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그리스 공산당 테제(1995년) ― 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을 결정지은 요인들에 대한 생각들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번역 ∣ 문영찬(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역자 주] 그리스 공산당의 1995년 테제는 한편으로 쏘련 붕괴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원인을 규명하고 원칙을 지키며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은 원래 쏘련의 노선을 전반적으로 지지했고 특히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도 일종의 개혁이라고 판단하여 전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그리스 공산당의 명운을 좌우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그리스 공산당은 위기를 겪었으나 그것을 훌륭히 극복하고 불과 4년 만에 쏘련 붕괴를 둘러싼 상황을 정확히 정리하고 나아가 자기비판을 수행했고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그 붕괴의 원인,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문제점, 당과 국가의 역할에서의 문제점을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가 여전히 사활적인 문제이며 착취와 억압의 고통에서 인류를 해방하는 유일한 길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공산당의 태도는 최근의 그리스의 총파업을 비롯한 그리스 노동자와 민중들의 가열찬 투쟁이 어떻게 하여 발생하고 있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공산당이 치열하게 자기비판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길을 탐구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의 대중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레닌주의 운동에 있어서 비판과 자기비판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자기비판의 과정은 고통스러운 과정임에 분명하지만 오류와 실수, 잘못된 노선을 시정하고 과학적인 전망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계기임을 그리스 공산당은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의 테제의 원칙은 청산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즉, 무엇보다도 20세기에 있어서 쏘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체제가 그 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전체에 어떠한 공헌을 했는가를 기초로 시작한다. 이러한 태도는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청산주의의 광풍과는 확실히 비교되는 것이다. 20세기의 사회주의를 쏘련 붕괴와 더불어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과와 한계, 오류를 곰곰이 따지고 그 역사에 기반하여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태도야말로 진실되고 정확한 사회주의의 길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 테제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다. 쏘련에서 왜곡된 과정의 시작이 탈스탈린주의였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사회주의 건설과 2차 대전에서 파시즘의 격멸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스탈린을 내치는 것은 스스로의 역사를 내치는 것에 다름 아니었고 이리하여 후루시쵸프 수정주의가 비롯되었고 후르시쵸프의 전인민당, 전인민국가라는 노선이 사회주의 건설 과정을 왜곡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공산당의 자기비판과 치열한 모색은 오늘날 세계대공황의 상황에서 새롭게 투쟁을 전개하는 모든 진보적 세력에게 있어서 중요한 모범사례이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 사회주의운동의 부활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모색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 차  례 >

  

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을 결정지은 요인들에 대한 생각들

사회주의의 적시성과 필요성

 

서문

 1부

• 사회주의 체제의 역할과 공헌

• 자본주의의 복고와 그것의 국제적 반향들

• 1989-91년 이후에 세계와 유럽

 

2부

• 자본주의와 대결의 조건들 하에서 사회주의의 건설과 과정

• 2차 대전까지, 하나의 나라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 전후시기 동안에 유럽에서 사회주의체제

 

3부

• 자본주의 복고의 원인들에 대한 결론들과 생각들

 

4부

• 그리스 공산당과 사회주의 체제

• 공산주의 사회로의 길에서 사회주의의 적시성(timeliness),

필요성 그리고 현실주의

 

 

 

서문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하여, 세계를 뒤흔든 발전들과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쏘련과 다른 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치체제에서, 이들 나라들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복고의 길을 열은 정치적 상황들이 창출되었다. 이 극적인 이야기의 주요한 사건들은 독일민주공화국의 합병, 바르샤바 조약과 상호경제원조회의(CMEA)의 해소와 1991년의 쏘련의 붕괴였다.

이 발전들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진보적 운동 앞에 심각하고 결정적인 많은 질문들을 제기했고 그것들의 원인들에 대해 연구하고 탐구하도록 그리고 필요한 평가들과 결론들에 도달하도록 강제했다. 이것은 각 당의 실질적이고 책임있는 공헌 그리고 국제적인 혁명운동과 진보적 운동의 전방위적인 집단적 노력을 객관적으로 전제하는 하나의 의무였다. 이러한 노력은 이 극적인 발전들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과 측면들에 대해 시간과 과학적인 탐구가 빛을 가져옴에 따라 항상적으로 풍부해질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그리스 공산당의 14차 대회의 정치적 결의는, 다른 공산당 및 노동자당과 협력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 대한 심오하고 포괄적인 연구에 대한 필요와 우리 당이 결론들과 경험을 이끌어낼 필요에 대해 강조했다. 이러한 틀 내에서, 중앙위원회는 이 주제들에 대한 생각들을 포함하는 자료를 만들고 그 주제에 대한 필수적인 당내의 그리고 공적인 대화를 조직하고 전국당협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중앙위원회는 이 자료가, 극적인 국제적 반향들이  있었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일어난 사회적 퇴보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는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고 좌익적이고 진보적인 인민들과 더불어 당내에서 그리고 당 바깥에서 반성들, 대화 그리고 다양한 토론들을 위한 출발점을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제적인 이유들 때문에, 그 자료의 주제는 다음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 유럽대륙에서 사회주의의 출현 그리고 그것의 공헌, 제국주의와의 끊임없는 거친 대결의 조건들 하에서 그것의 건설, 그리고 인류에 대한 또 사회적 해방, 진보 그리고 평화를 위한 민족들의 투쟁에 대한 그것의 거대한 공헌에 대한 평가

• 1989-91년의 역의 변화들을 뒤따랐던, 유럽과 더 일반적으로는 세계에서 정치적 발전들을 형성한 조건들과 환경들

• 사회주의의 “재구성과 재생”의 슬로건으로 시작했지만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타도되는 매개를 구성하고 자본주의 복고를 초래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수단을 구성하는 것으로 입증된 “페레스트로이카”의 반혁명적 정책

• 이 역의 발전의 다양한 요인들과 보다 깊은 원인들에 대한 조사와 확인 그리고 필요한 평가들과 결론들의 추출

• 이 시기를 관통하는 우리 당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평가

• 그리고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새로운 질서”와 대비되는 사회주의의 필요성과 적시성. 이 모든 주제들을 검토함에 있어서, 우리는 특히 심각하고 결정적이라고 우리가 믿는 어떤 쟁점들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 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정권들의 타도를 위한 조건들을 그 길을 따라 창출했던 외부적인 그리고 내부적인, 주체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요인들의 상호교차와 상호의존.

• 이러한 틀 내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복합적인 영향을 주었던 심각한 외부적 요인으로서 제국주의의 역할을 조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그것의 체계적이고 맹렬한 침략성으로부터, 복수를 하려는 그것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노력으로부터,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따라 나타났던 내부적인 어려움들과 실수들에 대한 그것의 잡다하고 체계적인 이용으로부터, 그리고 잃어버린 땅을 재획득하려는 목표에 따라 계획되고 초점이 맞추어진 오래된 반사회주의적 활동을 입증하는 많은 사실들과 자료로부터 명백하다.

• 사회주의의 출현으로부터 1989-91년의 사건들까지, 주체적 요인의 효과와 그것이 그 투쟁의 복합적인 요구들에 반응할 수 있었던 정도. 이것은 명백히 특수한 중요성이 있는 쟁점인데, 왜냐하면 특히 우리가 자본주의적 퇴보가 불가피하지 않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상황들의 복합으로부터 그리고 유례없는 문제들로부터 뻗어 나오는 실수들, 부적절함들 그리고 어려움들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그것의 침략성에 맞서는 데서 나타났던 장애들에 직면하여 사상적 성격의 후퇴와 일탈들에도 기인하는 문제들이 축적되었던 때에 나타났다.

• 앞서 말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우리의 주의를, 사회주의에서 모순들의 체계를 검토하는 것에, 과학상의 그리고 기술상의 혁명을 이용하는 것에, 이론과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에, 정치체제와 경제에서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주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검토하는 것에, 제국주의와 대결하는 전략과 전술에 대해, 그리고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할에 대해 집중시켰다. 최근의 주요한 역의 발전들은 적어도 역사적 필연성과 가능성으로서 사회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전망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확신과 신념을 변경시키지 않았다. 일련의 사회주의 정권들의 타도는 사회적 발전의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타도를 구성할 수 없고 나아가 이 이론을 무효화할 수조차 없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그리고 우연적인 퇴보와 역류들을 통하여 발생하는 항상적인 진보의 과정이다. 사회주의에 선행했던 네 개의 큰 구성체들은 연속적으로 대체되었다. 사회의 낮은 형태로부터 보다 높은 형태로의 이행은,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의” 이행은 불변의 법칙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의 승리와 세계적 규모에서 공산주의의 출현을 위해 요구되는 시간의 양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랜 과정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제한들을 즉각적으로 쓸어버릴 하나의 “행동”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어려움들과 가능한 역류들을 통하여, 역사는 그 방향으로, 인간의 활동의 종속과 제한의 모든 수단들의 완전한 제거를 향하여, “각자로부터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에 따라”라는 기본적인 공산주의 원칙을 향할 것이다.

 

 

1부

 

사회주의 체제의 역할과 공헌

 

1. 최근 동안에 일어난 극적인 격변들은 다양한 제국주의적 선전 기제들의 측에서 유례없는 반사회주의적 공세를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현존하는 약점들과 문제들을 이용하면서 그러나 주요하게 범위에서 유례없는 잘 조화된 선전의 조직적 중상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사상적 및 정치적 복수를 하려고, 평화, 진보 그리고 사회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인민과 모든 인류에 대한 쏘련과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의 거대한 역할과 큰 공헌을 손상시키고 무효화하려는 것을 꾀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위조될 수 없다. 그 사회주의 나라들에 존재했을 수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창출된 사회주의 체제는 문명의 가장 위대한 성취들 중의 하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폐지를 시도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그것의 우월성을 입증했고 노동하는 인민의 일과 생활들에 커다란 이익을 제공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바로 동일한 기준에 기초하여 혹은 그 안에서 각각이 나타났고 발전했던 특수한 역사적 현실 바깥에서 비교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봉건주의의 내부에서 성장했는데 왜냐하면 그 두 개의 체제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체제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혁명적 세력들은 소유의 근본적 쟁점에 대한 이전의 정권들로부터의 파열로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포위라는 조건들 하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한 사회체제를 건설해야만 했다. 권위자들(Classics)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대한 상세한 것을 제공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위한 축적의 근원은 자본, 식민지들에서 수억의 인민들에 대한 착취, 그리고 그들 자신의 인민에 대한 잔혹한 착취를 넘어서서 또한 이주자들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였다. 사회주의로 말하자면, 축적의 기본적 근원은 인간의 생산력과 그것의 생산성이다. 소비표준의 기초 위에서 두 체제들을 비교하기 위한 기준은 또한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현대의 시기에 인간의 필요들에 대한 측면에서 상이한 우선순위가 있었던 사회주의와 비교할 때, 생활의 질이라는 소비표준을 왜곡한다.

2. 쏘련과 세계 사회주의체제의 출현과 공고화로, 세계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사회주의 체제는 세계 혁명운동의 다른 부분들과 협력하여, 자본주의의 절대적 경향들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인 평형추를 구성했다. 세계의 심각한 어떤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들도 세계 사회주의체제의 참가 없이는 제공될 수 없었다.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공산주의적 노동운동의 그리고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의 출현과 힘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사회주의는 파시즘과 투쟁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쏘련의 역사적인 참가와 더불어 결정적으로 그리고 세계적 규모로 공헌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전위로서 싸웠던 세계적인 저항운동을 창출하는 데 압도적인 공헌을 했고 그것은 식민지체제의 붕괴에 촉매제로서의 영향을 주었다.

사회주의 체제는 각 민족들의 이익을 위하여 긴장과 전쟁의 뜨거운 지점들을 제거하는 데에 거대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인 공헌들을 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의 종결. 이집트에 대한 완전한 지지. 아스완댐 계획에 있어서의 원조. 1956년 삼국의 침략으로부터 위험에 맞서 그 나라를 지지한 것. NATO의 음모들에 맞선 1957년에 시리아에 대한 도움.

1958년 이라크에 대한 미국-영국의 공세에 대한 예방. 레바논과 요르단을 미국-영국 군대들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원조.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활동들에 맞서 아시아의 민족들을 지지한 것.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의 종결에 대한 공헌과 이어지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그것의 역사적인 원조. 이스라엘의 전쟁에 맞서 아랍국가들의 방어, 팔레스타인과 사이프러스 민족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 쿠바 위기에서의 커다란 원조, 뿐만 아니라 콩고, 기니아-비사우, 모잠비크, 앙골라 그리고 칠레의 민족들에 대한 커다란 원조.

3. 사회주의의 획득물들 그리고 사회주의체제의 더욱 전반적인 활동들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들의 다양한 연대는 그리스, 포르투갈 및 스페인 인민들의 반독재 투쟁에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쏘련과 바르샤바 조약들에 의해 이루어진 평화와 군축을 위한 잇따른 제안들, 체계적인 발의들 그리고 특수한 행동들은 두 사회체제의 차이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부정할 수 없는 표준의 하나 그리고 사회주의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성격의 증거를 구성한다. 특징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유럽에서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유럽 범위의 협정을 위한 제안들(1954년과 1955년), 독일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제안들, 모든 열강들이 점차적인 군축 조치들을 취할 것에 대한 쏘련의 새로운 제안들, 이것은 1955년에 쏘련이 그 자신이 손해를 보고서도 일방적인 감축 조치들을 취하였던 때에조차 거부되었다. 미국과의 쌍무적인 관계들의 정상화를 위한 반복되는 제안들과 발의들, 이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들과 진보적 운동들의 투쟁들에 영감을 주었고 궁극적으로 UN에 의해 채택되었다. 반대로, 이 시기를 통하여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체제의 방어능력을 파괴하기 위하여 군축과 평화에 대한 노력들을 침식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중요하고 다양한 형태의 영향을 주었다: 경제적, 정치적 및 사회적 영역들에서. 사회주의 나라들의 성취들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운동과 노조운동에 대해 자본주의 체제가 재조정하고 성과들을 양보하는 것을 강제했다. 이 성과들은 노동인민과 대중운동들에 대해 중요하고 다양한 긍정적인, 매력적인 힘을 주었다.

최초에는 하나의 나라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한 그룹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의 출현 그리고 생산의 기본적 수단들의 사회화는 동시에, 당시에 유례없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권리들 그리고 자유들뿐만 아니라 일할 권리,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권리, 무상의 국가 서비스의 제공, 주택 그리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들에 대한 접근과 같은 많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들의 대규모적인 만족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문맹의 끔찍한 유산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는 것 그리고 실업의 제거는 쏘련에서 특징적인 두 개의 사례를 구성하는데1), 노동인민의 3/4 이상이 중등 후 교육 혹은 완전한 중등교육을 얻었는데, 미국에서는 오늘날까지 2천3백만의 인민이 공식적으로 문맹으로 인정되고 있다.

쏘련은 2차 대전 전의 그것의 역사의 24년 동안에 그것의 산업과 경제적 발전에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문화적 가치들과 문화와 역사적 과거의 기념물들에 대한 보호에 대한 주의는 쏘비에트 국가와 그 인민권력의 책무였다. 역사적 중요성이 있는 하나의 사건은 사회주의 혁명이 인류문화의 성취들을 노동인민의 소유로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에르미타쥬는 루브르와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으뜸가는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혁명 후 즉각적으로 인민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춥고, 맨발이었고 문맹이었다. 문화혁명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통합적인 요소를 구성한다.2)

쏘련에서 1956년부터 7시간 그리고 6시간 노동일이 주 5일 노동과 함께 시행되었다. 모든 노동인민이 주휴와 유급 연차휴가를 보장받았다. 쏘련에서 작업주(work week)는 세계에서 가장 짧았다. 그러나 여가시간의 내용이 또한 변화했다. 그들의 여가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 인민의 권력은 별장 그리고 문화적, 정보적 및 건강 시설들과 같은 적절한 기관들을 창출했다. 노동인민을 위한 사회보장은 사회주의 국가의 최우선의 관심사였다. 보편적인 연금체계가 창출되었는데 그것의 중요한 특징은 낮은 은퇴연령(여성은 55세, 남성은 60세)이었다. 이들 기금들을 위한 재정조달은 국가예산을 통하여 그리고 기업들과 기관들에 의한 보험 제공을 통하여 보장되었다. 유사한 상황들이 또한 다른 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지배적이었다.

