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네그리와 자율주의 비판

 

김광석 | 진보전략회의

 

 

<목차>

 

1. Prologue

― 네그리 주장의 핵심과 그 배경

 

2. 제국주의인가 제국인가?

2-1. 노동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2-2. 국민국가의 부정으로서의 제국의 허구성

2-3.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은 팍스 아메리카의 찬양일 뿐이다.

2-4.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의 성립

― 국민국가는 약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고 있다.

2-5. 반세계화와 반자본 투쟁의 방법론

 

3. 비물질적 노동과 다중

3-1. 비물질노동의 특징과 허구성

3-2. 노동시간이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는 궤변

3-3. 산업예비군과 노동자중심주의

3-4. ‘경향’이라는 방법론

3-5. 네트워크적인 노동의 허구성

3-6. 네트워크 조직론과 네트워크 투쟁의 허구성

3-7. 절대적 민주주의와 혁명적 민주주의

3-8. 다중, 민중, 대중, 그리고 노동자와 빈자의 차이

3-9.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

 

4. 네그리의 제안들

4-1. 도주와 탈주(exodus), 그리고 삐딱한 자세와 변증법적인 투쟁

4-2. 보장소득

4-3. 사랑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5. Epilogue

― 네그리의 묘비에 바치는 헌사!

 

 

1. Prologue

– 네그리 주장의 핵심과 그 배경

 

이 글에서는 네그리(Antonio Negri)가, 특히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의 공저인 ≪제국(Empire)≫(2000)(윤수종 역, 이학사, 2001) 및 ≪다중(Multitude)≫(2004)(조정환ㆍ정남형ㆍ서창현 역, 세종서적, 2008)에서, 발명하고 의존하는 ‘제국’, ‘다중’, ‘비물질 노동’, ‘네트워크’, ‘떼지성’ 등의 주된 개념(패러다임)들이 현실에서 지지될 수 있는 것인가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네그리의 글은 사회와 역사를 내적 연관과 모순의 필연으로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계보학 운운한다든지, 이 사람의 주장은 어떻고, 저 사람의 주장은 어떻다면서도, 막상 자신의 주장은 정리된 형태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끌고 다니 있기 때문에 그의 글들을 완독하는 사람이 드물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겹기는 하지만 네그리 본인의 언사를 가급적 많이 인용하려고 한다.

네그리는 오늘날은, 국민국가인 열강들이 각축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세계화로 인하여 상품의 교역만이 아니라, 금융 등 서비스는 물론 노동력까지도, 국민국가를 형해화시키면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는 시대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국적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탈근대 즉 제국의 시대에는 산업노동이 아니라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으며, 이들 비물질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다중은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하고 협력하며, 창조적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존재이고, 반제국 투쟁의 담지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포드주의 시대의 산업노동자에 기반하는 위계적이고 중앙집중적인 노동조합과 당운동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고, 또 이미 형해화된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은 무의미하다며,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는 변화된 생산형태에 맞게 비물질적 노동자가 중심이 되고 다중의 차이가 존중되는 네크워크를 통해 소통하면서 사보타지와 엑소더스를 감행하자고 주장한다.

우선 그의 사고의 배경을 보면, 국가주의와 당적 운동 그리고 노동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반대한다.

네그리는 첫째로,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에서 자본의 지배도구이자 폭력장치인 국가에 대당하는, 즉 국가의 전복을 꾀하고 새로운 국가권력을 세우려는 운동은,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비민주적으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앙집중적일 수밖에 없는 당운동과 국가권력의 장악을 반대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고, 두 번째로, 세상을 변혁하는 주체 또는 핵심적 동력은 (산업)노동자계급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신념은, 국가권력을 접수하여 혁명적 방안을 실천하는 것은 스탈린의 ‘국가사회주의’(그는 ‘국가자본주의’라고 한다)나 체제내화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의 실천처럼, 또 다른 중앙집권적인 위계와 비민주성을 가져올 것이므로 당적인 조직과 권위를 만들지 말고, 결국 절대적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수평적이고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이라는 의미의) 자율주의적인 소그룹들이 네트워크로 소통하면서 저항만 하자는 주장으로서, 국민국가가 각축했던 제국주의 시대가 세계화(globalization)의 완성으로 제국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국민국가의 주권이 형해화되고 있기 때문에 국민국가를 장악하여 변혁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곧바로 제국에 저항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두 번째 신념은, 기왕의 변혁운동은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산업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사고해 왔으나, (생산력의 발달로) 산업노동자의 비중과 중요성은 낮아지고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고, 가치도 물질적인 생산현장만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생산과정에서 더욱 주되게 생산되며, 노동만이 아니라 자연과 기계에서도 생산되고 있다며, 이러한 생산과정은, 포드주의적인 육체노동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기반한 소통과 협력을 통하여 비물질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다중에 의하여 창조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가의 창조적 역할을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산업예비군의 개념을 부정하고 빈자의 개념을 제시한다.

즉,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 혹은 탈근대의 시대에는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소통과 협력 속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비물질 노동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고, 그들이 새 시대를 이끌고 갈 주체성이자 구성력(주권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고, 그들은 세계화의 결과로서의 제국에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거부와 탈주 등으로 잘 저항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사보타주로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전쟁이 없는 민주적인 사회를 이룰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이 네그리 주장의 핵심이다.

 

 

2. 제국주의인가 제국인가?

 

네그리는 생산과 소비와 교환이 전지구적으로 됨에 따라, 상품과 금융과 지식과 노동이 전세계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으며, 이를 규제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민족국가와 국제기구들을 자신의 마디로 포섭한 초국적인 네트워크적 주권인 제국이 출현하는데, 제국은 여러 주권들의 합성체이며, 탈영토적인 질서이고 총체적인 질서로, 단일 국가의 주권이 쇠퇴하고 제국의 주권은 강대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국에 대한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제국이라는 문제설정은 맨 먼저 세계질서가 있다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질서는 사법적 구성체로 표현된다.(≪제국≫, p. 27.)

 

세계시장은 국민국가의 경계들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이전 시기에는 국민국가가 전 지구적인 생산 및 교환을 근대 제국주의적으로 조직하는 데 있어서 주된 행위자였으나, 세계시장에게 국민국가는 점차 단순한 장애물로 나타난다.(≪제국≫, p. 209.)

 

국민국가들―심지어는 가장 지배적인 국민국가들의 주권적 권위는 쇠퇴하고 있으며 그 대신 하나의 초국적 주권형태 즉 전지구적 제국이 출현하고 있다.(≪다중≫, p. 27.)

 

왜냐하면 일국적 공간이 더 이상 주권의 효과적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다중≫, p. 28.)

 

기업과 그 법률회사가 국제적이고 심지어는 전지구적인 국제상관습법 체제를 발전시키고 그럼으로써 전지구화를 규제하는 규범적인 과정을 수립하는 만큼, 바로 그 만큼 자본은 일종의 “정부없는 전지구적 통치”형식을 가장 약한 형태로 창출하는 것이다.(≪다중≫, pp. 212-13.)

 

진정으로 전지구적 권위형식들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아마도 이러한 전지구적 기구의 가장 명백한 사례일 것이다. WTO는 전지구적 귀족국가들을 위한 실제적인 포럼이며…(≪다중≫, p. 214.)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세가지 수준의 규제적 장치들이 자본주의 시장 세력들과 법률적ㆍ정치적 기구들이 결합된 구조 속에서 ‘유사-전지구적 정부 또는 유사-정부를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작동하는 전반적인 구도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수준은 이윤보장을 위한 자본들의 상호작용의 자기 조절이다. 두 번째 수준은 국제적인 수준에서 합의를 수립하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중재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세 번째 수준은 새로운 전지구적 권위의 창출이라는 구성적 기획이다.(≪다중≫, p. 218.)

 

결국 네그리의 주장은 상품과 금융과 지식, 그리고 노동까지 국민국가의 장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으며, 국민국가를 초월한 초국적 질서인 제국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WTO 등의 국제기구를 예로 들면서 “제국은 탈중심화하고 탈영토화한 지배장치(우-토피아 ou-topia, non place)”라 주장하고, 심지어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전 역시 제국주의적인 침략이 아니라 제국의 경찰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완전한 허구이며, 초국적 주권으로서의 제국은 국민국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실에서 결코 인정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2-1. 노동의 이동이 자유롭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먼저 노동의 이동이 자유롭게 되었다면서 이를 찬양하는 네그리의 주장을 살펴보자.

 

인구의 이동성 때문에 국내 시장(특히 국내 노동시장)을 개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된다. 자본주의적인 명령의 적용을 위한 적절한 영역은 더 이상 국가 경계나 전통적인 국제적 경계선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제국≫, p. 339.)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속에서 공간적 이동성과 시간적 유연성은 대도시 노동자들과 시골의 토착 원주민들 모두에게 본질적인 요소들이었다.(≪다중≫, p. 320.)

 

이주자들은 이러한 풍성함과 생산성을 설명해주는, 빈자의 특수한 범주이다.(≪다중≫, p. 171.)

 

하나의 유령이 세상에 출몰하는데 그것은 이주라는 유령이다. … 도주와 탈출은 제국적 탈근대 안에서 대항하는 강력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성은 자생적인 투쟁수준을 이루고 있으며…(≪제국≫, p. 285.)

 

네그리는 제국의 시대에는 상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노동까지도 자유로운 이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 이러한 이주노동을 자본에 저항하는 대탈주이고 강력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복지와 고용정책이라는 고려 하에 고용허가제나 이주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주장은 완전한 사기일 뿐이다. 한국에서도 4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주노동자들 중 무려 20만 명을 추방하기 위하여 인간사냥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런 게 자유로운 이동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확산되고 있는 이주노동은, 아프리카와 동남아, 남미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초국적 자본의 수탈로 농촌에서 양극분해되어 쫓겨난 도시빈민이, 자국 자본에 의한 노동 흡수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가 없어 고국을 떠나는 현상이다.

남미의 주요도시들이 수백만에서 1,000만이 넘는 도시빈민들의 소굴이 된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고, 동남아의 여성들이 일본과 한국에 노예적 결혼계약에 팔려오는 것도 그 뿌리는 같다. 즉 자신들의 나라에서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떠나는 것인데, 이를 위대한 탈주로 칭송한다는 것은 네그리의 비민중성과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을 팔려는 이러한 욕구는 선진국에서 ‘3D’라고 불리는 저임금의 고역과 만난다. 그리고 이들 이주노동자는 호황기에는 저임금노동자로 착취당하고, 불황기에는 배출된다. 올해 초 세계적인 경제불황에 두바이에 진출한 수많은 (주로 방글라데시와 인도와 중국 등) 이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맑스가 말하는, 자본의 필요에 따라 자본에게 가장 먼저 수탈당하는 산업예비군일 뿐이지, 무슨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는 칭송받아야 할 창조적인 다중이 아님은 명백할 것이다.

 

2-2. 국민국가의 부정으로서의 제국의 허구성

 

세계화(globalization, 단순한 지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현상이므로 지구화 대신 세계화라는 표현을 쓴다)의 시대에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구라 치더라도, 상품과 금융, 서비스, 투자 등의 시장이 개방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WTO와 같은 세계적 질서의 존재도 사실이다. 과연 이러한 현상이 국민국가의 주권을 형해화시키고 초국적 주권인 제국을 성립시켰는지에 대하여 우선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거대 초국적기업이 국민국가의 사법권과 권위를 효율적으로 넘어섰다. … 국가는 패배했고 기업들이 이제 지구를 지배한다!(≪제국≫, p. 400.)

 

현실적인 측면과 이데올로기적 측면 모두에서 일국적인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국가는 자멸하고 있다. 단일정부의 통일성은 해체되어 일련의 독립기구들 (전통적인 독립기구들 외에, 은행, 국제적 계획기관들 등)에게 맡겨져 왔으며, 여기서 독립기구들은 모두 점차적으로 정당성을 권력의 초국적 수준에서 찾는다.(≪제국≫, p. 403.)

