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통일전선 전술의 현재적 의의

 

문영찬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머리말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정세가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그것이 일국의 변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정세분석과 전술수립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앞으로 전술의 문제가 운동진영의 주요 쟁점이 되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전술을 수립할 때만 승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맑스-레닌주의 전술론은 척박한 상태다. 과거 80년대 운동에서는 통일전선에 대한 우편향적 해석이 지배적이었거나 아니면 통일전선 전술을 배척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역시 통일전선에 대한 우편향적 해석이 개량주의진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변혁운동의 전진을 막는 한 요인이다. 반면에 변혁적 진영은 통일전선 전술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분파주의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20세기 사회주의의 하나의 성과인 통일전선 전술을 재평가하고 그것의 올바른 적용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일전선 전술은 노동자계급의 대단결이라는 정신에서 출발하여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인민의 단결이라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제민족해방을 위해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단결시킨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민족해방을 이루어내는 견인차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통일전선 전술의 올바른 경험을 흡수하고 반면에 통일전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 온갖 좌편향적, 우편향적 이해를 걸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통일전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대표적인 것은 통일전선을 정세와 무관하게 하나의 도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쏘비에트 혁명의 유형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유형을 도식적으로 나누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혁명은 도식이 아니며 통일전선전술 또한 도식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세에 의해 규정받는 역동하는 방침이 통일전선인 것이다.

그러나 통일전선은 또한 하나의 원칙이기도 하다. 정세에 의해 규정받으면서도 통일에 대한 대중의 열망, 자본에 반대하는 노동자대중의 열망,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인민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자본과 제국주의에 대한 협조노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통일전선을 하나의 술수, 책략, 상층의 협정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통일전선 전술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일전선전술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하여야 한다.

 

 

1. 노동자 통일전선전술

 

통일전선 전술은 레닌에 의해 최초로 제창되었다. 1919년 코민테른이 성립하고 나서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대중 속으로!’라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기초하여 레닌은 사회민주주의당들과의 연합을 고려하면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모든 당들의 연합, 공산당과 사회민주당들의 통일전선을 제창한 것이었다. 이러한 레닌의 제창을 받아 코민테른에서는 1921년 12월 18일자로 “노동자통일전선에 관한 그리고 제 2, 제2반(半) 및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노동자와 아나코생디칼리즘 조직들을 지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였다.1) 이 테제에서는 “강화되는 자본의 공세에 영향을 받아 노동자 사이에 자연발생적인, 문자 그대로 억누를 수 없는 통일에의 염원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민주당 등에 대한 통일전선을 제안하고 있다. 이리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최초로 노동자계급의 대단결이라는 사상이 표명되고 하나의 정치방침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회민주당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이들은 통일전선이 하나의 책략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반볼세비키, 반공노선을 계속 걸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통일전선이 과연 책략에 불과한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통일전선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디미트로프는 초기부터 통일전선에 대한 매우 원칙적이고 정확한 사상을 표명한 바 있다.

 

통일전선은 실제로, 결코 자기 자신이 당으로서 가지는 원칙으로부터의 후퇴나 당으로서 가지는 독자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대중을 옹호하기 위한 공통의 구체적인 자본주의적 정치강령의 채택과 그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공통투쟁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2)

 

이러한 언급에서는 책략 혹은 술수라는 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통일전선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감추는 것이 전혀 아니며 정치활동의 독자성을 보장하는 것을 오히려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당적 독자성은 물론 대중적 정치활동 또한 자신의 강령에 입각하여 지속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민주의당들이 통일전선을 책략이라고 일축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사민주의당들은 통일전선이 노동자계급의 통일에의 염원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는 사민주의당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대의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디미트로프의 언급을 계속 들어보자.

 

이러한 경우에 이 신사 여러분의 결론이, 공산당이 제안한 노동통일전선과 자신들의 계급협조전술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혼동과 동일시에 기초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만큼 극단적으로 생각이 잘못될 수는 없으며 통일전선사상을 이만큼 지독하게 곡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서 즉각 강조해 두건대, 통일전선과 계급협조는 동일한 것이 아님은 물론 그 반대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대립하며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서로 용납하지 않는 두 개의 전술이기 때문이다.3)

 