4. 사회주의의 지배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폐지하기 위한 토대를 놓았는데 존재하는 거대한 객관적인 어려움들을 극복했다.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영역들에서 여성의 평등한 권리들을 보장했다: 이것은 역사의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에 걸쳐 확립된 반대 성(性)과 관련한 불평등의 모든 형태를 제거하는 것이 당시에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노동하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하는 인민에게 익숙한, 실업, 높은 생활비용, 불안정, 고용주의 억압, 저평가 그리고 경멸, 그리고 사회범죄와 같은 번민과 문제들로 고통당하지 않았다.3)

5. 10월 혁명은 거대한 다민족 국가의 틀 내에서 민족들과 국적들 간에 우애적인 평등을 개시했고 그것의 모든 형태와 표현들에서 민족적 억압을 제거함에 의해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들을 제공했다. 책임, 용기 그리고 정치적 선견지명이,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하여 그리고 독립적인 국가들을 수립하는 권리까지를 포함하여, 우리 세기의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의 하나를 다루기 위해 필요로 되었다.4)

동시에 민족들과 소수자들을 단일한 국가로 모으는 과정은 모든 인민이 그들의 특수한 민족적 정체성과 문화적 특이성을 통합된 사회주의 국가의 틀 내에서 의식하게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창출했는데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 특이성에 대한 존중은 통합의 과정으로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특히 축적된 문제들이 신속하고 올바르게 다루어지지 않는 순간에, 통일의 느낌이 느슨해지거나 혹은 무디어지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위기의 순간에, 일반적인 퇴보의 조건 하에서 인종적 특징과 특이성들은 제국주의자들과 국내의 반혁명 세력들의 적절한 조종에 의해, 쉽게 민족적이고 국수적인 견해들로 전환되고 혁명 전의 기간 동안에 배양된 오래된 적대들과 불화들이 되살아나고, 그들의 역사에서 최초의 시기에 수십 년 동안 평화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함께 살아왔던 인민과 민족들을 내전과 유혈참사로 이끈다.

6. 사회주의 나라들은 생활의 국제주의를 위한 필요에 반응하기 위해 그리고 경제 관계들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에 기초한 그것의 이점들을 활용하기 위해 중대한 노력을 했다. 1949년에 상호경제원조회의(CMEA)의 수립과 더불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국제관계들의 새로운 유형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평등, 호혜 그리고 우애적인 상호 원조의 원칙들에 기초했다. CMEA가 없었다면 사회주의 나라들 간의 쌍무적인 관계들은 그것들의 발전에 공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EEC와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의 정책들과 경제적 압력들에 대해 더 상처받기 쉬웠을 것이다.

CMEA는 국제적인, 부문적인 경제적 조직들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들 간의 결합된 사업들의 수립을 위한 길을 닦았다. 사회주의 나라들 간의 관계들의 발전에 대한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CMEA의 더 일반적인 공헌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것의 회원국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토대에 기초하여 그것들의 오랜 역사에 걸쳐 획득되었던 자본주의 나라들의 축적된 자원 없이, 발전의 낮은 수준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출발점과 비교할 때,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의 노동인민의 생활들과 비교할 때, 사회주의 나라들에 의해 획득된 논쟁의 여지없는 성취들은 사회주의가 인민의 생활들에 있어서 그리고 그들의 개성의 발전에 있어서 항상적인 증진을 가져오는 타고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사건들이 입증하는 대로, 이러한 성취들은 자동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며 이 새로운 체제를 건설함에 있어서 인민이 능동적으로 참가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공산당들과 사회주의적 지배의 기관들에 의해 채택된 각각의 국면과 발전의 수준에서의 올바른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실수들 그리고 일탈들, 원칙의 위반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와의 거친 대결에 기인하는 거대한 어려움들은 이들 과정들을 늦추고 침체를 초래할 수 있는 요인들을 구성한다.

성질에서 객관적인 그러나 주요하게는 주체적인, 나타났던 문제들과 약점들은 별도로 하고 또 그것들과 관계없이, 20세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굴레를 벗어던지려 했던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향하는 길에서 사회주의로 거대한 도약을 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가치 있는 경험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 사회에 의한 최초의, 위대한 역사적 시도에 의해 특징지어진 세기로서 역사에서 기록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복고와 그것의 국제적 반향들
― “페레스트로이카”
 

7.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최초에는 사회주의의 “재생과 재구조”를 주장하는 슬로건으로서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시기에 존재했던 경제적 및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나오는 길을 이끄는 정책으로서 나타났다. 최초의 슬로건들의 어떤 것은 안드로포프 혹은 그전 동안에 쏘련공산당에 의한 이전의 노력들로부터 빌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것은, 최초의 슬로건들의 특수화와 실천적 적용이 정치적 체제와 경제의 양 수준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부문들을 뒤집는 데 영향을 주고 그러한 경향을 띠는 “개혁들”과 조치들의 내용을 띰에 따라 그것의 진정한 반혁명적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들”의 본질은 농업경제에서 시작하고 그것의 모든 부문들로의 확대의 명백한 의도를 가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의 과도적인 이전이었다. 그것들의 목적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제거하고 사회주의적 계획을 폐지하고 소비재와 서비스들의 전달과 분배의 체계를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뿐만 아니라 노동의 사회주의적 분업의 틀 내에서 우애적이고 평등한 관계들을 폐지하는 조치들과 선택들을 통한 반혁명을 수출하는 정책임이 폭로되었다.

8. 스스로 이러한 발전들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에 관계되는 커다란 의문은 왜 반혁명이 인민으로부터 어떠한 저항도 만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인민이 사회주의와 그것의 획득물을 방어하지 않았는가이다.

어떤 사람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선한 의도들로 출발했고 어딘가에서 그 길에서 “잘못 되었”고 반혁명의 매개가 되었다는 의견이다.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책은 부분들이 아니라 전체로서 판단되어야만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은 선언들과 슬로건들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적용의 영역에서 주요하게 판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정책은 많은 기본적인 전제조건들의 결합된 발생 때문에 대중의 지지 혹은 용인을 이끌어내었다:

a) 그것은 당과 정부 기관들에 의해 촉진되었고 그것들의 권위와 그것들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에 의존했다.

b) 그것은 “더 많은 사회주의-더 많은 민주주의”와 같은 모두에게 알려진 슬로건들을 사용했다.

c) 당시에 존재하는 문제들이 이용되었고 무엇보다도 어떤 변화들과 개혁들이 사회주의의 틀 내에서 필요하다는 공통된 믿음이 이용되었는데, 그것들은 경제와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부문들에서 왜곡들과 지체들을 다룰 것이었다.

특히 당시의 당과 국가의 지도부의 측면과 관련하여 현실은 그리고 발전들에 대한 연구는 지도부의 한 부분은 의식적으로 자본주의의 복고의 정책을 채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부분은 공산당에 점차적으로 침투한 수정주의적 그리고 기회주의적 견해들의 영향 하에 뒤따랐다. 다른 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당과 국가의 지도부의 모습은, 우리가 쏘련공산당 지도부의 정책들과 위신들에 의해 행사되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유사했다.

다양한 이유들로 과거의 제한적인 조치들에 불만족하고 영향을 받았던 인민의 부분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편들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중대한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서 지체에 의해 혹은 건강 부문과 더욱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서비스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봉급 때문에 영향을 받았던 인텔리겐챠의 중요한 부분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다른 부분들은 해외여행에 대한 어려움들과 제한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또 다른 부분들은 소비재에 대한 점증하는 그리고 만족되지 못하는 현대적 필요들에 의해, 주위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상점진열대의 영향과 이러한 환경이 배양하는 소비 모델들의 왜곡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학생들과 같은 젊은 층의 부분들은 그들의 잠재적으로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최초에는 “페레스트로이카”에 찬성하도록 영향을 받았고 그러고 나서는 그것의 덫에 빠졌는데 왜냐하면 믿을 만한 정보가 없었고 그들이 그것을 억제하도록 요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권들 그리고 권력을 잃어버렸고 계속하여 소수의 발판(foothold)으로 남아있었던 자본가들과 지주들의 후손들에 의해 특히 다른 바르샤바 조약 나라들에서 하나의 역할이 연출되었다. 그들은 반혁명적 과정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 상황은 제국주의의 공공연한 간섭의 사상적 영향력과 연동되어 일반적인 무관심 그리고 소외의 조건들 하에서 역동성을 획득했다.

그때 이후로 계속하여 사건들은 그것들 자체의 과정을 밟았다. 그들의 정치적 및 사회적 연합들을 가진 신자본가들과 더불어 부당이득자들의 층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들은 자본주의의 복고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다.5)

9. 외교정책에 있어서 “새로운 사고”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모순은 계급들을 교차하는(cross-class) 즉, 무계급적인 것, 전쟁과 평화 간의 모순이고 거기에는 모든 국가들이 아마도 그들의 사회체제와 무관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되고 반과학적인 입장에 기초해 있었다. 제국주의의 일정한 기본적인 특징들과 속성들을 부정하는 공상적인 견해들, 예를 들면 제국주의가, 바르샤바 조약을 해체하면 세계적인 안전체제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본질적으로 “쏘비에트 침략성을 억제하는” 제국주의적 입장이 채택되었다.

국제적인 국가 간의 관계들을 탈이념화하고 그것들의 정치적 내용을 무디게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레닌주의적인 평화공존의 정책은 계급적인 그리고 사상적인 화해의 정책으로 변형되었다.

“시장경제”라는 정책은 이전의 쏘련공산당 대회들에 의해 제기된 목표인, “사회-경제적 진화의 가속화”와 연계되었다.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노동생산성의 증대, 생산에서 과학과 기술의 진보의 적용들을 위한 인센티브의 강화, 기업들을 “자립”하도록 허용하는 것 등의 견지에서 촉진되었다. 경제적 기제에서 그리고 중앙계획의 관리에서 실수들과 약점들을 “교정하는” 것의 목표가 제기되었다. 사회주의를 폐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여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시장의 상호관계에 대해 토론들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경제적 강령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낸 그 다음 조치는 약간 늦게 1987년에 나왔는데 그때에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를 제공하고 보호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이, 비록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서 상이한 국면에서 적용되었고 일시적 조치의 성질을 갖고 있었지만, 쏘비에트 인민의 심리적 그리고 사상적 준비에서 하나의 사례로 사용되었다.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생활에서 투명함”이라는 슬로건이 처음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그것들에 전형적인 표준과 가치들에 기초해 있었는데,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의 슬로건은 선동적인 성격을 띠었다. 하나의 지점으로부터 제기된 사상적 그리고 정치적 견해들의 핵은 당의 지도적 역할과 전체로서 나라의 정치체제를 명백히 목표로 하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수반되었던 슬로건인 그 유명한 “글라스노스찌”는 공산주의 운동과 쏘비에트 인민의 역사를 위조하고 무효화하는 주요한 수단임이 입증되었다. 동시에 M. 고르바쵸프는 머리기사에서 제국주의 나라들의 지도자들과 계속하여 “의논”하고 협의하고 있었다.

반혁명은 제국주의 나라들, 그것들의 정부들과, 그들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자료와 인적 수단들을 명백히 갖고 있었던 그것들의 정보기관들의 전반적인 관련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기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전술과 방법론은 쏘비에트 사회의 현존하는 문제들을 과장하고 역사를 위조하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서의 70여 년을 무효화하고 헐뜯는 것이었는데 다음과 같다: 중앙의 계획과 관료주의의 문제들을 과장하고 절대화하는 것 그리고 기업과 연방의 공화국들에 의한 주도성을 강화한다는 구실로 중앙을 약화시키는 것.

이렇게 쏘비에트 국가의 통합된 성격을 침식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연방으로부터 발틱 공화국들의 이른 탈퇴를 초래한 민족적인 국수주의적인 차이들과 분쟁들을 일으키는 길이 닦여졌다. 특히 쏘비에트 정권을 타격하고 그것의 기초에서 최초의 균열을 이용하고 확대하기 위해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약속된 “경제적 원조와 개혁”의 강령들을 통해 지방주의와 국수주의가 강화되었다.

자본주의의 복고를 의식적으로 촉진하고 있던 쏘련공산당의 지도적 핵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최초의 단계들 뒤에 일어나고 있던 불일치와 분화들을 멋지게 이용했다. 특징적인 사례는 “혁신”과 “보수”, “좌익과 우익”이라는 단어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완전한 역전과 왜곡이었다. 이것의 결과, 보다 큰 혼돈과 방향상실이 창출되었고 그것은 많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공공연히 자본주의로의 빠른 회귀를 선전하고 있던 새로운 당들과 그룹들이 나타났다. 또한 “페레스트로이카”의 실제적 성격은 두 사회체제들 간의 구분선들로서 모호해졌다.

허무주의, 실수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부터 동떨어진 과거에 대한 비역사적 접근이,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역사적 경험에 대한 창조적인 활용에 대한 필요를 대체했다.

대중매체와 제국주의 선전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영웅적인 이야기와 인류의 성취들에 대한 사회주의의 국제적인 공헌은 비방되었다.

인민의 광범한 대중들 측에서의 방향상실, 혼돈 그리고 냉담함의 현상들은 반공산주의, 반사회주의를 정당화하고 쏘비에트 인민의 측에서 영웅적인 노력들의 70년 이상의 기간을 찢어버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서 봉사했던 “반스탈린주의” 그리고 “탈스탈린주의”의 영향 하에서 가속화되었다. 제국주의의 “지원”이 사회주의 체제를 “재구조”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사회주의 나라들의 독립적인 책임성에 대한 소리 높은 말들이 그리고 쏘비에트 모델의 “모방”을 거부하는 것이, “페레스트로이카”를 바르샤바 조약의 나라들과 자본주의 나라들의 당들에게 “수출”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을 감추었다. 1917년 이후 처음으로, 당과 국가의 지도부의 책임성을 가진 쏘련이 그것의 국제주의적 정책을 포기했다. 세상의 빛을 보았고 지금은 미국 요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공되고 있는 모든 증거는 고르바초프와 부시가 말타에서 만났을 때, 마치 그것이 독일 문제에 대한 “민주적” 해결이고 냉전을 종식시키는 수단인 것처럼, 독일민주공화국의 합병과 통합된 자본주의적 독일의 창출을 그들이 하기로 동의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독일민주공화국의 합병은 사회주의 체제의 해소를 가속화했다.

 

 

1989-91년 이후의 세계와 유럽

 

10. 1989-91년의 극적인 발전들은 공산주의자들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게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역의 효과들이 전체로서 인류에게 특징지어졌다. 민족들이 진보, 발전, 민주주의, 자유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그들의 주요한 지지, 그들의 진정한 동맹을 일시적으로 박탈당했다. 죽음의 희생들과 제국주의 간섭과 전쟁의 희생양들이 계속되고 있다. 사나운 발칸반도에서 수백만의 희생들, 죽음, 불구와 피난민들이 있었다. 르완다, 아이티, 소말리아의 민족들 그리고 멕시코의 인디언들은 1989-91년 이후의 새로운 지구적인 역전된 세력관계들의 가장 특징적인 희생양들이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느끼기에 그것의 손들이, 사회주의 체제에 의해 이전의 시기 동안에 놓여졌던 제한들과 장애들로부터 자유롭게 된 시기에, 그것의 가장 야만적이고 쌀쌀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UN을 포함하여 그것의 반인민적인 목표들과 추구들을 추종하는 국제적 조직들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다.

쏘련, 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과 바르샤바 조약이 없는 “다음날의 아침”에, 세계는 고삐를 벗은 제국주의 간섭에 의해, 시장의 재분할에서 다민족적인 경쟁에 의해, 그리고 심지어 유럽의 심장부와 전 지구에 걸쳐 야만적인 “현대적” 식민주의의 굴레를 통하여 나라들의, 전체 지역들의 종속과 합병에 의해 깊은 상처들로 충만해 있다.

