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쿠바 혁명 50년: 혁명의 매개체로서의 문화-예술

 

 

최상철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운영위원

 

 

이 글은 ≪정세와 노동≫ 제15호(2006. 7‧8합본호)에 실린 “쿠바 혁명과 예술 운동—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를 중심으로”를 보완하여 재서술한 것이다. 교정작업을 바탕으로 당시의 글을 더욱 전개하였고, 새롭게 서술하고 제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 발표했던 내용을 재론하는 것은 미숙했던 글에 있던 수많은 오류들을 정정하고자 함이며, 현재에도 혁명의 길을 걷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의 투쟁에 대해 연대하고자 함이다. 다시 글을 쓰면서 결론을 유보했던 부분에서는 현재까지의 잠정적인 결론을 제시하였고, 부족했던 작품 분석도 추가해 보았다. 또 이전의 서술은 누에바 뜨로바를 중심으로 한 음악에 많은 부분 편중되었는데 혁명 이후의 다른 변화에 대한 내용도 기술하였다. 그럼에도 이 글은 여전히 완결된 글이 아니다. 미천한 능력으로 인해 여전히 글의 완성도가 높지 않으며, 쿠바 혁명과 문화예술 투쟁과 관련해서 다루고 있지 못한 내용이 너무나 많이 있다. 언어 능력이 부족하여 많은 부분 2차, 3차 자료에 의존했는데, 더러는 반공주의적인 편견을 드러내거나 쿠바에 대해 악선동을 펼치는 것들이었으며, 그나마도 충분히 섭렵하지 못했다. 쿠바 및 라틴 아메리카에서 원어로 생산된 보다 많은 자료에 근거하여 풍부하고 생생한 현장감을 담고 있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훗날의 일로 미루어 둔다. 쿠바 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따라서 현재의 글은 일종의 잠정적인 보고문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닐 것이다. 더 많은 쿠바를 위한, 더 많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현실 운동의 전진이 미완성인 글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미숙한 이글이 사회주의 국가의 투쟁에 조금이라도 연대하고자 하는 작은 의지의 발로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쿠바: 침략의 땅에서 독립과 사회주의의 전초기지로

 

1492년 10월 28일 콜롬부스는 카리브 해에 위치한 한반도의 절반 정도 크기인 약 11만㎢면적의 작은 섬 쿠바에 도착하고 나서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땅”1)이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콜롬부스의 ‘발견’ 이전에도 이 섬에는 씨보니(Siboney), 따이노(Taíno)2)와 같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콜롬부스의 발언은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 그리고 학살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섬의 원주민들은 에스빠냐 침략자들에 의해 학살되거나 병에 걸려 죽었기에 거의 전멸되었고,3) 원주민을 대신한 노동력의 충원을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이 끌려왔다. 16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끌려온 노예는 백만에 이르며 에스빠냐 제국주의자들은 이들을 주요한 노동력으로 삼았다. 이후 쿠바는 에스빠냐의 주요한 생산기지이자 아메리카 지배를 위한 주요한 거점이었다. 쿠바의 산업은 설탕, 담배, 커피와 같은 단일 종목으로 재편되었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O. Henry)는 온두라스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단편소설 Cabbages and Kings(양배추와 왕)에서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는 바나나와 같은 단일 작물에 의존하는 경제와 바나나처럼 쉽게 부패하는 정권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를 그렇게 비탄과 시름의 땅으로 만든 것은 바로 서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다.

쿠바의 인민은 달콤한 복종에 안주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 1791년에 쌍-도밍그(Saint-Domingue, 현재의 아이티)에서 대규모의 노예 반란이 발생하였고, 이는 쿠바의 인민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4) 나뽈레옹으로 인해 에스빠냐 제국주의자들의 세력이 약해진 1810년에 대규모 독립투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반란은 진압당한다.5) 미국의 먼로 대통령은 1823년 유럽과 아메리카에 대한 상호 불간섭주의를 표방한 먼로 선언(Monroe Doctrine)을 발표하여 그때까지의 에스빠냐의 지배를 승인한다. 한편으로 먼로 선언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배제하고, 이들이 물러나면 자신의 앞마당으로 삼겠다는 야심을 내포한 것이었다. 호세 마르띠6)는 1878년부터 본격적인 반식민투쟁을 조직하였다.7) 잡지≪해방 조국(La Patria Libre)≫을 발간하였고 인종간의 평등을 부르짖으며 ‘10년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그는 에스빠냐에 대항한 투쟁 중인 1895년 5월 19일 적의 흉탄에 맞아 사망할 때까지 독립 투쟁을 위해 헌신했다.8) 1898년 미국은 메인 호(battleship Maine)의 폭발9)을 계기로 에스빠냐와 쿠바의 지배권을 위한 전투를 벌인다. ‘메인호를 기억하라!’는 선동적인 구호가 등장하였다. 미국은 쿠바의 독립전쟁으로 인해 쇠약해진 에스빠냐를 손쉽게 꺾을 수 있었다. 1902년 자치를 제한하는 플래트 수정조항(Platt Amendment)이 발표되어, 쿠바는 미국의 세력권에 완전히 편입된다. 플래트 수정조항은 외교권과 군사독립을 심각하게 저해하면서 내정을 간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구임대’한 관따나모만 해군기지(Guantánamo Bay Naval Base)도 플래트 수정조항의 선물이었다.10) 쿠바의 지배자들은 에스빠냐 침략자에서 미제국주의와 그 대리정권으로 바뀌었지만 그 폭압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마차도(Gerardo Machado)와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로 대리 정권은 바뀌어 갔지만 폭압적인 압제와 종속은 심해져 갔다. 1953년 7월 26일 피델 까스뜨로의 몬까다 병영(cuartel Moncada) 습격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혁명의 서곡을 알리는 것이었다. 까스뜨로는 재판정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케 할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á)”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피델 까스뜨로는 멕시코로 망명해 새로운 무장 투쟁을 조직했다. 1956년 체 게바라, 라울 까스뜨로를 비롯한 82명의 동지들은 그란마호(Granma)11)로 쿠바에 상륙해 게릴라 투쟁이 시작된다. 3년간의 투쟁은 인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내며, 1959년 1월 마침내 쿠바를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인근지역에서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땅으로 만든다.

쿠바 혁명의 의의는 작은 섬에 자주 독립정권을 세웠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주의 쿠바는 미국의 앞마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과 혁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베네수엘라 챠베쓰(Hugo Chávez) 정권에 대해 높은 기대감을 지니고 그것을 ‘새로운 21세기 혁명’으로 추앙하는 동지들이 한국에도 많이 있다. 챠베쓰 정권이 인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반미‧반제국주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적 전위정당이 부재하고, 자본가의 사적소유를 공격하지 않는 혁명은 분명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베네수엘라에서의 투쟁을 인민주의적인 것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 수는 있지만, 그 한계를 외면하고 찬사만을 늘어놓는 것은 투쟁에 올바르게 연대하는 자세가 아닐 것이다.12)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인 베네수엘라 챠베스 정권에 대한 찬사는 넘쳐나지만, 챠베쓰 정권과, 볼리비아의 모랄레스(Evo Morales) 정권을 가능케 한 한 굳건한 사회주의의 진지인 쿠바에 대한 분석은 그 중요성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하다. 체 게바라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동경은 널리 있지만, 끝까지 살아서 현실의 혁명과 투쟁을 이어가는 까스뜨로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냉혹한 것이 현실이다. 지나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체 게바라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까스뜨로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죽은 짐 모리슨(Jim Morrison)이나 커트 코베인(Kurt Cobain) 같은 록음악의 스타를 신격화하고, 살아서 활동하는 이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체 게바라는 신격화된 상품이 되며, 이념전에서 싸우는 한 명의 병사(sólo combatir como un soldado de las ideas)13)로써 투쟁을 멈추지 않는 노혁명가14)는 악마의 화신이 된다. 혁명의 과거는 낭만주의적으로 동경하고, 혁명의 현실은 비관하며 미래의 전망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는 “서서히 시드느니 한 번에 타오르는 것이 낫다”는 닐 영(Neil Young)의 가사15)에서 드러난다. 록 음악가와 체 게바라를 비견하려 한다면 그것은 체 게바라에 대한 모욕이다. 여기서 다소 무리한 수사를 동원하는 것은 체 게바라와 록 스타를 비견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동경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비판하려는 것이다. 선배 혁명가 체 게바라의 헌신적인 투쟁과 그를 따르는 남미의 인민과 전세계의 투사들을 폄하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혁명의 현재를 부각하는 것은 혁명의 과거를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싸우는 ‘혁명의 이상’을 찬미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불사른 선배 열사와 혁명가들의 숭고한 투쟁은 소중하다. 그러하기에 살아남은 이들의 투쟁은 더욱 더 치열하고 치밀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혁명의 이상은 냉엄한 현실조건과 투쟁하면서 현실화할 수밖에 없다. 쿠바는 세계 제국주의자들의 총본산인 미국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Key West)에서 불과 145km(90 마일) 떨어져있다. 제국주의의 총본산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에서 어떠한 동력으로 50년이 넘는 세월의 혁명을 지속하고 있는 지 분석하고, 현재의 지침을 찾아가는 것은 세계의 혁명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과제이다.

 

 

자본주의와 문화‧예술 분석을 위한 이론적 예비작업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단지 경제적으로 비참한 상태로 몰아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16)를 강요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이러한 분리는 점점 더 가속화되며 광범위하게 진행된다. 특히 정신노동 중에서 과학이나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부분과 예술이 분리된다. 뿐만 아니라 예술분야의 내적 연관성조차 상실되며 제도화된다. 예술과 과학이 상품화‧제도화되고 대중과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진다. 심지어 전문가 집단은 자신의 분야 외에는 문외한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화음악 이라는 개별분야에서조차 고도로 세분화된 영역에서 각각의 전문가가 자신만의 작업을 고립적으로 담당한다.17) 이는 자본주의적 분업이 노동자를 부분적이고 일면적인 인간으로 협소화시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18) 자본의 지배가 전면화 고도화 되면서 문화를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과정으로 파악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의 분업화와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의 분절화 및 소외는 점점 더 고도화된다. 그 결과 인민대중은 말초적이며 일차원적인 욕구만을 추구하는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독점자본주의와 문화와 관련해서 고 김진균 선생이 탁월한 분석을 내린바 있다.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 완성단계에서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방법을 도입했습니다. …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에게는 순수한 육체노동만 맡기는 것이고, 노동에 대해 통제하던 부분은 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정신, 의식이 되지요. … 정신, 의식이 소위 정신문화의 핵심이 되고, 조금 더 나가면 전문 경영자층의 기반으로서의 지식을 확보하는 방법,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문화, 정보 이쪽까지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죠. … 그런데 상품화의 대상은 좀 더 나가면 광고, 포장, 이런 식으로 가죠. … 독점자본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중적인 노동계급의 결집력을 다원주의를 가지고 균열시켜 나가는 것이죠. 말하자면 하나의 계급의식에 바탕하는 하나의 계급조직을 허물어뜨리는 작동을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런 자본가 계급의 헤게모니 문제와 다른 측면에서 하나의 축으로 되는 것은 특히 미국의 독점 자본가들은 생산에서 집적시키고 집중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영역의 모든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해 들어갑니다. … 그 문화 관리가 이런 식이니까 원래 노동자계급들이 갖고 있는 창의력, 인간적인 요소, 진보적이고 참신한 것들이 사회적으로 부각될 여지는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노동자의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 또는 예술표현의 기회를 거의 빼앗아버립니다. 그 대신 순수미술, 순수음악, 이런 형식을 제공해서 그것이 마치 모든 문화의 핵심적인 가치인 양 인식토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9)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인 문화는 그 경제적 토대의 파생물인 동시에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역할을 수행해낸다. 대다수의 노동계급은 심각한 빈곤에 경제적으로 시달리고 있고 생계유지만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문화 소비를 강요받는다. 오락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creation’을 ‘re-creation(재창조)’로 파자(破字)할 수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20) 노동자 계급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소비자 ‘대중’으로 전락하게 된다. 노동계급이 진보적인 문화 생산의 담지자로 올곧게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철폐하는 사회주의 혁명과 문화운동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이와 관련해서 혁명기 이후의 문화변혁과 관련한 과거의 유산을 찬찬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은 문화․예술적으로도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은 광활한 땅에서 격변을 일으켰다. 여기서 클라라 체트킨이 회상한 레닌의 발언을 인용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 예술과 교육 그리고 육아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체트킨을 비롯한 3명의 여성의 대화에 레닌이 끼어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쏘비에뜨 러시아에서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창출하는데 있어 새로운 세력을 일깨워 이들을 동력으로 삼는 것은 좋은 것, 아주 좋은 것입니다. (중략)

혁명은 지금까지 족쇄가 채워졌던 모든 세력들을 해방시키며 삶에 침잠해 있던 그들을 표면으로 끌어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그림, 조각, 건축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기호와 변덕뿐만 아니라 짜르 궁정의 유행과 충동을 봅시다. 사적 소유에 기초한 사회에서 예술가는 시장과 고객의 필요에 따라 작품을 생산합니다. 우리의 혁명은 이러한 극히 따분한 조건 즉 멍에로부터 예술가들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혁명으로 국가를 이들의 옹호자이자 주문을 내리는 고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모든 예술가와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 자유롭게 창작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산주의자이며 게으르게 대기해서도 발전을 저해할 무질서를 허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입안된 계획에 따라 이 과정을 조종하고, 결론을 도출해야 합니다. (중략) 왜 참다운 미(美)에 등을 돌리고 ‘오래되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심화된 발전을 위한 출발점을 내던지나요? 헛소리! 시시한 허튼 소리입니다! 순전히 위선이 넘칩니다. 서구를 지배하는 유행 예술에 대한 무의식적 복종이 많은 것도 물론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혁명가들입니다만 어쨌든 ‘현대 문화에 일정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 또한 증명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나는 감히 스스로를 ‘야만인’이라고 선언합니다. 나는 표현주의, 미래주의, 입체주의, 그리고 천재 예술가들의 고상한 발표와 여타의 다른 ‘주의(isms)’에 대해서 거리가 멉니다. 나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것들로부터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중략)

예술은 인민들의 것입니다. 그것의 뿌리는 바로 근로대중의 한 가운데 깊이 심어져야 합니다. 인민대중이 그것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술은 인민의 감정, 사고, 그리고 의지를 통일하고 고양시켜야 합니다. 예술은 인민들 속에서 예술적 재질을 발전시키고 행동을 촉발시켜야 합니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은 검은 빵을 필요로 하고 있는 데 몇 안되는 소수에게 맛있는 케이크를 대접해야 합니까? (중략)

예술을 인민에게 보다 가까이 가게 하고, 인민을 예술에 보다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전반적인 교육적‧문화적 수준을 제고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중략)

예컨대 오늘 만 명이, 그리고 내일 또 다른 만 명의 사람이 모스끄바 극장의 훌륭한 공연에 깊은 감명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백만의 인민은 자신의 이름을 쓰는 법과 셈하는 법을 배우려 애쓰고 있으며, 지구는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것, 그리고 세계는 마법사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이 지배한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한 문제 어떻게 계산을 하는지를 배우고 싶어합니다.

(중략)

그러나 나는 어떤 미술 전시회에서 가장 훌륭한 전시품을 보는 것보다 오직 어떤 오지 마을들에 몇몇 초등학교를 세우는 것이 더 기쁩니다. 대중의 전반적인 문화적 수준의 향상은 쏘비에뜨 예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킬  강력하고 무진장한 역량의 훈련을 위해 필요한, 건강하고 견고한 토대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이곳에 문화를 확립하고 유포하려는 우리의 열망은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진지한 작업과 나란히, 우리의 자원과 정력을 엄청나게 소모시키는 유치하고 미숙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창조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자연과 사회에서의 낭비를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 이래로 문화혁명의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들, 즉 대중의 각성과 문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질서에 의해 생산된, 그리고 이 질서를 창조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성정하고 있습니다.21)

 

자본주의의 문화적 폐해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역설한 20세기 초 레닌의 발언을 현재의 모든 예술분석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교조주의적인 태도22)일 것이다. 레닌은 표현주의, 미래주의, 입체주의 예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적 선호의 문제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사회주의 건설 이후의 정책 집행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것을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제거하고, 현재의 모든 예술평가에 레닌의 분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를테면 레닌은 미래주의자 마야꼬프스끼의 혁신적인 형식의 시집 ≪1억 5천만≫23)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했다. 제국주의에 포위된 취약한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조건을 반영한 레닌의 발언과 조처를 역사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24) 마야꼬프스끼 뿐만 아니라 여러 혁신적인 형식의 예술가들이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또 레닌이 ‘이해하지 못한다’며 매우 비판적으로 언급한 입체주의에 대한 시각도 재검토해야 한다. 입체주의 회화를 개척한 빠블로 삐까쏘(Pablo Picasso)를 작품이 비싼 가격에 팔린다는 이유만으로 자본주의의 수혜자로써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에스빠냐 내전 당시의 학살을 고발한 게르니까(Gernica)와 6‧25 전쟁 당시 미국의 민간인 학살을 폭로한 코리아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과 위대한 걸작은 숭고한 인류애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웅변해 냈다. 또 1950년 스딸린 평화상을 1962년에는 레닌 평화상25)을 수상하였지만, 1967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 일관된 노선을 견지하였다. 사회주의 현실주의의 원칙을 경직된 방식으로 적용한다면 입체주의라는 창작 방법을 부르주아적인 형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작물의 ‘특정한 형식’ 때문을 근거로 하여, ‘사회주의 현실주의를 올바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지나친 것이다. 그러한 언명은 혁신적인 방법과 형식은 대개 노동자계급보다는 지식인 계층과 친화력이 있다는 측면에서 전적으로 그릇된 지적이라고만 할 수만은 없다.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예술창작가 간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격차를 끊임없이 줄여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26) 그러나 작가의 세계관이 어떠한지, 또 그것을 작품에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는지, 그리고 세계관과 그 형식이 올바르게 조응하고 있는지 여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특정한 형식을 선험적으로 승인하거나 배제하는 것에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며 그것은 특수한 시기에 한정되어야 한다.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레닌의 조치를 현재에도 모두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은 리얼리즘에 대한 기계적인 적용이다. 그리한다면 20세기 사회주의 사회의 예술가들에게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불행한 사건들을 다시 반복하게 될 위험성조차 있는 것이며, 혁명의 선배들의 유산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레닌의 발언의 핵심은 지금도 빛을 바래지 않고 있다.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향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를 지양해, 절대 다수의 근로인민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에도 올바른 명제다. 혁명은 근로인민 대중이 문화를 풍부하게 향유해내게 하고 또 진정한 문화 창조의 주체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치열하게 전진하는 과정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이면서 동시에 실물적인 계급투쟁의 전장이다.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장치로 노동자계급을 장악하는 기술은 점점 혁신되고 있고 그 영향도 전면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이윤 창출을 위한 산업의 하위 파트너이며 피라미드식 위계에 자리한다. 음반제작이나 출판 같은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은 군수산업을 정점으로 한 초국적 자본에 거의 대부분 포섭되게 된다. EMI를 보라. 한국에서도 군수품을 암암리에 생산하며 초국적인 독점자본의 후발주자로 나서고 있는 재벌들이 어떻게 문화 산업을 기업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출판계를 장악하고 있는 시공사는 척결되지 않은 군사파쇼잔당 전씨 일가의 소유물이다. 독점 자본의 문화산업에 대한 포섭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며 그것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지배를 더욱 더 공고하게 한다. 심지어 진보적이며 양심적인 것으로 알려진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의 지배전략을 위한 도구가 된다. CIA가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해 문화를 주요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CIA가 출판물에 후원을 한 인사들 중에 조지 오웰, 한나 아렌트, 이사야 벌린 같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저명한 지식인’들을 두루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CIA 자금을 받은 이 지식인 집단의 특히 기묘한 점은 그들의 정치적 당파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치 자신들이 공평무사한 진리의 탐구자, 우상파괴적 인본주의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지식인, 혹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가들인 체 하면서, 스스로를 스딸린주의 정치기관의 “이념에 헌신하는” 타락한 “노역자들”(corrupted “committed” house “hacks”)의 반대편에 위치시켰다는 사실이다.

