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등소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비판

 

문영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

 

 

1. 머리말

 

2007년 10월 1일자로 중국에서는 물권법, 즉, 사유재산보호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사유재산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서 중국이 명실상부하게 사적소유 사회로 변화되었음을 공포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개인의 사유재산은 보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자본주의적인 물권법이 시행된 것은 중국 또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의 보장, 즉,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권법 시행 이전에도 중국에서 자본가계급은 경제적 의미에서 사실상의 지배계급이었다. 그러나 물권법 시행 이후에는 경제적 지배계급일 뿐만 아니라 법적 지배계급, 즉, 정치적 지배계급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사회주의제도와 인민민주독재는 공허한 것으로 되었고 나아가 자본주의로의 변화를 가리는 위장막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중국의 이러한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모택동 사망 이후 등소평 등 수정주의자에 의해 전개된 소위 개혁ㆍ개방의 결과 중국에서는 사적소유의 부활, 즉, 착취의 부활이 이루어졌고 이후 단계적으로 사적소유의 확대, 착취의 확대가 이루어졌으며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해체, 자본주의적 제도의 도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모든 것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구호 아래 이루어졌는데, 등소평 등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 것으로 자화자찬했으나 역사는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자본주의로 향하는 길목이었음을 폭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아직 그 물적 기반이 취약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수정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부활로 결말이 지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쏘련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중국과 쏘련이 다른 것은 역사성의 차이이다. 그리하여 쏘련은 연방의 해체를 통한 자본주의 부활로 결말이 지어졌고, 중국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점진적 해체와 자본주의의 부활의 길을 걸은 것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선언한 이후 세계적 차원의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한 축으로 기능해왔다. 이는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세계진보의 축이 아니라 반동의 한 축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등소평 노선의 반동성과 반인민성은 1989년 인민들의 천안문 시위에 대한 폭력진압으로 극적으로 표현된 바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주의 전망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이 필요하며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이론화한 등소평 노선에 대한 전면 비판이 요구된다.

등소평 노선의 특징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과 부정을 한 축으로 하고 사적소유와 착취의 부활을 또 한 축으로 한다. 다만 이러한 점을 호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절충을 하며 마치 자신이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듯이 위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따라서 등소평 이론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중국사회가 어떻게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어 왔는가를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중국의 자본주의화의 전개과정

 

1956년 쏘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의 후르시쵸프의 스탈린 비판은 동구에서는 헝가리 폭동을 불러왔으며, 중국에서는 유소기와 등소평을 중심으로한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파)와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조반파(造反派: 반대를 일으키는 당파)의 투쟁을 가져왔고 중국의 이러한 투쟁은 문화대혁명으로 발전하였다. 문화대혁명은 세계적 차원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중국노동계급의 미성숙,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좌편향의 오류 등이 겹쳐서 문화대혁명은 실패하고 모택동 사망이후 권력은 주자파에게로 넘어간다.

등소평은 모택동 사망 이후 복권되어 재등장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수정주의의 길을 걷는데 이러한 등소평이 걸은 수정주의 노선이 집대성된 것이 소위 ‘등소평 이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등소평이 무엇보다 내세우는 것은 생산력 발전이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사적소유의 부활과 착취의 부활도 마다하지 않고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등소평의 노선은 이후 중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규정하는데 중국에서 사적소유의 부활, 착취의 부활, 즉, 자본주의화의 과정은 크게 4개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의 수정주의적 경제개혁의 과정을 거친다. 이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다.

198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인민공사의 해체를 시작으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상품경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시기가 제2단계이다. 이 시기의 결과로, 즉 사회주의적 상품경제의 모순의 결과로 나타난 인민들의 항의에 대해서 등소평은 1989년 시위에 대한 폭력진압으로 응답을 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선언한 이후 1990년대 말까지의 시기는 제3단계로서 시장경제가 전면화되는 시기이자 사실상 자본주의로 건너뛴 시기이며, 사회주의는 단지 수식어로서 전락한 시기이다.

그리고 2001년 WTO가입 이후 현재까지가 제4단계로서 자본주의화를 완성한 시기이며, 이는 물권법의 제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각각의 시기를 구체적으로 분석해보자.