증대하는 많은 수의 나라들이 모진 제국주의의 의존과 굴종 하에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데, 사유화들을 통하여,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운동에 대한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마지막 장애물의 폐지를 통해, 기술적 의존의 강화와 초국적 자본들의 수중에 있는 최신의 지식과 기술의 집중을 통해, 경제의 핵심 부문들을 초국적 자본에게 넘겨주는 것에 의한 것이다.

민족적 국수주의, 사회적 인종주의,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차이들,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는 민족들 사이에서 불화를 조장하고 국가들을 작고, 약하고 그리고 굴종하는 민족들로 파편화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수중에 있는 무기가 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타락과 빈곤의 증상들이 대규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과 다른 나라들 간의 격차가 더욱더 넓어지고 있다. 여전히 배치된 많은 수의 핵무기들이 있고 지역전쟁들과 내전의 수가 증대하고 있고 전 세계에 걸쳐 지역적이고 내부적 갈등을 겪는 100개 이상의 뜨거운 지역들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위기, 마약과 사회적 범죄의 천벌이 빠르고 극히 위험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현대의 자본주의의 야만이 이전의 수십 년 동안에 고된 투쟁들을 통하여 획득된 모든 것에 대해 미쳐버린 공격을 개시함에 따라, 모든 나라들에서 노동계급과 노동인민은 새로운 역전된 상호관계들과 새로운 상황에 대해 중대하게 대가를 치루고 있다.

11. 1989-91년의 시기의 역전들은 쿠바, 몽고, 중국, 베트남 그리고 북한의 비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극히 부정적인 국제적 환경을 창출하였다. 국제적인 세력 균형들과 국제적인 노동자 및 공산주의 운동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에 기인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에서 존재하는 새로운 문제들과 모순들이 증대하고 있고 더욱 강해지고 있다.

현재의 조건들 하에서, 이들 나라들에서 당과 국가의 지도부들은 주요하게 경제의 영역에서, 생산과 여행의 부문들에서 외국의 투자자본의 유입과 활용을 허용하는 개혁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 개혁들은 더욱 일반적인 조건들과 그것들의 성격 때문에, 사회주의 소유에 대한 관계에서 경쟁적으로 활동하는 자본주의적 부문의 창출을 초래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그들의 자본의 행동을 통하여, 이들 나라의 국제적 사안들에 대한 사상적 및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특별한 국면에서 요구되는 고난들과 위험들을 마주하고 막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요인들에 의존한다: 인민의 사회적 및 정치적 각성의 수준, 공산당들의 정책의 올바름 그리고 거대한 객관적인 어려움들에 맞선 그들의 인내와 전투성. 이러한 노력의 성공적인 결실은 국제적 발전들, 노동자와 공산주의 운동의 증대되는 활동,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반제국주의 세력들의 이익으로 국제적인 세력균형에서의 개선과 변화에 또한 의존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 진보적 인민, 반제국주의자 그리고 평화운동들은 자본주의 복고에 저항하고 있는 민족들에 대한 연대와 능동적인 지지를 보여야할 의무가 있다. 쟁점은 외부적 간섭과 강제 없이 모든 나라와 인민이 그들 자신의 사회적 발전의 길을 선택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12. 쿠바는 제국주의 봉쇄의 조건 하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인민과 당의 끈들 그리고 그것의 경험―왜냐하면 그것의 독립의 최초의 시기부터 그것은 제국주의의 간섭으로 고통 받았기 때문이다―은 특히 노동의 사회주의적 분업의 이점들을 상실 후에는, 제국주의에 의한 무자비한 금제(embargo)에 저항하는 나라를 돕는 중요한 요인들을 구성한다.

장애들과 고난들은 거대하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이, 그 목표가 그것의 정치체제를 변화시키고 그 나라를 그것의 혁명 전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것인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관계를 추구하도록 쿠바가 강제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것의 상대적인 후진성과 많은 인구로부터 뻗어 나오는 현존하는 문제들을 국제적인 세력균형의 변화가 악화시켰다. 중국의 공산당은 그 나라가 사회주의 건설의 초급단계에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것의 경제적 및 기술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개혁들과 외부 세계에 개방”이라는 정책을 선택했다. 외국 자본의 행동은 이 큰 나라에서 그리고 특히 그것의 활동의 지역들에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부문의 출현을 초래하고 있고 사회적 분화와 계층화의 발전을 결과하고 있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을 방해하는 어려움들과 위험들은 더욱 명백해지고 있다.

유사한 문제들을 베트남과 몽골이 마주하고 있고 반면에 북한은 직접적인 제국주의 간섭의 결과들과 무기 통제의 구실 하에 이루어지는 잔혹한 압력을 목격하고 있다.

13. 이전의 사회주의 나라들이 보이는 모습은 그들 간의 차이들과 등급들에도 불구하고 다소간 기본적인 분야들에서 동일하다: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 인민에 의해 획득된 성과들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전략적 중요성이 있는 부문들이 외국 자본에게 넘겨지고 있고 기업들이 사유화되고 있고 토지는 예전의 자본주의적 소유자들에게 되돌려지고 있고, 무상 서비스들은 폐지되고 있는 것과 같은 “충격 요법”들이 광범하게 적용되고 있다. 황당무계한 재산을 가진 자본주의적 소유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빈곤, 상실 그리고 실업―수십 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현상들―의 발생이 그러하다. 공산당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들이 일상의 사건들이 되었다. 잘 조화된 재판들이 공공기금들의 낭비와 유용을 주장하면서 계속되고 있다. 공산당들의 활동은 방해받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조직적 중상, 거짓말들 그리고 비방들이 계속되고 있고 더 강해지고 있고 인민이 명백히 사회주의 과거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오늘날과 과거를 비교하기 시작함에 따라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당분간은 저항의 조직이 어려움들과 조우하고 있는데, 당과 노조 조직들이 해산되었고 다른 것들이 압도적인 피해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기치 않은 변화들의 충격은 중요한 대중적 세력들을 일시적으로 실망과 무력증의 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고립된 항의와 저항이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특히 그들의 사상적 방향들과 무관하게 노동인민의 획득물과 권리들을 옹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공산당들과 정치적 세력들이 활동하는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족들의 분위기의 특징적인 사례는 반혁명과 자본주의의 복고를 초래한 당들과 정치인들이 투표결과 쫓겨난 몇 차례의 선거 전투들의 결과에서 볼 수 있다. 반대로, 그들의 현재의 방향과 무관하게 이전의 사회체제로서 노동인민의 마음속에 연결되어 있는 공산당들과 당들은 긍정적인 선거 비율을 모으기 시작하고 있다.

14. 사회주의의 전복을 “냉전의 종식을 의미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끝에서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인류 번영”의 세력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위대한 “민주적 변화들”의 시기에 우리가 들어가고 있다고 서둘러 예언했던 그리스와 해외의 자본주의 체제 옹호자들이 틀렸음이 입증되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와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 운동의 대열을 버렸던 “신좌익” 당들의 일치는 더욱더 명백해지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방, 허무주의 그리고 실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사회주의 나라들과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공산주의 당들의 지도적 간부들이 반공산주의적인 캠페인과 병적인 흥분에 합류했을 때인 최초의 시기 동안에 광범하게 퍼졌다. 그들의 “폭로들”은 “내부로부터”의,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믿을 만한 평가들과 증언들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자들에 의해 활용되었다.

선의,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한 판단들을 가진 인민은, 이러한 이론들이 제국주의의 거친 개입과 침략성을 정당화하는, 그것의 역사를 통하여 자본주의에 의해 범해진 죄악들과 범죄들에 대한 “용서”를 보여주는 구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부

 

자본주의와 대결의 조건들 하에서 사회주의의 건설과 과정

 

15.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와 그리고 특히 그것의 가장 침략적인 부분, 제국주의 열강들과 국제적 조직과의 대결과 갈등의 조건들 하에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생활의 모든 측면의 증대하는 국제화의 조건들 하에서 건설되었다.

10월 혁명의 가장 이른 승리의 시기부터, 제국주의는 처음에는 무장된 간섭과 힘에 의해 그리고 이후에는 내전을 야기했던 제국주의의 포위와 고립이라는 수단으로써 신생 쏘비에트 국가의 타도를 그것의 지상과제로 설정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쏘련이 전쟁의 재난들과 황폐에 의해 패배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나찌 독일로 하여금 쏘비에트에 반대하도록 고취했다.

2차 대전 후에 그리고 11개의 나라들, 즉 세계의 영토의 26%가 자본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온 후에, 제국주의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써서, “냉전”의 전술을 적용하고 “공산주의의 위협” 그리고 “공산주의의 혼란”이라는 슬로건을 온갖 소리로 선언하면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 동시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그들은 독일을 강화하고 그것을 사회주의 나라들과 쏘련에 대한 공세적인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서 전후 협정들을 위반했다.

제국주의는 그것을 이용하여 독재적인, 테러적인 정권들이 들어섰던 150번 이상의 군사 작전들, 분쟁들 그리고 쿠데타에 대해 책임이 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1백5십만 이상의 어린이들이 제국주의에 의해 야기된 전쟁들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일찍이 1970년대에, 냉전 정책은 죽음의 선에 도달했다. 새로운 방식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전 세계에 걸친 공산주의 운동을 침식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새로운 전술의 더 깊은 원인들은 제국주의의 입장들이 사회주의의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상승, 민족해방 투쟁의 성취들 그리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민족들의 싸움에 의해 군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6)

16. 사회주의 나라들과 세계 평화운동의 일관된 압력 하에 열렸던 헬싱키 회담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나라들 간에 타협의 형태를 결과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그 협정들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회담 직후에, 그것은 협정들로부터 일방적인 이익들을 탈취하기 위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그것의 전술을 재조정했다. 그것은 평형추로서 사상적 전복을 사용했다. 그것은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요인들에 기인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나타났던 내부적인 어려움들과 약점들을 이용했다. 그것은 “다리(bridge)” 정책, 소위 “두 체제의 변환”의 전술을 시작했고 사회주의의 측에서의 “약간의” 성공들을 인정했는데 언제나 같은 목적으로, 사회주의체제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7. 제국주의 전술의 새로운 재조정은 “역데탕트” 정책으로써 1970년대 후반에 관찰되었다.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쏘련에 유리한 군사적-전략적 세력 균형에서의 변화를 구실로 하여, 제국주의는 체계적인 복수의 노력을 발전시켰다. 미국이 앞장서서, 새로운 무기경쟁이 지구상에서 뿐만 아니라 우주에서도 시작되었다.

강력한 자본주의 나라들은 “인권”을 옹호한다는 기치 하에서 체계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도발들”과 반공산주의 캠페인들을 조직했다. 그들은 민족들을 교묘하게 다루고, 사회주의 나라들에 대한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서, 가장 복잡한 사상적 무기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의 사건들이 보여준 대로, 다양한 반사회주의 및 반공산주의 요소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은 공산당들 간의 사상적 그리고 정치적 차이들을 이용했다. 그들은 쏘련공산당과 쏘련과의 최소한의 불만족 혹은 불일치의 표현들에 대해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지지를 제공했다. 그들은 이러한 목적들을 위해서 그들 나라들의 예산을 통해서 수십억 달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 나라의 환경들과 특이성들에 따라 끊이지 않는 방법의 목록들, 유용들 그리고 사보타지를 사용했다.7) 그 기치가 “붉은 것보다는 죽음이 낫다”인 오래된 반공산주의와 나란히 현대판이 나타났는데, 언제나 자본주의체제의 점차적인 복고를 목표로 했다.8)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각 경우에 사용된 특히 유연한 전술이 사회주의 나라들과 국제적 관계들에 영향을 주는 중요하고 심각한 요인을 구성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그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제국주의의 본성에 대한 환상들을 배양하는 것은, 노동운동과 인민운동에 대해 역의, 재난적인 결과들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향한 자본주의의 통합된 전략과 전술의 결과들은, 통합된 전략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결합된 정교한 전술을 요구했던 조건들 하에서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 측에서 유사한 행동과 마주치지 않았다.

 

 

2차 대전까지, 하나의 나라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18. 이 시기 동안에 기본적인, 우선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제거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남겨지고 제국주의의 포위와 간섭에 의해 악화된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계획된 싸움이었다.

10월 혁명부터 제2차 대전의 발발까지, 쏘련은 사회적 진화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거대한 진보를 이루었다. 매우 짧은 시기에, 그것은 그것을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과 분리시켰던 거리의 보다 큰 부분을 메웠다.

쏘련은 국제적인 고립에 대처하기 위해서 생산의 자급자족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것은 국제정세 때문에, 화학공업이 전혀 없고 중요한 금속 공장들이 없는 상황에서 에너지원의 문제를 역점을 두어 다루고 그것의 강철과 군수 산업들을 발전시켜야 했다. 거칠고 다종다양한 기후적 그리고 지형적 조건들 하에서 중공업이 발전되어야 했고 농업경제가 기계화되어야 했다.

강력한 중앙계획과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중앙집권화된 지도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했다. 중앙의 계획은 쏘련이 자신의 두발로 서는 것에 대해, 사회-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발전의 수세기를 정상적으로는 요구했던 거리를 메우는 것에 대해 그리고 히틀러의 파시스트 공세와 싸우고 그리하여 파시즘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승리에 대해 결정적인 공헌을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쏘비에트 권력은 기본적인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원칙을 실천해야만 했고 동시에 노동계급과 농민들 간의 동맹을 첨예화되는 계급투쟁의 조건들 하에서 발전시켜야 했다.

19. 새로운 체제는 바로 시작부터 분배와 공급 기제의 결여와 분산되고 후진적이고 소규모 생산 단위들의 우세를, 경제적 성격의 조치들로 역점을 두어 다룰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신경제정책의 정신 내에서 행동할 것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새로운 권력이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토대에서 사회주의의 토대들을 건설해야만 했던 이행기 동안에 필요했다. 그러나 간섭과 고립이 이 선택을 일찍이 포기하게 강요했고 그것 없이는 사회주의 혁명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적용하는 것을 초래했다.

쏘련공산당은 그 시기 동안에 강화되었던 계급투쟁이 내전의 형태를 띠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의 이해에서 그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계급사회의 지지자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조용하게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시공산주의” 정책은 “신경제정책”(NEP)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공세”의 정책 그리고 “농업경제의 전방위적인 협동조합적 조직화”로 이어졌다.9)

일반적으로 쏘비에트 권력은 공업의 회복, 농업생산 그리고 수송과 연결된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중점을 두어 다루었다. 그것은 장엄한 성장속도로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력들(쿨락들과 지배계급으로부터 뻗어 나온 인텔리겐챠의 부분) 간의 대결의 첨예화의 조건들 하에서 사회주의적 생산을 위한 토대들을 놓았다.10)

특수한 조건들(포위와 후진성의 높은 정도와 연관된 전쟁의 위협)이 집단화의 매우 빠른 속도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은 어떤 지역들에서는 사회적 마찰을 야기했고 노동계급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중농층과의 동맹에서 어려움들을 야기했다.11) 당의 결정들과 J. 스탈린의 연설들에서 각 지역의 다양성에 있어서 문제들과 실수들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졌다. 어떤 경우들에서는 예비적인 준비작업이, (집단농장이-역자)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집단농장들을 발전시키라는 서류상의 결정들을 수반한 그 운동의 관료주의적 강요에 의해 대체되었다.

집단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노동계급과 소농과 중농층 간에 모순을 악화시켰다. 집단화의 적용에서 교정하는 결정들에도 불구하고 문제들이 남았다.

20. 집단화의 속도에 대한 불일치를 넘어섰던 상이한 견해들과 불화를 공론화하기 위해서 역의 현상이 사용되었다. 그것들은, 마을에서 사회주의 관계들의 건설을 반대하고 방해하고 있었던 쿨락들에 반대하는 계급투쟁을 계속할 필요 자체에 관계되었다. 당내 투쟁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진보에 대해 장애를 구성했다(부하린 그룹과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사회주의의 건설에 있어서 주요한 국면은 추가적인 연구의 장이다. 그것은, 새로운 권력이 도시들과 마을들에서 노동계급과 중간 계층 간의 동맹을 공고화하고 굳힘에 의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토대들을 놓으려 시도하고 있었던 시기 동안에 경제와 정치 간의 관계에 대한 경험을 제공한다.

