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코뮨주의 선언인가 청산주의 선언인가? ― 이진경 등의 ‘코뮨주의 선언’ 비판

 

문영찬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1. 머리말

 

이진경 씨 등이 ‘코뮨주의 선언’을 제출했다. 자극적인 제목의 이 책은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기존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런데 선언이라고 하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진경 씨 등은 ‘코뮨주의 선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잘 전달하고 있으나 새로운 정치적 ‘선언’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느낌을 준다. 이는 이진경 씨 등이 ‘코뮨주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대안적 이념을 제기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며 단지 기존의 사회주의 이념을 청산하고 해체하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혹을 준다.

고병권 씨는 대중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말하고 있다. 흐름으로서 대중이 대중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며 기존의 민중, 계급이라는 것은 대중의 흐름이 정체되어서 형성된 것으로서 ‘대중의 죽음’이라고 한다. 즉,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은 대중을 죽은 상태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병권 씨가 제기하는 것 중 새로운 것은 대중을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뿐이고 현실적으로는 민중, 계급이라는 사회주의 운동의 골간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진경 씨는 소박하게도 적대적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우정의 정치학을 논하고 있다.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학은 파시즘과 똑같이 적대의 정치학이었으며 그것은 이제 우정의 정치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대하는 계급 간에도 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가 한 사람 한 사람 뜯어보면 선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이 개인적 운동이 아닌 바에야 계급적 이해를 떠나서 우정을 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진경 씨는 레닌의 전위개념을 비판하면서 기존의 전위 개념을 해체하고 전위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고병권 씨는 소유에 대해 논하면서 핵심적으로 20세기 사회주의가 달성한 국유는 전혀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아니었으며 억압의 체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논하려면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실사구시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간단하게 국유 자체는 노동자의 해방과 무관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청산주의로서는 맞는 것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선언’의 무게감으로서는 많이 부족한 느낌을 준다.

이들의 이러한 청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청산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은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게 세계를 보는 모든 관점을 스피노자에 의지하고 있다. 특이성 혹은 특이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변증법의 질, 양, 상호 연관 등의 개념을 대체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이들의 사상적 뿌리에 해당하는 들뢰즈 등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스피노자는 변증법이 구체화되고 정립되기 이전의 유럽의 철학자이다. 그에게서는 아직 철학적 개념들이 정확히 분화하기 전의 개념들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이 이렇게 스피노자에 의지하는 것은 변증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변증법을 통하면 보다 과학적이고 정확한 파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스피노자에게 의존하려는 것은 이들이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혹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혐의를 준다.

이진경은 가치가 인간의 노동만이 아니라 기계에서도 창출된다는 헛소리를 했다. 이진경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휴머니즘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고 자연도 코뮨에 포함되어야 하며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휴머니즘 없는 코뮨주의를 구상한다. 그러나 이는 휴머니즘에 대한 역사적 파악을 놓치는 것이다. 휴머니즘이 진보적이었던 것은 중세의 신학적 질서에 맞서서 인간의 해방을 외쳤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현대에서 휴머니즘은 더 이상 진보성이 없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한다. 즉, 인간해방이라는 대의는 구체화되어야 하고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의 생산도, 휴머니즘 자체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되는 것이라면 인간만이 가치의 생산의 담당자라는 것은 유지될 필요가 있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좋으나 최소한의 과학적 상식을 폐기하면 그야말로 헛소리의 행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헛소리는 사회에 대한 이해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른바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 제기된 ‘타자의 철학’이라는 것을 검토하면서 이들은 타자성이 유지되면서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대단히 관념론적인 접근이다. 적대적인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을 타도하여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에 의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 타자성이라는 개념이 유지되어야 하고 새로운 공동체는 이러한 타자를 포함하여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는 전형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념론적인 접근이다. 이들은 사회 변혁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을 주장하는데 그것도 관념론적으로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을 주장한 원래의 사람인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은 ‘초월’을 말하는데 전형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접근이고 결국은 신학에 대한 승인으로 흐른다. 우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적대하는 사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적대, 계급을 폐기하는 투쟁을 해야 하며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사회 전체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타자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고 대신에 전체와 개인의 변증법적인 통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의 본질은 한마디로 청산주의이다. 기존의 20세기의 맑스-레닌주의 운동을 천박하게 이해하고서는 그것들을 과감히 청산하고 자신들의 관념적인 헛소리로 운동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진경 씨는 한때 맑스-레닌주의 전위조직 운동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쓴 글들을 볼 때 그의 지금의 주소는 청산주의이고 한편으로 그가 맑스-레닌주의를 얼마나 천박하게 이해했었는가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는, 과학은 그렇게 간단히 청산되지 않는다. 상황의 힘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의 모순이, 운동을 재생시키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과학이다. 이진경 씨 등의 이러한 청산주의 선언에 맞서 이들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수호해야 하고 또 새롭게 정립해야하는 과학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면 이진경 씨 등의 ‘선언’의 순서를 따라 하나하나 짚어보자.

