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과 비판*

 

박석삼 ∣ 진보전략회의

 

* 이 글은 3월 14일에 진행된 진보전략회의 워크샾에 제출된 발제문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1. 들어가며

 

기본소득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기본소득의 대표적 주창자인 빠레이스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다 원하는 노동을 하게 되어 생산력이 증대하며, 이에 기초해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기본소득의 비중을 꾸준히 확대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를 기본원리로 하는 사회주의(맑스의 코뮌주의 첫 번째 국면)를 거치지 않고, ‘필요에 따른 분배’를 기본원리로 하는 코뮌주의(맑스의 코뮌주의 두 번째 국면)로 직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획기적으로 변형시키는 대안경제체제를 목표로 하는 ‘트로이의 목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작금의 ‘경제위기를 뛰어넘을 강력한 대안이고 좌파의 집권전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 시점에서 기본소득이 유의미하고 실현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코뮌주의를 앞당기는 이행기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고 별개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비정규직 등 노동의 유연화와 광범한 실업 등으로, 많은 사람이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현실에서, 사회보장의 한 방법론으로 제출되었다. 관리비용의 절약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우파적 자유주의적 버전부터, 이행기 강령이라고 주장하는 좌파적 버전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좌파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론은 기왕의 맑스적 입장과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곧바로 변혁적 관점이 아니라고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드러내고, 어느 입장이 더 나은지 따져볼 것이다. 이 글은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이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면 인정하되, 과연 곽노완 교수 등이 주장하는 ‘해방적 기본소득’이 실현가능하고 유의미한 것인지, 해방적 전략 혹은 이행기 전략이 될 수 있는지, 현 상황에서 슬로건이 될 수 있는지, 슬로건이 될 수 있다면 주된 것이어야 하는지 부차적인 것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모든 복지는 계급투쟁과 계급역량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복지는 출산장려정책처럼 자본의 필요에 의해서 도입되기도 하지만, 복지의 수준은 본질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어떠한 의미 있는 복지도 즉 어떠한 자본의 양보도 투쟁 없이는 쟁취될 수 없다.

최근 유럽이나 미국에서 등록금 인상과 관련한 큰 투쟁이 있었다. 교육자본이나 총자본의 공공복지에 대한 공격이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고, 이해관계가 있는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과 학부모들도 물론 분노하고 투쟁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어느 사회에서나 매우 행동적(active)인 계층임에도 경제위기 속의 국가재정의 위기 혹은 총자본의 처지도 양보할 여력이 적기 때문에 투쟁의 승리는 간단치 않다.

이처럼 모두에 대한 기본소득이 다수에게 이익이 되고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는 실현될 수 있다는 추상적 가능성일 뿐 구체적 가능성이나 현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슨 화폐주조이익이라든지 혹은 주식양도 차익세와 같은 조세의 신설 또는 조세의 개혁을 얘기하면서, 은연중에 치열한 계급투쟁이 없이 자본이나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관철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우려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구적 기본소득을 위한 탄소배출권 경매 주장에서 극에 달하고 있다. 배출의 억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것이 올바른 해법일 텐데도,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상품화하고 경매하여, 그 수익금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제약당한 전 인류에게 나눠주자고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가적 기업은 이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것이다. 결국 소비자인 일반 대중의 부담으로 자본가에게 배출의 자유를 주자는 황당한 얘기가 된다. 이 정도면 소부르주아적 발상이 아니라 대자본가적 발상이 된다.

기본소득론자들의 주된 특징은 자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즉 자본과의 치열한 계급투쟁 없이, 다수의 이익과 지지만으로 과세를 통하여, 자본으로부터 의미 있는 양보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주장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반자본의 이념이 없이, 자본과의 당당한 투쟁 없이 어떻게 자본을 극복하거나 자본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완전고용사회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전망, 그래서 고용에 연계된 기본보장은 사각지대를 남긴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의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이다. 이 공격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저지시키지 못한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공격에 맞서서 복지와 일자리를 지키고 나누는 투쟁의 중요성은 부정되지 않는다. 최근 경제위기로 부도위기에 몰린 그리스에서는 일자리와 복지를 쟁점으로 위력 있는 총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자리와 복지를 통일적으로 사고하면서 자본의 공격에 대하여 계급역량을 결집하여 투쟁을 키워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일자리는 저절로 나누어질 것이고 노동시간은 저절로 단축될 것이다’(금민)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치게 일면적이고 낙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결코 역동적인 반자본의 역량을 키워내지는 못할 것이다.