이러한 디미트로프의 언급은 통일전선의 본질이 바로 계급협조에 대한 반대라는 것, 즉, 노동자계급을 분열시켜 노동자의 상층으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와 협조에 나서게 하는 정책, 사민주의당들의 계급협조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통일전선이라는 것이다. 노동자가 분열되어 한 그룹은 싸우고 다른 한 그룹은 부르주아지에 대해 협조하는 상황을 끝내고 노동자가 당파에 관계없이 뭉쳐서 자본에 반대하는 연합전선, 통일전선을 결성하자는 것이 바로 통일전선 사상의 본질임을 디미트로프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전선은 책략이기는커녕 노동자대중의 통일에의 염원을 담고 있는 대의이며 노동자계급의 전술원칙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술은 한편으로 사민주의당들의 계급협조노선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라는 대의의 추구라는 양 측면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보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은 통일전선이 사민주의당들에 대한 공산당의 시각전환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통일전선은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공산당이 사민주의당들과 정치적, 사상적 화해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디미트로프는 위와 같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전환’이 일어난 자리였다고 간주하는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주요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통일전선 전술은 사회민주당계열의 노동자에게 공산당의 정책이 올바르며 개량주의의 정책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납득시키는 방법이지,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및 실천과의 화해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4)

 

따라서 통일전선은 하나의 책략이기는커녕 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통일에의 염원이라는 대의에 입각한 전술방침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민주의자에 대해 비판인 동시에 연대의 제기로서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은 통일전선을 수많은 정치적 책략들의 하나로 잘못 이해하는 첩경이다. 통일전선전술이 기반하고 있는 대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통일전선 전술의 올바른 이해와 운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통일전선 전술은 당장은 사회민주당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꾸준히 발전한다. 코민테른 2차 대회가 열리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21년 1월 8일 독일통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독일의 모든 프롤레타리아 조직, 즉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및 다양한 노동조합연합에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고 근로대중의 긴요한 요구들을 위해 반동정책에 반대하여 공동투쟁을 벌이자고 호소하였다.5) 이 “공개장”은, 러시아 혁명을 전후하여 사회민주당과 카우츠키 등 중앙파와 격렬히 대립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대담하게 제안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회민주당, 중앙파,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반공노선이 제안을 거부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극좌파’ 즉, 독일공산주의 노동자당도 “공개장”에 반대했는데 이들은 “공개장”을 개량주의의 수렁으로 빠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통일전선의 제안은 실패하였지만 그에 대해 우익적 그리고 좌익적 반대가 있음을 확인한 것은 성과였다. 실제로 이후 통일전선 전술은 각종의 우익적 좌익적 편향과의 투쟁 속에서 발전해 간다.

레닌은 “공개장”을 옹호하면서 ‘좌파’에 대한 투쟁을 전개한다. ‘좌파’는 통일전선 전술을 반대하면서 ‘공세이론’을 들고 나왔다. 이 이론은 공산당이 항상 공세전술을 취해야 하며 무장공세로 전환하여 ‘전위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지노비예프, 부하린, 라데크 등이 동조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코민테른 제3차 대회를 통하여 극복된다. 제3차 대회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좌파’를 비판하였다.

공산당 성립의 제1단계는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단호히 개량주의와 절연하는 것이지만, “제2단계에서는 혁명적인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제2단계에서 우리는 현명하고 교묘한 결정을 채택하여야 한다. 그러한 결정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것이며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즉 기본적인 혁명적 원칙을 각국의 특수성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레닌은 강조하였다.6)

이러한 원칙과 통일전선 사상은 영국의 경우에 공산당의 노동당에 대한 지지 전술로 나타났다. 레닌은 “영국공산당에 대하여, 공산주의자에게 투표하더라도 부르주아 후보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극히 소수의 경우가 아니면 모든 공산주의자는 선거에서 노동당원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동‧투표하도록 요구한다”7)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공산당은 레닌의 제안을 받아들여 노동당 후보에 대립하여 세운 공산당 후보를 사퇴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통일전선 사상은 서서히 발전하면서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는 ‘노동자정부’ 슬로건으로까지 구체화된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는 1922년 11월 5일 뻬뜨로그라드에서 개최되었다. 노동자정부 슬로건이 제출되자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났는데 좌익적 견해는 노동자정부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대용어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다수 의견은 노동자정부 슬로건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발전해가는 과도적인 형태로 파악했다. 즉, 노동자정부는 부르주아 당과 연립정부를 만들려는 개량주의자들의 기도와는 다른 것으로서 부르주아 권력과 투쟁하며 최후에는 그것을 타도하기 위해 경제 및 정치 분야에서 결속한 모든 근로자의 통일전선, 모든 노동자당의 연합8)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은 권력의 문제가 쟁점으로 대두되는 상황을 조건으로 모든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고 집결시키는 통합의 깃발로서 적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선전은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즉, 노동자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니며 노동자의 진정한 해방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한 착취의 폐지에 있다는 것을 선동해야 함이 지적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정부를 발전시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전환해야 한다는 과제가 공산당의 과제로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노동자통일전선이라는 전술은 각국에서 공산당이 성립하였지만 미숙한 상황에서 공산당들의 전술을 발전시키고 공산당들이 대중적 세력으로 발전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계급협조노선을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쫓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통일전선전술의 알맹이였던 것이다.