 

 

2. 대중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결여

 

고병권 씨는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민족, 계급과 같은 기존의 맑스주의적 범주, 개념은 대중의 흐름이 정지된 것으로서 대중의 죽음이라 선언한다. 나아가 대중이 파악가능한 대상이 되는 것은 대중의 죽음이고 대중의 본질은 그 파악불가능성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의 청산주의자로서 말하기를 전위는 계몽주의자로서 교육의 명목으로 대중을 지배했다고 하여 전위노선을 탄핵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주장은 청산주의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은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착상은 좋은 것이다. 더욱이 고병권 씨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들면서 로자야말로 대중을 ‘힘’, ‘능력’, ‘흐름’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코뮨주의 역사에서 정말로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극찬을 한다. 청산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맑스주의를 해체하면서도 끝까지 맑스주의적 포장을 걸치려는 것은 그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로자라는 언급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대중을 흐름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물론 대중은 흐름이다.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체로서 역사발전의 주체이다. 그러나 고병권 씨는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민족, 계급이라는 기존의 파악에 대립시킨다. 민족, 계급으로 파악하는 것은 대중을 흐름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대중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민족, 계급은 대중을 정지상태로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인가? 민족의 구성원은 변화하는 실체가 아닌가? 계급이라는 것은 대중을 고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인가? 만약 고병권 씨의 주장이 올바르다면 계급은 정지된, 죽은 것으로서 역사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자본주의 생성 이래 무수한 역사는, 아니 계급 사회가 생긴 이후로 무수한 역사는 바로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해왔다는 것이 현실 아닌가? 한국의 예만 보더라도 동학농민혁명, 일제하 소작쟁의, 그리고 원산파업, 그리고 분단 이후 무수한 투쟁들이 다 계급투쟁이 아니었던가? 즉, 계급은 투쟁하는 주체였고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병권 씨가 대중을 흐름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대중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고병권 씨는 대중이 파악가능한 대상으로 되는 것은 대중의 죽음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대중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의 이익을 수호하고 나아가 대중의 해방을 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따라서 고병권 씨는 대중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진지한 접근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헛소리를 자신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헛소리는 ‘대중을 인간들의 집합으로 한정하는 것에도 반대’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인간의 집합으로서 대중이 아니라 무생물까지 포함한 자연 전체가 대중이라는 것이다. 자연까지 포함하여 운동을 사고한다는 것은 좋지만, 이들은 대중이라는 개념이 갖는 역사성, 과학성을 폐기하여 대중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해체하는 것이다. 해체적 사고, 청산주의자들만이 이러한 주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대중이라는 맑스주의의 오래된 개념이 이들에 의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고병권 씨의 대중에 대한 이러한 헛소리는 가능한 지점까지 최대한 발전한다. 그는 “대중의 유체역학”이라는 글에서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것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여기서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비교하면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고 칭찬하고 있다. 클리나멘은 ‘직선운동에서 비껴나가는 원자들의 이탈적 운동’이며 이 운동의 ‘시간과 장소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고대원자론의 의미는 현대 과학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는데 양자역학에서 이러한 소립자의 우연적 운동은 이미 현실임이 입증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고병권 씨의 논거가 되고 있다. 즉, 소립자의 운동은 제대로 파악될 수 없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대중이 파악가능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의 논거로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학과 사회과학을 혼동하는 것이다. 물리적 현상과 사회적 현상은 모두 물질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사회적 현상은 사회과학에 의해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다. 그러나 대중을 인간의 집합으로 한정하지 않는 고병권 씨는 소립자의 운동에서 파악불가능함, 혹은 우연성이라는 현상이 곧바로 대중의 파악불가능성이라는 것으로 환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사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불가능하다. 사회에 대해서는 사회의 특수성을 해명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올바른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고병권 씨가 이렇게 물리학과 사회과학을 혼동하는 것은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자신의 관념을 관념론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는 대중의 분자적 흐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대중의 분자적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흐름을 다루는 역학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이 좋은 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직관, 착상은 될 수 있어도 과학적 접근은 아니다. 대중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사회과학을 뒤섞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 대중을 전제하고 접근해야 한다. 물론 대중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나아가 대중이 파악가능한 대상이 되면 그것은 대중의 죽음이라고 선언하는 고병권 씨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쓸모없지만 말이다.