(중략)

미국과 유럽의 민주적 좌파의 반스딸린주의의 수사적 외침, 그리고 그들의 민주적 가치와 자유에의 신념에 대한 선언은 서구의 가증스러운 범죄에 대한 유용한 이데올로기적 포장이었다. 다시 한 번,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나토의 최근 전쟁에서, 많은 민주적 좌파 지식인들이 몇 만이나 되는 쎄르비아인들에 대한 유혈 학살과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살해에서 나토 및 KLA27)와 한 패가 되었다. 만약 반스딸린주의가 냉전 동안 민주적 좌파들의 아편이었다면, 인권 간섭주의는 오늘날 똑같이 마취제의 기능을 하면서 동시대의 민주적 좌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28)

제국주의의 지배를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사적 유물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문화운동은 부문의 영역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동계급과 함께 투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부단한 혁신의 노력과 예술에 있어서 치열한 실험이 동반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그러하기에 문화라는 한 영역 그 자체를 독립화 해서 ‘문화운동’만을 ‘닫힌 상상력’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특권화하려 한다면 오히려 ‘부족한 상상력’을 갇히는 것이다. 문화와 사적 유물론과 간련한 기본 원칙은 마오쩌둥이 간결하며 명확하게 진술한 바 있다.

 

일정한 문화(관념형태로서의 문화)는 일정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반영이며 그것은 또 일정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며 크나큰 작용을 한다. 그리고 경제는 이러한 문화의 토대이며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인 표현이 된다. 이것이 문화와 정치, 경제와의 관계 및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견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형태의 정치와 경제가 먼저 그 일정한 형태의 문화를 결정하며 그런 다음에야 일정한 형태의 문화가 다시 일정한 형태의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주며 작용을 하게 된다.29)

 

과거의 이론적 유산을 학습하여, 사적 유물론을 문화‧예술에도 일관되게 적용한다는 것은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엥엘스가 “1890년 10월 27일에 베를린의 콘라트 쉬미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명확히 한 바 있다.30) 또 중국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루쉰도 짧지만 탁월한 내용으로 표현한 바 있다. “혁명은 피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피는 쉽게 지워지고 읽기가 어렵다. 여기에 문학의 필요성이 있다.” 혁명과 예술은 단선적이거나 위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대화하며 침투하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하기에 더욱 더 과학적인 예술관과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영화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 삐딱하게 보기

 

쿠바 혁명기 이후의 음악에 대해 서술하기 이전에 쿠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필자의 좁은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한국의 노동계급 동지들은 쿠바 혁명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을 지라도 쿠바의 음악에 대한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으며, 대다수의 한국 인민들에게 쿠바 음악은 생소할 것이다. 룸바(Rhumba), 차차차(Cha-cha-chá), 살사(Salsa), 맘보(Mambo) 등의 춤곡을 떠올리거나 아프로 쿠반 음악(Afro-Cuban Music)까지 떠올린다면 그래도 충분한 사전지식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고 뮬라또(mulato)와 메스띠쏘(mestizo)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쿠바는 일종의 문화적 점이지대로 끄리오요(Criollo)문화를 형성하였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의 육감적인 리듬과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역의 낙천적인 음악이 결합된 것이 아프로 쿠반 음악이다. 쿠바 음악의 원천은 거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에스빠냐의 낭만적인 가요와 록과 재즈 및 랩과 힙합을 비롯한 영미의 대중음악의 요소를 자기화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쿠바 인민이 누리는 대중음악은 개별 장르들이 형식적인 결합하고 있는 혼합물이기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인 독립 투쟁과 사회주의의 건설과정이 촉매를 이루고 있는 화합물이다.

빔 벤더즈(Wim Wenders) 감독과 라이 쿠더31)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영화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은 쿠바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입문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은 국내에서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으며, 영화에 출연한 주요 음악가들의 한국공연이 성사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주요 등장 인물들은 현재 대부분 사망하였기에 여러 애호가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영미 음악 중심의 문화제국주의적 편향을 벗어나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찬사를 던지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분명히 있다. 이 영화에 딴죽을 거는 것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쿠바 혁명이후 쿠바를 떠난 반혁명 세력들은 미국 마이애미에 제 2의 안식처를 마련하였고 그곳을 쿠바 탈환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쿠바를 적대하며 심지어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 같은 영화와 현재 쿠바의 대중음악도 부정하고 있다. ‘살사의 여왕’ 쎌리아 크루쓰32)나, 라틴팝을 세계화했다는 평을 듣는 글로리아 에스떼판(Gloria Estefan)33) 같은 미국 국적의 쿠바출신 가수들은 노골적인 반(反)까스뜨로, 반쿠바 선전의 선봉에 있다. 이들을 비롯한 반쿠바 예술가들은 쿠바 정부의 유화적인 몸짓에도 불구하고 쿠바 입국공연을 거부해왔다.34) 그러니까 쿠바 현지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은 간접적으로 쿠바 혁명을 지원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고 추측할 수 있다. 또 영미의 주류 대중음악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있는데 영화가 ‘월드 뮤직(World music. ‘세계 음악’으로 직역하기도 한다)’이라는 이름으로 쿠바 음악을 우호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는 제국주의적인 시각과 메씨지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영화에 나오는 쿠바의 노년의 거장들의 관록이 담겨있는 연주활동은 꿀처럼 매력적이지만, 그 속에는 칼이 숨겨져 있다. 영화 홍보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따라 다닌다. ‘쿠바 혁명 이후 이들 음악인들은 제대로 된 음악활동 기회도 갖지 못하고 묻혀있을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영화 내에서 직설적인 표현은 등장하지 않으나 은연중에 저의는 드러난다. 그것은 미국과 서유럽인들의 시각에 의한 잘못된 비난이다. 영화의 제목이며 주요 등장인물들이 회상하는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은 쿠바 혁명전에 있던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과 상류층을 위한 사교클럽이었다. 당시엔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독재정권에 대다수의 인민들이 신음하던 시대였고 그러한 종류의 사교클럽35)은 성매매와도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당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의 성매매 여성의 숫자는 1만에 달했으며, 쿠바 전역에는 3만에서 4만 정도로 달했다.36) 아바나는 미국의 ‘단골손님’이 자주 찾아드는 ‘휴양지’였고 카리브 해의 파리로 불리는 휘황찬란한 도시였다. 엘리아데 오초아37)가 12살 때(쿠바혁명전인 1958년)가 사창가에서 기타를 치던 시절을 회상하는 고백이 영화에 등장한다. 그런 식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가난하고 교육받기 힘든 쿠바인민이 생계를 위한 수단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교클럽에 드나들 수 있는 특권층에게 또 사창가의 단골손님들에겐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 있던 당시가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소수의 특권계급을 위한 사교클럽을 폐쇄하는 것은 혁명정부로서 마땅히 수행해야할 임무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그로 인해 음악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도 쿠바혁명의 대의에 공감함은 영화 곳곳에서 읽어 낼 수 있다. 또 주요등장 인물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엘리아드 오초아 같은 인물은 쿠바 혁명 이후의 음악기관인 까싸스 델라 뜨로바(Casas de la Trova)38)과 오랜 기간 교류를 갖고 활동한 인물이기에 혁명이 곧 대중음악에 대한 억압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견해이다.

영화 비평이 주목적이 아니니 조금만 더 부연하겠다. 영화 곳곳에 제국주의적 시각이 등장하는데, 거대한 빌딩이 마천루를 이룬 뉴욕 거리를 지나는 주인공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거리에서 쇼윈도 안의 미국 대통령들의 인형을 보고 지나가던 주인공들은 그들에 대해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여하튼 ‘지도자’라고 대화한다. 그렇다. 요새와 같은 형상을 이룬 뉴욕의 부는 미국의 노동계급과 제3세계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한 결과물이며, 주인공들이 대화 중 언급하던 ‘지도자’들은 그들이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쿠바를 지속적으로 탄압하던 인물이다. 그들 중에는 케네디, 존슨, 닉슨, 레이건과 같이 군사적‧경제적으로 쿠바 혁명을 짓누르려는 제국주의의 수장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쿠바를 떠나 처음 미국을 방문한 노음악가들이 드러내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행동을 여과없이 카메라로 비추고 있다. ‘낙후된 쿠바 땅에서 썩지 말고, 미국으로 건너와야 한다. 이곳이야 말로 예술가들이 살 곳이다’라고 은연중에 선전하고 있다고 하도 지나친 비판은 아닐 것이다. 영화도 사진처럼 거짓말을 할 수 있다!39)

이른 바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도 많은 논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흔히 영미 등 주류권 음악에 대항한 개념으로 월드 뮤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 용어는 온전치 않은 것이다. 쿠바와 브라질과 같이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지닌 나라의 음악을 월드 뮤직이라고 뭉뚱그려 소개하는 것은 음악을 이해하는데 심각한 제약을 주는 것이다. 쿠바에는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 외에도 무수한 다양한 음악적 원천을 향유하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또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는 소위 ‘제 3세계 음악’이라는 저속한 편견이 담긴 용어보다는 진보적이지만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월드 뮤직’은 지극히 자본의 입맛에 맞게 구성된 용어이다. 이 용어에 대해 쿠바의 <라디오 쁘로그레소(Radio Progreso)>와 텔레비젼의 연출가이자 음악 비평가인 기예르모 빌라르(Guillermo Vilar)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만든 것으로, 세계 각국의 음악을 쉽게 분류해서 판매하기 위한 상업적인 용어이다.40) ‘월드 뮤직’을 대중적으로 알린 것은 미국 남성 포크 듀오 싸이먼 앤드 가펑클(Simon & Garfunkel) 출신의 폴 싸이몬(Paul Simon)이다. 그는 1986년 음반 <Graceland(은총의 땅)>를 발표하였다. 이 음반을 통해 ‘월드 뮤직’은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소개되었다. 이 음반은 남아프리카 음악을 중심으로 한 ‘월드 뮤직’을 대중적 기호에 맞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그 음반 판매로 얻은 이윤과 명성은 남아프리카 인민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 워너(Warner Bros)와 폴 싸이몬에게 돌아갔다. 폴 싸이몬의 음반뿐만이 아니다. ‘월드 뮤직’을 다룬 여러 음반, 출판, 영화 및 공연 등으로 인한 이익은 앞서 언급한 군산복합체에 포섭된 초국적 자본에게 돌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의 영화와 음반판매로 얻은 막대한 이윤도 쿠바인민이 아니라 서구의 독점자본가의 손에 들어갔다. 쿠바는 자본가에게 탐스럽게 보이는 문화‧예술의 보고이다. 수많은 쿠바의 음악가를 비롯한 예술가들 그리고 심지어 야구, 복싱 선수들을 쿠바 밖으로 빼내기 위한 공작이 수없이 자행되어 왔다.41) 영화에서 드러나는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 있기만 하다가는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있는 제국주의 문화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다. ‘쿠바 혁명이 이들 예술가들이 세계에 널리 알려질 기회를 박탈했다’는 잘못된 비난은 다시 말해서 쿠바 혁명 이후에 이러한 예술을 상업화하여 이윤을 남기려는 자본의 의도가 관철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예르모 빌라르 같은 이는 쿠바 음악에 대해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까지 한다.42)

영화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영화에 출연한 주인공이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대답해 주고 있다. ≪월드 뮤직: 러프 가이드≫의 필진 중 한 명인 니겔 윌리엄슨(Nigel Williamson)‘쿠바를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우문을 하자 꼼빠이 쎄군도43)는 현답으로 응한다. 그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에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대답한다. “뭐하러? 여기 평온이 있는데. 내게 필요한 건 다 있다고. 내가 왜 다른 곳에 가야 하지?”44)

 

 

게릴라 투쟁의 승리 그러나 혁명은 이제 시작이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바띠스따 독재정권과 미국을 몰아낸 쿠바인민들은 이후 단지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총체적인 사회변혁을 이끌어냈다. 혁명이후에 반혁명 세력은 척결되었다. 20세기 혁명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 과정은 폭력을 수반한 것이었다. 혁명정부가 총살한 인원은 550명이었으며 이는 체 게바라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이를 근거로 혁명의 폭력성을 비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바띠스따 독재정권은 공공연한 대로상에서, 또 감옥에서 2만이 넘는 인원을 학살하였고, 미국은 이를 비호하였다. 혁명 직후 총살된 이들은 바띠스따의 직속 암살대원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의 역사에서 실패하든 성공하든 처형이 없었던 혁명은 없었다. 바띠스따 정권을 옹호하며 전세계 도처에서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미제국주의자들은 그러한 ‘폭력’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물론 혁명의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그 과정의 폭력은 최소화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오히려 부르주아 독재정권과 반혁명세력은 먼저 폭력투쟁을 시작하며, 잔인무도한 방법을 배제하지 않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혁명 이후에도 미제국주의와 쿠바의 이전 지배계급은 쿠바 혁명을 패퇴시키기 위해 군사작전과 경제 봉쇄, 심지어 암살과 테러45)와 같은 방식까지 도입하였다. 그런데도 쿠바에서의 반혁명세력에 대한 폭력은 상당히 적은 범위에서 제한되었다. 반혁명 세력이나 테러범이라고 할지라도 재판을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46)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1996년 현재 쿠바에서 정치적 처형의 희생자가 된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며, 약 800명의 양심수 또는 정치범이 존재한다고 발표했다.47) 쿠바에서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에서처럼 민간인을 공격하는 부대가 없으며, 1967-1997년의 멕시코에서와 같은 학살도 전혀 없다. 또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의 것과 같은 고문도 없다.48)

21세기 혁명은 과거보다 적은 폭력에 의존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사형제도의 궁극적 폐지에도 동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결된 인민의 조직된 힘과 반혁명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분쇄가 필요할 것이다. 상비군과 경찰과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존재하는데 ‘비폭력 투쟁’만을 내세우며 그것을 ‘평화주의’라 우기는 것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무장해제 하겠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난무한 학살과 폭력을 기억해야 한다. 1980년 광주의 인민이 쿠데타 계엄군에 대항해 자발적으로 무장한 것은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순리였으며,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조치였다.

쿠바 혁명 직후의 사회개혁은 의식성과 자생성의 긴밀한 결합을 이룬 것이었다. 혁명 정부가 먼저 착수한 것은 주택 개혁이었다. 체 게바라가 활약했던 <국립토지개혁청(Instituto Nacional de Reforma Agraria. INRA)>과 <국립저축주택청(Instituto Nacional de Ahorro y Vivienda. INAV)>은 긴밀히 협력하였고, 주택개혁과 농지개혁은 상호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진행되었다.49) 지주의 주택을 유상몰수한 후 무주택자에게 분배하였다.50) 지주의 토지도 유상몰수 되어 농업노동자들에게 재분배되었다. 농지개혁은 소농유지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협동농장으로의 전환을 예비한 것이었다. 쿠바의 농업은 협동농장과 국영농장으로 재편되었으며51) 이에 대한 저항은 거의 없었다. 쿠바의 주택개혁은 도시와 농촌의 균형을 고려하여 진행되었다. 현재에도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세계의 다른 나라의 수도와 달리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는 쿠바의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농촌의 개발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두었던 정책과 부동산 투기를 전혀 볼 수 없는 사회주의 체제의 반영이기도 하다.52) 쿠바 정부는 특히 농어촌을 중심으로 주택개혁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실상의 무주택자와 다름없는 움집에서 생활하는 인민은 자취를 감추었다.