 

그러나 우리는 국민국가의 역능에 대한 그 어떤 향수를 간직하거나 국민국가를 찬양하는 그 어떤 정치라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믿는다. … 즉 국민국가의 쇠퇴는 구조적이고 불가역적인 과정이다. 국민은 문화적 형성체, 소속감, 공동유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로 사법적-경제적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가 지닌 효과가 쇠퇴한다는 것은 확실히 GATT체제와 세계무역기구 WTO, 세계은행, 그리고 IMF와 같은 완전하게 전지구적인 사법적-경제적 기구들의 진화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초국적인 사법적 체제에 의해 지탱되는 생산과 유통의 전 지구화는 일국적인 사법 구조들이 지닌 효과를 넘어선다. … 국민은 완전히 억압적인 구조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국민에 의거하는 모든 전략을 그러한 근거에서 거부해야 한다.(≪제국≫, p. 434.)

 

네그리는 우선 국민국가가 세계화를 관철하는 WTO 등 국제기구나 질서에 따르는 것을 보고 국민국가의 주권이 형해화되고 초월적 주권이 형성된 것으로 주장한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즉 초국적 자본의 활동의 자유를 위해 국민국가의 장벽을 개방하는 것이다. 이는, 상품무역에 관한 관세장벽만이 아니라, 선진국 즉 제국주의 열강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금융(투기)자본, 지적재산권, 서비스, 투자 등등의 시장 개방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세계화는 자본을 위한 모든 분야의 시장의 개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단, 네그리의 주장과는 달리, 노동시장만은 제외하고.

그런 측면에서 WTO 협정이나 우루과이 라운드 협약은 전세계적인 국민국가 간의 개방수준에 관한 합의이고, 결국 전세계적 총자본의 활동의 자유를 위한 합의이고 질서이다. 이러한 세계화 혹은 개방이 전세계 민중의 이해에 반하여 진행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러한 합의된 질서를 국민국가가 존중하고 복종한다는 외견 때문에 국민국가의 주권이 형해화되었다는 것은 환상이다.

네그리 자신도 알고 있듯이, 2003년 멕시코 캔쿤에서 열린 WTO 정상회담은, 농산물시장의 개방을 둘러싸고 남반부 22개국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전세계적인 합의가 어렵게 되자 미국 등 선진국, 소위 G8은 다자간 혹은 양국간 FTA의 추진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국민국가의 장벽의 개방으로 나타나는 세계화는 이처럼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혹은 선진국 내부의 갈등 즉 각국 자본의 이해와 갈등의 조정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라든지, 혹은 쇠고기 검역주권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던 한미 FTA라든지, 이들 협정은 (네그리가 없어졌다고 우기고 싶은) 국민국가 간 즉 각국 자본의 갈등과 조정의 산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의 말대로 미국과 한국이 합의하여 관세장벽을 폐기했다고 하면, 미국과 한국의 관세 주권이 형해화되어 제국으로 이전되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당사국 중 일국이 이러한 합의를 위반했을 때, 보복관세를 할 때는 제국에서 주권을 찾아오는 것이고? 양국간이든, 다국간이든, 혹은 전세계적인 협약이든 간에 관세장벽이나 투자장벽을 완화하거나 없애는 협약은 주권의 불사용이나 억제일 뿐 결코 주권의 포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협약의 체결과 시행, 보복, 폐기, 탈퇴는 여전히 국민국가가 수행하고 있는 주권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권총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겨누기를 멈추고 옆구리에 차고 있자고 한 걸 가지고, 즉 언제든지 다시 뺄 수 있는 권총이 형해화되었다느니 초월적 존재에게 이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일 뿐이다.

결국 이들 세계적인 협정이나 질서는 자본의 지배도구이자 그 이해를 관철하는 대리인인 국민국가가 각국 자본의 이해를 조정하고 협의하는 가운데에서 합의한 협정이자 협약일 뿐인 것이다. 이때에 전세계적인 총자본의 이익과 개별자본 혹은 개별 국가의 자본이 충돌할 때, 때로는 강대국에 의하여 불리한 협약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고받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성립되는 질서를 국민국가의 형해화로 표현하는 것은,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이 국민국가를 부정하고 싶은 욕망, 아니 사실은 국민국가에 눈을 감고 싶은 욕망에 급급하여 객관적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적 질서란 제국주의 열강 상호간의, 그리고 열강과 약소국 간의 갈등과 각축의 산물일 뿐이다.

 

2-3.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은 팍스 아메리카의 찬양일 뿐이다.

 

네그리는 다른 모든 국민국가의 주권을 형해화시키는 초월적 주권의 성립을 주장하고 있다. 근대의 주권이라는 게 결국 내란의 종식과 평화적 질서를 위해 무력의 유일한 담지자로서 성립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은 독점적 (즉 유일한) 무력의 담지자여야 한다. 그리하여 미제국주의를 독점적 무력, 즉 제국의 화신으로 미화한 네그리는 미제국주의가 수백만 이라크 민중을 학살한 이라크 침략전쟁까지도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제국의 경찰권의 발동으로서 찬양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전 지구적 권력의 모습을 … 분석할 때, 세 층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구조를 인식할 수 있다. … 피라미드의 좁은 정점에는 하나의 최강 권력이, 즉 전 지구적 무력사용에 대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이 있다.(≪제국≫, p. 404.)

 

실제로 걸프전은 목적, 지역적 이익, 그리고 관련된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의 관점에서는 별 이득이 없는 억압 작용이었다. 이라크는 국제법을 어겼다고 비난받았으며 따라서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아야 했다. 걸프전의 중요성은 미국 스스로의 국민적 동기의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전지국적 권리의 이름으로 미국을 국제적 정의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 미국이라는 세계경찰은 제국주의의 이익에서가 아니라 제국의 이익에서 행동한다.(≪제국≫, p. 244.)

 

오늘날 국제조직들(유엔, 국제통화조직들,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주의적 조직들조차도)은 미국에게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보스니아까지 20세기 후반의 모든 지역 갈등에서 미국은 군사개입을 요청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들은 미국의 공적인 반대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선전행위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며 실질적인 것이다. 내키지 않을지라도 미군은 평화와 질서의 이름으로 이 요청에 응답해야만 할 것이다.(≪제국≫, pp. 245-46.)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유럽의 구시대 세력에 대항해 새로운 제국이 형성돼왔다는 사실은 좋은 소식일 뿐이다.(≪제국≫, p. 478.)

 

네그리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이렇게 된다. ‘저 네그리는 엎드려 비옵나니, 제국의 화신인 미국이시여! 별 이득이 없고,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세계평화를 위해서 불량국가들을 짓밟아 주시옵소서!’ 이보다 더한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찬미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미국이 제국주의적이 아닌 제국적 무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네그리의 주장은, 바로 자신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워싱턴은 다른 지배적인 권력들과의 협력없이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해 군주제적인 통제를 행사할 수 없다.(≪다중≫, p. 94.)

 

예를 들어 미국은 점차 (환경, 인권, 형사법정 등등에 관한) 국제적 협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 이런 의미에서 미국적 예외는 가장 강력한 나라가 향유하는 이중 기준을, 즉 명령하는 자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을 지칭한다.(≪다중≫, p. 33-34.)

 

미국이 자국의 입장 때문에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 의정서나 대인지뢰금지협정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제국이 초국적인 유일한 질서라면서, 권력의 행사를 다른 주권국가인 열강들과 상의해야 되고, 때로는 그 질서를 어기기까지 한다고요? 미국이 제국 그 자체라는 네그리씨! 도대체 미국은 제국의 위에 있는 존재요? 아래에 있는 존재요?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은 팍스 아메리카의 찬양일 뿐이다. 결국 팍스 아메리카나, 즉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찬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그리가 아무리 칭송하여도 미국의 막대한 대외수지의 적자나 위안화와 유로화의 강세에서 보듯이, 미국 중심의 일극적 질서는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질서라는 게 결국 무력과 돈이 아니던가? 중국과 러시아, 유럽 등 강대국들의 군비지출은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데, 이것이 국민국가의 무력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오늘날 세계가 초강대국인 미국의 패권 대신에 다자적 질서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렇다면 제국에서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갔다고 할 것인가? 네그리씨! 대답 좀 해보시오!

 

2-4.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의 성립
― 국민국가는 약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고 있다
 

이처럼 현실에서 인정되지 않는 제국을 창설하신 네그리씨는 이제 국민국가에 대한 모든 투쟁이 무가치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네그리의 말로 들어 보면,

 

우리는 제국과 제국의 세계시장에 도전하고 저항한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전 지구적 수준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인종적, 종교적, 지역적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고 제국과의 “연결이 끊기고” 정해진 경계들에 의해 제국열강들로부터 보호되는 고립적인 어떤 특수한 공동체를 제안하는 것은 모두 일종의 게토로 끝날 것이다. 제한된 국지적 자율성을 겨냥하는 기획으로 제국에 저항할 수는 없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 전지구화는 틀림없이 대항 전지구화와 만날 것이며, 제국은 틀림없이 대항제국과 만날 것이다.(≪제국≫, pp. 276-77.)

 

오늘날 다음과 같은 “국지적인” 좌파전략의 다양한 형태의 핵심에서 작동하는 추론은 완전히 반동적인 것 같다. 즉 자본주의적 지배가 훨씬 더 지구적으로 되고 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방어해야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본의 실제적인 전 지구화와 제국의 구성은 강탈과 패배의 신호들로 생각되어야 한다. … 오늘날 이러한 국지적인 입장이 잘못되고 해롭다고 주장한다.(≪제국≫, p. 81.)

 

전 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국지성의 방어라는 이러한 좌파의 전략은 많은 경우에 국지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율적이거나 자기 결정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기계의 발전에 연료를 공급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 … 오히려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전 지구적 관계들의 특정한 체제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국지적인 것을 방어한다는 이러한 전략은 제국 안에 현존하는 현실적인 대안들과 해방을 향한 잠재력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부정하기 때문에 해롭다.(≪제국≫, p. 82.)

 

베르덩의 도살장, … 애국 전쟁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융단폭격 … 대량학살의 목록은 계속된다. 자 그러한 근대성이 종결된다면, 그리고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많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기여한 근대국민국가가 세계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잘 떨쳐버린 것이다!(≪제국≫, p. 84.)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게릴라 구조의 민주적 요소들은 한층 더 네트워크 형식으로 확장되며, 조직은 점점 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된다.(≪다중≫, p. 118.)

 

여보쇼!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네그리씨!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 된다고요? 한줌도 안 되는 초국적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세계화에 대해서 비난하고 저항하기는커녕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 된다고요? 국지적인 입장이 잘못되고 해롭다고요?

한마디만 합시다. 오늘날 세계화에 반대는 어떠한 투쟁도 그 앞잡이인 국민국가의 공권력에 잔인하게 진압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지적인 입장 즉 국민국가에 저항하고 변혁하자는 것이 해롭고 반동적이라고요? 완전히 맛이 가도 한참 갔군요!!!

차베스를 비롯한 남미 좌파 혹은 진보적 정권들의 노력에서 보듯, 미국을 맹주로 한 제국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여, 일국의 진보적 변혁과 진보적인 여러 정권의 협력 하에 초국적 자본의 국유화와 초국적 투기자본의 억제, 나아가 평등 호혜적이고 공존적인 민중무역과 같은 새로운 무역질서를 창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일국적이거나 지역적인 노력들이 반동적이고 해롭다고 주장하는 당신들의 정체는 도대체 뭐요?

자본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 민중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세계화에 대하여 저항하기보다 가속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와 같은 반동들과 함께 네그리는, 국민국가가 형해화되었다면서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이나 국민국가를 통한 변혁의 경로를 무시하나, 국민국가는 반자본과 반세계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피할 수 없는 고리이다.

