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 ― 트로츠키의 주요 이론적 가정들에 대한 비판

 

토니 클라크(Tony Clark)

번역: 노사과연 편집부

 

 

예비적 논평

 

트로츠키는 레닌주의자처럼 사고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당연히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해당되는데, 그들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지혜를 발휘하여 이러저러한 과거의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옹호할지 모르지만, 현재의 구체적인 발전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사이비 좌익의 입장을 취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사이비 좌익주의

사이비 좌익주의의 좋은 사례는 상이한 사회체제를 가진 국가들 간의 ‘평화공존’이라는 쟁점에서 드러난다.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 추종자들은, ‘레닌주의적’ 평화공존과 ‘수정주의적’ 평화공존을 구별하지 않은 채, 쏘비에트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추구된 평화공존 정책을 비난해왔다.

그 차이는 물론 레닌주의적 평화공존은, ‘수정주의적’ 평화공존과 달리, 제국주의와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국내의 계급투쟁이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해방운동의 투쟁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어떤 사회주의 국가가 착취로부터의 인간해방이라는 대의를 배반하지 않고 제국주의와의 핵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든 비트로츠키주의자들이든, 사이비 좌익주의 요소들 모두에 의해 간과되거나 무시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쏘련의 붕괴의 문제와 관계가 있는데, 그 때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은 냉전을 가열시킬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인류를 핵전쟁이라는 대참화로 몰아넣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명확히 했던 때이자, 스탈린의 사망 후에 곧 권력을 잡은 쏘련의 수정주의적 지도자들이 고르바쵸프 시대에 그 사상적 파산의 최후의 단계에 달해 있던 때였다. 무엇이 수정주의를 발생시켰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이상의 것들은 중요한 점들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차이를, 1950년대 초에 수정주의자들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스탈린 지지자들은 숙청되었고, 스탈린 자신은 격하되었으며, 나중에는 공공연히 비난되었고 그의 저작들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혁명적인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의 지도자들 때문에 쏘련이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는 트로츠키주의와 맑스-레닌주의의 차이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이는 ‘구체적인’ 레닌주의적 추론과 트로츠키주의에 특징적인 ‘추상적인’ 사고 사이에 놓여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쏘련의 붕괴를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 쏘련은 스탈린 지지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붕괴된 것인가, 아니면 수정주의 지도자들이 스탈린 지지자들을 숙청했기 때문에 붕괴된 것인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에서 자본주의의 복고를 초래한 것은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가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와 관계를 끊은 수정주의 지도부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대중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지지자들인 부르주아 저술가들조차도 어떻게 모든 단계에서 쏘비에트 관료주의가 자본주의와 시장의 야만으로의 복귀를 방해하려 시도했는지 주목한다. 이것은 관료주의는 그 천성에 의해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때문에 예측될 수 있었다. 쏘비에트 관료주의가 이 점에서 달라야만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최고위의 관료와 특권층(the nomenklatura)의 성원만이 시장으로의 복귀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관료주의는 반혁명적이기 보다는 ‘보수적인’ 경향, 즉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트로츠키의 ‘반혁명적 관료주의’라는 이론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쏘련에서 전개되었던 반혁명 과정을 설명하는 틀을 제공할 수 없다.

 

두 개의 접근들

아래에 우리가 제출하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트로츠키주의의 ‘추상적’ 추론과 대비되는 레닌주의의 ‘구체적’ 추론이라는 두 개의 사고방식에 관한 것이다. 사고 혹은 추론의 수준에서의 이러한 차이, 따라서 방법과 이론의 수준에서의 이러한 차이는, 이 두 개의 조류, 즉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고, 역사의 해석에서만이 아니라 구체적 쟁점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계속 서로 대립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토대가 된다.

혁명의 문제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추상적 접근을 가장 통렬하게 생각나게 하는 것은 물론 그의 영구혁명론이다.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언급에 완전히 소스라쳐 놀랄 것이다. 그들은 물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트로츠키의 예측을 확증하지 않았던가?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하고 짜르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변형시키지 않았던가? 이러한 주장 또한 트로츠키주의의 추상적 추론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우리는 아래 글에서 보여줄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모순은 기본적으로 구체와 추상 간의 대립이라는 이론을 주장의 기초로서 세움으로써,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에 반대하는 트로츠키주의의 투쟁에서의 이 모순의 운동을 추적할 수 있다. 이는 물론 1917년 이전의 시기에 혁명적 맑스주의와 기회주의 간의 모순을 파악하는 데에서의 트로츠키의 무능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레닌이 볼 때는 1917년 이전의 트로츠키주의의 역할은 러시아 혁명운동에서의 기회주의를 위한 가림막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917년 혁명이 발발하기 불과 5년 전에 레닌은, 트로츠키가 “‘혁명적’ 미사여구를 늘어놓음으로써” 기회주의자들의 행위를 ‘방패막이 해주고’ 있으며, “… 거기에 트로츠키주의적 정책의 본질이 있다”(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17, pp 242-44)고 언급했다.

그리고 레닌은 그 후 1914년의 “통일의 호소를 빙자한 통일의 파괴”(Disruption of unity under the cover of outcries for unity)라는 글에서는,

 

“… 우리가 트로츠키주의를 ‘분파주의의 최악의 찌꺼기’의 대표자라고 부른 것은 정당했다”(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20, pp. 327-47)

 

고 쓰고 있다.

또한 레닌이 볼 때, 트로츠키의 특징 중의 하나는,

 

“… 맑스주의의 다양한 분파 사이의 이념적 불일치는 사회민주당의 20년 역사를 관통하고 있고 또 오늘날의 기본적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데도, 트로츠키는 그 불일치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고도 있지 않고 이해하고도 있지 않다.”(레닌: 같은 글)

 

는 것이었다.

이것은 1917년 혁명의 3년 전에 러시아 혁명운동에서 현실의 투쟁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조차 트로츠키는 의식적으로, 즉,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비판이었다.

그리고 같은 글에서 레닌은 트로츠키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한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 트로츠키의 공문구에는 반짝임과 요란함이 있지만, 그것들에는 내용이 없다.”(레닌: 같은 글)

 

트로츠키주의의 바로 이 ‘반짝임’ 효과야말로,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넘어왔지만 정치적으로 순진한 사람들, 즉, 맑스-레닌주의 속에서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에 봉사하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단지 맑스-레닌주의의 저작들을 학습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트로츠키주의자 그룹에서도 이러한 학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필시 레닌의 저작 일부에 담겨 있는 트로츠키에 관한 비판적 기록들 때문에 이들 그룹 속에서는 레닌의 저작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 학습이 방해받고 있다. 스탈린의 저작들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그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원컨대, 다음은 맑스-레닌주의의 관점에서 트로츠키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시의적절한 논문이었으면 한다.

 

런던에서,

2001년 7월 24일

 

 

서론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는 여러 상이한 수준에서, 즉, 정치적, 이론적 그리고 방법론적 수준에서 대답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방법론적 수준에 집중함으로써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이론적 토대들로 나아가고, 마지막으로 트로츠키주의와 관련된 정치적 결론들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는 트로츠키의 방법론적 접근을 논의하고, 이어서 그의 이론적 그리고 정치적 가정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로츠키주의의 정치적 그리고 이론적 가정들을 논의하고, 마지막으로 그 가정들의 뿌리를 추적하여 트로츠키의 방법론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방법론을 심사숙고하기 전에 맨 먼저 정치적 그리고 이론적 가정들로서 트로츠키주의와 조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후자가 아마 우리가 정치적 조류로서 트로츠키주의를 고찰할 때에 채택해야 하는 출발점일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현상의 수준에서 시작하여 외관으로, 즉 본질로부터 현상으로의 이행인 외관으로 옮겨갈 것인데, 그것은 이론적 수준에 변증법적으로 조응하는 것이다. 이 외관의 수준으로부터 우리는 계속하여 방법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것은 철학적 용어로 본질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상, 외관 그리고 본질, 혹은 정치, 이론 그리고 방법, 이 모두는 상호 연관되어 있고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비본질적인 것들은 가능한 한 최대한 버려야만 한다. 트로츠키주의는,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레닌주의와의 연관 하에서만 혹은 지금은 보편적으로 ‘맑스-레닌주의’라고 알려진 것들과의 연관 하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독자에게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역사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한 쟁점들, 혹은 두 개의 사상적 조류 사이에 나타난 모순들에 집중함으로써 이들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의 측에서는 이러한 차이들을 끊임없이 감추려 하거나, 알리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은폐 행위는 트로츠키 자신이 고무했던 관점, 즉, 트로츠키주의는 레닌주의의 연속이라는 주장, 혹은 한 트로츠키 그룹이 말하듯이, “트로츠키주의는 오늘날의 맑스주의다”라는 주장을 선전하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다.

우리로서 더욱 흥미가 있는 것은,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의 연속이라는 논쟁적인 주장이다. 첫 번째의 의문은 물론,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라면 왜 “트로츠키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주조한 것은 레닌 사후에 스탈린 혹은 트로츠키의 다른 적대자들이었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오래된 거짓말에 호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트로츠키와 그리고 실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라는 용어는 레닌 사후의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논쟁에서 생겨났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더구나 그 용어의 발명에 지노비예프가 책임이 있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은, 위의 예비적 논평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어떠한 실제적인 역사적 근거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라는 용어가 1917년 혁명 이전의 시기에 레닌 자신에 의해서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 명백하다. 이때가 바로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차이가 시작된 시기이다. 이 글의 목적은,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차이는 방법론적이고 이론적이며 정치적인 성격의 것들이라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정치적 수준에서만 이들 차이를 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언제나 틀림없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순전히 당파심에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평가라는 관점에서 트로츠키를 고찰하려면, 레닌주의와의 일면적인 차이만으로 트로츠키주의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차이들은 1917년까지 트로츠키를 볼세비즘의 외부에 머물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했지만, 그러나 트로츠키를 과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려면 어떻게 하여 그가 1917년에 볼세비즘에 결합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연관되어 있는 기회주의의 요소들이나, 고립에 대한 트로츠키 자신의 두려움을 우리가 무시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1917년에 그를 볼세비즘에 결합시켰던 트로츠키주의의 그 측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떻게 해서 트로츠키는 볼세비즘과 어느 정도 융합할 수 있었으며, 볼세비키의 활동에서 논쟁적이긴 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는가를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문건은, 트로츠키가 레닌과 차이가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의 연속이라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피상적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이 작업이 불필요한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공산주의 운동을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혀온 수정주의적, 우익적 일탈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앎이 정치적으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에 이끌리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우익 기회주의적 패거리들은 트로츠키주의를 위한 일종의 충원(充員) 매체이다. 이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레닌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익 기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 비판이 여전히 아주 중요한 이유이다.

1917년에 볼세비키당에 가입할 때에, 트로츠키가 당과 가지고 있던 관계가 결코 문제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실로 그 관계는 격렬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본질적인 차이들이 있었지만, 레닌은 당의 모든 지도적 참가자들과 차이가 있었다.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모순들을 악명 높게 했던 것은, 이들 차이의 질(質)만이 아니었고, 후에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 드러났던 일련의 쟁점들에 대한 갈등과 논쟁들이었다.

혁명가들 사이에는 물론 언제나 차이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트로츠키가 레닌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릇되었다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류는 대개 트로츠키의 입장 바로 그것이었다. 볼세비키당에 결합하면서 트로츠키는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반대의 어조를 낮추었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진실일 것이다. 후에 병과 죽음 때문에 레닌이 사라지자, 트로츠키는 볼세비즘을 다시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트로츠키주의는 볼세비즘에 대한 반대 속에서 태어났으며, 곧 다시 이러한 갈등의 상태도 되돌아간 것이다. 볼세비즘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단계의 반대가, 트로츠키의 주장에 의하면, 스탈린을 향한 것이었다는 점이 물론 달랐다. 이는, 트로츠키와 스탈린 사이에 레닌과 무관한 차이들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들의 통일은 방법론의 차원에서 찾아야만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트로츠키는, 명백한 정치적 이유들 때문에, 레닌주의를 공공연히 반대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는 스탈린에 반대하여 레닌주의를 옹호한다는 겉모습을 취했다.

트로츠키가 볼세비키당에 결합할 수 있게 했던 정체성의 요소들에 관한 앞서의 지점으로 되돌아 가보자. 트로츠키가 볼세비키당에 결합한 것은 주로 실천적 성격의 목적들 때문이었다. 트로츠키가 볼세비즘과 실천적ㆍ전술적으로 결합하게 된 것은 어떠한 이론적 공통성(theoretical subsumption)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볼세비키가 레닌 지도 하에 반자본주의적 혁명 단계로 계속 나아간 것은 이론적인 고려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의] 발전 때문이었다. 트로츠키가 볼 때, 이는 실제로 영구혁명의 실현이었고, 그리고 이를 근거로 그는 볼세비즘의 대열에 들어갔다. 1917년은,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에 가장 근접한 때였다. 이 시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관계는 적대적 갈등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트로츠키는 그러한 적대적 갈등을, 레닌이 생존해 있었을 때에는, 그럭저럭 억누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우 중요한 갈등의 에피소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트로츠키가 볼세비즘과 연합하고 있던 시기에도 매우 많은 갈등이 있었고, 이 때문에 레닌주의를 옹호한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은 명백히 엉터리다.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이러한 오래된 갈등들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트로츠키주의가 오늘날의 조건에서의 레닌주의의 연속이라는 주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트로츠키주의는 방법론을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트로츠키의 사상 형태를 채택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의 방법론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형태와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본질적인 점에서 트로츠키주의는 트로츠키주의로 남아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전술적 차이들은, 비록 그것들이 더욱 심각한 불일치의 조짐을 내포하고 있을 지라도, 제2차적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취급한다.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트로츠키주의란 레닌주의의 경쟁자라고 간략하게 대답할 수 있다. 이 점은 이러한 차이들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명백하겠지만, 이러한 차이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답변은 심히 불충분할 것이다. 기회주의는 종종 보호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주의는, 레닌주의에 반대하여 싸우지만, 레닌주의의 기치 하에 그렇게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트로츠키가 레닌주의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사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적 안내자로서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대체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적ㆍ정치적 성격의 다섯 가지 영역을 검토하는 것이다.

