운동이 최고의 고양기에 다다르고 노동자들이 상당히 급진적으로 되어가는 시점에서, 즉 노동자계급의 변혁운동의 전망을 세워야 했을 시기에 공산당은 루즈벨트 민주당을 지지함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냈다. 1936년 루즈벨트가 재선된 후, 1937년부터 루즈벨트 정부는 노동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고3), 미국 노동운동의 고양기는 여기서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 지도부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는 노동자계급운동을 고양시킨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였다. 이렇게 공황기는 미국 노동운동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1936-37년 시기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공황 시기의 공장 점거투쟁에서의 현장의 일반 공산주의자들의 비타협적인 투쟁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의 동력이 되었다(Smith, 2006).   

 

(3) 전쟁 시기 투쟁의 고양과 매카시즘: 1940-1960년

 

1940년대 초반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로 전반적으로 자본과 정부가 전쟁에 몰두하는 시기였으며,  미국 내에서 반공산주의 마녀사냥이 시작된 시기였다. 1940년 미국 의회는 스미스법(Smith Act)4)의 입법은 반공산주의 마녀사냥의 시작이었는데, 이 마녀사냥은 1948년에 그 최고조를 이루었고 1958년 매카시즘이 물러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산업별노동조합회의, 미국노동총연맹 등 노동조합들은 민주당 정부를 지속적으로 지지했고, 특히 이들 노동조합들은 전쟁 중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금지하고 전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 특히 산별노동조합회의 안에는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 노동조합에 소속된 공산주의자들도 결국에는 독일이 1941년 러시아를 침공함으로써 쏘련-독일 불가침협약이 파괴되자, 제2차 세계대전 반대를 중단하고, 루즈벨트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무분규 선언을 함으로써 전쟁 중에도 파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신뢰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Smith 2006).

현장노동자들은 이 시기에 노동조합들의 ‘무분규 선언’ 대해 강한 적대감을 나타냈고, 전쟁 중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계속되었다5). 1944-45년 사이에 비합법적인 파업들이 고무공장이나 자동자공장과 같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벌어졌고, 이들 공장노동자들의 거의 절반 이상이 이 시기에 파업에 참가했다. 전쟁 이후 1946년 말까지 계급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다. 1946년 상반기는 미국 노동부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집중되던 시기였다.6)

이 시기에 정부와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억압하는 여러 제도와 장치들을 도입했다. 1945년 트루먼은 반노조 자본가들과 힘을 결집하였고, 1947년에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y Act)7)을 통과시킨 외에도, 1947년 3월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함으로써 쏘련에 대한 냉전을 선포했고, 마샬정책을 통해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세계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1950년 공화당 메카시(McCarthy) 의원의 주도로 시작된 매카시즘8)은, 미국 정부에 의한 광범위한 이데올로기 숙청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산업별노동조합회의, 미국노동총연맹, 미국자동차노동조합) 운동 내에서 조합 지도부 자신들에 의해서도 행해졌던 마녀사냥이었다. 결국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미국의 거의 모든 좌파는 1950년대에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매카시즘으로 인한 광범위한 이데올로기 숙청운동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1955년 합병한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노동조합회의(AFL-CIO)는 이후 미제국주의의 충실한 심복으로 기능했다(Smith, 2006).

 

(4) 노동자계급 분노의 재분출: 1960-1970

 

1950년대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의 시기로서, 미국의 세계지배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운동은 계급투쟁이 아닌 계급협조를 선택했고, 노조관료주의가 강화되었다. 특히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노동조합회의의 성립은 미국 노동계급의 혁명적 힘을 보여주었던 시기가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50년대의 매카시즘과 같은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적 억압에 대항하는 분노의 표출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급진화가 시작되었다9). 또한 전후 호경기가 끝나자 1968년 초에 노동자계급은 임금 감소, 작업속도의 증대, 노동조합 관료주의 등으로부터 오는 분노감을 투쟁으로 폭발시켰다. 흑인노동자들이 이 시기 급진적인 투쟁의 선두에 섰다. 1970년에 공장의 일반 노동자들의 반란이 최고점에 다다른 후,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반란은 상승기를 타고 계속되었다.

 

(5) 신자유주의의 등장: 198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새로운 침체기에 접어들자, 자본가계급은 더욱 더 공세적으로 나왔다. 레이건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노동운동 탄압을 본격화했다. 이 시기에 레이건 정부의 노동자 탄압의 본격화를 자본가계급은 광범위하게 노조를 파산시킬 수 있는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자본가계급은 짐짓 노동자들을 파업하도록 자극한 후, 그것을 빌미로 노동조합원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비노동조합원들로 대체시키는 수법까지 동원하면서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켰다10). 1988년 들어선 (아버지) 부시 정권은 레이거니즘의 다음 단계를 예고하고 있었다. 군비증강을 통하여 전 세계에 미제국주의의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레이건 시대의 전략이 부시 정권 하에서 다시 한 번 포효하였다.

1996년에 집권한 클린턴 민주당 정부도 놀라운 반노동자정책ㆍ친자본가정책11)을 편 반면, 노동조합지도부(AFL-CIO)는 1996년 선거 때부터 줄곧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을 지지했고,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려고 하지 않았다12). 1990년대에 와서 산업노동자들은 1980년대 레이건 정부 시기에 보여주지 못했던 단결력과 결의를 가지고 투쟁을 하기 시작했으나, 노동조합 지도부는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계급투쟁으로 이끌지 못했다.

2001년 부시 정권과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서 제국주의적 야욕을 다시 한 번 불태웠다. 이 와중에 미국의 경제는 더욱더 침체기로 빠져들어, 2001년 이래 침체기가 시작되어 2005년 이래 여러 대기업들이 파산지경으로 빠지게 되었다.

2005년에는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노동조합회의가 다시 분열됨으로써, 50년 동안 존재했던 노동조합운동의 쇠퇴를 역전시키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2008년 세계적 대공황이 시작된 상황에서 대선에서 노동조합은 다시 민주당 오바마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노사협력관계를 재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현재 미국의 좌파 활동가들과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은 대공황으로 인한 자본가계급의 위기를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고양기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전환점으로 보면서 변혁운동의 부활을 결의하고 있다.

 

 

2) 공황시기 노동운동 고양기의 투쟁 사례들

 

1934년에 형세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그 해에 섬유노동자들은 패배했으나, 샌프란시스코, 톨레도, 미네아폴리스 3곳에서 1934년 봄과 여름 동시적인 투쟁이 전개되었고, 이 투쟁들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형세를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이 파업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단결의 힘에 의존하여 자본가와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한다면, 자본가계급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노동조합 상층부의 노사협조주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비타협적인 투쟁들이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높이며 그 의식을 변화시키고, 투쟁의 의지를 고양시켰던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아래에서는 노동조합 상층부의 타협으로 패배로 얼룩진 투쟁 사례들과 더불어, 1930년대를 미국노동운동의 전환점이 되게끔 한 비타협적인 투쟁의 예들을 보기로 하자.

 

(1) 조합 상층부의 계급타협으로 인해 패배로 얼룩진 투쟁 사례들

 

① 1934년 ‘피’의 섬유노동자 투쟁 (Bloody Textile strike)

미국노동총연맹 소속 미국섬유노동조합 (United Textile Workers, UTW)의 조합원수는 1933년에는 5만여 명이었으나, 1934년 중반에는 4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34년 8월 31일 미국섬유노동조합은 노조를 인정할 것,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모든 노동자들을 복직시킬 것, 전국산업부흥법에 규정된 대로 주당(週当) 30시간 노동과 38시간에 대한 주임금을 지불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총파업을 결의했다. 동해안의 뉴잉글랜드에서 미국 최남부 지역까지 약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은 피켓을 들고, 동료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면서 도시를 행진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노동자들이 ‘평화피켓’ 뱃지를 달고 행진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무장의 노동자들을 향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파업참가자들에게 실제 사격이 가해졌다. 또한 노스캐롤라이나 버링톤 지역에서는 군대가 400여 명의 파업대오 중 5명을 총검으로 찔렀다. 운소켓에서도 2,000여 명의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어 1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그러나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는 파업을 승리로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로드아일랜드 미국섬유노동조합 지도자인 프랭크 고르만(Frank Gorman)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폭력시위의 책임을 전가했다. 미국섬유노동조합은 전국차원의 파업을 선포하지 않았고, 3주 후에 파업중지를 선언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파업참가자들이 직장을 잃고, 노조를 떠나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난 후, 섬유노동자들은 노동자 정당을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Smith, 2006).

 

② 샌프란시스코 총파업

1934년 5월 9일 샌프란시스코 부두노동자들이 전원일치로 파업을 결의했을 때, 국제항만연대 (The Internationsl Longshoremen’s Association, ILA)는 젊은 노동조합활동가들을 부두로부터 추려낼 것을 합의하는 비밀협상을 이미 자본가들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업연기를 촉구하는 미국 노동부와 국제항만연대 간부들의 광란의 전신전보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5월 11일 14,000여 명의 항만노동자들이 샌디에고에서부터 시애틀까지 파업투쟁을 벌였다. 파업 참가자들은 전체 노동자의 노조가입권, 주 48시간 노동 대신 주 30시간 노동을 요구했다. 현장 노동자들은 샌프란시스코 파업위원회의 의장으로 공산주의자 해리 브리지스(Harry Bridges)를 선출했다. 파업은 시작부터 막강한 단결력을 과시하였다. 노동자들은 대중집회를 열었으며, 24시간 연속 시위를 했다.

부두노동자들의 조직은 트럭운전사나 상인, 해군들에게 그들의 파업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들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조합 지도부에게 지지파업을 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트럭노동조합 (Teamster’s Union)은 1주 안에 화물운반을 거부했고, 25,000여 명의 해상노동자들이 서해안에서 파업을 벌였다. 7월 5일 시(市)는 경찰병력을 보내, 종일 맹렬한 접전을 벌리고 있는 대중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이날은 ‘피의 목요일’이라 불린다.

피켓들이 흩어졌지만, 다른 노동조합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몇 시간이 지나자 다시 모였다. 곧이어 난투전이 벌어졌고, 4명의 노동자들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만약 부두노동자들이 항복했더라면 ‘패배’의 소식이 모든 노동조합을 통해서 서해안 전역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파업위원회는 파업을 다른 노동조합들에게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7월 14일 115개 지역 노동조합은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서 총파업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미국노동총연맹은 시 전체로 확산된 총파업을 원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총파업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비록 경찰과 주방위군이 노조사무실을 급습하거나, 모여 있는 노동자들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전역에 걸친 파업참가자들을 진압할 수는 없었다.

파업이 앞으로 진전해 감에 따라, 상황을 빨리 종결시키기를 원했던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는 고의적으로 파업을 훼손시켰다. 파업 30일째 되는 날 그들은 파업이 종결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공언한 지 4일째 되는 날 파업이 종료되었다. 결국, 부두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인정받는 것에는 승리했지만, 노동조합의 다른 요구들에 대해서는 타협할 것을 강요받았다(Smith, 2006).

 

(2) 자본가계급과 정부에 대항한 비타협적 투쟁 사례들

 

① 톨레도 자동차공장 파업투쟁 (Toledo Auto-Lite Strike)

1934년 2월 23일, 미국노동총연맹은 톨레도 자동차공장 노동자들과 두 개의 계열사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제안했다. 그러나 톨레도 자동차 노동조합은 미국노동총연맹의 ‘지회’의 명령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했다. 마침내 미국노동총연맹의 대표인 윌리암 그린 (William Green)은 파업 참가자들이 일터로 다시 복귀할 것을 명령한다. 이렇게 지속되는 강제 속에 있던 4,000여 명의 자동차노동자들은 한 달반 뒤에 다시 파업을 시작했다. 시작 당시에는 파업 참가자수가 그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절반도 안 되었고, 자본가들이 공장을 정상 가동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하여 1934년 4월에 이 파업이 승리로 끝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만, 뮤스트 (A. J. Muste)의 지도 하에 미국노동자당(American Workers Party)이 취업노동자들과 실업노동자들을 공통의 투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운동의 단결력을 획득했다.

톨레도 거주자들의 약 1/3이 파업하고 있는 사이에 회사측은 재빨리 대규모의 파업파괴자들로 구성된 구사대를 모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파업을 시작한 이래 도시의 대량의 실업자들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업자들이 파업 승리의 핵심열쇠임이 증명되었다. 파업 참가자들은 뮤스트의 루카스 지역 실업자연대(Muste’s Lucas County Unemploy-ed League)를 통해서 수천 명의 실업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관심사가 ‘파업노동자들의 직장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파업에서 승리하도록 하는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시위는 5월 23일까지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달랐다. 관련 언론은 다음과 같이 썼다 “갑자기 최류탄이 공장 창문으로부터 날아들어 왔다. 동시에 공장 노동자들이 쇠막대기 등으로 무장하고, 소방호스를 길거리에 드리우고, 군중들을 향해서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파업 동조자들은 가스에 의해 질식되어 뒤로 물러나면서도 벽돌던지기로 응답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기세 좋게 달려왔지만, 그들 또한 최루가스로 질식되어 포기해야만 했다. 15시간의 접전이 벌어진 끝에, 900명의 국가경찰이 내부에 갇힌 파업 파괴자들을 구해냈다.” 군인들이 파업자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2명을 죽이고, 수십 명을 부상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국가경찰에 대항하여 총 6일을 싸웠고, 양측에 많은 손상이 발생되었다. 마침내 5월 31일 파업 방해자들에게 공장문은 폐쇄되었고, 국가경찰이 물러났다. 그 다음날 40,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루카스 주재판소 밖에서 200여 명의 파업가들의 체포에 항의하면서 항거하였다. 그 도시의 99개의 노동조합 중 98개의 노동조합들이 동조파업을 서약했다. 자본가계급은 마침내 6월 4일 후퇴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했으며, 모든 파업 참가자들을 재고용하기로 동의했다(Smith, 2006).

 

② 미네아폴리스 트럭운전사들의 파업 (Teamsters‘ Strike)

1934년 미네아폴리스 트럭운전사들의 파업은 투쟁의 세 가지 흐름을 타고 발생했다. 트럭운전자의 파업은 2월에 시작하여 5월에는 창고 노동자들을 참가시켰고, 7월에 승리로 끝났다. 미네아폴리스 트럭운전사 일반노조원들이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투쟁을 견지했다. 전국의 트럭운전사 노동조합에는 95,000여 명이 조합원으로 있었지만, 너무 나약하여 그들의 의지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미국노동총연맹 관료들은 미네아폴리스의 승리에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 노조 대표자인 다니엘 토빈(Daniel Tobin)은 잡지 ≪팀스터스(Teamsters)≫에서 미네아폴리스 파업 지도자들을 “급진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파업의 지도자들은 일반 트럭운전자들이었다.

5월까지 약 5천 명의 트럭운전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노동조합은 미네아폴리스 노동자 수천 명을 파업에 참가시켰다. 35만여 명의 건설노동자들이 연대를 위하여 파업을 하고, 도시의 택시운전자들이 선례를 따라서 파업함에 따라, 파업은 극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도시의 중앙노동위원회도 파업을 지지했다. 파업의 각 단계마다 일반 트럭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 소속 75명의 파업위원회가 민주적으로 투쟁했다. 즉, 모든 파업노동자들과 함께 밤마다 회의를 했고, 10,000여 명에게 배포될 수 있는 일간 파업신문을 발간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파업 지도부가 있던 창고 밖에 그들 자신의 병원과 식당을 운영했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했고, 하루에 10,000여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했다. 파업팀들은 거리에서 파업을 파괴하려는 트럭을 만났을 때, 즉각적으로 급파할 수 있는 피켓이 가득 찬 트럭을 몰고 ‘피켓팀을 찾아다니면서’ 지속적으로 미네아폴리스 거리를 순찰했다. 트럭들은 매 10분마다 파업 지도부에게 전화하여 이동경로를 보고했다.

2,000여 명의 미네아폴리스 기업 경영자들은 ‘시민연대 (Citizen’s alliance)’라는 중립을 가장한 이름으로 조직되어, 파업노동자들을 반대하는 ‘반(反)노조운동’을 조직했다. 이 동맹은 ‘시민군’를 포함해서 ‘시민들의 대중운동’을 조직했는데, 이들 시의 지배자들은 ‘특별한 경찰병력’으로써 ‘대리근무’했다. 이 동맹은 스스로 ‘파업지도부’를 구성하고, 수천 명의 지지자들을 부양하고, ‘부상당한 파업파괴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렇게 경찰과 그들의 ‘대리근무자’들은 미네아폴리스 파업 참가자들을 공격했으나, 파업 참가자들은 이러한 위협에 직면해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5월 22일, 1500여 명의 경찰과 무장한 파업 파괴자들이 2만여 명의 파업참가자들을 공격했으나, 경찰이 오히려 패자가 되었다.

7월 16일 자본가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자 파업은 다시 재개되었다. 지역신문들은 파업이 유혈사태에까지 이르자 ‘붉은 피의 혁명’을 경고했다. 이 와중에 7월 20일, ‘피의 금요일’이라고 알려진 이날, 도시의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시위자들을 향해서 살인적인 공격을 하여 2명의 시위자를 죽이고, 55명을 부상시켰다. 미네소타 주지사는 ‘피의 금요일’에 대응하여 노조 상황실을 급습, 약 100여 명의 파업 지도자들을 전원 검거하면서 던 형제들 (Dunne brothers)을 체포했다.

그러나 모든 택시, 얼음공장, 맥주공장, 가솔린 트럭 노동자들로 구성된 연대체가 이 파업에 참가하였고, 4만여 명의 사람들이 ‘피의 금요일’에 죽임을 당한 해리 네스(Harry Ness)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경찰은 4만여 명의 분노에 찬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파업 지도자들을 석방시켜야 했다. 결국, 군인들의 숫자가 파업참가자들의 숫자와 거의 같게 되었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에 5주 간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파업참가자들은 계속해서 파업을 깨뜨리려는 트럭을 멈추기 위해 돌아다니는 피켓분대를 활동시켰고, 루즈벨트 노동중재위원회는 정상화를 위해 협상하고자 했다.

8월 22일 결국, 자본가계급은 노조의 주요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토빈 (Tobin)에 의해 멸시되던 “급진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대에 첫 번째 중요한 승리를 한 것이다 (Smith, 2006). 