 

 

1) 제1단계: 사회주의 생산관계 토대 위에서 자본주의 요소의 도입
   (1970년대 말)

 

1976년 모택동의 사망 이후 약 2년여의 기간을 거쳐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수정주의 세력의 권력 장악, 혹은 주자파의 권력 장악이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소위 개혁ㆍ개방노선이 구체화된다. 이 시기 이후 실시된 개혁은 쏘련에서 1965년에 실시된 코시긴 개혁 혹은 리베르만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즉,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국유기업에서 이윤제도의 도입, 기업의 독립채산제, 상여금 등 물질적 유인을 강화하는 정책을 편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단기간의 생산력 강화 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충돌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우월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자본주의적 요소를 절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쏘련의 경우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결과 1970년대에 경제성장이 후퇴하여 쏘련 경제가 침몰하는 상황에 빠졌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주의 사회의 기업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간주하는 것으로서, 이전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위한 단순한 물적 조건이었던 생산수단이 이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생산수단 즉 자본으로 전화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혹은, 이는 노동해방이라는 사회주의의 대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원칙에서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소평 등의 노선은 바로 이러한 쏘련의 수정주의적 노선을 중국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1979년의 국영공업기업 고정자산세 징수에 관한 임시규정1)은 국유의 공업기업을 자본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한 규정이었다. 고정기금 자체에서 세금을 징수한다는 것은 고정기금 자체가 가치증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것으로서, 이는 고정기금이 자기증식하는 자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쏘련과 중국의 이러한 잘못된 경제개혁은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쏘련은 붕괴의 길로, 중국은 자본주의화의 길로 걸음을 내디뎠다.

 

 

2) 제2단계: 인민공사의 해체와 ‘사회주의적 상품경제’(1980년대)

 

등소평은 국유기업에서 수정주의적 경제개혁을 진행하고 이어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는 개혁을 수행한다. 모택동 사상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의 성과의 하나였던 인민공사의 해체가 그것인데, 그를 위해 치밀하게 작업을 진행한다.

일찍이 1979년 중국 안휘성의 한 현(縣)에서 18명의 농민에게 사적 경영을 실험한다. 농가생산경영 책임제라 불리는 이 실험은 성공하여 이후 전면적 확대의 토대가 된다. 이 실험은 등소평 등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된 것으로서 사적소유와 사적 경영이 인민공사라는 집단적 소유와 경영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의 토대가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3년 1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현 농촌경제 정책의 몇 가지 문제’라는 문건2)을 발표하여 ‘농가생산책임제’를 전면화하고 인민공사를 해체하는 길을 밟는다. 이는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소농경영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는데 계급의식이 상대적으로 취약했고 생산력 수준이 낮은 농업에서 먼저 사적소유의 부활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인민공사가 어떠한 성격의 생산조직이었는지, 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담보하는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신민주주의 혁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반제반봉건의 이 혁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이후 1956년을 전후하여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진입한다. 쏘련에서의 농업집단화가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과는 달리 중국에서의 농업집단화는 농민들의 지지와 참여 속에 성공적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초급합작사, 그리고 이어서 고급합작사로 집단화의 정도를 높여갔고, 1958년 인민공사화 운동이 모택동에 의해 제창되어 이후 급속하게 인민공사가 수립되어 갔다. 인민공사는 집단적 농업을 토대로 농ㆍ공ㆍ상ㆍ학ㆍ병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농업과 공업을 결합시켜서 하나의 농공복합체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는 중국 사회주의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한편, 쏘련에서도 1950년대에 농공복합체가 많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단위가 농공복합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인민공사에 대해 당시 중국공산당은 “점차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최적의 조직형태이며 이것은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의 기초조직으로 발전할 것”3)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인민공사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넘어서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쏘련과 달리 농촌인구가 주민의 대다수였던 중국의 실정에 적합한 사회주의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농촌에서 혁명을 시작했던 중국혁명의 특수성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공사에 대해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의 유소기, 등소평 등은 소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 전 유소기, 등소평이 실권을 잡고 있던 때에도 그들의 농업정책은 인민공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부업의 확대, 자유시장의 확대, 개인 텃밭의 확대 등 사적소유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택동 사후 권력을 잡자 등소평은 바로 이 인민공사를 해체해 가는 수순을 밟은 것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업에서 사적소유를 부활시키는 정책은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가?

농업이 소농생산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농민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말하는 농민층 분해, 즉 농민의 양극분화가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노농동맹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농민층이 인민의 하나의 구성부분으로서 사회의 주인의 지위에 있었다가 다시 피지배층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등소평은 대중이 소농생산을 바라고 있고 이것이 생산력을 발전시킨다는 궤변을 일삼는다.

그런데 농업,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전통, 집단주의적 전통은 일시에 해체되지 않고 다시 향진기업이라는 집단적 기업형태로 잔존하게 된다. 인민공사에 포함되어 있던 집단적 공업기업이 향진기업이라는 형태로 전환되면서 농촌에서 집단주의가 살아남았던 것이다. 향진기업은 농산물의 가공 등을 기초로 발전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주의 기업은 1990년대에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개조되게 된다.