카지노와 같은 도박장도 폐쇄되었다. 남발되던 복권은 주택채권의 형식으로 양성화되었다. 쿠바에서 뿌리 깊은 도박을 근절하기 위해 인민을 위해 체육을 비롯한 건전한 대안이 제시되었다. 알콜중독과 마약이 거의 사라졌다. 카리브의 파리53)라 불리며 번영을 이루던 유흥시설도, 창궐하던 사창가도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의약품 가격을 비롯해 갖가지 공공요금 인하도 뒤따른 조치였다. 노동계급과 저소득층을 위한 갖가지 혁명적 정책이 집행되었다. 레오 휴버만과 폴 스위지는 쿠바 혁명 초기의 여러 혁신적인 조치를 근거로 1960년 4월에도 쿠바 경제의 성격이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언급한다. 경제에서 공공부문의 영역이 높고 정권의 경제 정책이 중앙당국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을 근거로 든다.54) 그리고 1960년 10월 쿠바를 재방문한 이들은 당시 자신들의 견해가 이제는 진부한 것이라고 언급한다.55) 그러나 이들은 ‘포괄적인 경제계획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생산수단의 국유화 정도는 높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들의 지적대로 쿠바 혁명은 역동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챠베쓰 정권도 사회주의라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성격 규정은 보다 엄밀해야 할 것이다. 쿠바 혁명이 점점 명확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1960년 4월에 사적 소유에 대한 공격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이들의 주장은 다소 앞서나간 분석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러한 쿠바 사회변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혁명 이전 쿠바의 경제구조는 지극히 대미편중적이었다. 혁신적인 조치에 분개한 미국은 대쿠바 석유 수출을 중단하며 경제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쏘련이 있었다. 쏘련은 1년에 600만 배럴의 원유를 쿠바에 공급하기로 하면서, 쿠바의 설탕을 매해 백만 톤을 구매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데,56) 이것은 호혜적인 구상무역으로 볼 수 있다. 쿠바 정부는 미국소유의 석유자본인 저지 스탠더드(Jersey Standard), 텍싸코(Texaco Inc.), 로얄 더치 쉘 (Royal Dutch-Shell Group)에 쏘련산 원유의 정유를 요청하였다.57) 1960년 6월, 이들은 정유를 거부하였고, 쿠바 혁명정부는 석유회사들을 정부관리하에 두었다. 이후 쿠바는 원유 필요량 전부를 쏘련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하여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58) 1960년 10월 초부터는 미국 기업의 국유화에 속도가 붙었다.59) 미국과의 경제전쟁은 혁명을 더욱 급진화하였다. 체 게바라는 미국의 언론인 로라 버그퀴스트(Laura Bergquis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압력이 “근본적인” 혁명을 이끌었고, “쿠바 혁명이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갈지 알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고 일갈했다.60) 쿠바혁명 초기의 성격은 반제국주의 농민혁명의 정도의 위상이었다. 그러나 국유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의 주도력이 주목받게 되었다. 국유화는 미제국주의자와 대자본가의 사적소유를 단순히 국가의 소유로 대체한 것만이 아니었다. 공장의 운영은 공장위원회 중심으로 재편이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이 실질적인 생산과정을 통제하게 되었다.61) 혁신적인 조치에는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쿠바 혁명이후 과거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 지배계급과 일부 중간계급은 탈쿠바 행렬을 벌인다. 이들은 미국 마이애미에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한다. 의사의 절반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만 4천의 아동도 쿠바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인력과 아동 빼돌리기 작전에는 카톨릭 교회도 개입하였다.62) 

 

 

혁명적 문화 건설을 위하여

 

혁명 이후에 단행된 조처는 객관적인 경제적 조건을 변혁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쿠바 혁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남성중심주의(machismo), 인종주의, 엘리트주의와 같은 문화적 병폐를 극복해야만 했다.63) 혁명정부는 이를 위해서 인민이 스스로 혁명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인민에게 지식을 전달하지 않는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의 최우선적인 조치는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었다.64) 1961년에 시작된 문맹퇴치(alfabeti-zación) 운동으로 그 해 말에는 20%가 넘는 문맹률65)이 3%로 급감하였는데, 이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얻은 놀라운 성과였다. 쿠바에서 문맹퇴치는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한 관료적인 조치가 아니라 전반적이고 통합적인 문화 수준의 고양하기 위한 총체적인 운동이었다. 그것은 의식적인 계획이 대중적인 자발성과 결합한 것으로, 전국적이며 전인민적인 거대한 운동이었다. 1961년 4월 10일 ‘문맹퇴치군(El Ejército Popular de Alfabetización. EPA)’이라 불리는 12만 명의 자원자가 문맹 퇴치를 위해 쿠바 전역으로 파견되었다. 전국적으로 캠페인이 펼쳐졌는데 ‘그래 할 수 있어’66)와 같은 긍정적인 문구들이 등장했다. 운동 관련된 전체 쿠바 인민이 125만 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67) 당시 쿠바 인구가 700만 정도였던 것을68) 감안할 때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운동과정에서 인민에게 지식을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시도들이 인민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자원 활동가의 가정방문을 통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학습이나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매체를 교육에 도입하는 새로운 방식도 등장했다. 1968년 쿠바 영화 <루씨아(Lucía)>는 문맹퇴치 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영화는 루씨아라는 같은 이름을 지닌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이중 마지막 편에서 쿠바 혁명 이후를 다루고 있다. 문맹퇴치 운동의 자원자들은 아바나에서 농촌 각지로 파견된다. 영화에서 문맹인들은 미제국주의자들의 희생자이기에,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주요한 혁명적 과제로 묘사된다. 영화에서는 여성 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배우자의 문자 학습에 적대적인 남성이 등장한다. 배우자 간의 여남갈등은 문맹퇴치를 위한 자원활동가가 가정에 파견되면서 더욱 증폭된다. 영화로 비추어 볼 때 ‘문맹퇴치군’들은 면대 면 접촉을 통해서 인민과 학습했으며, 단지 읽고 쓰는 능력만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문화와 같은 구습을 타파하는 데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혁명 이후에도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모순이 등장하지만, 음악 <관따나메라(Guantanamera)>69)에 맞춰 진행되는 전개는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 1961년 문맹퇴치 운동의 결과 쿠바의 여성은 적어도 읽고 쓰는 데에 있어서는 남성과 대등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 현재까지도 다른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높은 문맹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쿠바 문맹퇴치 운동의 승리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사적소유의 철폐 이후에도 여성해방은 결코 쉽지 않은 투쟁을 요구한다. 1970년대 쿠바의 여성들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거리에서는 혁명가, 집안에서는 반동분자”라고 비판했다.70) 사회 경제적 토대를 갖추는 것만으로 여성해방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1976년에 제정되고 1992년에 수정된 쿠바의 사회주의 헌법 4조71)는 가족과 관련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4조 36항에는 육아와 아동 교육에 있어 여남이 균등하게 자신의 역할을 분배해야 한다는 것까지 명기하며 혁신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해방의 문제는 가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것이며 법적인 조처만으로 달성할 수는 없다. 혁명 이후 단행된 과감한 토대의 변혁과 평등한 교육이 여성해방의 조건을 만들었고 여성의 지위도 많이 향상되었지만72),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보다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

인종주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반인종주의 투쟁은 전면적으로 전개되었고 혁신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네오 나치나 KKK와 같은 인종주의 극우 테러 단체는 쿠바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1973년 뉴저지 경찰을 살해했다는 누명에 연루된 블랙 팬더당(Black Panters Party)의 지도자 아싸타 샤커(Assata Shakur)는 1979년 감옥을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984년 미국에서 쿠바로 망명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쿠바에 분리된 인종지역이 없다는 것, 자유로운 의료와 평등한 교육이 집행되는 것에 놀란다. 또 밤에도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려는 다른 쿠바 사회에 감동하며 만족하지만 아직도 쿠바에 남아 있는 미세한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았다.73) 쿠바의 인종주의와의 투쟁은 세계에서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성공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인종주의의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다.

쿠바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쿠바 정부가 마치 동성애자를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탄압해온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놀랍게도 제국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도 그러한 언급을 한다. 스코틀랜드의 <사회주의 노동자 강령(Socialist Worker Platform)>의 회원인 뜨로츠끼주의자 마이크 곤잘레스(Mike Gonzalez)는 피델 까스뜨로가 “항상 동성애자를 1959년 이전의 퇴폐적인 아바나와 동일하게 간주했고, 그 뒤 40년 동안 동성애자 억압은 계속됐다”74)고 서술한다. 이에 대해 까스뜨로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쿠바 혁명 이후 병역의 의무는 전인민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사회적 편견 때문에 동성애자에게 병역을 부과할 수 없었다.’ ‘또 종교적 이유를 근거로 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있었다.’ ‘쿠바 정부는 이들과 동성애자들에게 집총이 아닌 노동의 의무를 수행케 하는 부대를 창설했고, 이러한 노동부대를 서방언론이 강제노동수용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일이 흐른 후에 이러한 노동부대는  사라졌다.’ 피델은 자신이 동성애자에 대해서 편견이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75) 그러나 자신과 쿠바 인민의 편견은 교육을 통해 많은 부분 극복되었고, 아직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쿠바 사회의 주요분야에 동성애자들이 활약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까스뜨로는 ‘동성혐오가 남성우월주의와 같은 근원을 지니며, 주로 교육받지 못한 층에서 높았다면서 교육을 통해 그러한 차별을 해결해왔다’고 한다.76)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뿌리 깊은 것이며, 동성애자가 쿠바에서도 차별의 희생자였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쿠바 정부가 이 문제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1993년 동성애와 사회주의의 문제를 섬세한 감성으로 다룬 또마스 구띠에레쓰 알레아 감독의 <딸기와 초콜릿(Fresa y Chocolate)>이 개봉되어 쿠바 사회의 동성애는 금기의 벽을 강력하게 부수어 갔다. 쿠바사회는 동성애와 성적 소수자 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도 싸워나가고 있다. 쿠바 국립성교육센터(Centro Nacional de Educación Sexual. 약자는 CENESEX.) 소장 마리엘라 까스뜨로77)는 여성과 동성애자 그리고 성적 소수자에 정책을 혁신적으로 펼치고 있다. 성전환수술도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시행되고 있다. 제국주의로 인한 풍요를 누린 서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그러한 정책이 뒤쳐진 것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 비한다면 현재 쿠바의 동성애 정책은 선진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쿠바에서는 교육이 무상으로 제공되어, 교육 접근권의 차별을 철저하게 혁파해 갔다. 1961년에는 사회주의를 먼저 경험한 쏘련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를 신속하게 파악해냈다.78) 같은 해에 국립토지개혁청(INRA)은 수천의 학생을 동유럽으로 유학 보내 사회주의 학습을 조직적으로 진행하였다.79) 당시쿠바 혁명 정부는 경제기반이 상당히 취약했지만,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우애로운 교류를 통해 효과적으로 유학사업을 추진하였다.80)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대중에 대한 전인적 교육보다는 대중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수동화‧우민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광고와 반공주의적인 선전선동으로 대중은  세뇌를 받고, 특정한 자극에 조건 반사를 하도록 교육된다. 이들의 반복되는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81) 사회주의적 교육은 이러한 수동화‧우민화를 극복해 내는 것이어야 한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다양한 연령층에 따른 노동 시간의 엄격한 규제와 아동 보호를 위한 그 밖의 예방 조처들이 수반된다면 생산적 노동과 교육(Unterricht)을 일찍 결합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를 전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이기 때문이다.”82)라고 주장하며, 노동과 교육을 통합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레닌의 노동과 교육을 통합해야 한다는 맑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화한 것이다.

 

만약 가르침, 훈련, 교육이 단지 교실에만 한정되고 생활의 자극83)으로부터 분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지주와 자본가에게 억압당하는 한, 학교가 지주와 자본가에게 통제되는 한, 청년세대는 두 눈이 멀고 무지한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84)

 

우리의 노동자‧농민이 로마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와 결코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국가의 예산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자신이 그들의 노동으로 국가를 유지합니다. 그들은 억수같은 피를 뿌리고 무수한 희생을 감내하면서 혁명을 ‘만들었고’, 그 대의를 지지했습니다. …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라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큰 규모의 대중 교육과 훈련을 최우선시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문화를 위한 토대를 창조합니다. 물론 식량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렇습니다. 이 토대 위에서, 그 내용에 상응하는 형식을 창조하게 될 진정으로 새롭고 위대한 공산주의적 예술이 태동하게 될 것입니다. 새롭고 위대한 사회주의 예술은 그것의 내용에 걸맞게 행태도 새롭게 창조되면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매우 중요하고 고귀한 일들이 바로 우리의 지식인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85)

쿠바 정부는 맑스가 말한 ‘생산적 노동’과 ‘교육’의 결합을 쿠바의 현실에 맞게 시행해갔다. 정책 시행 초기에는 학부모들의 반발을 불러 오기도 했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주로 농촌지역에서 농업 노동과 교육과정을 결부시키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것이 1968년에 추진된 45일간의 노동-교육 연계 프로그램이다. ‘학교를 농촌으로(Escuela al Campo)’라는 의욕적인 사업이 출발한 것이다.86) 1971년에는 노동-교육 연계 프로그램이 더욱 확대 시행되었다.87) 탁아소도 새롭게 개편되었다. 혁명 초기 탁아소는 노동하는 부모들을 위해 아이의 돌봄을 대신하는 소극적인 보육기관이었다. 1965년부터 탁아소는 혁명적 교육을 위한 적극적인 장소로 탈바꿈해갔다.88) 탁아소와 사회주의 교육에 대한 반공주의적 선전을 기억하는가. 아이들을 가정이 아니라 탁아소에서 키워 획일화하는 전체주의적 교육기관이며, 공산주의 교육은 아이들을 고철이나 줍게하는 강제노동 교육이라는 악선동을. 이에 대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규환 동지는 ‘제발 그런 탁아소가 하나라도 주변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비꼰다. 탁아소와 같은 보육시설의 확충과 그것의 사회‧공공적 운영은 노동하는 부모들을 위한 꼭 필요한 사회적 배려이며 여성해방의 최소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높은 지식 수준을 지닌 수많은 전문인력을 배출하여, 전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쿠바의 현재가 그러한 반공교육을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게 반박하고 있다. 2000년대의 까스뜨로는 자신감있게 쿠바의 교육을 말한다. 쿠바에는 혁명 전에 있었던 대학졸업자, 지식인, 전문 예술인의 30배가 넘는 고급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문자그대로의 문맹뿐만 아니라 기술적 문맹도 사실상 없다. 예술가와 예술교사 양성학교는 전국의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대학은 읍단위까지 설립되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이토록 거대한,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혁명은 없었습니다. 이는 쿠바를 세계에서 가장 지식과 문화가 많은 나라로 만들 것입니다.”89)

 

 

1962년 10월 위기: 쿠바 혁명의 기로

 

1961년 히론 해안 침공90)은 격퇴해냈지만, 1962년 10월 소위 ‘쿠바 미사일 위기’라 불리는 10월 위기(Crisis de Octubre)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10월 16일 쿠바에 건설된 쏘련 미사일 기지를 발견한미국은 부당한 간섭을 하였다. 10월 22일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핵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케네디의 협박이 공개적으로 펼쳐졌다.  미쏘와 쿠바는 물론 전세계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하였다. 쿠바를 둘러싼 해상은 봉쇄되었고, 쿠바는 결전의 날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긴박했다. 영화 <저개발의 기억>에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등장한다. ‘플로리다에 전투기와 군함이 증가’하고 있고 ‘케네디가 돌연 워싱턴으로 돌아왔다’는 신문 기사로 10월 위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이어 케네디의 경고가 담긴 연설91)과 원폭으로 인한 버섯구름을 비추는 텔레비전 화면이 비춰진다. 이어 거리의 무장한 인민이 시선에 들어오며,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무장하고 있다. 이어 벽에 써진 죽음(Muerte)라는 단어는 긴장감을 더욱 상승시킨다. 어떤한 조사도 단호하게 거부하겠다며,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Patria o Muerte!)외치며 끝나는 까스뜨로의 텔레비전 연설이 그대로 비춰진다. 영화는 부르주아출신 남성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긴박한 정세와 개인적인 위화감이 미묘하게 공존하면서 결말로 치닫는다. 쿠바 전역의 인민이 무장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시 쿠바 인민은 미제국주의 전쟁도발에 대한 철저하게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국주의와 언제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것은 좌경적 모험주의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10월 위기 당시 쿠바의 대응은 무모한 전쟁광의 그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부당한 핵사찰을 거부하며, 독립과 사회주의를 위해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지도하는 쏘련 수정주의자들의 미국의 압력에 한 발 물러나 버렸다. 10월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굴복은 이른바 ‘평화공존’ 노선의 부정적 측면이다. 제국주의와 불필요한 군비경쟁에서 벗어나고 전인류에 대한 핵전쟁의 위험을 줄인다는 관점에서 ‘평화공존’은 주요한 전술로써 채택할 수 있다. 제국주의와의 군비 경쟁에 말려들어간 것은 강요된 측면이 있지만 쏘련 경제에 심각한 부담이었음에 틀림없다.92) 그러나 제국주의와 뒷거래를 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발칸 반도에서 제국주의의 핵위협을 줄이기 위해서 쿠바에서 ‘양보’를 하겠다는 전술적 계산에 의한 것인데, 미국이 공정한 거래를 할 리가 만무하였다. 10월 위기 당시의 수정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을 전략으로 격상하였고, 결과는 부등가교환으로 끝났다. 단지 제국주의와 ‘기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쏘련은 쿠바의 미사일기지 철수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쿠바 인민에게 심지어 쿠바의 수뇌부에게도 어떠한 사전적인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우리가 협상에 참가했었다면, 더 유리한 협정을 맺을 수 있었을 겁니다. 관따나모에 해군 기지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고공에서 첩보비행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우리는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협정 이후에도 계속해서 저공으로 날아다니는 비행기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는 저공비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쏘련과 우리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이 일은 오랫동안 쿠바와 쏘련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93)

 

까스뜨로와 체게바라를 비롯한 쿠바 인민들은 쏘련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였다. 미국의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굴하지 않았던 쿠바인들은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세계 피억압 인민들의 쏘련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가게 되었다. 체 게바라가 타국의 게릴라 투쟁을 위해 쿠바를 떠나게 된 것도 이때의 충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쏘련의 비겁한 태도에 대해 중국의 비난이 이어졌다. 수정주의 논쟁에서 시발한 중쏘 간의 균열은 가속화하였다. 1969년에는 중쏘분쟁이 군사적 충돌로까지 이어졌으며, 전세계의 사회주의진영과 반제민족해방 진영이 쏘련과 중국의 주도권 다툼 하에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해방 투쟁의 주요한 역량이 쏘련파와 중국파로 나뉘어 분열되었다.94) 20세기 혁명사의 쓰라린 오류의 역사는 모스끄바의 수정주의자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쿠바 혁명은 그 쓰라린 배신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도를 가며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 갔다.

 

 

쿠바 혁명과 20세기 사회주의 문제들

 

쿠바 혁명의 눈부신 성과를 근거로 다른 혁명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떨까? 이하에 소개하는 까스뜨로는 발언을 살펴보자.

 

마오쩌둥은 위대한 역사적 업적을 세웠습니다. (중략)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인류 역사의 가장 빛나는 한 페이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커다란 정치적 실수들을 범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그것은 우파의 실수가 아니라 좌파의 실수, 즉 극좌적 사상이었습니다. 그런 사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법들은 ‘문화혁명’처럼 강경하고 부당했습니다. 나는 극좌정책의 결과로 후에 중국 과정에서 우익으로 선회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커다란 실수는 반대급부를 만듭니다. 극좌들의 실수는 어느 순간 우익성향과 우익 정책을 만드는 법입니다. (중략) 개인숭배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 그것을 보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95)

 

사회주의 건설의 경로는 각국마다 다르며 각각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끊임없이 굴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주의 건설의 노정에서 나타난 굴절은 한 마디로 평가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보다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까스뜨로의 마오쩌둥96)에 대한 평가는 쿠바 혁명의 성격이 지닌 독특한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전사회적 변혁이 거의 대부분 폭력에 의거하지 않고 진행된 쿠바의 현대사는 상당히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원칙을 견지함과 동시에, 설득과 동의를 통해 인민대중과 함께 새로운 사회주의적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타당하다.97) 또한 문화혁명의 극좌적 오류가 우익 수정주의자들의 반격을 초래했다는 까스뜨로의 분석도 타당하다.98) 그러나 수정주의와 관련한 논쟁이 대외적으로도 대내적으로도 첨예하게 전개된 중국과 쿠바는 분명히 다른 조건에 처해있었다. 쿠바에서 거의 무혈에 가까운 혁명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다른 나라와 다른 쿠바의 조건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문화혁명 당시에 홍위병의 폭력보다, 문화혁명을 주도한 조반파(造反派)를 진압하기 위한 주자파(走資派)의 폭력이 더욱더 거대하고 심각한 것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사회주의 건설과정의 폭력 문제는 그 시기의 구체적인 정세를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쏘련의 농업재편은 폭력적인 것이었는데, 유혈적인 계급투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99) 반면에 쿠바에서는 대중적인 반발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쏘련이나 중국과 달리 민족부르주아 소규모였고, 쿠바의 부르주아지의 다수가 미제국주의자이거나 그들과 결합한 대자본가였다는 조건에 기인한다.100) 혁명 이후에 내부적인 계급투쟁이 보다 덜 심각했다는 점은 다른 20세기 혁명과 다른 쿠바 혁명의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폭력에 대해 비판하는 까스뜨로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펼치고 있는 것도 주목해 봐야 할 것이다. 피델의 언급은 쏘련의 ‘패권주의’를 비판한 중국101)의 쏘련 비난과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 ≪르몽드 디쁠로마띠끄(Le Monde Diplomatique)≫의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의 질문과 까스뜨로의 답변을 그대로 인용한다.