 

 

3. 기본소득은 열등처우의 원칙을 초월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사회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필요적 노동은 있을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그 취지에 따라 최소한의 생계비 이상을 지급해야 하지만, 동시에 근로의욕을 해칠 만큼은 지급할 수 없다. 즉 노동을 하지 않고도 노동을 한 사람보다 나은 급여를 제공할 수 없다는 열등처우의 원칙이 관철된다. 두 교수(강남훈, 곽노완)의 1인당 50만 원이란 설정 자체도 생존은 유지할 수 있되, 최저임금보다는 낮아야 된다는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본소득이 코뮌주의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이라면서 ‘기보소득을 꾸준히 확대하면 코뮌주의로 직행할 수 있다’(빠레이스)든지,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수준의 후한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적인 개혁’(라이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다.

곽노완은 ‘보다 고차적인 코뮌주의 국면의 경제원리로 맑스가 제시한 “각자 능력에 따라,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고타강령초안 비판”)는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라는 점이다. 맑스의 원리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각자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경제원리를 뜻한다. 그런데 앞서 판 빠레이스를 검토하면서 보았듯이 이는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의 천국이자 헌신적인 사람들의 지옥으로 귀결될 수 있는 원리이다. 왜냐하면 각자 노동과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면 능력껏 일할 사람은 헌신적인 일부의 사람들로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는 노동자를 감소시켜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수준의 축소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이야말로 ‘노동과 상관없는 필요에 따른 분배’이고, 기본소득을 ‘꾸준히 확대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후한 수준’이 되는 순간이야 말로, ‘게으르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의 천국이자 헌신적인 사람들의 지옥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 점에서 곽노완의 주장은, 기본소득을 아무리 확장해도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노동유인을 해칠 만큼의 수준 이상은 지급할 수 없고 열등처우의 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이 되거나, 자신의 기본소득론에 대한 저주가 될 뿐이다.

맑스는 분명 이러한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기여한 만큼 분배받는 낮은 단계를 설정했다. 높은 단계에서도 필요에 따른 분배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임을 전제하고 있다. 맑스는 이처럼 생산과 소비 혹은 노동과 분배를 통일적으로 사고하고 있음에도, 안정적인 담세능력을 담지하셔야 할 헌신적인 자본가계급을 필수적 전제조건으로 상정하는 것 외에는 생산의 문제와 노동의 문제를 전혀 사고할 수 없는 틀인 기본소득론이야말로 수평파(leveller)들처럼 사회를 갈등으로 이끌 것이다.

 

 

4. 기본소득론은 형태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에 내용과의 괴리를

   피할 수 없다

― 과세와 분배제도의 개선만으론 생산의 적대적 관계는 해결되지 않는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개인별로 무조건적으로 생계에 필요한 소득을 현금으로 지급하라’는 요구이다. 노동의 기여나 의사, 소득의 유무에 상관없고 다만 연령에 따른 차이는 인정한다.

이러한 기본소득론은 무조건적인 현금급여라는 형태에 대한 집착으로 규정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사회의 변혁이라는 내용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여 내용에서 귀납적으로 도출된 형태가 아니라, 기본소득이라는 형태를 먼저 규정한 후에 연역적으로 변혁적 내용을 부여하려고 하기 때문에 과도한 의미부여가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론은 자본제적 생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세를 통하여 생산의 결과인 분배에 개입하는 방안이지 생산제도 자체를 변혁하는 방안은 아니다. 이 점에서 자본의 부정을 담지하고 있지 않은 기본소득 요구를 사회주의나 코뮌주의로의 이행을 앞당기는 이행전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

 

 

5. 기본소득의 장점과 단점

 

기본소득의 매력과 장점은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조건적인 복지나 시혜적인 복지가 아니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권이나 시민권에 입각한 보편적 복지로서의 장점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주로 여성이 담당해 왔던 부불노동인 가사노동(재생산 노동)에 대한 지불이 될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심사의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관리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도 거론된다.

그런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기본소득은 열등처우의 원칙을 벗어날 수 없고, 개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청년실업자 1인에게 주는 50만 원은 생존을 보장할지라도 질 좋은 일자리에 대한 욕구를 없앨 수는 없다.

또한 부부와 자녀 2명의 4인 가족의 경우 180만 원을 지급받는다면, 사실상 추가적 소득 없이 근검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고, 근로의욕을 포기할 수도 있다.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개인에 대한 급여는, 브라질처럼 기아모면 수준의 소액 급여라면 문제가 안 되지만, 개인에 대한 적정한 급여는, 일부의 수급자에게는 필연적으로 근로의욕을 해치게 된다. 이것은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 간의 사회적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게 한다.