한편, 인민공사의 해체를 시작으로 하는 1980년대의 중국경제는 사적소유의 부활을 특징으로 한다. 개체호(個体戶)라 불리는 개인의 영업활동, 이윤추구 활동이 시작되고 이들은 점차 자본을 축적하면서 1인기업을 넘어 타인을 고용하는 자본가로 발전하게 된다. 개체호가 고용하는 임노동자가 7인을 넘을 경우 사영기업이라 불리는데 사영기업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1980년대는 공업에서는 사회주의적 관계가 우위를 보이는 가운데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해체되고 사회 전반에서 사적소유의 부활이 확대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적 상품관계’라는 개념으로 이론화를 시도하는데, 이는 상품생산의 전면화를 용인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상품생산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등소평은 공유제를 주요한 틀로 삼고 기타 소유제가 발전하는 것이 생산력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한다. 즉, 공유제가 주요한 틀로 남아 있는 한 사회주의는 견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억지 주장이다. 상품생산이라는 것은 사적소유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상품생산이 전면화하면 생산관계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위축ㆍ해체되고 사적소유가 부활ㆍ확대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모순과 갈등의 결과 1980년대 후반으로 가면 물가인상, 경제의 불균형, 농민의 몰락 등이 가시화하면서 중국경제는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는 1989년에 인민들의 천안문 시위로 폭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등소평은 천안문 시위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그리하여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중국경제는 깊은 침체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 등소평과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길이 아니라 사적소유의 부활을 강화하는 길을 택한다. 1980년대에 농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한 데에 이어 1990년대에는 도시에서, 그리고 공업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는 길을 걷게 되고, 나아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선언하며 사실상 자본주의로의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3) 제3단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의 이행(1990년대)

 

1990년대 초에 중국에서는 사회적으로 하나의 논쟁이 발생한다. 이른바 성자성사(姓資姓社)논쟁이다. 이 논쟁은 중국사회가 시장경제, 즉, 사적소유 사회로 가는 것은 분명한데 그 앞에 자본주의라는 성(姓)을 붙일 것인지 아니면 사회주의라는 성(姓)을 붙일 것인지를 두고서 벌어진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등소평은 사회주의라는 성을 붙이자고 한 것이고 그것을 이론화한 것이 소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는 단지 수식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사적소유 사회라는 것은 착취사회를 말한다. 왜냐하면, 사적소유는 한편에서 부를 축적할 때 다른 한편에서 빈곤이 축적될 수밖에 없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앞에 자본주의라는 성을 붙일 것인지 사회주의라는 성을 붙일 것인지는 의미 없는, 자조적 논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선언하고 난 후에 중국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전면적 해체의 길을 걷는다.

1993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4기 3중전회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건립에서 약간의 문제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해 “현대기업제도의 건립을 위한 회사화를 공식화”4)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현대기업제도라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기업제도를 폐지하고 자본주의적 기업제도를 말단 기업에까지 채택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기업제도로서의 주식회사제도를 도입하고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회를 설치했는데, 이는 말단 기업에서 권력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사회주의적 기업제도에서는 직공(노동자)대표자 대회가 최고권력기관이었는데, 이제 그 기능이 약화되고 기업의 권력이 자본을 대표하는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회로 이동한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에서 단순한 피고용자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지위 약화는 이후 국유기업 개혁이라는 명분하에 대량의 노동자가 해고되는 사태로 발전한다. 하강(下岡)이라고 불린 이 대량해고 사태는 노동자계급이 경제적으로 피착취자로 전락되었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 걸쳐서 수천만 명의 국유기업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는데, 이는 199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신자유주의 물결의 중국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것이 중국적인 특색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량해고의 명분이었던 국유기업 개혁이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의 기업은 자본주의의 기업과 달리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다. 사회주의 사회의 기업, 특히 중국사회주의 사회의 기업은 단위(單位)라는 체제로 묶여 있어 기업이 노동자에 대한 각종 복지와 연금, 그리고 주택과 교육, 의료 등 일체를 책임지는 체제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주의 기업이 생산하는 소위 이윤과 자본주의적 기업의 이윤을 단순히 평면 비교하여 사회주의 기업은 효율성이 낮다고 주장하며 이를 국유기업 개혁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등소평 등 집권세력이 사회주의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는 농민이 피착취자, 피억압자로 전락하고 1990년대는 노동자계급이 피착취자, 피억압자로 전락한 것이 소위 개혁, 개방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국에서 자본가계급은 대대적으로 육성되었다. 1985년과 1998년을 비교하면 공업총생산량에서 국유기업이 점하는 비율은 68%에서 28%로 급감되었지만 성향(省鄕)개체기업은 2%에서 17%로 늘었고 기타 범주(즉, 사영기업, 외자기업 등)는 1%에서 23%로 급증하였다. 사영기업의 경우 2000년 말 통계로 176만 개의 기업이 총 2,406만 명을 고용하여 국내총생산의 12%를 생산하고 있다.5)