대중에 대한 이러한 입장, 겉으로는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한다고 하여 대중을 최고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듯한 고병권 씨는 실제로는 대중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보여주고 있다. “대중은 선한 본성도, 악한 본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대중은 선한 만큼 악하며 악한 만큼 선하다. 본성이 없다는 것이 대중의 본성이다. 대중은 언제나 반동적으로 전화할 수 있다. … 대중은 선한 만큼 악하며 민주투사인 만큼이나 잔인한 독재자이기 때문이다.”1) 이러한 고병권 씨의 고백은 대중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대중은 파악가능한 대상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으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대중을 신뢰하지 못하고서 어떤 운동이 가능할까? 대중은 언제나 반동적일 수 있기 때문에 대중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중운동, 나아가 모든 사회주의 운동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이들의 해체적 요소, 청산주의적 요소가 정확히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대중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역사의 주체로서 대중에 대한 신뢰, 억압과 착취에 대해 투쟁하는 주체로서 대중에 대한 신뢰, 그리고 대중을 조직하고 함께 투쟁하기 위한 정치적 구심으로서 전위조직의 건설, 이러한 관념은 고병권 씨의 머릿속에는 파고들 여지가 없다. 단지 관념적으로 대중을 고민하고 그것의 정치적 의미를 말끔히 청산하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이다.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언뜻 대중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인 듯한 외관을 띤다. 흐름 즉, 운동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은 유물론자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 민족이 대중의 죽음이라는 것은 그가 운동과 정지의 변증법적 관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의 질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대적 정지가 필요하다. 계급이라는 질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서 일정한 통일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무한한 변화 속에서도 존재하는 이러한 상대적 정지의 계기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고병권 씨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세계의 다양성은 바로 이러한 상대적 정지의 계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물이라는 물질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수소원자 두 개와 산소원자 한 개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렇게 수소와 산소원자가 결합되는 것이 바로 상대적 정지의 계기이다. 이러한 상대적 정지가 없다면 물이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변화와 정지의 통일이 바로 다양한 물질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분화의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고병권 씨는 마치 유물론적인 외관을 띠고 있으나 그것은 관념론과 뒤죽박죽된 유물론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병권 씨가 해체한 전위개념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전제는 대중은 파악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대중은 흐름으로서도 파악되어어야 한다. 그러나 흐름이라는 개념 자체가 파악불가능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고병권 씨는 빗나간 것이다. 흐름으로서 대중을 파악하되 상대적 정지의 계기를 포함하여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중을 파악가능한 실체로서 인정해야 전위의 개념이 복원될 수 있다. 전위는 대중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이 점이 바로 고병권 씨가 탄핵한 계몽주의자들과 전위의 차이이다. 계몽주의자들은 단지 대중을 깨우칠 대상으로만 파악한다. 따라서 계몽주의자들과 대중 간에는 명확한 장벽이 있다. 그러나 전위는 대중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대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대중에게 봉사하고 대중과 일체화된 대중의 선진 부위가 바로 전위인 것이다. 따라서 고병권 씨가 전위개념을 간단히 계몽주의자로 치환한 것은 그가 진정한 전위운동을 한 적이 없고 맑스-레닌주의 전위 개념에 대해 참으로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대중에 대한 개념, 전위에 대한 개념, 대중과 전위의 관계의 재정립을 통해 우리는 운동에서 청산주의가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적인 과학을 복원하는 길을 가야 한다.

 

 

3. 우정의 정치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학이 될 수 있는가?

 

이들의 관념은 청산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선언’의 외관을 갖추려 노력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 사회주의 운동을 간단히 적대의 정치학으로서 나찌의 정치학과 동일하다고 치부해버리고서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 우정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그러면 먼저, 이진경 씨가 대안으로서 제시하는 우정의 정치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과연 맑스주의 운동이 적대의 정치학인지, 나찌와 동일한 것인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정의 정치학은 적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적의 부정을 통해 친구를 정의하는 것과, 친구의 긍정을 통해 친구와의 관계를, 우정을 정의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2) 것이라고 한다. 대단히 선하고 평이한 접근이다. 친구 혹은 우정에 대해 “아마도 의견의 유사성이나 이해의 근접성보다는 서로 주고받는 감응의 긍정성에 의해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서로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손익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촉발하여 야기한 감응이 긍정적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특이성 내지 개체성을 부정하지 않을 정도 한에서 그 관계를 우정이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러면서 계급적 적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도 우정의 정치학이 가능한가 묻고는 “우정이 이해관계가 아닌 한, 경제적 대립이나 정치적 적대에 의해 동일하게 절단되지 않는다. 즉, 경제적 대립이나 정치적 적대가 우정의 형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는 해도 그것이 우정을 막는 결정적인 경계는 되지 못한다. 긍정적 감응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면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적대관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관계가 형성된다. 아마도 이것이 맑스나 엥겔스가 자신의 출신계급을 뛰어넘어 프롤레타리아에 근접하게 되고 프롤레타리아와 우정을 맺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이해관계의 대립이 있으면 경쟁의 경제가 작동하고 적대관계가 있으면 적대의 정치학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를 우정의 정치학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다만 모든 관계를 두 계급의 적대로 환원해서는 안 되며 종종 그 경계선을 가로지르면서 우정의 정치가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이진경 씨의 입장은 우정의 정치학을 적대의 정치학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의 정치학과 적대의 정치학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애매한 절충이다.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이 스탈린주의 운동으로서 적대의 정치학이라고 비난하고서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는 적대의 정치학이 지배한다는 것이라고 슬며시 발을 빼고 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계급적 관점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보충하고 있다. 적대의 정치학에는 참여하지 않고 고고한 우정의 정치학을 설파하면서 그러면서 사회주의운동을 적대의 정치학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면서 비겁한 것이다. 이진경 씨는 심지어 맑스-레닌주의 운동을 적대의 정치학으로서 나찌의 적대의 정치학과 같은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악의를 우정이라는 점잖은 말로써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정의 정치학이라는 것의 실체를 조금 더 파악해보자. 우정의 정치학의 대전제는 국가론이 없는 정치학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푸코와 같은 미시정치학, 즉 국가를 둘러싼 정치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정치가 필요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기초로 적대에서 출발하는 정치학이 아니라 우정에서 출발하는 정치학이 가능하다고 도약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혼란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푸코와 같이 국가를 둘러싼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도 얼마든지 정치적 현상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부르주아 정치와 프롤레타리아 정치를 적대의 정치학이라고 규정하고는 자신은 그러한 적대를 뛰어넘어 우정의 정치학을 설파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관념론이요, 정치적으로 비겁한 짓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적대를, 적대로 둘러싸인 계급사회에서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가 제시하는 우정의 정치학은 감응의 정치학, 긍정적 촉발의 정치학이라는 좋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만 그것의 현실적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적 적대를 외면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좀 더 들어가 보면 이진경 씨는 계급사회에서 정치라는 것이 나아가 사회주의 운동이 적대와 연대의 통일, 사랑과 분노의 통일이라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운동한다는 것은 사회를 변혁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계급적 적대를 폐지하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동지들 간의 연대와 애정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적대를 지양하는 연대가 운동인 것이다. 이것이 운동의 본질인데 이것을 적대와 우정이라는 이분법으로 칼로 무 자르듯이 기존의 운동은 나찌와 같이 적대의 정치학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자신의 운동에 대한 배신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다음으로 기존의 운동은 일상적 삶의 변혁이 아니었고 따라서 국가론이 없는 정치학이 필요하며 그것은 푸코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살펴보자. 사실 푸코는 젊은 시절에 맑스주의를 잠깐 접한 것을 제외하고는 맑스주의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삶의 정치를 논하고 국가론 없는 정치라는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추켜세워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러한 논지의 전제는 기존의 운동은 삶의 변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존의 운동은 성, 가족, 감옥 등과 같은 구체적 삶의 문제에서는 무능력했고 거시적 접근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맑스주의를 탄핵하는 것이다. 운동에 뛰어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 삶에서 변혁적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에 대한 모욕이고 비과학적인 접근이다. 운동한다는 것은 미시적 삶에서도 변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맑스주의운동이 과거의 운동과 다른 것은 삶을 총제적으로 보는 것이고 관념적 삶이 아니라 물질적 삶의 변혁을 시도하고 또 성공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변혁하는 것이 사회주의운동인데 어떻게 미시적 삶이 변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재정에서, 이성관계에서, 가족관계에서, 그리고 기타 무수한 사회적 관계에서 사회주의적 관점을 정립하지 않고서는 변혁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이렇게 사회주의 운동은 단지 거시적 목표만이 아니라 운동을 하는 주체의 삶을 변혁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과학이고 정치와 윤리의 통일이다. 운동의 초보자, 과학성을 견지하는 못하는 운동은 운동과 윤리가 분리되어 있다. 운동의 이러한 허점을 푸코식 논리가 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은 그 발전과정에서 정치와 윤리의 통일을 이루어간다.