또한 모두에게 동일한 액수의 급여는 실업자에게는 절박한 부조이지만, 중간층 이상의 소득자에게는 긴급한 부조가 아니다. 소득 재분배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후상박의 원리에 어긋난다. 기본소득론은 긴급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동일액수의 지급의 정당성을 전혀 제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란 측면을 갖는다. 결국 기본소득은 임노동자에게는 추가적인 급여가 되고, 실업자에게는 생계보조급여란 성격을 갖게 된다. 가령 어느 노동력의 재생산비(급여)가 200만 원이고 기본소득으로 50만 원 더 받았을 때, 자본가는 190만 원이든 170만 원이든 점진적으로 급여를 낮춤으로서 재생산비를 넘는 부분을 무력화하려는 경향성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생활비가 100만 원이 필요한 사람이 기본소득이 없을 때는 악착같이 100만 원의 일자리를 찾겠지만, 50만 원의 기본소득이 있을 경우 50만 원의 파트타임도 수용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구빈법과 스핀햄랜드법이 자본의 직접 급여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 것처럼, 기본소득 역시 자본의 직접 급여인 임금을 낮추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화폐로 지급되는 급여는 자본이 강요하는 상품화와 시장화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데도, 이 점을 소득재분배를 통한 내수중심의 성장에 기여한다고 하고 있는 바, 이것은 결코 반자본의 논리가 될 수 없고, 시장에 대한 종속을 강화시키는 욕망의 상품화를 강화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6. 기본보장안의 검토

 

곽노완의 글에 따르면, 비숍(Bischoff)은, ‘최소생계비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성인 내지 가족에게 그 차액을 정부가 지급해주는 제도로 기본보장(Grundsicherung)이 기본소득보다 오히려 진보적이며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기본보장의 수급기준들 중 제일 중요한 기준이 최소생계비 미만의 소득이 이라는 점은 한국의 국민기초생활보장의 경우와 동일하다. 다른 점은, 기본보장의 경우 수급권 판정을 위해 노동소득을 계상할 때 일정 비율(예를 들어 50%)만 소득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1인 가구가 있고 기준 최소생계비가 140만 원이며 그 1인의 노동소득이 200만 원일 경우 이의 50%인 100만 원만 소득으로 계상된다. 그리하여 그 1인은 140만 원-100만 원=40만 원의 기본보장을 추가로 받게 된다. 이는 노동유인을 감퇴시키지 않기 위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본보장에 대하여 블라슈케(Blaschke)의 비판대로, 1. 관료적인 소득 및 재산심사를 강화하고자 하며 따라서 신청자들을 낙인찍고 사회적으로 배제하며, 2. 노동해방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임노동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따라서 사실상 시장과 자본을 보완하는 데 머물며, 3. 기본보장의 대가로 사후적이긴 하지만 노동의무를 어느 정도 강요함으로써 강제노동을 사실상 인정한다. 4. 또 블라슈케가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기본보장은 현재보다 소득 및 재산심사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현재보다 많은 인력과 시간 및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는 점도 기본보장이 갖는 결정적인 단점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고 곽노완은 주장한다.

이처럼 기본소득론과 기본보장론은 서로 우월함을 다투고 있고, 장단점을 보완해 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위 비판 중 2항의 시장과 자본을 보완하는 것은 둘 다 똑같고, 3항의 노동유인이 있다는 것은 기본보장론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제의식이 모두에 대한 현금급여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생존을 위협 당하는 실업자나 저소득 계층에 대한 긴급한 대안으로 한정한다면, 긴급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무차별적인 급여를 함으로써 막대한 재원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기본보장안을 수정하여, 필요한 계층(소득 분위 하위 20%)에게만 한정적이고 능률적으로 지급하는 방안이 더 나은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근로자의 소득은 여타의 소득과 재산도 국세청에 이미 데이터베이스화가 되어 있고, 자영업자의 탈루와 도덕적 해이의 문제도 있겠지만,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등의 징수의 공평함을 기하기 위해 포괄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있고 꾸준히 보완되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다면 별도의 심사노력이 없이도 지급액은 프로그램으로 산정될 수도 있다. 기본보장은 그 자체가 노동유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사제나 관리감독제가 아니라 단순 신청제로 한다면 관리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7. 필연의 왕국과 자유의 왕국에 관련한 노동해방의 관점

― 탈노동 혹은 노동으로부터의 탈주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궤변에 대하여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고역이고 자기를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즉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과 사회적 관계가 노동자와 대립하여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노동이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실현이 과정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생산물과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임노동 관계의 철폐가 노동해방의 이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생산수단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 성격의 해소이다.