우선 네그리도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고 반자본의 과제를 얘기하고 있는 바, 자본주의 사회란 무엇보다도 자본과 노동,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모순 속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모순은 자본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분열책동으로 나타난다는 점과, 자본 내에서는 노동에 대한 공동대응과 헤게모니를 위해서 협력하는 측면과 상호 갈등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가령 현단계의 자본의 운동양식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무엇보다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을 본질로 하고 있고, 그것은 복지의 축소, 노동의 유연화(실업과 비정규노동으로 나타나는 불안정 노동의 강요)로 나타나고 있으며, 의료나 철도, 물, 전기 등 공공재의 사유화 정책과 상품의 교역만이 아니라 금융을 비롯한 서비스와 지적재산권 시장 등의 개방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강요되고 추진되는 배경은 무엇인가? 한편에서는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같은 노동계급의 위축을 배경으로 한 공세적 측면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이윤율 경향적 저하의 법칙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상대적 과잉자본이 있다. 과잉자본의 투자처를 찾기 위한 욕구가 국내적으로는 공공재의 사유화와 부동산 투기 등으로 나타나고, 전세계적으로는 금융을 비롯한 서비스와 투자의 개방, 즉 초국적 자본의 운동에 방해되는 장애물의 철거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본의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WTO와 같은 국제기구나 우루과이 라운드 혹은 FTA와 같은 국제적인 협정과 협약이, 자본의 도구인 국민국가 간의 협력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국적인 협약과 질서는 독점자본 간의 갈등을 숨기지 못한다. 자본은 보다 넓고 자유로운 세계시장을 요구하지만, 한편으로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경쟁위기 속에서 GM이나 크라이슬러, AIG에서 보듯 개별자본의 생존을 위해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요청하면서 서로 시장을 놓고 적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가장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이다. 전체 근로자의 70%가 월 100만 원도 안 되는 비정규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청년들을 비롯한 광범위한 실업은 전체 민중에게 굴욕적이고 동물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고, 이를 억압하기 위한 자본의 독재형태가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이다. 즉, 자본은 노동과의 대립 속에서 국가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지 네그리의 주장처럼 국민국가를 형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자본 간의 모순과 협력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을 사상하고, 심지어 자본 간의 갈등에도 눈을 감은 채, 오직 총자본의 공통의 이익의 반영물인 국제적인 협약과 질서만을 가지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제국의 시대가 되었고, 국민국가는 제국에 주권을 양도하면서 형해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총자본이 아무리 공통의 이해를 위해 협력하더라도, 노동을 억압하고 개별자본의 경쟁과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국가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과,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있는 측면에 눈을 감는 것이다.

총자본의 이해를 위하여 개별자본들이 자신들의 도구인 국민국가를 동원하여 협력적 질서와 협약을 만든 것을 가지고, 혹은 상품과 서비스 등의 교역의 장벽이 완화된 것을 가지고, 혹은 인터넷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만을 보고, 국민국가 혹은 개별 독점자본의 각축장인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의 질서와 의지를 갖는 제국의 시대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칭송하는 것은, 네그리가 자본의 논리와 선전에 세뇌된 투항주의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8년의 촛불항쟁은 미국의 축산자본과 사료자본의 이익을 위해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게 강요한 미친소에 대한 불만으로 분출되었다. 그런데 그때도 역시 시위대를 물대포와 방패로 진압한 것이 바로 공권력이라는 국민국가의 경찰이 아니던가? 시애틀의 반세계화 투쟁이든, 또 다른 반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었던 2008년의 촛불항쟁이든, 우리의 모든 저항과 투쟁은 경찰에 의해 진압되고 있고, 그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합법적 폭력의 유일한 담지자인 주권이 국민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이 현실에서, 국민국가와 싸우는 것은 해롭고, 무익하고, 반동적이라는 이들 자율주의자들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폭력장치인 국가가 자본의 지배도구라는 점은 오늘날 체제에 대한 어떠한 저항과 도전도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의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있는 현실에서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자본가의 수중으로부터 노동자 민중의 수중으로 빼앗아 오는 것은 변혁운동의 핵심적 고리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권력이 위계적이고 비민주적인 속성을 가졌다는 것은, 새로운 권력이 직접민주주의의 원칙을 최대한 반영한 혁명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관철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권력의 파괴와 새로운 권력의 창출을 포기하자는 것은 청산주의에 다름 아니다.

결국 스스로 ‘맑스를 뛰어넘었다’는 네그리의 주장은, 새로운 현상과 추세를, 그 본질적 연관을 탐구하지 않은 채, 걸핏하면 계보학을 들먹이면서 현상에 굴복하는, 달리 말하자면,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며 현상에서 본질을 탐구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아니라 현상에서 현상으로 나아가는 비변증법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방법론에 의지하는 청산주의자의 궤변일 뿐이다.

 

2-5. 반세계화와 반자본 투쟁의 방법론

 

WTO나 IMF 등 세계화를 강요하고 조정하기 위한 이러한 ‘제국적’ 질서가, 초국적 자본 혹은 총자본의 일반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응책일 뿐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들의 강요는, 이른바 ‘악의 축’에 대한 적대나, 걸프전과 같은 전쟁이나, 우루과이 라운드처럼, 혹은 G8 정상회담처럼, 궁극에는 여러 국가들 간의 협약이나 국민국가의 정책에 대한 강요나 강제로 나타나고 있을 때, 여기에 대한 유효한 저항과 투쟁은 국민국가에 대한 압력을 통하여 이러한 회의와 합의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위해 강요되는 이러한 시도(이 시도를 ‘제국’이 하든지 혹은 다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하든지 상관없이)는, 피해 받는 민중의 입장이 관철되도록 일국적 혹은 다국적으로 국민국가를 통하여 저항하고 투쟁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지, 네트워크적인 주권(네그리는 제국은 네트워크 주권이라고 한다)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장악되어 있는 네트워크를 교란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며, 어느날 갑자기 전세계적인 노동거부로 파괴될 체제가 아니다.

정상회담의 무산을 위한 시위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무력에 의해 진압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압을 넘어서는 힘은 전 세계민중의 항의로 각국의 입장과 정책을 바꾸는 길이다. 즉 장소에 대한 시위는 더 안전한 장소와 방어를 강구하는 적들의 노력에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전쟁인 이라크전 때 파병 국가들 내에서 반전운동을 통한 각국 의회의 철군결의가 유효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각국의 입장과 정책에서 민중의 입장이 관철되도록 전세계적인 연대 속에서 국민국가내의 투쟁과 저항을 조직하는 것이 올바른 방도라 할 것이다.

즉, 설령 제국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제국의 의지라는 게 결국은 각국 자본과 세계적 총자본의 입장이 국민국가들의 정책의 갈등과 조정으로 형성되는 현실에서, 국민국가를 초월한 제국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은 황당할 따름이다. 제국의 의지란, 국민국가를 초월하여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들 간의 각축과 조정의 결과이고, 그 의지는 다름 아닌 민중과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국민국가, 즉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각국 정부들의 정책의 야합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화 정책에 반대하는 반세계화ㆍ반자본의 투쟁이 아니라, 국민국가를 무시하고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제국에 저항하자는 입장 역시 정당한 투쟁을 회피하는 청산주의적 입장에 다름 아니다. 이들 청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생적인 투쟁을 찬미하면서 네트워크로 강대하게 뭉쳐질 그날이 오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아무리 다중과 비물질노동자와 반세계화 투쟁을 찬미하고, 촛불은 영원하다고 찬미하여도, 국가적 질서에 대한 저항과 투쟁으로 이러한 저항과 투쟁을 연대할 것을 제안하고, 추동하고, 리드한다는 의미에서의 혁명적 운동 혹은 당적 운동체를 부정하는 네그리와 조정환 등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은, 궁극적 승리를 꿈꾸지 말자는 의미에서 청산주의자의 변명과 궤변으로 가득 찬 소부르주아 잡사상일 뿐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국가적 변혁을 꿈꾸는 당적 운동의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적 당적 운동과 노동자ㆍ민중이 장악한 국가권력이, 대중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조직 내부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떻게 하면 관철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화를 찬미하면서 허무맹랑한 제국이란 개념을 내세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국민국가를 부정하고 국민국가를 변혁하는 실천을 해롭다고 주장하는 자율주의자들(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조정환 등)의 주장은 참으로 해롭고 반동적이다.

 

 

3. 비물질적 노동과 다중

 

네그리는 산업노동자들이 헤게모니적이었던 포드주의 시대와는 달리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 즉 탈근대의 시대에는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으며, 맑스의 노동가치설은 폐기되어야 하며, 민중이나 대중이 아닌 다중이 제국과 맞장 뜰 그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3-1. 비물질노동의 특징과 허구성

 

노동자계급 중심주의에 대해 혐오하는 네그리는,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나 임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그 일부인 산업노동자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왜곡하면서, 산업노동이 아닌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비물질 노동은 뭐고, 네그리는 왜 이런 개념을 발명해 내었을까? 이제 그 베일을 벗겨보자.

 

20세기의 마지막 수십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적 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서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 (≪다중≫, p. 145.)

 

우리의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 오늘날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다중≫, p. 146.)

 

선진국들에서 비물질적 노동은 음식적 종업원들, 판매원들, 컴퓨터 공학자들, 교사들, 의료노동자들과 같은 …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직업들 대부분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 예를 들어 종자의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 농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말이다. 셋째, 비물질노동의 중심성은 그것이 생산하는 비물질적 형태의 재산이 갖는 중요성이 증가하는 데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나중에, 최근에 사유재산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특허권, 저작권, 그리고 다양한 비물질적 재화와 관련해서 제기된 복잡한 법적 논점들을 논의할 것이다.(≪다중≫, p. 151-52.)

 

그래서 정동적 노동은 편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 예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서비스하는) 법률적 지원노동, 항공 승무원들, 패스트푸드 노동자에게서 정동적 노동을 인식할 수 있다.(≪다중≫, p. 145.)

 

우리는 현대경제에서 비물질노동의 주요한 세가지 측면을 다룰 것이다. 즉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새로이 연결되는 산업생산의 소통적 노동, 상징분석과 문제해결을 하는 상호작용적 노동. 그리고 정서를 생산하고 조종하는 노동이 그것이다.(≪제국≫, p. 62.)

 

좀 헷갈리지 않는가? 네그리의 말을 따르면, 돌봄 노동이나 패스트푸드 노동자와 같은 서비스 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이고 정동적 노동인 것 같은데, 이런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노동의 산물이 정보, 지식, 아이디어, 이미지, 관계, 정동(이건 빼고)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이며 중요성이 점증하는 비물질적 재산일까? ‘생산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거나 아이디어나 관계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물질적 노동은 뭘까?

음식점 종업원들, 판매원들, 컴퓨터 공학자들, 교사들, 의료노동자 중에서 컴퓨터 공학자를 빼면 이 사람들은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일하거나 상징분석과 문제해결을 하는 노동의 수행자가 아니다. 네그리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전형적인 비물질 노동자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게임을 개발하는 컴퓨터 공학자나 종자의 정보 따위를 다루는 유전공학자이다. 바로 이들의 생산물이 전형적으로 특허권과 저작권의 대상이 되고 있고 중요성이 증가하는 비물질적 형태의 재산이 아닌가?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네그리의 말장난을 알 수 있다. 일단 네그리는 물질적 노동이 아닌 A, B, C, D를 죄다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다음 비물질적 노동은 a, b, c, d 적인 측면이 있다고 한다. 즉 비물질노동 중에서 오직 D만 d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도, 모든 비물질노동은 d의 측면이 있다는 식이다.