 

문: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탱크들을 프라하에 임성하도록 허락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쿠바혁명의 동조자들은 그런 결정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답: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반혁명적 상황, 즉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역사는 우리의 그런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곳뿐 아니라 사회주의 영역에서 일어나던 모든 자유주의적 개혁에 반대했습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중상주의적 관계를 강조하는 일련의 조치들, 즉 이윤과 소득, 수익과 물질적 자극을 비롯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강조하던 정책에 반대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무력을 파견해야 한다는 괴로운 필요성을 받아들였고, 그런 결정을 한 사회주의 국가들을 규탄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런 사회주이 국가들이 시종일관해야하며, 세상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경우에는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제시된 최초의 문제들이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고, 따라서 반대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통치방법과 관료주의적 정책 그리고 대중의 분리에 대한 비난은 두말할 것 없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런 정당한 구호를 잊어버리고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가슴 아프게도 군사 개입을 승인해야 했죠.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힘을 모으고 단결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102)

 

그리고 까스뜨로가 언급하고 있는 개인숭배에 대한 언급도 예민한 주제이다. 오랜 논란이 된 주제이지만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인 만큼 더욱 섬세하게 다루어야 할 쟁점이다. 개인숭배의 ‘원흉’으로 스딸린103)이 가장 먼저 거론된다. 소위 스딸린주의자104)로 분류되는 문예이론가 쿠와하라 코레히또(藏原惟人)는 스딸린에게 ‘여러 가지 결함’이 있었으며, ‘정책에서도 허다한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만년에는 개인숭배를 극단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묵인하고, 과오를 범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숙청하려했던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개인숭배 비판’은 맑스-레닌주의적 혁명의 원칙마저 청산하려는 방침이라고 전면적으로 비판한다.105) 까스뜨로와 체 게바라는 흐루쇼프의 스딸린 비판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도 그 영향을 받아 ‘개인숭배’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는 흐루쇼프의 영향력이 일정하게 작용한 것으로 봐야 것이다. 물론 두 혁명가는 평생 원칙적인 투쟁으로 헌신한 사회주의자이며 수정주의 노선으로 일탈한 일은 결코 없다. 또 쿠바에서 피델 까스뜨로에 대한 공식적인 ‘개인숭배’가 없는 것106) 그리고 명백히 반혁명적인 것이 아닌 이상 그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게 이루어진다는 것107)은 놀랍고 위대한 혁명의 성과이며 우리도 지향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그런 쿠바에서조차 이른바 ‘개인숭배’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쿠바 역시 20세기 여러 사회주의 국가에서처럼 핵심적인 혁명가의 지도력에 많은 부분 의존하였다. 체 게바라와 까스뜨로가 없는 쿠바 게릴라 투쟁의 승리는 가능하지도 않았고, 위대한 지도자가 없이는 혁명 정권의 유지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오류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한계이다. 한편에서 제국주의자들이 까스뜨로에게 세계 최장기 독재자라는 낙인을 새겨 놓았을 정도로, 쿠바에서 혁명의 사령관에 대한 의존이 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쿠바에서 살아 있는 지도자에 대한 공식적인 ‘개인숭배’가 없다지만 죽은 체 게바라에 대해 보내는 인민의 ‘경의의 흔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레닌과 호찌민과 같은 죽은 지도자들에게 행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 쿠바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까스뜨로 사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장담하기는 힘들다.108) 우리의 과제는 21세기 혁명에서 20세기에서 나타났던 소수의 혁명 지도자에 대한 의존을 대폭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20세기 혁명도 소수의 혁명가의 투쟁이 아니라 다수의 계급대중의 능동적인 참여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혁명의 수뇌부의 역할이 비대하였고 이것은 수뇌부에도 혁명의 전진에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전위와 대중의 긴밀한 결합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당과 계급은 보다 밀접하게 소통해야 한다. 문제는 ‘개인숭배 비판’으로 해결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숭배’의 물적토대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빅또르 하라와 쿠바 혁명

 

칠레 누에바 깐씨온(nueva canción)의 영웅 빅또르 하라는 “예술가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그 본질 자체로부터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 위대한 소통능력 때문에 예술가는 게릴라만큼이나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109)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을 삶에서 실천으로 입증하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노동하는 기타(guitarra trabajadora)’라 부르던 그 시대에 가장 대중적인 가수였다. 칠레의 전통 정서와 당시 젊은 층의 외래 문화적 성향까지도 체화해냈고 기타라는 단순한 악기와 인간의 목소리라는 최소한의 조합으로 칠레 인민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권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에는 ‘빅또르 하라(Víctor Jara)’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로부터 시의 소통 능력을 배웠고 자신의 노래로 대중을 설득하였다. 그의 노래는 정치적 연설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그의 말처럼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다.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110)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그를 알아본 군인들이 ‘위험인물’인 그를 살려두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체육관에서 다른 5천명의 칠레 인민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중에도 “칠레 스타디움(Estadio Chile)”이라는 곡의 작사를 하였다. 그것은 칠레의 인민연합 정권의 패배를 알리는 장엄한 비극이며, 죽음에 굴하지 않았던 숭고한 투쟁의지의 승리이다.

 

하지만 갑자기 양심이 나를 깨우고

심장 박동은 없고 기계의 재깍거림만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이네

군인들이 온화한 엄마 얼굴 같은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네

멕시코, 쿠바 그리고 이 세상은 뭘 하고 있나?

이 뻔뻔함에 대해 그대들이 외처주기를!

우리의 손은 만 개나 되지만 그 손은 이제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가 없어

이 나라 전체를 합하면 우리는 몇이나 될까?

대통령 동지의 피는 폭탄과 기관총보다도 더 세게 우리를 내려치고

그렇게 우리의 주먹은 다시 내려치게 될 것이네

 

노래는 내게서 얼마나 힘겹게 새어나오는가!

두려움을 노래해야 할 때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두려움,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이 두려움을.

침묵과 외침만이 지금 이 노래의 목적이 되는,

무한 속의 수많은 순간들에 놓인 나를 직시하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고

내가 느꼈던 것, 그리고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순간들을 탄생시키리라

 

Pero de pronto me golpea la consciencia

y veo esta marea sin latido

y veo el pulso de las máquinas

y los militares mostrando su rostro de matrona

llena de dulzura.

¿Y México, Cuba y el mundo?

¡Qué griten esta ignominia!

Somos diez mil manos

menos que no producen.

¿Cuántos somos en toda la patria?

La sangre del compañero Presidente

golpea más fuerte que bombas y metrallas.

Así golpeará nuestro puño nuevamente.

 

Canto, qué mal me sales*

cuando tengo que cantar espanto.

Espanto como el que vivo

como el que muero, espanto.

De verme entre tantos y tantos

momentos de infinito

en que el silencio y el grito

son las metas de este canto.

Lo que veo nunca vi.

Lo que he sentido y lo que siento

harán brotar el momento…111)

 

이런 빅또르 하라의 삶은 쿠바 혁명과 깊은 유대 관계 속에서 이루어 졌다. 1960년 쿠바에 빅또르 하라의 쿠바 공연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빅또르 하라는 쿠바에서 2, 3주간 체류하면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며, 변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원하던 까스뜨로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체 게바라와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112) 1972년 칠레 아옌데 인민연합 정권 집권 당시 빅또르 하라 가족은 쿠바를 재방문한다. 빅또르 하라는 혁명 이후의 쿠바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 운동을 하고 있던 가수들을 만났다. 빅또르 하라는 쿠바 씨에라 마에스뜨라(Sierra Maestra)의 농민, 학생들의 자원활동 단체에 참가하였다. 또 후안 하라는  현대무용학교 단체113)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의 쿠바혁명은 상당히 안정되었고, 새로운 사회적 기반과 혁명세대를 만들어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안은 그곳의 학생들은 오직 재능만으로 뽑혔고,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입학 이후 경제적인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부모가 노동하러 나간 이후에도 보육 전문가들과 탁아소가 있기에 아이들의 양육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야외 미술관을 들러보면서 쿠바 혁명의 활기를 몸소 체험했다. 발레 무용가, 배우, 교사들도 사탕수수 수확기에는 당연히 농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미국의 히론 해안 침공과 같은 침략에 대비한 병역의무도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점 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114) 

 

 

문화‧예술, 혁명의 매개체가 되다

 

쿠바 혁명의 문화적 파급 효과는 대단했다. 그것은 단지 쿠바 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유례없는 단결을 가져다주었다. 쿠바 혁명의 물결은 남미 전역을 휩쓸어 지식인․예술가 집단에서 강력한 호응을 얻어 새로운 문화적 공간의 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은 경제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쿠바에 연대를 보내는 작가와 지식인들은 자신의 직위를 그만둘 각오를 해야만 했다.115) 하지만 쿠바의 문화‧예술 투쟁의 강력함은 그러한 봉쇄로도 깨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의 혁명이 전통과 문화유산을 파괴한다고 선전한다. 제국주의자들의 악선동과 세간의 편견과 달리 오히려 쿠바 사회주의 혁명은 전통문화의 유산을 모두 부정하지 않았다.116)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혁명적 문화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혁명적 문화는 과거에서 계승해야 할 전통을 찾아내고,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구습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계급대중과 전문가의 결합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이어져야만 한다.117)

1959년 혁명 직후 아이디 싼따마리아(Haydée Santamaría)와 같은 문인들의 주도로 <아메리카의 집(Casa de las Américas)>118)이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혁명의 예술적 성과를 카리브 해역과 남미 전역 및 전세계에 보급하려는 창구로서 역할을 하였다. 문학, 미술, 음악, 출판, 연극 등 제반 문화 활동을 지원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결속을 위한 사회‧문화적 토대 마련을 시도했고,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 보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시인 파야드 하미스(Fayad Jamis)와 로베르또 페르난데쓰 레따마르(Roberto Fernández Retamar)의 음유시 창작 활동은 <아메리카의 집>과 깊은 연관성을 맺은 것이었다. 하미스는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직접 불렀다. 1966년 젊은 예술인들이 모여 미국을 풍자해 붙인 이름의 월간지 ≪수염난 악어≫119)를 창간했다.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그들은 시와 음악의 만남을 추구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이후 이 잡지는 쿠바 신음유가요 운동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예술 지원 정책의 일환으로 아바나에 <영화 예술 및 영화 산업 연구소(Instituto Cubano de Arte e Industria Cinematográficos. ICAIC)>를 설립하고 여기에 예술가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는 미국의 쿠바 봉쇄 정책에 맞서 쿠바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문화 기관을 연결하는 교량이었다. 이곳에 라틴 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초청하여 창작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였다. 덕분에 미국의 고립화 기도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 활동의 메카로 떠오르게 되었다. <영화 예술 및 영화 산업 연구소>의 설립으로 또마스 구띠에레쓰 알레아와 움베르또 쏠라스와 같은 거장들이 탄생하였다. 이들 감독들은 쿠바 영화사와 20세기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만들어 냈다. 쿠바의 영화 정책의 성공으로 다른 나라의 영화 감독들도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국제학교(Escuela Internacional de Cine y Televisión. EICTV)>에서 공부하고 있다. 아바나에서는 <새로운 라틴 아메리카 영화 국제 페스티벌(Festival Internacional del Nuevo Cine Latinoamericano)>도 개최하여 쿠바와 라틴 아메리카의 성과를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또한 쿠바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의 연대기구(Organización de Solidaridad con los Pueblos de África, Asia y América Latina : OSPAAAL)>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제3세계의 민중들과 폭넓은 정치적, 문화적 연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그를 위해 필요한 정치 선전사업도 벌이고 있다. 쿠바의 정치 포스터는  쏘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형식상 특이한 점은, 1966년에서 72년 사이의 발전기를 거치는 동안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카리브적 정열을 반영하는 색채와 구도, 그리고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작가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모더니즘적 양식이나, 심지어는 사이키델릭 양식120)까지 그대로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쿠바는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모더니즘을 배척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자와 제국주의자들이지 추상미술이 아니다”라는 까스뜨로의 말은 그런 상황을 입증해준다.121)

쿠바의 정치 포스터에서 보인 전술적으로 유연한 태도는 쿠바의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드러난다. 헐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지루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관객에게 의문을 제시하게 하는 방식을 필요했다. <저개발의 기억>의 또마스 구띠에레쓰 알레아 감독은 프랑스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영화의 시도를 배격하지 않고 형식 실험과 정치적 명징성을 함께 추구하였다. 영화에서는 포로노그래피 반대하기 위해 그 영상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매번 똑같은 화면을 반복하는 자본주의 영화의 인습성을 등장인물의 대사로 비꼬기도 한다. 감독이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 시도도 감행한다. 122) 움베르또 쏠라스의 <루씨아>에는 싸이키델릭한 영상이 등장하여 ‘전형적인’ 사회주의권의 영화와 다른 접근 방법을 보여준다. 음악에서 싸이키델릭 양식은 주술적인 목소리, 단순한 주제의 반복과 특정한 인상을 주는 소리의 왜곡과 증폭을 특징으로 한다.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기능과 화면 편집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왜곡된 영상으로 관객 앞에 제시되며, 혁명 이전의 퇴폐적인 과거를 비판하는 의도로 활용된다. 영미의 싸이키델릭 양식과 달리, 개인의 정신적 초월을 추구하지 않으며, 환각과 마약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 이후를 묘사할 때는 일그러진 영상이 아니라 지극히 낭만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대조를 이룬다.

쿠바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예술가와 전문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와 다른 역할을 한다. 쏘련에서처럼 쿠바의 예술가와 전문가들도 거의 대부분 근로인민대중 출신이다.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기꺼이 쿠바 인민에게, 또 쿠바의 국경을 넘어 전세계의 인민에게 돌려주길 주저하지 않는다. 쏘련과 쿠바의 차이도 있다. 쿠바에서 예술가 및 의사와 같은 전문가들과 다른 직업군의 대우는 큰 차이가 없으며, 약간의 별도의 혜택을 받을 뿐이다.123) 반면에 쏘련에서는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쿠바에 비하면 ‘충분한’ 대가를 마련해주었다.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사회주의 사회의 음악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수 성공한 예술가의 그것과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한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봉급과 주택은 물론 코카서스와 크림 등 휴양지로 창작휴가까지 떠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도 하였다.124) 유명 작가에 대한 대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명 작가들의 별장을 방문한 외국의 문예 활동가들은 놀라움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한편에서는 쏘련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적 자극’을 제거하는 것은 쏘련 사회주의를 취약하게 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125) 다른 한편에서는 미하일 숄로호프 같은 작가도 이제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여 인민의 생생한 삶을 다룬 글을 작성하지 않기에, 이제 쏘련의 문학작품은 소수민족 작가들의 것에서 그 혁명적 정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 된 적이 있는데,126) 그것은 전자와는 상반된 견해이다. 한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여러 예술가와 전문가들이 탈한국 망명자가 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혁명에 대한 중대한 위험요소가 될 것이다. 혁명 이후의 예술가와 전문가들을 어떻게 육성할 것이며, 이들에게 어떠한 대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한다. 과거 사회주의에 대해 충분한 분석하지 않고 청산주의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배워야 할 교훈과 버려야 할 것들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도 취약한 구조가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누에바 뜨로바: 쿠바 혁명음악의 정수

 

쿠바 혁명이 다채로운 음악 유산의 보고와 같은 쿠바음악을 단순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사실은 정반대다. 쿠바 혁명은 다양한 음악적 전통을 근거로 하여 음악적 풍요로움을 극대화시켰다. 쿠바의 일상은 음악 그 자체이다. 옷을 차려 입고 연주회에 갈 필요도 없이 그냥 밖에 나가기만 하면 곳곳에서 활력이 넘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127) 이는 쿠바가 노동을 한 이후에 충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쿠바에서는 거리에서 청소를 하는 여성노동자도 잠시 일을 멈추고 길거리 음악을 들을 여유를 즐긴다.128)

쿠바 혁명은 과거에 누리던 다채로운 음악 유산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적 음악 양식을 창출해냈다. 그것이 바로 혁명과 함께 탄생한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129)다. 에스빠냐어로 Nueva(누에바)는 ‘새롭다’라는 뜻의 형용사이고, trova(뜨로바)는 ‘시가’라는 뜻으로 ‘음유시인’을 뜻하는 명사 뜨로바도르(trovador)의 어근이다. 따라서 누에바 뜨로바를 직역한다면 ‘신음유가요’정도가 될 것이다.130) 누에바 뜨로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쿠바의 뜨로바 전통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뜨로바 전통은 어원에서 드러나듯 방랑자의 음유가요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유럽 중세의 담시문학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131) 뜨로바도레(trovadore)라 불리는 떠돌이 음유시인들은 20세기 초 쿠바 전역을 유랑하며 기타를 중심으로 자유분방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 음악적 내용은 시적인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주의적 정서와 낭만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뜨로바 도레스까(trova- doresca)라는 20세기 초반 음악에 기반을 둔 노래도 있는데, 그것은 기타 반주를 바탕으로 하고 내용이 아주 시적이다.132) 자칫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현실도피적인 음악이 될 수도 있던 뜨로바 음악의 전통은 쿠바 인민의 투쟁역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되었다.