또한 어떤 사회적 구성체이든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있다. 발달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사회적 필요노동을 축소함으로써, 그리고 노동의 양을 고르게 분배함으로써 노동시간을 절대적으로 단축하는 것―즉 개인의 자유시간을 절대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이상이다. 이것을 맑스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적대적 관계의 해소(를 위한 투쟁) 없이 자본의 기생적 이윤에 대한 제약만으로 노동해방을 얘기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다.

또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필연의 영역을 부인할 수 없는 한 사회적 필요노동을 고르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단축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탈노동 혹은 노동거부의 관점에서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기본소득을 무슨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하는 것도 동의할 수 없다. 가령 기본소득이 노동과 상관없이 인간다운 혹은 최소한의 삶을 보장한다고 하면, 사회는 결국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 전자의 노력으로 후자를 부양하는 부당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적대적 모순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탈노동의 관점에서 도주나 탈주하는 것은 결코 노동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노동에 참여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에도 자본의 반동성과 기생성 때문에 사회적 생산과 경제활동에서 배제되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 안빈낙도하는 예술가가 최소한의 생계보장적 기본소득에 만족하면서 소부르주아적 결단으로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겠다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8. 기본소득은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에 반한다

 

기본소득논자들은 현물급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토대 위에서 현금급여를 설계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회의 전체 구성원의 노동의 결과인 재화와 서비스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에 대하여, 시장과 상품을 매개로 할 것인지 아닌지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무상의료라고 하여도 만약 한국처럼 의료행위가 상품으로 거래된다면, 혹은 이윤추구의 대상이 된다면, 의료비의 100%를 국가가 보장한다고 하여도 자본가적 생산은 극복되지 않는다. 보육기관을 국가가 운영하고 무상으로 이용하게 하는 것과 수많은 유치원이 난립하도록 허용하고 유치원비를 화폐로 보조하는 것은 심각한 차이가 있다. 누구나 무상으로 사용하는 도로를 사적자본이 소유하고 통행료를 화폐로 보조하는 것도 차이가 있다. 전기회사가 사유화된 후 사용료를 화폐로 보조하는 것과, 국가가 소유하고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우월한가?

사회주의란, 공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소비와 삶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지향이 관철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시장과 화폐가 교환의 장과 가치척도로서 하루아침에 소멸되지 않겠지만, 끊임없는 탈시장화와 탈상품화는 사회주의 건설을 관철하는 원칙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노동자의 의사에 반하여 일시적인 실업이나 노동 무능력자가 있을 수 있다. 이때에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 속에서 필요한 사람에게만 화폐적인 사회부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원칙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면서 사회적 부조가 긴급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인 화폐급여를 하여 상품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가? 무차별적인 화폐급여는 상품과 시장의 확장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억제되어야 맞는 것이고,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지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심지어 기아에 직면한 최빈국에게 식량원조보다 화폐를 개인에게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있는데, 진정 도와주고 싶다면 최빈국의 부채를 탕감하고 식량생산의 기반의 재건을 도와주어야 될 일이지, 수입농산물의 소비자로 묶어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을 훼손하는 기본소득론은, 성장제일주의와 대량소비, 생태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가치추구에 해롭다고 말할 수 있다.

 

 

9. 공공적 복지와 개별적 복지 그리고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독일에서는 100여 종의 사회보장제도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무상의료나 무상교육과 같은 보편적인 복지도 있겠지만, 실업자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노후 장기요양과 같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선별적 복지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번잡한 제도는 정비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적으로 특별한 부조가 필요한 선별적인 복지의 가치나 필요는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의 일종인 기본소득만으로는 선별적 복지를 없앨 수도 없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현금급여 역시 대부분 선별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결국 복지의 재원은 먼저 교육과 의료 등 사회적 필요를 탈시장화하고 탈상품화하는 부분 즉 사회의 공공적인 복지 부분과, 개별적인 지급으로 나뉘는 것이고, 개별적 지급도 특별한 목적을 갖는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로 나뉘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확대)재생산을 위한 투자는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매년 30% 가까운 투자를 해왔다. 2009년을 예로 들자면, 총생산이 1,000조 원인 나라에서, 총투자 29.9%, 정부지출 15.6%는 피할 수 없다면, 민간지출은 55.5%인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지원비 25조를 뺀 기본소득 필요액 263.9조 원, 26.4%는 민간지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50만 원의 기본소득은 개개인의 소비적 지출 혹은 화폐적 지출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 된다. 결국 탈시장화해야 할 공공적인 복지 부분과 선별적 복지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절대화이다.