여기서 통일전선과 계급동맹의 차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통일전선은 자본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통일과 연합의 문제였다. 그러면 계급동맹과 통일전선은 어떠한 관계에 놓이는가?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기까지 계급동맹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했으나 통일전선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통일전선과 유사한 것으로는 좌익블럭 전술 등을 언급했을 따름이다. 통일전선은 비판과 연합의 통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즉, 정세의 요구가 없다면 통일전선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전선은 철저히 전술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급동맹은 이와 다르다. 계급동맹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존재하는 변혁의 성격, 계급들의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다. 즉, 일정한 전략적 단계에서 각 계급세력들을 어떻게 배치할 지를 결정하는 전략의 문제인 것이다. 그에 따라 계급동맹은 정세의 규정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통일전선이 철저히 정세와 연관되는 것이라면 계급동맹은 정세가 아니라 변혁의 성격, 자본주의의 발전단계, 사회계급분석에 기초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하면 통일전선은 전술의 문제라면 계급동맹은 전략의 문제라고 정식화할 수 있다.

 

 

2.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

 

그러나 위와 같은 노동자통일전선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통일이 아니라 계급협조노선을 밀고 나갔던 것이다. 더구나 사회민주당들은 파시즘의 위협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반파시즘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나아가 공산당의 반파시즘 통일전선 제안을 일축하고 반공노선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1933년 히틀러의 나찌가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파시즘은 처음에 1922년 이탈리아에서 뭇솔리니 집권으로 시작되었다. 파시즘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에게 광포한 테러독재를 실시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파시즘이 발생한 것은 혁명에 대한 부르주아지들의 공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고 유럽에서 혁명적 기운이 높아지자 부르주아지들이 테러독재를 택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회민주당들은 파시즘은 후진국의 현상으로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는 서유럽 등에서는 파시즘이 불가능하다고 안이하게 인식하였다. 파시즘은 서서히 확산되다가 1929년 대공황 이후로 급속히 세를 넓혀간다. 특히 독일에서 나찌가 집권하게 되는데 나찌의 집권 전에 독일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에게 10여 차례나 나찌의 집권을 막기 위한 반파시즘 총파업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9) 따라서 파시즘 집권의 1차적 책임은 사회민주당에게 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노동자계급이 통일되어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강력한 반파시즘 투쟁을 통일적으로 전개했다면 나찌가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파시즘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유럽 전역과 미국 등에서까지 세를 넓혀갔다. 그에 따라 각지에서 반파시즘 운동도 성장했다. 1933년 6월 유럽 반파시즘 노동자대회가 파리에서 열렸다. 공산주의자들의 제창으로 유럽의 300만 노동자를 대표하여 파시즘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반대, 민주적 권리의 옹호 등의 강령을 채택했다. 이는 당과 노동조합,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파시즘 반대자가 전투적인 통일전선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반파시즘 운동이 활성화된다. 프랑스에서는 파시즘 세력이 권력탈취를 기도하자 1934년 2월에 공산당과 사회당이 연합하여 총파업을 단행했는데 450만여 명이 참가하여 파시즘의 도발을 막아내었다. 이를 기초로 1934년 7월 27일 공산당과 사회당의 행동통일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지속되어 1935년 중반 프랑스에서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결성되었다. 스페인에서도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결성되어 1936년 2월의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였다. 이에 대해 1936년 7월에 파시스트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은 내전을 겪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대 반파시즘 세력의 투쟁의 장이 되었는데 히틀러와 뭇쏠리니가 스페인 파시스트들을 지원하고 쏘련이 인민전선을 지원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각국에서 스페인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결집하여 국제여단을 형성하여 직접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공화국은 점차 고립되었는데 특히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정부로 성립한 블룸내각이 스페인 내전에 대해 중립을 선언했는데 이는 사실상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봉쇄하는 조치였고 스페인의 반파시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도 이후 대부르주아지의 정치적, 경제적 보이코트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비록 반파시즘 운동이 일시적으로 약화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세계적 차원에서 통일적인 반파시즘 통일전선이 성립한 것은 큰 성과였고 이를 위해 1935년의 코민테른 7차 대회의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7차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파시즘에 대해 “하나의 부르주아 정부와 다른 부르주아 정부와의 보통의 교체가 아니라, 부르주아지 계급지배의 한 국가형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또 다른 형태인 공공연한 테러독재와의 대체다”10)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을 기초로 7차 대회는 반파시즘 노동자 통일전선을 제창하였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험을 평가하면서 노동자통일전선을 반파시즘 인민전선으로 확장할 것을 결의하였다. 특히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민주적 요구들을 위한 투쟁을 통하여 광범한 근로자층을 결합하고, 파시즘을 타도하고, 자본의 권력을 제한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기초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상을 제기한 것이었다.11) 이를 통하여 2차 대전 후 정식화된 인민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인민전선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의 하나의 형태라는 문제의식까지 제기되었다. 이는 레닌이 프롤레타리아독재로의 다양한 접근과 이행의 형태를 찾는 것에 주의하라고 요구한 방침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반파시즘통일전선이라는 당면의 요구를 발전시키고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통하여 사회주의 변혁이론이 풍부하게 된 것이었다.