에스빠냐에 대한 투쟁기에도 뜨로바 음악의 전통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씬도 가라이의(Sindo Garay) “라 바야메싸”133)는 1868년 시작된 대(對)에스빠냐 ‘10년 독립전쟁’의 상징인 노래이다. 쿠바인은 음악이 없이 한 시도 살아가기 힘든 민족이다. 쿠바인들은 전쟁 중에도 이 전투곡에 몸을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134) 1930-40년대 마차도 독재정권 시절에 호세 마르띠의 시에 호쎄이또 페르난데쓰(Joseíto Fernández)가 곡을 붙인 ‘관따나메라(Guantanamera)’135)가 등장하었다. 당시 <라 보떼구이따 델 메디오(La Boteguita del Medio)>136)라는 까페는 비판적 음악인과 문인을 비롯한 예술인이 자주 모인 저항적 예술의 근거지였다. 이 시기에 뜨로바는 고독한 방랑자의 노래에서 좀 더 구체적인 현실적인 색채를 띤 예술로서 질적 전환을 한다. 훗날 까스뜨로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혁명적 시인이자 음악인인 까를로스 뿌에블라(Carlos Puebla)를 비롯한 뜨로바 가수들이 이 까페에서 잦은 공연을 갖기도 했다. 새로운 음유가요라는 뜻을 지닌 누에바 뜨로바는 우선 형식적 측면에서 뜨로바의 전통을 현대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형식적인 혁신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쿠바 혁명을 거치며 1960년대 이후의 체험이 음악 곳곳에 체화된 새로운 음악 양식이자 음악 운동이다. 이것은 쿠바만의 독자적인 산물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 누에바 깐씨온(nueva canción), 칸또 누에보(canto nuevo), 깐싸웅 노바(Canção Nova)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은 ‘모두 새로운 노래’라는 뜻의 음악 운동을 지칭한다. 이름의 유사성에서 알 수 있듯이 누에바 뜨로바는 남미대륙의 저항적 노래 운동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였다. 누에바 뜨로바를 음악 내적으로 보면 시적 전통의 유산을 물려받았기에 가사에 상당한 주안점을 둔다. 즉 그것은 노래로 부르는 시이다. 그러나 음악 형식적으로 손(Son)137)의 영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작곡자와 연주자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영미의 포크 음악과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 밥 딜런(Bob Dylan) 등 당대의 미국의 진보적 저항가수의 음악적 영향력도 많이 받았는데, 상업적인 문화의 침투에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요컨대 누에바 뜨로바는 쿠바의 혁명적 상황 하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세계 인민의 음악적 양분을 골고루 섭취해 자라난 것이다. 내용적으로 누에바 뜨로바는 혁명이후의 사회․문화적 변혁의 산물이었으며, 쿠바 정부의 전폭적인 정책적 지원을 바탕으로 자라난 음악운동이다. 이 점에서 쿠바 혁명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누에바 뜨로바의 독자성이 드러난다. 누에바 깐씨온의 정서에는 혁명에 실패한 남미 인민들의 좌절이 담겨 있다.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의 “불의의 한 가운데에서(Al centro de la injusticia)”와 같은 곡이 그러하다. 비참한 현실을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에는 짧은 생을 마감한 좌절과 고뇌가 담겨 있다.

 

칠레의 북쪽은 페루와 맞닿아 있네  (중략)

Chile limita al norte con el perú 

 

 

몇몇이 부자로 산다

그러나 그것은 피와 학살을 인한 것  (중략)

Claro que algunos viven acomodados,

Pero eso con la sangre del degollado.   

 

 

광산노동자는 돈을 벌지만

외국인들의 지갑을 위한 것  (중략)

El minero produce buenos dineros,

Pero para el bolsillo del extranjero; 

 

 

여행자들은 바늘과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네  (중략)

Pa no sentir la aguja de este dolor 

 

 

칠레는 불의 한가운데에 맞닿아 있네

Chile limita al centro de la injusticia.138)

 

반면에 쿠바의 ‘새로운 음유가요’는 혁명 조국과 사랑에 관한 내용을 소재를 삼는 낙관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연인에 대한 사랑을 혁명에 대한 열정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혁명적 보편성과 작가의 개성 중 어느 한쪽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누에바 뜨로바의 주요 작가들은 혁명이 한창 사회를 변혁하던 시기에 사춘기를 보냈다. 젊은 예술인들의 활동에 혁명의 체험은 귀중한 자산이었다. 누에바 뜨로바 운동 초기에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인중에게 전달할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음유시 형식을 선택하였다. 노래엔 시적․음악적 서정성이 잘 결합되어 매우 다양한 음향과 정서를 보여 주었다. 여기에 혁명과 혁명 영웅에 대한 찬사와 저항이 가사에 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의 새로운 인간139)에 대한 믿음을 합창했고, 인민은 그들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믿었다. 자국의 민속 음악적 전통이 타문화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하며 고도의 창조성을 발휘한 누에바 뜨로바 운동은 실로 남미 음악 운동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누에바 뜨로바를 관변음악적 성격을 띤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개성이 강조가 되어 개인의 내면의 세계를 곡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심지어 까스뜨로에 대한 비판까지 담겨 있는 곡들도 나오는데 관변가요라고 한다면 지나친 혹평이다.

 

 

씰비오 로드리게쓰의 음악: 서정적인 혁명의 노래

 

이제 대표적인 누에바 뜨로바 작가인 씰비오 로드리게쓰(Silvio Rod-ríguez)[1946-]의 음악을 맛보기 해보자. 씰비오 로드리게쓰는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아니다. 하지만 가녀리게 떨리면서도 울림이 풍부한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는 쿠바 혁명이 지니는 다채로운 색채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것이다. 노래를 잘한다 혹은 못한다는 비교는 상대적인 것이다. 한국의 입도 제대로 못마추는 노래 못하는 가수들에 비한다면 씰비오는 가왕(歌王)이라는 칭호를 받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작년에 서거한 메르쎄데쓰 쏘사140)와 같은 탁월한 해석자에 비한다면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메르쎄데쓰 쏘사는 탁월한 해석자이지만 스스로 작곡을 하지는 못하였다. 씰비오 로드리게쓰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직접 만든 노랫말과 곡을 진실하게 불러왔다.

빠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és)와 같은 주요한 누에바 뜨로바 작가가 많지만 그를 택한 것은 한국에선 그의 음악을 택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의 대표작인 첫 작품 1975년작 “꽃과 나날들(Días y flores)”과 1982년작 “유니콘(Unicornio)”이 라이선스141)로 발매되었고 그외 주요 작품들이 수입되기도 했으며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간간히 음악이 소개되었기에 비교적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씰비오 로드리게쓰를 소개하는 것은 접근성을 고려한 것이기는 하지만, 300명이 넘는 누에바 뜨로바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작가라는 이유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인지도는 쿠바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와 세계 각국을 넘나든다. 군사파쇼가 지배하던 시절에 그의 노래는 금지곡이었는데, 금지가 풀려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에서 공연을 하면 수만 명의 관중이 체육관에 몰려 함께 그의 노래를 부른다. 1990년에는 칠레에서 피노체트 파쇼정권이 물러난 이후에 씰비오의 공연을 있었다. 쿠바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 추쵸 발데스(Chucho Valdés), 밴드 이라께레(Irakere),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의 딸이기도 한 칠레의 이사벨 빠라(Isabel Parra)와 함께 한 자리였다. 칠레 누에바 깐씨온의 영웅 빅뜨로 하라에 대한 추모를 겸한 공연에는 8만의 관중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의 실황은 1991년 <Silvio en Chile(칠레에서의 씰비오. Silvio in Chile.)>라는 2장짜리 음반으로 발표되어 칠레와 쿠바 인민의 연대의식을 고무하였다. 1990년은 피노체트의 독재가 끝난 해이지만 군부를 비롯해 칠레에서 피노체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런 면에서 그의 공연의 파장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미적 감수성을 문화 운동으로 승화시켰고, 노래를 통해 잊혀진 전통을 복구하여 훌륭한 투쟁의 무기로 삼았다. 쿠바 인민의 역사를 기록하며, 그들을 대변하고, 끊임없는 창작 활동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음악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청년 시기 쿠바 인민군에서 복무하며 제국주의와의 최전선에서 혁명을 위해 복무했다. <영화 예술 및 영화 산업 연구소(ICAIC)>의 학생이기도 했기에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판에 대한 이해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는1992년부터 쿠바 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실 정치인이기도 하며, 지금도 자신의 정치‧사상적 노선과 예술적인 표현을 부단히 일치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2007년에는 피트 씨거를 위한 공연을 위해 미국에 입국하길 원했으나 ‘봉쇄’당하기도 하였다.

음악가로서 폭도 넓은 편인데 쿠바 음악적 유산과 사회주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비틀즈(The Beatles), 밥 딜런(Bob Dylan) 및 영미 저항음악가(protest musician)의 영향을 받았다. 그 외에도 스뜨라빈스끼나 모차르트와 같은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나 애드가 앨런 포우나 조지 고든 바이런 같은 영미 문인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142) 이러한 영향력을 부인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없이는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쿠바의 옛 음악의 유산을 재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격조 높은 가사와 지적인 기교로서 놀랍도록 창의적인 음악을 창조해냈다. 가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만 하덕규143)의 음악 같다고 할 이도 있을 것이고 ‘열린 음악회 풍의 음악 같다’는 엉뚱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에스빠냐어 구사가 가능해서 가사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노래의 배경을 모르면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기 쉬울 것이다. 씰비오의 음악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사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씰비오 로드리게쓰의 작품을 화성적으로 깊이 분석하고 있는 논문도 있다.144) 그러나 씰비오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그렇게 분석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전부다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에서 맛보기로 곡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먼저 씰비오 로드리게쓰의 첫 작품 <꽃과 나날들>에서부터 시작해 보겠다. 1973년 칠레 투쟁의 패배를 노래한 “칠레의 산띠아고”(Santiago de Chile)에는 깊은 슬픔이 잔잔한 풀룻 연주와 격렬한 기타 반주에 전해온다. 칠레의 패배와 빅또르 하라의 죽음에 느끼는 작가의 감정의 파고가 그대로 전해 온다. 그러나 곡은 비탄의 정서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145) 죽지 않았어

내게서 죽이진 못해

머나먼 거리도,

사악한 군인들도

 

Eso no está muerto,

no me lo mataron

ni con la distancia

ni con el vil soldado.

히론 해안(Playa Girón)은 주요한 의미를 지닌 곡이라 판단하기에 가사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146) 히론 해안은 미국이 소위 ‘피그만(Bay of Pigs)’라고 부르는 곳이다. 미국은 1961년 4월 16일 히론 해안을 침공한다. 미국의 전략은 쿠바 망명자들이 주축이 된 군대가 상륙작전을 펼치고, 그곳의 침투지를 거점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면 이를 케네디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침공은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상황은 단 48시간 만에 상황종료 되었다. 1961년 12월 2일 까스뜨로는 혁명의 맑스-레닌주의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장시간의 연설을 한다. ‘자신은 맑스-레닌주의자며 죽을 때까지 그러할 것’이고, ‘맑스-레닌주의적 계획’에 입각해 사회변혁을 지속할 것이며, ‘당을 혁명적 소명을 위해 복무’시켜야 한다고 연설한다.147) 이후 쿠바 혁명은 비가역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혁명의 사회주의적인 명확해졌다. 히론 해안 침공 이후 쿠바 혁명이 더욱 공고해졌다. 씰비오의 곡에서 “히론 해안”의 쿠바 인민은 인종주의를 극복해내며 ‘고기잡이 함대’로 표현되는 열악한 조건을 극복해 낸다. 쿠바 인민은 모두 ‘히론 해안’호에 탑승한 공동체이며 이들이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 갈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히론 해안

 

시인 동무들이여

최근 시(詩)에 일어난 일을 헤아리며

나는 묻고 싶네

―내겐 절박해―

한 편의 시로 배 한 척을 만들려면

어떤 종류의 형용사를 사용해야만 하지?

감상적이지도 않고

군사적이거나 생경한 팜플렛과도 거리를 두고 말이야

내가 “고기잡이 쿠바 함대”와

≪히론 해안≫같은 단어를 써도 괜찮을까?”

 

음악 동무들이여

저 대담한 다향(多響)의 노래를 헤아리며

나는 묻고 싶네

―내겐 절박해―

이 배에 대한 노래를 만들려면

어떤 종류의 화성을 사용해야만 하지?

작은 꼬마들, 사람들과, 외로운 갑판 위의 사람들,

검고, 붉고, 푸른 사람들

≪히론 해안≫에 승선한 사람들에 대한 노래를 말이야

 

역사의 동무들이여  

진실임에 틀림없는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을 헤아리며

나는 묻고 싶네

―내겐 너무나 절박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떤 규칙을 따라야만 하지?

누군가가 먹을 것을 훔치고

그 후에 삶을 준다면 무엇을 해야 하지?

우리는 어디까지 이 진실을 밀고나가야 하지?

우리는 어디까지 알고 있지?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를 써야 해

≪히론 해안≫ 호의 사람들이

 

1969년 10월 5일

 

“꿈속의 바다뱀(Sueño Con Serpientes)”은 상당히 재미있는 곡이다. 브레히트의 시를 에스빠냐어로 번역해서 낭송하는 도입부가 지나고 음악이 시작되면 다소 난해한 동화와 같은 가사가 전개된다. ‘뱀을 죽였더니 더 큰 뱀이 나온다’는 내용이 반복된다. 혁명의 어려움을 말하며 그것이 끊임없는 고난과의 투쟁이어야 함을 비유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바다뱀은 아마도 헤라클레스 신화에서 나오는 히드라를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널리 알려진 그리스 신화지만 요약해서 소개해 본다. ‘히드라는 머리가 아홉 개가 달린 괴물로 레르나 지역 근처의 늪에서 살았다. 이 물뱀은 하나의 머리가 잘리면 그곳에 새로운 두 개의 머리가 생기는 불사(不死)의 괴물로 밤이면 수풀에서 나와 닥치는 대로 사람과 가축을 잡아 먹었다. 히드라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났고, 또한 가운데의 머리는 죽지도 않는 불사의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30여일 걸친 끈질긴 싸움 끝에 8개의 머리를 불에 태워 죽이고, 나머지 불사의 머리는 칼로 잘라 거대한 바위아래에 묻어버린다. 싸움이 끝난 후 헤라클레스는 맹독을 가진 물뱀의 피를 그의 화살에 묻히고 다녔는데, 그때부터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에 대드는 사람이 없었다. 제우스는 레르나에서의 아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물뱀을 하늘에 올려 별자리로 만들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하였다.’

 

하루를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일 년을 투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더 좋은 사람들이다

여러 해를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평생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꼭 필요한 존재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148)

 

타이틀 곡 “꽃과 나날들”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맞이하기 위해서 ‘광견병(rabia)’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을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제국의 광기(la rabia imperio)와 폭탄 전쟁(la rabia bomba)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의 ‘광견병(rabia)’이 오히려 시인의 임무라 선언하는 내용으로 시인의 역할에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가녀리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와 곡의 전개에 유의해서 들어보자.

 

광견병이 나의 임무

 

시간의 때가 묻은 채

지쳐 돌아올 그 때

우리의 사랑을 위해 돌아오는 건 아니네

그때 난 숲이나 태양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거고

동무여, 그때 당신은

내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맞이할

새로운 영혼이 필요할 것이네

    

La rabia es mi vocacin.

 

Si hay das que vuelvo cansado,

sucio de tiempo,

sin para amor,

es que regreso del mundo,

no del bosque, no del sol.

En esos das,

compaera ponte alma nueva

para mi ms bella flor.

 

다음으로는 1982년작 <유니콘> 음반으로 넘어가겠다. 씰비오 로드리게쓰의 <유니콘>이 ‘초현실주의적인 노랫말의 특징’을 보인다고 지적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할 수 있는 용기있는 발언이다.149) 가사에는 시적인 상징과 은유가 전편에 걸쳐 등장하지만 이는 유미주의(唯美主義)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먼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Por Quien Merece Amor)”를 들어보자.

 

내 사랑은 가장 많이 사랑하지만

그 오래된 고통 속에서 가장 잊혀져 왔습니다

내 사랑은 죽음에게도 그 가슴을 열어두며

좋은 시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용감한 이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위한

타오르는 태양입니다.

 

Mi amor, el más enamorado

Es demás olvidado en su antiguo dolor

Mi amor abre pecho a la muerte y despeña su suerte

Con un tiempo mejor

Mi amor, este amor aguerrido

Es un sol encendido

Por quien merece amor

 

잔잔한 피아노 연주와 후반부에 잔잔히 깔리는 현악기를 비롯한 다채로운 악기군의 연주와 서정적인 가사 그리고 감미로운 목소리만으로 평범한 사랑타령 노래로 판단한다면 예술에 대한 실례를 범하는 것이다. 이곡은 1981년 12월 경 미국이 쿠바가 엘살바도르에 무기를 보내고 있다는 구실로 쿠바 해상을 봉쇄한 시기에 만든 것이다. 씰비오 로드리게쓰는 ‘만약 미국의 협박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곡은 엘살바도르 인민에 대한 연대와 사랑의 표현’이라고  언급한다. 미국의 봉쇄가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쿠바는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콜롬비아 게릴라, 엘살바도르 좌익 게릴라의 지도자들과 깊은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직간접적으로 후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150)

니카라과를 위한 긴급한 노래(Cancion Urgente Para Nicaragua)는 니카라과 혁명과 산디니스따 전사에게 보내는 찬사임을 알 수 있다. 가사를 보면 니카라과 산디니스따(Sandino), 볼리바르(Bolívar)와 체 게바라(Che)는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하면서 니카라과의 투쟁과 아메리카 인민의 해방투쟁의 보편성을 밝히며 공통된 연대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곡은 제목과 달리 너무나도 경쾌하고 발랄한 곡이다. 타악기의 소박하며 효과적인 사용이 이러한 정서를 더욱 부각하고 있다. 긴급한 연대의 노래가 긴박한 정서에 비장미(悲壯美)를 풍기는 정형화된 행진곡에 담길 필요는 없다. 곡의 후반부에는 아래와 같은 찬사가 등장한다.

 

니카라과는 그들만의 영광의 길을 걸을 것이네

왜냐하면 선각자의 피흘림이 그들의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이지

 

Andará Nicaragua su camino en la gloria

porque fue sangre sabia la que hizo su historia

 

사회주의 현실주의 예술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관적인 정서는 이 곡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각자의 피흘림(sangre sabia)151)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단히 애석하게도 곡이 발표되고 9년이 지난 1990년 산디니스따의 투쟁은 패배로 귀결된다.

타이틀 곡 “유니콘”은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는 곡이다. 이 곡은 1968년 에르베르또 빠디야(Herbero Padilla)가 자신의 시집 ≪Fuera del Juego≫152)에서 쿠바 혁명정부에 대한 비판을 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1981년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떠난 사건을 소재로 한 곡이다. 이곡에서 유니콘은 바로 시인 빠디야를 가리킨다. 당시 이 사건은 일련의 해외 지식인들이 쿠바 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153) 그러나 빠디야의 시가 번역조차 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판단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다른 예로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같은 헐리우드 영화는 러시아 혁명 이후 서정시를 금지한 조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러한 조치의 배경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또 냉전 시대 이 영화는 제국주의의 선전물로 반혁명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빠다야가 이 사건 후에 해외에서 반 쿠바 선전을 하였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빠디야의 시의 일부가 소개되어 있는 자료도 간신히 찾았는데, 거기에는 빠디아의 시를 영역한 한 구절을 담고 있다. 빠디야는 그리스의 파씨스트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던 사회주의 시인 야니스 리토스(Γιάννης Ρίτσος)에게 헌정한 시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국가’를 비판한다. 문제는 그것이 쿠바 정부에 대한 비판을 그렇게 표현한 데서 발생한 것이다.154) “유니콘”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여 전세계에 누에바 뜨로바를 알리게 된 곡이다. 이 곡은 빠디야의 망명 직후에 발표된 것임을, 또 이 곡에서 빠디야도 쿠바정부도 비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서 들어보자.