우리는 맑스-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대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음모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여기서 덧붙이는 것은 중요하다. 트로츠키가 매우 의식적으로 이것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똑같은 가정을 한다면, 이는 너무 단순할 것이다. 사실은 우리는 그것들에 정반대의 결론들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소부르주아적 절충주의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를 쉽게 혼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트로츠키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동의하기 때문에 또한 이러한 입장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당면한 문제는, 레닌주의와 대립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면서 트로츠키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자가당착은, 첫째로, 그들이 레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볼 때는,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에는 모순이 전혀 없거나, 아니면 아마도, 모순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더라도, 그것은 어느 것이나 러시아 혁명운동의 이미 혁명 전(前) 시기의 지난 일로 무난히 치부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트로츠키 자신의 태도였고, 따라서 그의 추종자들이 똑 같은 자세를 취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볼세비키들, 즉 맑스-레닌주의라고 알려지게 된 사람들에게는 혁명운동에서 ‘좌’와 우에 적수가 있었다. 레닌주의의 오른쪽의 경쟁자는 멘세비키, 즉 마르또프나 플레하노프 같은 사람들이었다. 레닌주의의 경쟁자로서 트로츠키는 ‘왼쪽’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때로 볼세비즘에 반대하여 멘세비키들과 합작했다. 레닌은 1917년 이전의 시기에 비판한 것도 바로 이 사실, 즉 그의 사이비 좌익적 입장이 자주 멘세비즘의 이익에 봉사했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문제 및 그에 관해 트로츠키가 취했던 태도와 관련하여 맑스-레닌주의의 사이비 좌익적 경쟁자로서의 트로츠키주의라는 견해를 확립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맑스의 영구혁명(revolution in permanence)이라는 용어에 대한 트로츠키의 해석의 문제로 돌아간다. 실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theory of permanent revolution)은 “트로츠키주의”라 불리게 되었던 것의 지적인 출발점이었다. “트로츠키주의”라는 이 용어는 1917년 이전에는, 우리가 앞서 지적하였듯이, 레닌에 의해서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레닌은 기회주의를 의미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했다. 예컨대,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와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조정자들’은 어떤 청산주의자보다도 더 유해하다. 신념이 있는 청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있어, 노동자들이 그들이 어디가 잘못인지 간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반면에 트로츠키 일파는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있고, 해악을 은폐하고 있어, 그 해악을 폭로하고 치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레닌, <<전집>> 제17권. pp. 242-44. 1911년 9월)

 

‘트로츠키주의’라는 용어의 내적인 의미는 레닌에게 있어서는 명백히 기회주의의 하나였다. 처음에 그 용어를 등장하게 한 것은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 간의 오래된 대립관계였다. 이미 보았듯이, ‘트로츠키주의’라는 용어는, 레닌이 볼 때는, 청산주의자들을 엄호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수사를 뇌까리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 용어는 트로츠키 자신에 의해 고안된 전설처럼 후일의 스탈린-트로츠키 논쟁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었다. 이 특히 논쟁적인 쟁점을 벗어나 이제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우리의 분석의 논리적 출발점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제 우리는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3.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트로츠키주의는 이념적으로 그의 ‘영구혁명’ 이론으로부터 시작된다. 트로츠키는 이 관점에서 결코 동요한 적이 없다는 것이 언급되어야만 한다. ‘영구혁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영구혁명론이 주장하는 바는, 노동계급이 러시아의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이끌어야만 하고, 국가권력의 소유라는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 단계, 말하자면 최소강령에 멈춰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 단계로까지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에 대한 반대로 일깨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노동자들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도와 후진적 러시아를 지원할 것이며, 그리하여 혁명을 영구적으로 만들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중심문제 즉, 어느 계급이 혁명을 이끌 것인가를 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레닌과 트로츠키 두 사람 모두 노동계급이 혁명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관점은 둘 다 모두 멘세비키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멘세비키들은,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도되어야만 하고, 노동계급의 역할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나리오에서는 노동자들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을 놀라게 하여 쫓아내어서는 안 되었다. 멘세비키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 사이의 동맹을 주장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는 그들 자신의 혁명으로부터 뒷걸음질 칠 것이며, 그것의 근본적 완수에 결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의 교훈을 무시했다.

부르주아혁명이 중도이폐(中道而廢)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레닌은 노동계급과 농민층의 동맹을 주장했다. 이들 두 계급이 부르주아 혁명의 근본적 완수에 가장 이해관계가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멘세비키들은 부르주아지의 지도력 하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을 지지한 반면, 볼세비키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동맹을 지지했다.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불일치가 드러난 것은 농민층 문제에 관해서였다. 의심할 바 없이 트로츠키는 농민층의 역할을 인정했지만, 또한 그는 농민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기도 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를 부인하면서, 이러한 비난은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스탈린주의자’의 분파적 고려에 따른 비방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층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역할을 과소평가했다고, 즉, 그것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논박할 수 있는데, 이는 트로츠키가 경험에 비추어 그의 이론을 갱신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글들에서 농민층의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를 시사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이것을 논박하는 것 같은 구절들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주의 깊게 고찰할 때, 우리는 트로츠키주의가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관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트로츠키주의가 농민층의 역할에 대한 부정확한 전술적인 이해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1922년에 자신의 저서 <<1905년(The Year 1905)>>에 쓴 서문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 그 역할의 아주 초기 단계들에서 봉건적 소유만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 역시 깊히 침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혁명투쟁의 첫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했던 모든 부르주아 집단들과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었던 농민층의 광범한 대중들과도 적대적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후진국의 노동자 정부의 입장에서의 압도적 다수의 농민들과의 모순들은 단지 국제적 규모에서만,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장(場)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하르펠 브라르, “트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Trotskyism or Leninism?), p. 117 중에서.)

 

라고 주장했다.

만일 “그 역할의 아주 초기 단계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층의 광범한 대중들”과 “적대적으로 충돌”하는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다면, 그 혁명에서 공산주의적 지도자들, 그리고 노동계급의 정치권력이 처음부터 그 운을 다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맑스-레닌주의자들이, 트로츠키주의는 시작부터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층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한다고 해서 누가 논박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트로츠키주의가 농민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는 맑스-레닌주의의 주장은 또 다른 트로츠키의 글에 의해 명백하게 예증될 수 있다. 거기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에 부르주아 혁명의 모든 짐을 지게 하는 우리의 사회-역사적 관계들의 본성은, 노동자의 정부에 대하여 거대한 어려움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또한 어쨌든 그 정부의 초기에 그 정부에 헤아릴 수 없는 이점들을 줄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트로츠키, “1906년의 결과들과 전망들”(Results and Prospects, 1906), <<영구혁명(The Permanent Revolution)>>, New Park Publications, 1962년 7월, p. 203)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이 “… 부르주아 혁명의 모든 짐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 위에 ...” 지우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맑스-레닌주의의 서투른 흉내라는 점은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해 초보적인 지식만 있어도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레닌주의에 대립한다는 것을 폭로할 수 있다. 레닌주의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짐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 위에 놓여 있다고 가르쳤다. 트로츠키주의와는 달리, 맑스-레닌주의는 어디에서도 러시아 혁명의 ‘모든 짐’이 프롤레타리아트만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트로츠키주의가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층의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로부터 시작했다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면, 적어도 편견 없는 사람에게는  트로츠키로부터의 또 하나의 인용으로 충분할 것이다. <<결과와 전망들>> 속에서 트로츠키는 1905년의 러일전쟁의 패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제국주의로의 길을 통해 내부적인 혁명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던 6월 3일의 러시아의 시도는 명백히 대실패로 끝났다. 이는 6월 3일 정권에 대해 책임이 있는 혹은 절반의 책임이 있는 당들이 혁명의 길을 택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혁명의 문제가, 지배계급을 제국주의의 길을 따라 더욱 더 몰아갈 군사적 재난에 의해 폭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국내의 유일한 혁명적 계급의 중요성을 배가할 것임을 의미한다”.(트로츠키, 같은 책, p 252)

 

이 구절은 트로츠키주의가 처음부터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생략법에 의해,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트로츠키가 여기서 “국내의 유일한 혁명적 계급”에 관해 서술할 때,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반면에 농민층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레닌주의와 달리, 트로츠키주의, 특히 초기의 트로츠키주의의 내부에는 농민층의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더 이상의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트로츠키주의와는 달리, 맑스-레닌주의는 어디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혁명에서 “유일한 혁명적 계급”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에서 노동계급이 “유일한” 혁명적 계급이라고 암시하는 것이 농민층의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농민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인가? 이 하나의 구절은 그 자체로서, 맑스-레닌주의를 반대하고 트로츠키주의를 지지하여, 트로츠키는 농민층을 결코 과소평가한 적이 없고, 따라서 이러한 비난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어떠한 시도도 분쇄한다. 노동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국내의 유일한 혁명적 계급”이었다는 관점은 볼세비즘의, 즉 맑스-레닌주의의 정반대의 관점이다.

트로츠키의 정말로 놀라운 또 다른 발언은, 그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자로서 농민층의 중요성에 대한 레닌주의적 이해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준다. 트로츠키는 인쇄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계속되는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맑스주의적 전통과 완전히 일치되게 레닌은 결코 농민층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동맹자로 간주한 적이 없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와는 반대로, 레닌으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 것은 농민층의 압도적 우세였다.”(트로츠키, <<영구혁명이란 무엇인가―러시아 혁명의 세 가지 개념들(What Is The Permanent Revolution―Three concepts of The Russian Revolution)>>, 1970년에 스파르타쿠스주의자 발간, 페이지 표기 없음)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동맹은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었으며, 한편 중농 및 빈농층과의 동맹은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떠받치는 전제조건이었다는 것은, 심지어 레닌의 글들을 서투르게 공부한 사람들에게도 누구에게나 레닌주의의 ABC이다. 트로츠키가 뻔뻔스럽게도, 레닌은 농민층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동맹자로 결코 간주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레닌을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도 무덤에서 일어나게 할 것이다. 이것은 레닌주의의 파렴치한 부정이며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대체하는 것이다. 만약 트로츠키가 무지에 의해 이런 발언을 했다면, 그것은, 트로츠키와 그의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추종자들이 레닌주의의 계속을 대변한다는, 이론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 의한, 이미 불가능한 주장을 더욱 더 약화시킬 뿐이다. 이들은 이렇게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차이들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론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지금 문제는, 레닌은 트로츠키가 농민층을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이것은 스탈린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후일의 비방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트로츠키로 하여금 이 성가신 문제에 답을 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레닌이 나를 농민층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난했을 때, 그는 내가 농민층의 사회주의적 경향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레닌이 볼 때, 농민층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독립성을, 농민층이 자신의 권력을 창출할 능력과 그것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독재 수립을 방해할 능력을 내가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트로츠키, 같은 책)

 

우리는, 이 글은 엉터리이며, 레닌이 트로츠키를 농민층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는 솔직한 인정만이 유일하게 취할 점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레닌이 사실은 농민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는 것을 실토한 후에 트로츠키는 재빨리, 농민층의 역할의 과소평가에 대한 비난은 레닌 이후에 시작되었다는 트로츠키주의자의 전설로 재빨리 돌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 문제에 대한 재평가는, 대체로 레닌의 와병과 죽음과 동시에 시작된 테르미도르 반동의 시기에 개시되었다.”(트로츠키, 같은 책)

 

그와는 정반대로, 트로츠키가 쏘련 공산당 및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대체하려는 헛된 시도를 한 것이야말로 레닌의 죽음 이후였다. 트로츠키가 언급하고 있는 재평가는 레닌주의에 사활적인 문제,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독재 하에서의 농민층의 역할의 문제이다. 트로츠키가 볼 때는, 레닌의 죽음 이후에,

 

“…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연합은 복고의 위험에 반대하는 본질적으로 충분한 보증으로, 그리고 쏘련 국경 내에서 사회주의가 달성될 것이라는 확고한 맹세로 선언되었다. 국제혁명의 이론을 일국사회주의 이론으로 대체한 후, 스탈린은 농민층에 대한 맑스주의적 평가를 ‘트로츠키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더욱이 현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 전체에 대해 소급적으로 그렇게 불렀다.”(트로츠키, 같은 책)

 

트로츠키는 맑스주의는 “농민층을 평가하면서 결코 비사회주의적 계급으로서 절대적이고 불변의 성격을 부여한 적이 없다”고 말했으면서도, 그는 그 문제를 구체적 방식으로 제기하여 필요한 결론들을 끌어내지 못했다. 트로츠키 자신의 말로, 맑스주의는 농민층을 평가하면서 결코 비사회주의적 계급으로서 절대적이고 불변의 성격을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는 트로츠키주의를 한층 더 폭로하는 것이다. 레닌의 글을 자세히 보면, 사회주의 하에서의 농민층의 역할의 문제에 대한 ‘재평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이 세계혁명의 이론을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대체했다는 중심적 전설을 소중히 하고 있다. 두 개의 이론, 즉 일국사회주의론과 세계혁명론이 존재한다는 이러한 양극단적인 개념은 순수히 트로츠키주의의 창작품이고, 사실상 그 가장 중요한 전설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지금은 농민층과 사회주의에 관한 레닌의 관점을 다룰 것이다.

레닌이 보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과 더불어, 수백만의 소농들과 동맹으로 결합하여, 그리고 협동조합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모든 대규모의 생산수단에 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이것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다.”(레닌, <<전집>> 제27권, p. 392)

 

더 이상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도 우리는,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념적 특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야만 하는 난처함을 어느 정도 느끼면서, 맑스-레닌주의는 쏘련에서 사회주의적 독재를 떠받치기 위한 관건적 조건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 즉 중농 및 소농의 동맹이었음을, 트로츠키가 경솔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재평가한 것이 아니라, 계속 견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전략적 노선과 관련한 맑스-레닌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형성하고 있다.

사실상 트로츠키는 농민문제에 대해서 가장 명확하게 그의 반레닌주의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농민문제를 그는 언제나 추상적으로 제기하는 경향이 있고,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고 나서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 점에 대한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10월 혁명 전에는 누구도 그리고 레닌은 더욱 더, 농민층을 사회주의 발전의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트로츠키, 같은 책)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동맹이 쏘련을 자본주의 복고로부터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었고 따라서 세계혁명의 확장은 필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그러나 스탈린의 글들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은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층의 역할 문제를 둘러싸고 볼세비즘은 오른쪽으로는 멘세비키와 싸웠고, 극좌쪽으로는 트로츠키주의 및 다른 사이비 좌익적 경향들과 싸웠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은 ‘사이비 좌익주의’의 하나였다. 그것에 대해 레닌은 ‘터무니없이 좌익적’이라고 언급했다. 이 이론은 휴지통에 버려졌을 것인데, 어떤 것이 발생하여 그것을 구원했고, 말하자면 그것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어떤 것은 1914-19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은 어느 정도 트로츠키의 이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전쟁이 없었다면 트로츠키의 이론은 잊혀졌을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의 중요성은, 그것이 볼세비키로 하여금 짜르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레닌이 트로츠키의 견해로 건너갔다는 인상을 주었다.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끄는 투쟁을 대요(大要)를 서술한 “4월 테제”를 처음에는 반대했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같은 사람들의 핵심적인 주장이었다. 심지어 트로츠키조차도 그의 자서전에서 레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사태의 경과로 산수를 대수학으로 대체됨으로써 우리의 견해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트로츠키, <<나의 생애(My Life)>>, Pelican, p. 345)

 

노동계급은 실제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끌었고, 그리고 나서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환시켰다. 레닌은 이미 이러한 가능성을 고수했었다.

 

“우리의 강령은 낡은 것이 아니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의 새로운 최소강령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살아남아 민주주의 혁명의 현실적 승리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또한 완전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분투하는 노동계급 당의 본성과 목표와 일치하는 새로운 행동의 방법도 가지게 될 것이다.”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Progress Publishers, 모스크바, pp. 54-56)

 

그리고 다시 <<두 가지 전술>>에서 레닌은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과 대비시킨다. 우리 모두는 그것들을 엄격하게 구분할 절대적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의 과정 속에서 두 혁명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요소들이 뒤섞일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있는가? 유럽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가 수많은 사회주의적 운동들과 사회주의를 수립하려는 시도들과 친숙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유럽에서 장래의 사회주의 혁명은 민주정치의 장에서 이행되지 않고 남아 있는 많은 것들을 여전히 완수해야만 하지 않겠는가?”(레닌, 같은 책, pp. 82-83)

 

더 나아가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의심의 여지없이 단지 경과적이고 일시적인 사회주의적 목표이지만,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에 이 목표를 무시하는 것은 명백히 반동적일 것이다.” (레닌, 같은 책, p. 83)

 

레닌이 볼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수립할 터였다. 이것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모든 짐’을 져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견해는 말할 것도 없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일한 혁명적 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위에서 개괄된 트로츠키의 견해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레닌의 관점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독재는 최소강령, 즉 부르주아 혁명의 요구들을 수행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글로부터 우리는, 혁명의 부르주아 단계는 사회주의 단계와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최소강령, 즉 부르주아 혁명과 최대강령, 즉 사회주의는 레닌이 볼 때 두 개의 서로 무관한 과정이 아니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혁명적 독재는 과거와 미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의 과거는 봉건주의에 대한 투쟁이며, 그것의 미래는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인데, 자본주의에 대한 이 투쟁은 민주주의 단계에 존재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체로서 농민층의 단일한 의지에 종말을 초래할 것이다.

 

“러시아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투쟁이 끝나고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가 러시아에서 지나가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에는 민주주의적 독재 등에 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의지의 단일성’에 대한 말하는 것조차 조소거리가 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독재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것이고, 더욱 자세하게 그것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레닌, 같은 책, p. 84)

 

다른 말로 하자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독재로 성장할 것이다. 약간의 수정이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큰 틀에서는 정확하게 러시아 혁명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혁명은 처음에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초래했고, 이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 독재로 전화하였다. 이론은 레닌이 인정했듯이 언제나 상황의 구체적 발전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독재의 구체적 형태를 예언하지는 않았다.