2차 대전 전까지 반파시즘 인민전선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까지 성립하지만 파시즘의 거센 공격 앞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인민전선은 패배를 겪게 된다. 그러나 반파시즘통일전선 사상은 이미 확고하게 성립하였고 이는 2차 대전이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관철되어 이후 공산당의 성장과 반파시즘 무장투쟁의 활성화로 귀결되게 된다.

그런데 스탈린이 쏘련 20차 당대회에서 탄핵된 후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잡으면서 코민테른사와 통일전선의 역사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수정이 가해졌다. 즉, 코민테른 5차, 6차 대회와 7차 대회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7차대회에서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6차 대회를 전후하여 코민테른이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즘이라 규정했다고 하고 그것을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코민테른 7차대회는 6차대회를 부정하는 전환을 이루었는가? 먼저 6차 대회의 기조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의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에 관한 테제”를 보자.

 

부르주아지는 사회민주주의를 포섭함과 동시에 중대한 시기에 임해서는 일정한 조건하에 파시즘 체제를 추진한다. … 사회민주주의의 공식이데올로기인 계급협조 이데올로기는 많은 점에 있어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접촉하는 것이다. 혁명운동과의 투쟁에 적용되고 있는 파쇼적 제 방법은 맹아적 형태로 다수 사회민주당의 실천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12)

 

‘전환’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자들은 위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위 견해 어디를 보아도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가 계급협조 이데올로기라는 것, 파시즘의 대두에 대해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명백한 진실이었고 심지어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유혈 진압하는 데도 앞장선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1차 대전과 러시아혁명을 전후하여 부르주아사회의 지주로 성격전환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계급의 일정한 부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고 상당수의 노동자대중이 그러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전선 전술은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비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회민주주의와 연합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이루려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민주주의의 계급협조노선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노동자계급의 통일적 대오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코민테른의 5차 대회, 6차 대회와 7차 대회의 연속을 확인할 수 있다. 즉, 7차 대회의 반파시즘통일전선의 결의는 과거의 대회의 연장선상에 있고 나아가 정세에 걸맞게 이를 심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흔히 7차 대회를 통일전선 전술의 ‘전환’으로 보는 견해는 통일전선 전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태도라 할 수 있으며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 수정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반파시즘 인민전선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을 잠깐 살펴보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계급협조주의라고 악선동을 한다. 즉, 반파시즘 인민전선에 자유주의부르주아지도 참가했고 공산당이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통일전선의 ‘통’자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노동자통일전선에 기초하여 그를 확장한 것인데 노동자통일전선은 바로 계급협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건설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계급협조인가 아니면 노동자계급의 대오의 통일인가가 핵심적 쟁점이며 따라서 계급협조노선을 주장하는 사민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한 견인으로 성립한 것이 노동자통일전선인 것이다. 반파시즘인민전선은 파시즘이 부르주아민주주의조차 폐지하는 방향으로 감에 따라 부르주아지 내에서도 반파시즘 세력이 성립한 것이고 따라서 이들도 당연히 반파시즘 투쟁에 동참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반파시즘적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는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올바른 실천을 통한 견인과 비판이 주요한 정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인민전선 비판은 통일전선의 본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실토하는 것이고 나아가 반쏘련, 반공적인 자신들의 노선을 드러내는 것이다.13)

 

 

3. 반제 민족해방 통일전선

  ― 중국사례를 중심으로

 

1930년대 유럽에서 반파시즘을 중심으로 하여 통일전선이 성립하고 반파시즘 인민전선 운동이 발전한 데 비하여 식민지, 반식민지에서는 통일전선이 반제 민족해방 통일전선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의 경우 전형적인데 코민테른의 관심을 받으며 중국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해방투쟁은 통일전선의 결성과 와해를 반복하며 진행되었고 끝내 통일전선을 성취하여 민족해방혁명을 달성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이루어내었다.