 

내 푸른 유니콘이 어제 사라졌습니다

풀을 뜯게 내버려두었더니 사라져버렸어요

누가 보았거든 알려주면 좋겠어요

그가 떠나면서 남긴 꽃들은 입을 열려고 하지 않네요

 

Mi unicornio azul ayer se me perdió,

pastando lo deje y desapareció.

Cualquier información bien la voy a pagar.

Las flores que dejó no me han querido hablar.

 

씰비오 로드리게쓰는 1997년 인터뷰에서 리얼리즘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미적 견지에서 인민의 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여기에 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혁명이 성공한 쿠바의 현실과 아직도 자본주의의 폐악에 허덕이며 치열하게 투쟁해야 하는 대다수 국가의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 따라서 씰비오의 음악은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지만,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서는 곤란하다.155) 아래의 인터뷰는 누에바 뜨로바의 성과와 한계점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으로 독해할 수도 있다. 인터뷰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우리 노래들이 혁명적이라고 간주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 노래들은 베트남 전, 인종차별, 반제국주의 같은 잘 알려진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혁명 노래 가수라는 그런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좁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원한 것들, 의도한 것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것조차 좀 더 넓고 깊은 의미에서 반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뜨로바 음악의 전통을 더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계승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혁명 가수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나쁘게 들린다. 게다가 우리는 모든 뜨로바 음악, 시와 미적 자유를 누린다고 느끼며 우리에게는 이런 열망은 분류 될 수 없고, 한계가 없으며 상황에 맞는 슬로건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56)

 

 

특별한 시기: 1959년 혁명 이후 최대의 위기

 

쿠바의 특별한 시기(Período especial)는 쏘련 붕괴 이후 겪었던 쿠바판 ‘고난의 행군’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유머 하나를 소개 한다.

 

쿠바에는 가솔린이 없지만 차는 굴러다닌다. 식료품 가게에는 음식이 없지만 모두 저녁 식사를 요리한다. 그들은 돈이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하지만 매일 밤 럼주를 마시거나 춤을 추러 간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157)

 

쏘련 붕괴 직후 미국은 로얄 더치 쉘은 까자흐스딴의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1조 달러를 지불했다.158) 이는 쿠바의 주요한 원유 공급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로버트 E. 쿼크는 1995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득의양양하게 서술했다.

 

어느 모로 보나 쿠바의 최고 지도자는 자신의 조국이 멸망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그가 권력과 특권을 포기하기 전에 말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지난 50년 동안 쿠바를 이끌었던 혁명가 피델 까스뜨로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159)

 

쿠바는 까스뜨로의 표현처럼 ‘위험’하고 ‘사회주의적인 원칙에 반대’되는 뻬레스뜨로이까를 거부했다. 그리고 1984년에 이어 1988년 서울 올림픽도 거부했다. 그러나 쏘련에서 고르바초프의 노선은 옐친으로 이어지면서 확고한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쏘련 붕괴 이후 쿠바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구쏘련 노동계급의 ‘쓰라린 패배’는 쿠바혁명의 최대의 우군이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소위 ‘냉전’을 근거로 했던 특별한 시기에도 수십 년간 지속된 미국의 경제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1994년 8월 5일, 아바나에서 쿠바 혁명 이후 46년 만에 폭동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1997년에는 쿠바 관광산업을 위축시키기 위한 목적의 테러가 발생하였다. 이는 <쿠바 미국 국가재단(Cuban American National Foundation. CANF>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이 저지른 것으로 사실상 미제국주의자들의 기획물이다. 

쿠바의 경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사탕수수나 담배와 같은 단일 작물 의존경제 구조를 변화시켜야만 했다. 식민지 시대의 단일 작물 재배는 혁명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국제분업에 기초한 것이며, 호혜적인 구상무역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분업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사탕수수 생산량은 800만 톤에서 150만 톤으로 줄었다. 사탕수수 생산이 감소하면서, 제당소의 숫자도 줄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인력이 감축되었고, 이엘 따라 불가피하게 자신의 기존 일자리를 잃게 되는 이들이 발생하였다. 그들에게 다른 직업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학습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였다. 제당산업 노동자들에게 매일 작업 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산업 재편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학업을 직업으로 삼는 이가 4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160) 사탕수수뿐만 아니라 농업 전반에서도 전면적인 재구조화가 진행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식량 생산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지만, 단일 품종 대량재배에 의존하는 농업을 유기농에 기반한 친환경적 농업161)으로 교체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화학 비료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식물과 미생물을 이용했다.162) 다양한 유기농 농산물을 인민에게 저렴하게 공급하였다. 쿠바의 유기농업은 성공한 모형이 되었다. 쿠바의 특별한 시기에도 양은 줄었지만 식량 배급은 유지되었고, 심각한 식량난은 없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은 결과 세계 각국에서 유기농업을 배우러 방문할 정도로 쿠바의 농업은 더욱 튼실해졌다.

그러나 특별한 시기는 불가피하게 수정의 경로를 강요하였다.163) 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하였고 생산수단의 국유와 계획경제 체제는 완화되었다. 미국의 <진보 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 PLP)>은 “Is Cuba Communist?”, “Red Tourist in Cuba”164) 같은 글에서 특별한 시기의 수정을 근거로 쿠바가 1959년 혁명 이전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비친다. <진보노동당>이 청산주의와 수정주의를 극복하며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최대강령주의 혹은 선전주의에 경도되어 있다.165) 이들이 들이대는 쿠바에 대한 냉혹한 잣대는 우려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고립무원한 상태의 사회주의 국가가 취할 수 있는 길은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이 아니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기본틀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수정일 수밖에 없다. <진보노동당>은 수정과 수정주의를 구분하지 않는 지나친 비판을 행했다. 그러나 <진보노동당>의 비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관광업을 위한 호텔은 캐나다와 유럽의 자본가의 손에 넘어 갔고 그 대가로 여러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특별한 시기에 쿠바의 페소화보다 미국의 달러화가 더욱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쿠바의 관광산업을 지배하는 캐나다와 유럽의 자본가들이 쿠바를 위해 한 일이라곤 호텔을 건설한 것 밖에 없다. 관광산업의 막대한 이윤은 미국의 자본가도 군침을 삼킬만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성매매가 관광업의 활성화와 더불어 부활했다. 관광지 주변에서 벌어지는 성매매는 조직적이며 직업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성매매가 다시 재등장한 것은 분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결핍과 어려움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부패와 도둑질이 재등장하기도 했다. 관광을 통해 외화를 획득했던 이들은 신흥 부자가 되기도 했고, 석유를 빼돌리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쿠바에서 해외로 이주한 이들은 쿠바로 달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달러는 결코 쿠바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로 성장한 쿠바인이 해외로 나가서 1달러를 보낸다고 한다면 쿠바는 거기에 44달러를 들여야 한다.166) 또한 달러를 받을 수 있는 계층이 생겨나면서 경제적 차별과 빈부격차는 커졌다. 까스뜨로와 쿠바 정부는 부패를 해소하기 위해 인민의 도덕심에 호소했다. 그리고 석유를 빼돌리는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젊은 봉사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조직적인 부패 퇴치 운동의 효력이 나타났고 성과를 거두었다.167)

경제적 어려움은 음악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별한 시기를 겪은 쿠바 젊은이들은 1959년 혁명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세대였다. 그들에게 혁명의 열정은 쿠바 거리의 벽에 적힌 구호처럼 낡은 것일 수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지속된 경제 제재로 인한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극심한 좌절감을 겪었다. 까를로스 발렐라(Carlos Varela)와 같은 누에바 뜨로바 작가는 선배들과 달리 개인의 좌절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다.168) 피델에 대한 비판도 증가하였다.169) 이 시기에 미국의 랩과 힙합과 같은 음악도 쿠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랩과 힙합이란 장르의 기원은 미국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흑인들의 음악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랩과 힙합에도 급속한 자본의 장악이 진행되었다. 역사적으로 록음악이 그러한 경로를 겪었던 것처럼 랩과 힙합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 문화 단일화 전략의 도구가 되었다. 쿠바에서 랩과 힙합의 수용은 비판적인 수용을 거친 것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문화를 수용할 때는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170) 사회주의의 번영기와 위기의 시기에 문화 전술에는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특별한 시기의 문화적 변모에 대해서는 보다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쿠바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에서 소생산에 대한 허용을 하던 특별한 시기에도 지켜야 할 원칙을 고수했다. 중국에서처럼 개체호(個体戶)라 불리는 소생산이 사영기업으로 전환하면서 결국에는 자본주의로 역이행을 했던 과오171)를 범하지 않고, 철저하게 소생산의 자본화를 차단했다. 관광과 무역에서 이윤을 얻는 이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는 정책을 후퇴함 없이 밀고 갔다. 쿠바가 자본주의로 후퇴하지 않고 다시금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경제의 비중을 높여가는 것은 이러한 기본 전략을 수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술적인 유연함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수정과 수정주의의 차이이다. 원칙을 지켜낸 사투와 단결된 투쟁으로 2004년경부터는 특별한 시기는 어려움을 거의 극복해냈다. 달러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중 경제 시대는 끝났다. 물론 아직도 특별한 시기의 여진이 남아 있기에 완전한 극복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2005년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희생자를 위해 건강간리기구와 야전병원을 갖춘 의료진 1610명을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미국에 할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172)

 

 

피델 이후에도 혁명은 전진한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독재국가라고 낙인을 찍으며, 혁명의 계승과 지속이라는 문제를 단순히 ‘후계’라는 인적 교체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부르주아 위선자들에게 까스뜨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도자로서 내 기능은 집단의 일부입니다. 우리에게는 국가평의회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쿠바에서 중요한 결정들, 즉 근본적인 결정들은 분석과 토론의 과정을 거쳐 집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쿠바에는 항상 집단적인 지도부가 있습니다. 나는 장관이나 대사들을 내 마음대로 지명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하급 공무원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어요.173)

 

그들은 마치 인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걸 개인전용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단 한 명의 지도자만 존재하죠. 수백만 명이 투쟁했고 조국을 수호했으며, 수십만 명의 의사와 전문인들이 있고, 농민과, 학생, 노동자가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까스뜨로라는 최악의 인간만 있습니다.174)

 

한편 2005년 12월 의회에서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펠리페 뻬레스 로께175)는 ‘피델 까스뜨로 이후’를 언급하면서, 그런 사람은 특권 의식을 갖지 않고 엄격한 행동으로 타인의 모범이 되고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친미 성향을 지닌 유산계급이 출현을 막을 수 있는 지도자라고 말했다.176) 제국주의자와 부르주아지는 단지 피델의 라울로의 교체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그러나 피델은 라울이 공산당 제1서기가 되기 이전에 라울 이후에 대해서까지도 언급했다.

 

이제 현재의 세대가 다른 세대를 대체할 겁니다. (중략)

우리 세대는 이미 끝나고 있으므로 나를 대체할 사람은 새로운 세대가 될 겁니다. (중략)

현재는 2세대가 있지만, 이제, 3세대, 4세대가……. 나는 4세대가 어떻게 될지 아주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6학년 학생들이 어떻게 연설문을 작성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재능이 대단한지 몰라요! (중략)

어떤 사람은 이것에, 다른 사람은 다른 것에 천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사회 전체를 발전시키고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바로 특별한 시기가 끝난 지 몇 년 후에 ‘나는 사회주이자이다’라고 서명한 800만 명입니다. (중략)

혁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더 많은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177) 

 

쿠바는 니카라과 같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뿐만이 아니라 시리아, 콩고, 카보베르데, 기니, 앙골라의 투쟁을 군사적으로 지원했으며 함께 피를 흘렸다. 헌신적인 투쟁의 결과 쿠바에 비하면 ‘다운 그레이드’된 혁명이지만, 볼리바리안 혁명이 이어졌다.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들은 미국 주도의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를 대체할 라틴아메리카의 대안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 평등한 의료와 교육이라는 기본 노선도 흔들림없이 유지하였다. 쿠바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데 너무 의사에게 자주 가는 현상’에 대해서 놀라움과 부러움을 표한다. 특별한 시기에도 해외로의 의료 원조는 지속되었으며 체 게바라의 정신을 이어갔다. 베네수얼라와 협정을 맺어 석유와 의료에 대한 교육을 호혜적으로 진행기로 하였다. 볼리비아에도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에도 10만의 의사들을 양성하기로 하였다.178) 쿠바 혁명은 쿠바 내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 각국에서 광야에 번질 새로운 불씨를 형성하고 있다.

1959년 혁명을 직접 체험한 ‘혁명 1세대’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50세를 넘긴 쿠바 혁명은 영광의 역사이며, 동시에 시련과 고난의 역사이다. 쏘련의 패배 이후에 겪은 특별한 시기의 좌절과 난관은 극복해 내었지만, 언제 또 다른 위협이 닥쳐와 혁명을 위태롭게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쿠바의 혁명에 국제주의자자로서 연대하는 것은 다른 경로를 걸을 수밖에 없는 각국의 현실을 무시한 상황에서 쿠바의 사례를 수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쿠바 혁명에 연대하는 것은 자국의 자본가계급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최후에까지 밀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쿠바의 고난 극복과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은 전세계 근로인민 대중에게 지대한 영감의 원천이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쿠바의 혁명의 앞날을 환히 비출 것이다.

 

우리 사랑의 테마는 상처 입은 것 

하지만 간절함이 고통을 치유한다

 

Nuestro tema de amor tiene quebranto,

pero su empeño sana el dolor179) 

 

¡Socialismo o Muerte! ¡Viva la revolución!

사회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혁명 만세!

 


 

1) Leo Huberman & Paul M. Sweezy, Cuba: Anatomy of a revolution, Monthly Review Press, 1961, p. 1. 번역은 ≪쿠바혁명사≫, 지양사, 1984, p. 11. 이 책은 엄혹한 군사파쇼의 시절에 발행된 것이기에, 원문에 있는 생생한 사진이 누락되어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2) Ted A. Henken, Cuba: A global studies handbook, ABC-CLIO, 2008, p. 26.

 

3) Richard Gott, Cuba: A new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2004, p. 21.

 

4) Richard Gott, 같은 책, pp. 44-45.

 

5) Richard Gott, 같은 책, p. 49.

 

6) José Martí[1853-1895]. 쿠바의 독립투사이자 영웅적 시인. 1868년 10년 독립전쟁시기부터 대활약한다. 호세 마르띠의 사상은 레닌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체르느이셰프스끼(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니꼴라이 가브릴로비치 체르느이셰프스끼)와 같은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다. 쿠바의 헌법은 맑스-레닌주의와 함께 호세 마르띠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임을 명기하고 있다.

 

7) Richard Gott, 같은 책, p. 85.

 

8) 마크 크레머(Mark Cremer), ≪지구촌 문화충격 탈출기: 쿠바(큐리어스 시리즈9)≫, 휘슬러, 2005, pp. 16-17. 이 책의 원제는 Culture Shock! Cuba (Culture Shock! Country Guides)이며, 1998년에 출간 된 것이다. 1990년대 이른 바 특별한 시기(Período especial)의 쿠바를 다룬 일종의 관광 가이드북이다. 비교적 편견을 배제하고 서술하고 있는 편이기에 비판적으로 독해한다면 쿠바의 사회 문화에 대한 초보적인 입문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미세한 오류가 있으니 약간의 주의를 요한다.

 

9) Richard Gott, 같은 책, pp. 97-99. 이 책에서 마인 호의 폭발은 내부적인 것이라는 반박도 볼 수 있다. 또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17-18에도 그러한 견해가 등장한다. 이른바 ‘통킹만 사건’(베트남어로는 ‘바크보만 사건’, Sự kiện Vịnh Bắc Bộ)등 무수한 조작과 날조의 역사를 가진 미제국주의의 역사는 무엇을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하는 것인지 의문투성이다. 천안함 사건도 의혹 투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박태수, “천안함은 좌초로 침몰되었다”, ≪정세와 노동≫ 제56호(2010. 4.), 노사과연)을 참조하길 바란다.

 

10) Richard Gott, 같은 책, pp. 110-111.

 

11) 현재는 쿠바의 지명이기도 하며, 쿠바 공산당의 기관지의 명칭이기도 하다. 쿠바 공산당 웹싸이트는 http://www.granma.cu/

 

12) 채만수, ≪피억압의 정치학≫, 노사과연, 2008, pp. 460-466. 우리는 실패한 혁명, 그리고 충분하지 못한 투쟁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의 패배의 원인에서 뼈져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도 어두운 것이다.

 

13) 까스뜨로, “최고사령관의 전언”, ≪정세와 노동≫ 제33호(2008. 3.), 노사과연.

 

14) 쿠바와 까스뜨로에 대한 비난은 오른쪽에서만 펼쳐지고 있지 않다. ‘인민주의(populism) 정권’, ‘국가자본주의 정권의 수장’, ‘기형화된 노동자 정권’ 등등 좌익의 언어를 빌린 비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5) 원문은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이다. 이것은 미국의 록가수 닐 영이 1979년에 발표한 음반 <Rust never sleeps>의 마지막 곡 “Hey Hey, My My (Into the Black)”에 나오는 가사이다. 앞서 언급한 자살한 록 가수 커트 코베인의 유서는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16)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와 예술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원론적인 이해에 관해서는 최상철, “맑스-레닌주의 문학‧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 ≪노동사회과학≫ 제2호, 노사과연, 2009, pp. 291-294를 보라.

 

17) Hanns Eisler, A rebel in music, Seven seas, 1978, p. 103. 번역은 “음악의 반란자(11)”, ≪정세와 노동≫, 2010년 3월호, pp. 126-127.

 

18) MEW(Diez Verlag), 1987, Bd. 23, SS. 369-370. 번역은 ≪자본론≫Ⅰ(상) (김수행 역, 제2개역판), 비봉출판사, 2002, pp. 472-473.

 

19) “창간좌담: 현단계 문화현실과 과학적 문화이론” 중 고 김진균 선생의 발언, ≪문화과학 창간호≫, 문화과학사, 1992, pp. 19-20. 당시 좌담은 박거용의 사회로 강내희, 김정환, 김진균, 심광현이 참여했는데, 김진균 선생이 단연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

 

20) Hanns Eisler, 같은 책, p. 59. 번역은 “음악의 반란자(7)”, ≪정세와 노동≫, 2009년 11월호, p. 101.

 

21) Lenin, On literature and art, Moscow, Progress, 1976, pp. 273-280. 번역은 ≪레닌의 문학예술론≫, 이길주 역, 논장, 1988, pp. 331-338. 여명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레닌의 문학론≫에서 같은 내용의 번역이 있는데 오역이 심해서 추천하기 힘들다. 인용한 번역문에는 필자가 수정한 부분이 있다. 이하에도 번역문을 인용할 경우 번역과 표현은 수정하도 할 것이다. 수정 내용은 일일이 표기하지 못하고 출처만 표기한다.