또한 기회주의자들이, 노동자와 농민의 쏘비에트를 통하여 혁명의 첫 단계를 지배할 것이고 민주주의 혁명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함께 일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2월부터 10월까지의 이 8개월의 준비기간은 대중들에게, 기회주의자들을 내쫓고 사회주의 독재의 새로운 정부를 지지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끔 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리고 그것은 트로츠키의 예측과는 어떻게 달랐던가?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에 노동계급은 최소강령을 수행하고 그리고 나서 계속하여 사회주의로, 즉 최대강령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발전은 단지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끼어듦으로써만 가능했다. 이 전쟁이 없었다면, 그토록 단기간에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했던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1차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조성된 조건들이 없었다면, 두 개의 요인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의 예측에 반대로 작용했을 것이다. (1) 전체적으로 농민층은 사회주의로 즉각적인 이행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계급 세력의 균형이 멘세비키와 부르주아지에게 유리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2) 전시라는 특수한 조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했다면, 반혁명을 지지하는 세계 제국주의의 간섭이 틀림없이 더욱 더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1914-18년의 전쟁은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이 영구혁명이라는 그의 의견의 사이비 좌익적 본성을 감출 수 있게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전쟁에 의해 조성된 조건이 없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시도하거나 옹호했다면, 그것은 노동계급의 확실한 패배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점인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볼세비키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부르주아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이라는 추상적 테제로 건너뛰었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라는 레닌의 입장을 확증했지만, 그러나 이는, 레닌이 “4월테제”에서 말했듯이, 보다 독창적인 형태로, 그리고 나아가서는 전시(戰時)라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졌다.

레닌과 볼세비키들은, 추상적 이론의 수준에서, 러시아의 상황에서 즉각적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촉진시킨 것이 아니었다. 사실 레닌은 맑스주의에 따라서 이러한 발전을 배제했다.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은 본성상 부르주아적인 것이었고 공화국으로 이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키는 문제는 외부적 그리고 내부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 내부적 요인은 노동계급의 의식성과 조직화의 정도였다.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끼어듦에 따라 레닌의 계산이 바뀌었다. 전쟁은 혁명 과정을 가속시켰고, 그리하여 혁명의 민주주의 단계와 사회주의 단계 사이의 거리를 좁혀 민주주의 단계로부터 사회주의 단계로의 전환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레닌이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을 주장한 것은, 트로츠키의 이론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시 상황이 혁명의 과정을 가속시켜 사회주의 단계가 시작되는 데에 유리한 조건들을 조성했기 때문이었다. 가속화된 혁명 과정과 유리한 조건들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노동계급이 권력을 소유했다는 것만을 근거로 한 사회주의 단계로의 전환은 좌익적 모험주의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명확한 경계선을 본다. 레닌의 전제가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조성된 구체적 상황이었음에 반해서, 트로츠키에게 있어서는 그 전제가 ‘영구혁명’이라는 추상이었다. 그들 사이의 방법론적 대립이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인식상의 상이(相異)의 본질인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방법론적 그리고 이념적 차이는, 레닌의 1917년의 “4월 테제”와 1928년에 갱신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을 비교하면 명백하다. ‘4월 테제’에 개괄된 정책의 배경과 토대는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그 테제의 중심적 무대에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전진을 결정하는 주요하고 기야 요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1928년에 갱신하여 제시한 그의 이론을 검토하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을 사회주의로 이끌어 나아가도록 제국주의 전쟁이 열어젖힌 가능성 사이의 연계를 트로츠키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영구혁명에 관한 1928년의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어디에서도 제국주의 전쟁과,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볼세비키의 전술의 변화를 관련지어 언급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2류의 부르주아 역사가들조차도 범하지 않는 오류이다.

사실, 레닌과 트로츠키 간의 방법론상의 진정한 모순을 폭로하고 있는 것은 바로 트로츠키의 1928년 저작이다. 다음의 서술이 이것을 보여줄 것이다. 심지어 혁명 후 11년 뒤에도 레닌주의에 반대하여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역사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 정부란 결코 있었던 적이 없다.”(트로츠키, <<영구혁명>>, New Park Publications, 런던, 1962, p. 4)

 

레닌 사후의 그의 모든 글 중에서도 레닌에 대한 트로츠키의 거부는 여기에서 아마 가장 노골적일 것이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는 정반대의 것을 가르친다. “4월테제”의 레닌은 트로츠키주의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1917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서술하고 주장했다.

 

“‘노동자와 병사 대표자 쏘비에트’―거기에 이미 실제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있다.”(레닌, “4월 테제”, <<전집>> 제24권, pp. 42-54)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대립을 설명하기 위해 더 이상의 다른 어떤 글도 필요하지 않다. 레닌이 더하기를 말할 때 트로츠키는 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절(節)에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관해 트로츠키 및 멘세비키와 의견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혁명을 위해 필요한 계급들의 동맹에 관해서, 그리고 이 계급들 중 어느 계급이 지도해야만 하는지에 관해서 멘세비키와 달랐지만, 그는 혁명이 자본주의적일 것이며 공화국을 초래할 것임을 인정했다. 레닌이 볼 때 혁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 사이에는 어떤 만리장성도 결코 없었는데, 그러나 혁명의 심화된 발전은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요인들에 달려 있을 것이었다.

1914-18년의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은 혁명의 과정을 가속시켰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유리한 조건들을 조성하였다. 이것이 볼세비키의 전술에 변화를 가져왔다. 트로츠키는 반면에 농민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했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일한’ 혁명적 계급이고 혁명의 ‘모든 짐’은 노동자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그의 초기의 이론에서는, 레닌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또한 레닌주의에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그것은 결코 역사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트로츠키는,  제1차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조성된 조건들이야말로 그토록 단기간에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했음을 깨닫지 못하고, 부당하게도 레닌이 자신의 이론으로 건너 왔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의 지도적인 트로츠키주의자 알랜 우즈(Alan Woods)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다.

 

“역사가 현실적으로 내던져버린 ‘민주주의적 독재’를 구체적으로 실현했던 것은, 합병정책을 추구하는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했으며, 민주주의 혁명의 근본적인 임무들은 단 하나도 해결할 수 없었고 심지어 진지하게 제기조차 못했던 자본주의 정부였다. ‘민주주의 독재’라는 대수학(代數學)의 공식은 역사에 의해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왔다.”(알랜 우즈ㆍ테드 그랜트, <<레닌과 트로츠키, 그들은 실제로 무엇을 지지했는가(Lenin and Trotsky, What They Really Stood For)>>, p. 75)

 

비록 이것은 부당하게도 임시정부가 민주주의 독재를 실현했다고 주장하려고 했던 수정주의자 몬티 존슨에 대한 답변이었지만, 우즈와 그랜트 자신들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참으로 그들은 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독재를 혼동하고 있다. 민주주의 독재의 본질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체로서 농민층의 동맹이었던 반면에 임시정부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동맹이라는 멘세비키 정책의 실현이었다. 볼세비키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폭로하고 분쇄하려 했던 이 동맹은 본질적으로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사회민주주의와 부르주아지 간의 현재의 동맹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모순은 우즈와 그랜트가 민주주의적 독재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은 제국주의 전쟁 등을 수행하는 자본주의 정부였다고 주장할 때 더욱 더 폭로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위에서 대략 언급된 트로츠키의 오류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레닌과 달리 트로츠키는 부르주아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의 가능성을, 그와 관련한 구체적 조건들로부터가 아니라, 추상적 이론의 가정들로부터 연역하였는데, 그 이론은 노동자들의 필수적인 권력 소유를 이를 위한 유일한 본질적 결정요소로 보았다. 이 사이비 좌익주의는, 만일 그것이 다른, 부적합한 환경에서 실천되었다면, 혁명의 비극적인 패배를 초래했을 것이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은, 그것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론적 추상으로부터 연역되는 즉각적인 긴급사(緊急事)로 옹호했고,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가는 상호 내적으로 연관된 모든 과정들로부터 고도의 인식상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맑스주의의 ‘좌익적’ 왜곡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트로츠키의 이론은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발전 과정들과 무관한 직관적인 예언에 가깝다.

심지어 반공주의적 부르주아 역사가 로버트 써비스조차 다음과 같이 관측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일이다.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레닌은 스위스 도서관에서 글을 끄적거리는 ‘망명자’ 이론가로 남아 있었을 것이며, 설령 니콜라스 2세가 평화기의 권력 양도로 폐위되었다고 하더라도, 공산주의 정권체제의 개시는 거의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R. 써비스, <<20세기 러시아사(A History of Twentieth Century Russia>>, p. 26)

 

이것은 써비스의 놀라운 통찰이 아니다. 그것은 주로 혁명의 사회주의적 단계와 관련된 진실의 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심결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의 사이비 좌익적 본성과, 상황이 달랐더라면 노동계급과 농민층에게 닥쳤을 잠재적 비극을 폭로하고 있다.

 

 

4.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

 

비정한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인민의 착취를 반대하는 맑스주의, 공산주의의 투쟁은, 인류사의 새로운 장(章)을 열어젖힌 1917년의 10월 혁명에서 최초로 철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세계혁명, 혹은 적어도 유럽혁명의 퇴각은, 쏘비에트 혁명가들로 하여금, 혁명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견디고 사수하면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의미했다. 많은 희생을 치루며 내전에 승리했고 착취의 지지자들을 패배시켰지만, 혁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진적이고 반봉건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던 곳에서 자본주의 세계의 포위와 직면해야만 했다.

이것은 물론 러시아 혁명의 지도적 인물들 간의 논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 관건적 요소이다.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한 후에 쏘비에트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력에 대한 두 지도적 경쟁자로서 떠오른 것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였다. 일부 유치한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이들 간의 투쟁을 단지 권력에 굶주린 사람들의 개인적 투쟁으로 보고 있지만, 맑스-레닌주의자들은 그들 간의 정책 차이를 근거로 분석한다. 주요 경계선은, 한편에,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 간에 그어졌다. 전자는 스탈린의 뒤에 모였고, 반면에 후자는 트로츠키에게 모여들었다.

트로츠키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아니면 세계혁명 사이에서 선택하기를 원했지만, 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이 볼 때 이는 잘못된, 비변증법적인 문제제기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스탈린을 지지했던 맑스-레닌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의 ‘이것이냐’(either) ‘저것이냐’(or)라는 테제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세계혁명인가라는 트로츠키주의자의 노선에 따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키려는 모든 시도와 싸웠다. 스탈린이 볼 때, 이러한 노선에 따라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키는 것은 단지 세계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이 볼 때,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전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세계혁명의 과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고,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즉, 쏘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세계 혁명의 과정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일국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세계혁명에 봉사하고 있었고, 따라서 국제 노동계급의 이해에 봉사하고 있었다.

스탈린 및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반대하는 투쟁은 실제적으로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는, 세계노동계급의 이해에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이 쟁점에 대해서 스탈린을 반대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제국주의의 이해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쏘련에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다는 주장은 스탈린을 트로츠키 및 그 지지자들과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몰아넣었는데, 그들은 스탈린이 바로 이 문제에서 레닌주의로부터 이탈했다는 주장을 늘어놓았고 계속하여 그러했다.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을 반대하는 편에서 섰을 때, 트로츠키의 역할이 이제 이 쟁점을 이용하여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을 깨는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있을 수 없다. 이는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일국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세계혁명인가를 선택하도록 하는 요구의 불가피한 효과일 터였다. 1928년에 ‘영구혁명’에 관한 저서에서 트로츠키는 이러한 선택을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제기하고 있다.

 

“영구혁명인가 일국사회주의인가―이 양자택일은 동시에 쏘련의 내부적 문제들과, 동양에서의 혁명의 전망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전체의 운명을 포괄하고 있다.”(트로츠키, <<영구혁명(The Permanent Revolution)>>, New Park Publications, 1962, p. 11)

 

사실상 트로츠키는, 일국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세계혁명인가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이는 레닌 사후의 트로츠키주의의 본질이 되었다. 반면에 스탈린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와 세계혁명은 대립적이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한편은 다른 한편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의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트로츠키가 볼 때, 영구혁명인가, 아니면 일국사회주의인가 하는 것은 국제노동계급의 공산주의적 전위가 당면하고 있는 양자택일의 ‘대안들’이었다. 스탈린은 이를, 이제는 볼세비즘의 대열 속에 잠입해 있는 트로츠키주의가 내놓은 또 하나의 사이비 좌익적 노선이라고 생각했다.

레닌과 볼세비키들이 유럽적 규모의 혁명의 전망을 갖고 있었지만, 이러한 소망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前後)의 사회민주주의의 배신 때문에 먼지로 화하였다. 1918-19년의 독일 혁명의 패배는 러시아 혁명을 고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의 1923년의 봉기는 이러한 고립을 더욱 강화시켰다. 레닌은 보다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성공적인 혁명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지원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제: 역자] 볼세비키들은 [다른 나라의: 역자] 노동자들의 간접적 지원, 즉 이들 노동자들이 자국의 부르주아지의 반쏘 책략에 반대하여 벌이는 투쟁이라는 간접적 지원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볼세비키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제 버티면서 국제혁명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책동으로부터 쏘련을 방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권력을 잡고 있는 쏘련의 노동계급으로서는, 굴복으로 가는 길을 추구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로 가는 또 다른 길을 추구할 수 있었다. 레닌은 틀림없이, 적어도 이론적 수준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론과 전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잠시 동안 볼세비키들은 명백히 세계혁명이 빠르게 발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론으로 되돌아가서 새로운 정세에 비추오 새로운 전망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 새로운 전망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세계혁명을 지원하면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새로운 전망은 레닌의 이전의 이론적 개념을,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세계혁명과 대립되지 않는다고 표현하게끔 하였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와 세계혁명의 관계는 적대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점과 관련하여, 당시 트로츠키가 지지했던 ‘유럽합중국’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레닌의 비판이 당 내부의 트로츠키주의적 반대파와 논쟁에서 스탈린과 그 지지자들이 도달했던 정책을 신뢰하게 했다. 1915년에 레닌은, ‘유럽합중국’이라는 슬로건을 먼저 ‘세계합중국’과 관련된 또 다른 슬로건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그 ‘유럽합중국’의 슬로건을 반대했다.

 

“(유럽만이 아닌) 세계합중국은, 공산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한 국가의 총체적 소멸을 가져올 때까지, 사회주의에 결합하는 민족들의 통일과 자유의 국가형태이다. 그러나 분리된 슬로건으로서의 세계합중국이라는 슬로건은 거의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그것이 사회주의와 융합할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것이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될지도 모르며, 또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이러한 나라[=사회주의가 승리한 한 나라: 역자]의 관계에 관한 오해를 유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레닌, <<전집>> 제21권; 그리고 <<맑스, 엥겔스, 맑스주의>>, Foreign Languages Press, pp. 334, 339)

 

명백히 레닌주의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승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 대한 이러한 나라의 관계에 관한 문제들도 제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로츠키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추구했던 바로 그 문제, 즉 일국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세계혁명인가 하는 부당한 선택과 관련하여 트로츠키주의란 레닌주의의 변조(變造)임이 폭로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더 많은 원문의 증거가 필요하다면, 1915년의 바로 그 동일한 문건에서 레닌은 계속 다음과 같이 관찰하고 있다.