 

③ 1936-37년 아크론 굿이어(Akron, Good year) 투쟁

1936년 노동자계급의 자신감은 특히 자동차공장 노동자들과 타이어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급격히 증대한다. 경제적 대혼란은 1935년 시작되어 1937년 가을까지 지속되어 투쟁성이 상승하였다. 1936년 공장 점거투쟁의 물결이 고무공장의 중심, 아크론, 오하이오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미국고무노동조합(United Rubber Workers, URW) 지도자들은 이러한 파업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아크론 공장 점거투쟁은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요구의 승리를 가져왔다. 대부분 공장 점거투쟁의 이슈는 임금과 노동문제였다. 그러나 1936년 가을 굿이어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공장 폭력배들이 지역노동조합지도자들을 폭행하자 하루 종일 점거투쟁을 벌였다. 그 다음날 밤에 동일한 노동자들이 다시 점거투쟁을 했다.

산업별노동조합회의 지도부나 루즈벨트 사절단들도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꺾어놓지 못했다. 루즈벨트는 중재인을 보내서 굿이어 노동자들의 2주간에 걸친 공장 점거투쟁을 멈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4,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한 달 동안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다. 한 달 간의 투쟁 이후, 굿이어 노동자들은 약간의 이득을 얻고 공장으로 복귀했지만, 노동조합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파이어스톤, 굿이어, 굿리치 소속의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년 후에 플린트 공장 점거투쟁 이후까지, 노동조합 인정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공산당은 산업별노동조합회의의 설립투쟁을 지도했던 공장노동자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산업노동자들 사이에 성실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1935년 자동차 노동자들 사이에 공산주의자 회원은 630여 명이었는데, 1939년에는 주변의 많은 동조자들을 포함하여 1,100여 명으로 거의 두 배가 되었다. 1937년 공산당은, 공산당원들이 거의 모든 지역의 자동차공장 노동조합에서 활발하게 역할을 하여, 디트로이트의 28개의 자동차공장에 핵심거점을 세웠다. 또한 일반 공산당원들은 1936년 오하이오 아크론 공장에 휘몰아친 가장 중요한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파이어스톤 투쟁위원회의 구성원이었고, 굿이어 투쟁의 주요 핵심적인 투쟁 지도자로서 역할을 했다. 같은 해 공산당의 아크론 조직은 모든 투쟁의 가두집회를 주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Smith, 2006).

 

④ 1936-1937년 GM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파업: 세기의 파업

㉠ 1936년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의 전개

1936년 12월 28일-1937년 2월 11일 사이에 이루어졌던 전설적인 GM 플린트공장 점거투쟁13)은 1930년 다른 어떤 파업보다도 더 극적으로 형세를 역전시켰다. 플린트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미국의 역사에 전례 없는 ‘공장 점거투쟁’이라는 전술을 채택하여 자본가계급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Linder, 1965). 플린트공장 점거투쟁 동안, 15만여 명의 GM 노동자들 가운데  14만여 명이 점거농성을 하거나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의 중요성은 이미 자동차공장을 넘어섰다. 미국의 모든 국민들은 플린트공장 자동차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지도부, 경찰, 사측이 고용한 폭력배, 그리고 심지어 루즈벨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당면한 문제들에 직면해서 대항하고, 행동하고, 결국에 가서 승리하는 것을 예의 주시했다(Smith, 2006).

플린트공장은 GM왕국의 중심지였다. GM은 1936년 플린트공장에 47,000여 명을 고용했다. 플린트공장 내의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조합원은 10월의 150여 명에서 그해 12월 말에는 4,500여 명이 되었다. 미국자동차노동조합 지도자들은 1937년 1월에 미시간 뉴딜 주지사인 프랭크 머피(Frank Murphy)가 취임할 때까지 파업을 연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역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12월 27일 점거농성은 클리블랜드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음날에는 플린트에 있는 피셔바디(Fisher Body), 시보레공장(Chevrolet plants)으로 확산되었다.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이 앤더슨, 인디아나, 노우드, 오하이오, 자네스빌, 위스콘신, 디트로이트로 확산되었다(Smith, 2006).

GM 관리자들은, 그들 자신들은 와그너법 (Wager Act)을 준수하지 않으면서도, 점거농성이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대응했다. 생산이 감소하자 GM은 파업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한 명령을 얻기 위해 법원에 의지했다. GM은 재판관으로 하여금 법을 들먹이면서 노동자들에게 공장 밖으로 나갈 것을 종용하도록 했으며, 회사에 충성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플린트동맹’을 만들어 파업파괴팀을 구성했고, 공장 점거파업 노동자들에 대해 자경단을 구성했다. GM은 1937년 1월 2일 법원의 금지명령을 획득 했고, 공장 내부에 남아 있던 동맹파업자들 및 데모에 동참하여 파업진압자들에게 항의하는 동맹파업자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보안관이 점거농성 동맹파업자들에게 법원의 금지명령을 소리내어 읽자, 그들은 그에게 “공장 밖으로 나가라”라면서 비웃었다14)(Smith, 2006). GM은 계속해서 파업노동자들이 공장을 비우지 않으면 노동조합과 협상하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Linder, 1965). 사장인 알프레드 슬로안(Alfred P.Sloan)은 동맹파업자들에게 GM은 “어떠한 노동조합도 그들의 노동자들을 위한 단독의 단체교섭 대상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월 11일 경찰이 피셔 차체2공장 (Fisher Body No. 2)에 침입했으나, 노동자들은 용기, 조직, 단결력으로 경찰의 침입을 이겨 냈다. 관리자들은 이날 피셔 차체2공장의 난방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공장 경비원들은 공장 안으로의 모든 음식물 공급을 차단시켰다. 동맹파업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공장문에서 근위대들과 맞부딪혀 곤봉, 최류탄, 폭동진압용 단총을 가진 경찰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동맹파업자들은 문경첩이나 화재 진압용 호스 등으로 응답하였다. 동맹파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지자들 수천 명이 물결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경찰들을 무력화시켰다. 노동조합원들은 후에 이 투쟁을 ‘불런전투(The Battle of Bulls Run)’15)라고 불렀다(Smith, 2006). 이 투쟁에서 승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성들이 보여준 투쟁력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두드러진 두각을 나타낸 여성활동가인 제노라 존슨(Genora Johnson)은 여성부대의 전위반인 여성응급구조대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여성 집단의 지도자들이 분대장이었는데, 그들은 전화와 차를 가지고, 응급상황을 해결하고, 작업현장으로 운송했다(Linder, 1965).

GM은 계속 미국자동차노조와의 협상을 거부했다. 사측이 2월 초 동맹파업자들에 대해서 두 번째 금지명령권을 확보하자, 주지사 머피까지 GM과 파업노동자들을 협상시키려고 했는데, 이 협상 테이블에는 오직 미국자동차노동조합만이 모습을 나타냈다. 현장의 파업노동자들은 협상 테이블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이 협상에 만족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사측이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지사 머피는 교착상태를 깨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겠다고 위협했으나, 현장 노동자들은 논의와 투표를 거친 후에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공장점거를 계속하겠다고 결정한다.

트레비스(Travis)와 플린트공장 현장 지도부는, 협상이 지속되는 15일 동안 GM 사측이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을 점점 덜 받아들이게 압력을 가하는 것을 보면서, GM 사측과의 협상을 깨지 않고 협상자체에만 의존한다면, GM이 다시 공격적으로 될 것임을 깨달았다. 트레비스는 공장점거를 통하여 파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공장에서 철수하는 것은 퇴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와중에 파업지도부인 트레비스, 크라우스(Kraus), 로이 빅터(Roy Victor) 등이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파업지도부가 체포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협상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Linder, 1965). 현장노동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명백한 인정과 결정적인 승리 없이 휴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결국 현장노동자들은 GM이 미국자동차노동조합과 협상한 내용조차 어기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 후, 공장철수를 거부하였다. 트레비스는 즉각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철수하지 말자고 요청했고, 노동자들은 함성을 지르면 기뻐했다. 밖에 있던 5,000여 명의 군중들도 환호성을 울렸다(Linder, 1965). 1934년 톨레도공장의 1천여 명의 노동활동가들, 아크론 고무노동자들, 피츠버그 광부들을 포함한 연대파업 참가자들이 피셔 차체1공장 (Fisher body no1) 주위에 집결해서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GM은 다시 동맹파업자들이 있는 공장 내에 난방을 차단했다. 이제 점거농성자들은 1월의 날씨에 공장 내의 수도시설이 모두 얼어붙도록 공장문을 다 열어제쳤다. GM 보험사는 손상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안할 것이다. 플린트시(市) 관료들은 ‘반(反)노조자경단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1월 20일 루이스16)는 루즈벨트에게 GM으로 하여금 협상에 잘 응하도록 힘써 달라는 요청했으나, 루즈벨트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회사측은 로즈벨트의 거절에 힘입어 ‘파업파괴 전략’을 선택하고, 파업을 파괴하기위한 자경단을 꾸렸다. 사측은 점점 더 공격적이 되었고, 노동조합은 점점 약화되어 새로운 반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파업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지경이었다(Smith, 2006).

이때 트레비스와 그의 파업동조자들이 일을 수행했다(Linder, 1965). 1월 29일 금요일 트레비스와 그의 파업동조자들이 난공불락의 시보레 제4공장 (Chevrolet Plant No. 4)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훌륭한 성공적인 공장점거는 트레비스와 파업노동자들의 독창력과 영웅적인 행동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Linder, 1965). 공장 점거파업자들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전술상의 책략은, 시보레 제4공장을 점거하면서, 파업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Smith, 2006).

플린트 점거농성 34일만에 노동자들은 다시 공격적이 되었다. 결국 GM은 2월 4일 공장을 비울 때까지는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던 태도를 바꾸어서 협상을 개시했다. AFL은 계속 배반을 했다. AFL은 GM 사측을지지, 파업을 ‘패배’로 규정하면서 공장을 가동시킬 것을 요구했다. AFL의 대표 윌리암 그린(William Green)은 루즈벨트로부터 CIO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파업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GM에게는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을 인정하지 말라고 요청했다(Linder, 1965).

항간에 주지사 머피가 공권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파업지도부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고, 파업참가자들의 대부분은 ‘목숨을 건 투쟁 위원회 (Fight to the death commettee)’에 서명함으로써 투쟁의 결의를 보여주었고, 머피에게 통신문을 통해 그들이 계속 공장에 남아 투쟁하기로 결의했음을 알렸다(Linder, 1965).

공장 내부의 결의가 이러하였으므로 공장 외부에도 많은 지원군이 있었다. 트레비스는 최후의 결판을 위해서 많은 대중의 지지를 요청했다. 수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약 10,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디트로이트에서 쏟아져 나왔다. 또한 2월 3일은 ‘여성의 날’이어서 수백 명의 여성들이 각지에서 쏟아져 나와 플린트공장으로 향했다. 마침내 총 5,000여 명으로 구성된 플린트 여성응급부대가 공장에 도달했다. 2월 9-10일 사이에 시보레 제4 공장의 전기와 난방이 모두 꺼진 상태에서 플린트공장을 둘러싸고 10,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공장 안에 있던 약 5,000명의 점거농성자들은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2월 11일 공장 점거농성 44일째 되는 날, GM이 드디어 항복했다. 그들의 공장과 장비들의 안전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1936년 2월 11일 퇴각한 것이다. GM은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과 협약을 맺고, 20개의 파업공장들과 여타의 모든 공장들에서 UAW를 협상 대상 노동조합으로 인정할 것을 승인했다. 1936년 2월 11일 UAW와 6개월 계약을 맺었고, 최소한 6개월 동안 다른 집단과 협상하지 않을 것임을 인정했다(Linder, 1965). 이 파업의 결과, 동맹파업 참가자들의, 노동자들의 조직할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법”을 불복종하려는 의지가 성공의 열쇠였음이 판명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파업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했고, 그들의 사업주에 의해 무시되어오던 와그너법에 의해 인정되었다(Smith, 2006).

 

㉡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플린트공장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던 그 역동적인 역사적 상황을 재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클리브랜드 공장 점거투쟁이 시작된 후, 이틀 후인 1936년 12월 30일 피셔 차체1공장에서 시작되었다. 30일 밤 야근을 시작하러 공장 안으로 들어가던 노동자들이 회사측이 철도차량을 뒤로 빼고, 물류를 빼돌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바로 GM관리자들이 몰래 공장을 옮기는 방식으로, 생산을 노동조합의 힘이 약한 곳으로 옮겨서 피셔 차체1공장을 파괴하려는 공개적인 시도였다. 트레비스는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즉각적으로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200와트의 빨간 전등을 깜박여 노동자들의 중식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그는, “지금 사측이 공장을 이전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클리브랜드 노동자들도 그들의 일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노동자들에게 질문했다. 곧바로 “공장을 점거하자! 까짓것 공장을 점거하자!”라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UAW의 편집장이었던 헨리 크라우스(Henry Kraus)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노동자들은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힘에 쇠사슬을 감으려는 시도 같았다. 그들은 뒤로 물러설 수 없었고, 전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그들은 출입문을 깨고, 공장정문을 향해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1/4마일 높이의 빌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Linder, 1965).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철도차량 부두로 달려갔다. 거기에서는 한 공장관리자가 차량 적재를 지시하고 있었다. “파업이다!”라고 노동자들이 기관차 엔진노동자에게 소리쳤다. “좋아”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동수(制動手)로 하여금 작업을 멈추고 걸음을 멈추게 했다.

공장 내부의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공격자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공장 안의 보안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작업을 덜 끝낸 뷰익(Buick) 차체들을 모아서 출입구에 쌓아 거대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 아세틸렌 토치램프를 가지고 노동자들은 모든 출입구 주위를 강철로 용접했다. 모든 창문에는 방탄용 천을 덧댔고, 그 천을 구부려서 소방용 호스의 주등이가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또한 그들은 최루가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젖은 천들을 준비했고, 금속 부품들을 전략적인 요새지마다 쌓아 바리케이트를 쳤으며, 침입자가 올 때를 대비하기 위해 스프레이용 페인트 총을 공장 전체에 배치했다. 관리자들이 작업으로 돌아가라고 호각을 불어댔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갑자기 3층 문이 열리고 노동자들이 팔을 내밀고 외쳤다. “어이 밥, 그 여성들은 우리 편이야!” 절단가공 부서의 여성들이 노동조합 지도부에 보고되었다. 거의 3000명의 야간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이와 동시에, 작은 공장인 피셔 차체2공장에서도 공장 점거파업에 동참함에 따라, GM공장에서 차체의 생산이 멈추었다. 수천의 파업 선언문들이 미국 전역의 부품 제조업체나 조립공장으로 전달되었다. 1월 7일까지 10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1월 3일 무려 10개의 도시에서 300개의 전국노조회의가 열려서 플린트공장에서 공식적인 요구를 주장했는데, 그 요구들은 UAW의 인정,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모든 노동자의 원직복직, 강제휴업 동안 근속수당 지급, 새로운 최저임금제, 주 30시간 5일 노동, 잔업시간 반으로 줄이기, 성과급제 폐지, 조립라인 작업속도 감소 등이었다(Linder, 1965).

 

㉢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에서 시보레 공장 탈환시의 노동자들의 독창적ㆍ영웅적 투쟁

시보레4(Chevrolet 4)공장은 주간 7,000명, 야간 7,000명이 오후 3시 30분에 교대하는 사업장으로 총 1,4000명이 근무하는, GM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다. 이 공장을 점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이 공장의 감독관인 (나찌) 돌격대원 아놀드 렌즈(Arnold Lenz)는 밤낮으로 공장 내부를 순찰하였고, 노동조합이 점점 발전하자, 렌즈는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을 해고했다. 이러한 사건이 계속 발생하자, 트레비스는 순찰병을 불러 시보레4공장에 관한 몇 가지 질문들, 즉 부두의 형태, 접근 방법, 보트로 플린트강에서 공장까지 도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렌즈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시켰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감독관 렌즈는 “트레비스가 웃기는 놈이군! 그는 시보레4공장을 점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트레비스는 GM 관리자들이 시보레4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절대로 공장 점거파업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렌즈는 1월 29일 금요일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3-4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트레비스는 일요일 밤에 시보레 노동조합원들을 소집했고, 약 1,500명이 모였다. 그는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폭력불량배의 공격에 대해서 설명하며, 노동조합이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장에는 전폭적인 지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눈을 똑바로 뜨고 보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오.” 회의는 휴회되었으나, 약 150명의 대의원들과 조직부는 따로 남았다. 트레비스(Travis), 크라우스(Kraus), 로이 로이터(Roy Reuther)가 근처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간 후, 촛불만 켠 상태에서 남은 노동자들을 한 사람씩 들어오라고 했다. 그들이 들어오자 3인 위원회는 가장 ‘믿을 만한’ 30명을 뽑아서 “지도자를 따르시오”라는 비밀지침을 포함한 종이와 함께 휴게실로 보냈다. 그 30명의 사람들은 다음날 오후 3시 20분에 시보레9공장에서 점거농성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보레 4ㆍ6 공장에 있던 노동자들은, 9공장을 도와주러 나가지 말고 그들의 작업장에 남아서 사태를 예의주시하라는 이야기와 함께, 9공장에서 어떤 공격적인 소리가 들려도, 9공장의 노동조합 조직력이 다른 곳보다 더 강하고 방어를 잘 할 것이므로, 안심하고 있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트레비스는 그러고 나서 9공장의 가장 믿음직한 두 명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옆으로 데리고 가 귓속말로 그들에게 6공장이 ‘진짜 표적 공장’이므로, 6공장이 점거될 때까지 오후 4시 10분까지 공장을 지키고 있으라고 말했다. 이 와중에 트레비스는 6공장과 4공장의 3명의 지도자, 즉 에드 크롱크(Ed Cronk), 하워드 포스터(Howard Foster), 커밋 존슨(Kermit Johnson)에게 9공장은 오직 ‘유인책’으로 활용될 것이니, 크롱크는 6공장의 노동자들을 4공장으로 집결시키고, 나머지 4공장의 두 사람에게는 공장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오직 6명―트레비스, 크라우스, 로이 로이터, 에드 크롱크, 하워드 포스터, 커밋 존슨―만이 4공장이 ‘실제 점거파업의 표적 공장’임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4공장은 어떠한가? 로이터와 크라우스가 “만약 30명의 가장 신뢰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이 9공장에서 점거농성이 있다는 계획을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질문하자, 트레비스는 “바로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30명이 아침에 공장에 나올 것인데, 공장의 밀고체계를 타파하려면 이 방법, 즉 밀실에서 종이에 쓰인 비밀지침, 그리고 휴식시간 등과 같이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30명 중 몇몇이 9공장에서 점거파업이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렌즈에게 가지고 갈 때, 그 관리자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첫째, 극단적으로 비밀을 유지하려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렌즈를 비롯한 관리자들은 노동조합이 4공장을 점거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레비스는 GM 스파이 체계가 관리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9공장은 표적공장이 될 것이고, 공장 순찰원들이 모두 9공장으로 간 사이에 노동자들이 4공장을 점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인 2월 1일 오후, 법원에서 GM의 금지명령 처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을 때, 트레비스는 노동조합 강당에서 대중들에게 “법원으로 항의행진을 하러 갑시다”라고 제안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고, 여성응급구조대는 총력을 다 하여 싸웠다. 노동조합 파수대에 의해 둘러싸인 노동조합 방송트럭이 시가지를 돌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이상한 제보’가 9공장과 6공장에 날아들었다. 노동조합 강당에서 5분 후에 도로시 크라우스(Dorothy Kraus)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한 장의 종이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트레비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법원까지 행진하려고 모인 대중들을 향해서 “9공장에 우리의 동지들이 얻어맞고 있으니, 우리가 바로 그리로 갑시다!” 하고 말했다. 노동자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쪽지에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군중들은 미친 듯이 계단으로 내려가 긴 줄로 늘어져 있는 자동차를 집어타고 몇 분도 채 안 걸려 9공장에 갔다. 일찍이 비밀정보를 캐들은 취재기자들이 벌써 9공장 앞에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곳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결국 렌즈는 완전히 덫에 걸렸다. 시보레 공장 전체의 무력군대가 9공장 옆의 빌딩에 배치되었다. 오후 3시 20분에 밤근무 교대 노동자들이 “파업”이라고 큰 소리를 지르며 행진하자, “붉은 군대들,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소리 지르는 렌즈를 선두로 공장의 순찰대원들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여인의 남편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열려진 창문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붉은 군대들에게 외쳤다. “저들이 노동자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자!” 여성들은 조직적으로 공장의 모든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여성들 중 한 명은 나중에 그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약 우리가 없었다면 투쟁은 더욱 거세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머리 위에 펄럭이는 깃발을 따라 행진했다. 관리자들의 가스총에서 나온 독가스가 우리 쪽으로 확산되었다. 우리가 독가스 공격을 받았지만, 그대로 직진했다. 우리는 공장 내부에서 독가스 공격을 받고 있는 우리의 동지들을 위해 창문을 깨야만 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남편들을 보호하려고 갔다.