회사제도의 ‘개혁’ 중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주식제도의 도입이다. 많은 기업이 주식회사화하고 있는데, 중국공산당이 중국사회가 사회주의 사회라고 강변하는 하나의 근거가 바로 이 주식회사이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인 이유로서 공유제가 여타의 소유제에 비해 주된 몸통이라는 것을 들고 있는데, 주식회사에서 국가가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이 또한 공유제의 일부로서 사회주의적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 강택민, 후진타오가 주장하는 공유제는 본래의 사회주의적 전인민소유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공유제는 본래 자본주의에서도 존재하는 제도이다. 사적소유가 여러 개 결합하면 공유로 인정되는 것이 자본주의 제도의 하나의 특징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들어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이 사회주의 사회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적 공유제도이지 사회주의적 공유제도는 아니다. 사적소유에 기초한 공유제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적 공유제도인가도 혼동하는 것이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의 실태이다.

그리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은 국유기업 개혁을 통해서 많은 국유기업을 사유화했다.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 준다”는 방침을 통해 국유기업 중 핵심적 기간산업을 제외한 중소형의 국유기업을 대부분 사유화했다. 그 결과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골간인 국유, 즉, 전인민소유는 형해화되었고, 중국은 전형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변신한 것이다.

 

 

4) 제4단계: WTO의 가입과 현재(2000년대)

 

중국은 2001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고, 이어서 같은 해에 WTO에 가입했다. WTO의 가입은 중국이 명실상부하게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고 자본주의 사회라고 공인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중국경제는 수출과 수입이 크게 늘었고 지금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린다. 중국경제가 이렇게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깊숙이 편입됨에 따라 중국의 동향은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중국은 1989년 천안문 시위 진압 이후 경제가 침체한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경제침체가 거의 없었고 거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보여 왔다. 이렇게 경제침체 혹은 공황이 없는 상태로 고도성장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쏘련 등 사회주의 경제를 제외하고는 유례가 없는 것인데, 이는 중국경제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본주의화될 대로 자본주의화된 중국경제는 이제 세계경제와 그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만약 세계적 공황이 중국에까지 닥친다면 중국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실천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3. 등소평 이론 비판

 

등소평의 개혁ㆍ개방 정책은 일관되게 사적소유의 부활, 착취의 부활을 확대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인데, 이러한 배신을 합리화하고 이론화한 것이 소위 ‘등소평 이론’이라고 불리는 주장들이다.

등소평 이론은 현재 중국에서 맑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과 함께 중국의 지도사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고 중국공산당의 당장(黨章)에 기입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맑스-레닌주의나 모택동 사상은 장식품에 불과하고 등소평 이론이야말로 중국공산당의 지도사상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등소평 이론이 당대의 맑스주의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등소평 이론은 20세기 수정주의의 결정판인데 여기에는 어떻게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관계를 타격하고 해체하고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는지 그 알맹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등소평 이론에 대한 전면 비판은 새로이 사회주의 전망을 열어가는 데에 있어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는 쏘련의 해체로 인해 무너져 내린 과학적 사회주의를 복원하는 하나의 길이기도 하다.

 

 

1) 등소평의 재등장과 진리표준논쟁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고 난 후 개혁ㆍ개방 정책이 채택된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까지는 노선투쟁, 권력투쟁의 시기였다. 강청 등 문화대혁명의 주도세력은 좌편향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화국봉과 주자파 연합세력에 의한 쿠데타로 실각한다. 이 시기에 화국봉은 모택동의 후계자로 꼽히고 있었는데, 화국봉이 내세운 것이 ‘두 개의 무릇’이었다. ‘두 개의 무릇’은 “무릇 모 주석이 내온 결정을 따르고 무릇 모 주석의 지시를 변함없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긍정하는 것이었고, 모택동의 권위를 빌어 화국봉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실각상태였던 등소평은 ‘두 개의 무릇’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제기한 것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라는 것이었다. 이 논쟁의 구도를 보면 화국봉은 교조주의였고 등소평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모택동 노선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등소평의 정치적 의도였고,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듯한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목적을 관철시킨다. 그리하여 사상적 지도에 있어 등소평이 우위를 점하게 되고 이후 화국봉은 실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교조주의는 수정주의 세력에게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는 것을 재음미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를 모택동 노선을 부정하기 위해 원용했다. 여기에는 문화대혁명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는 규정은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2번에서 유래한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테제는 과학적 진리와 실천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등소평에게 있어 실천은 기존의 진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책일 뿐이다. 화국봉의 ‘두 개의 무릇’이라는 관점이 교조주의적이라는 것을 논외로 한다면 등소평의 실천은 실용주의적으로 해석된 실천이다. 그는 기존의 과학적 사회주의, 혁명적 노선을 부정하기 위해 실천만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는 헤겔의 “현존하는 것이 이성적이다”라는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실천을 통해 우위를 점하고 현실로 되기만 하면 그것이 반동적인가 진보적인가를 떠나 진리의 지위를 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실천이 진리의 기준인 것은 절대적 측면과 상대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6).