 

“불균등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 혹은 심지어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단독으로 성취될 수 있다.”(레닌, 같은 책)

 

레닌과 마찬가지로 세계혁명 과정의 일부로서의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지지하는 스탈린을 반대하면서, 레온 트로츠키는 어떻게 레닌주의를 옹호한다는 주장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모순 즉, 트로츠키가 노골적으로 레닌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레닌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히 트로츠키주의의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를 폭로하는 것이고, 또한 그리하여 소부르주아지와 연결된 절충주의를 폭로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의 기회주의는, 그것이 레닌주의와 공개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레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가면을 쓰고 레닌주의를 ‘옹호’하는 체해야만 한다는 데에 있다. 볼세비키가 권력을 잡은 후 트로츠키는 공산당 내에서 레닌주의의 숨은 반대자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바로 전야인 1916년에 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강령”에서 레닌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는 단 한 방에 모든 전쟁을 일반적으로 제거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것은 전쟁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맑스, 엥겔스, 맑스주의>>, p. 385)

 

트로츠키나 그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1917년 10월 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세계혁명 과정에 이론적으로 대립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명백하다. 이것은 사실상,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경계선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경계선 중의 하나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끊임없이 계속하여, 부르주아 교수들처럼, 이전의 어떤 지도자들의 사진들이 공공의 시야에서 제거될 때 스탈린이 혁명의 연대기를 위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볼 때 더욱 더 심각한 것은 트로츠키주의에 의한 레닌의 이론적 유산의 변조다.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및 세계혁명에 대한 그 관계의 문제는 트로츠키주의의 변조의 고전적 사례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제기하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 이상의 원문 증거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을 위하여 위의 글을 계속 인용하자면, 거기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다양한 국가에서 극히 불균등하게 진행된다. 상품생산 하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이로부터, 사회주의는 모든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반박의 여지없이 도출된다. 그것은 처음에는 한 나라 혹은 몇몇 나라 속에서 승리를 획득할 것이고, 다른 나라들은 당분간 여전히 부르주아적 혹은 전(前)부르주아적인 채 남아 있을 것이다.”(레닌, 같은 책, p. 385-86)

 

레닌이 볼 때, 상품생산, 즉 자본주의의 발전의 불균등성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다. 이것이 이번에는 다른 모든 나라들에 대한 이러한 나라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었다. 1924년 이후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주요한 모순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주의 간의 모순으로 되었는데,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가 세계혁명 과정의 이해에, 그리고 따라서 옹호되어야만 하는 노동계급의 이해에 봉사한다고 주장했고, 트로츠키주의는, 모든 사실에 반하여, 일국사회주의는 비(非)레닌주의적(UN-Leninist)이고, 불가능하며, 국제혁명에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공공연하고 명백하게 세계혁명 과정의 일부로서 일국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옹호했기 때문에, 스탈린이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을 옹호하는 것은 비레닌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교활성과 기회주의를 드러내는 가장 비열한 사례였다. 왜냐하면,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관한 한, 이 쟁점에 관해서 수정주의자였던 것은 바로 트로츠키였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에서, 트로츠키는 단지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하고 있었고, 그는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잘못한 것은, 그의 입장은 단지 유서 깊은 트로츠키주의였을 뿐인데도, 그것이 레닌주의적 정통인 체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레닌주의의 기치 하에 트로츠키주의를 선동하는 동일한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이 점에서 트로츠키주의는 명백히 가장 음험한 종류의 좌익 기회주의로서 나타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반(半)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일국사회주의와 세계혁명 과정 사이의 관계에 관한 쟁점에서 레닌주의에 완전히 반대하여 명백하게 위조된 기초 위에서 노동계급의 전위의 지도력을 획득하려 해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맑스-레닌주의를 이렇게 뻔뻔스럽고 시끄럽게 수정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필경 스탈린의 파괴로부터 볼세비즘의 유산을 지킨다고 주장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트로츠키주의는 지식인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그토록 저속한 방식으로 맑스-레닌주의를 반대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는가? 이는 수많은 이유 때문에 가능했다. 그 주요한 이유는 물론, 트로츠키주의가 1917년 이전에는 레닌주의를 공공연히 반대했지만, 10월 혁명에서 레닌주의가 성공한 이후, 특히 레닌이 정치무대에서 떠난 후에, 이제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에 대한 숨겨진 반대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자리에는 언제나 사이비 좌익분자들이 있었고, 따라서 트로츠키주의가 추종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트로츠키의 주장은, 한 나라에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관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국 사회주의와 국제자본주의 간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유발하는 주장이다. 그 모순은 명백하다. 일국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옹호하면서 레닌은, 세계합중국이라는 슬로건이 오류인 것은, 그 슬로건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또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이러한 나라[=사회주의가 승리한 한 나라: 역자]의 관계에 관한 오해를 유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레닌, 같은 책, p. 338)

 

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순들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일국사회주의와 국제 자본주의 간의 모순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조종될 수 있고 비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명확히 레닌의 정책이었다. 쏘련은 경제적 봉쇄를 견디어 낸 후에는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타협하지 않고도 자본주의 국가들과 어느 정도는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진지한 혁명가라면 누구도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세계혁명 과정에 유해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물론,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문제는 결코 추상적으로 제기될 수 없다. 이것은 또한, 특히 쏘련의 상황 속에서, 레닌이 이해한 사회주의의 본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레닌이 볼 때,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의 소농 및 빈농들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농민층의 보증된 지도력, 등―이것이, 이전에는 행상인으로 경멸되었고 그리고 신경제정책(NEP)하에서 어느 정도는 우리가 지금 그렇게 경멸할 권리가 있는 협동조합들로부터, 협동조합들만으로부터,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다.”(레닌, <<전집>> 제27권, p. 392)

 

국가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다른 전제조건들이 주어져 있다면, 트로츠키 자신이 사회주의를 협동조합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했다. 영구혁명에 관한 1928년의 자신의 저작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규모의 협동조합적 생산인 사회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이, 대기업이 소규모 기업보다 더 생산적인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만 가능하다.”(트로츠키, <<영구혁명>>, p. 220)

 

그러나 스탈린에 대한 그의 분파주의적 투쟁에서는 그는 사회주의, 즉 생산의 협동조합적 조직이 일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주의가 이러한 개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공산주의 사회의 초기단계와 그 후기단계의 차이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또한 문제를 순수하게 추상적인 방식으로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보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이의 이행기적 사회임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 나리에서는 협동조합적 생산과 노동계급의 정치권력이 불가능하다고 추상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이비 좌익적 헛소리다.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일국사회주의는 세계혁명의 과정과 대립하지 않으며 상호보완적이라는 맑스-레닌주의적 테제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설명해온 것처럼, 트로츠키주의의 주요한 변화는 그것이 레닌주의에 대한 공개적 반대파로부터 나중에는 숨겨진 반대파가 되었다는 점이다. 볼세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트로츠키주의는 외투 속에 비수를 감추고 레닌과 악수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는 여전히, 코민테른의 결의가 묘사했듯이, 맑스주의로부터의 소부르주아적 일탈이며, 레닌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어떤 거짓말도 결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레닌이 볼 때 일국사회주의는 세계혁명과정의 일부로서 가능했다는 사실, 심지어 부르주아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을 바꿀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다른 문제들에서처럼, 이 점에서, 노동계급의 전위 앞에서 트로츠키주의의 레닌주의에 대한 숨겨진 반대를 폭로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것이다.

 

 

5. 트로츠키와 쏘비에트 관료주의

 

쏘련에서의 관료주의의 문제에 관해 트로츠키는 일련의 허위 논법을 제기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시작했다. 트로츠키의 관점에서는 쏘련은 스탈린 하에서 관료주의적 타락의 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타락’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용어는 어떤 퇴보를 의미한다. 그러한 퇴보란 보다 높은 수준의 존재에서 보다 낮은 수준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타락이라는 것은 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다 낮은 정신적 혹은 도덕적 혹은 육체적 수준으로 나쁘게 되는 것…”(<<콜린스젬영어사전(Collins Gem English Dictionary)>>, 신판, p. 141)

 

다른 말로는, 타락은 다음을 의미한다.

 

“… 퇴보하는 것 등, 질적으로 혹은 표준에서 악화되는 것…”(<<체임버사전(The Chambers Dictionary)>>, 신판, p. 426)

 

그 용어의 또 다른 의미는 다음을 의미한다.

 

“… 감소하고, 악화되고, 다시 나빠지는 것…”(<<로제 유의어(類義語) 사전(The Original Roget’s Thesaurus of English words and phrases)>>, 신판, p. 778)

 

말하자면, 타락한다는 것은 이전의 우수했던 조건으로부터의 퇴보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쏘련이, 타락의 시기가 정착되기 전에, 이전의 우수했던 혹은 우수함에 가까웠던 시기를 누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알려진 사실들과 전혀 다르다. 예를 들면,

 

“관료주의적 태도, 관료의 편의주의적 요구에 대한 개인의 종속, 상투성, 그리고 강박관념은 러시아 역사에서 항상적인 주제였고, 러시아의 보통의 인민들에게 항상적인 시련이었다. 쏘비에트 시기에도 이 ‘관료주의’는, 그것을 제거하려는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웨스트우드, <<인내와 노력―러시아사, 1812-1986.(Endurance and Endeavour―Russian History)>>, 제3판, pp. 48-49)

 

그리고 관료주의 해악의 경제적 측면과 관련하여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8년 5월 5일에 우리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낡은 관료주의적 기구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분쇄된 10월 혁명 후 6달이 지나 우리는 그러한 해악의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레닌, <<전집>> 제32권, P. 351. 1921년 4월 21일)

 

그러나 물론 그 해악은 여전히 존재했는데, 왜냐하면, 1919년 3월 18일-19일의 러시아공산당(볼)의 제8차 대회는,

 

“… 쏘련 내에서의 관료주의의 부분적 부활”(레닌, 같은 책)

 

에 관해 솔직하게 언급하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관료주의의 문제가 관련되는 곳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고 주장하면서 1919년의 이 당강령을 칭찬했다.

 

“… 그 해악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드러내고 폭로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기를 바라야 하고, 그것과 싸울 수 있는 사고, 의지, 정력 그리고 행동을 자극해야 한다.”(레닌, 같은 책)

또한 쏘비에트 제8차 대회는 1920년에

 

“… 관료주의의 해악…”(레닌, 같은 책)

 

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쏘비에트 제8차 대회에 이어서, 러시아공산당(볼) 제10차 대회는 1921년 3월에,

 

“이러한 해악들에 대한 분석과 밀접하게 관련된 논의들을 요약했고, 우리는 그것들이 이전보다 더 뚜렷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레닌, 같은 책)

 

쏘련이 스탈린 하에서 타락의 과정을 시작했다는 주장은 사실에 비추어 부정확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레닌이 말하고 있는 것은 혁명 직후의 관료주의의 부활[타락]이다. 레닌은 관료주의의 문제와 맞붙어 싸웠고 그것의 경제적 뿌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관료주의의 해악은 군대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복무하는 기구들 내에 있다.”(레닌, 같은 책)

 

다른 저술가들은 심지어 볼세비키가 이러한 조직들을 획득하기 전의 쏘비에트 관료주의의 등장에 대해 언급한다. 현실은 낡은 러시아의 관료주의적 문화가 새로운 시대로 이월된 것이고, [그리하여: 역자] 새로운 사회는 모든 측면에서 낡은 사회의 모반(謀反)을 지니고 있다는 맑스의 견해를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어야만 하는 공산주의 사회는,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발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로부터 갓 출현한 것으로서 그것이다. 그것은 따라서 모든 측면에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여전히 그 자궁으로부터 그것이 출현한 낡은 사회의 모반들이 찍혀 있다’.(맑스, <<고타강령 비판>>)

 

새로운 사회가 낡은, 타도된 사회의 모반을 지닐 것이라는 것은 그리하여 현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맑스 자신에 의해서 인정된 것이었다. 이것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상호작용, 계급사회가 소멸하기 시작할 때까지 지속되는 그 투쟁과 관련되는 복잡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타락’이라는 단순한 범주를 단조로운 방식으로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수준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투쟁이, 공산주의사회로 이행하는 사회주의 단계에서 모든 근본적인 특징들에서 발생한다. 사실, 모든 측면에서 혁명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투쟁의 과정은 변증법적이다. 그리하여 관료주의적 타락이라는 트로츠키의 일면적인 개념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낡은 짜르 러시아의 관료주의적 전통으로 인하여, 특히 혁명이 상속받은 후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장기간의 어려운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투쟁을 배제하고 있다.

레닌이 볼 때, 쏘비에트 관료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은 짜르 러시아의 경제적ㆍ문화적 후진성의 결과였다. 관료주의의 ‘회귀’는 따라서 놀랄만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1919년에 레닌은, 혁명 후에 어떻게,

 

“짜르의 관료들이 쏘비에트 기구들에 결합하기 시작하여 그들의 관료주의적 방식들을 실행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색깔을 띠기 시작했으며, 출세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공산당의 당원증을 획득기 시작했는지”(레닌, <<전집>> 제29권, p. 183)

 

지적했다. 

구 정권의 옛 관리들이 쏘비에트 국가에 의해 다시 고용됨에 따라 그들이 관료주의의 성장을 위한 비옥한 토양를 제공했는데,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체 주민이 정부의 사업에 참여할 때에만… 관료주의와 철저하게 싸울 수 있다.”(레닌, 같은 책)

 

레닌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낮은 문화적 수준 때문에 결과적으로, 강령 덕분에 근로인민에 의한 정부의 기관인 쏘비에트가 사실은, 전체 근로인민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적 부분에 의한 근로인민을 위한 정부의 기관이다.”(레닌, 같은 책)

 

쏘비에트의 상황에서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었거나 확실히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관료주의의 부정적 측면들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은 레닌이 볼 때 장기적인 일이었다. 관료주의를 극복하는 장기적인 과정에 관한 관점의 결과로 레닌은 반(反)관료주의 강령을 선동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반관료주의 강령을 거부함으로써 레닌은, 관료주의의 역기능적 측면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약화시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문제는 정치적 수준에서만 해결될 수는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레닌은,

 

“관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데은 수 십 년이 걸릴 것이다”(레닌,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대한 보고”, <<전집>> 제32권, pp. 56-7, 1921년 1월 23일)

 

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레닌이 볼 때 이것은,

 

“… 매우 어려운 투쟁…”(레닌, 같은 책)

 

이 될 터였다.

그리고 나아가 레닌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고려할 때 장기적 전망을 견지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반관료주의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하룻밤에 관료주의적 관행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멋진 말을 좋아하는 사기꾼(quack)일 뿐이다.”(레닌, 같은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관료주의적인 지나침은 즉각 시정되어야만 한다.”(레닌, 같은 책)

 

혁명의 시기부터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던 관료주의의 문제 전체는 레닌이 트로츠키에 반대하고 나섰던 저 유명한 노동조합 논쟁에서 공공연하게 폭발하였다.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체크트란(Tsektran)에 의해 지도되는 철도ㆍ수운(水運)연합노조을 통제하고 있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체크트란에는 탁월한 노동자들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을 임명할 것이고, 그들의 관료주의적 지나침을 교정할 것이다.” (레닌, <<전집>>, 제32권, p. 5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중앙위원회에 의해 소집된 1921년 3월의 전러시아 수송노동자 제1차 대회는 체크트란의 지도부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쫓아냈고 작업의 새로운 방식의 틀을 짰다.”(<<레닌전집>> 제32권, p. 530의 주 9번을 보라.)

 

저 유명한 노동조합 논쟁은 1920-21년에, 트로츠키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자신의 지지자들에 대해서 적대적 경향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시작되었는데, 트로츠키는 조합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이들 지지자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 쟁점을 보다 면밀히 검토한 후 레닌은 이러한 비난은 그릇된 것이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광신적 일탈파(the lunatic fringe)의 누군가만이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다.”(레닌, 같은 책, p. 57)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반대하고 있었던 것은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이 그들 가운데 도입하고 있었던 관료주의적 방식들이었다. 레닌이 볼 때 트로츠키의 입장은,

 

“… 쏘비에트 권력의 몰락을 초래하는”(레닌, <<전집>> 제32권, p. 57)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당의 레닌주의적 지도부에 의한,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내전 후에 노동의 군사화를 요구하고 있던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투쟁으로서 시작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쓰고 싶어 하고,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레닌주의의 투쟁이 스탈린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시작되었다고 속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 투쟁은 실제로는 트로츠키가 임명한 사람들이 체크트란에 도입했던 관료주의적 방식과 지나침에 반대하여 시작되었다. 레닌이 서거하면서 트로츠키는 곧 반관료주의자로서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지도권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트로츠키는, 관료주의와 싸우는 문제를 단순하고 일면적인 정치적 문제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반관료주의 강령과 관련된 레닌의 견해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들은 관료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단기간의 해결을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봐온 것처럼, 레닌도 어떤 단기간의 치유책을 생각하지 않았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자세히 얘기했다.