즉, 네그리는 소위 지식자본가라고 할 수 있는 공학자들의 특수한 노동을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한 다음에, 정보와 지식과 아이디어가 비물질적 특성이라고 규정하면서, 마치 패스트푸드 노동자나 음식점 판매원도 그런 노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야바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보슈! 네그리씨! 음식적 종업원이나 판매원이나 교사들이나 의료노동자가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소통적 노동을 하고 상징분석과 문제해결을 하는 상호작용적 노동자들이라고요? 부분 혹은 일부의 특수성을 마치 전체의 특징인 것처럼 얘기하는 당신과 서울역 앞의 야바위꾼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냉정하게 말해서 네그리가 말하는 비물질적 노동의 중요한 특징, 즉 정보네트워크 속에서 소통하면서 중요성이 증가하는 비물질적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는 대기업의 연구소나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근무하는 고급 두뇌들인 것이고, 이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지식자본가라고 불러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가령 유전정보나 프로그램 혹은 Windows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예컨대 5억 달러가 들었고, 그것들을 복제하는 데는 별 비용도 안 드는데,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이라는 이름 하에 50억 달러어치를 판매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복제물의 총 가치는 5억 달러(+α)이지만 지적재산권이라는 이름 하에 45억 달러가까이나 시장에서 더 수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탈하는 힘은 거대 독점기업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미FTA 협상 때 지적재산권을 20년간 인정할 것인지 50년간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옥신각신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권리가 상품이 갖는 본래적 가치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적 수탈권을 보장하는 국민국가의 인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런 황당하고 부당한 권리를 부정하기는커녕 새로운 비물질적 부라고 침을 흘리는 네그리의 반노동자적, 반노동가치적, 친자본적인 반동성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2. 노동시간이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는 궤변

 

네그리는 이렇게 현대 사회의 극히 일부인 지식자본가들의 노동을 비물질 노동의 전형인 것처럼 야바위 짓을 한 다음에, 비물질 노동은 노동일이나 노동시간과 같은 척도로 잴 수 없다며, 아예 반동으로서의 본성을 드러낸다. 네그리의 수작을 들어보자.

 

공장생산의 규칙적인 리듬과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명확한 구분은 비물질노동의 영역에서는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시간의 맨 꼭대기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회사들이, 피고용인들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가능한 한 사무실에서 보내도록 하기 위해 무료음식과 운동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 노동자들에게 부과되는 유연성과 이동성이 점증하며 공장노동에 전형적인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고용이 쇠퇴함에 따라 … 새로운 패러다임은 노동시간과 삶의 시간 사이의 분할을 침식한다. 우리가 포스트 포드주의 생산에서 보게 되는 노동과 삶 사이의 이 밀접한 관계, 시간 구분의 흐려짐은 비물질노동의 생산물들의 경우에 훨씬 더 명확하다. 물질적 삶은 사회적 삶의 수단을 창출한다. … 이와 달리 아이디어, 이미지, 지식, 소통, 협력 그리고 정동적 관계들의 생산을 포함하는 비물질적 생산은 사회적 삶의 수단이 아닌 사회적 삶 자체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비물질적 생산은 삶정치적이다.(≪다중≫, p. 186.)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 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된다.(≪다중≫, p. 187.)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는 여러 근로자들 혹은 직장인들이 작업의 성격에 따라서 엄밀하게 잔업수당이나 특근수당을 받는 직장도 있고, 수당을 뭉개거나 얼렁뚱땅하는 직장도 있다. 아무리 출퇴근 시간이 들쑥날쑥 하고 잔업수당제도가 없이 악착같이 오랜 시간을 근무시키는 직장이라고 할지라도, 자본의 입장에서는 총노동일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고 있는 것이고, 노동자 역시 그러한 잔업을 자신의 노동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즉, 포드주의 시절에 비교해서 정시퇴근이 불분명해졌고 더 오랜 시간을 자본에게 착취당한다고 하여도, 대부분의 노동자는 회사를 위해 일하는 시간과 사적인 시간을 구분하고 있다.

설령 노동시간이 길어져서 잠만 자고 출퇴근을 반복한다고 하여도 착취당하는 시간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사적인 시간은 구분이 가능하고, 자본이 노동일이나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주는 현실은 변함이 없다. 이러한 착취형태를 무슨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의 특징으로 제기한다는 것도 황당하려니와, 지급받지 못한 초과 착취된 노동시간(부불노동)에 대해서 투쟁하라고 하기는커녕 이를 근거로 맑스에 대한 적대감에 불타올라 노동가치설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네그리의 반노동자적 심정의 발로일 뿐이다.

네그리 씨! 노동자가 제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가치법칙을 포기해야 한다고요? 잔업수당을 따로 주지 않는 연봉제나 정액 월급제에서 자본가가 한 시간이라도 노동을 더 시키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예를 들어 월 200만 원에 200시간이 정상근무이고, 이때에 400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240시간의 노동을 했다면 480의 가치를 생산한 것이고, 자본가의 몫 즉 잉여가치가 200에서 280만큼 늘어났을 뿐이다. 즉, 가치는 시간에 비례했지만 착취율이 높아진 것이고, 부불노동이 확대되었을 뿐인 것은 초등학생도 알 얘기인데, 노동 시간과 삶의 시간의 구별이 흐려졌다느니 시간이라는 양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더 대꾸할 만한 가치도 없는 궤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과 삶의 시간이 불분명한 사람들도 물론 있다. 대기업의 간부들처럼 근무시간에 골프 치면서 영업을 하는 사람들과 연봉이 수십만 불에 달하는 고급두뇌들이나 예술가들은 휴식과 노동시간이 불분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네그리 씨! 이렇게 고급인재들 외에 진정으로 노동과 삶의 시간의 구분이 헷갈리는 노동자들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요? 당신은 항상 노동자들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자본가와 다름없는 사람들만 얘기합디다! 이주가 자본에 대한 저항이고, 위대한 탈주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자 역시 더 많은 고액 연봉을 위해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만의 얘기 아니요?

이러한 노동가치설을 폐기해야 된다는 주장은 “노동자의 주체성은 착취의 경험이라는 적대 속에서 창조”되며 “비물질적 생산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우리 시대에는 빈자가 생산의 패러다임적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다중≫, p. 192)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착취당하는 게 중심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중심문제라는 몰역사적인 주장으로 발전한다.

 

3-3. 산업예비군과 노동자중심주의

 

자본의 착취를 부정하고 싶으신 네그리는 가치법칙을 부정하더니, 이번에는 산업예비군이란 개념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고,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적 노동을 가르는, 언제나 의심스러웠던 낡은 맑스주의적 구분은 이제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 산업예비군 개념처럼 이 구분들도 여성, 실업자, 빈자들을 중심적인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고, 혁명적 기획을 주요한 생산자들이라고 간주된 (공장에서 굳은 살이 박힌) 남성들에게 위임하는 데 종종 사용되었다.(≪다중≫, p. 174.)

 

얀 물리에 부탕은 맑스의 “산업예비군” 개념은 우리가 말한 이동성이 지닌 힘을 이해하는 데 특별히 강력한 장애물임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 모든 노동력 형태는 자본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업인구와 이주 인구들조차 자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그리고 자본에 의해 “예비군”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은 자본의 철의 법칙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주체성과 차이를 강탈당한다.(≪제국≫, p. 284-85.)

 

자본주의 초기에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이 도시빈민이 되어 자본을 위한 노동력 공급의 풀(pool)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산업이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소생산자가 몰락하여 대다수는 임노동자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고 지금도 그렇다. 수많은 동네 수퍼들이 대형마트의 입주로 몰락한다든지, 선진국(결국 초국적 농업자본)을 위한 수출작물의 생산을 위해서 대농지경영(라티푼디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토지 농민이 발생하여 남미의 여러 도시들이 1,000만이 넘는 도시빈민으로 넘쳐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북부에서 발생하는 빈민들과 이주노동자 역시 동일한 사정이다. 이것은 세계화에 의해서 혹은 자본 또는 초국적 자본의 수탈과 착취에 의하여 분해된 소생산자들을 자본이 충분히 포섭하지 못했을 때 도시빈민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빈민들은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존재―프롤레타리아―임에는 변함이 없다. 즉, 자본에게 고용이 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혹은 실업자이건 이주노동자이건 파트타이머이건 혹은 도시빈민이건 간에, 노동력 공급의 풀로써 호황기에는 고용되어 착취당하고 불황기에는 내팽개쳐지고, 최근에는 호황기에도 높은 실업률에 고통 받는, 이들의 정체성은 자본에게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착취를 대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산업예비군일 뿐이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주체성과 차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비물질 노동자이고 다중이라는 말인가? 이들 노동력이 자본의 철의 법칙에 종속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자본의 세상과 싸워야 하지만, 네그리의 말처럼 주체성과 차이를 강탈당한 다른 존재라면 자본의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다. 바로 그 다른 존재가 비물질노동자이고 다중이다. 바로 여기에서 네그리가 그렇게 사기적으로 설명하면서 만들어낸 다중과 비물질노동자라는 개념이 자본과 싸우지 말자고 선동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3-4. ‘경향’이라는 방법론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이 양적인 면에서 지배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 하나의 경향을 부과해 왔으며 … 헤게모니적 지위를 차지했다는 것 … 그러므로 산업노동과 공장이 모든 맑스주의적 분석을 이끄는 핵심으로 남아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경향’에 대한 맑스의 방법을 상기시켜주어야 한다”(≪다중≫, p. 181)고 주장한다.

우선 네그리 씨가 말하는 맑스가 내가 알고 있는 맑스와 동명이인이 아닌가 생각되고, 맑스주의자들을 얘기할 때도 네그리 씨 옆집에 사는 맑스주의자들을 얘기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맑스는 ‘역사적 경향’에 대해 언급할 때에 네그리 씨처럼 주관에 입각한 경향만 얘기한 적이 없다. 양적으로 지배적이지 않더라도 사물과의 연관 속에서 내적인 필연으로서 헤게모니를 관철할 모순들의 운동을 밝히는 것이었지, 무슨 계보학이나 들먹이면서 헤게모니적으로 될 필연적 연관을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경향’이라는 방법론을 쓴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임노동의 관계에서 총자본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을 규명했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인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노동자만을 중심에 두고 사고한 적이 없다. 네그리 씨! 제발 얼렁뚱땅 사기나 치면서 노동자계급과 계급운동을 이간질하지 말아주세요!

 

3-5. 네트워크적인 노동의 허구성

 

네그리는 탈근대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이 되었으며, 이들 비물질 노동자들은 주로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하고 있는 생산적인 노동자라고 주장한다. 네그리의 말을 들어보자.

 

노동협동의 네트워크는 영토적이거나 물리적인 중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제국≫, p. 388.)

 

정치용어로 전 지구적 정보인프라는 네트워크 체계의 서로 다른 모델에 따라 작용하는 민주주의적 메커니즘과 소수 독점적 메커니즘의 결합체로 특징지울 수 있다. 민주주의적 네트워크는 완전히 수평적이고 탈영토화된 모델이다. … 인터넷이 이러한 민주주의적 네트워크 구조의 가장 좋은 예이다. 비결정적이고 잠재적으로 무수한 수의 상호 접속된 노드들은 어떠한 통제 중심점 없이 소통한다. … 인터넷은 중심이 없고 거의 모든 부분이 하나의 자율적 전체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네트워크는 자신의 일부가 파괴되었을 때조차도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다. 생존을 보증하는 동일한 설계요소인 탈집중화는 또한 네트워크를 통제하기 매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 이 민주주의적 모델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 즉 위계적이지 않고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 구조라 부르는 것이다.(≪제국≫, p. 392.)