다음으로 국가론 없는 정치라는 점을 살펴보자. 이진경 씨는 국가론 없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삶이 국가와 무관한 것인가? 일상적 삶에서 관철되는 모든 억압과 모순이 국가와 무관한 것인가? 자본주의 후기, 지금의 삶에서 국가는 일상적 삶의 모든 영역에 촉수를 뻗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억압과 착취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억압의 심장부인 국가를 타격하고 부르주아 국가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도대체 틀린 말이라는 것인가? 거꾸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변혁적인 삶을 살려면 국가론, 맑스주의 국가론을 섭취하고 올바른 투쟁의 노선을 세워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기존의 운동, 맑스-레닌주의 운동이 나찌와 같이 적대의 정치학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진경 씨는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를 언급하면서 전략과 전술, 주요타격방향 등의 개념을 말하면서 여기에서 전형적인 적대의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적과 동지에 중간을 두지 않고 중간지대조차 적과 동지로 나눈다는 이 섬뜩한 주장! 언제나 핏발 선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는 이러한 주장! 그러나 스탈린이 말하는 그러한 적대는 사실 자본주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그러한 적대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맑스주의자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자신의 관점으로 한다. 적대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그러한 적대를 청산하기 위해 전략과 전술을 논하고 세력배치를 논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인가? 적대를 폐지하기 위한 연대가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즉, 사회주의가 공상이 아니라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전략과 전술을 가져야만 한다. 현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누구이고 동지가 누구이며 중간 지대가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않고서 어떻게 변혁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이것은 적대를 폐지하기 위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히 불려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을 나찌의 적대의 정치학과 같이 보는 것은 상당히 악의적인 주장이다. 이진경 씨는 나찌의 정치이론가인 칼 슈미트의 “적이란 바로 타인, 이질적인 자이다.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론적으로 어떤 타인이며 이질적인 자라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3)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맑스주의 정치는 바로 이러한 적대의 정치학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상당히 악의적인 주장이다. 이질적인 자, 타자라는 것은 매우 포괄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즉,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적대성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이는 나찌가 세계를 지배하려 했다는 것, 모든 사람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이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운동이 이러한 정복의 정치학이었던가?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자, 이질적인 자, 적으로 보았던가? 인민이라는 개념, 민중이라는 개념은 노동자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대중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생산자를 중심으로 하여 억압받는 사람들 대부분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들을 동맹자로 끌어들이고 부르주아지를 타도한다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이는 운동을 하지 말라는 것, 운동은 정치여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닌가? 나찌의 정치학이 정복의 정치학이었다면 억압의 정치학이었다면, 사회주의운동의 정치학은 해방의 정치학이 아닌가? 이진경 씨는 무슨 안경을 끼었기에 억압과 해방의 차이도 보지 못하는가? 단지 쏘련이 붕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진경 씨의 그런 관점을 옹호한다고 보는가? 이진경 씨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가? 20세기 사회주의를 통하여 인류가 어디까지 전진했었고 어떤 오류가 축적되어서 결국에는 무너졌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따라서 나찌와 20세기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전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고 역사에 대한 몰이해이다. 억압과 해방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이 사회에서 헛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운동은 공상이 아니고 과학이며 그것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관념의 운동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이어야 하며 국가를 변혁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이 사회에 존재하는 적대관계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적대관계를 직시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을 변혁하는, 지양하는 운동, 적대를 폐기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따라서 적대의 정치학과 우정의 정치학이라는 이진경 씨의 관념적인 접근은 아무짝에 쓸모없고 부르주아지에게 아첨하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우정이 아니라 동지에 대한 애정, 그리고 계급적 분노를 갖는 그러한 운동이 현실적인 운동이다.