 

오후 3시 30분경 호각이 불자 몸싸움이 치열해졌다. 폭력단원들의 곤봉과 가스총에 맞서서 남성 노동자들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마련했다. 오후 3시 45분경 4공장의 관리자가 4공장에 있는 모든 사측의 사람들을 9공장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4공장에는 사측의 무력부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마침 오후 4시 10분경, 두 명의 내부 지도자들인 테드 라 듀크(Ted La Duke)와 톰 클레시(Tom Klasey)는 “우리가 업무를 완수했다”고 외쳤다. 곧이어 크라우스(Kraus), 도우 켈러(Dow Kehler), 켈리 말론(Kelly Malone)이 컨베이어라인을 세웠다.

관리감독자들과 실권 없는 상사들에 의해 ‘해고’의 위협에 처해 있던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조직원들이 주변을 행진하면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동참하라!”라는 외침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파업대오가 늘어나면서 그들은 점점 더 용기백배 해졌다. 실제로 관리자들의 폭력은 거의 자행되지 못했다. 파업참가자들은 수백 명이 되었다. 컨베이어 작동 열쇠가 있는 모든 곳에는 노동조합 조직원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노동자들도 정문을 지키고 망루를 보았다.

현장관리자들이 다시 정렬했고, 한 관리자는 수동적인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재탈환하라고 촉구했다. 노동자들이 관리자들에게 “나가라”고 외쳤고, 관리자들은 감독사무실로 퇴각한 후 문을 걸어 잠궜다. 그러자, 크롱크(Cronk)와 노동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들에게 “5분 안에 나가시오”라고 소리쳤다. 관리자들이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하려고 하자, 크롱크는 벽에서 전화기와 줄을 잡아채었고 관리자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거대한 공장이 마비되었다. 공장은 완전히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통제 하에 놓였다.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들이 쏟아졌다.

 

우리는 동지들이 우리와 같이 하기를 원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고, 곧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동조합을 갖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 많은 동지들이 지금 결정의 순간에 있습니다. 일부 동지들은 집에 갔습니다. 약 2000명이 남아 있고, 나머지 2000명은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는 단결의 의지를 표명하며, 거대한 곤돌라에 그들의 점심을 놓아두고 갔습니다. 그들 중 반 이상은 음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후 4시 15분쯤 노동자들은 현장관리자들을 몰아내고, 공장에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다. 9공장에 갔던 순찰대원들이 돌아와서 북동쪽의 문으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노동자들이 그들을 막대기와 로커암으로 연결한 자체개발 딱총으로 위협하여 그들은 내보냈고, 다른 사람들은 물호스 등을 준비했다. 이때쯤 2공장에서 방송차가 돌아왔다. 여성응급부대는 마이크를 잡고, 9공장의 전장에서 돌아온 여성들을 맞이했다.

공장 내부의 노동자들은 공장문마다 바리케이트를 치느라 바빴다. 2월 1일 오후 4시 45분이 되자, 미국자동차노동조합-산업별노동조합회의 노동자들이 ‘전혀 함락당할 것 같지 않았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GM 공장의 가장 큰 규모를 가진 4공장에 요새를 구축했다. 사측의 경비대나 국가 군부대의 탈환 위험에 대비해서 여성들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트레비스에 의해 고안된 영리한 계획과 파업참가자들의 창의성과 영웅적인 태도가 수조 달러의 자동차공장에 중상을 입혔다.

어둠이 몰려오고, 조 사옌(Joe Sayen)은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었 때문에 투쟁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유, 생명,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합니다. 지금이 우리에게는 큰 기회입니다.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죽임을 당한다면요. 우리의 생명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잃을 것은 단지 목숨 밖에 없고, 노예가 아닌 영웅으로 죽어갈 것입니다(Linder, 1965).

 

㉣ 플린트 공장 점거파업에서의 ‘해방구’

   ―노동자들의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조직과정

피셔 차체1공장 노동자들은 공장 내부에서 미국 전역에서 그때까지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가장 효과적인 조직 작업을 수행했다. 공장 안전체계를 마련한 후 노동자들은 곧 집단회의에 들어가서 파업을 통치하기 위해서 현장대표위원회와 5개의 파업전략위원회를 구성했다. 버드 시몬스(Bud Simons)가 의장이 되었고, 월터 무어(Walter Moore)와 조 데이빗(Joe Devitt)이 지도자로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11월 13일 최초의 공장 점거파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노동자들이었다. 각 위원회들은 음식, 규찰, 정보, 위생, 건강, 안전, 인민재판, 오락, 교육, 체육 등을 조직했다. 모든 위원회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고 권위는 사라졌다. 최고결사대 1,200명만 공장 안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그들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밖으로 내보내졌다. 전체 공장에서 매일 두 번의 회의가 이루어졌고, 여기서 행정적인 처리를 수행했다(Linder, 1965).

파업위원회는 게시판에 모든 규칙들을 공고했다. 담배는 제한된 곳에서만 피우고, 술과 도박은 금지하고, 정보는 오직 공식적인 위원회를 통해서만 주고 받고, 개인끼리의 어떠한 전화도 하지 않는다. 모든 외부나 언론으로부터의 질문들은 서면으로 미리 받았으며, 단지 파업전략위원회에 의해서만 답변이 이루어졌다. 규찰위원회는 공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입구를 지키고, 게시판에 모든 노동자들의 이름과 교대를 적었다. 이 위원회 안에 65명의 가장 믿음직한 노동자들이 특별순찰대를 구성해서 한 시간마다 35분 순회를 실시했고, 이를 24시간 동안 전체 파업기간 동안에 수행했다. 그들은 규칙이나 원칙들을 위반하는 사례들을 보고했고, 모든 소문들을 조사했다. 규율을 파괴한 사람들은 인민재판소에 보내져 가벼운 벌을 받거나, 3회 이상 반복할 때에는 공장 밖으로 추방됐다. 접견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누구도 공장을 드나들 수 없었다.

공장 내부에서 모든 노동자는 하루에 6시간 동안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3시간 업무, 9시간 휴식, 3시간 업무, 9시간 휴식을 하였다. 매일 오후 3시에는 전체 청소를 실시했으며,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청결하게 유지했다. 공장우체국이 세워져서 모든 메일은 미리 검열한 후에 전달이 되었으며, 노동자들의 가족이 면회를 왔을 때, 부인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자녀들은 창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요새는 너무나 확고해서, 노동자들은 오직 한번만 하루 동안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공장 점거투쟁 동안 계급의식과 절대적인 현장 민주주의가 고조되었다.

파업노동자들의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서 지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조로움과 지루함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생활체조가 조직되고, 파업노동자들 사이에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었고, 매일 저녁 연주회가 열렸다. 각 집단은 라디오나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다. 탁구, 체스, 카드 등이 공급되었고, 농구팀, 권투, 레슬링 팀이 조직되었다. 파업참가자들은 시도 쓰고, 노래를 지었으며, 가장 잘 된 것은 노조신문에 개재되었다. 그것들은 대개 GM 사측이나 관리자들을 풍자하는 것들이었다.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노동자 교양강좌가 매일 열렸다. ‘살아 있는 신문’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파업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출하였다. 드라마팀은 디트로이트 현대극장에 초대되어 연극을 상영했다. 찰리 채플린이 그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필름을 제공했다. 글쓰기팀은 미시간대학교 학생들의 지도를 받아 연극을 썼다. 여성부대가 파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들은 공장 앞에서 전 국민을 대표하여 댄싱을 조직했고,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기도 했다.

여성들은 플린트공장 점거농성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약 350명의 파업자들의 아내들이 ‘플린트 여성응급구조대(Flint Women’s Emergency Brigade)’을 구성했고 후에, ‘불런전투’에 참가했다. 여성응급구조대는 분계선을 따라 조직되었고, 동맹파업가의 아내인 제노라 존슨(Genora Johnson)과 개별분대들을 총괄하는 분대장들의 명령을 받았다. 전형적인 ‘여성 보조기관’과는 달리, 여성구조대는 여성 발언자들의 접수처, 피켓을 드는 여성들을 위한 탁아시설, 방어라인을 조직하여 순간적으로 경찰과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용기는 공장 내의 남성들과 똑같았다. 1월 20일 존슨은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가 파업대오를 둘러싸고 띠를 형성할 것입니다. 만약 경찰이 총을 쏘려고 한다면 우리를 먼저 쏘아야 될 것입니다. 투쟁 속에서 새로운 여성들이 태어났습니다. 어제의 여성은 노동조합주의에 대해 공포에 떨었었다면, 단 하룻밤 지나고 나서 우리는 노동조합 투쟁의 파수꾼이 되었습니다(Smith, 2006).

 

공장 밖의 조직체계도 공장 내부의 노동자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음식공급, 출판, 복지, 구제, 방어, 노조발전 등을 위해 중추적인 위원회의 역할을 했다(Linder, 1965).

노동자들의 환상적인 정신과 조직이 나라 전역에 널리 퍼졌다. 공장 점거투쟁은 나라 전체의 일이 되었다. 나라 전역의 사람들이 신문을 펴들고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이 아직 잘 있는가”를 먼저 확인했다. 공장점거 파업자들은 이렇게 해서 공장 내부와 외부의 결합에 의해서 회사와 경찰병력에 대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세웠다(Linder, 1965).

 

㉤ 플린트공장 점거파업 승리의 결과

플린트공장의 승리는 전국적으로 계급투쟁에 영향을 미쳐서, 노동자계급의 신뢰를 한층 높였다. 노동운동사 연구가인 시드니 파인(Sidney Fine)은 “공장 점거투쟁의 극적이고, 성공적인 한 예를 보인 GM 투쟁의 전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공장 점거투쟁은 모든 상상할 수 있는 형태의 방법을 포함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공장 점거투쟁은 또한 다른 투쟁의 활동무대였으며, 강력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1936년 플린트 공장 점거파업 승리의 결과는 그 이후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파업의 물결에서 나타난다. 즉각적인 승리의 효과는 매우 컸다. AFL 대표 그린(Green)이 노동자들은 진정하라고 요구했지만, 파업과 점거파업의 물결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디트로이트 자체에서만 해도, 그 뒤의 2주 동안 87건의 공장 점거파업이 발생했다. 4일 후에 GM 공장 밖으로 나와 행진을 했는데, 이때  UAW 조합원들은 20만여 명에 달했다. 또 10만여 명이 그 다음 수개월 사이에 추가적으로 가입했다. 2월 24일 플린트공장 점거농성이 끝난 지 채 2주도 안되어, 미국 전역에서 최소한 3만 명이 공장 점거농성을 했고, 디트로이트에서만 17개의 파업이 진행되었으며, 그 다음 14일간에도 새로은 공장점거파업이 진행되었다. 1937년 3-6월 사이에 GM 자동차공장에서만 170건의 공장 점거투쟁이 발생했다. 3월2일 미국 철강노조가 파업 없이 CIO 협약에 동의했다. 3월 2일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강철회사인 유에스스틸(US Steel)이 CIO 산하 철강노동자 조직위원회(Steel Workers Organising Committee)와 무파업 협약을 맺었다. 3월 3일까지 47개의 공장 점거파업이 있었다(Linder, 1965). 1937년 중반에는 거의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투쟁에 참여했다. 파업수는 1936-37년 사이에 2,172건에서 4,740건으로 증가했다(Smith 2006).

플린트공장의 승리는 CIO가 다른 대량생산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37년 9월에 CIO의 구성원은 3,718,000여 명으로 늘었다. CIO가 조직한 농성파업이 전국을 휩쓸었다. 4년이 지나지 않아, 4백만여 명의 노동자가 CIO로 조직되었다. 자신들의 공장도 점거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 빅스틸(Big Steel)은, 노동자들이 투쟁도 하지 않았는데도 항복했다. 이 시기는 미국 노동운동의 절정기였다. CIO의 성공은 또한 AFL에도 혜택을 주어, 양 조직은 1930년대 파업의 물결이 이는 동안에 매우 주요하게 성장했다. AFL은 약 1백만 명의 새로운 회원을 모아 전체 약 360만 명이 되었다. AFL은 CIO의 분리를 유발시켰던 산업조직들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후, 계속해서 미숙련노동자들을 일반회원으로 기입시켰다(Smith, 2006). 플린트공장의 공장 점거파업은 무엇보다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시기가 전환점이었다.

 

㉥ 플린트공장 점거파업투쟁에서의 공산주의자ㆍ공산당 역할의 한계

1936년 플린트공장 점거파업 투쟁의 역사에서 놀랄 만한 사실은 1930년대에 공산주의자와 공산당이 공장 점거파업의 지도력의 핵심으로써 투쟁했고, UAW를 건설하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의 지도력의 핵심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월터 무어(Walter Moore)와 같은 사람은 공산당에 가입한 플린트공장의 노동자로서 피셔 차체1공장에서 5명의 노동자로 구성된 ‘파업전략위원회’의 멤버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속으로 스며들어 와 노동조합이 없는 독점자본의 요새 사업장을 깨기 위해 산업노조의 정책을 지지하면서 싸워왔던 것이다(Linder, 1965).

1930년대 공산주의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린더는, 가장 중요한 한계로써 첫째로, “국가의 역할, 즉 루즈벨트 정부의 역할과 관련하여 올바른 입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국가에 대한 계급적 관점이 상당히 부족했다는 것이다. 린더는, “공산당 지도부 내에 존재했던 근본적인 약점은 나중에, 1937년에 얻었던 모든 성과들을 전멸시키려는 사측의 시도에 대해서 노동자들이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것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Linder, 1965). 이 부분에 대해서 스미스도 1937년 플린트공장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노동조합 관료들은 GM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GM 자본가계급의 의도에 끌려가는 경향이 강했던 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루즈벨트 정부의 노사합의 제스추어에 대한 단절이 부족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Smith, 2006)17).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1937년의 정신’만이 아니라, 현장 활동가의 핵심이 전국 차원에서 각 사업장 단위의 현장노동운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또한 이 운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견지한 공산주의자의 지도력이다.

 

㉦ 플린트공장 점거파업투쟁의 의의

이러한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플린트공장 점거파업 투쟁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만들었다는 점과, 집단행동의 단결력에 의해 패배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단결력에 내재된 거대한 힘을 증명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에게 다른 어떠한 노동조합의 투쟁보다도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다른 어떤 노동운동의 역사보다 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공장 점거투쟁이 전통적인 형태의 파업보다 더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무엇보다도 파업노동자들이 공장 안에서 기계를 지키고 있으므로, 배반자나 파업파괴자들이 공장을 운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리하여 공장 점거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사기는 증진된다. 나아가, 1930년대에 만연했던 공장 스파이들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공정 점거가 한 두 명의 현장지도자들에 의해서 시작될 수 있고, 이것이 전체 공장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Linder, 1965).

공장 점거투쟁은 물론 그 자체가 혁명적인 투쟁은 아니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의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고전적인 파업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해고할 자본가계급의 권리와 배반자 및 파업파괴자를 사용할 권리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 있어 공장 점거투쟁은 더 집중된 투쟁의 형태로써, 특히 파업 동안 장기간 공장 내부에 있었던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의 주도권을 크게 고양시켰다. 결론적으로 1936-37년 겨울에 전국을 휘몰아쳤던 플린트공장 점거농성의 승리는 공황기 미국노동운동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3. 공황기 미국 노동자 대투쟁의 한계는 무엇이었나

 

1) 미국에서 공황시기의 노사협력관계의 구축과정

 

공황기인 1933년-1939년 사이 루즈벨트는 노동자들에게 몇 가지 양보안18)을 던지면서 노사협력관계를 구축하여, 노동자들로 하여금 민주당을 위해 충성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밀려 마지못해 ‘양보’한 법들의 본질적 내용은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장치임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그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주었으나, 이는 마지못한 양보였고, 실제로 그는 고의적으로 전국산업부흥법 제7항(NIRA section 7a)을 모호하게 규정, 사업주들이 회사의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게 함으로써 많은 사업주들은 전국산업부흥법을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분쇄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이 법의 조항들을 시행하기 위해서 창설된되는 국가부흥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 NRA) 법안은 임금체계를 인종차별적으로 규정했다. 민주당 남부 뉴딜연합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서 이미 남부에서 실행되고 있던 인종차별을 합법화했던 것이며, 루즈벨트는 이를 전 미국에 일반화하려고 했다(Smith, 2006). 결국, 이러한 기만적인 양보와 개혁안들을 통해서 루즈벨트는 노동자계급과 동맹함으로써 전설상의 자리를 획득했고, 민주당을 위해 상승하는 노동운동의 충성심을 포획하려 했다.