한국도 물론 현재 26.6%의 국민부담률(조세부담률 20.8%+사회보장부담률 5.8%)을 35.6%인 독일이 아니라 스웨덴처럼 50-60%를 부과할 수 있고, 기본소득을 낮은 단계(낮은 액수)부터 시작하여 점증시킬 수도 있고, 노령층부터 선별적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총투자와 정부지출을 감안할 때 어떤 경우에도 복지예산은, 민간지출의 50%를 넘기 힘들고, 민간지출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의 수평주의적(leveller)인 화폐적 분배는 사회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해칠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이건 독일이건 스웨덴이건 혹은 자본주의 사회이건 사회주의 사회이건 간에, 총 민간지출의 절반에 해당되는 화폐적 분배인 기본소득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거나, 고집해야 할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10. 코뮤니즘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라는 이상은 무엇인가?

서구 복지국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무상의료와 무상 교육 등 필요에 따른 분배가 있고, 낮은 단계인 역사적 사회주의에서도 필요에 따른 분배가 있었다. 기여에 따른 분배나 필요에 따른 분배란, 해당 단계의 사회에서 전일적인 분배원칙이 아니라 규정적인 분배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도 심지어 봉건사회에도 필요에 따른 분배는 있는 것이고, 단지 양적인 차이와 규정적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곽노완이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야 필요에 따른 분배를 한다든지, 낮은 단계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가 없으므로 사민주의보다 저급하다든지, 필요에 따른 분배만 있는 높은 단계는 노동의욕을 해치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 없다든지, 노동에 관계없이 필요적 분배를 하는 기본소득이 낮은 단계를 뛰어 넘는 코뮤니즘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개념상의 오해로 인한 잘못된 주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동유인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소득의 절반을 필요에 따라 재분배한다는 원리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론자들이 보편적 복지의 하나인 화폐적 지급형태에만 집착할 때, 기왕의 사회주의자들은 필요적 분배에서 보편적 복지만이 아니라 사회의 공공적 복지(학교, 병원, 요양소 등등)와 특별한 부조가 필요한 장애인이나 노인들의 장기요양과 같은 선별적 복지까지 포함하여 사고하고, 비화폐적인 탈상품화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11.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불필요하고 해롭다

 

곽노완은 ‘해방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면서, 코뮨주의 사회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 몫 중 누구나 품위 있는 생활이 가능한 화폐적 기본소득을 얘기하지만, 액수의 고하간에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본소득은 열등처우의 원칙 때문에 최저임금을 넘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에도 반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실업자와 노동 무능력자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조건적인 현금급여라는 형태를 고집하여 사회적 부조가 필요 없거나 긴급하지 않은 전체 성원에게 총생산의 30%에 달하는 기본소득을 제공할 경우 사회적 필요에 대한 투자는 현저하게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두 교수는 기본소득의 지급을 위해서는 290조 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무주택자를 1,000만 가구라고 한다면 가구당 5,000만 원(서울을 제외하고는 아파트 가격이 5,000만 원 정도면 된다), 즉 500조면 무상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 이 금액은 기본소득 2년분의 예산도 안 된다. 이 경우 매년 290조의 재원이 있을 때 소수에 대한 배려로 40조 원을 쓰고 나머지를 무상주택으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기본소득을 고집하여 1인당 50만 원씩 분배하여 상품으로 소비하게 하여야 할까?

답은 명약관화하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은 필요 없다. 사회적 계획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실업자나 노동 무능력자에 대한 지원은 행정비용도 그다지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무차별적인 현금급여인 기본소득은,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에도 반하고, 오히려 장애가 될 것이다.

 

 

12.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

 

기본소득은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면서, 그 결과물의 일부에 대한 양보를 강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산가치란 수익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에 중과세로 수익률이 낮아지면 자산가격은 폭락할 수밖에 없거나 과세의 회피로 이어져 임대료나 이자율의 상승 등으로 실수요자에게 전가될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자산가치의 폭락은 피할 수 없고 과세금액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로소득은 근절의 대상이지 온존시키면서 중과세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좌파의 집권 시 중과세든 전액 환수든지 간에 불로소득(에 대한 총 투자액)은 급감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안정적인 재원은 확보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13. 곽노완, 강남훈 교수의 기본소득설계안의 검토

 

<조세부담률 및 국민부담률 국제비교(2006년기준)>

구분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태리

영국

OECD

조세부담률

(%)

19.7

(20.8)

21.3

17.7

27.8

21.9

29.6

30.3

26.8

국민부담률

(%)

24.9

(26.6)

28.0

27.9

44.2

35.6

42.1

37.1

35.9

출처: OECD Revenue Statistics(08년판), (  )는 08년 수치임.