 

22) 현재는 좌우익 청산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맑스, 엥엘스, 레닌의 기본저작도 완역되지 않았다. 과학적 이론 정립을 이해서는 갈 길이 멀다. 이러한 시기에는 역설적이지만 ‘교조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교조주의의 결핍’이 문제다.

 

23) “≪1억 5천만≫은 1억 5천만의 러시아를 상징하는 이반과 전력과 동력, 기계의 미국을 상징하는 윌슨 대통령과의 ‘전세계 계급 투쟁 우승 결정전’, 즉 노동자 계급과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철‧이종진‧장실, ≪러시아 문학사≫, 벽호, 1994, p. 459.

 

24) 자세한 내용은 최상철, 같은 글, p. 315.을 보라. 당시의 레닌의 조처는 개인적 취향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쏘비에뜨 사회주의의 현실적 조건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정책적 판단의 기본 취지는 그른 것이 아니며 또한 불가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21년은 네쁘(НЭП, 신경제정책을 뜻하는 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의 약자.)가 막 시작된 시기이며 대다수의 인민은 아직도 전시공산주의 체제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취약한 쏘비에뜨 사회주의 체제는 한정된 자원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유지해야 했기에 과단성 있는 조처가 반드시 필요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조처들은 자칫하면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시도를 부득이하게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 예술 정책이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굴절은 향후 한국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도 또 현실의 노동자 문예 창작과정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과거의 경험을 찬찬히 살펴 세밀하게 분석해야 앞으로 닥치게 될 문제의 해답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25) 스딸린 사후에 스딸린 평화상은 레닌 평화상으로 개명된다. 브레히트도 스딸린 평화상을 받았는데, 사회주의 진영의 ‘반골’인 브레히트에게도 ‘스딸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여질 것만 같다!

 

26) 쿠바 영화 감독 또마스 구띠에레쓰 알레아(Tomás Gutiérrez Alea)[1928-1996]의 1968년작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에는 혁명 직후에 부르주아 출신의 남자 주인공 쎄르지오가 가난한 자신의 연인과 미술관에 함께 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전시된 추상 회화작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연인을 본 쎄르지오는, 마이애미로 떠난 자신의 전배우자를 떠올린다. 그의 새여인과 전배우자의 미술관에서의 태도가 대조적으로 지나간다.

 

27) KLA: Kosovo Liberation Army. 알바니아어로는 Ushtria Çlirimtare e Kosovës, UÇK. 코소보 해방군이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 단체. 이들의 문장이 신성로마제국의 쌍두 독수리라는 것에서 그 성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코소보 문제에 대해서는 ≪정세와 노동≫ 2008년 3월호에 번역된 사라 플런더스(Sarah Flounders)의 “워싱턴이 발칸반도에 새 식민지를 얻다― 코소보의 “독립””을 참조하라.

 

28) 아래 웹싸이트의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의 글을 보라.

    http://www.monthlyreview.org/1199petr.htm 원문은 프랜씨스 스토너 쏜더스(Francis Stonor Saunders)의 책 Who Paid the Piper: The CIA and the Cultural Cold War(누가 풍각쟁이의 물주인가: CIA와 문화적 냉전)의 서평이며 Monthly Review(먼쓸리 리뷰) 1999년 11월호에 실리기도 하였다. 페트라스의 서평은 조만간 ≪정세와 노동≫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며, 스토너 쏜더스의 번역 작업은 진행중이라 하니 언젠가는 단행본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29) 마오쩌둥, “신민주주의론”, ≪모순론‧실천론(외)≫, 범우사, 2009, pp. 105-106.

   “정치는 경제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이다”라는 구절은 레닌이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2. Moscow, Progress, 1963, p. 32)에서 비롯한 것이다. 번역 전문은 ≪노동자정치신문≫, 44호-46호에 실려 있다.

 

30) MEW, Bd. 37, S. 494. 번역은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박종철출판사, 2000, p. 518.

 

31) Ry Cooder[1947-]. 미국 기타리스트. 빔 벤더즈 감독에게 <부에나 비스따 쏘씨알 클럽>의 제작을 제의하고 전체적인 기획을 담당한 인물이며 영화에도 주요하게 등장한다. 빔 벤더즈 감독의 1984년 영화 <파리 텍사스(Paris, Texas)>에서도 음악을 담당하였다.

 

32) Celia Cruz[1925-2003]. 쿠바 혁명 정부는 살사라는 장르 자체를 ‘쿠바 음악을 표절한 제국주의 예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104.

 

33) 글로리아 에스떼판의 아버지는 미제의 하수인 바띠스따의 경호원이었다. 또 에스떼판의 연주를 맡은 밴드 이름은 마이애미 싸운드 머쉰(Miami sound machine)이다. 쿠바에서 쫓겨난 지배계급의 근거지가 마이애미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34) 배윤경, “남미의 민중음악— 새로운 노래(Canto Nuevo)를 중심으로” 2006년도에 웹상에서 발견한 문서인데 이전의 주소에는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는 못한다.

 

35) 쿠바 영화 루씨아에도 혁명 이전의 클럽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퇴폐적인 광경에 대한 비판적인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영상은 왜곡되고 일그러진 형태로 드러난다.

 

36) Oscar Lewis et al, Four Women: Living Revoluti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77, p. 279. Sandor Halebsky & John M. Kirk, Cuba: Twenty-five years of revolution 1959 to 1984, Praeger, 1985, p. 81에서 재인용.

 

37) Elíades Ochoa[1946-]. 영화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기타리스트.

 

38) 직역하면 ‘뜨로바의 집’이라는 뜻이고 쿠바 혁명 이후에 설립되었다. 아바나, 쿠바 산띠아고(Santiago de Cuba)등 주요 지역 곳곳에 위치`한다. 여기선 무료 공연과 음악인들의 자유로운 교류가 행해지며 교육기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Simon Broughton & Mark Ellingham, World music: The rough guide volume 2, Rough guides, 2000. p. 393. 참고로 국내의 많은 ‘월드 뮤직’ 관련 서적은 바로 이 책을 참고로 하고 있다. 해토출판사에서 나온 심영보 저 ≪월드 뮤직: 세계로 열린 창≫은 이 책을 축약 번역하여 주석을  담고 있는 거친(rough) 한국판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39) ‘사진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브레히트의 ≪전쟁교본(Kriegsfibel)≫의 부제이다.

 

40) 기예르모 빌라르의 인터뷰. 출처는 http://blog.naver.com/sabaino/ 인터뷰는 정지은님이 번역한 것인데, 에스빠냐어 원문은 <라디오 쁘로그레소> 홈페이지(http://www.radioprogreso.cu/)에서 검색해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41) 이러한 공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며, 쿠바뿐만 아니라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를 붕괴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전설적인 쿠바의 권투 선수 테오필로 스티븐슨(Teófilo Stevenson)은 2백만 달러를 내밀며 자신을 프로복서로 전향시키려는 제안에 이렇게 답했다. “프로복싱계는 선수를 마치 상품처럼 사고팔다가 효용가치가 없으면 헌신짝처럼 내버린다. 무하마드 알리는 수백만 달러를 벌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착취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돈을 버는 것보다 공부와 혁명에 관심이 많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34. 그는 만약 프로로 전향했다라면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자리가 위태했을 것이다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권투선수이다.

 

42) 송기철, “World Music 4U”, ≪객석≫(2006. 5.), pp. 110-111.

 

43) Compay Segundo[1907-2003]. 뜨로바(trova) 기타연주자. 영화에서 등장하는 기타 치며 노래를 하는 노거장. 후술하는 씰비오 로드리게쓰와도 함께 부른 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44) Simon Broughton & Mark Ellingham, World music: The rough guide volume 2, Rough guides, 2000, p. 394.

 

45) 1973년 쿠바 항공기 폭파로 73명이 사망하는 사건의 범인은 전CIA 직원인 쿠바 망명자이다.

 

46) 쿠바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투쟁에 참여할 때에도 적군에 대해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반제민족해방 투쟁을 위해 1975년 앙골라 내전에 참전 당시에 전쟁 포로로 잡힌 남아프리카공화국 군인에 대해서도 구타하거나 인권유린을 자행하지 않았다.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 현대문학, 2008, p. 291. 심지어 까스뜨로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지원 하에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343.

“영국의 감옥은 정치적이자 애국적인 동기를 지닌 아일랜드 죄수들로 가득합니다. 그곳에서는 딱 한 번 단식투쟁이 있었어요. 그러자 영국인들은 수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했죠. 에스빠냐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곳에서 투쟁하는 바스크 죄수들에게 매우 강력한 법을 집행합니다. 이딸리아 정부는 아직도 1970년대에 활동했던 ‘붉은 여단’ 단원을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옮긴이: 2009년 11월에는 한 붉은 여단 여성단원이 감옥에서의 처우개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하기도 했다.) (중략) 우리는 독일정부가 바아더(옮긴이: Baader-Meinjof Gang, 적군파.) 그룹의 대원들에게 얼마나 강경하게 대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에는 정치적 이유로 투쟁하는 코르시카 죄수들이 수십 명이나 수감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왜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습니까? 왜 무미아 아부 하말(Mumia Abu-Jamal) 기자를 석방하지 않고 20년도 넘게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까? 왜 원주민 지도자 레너드 펠티어(Leonard Peltier)를 석방하지 않고 25년 이상 감옥에 가두는 거죠?”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579-580.

 

47) 쿠바 혁명 직후인 1961년 히론 해안 침공이 있기 전에 정치범(반혁명세력)은 대략 1만 5천명 정도였다.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580.

 

48)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p. 195-196.

 

49)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p. 102-103. 번역은 ≪쿠바혁명사≫, 지양사, 1984, p. 116.

 

50) 토마스 구띠에레쓰 알레아(Tomás Gutiérrez Alea) 감독의 1968년작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은 반혁명적분자는 아니지만 혁명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느끼는 부르주아 남성의 쎄르지오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영화에서 지주재산 (유상)몰수와 주택분배 과정이 비(非)반혁명적 부르주아 출신 인텔리의 시선에서 드러난다. 영화 의도는 부르주아의 시각을 부르주아의 시선을 통해 비판하려는 것이다.

 

51)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p. 114-123; 번역은 ≪쿠바혁명사≫, pp. 129-138.

 

52)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59.

 

53) 영화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에서 쎄르지오의 대사에도 등장하는 혁명전 아바나의 별칭이다.  

 

54)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46; 번역은 같은 책, pp. 163-164.

 

55)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85; 같은 책, p. 201.

56)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70; 같은 책, p. 187.

 

57)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69; 같은 책, p. 186. 이는 J. H. Carmical이 쓴 New York Times(뉴욕 타임즈) 1960년 5월 29일자 기사를 재인용 한 것이다. 번역본에는 날짜가 5월 20일로 잘못 표기되었다.

 

58)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79; 같은 책, p. 196.

 

59)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81; 같은 책, p. 197.

 

60) Look, 1960년 11월 8일자.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75; 같은 책, p. 191. 번역본에서는 Laura Bergquist의 철자를 잘못 표기하고 있다.

 

61)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 188; 같은 책, p. 205.

 

62)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267-268.

 

63) Julie Marie Bunck, Fidel Castro and the quest for a revolutionary culture in Cub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p. 3.

 

64) 클라라 체트킨은 레닌에게 문맹 때문에 인민이 부르주아적 관념에 오염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혁명이 용이하게 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예, 사실입니다.” 레닌은 대답했다. “하지만 일정한 한계 내에서만,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우리 투쟁의 일정한 시기 동안에만 그러합니다. 권력쟁취를 위한 투쟁 기간 중에, 낡은 국가기제를 파괴하는 것이 필수적인 시기에는 문맹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파괴를 위한 파괴를 행하고 있을 뿐입니까? 악화되어가는 문맹은 재건의 업무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중략) 그들 대부분은 구체제 하에서 자랐으며, 그래서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어떠한 문화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지식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중략) 인민에게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교육과 훈련은 관료주의를 극복하고 근절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Lenin, On literature and art, Moscow, Progress, 1976, pp. 276-277. 번역은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334-335.)

 

65) 수치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비도시 지역 문맹률은 평균보다 훨씬 높은 42%라는 주장도 있다. Cheryl LaBash, “Cuba teaches the world to read”, 2007. 1. 7., http://www.workers.org/2007/world/cuba-0111/

 

66) Yo sí puedo, 영역하면 Yes, I can. Cheryl LaBash, 같은 글.

 

67) Julie Marie Bunck, 같은 책, p. 26.

 

68) United Nations(UN) World Population Projects, The 1998 Revision Volume 11: Sex and Age (Median Projections for 2005-2080), United Nations, 1999, G. Edward Ebanks, “Population challenges: Cuba and the Dominican Republic”, p. 8.에서 재인용. 이 논문은 인터넷 검색으로 조회함. 당시 쿠바 인구는 자료에 따라 600만에서 700만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69)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관따나메라>는 배경음악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이야기 전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변형된 가사와 적절한 편곡은 영화의 주제와 정서를 더욱 선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70) Richard Levins, “How to Visit a Socialist Country”, Monthly Review, 2010. April, p. 6. 쿠바에서는 이혼율이 높은데 이는 결혼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고 있음을 뜻하지만, 많은 쿠바의 가정에서 아직도 구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71) 쿠바 헌법(Constitución de la republica de Cuba)은 아래 싸이트를 보라. http://www.cuba.cu/gobierno/cuba.htm ‘constitution of Cuba’ 정도로 검색하면 영문번역도 쉽게 찾을 수 있다.

 

72) 영화 루씨아에서 등장하는 세 여성을 비교해 보라. 대(對)에스빠냐 독립 투쟁기의 부르주아 가문 출신 루씨아, 바띠스따 반독재 투쟁 당시의 노동자 루씨아, 그리고 혁명 이후의 농민 루씨아를 비교하면서 영화를 독해하는 것은 감상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73)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p. 81-87. 그리고 http://en.wikipedia.org/wiki/Assata_Shakur/을 요약한 것이다.

 

74) 마이크 곤잘레스,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 책갈피, 2005, p. 154.

 

75) 실제로 피델은 동성애자에 대해 편견을 담고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그가 쿠바의 혁명의 수뇌임을 감안할 때 그것이 쿠바의 동성애자 관련 정책집행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76) 이상은 다음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251-254.

 

77) Mariela Castro Espín[1962-]. 피델 이후에 국가 평의회(Consejo de Estado) 의장직을 맞고 있는 라울 까스뜨로의 딸이기도 하다. 피델 까스뜨로가 초기에 지니고 있던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데 그녀가 많은 기여를 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글이 쿠바 출신 미국인 호르게 호르헤 레이에스(Jorge Reyes)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다. 이 블로거는 1992년에는 까스뜨로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보다 철저히 파악해 봐야 할 것이다. http://the-reyes-report.blogspot.com/2008/06/free-sex-education-in-cuba.html

≪아바나 타임즈(Havana times)≫에 실린 달리아 아꼬스따(Dalia Acosta)의 “Mariela Castro’s Hopes for Cuba”와 같은 기사도 참조하면 마리엘라 까스뜨로의 정책에 대해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http://www.havanatimes.org/?p=10543

 

78) Julie Marie Bunck, Fidel Castro and the quest for a revolutionary culture in Cub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p. 29. 이 책은 쿠바의 문화‧예술 투쟁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반공주의적 관점에 유의해서 읽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79) Julie Marie Bunck, 같은 책, p. 27.

 

80) 호찌민은 미국과 전쟁이 아직도 다 끝나지 않은 시기에 베트남의 젊은 학생들을 해외로 유학보내는 조처를 단행했다. 이들이 새로운 베트남 건설의 주체가 되었다. 이후 베트남이 수정주의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81)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590-591.

 

82) MEW, Bd. 19, S. 32. 번역은 박종철 출판사 판 ≪저작선집≫ 4권, 2005, p. 389.

 

83) ferment. 러시아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брожение가 영어의 ferment에 정확히 대응하는 단어이며, 명사 ‘발효’와 동사로 ‘발표하다’를 기본적인 뜻으로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자극’으로 옮겨 보았다.

 

84)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1, Moscow, Progress, 1963, p. 295. 번역은 ≪레닌 문학예술론≫, p. 201. 위 내용은 1920년 10월 2일 “러시아 공산주의 청년연맹(꼼쏘몰. Российски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союз молодёжи, РКСМ.)” 제3차 전러시아 대회에서 했던 연설 중 일부이다.

 

85) Lenin, On literature and art, p. 278. 번역은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336-337.

 

86) Julie Marie Bunck, 같은 책, pp. 42-43.

87) Julie Marie Bunck, 같은 책, p. 49.

88) Julie Marie Bunck, 같은 책, p. 37.

 

89)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629.

 

90) ≪정세와 노동≫ 제50호(2009. 10.), pp. 7-8.

 

91) 아마도 10월 22일자 연설인 것으로 추측한다.

 

92) 바만 아자드,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사회주의 국가 쏘련을 해체시킨 요인들≫, 노사과연, 2009. pp. 162-163.

 

93)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307. 아직도 쿠바 관따나모에 미해군 기지가 있는 것을 쿠바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94) 사사끼 타츠오(佐々木辰夫),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0)”, ≪정세와 노동≫ 제54호(2010. 2.)

 

95)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638.

 

96) 영화 <저개발의 기억>에 마오쩌둥의 어록 “이데올로기 문제와 옳고 그름을 해결하기 위해 행정적 규제나 억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소용이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해롭다”는 발언이 등장한다. 이것은 여기서 인용한 까스뜨로의 평가와 다른 내용의 흥미로운 발언이다.

 

97)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29, Moscow, Progress, 1963, pp. 71-72. 번역은 ≪레닌 문학예술론≫, pp. 174-175. 레닌은 부르주아출신의 전문가에 대한 설득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규율 창출의 필요성을 동시에 역설하고 있다.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의 극좌경적 조치와 이로 인한 희생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혁명사에 대한 치밀한 학습과 오류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98) 문영찬, “등소평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비판”, ≪노동사회과학≫ 제1호, 노사과연. 2008. p. 267.

 

99) 문영찬, “쏘련 사회주의의 흥망과 스탈린”, ≪노동사회과학≫ 제2호(2009)를 참조하라. 또 알렉산드르 도브젠꼬(Олександр Довженко) 감독의 1930년 영화 <대지(Земла)>도 당대의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다.

 

100)  Leo Huberman & Paul M. Sweezy, 같은 책, pp. 148-149. 번역은 ≪쿠바혁명사≫, p. 165.

 

101) 그러나 중국의 패권주의 또한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을 비롯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사사끼 타츠오(佐々木辰夫), “아프가니스탄 4월혁명(10)”, ≪정세와 노동≫ 제54호(2010. 2.).

 

102)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623. 번역에 약간 어색한 부분이 있는데 원문을 확인하지 못하여 그대로 인용한다.