 

2) 노동조합의 한계: 미국 정부의 노사협조주의의 구도 속에 들어가다

 

1929년 이후 공황기의 노동자계급의 투쟁과정에서 미국노동조합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한계는 노사협조주의의 전형을 밟았다는 데 있다. 공황기에 미국 정부가 노동조합에게 노사협조주의의 손을 내밀었다면, 노동조합들은 이를 덥석 잡았을 뿐 아니라, 절대지지와 절대복종의 상태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932년과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루즈벨트를 지원한 것과, 공황기에 발생했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루즈벨트 정부를 매개로 자본가계급과의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 점 등이다. 1936년 대통령선거에는 AFL도 CIO도 공히 루즈벨트를 지지하면서 각 단위노동조합들이나 노동자들에게 루즈벨트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Smith, 2006).

또한 2차 세계대전 때에도 AFL과 CIO는 노동자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했고, 무분규를 선언했다.19) 예츠(Michael D. Yates)는 제2차 대전 때의 노사협조주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2차대전시기에 미국노동총연맹(AFL)과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는 전쟁을 강하게 지지했고, 그들의 조합원들이 파업을 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다. 정부는 자본가계급에게 노동자들과 단체협약을 맺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 정부는 파업에 대신하여 계약논쟁을 진정시키기 위한 중재안을 후원했다. 이러한 노사협력체계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전국적 노동조합지도자들에 의해 기업과 정부의 거물들과 수행되었으며, 현장의 일반노동자들은 전혀 참가하지 못하였다. … 노동현장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쏘련에 대한 충성 때문에, 대부분 이러한 보수적인 협정을 따라갔다. 비록 노동자들이 무분규 선언에 반항해서 파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쟁 동안 급진주의적 정책이나 현장에서의 선전은 중단되었다. 관료주의적이고, 노조 상근자 위주의 단체교섭이 전쟁 이후 확장되었다. 논쟁을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로써, 상근자가 불만들을 통제하고, 중재하는 방법들이 거의 전부였고, 거의 모든 단체교섭이 ‘무분규’ 합의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불만족을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Yates, 2009).

 

 결국 AFL과 CIO의 뉴딜 연립내각에 대한 충성심은 1936년 이후,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정치세력화를 막았고, 노동운동 내에 노사협력주의를 만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예츠는, 미국 정부의 노동정책은 이렇게 “미국정부가 노동조합 지도부들을 인정해줌으로써, 노동운동 내에서 그들의 지위를 확고하게 유지시켜준 후, 노동조합과 민주당을 제휴하는 데 그들의 힘을 사용했다”고 쓰고 있다(Yates 2009).

이어서 예츠는 아래와 같이 이 시기에 정부와 노사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CIO의 열망이 결국 전쟁 이후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급진파들을 내부로부터 축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전쟁 이후, CIO의 노동조합들은 민주당에 연합하기를 원하는 집단과, 정치적 독립을 원하는 집단으로 나뉘었다. 전자는 급진파들이 자신들의 계급의 적이라고 추정하여 정부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파괴했다. 이것은 아주 쉽게 이루어졌는데, 이들 급진파들은 공산당에 속해 있거나 근접해 있었고, 1940년대 후반기에 시작된 냉전기에 정부의 억압정책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노동운동 전체가 쇠락했다. 노동조합들이 민주당 내에서 약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업들의 젊은 협력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이전처럼 강력하지 못했고, 1970년대 초에 조직된 노동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의 초석이 되었다(Yates 2009).

 

3) 공황시기 좌파운동의 한계, 공산주의자 역할의 한계

 

공산당20)은 1929-1939년 공황기에 전국적인 노동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조직이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공산당은 비교적 큰 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1938년 말, 공산당은 82,000여 명으로 성장했다. 더욱이 공산당은 CIO 설립투쟁을 지도했던 공장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산업노동자들 사이에 성실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1935년 자동차노동자들 사이에 공산주의자 회원은 630여 명이었는데 많은 동조자들을 포함하여 1939년에는 1,100여 명으로 거의 두 배가 되었다. 1937년 공산당은, 공산당원들이 거의 모든 지역의 자동차공장 노동조합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여, 디트로이트 자동차공장에 28개의 공장핵심을 세웠다(Smith, 2006). 두 번째로는,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1917년 러시아혁명 전통의 후계자임을 성공적으로 주장해왔고, 1930년대에도 1917년 러시아혁명의 기억은 계속해서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공황기에 미국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공산당의 역할은 혁혁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1929년 이래 공황기에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현장노동자들의 투쟁의 요구를 대중파업으로 이끌면서, 노동자계급 투쟁에 헌신해왔다. 공산당은 다른 좌파조직들보다도 빠르게 움직였고, 1930년대 급진화된 수십만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몇몇 예를 들면, 현장 공산당원들은 1936년 오하이오 아크론공장, 파이어스톤공장, 굿이어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러한 헌신으로 1936년-1937년 GM 플린트공장의 공산당 소속 현장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GM 자본가계급과 타협하려는 태도를 불식시키고,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을 지속하여 결국 투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공황기 공산당에 속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혁혁한 운동에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는, 첫째로 공산주의자들이 현장의 노동운동과 결합하여 노동자계급운동을 고양시키는 데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수를 이루었던 CIO 등의 노동조합이 민주당 루즈벨트 정부를 지지하고, 노사화합의 구도를 견지함에 따라 노동운동을 진정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둘째, 제2차 대전 시기에 미국정부의 전쟁 참여를 지지했고, 무분규 선언까지 함에 따라, 전쟁기에 분출했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노동자계급 투쟁으로 승화시켜내지 못하고,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으로 발전시켜내지 못했다(Smith, 2006).

린더는 “이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왜 투쟁이 대량생산 산업들의 노동조합화를 넘어서 그들이 그 이전에 했던 것[볼쉐비끼 혁명]처럼 중대하고 필수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을까. 이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의 중요한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한계로서 첫째, “국가의 역할, 즉 루즈벨트 정부의 역할과 관련하여 올바른 입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국가에 대한 계급적 관점이 상당히 부족했다는 것이다21).

린더는, “비록 공산당이 1936년 대통령선거에 후보자를 냈지만, 선거에 직면해서 대부분 루즈벨트의 뒤를 따라다니는 형세”였음을 지적한다. 또한 린더는, 1936년 12월부터 1937년 3월까지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워커(Daily Worker)≫에 게재된 글들을 보아도, “국가와 통치계급과의 연관성에 대한 진정한 폭로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공산당원들은 루즈벨트의 뒤에 서 있는 통일전선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린더는, 전쟁 이후 CIO의 좌파 지도자들에 대한 학살이 성공하게 된 것도 부분적으로는 공산당이 이러한 공격에 맞서는 데에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리더쉽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Linder, 1965).

스미스도 또한 1930년대 공황 시기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한계로써 공산주의자들이, 계급투쟁을 철저하게 황폐화시켰던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연합을 지지하면서 루이스 등을 포함한 CIO 관료들에게 무비판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Smith, 2006).

한편 미국의 진보노동당(Pogressive Labor Party, PLP) 역시 기관지 ≪챌린지Challenge)≫의 한 글에서 1930년대 공황기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에서 노동자들의 자발적으로 분출하는 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에 대한 요구로 발전시켜내지 못한 한계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미국 공산당은 수많은 영웅적 투쟁들을 이끌었지만, 러시아의 볼쉐비끼는 범하지 않았던 결정적인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볼쉐비끼는 전투적 계급투쟁을 이끎과 동시에 이를 최종 목표인 공산주의 혁명과 연결시켰고,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그러나 미국 공산당은, 투쟁과 혁명에 대한 요구를 결합시키는 이 지점에서 실패했다. 본질적으로 미국 공산당은 전투적 개혁가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산당의 전투적 개혁가들은 이 투쟁에서 결정적인 요소를 빼먹어 버렸다. 혁명과 국가 권력을 향한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국가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던 지배 계급은, 10년도 지나지 않아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 있었다(Progressive Labor Party, 2008).

 

이어 PLP는 노동운동의 활성화가 결국은 자본주의 국가가 주도하는 개량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적하면서22), 아래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그 변혁성을 견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전투적 노동계급 투쟁의 지도자로서 미국 공산당이 수행했던 역사적 역할을 칭송한다. 우리는 대중이 1930년대 보여줬던 전투성과 계급의식을 다시 일깨우는 일에 헌신할 것이다. 하지만 또한 미국 공산당의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파업 현장과 빈민구호 식당, 실업 대열과 반전시위, 그리고 공황에 맞선 시위에서, 우리의 구호는 명확하다. 노동자계급에게 개량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다(Progressive Labor Party 2009).

 

결론적으로 공산당은 루즈벨트 정부의 본질, 즉 그가 ‘약간의 노동개혁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미국 전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대항하여 사용했던 모든 종류의 지역적 폭력이나 사업주를 위한 공장의 폭력 등을 허용하여 노동탄압을 자행함으로써, 구시대의 정치인 당근과 채찍의 정책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폭로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은 투쟁 속에서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필요하며, 국가ㆍ계급사회ㆍ법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공산당은 지속적으로 이것을 수행했어야 하나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방관했으며, 그리하여 오랜 동안 노동자들에게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4. 경제공황과 국가의 역할: 매카시즘

 

1) 메카시 이전의 매카시즘

 

1940-50년대 반(反)공산주의 마녀사냥은 무례한 공화당 상원의원 죠셉 메카시(Joseph McCarthy)와 반동적인 FBI 의장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의 이미지 때문에 공화당의 창조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숙청운동은 민주당의 공화당과 맞먹는 광폭성 때문에 압도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루즈벨트는 1940년 스미스법(Smith Act)에 사인했고, 케네디와 휴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는 자유주의자들이 반공주의를 채택하도록 하는 데 선봉에 섰다. 험프리는 1954년 공산주의자의 모든 법적 권리, 특권, 면책을 빼앗는 공산주의자 통제법(Communist Control Act)를 성공적으로 지지했다. 험프리는 또 1954년 ‘적색공포’를 진압하고자 헌신했던 자유주의자들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미국인’(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 ADA)의 주창자였는데, 이 법은 실제로 ‘적색공포’를 진압하는 데 헌신했다.

또한 트루먼의 반쏘 대외정책은 국내에서 마녀사냥으로 전환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1930년대의 노동자계급 급진화에 대항하여 자본가계급의 반동을 시작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23)이 발표된 그 달에, 트루먼은 충성법(Loyalty Act by Executive Order 9835)을 제정해서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조직들을 파괴ㆍ검거했다. 그 결과 1947-1956년 사이에 2,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으며, 12,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 1947년 태프트-하틀리법이 통과된 후에, 1957년까지 태프트-하틀리법은 미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태프트-하틀리법이 통과된 후, 파업참가자들이 급격하게 감소했고, 다시는 1945-1946년의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2) 매카시즘

 

매카시즘은, 미상원의원 죠셉 메카시가 1950년 2월 9일 공화당 여성들과의 간담회에서 연설 도중 청중들에게 종이조각을 흔들며 “내 손에는 공산당원으로 알려졌고, 아직도 국무부의 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공무원 205명의 리스트가 있다”며, 공산주의자들이 공장 현장에서부터 정부 각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침투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반공산주의 마녀사냥의 효시가 되었다. 스미스는 매카시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45-57년 사이 3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정치적 증언을 해야 했고, 1949-1959년 사이에 정부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배경을 알고 싶어 하는 자본가들에게 6만여 명의 정보를 넘겨주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공산당의 일원이었다는 것 때문에, 평화를 위해 서명했다는 이유로, 파시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람들과 친밀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고, 수천 달러의 벌금을 물었고, 감옥으로 보내졌고, 해고되었다(Smith, 2006).

 

3) 노동운동 내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

 

전쟁 이후 트루먼정부의 반(反)쏘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반공주의 마녀사냥은 노동조합 지도부들에 의해서도 자기 조직의 활동가들 중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과정으로 자행되었다. 노동계급 안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손상을 입힌 것은 노동조합 지도부 그들 자신들에 의해 행해졌던 마녀사냥이었다(Smith, 2006).

1946년 파업의 물결이 이는 동안 CIO의 지도자들은 이미 내부 공산주의자 숙청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것이 이후 5개년 동안 중대한 임무가 되었다. 1948년 공산당이 트루먼의 냉전정책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되고, 1948년 대통령선거에서도 트루먼을 지지하지 않고, 헨리 왈라스(Henry Wallace)를 지지하게 되자, 이것이 바로 CIO가 공산주의자들에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구실을 제공했다. CIO는 1949년 자체적으로 반공산주의자 규약을 통과시킨 후, 공산당원이 노동조합 사무실을 차지하지 못하게 막았다. CIO 대회에서 공산당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조합들인 미국전기노동조합(United Electrical Workers, UEW), 농업장비노동자노조(The Farm Equipment Workers, FEW) 등을 축출했다. 1950년에는 거의 마지막 축출이 이루어졌는데, 대회는 9개의 공산당이 이끄는 노동조합들을 축출하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전체 회원의 20%, 거의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축출당했다. 1954년까지 100개의 노동조합 중에서 59개의 노동조합이 규정을 바꾸어서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에 상근하지 못하게 했으며, 40개의 노동조합에서 공산주의자를 회원으로 받지 않았다(Smith, 2006).

공산당은 맥카시 숙청이 최고도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대응방법을 찾지 못했다. 1948년 당지도자들은 당원들이 스미스법에 의해 기소되어 CIO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에 직면해서도 정치적 방어를 조직하려고 하지 않았다. 반공주의가 1940년 초에 CIO 안에서 강화되었고, 계속해서 성장해갔다. 공산당은 공산주의자 색출정책에 맞서기를 거부했고, 그것이 더욱 뉴딜연합 안에서 분쟁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은 노동조합운동 내에 반공주의가 도전받지 않고 확고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결국, 1957년 공산당은 약 1만 명의 사기가 저하된 당원들만이 존재했다 (Smith 2006).

 

4) 매카시즘의 영향

 

메카시 반공산주의 마녀사냥은 1930년대 이래 노동자계급의 주체의식이 급속도로 성장하던 미국 노동계급운동 내에서 사회주의 전통을 삭제해버렸다. 1950년대에 미국 좌파는 모두가 다 파괴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메카시 마녀사냥이야말로 바로 왜 산업노동조합을 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사회주의자 운동이 50년 후 사회적으로 무시되는 상태로 남아 있었던 중요한 이유이다.

 

 

5. 결론

 

20세기 초에 사회적, 정치적 대격변에서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중요했던 시기는 제1차 대전에서부터 1930년대 대공황까지의 시기였다. 이들 시기는 세계의 노동자계급이, 단지 ‘빵과 버터’와 같은 노동조합이나 개량에 의존했던 시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넓은 사회적 전망을 포착했던 시기였다. 1930년대 노동자계급의 고양은 계급투쟁의 힘을 노동운동에 유리하게 이동시켰다. 미국에서는 특히 1936-37년 겨울의 몇 달 동안 전국을 휘몰아쳤던 플린트공장 점거농성의 승리는 공황기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공황기 미국 노동운동의 이러한 역사는 사회주의의 전통이 결코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계급투쟁을 부활시키는 것만이 21세기에 계급의 힘 관계를 이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다. 결국, 맑스가 “프로레탈리아는 계급으로, 그와 동시에 또한 정당으로 조직되어 가지만 이 조직은 노동자 사이의 경쟁에 의해서 끊임없이 거듭 무너져버린다. 그러나 이 조직은 한층 억세고 견고하고 유력한 것이 되어 반복하여 부활된다(맑스ㆍ엥겔스, 1848)”라고 말했듯이, 노동자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투쟁을 통하여 계급으로 조직되고, 노동자계급 정당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II. 세계적 대공황과 한국 노동자계급 투쟁의 역사

 

공황기의 한국 노동자 투쟁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국노동운동사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그 내용은 무엇일까? 역사를 통해서 무언가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투쟁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자본가계급과의 대립관계를 명백히 하며, 변혁운동의 주체로써 자리매김하는 데 어떤 투쟁이 얼마나 역할을 했으며, 그 투쟁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이었는가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선 한국의 노동운동사 속에서 노자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의 역사는 자본의 축적의 정도, 국가체제의 성격, 노동자계급 운동 자체의 고양 정도 등에 따라 대략 일제 하에서 1945년 해방까지의 시기, 해방 후 1945-1848년까지 이른바 ‘해방정국’의 시기, 이후 1960년 4월까지, 1960년 4월에서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까지의 시기, 이후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까지, 이후 1979년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 1980년부터 1987년 6월까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1997년 말 경제위기 이전까지, 그리고 1997년 말에서 현재까지의 시기 등으로 시대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1997-98년의 경제공황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시기가 당장의 실천과 관련해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애초부터 반(反)노동자계급조직으로서의 대한노총으로부터 시작되는 한국노총은 물론 논외로 하는 것이지만, 이 시기는 자주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폭발, 성장ㆍ발전하다가, 운동 내부에 일종의 노사협조주의로서의 소위 ‘사회적 합의주의’가 등장, 정착하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사를 보면, 그것은 우선 196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서서히 재생하기 시작한 운동은 1970년대 국가와 자본의 공업화,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더불어 ‘민주노조운동’으로 성장하고, 1980년대 중화학 고도 산업화와 파쇼적 억압 하에서 혁명성ㆍ전투성을 억눌린 형태로 키워왔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약화된 파시즘을 뚫고 그 해 7-9월에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대적으로 폭발ㆍ성장하여 전노협ㆍ민주노총 등을 차례로 결성하면서, 1997년 대공황이 엄습하기까지, 곡절과 진퇴를 거듭하면서 그 여세를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이후 이미 일각에서는 노사합의주의가 등장하여 자리 잡기 시작하다가 1997년 말-98년의 대공황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 이후 노사합의주의가 강화된 형태인 이른바 ‘사회적 합의주의’를 낳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결국 한국의 자주적 노동운동사는 1987년 대투쟁에서부터 1997년 공황까지의 시기를 말하자면 일종의 과도기, 혹은 전환기로 하면서 1987년 이전의 시기와 1997년 말 이후의 시기로 나뉜다고도 할 수 있다. 1987년까지는 때로는 완만한 그리고 때로는 급격한 주체역량의 재생ㆍ축적기였고, 그것이 87년의 대투쟁을 통해서 최고조에 달한 후 그 일종의 관성이 1997년까지, 서서히 약화되면서도, 기본적으로 유지되었고, 1997년 말-98년의 경제위기를 통해서 급격히 후퇴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87년 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노동자계급의 주체역량이 재생ㆍ축적돼온 것은 물론 한국 자본주의의 급격한 전개, 자본의 급격한 축적과, 그것을 뒷받침한 저임금ㆍ장시간 노동,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 등 가혹한 착취와 억압이 그 배경과 토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생략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의 과정, 특히 1997년 말 경제위기 이후 퇴조기를 이루는 과정인데, 여기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들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1) 재생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취약성 ― 애초 1950년대 전쟁과 그 이후의 파쇼적 억압을 통한 자주적 노동운동의 말살은 그 조직의 말살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등을 앞세운 테러적 억압에 의한 사상ㆍ이념까지의 말살이었다. 1980년대 이후 사상ㆍ이념적인 재건 작업이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단절이 너무나 크고 또 시간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미 전세계적으로 반공주의가 발호하는 조건 하에서였다. 게다가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불어 닥친 쏘련과 동유럽의 붕괴ㆍ해체는 엄청난 타격이었고,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혼란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그 때문에 80냔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서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에도 그것은 ‘전투적 조합주의’로는 나타났을망정 변혁 지향적인 운동으로는 나타나지 못했다.