 

“우리의 강령은 관료주의의 해악과 싸우는 임무를 극히 장기간의 것으로 공식화하고 있다.”(레닌, “러시아공산당(볼) 10차 대회, 1921년 3월 8-16일”, <<전집>> 제32권, p. 205)

 

레닌이 쏘비에트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극히 장기간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문면상 절대적으로 명확하다. 그리고 바로 정확히 여기에서, 관료주의와 싸우는 문제에 대한 한편의 맑스-레닌주의적 접근과 다른 한편의 사이비 좌익적인 트로츠키주의적 접근 사이의 모순이 시작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문제에 이르르자, 트로츠키는 암암리에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그의 접근과 레닌의 접근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은, 트로츠키가 톰스키와 로조프스키를 노동조합 관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에 반대했고,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이 논쟁에서 어느 쪽이 관료주의적 경향이 있는지 이후에 말하게 될 것이다.”(레닌, <<전집>> 제32권, p. 25)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는 당이 두 개의 강령 중에서 선택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레닌이 생각하기에 당에 해를 끼치게 될 입장이었다. 부하린에 답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당신이, 트로츠키처럼, 당은 두 개의 조류 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고 말하다니, 이상한 일이다.”(레닌, <<전집>> 제32권, p. 26)

 

그리고 레닌이 보기에,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라는 제목의 트로츠키의 강령 팜플렛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본질 자체에 관련한 오류들을”(레닌, <<전집>> 제36권, p. 32)

 

포함하고 있었다.

실제로 레닌은, 또한 트로츠키의 입장은,

 

“‘노동조합주의’보다도 더 ‘반동적 운동’(reactionary movement)으로 보인다”(레닌, 같은 책. p. 31)

 

며, 트로츠키를,

 

“관료주의적 입안자”(레닌, <<전집>> 제32권, p. 30)

 

라고 비난했다.

당시에는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유행하지는 않았지만, 트로츠키의 팜플렛에 대한 레닌의 답변 내용은, 레닌이 “반동적 운동”이라는 어구를 사용할 때 그가 사실상 의미하는 바가 바로 파시즘임을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또한 트로츠키의 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접근은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이는 당신의 테제에 수많은 이론적 오류들이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를 평가함에 있어서의 맑스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황의 특수하고 정치적인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고 이러한 광범한 주제를 다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레닌, 같은 책, p. 32)

 

러시아공산당(볼)은 노동조합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이는 논쟁자들 간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트로츠키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여 레닌으로부터 분열이라는 비난을 자초했는데,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트로츠키는 퇴장하여 위원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있고, 위원회의 작업을 분열시키고 있다.”(레닌, 같은 책, p. 35)

 

레닌은 기분이 상했으며, 트로츠키의 분열적인 행동에서 위험한 전조를 보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위원회의 작업을 혼란시키는 이러한 행위는 관료주의적이고, 반쏘비에트적이며, 반사회주의적이고, 부당하고 유해하다.”(레닌, 같은 책, p. 36)

 

그리고 레닌은 트로츠키가 위원회의 다른 성원들과 어떤 차이들은 가지고 있든, 그것이

 

“… 위원회의 작업을 분열시킬 어떤 이유도 될 수 없다”(레닌, 같은 책, p. 36)

 

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은 또한 부하린을 꾸짖었는데, 왜냐하면,

 

“… 그는 트로츠키 동무가 위원회에 남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주장했어야 했기”(레닌, 같은 책, p. 36-37)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트로츠키가 임명한 사람들이 체크트란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체크트란은 중앙위원회, 즉, ‘철도ㆍ수운연합노조’의 지도부였다. 그들은 노조 내로 트로츠키의 군사적 접근을 도입했다. 일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는, 이러한 접근은 내전에 의해 발생한 파괴 후에 수송체계를 다시 정상화시키기 위해 필요했다. 그리고 레닌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웅주의, 열정 등등은 군사적 경험의 긍정적 측면이다. 관료적 형식주의 그리고 거만함은 최악의 군사적 유형의 경험의 부정적 측면이다.”(레닌, <<전집>> 제32권, p. 37)

 

그러나 트로츠키의 테제와 관련해서는, 레닌이 보기에,

 

“…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것은 최선이 아니라 군사적 경험의 최악의 역할을 하고 있다.”(레닌, 같은 책, p. 37)

 

레닌이 보기에는, 발휘되고 있는 것은 트로츠키의 군사적 경험의 부정적 측면이었다. 노동조합 내의 트로츠키 자신의 지지자들이 이 부정적 측면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 결과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지도자는 그 자신의 정책만이 아니라 그가 이끄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레닌, 같은 책, p. 37)

 

다른 말로 하자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군사적 스타일의 체크트란 지도력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 관료주의적 지나침을 초래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은 루주탁(Rudzutak)의 테제, 즉 “생산에서의 노동조합의 임무”에 찬동했고, 레닌은 그 테제를 소비에트 8차 대회에서 낭독했다. 레닌은 루주탁의 테제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거기서 하나의 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트로츠키 동무가 많은 생각 후에 쓴 것보다, 그리고 부하린 동무가 … 아무 생각 없이 쓴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레닌, <<전집>> 제32권, p. 49)

 

레닌이 볼 때, 루주탁의 테제를 연구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터이며,

 

“… 그리고 이는 또한 트로츠키 동무와 부하린 동무에게도 해당된다.”(레닌, 같은 책, p. 40)

 

트로츠키는 선거와 직원들의 임명을 포함한, 노동조합의 재조직을 요구했는데, 레닌이 볼 때 이는,

“… 진정한 관료주의적 접근의 사례로서, 트로츠키와 크레스틴스키(Krestinsky)가 노동조합 ‘직원들’을 선출하는 것.”(레닌, 같은 책, p. 41)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 문제와 관한 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자신의 실천적 경험에 대한 연구가 트로츠키 동무나 부하린 동무가 집필한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할 것이다.”(레닌, 같은 책, p. 41)

 

노동조합 논쟁의 첫 번째 국면을 마치면서, 그리고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관한 트로츠키의 테제에 대한 분석을 결말지으면서, 레닌은 거듭해서,

 

“트로츠키의 테제는 정치적으로 유해하다.”(레닌, 같은 책, p. 42)

 

고 주장했다. 그리고 레닌은 그뿐만 아니라 트로츠키의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정책의 요점은 노동조합을 관료주의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 당대회는 그것을 비난하고 거부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레닌, 같은 책, p. 42)

 

레닌이 보기에 중앙위원회가 범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닌 자신이 범한 최대의 실수는 루주탁의 테제를 간과했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은 논쟁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레닌: 앞의 책. p. 44)

 

트로츠키는 노동조합의 “대개편(shake up)”을 요구했지만, 레닌은 톰스키를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다음에 동의했다.

 

“… 체크트란의 반칙과 관료주의적 지나침이라는 관점에서 ‘대개편(shake up)’이야말로 전체 논쟁의 핵심이다.”(레닌, 같은 책, p. 44)

 

노동조합 논쟁이 진행되면서, 철도ㆍ수운연합노조, 체크트란의 트로츠키주의 지도부는 다음과 같은 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 ‘… 중앙집권제와 군사화된 활동형태가 관료주의, 폭압, 관료적 형식주의로의 타락’…”(레닌, 같은 책, p. 45)

 

그리고 레닌은 노동조합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에 트로츠키가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은,

 

“ …분파주의”(레닌, 같은 책, p. 45)

 

로 이끌었다고 폭로했다.

위원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이 조치야말로, 레닌이 볼 때,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한 그릇된 테제의 제출이라는 트로츠키의 작은 오류를 중대 오류로 전환시켰다. 레닌이 보기에, 노동조합을 관료주의적으로 괴롭히는 트로츠키의 잘못된 정책은 오만하게도 그가 노동조합위원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강화되고 최악의 것이 되었다.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와 부하린 두 사람은 “생산에서 노동조합의 임무”라는 루주탁의 테제의 최상의 부분을 체크트란의 성원들, 즉, 홀쯔만, 안드레예프, 그리고 류비노프가 입안했다는 ‘전설’을 날조해냈고, 레닌은 이를 비난했다. 실제로 루주탁은 곧 이러한 ‘전설’을 논파했다. 류비노프는 노조 지도부에 있지도 않았고, 어떤 경우에나 홀쯔만은 그 테제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1920년 12월 30일의 쏘비에트 8차 대회에서는 루주탁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테제의 출처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물론 그가 저자임이 확증되었다.

레닌은, ‘대개편’이 필요한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맨처음 루주탁의 테제를 간과하고 그리하여

 

“… 전적으로 공허한 논의를 불 붙게”(레닌, 같은 책, p.47)

 

한 것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였기 때문이었다.

레닌의 견지에서는 어떤 것도 체크트란을 통제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실수를 덮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비록 그 오류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오류는 흔해빠진,

 

“… 다수 지난친 관료주의이다.”(레닌, 같은 책, p. 47)

 

그리고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은, 쏘비에트 국가는

 

“… 관료주의적 굴절을 수반한 노동자 국가이다”(레닌, 같은 책, p. 48)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레닌이 볼 때, 노동자 국가의 관료주의적 굴절은, 내전 때에 사용했던 방식을 평화로운 건설의 시기에 적용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독립성을 침해하려는 트로츠키의 시도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노동조합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그 자신의 강령을 제출했다. 그 제목은,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관한 러시아공산당 10차대회의 결정 초안”이었다. 중앙위원회의 9명의 성원이 이것에 서명했는데, 지노비예프, 스탈린, 톰스키, 루주탁, 칼리닌, 카메네프, 페트로프스키, 아르티욤 그리고 레닌이었다. 로조프스키도 서명했다. 그 강령이 프라우다에 실렸을 때는 슈미트, 치페로비치 그리고 밀류틴이 추가로 서명했다.

레닌은 모든 경쟁적인 강령들에 대해서 그 각각의 저자와 책임 있는 사람들이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레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당에 환기시켰다.

 

“이 요구에 대해서 이그나토프파와 사프로노프파는 동의했으나 ‘트로츠키파’와 ‘부하린파’, ‘쉴랴프니코프파’는 거부했는데, 그들은,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자신들의 강령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언급되고 있는 익명의 동무들이다.”(같은 책, p. 49의 주를 보라.)

 

레닌의 강령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기초는, 트로츠키파에 반대하여,

 

“관료주의적 지나침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정하는”(레닌, 같은 책, p. 52)

 

것이었다.

레닌은 또한 거듭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관료주의와의 투쟁은 장기간에 걸친 곤란한 싸움이다’.(레닌, 같은 책, p. 52)

 

1920-21년의 노동조합 논쟁은 레닌 그룹과 트로츠키ㆍ부하린 그룹 그리고 생디칼리스트 그룹 간의 3각의 투쟁이었다. 레닌은 중간의 길을 추구했다. 레닌이 보기에 그것은, 모든 군사적 그리고 임명의 방법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는 관료주의적 지나침과 싸우는 문제였다.

레닌이 걱정한 것은, 이 문제로 야기된 당 지도부의 분열의 위험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하여금 이들 차이를 이용하여 또 다른 침략을 시도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도부의 분열은 국내의 반혁명 활동들을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레닌은 1921년 1월 25일의 제2차 전러시아 광산노동자 대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트로츠키가 노동조합 논쟁을 분파적 투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 나는 이 모든 서투른 성급함과 경솔함에 대해서 특히 트로츠키 동무를 비난한다.”(레닌, 같은 책, p. 54)

 

그리고 트로츠키가 로조프스키와 톰스키를 관료주의적 실천을 한다고 비난했지만, 레닌은 이렇게 응답했다.

 

“나는 그와 정반대가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레닌, 같은 책, p. 55)

 

레닌이 보기에는, 대개편 정책에 요약되어 있는 트로츠키의 노동조합 정책을 실행한다면,

 

“… 분열을 야기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붕괴시킬 것이다.”(레닌, 같은 책, p. 56)

 

트로츠키파가 통제하는 체크트란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그들이 관료주의적 지나침을 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였다. 레닌이 볼 때, 관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것은, 이미 지적한 것처럼, 수 십 년이 걸리겠지만, 이러한 시정은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레닌은 ‘광신적 일탈파’의 누군가만이 트로츠키와 같은 방식으로 노동조합을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손상시키고 있었는데, 그것이 계속 지속된다면, 그는,

 

“… 쏘비에트 권력의 몰락을 초래할”(레닌, 같은 책, p. 57)

 

위험이 있었다.

트로츠키의 견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해서 레닌의 마음속에는 어떤 의문의 여지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만일 당이 노동조합과 갈라서게 된다면, 그 책임은 당에 있는 것이고, 이것은 쏘비에트 권력을 파멸시키게 될 것”(레닌, 같은 책, p. 58)

이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체크트란에 대한 적대적 풍조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논쟁을] 시작했는데, 그러나 레닌은 이렇게 반박했다.

 

“노동조합원들 사이에 우리를 적대하는 풍조가 있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한 상부에서 범한 우리의 오류 때문이고, 관료주의 때문인데, 내 자신이 포함되는 이유는, 글라프폴리트푸트(Glavpolitput)를 임명한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레닌, 같은 책, p. 58)

 

글라프폴리트푸트는 철도수송을 복구하기 위해서 1919년에 설치된 주요한 정치 부서였다. 그것은 철도를 다시 가동하기 위해서 군사적 방법을 적용했는데, 그러나 그것이 후에 관료주의적 지나침을 초래했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이 관료주의의 위험을 과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는데, 그러나 레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 어떤 새로운 길을 창안한 것은, 트로츠키가 말하듯이, 레닌이 아니라, 당이었으며, 당은, ‘주의하라, 어떤 새로운 병폐(malaise)가 있다’고 말했다.”(레닌, 같은 책, p. 67)

 

따라서, 쏘련에서 관료주의적 지나침 혹은 관료주의의 부정적 측면들에 대한 투쟁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전설과는 정반대로, 실제로는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투쟁으로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명백하다. 1920년 7월 러시아공산당 제9차 대회는 다시금 관료주의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 해 8월의 중앙위원회에서는 “관료주의의 해악과 싸워야 한다”(레닌, 같은 책, p. 67)는 지노비예프의 편지를 지지했다. 1920년 9월의 러시아공산당 협의회는 그 쟁점을 다시 제기했고, 1920년 12월의 쏘비에트 제8차 대회에서는 관료주의적 실천에 대한 긴 보고가 있었다.

이에 앞서 1919년의 당대회는 관료주의적 ‘병폐(malaise)’의 존재에 대해 인지했었는데, 그러나 동시에 관료주의와의 싸움에서의 선동적 접근에 반대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도 요술지팡이를 흔들어 간단히 관료주의를 종식시킬 수는 없다는 견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투쟁은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고, 레닌은 끊임없이 그렇게 거? 주장했는데, 그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선동과 기만을 농(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 백 가지의 조치들이 필요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문화적으로 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노농감독부(the Workers’ and Peasants’ Inspection)1)의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레닌, 같은 책, p. 68)

 

트로츠키에 대한 레닌의 비판 가운데 하나는,

 

“‘상층’에 대한 참으로 관료주의적인 관심의 집중”(레닌, <<전집>> 제32권, p. 72)

 

에 대한 것이었다.