 

 

4.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표현이다

 

고병권 씨는 소유의 문제를 파고들고 있다. 고전적인 로크의 소유론부터 맑스의 소유개념까지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소유를 하나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병권 씨는 사회주의 사회의 소유문제에서 그르치고 있다. 고병권 씨의 주장을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보자.

 

과연 사유와 국유가 대립하는 것일까. 우리가 역사에서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근대적인 사적 소유에 근대 국가가 조응한다는 사실이다. 사적 소유는 근대 초기의 국가 폭력이 없었다면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적 소유가 가능해진 것은, 국가가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폭력을 사용해서 전국적 수준에서 화폐적 평면, 법적 평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국가의 배타적 독점이 사적인 배타적 독점의 기반이 된 것이다. 실제로 많은 공통적인 것―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공유―의 영역이 국유를 통해 사유화되거나 사유화되기 좋은 조건으로 전화되었다. 국유가 공통의 소유가 아닌 국가의 소유를 의미할 때 다시 말해 국가의 배타적 독점을 의미할 때, 그것은 쉽게 사적 독점으로 전화될 수 있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패망과 함께 국영기업들이 집단 매각되는 방식이 그랬고 개발독재 국가에서 공기업의 사적 불하가 그랬고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유화 방식이 그렇다. 공유지의 사유화라는 엔클로저 운동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4)

 

고병권 씨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개념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에서 소유에 대해서는 전혀 잘못짚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국유와 사회주의에서 국유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국유는 사적 독점의 보완물이다. 즉, 독점자본가들의 공동소유가 자본주의에서 국유, 공기업들의 의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 국유 혹은 공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첫째, 자본가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본가계급이 타도되고 사라진 상태에서 국유는 전인민의 공동소유, 전인민소유의 법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의 국유는 인민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의 표현이다. 자본, 즉 노동자를 억누르는 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생산수단은 노동자 전체를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 전화된 것이 바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전인민소유라고 표현되지 않고 국유라고 표현되는 것은 국가의 존재 때문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존재하는 한 전인민소유라는 내용은 국유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둘째, 국유는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하나이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사적 소유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유를 의미한다. 공유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대략 두 가지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국유이고 다른 하나는 협동조합적 소유이다. 농업의 경우 협동조합적인 소유가 지배적이고 공업, 상업의 경우 국유가 지배적이다. 이들 두 가지 생산관계, 즉 협동조합적 소유와 국유라는 두 규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착취가 없다는 것이다. 즉, 자본가의 존재를 이 두 관계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관료의 억압 혹은 수탈이 있을 수 있다. 기존의 쏘련을 보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관료주의가 횡행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수정주의의 발생에 기인한다. 이때 공장경영층, 관료들은 쏘련의 역사 후반부에 노멘클라투라로서 특권층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이것은 관료주의의 문제이지 생산관계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국유 자체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철저히 관철시켜야 한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문제의 원인과 성격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해답을 내올 수 없다. 수정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철저히 관철시키고 관료주의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과의 대립의 점진적인 해결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20세기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다.

그리고 고병권 씨는 소유문제를 물질적 생산에 한정해서 논의하는 것을 반대하고 정체성의 생산도 소유문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를 인용하면서 가족, 교회, 학교, 대중매체 등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주체생산에 결정적으로 역할하며 이 주체 생산수단들의 소유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고병권 씨가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문제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는 것은 혼란된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상부구조의 문제로서 그것은 사회주의 변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생산에서 결정적인 생산수단의 소유문제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회의 기초는 이데올로기 생산이 아니다. 사회의 기초는 물질적 생산이며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의 문제이다. 이데올로기 생산기제와 물질적 생산의 생산수단의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것을 뒤섞는 것은 혼동이며 사적 유물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5. 변증법적 유물론의 폐기와 조직문제에 대한 왜곡

 

이진경 씨 등은 자신의 입론을 펼치면서 유물론과 관념론을 오락가락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서 변증법적 관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신에 이들은 스피노자에 의존한다. 스피노자는 헤겔 이전의 철학자로서 변증법이 정립되기 전의 사람이다. 이진경 씨 등의 인식틀을 보여주는 것은 특이성 혹은 특이점이라는 개념이다. 이진경 씨의 개념정의를 잠깐 인용해보자.