국민부담률 = 조세부담률 + 사회보장부담률이다.

 

두 교수가 설계한 기본소득의 재원조달 방안1)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두 교수는 2009년 국민총생산이 약 1,000조 원, 총조세가 217조 원인 나라에서, 평균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위해서 약 291조 원이 소요될 것으로 산정하고 있다.

또한 OECD는 2006년 기준 조세부담률이 26.8%이고, 사회보장부담률은 9.1%임을 알 수 있고, 한국은 2008년 기준 20.8%와 5.8%임을 알 수 있다.

사회보장이 잘된 나라인 독일과 비교할 때, 2008년 독일인구는 8,200만 명이고 국내 총생산은 3조7,000억 달러, 1인당 45,004달러인데 비해, 한국은 4,927만 명, 9,347억 달러, 19,231달러로 1인당 소득이 2.34배나 많다(달러당 환율은 약 913원). 한국의 26.6%의 국민부담은 소득이 2.34배나 많은 독일의 35.6%와 비교할 때 결코 가벼운 부담은 아닐 것이다. 설령 독일처럼 국민부담을 늘려도 추가 징수액은 9%, 약 90조 원이 한계일 것이다.

두 교수는 서유럽의 경우 추가세수 없이 기존의 현금지급형 사회복지만 기본소득으로 통폐합해도, 모든 국민이 1인당 평균 매월 140만 원(1,533달러) 정도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독일의 예를 들어보면, 1,533달러×12개월=18,396달러로, 이는 독일 1인당 국민소득 45,004달러의 40.9%에 해당한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만약 독일의 사회보장부담률 13.7%가 교육이나 의료에 쓰여지지 않고 모두 기본소득으로 지급된다고 하여도 월 513.8달러, 469,000원밖에 안 된다.

 

<국내총생산과 지출(명목, 연간)>

단위 : 십억 원

계정항목별

2004

2005

2006

2007

2008

국내총생산

826,892.70

865,240.90

908,743.80

975,013.00

1,023,937.70

피용자보수

369,205.30

396,337.90

419,926.80

448,993.80

471,269.00

영업잉여

258,345.40

258,129.30

264,450.70

284,555.90

299,188.20

고정자본소모

106,994.10

113,845.70

120,393.80

128,904.20

136,195.70

생산 및 수입세

95,557.30

99,869.00

107,792.00

117,375.00

122,679.50

(공제)보조금

3,209.20

2,941.00

3,819.40

4,815.80

5,394.70

국내총생산에 대한

지출

826,892.70

865,240.90

908,743.80

975,013.00

1,023,937.70

민간최종소비지출

435,060.40

465,430.50

494,917.60

530,264.10

557,594.70

정부최종소비지출

110,127.70

120,010.10

131,900.70

143,262.20

156,327.60

총고정자본형성

241,474.90

249,689.70

260,650.90

278,167.90

299,663.60

재고증감 및

귀중품 순취득

6,036.30

7,176.20

8,536.80

8,749.70

21,938.50

재화와 서비스의 수출

338,059.10

339,756.80

360,625.30

408,754.10

541,266.40

(공제)

재화와 서비스의 수입

303,678.40

316,377.60

348,022.90

394,026.20

553,949.10

통계상 불일치

-187.2

-444.8

135.3

-158.9

1,095.90

국외순수취요소소득

2,434.00

-813.7

1,390.30

1,800.90

6,698.60

국민총소득

829,326.70

864,427.30

910,134.20

976,813.90

1,030,636.30

 

위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2008년 국내 총생산 1,023조 원 중 피용자 보수(노동자 몫)는 471조 원이고, 영업이익(자본가의 몫)은 299조 원이다. 또한 총지출 1,023조 원 중 민간지출은 557조 원이고, 정부지출은 156조 원, 그리고 총고정자본 형성은 299조 원이다. 총조세는 212.8조 원이고 조세부담률은 20.8%이다(2009년은 24% 정도인데 최근 부자 감세로 22%로 축소되었음). 결국 총조세 중 정부지출을 뺀 약 56.8조 원은 민간으로의 이전소득임을 알 수 있고, 영업이익 상당액 299조 원이 고정자본 형성 즉 재투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위 표의 총 민간지출에서 피용자보수와 정부이전소득을 빼면, 자본가들의 소비지출은 29.2조 원 정도임을 알 수 있다(557-471-56.8=29.2).