2) 재생 자주적 노동운동 주체의 계층 구성상의 특징 ― 자주적 노동운동의 대중적 주체인 민주노총의 주요 조합원들은 대공장 노동자들인데, 이들은 1987년 대투쟁 이후의 성과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고임금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들의 일종의 ‘보수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이들의 현실안주는 오늘날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3) 상대적 민주화 ― 노태우 정권의 시기에 지배세력은 노동자ㆍ민중에 대한 착취강화, 억압을 집요하게 추구했지만, 아직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관성이 강해서 그들의 억압의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ㆍ민중은 기본적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전이 김영삼의 이른바 문민정부→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노무현의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상대적 민주화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 그런데 이 민주화는 위에서 언급한 요인들과 더불어 동시에 노동운동 내부에 현실안주, 기회주의를 배양하고 정착시키는 요인, 정치적ㆍ정서적 요인과 구실로도 작용했다. 특히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하에서는, 1930년대 루즈벨트 정권 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동조합 운동의 많은 상층 지도자들이, 어떤 이들은 드러내놓고, 어떤 이들은 위장된 형태로 부르주아 정권과 타협하고 그들을을 지지해가게 되었다. ‘노개위’니, 노사정위원회니 하는 것들이 그런 움직임을 추동하는 기구로 작용했다. 이 시기들에도 물론 수많은 대량해고가 자행되고, 대대적인 비정규직화가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감옥에 보내지고, 또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희생되어 갔지만, 전반적인 기조는 그러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리고 특히 1997년 말-98년이 심각한 경제위기 이후에는 노동운동 내에 애국주의도 강하게 나타나면서 그러한 경향을 강화했다.

그렇다면, 결국, 한국에서 노자관계에 국가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의문점들에 대해서 간단히 실타래를 풀어보고자 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역사에서 이후 변혁운동의 발전의 토대가 될 교훈을 찾고자 함이다.

 

 

1. 1997-2009년 시기에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의 전개

 

1) 1997년 이전의 노동자계급운동

 

(1) 1987년 대투쟁 이전

 

한국의 노동운동의 역사는 1920년대 일제시대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 1920년 세계공황의 시기와도 맞물리는 시기여서 한국의 노동운동의 역사가 세계노동운동의 진동의 파장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 있고 또 자본주의의 발전이 뒤떨어져 있어 그 운동의 파고가 서유럽이나 미국에 견줄 바는 못 되지만, 조선도 세계공황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0년대에 조선에서 시작된 노동운동은 1929년 세계공황기에 조선에서도 합법ㆍ비합법의 노동조합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1945년 해방 이후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설립과 투쟁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조선의 노동자들은 1924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을 설립, “노동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하며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할 것”이라며 노동운동이 노동해방을 위한 운동이어야 함을 천명하고 있었다(민주노총 2001). 조선노동총동맹은 가입단체 260여 개에 회원수 5,300여명에 이르는 전국조직이었다(안태정, 2002).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곧바로 중앙조직 간부들은 활동정지의 상태에 빠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50여 건의 소작쟁의, 노동쟁의에 적극 개입하고 해결하면서 노동자, 농민 속에 뿌리를 내리는 조직으로 성장해 갔다.

그 이후, 1929년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공황이 발생하자, 식민지인 조선에서도 조선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열악해졌고, 이에 조선 노동자들이 생사를 건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일제가 노동쟁의 자체를 불법화하고 합법적 노동조합마저 와해시켜 나갔는데,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비합법적 노조를 건설하여 더욱 전투적으로 투쟁을 수행해 나갔다. 바로 일제의 탄압에 맞서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비합법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적색노조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의 노동자들은 불과 80일만에 각지의 노동조합을 산별노조로 체계화하여 전국노동자조직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전평이었다24). 그러나 전평은 그 당시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운동형태였던 “공장자주관리운동”25)에 의해 아래로부터 솟구치고 있었던 노동자들의 운동과 전투적으로 결합하지 못했고, 오히려 “미군청정과 충돌하지 말고 협력관계를 유지한 후, 평화적 방식을 통해 민중적 권력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므로 미국과의 충돌을 되도록 피하라(안태정, 2002; 민주노총, 2001)”고 주장함으로써, 커다란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전평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 하에서 1946년 9월 13일 노동자동맹파업, 1947년 3월 총파업이 노동자 민중의 생활요구를 배경으로 조직되었고, 1948년 2ㆍ7총파업과 5ㆍ8총파업은 명백히 정치적 성격을 띠며 조직되었다. 2ㆍ7총파업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입국하려던 국제연합한국위원단에 반대하여 전평이 일으킨 파업이었고, 5ㆍ8총파업은 남한이 단독으로 선거를 치르려는 5ㆍ10총선거에 반대하여 일으킨 파업이었다.

이후 우익세력들은 미군정과 한민당을 지지하기 위해서 전평을 폭력으로 파괴하고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대한노총)을 결성한다.

해방 이후 전평이 와해되고, 6ㆍ25라는 전쟁과의 그 여파 속에서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던 노동자계급은 4월 혁명을 계기로 하여 가열찬 투쟁의 불길을 당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부활하던 노동자투쟁은 1961년 5ㆍ16 군사구테타에 의해 완전히 부정된 채, 반동의 다시 시기를 맞게 되었다.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으로 분열됐던 노총단체가 통합하여 1960년대에 한국노총을 결성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노동단체마저 5ㆍ16 군사쿠테타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고 다시금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충실히 복무하는 하수인,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재편되었다. 군사쿠테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노동운동이 금지되다시피 하고, 한국노총은 군사독재 정권과 함께 자주적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어용기구에 불과했다.

이 시기에 노동운동 단절의 가장 큰 이유는 이승만ㆍ박정희 독재체제와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은 한국의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아직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그 탄압은 전세계적으로 세계공황과 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의 매카시즘과 더불어 반공주의의 물결이 노동운동을 가로막았던 시기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이 계속 증가하였다. 특히 1979년 YH무역노조 투쟁은 그해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부마항쟁을 일으키는 한 촉매가 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독재정권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1980년 초까지는 노조민주화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후 전두환 일당의 5ㆍ17쿠테타 이후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그 해 4월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대파업은 부마항쟁, 광주민중항쟁과 더불어 1980년의 최대의 민중투쟁이자 노동자투쟁이었다.

1980에서 83년까지는 노동운동이 침체기를 겪게 되나, 이후 1983년 하반기에 전두환이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약간의 유화정책을 실시하면서 정치적 탄압이 다소 느슨해지자 노동운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노동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킨 것이 ‘한국노동자복지회(한국노협)’의 창설이었다. 그 이후 1984년 여름 대구ㆍ부산지역 택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1984년 대우자동차투쟁, 1985년 구로지역 노동자 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2) 민주노조운동의 양적성장기: 1987-1997년

 

1986ㆍ87년 민주화운동, 특히 87년 6월 항쟁의 ‘승리’에 힘입어 1987년 7-9월에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하여 민주노동조합 결성이 물밀 듯이 증가하게 되고, 노동자 투쟁은 이후 1997년 경제위기의 직전까지 진퇴를 거듭하면서 증가하게 된다. 이 시기는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의 양적 팽창기였다.

1997년 말 경제공황 이전까지의 투쟁을 요약해보면,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는 반공주의와 군부독재 하에서 노동운동의 맥이 끊기다시피 했으나, 1970년대에 이르러 전태일 열사를 시작으로 한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조직화와 고양되던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양적으로 팽창시켜, 1990년대 초 전노협을 결성하기에 이르고, 민주노조운동을 복원시키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임금인상 투쟁, 노동법 개정 투쟁이 주였지만, 한국노총의 어용ㆍ노사협조주의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적으로 자각하여 ‘노동해방’의 기치 하에 변혁운동을 민주노조운동에 결합하려 했다는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적이고 노동자 당파성에 입각한 노동운동이었다. 비록 투쟁의 주제들이 임금인상 등 경제적 요구와 ‘사회개혁’ 투쟁 등 개량화된 제도개선 투쟁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투쟁의 양상은 전투적인 형태로 진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2) 1997년 말 경제공황 이후 노동자계급운동의 전개

 

(1) ‘노사정’ 계급타협주의: 조합 상층부의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과
    노동자계급운동의 추락
 

1997년 말 경제공황을 기점으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그 상층지도부가 ‘사회적 합의주의’ 노선으로 가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추락의 과정이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1997년 말 경제위기 이래 한국의 노동운동사 속에서 노사합의주의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96년 4월 24이 김영삼정부는 신노사관계구상을 발표하면서 협력적 노사관계와 고용의 유연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 기구로서의 신노사관계개혁위원회 설치를 민주노총에 제안했고, 물정 모르던 민주노총도 여기에 참여했으나, 김영삼 정부의 의도가 정리해고, 변형근로, 파견근로제 등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뿌리째 흔드는 노동법 개악임이 드러나자, 96년 10월 노개위에 불참을 선언하고,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의 국회 날치기 통과를 계기로 12월에는 총파업에 돌입하나, 결국에는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민주노총, 2001). 계급적 관점을 견지한 민주노총의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997년 말 경제공황을 계기로 김대중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신자유주의 정책과 노사합의주의를 안착화시켰고,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개량주의의 혼돈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1998년 3월부터 1998년 7월까지 수차례에 걸친 총파업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 반대 의지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와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 확대를 맞바꾸는 방식으로 노사정 합의를 하였다. 그런데 합의 이후, 정리해고제는 확대해석되어 현장에서 무자비하게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무기가 된 반면에, 노조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안은 전교조 합법화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아 결국 노사정위원회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을 관철하는 도구임이 증명되었다(민주노총, 2001).

2003년 집권한 노무현 정권은 ‘새로운 노사혁력체계 구축’을 12개 국정과제로 구체화하였고, 과제실현을 위해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내세웠다(선지현, 2003; 김태연, 2003). 그 본질이 무엇인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란 신자유주의적 노사관계로서, 노무현 정부가 핵심과제로 삼고 있는 “기업인들이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만들고, 이를 위해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본질은 9월 발표된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노동법 일부를 개선하겠다는 초기의 언질조차도 오히려 그 개악을 위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하는 방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선진화 방안’이었다. 또한 노무현 정권은 2005년 “로드맵의 본질과 노동운동의 대응방향”를 제시하면서 집권 이래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던 사회적 합의주의 공세를 2005년에는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로 바뀌어져 표현하면서 노동조합의 참여를 제안했다(선지현, 2005).

결국 1997년 말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국가ㆍ정부의 노사협조주의의 노선은 “정부와 자본의 입장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관계를 제도화시키는 과정에서 김영삼 정부는 태동기로서, 김대중 정부는 과도기로서 의미를 갖는다면, 노무현 정부 시기는 그것을 마무리 하려는 단계”로 발전해 나간 것이다(최경희, 2005).

그러나 민주노총의 노사협조주의 노선은 단지 정부와의 노동정책의 합의 측면에서만 있어온 것이 아니었다. 민주노총의 노사협조주의 노선은 지도부의 부패와 비리로까지 이어지며, 이는 단위 사업장 민주노조지도부의 비리와 부패로까지 이어 진다(박종성, 2005).

 

(2) 1997년 말 경제공황 이후의 사례들

 

1997년 말 경제공황 이후 한국정부와 민주노총의 노사협조관계는 노동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노협 시기엔 ‘전투적 민주노동조합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후에 민주노총이 들어선 이후의 투쟁양상은 ‘노사합의로 귀결되는 투쟁’이 주된 흐름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1997년 말 경제공황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의 투쟁사례들을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민주노총과 단위 노동조합의 타협으로 종결된 계급타협의 사례들과, 둘째, 타협적인 투쟁을 배제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하고, 단결력이 높아지고, 투쟁의 의지가 고양된 투쟁사례가 그것이다.

 

① 민주노총과 단위 노동조합의 타협으로 종결된 계급타협의 사례들

   ―민주노총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 1998년 이후 김대중 정부 시기의 민주노총 총파업

1997년 말 경제공황 이후, 민주노총과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 집행부는 한편으로 아래로부터 끌어올라오는 투쟁의 열기를 총파업으로 수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부와 자본과의 상층교섭을 통해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민주노총, 2001). 이 시기에 노동자ㆍ민중의 투쟁이 심각하게 노사협조주의에 물들기 시작한 것은 1998년 2월에 시작된 노동법 개정 투쟁시기였다. 노사합의주의가 관철된 대표적인 사례는 1998년 2월 노사정위에서 민주노총이 교원노조의 합법화 및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 등을 약속받는 대신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등의 법제화에 찬성한 것이다(김세균, 2002).

2000년 들어 김대중 정부는 또 다시 신자유주의 제2차 구조조정을 강력히 추진해나갔다. 노동조합은 5월 총파업을 전개했는데26), 노동조합은 총파업의 열기를 끝까지 반정부 투쟁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스스로 총파업을 정리하고 말았다. 이것은 개별 사업장의 파업투쟁에도 영향을 미쳐, 개별사업장들의 파업에 정부가 대규모 공권력을 투입,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무자비한 진압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98년 7월 20일부터 8월 24일까지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현대자동차의 1998년 7ㆍ8월 투쟁을 보자. 그 당시 현대자동차 생존권사수투쟁 평가서에는 “현대자동차의 생존권사수투쟁은 처음부터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다”고 평가하고 있다.(현대자동차, 1998) 이 투쟁은 1998년 2월 15일 임시국회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입법화되고 나서 처음으로 대기업에 적용시키는 것이어서, 언론에도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투쟁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98년 6월 29일 현대자동차 사측은 노동부에 5,830명의 정리해고신고서를 제출했으며, 임금을 22% 삭감하지 않으면 6,842명을 추가로 정리해고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6월 30일 오후 3시부터 7월 1일까지 26시간 1차 경고파업을 했다. 이후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7월 20일부터 8월 24일까지 총파업에 돌입하게 된다(현대자동차, 1998).

사측은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임시휴업에 들어간다고 발표했고, 23일부터 27일까지 5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희망자는 2천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 투쟁과정에서 노동조합 집행부(김광식 위원장)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현장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채, 여러 번 사측에 양보안을 제시하였고, 마침내 8월 24일 새벽 2시 경에 노동조합위원장이 단독으로 회사측과 잠정합의를 해버렸다27).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집행부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새벽 2시경 TV를 통해서였다. 조합원들은 김광식 노조위원장이 현장 노동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회사측과 타협을 해버린 것에 대해 강력히 노동조합 집행부를 비판하였다. 9월 1일 현대자동차 노조는 8월 24일 김광식 위원장에 의해 일방적으로 회사측과 타협한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한 결과, 63.58% 반대로 부결되었다. 현장노동자들의 투쟁력과 자각이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적 집행부보다 앞선 것이었다.

“투쟁의 주체인 현장 노동자들이 이끌어온 36일 간의 투쟁은 지도부의 양보와 배신으로 이렇게 끝이 났다.” 결국, 김광식 노조위원장은 ‘정리해고 반대를 둘러싼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투쟁’에서 자본에게 투항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투쟁의지를 외면하고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였다. 그럼으로써 자본가들에게 이후의 사업장들에서 ‘정리해고’의 명분을 부여하게 되었다. 더욱이, 227명의 정리해고자 명단 속에는 식당 여성노동자 176명이 포함되어 있어, 결국 김광식 노조위원장은 식당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비정규직화 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28).

현대자동차의 36일 간의 전면총파업 투쟁의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36일 간의 총파업의 의의는 공장 내 파업을 통하여 현장 노동자들의 단결력이 고양된 점이다. 민주노총과 현대노조 집행부의 노사협조주의와 대타협에도 불구하고, 굳건했던 현장노동자들의 투쟁 대오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7월 20일 파업투쟁의 깃발이 올려졌을 때, 3천여 명의 대오가 텐트농성을 시작했고, 1만 명이 넘는 저녁집회 대오를 형성하면서 전면 총파업을 경험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노동운동사에 획을 그을 만한 일이었다. 또한 총파업을 사수하려는 300여 명의 ‘녹색사수대’, 식당 ‘아지매부대’ ‘가족대책위’ 등은 36일 동안 파업의 선봉이었고 주역이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36일 간의 전면총파업은 공황시기에 총자본의 공세에 맞서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키고 단결력을 보여줌으로써, 총자본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었던 노동자들의 위대한 투쟁이었다. 현자노동자들의 투쟁은 공황시기에 노동자투쟁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36일 간의 전면총파업의 한계는 무엇인가? 어느 현대자동차 노동활동가의 평가를 보자.

투쟁의 가장 큰 한계는 민주노총과 현자노조지도부의 배신이었다. 현대자동차 현장노동자들의 36일간의 역사적인 전면총파업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참여와 노동조합의 양보교섭은 노동자들의 끓어오르는 힘을 사그러뜨린 자본가와의 “역사적 대타협”이었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역사적 배신’이었다(현대차 활동가, 1998).

전면적인 계급투쟁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계급타협적인 노사협조주의로 갈 것인가?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노사정위원회와 양보교섭문제가 있었다.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와 현자노조의 양보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36일 동안의 현자 파업은 출발부터 이미 조합원에 대한 배반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현자 노조의 배반은 현장 활동가들의 피를 토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층 지도부가 정부와 총자본의 경제위기 타개를 위한 노사정위 참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8월 24일의 극적인 협상으로 투쟁하는 조합원과 활동가를 배신하면서까지 집행부가 ‘정리해고’에 도장을 찍어준 것은 민주노총 등 공식 노조운동지도부가 기존 민주노조운동의 모든 성과와 전통을 내팽개치고 노사협조주의로 돌아섰음을 확인시켜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현대차 활동가, 1998).