 

사실은 우리가 소통과 사회적 네트워크들, 상호작용적 서비스들, 그리고 공통 언어들로 구성된 생산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상품을 사용하고 상품의 점유에서 유래하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사적 소유 개념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틀에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은 더욱 적어진다. 즉 공동체가 바로 생산하는 것이며, 생산하는 동안 바로 그 공동체는 재생산되고 재규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사적 소유개념의 근거는 탈근대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느 정도 해체된다.(≪제국≫, p. 395-96.)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구조들과 제도들은 오늘날 점차 사라지고 있다. … 제도들의 붕괴, 시민사회의 소멸, 훈육사회의 쇠퇴는 모두 근대적인 사회적 공간의 홈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통제사회의 네트워크들이 생겨난다.(≪제국≫, p. 426.)

 

네그리가 꿈에 그리는 네트워크로 소통하면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을 하고 있는 비물질적 노동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대부분 PC를 가지고 있듯이, 대부분의 생산설비 역시 인공지능 즉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공장에서도 과거에 근육노동이었던 작업이 버튼 하나로 수행되는 것이 현실이다. 산업노동자를 공장에서 ‘굳은 살이 박힌 사람’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이와 같이 컴퓨터 혹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여도 노동의 강도와 집중력은 별로 변함이 없다. 즉, 인공지능라는 생산력은 자본에게 전유되었을 뿐 노동의 절약이 노동자에게 혜택을 준 것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를 앞에 두고 컴퓨터로 노동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 역시 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이 고역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던가? 이점에서 노동의 현장에 인공지능이나 컴퓨터가 다량으로 도입되었다고 해서, 혹은 압도적으로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천국이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쨌든 네트워크란 장소적으로 분리된 존재들이 소통하는 망이고, 여기에는 대부분 컴퓨터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 노동의 대표적인 예는 은행원들일 것이다. 즉 금융산업의 종사자야 말로 전형적인 네트워크 산업이다. 그런데 네트워크로 연결된 이들 은행원들이 더 수평적인 소통을 하고 있고, 더 생산적이라고?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든 안 되어 있든, 혹은 작업에 컴퓨터를 이용하든 안 하든 간에, 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은 똑같이 고역이다. 그리고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노동을 하고 있다고 해서 결코 민주적 소통에 친화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자신에게 부과된 분절되고 협소한 작업의 수행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함께 모여서 서로 의논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 소통적이겠는가? 아니면 서로 떨어진 채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소통하는 게 더 소통적이겠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네트워크로 연결된 작업을 한다고 해서 더 민주적이라든지 더 소통적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사회적 조직과 활동에 있어서 위계적이지 않은 수평적인 결합의 경우에 민주적인 소통이 고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이 조직하고 강요하는 작업의 현장에서는 아무리 컴퓨터를 사용하고 인터넷을 활용하고 네트워크로 조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위계적인 지휘 하에 노동하는 한 그 자체가 민주적 소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이 네트워크적으로 되었다고 해서, 혹은 초국적 자본이 부품은 A국가에서, 조립은 B국가에서 한다고 해서, 하나의 대공장에서 생산하던 것과 노동자들에게 뭐가 달라진 점이 있겠는가? 네트워크로 운영되는 콜택시 기사들에게 민주적 소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국가가 전 공무원을 정부종합청사에 모으지 않고 전국에 분산시켜 네트워크적으로 소통한다고 해서 더 민주적인 행정이 되었다는 것인가?

자본의 전세계적인 확장에 발맞추어 네트워크적인 생산도 많아졌고,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산업도 있으며, 분절된 작업의 통일을 위해 팀장급(책임자급) 회의도 있지만, 즉 탈근대화 시대에 컴퓨터와 인터넷과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자의 민주적인 품성이나 소통에 기여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고, 여전히 자본에 의해 강요되는 고역인 점도 변함이 없다.

결국 설령 네트워크적으로 소통하는 노동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특별히 소통적이라든지 생산적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고, 네트워크적으로 연결되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의 차이는 거의 무의미하다. 자본의 조직 하에서 자본의 지휘 하에 있는 위계적인 네트워크가, 간부급에게라면 몰라도, 평노동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네트워크적 노동이라고 하여 마치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인터넷에서 서핑하고 소통하는 것과, 자본에 의해 조직되고 분산된 노동공간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것이 무슨 비슷한 것처럼 논지를 전개하는 데서도 네그리의 사기성이 들어난다고 할 것이다.

 

3-6. 네트워크 조직론과 네트워크 투쟁의 허구성

 

계속하여 네트워크 찬양론자인 네그리의 얘기를 들어보자.

 

911 이후 … 그들이 대면하는 적이 단일한 주권적 국민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네트워크라는 점이다.(≪다중≫, p. 87.)

 

인민군의 형성에 수반되는 중앙집중과 위계는 다양한 지역 게릴라 조직들과 반란 주민들 전체의 자율성의 극적인 손실을 초래한다.(≪다중≫, p. 108.)

 

마지막으로 시애틀에서 제노바로, 그리고 포르토 알레그레와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들에 생명을 불어 넣었던 지구화운동들은 분산된 네트워크 조직들의 지금까지로서는 가장 명확한 사례이다.(≪다중≫, p. 124.)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게릴라 구조의 민주적 요소들은 한층 더 네트워크 형식으로 확장되며, 조직은 점점 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된다.(≪다중≫, p. 118.)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분산된 네트워크의 형식으로 발전한다. 각각의 지역적 투쟁은 하나의 마디로 기능하면서 지성의 어떠한 중추나 중심이 없이 다른 모든 마디들과 소통한다. 각각의 투쟁은 특이한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지역적 조건들에 묶여 있지만 동시에 공통적인 웹 속에 몰입된다.(≪다중≫, pp. 266-67.)

 

전통적인 조직형식은 투쟁의 동일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당과 같은 중앙의 지도아래 조직된다. … 소수자적 … 운동은 … 통일성의 이름 아래 일차적인 투쟁에 종속되어야 한다. … 두 번째 모델은 각각의 그룹이 자신의 차이를 표현하고 자신의 고유한 투쟁을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권리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 차이 모델은 일차적으로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투쟁들을 통해서 발전되었다. 이 두 지배적인 모델들은 중앙집중적 동일성 아래 통일된 투쟁인가 아니면 우리의 차이들을 긍정하는 독립된 투쟁인가 사이에서 하나를 확연히 선택하도록 한다. 다중의 새로운 네트워크 모델은 이러한 선택들 둘 다를 대체한다. … 다중은 서로 모순적인 ‘동일성-차이’의 쌍을 서로 보완적인 ‘공통성-특이성’ 쌍으로 대체한다. … 새로운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공통된 것의 기둥이다.(≪다중≫, pp. 267-68.)

 

다양한 친연집단들이 합류하지만 이들이 하나의 커다란 중앙집중화된 집단 속으로 통일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차이와 독립을 유지하지만 네트워크 구조 속에서 함께 연결된다.(≪다중≫, p. 345.)

 

네그리는 네트워크적인 생산형태 하에서는 네트워크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설령 네트워크적으로 분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조직도 네트워크적으로 하자는 소리는 결코 바람직하지가 않다. 가령 우체국 노동자들이든, 혹은 전국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금융기관이나 건강보험공단 노동자들이건 간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작업장의 분산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이해를 갖는 전국적인 노조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은 상식일 텐데도, 즉 설령 네트워크로 분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집중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할 텐데도, 생산의 형태에 맞게 분산과 차이를 유지하면서 네트워크로 메신저질이나 하자는 것은 노동자의 단결에 해를 끼치는 반동적인 주장일 뿐이다.

아마도 네그리는 2000년도에 들어와 전개된 반세계화 투쟁이 네트워크로 동원된 것에 고무된 듯한데, 시애틀을 예로 들어 보면, 이들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슨 비물질 노동에 종사하는 다중이 아니라 1인당 수백만 원씩을 개인부담으로 지출하면서 시위를 불사한 활동가들이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다수 참여한 이러한 회담 반대투쟁은 일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위가 책임 있는 전술지도부나 중앙이 없는 채로 국제적 회담의 무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때, 잔인한 진압은 물론 회담장의 변경만으로도 무력화되는 운명이었다.

이것은 네트워크로 수평적으로 소통한다고 하여 집단지성이 작동하여 창조적인 투쟁을 만들어 낸다는 보장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네트워크를 장악한 권력과 자본은 언제든지 이들 네트워크를 폐쇄하거나 교란하거나 감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유약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계급대중과 결합하는 투쟁을 도외시함으로써 대중의 뿌리가 없는 소부르주아적 투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예찬만 할 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반세계화 투쟁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승리를 거둔 캔쿤 투쟁은, 네그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중앙집중적 운동체인 국제 소농조직인 비아 캄뻬씨나와 한국의 전농과 민주노총, 그리고 평등한 소통만이 아니라 의지의 결집을 모아낼 수 있는 아나키스트 그룹과 결코 스스로를 자율주의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미주와 유럽의 수많은 활동가 소그룹들이 활동가 연대체에 결합하여, 이들 네 단위들(즉 비아 캄페시나와 한국원정단과, 아나키스트그룹과 활동가 연대)이 연대하여 투쟁지도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소그룹이 소그룹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그룹으로 중층적인 네트워크와 연대를 형성하고 민주적인 상층연대를 구성했을 때 쟁취할 수 있었던 승리였다.

또 포르토 알레그레와 뭄바이를 구경만 하신 네그리 씨는 네트워크적 참여만 보았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행사마저도 인터넷 상에서 게나 고동이나 제안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뢰받는 영향력 있는 그룹들의 내부 논의를 통해서 정리된 제안에 의한 것이고, 행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과,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리딩 그룹들이 있어서 가능한 행사였다. 마치 2008년의 촛불집회 때의 대책위처럼 최소한 권위 있게 판을 까는 유능한 그룹이 있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들 리딩 그룹이 지도부로서, 혹은 군림하는 권위 있는 중앙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역량 있고 신뢰받는 헌신체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이점에서 군림하지 않는 평등한 주체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대책위는 이 원칙을 넘어서 대중을 지도하고, 때로는 억압하려 했기 때문에 불신을 받았던 것이고 …. 즉, 시애틀이건 포르토 알레그레이건 간에 중추적인 리딩 그룹과 이에 호응하는 소그룹들이 서로 존중하는 중층적 네트워크였던 것이지, 네그리가 말하듯 절대적으로 수평적인 존재들의 네트워크가 자생적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니었다.

네그리는 네트워크를 절대시하면서 민주적 운동형식을 강조하지만, 요즘 어떠한 연대투쟁도, 그 속에 당이나 노동조합이 결합을 하든 않든 간에, 민주적인 소통과 의결구조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은, 한국사회의 수많은 사안별, 의제별, 연대 투쟁체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까닭은 어느 단체도 특정한 권위를 갖지 않은 상황에서는 민주적 결정구조가 상식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기 때문에 사실 이는 당연한 얘기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용산투쟁을 예로 들면, 당사자인 용산 4지구의 철거민과 유가족들만이 아니라 도시빈민조직이라 할 수 있는 전철연을 비롯한 다양한 철거민 단체와 진보신당과 사노준, 사노련을 비롯한 수많은 당 운동체와 인권단체, 나아가 민주노총과 사회적 실천에 관심이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등 여러 종교단체들까지 범대위라는 사안별 연대투쟁체에 결합되어 있다. 물론 이 연대체는 결코 네트워크 조직도 아니고, 또한 일국적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자율주의자들은 참여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각 조직은 다양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면서 훌륭한 저항과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또 ‘외부 좌파세력의 선동에 놀아나지 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다양한 당적 운동체들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단체와 정치투쟁단체들이 결합하여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해고 반대는 결코 자본-임노동 관계를 극복하자는 반자본의 투쟁이 아니다’라고 빈정대는 자율주의자들은 결합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파업지도부와 상황실은 민주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고 대중은 그들을 신뢰하고 있다. 네트워크적으로 노동하는 쌍차노동자들은 결코 조립부와 도장부, 운반부, 혹은 1공장, 2공장, 3공장으로 나뉘어서 차이성이나 씨부랑거리면서 네트워크적인 소통이나 하자는 수작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그리는, “분산된 네트워크는 떼(swarm)를 이루어 자신의 적을 공격한다. … 전통적인 모델들에 의해서만 사고를 할 수 있을 뿐인 사람들 … 그들은 단지 자생성과 무질서만을 보는데 … 네트워크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실제로는 조직적이고 합리적이며 창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네크워크는 떼지성을 가지고 있다. … 어떤 중앙통제 없이 지능체계를 형성한다. 떼지성은 근본적으로 소통에 기초하고 있다”(≪다중≫, p. 127)든지,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갖가지 다양체의 소통과 협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집합적 지성”(≪다중≫, p. 128)이라면서, 자꾸 떼지성이니 집단지성을 얘기하지만, 개방적이고 진정한 민주적 토론구조라면 집단지성과 창조성은 보장되는 것이고, 굳이 네트워크적 연대만이 독점하는 장점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네트워크란 자본이 장악하고 국가권력이 통제하고 감시하는 도구이다. 네트워크로 소통하고 동원하는 투쟁은 자본의 도구인 국가의 단 한 번의 결정만으로 폐쇄되고 무력화될 뿐 아니라, 도청과 감청을 통하여 감시되고 있고, 선동과 조작을 통해서 교란되고 있다.