 

103) ‘친 스딸린주의적’이라고 평가받는 헝가리의 루카치는 스딸린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오히려 말년의 루카치에 대해서는 수정주의자라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루카치는 스딸린이 ‘여러 중요한 문제를 두고는 잘못된 혹은 적어도 과장된 입장을 취했으며 또 이러한 입장이 그의 이론적‧실천적 태도를 하나의 독자적 방법으로 굳어지게 했’고, ‘스딸린 시대의 심각한 후유증에 대해 공정하고 보다 이상적으로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루카치는 ≪미학≫(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1972년도에 출판된 축약본이며 아직도 루카의 미학이 완역이 되지 않았다.)에서 스딸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즉 사회주의가 우선은 수십 년에 걸쳐 하나의 고립된 국가에서만 성립될 수 있었고, 이 국가가 끊임없이 외국군대의 간섭에 시달림으로써 구체제 복고로의 위험에 노출되었으며, 그 밖에도 단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가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는 등의 사실들은 초기 몇십 년 동안의 발전에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무엇보다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된 밀어붙이는 식의 강요된 생산발전, 특히 중공업의 발전은 전체 인민에게 너무 과도한 과제와 짐을 안겨주었고 그 짐을 지속적으로 짊어지고 그 과제를 관철시키는 일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는 객관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중략) 그래도 레닌 사후에는 위에서 언급한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평가하고 일국 사회주의라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모든 필요한 결론을 이끌어낼 마음의 자세와 능력을 가졌던 유일한 사람은 스딸린이었다는 점은 강조되어야만 한다. (중략)

  쏘련에서 문맹이 사라졌는가 하면 고도의 지적능력을 갖춘 광범위한 일군의 사회주의적 엘리트가 생겨나고 생산력의 발전으로 쏘련은 한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막강한 산업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만 할 것은 세계를 히틀러의 지배로부터 구해준 것은 어디까지나 쏘련의 힘과 확고한 임전태세였다는 점이다. (루카치, ≪미학≫, 제4권 미술문화, 2002, pp. 254-256.)

 

루카치는 참으로 극악한 스딸린주의자임에 틀림없다! 한편으로 루카치의 스딸린 비판은 수정주의당의 총수 흐루쇼프의 ‘개인숭배 비판’ 이후의 조건에서 보다 구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루카치가 스딸린 비판과 극복의 지점을 정확히 파악한 것인지 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학습과 토론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스딸린의 극복이라는 것은 21세기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우리가 필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 루카치가 ≪미학≫에서 제기한 ‘탈인간중심화의 방법론’에 근거한 ‘예술의 해방투쟁’이 그 비판과 극복의 초점을 정확히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지니고 있다.

 

104) 이러한 낙인찍기는 오히려 맑스-레닌주의자를 일컫는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들어야 할 지경이다. 물론 저들이 말하는 ‘스딸린주의’가 허구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예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악마주의’가 허구인 것과 마찬가지다.

 

105) 쿠와하라 코레히또(藏原惟人), ≪문화활동 세미나≫, 공동체, 1988, pp. 89-90.

 

106) “쿠바에는 인간에 대한 우상숭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쿠바에서 현존하는 지도자들 이름을 딴 공식 사진이나, 거리 혹은 공원이나 학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유네스코(UNESCO) 전 총재, 페데리꼬 마요르(Federico Mayor)와의 인터뷰(2000년 1월 28일) 중에서. 피델 까스트로, ≪들어라! 미국이여: 카스트로 연설모음집≫, 산지니, 2007, p. 54.

 

107) 그러나 ‘언론의 자유’는 항상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언론에 대한 사적소유의 자유를 지고의 신성한 가치로 받드는 것, 혹은 반혁명을 선동할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느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28. Moscow, Progress, 1963, pp. 96-98. 원문은 Правда(쁘라브다), 202호(1918. 9. 20.), 번역은 ≪레닌의 문학예술론≫, pp. 163-165.

 

108) “마요르: 살아 있는 신화인 것이 당신의 특권인가? 당신은 죽은 후에도 계속 신화로 남을 것인가?

 까스트로: 나는 신화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나를 당신이 말하는 신화로 변모시켰다. 만약 내가 살아있는 신화라면 그것은 미국의 무수한 암살시도의 실패 덕분이다. 하지만 물론 나는 죽은 후에도 계속 신화로 남을 것이다. 그러한 막강한 제국에 반대해서, 그렇게 오래 투쟁해 온 족적을 없애버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겠는가?” (유네스코(UNESCO) 전 총재, 페데리꼬 마요르(Federico Mayor)와의 인터뷰(2000년 1월 28일) 중에서. 피델 까스트로, 같은 책, p. 55.)

 

109) 배윤경,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빅토르 하라와 누에바 깐씨온≫, 2000, p. 93에서 재인용.

 

110) 한편 아옌데 정권의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정부의 무리한 국유화와 퍼주기식 복지정책’이 ‘경제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을 꼽는 경우도 있는데(배윤경, “남미의 민중음악 —새로운 노래(Canto Nuevo)를 중심으로”) 이것은 아옌데 정권에 대한 호의를 지닌 것일지라도 원인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부르주아들이 ‘좌파정권’을 비판할 때 흔히 동원하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혁명을 굳건하게 하는 요인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아옌데 정권이 ‘민주적’ 선거 교체 이후의 권력 장악과 조직화에 실패했다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111) 빅또르 하라의 Estadio Chile의 가사 후반부. Estadio Chile는 빅또르 하라가 죽어간 공간이며, 또 현재는 배우자 후안 하라가 설립한 빅또르 하라 재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가사 번역은 웹 상에서 아이디 Yupanqui님의 번역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을 사과드린다. 상업적인 목적의 출판이 아니니 널리 이해해주길 부탁드린다.

 

112) 후안 하라,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삼천리, 2008, pp. 106-107.

 

113) 후안 하라가 목격한 혁명 초창기의 생동감은, 현재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른 쿠바의 국립 발레학교(Ballet Nacional de Cuba)로 이어진다.

 

114) 후안 하라, 같은 글, pp. 335-336.

115)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76.

116) Julie Marie Bunck, 같은 책, pp. 3-4.

117) 쿠와하라 코레히또, 같은 책, p. 257.

 

118)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들은 아메리카(América)라는 단어를 미국(米國)이 독점하여 패권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분개한다. 아메리카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이지 북 아메리카의 한 국가를 지칭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119) 이곳의 서술은 많은 부분 웹상에서 발견한 문서,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NUEVA CANCION) 운동”에 기반한 것이다. 웹싸이트 주소는 아래와 같다.  http://myhome.hanafos.com/~letras/musica/cancion.htm 필자가 드러나 있지 않는데 신현준의 글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여기에서 ≪수염난 악어≫의 원어 표기를 제시하고 있지 않기에, 그것이 정확히 어떤 잡지인지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120) Psychedelia. 60년대 말 서구 록(Rock)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등장한 하위문화로 반전운동, 약물을 통한 환각체험, 히피즘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 반문화적 성격을 지닌 원초적 저항성을 담은 것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이것은 상업화의 경로를 피할 수 없었다.

 

121) 이영준, “정치 포스터와 이미지 조작”, ≪문화과학 창간호≫, pp. 228-229.에서 약간의 오류 수정 후에 인용하. OSPAAAL의 홈페이지도 있으니 한번 들어가봐도 좋을 것이다. http://www.ospaaal.com/ 정치 포스터 운동을 고민하는 동지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것을 확신한다.

 

122) 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878&t__nil_main_introduce=more

 

123)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135.

 

124) 김효진, “정신혁명을 강요받았던 죽은자의 노래”, ≪객석≫, 1997년 8월호,

p. 140.

 

125) 바만 아자드, 같은 책, p. 147.

 

126) 쿠와하라 코레히또의 글에서 읽었는데 정확한 인용은 하지 못한다.

 

127)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113.

 

128) <세계테마기행: 매혹의 땅 쿠바> 제4부, EBS, 2008.을 보라.

 

129) Simon Broughton & Mark Ellingham, 같은 책, pp. 408-413. 음악적 근원과 내용에 관련해서 주요한 참고자료로 삼았다. 또한 Ted A. Henken, 같은 책, pp. 347-351도 좋은 참고자료를 제시한다. 누에바 뜨로바를 다룬 단행본으로 (Dr. Cristobal Diaz Ayala, Musica Cubana del Areyto a la Nueva Trova, Ediciones Universal, 1993.)도 있는데 에스빠냐어의 문외한이라 거의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 책은 마이애미에서 출간된 것이기에 독해할 때 주의가 필요하리라 예상한다.

 

130)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97.

 

131) 자세한 내용을 아래를 보라. Stanley Sadie(Editor),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vol. 19, Macmillan publishers, 1980, pp. 189-208.

 

132) 기예르모 빌라르의 인터뷰. 출처는 http://blog.naver.com/sabaino/

 

133) La Bayamesa. 뜻은 ‘바야모(Bayamo)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 곡은 이후에 쿠바의 국가가 된다. http://en.wikipedia.org/wiki/La_Bayamesa 바야모는 온갖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미군의 수용소가 있는 관타나모(Guantanamo)에서 위도 상 일직선상 서쪽인 쿠바 남단에 있으며 쿠바 그란마주의 주도이다.

 

134) 러시아 혁명기에 적군도 ‘불가강의 뱃노래’에 맞추어  백군을 격퇴하였다. 리우스,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 오월, 1988, p. 19에 따르면 이 곡은 모차르트를 표절한 곡이라 한다. 이곡은 실제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제1막에서 바리톤이 연기하는 피가로가 부르는 아리아, “Non più andrai(이젠 날지 못하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에스빠냐의  독립투쟁의 긴급한 상황에서 곡이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표절’은 리우스의 표현대로 그리 흠잡을 일이 아니다. ≪정세와 노동≫ 제55호(2010. 3.), pp. 120-121.

 

135) 관따나모의 여인이라는 뜻. 한국에도 재즈곡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이곡은 1963년 미국 저항포크의 선구자 피트 씨거(Pete Seeger)가 쿠바 혁명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1963년 카네기 홀에서 부르기도 하였다.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92. 1960년대 이후 이 곡은 전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여, 한국에서도 “유복성과 신호등”을 비롯한 라틴 음악 밴드가 이 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136) 보떼구이따는 지명이며 카페의 이름은 ‘정중앙의 보떼구이따’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이 카페는 지금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남아 있으며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던 곳이다. 음악인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방문한다. 악사들의 공연도 자주 있고, 자연스럽게 악기들을 연주해볼 수도 있다.

 

137) 쿠바의 주요한 음악적 전통이다. 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아프리카적인 리듬의 영향력을 간직하던 음악이 집단 음악 축제를 거치면서 구체화되었다. 쿠바의 거의 모든 음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138) 서툴지만 과학기술 발전의 도움을 받아서 직접 번역해 보았다.

 

139) 체 게바라는 1965년 연설에서 혁명은 ‘새로운 인간(hombre nuevo)’을 형성하는 것이야 함을 역설했다.

 

140) Mercedes Sosa[1935-2009]. 아르헨티나와 라틴 아메리카 음악의 대모로, 그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로 생각된다. 서거 직전에는 샤키라(Shakira)와 함께 씰비오 로드리게쓰의 “망치(La maza)”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공연에서 라틴 음악의 ‘수퍼스타’ 샤키라가 쏘사에게 존경어린 눈빛을 보내는 장면은 유튜브(http://youtube.com)에서 검색하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141) M2U라는 음악 재발매 회사(현재는 ‘미디어 아르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에서 재발매 되었다. 음반 커버를 제대로 재현하고 있고 무엇보다 가사에 대한 번역을 담고 있기에 추천한다. 이 이후에 인용하는 번역 가사는 여기서 발매된 음반의 해설지에 담긴 정승희님의 것에 기반한 것이며 필자가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음반을 굳이 구하지 않더라도 간단히 검색만 한다면 음악을 듣거나 파일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량 발매되어 절판된 것이라 수입음반이나 중고음반을 찾지 않는다면 현재 음반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편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다.

 

142) Howard J. Blumenthal, The world music CD listener’s guide, Watson- Guptill Publications, 1998, p. 140

 

143) ‘시인과 촌장’이란 팀에서 활동하던 대중음악인이었으나 현재는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144) Noriko Manabe, “Lovers and Rulers, the Real and the Surreal: Harmonic Metaphors in Silvio Rodríguez’s Songs”. http://www.sibetrans.com/trans/trans10/noriko.htm

 

145) 여기서 그것(Eso)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칠레혁명, 빅또르 하라, 혹은 칠레 인민, 아니면 칠레의 아옌데 정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46) 가사 번역은 ≪정세와 노동≫ 제50호(2009. 10.)에 권두시로 실린 것이다. 원문은 같은 곳에 소개하였기에 생략한다.

 

147) Fidel Castro, Selected Speeches of Fidel Castro, Pathfinder, 2004, pp. 33-40. 이 출판사는 뜨로츠끼주의의 한 분파가 주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 실린 잭 반스(Jack Barnes)의 글에는 쿠바 문제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태도를 비판하고 다. 쏘련에 대해 적대적이나 쿠바와 쏘련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148) 에스빠냐어 가사는 번역이기에 생략한다. 1967년 Verlag에서 출간한 20권 짜리 브레히트 전집(Gesammelte Werke)에서는 시 원문을 찾지 못하였다. http://www.bertolt.com/bertolt_brecht_quotations.html에서는 영역한 시를 볼 수 있다. 브헤히트의 어머니(Die Mutter)에서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149) 심영보, ≪월드뮤직, 세계로 열린 창≫, 해토, 2005, p. 230.

 

150) Trad Szulc: Fidel: A critical portrait, Avon Books, 1986, pp. 719-721. 단 이 책은 허스트 재벌(The Heart Corporation) 산하의 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노골적인 반공서적임에 유의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마리오 쏘사,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1)”, ≪정세와 노동≫, 2008년 9월호를 참조하라. 

 

151) 정승희의 가사번역은 ‘신성한 피흘림’으로 오역하고 있다. ‘sabia’는 넓은 의미로 ‘현명한 이’를 가리키는 단어로 인?리겐찌아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맥락을 고려하여 선각자로 옮겨 보았다.

 

152) ‘유희의 외면’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영역하면 Outside of game.

 

153) 샤르트르와 같은 이는 이 사건을 이유로 쿠바 정부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백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으로 유명한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즈(Gabriel García Márquez)는 그 이후에도 끝까지 쿠바 혁명을 옹호하였다.

 

154) Richard Gott, 같은 책, pp. 247-248.

 

155) “중국에서 경극 배우가 총을 메고 혁명연극을 공연한다고 해서 일본의 가부끼(歌舞技) 배우가 가부끼의 형식으로 동일한 공연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쿠와하라 코레히또, 같은 책, p. 135.

 

156) 1997년 4월의 인터뷰 중에서. 번역은 http://cafe.daum.net/silvio의 성희님의 것. 약간 수정을 가해보았으나 어색한 부분이 남아 있다.

 

157) 마크 크레머, 같은 책, p. 166.

 

158) 로버트 E. 쿼크(Robert E. Quirk), ≪피델 카스트로≫, 홍익출판사, 2002, p. 733.

 

159) 로버트 E. 쿼크, 같은 책, p. 735. 이 책은 출간된 지 7년이 지나 번역된 것이다. 이 책은 반공주의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선전문구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쿠바 Yes, 양키 No! 지난 50년 동안 미국의 턱밑에서 온 몸으로 반미‧반제국주의를 외쳐온 라틴 아메리카 유일의 사회주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의 살아 있는 신화!” 아마도 선전문구에 ‘낚여서’ 책을 구입한 독자도

   꽤 있을 것이다.

 

160)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624-625.

 

161) 이명박의 녹색 성장은 농업 말살 정책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위선적인가?

 

162) 미제국주의자는 이를 두고 쿠바가 생화학 무기를 만들려 한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163) 자세한 내용은 신석호, ≪김정일과 카스트로가 경제위기를 만났을 때: 북한과 쿠바 경제의 위기와 개혁≫, 전략과 문화, 2008을 보라. 선정적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노골적인 반공서적이다. 그러나 자료를 비교적 꼼꼼하게 제시하고 있어 깊은 연구를 위한 준비자료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쿠바에서 직접 생산된 자료는 Jorge Mario Sánchez Egozcue and Julian Triana Cordoví가 2008년 11월 3일 발표한 논문 “An Overview of the Cuban Economy, the Transformations Underway and the Prospective Challanges it Faces”를 보면 좋을 것이다. 뜨리아나 꼬르도비는 방한해서 학술 교류를 갖기도 하였는데 아쉽게도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다.

 

164) 그들의 홈페이지 http://plp.org에서 읽을 수 있다.

 

165) 토니 클라크,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 뜨로츠끼의 주요 이론적 가정들에 대한 비판≫ p. 155. 부록으로 “에스빠냐 내전(1936-39)의 교훈”의 역자의 당부에서.

 

166)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644-649.

 

167)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652.

 

168) Simon Broughton & Mark Ellingham, 같은 책, pp. 410-411.

 

169) 1990년대 특별한 시기에 피델 까스뜨로에 대한 비판은 쿠바에서 널리 들을 수 있다.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쿠바 인민이 피델을 대체할 지도자로 일순위로 꼽는 이는 체 게바라였다.

 

170) 쿠바는 1960-70년대 싸이키델릭 시대에도 그랬듯이 제국주의 문화의 형식 그 자체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70년대 쿠바의 씬떼씨스(Síntesis)는 쿠바 흑인의 시점에서 서구의 프로그레시브록(progressive rock)과 싸이키델릭을 재해석한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서구의 문화예술 수용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문화에 담긴 세계관과 그 지배전략에 유의해야 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171) 문영찬, “등소평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비판”, ≪노동사회과학≫ 제1호, p. 271.

 

172)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335-336. 부시 행정부는 이를 거부하였음은 물론이고, 익사해가는 인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투입하여 혹시 있을지 모를 ‘소요사태’를 차단하는데만 전력을 다하였다.

까스뜨로는 체 게바라를 회상하며 “부상당한 동지는 물론 부상당한 적군까지 돌보아 주는 훌륭한 의사였다”고 말한다. 피델 까스뜨로 외, ≪레볼루션 —우리의 투쟁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미토, 2004, p. 11. 이 책에 아웅산 수지 같은 서유럽 지향주의자가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파씨스트 솔제니친 같은 인물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173)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613

174)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615.

 

175) Felipe Pérez Roque 1999-2009까지 외무장관 재임.

 

176)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부록. p. 713.

 

177)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p. 673-674.

 

178) 피델 까스뜨로‧이냐시오 라모네, 같은 책, p. 584. 2007년 SBS에서 방영된 <맨발의 의사들>을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79) 씰비오 로드리게쓰의 <삼부작(Tríptico)> 음반 중 제1부(1984년 작)에 수록되어 있는 “우리의 테마(Nuestro tema)”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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