절대적 측면에서는, 맑스의 테제와 같이 궁극적으로 진리는 실천에 의해 규정되고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대적 측면에서는, 일정한 주어진 역사적 단계에서는 이론의 진리성이 완전히는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등소평은 이러한 상대적 측면을 무시하고 절대적 측면만을 내세워 기존의 혁명적 노선을 부정하는 근거로 맑스의 테제를 활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맑스의 견해를 내세워 화국봉의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사상적 지도권을 장악한 것은 수정주의 세력, 주자파가 노련한 정치세력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상적 지도권을 장악하자마자 등소평은 본색을 드러내는데, 이른바 사상해방이라는 것을 내세워 기존의 노선을 수정하고 과학적 사회주의 원칙을 폐기하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사상을 해방하자는 것은 교조주의에 반대하는 측면에서는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적 사회주의 원칙에 대한 공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수정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등소평의 사상해방 이론은 물질과 사상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인간의 사상, 의식은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바로 이러한 측면, 물질적 관계가 사상을 규정한다는 측면을 간과하고 모택동 사상을 부정하고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기 위해 사상해방을 주장한 것이다. 즉, 수정주의 노선을 전면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과학적 사회주의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생산력주의적 경향

 

등소평 노선의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는 생산력 발전을 제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산력 발전을 중시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인민의 삶을 개선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급속한 증대가 무엇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소평의 노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계를 올바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사적소유와 착취를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력주의는 등소평만의 문제가 아니라 1950년대 쏘련에서도 발생한 적이 있다.

등소평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속박한다고 파악한다. 즉, “계획경제만 하는 것은 생산력 발전을 속박한다”7)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에 의해 가능한 것인데, 등소평은 눈앞의 이익만 보고 사적소유의 부활을 통한 생산력 발전을 제일로 치는 것이다. 등소평은 사회주의 우월성을 생산력의 급속한 성장으로 보는데 문제는 생산력을 급속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우월성이 발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즉, 해방된 노동을 하는 대중의 창발성과 혁명성을 고양시킬 때에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에 따라 등소평은 사적소유에 바탕한 이기심을 생산력 발전의 동인으로 보고 그를 관료주의적으로 조종하는 조정정책을 선호한다. 실제로 1950년대 말 대중운동에 입각한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면서 유소기와 더불어 조정정책을 실시하는데, 이를 통해 모택동과는 결정적으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갈등이 문화대혁명으로까지 비화된 것이었다.

등소평이 이렇게 생산력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을 잘못 파악하기 때문이다.

등소평이 인식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 모순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의 생산력 발전 수준은 매우 낮고 인민과 국가의 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목전의 시기의 주요모순이고 이 주요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중심 임무”8)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생산력이 낮고 인민의 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만이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한 임무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은 생산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문제이다. 인민내부에 존재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주된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문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을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에도 등소평은 이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고, 당장의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사적소유, 착취의 부활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이 아니라 절충주의적 인식이다.

 

 

3) 역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

 

1981년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한다. 이 결의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하면서 모택동에 대해 건국과 신민주주의 단계에서는 옳았으나 문화대혁명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에서 좌편향을 범했다고 비판한다. 등소평은 이 결의를 기초하는 작업을 직접 지휘했으며 자신의 관점을 이 결의에 녹여냈다.