이러한 식민지, 반식민지에서 민족해방통일전선은 1920년 코민테른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식민지에서 민족해방혁명이 하나로 만나고 있다는 것, 식민지의 민족해방을 지원하는 세력은 제국주의 국가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쏘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위 테제는 식민지의 당면과제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한계내이지만 민족해방혁명이며 그것과 프롤레타리아혁명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중국에서는 반제통일전선의 결성이 모색된다. 특히 1922년 7월의 중국공산당 2차 대회는 “우리는 힘을 합하여 군벌과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 혁명적 당파와 제휴하여 통일전선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된다”14)고 결의하고 있다. 이에 대해 코민테른은 한층 구체화된 방침을 중국공산당에게 전달한다. 1923년 1월 12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국민당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태도에 대해서”라는 결의를 채택하는데 그 결의에서는 “중국에서 중심적 과제는 제국주의자와 국내의 그 봉건적 대리인에 대한 민족혁명이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민족혁명집단은 일부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에 입각해 있고 일부는 인텔리겐챠와 노동자에 입각한 국민당이다”는 점을 서술하고 있고 그에 따라 중국공산당원이 국민당 내부에서 활동하도록 권고하고 있다.15)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은 타당한 것인데 국민당이 전체 민족혁명을 포괄하고 있는 상태에서 공산당이 그와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나아가 그 안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이 현실적인 통일전선의 실행이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민당은 혁명적이었고 공산당은 선전, 선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1차 국공합작이다. 이로 인해 중국혁명은 일취월장했으며 군벌이 토벌되고 반봉건혁명이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공산당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장개석은 손문이 사망한 후 1927년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여 1차 국공합작, 통일전선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민족해방운동의 성장은 중국만의 현상이 아니었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2월 베를린에서 식민지억압반대투쟁동맹이 결성되었고 1927년 2월 브뤼셀에서 식민지억압반대‧제국주의 반대 국제대회가 열렸다. 이는 제국주의국가의 노동자계급과 식민지 피억압민족이 연대하는 대회였는데 식민지체제에 대한 반대, 맑스의 계급투쟁에 입각한 해방의 달성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대회는 “모든 피억압민족과 계급에게 보냄”이라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피억압민족과 피억압계급이여 단결하라!’는 호소를 발표했다.16)

한편 중국은 일본군이 도발하여 만주를 점령당하고 이후 1937년 일본이 중-일 전쟁을 일으키자 중국인민의 항일전선의 결성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장개석은 수차례에 걸쳐 공산당의 홍군을 토벌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대장정을 하여 중국서북부에 안정적인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에게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제안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장개석에게 공산당과의 연합을 강요하여 극적으로 제2차 국공합작,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이를 기초로 이후 중국인민은 일본과의 투쟁에 집중할 수 있었고 2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중국에서는 항일민족통일전선으로 수정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일본군국주의, 파시즘이라는 주적에 대해 민족해방전선의 결성으로 중국인민은 답했던 것이다.