레닌이 볼 때,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공격은 분파주의로 가득 찬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다수가 노동조합과 국가의 합병을 반대하고, 새로운 임무와 방법을 주저하며, 그리고 또한 그들 가운데에 기업 배타성의 기풍을 조장하고, 그리하여 직종별 조합의 부활을 촉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레닌은 이러한 공격들에 반대하면서 노동조합들을 옹호했고, 만일 톰스키가 트로츠키와 ‘많은’ 군사적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관료주의적 기풍을 조장하고 있으며, 야만성의 부활을 촉진하고 있다는 등으로 비난했다면, 그에 대해서 트로츠키가 무엇을 말했을 것이고 또 어떻게 말했을까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레닌은, 톰스키가 이 모든 것에 대해 트로츠키를 정당하게 비난할 수 있었음을, 그리고 트로츠키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물을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레닌은 트로츠키의,

 

“… 철저히 관료주의적 접근”(레닌: 전집 32권 p. 73)

 

을 비판했다. 이는 트로츠키가, 실제의 발전 수준과 대중들의 생활조건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톰스키가 대중 속에 어떤 기풍을 창출하고 있다거나 촉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레닌은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 그토록 용의주도하게 회피ㆍ위장해오고 있는”(레닌, 같은 책, p. 73)

 

노동조합 논쟁의 진짜 본질은, 노동조합이 새로운 임무와 방법들을 주저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새로운 간부들에 대해 적대적 기풍을 조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상황의 본질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항의가 정당했으며, 그들이,

 

“… 쓸모없고 해로운 관료주의의 지나침을 시정하기를 거부하는 새로운 간부들을 내쫓을”(레닌, 같의 책. p. 73)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는 것에 있었다.

레닌이 보기에는, 누군가가 새로운 임무와 방법들을 이해하기를 거부했다기보다는, 누군가가,

 

“…새로운 임무와 방법들에 대한 많은 수다를 통해 어떤 쓸모없고 해로운 관료주의의 지나침에 대한 자신의 옹호를 은폐하려는 서투른 시도를 하고 있었다.”(레닌: 앞의 책.; pp. 73-4)

간단히 말하자면, 논쟁의 본질은 트로츠키와 그 일파가 조직 노동자들에 반대하여 관료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레닌이 볼 때 그것이야말로,

 

“… 독자들이 명심해야할 논쟁의 본질”(레닌, 같은 책, p. 74)

 

이었다.

트로츠키는 1920년 11월 26일의 제5차 전러시아 노동조합 협의회에서 노동조합을 ‘대개편’하는 것에 관해 연설했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은 노동조합 지도부와 갈등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공산당(볼)의 중앙위원회의 일원, 즉, 공산당의 고위 인사였기 때문에, 트로츠키파와 노동조합 지도부 간의 이러한 논쟁은 당과 노동계급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 발전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레닌은 이러한 갈등 혹은 이러한 갈등에 담겨 있는 것이 쏘비에트, 즉 노동자 권력의 몰락임을 암시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자신의 강령과 다른 측, 즉 루주탁의 강령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그 논쟁을 위험한 결과들을 초래할 분파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

실제로 레닌은, 설사 트로츠키의 테제가 올바를지라도,

 

“…그의 그러한 접근이 그 자신과 당, 노동조합운동을, 그리고 수백만의 노동조합원들의 훈련과 공화국을 해칠”(레닌, 같은 책, p. 74)

 

것임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완충’ 그룹을 구성함으로써 노동조합 문제를 둘러싼 당 지도자들 간의 차이를 화해시키려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레닌이 지적했듯이, 노동조합에 대한 트로츠키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부하린은 이 논쟁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대신에, 트로츠키파의 편을 들었다. 부하린은 공산당 지도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혹은 적어도 억제하기 위해서, 그의 완충 그룹을 구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이 발전하면서 그는 다른 한쪽에 반대하여 한쪽 편을 들었다.

노동조합 문제를 둘러싼 공산당 지도부의 분열, 즉, 자칫 러시아 공산당과 조직된 노동계급 간의 균열을 초래할지도 모를 분열이 성장하기 시작하자 트로츠키는 ‘대개편’ 정책이 자신이 제기한 것임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일관해서 트로츠키의 팜플렛,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가,

 

“‘위로부터 대개편 정책’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레닌, 같은 책, p. 76)

 

고 지적했다.

레닌이 볼 때, 관료주의적 지나침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정당했다. 그리고 관료주의적 지나침의 전형을 보인 것이 바로 트로츠키와 ‘철도ㆍ수운연합노조’의 중앙위원회였던 체크트란 내부의 그의 추종자들이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었다. 따라서 레닌이 보기에는, 물어야 할 보다 의미 있는 질문은,

 

“…예컨대, 체크트란 내부의 어떤 쓸모없고 해로운 관료주의적 지나침이라는 관점에서 대중들의 ‘적대성’은 정당한가”(레닌, 같은 책, p. 76)

 

여부였다. 그리고 레닌은 지노비예프의 다음과 같은 선언에 동의했다.

 

“… 분열을 초래한 것은 트로츠키 동무의 극단적인 지지자들이었다.”(레닌, 앞의 책, p. 76)

 

레닌이 볼 때,

 

“… 노동조합 운동의 분열 위험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었다.”(레닌, 같은 책, p. 80)

 

그 논쟁의 한 편에서, 레닌이 주장한 것은,

 

“… 어떤 바람직하지 않고 해로운 관료주의의 지나침과 임명제도가 정당화되거나 옹호되어서는 안 되고, 시정되어야만 한다는 요구”(레닌, 같은 책. p. 80)

 

였다. 

논쟁의 다른 한편에는,

 

“…노동조합을 관료주의적으로 괴롭히는”(레닌, 같은 책, p. 42)

 

트로츠키의 정책이 있었다.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한 쏘비에트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논쟁에는, 근본적으로 두 개의 편이 있었다. 관료주의를 옹호하는 트로츠키가 이끄는 그룹과, 루주탁의 테제를 지지하고, 내전 시기로부터 이월되어 온 군사적 방법들과 관료주의적 지나침을 제한하려 한 레닌의 주위에 결집한 그룹이 그것이다. 첨가하여 말하자면, 1920년 11월 2-6일의 전러시아 노동조합 제5차 협의회는, 레닌을 위시한 그룹과 연합하여, 루주탁의 테제를 채택하였다.

 

“그것이 바로 응당 그래야 할 모든 것이다.”(레닌, 같은 책, p. 80)

 

그러나 레닌은 단기간에 관료들을 배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오랜 기간 훌륭한 관료 없이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레닌, 같은 책, p. 82)

 

그리하여 레닌이 볼 때, 당면 문제는 “관료들” 그 자체가 아니라 “관료주의적 지나침”이었고, 최악은 노동조합 운동과 관련하여 이러한 지나침을 옹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단기간에 관료들의 복무를 없앨 수는 없기 때문에, 레닌의 관점에서는 좋은 관료들과 나쁜 관료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레닌이 주장하기로는, 조합에 대한 정치적으로 그릇된 접근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었다.

레닌은 ‘대개편’ 정책 그 자체를 전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에 반대한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고려하지 못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가 획득되었다고 해서 노동조합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 노동조합의 핵심적 역할의 하나는,

 

“… 쏘비에트 기구 등에 접근하기 어려운 근로인민의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이해를 다양한 방식과 수단으로 보호하면서, 쏘비에트 기구의 관료주의적 왜곡과 싸우는”(레닌, 같은 책, p. 100)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레닌은 계속하여 이러한 임무들의 장기간 지속될 것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불운하게도 앞으로 장기간 직면해야만 하는 투쟁이다.”(레닌, 같은 책, p. 100)

 

레닌이 볼 때 노동조합 논쟁은 그것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생산이라는 현실적 사업과 괴리된 불행한 혼란으로 간주했고, 그는 또 반혁명주의자들이 트로츠키-부하린이라는 반대파의 배후에서 은신처를 찾고 있다고, 즉 그들이 반대파의 배후에 숨어서 당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논쟁에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는데, 왜냐하면 레닌이 볼 때 노동조합 논쟁의 전체 경험은 분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당을 ‘단련’시켰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분파주의의 재발이,

 

“수년 내에 필히 일어날 것이지만, 그러나 보다 쉽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기”(레닌, 같은 책, p. 105)

 

때문이었다.

분파주의는 실제로 트로츠키를 그 주요 주모자 중의 한 사람으로 삼아 재발했다. 그러나 이때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해 논쟁하던 기간에도,

 

“… 당은 토론에 대응을 하였고, 트로츠키 동무의 그릇된 노선을 압도적 다수로 거부했다.”(레닌, 같은 책, p. 107)

 

레닌이 지적한 것처럼, “상층부”와  “지방에서”, 일부 위원회와 부서에서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당의 노동자 대중은 … 그릇된 노선에 굳건하게 반대했다.”(레닌: 앞의 책. p. 107)

 

그리고 그가 어느 정도 만족하면서 주장하기를, 당은,

 

“트로츠키 동무의 오류를 신속하고 단호하게 교정하였다.”(레닌, 같은 책, p. 107)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는 쟁점에 대한 러시아공산당 내의 논쟁은, 노동조합이 보조기관으로서 생산의 증대를 지원하는, 쏘비에트 국가의 단순한 부속물인가 아닌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은 사실상 트로츠키의 견해가 도달한 것이었다. 레닌이 갖고 있었던 다른 견해는, 노동조합은 공산주의의 학교여야 하고, 또한 당과 근로인민 대중 사이의 전달 장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 논쟁의 결과는 관료주의의 문제가 당의 확고한 토론 주제가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체 당과 전체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은 관료주의의 문제 및 그것과 싸우는 길이 토론 주제로 높이 올려졌음을 깨달았다’. (레닌, 같은 책, p. 109)

 

그리고 레닌은 관료주의적 실천들에 반대하는 문제에 대해 당의 관심을 배가할 것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는, 누가 그것을 지시하든, 관료주의의 어떠한 부당하고 해로운 지나침을 시정하려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레닌, 같은 책, p. 103)

 

쏘련에서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의 기원은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한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투쟁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반대편에 서 있었다. 레닌은 관료주의에 대한 그의 투쟁을, 트로츠키의 지도 하에 노동조합을 “관료주의적으로 괴롭히는” 정책을 추구한, 트로츠키파가 통제하던 체크트란, 즉 철도ㆍ수운연합노조의 중앙위원회에 대한 반대로 시작했다.

우리가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레닌은 관료주의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이 단기간에 사라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관료주의의 해악에 반대하는 투쟁의 “장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다음을 명확히 하였다.

 

“우리의 강령은 관료주의의 해악과 싸우는 임무를 극히 장기적인 임무로 공식화하고 있다.”(레닌, “1921년 3월 8-10일, 제10차 당대회”, 같은 책, p. 205)

 

따라서 명백히 ‘관료주의’는 러시아의, 쏘비에트 혁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고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J. N. 웨스트우드가 관찰하듯이,

 

“쏘비에트 시기에까지 살아남은 전능하고 고압적인 관료주의가 되풀이하여 1917년의 성과들을 잠식했다.”(웨스트우드, <<옥스퍼드 현대세계소사(小史)―인내와 노력의 러시아사, 1812-1986(The Short Oxford History Of The Modern World: Endurance and Endeavour―Russian History, 1812-1986)>> 제3판, p. 452)

 

혁명 이전의 러시아 제국의, 짜르 국가의 전통은 부정적 의미에서의 특유한 관료주의의 전통이었는데, 그것은 러시아 문학에서 끊임없이 풍자되는 주제이기도 했다. 이 전통은 쏘비에트 시기에까지 살아남았고, 우리가 본 것처럼, 이내 볼세비즘의 주요 토론 주제가 되었다.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최초의 투쟁은 주로 트로츠키와 체크트란 내부의 그 지지자들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1924년의 레닌 사망 후에 트로츠키가 다시금 반대파의 편에 섰을 때, 그는 유턴을 결정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권력을 즐기고 있던 때 그는 관료주의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는 관료주의의 주요한 주창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고, 그 사실은, 노동의 ‘군사화’를 위한 그의 주장을 기억하고 있던 다른 당 지도자들과 다수의 일반당원들로부터 그를 고립시키는데 기여했다.

관료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부터, 트로츠키는 이제 관료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부분적으로는, 의심의 여지없이, 관료주의에서 혁명에 대한 위험을 감지한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려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트로츠키의 목표는 이 사람들을 스탈린 반대 투쟁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등장한 것은 관료주의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싼 양극화된 갈등이었다. 이전의 논쟁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레닌주의인가, 트로츠키주의인가’ 양단간의 선택의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관료주의와의 투쟁의 문제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 접근은 단순히 그 문제에 대한 레닌의 개인적 접근이나 관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레닌이 옹호했던 접근은 당 강령에 정식으로 기술되었다. 이 관점의 핵심은 관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데는 많은 기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었고, 레닌이 비난한 러시아의 이전의 관료주의적 전통이나 문화적 지체를 고려할 때, 이러한 가정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노동조합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문제의 일부였다가 이제는 스스로 해결의 일부인 것처럼 행동했다. 관료주의의 옹호로부터 이제 그는 완고한 반관료주의자가 되었거나 그러한 척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관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문제에 대한 레닌주의를 거부했다.

그 결과는 사이비 좌익적 강령, 반(反)레닌주의적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고, 그가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타도하기 위해 “정치적” 혁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관료주의를 비판하면서 트로츠키는 계속 상호 연관되어 있으나 분리된 두 개의 쟁점을 혼동했다. 이들 문제는, 첫째로, 쏘련에서의 특권의 존재와 관료주의의 문제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특권층의 존재라는 문제는, 관료주의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동일한 문제는 아니다. 특권을 수반하지 않은 관료주의가 가능하긴 하지만, 관료주의의 한 측면은 어떤 개인들에 대한 특권의 수여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무엇이 특권을 구성하는가 하는 것은 때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공장이나 광산에서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것에 비해서 특권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쏘련에서 지도적 관료들이나 공무원들에게 상대적인 특권이 있다는 것을 레닌은 공개적으로 언급했는데, 그는 1921년의 2월 7일의 한 문건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쏘비에트의 관료들, 쏘비에트 공화국의 방자한(pampered) ‘고관들’…”(레닌, <<전집>> 제32권, p. 132)

 

이것은 트로츠키가 특권화된 쏘비에트 관료들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하기 오래 전이었다. 여기서 “방자한”이란 단어는 특권과 같은 뜻이며, 따라서 레닌이 살아 있을 때에조차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일부 관료들은 특권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통합된 경제계획”에 관한 그의 글에서 레닌은 시간을 내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지금까지 성취되어 왔고 계속될 필요가 있는 사활적 사업에 대한 고답적인(highbrow) 관료주의적 경시.”(레닌, 같은 책, p. 137)

 

말할 것도 없이, “고답적인”이란 용어는 특권과 같은 뜻은 아닐지라도 분명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고관들의 무시, 그리고 공산주의 문필가자들의 지적인 자만.”(레닌, 같은 책, p. 138)

 

자신들의 공산주의를 떠벌리는 문필가들과 고관들을 레닌은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레닌과 달리, 트로츠키는 자신이 권력을 잃기 시작했을 때에야 관료주의의 해악을 깨달았던 것 같다. 이제 관료주의의 해악을 깨닫자, 그는 정치적 혁명에서 치유책을 찾았는데, 이는 관료주의의 해악과의 진지한 투쟁이라기보다는 권력을 다시 획득하려는 그의 분파주의적 야심을 표현하는 접근방식이었다. 그의 접근은 본질적으로 사이비 좌익적인 것이었고, 그 문제에 대한 레닌주의를 명확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야심과 분파주의적 고려 때문에, 트로츠키는, 관료주의의 해악에 대한 투쟁은 장기적 전망에 기초해야 한다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사정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제안이 반혁명을 초래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트로츠키가 정치적 혁명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하기 오래 전인 1924년 1월에 열린 러시아공산당(볼) 제13차 협의회에서 그러한 슬로건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 협의회에서 채택된 한 결의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트로츠키 동무를 영수로 하는 반대파는, 당기구의 파괴를 요구하는 슬로건을 제출했고, 국가기구 내부의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의 중심을 당기구 내부의 ‘관료주의’로 이동시키려 했다.”(맑스-레닌주의 연구소,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레닌과 쏘련 공산당의 투쟁>>, p. 239)

 