등소평이 모택동을 비판하는 핵심은 1950년대 후반의 사회주의 혁명단계와 문화대혁명에 대한 것이다. 등소평은 1956년에 사회주의 개조가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당시 모택동은 이를 부정하고 농촌의 집단화를 가속화할 것, 그리고 인민공사화와 대약진운동 등 대중운동 방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등소평은 이 시기 모택동의 이러한 노선을 좌편향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의 주장대로 1956년에 사회주의적 개조가 대체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농촌은 초급합작사 형태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집단적 농업의 맹아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확립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공업에서도 신민주주의 혁명에 함께 참여했던 민족부르주아 계급은 우대를 받아서 그들의 생산수단 소유는 몰수가 아니라 공사합영의 형태로 존속하고 있었다. 즉, 공업과 농업 모두를 보아도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소기, 등소평 등 주자파는 사회주의 혁명을 밀고 나가는데 소극적이었고, 이에 따라 모택동 등의 혁명노선과 갈등을 빚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소련에서 후르시쵸프의 수정주의가 득세한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 등소평 등은 표면적으로는 후르시쵸프를 수정주의라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노선을 중국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모택동 등 혁명파가 대반격에 나선 것이 문화대혁명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내부의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후르시쵸프나 브레즈네프의 수정주의 등, 국제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운동이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주자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이를 밑으로부터 대중운동을 통해 관철시키려 했던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또한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등소평은 이 시기 지식인들이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실은 육체노동에 대한 정신노동의 우위를 비판한 것이 문화대혁명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에 입각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계속 혁명 노선을 관철시키려 했던 점에서 문화대혁명은 커다란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실패한 것은 그 실천과정에서 빚어진 좌편향 때문이었다. 실제로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는 세력 내부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형적인 좌편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강청 등이 주도한 공자 비판 등의 운동도 초점을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좌편향으로 인해 문화대혁명 말기에 가면 주자파가 다시 복권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은 권력 전체가 모택동 사후 주자파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등소평은 이러한 문화대혁명을 전면 부정하면서 문화대혁명은 무정부주의였으며 모든 것을 타도하는 것이었다고 혹평한다. 그리고 ‘10년의 동란’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비록 좌편향이 있었다고 해도 문화대혁명은 국제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운동이었고,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혁명 등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10년 기간에 희생된 사람은 3만여 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는 무고하게 주자파로 몰려 희생된 사람도 있고, 특히 좌편향으로 인한 희생자가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지금 고도의 생산력에 기초하여 현대화를 추진한다는 중국에서 생활고로 인한 자살자가 한 해에 3만여 명을 훨씬 넘는다. 따라서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을 무정부주의였고 모든 것을 타도한 동란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등소평과 중국공산당의 ‘역사 결의’를 통해 모택동 사상은 무력화되었고, 단지 당장에 있는 수식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들이 모택동 사상 일체를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자체가 모택동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민족 부르주아지가 이 혁명과 신민주주의 단계, 민족해방투쟁에 참여했다는 역사적 경과 때문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 결의를 통해 자신의 수정주의 노선을 아무 거리낌 없이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야말로 ‘역사 결의’의 현실 정치적인 의미였다.

 

 

4) 한 개의 중심과 두 개의 기본점

 

등소평의 실용주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은 그의 현실 정책에서인데, 그의 정책들을 집약한 것이 “한 개의 중심과 두 개의 기본점”이라는 것이다. 한 개의 중심은 경제건설을 의미하고, 두 개의 기본점은 첫째 개혁ㆍ개방의 원칙, 둘째 사회주의 4항의 견지 원칙이다. 여기에 등소평의 사고의 전모가 드러난다. 경제 건설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제일 과제로 삼으면서 그를 위한 동력으로 개혁ㆍ개방을 꼽고, 그리고 이러한 것을 보증하는 사회적 안정을 위해 사회주의 4항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4개항이란 첫째, 사회주의 견지, 둘째 인민민주독재의 견지, 셋째 공산당 영도의 견지, 넷째, 맑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의 견지를 말한다.

생산력주의자인 등소평이 경제 건설을 제1로 놓는 것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경제건설의 동력으로서 개혁ㆍ개방을 꼽고 있는 것도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 경제 건설을 위해 개혁ㆍ개방, 즉, 사적소유의 부활, 착취의 부활의 길을 열고 자본주의와 절충하여 생산력 향상의 동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가 이미 사회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의 생산력 증대라는 것은 인민의 혁명성과 창조성에 의지하는 것인데, 등소평은 경제 건설의 동력을 전적으로 사적소유 의식, 외자의 도입에 의지한다. 그런데 이렇게 과감하게 수정주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등소평은 문화대혁명의 교훈, 밑으로부터 저항을 우려하여 형식적으로 사회주의 4개 항의 견지를 첨가한 것이다.

사회주의 4개 항을 견지한다는 원칙은 1979년에 제출된 것이다. 개혁ㆍ개방을 추진하더라도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민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등소평의 사회주의 4개 항 노선은 이미 공허화되었고 자본주의화를 위장하는 위장막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항의 사회주의 견지란 소유관계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사적소유의 부활은 공고하게 이루어졌고, 이는 물권법의 제정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공유제도 이미 자본주의적으로 개조된 공유제로 변질되었고, 그 비중도 이미 사적소유가 압도적이다.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등소평의 논리를 여기에 적용하면 실천을 통해 등소평의 사회주의 견지노선이 파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항의 인민민주독재도 공허한 것이 되었다. 인민은 사회의 주인의 위치에서 피억압자, 피착취자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1980년대 초반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노농동맹이 파기되고 농민이 수탈당하는 위치로 전락했고, 1990년대에는 공업에서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이 피착취자, 피억압자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그리고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자본가계급이 부상하였는데, 이는 인민민주독재가 부르주아 독재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항의 공산당의 영도는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공산당의 성격이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무산대중의 결집체로서 공산당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는 2001년 강택민의 ‘3개 대표론’을 기초로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 허용 결정으로 완성되었다. 자본가(사영)가 생산력을 대표하는 한 부분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자본가의 입당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자본가가 공산당원이 될 뿐만 아니라 공산당원이 자본가가 되는 길이 제도적으로 열렸다. 자본가는 경제적 권력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에도 마음껏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넷째 항의 맑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의 견지는 공허한 수식어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이 항목을 등소평이 첨가한 것은 모택동 사상을 따르는 잔존하는 혁명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항목은 중국에서 이론과 실천의 극단적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돈을 향해 나아가는(向錢看) 상황에서 사회주의 원칙은 내팽겨 쳐진 지 오래이다. 바로 이 항목이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주의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항목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가들이 사회주의를 조롱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항목 때문이다. 