2차 대전이 중국인민의 항쟁, 쏘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의 패퇴로 막을 내리자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대해 연합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하지만 국민당은 다시 내전을 도발한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을 제외한 전인민의 세력을 결집하게 되는데 이것이 혁명적 민족통일전선이라 불린 것이었다. 이 세 번째의 통일전선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바로 이 통일전선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주체는 바로 이 통일전선(전국정치협상회의)이었던 것이다. 전술적 통일체였던 통일전선이 권력의 수임자로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경험을 보면 통일전선의 결성을 위한 투쟁이 공산당과 인민에게 있어 사활적인 것이었고 혁명의 승리는 바로 이 통일전선에 의해 담보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위당인 공산당이 없었다면 통일전선도 없고 혁명의 승리도 없었겠지만 <공산당+통일전선>이 승리의 담보역할을 했던 것이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이후의 혁명들이 통일전선을 중시하는 노선을 걷게 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중국의 통일전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중국의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관료적 부르주아지, 매판부르주아지는 국민당의 기반이 되었지만 민족부르주아지는 국민당에 포섭되지 못한 상태에서 반제, 항일이라는 전선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유약한 것이었는데 확고한 반제가 아니라 동요하는 반제였던 것이다. 반식민지 상태에서 이들 민족부르주아지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는데 이들의 유약함이 중국에서 공산당이 민족해방투쟁을 주도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이들 민족부르주아지는 2차 대전 승리 후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에서 국민당에 가담하지 않고 반대로 공산당의 통일전선에 응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부르주아지까지 포함하는 통일전선의 결성이 가능하다는 것, 그럼에도 헤게모니를 노동자계급이 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들 민족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적 개조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사례는 드문데 중국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후로 5반(五反)운동, 반독직운동 등을 거치며 민족부르주아지는 자본가로서 기득권을 상실하고 점차 인민의 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이들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공사합영(公私合營)을 통한 사적 소유의 제한, 그리고 이후 소유권의 이전과 그 대가로 이자를 일정한 기간에 한하여 지불하는 것 등으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중국에서 민족부르주아지는 점차 소멸의 길을 걸은 것이다. 이것이 1950년대까지의 과정이다. 그러나 민족부르주아지는 이와 같이 조용히 소멸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계급적 본성상 사회주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계급이고 오직 힘에 의해서만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실패하고 소위 개혁, 개방에 의해 자본가계급이 대대적으로 육성되었는데 이를 대변한 등소평 등 주자파(走資派)의 노선은 실은 이들 민족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해와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들 민족부르주아지는 계급으로서 소멸되는 듯하다가 등소평에 의해 계급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 부분은 통일전선의 문제는 아니고 사회주의건설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과 실패의 교훈을 새기되, 통일전선에서 민족부르주아지를 포괄하는 문제와 사회주의 건설문제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4. 제2차 대전과 통일전선 전술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제창된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패배를 계기로 실패한 듯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실패를 통하여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은 더 확고하게 되었으며 이는 제2차 대전의 전개과정에서도 관철되었다. 제2차 대전은 본질적으로 영국과 미국을 한편으로 하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한편으로 하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누가 세계의 패권을 쥘 것인가를 결정하는 제국주의적인, 약탈적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쏘련과 독일이 전쟁을 하면서 전쟁의 성격은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구도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국가 간의 전쟁만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볼 때도 파시즘적 지배집단에 대한 반파시즘적인 전인민의 전쟁이 진행되었다. 독일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벌어진 빨치산 투쟁은 이러한 반파시즘인민전선의 성과였던 것이다. 불가리아, 프랑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 독일군의 점령지역 하에서 빨치산 투쟁, 즉, 내전이 동시에 진행된 것이 2차 대전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독일이 초기에 쏘련을 침략하여 점령한 점령지에서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빨치산들이 조직되어 독일군의 후방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제2차 대전의 양상은 코민테른 7차 대회의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불가리아를 예로 들면 불가리아는 독일의 나찌에 굴복하였는데 이에 맞서 반파시즘 인민전선으로서 조국전선이 결성되어 빨치산 투쟁에 나섰고 이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불가리아군이 대쏘련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았고 나아가 쏘련군이 불가리아에 진주하기 전에 불가리아의 조국전선 빨치산들이 1944년 9월 9일 봉기를 하여 독일군을 몰아내고 반파쇼 혁명을 완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국전선에는 노동자, 농민, 수공업자, 진보적 인텔리겐챠, 애국적 군인 등 전 인민이 집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국전선이 중국과 같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2차 대전에서 반파시즘 전선에 대한 공산당의 헌신은 공산당이 도약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 곳곳에서 레지스탕스, 빨치산 투쟁을 주도한 공산당은 과거의 협소한 계급정당에서 전 민족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발돋움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2차 대전이 종료되면서 유럽 곳곳의 나라에서 공산당은 대표적인 정당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반파시즘 통일전선은 고난을 헤치고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동유럽의 경우, 그리고 중국의 경우까지 포함하여, 반파시즘 전선에서 확고하게 된 민주주의적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전화하는 양상이 빚어졌다. 동유럽의 경우 쏘련군의 진주가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그 바탕에서는 각국 공산당의 헌신적인 반파시즘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종합하여 2차 대전 후의 혁명의 경험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민민주주주의 혁명은 쏘비에트 혁명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혁명의 유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짚을 점이 하나 있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논하면서 ‘일반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인데 일반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말고 별도의 보편적인 민주주의가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반파시즘 민주주의 투쟁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사고는 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계급적 지배형태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의 다른 면이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다른 면이다. 즉, 민주주의는 계급성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쟁취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봉사하는 것을 두고서 이를 잘못 해석하여 민주주의 ‘일반’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과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의 경험을 분석하면 부르주아적 범주에 속하는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와 착취를 완전히 폐지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성립시키는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가 구분된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것은 이러한 혁명들의 연속성을 포괄하여 정의하는 것이다. 즉,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유형은 그 안에 부르주아적 한계에 속하는 단계와 부르주아적 한계를 넘어서는 단계의 구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민주의 혁명을 쏘비에트 혁명과 구별하는 것은 혁명에 이르는 다양한 경험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타당하다.