 

어떤 것을 그것이게 해주는 특이적인 성분, 그것을 그것이게 해주는 이 특이적인 본성을 특이성이라고 명명하자.5)

 

여기서 이진경 씨가 말하고 있는 특이성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변증법에 있어서 ‘질’이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그것을 그것이게 해주는 성질이 질인 것이다. 그런데 이진경 씨는 질이라는 개념보다 특이성이라는 개념을 선호하는데 여기서 문제는 특이성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내용이 무한히 늘어난다는 것이다.

특이성은 들뢰즈의 어법으로 말하면 ‘특이점들의 집합’이고 특이성은 무엇보다 외부성이 중요한 특징이고 특이점의 분포가 달라지면 특이성도 달라지고 특이성은 특이점으로 작용하는 잠재적 특이성들의 집합적 배치이고 등등이, 이진경 씨가 사용하는 개념이고 어법이다. 이렇게 특이성이라는 개념은 질의 개념으로도 쓰이고 기타 여러 가지 경우들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특이성은 변화의 원인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것은 변증법의 모순,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진경 씨는 특이성을 상당히 많은 개념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진경 씨가 이렇게 특이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 변증법이라는 인식틀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증법의 질, 양, 상호연관, 운동의 동력으로서 모순 등의 개념이 한층 더 과학적이고 정확한 인식틀을 제공하는데, 이진경 씨는 굳이 특이점과 특이성이라는 개념으로 상당부분을 규정짓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변증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의 자유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유기적 공동체와 특이적 공동체라는 개념이다. 이진경 씨의 특이적 공동체에 대한 개념규정을 인용해 보자.

 

특이점들이 가감되는 데 따라 달라지며, 그러한 특이점의 가감에 대해, 외부성이 열려있는 코뮨적 공동체, 그리고 참여하는 특이적 요소들의 특이성이 최대한 표현되면서도 구성되는 특이성을 분유하는 코뮨적 공동체, 나아가 그러한 요소들의 공-조 내지 협-조를 통해 집합적 신체의 리듬을 유지할 뿐 규칙이나 제도로 보장되는 안정성을 추구하지 않는 코뮨적 공동체를 우리는 특이적 구성체라고 명명할 수 있다.6)

 

이진경 씨는 이러한 특이적 공동체를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의 공동체 혹은 사회주의 사회의 공동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공동체는 유기적 공동체라는 이름하에 재단 당한다. 특이적 공동체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유기적 공동체에 대한 이진경 씨의 개념규정을 인용해보자.

 

이렇게 구성된 코뮨조차 자신의 안정성과 동일성(정체성)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구성 요소들의 위치를, 특이점들의 분포를 하나로 고정하려고 하는 순간 다른 종류의 구성체로 변환된다. 그 구성체는 그 신체의 구성 요소들의 지위나 가치를 전체인 신체의 존속을 위해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할당하며, 구성요소들을 신체의 유지와 존속을 척도로 삼아 위계화한다. 구성체의 존속을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지휘하는 역할을 하는 부분과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부분들이 분할되고 각각의 부분은 상하관계나 기능적 관계에 따라 활동하고 조직된다. 이는 결국 구성체 안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좀 더 중심적인 지위, 좀 더 높은 위치의 지위를 욕망하게 한다. 그리고 지위가 제공하는 일반적, 통상적 기능이 개체적 특이성을 대체하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공동체를 유기적 공동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양상을 발견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아니,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조직, 특히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유지되는 조직들에서 이러한 사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혁명적 조직으로서 당이나 노동운동 조직인 노동조합, 혹은 다른 종류의 시민운동 조직 등에서도 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혹은 자발적으로 구성된 종교적 공동체의 경우에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7)

 

이진경 씨가 관념적으로 정의한 특이성 혹은 특이점이라는 개념이 이런 위력을 발휘할 줄이야! 이진경 씨의 특이성이라는 개념으로써 기존의 모든 조직, 나아가 운동적 조직조차 매도당하고 오직 이진경 씨의 특이적 구성체만이 올바른 조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진경 씨는, 유기적 공동체는 모두 일종의 관료적 조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특이점들에 의해 변화의 능력을 내포하는 특이적 구성체만이 지향해야 할 조직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혁명적 당과 종교조직을 동일시하는 이진경 씨는 도대체 과거에 어떠한 운동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회의 대부분의 조직은 유기적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직은 사람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유기적 관계를 통해 하나의 질로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진경 씨는 슬쩍 유기적 조직을 관료적 조직으로 바꿔치기 하고 혁명적 당조차 이러한 조직이라고 규정하는 비약을 하는 것이다. 대신에 자신이 창안한 특이적 조직만이 올바른 조직이라고 강변하면서. 그러나 이진경 씨가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특이성이라는 개념이 변증법이 정립되기 이전의 미분화된 개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이진경 씨에게서 조직문제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특이성이라는 개념이 포괄하는 무수한 개념의 스펙트럼으로는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이진경 씨는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조직들, 나아가 혁명운동의 조직에 대해 그 특성과 동력 등을 정확히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뭉뚱그려 유기적 공동체라는 이름하에 재단하는 것은 당신의 독선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조직체는 관료주의적인 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민주적 조직원리가 파고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운동하는 조직체, 나아가 혁명운동하는 조직체는 철저히 유기적이면서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운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조직과 피지배계급의 조직의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구분하고 그 특성에 대해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운동에 기여하는 것일 텐데 이진경 씨는 특이성이라는 모호한 개념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재단하는 비약을 감행한다. 이진경 씨가 자신의 사유를 마음껏 펼치는 것은 그의 자유이지만 혁명운동의 조직을 매도하고 왜곡하고 부르주아 조직과 동일시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6. 휴머니즘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한다