21. 1930년대에 쏘비에트 권력은, 실업의 제거와, 숙련된 노동의 부족과 임금정책에 대한 평균적 관점에 의해 표현되었던 생산의 광범위한 기계화를 위한 노력에서의 지체 간의 모순들과 같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새로운 문제들에 마주쳤다. 당은 “새로운 상황에서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과제들”을 결정해야할 필요를 인식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발전의 조응하는 속도와 비교하여 발전의 속도를 가속화해야할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다.12)

관료주의, 자기만족, 그리고 권력의 남용과 같은, 그것의 성격에서의 일정한 이완의 증상을 당 서류에서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그것의 대열을 숙청”하는 결정을 초래했다. 대두된 왜곡들은 주요하게 간부들의 개선의 문제로 돌려질 수 있다. 쏘비에트 권력의 초기에 내전 동안에 반사회주의 세력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느끼는 간부들 대신에, 경험이 없고 혹은 사상적 정치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대신 선출되었다.13)

새로운 상황은 당 사업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했고 그리고 이러한 틀 내에서, 당은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문제를 푸는 행정적 방식과 연관된, 그리고 협의를 위해 제공되는 헌법적 절차들이 정당하지 않게 준수되고 있지 않음에 따라, 당 간부들의 선출의 원칙의 위반들과 연관된 현상들을 중점을 두어 다룰 필요를 강조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 그리고 적절한 문서들은 결정들로부터의 일정한 이탈과 일탈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목격을 포함하고 있다. 당내 민주주의와 집단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남용과 제멋대로의 행동의 현상들이 나타났다.

쏘련 공산당 20차 대회(1956년)에 의해서 이 시기에 겨누어진 비판은 그 특별한 역사적 조건들 하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객관적인 검토를 구성하지 못했다. 그 논의는 인격숭배(personality cult)의 문제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그 당시의 문제들에 대한 혹은 당의 기능과 활동에서 부정적인 현상들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들을 그 자체로는 제공할 수 없는 쟁점이었다.

가장 심각한 사건은 20차 대회가 올바른 입장 ―그 특별한 역사적 시기 동안에― 즉, 계급투쟁이 첨예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비난한 것이었다.14) 전쟁 전의 시기 동안에(포위의 조건들 하에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착취계급들의 활동, 그들의 지지들 그리고 흔적들을 분쇄하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그 나라의 내부에서 사회주의의 토대들이 건설되는 것을 막으려함에 이해가 있었던 세력들 가운데에서 반응과 지지를 발견했던 자본주의의 책동에 관하여 경계가 요구되었다. 그 특별한 시기에, 경제관리의 중앙집중화된 수단이 필요했고 어느 지점까지는 정치적 상부구조에서 그것의 반향들이 있었다.

20차 대회에 의해 겨누어진 비판은 틀림없이 실수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유감으로 여기는 데 관심이 없었던 그러나 이러한 실수들의 이름으로 공산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건설의 뿌리를 타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사람들에 의해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파괴적이고 중상적인 공격을 시작하는 데 이용되었다. 스탈린에 대한 그것의 이야기에서, 제국주의는 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창출에 대한 그것의 모든 계급적 증오를 보여주었다.

하나의 결론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순간들에서, 반혁명의 위협이 있었다는 주요하고 기본적인 사실과는 별도로, 권력의 남용과 간부와 기관들에 의한 고압적인 행동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당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사회주의적 비판과 활동이 실제적인 실수들과 일탈들에 대한 비판과 혼동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마지막 말, 총체적인 경험 그리고 이 시기의 부정적인 측면들은 아직 뚜렷해지지 않았다.

그 시기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사회주의 건설의 최초의 국면에 관하여 끌어내어지는 역사적 결론들이 포괄적이고 객관적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긍정적, 뿐만 아니라 부정적 측면들이 그것들의 진정한 차원들에서 제기되도록 하기 위하여 요구된다.

 

 

전후 시기 동안에 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

 

22.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주의의 건설은 보다 넓은 기준에 기초하여 판단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상황과 특히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창출은 모든 장에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그리고 사상적 차원에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싸움을 제기했다.

2차 대전 말엽에 국제적인 세력 균형은 사회주의의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상당히 변화했는데, 반면에 동시에 국제정세는 훨씬 더 복잡하게 되었고 새롭게 구성되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요구들이 더욱더 커지고 더욱더 복잡하게 되었다. 유럽의 8개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전후 사회주의 체제의 창출을 위한 토대를 구성했다. 그 당시까지 이들 나라들의 압도적 다수는 그들의 생산의 발전에서 뒤쳐져 있었고 심지어 발전된 자본주의의 경험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이것은 별도로 하고 그들이 전쟁에 의해 황폐화되어서 새로운 환경들 하에서 그들을 재건하는 것은, 쏘련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틀 내에서 주어야만 했던 돈과 원조의 막대한 양을 요구하였다.

새로운 정권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러고는 노동계급의 정치권력으로 진화해갔던 다양한 조건들은 또한 사회주의로 이행한 8개 나라들에서 특별한 특징들을 산출했다: 그들의 정치 체제에서, 그들의 사회적 및 정치적 의식성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조건들과 형태들에서, 그들의 국가구성들과 정치체제들에서, 각각의 이행기의 속도와 지속에서, 종교와 교회의 역할에서.

이들 8개의 유럽의 나라들에서, 새로운 사회는 그들의 반파시즘 투쟁의 발전들과 특이성들로부터 나왔다. 민족해방투쟁은 인민의 혁명과 융합되었다. 이들 나라들의 일부에서는 낡은 행정적 기제들이 즉각적으로 해체되었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점차적으로 해체되었는데 반면에 동시에 반파시스트 저항을 통하여 권력과 행정의 새로운 기관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창출되었다.15)

자본과 노동의 근본적인 모순은 이 특별한 사례에서 인민적 계급들의 외국 파시스트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에 대한 반대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 지점에서 사회들의 적대적인 모순들은 하나가 되었다.

23. 실천적으로 공산당들은 각 나라마다 단일하지는 않았던, 창출된 정치적 전선들에서 지도적 위치를 획득했다. 전후의 새로운 조건들에서 자본주의를 지지하기를 원했던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또한 최초의 국면에 참가했다. 이것은, 인민의 공화국들과 사회주의적 변혁을 수립하기를 원하는 세력들이 승리했을 때 길을 따라서 갈등이 첨예화된 이유이다. 적군(赤軍)은 이들 혁명들을 지지하고 방어하는 것을 도왔는데, 반혁명의 수출과 외국의 간섭을 막았다.

이들 나라들의 일부에서는 이전의 착취계급들의 대표들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비율을 구성했다. 뒤따랐던 어렵고 결정적인 시기 동안에 그들은 이전의 소부르주아 계층과 동맹하여 그것의 다양한 책략들에서 제국주의를 지지하였다. 공산당들이 때에 맞춰 이들 특이성들을 준수하는 데 실패하는 정도에 따라, 그들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의식성의 발전을 방해하는 역전된 현상의 출현에 기여했다.

24. 쏘련공산당과 다른 당들의 전후의 모든 당대회에서 목표들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진보들을 생산에 적용함에 의해 그리고 물질적 및 기술적 토대를 일신함에 의해 공산주의를 위한 물질적 및 기술적 기초의 창출을 가속화하는 것에 두어졌다. 전략적 목표는 사회적 번영을 일으키고, 자본주의의 그것에 대한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그리고 광범하게 인민의 물질적 및 지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대회들은 노동자들의 수입들과 그들의 소비 능력에 관하여 공업의 발전과 농업경제의 그것 간의 불일치를 제거하는 필요를 지적한다.

상향하는 과정이 사회주의 나라들의 경제에서 주목되었을지라도, 그것들을 주요한 특징은, 수치상의 목표들이 개선되고 있었지만 반면에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진보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는 목표는 계획에 따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목표들은 불일치의 제거에 관하여도 충족되지 못했다. 1970년대 말경에는 일정한 역전과 발전 속도에서의 감소가 주목되었다. 문제들은 전체로서 사회적 관계들에 관하여 쌓이고 있었다.

목표들―그것은 모든 대회에서 다소간 동일했다―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된 방법들과 수단들은 상당히 달랐다.16)

1980년대 초에 쏘련공산당 내에서 사회주의 경제에서의 개혁들의 문제를,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의 그/그녀의 직업에 대한 태도에 관한 고려들을 제기하는 시도에서 중요한 논의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원칙들, 사회적 소유와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의 명시적인 방어에서 사상적 전선의 개시와 연관되어 있었다.17)

8개의 나라들은 그들 자신의 조건들 하에서 쏘련의 경험을 이용했다. 그것의 많은 특징들은 특히 사회주의를 위한 토대를 놓는 시기 동안에 기계적으로 수행되었다. 그 길에서, 쏘비에트 “모델”로부터 중대하게 일탈한 상이한 견해들과 실천들이 나타났다.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잘 알려진 “프라하의 봄”의 시기에), 헝가리(1980년대), 폴란드(1980년대)에서 상이한 방법들과 정책들이 국제적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공산당들 간의 관계들에 영향을 주는 쟁점들에 있어서 사회주의 건설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사상적 불일치를 반영했다.

공산당의 문서들과 논의들에 대한 연구는 이 시기 동안에 사상적 논쟁의 형태로 사회주의 의 문제들에 대한 논쟁들과 불일치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때에 페레스트로이카의 출현과 충격을 위한 길을 예비한 첨예한 이론적 일탈들과 의문들이 생겨났다.18)

사회주의의 전후 건설에 대해 그리고 특히 가장 최근의 수십 년간에 대한 오늘날의 조사는 문제들의 점차적인 축적 그리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이론의 원칙들에 기초한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해결들과 사회주의 건설 동안에 표면화되고 있던 새로운 문제들과 모순들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제공하지 못하는 당과 국가 지도부들과 공산당들의 무능력을 보여준다.

 

 

3부

 

자본주의 복고의 원인들에 대한 결론들과 생각들

 

25. 사회주의의 전복은 자본주의의 복고의 불가피성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들을 확증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요소들의 일부 즉, 당의 전위적 역할 그리고 그것의 인민대중과의, 내부로부터 혹은 외부로부터 어떤 실수들과 책략들에 맞서 사회주의를 방어하는 데 있어서 안전밸브 역할을 하는 요소들과의 관계에 관한 그것들이 약화되고, 변경되고 그리고 타격받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근저가 되는 원인들에 대한 논의들은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자본주의적 퇴보를 위한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그 전제조건들을 창출한 요인들의 망에 대한 연구를 초래했다. 또 하나의 출발점은 사회주의 사회는 그 자신의 발로 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행의 사회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나라들에 대하여 자본주의를 복고하려는 작용은 내부로부터 위로부터 시작되었지, 자본주의를 복고하려는 어떠한 제국주의적 간섭 혹은 어떤 인민적 봉기 혹은 내부적 충돌이 선행하지도 않았다. 혁명적 노동운동의 역사는 패배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상이한 역사적 순간들에서, 투쟁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들 하에서, 충돌이 한편으로는 혁명적 인민대중들의 결정적인 행동과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 그리고 국제적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들 사이에서 솔직한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자본주의를 복고하기 위해 사용된 조건들, 방법들 그리고 수단들은 출발점으로서 주체적 요인들 즉, 당과 국가적인 사회주의 체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관계들의 영역에서 보고된 우선적으로 내부적인 모순들의 총체를 연구하는 것을 강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복고되었던 시기의 그 특별한 지점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관계에 관한 또 다른 그룹의 모순들은, 반혁명을 초래한 내부적 사건들의 연쇄와 상호의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지라도, 그러나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26. 지배하는 당과 그 정치적 체제의 핵으로서 당의 전위적, 지도적 역할은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느슨하게 되었고 당의 원칙들과 작용하는 규율들 그리고 간부를 개선하는 정책은 무디어졌다.

반혁명의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공산당들의 정체성과 성격에서의 변화를 드러낸다.

또한 특수한 사건들이 그리고 특히 “경고 신호들”로서 인식되어야만 했던 것이 유럽에서 있었다(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의 문제들, 루마니아 그리고 알바니아, 또한 자본주의 유럽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타격하는 선봉으로서 유러코뮤니즘을 사용하는 수정주의적 공격이 있었다).

자본주의 유럽에서 공산당들의 분열의 현상들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운동과 공산주의 운동들의 대열에 대한 자본주의와 그것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사되는 사상적 압력의 강력한 경고를 구성했다.

최근의 발전들에서 더 명백하게 보여진 대로, 공산당들은 사회에서 그것들의 지도적, 전위적 역할을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그리고 국제적 영역에서 성공들은 젠체함과 자기만족의 정신을 배양했다. 인민과의 통일 그리고 노동인민과 사회적 조직들과의 민주적 관계들―사회주의를 위해 가장 귀중하고 필요한 모든 것―이 흥미 있는 것이 되지 못했고 유지되고 계속 개선되기를 멈추었다.

하나의 지점으로부터 계속하여, 그들은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었고 그들은 인민의 분위기, 문제들, 필요들 그리고 관심들을 파악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당의 기관들과 조직들은 인민 대중들의 창조성과 주도성을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그들의 능동적 참가를 약화시키는 것을 결과했던 관료주의적 유형의 서비스들로 변형되었다.

광범한 인민대중들에 의한 당, 그것의 조직들 그리고 간부들에 대한 통제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공산당들의 지도적 기구들은, 위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 비판과 자기비판의 과정을 침식하는 것에 대해, 결정들의 형식적이고 도식적인 수행, 진정한 상황들을 감추고 윤색하는 경향들, 노동의 질과 결과들에 대한 관심의 결여,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감싸 감추는 정신을 결과하는 것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정책의 왜곡들, 국가 규율에 대한 위반들, 그리고 생산의 질에 대하여 용인하는 분위기가 배양되었다.

당내 민주주의가 위반되었고, 간부들 사이에서 출세주의를 위한, 당과 정부에서의 위치들의 악용을 위한, 간부 선출에서 주관주의를 위한 길이 명확해졌다.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에서의 평등의 원칙이 위반되었고 최근의 기간 동안에 당의 동지애에 대한 경멸의 현상들이 나타났고 강해졌다.

이러한 발전들의 결과로서, 이기적인 동기를 갖고 있는, 정치적 능력과 넓은 시야의 결여로 고통 받고 있는, 혹은 노동인민의 제안들과 주장들을 이해하고 찾아낼 능력이 없는, 혹은 반사회주의적 선전에 대해 이의를 달리하는 견해들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 간부들에게 문이 활짝 열렸다. 그들의 결정들을 과학적인 자료에 토대를 두는 공산당들의 능력이 감소되었고 사회주의의 건설과 복잡하고 뒤얽힌 현상들을 다루는 것에 대해 더욱 막연한 중요성을 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산당의 성격과 양립할 수 없는 이러한 현상들이 인민들 사이에서 당의 위신을 침식하는 길을 열었다.

27. 우리의 이론으로부터의 일탈, 원칙들을 건설하는 것의 위반들을 구성하는, 이론적 관점들이 배양되었고 선택들이 선호되었다. 제국주의와 수정주의와의 투쟁의 전선이 약화되었다. 어떤 경우들에서는, 현실에 조응하지도 못하고 혹은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이론적 쟁점들을 단순화한 잘못된 이론들이 채택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행기의 복잡하고 오랜 기간의 성격을 과소평가하면서, 발전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의 빠른 이행을 제기했던 이론들(20차 대회를 보라), “전인민의 국가”, “전인민의 당” 그리고 “전인민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들이다.19)

“어떤 조건들 하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다양한 나라들의 이행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한 20차 대회의 결정들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공격을 위한 이론적 토대로서 공산당들의 지도부들에 의해 활용되었다. 민족적 특수성들과 특이성들의 이름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불변의 법칙이 수정되었다. 구조적 개혁들과 “민주주의 정책”을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가 혁명적 도약 없이 사회주의 체제로 변혁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군사기구와 반동적 관료주의적 기제에 의해 지지받는 착취계급들이 저항을 한다는, 이행의 어떤 형태도 일반적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고 포괄적인 의회적 그리고 비의회적 투쟁의 결과라는 사실을 과소평가하고 경시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시기 동안에, 칠레 그리고 포르투갈의 경험에 의해 그리고 제국주의의 전술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20차 대회의 관점들과 사상들의 일부는 파기되었다. 20차 대회에 관련되는 방향에서의 어떠한 변화들도, 그 나라들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의 대열 내에서 더욱 일반적인 이론적이고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토의를 수반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조용하게 일어났다.