여기서 또 하나 짚을 것은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하여 통일전선이 전술이 아니라 전략으로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통일전선을 논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략적 통일전선이라는 개념을 구사하고 있다.17) 이들의 문제의식은 주로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경험들이 쏘비에트 혁명과 구별되고 그 특징은 바로 통일전선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쏘비에트 혁명과 구별되는 혁명유형이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 해도 그것이 바로 통일전선이 전략이라는 규정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통일전선은 정세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전술의 일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경험은 통일전선이 바로 권력의 수임자가 되어서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권력의 수립의 주체가 되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전술의 영역에 머물 수 있는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전략은 본래 혁명의 단계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혁명의 성격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여 각 계급세력을 배치하는 것이 본래적 의미의 전략이다. 이에 반해 전술은 전략에 종속되면서 정세에 근거하여 수행되는 작은 전투의 개개의 계획을 말한다. 반파시즘 통일전선이라는 것은 파시즘이 대두하지 않았다면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전술의 일종이다. 즉, 정세를 반영하여 성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술의 운용의 결과 계급세력의 배치가 변경되었다면 그것은 전략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통일전선은 전술에서 출발하여 전략의 변경을 가져왔다는 점이 핵심이다. 여기에 전략과 전술의 변증법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술이 성공하여 전략의 변경을 가져왔다고 해서 전술이 전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통일전선 조직이 권력수립의 주체가 되었다고 해서 전술이 전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전술운용의 성과,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헌신적인 투쟁이 그러한 통일전선 조직에 응집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정리하면 통일전선전술의 성공적 전개가 전략의 변경을 가져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통일전선 자체가 전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일전선은 정세에 조응하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5. 선진국에서 반독점 통일전선 전술

 

2차 대전 후에 변혁운동은 통일전선 전술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전개되었다. 제3세계, 신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이 보편화되었고 실제로 베트남, 니카라과 등에서는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선진국, 제국주의 국가에서 반독점통일전선전술은 성공한 사례가 없다. 오히려 이들 국가의 공산당들은 성장하기는커녕 위축과 축소의 길을 걸어왔다. 이는 이들 국가의 변혁노선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들 국가의 통일전선전술은 반독점 통일전선 전술이다. 그리고 변혁론 또한 반독점 민주변혁론을 주장해왔다. 그리고 평화적 이행을 주로 사고해왔고 심지어는 의회를 통한 점차적인 변혁을 주장해왔다. 이들의 이러한 노선은 과거 개량주의라고 비난해왔던 사회민주당들의 노선과 매우 흡사하다. 차이는 이들 서구공산당들의 노선이 쏘련의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에 의해 용인되어 왔다는 것이다.

쏘련이 붕괴된 후 이들 서구의 공산당은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이러한 양상은 이들의 반독점 민주변혁론 그리고 반독점 통일전선전술이 근본적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반독점 민주변혁론에서는 중소자본가까지 민중으로 파악하여 변혁의 주체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중소자본가는 부르주아지인데 부르주아체제를 타파하는 변혁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최대로 확보된 상황에서 이들 부르주아지들이 변혁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적 소유에 대한 정면 공격, 몰락하는 소부르주아지와의 계급동맹을 기초로 변혁론을 다시 세워야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독점자본에게 있지만 중소자본가 또한 지배계급으로 포괄된다. 이들은 변혁의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공산당들의 변혁론은 다시 세워져야 하며 통일전선 전술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서 통일전선은 반자본주의 통일전선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 내의 통일전선에 기초하여 몰락하는 소부르주아지를 포함하는 반자본주의 전선이 형성될 때 선진국에서 변혁운동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6. 남한에서 통일전선의 문제

  ― 개량주의자에 대한 태도

 