강력한 조직을 만들고 연대를 구축할 것이 아니라 오직 소그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네트워크로 소통하면서 한날한시에 전세계적으로 노동의 대거부를 하여 제국을 끝장내자는 네그리의 대기주의적이고 한탕주의적 주장은, 보다 강고한 투쟁을 건설하려는 노동자계급의 발목을 잡고 투쟁의 모든 정보를 자본과 국가에게 갖다 바치자고 선동한다는 의미에서 자본의 첩자들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네그리가 말로써 들먹이는 코뮤니즘의 실현은 국민국가의 혁명적 변혁을 통해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회피하고 무시하면서 끼리끼리만 만족하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자율적 공동체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나아가 자연발생적인 저항체들의 투쟁이 네트워크로 단결해서 제국으로부터 대탈주가 일어날 날을 기도하자는 수작에 대해서는 경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크리스 하먼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는 없다면서, “네그리와 자율주의자들이 (반세계화) 운동 자체의 추동력과 모멘텀을 칭송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지금 체제에서 희생자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희생 때문에 결국 저항을 할 것이고, 조직화할 필요가 없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될 수 있기 때문에, 정당은 우리 운동에서 설 자리가 없고, 해야 할 역할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반자본 운동이 성장할수록 국가 권력의 폭력적인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도 국가와 국가의 폭력을 무시하고 모든 운동들이 자동적으로 네트워크로 단결해서 제국이 끝장나길 바라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중이 저항과 투쟁 속에서, 그리고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을 때에, 그들이 더욱 강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뭉쳐야 하고, 연대해야 하고, 강력한 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를 깨우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파리코뮌이나 광주항쟁 때에 수만 명의 시민이 단결하여 계엄군을 몰아냈을 때에도, 네그리의 주장처럼 강력한 중앙집중적 항쟁지도부를 건설하면 개인의 창의성을 해치는 비민주적 기구가 될 것이므로, 그냥 소그룹이나 개인으로 남아 절대적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네트워크적 연대나 하자는 수작 역시 혁명을 포기한 청산주의자의 궤변일 뿐이다.

 

3-7. 절대적 민주주의와 혁명적 민주주의

 

그러나 자신의 탈영토화된 자율성 속에서 대중이 이렇게 생체 정치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자율적인 많은 지적 생산성으로, 절대적 민주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생산, 교환 그리고 소통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배는 전복될 것이다.(≪제국≫, p. 442.)

 

혁명적 시기에 나타나는, 즉 대중이 주체로서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직접민주주의란 모든 대중이 중요한 결정에 대하여 직접 참여하고, 논의하고, 결정하고, 보고받고, 검증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의 이상으로서, 역사 속에서는 무엇보다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라는 측면과, 소환제를 특질로 하고 있으며,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비권위적이고 대리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참여하는 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함께 모여서 결정하고, 결정된 결과에 따르는 것은, 대중의 자기 지배의 이상인 바, 필연적으로 실천의 주체인 대중이 직접 결정에 참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로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광주항쟁 때나 러시아 혁명기의 수병 소비에트에서는, 수백, 수천 명의 군중이 중요사항에 대하여 광장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발언하고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었다. 때로는 파리코뮌의 군사위원회에서 보는 것처럼, 대대에서 군단평의회 위원을 선출하고, 군단평의회에서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파견할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것은 수천, 수만 명이 함께하는 광장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상향식, 즉 아래로부터의 구성이었으며,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는 점과, 간부라고 하여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과 함께 더욱 중요한 것은 파견의 성격이었다.

즉, 대의제 민주주의의 국회의원처럼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한 단위에서 사전 논의와 사후보고를 통하여 전체 성원이 동일한 의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결정한 결과를 전달하는 사자(使者) 즉 심부름꾼인 것이다. 때문에 대표라고 하여 단지 보수만 동일할 뿐 아니라 자기 성원보다 높은 지위와 권위가 주어지지 않고, 평등한 위치에서 때로는 성원의 의사에 복종하는 심부름꾼으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구성원이 다수여서 한자리에 모일 수 없을 때, 전체 성원의 민주적인 참여와 결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혁명 대중이 창조적으로 찾아 낸 방안이었다.

또한 이처럼 평등한 참여가 보장될 때에 대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혁명의 와중 속에 모두가 적극적인 실천의 주체이자 자기운명의 주체로서 참여했을 때 얼마나 많은 창조적인 실천이 나왔는지는 예를 들 필요가 없다. 대중이 혁명적이어서만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 결정에서 소외되지 않은 주체로서 참여했을 때 창조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촛불항쟁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모든 저항은 공권력의 탄압에 직면하고 진압되는 운명에 놓여지는 것이고, 이러한 폭압적 물리력을 저지하고 깨부수는 방법은 강고한 조직력밖에 없다. 이러한 때에 위계제와 중앙집중적인 구조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문제는 이러한 중앙집중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민주주의를 관철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 해답은 파리코뮌과 같은 혁명적 시기에 등장한 혁명적 민주주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위계제와 중앙집중적 구조는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연대와 단결로써 강고한 실천체를 만들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소통하는 소그룹만이 정답이라고 주구장창 외치는 자율주의자들은 투쟁의 승리를 포기한 패배주의자에 다름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 네그리처럼 이제는 국민국가가 형해화되어 제국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은 무의미하고, ‘타이밍이 중요하다’면서 날 잡아서 한 일주일 동안 전 세계의 다중이 노동과 생산을 거부하고 대탈주를 감행하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절대화라는 가면 뒤에 숨은 청산주의자의 요설일 뿐이다.

무장한 집단적 폭력인 공권력에 대하여 원자화된 다중이 네트워크로 소통하여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정권이 중요한 시기에 아고라를 비롯한 소통의 장을 폐쇄시키는 것만으로도 네트워크가 무력화 된다는 점과, 나아가 중심을 갖지 않은 네트워크는, 즉 민주적으로 선출된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는,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누구나 제안하고 선동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음모와 교란을 목적으로 한 선동 역시 똑 같은 권리로 제안되고 선동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즉 6ㆍ10에 광화문에서 모이자는 제안이 있다면, 청계광장이나 시청에서 모이자는 제안과 선동도 동일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모든 성원이 함께 모여 결정하고 실천하는 광장의 민주주의가 이상적이겠지만, 설령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일지라도 투쟁 속에서 획득된, 민주적이고 비권위적 신뢰에 기반하여 헌신할 의무 외에 아무런 특권이 없는 (즉 전권을 가진 대표자나 대리인이 아니라) 사자(심부름꾼-머슴)들의 아래로부터 쌓아 올린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관철되는 것이지, 뭉치지 않고 분자화된 개인이나 소그룹이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할 때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 씨! 나는 절대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그날(결국 무책임한 선동가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다가 죽느니보다는, 강고하게 뭉치면서도 민주적으로 실천하는 혁명적 민주주의를 신봉한답니다!

 

3-8. 다중, 민중, 대중, 그리고 노동자와 빈자의 차이

 

국민국가와의 투쟁을 부정하는 네그리는 민중과 대중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다중으로 나아간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인민군 모델과 게릴라 모델 모두에서 ‘민중(인민)’이라는 생각이 조직의 권위를 확립하고 폭력사용을 합법화하는 데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민중은 지배적 국가권위를 대체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주권형태이다.(≪다중≫, p. 113.)

 

다중 속에서 융합하는 형상들―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은 구체적인 장소들에서 삶의 독특한 형식들을 대표하는 삶정치적 형상들이다.(≪다중≫, p. 199.)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 특이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 민중의 구성부분들은 무차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들의 차이를 부정하고 단념함으로써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 따라서 다중의 복수적인 특이성들은 민중의 획일적인 통일성의 반대편에 서있다.(≪다중≫, p. 135.)

 

특이성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행동하는 다중은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를 나타낸다. 다중의 구성과 행동은 정체성이나 통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한다.(≪다중≫, p. 136.)

 

일국적으로건 전지구적으로건 노동자들과 빈자들 사이의 분할의 선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공통적인 조건내부의 위계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중은 모두 생산적이며 다중은 모두 가난하다.(≪다중≫, p. 173.)

 

노동자의 주체성은 착취의 경험이라는 적대 속에서 창조된다. 비물질적 생산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우리 시대에는 빈자가 생산의 패러다임적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다중≫, p. 192.)

 

만일 모두를 위한 보장소득의 요구가 국가의 영역을 넘어 전지구적 요구로 확대된다면, …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기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다중≫, p. 175.)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네그리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 다양한 존재들이 있는데, 이들을 민중이라는 통일성 하에 묶어서 국가권위에 대항하는 것은, 국민국가가 형해화되어 이미 의미가 없고, 나아가 그 투쟁 속에서 다양한 존재들의 차이성이 무시되기 때문에, 제국의 시대에는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성과 차이가 존중되는 다중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착취 받는 계급 혹은 대중이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없으므로 빈자가 공통적인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국민국가가 형해화되고 제국의 시대가 되었다고 우기더니, 이제는 착취가 중심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문제라면서, 자본-임노동 관계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착취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가난한 자이니까 소득을 보장해달라는 보장소득의 요구로 나아간다(보장소득의 허구성은 뒤에서 다룸).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것이 총자본과 초국적 자본의 공격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나, 노동의 유연화와 복지의 축소 역시 자본의 노동에 대한 공격이고, 자본이 생산의 과정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상품화하고 있든 현실에서, 사유화―결국 상품화에 반대하고 공공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이윤을 위한 상품생산을 본질로 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폐지하는 반자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런데 대중의 절대 다수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지 않으면 안 되는 프롤레타리아라고 했을 때, 그가 자본에 직접 고용이 되어 있든, 혹은 도시빈민으로서 산업예비군을 이루든 간에, 프롤레타리아(무산대중)나 노동자계급의 주체성을 가질 문제이지, 착취관계는 제쳐 놓고, 즉 반자본은 제쳐 놓고 가난의 문제로 싸우자는 것은, 가난과 빈자가 수천 년간 계속 존재해왔다는 점에서 몰역사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네그리의 주장은, 반자본 계급운동을 방기하자는 것으로서 더 논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소위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는 공무원, 교사, 과학기술 연구자(과기노조) 나아가 연예인이나 프로야구 선수들까지도 자본에 대립하여 노조를 결성하고 있는 마당에, 그들도 역시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 노동자이고 프롤레타리아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깨우치고 뭉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네그리는 노동자계급 중심주의가 마치 산업노동자만을 중심에 두는 것으로 왜곡하면서, 무슨 비물질노동과 다중이란 개념을 창작하여 전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이간질하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역사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반동적 행위라고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계급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 생태, 평화, 소수자 등의 정체성이 있고, 이들의 차이와 주체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대중의 절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인 한에서, 착취의 문제를 버리고 결국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가난한 자로 행세하자는 네그리의 수작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다.