사상적 전복의 전략―경험의 관점에서 오늘날 회고할 때 알 수 있듯이―은 공산주의 운동으로부터,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당과 정부 지도자들로부터 대응되는 공격적이고 통일된 반응을 만나지 않았다. 당들의 문서들에서, 특히 쏘련공산당의 그것들에서 제국주의의 새로운 전술의 위험한 성격에 대해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새로운 상황에 공격적이고 확신에 차서 대결하기 위하여 경보음을 내고 공산주의 운동에서 경계심을 갖게 하기에는 실천적으로 불충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독립적인 노동운동이 나타났던 최초의 순간부터 이미 갖고 있었던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은 사상적 투쟁의 초점을 외부로부터 공산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체제의 내부로 솜씨 좋게 옮겼다. 전략과 전술에서, 그것은 다양한 계급들, 계층들 그리고 정치적 세력들과의 대결과 협력으로부터 획득되었던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적용하고 재적용하는 데 있어서 활용했다(절대 군주제, 입헌군주제, 의회제 공화국, 파시스트 독재, 군사쿠데타). 그것은 지도적 간부들의 실수들, 약점들 그리고 야망들을 활용했고 일탈들과 불평을 배양했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분위기를 이용했다.

우리는 회고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나라들의 공산당들의 문서들에서, 사회주의의 논쟁의 여지없는 승리들이 과대평가되었고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후에 발생했던 장엄한 변화들이, 발전의 과정 동안에 떠올랐던 복잡한 새로운 문제들을 과소평가하는 방식으로써, 과대평가되었다고 믿는다.

어떤 경우들에서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현상들이 절대적인 것으로서 제기되었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견해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에 대한 전망으로 배양되었다. 새로운 과학적 및 기술적 진보들을 생산에 적용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이, 그것들의 모순과 노동인민의 생활과 권리들에 대한 반대의 효과들에도 불구하고 과소평가되었다.

일탈은 진공상태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해결책을 찾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 적절한 때에 폭로되지 못하거나 혹은 그 주요한 원인이 규명되지 못한 실수들, 일탈로 진화하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주관적인 그리고 피상적인 평가들이 있었다.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순간들에 제국주의와 대결하는 것을 쏘련과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이 망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생활에서 그리고 두 사회체제 간의 대결에서 문제들에 대한 어떤 잘못된 혹은 공상적인 견해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사상적 압력 하에서 뒤로 물러나는 경향을 표현했다.

직접적으로이건 혹은 간접적으로이건 간에, 기회주의는 공산당들의 약화를 위한 길을 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성공하는 것을 침식하고 약화시키려는 제국주의의 노력을 위한 사상적 기초를 구성했다.

문제는 수정주의적, 기회주의적, 그리고 청산주의적 견해들의 형식적인 주문(呪文:exorcism)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의 보유자들을 탄핵함에 의해 풀어질 수 없다. 역사에 대한 유물변증법적인 원칙들은, 노동운동 내에서 기회주의적 이론들과 실천들의 출현을 위한 조건들이 창출될 수 있는 기초 위에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생활에서 객관적인 사실들을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이것은 기회주의의 우위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현상들에 유리한 객관적인 요인들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그때에 공산주의 운동이 문제들, 부작용들 그리고 심지어 일시적인 패배들을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28. 사회주의적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요구되었던 새로운 유형의 개인의 항상적인 성장과 개선을 목표로 하는 다면적인 교육적 활동과 같은, 창조적인 사상적 및 정치적 사업이 약화되었다.

사회주의적 사고가,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의, 기회주의와 수정주의와의 강도 높은 대결의 조건들 하에서 새로운 길을 계획해야만 했던 이 새로운 사회의 발전에 대해 조타장치를 구성할 수 있었고 해야만 했다. 사회주의 건설은 광범한 인민대중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적 그리고 정치-사상적 수준을 요구하고, 뿐만 아니라 지식과 의식의 어떤 수준을 요구하는데, 그들이 복잡하고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정치적 및 조직적 과정에 반응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자본주의와의 첨예한 사상적 대결과 특히 사회주의 사회들 내에서 사상적 활동의 역할에서 증대의 조건들 하에서 이 중요한 활동의 전선은 무시되었고 변화하는 조건들에 적용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노동인민이 그 체제의 확신에 찬 지지자들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그리고 사회적 및 정치적 사안들을 관리하는 데에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참가를 통하여 사회주의적 의식을 배양하는 과정의 복잡함은 과소평가되었다.

사상적 및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토론은 전체 당, 그것의 조직들, 당원들과 비당원 지지자들, 그리고 물론 전체 사회를 동원하지 못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회주의에 대해 견해들과 방향들의 광범한 표현을 제공하였을 것이고 잘못된 견해들이 사상적 수단과 설득적인 주장들을 사용하여 마주하였을 것이다. 사상의 진화는 자동적으로 사회적 진화와 보조를 맞추지는 않는다;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사상들은 인민의 주도성과 창조적 행동이 무디어지고, 느슨해지고 그리고 감소되는 조건 하에서, 무정부주의적인 찌꺼기들, 개인주의, 주관주의 그리고 지방주의가 복귀되고 더욱 강해지는 것을 허용하면서 무너진다. 이렇게 문제들의 복잡함에 직면하여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 사상의, 타협과 권태의 침투와 재생의 도랑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들이 창출된다. 이러한 부적당한 점들이 일반적인 퇴보의 조건들 하에서, 오늘날 더욱 명백해지고 있다.

29.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과 혁명적 세력들의 행동에 의해 혁명적 이론의 창조적 진화, 발전 그리고 풍부화에서 지체가 있었다. 쏘련과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과학적 조사와 이론적 조사들을 무효로 하는 어떤 의도도 없이, 발전들은 공산당들이 사회주의 건설과 동시대의 조건들에서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창조적 발전에서 이론적 지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일부가 당 자체에 속하는 특수한 연구중심들에 의해 수행되는 과학적인 연구들은 과소평가되거나 혹은 간과되었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가, 관리와 행정에 대한 능동적 참가와 관련하여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준비하는 이론의 항상적 발전, 지식의 갱신을 통하여 건설되어야 하는 필요가 과소평가되었다.

어려움들과 즉각적으로 대결하고 그리고 변증법적 방식으로 해결될 필요가 있는 새로운 조류들, 모순들 그리고 갈등들이 확인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문제들이 앞서서 연구되지 않았다. 10월 혁명의 성공과 이어지는 혁명운동의 상승은, 그것의 성공의 기본적 요소들의 하나가 앞서의 얼마 동안에 일련의 중대한 이론적 쟁점들이 권위자들(Classics)에 의해 연구되었다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론과 과학적 조사에 의지함이 없이 경험에 절대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해가 될 수 있다. 인민의 전위적 부분으로서 당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을 인식해야만 하고 예견해야만 하고 그리고 즉각적인, 매일의, 부분적인 것에 직면하여 총체적인 운동, 전체의 자취를 잃지 않아야만 한다.

30. 직접민주주의와 대표 민주주의의 변증법적 관계가 약해졌고 올바르게, 그리고 그 시대에 의해 또한 사회주의 건설의 복잡한 과제들에 의해 요구되는 바대로 기능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을 통하여, 중앙의 계획을 대중의 주도성과 결합하는 것이, 인민들 사이에서 그들이 사회주의 소유를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배양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1970년대부터 계속하여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고 첨예한 형태를 띠었다.

과도한 권력과, 문제들의 객관적인 성격 그리고/혹은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었던 현상들을 포함하여,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형태들의 발전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올바른 기능에서 문제들이 나타났다. 이 특수한 체제에 고유한 가능성들―그것의 기본적인 기준이 인민의 의식적 참가, 정부들 그리고 행정 기구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 그리고 변증법적인 관계와 단위: “당-쏘비에트-인민”이었던―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혹은 활용되지 않았다.

내전과 2차 대전에서 경험 있는 간부들과 전사들의 손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전선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능력 있는 간부들을 활용해야할 필요가 쏘비에트들의 구성에서 간극들을 창출했다. 객관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민주적 방식으로 그리고 인민의 참가와 지지로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경험을 가지지 못했던 간부들의 새로운 세대가 육성되었다. 그들은 느슨함과 출세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선출되었다.

이 결과들은, 주목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들과 국가권력의 기관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그리하여 더욱 첨예한 방식으로 재생되었다.

적절한 경험을 이용하기 위하여 더욱 조사되어야만 하는 주요한 문제는 국가권력의 형태로서 쏘비에트들의 역할과 이용 그리고 지역 쏘비에트들과 노동자들의 공동체들 간의 관계들과 관련이 있다.

비록 새로운 권리들을 지역 쏘비에트들에 대해, 노동인민에 대해 그리고 노동자들의 그룹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부여하는 법률들이 통과되었지만, 사실상 대중적 참가와 통제를 위한 절차들은 성격에서 단지 형식적으로 되고 있었다.

더 깊은 검토를 요구하는 하나의 똑같이 중요한 쟁점은 노동조합들과 사회주의 사회의 다른 대중 조직들의 지위와 역할이었다. 법률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그것들의 역할은 법률들과 결정들을 통하여 그리고 모든 사회적 및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참가를 통하여 공고화되었다. 실천 상에서는, 그것들의 역할은 가능한 최고도로 발전되지 못했다.

당과 인민과의 연계들의 느슨함 그리고 노동인민으로부터 중앙기관들의 분리는, 비당(non-party) 세력들이 인민이 국가와 당 기관들에 대한 능동적 참가와 통제에 관여하는 흡인의 버팀목을 구성해야만 했던 대중조직들의 활용에 대해 역의 효과를 가졌다.

위의 현상들에 대한 일차적이고 가장 주요한 책임은, 그것의 성격과 역할에 의해, 그것의 활동을 인민의 주도성과 상호 관련시키고 그리고 인민에 의한 참가를 항상적으로 배양하는 것을 위하여 첫 번째의 관심을 가져야만 했던 공산당의 역할과 활동에 놓여 있다. 그것은 행정적 방법들을 제한하고 제거해야만 했고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적 및 조직적 기능들에서 인민의 직접적인 그리고 대표들의 기관들의 역할을 증대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을 창출해야만 했다.

31. 나타났던 부정적인 현상들과 문제들은, 그것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 사이의 완전하고 실질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정치적 단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에 의해 그 국가가 표현되는 정치적 이행기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존재한다는 이론적 입장이 그릇되었음을 입증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반사회주의적 세력들, 개량주의자들 그리고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사회주의 정치체제에 겨누어졌던 비판은, 의식적으로 ―혹은 어떤 경우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가정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준을 같다고 보는 가정으로부터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무계급적인 취급들로부터 출발했다.

이러한 유형의 가장 특징적인 견해들 중의 하나는 민주주의를 다당제와 동일시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정부에 참여하는 당들의 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다른 당들의 존재와 기능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는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주요하게 결정된다. 공산당은 별도로 하고, 사회주의 하에서 정치적 당들의 수, 성격 그리고 역할은 특수한 민족적 특이성들과 전통에, 사회적 성층 혹은 역사적 이유들에 의존한다(예를 들면, 사회혁명당원들은 비록 그들이 최초의 쏘비에트 정부에 참가했지만 내전에서 반혁명으로 넘어갔다).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은 사회주의 발전의 각 국면에서 각 수준에서 사회의 경제적 영역에서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주의의, 중앙집권주의를 개선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는 우선적인 목표와 가능한 한 최선의 결합을 보장할 필요를 보여주었다.

중앙집권주의는 노동인민의 기본적 이익들을 표현해야만 하고 민주주의는 권력의 행사에서 인민의 계속되는 존재를 표현해야만 한다. 그 둘의 가장 조화로운 가능한 결합, 그것들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은 사회주의 체제가 실수들과 파괴적인 활동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한 요인을 구성한다. 민주주의를 손상시키는 중앙집권주의의 증대는 경제적 발전에서 그리고 집단적인 이익들을 만족시키는 데서 심각한 부작용들을 야기했고 사회주의 체제의 방어를 약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적인 자기정부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적 참가와 사회주의적 소유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성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인민이 전체로서 사회적 부의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소유자들이 되는 것은, 통제의 권리들을 확보하고 개선하고 그리고 확대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개성의 전방위적인 발전을 보장하기 위해 시간과 항상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 대회들에서 집중적인 관심사였고 특수하고 적절한 결정들과 계획들이 정식화되었지만, 이 쟁점이 목표들과 필요들의 기초 위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졌던 것 같지는 않다.

노동인민과 사회주의적 소유의 관계의 질에서 요약될 수 있는 객관적인 어려움들, 실수들, 위반들 그리고 일탈들은 별도로 하고, 중앙 행정의 증대된 중요성과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권력의 기능들을 행사함에 있어서 노동인민의 존재20)는, 마찬가지로 떠오른 문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32.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 “각자로부터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노동에 따라”라는 원칙이 실질적으로 위반되었다. 경제적 및 도덕적 인센티브의 체제는 항상적인 개선들을 요구했다. 이것이 실현되지 못하고 위반되는 정도에 따라, 노동에 대한 무관심과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에 대한 무관심을 위한 토대가 준비되었다. 이 요인들은 행해진 노동의 양과 질에 조응하지 못하는 수입들의 창출을 초래했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경제적 해결에 대한 간헐적인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인민 경제에서 경제적인 방법들과 인센티브들의 역할은 최종적으로 더 강해지지 못했고 중앙계획은 굳어졌고 집중화되었다. 재화의 수송에서 그리고 시장의 신속한 공급에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 점에 관하여 토론들이 열렸고, 가치 법칙, 상품-화폐관계들이 기업들을 관리하고 가동시키는 데 있어서 사용된 방식에 대해 그리고 노동자들의 공동체들이 활용된 방식에 대해 공산당들과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비판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문제들은 특히 상품-화폐관계에 관련되어 있었고 소비재와 서비스들의 질 그리고 도덕적 인센티브, 사회적 통제 그리고 계획과 행정에 대한 참가는 더 한 층의 특수한 토론을 필요로 한다. 비판적 주장들에 대한 이유들이 있지만 그러나 특수한 검토와 더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공산당들 그리고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실험들과 적용들이 수행되었던 헝가리와 폴란드와 같은 중앙유럽과 동유럽에서의 경험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어떤 것들은 비효율적임이 입증되었고, 사상적 및 정치적 영역들에서 부작용이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출현에 대해서 비난받아야만 한다.

나타났던 그리고 이론으로부터 일탈을 구성했던 문제들은 맑스-레닌주의의 일반적 방향을 반박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것을 확증했는데 즉, 사회화(그것의 주요한 형태들에서, 국가와 협동조합적인 것)는 분리된 독립적인 공동체들의 형태에서가 아니라 국가소유로서 사회주의의 기간 동안에 전진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행기 동안에 생산력들을 발전시키고 집단적인 이익을 확보할 필요 때문이었다.

계획의 영역에서, 지방 쏘비에트들과 노동자들의 공동체들 그리고 그것들의 역할에서, 민주주의와 중앙집권주의 간의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나타났던 문제들, 약점들 그리고 실수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평형추로서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경쟁” 그리고 사유화의 혹은 공상적인 정책에 대한, 가능한 최선의 경우에는 사회의 전체적이고 집단적인 이익에 손해를 주면서 통일되고 전국민적인 사회주의적 소유를 생산자들의 그룹들에 의한 소유로 분열시키는 것을 초래할 “자기행정”과 “자기관리”를 입안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서 이용될 수 없다. 사회적 소유와 중앙계획은 반사회주의 세력들에 의해 항상적인 공격과 비방들에 종속되어 있었다. 본질적으로, 목표로 되고 있는 것은 계급적 착취의 폐지와 노동계급과 그 동맹들의 정치적 권력이다.