남한에서 당면 변혁의 성격은 사회주의 변혁이다. 이는 1980년대와 비교할 때 계급대립의 구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혁명의 성격도 반제반파쇼 민족민주 변혁에서 민족민주적 과제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변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계급대립구도는 노동자계급과 몰락하는 소부르주아지 즉, 소부르주아 하층을 포함하는 민중 대 자본가계급의 대립이 주요하고 중간에 소부르주아 우파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급세력의 배치, 즉 전략을 기초로 통일전선을 논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통일전선의 주요한 대상은 개량주의자들이다. 현재 남한에서 개량주의자들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포괄되어 있다. 이들은 노조운동에서는 국민파와 중앙파로 나타나는데 서구의 사민주의자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을 약화시키고 자본가계급과의 계급협조노선을 퍼뜨리는 주범이다. 그러나 이들이 노동자계급의 상당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개량주의자들의 계급협조노선을 무력화시키는 방침이 필요하다. 이들이 노동자의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이라는 것, 계급협조노선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이 보장되고 노동해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설득하고 선전, 선동하는 것을 한시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을 통일전선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계급협조에 대립되는 노동자대오의 통일의 길로 이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당면의 노동자 생존권 보장 투쟁과 민주주의 투쟁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 이들이 의회주의적 노선의 길을 갈 때는 자본가계급과의 협조임을 폭로하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을 통일시키고 민중과 연대하는 투쟁의 길로 나서도록 압박해야 한다.

과거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무력화의 방침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전선의 강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 더해 이들을 투쟁의 전선으로 끌어들이는 의식적 작업을 해야 한다. 이들에게 계급협조가 아니라 통일전선의 대오로 들어 올 것을 설득해야 한다.

 

 

맺음말

 

통일전선의 역사와 경험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귀중한 보고이다. 통일전선이 관철되었을 때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혁명의 승리를 담보할 수 있었고 그것이 실패할 때 운동은 곤란에 빠졌고 반동이 횡행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통일전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은 우편향적 오류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통일전선 사상의 진수가 계급협조에 대립되는 계급통일임을 망각하고 상층의 협정, 일시적 연합을 위한 원칙의 양보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통일전선은 모순적 통일이다. 한편으로 계급협조를 폭로하며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대오의 통일, 나아가 인민적 대오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통일전선의 역사 자체는 통일전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 좌익적 편향과 우익적 편향에 대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편향은 통일전선이 마치 연합대상과의 협상이 본질인 것으로 생각하고 원칙을 내주는 반면에 좌편향은 노동자대오, 민중 대오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하찮게 생각하고 도식적인 교조를 반복하고 통일전선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통일전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 우리 사회에서 반자본주의 전선을 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자본주의 전선에는 무정부주의자까지 포함하고 개량주의자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지주로 봉사하는 것을 폭로하고 자본에 반대하는 전선에 서도록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통일전선이 형성된다면 우리사회에서 변혁운동은 일취월장할 것이며 정세의 고양에도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은 통일전선 전술이 세계적으로 관철되었을 때 세계변혁이 확산되었고 반대로 통일전선전술이 우경적으로 해석되어 변혁운동이 개량화되었을 때 변혁운동은 몰락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자 대오의 통일, 민중대오의 통일이라는 통일전선의 원대한 의의를 복원하고 변혁성을 확보할 때 21세기의 사회주의운동은 다시금 힘차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1) ≪코민테른 자료선집 3≫, 동녘, 1989, p. 66.

 

2) G. M. 디미트로프, “통일전선과 자본의 공세”, ≪통일전선 연구≫, 거름, 1987, p. 18.

 

3) G. M. 디미트로프, “통일전선인가 계급협조인가”, 같은 책,  p. 30.

 

4) 같은 책, p. 153.

 

5)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 거름, 1986, p. 129.

 

6) 같은 책, p. 143.

7) 같은 책, p. 170.

8) 같은 책, p. 187.

 

9)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I≫, 거름, 1986, p. 53.

 

10) 같은 책, p. 110.

11) 같은 책, p. 119.

 

12) 민정구 엮음, ≪통일전선론≫, 백산서당, 1987, p. 49의 주60에서 재인용.

 

13)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인민전선 비판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설명은 ≪트로츠키의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풀무질)을 참고하시오.

 

14)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 p. 210.

 

15) 같은 책, p. 211.

16) 같은 책, p. 280.

 

17) 허성혁, “통일전선과 정치적 민중조직”, ≪통일전선론≫, 백산서당, p. 307.

    김운영, “통일전선에 관한 몇 가지 문제”, ≪통일전선의 전략과 전술≫, 아침, 1987, 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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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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