 

3-9.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

 

이번에는 소위 공통적인 것에 대한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의 패러다임에서 가치이론은 측정된 시간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래서 착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 예를 들어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에 대해 생각해보라. 언어, 아이디어, 지식을 생산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이 사유재산이 된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의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다중≫, p. 191.)

 

공적 재화와 서비스들이 국민국가의 수중에 있는 근대적 주권의 바로 그 토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떻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낡은 대립 속에 빠지지 않고 공통적인 재화와 서비스들의 사유화에 저항하는 방법을 구상할 수 있을까?(≪다중≫, p. 253.)

 

일반 이익, 또는 공공 이익 개념을, 이러한 재화들과 서비스들의 관리에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정치적 생산의 탈근대적 변형에 연결되어 있는 법률적 문제가 공공이익에서 후퇴하여 상이한 사회적 정체성들을 기초로 한 사적 통제를 향해가지 않고 오히려 공공이익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인 틀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을 믿는다. 공통이익은 국민국가의 법률적 도그마를 정초한 공공이익과는 대조적으로, 사실상 다중의 생산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공통이익은 국가의 통제 속에서 추상화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인, 삶정치적인 생산 속에서 협력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재전유된 일반 이익이다. 즉 그것은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을 관리되는 일반 이익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분석한(긍정적인 외부효과들에 의해, 또는 새로운 정보네트워크들에 의해,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협력적이고 소통적인 노동형태들에 의해 창출된 공통성과 같은) 경제적 삶정치적 활동과 일치한다. 요컨대 공통적인 것은 주권의 새로운 형태, 즉 민주적인 주권을 나타내는데, 여기서 사회적 특이성들은 자신들의 삶정치적 활동을 통해 다중 자체의 재생산을 가능케 해주는 재화들과 서비스들을 통제한다. 이것이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에서 공통된 것에 기반을 둔 코뮌으로의 이행을 이루어낼 것이다.(≪다중≫, p. 254.)

 

결국 네그리는 공적인 문제, 즉 교육이나 물, 전기, 의료 등등의 공적인 영역을 상품화하지 말자는 우리의 입장과는 달리, 다중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지식이나 이익 즉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 금융자본의 이익 그리고 외부효과, 즉 도로의 신설로 주변의 주택이 얻는 이익 같은 것을 공통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주장이다. 사적소유제도 때문에 자본가가 전유하였던 소위 공통적인 것은 사적소유를 폐지하거나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의 법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해결되는 것인데, 이것을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에서 공통으로 생산하였으니 공통으로 관리하자는 주장은 자본의 권리 전반을 폐지하자는 주장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 국가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주체성인 민중과 프롤레타리아라는 통일성을 부정하고, 따라서 국가권력과 그에 따른 주권적 법률적 통제인 사적소유의 폐지와 부정이 아니라, 단지 자본이 전유할 권리가 없는 공통적인 생산물을 공통적으로 관리하자는, 예를 들어 공통적으로 생산된 종자 정보나 특허권ㆍ지적재산권을 공통적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엄청나게 혁명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의 권리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가치가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는 무관하거나 애매하게 발생한 가치만을 공통적으로 관리하자는 것이다. 네그리는 바로 이걸 주장하기 위해서, 즉 착취관계와 싸우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 노동가치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4. 네그리의 제안들

 

… 우리는 정치적 행동주의, 계급투쟁, 혁명조직의 몇몇 기본적인 전통적 모델들이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무용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그것들이 종지부를 찍게 된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다중 자체의 변형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계급들의 전지구적 재구성,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리고 네트워크 구조들에 기초하는 의사결정 형태들 등은 모두 모든 혁명적 과정의 조건들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예컨대 파리코뮌에서 10월 혁명에 이르는 많은 에피소드들 속에서 일차적으로 규정된 전통적인 근대적 반란관은, 대중들의 반란적인 활동에서 정치적 전위들의 창출에 이르는, 대항권력조직의 구축에서 국가권력의 장악에 이르는, 그리고 제헌과정의 개시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립에 이르는 운동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혁명적 활동의 이러한 연속은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다. 그 대신 반란의 체험은 다중의 살(flesh) 속에서 재발견되고 있다. 반란활동은 더 이상 그러한 단계들로 분할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동시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저항, 탈출, 적의 권력의 공동화 그리고 다중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동일한 과정이다.(≪다중≫, p. 103)

 

자본과 세계화에 반대하는 듯한 네그리가 제국에 대항할 주체로서의 ≪다중≫이라는 책을 쓰면서, 자본과 세계화가 강요하는 착취와 수탈과 억압과 소외에 대한 일언반구의 묘사도 없이 오직 전쟁과 민주주의만 거론하면서, 저항의 형태면에서 포드주의적 시절에는 인민군이 유효했고, 농촌에 중심을 두거나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에는 다중심적 게릴라전이 유효했지만, 이들 운동은 결국 중앙집중적 단일체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는데, 비물질노동이 헤게모니를 갖는 네트워크 시대에는 특정한 중심이나 중앙이 없이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다중의 네트워크 운동이 시대에 적합한 이행형태라고 주장하며, “전쟁에 저항하기, 그리하여 이 전지구적 질서의 정당화에 저항하기는 공통적인 윤리적 과제이고 … 자본은 다중의 저항에 의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해지고, 다중과 제국의 육박전에서 다중은 자신의 토대로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이 민주적 운동은 탈출(exodus)의 과정이며, 제국적 주권의 권위를 종속된 사람들의 동의에 연결시키는 끈을 다중이 끊는 과정”(≪다중≫, p126)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이 싸움은,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WTO 회담에서의 극적인 사건들에서부터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의 집회에 이르는, 지구화 문제를 둘러 싼 일련의 항의들과 시위들 전체를 관통한다. 민주주의를 바라는 욕망은 또한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항하는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항구적 전쟁상태에 대항하는 다양한 운동들과 시위들의 핵이다.(≪다중≫, p. 101.)

 

국민국가를 부정하고, 노동가치설과 노동자계급 중심주의를 부정하는 네그리는, 당연한 귀결로서 착취관계에 기반한 반자본 투쟁(자본의 착취권은 결국 국민국가가 인정한 소유권이고, 국민국가의 변혁 없이 자본운동은 제약되거나 폐지되지 않는다. 즉 반자본은 국민국가의 변형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 눈을 감기 위해서, 착취 받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저항의 주체로서 빈자라는 정체성인 다중을 제시하고, 다중의 정체성은 공통된 것(종자정보와 같은 공통의 지식이나 지적재산권)을 강탈당한 데서 찾자고 한다.

세계화를 찬양하고 미제국주의를 찬양하더니, 결국 반자본의 이념을 폐기하고 지적재산권 등으로 얻는 자본의 폭리를 공동으로 참여하여 관리하자는, 사민주의보다도 못한 자유주의적 이상을 향해 달려가자는 이런 헛소리까지 따로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친세계화와 자본(의 특별이윤)에 빌붙기를 주장하는 네그리에게 남은 것은, 직접적으로는 계급투쟁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전쟁반대나 민주주의와 같은 주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다중≫이란 책이 제1부 전쟁, 제2부 다중, 제3부 민주주의로 구성된 이유이고, 바로 여기에서 네그리의 본질이 독점자본의 특별이윤을 질투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의 사상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여보슈! 네그리씨! 나도 전쟁반대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누구나 앞장서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란 반자본의 투쟁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우!

 

4-1. 도주와 탈주(exodus), 그리고 삐딱한 자세와 변증법적인 투쟁

 

보편적 유목주의에서 새로운 형상들과 주체성들이 생산된다. 대중이 지닌 탈영토화하는 힘은 제국을 유지하는 생산력이자 동시에 제국의 파괴를 요청하고 제국의 파괴를 필연적이게 하는 힘이다.(≪제국≫, p. 102.)

 

하나의 유령이 세상에 출몰하는데 그것은 이주라는 유령이다. … 도주와 탈출은 제국적 탈근대 안에서 대항하는 강력한 계급투쟁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성은 자생적인 투쟁수준을 이루고 있으며…’(≪제국≫, p. 285.)

 

대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조건의 국지적이고 특별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서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삶을 구축하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야만적 이행이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말하듯이, 이것은 긍정적인 야만행위이다.(≪제국≫, p. 287.)

 

이러한 야만적 전개과정은 … 무엇보다도 젠더와 성이라는 신체적 관계 및 배치에서 인식할 수 있다. 젠더 사이에서 그리고 젠더 안에서 신체적 성적 관계들이 지닌 관습적 규범들은 점점 더 도전과 변형에 열려있다. 신체들 자체가 변형되고 변하여 새로운 탈인간적 신체를 창조한다.(≪제국≫, p. 288.)

 

오늘날의 신체적 돌연변이들은 인류학적인 탈출을 구성하며…(≪제국≫, p. 289.)

 

대항의지는 실제로 명령에 완전히 복종할 수 없는 신체를 요구한다. 대항의지는 가족생활에, 공장 규율에, 전통적 성생활의 규제 등에 적응할 수 없는 신체를 요구한다.(≪제국≫, p. 339.)

 

나는 이 따위의 신체적, 인류학적 탈출에는 관심이 없으니 비판을 생략하겠다.

 

횡단적 이동성이야말로 수목적이라기보다는 리좀적이다. … 훈육된 노동력이 지닌 새로운 횡단적 이동성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적이고 강력한 자유추구를 훈육체제 안에 제한되고 통제될 수 없는 새롭고 유목적인 욕망들의 형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제국≫, p. 339.)

 

인구의 이동성 때문에 국내 시장(특히 국내 노동시장)을 개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점점 어렵게 된다. 자본주의적인 명령의 적용을 위한 적절한 영역은 더 이상 국가 경계나 전통적인 국제적 경계선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제국≫, p. 339.)

 

자본은 다중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명령과 권위에 대한 다중의 저항에 의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삶정치적 장에서 벌어지는 다중과 제국의 육박전에서, 다중은 자신의 정치적 토대로서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 민주주의는 ‘절대적 민주주의’이다. 우리는 또한 이 민주적 운동을 ‘탈출(exodus)’의 과정으로 부를 수 있다. 제국적 주권의 권위를 종속된 사람들의 동의에 연결시키는 끈을 다중이 끊는 것이 거기에 포함되는 한에서 말이다.(≪다중≫, p. 126.)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첫 번째 층위의 공화주의적 원칙을, 즉 도주, 탈출, 유목주의를 본다. 훈육시대에는 사보타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의 통제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일 것이다. 근대에서의 대항은 종종 직접적인 그리고/혹은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의미했던 반면, 탈근대에서의 대항은 애매하거나 삐딱한 자세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당연하다. 제국에 대항하는 전투는 삭제와 태만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주는 어떤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장소를 철거하는(비우는) 것이다.(≪제국≫, pp. 283-84.)

 

일주일간의 전지구적 파업은 그 어떤 전쟁도 저지할 것이다.(≪다중≫, p. 413.)