파업시기에 노동자 대투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현대자동차 노동자 투쟁의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한 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파업지도부를 확대 개편하는 일이다. 정리해고 철회투쟁을 이끌기 위한 투쟁 지도부는 일상적인 교섭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리해고 철회에 사활을 걸고 투쟁할 동지들로 구성되는 것이 올바르다. 둘째, 내부 동력을 극대화할 파업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이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셋째, 연대투쟁을 적극 이끌어내는 것이다(현대차 활동가, 1998).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교훈은 무엇인가? 현대자동차의 한 현장 활동가는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교훈으로 첫째, 노조의 양보교섭 시도를 처음부터 저지할 것, 둘째, 노조의 관료주의에 맞서 대중의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할 것, 셋째, 현장권력 쟁취와 계급적 연대의 깃발을 높이 들 것을 제안하고 있다.(현대차 활동가, 1998).

 

㉢ 1997. 7. 15.-10. 22. 기아자동차 노동자 투쟁

1997년 7월 15일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되자, 기아자본과 노동자는 조사협약을 통하여 ‘기아살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29). 이때 노동조합은 삼성 독점자본 대 기아자본ㆍ기아노동자라는 대결구도를 만듦으로써, 삼성 독점자본에 맞서서 기아자본과 함께 ‘기아살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기아사태의 현상과 본질을 보면, 현상적으로 “기아사태의 배후에는 독점자본 간의 항쟁과 암투 그리고 음모,” 삼성 독점자본이 기아그룹을 흔들고 목을 조이는 것이 있었지만, 기아사태의 본질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과 과잉생산”에 있었다(채만수, 1997). 즉, 기아사태는 자본주의의 생산의 무정부성에 있었던 것이고, 이 모순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부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었다(채만수, 1997).

노동조합은 ‘기아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기금사업을 전개하여 노조복지기금 19억 원을 회사에게 조건 없이 ‘대여’하였으며, 1천억 원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8월 9일 현재 600억 원을 모았다30). 또한 상여금과 하기휴가비 및 상반기 월차수당을 반납했으며, 1997년도 임금인상을 동결하고 복지부문 및 단협 비용부담 항목을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유보한다고 결의하였다(강연자, 1997). 민주노총31)은 1997년 7월 23일 ‘기아 정상화와 국민기업화를 위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부 지원을 촉구하고, 특정 재벌의 기아인수 반대와 기아노동조합의 ‘기아살리기’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기아노동조합의 ‘기아살리기’ 운동은 부도유예협약 체결이 된 지 한 달만에 계열사를 포함, 3,164명(기아차 1197명)이 실질적으로 해고되는 결과를 낳았다32). 기아자본과 정부는 10월 22일 기아차 법정관리를 선언하게 되고, 기아노동자들과 범대위는 파업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1998년 4월 14일 정부와 기아자동차 자본은 법정관리를 개시하고, 법정관리인으로 류종렬을 선임한 후, 바로 제3자 매각결정을 발표를 하게 된다. 이렇듯 법정관리, 소위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의 관리는 바로 자본주의적 국유화에 불과한 것이며, 기업을 또 다른 자본가에게 넘기기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결국 법정관리인은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해 강제휴업 조치 등으로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휴업을 단행하였고, 이에 분노한 기아차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 등 노사화합구도 속에서 단사 차원의 옥쇄파업까지 감행하였다. 그러나 끝내 자본의 노사화합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지 못한 채, 1998넌 6월 18일 노사정 교섭이 자본가의 힘에 밀려서 타결되었다. 이후 채권단과 법정관리인은 기아를 공개입찰로 1998년 8월 현대자본에게 넘기게 된다.

결국, 기아노동자들은 “법정관리” 시기까지 자본가와 동반자로써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려 했으나, 채권단과 법정관리인이 제3자 매각을 결정하자, 뒤늦게 파업투쟁을 했던 것이다.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의 한계와 교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 노동자의 ‘회사살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회사살리기를 통하여 노사화합을 시도했으나 결국, 정부와 자본가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특히, 공황 시기에는 살아남기 위해 위선에 찬 모습을 하면서 내미는 자본가의 손을 절대 잡아서는 안 된다. 그동안 그들이 얼마나 착취하고 배신해왔던가?

둘째, 기아자동차는 ‘법정관리’ 이후에 제3자 매각에 의해서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는데, 법정관리, 또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유화’는 정부와 자본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언제나 뽑아들 수 있는 그들의 카드라는 것이다. 여기에 현혹되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경제위기 때마다,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공장마다 정부와 자본가는 ‘법정관리’ 또는 ‘국유화’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거덜난 자본을 추스려 또 다른 자본가에게 넘기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 차라리 자본가의 처분을 기다리지 말고,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공장을 접수한다고 이야기하자.

셋째,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투쟁의 의지를 고취시켜야 한다. 우리는 1998년 공황 시기에 투쟁했던 경험이 있다. 이제 다시 시작된 공황의 시기에 정부와 자본이 취할 경로를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굽히지 않는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기아도 몇 달 더 투쟁을 지속했었더라면 곧 이어서 불붙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도 가능했었을 것이다. 기아자동차 투쟁의 교훈 속에 현 시기 자동차 노동자들의 갈 길이 있다.

 

㉣ 그 외의 사업장들

1998년은 이후에도 구조조정과 대량해고에 맞서 노동자들의 결연한 투쟁이 있었지만, 민주노총지도부와 일부 대기업 노동조합의 합의와 타협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 1998년 이후에도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투쟁이 노동조합 집행부의 타협과 합의로 인해 얼룩진 노동운동의 역사를 일부나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노동조합의 굴욕적인 합의들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조합의 파업까지 유도하여 노동조합 탄압의 도구로 사용했다. 1998년 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정부가 노동조합에게 파업을 하도록 공작한 후,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경진압함으로써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여타 노동조합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쐐기를 박으려 한 것이었다. “조폐공사사건은 그동안 노동자의 투쟁이 일어나면 그 책임을 온통 노동자들에게 전가해 왔던 정권과 자본의 입장이 새빨간 거짓이었음과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가 노사관계의 배후에서 노사관계전환을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었다(민주노총, 2001).”

1999년 4월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은 지하철공사측의 구조조정 계획에 저항하며 교섭에 나선 서울시측과 협상을 파기하고 19일 총파업에 들어가 지하철노조로는 최초로 1주일이 넘는 파업을 전개했으나, 그 이후 정부와 노동조합은 공사의 강경일변도와 시민의 안전을 고려하다는 이유로 “선복귀 후협상”이라는 서울시의 입장을 수용하여 파업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복귀 후 정상적인 단체교섭은 이루지지 않았다. 1999년 개혁방송법 쟁취를 위한 방송노조연합의 파업투쟁에서도 방송노조연합은 7월 13일 방송법 개악저지를 위한 총파업에 들어갔으나, 결국 정부여당의 협상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28일 오전 6시부터 파업돌입을 중단한다. 이후, 일부 노동조합의 의견은 받아들여졌으나, 궁극적으로 노동조합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은 미결과제로 남았다. 대우조선노동조합도 대우조선의 매각 발표에 반발하여 4월 20일 파업에 돌입했으나, 4월 28일 노사 간에 합의하고 파업을 중지하게 된다. 한편, 2002년 4월 발전노조 파업에 연대하는 총파업투쟁을 별다른 명분 없이 유보시킨 것도 한 예이다(김세균, 2002).

 

②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승리한 사례들

   ―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하고, 단결력이 높아지고, 투쟁의 의지가 고양된 비타협적인 투쟁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사협조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하여 종국에 가서는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하고, 단결력이 높아지고, 투쟁의 의지가 고양된 비타협적인 투쟁의 사례들이 있다.

 

㉠ 대우자동차 공장

대우그룹의 해체 이후, 1999년 8월 26일 인천 대우자동차공장은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정부와 채권단은 포드로 매각을 추진하였다. 노조는 한시적 공기업화를 통해 정상화 후 장기적 발전전망 속에서 대우차처리를 요구하자 포드는 입찰을 포기하였다. 그 후 김대중 정부의 진념 노동부 장관 등은 노조에 부도협박을 하며 구조조정 동의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였고, 노동조합은 결국 2000년 11월 27일 회사와 ‘공장정상화를 위한 노사협의서’를 합의하였다. 사측은 2001년 1월 16일 2,794명에 대한 정리해고 계획서를 노동부에 제출하였고, 2001년 2월 16일 1,754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하였다. 이에 노동조합은 무기한 파업을 선언하며 공장을 거점으로 조합원을 집결시키는 활동에 주력하였고, 사측은 경찰을 불러 공장을 봉쇄하고 출입문을 차단하였다.

노동조합의 투쟁의 수위가 높아지자, 경찰은 2001년 2월 19일 경찰병력 35개 중대 4,200명, 지게차, 포크레인을 동원한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을 펼쳤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회사 밖으로 밀려나와 산곡성당에 대우자동차 공투본  상황실을 설치한 후, 1년 동안 가열찬 투쟁을 진행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4월 10일 경찰 폭력만행을 저지르며, 노조 죽이기를 계속하였고, 노동조합은 김대중 정권 퇴진운동으로 전선을 확대하여 밀고 나가려고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5월 30일 GM이 대우차 인수제안서를 제출하게 되고, 노동조합은 지엠 매각 반대 결사대를 미국에 파견하면서 투쟁을 했다. 그러나 공장 내의 자본의 사주를 받은 세력들이 금속연맹에 항의하는 등 매각을 반대하지 말라며 재차 노조와 상급단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내에서 범추위라는 임의기구를 내세워 집행부를 압박하던 이들은 급기야 노조를 무시한 태도를 보이고 공공연히 무분규 노사화합을 선언하는가 하면 구속되어 있는 집행부의 현 위원장을 대신해 직무대행체계를 요구하였다. 결국 노동조합은 전략적 후퇴를 결정하며 직무대행을 위촉하고 산곡동 지도부는 자진출두하여 직무대행체계로의 전환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해고자들에게 공장 내에서의 투쟁을 강화할 것을 주문하였다. 결국, 9월 21일 대우차는 분리매각되고, 단협 등의 양보를 골자로 한 양보교섭의 합의 도출 후 해고자 복직을 위한 800일이 넘는 길고 긴 협상과 투쟁 끝에 7월 27일 300명의 복직합의로 정리해고자 복직의 물꼬를 튼 채 정리해고 분쇄투쟁은 1차 마무리 되었다(정종남, 백일, 허영구, 박윤천, 김창곤, 2009).

대우자동차노조 17대 김창곤 쟁의부장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1년간에 걸친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은 ‘숱한 노동조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를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어도, 이 투쟁의 시기 동안 공투본 결성과 연대투쟁의 위력을 나름대로 떨치며 정리해고의 후유증이 무엇인지 자본과 정권에게 똑바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종남, 백일, 허영구, 박윤천, 김창곤, 2009).

대우자동차 투쟁의 가장 큰 한계로, 김창곤은 대우그룹해체 후, 노동조합이 정부와 채권단의 협박에 휘둘려서 노사합의를 위해 낭비했던 시간 때문에 1,754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을 때, 노동조합의 지도부가 즉각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고, 투쟁의 시기를 놓쳐버린 점을 지적하였다. 즉 초반에 노사협의에 너무 집중하다가 투쟁의 시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조합집행부는 노사합의를 했더라도 싸움을 피할 수는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그 시기가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하고, 투쟁의 열기를 끌어올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었다는 것이다(정종남, 백일, 허영구, 박윤천, 김창곤, 2009).

 

㉡ 그 외 단위 사업장들

1999년 축협 등 3사 노조 (축협중앙회노조, 전국축협노조, 전국농협노조) 투쟁33), 롯데호텔 노조 및 스위스 그랜드호텔 노조 투쟁34), 사회보험노조 투쟁35), 한국통신노동자 투쟁36),  2002년에 보건의료 노조 투쟁 37) 등이 경제공황 이후,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끝까지 투쟁했던 사업장들이다. 2009년 6월 현재,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공황 시기에 자본가계급과 정부의 구조조정에 맞서 30일이 넘는 공장점거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해오고 있다(손미아, 2009).

 

㉢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정규직 노조의 노사협조주의

2000년 이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의 투쟁은 승리의 사례보다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싸운 사례들이 존재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부 다 비타협적이었다. 타협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대기업 노동자들의 경우, 타협으로 얻을 것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98년 경제공황 이후 ‘근로자 파견법’의 도입으로 인하여 비정규직이 대량 양산되었고, 자본은, 경제공황기에 자본의 위기를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모두 전가시켰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노동강도 강화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고, 2000년에 접어들어서는 그 완강함과 전투성에서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의 선봉에 서는 투쟁으로 되었다. 비정규직의 투쟁은 자본가계급이 ‘근로자파견법’에 따라 2년 비정규직을 고용 후, 계약해지를 통한 부당해고 처리에 대한 저항이었다38).

2000년에 이어 2001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운동의 핵심에 서고 있다. 이 시기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근로기준법, 노동3권 등 노동기본권 쟁취투쟁이 핵심적인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었는데, 그 이유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로자 파견법’에 의해 고용의 불안정성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이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마치 1970년대 초, ‘근로기준법을 보장하라’하며 산화해갔던 전태일 열사의 시기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자본과 정부는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약 30년 동안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획득한 노동기본권을 ‘경제위기 극복’의 논리로써 하루아침에 말살시켰다. 2001년에 있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사례들.39)

한편, 2003년 이후에는 1998년 노동법 개악 이후, 급격하게 증가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열악한 고용조건과 노동조건으로 생존위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노무현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인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울분을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열사정국이 전개되었다40).

그런데, 노사협조주의, 관료주의는 민주노총 상층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노사협조주의, 관료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들은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외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사협조주의, 관료주의인 것이다. 한 예로, 기아 화성공장의 비정규직 지회가 파업하고 있는 현장에서 대체인력이 투입되었을 때, 정규직 노동조합이 이를 저지하지 않고 버티다가, 활동가들의 압력에 못 이겨 대체인력을 저지하는 것, 2004년 현대자동차에서도 3공장에서 관리자들과 경비에 의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었을 때, 정규직 노조가 팔짱만 낀 채 방관하고 있었던 것 등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이다. 특히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는 민주노총 상층부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대공장 단사에서 노사협조주의· 투쟁회피주의· 투쟁을 관료적으로 통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5년 이후 2009년 지금까지도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양상을 보면, 단 며칠 내지 몇 주일 파업으로 회사측의 타협안에 동의하고 파업타결을 알리는 사업장들은 대부분 정규직 사업장들인 반면, 비정규직 사업장들은 해고와 법에 고발조치까지 당하면서 비타협적으로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거나 전재했던 사업장들은 비정규직 사업장들이다. 예를 들면, 하이닉스, 하이텍, 이랜드ㆍ홈에버 비정규직투쟁, 자동차 공장 비정규직 투쟁 등과 같은 사업장들이 있다.

결론적으로, 1998년 경제공황 이후, 소규모이지만 쓰러질 때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리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사협조주의가 만연한 노동운동의 풍토를 갈아치울 새로운 계급투쟁의 혼을 불어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경제 공황 이후 국가에 의한 노사합의주의의 만개

 

1) 민주노동운동 내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의 도입과정

 

한국에서 민주노동운동 내에 사회적 합의주의가 스며들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1997년 이전과 이후의 투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1997년 이전과 이후의 투쟁은 어떤 측면에서 바뀌었고, 어떤 측면에서 바뀌지 않았는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 내의 사회적 합의주의, 즉 계급타협적인 노선은 사실은 1995년 전노협 이후, 민주노총이 들어설 때 제1기부터 이미 내재해 있었다. 김세균은 “민주노총 제1기 지도부의 운동노선은 집단적 노사관계의 민주화 내지 민주노조운동의 합법화를 보장한다면 체제내적 개혁을 추구할 것임을 공식화하고 정책결정과정에의 참여의 길을 열어 놓은 계급타협주의적 노선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라고 말한다(김세균, 2002).

이러한 민주노총의 태생적인 계급타협주의 노선은 이후에 여러 가지 내외적인 요인들, 즉 민주노총 상층부의 관료주의적 태도, 대기업 및 정규직 노동조합의 이익 집단화 경향, 의회주의적 정치노선의 지지 등으로 인하여 더욱 강고하게 노사협조주의를 굳히게 된다(김세균, 2002). 물론 이러한 원인들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1997년 말 발발한 경제공황일 것이다. 공황기에 자본가계급이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는 과정에서 행한 경제적ㆍ경제외적인 협박과 회유가 민주노총 지도부로 하여금 노사협조관계를 공고하게 만드는 촉매 또는 매개요인으로써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미국 노동자들의 거센 파업물결을 보면, 이러한 경제적인 요인은 근본적인 요인은 아니고, 민주노총의 태생적인 계급타협주의 노선이 정부의 노사합의주의와 만나서 사회적 합의주의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매개요인 또는 상호작용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가 이 점을 가장 교묘하게 활용했다.

이러한 계급타협주의 노선은 종국적으로, 총파업투쟁의 목표와 위상을 바꾸었다. 1997년 이전에는 파업의 가시적 성과보다는 파업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고취가 주요 목표이고 위상이었다면, 1997년 이후에는 파업의 가시적 성과나 당장의 성과에 더 집중하게 됨으로써 가시적 성과를 위한 노사 간의 타협이나 협조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민주노총 상층지도부의 계급타협주의, 노사협조주의 노선이 현장의 단위 작업장에서의 파업투쟁을 노사 간의 타협이나 협조로 대치시켜 버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에서 노동운동에서 계급투쟁의 정신이 사라진 것은 민주노총에 그 기원이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2) 노동운동이 사회적 합의주의로 점철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면 왜 1987년 이후 10년 간의 ‘민주노조운동의 양적성장’ 시기가 1997년 말 경제공황 이후에는 질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는가?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들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또는 왜 민주노총 상층부가 사회적 합의주의를 내세운 노사협조주의로 가는 것이 가능했고 유지가 가능했는가? 노사협조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토대가 무엇일까? 그들이 사회적 합의주의를 내세워도 그것이 제거되지 않고 왜 묵인이 되고 있는가? 사회적 합의주의가 들끓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세력화의 부재, 당의 부재이고, 그것이 묵인되는 이유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우위에 따른 민족주의 노선에의 편승일 것이다.