따라서 등소평의 실용주의가 집약된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에서 의미 있는 것은 사적소유의 부활을 통한 경제 건설이다. 그리고 이 노선은 중국의 부르주아지에게 충실히 봉사하는 노선이다. 나아가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노선이다.

모택동이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했다면, 등소평 노선은 똑같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실은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를 건설한 것이다.

 

 

5) 계획과 시장,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비판

 

등소평 노선의 특색의 하나는 절충주의인데, 이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계획과 시장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계획과 시장에 대해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 시장을 말하면 자본주의이고 계획을 말해야만 사회주의인가? 생산력 발전에 좋은 점이 있다면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하면 사회주의의 것이고, 자본주의를 위해 복무하면 자본주의의 것이다. 계획을 말하면 곧 사회주의인 것같이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에는 기획청이 있고, 미국 또한 계획이 있다. 우리는 이전에 쏘련에서 배웠고 계획경제를 했다. 후에는 계획경제를 주요한 것으로 했는데 현재는 다시 이와 같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9)

 

이러한 등소평의 언급에서 계획과 시장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찾아보기 어렵고, 거기에는 단지 절충주의와 실용적인 접근만이 있을 따름이다. 등소평이 일본과 미국에서의 계획을 말하는데 일본과 미국의 계획이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응하여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 표현으로서 계획이 아니던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계획과 사회주의의 계획을 동일시하는 것은, 좋게 말해 무지의 표현이고, 정확히 말하면, 악의적 왜곡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무정부성을 본질로 한다. 국가가 아무리 개입하여 계획을 해도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 무정부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사회 전체가 의식적으로 경제를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 표현이 계획경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의 계획과 사회주의에서의 계획은 그 본질이 다른 것이다. 이를 동일시하는 것은 등소평의 사고에서 이미 사회주의 원칙이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뒤섞어 놓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란, 중국이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후진적인 단계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계급투쟁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이 주요모순이고 중심과제가 된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해 등소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사회주의가 어떤 단계에 처해 있는가 하면 바로 초급단계인데, 즉 초급단계의 사회주의이다. 사회주의는 본래 공산주의의 초급단계인데 우리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 즉 발달하지 못한 단계에 처해 있다. 모든 것은 이러한 실제에서 출발해야 하고 이 실제에 근거하여 계획을 제정해야 한다.10)

 

그리고 등소평 이론을 체계화한 중국의 대학 교과서인 <<등소평이론개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전제는, 우리나라의 사회 생산력의 본질을 규정한 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이라는 것이다. 이 전제하에 과감하게 비공유제 경제성분을 발전시키고 경제사회화, 시장화, 현대화 정도를 제고하고, 더 많은 외국자본을 흡수하여 현대화 건설을 하는 것은 모두 사회주의 기본제도에 위험하지 않다.11)

 

이러한 주장은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에서 다시 단계를 나누어 초급단계를 설정하고 이 단계에서는 생산력 발전을 위해 사적소유의 부활, 착취의 부활을 용인할 수 있고, 이는 사회주의 제도에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지양한 사회라는 것을 본질로 할 때 이렇게 사적소유의 부활, 착취의 부활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고, 수정주의로의 길을 활짝 여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은 사적소유를 부활시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의식성과 인민대중의 자발성, 창조성, 혁명성이 제고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적소유에 따른 이기적 동력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자본주의로 후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를 그와 같은 내용으로 규정하려면 그 앞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떼어야 타당할 것이다.

 

 

6)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완성과 자본주의로의 비약

 

1980년대까지는 중국에서 시장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어디까지나 공유제를 주요한 틀로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사회주의 상품경제’라는 용어로 이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시위에 대한 폭력 진압 이후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소위 개혁ㆍ개방이 난관에 부딪히자 등소평은 다시금 사적소유의 부활을 전면화하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를 이론화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편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전면화하면서 1980년대의 농업에서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해체에 이어 공업에서, 도시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한다. 이를 위해 도입한 것이 회사제도와 주식제도이다. 사회주의적 국유기업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자본주의적 회사제도로 개편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식제도를 광범위하게 도입한다. 이 ‘개혁’으로 노동자계급은 피지배계급, 피착취계급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등소평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펴면서 사회주의 본질을 새롭게 규정한다.