국민총소득은 자본가의 몫과 노동자의 몫으로 나뉘지만, 국민 총지출은 민간소비(자본가+노동자), 정부지출, 투자로 나뉜다.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투자의 주체와 성과의 귀속은 다를지라도 투자는 해야만 한다. 한국은 매년 총생산의 30% 정도를 투자해왔다.

이 통계상으로 볼 때(계산의 편의를 위하여 총소득을 1,000조 원으로 한다), 총투자 29.9%, 정부지출 15.6%, 민간지출 55.7%(합계 102%)인데, 여기서 사회보장을 감수시킬 부분은 55.7%인 민간지출 밖에 없다면, 291조 즉 29.1%를 어떻게 부과할 수 있을까? 결국 피용자 보수 47.1%에서 20.5% 즉 급여소득의 43.5%는 기본소득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두 교수의 재원 마련 방안을 보면, 생필품을 제외한 부가세를 20%로 올려 34조 원을 마련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필품을 제외하여도 현행 10%도 버거운 현실에서 세율을 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갈 간접세로 결코 진보적인 조세가 아니고 의미가 없다.

또 갑근세가 17.3조 원인데 기본소득세로 22.2조 원을 근로자에게 부과한다는 것 역시 지나친 부담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군인연금과 공무원 연금의 적자를 국가가 보충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 두 연금의 9조 원은 허수일 뿐이다.

나아가 교통에너지환경세 9조 원 역시 특별한 용도에 지출할 목적세로 편의적으로 증세하여 기본소득 재원으로 돌릴 수 없다.

필자 또한 가진 자들의 증세와 불로소득의 중과세에 찬성하고, 그 돈을 저소득층에게 재분배하자는 취지에 찬성하지만, 아무리 증세를 하여도 조세의 확장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두 교수는 증권양도소득세를 신설하여 양도차액의 30%를 과세하여, 증권(현물)양도세에서 30.33조 원, 파생상품에서 45조 원 등 71.8조 원을 만든다고 하나, 이는 결국 매년 양도차익이 239조 원이 나야 한다는 얘기다.

주식의 예를 들어보자. 주식은 매매의 시점과 양이 다르기 때문에 양도차액을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2010년 2월 현재 총 상장주식의 시가는 844조 원인데, 증권(현물)에서 30.33조 원의 양도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100조 원의 양도차익이 발생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주식은 매년 한 번 이상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보유자가 있기 때문에 일부만 거래되고 있다. 만약 시가총액회전율을 약 15%, 약 126.6조 원이라면(2월 달엔 9.09%였음), 126.6조 원이 매년 100조 원의 양도차익(투자수익률은 79%)이 발생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매년 주식가격이 80% 가까이 폭등할 수 있을까? 설령 모든 주식이 1년에 1회 이상 거래되더라도 매년 10% 이상 상승해야만 한다.

또 파생상품에서 40조 원을 부과하기 위해선 매년 120조 원의 투자이익이 발생해야 한다. 파생상품 이론상 기초상품 가격이 오를 때나 내릴 때나 손실금과 이익금이 항상 일치한다면, 매년 120조 원 이상 신규 투자되어야 하고, 총 투자액 중 매년 40조 원을 추출해야 한다.

한국의 금융시장에 투입된 금액이 많아야 300조 원 정도일 텐데, 투자자들이 서로 사고파는 누적거래액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내외국인 투자자가 주식과 파생상품을 포함한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매년 240조 원의 투자이익을 발생시키거나, 매년 240조 원씩 신규 투입되거나, 매년 70조 원씩 양도세로 추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