 

(1)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부재, 당의 부재

 

한국의 노동운동이 사회적 합의주의로 고착화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적 정치세력화의 부재 또는 노동자계급정당의 부재이다(채만수, 2003; 박영균, 2002; 김세균, 2002). 박영균은 노동운동 내의 노사합의주의는 단지 일부 지도부의 문제도 아니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박영균, 2002).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현장활동가들이나 기타 민주노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노사정위원회와 결렬하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결의해야 한다고 하지만, 왜 이것이 안 되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2) 변혁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측면
    ― 반제민족주의에 편승하는 국가주의 노선

 

채만수는 많은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상층부의 ‘사회적 합의주의’가 다수의 ‘대중적인 힘’을 얻고 있는 주요한 이유가 그들이 바로 노동자ㆍ대중의 반미ㆍ반제ㆍ민족의식에 편승하여 애국주의ㆍ국가주의를 내세우면서 노동자 대중을 오도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채만수, 2005).

채만수는 이어 이러한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해결 방법은 “반제ㆍ반미ㆍ민족의식을 가진 노동자 대중을 저들 민족주의자들ㆍ국가주의자들에게 내맡길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노선으로 조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채만수, 2005)

 

이 분열과 대립은 지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반제ㆍ반미ㆍ민족의식을 가진 노동자 대중을 저들 민족주의자들ㆍ국가주의자들에게 내맡길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노선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노동자계급노선을 주장하는 활동가와 단체들이 노동자 대중 속에 존재하고 있고, 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반제ㆍ반미ㆍ민족의식을 계급노선에 기초하여 정화시키고 계급노선 속에 통일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곧 민족문제ㆍ민족모순과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는 한, 그들 노동자 대중을 획득할 수 없고, 따라서 ‘다수의 대중적 힘’에 의해서 그 노선이 뒷받침될 수 없다는 점이다(채만수, 2005).

 

 

III. 경제공황시기에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1. 공황이 노동자계급에게 주는 의미

 

새로운 세계 대공황에 직면한 이 시기에 대공황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조건은 어떠한가?

공황으로 인한 총자본의 공세는 산발적이고 부분적인 요구들이 전계급적 요구로 일반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왜냐하면, 공황은 분명 자본의 위기이며, 그들 존재의 본질적 약점인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황기는 혁명의 시기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자의 절대수를 감소시키는 생산력의 발달―즉 국민 전체가 보다 짧은 시간에 총생산을 달성할 수 있게끔 하는 생산력의 발달―은 이 생산양식 아래에서는 혁명을 유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산력의 발달은 인구의 다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인 한계를 보게 되며,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은 결코 생산력의 발달이나 부의 생산을 위한 절대적인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점에 달하면 이 발전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충돌의 하나의 측면은 주기적 공황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 그 이유는 노동인구의 이러저러한 부분이 자기의 종래의 직업에서 불필요하게 될 때 공황은 발생하는 법이기 때문이다(맑스, 1894).

 

자본축적의 증대는 집적의 증대를 포함한다. 이리하여 자본의 힘이 증대한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 생산자들에 대하여 사회적 생산조건들―자본가로 인격화되어 있다―이 점점 자립화되어 대립한다. 자본은 점점 더 사회적인 힘―이 힘의 행사자가 자본가이다―으로서 나타나는데, 이 사회적인 힘은 어느 특정의 개인의 노동이 창조할 수 있는 것과는 이미 어떠한 관련도 없다. 그러나 자본은 소외된 독립적인 사회적 힘으로 나타나며, 이 사회적 힘은 물로서 그리고 이 물을 통해 자본가가 행사하는 힘으로서 사회에 대립한다. 자본이 일반적 사회적 힘으로 발달되어 가는 것과, 이러한 사회적 생산조건들을 지배하는 개별 자본가들의 사적인 힘이 증대하여 가는 것 사이의 모순은 점점 더 첨예화되어 가는데, 그 반면에 이러한 첨예화는 이 모순의 해소를 또한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첨예화는 동시에 생산조건들을 일반적, 공동적, 사회적 조건들로 전환시키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생산력의 발달에 의하여, 그리고 이러한 발달이 달성되는 방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맑스, 1894).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공황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혁명은 또한 공황이 확실한 것처럼 확실하다.41)

 

맑스의 언급에서 보듯이 세계공황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조건은 혁명의 시기이다.

그러면, 이러한 혁명의 시기를 자본가계급은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잉여가치, 이윤이 창출되지 않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즉 자본주의 공황의 시기에 과잉생산, 이윤율의 저하, 투하한 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감소 등을 해소하기 위한 자본의 방식은 파괴이다. 그 주요한 파괴, 그리고 가장 급격한 성질의 파괴는 가치의 속성을 지닌 자본에서, 그리고 가본가치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파괴의 형태는 자본의 갑작스러운 강력한 가치감소, 재생산과정의 현실적 정체와 교란, 재생산의 현실적 축소이며, 노동자계급에게는 노동자계급의 해고, 임금인하 등을 통항 노동자 해고와 인위적 과잉인구의 창출이다. 인격화된 자본인 자본가는 “추가자본의 전부 또는 일부의 가치액만큼의 자본이 유휴화하든지, 심지어는 부분적으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공황을 해소해야 한다(맑스, 1894). 이리하여 어떤 자본은 파괴되며, 또 다른 자본은 오직 상대적인 손실 또는 일시적인 가치감소만을 겪는다. 결국, 공황 시기에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와 구조조정으로 자본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자본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산력의 사회적 발달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더 발전된 새로운 사회의 생산관계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성에 놓여 있다.

 

해소의 방식은 해소되어야 할 충돌의 출현, 그것 중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 방식은 추가자본의 전부 또는 일부의 가치액만큼의 자본이 유휴화하든지 심지어는 부분적으로 파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리하여 한 자본은 파괴되며, 또 다른 자본은 오직 상대적인 손실 또는 일시적인 가치감소만을 겪는다는 등등이다(맑스, 1894).

 

한편 공황기에 국가의 역할은 어떠한가?

자본주의사회의 국가 또는 정부는 독점자본가계급의 국가이요 정부다. 그들이 자본주의 역사에서 1929년 대공황에 직면하여 선택했던 것은 케인즈주의나 뉴딜정책과 같이, 노사협조주의적 정책처럼 보이나 실지로는 파시즘적인 경제정책을 펴는 것, 또는 제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 도발 이었다(채만수, 2008). 2008-9년 또 다른 세계공황에 직면해서 자본가계급 및 그들을 옹호하는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이번 공황의 원인을 “고빼 풀린 자본주의”에서 찾고 있으며, 그 해결 방법으로 ‘신자유주의의 종언’이니 하면서, 마치 혁명적인 대안인 양 ‘시장에 대한 국가, 정부의 규제, 감독, 조정’을 제시하고 있다(채만수, 2008).

이들 소위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대안은 자본주의의 최대의 위기의 집결체인 경제공황이라는 ‘혁명의 시기’에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 노선을 강화하고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미 수명을 다한 자본주의를 살려보려고, 죽은 생명체에 혼을 불어넣으려고 하고 있다. 생명체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도 이미 생명이 다한 것은 사멸해야 한다.

공황기에 노동자계급의 역할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 “혁명의 기운을 드높여라!” 현재와 같은 세계공황기에는 노동과 자본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타협은 불가능하다. 자본가도 자본가끼리의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그들의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도 그만큼 위기에 몰려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투쟁을 통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이다.

 

 

2.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을 가로막은

   매카시즘, 반공주의, 사회적 합의주의의 본질과 실체

 

우리는 앞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을 가로막은 파시즘, 매카시즘, 반공주의 마녀사냥, 사회적 합의주의의 본질은 결국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같은 종에 속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힘이 우세할 때는 파시즘, 매카시즘, 반공주의 마녀사냥 등 가장 강력한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들이대며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숨통을 죽이려 들다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거세지고, 투쟁이 왕성할 때에는 자본가계급은 ‘노사협조주의’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본질을 숨기기 때문이다. 그 실례를 보면, 1929년 대공황기에, 미국 루즈벨트는 자신의 국가권력 쟁취를 위해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층을 회유하여 노사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기에는 ‘매카시즘’과 같은 반공주의 마녀사냥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의 싹을 뿌리째 뽑아버렸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국가가 스스로 위기라고 느낄 때마다 들이대는 ‘반공주의 마녀사냥’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며, 반제ㆍ민족주의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대응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의연한 계급투쟁밖에 없다. 그것의 본질이 노자 계급관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려해야할 것은 운동집단 내부에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남발하는 주장과 언어들 및 그 언어들 속에 깔린 왜곡된 의식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한 예로 ≪레프트 21≫의 기사인데, 이 기사의 저자는 처음에는 차분하게 역사를 기술하다가도 1937년 GM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의 대투쟁의 승리의 의의는 “지배자들의 양보”를 따내는 것으로 축소, 왜곡하고 있다.

 

플린트 파업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GM 같은 거대 기업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그들은 생산을 멈췄고 공장을 점거했다. 경제 위기 시기에도 그들처럼 단호히 투쟁한다면 지배자들의 “양보”를 얻어 낼 수 있다(김용민, 2009).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단, “노동자계급투쟁과 노사협조주의와 타협과 양보를 구별 못하는 집단이 노동운동을 선도한다고 섣불리 나서지만 않는다면!”

 

 

3. 공황시기 노동자계급 대투쟁역사의 교훈: 미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공황기 노동자계급 대투쟁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대공황기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에게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할 시기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하여, 폭발하는 ‘자본주의의 주요 모순’, 즉 사회적 생산과 사적소유의 모순을 끊어내야 하는 시기이다.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 그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으로 인하여 그 거대한 사회적 생산을 자본가계급의 사적소유로 둘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고 말이다.

 

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은 생산력을 절대적으로 발달시키려는 이 생산양식의 경향 바로 그것에 있는데, 이 생산력의 발달은 이 생산양식의 특수한 생산조건―자본은 이 바탕위에서만 운동할 수 있다―과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것이다(맑스, 1894).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것이다. 즉, 자본과 자본의 자기증식이 생산의 출발점과 종점, 동기와 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생산은 오직 자본을 위한 생산에 불과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의 생활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가 있다. [생산자 대중의 수탈과 빈곤화에 입각하는] 자본가치의 유지와 증식이 그 안에서만 운동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한계는, 자본이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생산방법―생산의 무제한 증가, 생산을 위한 생산,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무조건적 발달을 향하여 돌진하는 생산방법―과 끊임없이 모순하게 된다. 수단―사회적 생산력의 무조건적 발달―이 제한된 목적 [기존자본의 가치증식]과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물질적 생산력을 발달시키기 위한 역사적 수단이며 이 생산력에 대응하는 세계시장을 창조하기 위한 역사적 수단이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자기의 역사적 과업과 자기의 사회적 생산관계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을 또한 내포하고 있다.(맑스, 1894)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발달하는 거대한 생산력, 그리고 이것과 동일한 비율은 아니더라도 증가하는 자본가치―이것들은 인구보다는 훨씬 더 빨리 증가한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이 기초를 위하여 그 거대한 생산력이 작용하는데, 이 기초는 부의 증대에 비하여 점점 더 협소하여진다―와 모순하게 되며, 그리고 이 증대하는 자본의 가치증식조건들과 모순하게 된다. 여기에서 공황이 발생한다(맑스, 1894).

 

맑스에 의하면, 이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심각한 모순이 발생한 것이고, 그것은 대공황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의 투쟁이야말로 바로 이 발현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이 모순의 해결은 낡은 질의 한계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는 것, 즉 새로운 질을 만드는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없다면 그때의 발전은 불가능한 것이다. 즉, 비약은 이 모순의 해결이다“(녹두편집부, 1985).

1929년 대공황기 미국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1997년 말 경제공황 이후 한국 노동자계급 투쟁의 교훈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다. ‘비타협적인 노동자계급의 투쟁’ 바로 이것인 것이다.

 

 

4. 공황으로 인한 노동운동의 고양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

 

공황기 노동자 대투쟁의 의의를 한마디로 하면, 그것은 정세를 노동자계급투쟁의 정세로, 그리하여 혁명으로 가는 변혁운동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전환점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세력화를 만들어야 한다. 투쟁 속에서 획득한 단결력과 투쟁력으로 당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세계적 공황이 도래한 현 시기에 자본주의의 주요모순,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적소유의 모순은 전 세계에 걸쳐서 첨예화되고, 그 모순이 양에서 질로의 변화를 겪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바로 노동자계급이 노동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이 절대절호의 찬스인 공황의 시기에 우리의 운동의 전술은 세계공황 하에서 점점 빈곤화로 고통 받는 모든 노동자ㆍ민중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변혁운동의 구심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 운동을 이끌어갈 핵심적인 주체는 이 변혁운동을 가장 잘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객관적, 주관적 조건을 갖춘 노동자계급일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세력화, 즉 당 건설을 해 나갈 것인가? 우리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 가능성을 다양한 경로와 경험을 통하여 이미 체득한 바 있다. 1917년 쏘련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의 경험, 1929년 대공황기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 1997년 말 경제공황 이래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 2008년 광범위한 한국대중들의 촛불집회, 그리고 한국의 쌍용자동차 공장 점거투쟁 등 2009년 새로운 공황의 시기에 다시 일어서는 노동자들의 투쟁들 ― 이 투쟁들 속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1917년 쏘련의 사회주의 혁명을 예외로 둔다고 해도, 우리는 미국 1937년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의 44일간의 점거투쟁과정 동안 그들이 얼마나 공동사회를 규율 있게 꾸려나가고 인간해방의 세상을 만들었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예는 1998년 한국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투쟁의 경험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98년 7월 20일 현장 노동자 3천 명으로 파업을 시작했지만, 파업에 돌입한 현장노동자들의 힘과 자신감은 그들 스스로 공장의 통제력을 확보한 상태에서 몇 배가 되었다. 그리고 현장을 장악하는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과정에서 일상적 노조체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직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총파업을 사수하려는 300명의 녹색사수대, 파업 내내 식사를 준비해주던 ‘아지매 부대’, 가족대책위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활동은 바로 노동해방의 길이 아니었겠는가? 최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30일이 넘는 투쟁을 해오면서 다시 한번 공장 점거파업을 통하여 파업을 노동자들의 학교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노동자계급이 그들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계속해 나갈 때, 바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성장할 것이며, 당을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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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은 1886년 숙련공 중심의 직능별 노조연합체로 설립되었다. AFL은 회사 경영주와 결탁하여 어떠한 저항도 없이 임금삭감을 받아들이라고 하면서 노동자들을 회유하는 조직이었다.

 

2) 산업별 노동조합회의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CIO): 강철, 고무, 유리, 자동차, 전기, 기타 여러 산업에서 산업노동조합들을 총 망라하여 조직한 단체로서 AFL의 어용노선에 반대하여 1935년에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AFL 내에서 조직되어 1938년에 독립, 독자적인 전국적 노동조합연합체를 결성했다가 1955년에 AFL과 통하브 현대의 AFL-CIO를 구성했다.

 

3) 예컨대, 1937년 5월 30일 시카코 남쪽 리퍼블릭스틸(Republic Steel) 공장 밖의 파업자 기념일 집회에서 경찰이 총기를 난사, 11명의 사망, 40명의 중경상 등, 100여 명의 인명손상을 가져왔다. 이것이 시카코 기념일 대학살(Chicago Memorial Day massacre)이었다.

 

4) 스미스법(Smith Act, 정식명칭은 외국인등록법[The Alien Registration Act]): 폭력을 통한 정부 전복을 지지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모임 또는 조직을 구성ㆍ가입하는 행위를 형사범죄로 규정한, 1940년의 연방법.

 

5) 1943년 루이스(Lewis)에 의해 지도된 530,000여 명 광부들의 파업은 ‘무분규 선언’을 무시하고 승리로 이끌었던 투쟁의 한 예이다.

 

6)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8월 노동조합 관료들은 전쟁 이후에도 노사협력관계는 계속된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전장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들은 실업자 신세가 되었고, 계속 일을 했던 노동자들의 임금도 급격히 감소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1945년 말부터 실업자들의 대중시위가 뉴욕,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다. 1946년 1월에 자동차, 철강, 전자, 그리고 통조림공장 노동자들이 동시에 파업에 나서서, 경제의 산업토대가 마비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에 승리”한 그날 이후, 12개월 동안 5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고, 이것은 전쟁 동안에 발생했던 파업의 4배 이상이 되었다(Smith 2006).

 

7)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y Act): 정식명칭은 노사관계법(Labor-Manage-ment Relations Act)이며, 1935년 제정되어 미국의 노동헌장이라고 불리는 와그너법(Wagner Act, 정식명칭은 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을 자본가계급에게 유리하게 수정한 것으로, 트루먼 정부 때인 1947년 노동조합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정되었다. 이 태프트-하틀리법은  노동자들의 조직과 단결, 그리고 파업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많은 제한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태프트-하틀리법이 통과된 후 파업참가자들은 급격히 감소했고, 미국노동운동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1945-46년의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8) 미국 공화당 상원위원이었던 조지프 매카시가 1952년 공화당 당원대회에서 “미국에선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1950년대 미국에서는 반공주의 광풍 즉, 매카시즘 시대가 열리고 말았다.

 

9) 1960-70년대에는 대중적인 반전운동, black power운동, 여성해방운동, 게이해방운동 등이 고양된 사회적 고양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은 조직노동자의 활동무대의 밖에서 일어났으며, 명확한 계급정치의 인식 없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매카시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Smith 2006).

 

10) “자본가들은 이 시기에 레이건의 노동운동 탄압정책에 힘입어, 그들 스스로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파업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영구적인 대체인원을 고용할 법적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노동자들로 하여금 파업을 하도록 강요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면 비노조원들을 영구적으로 대체고용하였다. 이 비노조원들은 노동조합의 인가를 철회할 수 있는 투표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철회선거로 인하여 비노조원이 되었다. 노동조합 인원수는 1950년대 중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나선강하하여 1987년에는 조합원이 전체 노동인력의 16%로 감소했다. 노동자들은 1980년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서 싸웠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자신들을 고용한 자본가들뿐 아니라 노동지도자들과도 장기적인 항쟁(투쟁)에 연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Smith, 2006).

 

11) 클린턴은 Personal Responsibility and Work Opportunity Act에 서명함으로써 60년 동안의 뉴딜의 상징을 해체하였고, 정부가 빈자들을 보살펴줄 어떠한 책임도 완화하였다(Smith, 2006).