 

이진경 씨는 나름대로 운동의 패배를 되새기면서 그것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좋은 점이다. 휴머니즘의 문제를 새기면서 운동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는 것도 그러한 자세의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접근이 피상적으로 진행되면서 전혀 엉뚱하게 기존의 운동을 청산하고 관념론적인 도피로 끝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기존 운동의 해체이고 과학의 폐기이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공과를 따져야 하는데, 이진경 씨는 이러한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라 운동에 대한 관념적 부정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휴머니즘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결국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폐기로 나아가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기존의 맑스 경제학은 노동가치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를 분석해 왔다. 그것을 통해 자본의 운동법칙을 과학적으로 밝히고 자본주의가 하나의 역사적 사회구성체임을 논증했다. 이러한 맑스의 성과가 그러나 이진경 씨에게서는 간단히 처분되고 대신에 기계도 가치를 생산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진경 씨의 사고를 추적해보면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로서 지금은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제는 자연도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휴머니즘의 폐기로 나아가고 그에 따라 기존의 과학을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혼란된 사고이다. 그러면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보자.

휴머니즘이 생긴 것은 그리고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은 중세의 신학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였다. 신학, 신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체이고 인간은 단지 그것의 종이었던 시절에 과감하게 인간이 중심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혁명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절의 아름다운 예술품들,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것들은 이러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휴머니즘으로부터 자본주의적인 근대가 생겨났다. 그 자본주의는 착취관계를 극단화하면서도 단순화한 것이었고 지금은 근대 이성 비판, 환경문제 등 도처에서 공격받고 비판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근대를 산출했던 휴머니즘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진경 씨는 동물도 생산수단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이고 나아가 기계도 생산수단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휴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휴머니즘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맑스의 초기저작들을 보면 인간해방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맑스는 초기의 인간해방이라는 이념으로부터 더 전진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사회주의를 공상에서 과학으로 전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휴머니즘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맑스는 휴머니즘을 폐기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맑스는 휴머니즘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지양했다. 맑스의 모든 저작에는 인간주의가 깊이 배어있다. 그러면 맑스는 인간중심주의자였는가? 그렇지 않다. 맑스의 초기저작인 ≪경철수고≫에서는 ‘완성된 인간주의는 자연주의이고 완성된 자연주의는 인간주의이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다. 자연의 최고의 산물로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가장 인간다운 것은 자연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맑스가 변증법의 힘을 빌려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철저하게 접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지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진경 씨는 이와는 딴판으로 접근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동화된 기계제 생산을 보고서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생산의 주체이고 나아가 노동가치론을 폐기하면서 기계 또한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라고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진경 씨가 이 세계를, 이 자본주의 사회를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동화라는 현상은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생산하는 상품들이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그것은 무상으로 인간들에게 배분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자동화라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는 혁명적 주장의 논거로 작용해야 하는 것이지 거꾸로 자동화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주장은 이렇게 비과학적인 주장이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진경 씨가 좀 더 진지한 학자라면, 진정성이 있는 학자라면, 노동가치론의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알았다면 또한 그렇게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맑스의 ≪자본론≫ 3권 후기에서, 엥겔스는 가치법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설명의 요점은 가치법칙의 생성이 역사적이었다는 것, 상품생산의 발전과 가치법칙의 작동이 맥을 같이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화폐가 없던 때로부터 화폐가 발생한 후까지 가치는 상품생산의 척도로서 응고된 노동일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응고된 노동이 가치의 본질이고 상품생산, 자본주의적 생산을 규정하는 힘인데 이 본질을 이진경 씨는 제거하고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은 천박한 경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 씨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몰이해, 피상적 이해를 보여주는 것은 맑스가 자연이 지대라는 가치를 산출한다고 주장했다는 파악이다.8) 맑스는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본론≫을 아무리 샅샅이 살펴보더라도 그러한 주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대가 가치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연이 지대를 산출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지대를 산출하는 것은 인간이다. 즉, 지주가 갖는 토지소유권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갈라먹는 사회적 힘을 산출하는 것이다. 즉, 지대는 토지소유가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진경 씨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휴머니즘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되는 것이다. 맑스가 주장했던 인간해방이라는 이념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인간해방을 통한 인간과 자연의 일치와 공존으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이진경 씨처럼 과학의 폐기가 마치 발전이고 새로운 대안이라는 식으로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7. 타자의 철학과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이진경 씨 등이 자신의 책의 제목을 ‘공산주의자 선언’이 아니라 ‘코뮨주의 선언’이라고 붙인 것은 기존의 공산주의는 틀렸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표현 대신 코뮨주의라는 용어를 쓰고 공동체라는 용어 대신 코뮨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으로 새로운 용어를 씀으로 인해서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위장하려는 수많은 현학자들의 행태와 동일한 것이다. 이진경 씨 등은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코뮨주의자 선언’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코뮨주의가 공산주의의 번역어이며 다만 자신들은 역사적 공산주의와 단절하고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적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무엇인가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고 단지 역사적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청산주의만을 보여줄 따름이다.