33. 유물변증법의 핵을 구성하는 사회주의에서 내적인 모순들의 체계가 간과되었다. 발전의 모든 국면과 수준에서 생산관계들과 생산력들 간의 변증법적 통일과 상호작용을 확보할 필요가 과소평가되었다.

실수들, 약점들, 결핍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탈들이 번성했던 이유에 대해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많은 문제들에서 이것이 핵심적 쟁점임이 입증된다. 사회주의에서 모순들의 문제는 이론적 연구들의 그리고 주요하게는 실천적 해결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 반영되었던 역의 효과들을 결과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모순들과 불일치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은 간과될 경우 갈등의 성격을 띨 수 있다는 레닌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들의 일부가 과소평가되었다.21)

사회주의 사회를 통합하는 과정이 과대평가되었고 혹은 절대화되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순들이 그것들의 중요성을 잃는다는 잘못된 견해들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 결과는 불일치들, 부조화들 그리고 문제들이 확인되지 못하고 환경들에 의해 요구되는 정도로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때때로, 특히 1970년대에 그리고 더욱 집중적으로는 폴란드 위기 이후로, 집중적인 논의가 사회주의에서 모순들의 변증법에 대해 수행되었지만 이 논의들은 계속되지 못했다. 쟁점들이 전면화되었지만, 이 결정적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들은 다양한 과학기관들에 의해 수행된 이론적 논의들과 연구들을 넘어서 제공되지 못했던 듯하다.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에서 모든 국면들에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혁명이 사회적 및 기술적 진보 간에 유기적 연계를 보여주었던 조건들 하에서, 공산당들과 국가 기관들은 그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돌렸어야 했다: 생산관계들을 개선하는 것, 생산력들을 발전시키는 것, 경제의 전체 기제의 최적의 조직화를 달성하는 것, 사회주의적 의식성을 제고하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민족들의 문화적 발전을 증대시키는 것.

사회주의 건설의 조건들 하에서 ―자본주의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서― 특징적인 성격은 인민의 물질적 및 지적인 필요들에서 빠르고 어떤 경우들에서는 무모한 증가였다. 그리하여 생산력들의 발전에 대한 필요는 항상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 모순들이 회피되는 정도에 따라, 갈등들이 사회적 생산과 소비 간에, 개인적 및 사회적 이익 간에 발생했다. 이러한 사례에서는 모순들이 개인의 소비주의를 촉진하고 이상화함에 의해 혹은 물론 개인적 및 집단적 필요에서 증가하는 흐름을 무시함에 의해서 제거될 수 없었다.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은 객관적인 가능성들에 기초한 균형의 어떤 “척도”도 없었던 정도에 따라 문제들이 창출되었고 불만이 조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4. 일반적인, 부분적인, 특수한 그리고 지방적인 이익들 간의 모순들을 위한 길을 준비했던 사실인, 사회주의 사회의 성층화(stratification)가 간과되었다.

사회주의의 토대들이 놓여졌을 때, 계급적 구분들이 폐지되었다. 다양한 형태들로 드러났던 노동계급과 인구의 다른 사회적 층, 농민층과 인텔리겐챠 간의 역할들의 구분들과 차이들(도시와 농촌 간의,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 간의 모순들 등)은 사멸하고 있었지만 폐지되지는 않았다.

다른 구분들은 사회주의 발전의 수준과, 사회주의적 소유의 형태들과, 역사적, 민족적 그리고 지방적 특이성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또한 의식성과 방향의 차이들로서 나타났던 다른 것들은, 시대착오적인 관점들의 잔존으로부터 혹은 제국주의에 의한 사상적 공격의 조건 하에서 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의 압력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들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 사회로의 혁명적 변혁에서의 이행기로서 묘사되는, 이 사회의 성격에 대한 맑스주의적 입장과 연계되어 있다. 그것은 완전한 사회적 평등이 성취될 수 없는 시기이다.22)

역사적 경험들은 맑스-레닌주의 권위자들의 입장들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것은 더 깊은 연구를 위한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모순들에 대한 개념들의 발전을 위한 많은 새로운 자료를 제공했다.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가 그로부터 태어났던 낡은 사회의 찌꺼기들, 전통들, 그리고 깊은 흔적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계급투쟁은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들에, 특히 생산의 주요한 수단을 사회화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토대를 놓기 위한 노력들이 행해지고 있는 시기 동안에 계속되고 강화된다. 착취계급들은 그들이 소수가 되었고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및 정치적 지지들의 일부를 잃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이 표현되는 강도, 지속, 첨예함 그리고 형태는 사회주의적 관계들이 건설되는 속도에 그리고 국제적 환경과 세력균형에 의존한다. 사적인 자본과 소규모 상품 생산이 존재하는 전체 시기 동안에 부르주아 계급의 새로운 요소들이 재생된다. 상황은 또한 국제적인 세력균형과, 외부적 간섭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부로부터 사회주의의 타도를 도모하는 내부적 발판을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제국주의의 전략과 전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것의 첨예함과 형태들은 모든 나라들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민족적 특이성들, 노동자들의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들, 당과 인민 간의 끈의 질, 그 특수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조치와 변혁들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노동계급과 다른 사회층 간의 동맹의 질, 이 모든 것이 역할을 하는 한 부분이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들이 공고화됨에 따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그리고 건설과 정치적 및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행정에 자발적인 능동적인 대중적 참가가 증대함에 따라, 사회주의의 적들은 최소화될 것이다.

35.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혁명의 진보들을 사회주의에서 광범하게 사용하는 것이 지체되었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공산당들의 대회들은 새로운 기술들의 불만족스런 수행과 활용에서의 문제들을 반복하여 확인했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혁명은 불균등하고 선택적으로 적용되고 활용되었다: 군사적 경제에서, 우주에서, 중공업의 일부 부분들에서 그리고 대규모의 프로젝트들에서; 소비재들과 서비스 산업들에서는 덜 그러했다.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은 별도로 하고, 과학과 기술의 상대적으로 낮은 활용과 투자들에 대한 똑같이 낮은 복귀(return)는 다음의 요인들에서 찾아져야 한다: 경제적인 행정 기제의 역할에서, 행정과 관리의 형태들과 방법들에서, 노동의 질과 양에 따른 분배의 체제에서,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인센티브들의 체제에서, 물질적, 재정적 그리고 노동력 자원들의 합리적 이용에서 그리고 행정, 관리에 대한 인민의 참가와 계획과 행정 기구들에 대한 통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인간의 요인과 과학과 기술 없이는 그 자체로 실천될 수 없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가능성들을 이용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외연적인 발전으로부터 내포적인 발전으로 이행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형태들과 질과, 대중들의 참가와 연계되어 있다.

공산당들과 과학자들의 경험의 도움으로 연구되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계속적인 성장을 고무하거나 혹은 억제하는 객관적인 요인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술적 진보들의 포괄적인 적용의 그것으로서 역할하는 사회주의적 축적―특수한 나라들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조건들에서―의 가능성들의 문제이다.

사회주의에서 기술이 사용되었던 방식을 인식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상응하는 상황과 비교할 때 가장 낮은 지점에서 출발했던 나라들에서 생산력들의 성장과 눈에 띄는 기술적 진보에 대해 중요한 추진력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지 않는다. 일련의 연구들과 통계는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생산력들이 발전했다는 것을 그리고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행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발견들과 과학적 조사는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쏘련은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을 간헐적으로 앞섰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널리 퍼진 주장, 즉, 생산력들을 현대화하는 데 있어서 지체가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체제들의 타도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다.

생산수단, 기술 그리고 과학의 발전을 진보성과 민주주의의 배타적인 기준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들은 일면적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서 소유의 문제를 간과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노동인민의 입장과 역할을 간과했다.

생산력들의 발전은 그것들의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간 활동의 창조적 측면에 대한 그리고 노동인민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배타적인 지시기는 아니다. 사회주의는 심지어 낮은 생산성으로도 그리고 특히 이것이 역사적, 객관적 이유들에 기인할 때, 자본주의 이상으로 노동 인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노동과 생활 조건들에 가져다주는 질적인 요소들 때문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폐지는 생활의 질과 기준과 필요의 등급을 결정하는 인간적 가치들의 새로운 체계를 창출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혁명에 기초한 물질적 및 기술적 하부구조의 발전은, 생산수단의 발전의 수준은, 그리고 복잡한 기계화와 자동화는 생산관계들의 발전에 공헌한다.

36.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의 적용이, 제국주의와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행동의 통일의 느슨해짐과 분열로 인하여 약화되었다.

결정적인 시기에,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통일된 전략과 전술이 제국주의의 통일된 전략과 전술에 맞서 정렬되지 않았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에 대한 특히 중대한 타격은, 국제적 세력균형에서 그리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행동의 통일에서 영향이 있었던, 쏘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간의 불화였다.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많은 공산당들에게 역의 연쇄적 반응을 가져왔다. 그것은 반공산주의 그리고 반사회주의를 가속화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은, 이후에 자본주의적 유럽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대열 내에서 수정주의, 패배주의, 타협적인 태도들의 침투의 신호를 보냈던 유로코뮤니즘의 파도에 의해 가일층의 시험을 받았다.

다른 공산당들과의 견해들의 교환을 위한 포럼을 제공하는 통일된 중앙으로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해산으로부터의 역의 결과들과 반향들은 연구되고 이해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국제회의들의 도움으로 수립되었던 협력의 새로운 형태는 제때에 어느 지점까지는 전략과 전술의 공통된 정교화에 대해, 결합된 행동에 대해 공헌했다. 그 길에서, 이것은 역시 공산주의 운동의 대열 내에서 사상적 불일치와 불화들 때문에 실질적으로 포기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했던 국제적 쟁점들에 대한 쌍무적인 그리고 다각적인 지역적 모임들은 결합된 행동 혹은 사상적 및 이론적 문제들에 관련된 사안들을 다루기에는 불충분했다. 논의와 조우는 다소간에 형식적 성격이었고 문제들의 본질에 대한 살아있고 창조적인 논의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사상적 차이들에 초점을 맞추었던 논의가 공개적인 불화와 모든 종류의 관계들의 단절의 형태를 띠었던 시기가 있었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독립적인 책임성과 당의 내부적 사안들에 대한 비개입의 이름으로, 모든 논의와 비판이 중지되었고 그 결과 관계들이 견해들과 의견들의 교환에서 엄격할 정도로 형식적 성격을 띠었다. 두 개의 전술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결과를 초래했다: 통일의 느슨해지는 것에 대해, 이러저러한 견해의 뒤에 손쉽게 정렬하는 것에 대해. 주요한 것은 이론적 문제들과 하나 혹은 다른 견해 혹은 일탈에 대한 이유들에 대한 논의가 감소되거나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의 긍정적인,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다른 공산당들과 의견들의 교환을 통하여 공산주의당들 사이의 사상적 문제들과 차이들에 대해, 그리고 국제적 및 지역적 수준에서 그들 간에 발전되었던 관계들의 유형에 대해, 논의들을 수행할 방법과 수단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상이한 견해들에 대한 논의가 공산주의 원칙들에 기초하여 수행될 때, 제국주의 세력들에 의한 이용이 배제될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 결과는 이들 세력들에 맞서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을 구성한다.

37. 제국주의와 그것의 대결에서 사회주의의 전략과 전술에서 실수들이 행해졌다.

제국주의 측에서는, 두 체제 간의 대결은 단지 사상적 투쟁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전복적인 활동의 형태였다.

전후 초기에 그리고 어느 정도는 19차 대회와 주요하게는 20차 대회에서 발전되었던 평화공존의 노선은 공상적 견해들의 배양을 허용했는데, 즉 제국주의가 전쟁과 군사적 수단을 포기하고 평등한 터전 위에서 호혜와 협력의 원칙에 기초할 새로운 세계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 그리고 제국주의가 평화 시 경제를 받아들이고 발전 문제들이 있는 나라들에 의한 군축을 통하여 절약되는 자원들의 활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가 그러했다.

세력균형에서의 근본적 변화, 국제 혁명과정의 항상적인 진보 그리고 반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통일된 세계적 행동은 효과적으로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성과 군사적 개입들과 침입들을 방지할 수 있다.

역사의 그 특별한 국면에서, 유럽의 동맹들을 가진 미국이 자본주의에서 더 약한 시궁창들을 보강하고 있고,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리고 원자와 핵무기들의 사용의 항상적인 위협을 그 주요한 수단으로 하여 나라들의 내정에 대해 공공연하고 혹은 은밀한 간섭으로써 그들을 제국주의 체제에 묶어두려 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되지 않았다.

전쟁을, 특히 열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싸우는 것과 전쟁 일반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특수한 조건들 하에서―를 제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38. 전후 시기 동안에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들과 역할들에 대한 평가에 의한 부정적인 영향이 마찬가지로 있었다.

공산주의 전략에서 주요한 요소는 데탕트와 평화의 대의에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사회민주주의와 결합된 행동과 동맹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그것의 말로 하는 선언들과 주기적인 피상적인 술책들과 무관하게, 사실상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적인 “인권” 캠페인에서 제국주의 세력들의 편에 있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전후 정부들에서 추방하게 했던 미국의 압력들(마샬계획을 통하여)을 따름으로써, 공산당들과의 협력을 파기한 것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반제국주의, 반군사주의 운동이 강화되고 확대되어야만 했던 결정적인 순간들에서, 제국주의의 정책은 무기경쟁에 대해 쏘련과 미국을 똑같이 비난함에 의해 너그럽게 용서되었다. 방어적인 바르샤바 조약이 냉전과, 침략적인 NATO와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물론 빌리 브란트에 의해 지도되는 독일사민당과 같은 어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명백히 독일민주공화국의 합병과 내부로부터 반사회주의 활동들의 고무를 목표로 하는 소위 “다리” 정책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주의 당들이 정부권력에 올랐던 것은, 이들 당들의 성격에 대해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여 그것들이 제공했던 봉사들과 그것의 위기에 대한 관리에 대해 많은 증거들을 제공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별도로 하고, 노동운동의 힘과 통일을 침식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요인임이 입증되었던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의 지지 없이는 그것의 권력을 유지할 수도 없고 주요하게는 재생산할 수도 없었다.

소위 사회주의로의 제3의 길이 있다는 환상들을 그 당시에 조장했던 사회민주주의의 이론들에 맞선 강력하고 확신에 찬 그리고 전투적인 사상적 전선에 대한 필요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명백히 알 수가 있다.

 

 

4부

 

그리스 공산당과 사회주의 체제

 

39. 우리 당은 그것이 설립된 첫 순간부터 그리고 그것의 70년 이상의 역사를 통하여, 수천의 당원들과 간부들의 목숨으로써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나라들의 대의를 방어해왔다.

우리는 전 세계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인민이 성과들을 획득하게 하는 추진력이 되었던 사회주의의 나라들에서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성과들을 인정했다.

우리는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그리고 평화와 군축의 대의에 대해 사회주의 나라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제공되었던 거대한 도움을 감사히 여겼다.