 

12) 클린턴정부 집권 내내 AFL-CIO 지도부는 불요불굴의 의지로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거의 계급투쟁을 경멸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틀린턴 집권 9년이 지난 2004년 민간기업의 노동조합 가입율은 8.2%로 감소했고, 이 노동조합지도부의 노사협력 전략은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Smith, 2006).

 

13) GM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의 점거파업 이전에 이미 1936년 11월, 자동차공장들에 점거농성이 확산되었고, 11월 말에는 디트로이트에 도달하였다. 당시 1200여 명의 철강노동자들이 미드랜드 자동차 차체공장 (Midland Steel auto-body plant)을 점거하고, 조직적인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했다.

 

14) 금지명령을 내린 재판관은 에드워드 블랙(Edward Black)이란 자인데, GM에 주식 219,900달러를 빚지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5) 제1차 ‘불런전투’는 1861년 7월 21일 하루 동안에 벌어진 전투다. 불런전투란 남부에서 붙인 이름이며, 북부에서는 “매너서스전투”라고 부른다. 북군은 리치먼드를 공략하기 위해, 남군은 그런 북군의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매너서스에서 서로 맞부딪히게 된 것이 1차 불런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남군은 섬터 요새 이후 최초의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 전투로 북군은 패하여 워싱턴으로 철수했다. 무엇보다 이 전투 한 번으로, 전쟁을 소풍놀이처럼 쉽게만 생각했던 북부의 분위기가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경제력도, 사람 수도 비교가 안 되는 남부 농사꾼들의 반란이니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분위기가 충격과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전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이다(http://ko.wikipedia.org).

 

16) 루이스(John L. Lewis)는 AFL의 최고지도집단에 속했으나, 동업조합성격을 가진 기능적인 노동조합주의에 반대하여, 1935년에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설립 당시는 AFL 내 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sations, 나중에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sations로 바뀜)를 설립했다.

 

17) 1937년 1월, 플린트공장 점거투쟁 이후, 200명의 미국자동차노동조합 대표단이 ‘정책위원회’를 만든 후, GM 에게 주 30시간 노동, 하루 6시간 노동, 조립라인의 작업속도 결정에 노동조합의 참여 등을 포함한 8개의 요구조항을 내걸었다. 플린트공장 파업이 승리한 후,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강한 현장대표자 체계를 갖추어 GM과 첫 계약협정을 시도했다. 현장노동자들의 제안에 따라, 각 15-100여명의 노동자 집단이 그들 스스로 그들의 대표를 선출했다. 어떤 GM공장에서는 이미 적소에 현장대표들을 선출했다. 그러나 곧 UAW 지도부들은 노동조건에 대한 이러한 노동자들의 중요한 통제를 헐값에 팔아넘기려 했다. 첫 번째 계약은 3월에 맺었는데, GM 관리자들은 현장대표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 대신 새로운 구조의 ‘위원회’ 구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현장대표보다 노동자계급의 권위를 덜 갖는 것이었다. 두 번째 만약, GM 정착기인 4월에 협상이 전개되었다면 현장대표들이 노동자들의 고충을 다룰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인데, 노동조합은 UAW의 인준 없이 4월 협약을 실행했다. 1937년 5월 UAW 지도부는 조합의 허락 없이는 파업을 못하게 하는 내용을 표결에 부치기도 했다. GM은 노동조합의 인정을 받지 못한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에게는 총을 쏘아도 된다는 조항에 동의해 주길 요청했으며, 1937년 노동조합은 이를 승인했다. 이러한 규율의 두려움 때문에 노동자들의 ‘무모한’ 파업은 일시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GM이 UAW와 협의 후 11월 공약 내용이 협상되었을 때, 첫 번째 단협안 보다 더 못하게 된 것을 인지한 노동자들이 다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Smith, 2006).

 

18) 루즈벨트는 노동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1933년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전국산업부흥법, NIRA)를 부여했고, 1936년 재선을 위해 또 다시 노동자계급의 지지가 필요해지자 와그너법을 제정하여 사업주들이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을 맺지 않을 경우 불법행위라고 규정했으며, 사회보장법(Social Securiy Act)을 통과시켜 미국 정부가 극빈자나 노인층에게 최소한의 삶의 기준을 제공해주었다. 또한 루즈벨트는 공공사업촉진국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후에 Workers Projects Administration으로 바뀜)을 세워 실업노동자들에게 건설사업에서 공공의 일자리를 제공했다(Smith, 2006).

 

19) CIO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40년에 루즈벨트 정부가 설립한 국가방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가하면서, 방위산업에서의 파업을 비난했고, 이어 1941년 1월 루즈벨트의 새전쟁위원회 (New War Board)에 가입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금지시키며 무분규 선언을 제안했다. AFL도 1941년 12월 5일 방위산업에서 파업을 금지하더니, 그 다음날에는 모든 조합원들의 파업을 금지시켰다. 1942년 11월 UAW의 집행이사회는 CIO에게 노동자 조직보다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CIO는 군수무기 생산을 위해 생산을 증대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노동자들에게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생산 증대를 촉구했다(Smith, 2006).

 

20)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미국사회당 내에서 러시아혁명을 지지하는 분파가 사회당에서 축출된 후, 두개의 독립적인 당, 즉 공산노동당(Communist Labor Party)과 미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America)을 설립하였고, 양쪽 당은 즉각적으로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코민테른의 주장으로 그들은 1921년 연합공산당(United Communist Party)을 설립했다. 또한 1921년 7월 코민테른의 제안에 따라, 공산당은 이미 존재하는 노동조합(AFL) 안에서 노동운동의 좌파블록을 통합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했다(Smith 2006).

 

21) 린더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의 역할에 대한 환상은 당 기관지인 ≪데일리워커(Daily Worker)≫에서 “연방정부가 GM에 압력을 넣어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국가적인 합의내용을 받아들이고, 노동자들의 요구안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루즈벨트 행정부가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말이라는 것이다(Linder, 1965).

 

22) “확실히 미국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자본가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고, 저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처럼 크게 변화된 정책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 실업보험, 최저임금, 하루 8시간 노동, 사회보장, 복지 등. 이것은 잠재적으로 혁명적 공산주의 사상이 대중적 사상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미국 지배계급의 시도였다. 이 모든 개혁의 공적은 루즈벨트에게 돌아갔지만, 사실 이것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선두에 선 노동자계급 대중 투쟁의 결과였다. … 유감스럽게도 공산당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지배자들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노동자계급은 무장 해제되었으며, 그들을 위해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 오도되었다. … 어떤 의미에서, 지금 노동자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은 당시 공산당이 뿌려놓은 것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진 개량은 늘 뒤집어지거나 혹은 천천히 잠식당한다. 하루 8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투잡(two jobs)을 해야 하거나, 연장근무를 해야 하는 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사측의 노조파괴 공작과 반공노조 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해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민간 총 노동인구의 35%에서 7%로 줄어들었다. 미국 정부는 실업 보험을 삭감하고 있으며, 긴박하게 도움이 필요한 수백만 명의 신규 실업자들은 궁핍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실업자 중 40% 이하만이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또한 최저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Progressive Labor Party, 2008).

 

23) 1940년대 중반에, 트루먼 자신이 1950년대의 매카시즘을 위해 길을 잘 닦은 전속력의 반공산주의 개혁운동을 착수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1947년 3월 12일, 대(對)쏘 냉전을 시작함으로써, 미국과 쏘련 사이의 제도화된 투쟁을 드러냈다, 마샬플랜은 트루먼독트린의 핵심전략으로서 “공산주의 우세”를 거부하는 나라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노동조합들은 국무부의 마샬정책 하에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좌익노동자들의 운동을 분쇄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Smith, 2006).

 

24) 1945년 11월 5일 전국 13개도의 50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결성대회를 열어 그 역사적 출범을 하였다. 전평은 해방 직전까지 적색노동조합의 활동의 영향과 일제가 물러간 공백기의 영향을 받아, 결성 당시 노동조합수가 1,194개가 되었으며, 16개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안태정, 2002).

 

25) 해방직후, 조선 노동자들은 일제가 공장문을 닫고 철수해버리자 직장폐쇄에 항의하며 퇴직금요구투쟁을 벌이다가 점차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여 스스로 운영하는 공장자주관리운동으로 나아갔다 (안태정 참조하기).

 

26) 이 당시 민주노총 총파업의 요구는 노동시간단축, 자동차 등 기간산업의 해외매각저지, 인원감축을 수반하는 농수축협 강제통합저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이었다. 민주노총은 5월 31일 주5일제 근무실시, IMF 피해원상회복과 자동차 해외매각ㆍ협동조합 통합 재검토, 비정규직 문제해결과 조세ㆍ사회보장제도 개혁등 3대 노동현안을 해결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했다.

 

27) 1998년 8월 24일 잠정합의안은 다음과 같다. ① 정리해고 227명 ② 정리해고자 선정-합리적인 기준으로 선정 ③ 정리해고자 취업보장-계열사 취업노력, 2년 후 본인 원할 때 재위업 약속 ④ 휴직임금-1년 휴직, 6개월은 재교육훈련, 휴직임금-노조-급여의 2%, 사측과 정부-일정부분 부담(고용안정기금으로) ⑤ 정리해고자 위로금-5년 미만: 7개월 통상금, 5년 이상 10년 미만: 8개월 통상금, 10년 이상: 9개월 통상금-계산방법은 5차 희망퇴직자와 동일.-85억원의 고용안정 기금을 확보하여 추가지원. ⑥ 고용안정기금-노사공동으로 기금을 마련한다. ⑦ 고소고발, 손해배상 징계철회-일괄철회 ⑧ 노사 평화선언 채택-2년간 고용조정하지 않겠다는 약속. ⑨ 재취업제 도입-정리해고자 재취업 약속, ⑩ 식당 여조합원 처우 문제-인원: 식당은 노조에서 운영, 위로금 지급, 9개월+45일분(기지급)+운영권 전환 때까지 기존임금 지급, 경영상 해고자 및 배우자 취업 노력. ⑪ 외주 하도급 전환문제-외주, 하도급으로 전환코자 할 때는 노조와 합의하고 경영상 해고자 우선 재고용한다.-노사 합의 없이는 하도급을 제한한다(현대자동차, 1998)

 

28) 고길섶. 2004. 어느 다중적 소수자의 삶과 투쟁이 보여주는 문화적 의미 -최종희, 울산 현대자동차 노조 직영식당 노동자. [어느 소수자의 사유]. 문화과학사. 2004. P. 306.

 

29) 그 이전에 이미 기아자본가는 1997년 6월 28일 노동조합에게 임금협상에서 백지위임을 요구하였고, 노동조합은 이를 승인해주었었다.

 

30) 이 당시 기아 노동자들은 1인당 천만 원씩을 결의했고, 이렇게 해서 4063명의 기아노동자들에 의해 모여진 기아회사채의 규모만 해도 260억 원이었다고 한다(박윤천, 2009).

 

31) 1997년 7월 23일 민주노총 위원장 권영길과 한국자동차산업정상화와 삼성자동차포기를 위한 대책위원장 조준호의 공동발표내용에 보면, “……3. 기아자동차노조는 임금교섭권 위임에 이어 1조합원 1천만원 모금, 하기 휴가비, 월차반납, 노조 복지기금 회사지원, 임금동결, 차량할부금 일시금으로 공제, 가족판매 켐페인 등을 결의했다. 우리는 이러한 기아자동차 노조의 기아살리기 운동에 공감하며, 아울러 우리는 기아자동차 경영진이 뼈를 깍는 자성 속에 경영 정상화에 혼신의 노력을 거듭할 것을 촉구한다……” 라고 발표 되었다.

 

32) “기아의 노조 그리고 기아의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본의 그러한 대량해고, 통제, 노동강도 강화 음모를 좌절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지금 취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른바 ‘노사협조’나 ‘노사화합’을 통해서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노사협조’나 ‘노사화합’적인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노조는 철저히 무력화되고, ‘회사살리기’란 이데올로기만 무성해져,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허위의식이 노동자들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채만수 1997).

 

33) 축협 등 3사 노조 (축협중앙회노조, 전국축협노조, 전국농협노조) 투쟁을 보면, 1999년 국회상임위를 통과한 농업협동조합통합법의 부당성을 알리고, 6월 정기국회에서 이를 폐지 또는 유보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는 계획으로 투쟁에 나섰다. 3사의 투쟁은 5월 31일 민주노총 총파업 때 투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 당시 민주노총은 동법의 폐지를 내걸었고 2월 27일부터 4월 1일까지 매주 일요일 서울에서의 집회, 결의대회, 4월 23일 서울역에서 민중대회, 5월 31일 민주노총 총파업에서 3사 노조는 주도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6월에 법률안의 폐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정부주도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문제점을 노동자, 농민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민주노총, 2001).

 

34) 롯데호텔 노조투쟁의 의의는 정부의 경찰력을 투입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통해서 노동조합을 통제하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공권력의 투입 후에도 파업대오를 유지하여 끝내 승리한 것이다. 이 당시 정부는 경찰력투입을 통한 파업진압→노조지도부 구속→산발적 가두투쟁→무기력한 업무복귀로 이어진 노동운동의 굴욕적인 역사가 있었는데, 롯데호텔 노동자들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다. 이 투쟁사례는 정부가 아무리 공권력을 투입하여, 공봉과 방패, 원시적 폭력, 인신구속으로 짖밟더라도 조합원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파업대오를 유지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롯데호텔과 함께 투쟁에 나선 스위스 그랜드호텔 노조도 120일 간의 장기간의 파업 끝에 10월 7일 롯데와 비슷한 내용으로 회사측과 임단협을 타결했다(민주노총, 2001).

 

35) 사회보험노조 투쟁 역시 7월 1일 공권력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으나, 경찰의 폭력진압과 지도부의 구속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보험노조의 투쟁은 갈수록 기세를 올렸다, 4달 간의 노동조합의 완강하고 줄기찬 투쟁으로 인해 결국 11월 2일 사측과 현안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사회보험노동조합은 1,606명의 연행, 9명의 구속, 조합원 최진욱 씨의 사고사, 463명의 직위해제 등 회사측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해 온 불굴의 정신이 있었다. 이 사회보험노조 조합원들의 불굴의 정신은 오래 기억될 투쟁이었다(민주노총, 2001).

 

36) 한국통신노동자 투쟁을 보면, IMF 신탁통치 이후, 한국통신은 해외매각과 민영화를 위한 정부의 구조조정 방침으로 인해 가장 커다란 희생을 강요당한 공기업이었다. 98년 이후 1만5천여 명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강제명예퇴직으로 직장에서 ?아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에 다시 강제명예퇴직을 실시하였고, 약 7,000여 명에 달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하였다. 이에 노동조합은 2000년 12월 18일부터 12월 22일까지 총파업에 돌입했고, 초기에 8,000명 대오로 출발한 파업이 30,000명 대오로 늘어나 투쟁의 열기가 드높아졌다. 이에 정부와 사측은 결국 협상에 응하게 되어, 12월 22일 명퇴중지, 분할ㆍ분사시 사전협의, 명퇴 관련 부당조치 원상회복 등에 합의하며 교섭이 타결되었다. 이 투쟁은 당시 한전, 철도 등 공공부문 노조들이 구조조정에 맞서 투쟁전선을 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후퇴하는 상황에서 구조조정 저지노선을 새롭게 구축하는 계기가 된 투쟁이었다(민주노총, 2001).  

 

37) 2002년에 보건의료노동조합은 “산별교섭 쟁취, 의료의 공공성 강화, 인력확보와 파행근무 금지,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 인사승진제도 개선, 사학연금제도 개선, 노동조합 강화, 산별노조 강화”를 주된 요구안으로 내걸었고, 8개지부의 파업사업장을 비롯해서 많은 중소병원 노조가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병원측의 탄압과 직권중재를 빌미로 한 정부의 불법파업 규정에 맞서 싸웠다 (민주노총, 2001). 

 

38) 2000년에 있었던 투쟁사례들을 보면, 5월 26일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부당해고 반대 투쟁, 4월 16일 대상식품 사내하청노동조합의 노조와해 &반대 및 직접고용 확보를 위한 투쟁, 12월 13일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의 조합원 7000명 계약해지 거부투쟁, 12월 7일 볼보기계 건설 코리아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근로계약해지 거부투쟁, 10월 10일 삼창프라자 시설관리 노동조합의 계약해지 거부투쟁 등이다.

 

39) “2001년 9월 10일 현재,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사업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면서 270여 일째 파업투쟁을 하고 있고,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이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면서 200일 가까이 투쟁하고 있다. 린나이코리아노동조합이 원직복직과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면서 투쟁하고 있고, 방송사비정규직노동조합이 파견법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해고되는 것에 맞서 1년이 넘게 싸우고 있다. SK인사이트코리아노동조합이 정규직으로의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1년 넘게 투쟁하고 있고, 명월관노동조합은 복수노조 금지조항으로 인해 노조설립신고필증조차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해고된 8명의 노조 간부들의 복직을 요구하면서 투쟁하고 있다. 대송텍노동조합은 불법파견과 부당해고에 맞서 정규직화를 요구하면서 국방부와 대한송유관공사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 캐리어사내하청노동자들은 2년 이상자들이 정규직화되었으나 노조 인정과 2년 이하자의 고용승계를 요구하면서 아직도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보험모집인노동조합도 노동조합 인정을 목표로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하고 있다. 홍익매점노동조합도 단체교섭을 요구하면서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9월 10일 현재 파업투쟁 87일째를 맞고 있는 린나이코리아노동조합이 파업 39일째 되던 날 다른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이 린나이를 소개하면서 새내기 투쟁사업장이라고 소개했던 웃지 못할 일화가 있을 정도로 파업투쟁 40일의 경험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있을 만큼 길고 치열하다(김혜진, 2001).

 

40) 2003년 이래 죽음으로 투쟁한 열사들은 1월 9일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의 분신,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의 농민운동가 이경해의 할복, 10월 17일 한진중공업 지회장 김주익의 자결, 10월 23일 세원테크 지회장 이해남의 분신,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광주전남지역 본부장 이용석의 분신, 10월 30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곽재규의 투신 등으로, 이들의 죽음은 노무현 정권과 초국적 자본의 핍박과 착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수많은 노동자ㆍ민중의 분노와 서러움의 응어리가 뭉쳐진 결정체였다.

 

41)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MEW, Bd. 7, S. 98; 맑스ㆍ엥겔스, “평론, 1850년 5-10월”, MEW, Bd. 7, S. 440.; 1895년에 엥겔스가 쓴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의 서문” (MEW, Bd. 22, S. 511)에서도 다시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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