이들은 코뮨주의 혹은 코뮨이라는 개념을 보강하기 위해 그에 대한 대립물을 설정하는데 그것이 타자라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는 주체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레비나스라는 사람의 타자론을 끌어들여 그것을 분석하면서 자신들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코뮨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의 코뮨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라는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은 헛소리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타자론이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는 공동체만을 강조한 전체주의였고 따라서 타자성을 인정하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사고의 출발점이 쏘련 사회를 전체주의로 본다는 것이고 이는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기초로 이들이 전개하는 타자론은 허황된 것이다. 타자는 이질성 자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이질성 자체로서 타자의 얼굴을 마주한다면 그리하여 타자에게 헌신하는 윤리적 주체로 자기를 정립한다면 이 세계에선 불가능한 초월과 무한의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허황된 설정인가? 이는 인간이 자신의 외부, 다른 사람을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설정한 주관의 관념에 자신을 몽매하게 묶어두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타자론은 신학적 논리로 직행한다. “타자의 철학자로서 그는 지각과 인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외부-타자로의 초월, 즉 무한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마침내 타자는 종교적 울림 속에서 신의 얼굴을 한 채 나타난다.”9) 이는 타자를 신비화시키고 그 결과로 신학적 논리로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 타자를 초월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는 가정이야말로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이러한 설정은 인간의 최소한의 사회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신학적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초월’이라는 설정 자체가 얼마나 신비적이고 허황한 것인가? 이러한 타자론을 수용한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거나 아니면 전체주의 사회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연대가 불가능하고 타자적 관계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난점은 논리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편리한 방식으로 풀린다. 타자적 관계가 갖는 사회성의 결여를 해결하는 것이 국가라는 것이다. 또한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이라는 레비나스의 테제는 모든 초월적인 것의 내재적 공속이라는 데리다 자신의 테제와 맞물려 반향한다”10)는 것이다. 이 또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이라는 테제 자체가 헛소리이고 이것을 전제로 한 데리다의 ‘초월적인 것의 내재적 공속’이라는 주장 또한 헛소리이다. 초월적인 것의 내재적 공속이라는 것은 초월적인 것은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인데 전형적으로 신학적 논리이다. 인간에게는 신성이 이미 존재한다는 따위와 아주 유사한 말이다. 이러한 헛소리와 신비한 관념이 이진경 씨 등이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마치 타자론을 제기하면 전체주의와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라는 외양을 취하고서는 실은 사회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전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타자론을 제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과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본의 압제를 이겨내고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달성하여 개인의 발전의 조건을 확보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이것을 상당부분 달성했었다. 그러나 수정주의의 발생, 그리고 관료화로 인해서 그리고 핵심적으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극복이 지체되어서 역사의 역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생산수단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개인의 발전의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들의 타자론의 관념성은 코뮨주의 공동체의 반대항은 타자가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타자론이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 즉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분석, 그곳에서의 모순의 파악이 코뮨주의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8. 결론

 

이진경 씨 등은 자신의 사유를 마음껏 전개하여 하나의 선언을 제출했다. 그러나 선언을 하고자 하는 욕심은 이해되지만 그것의 내용은 초라하고 단지 과학의 폐기, 역사에 대한 청산주의 선언으로 끝났을 뿐이다. 이진경 씨가 진정성이 있는 학자라면 ‘선언’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았어야 한다. 자신들의 헛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선언이라고 포장한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대중, 정치, 소유, 특이성, 휴머니즘, 그리고 타자 등까지 마치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낸 것같이 포장했지만 실은 현실에 대한 분석을 회피하고 관념의 도피로 빠졌을 뿐이다. 관념론과 유물론을 뒤범벅이로 섞어 버리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진경 씨가 새로운 대안으로서 자신들의 선언을 제출한 것으로는 보이지가 않는다. 운동하는 사람은 선언이 아니라 운동의 일보전진을 위해 현실을 분석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멋들어 보이는 관념의 유희는 씁쓸할 뿐이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는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현실의 운동의 진전은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리하여 20세기 사회주의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요구된다. 무엇이 남겨져야 하고 무엇이 극복되어야 하고 무엇이 새로 제출되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일차적 과제는 청산주의에 대한 투쟁이다. 청산주의에 대해 단호히 투쟁하여 과학을 수호하는 작업, 맑스-레닌주의의 기치를 단호히 치켜세우는 것 그리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묵묵히 밀고 나가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황,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감각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 등이 어우러질 때 역사의 진보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1) 이진경‧고병권, ≪코뮨주의 선언≫, 교양인, 2007, pp. 60-61.

 

2) 이진경‧고병권, 같은 책, p. 85.

 

3) 같은 책, p. 82.

 

4) 같은 책, pp. 128-129.

 

5) 같은 책, p. 156.

 

6) 같은 책, pp. 172-173.

 

7) 같은 책, pp. 173-174.

 

8) 같은 책, p. 223.

 

9) 같은 책, p. 246.

 

10) 같은 책, 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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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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