주요한 사실, 즉 사회주의의 성과물들을 방어하는 우리의 투쟁정신은 우리나라에서 투쟁의 필요들과 특수한 특징들에 의해 지시되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 반공산주의 선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명백한 대응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는 과거와, 역의 극적인 발전들이 일어난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 당에 의한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40. 최근 기간 동안에 발생한 발전들은, 우리 또한 다른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화와 윤색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보여주었다. 우리 당은 많은 당 기구들과 문서들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과 약점들에 대해 말했다. 또한 다른 당들과 우리의 쌍무적인 접촉들과 관계들에서 우리 당원들에게 요점을 알려주는 것 없이 ―많은 경우들에서― 국제적 쟁점들 혹은 그리스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관련된 어떤 문제들에 관하여 비판이 표현되었다. 비판이 향하고 있는 상황들에서 우리는 조건들이 허용하는 정도까지, 더 깊은 원인들을 논의하려는 노력을 수반함이 없이 묘사되는, 일반적 언급들로 우리 자신을 제한했다. 우리는 우리가 주목했던 문제들을 주요하게 객관적인 요인들 때문인 것으로 돌렸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회주의의 발전과 관련된 문제들로서 정당화했는데 그것들은 모든 경우들에서 현실에 조응하지 않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 원인들은 부분적으로는 객관적인 이유들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심각한 주체적인 요인들 때문이었다. 우리 당이 지하에 있던 많은 기간들, 박해들의 오랜 기간은 체계적인 이론적 작업과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을 활용하는 데 대한 공헌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우리 당은, 주요하게 그것의 역사의 과정에서 일탈들과 대결함에 있어서 그것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판단하기에 비판적 정신에서 볼 때, 올바르거나 객관적이지 않았던 견해들과 대결하는 것을 도왔던 어떤 반영들을 획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 당 역시 적절한 이론적 배경을 획득하고 창조적인 연구와 우리 이론의 흡수를 촉진하고, 계급, 혁명적 투쟁의 풍부한 경험을 활용하고 즉, 그 자신의 힘으로써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관점에서 사상적 및 정치적 입장들의 창조적 발전에 대해 공헌하는 필요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공산당들 간의 관계들에서 그리고 이론과 사상의 문제에서 그들의 결합된 행동에서 나타난 형식주의와 화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당들의 경험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정책과 실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그리고 일탈들에 대한 동지적 비판을 결합시키지 못했는데, 그것은 다시 한 번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더욱 일반적인 역의 효과들을 가진 것으로 입증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반향들이 민족적 혹은 지역적 수준으로 제한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당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환영했는데 그것을 사회주의의 이익에 맞는 개혁으로 인식했고 우리가 그것의 사상적 확고함과 오랜 기간의 경험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쏘련공산당의 지도부에 의해 페레스트로이카가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소유와 사회주의적 소유의 상호공존이 쏘련에서 법률에 의해 공공연히 채택되었던 1987년에는 최소한 나타나고 있던 역의 과정의 신호들을 논의하기 위한 기회들이 있었다.

1990년 1월의 전체회의와 후에는 우리의 13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의 사건들과 발생하고 있는 변화들을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 평가들은 올바르지 않았다. 1990년의 테제들은 “새로운 사고”와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대한 환상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것들은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민주공화국에서의 사건들에 대해 왜곡된 접근을 포함했는데 실제로는 체제를 뒤집기 위한 반혁명에 의한 “폭발”이었음에도, “대중들에 의한 폭발”로서 인식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중앙유럽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정권들의 붕괴는 어느 정도는 … 불가피했다”고 간주되었다는 것이다.23)

최근의 몇 년간의 사건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무비판적 수용과 그것의 성격을 제때에 인식하는 데 실패한 것이 우리 당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더욱 일반적으로는 공산주의 운동의 대열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앙위원회에서 그리고 최근에 다양한 기관들에 선출되었던 꽤 많은 수의 당 간부들 사이에서 수정주의적 그리고 심지어 반공산주의적 견해들이 발전하였고 1990-91년 시기의 당내 위기를 초래했다는 결과와 더불어 사상적 경계심이 이완되었다.

41. 우리 당은 잠깐만 보아도 여기에서 도출된 교훈들에 대해 주의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간부를 육성하는 정책, 사회적 구성, 집단성과 내부 민주주의, 기회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한 견고한 투쟁, 뿐만 아니라 사회적 및 정치적 현실을 변화시킴에 있어서 우리 이론에 대한 연구, 흡수 그리고 발전에 관하여.

최근의 비극적인 경험은, 그것의 이론과 기능하는 원칙들에 기초하여 실천적으로 기능하기 위하여 맑스-레닌주의 이론을 당이 채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원칙들에 대한 존중, 이론의 창조적 적용 그리고 객관적인 발전들에 기초하여 실천 상에서 그것의 발전과 풍부화를 위하여 항구적인 관심이 있어야만 한다. 주요한 책임은, 모든 당원들과 더욱 광범위하게는 당의 영향과 활동 하에 있는 써클에 의해 획득되어야 하는 투쟁의 지식과 경험을 위한 전제들과 조건들을 창출해야만 하는 중앙위원회와 당 간부들에게 놓여 있다. 자기만족과 이완은, 발전하고 지속적으로 성숙하는 당의 능력을, 노동인민의 이익들을 위하여 사회적 변화와 사회주의의 대의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그것의 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당의 능력을 축소시킨다.

 

 

공산주의 사회로의 길에서 사회주의의 적시성(timeliness), 필요성
그리고 현실주의

 

42.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의 최종적인 승리는 세계적 법칙이다. 인류의 과정은 5개의 사회체제의 연속이 있었던 이미 저물어간 천년과 비교할 때 하나의 특별한 기간만의 ―그리고 물론 짧은 기간― 사건들과 발생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인류사회에는 그 성격에서,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전위, 노동계급과 그 당의 지도적 역할과 더불어 노동인민의 혁명적 투쟁을 통하여 작동하는 객관적인 법칙들이 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인민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들로서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43.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또 하나의 체제가 있을 것이라는 일부 학자들과 정치세력들에 의해 전파되는 견해들은 공상적이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새로운” 체제로 묘사하려고 시도할 지라도, 그들은 단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가진 그리고 인간을 계급사회의 법칙들의 먹이로 하는 자본주의체제의 변종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로 제3의 길”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듯이, 동일한 것이 아마도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회도 아닌 “또 하나의” 체제에 대해 희망을 부여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입증될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44.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으로서 맑스-레닌주의는 계속하여 시의적절하고 지극히 중요하다. 노동계급과 착취 받고 억압받는 사회층은 이 이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과 공산주의 사회에 의한 그것의 대체에 대한 논쟁할 수 없는 법칙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획득하는 것을 도울 해답들, 사상들 그리고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의 생명력과 힘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것의 적들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최근의 시기 동안에, 관념론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소란스러운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맑스의 사상들과 제안들에 의지해야만 했다.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로 회귀하는 그 조류는 모든 경우들에서 사욕이 없는 동기들에 의해 지시된 것이 아니었다. 부르주아 사상가들, 자본주의체제의 하인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이 새로운 매력과 영향력을 재획득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친숙한 술책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들의 가장 동적이고 근본적인 내용 즉, 사회주의 혁명과 그것의 일반적 원칙들의 필요성과 적시성을 제거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비교하는 것. 그들이 두려워하고 또 모든 수단을 다해서 막으려고 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당, 공산당에 결합하려는 생각이 토대를 얻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사상은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의 적시성 그리고 전망들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세워졌던 사회주의의 경험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의 발전, 풍부화 그리고 전 세계의 발전에 대한 연구에 대해 매우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모든 종류와 기원을 가진 성취들과 또한 실수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최초로 시작되었을 때는 가지지 못했던 배워야할 큰 교훈들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그 모순들을 가진 진화하는 현실에서 이론의 창조적 발전을 연구하고 심화하는 것을 위한 자극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실수들이 회피되고, 사고가 예리해지고 그리고 경험이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조사를 위하여 제고되게 하기 위하여 교훈들이 도출되는 것을 허용한다.

그것의 모든 구성요소들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과학적 이론은 인민적 세력들에게 지식을 통하여 복잡한 새로운 문제들에 정통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기술적 및 문화적 혁명은 사회주의 건설의 유기적이고 추진적인 부분을 구성해야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의 가장 애정 있는 지지자들에 의한 그것의 가장 낙관적이고 주관적인 평가들에 따를 때조차 출구가 없는 심각한 위기를 경과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토대 자체가 침식되고 있다. 노동계급은 그것의 사회적 동맹들과 더불어, 맑스에 의해 강조되었듯이, 한 번 더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임을 입증하고 그것을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수립할 것이다. 일시적인 패배는 그것의 결론들이 올바르게 활용되는 한, 승리를 배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승리를 준비하기조차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 전체로서 역사와 인류의 변증법적인 운동을 모르거나 의식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과 공산주의자들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45. 그리스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전복은 우리나라에서만 아니라 지구적 규모에서 사회주의적 전망의 객관적인 필요성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에 대해 많은 새로운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깊이 확신한다. 인류가 지금 경과하고 있는 큰 모순들은 제국주의 세력들과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필요를 표현하고 있는 세력들 간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자본과 노동의 근본적인 모순, 제국주의적 의존과 억압, 국제적 관계들에 부과되고 있는 신식민지주의적 양상들은 객관적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타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에서 혁명적 변화의 필요성과 현실주의를 구성한다.

과학과 기술의 빠른 상승, 생산력들의 거대한 발전은 억압적이고 협소한 착취적인 자본주의적 관계들과 조화될 수 없다. 자본의 활동의 국제화, 민족적인 국가독점 규율들에서 초국적인 것들로의 이행은 생산관계들과 생산력들의 조응의 결여를 보여준다. 지구적인 역사적 전개에서, 생산력들은 자본주의의 경계들을 넘어서 나아갔고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객관적으로 성숙했다.

제국주의에서, 내부적 및 외부적인 모든 모순들은 오늘날 세계경제의 틀 내에서 표현된다. 세계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 더욱더 명백해지고 있고 그것의 반동적인 성격이 더욱더 명확해지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은 지구적인 열핵전쟁의 위협을 포함하는, 군사력, 간섭들 그리고 지역적 전쟁들의 수행을 자본주의가 정당화했던 소위 공산주의의 위협의 연막을 제거했다. 그것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위기를 야기했고 노동운동과 평화운동에서 일반적인 퇴보를 야기했다. 그것은 시장들, 국가들 그리고 지구의 전체 지역들의 재분할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지역적 전쟁들과 간섭들을 위한 길을 열었다.

혁명운동의 퇴보와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위기는, 오늘날 상황이 객관적으로 성숙한 많은 나라들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과정을 이용하고 운행시킬 주체적 요인의 퇴각을 초래했다.

주요한 문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주체적인 조건들을 창출하는 행동이다. 우리 인민에게 영향을 주는 즉각적이고도 짓누르는 문제들을 푸는 매일의 투쟁은 이러한 전망의 유기적인 부분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데 그리고 특히 왜냐하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들 속으로 달려가고 있고 인민운동에 대한, 인민적 계층에 대한 양보들 대하여 어떤 금지적인(prohibitive) 장애물들 속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46. 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자본주의의 복고의 과정에 영향을 준 사회주의 건설의 그러한 측면들을 연구하도록 강제한다. 우리는 사건들과 발전들의 견지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대결의 동시대의 상황들과 조건들에서 그것들을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한다.

가장 가치 있는 교훈들의 하나는 사회주의 혁명은 ―그것의 창조적 사업,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의 국면, 즉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같은― “인구의 다수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인민의 다수에 의한 독립적인 역사적 창조성없이는”24)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대적 조건들 하에서 노동계급과 노동인민의 정치적 성숙의 수준에 의해, 그들의 이익들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각성에 그리고 역사적 숙명론으로부터 그들의 해방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당과 노동계급의 동맹들의 정책은 전략적 중요성이 있는 쟁점인데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근본적인 사회적 및 경제적 변혁들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노동계급과 그 동맹들에 의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리고 사회주의로 이행을 위한 사회적 및 정치적 전제들을 형성함에 있어서 그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책임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유리한 결과로 그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항상적으로 증가한다.

당의 주요한 문제들의 하나는 항상적으로, 노동계급과 더욱 일반적으로는 인민과 그것의 끈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 인민의 경험과 주도성에 의존하는 것, 그 자신의 사례를 통하여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의식을 배양하고 새로운 과제들의 어려움들과 복잡성에 직면하여 모든 형태의 실수들, 일탈들, 왜곡들, 그리고 전복들로부터 사회주의를 방어하는 의무와 책임성을 배양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의 관리와 그것의 발전은 공산당의 역할을 계속적으로 높일 것인데, 그것은 확실히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의 대체물로서 혹은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저질러진 실수들로부터 배워야만 하고, 생산을 관리하는 것과 국가와 사회적 사안들에서 대중들의 창조적 활동성이 더 강하게 되고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 동안에 개선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당과 국가 그리고 경제적 기관들 그리고 사회적 조직들 간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켜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체제에서 공산당에 의해 수행되는 특별한 역할의 이름으로 국가와 사회조직들을 대체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고유한 잠재성을 구속하는 것을 초래하고, 소외와 냉담함을 초래하고, 사회주의를 약화시키고 모든 형태의 파괴에 맞선 그것의 방어를 제한하는 심각한 실수들의 위험을 초래한다.

47. 사회주의 건설의 조건들 하에서 지배적 당으로서 공산당의 새로운 역할은 역사상 최초로 객관적인 법칙들의 가능성과 의식적인, 계획된 방식으로 사용되는 과학적인 예측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공산당은 새로운 권력이 예상들과 그것의 책임성들에 반응하는 것을 보장하는 데 있어서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이 불가능한, 권위자들에 의해 사용된 과학적인 단어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그것이 조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권력은, 부르주아 정치 체제의 반대편에서 발견된다. 부르주아 정치체제는 그 정부의 형태와 방법들과 무관하게, 자본주의적 소유의 독재인데,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고 관리하는 정부들과 당들에 의해 봉사되는 초국적 거대 회사들의 형태를 오늘날 갖고 있다. 이것은 생산수단을 찬탈하고 인간 노동의 잉여가치에 기초하여 부유하게 되는 사회적 소수이다.

새로운 정치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최초로 착취계급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저항을 극복할 권력을 가지게 될 노동인민을 위한 광범한 민주주의를 적용함에 의해 그 동맹들과 더불어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거대한 과제들을 수행하는 부름을 받은 노동계급의 권력으로서 실천적으로 그 사명의 정당함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것은, 농민층, 소규모와 중규모의 기업들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급진적인 인텔리겐챠와 같은 자본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다른 사회적 층과 동맹하여, 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노동계급이 획득하기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이라는 단어의 정당함을 입증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을 위한 객관적인 기초는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그것의 위치와, 모든 노동인민과 다른 반제국주의적, 반자본주의적 세력들과 동맹하는 노동자 권력의 본질을 실현하는 그것의 능력일 것이다.

생산과정의 조직에서 어떠한 변화들도, 과학적 및 기술적 진보들의 활용을 통한 생산력들의 빠른 발전도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새로운 권력의 형태는 그것의 계급적 본질에 의해 주요하게 결정될 것이지만, 그것은 계급세력들의 배치,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수준, 지역적 및 국제적 수준에서의 세력균형, 인민의 정치적 각성의 수준 그리고 그들의 민족적 특성과 같은 다른 요인들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원하는 다른 당들과 사회-정치적 조직들과의 민주적 관계들, 직접민주주의와 대표 민주주의의 올바른 기능을 위한 주의, 그리고 노동계급과 더 일반적으로는 인민에 의한 당의 활동에 대한 통제는 근본적인 중요성이 있는 문제들이다. 그것들은 정치적 전위와 인민 간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기초를 구성한다.

48. 하나의 나라 혹은 더 넓은 지역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조건들의 불균등한 발전 때문에, 경계심을 발휘하고 모든 전선들에서 (경제적, 정치적, 사상적, 군사적) 제국주의에 의한 다양한 공공연하거나 은밀한 공격들로부터 새로운 체제를 방어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현재의 조건들에서, 권위자들의 입장, 즉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 체제의 궁극적인 승리는 지구적 우세를 향한 그것의 진보와의 변증법적 관련에서 확실하다는 것이 더 심각하게 연구되어야만 한다.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은 제국주의가 지구적 사안들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한, 그것이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방해하는 힘, 조직 그리고 종합적인 지배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제적 관계들과 외교정책은 국내적 상황, 사회주의 사회들 내부에서의 발전들과 꼭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외부적 요인들은 올바르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건설의 역동성에 타격을 주는 내부적 문제들과 내부적인 요인들로 한층 진화할 수 있다.