 

허허허! 제국에는 경계도 없고 안도 밖도 없다면서 어디로 탈출을 하자고? 이주 노동이, 자본의 요구에 의한 것일 뿐, 자본에게 부담을 주기는커녕 자본의 축적에 기여하는 판에, 탈영토 운운하면서 고국을 떠나 사회의 최하층으로서 착취당하는 것을 창조적인 저항이라고 칭송하더니, 변증법적으로 대립하지 말고, 즉 anti로서 반자본의 전면전을 하지 말고 삐딱하게 태만으로 저항하자고? 그러다가 짤리면 어떡하려구? 권력의 장소를 비우는 도주란 뭔데? 날 잡아서 전세계적으로 일주일만 파업하면 끝난다는 그 얘기 하는 거요? 일국에서의 총파업도 제대로 하기 힘든 판에, 아니 지난 10년 동안 연맹 총파업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판에, 뭔 세계적인 총파업? 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런 날이 오기만 기다리자는 수작 아니우? 자본과 제국주의자들이 (노여워하는 척하며) 무척 고마워하실 발언이군요.

물론 삐딱한 저항도 때로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작년에 시위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우보산책의 제안이 있었다. 그냥 시 중심가 광장에서 서로 어울리지 말고 천천히 어슬렁거리면서 산책만 하자는 제안이었다. 벨로루시에서는 독재자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실천도 있었고, 작년 겨울 광화문에선 촛불산책도 있었다. 이러한 저항은 저항이 극도로 억압당하고 위축되었을 때, 공권력이란 폭력 앞에서 시민의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을 때, 즉 역관계가 극도로 불리할 때 저항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권력에 대한 조롱이고 해학이다.

2008년 광화문에 수십만 명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어도, (물론 촛불이 많이 나와 거리와 광장을 장악했을 때는 굳이 촛불을 들지 않았지만,) 노골적인 폭력 앞에선 속수무책이지 않았던가? 저항의 힘이 극도로 약하고 위축되어 있을 때에는 삐딱한 저항이라도 하자는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궁극에는 변증법적인 정면대결을 하지 않으면 권력의 타도도 없고, 설령 이승만처럼 독재자가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다른 정상배들에게 혁명의 성과를 도둑질 당한다는 것, 이런 게 역사의 교훈이다.

삐딱한 투쟁은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는 약자의 투쟁이다. 그러나 오늘은 비록 약자여서 삐딱하게밖에는 저항할 수 없지만 내일은 당당하게 정면의, 즉 변증법적인 투쟁을 꿈꾸는 투쟁이다. 어떠한 투쟁도, 설령 그 잘난 탈근대화의 시대에도, 저항이 성장하면 더 이상 삐딱할 필요 없이 당당하게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네그리가 변증법적인 대결을 시대에 낡은 것으로 매도하면서, 오직 삐딱한 것만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절대화하고 있는 것은, 행여나 대중의 저항이 성장하여 삐딱함을 벗어 던져야 될 때에도 당당하면 안 된다며 투쟁의 발목이나 잡을 훼방꾼으로서의 역할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고, 그가 궁극의 승리를 포기한 패배주의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세계화와 미제국주의의 어마어마한 힘에 굴복한 것처럼 … 네그리 씨! 제발 요사스러운 소리는 그만하고 구경만 하세요!

이처럼 네그리가 삐딱함만을 찬양하는 이유는, 국민국가에 반대하는 일국적 투쟁,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지적 기획,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반자본의 계급투쟁을 부정했을 때, 이미 예견되었던 주장이다. 강고하게 뭉치는 것은 낡은 것이니까 다양성과 차이성을 존중하면서 네트워크만 하자는 사람이 어떻게 적을 부정하는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계급이여! 제발 뭉치지 말고 자본과 국가에게 정면으로 힘의 대결을 하지 마시오! 당신들의 투쟁은 이미 낡았습니다. 삐딱함이라는 첨단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즐깁시다! 이것이 바로 투항주의자인 네그리가 ≪다중≫이란 책을 쓴 목적이다.

 

4-2. 보장소득

 

다중의 정체성이 빈자들인 한 소득을 얘기하는 것은 필연이다. 착취관계의 폐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세상의 주인이 되자는 얘기가 아니라 자본의 소득을 좀 나눠 주시라는 말씀이다.

 

언젠가는 가난의 공통적인 조건에 반대하는 항의들이 구성적인(입헌적인) 정치적 기획들 속에서 이 공통적인 생산성을 들어내야 할 것이다. … 보장소득―고용과 상관없이 모든 시민에게 지불되는 소득―에 대한 요구는 가난을 겨냥하는 그와 같은 구성적 기획이다. 만일 모두를 위한 보장소득의 요구가 국가의 영역을 넘어 전지구적 요구로 확대된다면, 이것은 지구화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기획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기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 (≪다중≫, p. 175.)

 

이제야 부의 분배, 즉 착취관계의 폐절이 아니라 착취자의 온존을 주장하시는 네그리씨의 소부르조아적 본색이 드러나는군요.

네그리는 ≪제국≫과 ≪다중≫이라는 책을 통하여 국민국가와 싸우는 것도 무의미하고, 비정규직 복직투쟁이나 임금인상 투쟁도 반자본의 의미가 없다고 빈정대면서 제국과 맞장 뜰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그 하나는 강고한 조직운동 같은 것은 만들지 말고, 네트워크로 메신져나 하면서, 날 잡아서 한 일주일만 전세계적으로 노동거부를 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장소득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대거부(사보타지)에 대해서는 위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보장소득에 대하여 논하기로 하자.

보장소득 혹은 기본소득이란, 노동에 참여하든 않든 간에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달라는 주장인 바, 고용과 노동의 제공 여부와 상관없는 보장이라는 점에서 얼핏 진보적인 것 같지만, 바로 이 주장이야말로 네그리가 소부르주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이 주장은 자본에 반대하거나 자본의 철폐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게 자본의 돈으로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요구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작년도 GNP는 1,000조 원이고, 국가예산은 230조인데, 곽노안 교수의 추산에 의하면 기본소득액은 280조 원이 된다. 그런데 이 재원을 불로소득에서만 조달하자고 했을 때는 자본이 자본임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 그 재원은 국민의 세금이 되는 것이어서 일정소득 이상의 사람은 자기 돈을 내었다가 자기 돈을 되돌려 받는 것이고, 따라서 극빈층만이 이해관계를 갖는다. 허경영이 이미 이와 비슷한 선동을 하였지만, 설령 실현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층의 소수일 뿐 국민적 운동이 될 수도 없다. 또한 전국민적 요구로 국가와 자본이 이 제안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이해에 맞게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국민의 보장소득 혹은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국가인 브라질에서도 시행되고 있고, 복지강국인 독일에서도 관리비용의 축소 면에서 검토되고 있다. 자본의 폐절의 이념을 담지 않은 이러한 주장과 운동은 결국 서구 사민주의의 현실에서 보듯 자본과의 공존, 나아가 자본에 대한 구걸로 귀결될 운명이고, 더구나 화폐로 지급되는 이러한 소득은 삶의 상품화에 더욱 기여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이 역시 소부르주아적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요구를 국민국가의 형해화를 주장하는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설령 전 세계적으로 요구한다고 하면 그 기준소득을 몇 달러로 할 것인지도 궁금해진다. 인도는 100달러로 하고, 한국은 1,000달러로 할 것인가?

결국 보장소득이란 제대로 실현될 전망도 없는, 나아가 자본과의 공존을 운명으로 하는 소부르주아적인 발상일 뿐이다.

 

4-3. 사랑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사회체를 창조하는 것이고, 이 새로운 사회체는 거부를 훨씬 능가하는 기획이다. 단순한 거부를 넘어서 또는 그 거부의 일부로서 우리는 또한 새로운 삶의 양식과 무엇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벌거벗은 삶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간 homohomo, 즉 집합적 지성과 공동체의 사랑에 의해 알맞게 되고 풍부해진 인간성으로 향한다.(≪제국≫, p. 274.)

 

이러한 내부는 ‘대중의’ 지성과 정서의 네트워크의 생산적인 협동, 즉 탈근대적 생체정치의 생산성이다. 이러한 전투성은 저항을 대항권력으로 만들고 반란을 사랑의 기획으로 만든다.(≪제국≫, p. 520.)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 모두 다중의 공통적인 물질적ㆍ정치적 기획 속에 표현되고 구체화된다. …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다중≫, p. 417.)

 

타이밍이 결정적이다. … 폭력과 모순, 전지구적 내전, 제국적 삶권력의 부패 그리고 삶정치적 다중의 무한한 노력의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엄청나게 축적된 불만들과 개혁제안들이 어느 시점에선가 강력한 사건에 의해, 급진적인 반란의 요구에 의해 변형될 것임에 틀림없다. … 머지않아 하나의 사건이 그와 같은 살아 있는 미래 속으로 우리를 화살처럼 쏟아 넣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진정한 행동이 될 것이다.(≪다중≫, p. 424.)

 

결국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은 네트워크적으로 소통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급진적 반란이 일어날 그날까지 메신저질이나 하자는 얘기인데, 여기서 사랑을 들먹이는 이유는, 착취관계에 기반한 적대에 기반하면 자본에 반대하자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적대의 통일성에 기반한 민중이나 대중이 아닌, 빈자들의 사랑에 기반한, 그리하여 공통으로 생산된 독점자본의 특별이윤을 보장소득으로 나눠달라고 하면서, 말하자면 신앙촌운동이나 하면서 예수가 재림할 그 날을 기다리자는 게 네그리 주장의 핵심이다.

최근에 네그리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조정환이, 전기를 자급하는 방법을 찾자느니, 스스로 건강을 돌보자느니, 공동체 정원을 만들자느니 등등, 체제와 변증법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삐딱하게 혁명을 흉내 내는 자율적 공동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담은 책을, “세상을 바꾸는 즐거운 상상”이라는 부제를 달아 <<혁명을 표절하라>>는 책으로 내고 있는 것도, 네그리 등이 주장하는 자율주의라는 게, 적대에 기반한 투쟁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한 자위(masturbation)나 하자는 운동임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5. Epilogue

― 네그리의 묘비에 바치는 헌사!

 

위대하신 철학자 네그리 선생님께 바칩니다.

 

그대는 있지도 않은 제국이란 개념을 발명하시어, 국민국가의 법과 질서를 위해 발동되는 저희들의 방패와 물대포와 고무총과 군홧발에 저항하고 대드는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고 해롭다고 주장하여 주시고,

 

저희들 자본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관철하고 있는 세계화를 가속화해야 된다고 들뢰즈와 가타리 등의 동료와 함께 열렬히 칭송하시면서, 일국적이거나 국지적인 기획과 투쟁이 무의미하다고 바람잡아 주시고,

 

석유전쟁인 이라크전까지도, 내켜하지 않으시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이해가 아니라, 제국의 평화를 위한 경찰행동이었다고 칭송하여 주시고,

 

“만국의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주장을 얼렁뚱땅 산업노동자만 단결하라는 주장으로 바꾼 다음에, 비물질 노동이 헤게모니를 갖는 세상이 왔고, 세상에는 산업노동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업자와 이주노동자도 있으니까,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서 다중이란 표현을 쓰자면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계급과 그들의 운동을 이간질 하여 주시고,

 

적대에 기반한 대중이나 민중이란 말을 쓰면서 국가나 자본에 저항하는 것은 낡고 해롭다고 하시어, 대중의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의 발목을 잡아 주시고,

 

나아가 노동과 삶의 경계가 무너져서 착취된 가치를 측정할 방법이 없으니, 누구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공통적으로 생산된 지식으로 얻어지는 특별이윤만 보장소득으로 좀 나눠달라고 애교도 떨어 주시면서,

노동자들은 결코 강대하게 뭉치지 말고, 저희들이 속속히 들여다보고 있고, 언제든지 교란하고 폐쇄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설득하시어,

 

저희들 제국주의자들과 독점자본이 발 뻗고 자게 해주시었으니 참으로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혹자는 선생님을 소부르주아 잡사상가라고 폄하하지만,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으로 저희들 제국주의자와 독점자본가들의 위대하신 이데올르그로서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이에 전 세계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와 독점자본가들의 뜻을 모아 선생님의 묘비에 헌사를 바칩니다.

 

전 세계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와 독점자본가 일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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