두 가지 기본적인 이유 때문에 트로츠키는 “정치적 혁명”이라는 슬로건에 도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미 우리가 언급한 것, 즉 분파주의적 요소인데, 말하자면,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만 그는 잃었던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의 것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노동계급과 관료주의 사이의 모순이 본성에서 적대적이며, 따라서 관료주의는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분쇄될 수 있다는 가정이었다. 이전의 중요한 쟁점들에 관한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모순의 견지에서 보면, 관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쟁점에 관해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모순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는 하나의 개념을 발전시켰던 바,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적대적 성격을 갖는 모순의 평화적 해결을 사전에 배제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혁명”이라는 슬로건 속에, 아니 오히려 이 슬로건의 배후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의 이전의 정치적 권력을 다시 장악하려는 트로츠키의 불타는 욕망이 있었고, 따라서 그의 개념적 틀이나 이해(理解)는 이러한 목표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관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문제에 관해 맑스-레닌주의와의 사이에 차이를 첨예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차이는 반관료주의에 관한 두 개의 대립적인 전망의 발전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차이의 핵심은, 맑스-레닌주의가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장기적으로 접근함에 반해서, 트로츠키주의는 사이비 좌익적인, 단기적 전망, 즉 정치적 혁명이라는 전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러한 일면적인 접근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다른 모든 상호 연관된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정치적 투쟁으로 축소시킨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정치적 혁명의 전망을 떠받치기 위해, 트로츠키와 그 추종자들은 관료들과 노동계급 사이의 모순을 순전히 적대적인 것으로 제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 등을 고려하면, 그리고 올바른 맑스-레닌주의적 지도력을 고려하면,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계급과 관료주의와의 모순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쏘련에서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의 방향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당과 국가 기구 내부에서의 맑스-레닌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 간의 관계였다. 국가와 당 기구에 맑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분자들은, 반관료주의 투쟁이 자신들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한, 반관료주의 투쟁에 제동을 거는데 자연스럽게 이해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쏘련에서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레닌이나 처음으로 이 문제를 다뤘던 1919년의 당강령은 이 반관료주의 투쟁을 장기적인 과정으로 간주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야만 한다―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국가와 당 기구 내부에 있던 사회주의의 적들의 저항이었다. 레닌은 이전에도 당과 국가 기구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짜리즘의 낡은 행정 공무원들과 노동계급의 새로운 대표들 간의 투쟁이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당과 국가기구, 혹은 관료들에서는 공산주의적, 맑스-레닌주의적 열망에 대한 지지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은 국가와 당 기구 내부에서 진행되는 공개적인 그리고 감추어진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묻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는,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이라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이미 보여준 대로, 관료주의와의 투쟁에는 두 개의 상이한 접근이 있었다. 관료주의와의 투쟁은 장기적인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레닌주의적 접근과, “정치적 혁명”을 통한 치유책을 추구한 트로츠키파의 단기적 접근이 그것이다.

트로츠키는 소련에서의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특권’에 대한 투쟁과 혼동했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 두 측면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나, 그러나 그것들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특권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선포된 목표와 관련하여 쏘련에서의 사회적 차별화의 문제를 보아야만 한다. 공산주의라는 목표는 착취가 없는, 특권이 없는 무계급사회이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는 공상주의적(utopian)이지 않다.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첫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로 시작된다. 이 첫 번째 단계는 낡은, 자본주의 사회의 형적(形迹)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의 역할은 계급과 특권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수준으로 사회의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행기에 있어서의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 혹은 보다 정확히는 관료주의의 해악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의 이러한 기본적인 임무와의 관련 속에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 사회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모순적인 국면이다. 쏘련에서는 이 투쟁이,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봉건적-자본제적 전통 때문에 대단히 치열했다.

1929년부터 계속하여 쏘련은 급속한 현대화 과정에 몰두했는데, 이는 사회주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을 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종복(從僕)들에 의해 부추겨진, 전쟁의 위협에 따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쏘비에트의 공산당 지도부가 맞닥뜨려야 하는 두 개의 모순되는 과정이었다. 오로지 반(反)스탈린이라는 관점에 서서 현명한 척하는 사이비 좌익들은 보편적으로 이 모순을 무시한다. 우선권을, 가능한 최단기간 내에 특권을 폐지하는 데 둘 것인지, 아니면 쏘련의 방위력을 발전시키는 데 둘 것인지, 쏘련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국주의의 위협 때문에 방위를 우선하기로 한 결정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어떤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가능한 한 최단기간 내에 쏘련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산업화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해 그 복무가 필요한 부르주아 전문가들에게 어떤 특권들을 할당해야만 했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레닌과 스탈린의 시대에는 이것은 분명 특권에 대한 원칙적인 옹호가 결코 아니었으며, 쏘련이 급속히 발전해야만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불가피한 실용적인 승인이었다는 점이다. 공산당 지도부가 볼 때, 전체 과정에서의 모순은, 쏘련의 상황에서는, 특권의 활용이 장기적으로는 사회주의에 대립하는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그것이 첫째로 특권을 초래한 조건들을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사회주의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쏘련이 처한 객관적인 상황의 산물인 이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책에 중대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권층의 결정화(結晶化)는, 그 세력이 노동계급의 이익에 대립되는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정도로 강해진다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탈선시킬 수도 있었다. 스탈린 시대에는 분명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29년 4월의 제16차 당대회는 정부의 관료주의를 제거하는 스탈린의 정책을 지지했다. 1930년에는 우익인 리코프가 수상에서 제거되고 몰로토프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것은 우익 반대파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간단히 말하면, 중앙의 당국자들은, 레닌 시절부터,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부르주아 전문가들과 핵심 노동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할당했는데, 이는 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사회주의 국가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 토대―그것은 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소비 영역에서의 사회적 불평등을 근절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를 쌓기 위한 것이었다. 지도자들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정책은, 이전의 체제로부터 사회주의가 물려받은 후진성 때문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특권의 토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특권을 이용한다는 정책은 위험을 수반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차별화를 초래하고 수정주의의 성장을 위한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중에 반혁명에 문을 열어주는 사이비 좌익 반대파가 생기게끔 하는 것이다.

쏘련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의 맑스-레닌주의자의 역할은, 한편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특권을 완전히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면서, 특권의 남용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관료주의의 부정적 측면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첫 번째 단계에 있던 쏘련의 상황에서 특권이 불가피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특권과 관료주의적 남용을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결국 그것들의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게 하는 물질적 그리고 이념적 조건들의 발전을 촉진하면서, 특권의 남용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이었고, 그것들을 일정한 한계 속에 제한해두는 것이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공산주의의 첫째 국면은 아직 정의와 평등을 제공할 수 없다. 부(富)의 차이들, 불공평한 차이들이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수단, 공장, 기계, 토지 등을 장악하여 그것들을 사유재산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레닌, <<국가와 혁명>>, <<전집>> 제33권, p. 93)

 

명백한 것은, 공산주의의 첫 번째 국면, 즉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권력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때에는 차이들, 불공평한 차이들이 남아 있다. 쏘련의 상황에서는 특히 위험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애초의 경제적ㆍ문화적 후진성 때문이었고, 스탈린의 시대에 대중적인 문맹퇴치 운동이 치유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후진성이었다. 물론,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 남아 있는 어떤 특권들의 문제 전체를 순전히 추상적인 의미로 제기할 수는 없다. 그 문제는 구체적으로 제기되어야만 한다. 즉, 보다 더 성숙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의 첫 단계로 진입할수록, 우리는 보다 덜, 그 용어의 진정한 의미에서, 이 단계에서 남아 있는 특권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사회적 의미에서 특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권’이라는 용어는,

“… 단지 일부의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편의, 혹은 이익”(Collins Gem English Dictionary, 신판, p. 430)

 

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서 부의 불평등과 불공평한 차이들이 어느 정도까지 남아 있다면, 이것은 낡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막 출현한 새로운 사회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산물이지, 공산주의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생산력의 앞선 발전, 사회주의의 진보는 사회적 평등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 관료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에 반대하는 투쟁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맨 먼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맑스-레닌주의에는 관료주의에 대한 혁명적 반대와 기회주의적 반대, 관료주의에 대한 원칙이 있는 투쟁과 분파적 투쟁 간의 구분이 있다는 점이다. 1903년에 멘세비키와 분열하고 나서 레닌이 말했듯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유명한 관료주의에 대한 외침들은 분명 단지 중앙기구들의 인적 구성에 대한 불만족을 눈가림하는 연막, 무화과 잎일 뿐이다… 당신은 관료주이자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반해서 대회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형식주의자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동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회의 형식적 결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등.”(레닌, <<전집>> 제6권, pp. 287, 310)

 

‘관료주의’에 대한 논의는 어떤 논의나 이 용어를 일정하게 정의(定義)하면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관료주의란 행정의 한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고, 혹은,

 

“… 공무원들이 부서장들에게만 책임을 지는 정부 혹은 통치의 체제. 사소한 규칙과 절차에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일처리가 지연되는 어떤 행정체제. 집단으로서 공무원들…”(Chambers Dictionary, 신판, p. 214)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는, 간단히, 관료주의란,

 

“… 관료사회, 형식주의적 비능률…”(Collin Roberts French Concise Dictionary, 제3판, p. 55)

 

이다.

‘관료주의’라는 용어는 특히 행정의 구조 및 그 특정한 작업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유형의 관료주의의 본성과 구조를 이론적으로 논할 필요도 없이, 현대의 관료주의는, 산업화의 과정에 따라 증대하는 국가의 사회적 책무들을 관리할 필요에 대한 행정적 반응으로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하면 충분하다.

관료주의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규칙과 규정들, 즉 기성(旣成) 절차에 기초한 행정의 형태들과 관련되어 있다.

트로츠키의 글들은 이러한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과 그다지 많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 다른 말로 하자면, 레닌이 비난했던 부정적 측면 혹은 관료주의적 해악에 대한 투쟁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는 좁은 의미에서 스탈린에 의해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람들을 의미하거나,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쏘비에트 사회의 상층 통치계층 전체를 의미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특권화되고 지도적인 통치층이 노동계급으로부터 권력을 강탈했다고 주장했고, 트르츠키에게 있어서 관료주의란 바로 그들이었다. 트로츠키는 관료주의와 노동계급 사이의 모순을 절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을 권력으로부터 제거하는 정치적 혁명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트로츠키의 관념 속에서는 스탈린은 단지 관료주의의 종복으로서, 관료주의 그것이 분부하는 대로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 날조된 이미지는 물론, 국가 관료주의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1930년대에 깨져버렸다. 트로츠키주의의 전설은 이들 숙청이 진정한 혁명가들을 향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숙청의 표적은 쏘비에트 기구 내부의 제5열 분자들이었다.

트로츠키의 관념에 따르면, 관료주의가 노동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았다. 트로츠키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정책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강령에 이러한 새로운 발전이 표현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이 쟁점을 다루었고, 레닌이 볼 때 일국에서의 사회주의가 세계 혁명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세계혁명을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는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either/or) 세계혁명을 지지할 것인가의 택일(擇一)을 요구하고 있다. 트로츠키의 스탈린 고발은, 현실의 혁명과정을 정당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이러한 비변증법적인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느 계급이나 모두 그들의 가장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대표자들을 통해서만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그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일반적 법칙은 노동계급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실 이 규칙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의 성격 때문에 노동계급에게 더욱 더 강하게 적용된다. 이는, 노동계급은 그것의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부분, 그것의 전위, 즉 공산당을 통해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그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레닌주의는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다른 어떤 방법도 알고 있지 않다. 공산당 내부의 사태 전개는 노동계급이 국가의 정치권력을 계속 소유할 것인지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서 결정적이다. 노동계급이 국가의 정치권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당의 정치권력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는 단번에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당 내에 어떤 수정주의가 나타날 때마다 그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는, 중앙위원회나 정치국 같은, 중요한 정책 결정 기구 내에 수정주의자들이 의문의 여지없이 숨어 있긴 했지만, 결코 그들이 그들 기구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이 쏘비에트 공산당을 이끌고 있던 때에는 쏘비에트 관료주의자들에 의한 노동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의 찬탈은 결코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보다 상층의 국가 기구 및 당 기구일수록, 그 안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수적으로 소수였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쏘련에서 투쟁들에 대해서도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 트로츠키는 1917년까지 계속하여 레닌과 싸워왔고, 그 후에도 레닌과는 주요한 분파적 차이들이 있었다. “쏘비에트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요구는 그것이 실제로는 무엇이었는가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상투쟁 속에서 트로츠키의 본질적인 반레닌주의가 폭로되고 패배한 후, 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을 권력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한 분파적 요구였다. 사상투쟁에서의 트로츠키의 패배를, 일부 부르주아 저술가들처럼, 당 기구에서의 서기장으로서의 스탈린의 지위 탓으로, 그리고 그가 그의 임명권한을 이용한 탓으로 돌리는 것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에 대항한 그의 정치적 주장들을 당 내부의 최고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납득시킬 필요가 없었다고 사실상 말하는 피상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여준 바와 같이, 관료주의에 대한 문제에서조차 트로츠키주의는 맑스-레닌주의와 대립하고 있으며, 레닌주의의 관료주의의 해악과의 장기적인 투쟁 전망을 정치적 혁명이라는 단기적인 전망으로 대체하고 있다. 정치적 슬로건들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 슬로건들을,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요인들로부터 고립시켜 추상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것들의 객관적인 의미와 목적, 즉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어느 계급의 이해에 봉사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데, 레닌이 얘기했듯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누구든지 (특히 그것도 독재의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강철의 규율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자는, 현실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여 부르주아지를 돕는 것이다.”(레닌, <<전집>> 제25권, p. 190)

 

 

6.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

 

트로츠키는 1938년에 그의 “이행기 강령”을 썼다. “자본주의의 단말마의 고통과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라고 알려진 그것은 친(親)트로츠키 인터내셔널의 다양한 분파들의 강령적 안내자가 되었다. 트로츠키가 이 조직에 대해 높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그 강령 속에서의 트로츠키의 다음과 같은 언급 속에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쏠리니, 히틀러 그리고 그들의 대리인들과 모방자들의 타도는 오직 제4 인터내셔널의 지도력 하에서만 일어날 것임을 이미 전세계 선진 노동자들은 굳게 확신하고 있다.”(트로츠키, <<이행기 강령: 자본주의의 단말마의 고통과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The Transitional Programme: 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and the Task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New Park Publications,  p. 47)

 

이 단정적인 발언은 트로츠키의 희망의 표현이었을 뿐 아니라 그가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통렬하게 상기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는데, 트로츠키주의의 일관된 특징인, 현실로부터의 이러한 이탈은 그의 고립과 더불어 더욱 두드러져 갔다.

“이행기 강령” 속에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적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되어 있다.”(트로츠키, 같은 책, p.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보면서, 낙관적이었다.

 

“… 역사의 법칙들은 관료주의적 기구보다 강력하다.”(트로츠키, 같은 책, p. 14)

 

그리하여 트로츠키는, 주관적인 수준에서 즉, 지도력의 수준에서 위기를 보면서도, 물질적 요인들, 혹은 역사의 법칙들이 종국적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이는 물론 진실이다. 트로츠키가 볼 때, 상황이 요구하는 것은,

 

“… 현재의 요구들과 사회주의적 혁명 강령 사이의 가교(架橋)를 발견하는”(트로츠키, 같은 책, p. 14)

 

것이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볼 때,

 

“이 가교는, 오늘날의 조건들과 광범한 층의 노동계급의 오늘날의 의식으로부터 발생하고 또 변함없이 하나의 최종적 결론, 즉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으로 이끄는 이행기적 요구들의 체계를 포함해야 한다.”(트로츠키, 같은 책, pp. 14-15)2)

 

트로츠키는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가 개량을 혁명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개량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향시켜고,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개량주의자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이런 개량주의자들에게는,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는 어떠한 가교도 존재하지 않았다”(트로츠키, 같은 책. p. 15)

 

고, 그는 주장했다.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을 배신하였는데, “이행기 강령” 속에서 트로츠키는 이러한 배신은 맑스주의적 강령의 최소 부분과 최대 부분 사이의 분리 때문이었다고 사실상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는 하나의 치유책, 즉 강령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본질적으로 옛 강령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가교를 추구했다. 이것은 “이행기 강령”이어야 했다.