49.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이행기의 문제들에 대한 연구는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 생활의 모든 영역들과 부문들에서 자본주의의 유산은 특히 고통스럽고 무거운 것이 될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사회주의 경제와 사회적 생활의 형태일 것이다.25)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과 국제적 발전들은 국가계획과 경제를 관리함에 있어서 경제적 방편들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50.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은 당, 인민적 전위 그리고 행정과 관리의 기관들이 젠체하고 자기 만족하는 정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의 필요 혹은 필요들의 묶음에 대한 만족은 새로운 필요들과 요구들을 산출하고 인간의 필요들은 결코 그것들의 최종적인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 지역, 그룹 그리고 일반적 사회적 필요들 간의 모순들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회주의적 이익의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개인과 사회 간의 객관적인 모순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필요들을 개인화하는 흐름은 존재할 것이고 인민대중들의 방향과, 사회주의체제의 건설과 방어에 대한 그들의 참가의 정도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 모순은, 이행기이고 그리하여 완전하지 않은 사회인 사회주의의 전체 국면을 통하여 재생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경험이 보여주었듯이, 생산관계들과 그것들의 생산력과의 변증법적 관계가 인민에게 이익이 되도록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51. 사회주의 건설이 나라들마다 특이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확증되었다. 그것들을 과소평가하고 무시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다른 사회층과의 동맹에서, 계급투쟁과 모순들의 진화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창출할 수 있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각 나라의 입장은, 그것의 경제를 통합하는 과정이 그러하듯이, 생산력들의 발전 수준, 그것의 경제적 상황, 그것의 환경들, 계급투쟁의 국제화의 수준 등에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우리 당은 국제적 관계들의 진화와 유럽과 국제적인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그리스에서의 상황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획득하려는 항상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나라 혹은 유사한 사회-정치적 문제들과 유사한 발전 수준에 있는 나라들과 관련되는 특이성들은 사회주의의 단일한 본질을 반박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특수성의 쟁점의 이름으로 “사회주의의 다중성”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들은 확증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의 일반적 법칙들과 원칙들을 부정하고 과소평가하기 위한 구실임이 입증되었다.

52. 사회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와 관련된 그리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특별한 투쟁에서의 이론적 쟁점들은 공산당들 간의 상응하는 협력 없이는 실질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풀릴 수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공산당들은 그 자신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대의에서 우선적이고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국제적 성격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전망과 더불어, 공산당들 간의 조화와 공통의 행동과 강력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수립을 필요로 한다. 강력한 통일된 국제적인 공산주의운동이 없이는, 자본주의의 굴레 하에서 그리고 그것이 1989-91년의 극적인 발전 후에 획득한 새로운 침략성 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각 민족들의 통일전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전 세계에 걸쳐 수백만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들, 반제국주의 세력들과 운동들에 의한 통일된 행동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희망하고 요구하고 믿고 있다. 내부적인 싸움과 “파이”의 분할을 둘러싼 경쟁관계들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세력들과 그들의 이해들을 표현하는 정치적 당들은 노동계급과 그 운동에 대해, 그들이 착취하고 억압하는 민족들과 나라들에 대해 통일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당들과 사회민주당들의 조정, 뿐만 아니라 이전의 공산당 간부들과의 협력은 더 높은 단계로, 유럽에서의 통일된 당들과 국제적으로 상응하는 것들의 창출을 향하여 넘어갔다.

그리스 공산당은 사회주의를 위한 싸움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인들의 하나는 공산당들에 의한 행동의 통일과, 다른 좌익, 반제국주의 세력들과 반자본주의 세력들과의 공통된 행동이라고 간주한다. 사회주의를 방어하는 싸움에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에서의 파열의 역의 효과들로부터 끌어내어지는 결론들에 기초하여, 그것은 이 중요한 영역에서 그것의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그리스 공산당은 그리스와 전 세계에 걸쳐 수천의 수백만의 전사들이 그것을 위해 그들의 목숨 자체를 포함하여 그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주었던 사회주의의 이상들에 대한 무욕, 희생 그리고 헌신이라는 특출한 미덕들을 배양할 것이다.

 

 

1995년 3월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1) 인구의 2/3 이상이 문맹이었다.

 

2) 레닌의 마지막 편지들과 글들은 문화혁명의 기본적 방향들과 목표들을 포함했는데, 그가 믿기에 그것은 쏘련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협동조합에 관하여”라는 그의 글에서 그는 경제적 문제들을 푸는 관점에서 문화라는 쟁점을 검토했다.

 

3) 이 나라에서는 1인당 GDP에서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강력한 운동이 있었다(1985년에 55%; 1913년에 11.5%로부터). 1인당 수입은 양적인 지시로 계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사회적 관계들을 반영하여 두 개의 사회체제에서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4) 레닌은 민족 문제와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푸는 것 간의 긴밀한 연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자결의 일관된 적용은 민족들을 분열시킬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공격했다. 그는 민족적 쟁점은 계급적 관계와 계급투쟁의 영역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고 그리고 그것의 해결은 노동인민의 계급적 통일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5) 그 “개혁들”의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소유와 생산의 다양한 형태들과 그것들 사이의 경쟁”을 인정했던 법률에 의한 “사적 소유의 보호”;권력의 행사를 위한 매개로서 쏘련공산당의 약화 그리고 연방의 대통령 제도의 보강을 수반하는 정치적 및 국가체제의 변화;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생활의 기본적 부분에서, 방어와 안전의 부문에서 쏘련공산당의 약화; 자본주의적 의회주의와 보다 큰 유사성을 띤 정치체제 유형에 의한 쏘비에트 정치권력 체제의 대체; 쏘비에트들, 당위원회들의 역할을 중립화하기 위해 취해졌던 노력들; 나라의 대통령이 초권력(superpower)을 점차적으로 떠맡고 그가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이라는 직함을 유지한 것; 평화와 열핵전쟁의 방지를 위한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와 사상적 및 정치적 화해를 무엇보다 목표로 했던 나라의 외교정책에서의 변화; 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국제주의적 연대의 포기.

 

6)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70개 나라들이 그들의 민족적 독립을 획득했다. 그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경제적 문제들을 역점을 두어 다루기 위해 사회주의 나라들의 경제적 및 과학적인 도움에 의존했다. 분화를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쏘련이 군비에서 미국의 그것에 대해 평형의 지점에 도달했을 때, 군사적 세력균형에서의 이동이었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패배 그리고 식민주의의 붕괴를 초래한 민족해방운동의 획득물들이 또한 영향을 주었다.

 

7) 존슨 독트린은 특히 1964년 후에, 동유럽 나라들을 향한 “다리” 정책을 폈다. 반대로, 공포의 균형은 핵무기들을 수단으로 하여, 그리고 독일민주공화국을 향한 고립의 정책을 수단으로 쏘련을 향하여 유지되었다. 내부로부터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선호하는 방법들이 선택되었다. “쏘련으로부터의 독립”의 이론이 조장되었고 “동유럽의 진보는 서구와의 관계를 확장하고 대결을 완화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선전이 개발되었다.

 

8) 사상적 무기로서 사상적 전복을 제국주의가 사용하는 것은, 그것을 내부로부터 전복의 정책이라 불렀던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인 Y. 안드로포프에 의해 강하게 제기되었다.

 

9) 15차 당대회에서 정교화되었던 방향. 쏘련공산당은 소규모 그리고 중규모의 가구들에 의한 증대되는 생산성에 대해 그리고 기술적 장비에 대해 무게를 실었다. 토지의 국유화는 소규모와 중규모의 농민층에 의한 토지소유의 권리와 반대되지 않았다. 그는 소규모 가구들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역할과 가장 단순한 형태들, “동료의식”으로부터 카르텔로의 분산된 가구들의 융합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형태들을 보았다. 소규모 가구들과 소규모 생산에 대한 태도는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지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높은 것의 이름으로 생산의 가장 낮은 조직의 파괴를 거부했다. 동시에 그는 콜호즈들과 소포즈들의 이점을 제기했다. 경제의 완전한 규모의 조직화라는 목표는 농촌에서 쿨락들의 일정한 부분을 패배시키고 그러고 나서 전체로서 쿨락 계급의 제거라는 정치적 목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10) 1920-21년의 회계연도: 이전의 해의 그것과 비교하여 국민적 수입에서 11%이상의 증가. 반면에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미국, 영국 그리고 독일―에서 그것은 2-4%를 초과하지 않았다. 동일한 회계연도에 대규모 공업에서 생산에서 18%의 증가가 이전의 해의 그것과 비교할 때 있었다. (≪쏘련공산당의 역사≫, Synchroni Epohi Editions, p. 446.)

 

11) 1930년 3월 15일의 중앙위원회의 결정과 이 결정에 기초한 J. 스탈린의 개인적인 글, 그것은 동맹의 공고화를 방해하는 실수들을 지적하고 있고 실수들을 인정한다는 그리고 그것들을 가능한 많은 지역들과 경우들에서 교정한다는 쟁점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 지역들은 기정사실들이 일탈 혹은 행동의 그릇된 과정을 통하여 창출되지 않았었다.

 

12)12) J. V. 스탈린, “경제간부들의 회합”, 전집(그리스판) 12권, pp. 56-88. 그 문제는, 수입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원칙의 적용에 대한 경제 및 노조 간부들에 의해 취해진 부정적 입장에 대해 강조했고 노동자들의 새로운 물질적 그리고 문화적 필요들을 만족시키는 데 있어서 지연의 문제들을 강조했다. 새로운 필요들을 만족시키는 기초 위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성을 발전시키는 필요성이 지적되었다. 기업들의 경제적 자립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쟁점이 올려졌다; 사회주의적 축적의 원천들이 공업의 내부적인 자원들을 동원함에 의해, 모든 기업에서 경제적 자립의 원칙을 도입하고 견고히 하는 것에 의해, 생산비용의 실질적인 감축, 예외 없이 공업의 모든 분야에서 내부적인 공업의 축적의 증대에 의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 당의 지도부는 사회주의 건설의 진보는, 발전한 자본주의의 그것들과 비교하여 생산력들의 발전의 속도에 관하여 사회주의의 사라지지 않는 우월성을 보장하기 위해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간주했다.

 

13)13) 이 문제들은 쏘련의 최고 쏘비에트의 선출을 위한 당 조직들을 준비한다는 쟁점을 논의한 전연방공산당(볼)의 중앙위원회의 전체회의 동안에 1937년 2월-3월에 제기되었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중앙위원회는 폐쇄된 즉, 비밀투표를 실시하고 신당원선출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특별한 중요성이 대의원들의 공통된 후보자를 선출함에 있어서 결합된 행동 그리고 공산주의자들과 비당원들의 동맹에 부여되었는데 이리하여 실천적 방식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통일에서 진보를 드러냈다.

 

14) ≪쏘련공산당의 역사≫(그리스판), Synchroni Epohi Editions, 1980. pp. 532-535. 또한 쏘련공산당 20차 대회로부터의 문서조사.

 

15) 국가형태들은 각 나라마다 다르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그리고 적군(赤軍)에 의해 해방된 독일의 부분은 별도로 하고, 다른 모든 나라들에서는 형태적으로 그리고 루마니아에서는 실질적으로 달랐는데 거기서는 군주제 정권이 유지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대통령의 직위와 의회적 공화국으로 구성되는 순수한 부르주아 정치체제로 남아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에서는 사회-정치적 변혁들과 혁명적 권력이 중앙의 권위 없이 발전되었다. 그 체제는 외부의 그리고 내부의 적들과 그들의 지역적 협력자들에 반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재산에 대한 몰수와 공업의 기본적 분야들의 국유화는 제3공화국(독일정부-역자)에 양도되었던 기업들이 노동자 통제로 들어와야 한다는 요구와 더불어 발생하였다.

 

16) 20차 대회는 공업의 발전과 확장적 발전에 우선을 두는 노선을 계속했다. 비록 이러한 노선의 포기를 지지하는 반대견해가 있었지만. 23차 대회에서는 농업경제의 발전에 특별한 무게를 실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진보에 유리한 노선이 채택되었다. 1976년의 25차 대회는 질과 효율성의 노선을 정교화했다. 1981년의 26차 대회는 발전된 사회주의의 이론을 정교화했고 집중적인 발전으로 이행이라는 쟁점을 제기했다.

 

17) 여기에 심각한 어려움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다양한 기원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의 이점들을 입증했던 수립된, 집단적인 소유의 본질과 결코 연계되어 있지 않았다. 반대로 인민경제의 이러저러한 부문에서 정규적인 작업을 한때 방해한 상당한 수의 결핍들은 그 명확한 토대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인 규칙들로부터 그리고 경제적 생활의 요구들로부터 일탈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출처: Y. V. 안드로포프, “레닌주의는 우리의 길을 비춘다”, selected articles and speeches, p. 310; “전체 사회주의 사회를 조직하는 시험되고 검증된 원칙은 민주집중제인데, 그것은 계획과 관리에서 과학적인 지도부의 통합된 체제의 이점들과 더불어, 대중들에 의한 자유로운 창출의 성공적인 결합을 허용한다.” 앞의 책, p. 320.)

 

18) 당의 문서들과 다양한 논의에서 특히 Y. 안드로포프가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이었던 시기 동안에, 부르주아 계급의 관념론자들의 견해들 사이의 사상적 논쟁들에 대해, 또한 개량주의와 더불어,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이론적 모델로부터 쏘련 “모델”과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의 그것의 일탈에 관하여 강력한 언급들이 있었다. 비판이, 사회주의 국가 조직이 맑스주의적인 공산주의적 자기 정부의 전망에 조응하지 못한다는 주장과 함께 “사회주의 국가조직과 민주주의의 형태”에 대해, 사회적 소유를 교묘히 회피하는 “고립된” 개인들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서구의 사회학, 철학 및 정치적 생각이라는 사상과 더불어 ‘소생되어야’만 하는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위기”에 대해 겨누어졌다.

 

19) 21차 대회와 22차 대회, 거기에서 그것들은 1977년에 쏘련 헌법에 기입되었다.

 

20) 쏘련공산당의 26차 대회: 현실의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없이 불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1980년에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전체회의에 대한 그의 연설에서, L. I. 브레즈네프는 중앙집권주의와 민주주의의 올바른 관계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는 통합적인 전체로서 국민경제의 망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그리고 편협함과 지방적 이기주의를 역점을 두어 다루기 위해서 하나의 중앙이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로, 가능한 한, 경제의 부드러운 기능은 풀뿌리 수준에서, 노동자들의 공동체에서 그리고 사회의 지도적 간부들에서 주도성을 발전시키는 것을 필요로 했다. 문제는 불필요한 망설임들과 투표 없이 이것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에서 대부분의 실천적인 문제들을 정확하게 푸는 것이었다.

 

21) 레닌은 사회주의는 생활에서 부드럽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이 복잡할 것이다(전집 36권, p. 47). “쏘비에트 권력의 즉각적인 과제들”이라는 그의 연설에서 그는, 대장장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보통의 사슬처럼, 단순하게 조야하게 깎여진 것들이 아닌, 역사적 사건들의 사슬에서 이러저러한 것 사이의 연계들의 배열, 그것들의 형태와 관련을, 그리고 차이들을 다루었다(같은 책, p. 206).

 

22) 맑스는, 역사의 총체적 운동을 부여하면서, 공산주의 사회의 최초의 국면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이행기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대한 논박할 수 없는 법칙들을 대면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적 체제의 창출과 더불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의 기간을 또한 연구했다. 권위자들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서 다양한 국면들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공산주의의 그것과 인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단일한 본질과, 그들이 경제적 성숙에서의 차이로서 보았던 과학적인 차이들을 지적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이행기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이행기성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근본적 차이들을 부정하는 잘못되고 반과학적인 견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23)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그리스 공산당 13차 대회 문서들”, p. 22.

 

24) V. I. 레닌, 전집(그리스판) 36권, p. 171.

 

25) 공산주의는 그 최초의 국면에서, 그 첫 번째 단계에서 사회주의 사회인데 경제적으로 완전히 성숙될 수 없고,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사회주의 사회의 이행기적 그리고 불완전한 성격의 이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특징적인 원칙들과 방법들의 보전과 발전을 주장하는 수정주의적, 기회주의적 견해와 아무 관련이 없다.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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