또한 두 교수는 ‘한국에는 이미 250조 원 수준의 사회적 공동소유인 연기금이 적립되어 있으며, 기업들이 사실상 전체사회성원의 공동소유인 은행 등 금융자본으로부터 자기자본의 평균 100% 수준에 달하는 부채를 갖다 쓰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인 역량만 뒷받침된다면, 당장에라도 대다수 생산수단을 전체사회성원의 공동소유로 전환할 수 있는 21세기 코뮌주의의 시초축적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이렇게 쉽게 달성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기업부채 100%라는 것은 자본금에 대비해서의 얘기이고 시가총액에 대비한 개념이 아니다. 즉 상장주식 자본금은 92조이고 시가총액은 844조인 것이다. 물론 연기금은 장래에는 부도가 예상되지만 당분간은 계속 증가할 것이고 이 기금으로 모든 주식을 살 수도 있다. 그런데 특수한 목적을 위해 갹출(醵出)하여 적립된 연기금이나 국민의 예금으로 주식을 매입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배당금이 시가총액의 1% 남짓밖에 안 되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배당금이 1%밖에 안 되는 것은 기업유보금이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투자에 쓰여진다. 영업이익과 총투자액이 거의 비슷한 것은 이미 살펴 본 바와 같고, 자본가들의 소비는 총영업이익의 10% 정도인 29.2조 원이다). 설령 모든 상장주식을 매입하더라도, 그 이익은 8.4조 원밖에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유화한 수익금으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도 별 근거가 없다. 더구나 사회주의적 기업은 이윤을 기본동기로 하지 않는다. 전기나 수도처럼 저렴한 공급이 목적일 수도 있고, 소비재라고 할지라도 이윤의 극대화보다는 적정한 확대재생산을 고려한 이익일 것이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두 교수는 주로 불로소득과 투기 소득에 대한 중과세로 재원을 마련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직접세 증가분 32.9조 원 중 근로자의 부담인 기본소득세가 2/3를 차지하고, 여기에 부가세 증가분 34조원까지 합하면, 소비대중이 부담해 할 세금은 56.2조 원에 달하는 반면, 증권양도소득세는 72조 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1,000조 원의 총생산 중 정부지출과 총투자를 감안하면 아무리 증세를 하여도 필요재원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즉 현 상태에서는 아무리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고 의회를 장악하여도 필요재원의 1/3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기만 하면 기본소득을 즉각 실시할 수 있다는 두 교수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14. 결어

― 기본소득은 이행전략이 되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계층에 대한 대안은 필요하다. 기본소득론이 그 대안의 하나일 수도 있고, 기본보장이나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보안하여 새로운 대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탈시장화와 탈상품화의 원칙 그리고 개개인의 상품적 필요가 아닌 사회의 공공적 필요를 위한 분배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해롭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기본소득이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코뮤니즘을 앞당긴다는 주장은, 사회의 공공적 필요와 개인의 상품적 필요를 혼동한 주장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노동 안에서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이상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절대적 노동시간의 축소와 고른 분배에 의해서 달성되는 이상이지, 사회적 필요노동의 분배를 부정하는 탈노동적 관점은 인정될 수 없고, 열등처우의 원칙에서 볼 때 관철될 수도 없다.

또한 일인당 50만 원의 기본소득이라는 화폐급여는 총지출의 26.4%에 해당되는 바, 정부지출과 총투자를 감안할 때 총 민간지출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고, 설령 스웨덴이라고 할지라도 26.4%의 무차별적인 기본소득은 공동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희생시켜야만 가능할 것이다. 결국 모두에게 무차별적이고 유의미한 수준의 화폐형태의 기본소득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능성이 희박하고, 고집하기에는 단점이 너무 많다.

그리고 설령 해방적 기본소득이 유의미하다고 하더라도, 좌파가 정권을 잡아야만 그리고 정권을 잡고 나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의 현물급여를 존중하면서 불로소득에 대한 공격으로 재원을 마련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전제조건인 좌파의 집권과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어떤 방법으로 이룰 것인지, 그 주체와 주된 슬로건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전혀 제시하고 있지 않다. 유의미한 기본소득이라는 목표보다, 전제조건의 달성이 훨씬 어려운 과제라면, 이러한 목표를 당면 슬로건으로 제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론은 자본을 부정하고 자본과 당당하게 싸우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에게 타격을 주는 운동으로 성장하기도 어렵고, 형태에만 집착하는 이 운동이 설령 성장하더라도 자본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자본이 수용하더라도 왜곡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본소득의 주장만을 앞세우는 것은 반자본의 전선을 교란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무조건적인 현금형태의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적 원칙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고용과 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실업자 등 도시빈민과 사회적 부불노동인 가사노동에 대한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고, 당면한 현실에서 빈곤층을 포함한 대중을 결집시킬 담론과 요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 참고문헌

 

강남훈․곽노완,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민주노총, 2009. 2.

곽노완, “여러 가지 기본소득과 노동운동의 비전”

금민(사회대안포럼 운영위원장), “기본소득-두 가지 무조건성에 대하여”

제갈현숙, “경제위기 대응으로서 기본소득 전략-토론문”, ≪진보전략회의 워크샵 자료집≫, 2009. 5.

제갈현숙, “노동에서 분리된 소득? 참신하지만 매력적이진 않아”, 참세상, 2010. 3.

 


 

1) 곽노완․강남훈,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민주노총, 2009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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