그러나 최소-최대강령을 “이행기 강령”으로 대체함으로써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자기 자신의 충고를 무시했다.

 

“혁명적 강령은 계급투쟁의 변증법에 기초해야만 한다.”(트로츠키, 같은 책, pp. 46-47)

 

변증법적이기는커녕,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은 최소 요구들과 최대 요구들의 절충주의적 결합이며, 최대 요구적 유형의 요구가 지배적이다.

우리는, “이행기 강령”을 1938년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트로츠키 자신이 다루고 있다고 상상한 문제의 맥락 속에서 고찰해야만 하는데, “이행기 강령”의 본질은 트로츠키가 대개 최대강령의 요구들을 “이행기의” 요구들로 가장하여 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볼 때, 이행기의 요구들은 최소 요구들도 아니고 최대 요구들도 아니다.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트로츠키의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을 무시할 수 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특히 이 점과 관련하여, “이행기의” 요구들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자세히 검토해보면, “이행기 강령”이 주로 이행기의 요구들로 재포장된 최대 요구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러시아 혁명에 참가하여 지도적 역할을 한 트로츠키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는, 혹은 오히려 강령의 최소 부분과 최대 부분 사이에는, 즉 개량과 혁명 사이에는, 어떤 ‘가교’도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질적이고 변증법적인 도약, 즉 양적인 상태의 질적인 상태로의 변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의 시기라는 관념을 강령의 문제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기가 이행기적이라면, 그렇다면 요구들 역시 이행기적이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트로츠키의 제4 인터내셔널은 주로 최대 요구들의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것에 그는 성격상 이행기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 결과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은 기본적으로, 1938년에 제4 인터내셔널을 설립한 이후 줄곧, 주로 비혁명적인 상황에서 혁명적 요구들을 수행할 것을 선동해 오고 있다.

주로 비혁명적인 상황에서 주로 혁명적인 요구들을 위해 싸움으로써, 트로츠키주의는 노동자 운동에서이 사이비 좌익적이고, 분파주의적인 조류로서의 그 본질을 유지했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보면, 노동계급의 혁명적 요구들과 갈등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요구들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량으로부터 혁명으로의 도약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최대 요구들을 이행기의 요구들로서 제기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의 역할은 반자본주의적인 노동자와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치적 요구들의 성질에 대해 혼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사회민주주의가 이행기의 요구들이라는 가교에 대한 어떠한 필요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개량과 혁명 사이의 관계를 명료히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은, 그들이 이행기의 요구들이라고 하는 가교를 회피하고 있는 데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혁명의 최대강령을 배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이 볼 때, 최소 요구들과 최대 요구들은 반드시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비혁명적 상황 및 혁명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물론,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비혁명적 상황에서는 최대 요구들에 대해 선전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혁명적 상황에서 최대강령의 요구들을 선전하지만, 이는 대중을 향하여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그러한 선전이 아니라, 그 선전은 교육적 목적을 위하여 계급의 보다 선진적인 부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처음에는 그 혁명적 전위에게, 혁명의 완전한 강령을 제시한다. 비혁명적인 상황에서는 혁명적인 최대 요구들이 대중들을 동원하지 못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최대 요구들을 통해 대중들을 동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들이 “이행기적 요구들”로 가장되어 있든 아니든, 분파주의적 집단의 어리석음이다. “이행기 강령” 속에서 트로츠키가 분파주의를 비난할 때, 이는 최고의 아이러니이다. 그는 자신 및 자신이 사산(死産)한 제4 인터내셔널을 희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분파주의와 관련되는 곳에서 트로츠키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밑바탕에는, 부분적이고 이행기적인 요구들을 위한 투쟁, 즉 오늘날의 노동대중들의 초보적인 이해와 필요를 위한 투쟁에 대한 거부가 가로놓여 있다.”(트로츠키, 같은 책, p. 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최대 요구들을 전환기적 요구들, 즉 최소적이지도 않고 최대적이지도 않으며 그리하여 실제의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비실천적인 요구들로 대체함으로써 그 자신이 분파주의를 조장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트로츠키는 알지 못했다. “이행기 강령”의 트로츠키야말로 따라서 문자 그대로(true to form) 정수(精髓)의 트로츠키(the essential Trotsky), 실천적으로 비변증법적인 트로츠키인데, 이러한 특징이 그로 하여금 레닌과 거듭거듭 갈등토록 하였다.

“이행기의 요구들”이라는 용어를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처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4차 대회의 테제, 결의와 선언(Theses, Resolutions & Manifestos of the Fourth Congress of the C.I.)>>, p. 330을 보라.)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이라는 관념은 이러한 초기 용법으로부터의 논리적 발전이었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강령의 실제의 본성, 즉 그 목적은, 비혁명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상황에서, 즉 개량의 시기와 혁명의 시기에, 대중들의 행동을 인도하는 것이다.

어떤 요구들이 강조되고, 어떤 요구들을 중심으로 당이 가장 광범한 인민을 동원하기 위해 분투하는가는, 우리가 혁명적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는가, 아니면 비혁명적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맑스주의의 강령은 따라서 계급투쟁의 수세적공세적 단계들과 연관되어 있고, 최소 요구들과 최대 요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투쟁의 전술적 측면을 대표하고, 후자는 투쟁의 전략적 측면을 대표한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최소 강령과 최대 강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요구들이라고 말한다. 트로츠키와 달리 우리는 이것을 이행기 강령으로 대체하지 않고, 오히려 근로인민의 당당의 이익, 즉 최소 혹은 부분적인 요구들을 옹호하는 유연한 강령에 의거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당은 대중들에게 그들의 상황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사회주의로 이끄는 요구들, 즉 최대 요구들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맑스주의적 강령은, 대중들의 최소의, 부분적인, 상대적인 요구들과 사회주의를 위한 절대적인, 최대의 요구들의 통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적인 요구들로부터 절대적인 요구들로의 변화, 그것들의 현실적인 활성화는 계급투쟁의 구체적 과정에 의존한다. 따라서 강령은 계급투쟁의 서로 다른 단계들, 즉 노동계급의 당면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한 ‘수세적’ 투쟁으로부터 권력을 위한 즉각적인 투쟁에 이르는 단계들과 연관되어 있다.

 

 

7. 트로츠키의 방법론에 대한 레닌의 언급

 

레닌이 이전에 ‘영구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해석을 터무니없이 ‘좌익적’이라고 분류한 것은 틀림없이 트로츠키의 방법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즉 그것이 사이비 좌익주의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지만, 레닌이 트로츠키의 방법론의 문제에 접근한 것은 1920년에 일어난 유명한 노동조합 논쟁 때였다.

트로츠키의 방법론 혹은 추론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구체에 대한 추상의 우위,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를 보게 된다. 맑스-레닌주의와는 달리 트로츠키주의에서는 추상과 구체 사이에 분리가 있다. 1917년의 “4월 테제” 속에서 레닌은, “나의 친구 이론은 회색이지만, 푸르른 것은 영원한 생명의 나무이다”라는 괴테의 격언을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트로츠키 버전의 ‘영구혁명’에서는 우리는 민주주의적 혁명에서 사회주의적 혁명단계로의 추상적 이행을 보게 된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최소강령에서 최대강령으로 이행이 순수히 추상적이며, 어떠한 구체적인 결정 요인들로부터도 독립적이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1928년에 영구혁명에 관해서 쓰면서 그의 방법론의 본질을 참으로 놀랍도록 입증하는데, 실로 그 글의 어디에서도 그는 세계를 박살낸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과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간의 관계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트로츠키에 의해서 무시된 이 깨뜨릴 수 없는 연관이야말로 레닌의 참으로 놀라운 “4월 테제”의 출발점이었다. 그 테제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르보프와 그 일당의 새로운 정부 하에서도 그 정부의 자본주의적 본성 때문에 러시아의 편에서 전쟁은 여전히 의심의 여지없이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이기 때문에, 이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는 ‘혁명적 방위주의’에 대한 어떠한 사소한 양보도 허용될 수 없다.”(레닌, <<전집>> 제24권, pp. 19-20)

 

그리고 그 전쟁과 그 결과 일어날 사회주의로의 이행 사이의 구체적 연관이 레닌의 다음과 같은 언급 속에 개괄되어 있다.

 

“자본의 권력을 타도하여 국가권력을 다른 계급 곧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전하지 않고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빠져 나와 민주적이고 비강압적인 평화를 획득할 수 없다.”(레닌, <<전집>> 제24권, pp. 55-91, 성페테르스부르크, 1917년 5월 28일)

 

이러한 연관은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에서도 또한 언급된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실천적으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쟁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길이 없었다.”(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 Foreign Languages Press, 베이징, 1973, p. 62)

 

1917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는 이미 실현되었지만, 그러나 매우 색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수많은 극히 중요한 수정을 수반하면서 실현되었다.”(레닌, 같은 책, pp. 42-54)

 

반면에 트로츠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레닌과는 다르게,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1928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 정권은 결코 역사에 존재한 적이 없다.”(트로츠키, <<영구혁명-결과와 전망들->>, New Park Publications, p. 4)

 

레닌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면m 트로츠키는 정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체와 추상이, 즉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가 첨예하게 구분된다. 바로 이들 대립물 사이의 투쟁이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투쟁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형태들로 그리고 다른 시기에 벌어지고 있는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간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추론 형태와 ‘추상적인’ 추론 형태 간의 투쟁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레닌의 사고에는 더 많은 내용이 있었고, 그것을 보다 더 구체적이고 보다 더 생활과 밀접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트로츠키의 사고에는 알맹이가 없었다. 그 결과 대상에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트로츠키주의는 따라서 추상적 추론 결과의 체현물, 즉 구체적 총체에 미치지 못하는 논리 형태였다. 레닌주의와 달리 트로츠키주의는 일반의 수준에서 덫에 걸려 있다.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은 트로츠키의 강령에 대해서, 그것은,

 

“…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모든 것을 무시한, 고답적이고, 추상적이며, ‘공허하고’, 또한 이론적으로 그릇된 일반적 테제들”(레닌, <<전집>> 제32권, p. 85)

 

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동시에 트로츠키의 입장에 대한 비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 비판은 동일한 논쟁과 관련한 레닌의 보다 이전의 발언에 의해서 강화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의 모든 테제는 ‘일반적 원칙들’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그릇된 접근이다.”(레닌, 같은 책, p. 22)

 

트로츠키의 방법론의 본질을 구성한 것은, 그가 일반적인 것을 절대화하면서, 구체로 내려갈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맑스주의의 혁명적 강령의 최소-최대 요구들을 대체하기 위해 도입하고 있는 “이행기” 요구들이라는 관념 또한 극히 명료하게 이러한 방법론적 일면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맑스-레닌주의자가 볼 때, 개량과 혁명 사이에는, 혹은 최소 요구들과 최대 요구들 사이에는 한편으로부터 다른 편으로의 도약이 있다. “이행기 강령”은 이러한 도약을 무시한다.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투쟁을 동원해제시키기 위한 일시적 책략으로서 언제고 어떤 부분적인 최소 요구에 대해서 양보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누가 지배할 것인가, 누가 집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는 최대 요구들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양보도 할 수 없다.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은 변증법적 도약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며, 자본주의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의 혁명이 느린 동작으로 진행된다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 끝난다. 다른 한편에서는, 최대 요구들에 “이행기적”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트로츠키는 혁명적 도약을 이행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한다. 실제의 사실에서는 이행기 강령은, 구체적 혁명과정에 대한 어떠한 진정한 이해로부터도 분리된 추상적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비혁명적인 상황에서 계속 이러한 강령에 의거하는 사이비 좌익적 분자들은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8. 결론

 

트로츠키주의는 시작부터 노동자 운동에서 혁명적 분자들과 기회주의적 분자들 사이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들을 화해시키려 했다. 트로츠키주의의 이론적 기원은 트로츠키 버전의 영구혁명이다. 그것은 내적 및 외적 요인들과 무관하게 러시아에서의 당면한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 즉 최소강령으로부터 최대강령으로 전진을 자명한 것으로 가정했다. 맑스-레닌주의와는 상이한 이러한 가정은, 이 비평에서 우리가 반박할 수 없는 원문 증거들로 명확하게 보여준 바와 같은 강령상의 “농민층에 대한 과소평가”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더 근본적인 방법론적 수준에서의 문제이기도 한데, 사실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진은 1914-18년의 제1차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발생된 특수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거나, 어쨌든 매우 가망성이 적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레닌이, 트로츠키가 농민층을 과소평가하는 것과 관련하여 트로츠키의 이론을 “터무니없이 좌익적”이라고 규정한 것은 매우 정당하고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그런데, 여러 기회를 통해 레닌은 러시아에서 계속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에 관해 글을 썼음에도, 레닌이 살아 있을 때에는 트로츠키는 그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에 대한 트로츠키의 반대에도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세계혁명이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트로츠키가 보기에는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과 세계자본주의 사이의 모순은 쏘련이라는 구체적인 사정에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트로츠키는 “일국 사회주의”와 “세계혁명”이 모순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임을 보지 못하고, 그 양자 사이의 선택을 강요함으로써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키려 하였다. 변증법에 대한 무지와 악의, 그리고 분파적 고려에 의해 유발된 이러한 분열적 행동은 제국주의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모순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은 단순한 정치적 강령으로 축소될 수 없고 그보다는 장기적인 전망에 기초해야 한다는 레닌의 권고를 트로츠키가 거부한 데에도 드러났다. 또 다시 사이비 좌익주의와 분파적 고려로부터 트로츠키는 맑스-레닌주의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여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단기간의 전망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보여준 것처럼,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의 이론적 기원은 1920-21년의 노동조합 논쟁 중에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으로서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트로츠키주의는 숨기고 있다.

트로츠키는 어떻게 “이행기적 요구들”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최소 및 최대 요구들이라는 개념을 대체하는가, 그리하여 어떻게 혁명적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비혁명적 상황과 혁명적 상황의 차이에 대해서 선진노동자들로 하여금 혼동하게 하는가, 어떻게 “이행”이라는 개념으로 혁명적 “도약”의 개념을 대체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노동계급의 즉각적 이해를 옹호하기 위한 투쟁을 권력을 향한 직접적 투쟁과 혼동하게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보여주었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계급투쟁의 ‘수세적’ 단계와 ‘공세적’ 단계 사이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보여준 것처럼, 사실상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장기간 지속된 모순의 기초인 트로츠키의 방법론의 내용은, 트로츠키주의에서는 트로츠키의 사고(思考) 속에서는 ‘추상’이 ‘구체’보다 우위에 있으며, 구체의 풍부함을 무시하면서 추론을 일반적 수준에 제한하거나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전제 위에서 우리는, 트로츠키주의란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레닌주의와 경쟁하는 사이비-좌익적인 이념이라는 맑스-레닌주의의 주장이 정당화되고도 남는다고 말할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한 답변은, 트로츠키주의란 사이비 좌익주의라는 것이다. 보다 길게 답변하자면, 트로츠키주의는 레닌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자였다가 지금은 레닌주의에 대한 감춰진 반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맑스주의에서의 소부르주아적 일탈이다. 그것은 구체적 사고에 대한 추상적 사고의 승리이다.   (2001년 8월 20일)

 


 

1) [역자 주] 쏘비에트의 경제기관으로서, 기업의 감독방법을 지도하고, 사무처리의 개선을 담당하는 인민위원부. 1918년 1월에 국가감독인민위원부로서 설치되었고, 1920년 2월에 노동자통제기관을 통합하여 노동감독부로 되었다.

2) [역자 주] 이 인용문의 영어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This bridge should include a system of transitional demands, stemming from today’s conditions and from today’s consciousness of wide layers of the working class and unalterably leading to one final conclusion: the conquest of power by the proletar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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