 

계획이 많고 시장이 많고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을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와 같지 않고 자본주의 또한 계획이 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와 같지 않고 사회주의 또한 시장이 있다.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의 수단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착취를 소멸시키고, 양극분화를 없애고, 최종적으로 공동부유에 도달하는 것이다. … 일부분의 지구(地區)가 조건이 된다면 발전을 시작하고 일부분의 지구는 발전이 늦을 수 있다. 먼저 발전하는 지구가 후에 발전하는 지구를 데려가고 최종적으로 공동부유에 도달하는 것이다.12)

 

일부 지구가 먼저 발전한다는 것은 등소평이 사적소유의 부활에 따른 불균등 발전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부활에 대해 ‘사회주의 본질론’을 들이댐으로써 사회주의라는 위장막을 유지하려 한다. 등소평이 생각하는 공산주의 사회는 공동부유한 사회이다. 전형적으로 생산력주의자의 사고, 자본주의 길을 걷는 주자파의 사고를 보여준다.

맑스가 말한 공산주의 사회는 단지 생산력이 발달한 사회라고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의 발달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맑스가 규정한 공산주의 사회의 본질적 규정은 “각 인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이 사회 전체의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는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토대를 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함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등소평의 공동부유에서 ‘공동’이라는 것은 수식어에 불과하고 먼 미래에 달성하는 방향일 뿐이다. 이는 자본주의자, 자본가들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특히 사민주의자들 또한 공동부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착취를 부정하고, 양극분화를 부정한다.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와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론은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양극분화를 저지하기 위해 세금정책, 복지정책을 실시한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 자본가계급이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도 자신이 착취를 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론에서 남는 것은 생산력 해방인데, 실제로 이것이 핵심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한다는 것이 등소평의 기본적 관점이고, 착취의 소멸과 양극분화의 소멸은 추상적인 방향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론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혁명을 포함한 이전의 모든 혁명 또한 바로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고유한 본질은 바로 착취 일반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착취를 부활시키는 것, 사적소유를 부활시키는 것은 사회주의 본질에 위배되고, 자본주의의 부활로 결말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등소평은 자신의 수정주의 노선의 대미를 사회주의 본질론이라는 관념적 접근으로 결말지었지만, 이는 파산한 이론일 수밖에 없다. 등소평이 말한 생산력의 해방은 자본가계급의 해방이었으며 공동부유는 자본의 축적으로 결말지어진 것이 현실이다. 등소평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오가며 끊임없이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직 수정주의 이론의 결정판을 인류에게 선사했을 뿐이다.

 

 

7) 등소평 노선의 계급적 본질

 

등소평 노선이 출현한 것은 단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쏘련에서도 생산력주의가 출현했으며, 후루시쵸프에 의해 수정주의가 제출되기도 했다. 다만 다른 것은 등소평은 사회주의라는 이름 아래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를 실현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등소평 노선의 계급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까지 사회주의라는 수식어를 놓치지 않았고 경제발전을 제1로 삼으면서 사적소유의 부활을 추진한 그의 노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 말에 주목하는 것을 넘어서 그 뿌리인 계급적 본질을 추적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것은 모택동 등 중국공산당의 혁명투쟁의 결과였다. 이때의 혁명의 단계는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모택동에 의해 정식화된 바 있다. 이 신민주주의 혁명, 반제ㆍ반봉건 혁명에는 민족부르주아지도 광범하게 참여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에도 그들은 속된 말로 지분을 인정받았다. 이는 민족해방투쟁에는 민족부르주아지도 참여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적소유자라는 본성에 의거하여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세력이 된다는 점이다.

유소기, 등소평 등 주자파와 모택동 등 혁명파의 대립은 이러한 계급적 차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모택동 등은 농업의 집단화와 계속혁명을 주장했고, 반면에 유소기, 등소평 등은 이에 소극적이었으며 대중운동보다는 관료적인 조정정책을 선호했다. 이러한 대립을 바탕으로 중국의 민족부르주아지는 사회주의 혁명단계에서도 살아남았고 계급으로서 소멸되지 않았다. 1950년대 말에 공사합영이라는 형태로 민족부르주아지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민족부르주아지는 계급으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제적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모택동 사망과 등소평 이후 다시 계급으로서 부활했다. 등소평 노선이 근거한 계급은 바로 이들 민족부르주아지였던 것이다. 이들을 살려두고, 나아가 육성하고, 그리고 최후에는 다시금 지배계급으로 복귀시킨 것이 등소평 노선의 결말이었던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사회주의는 허상이 되었고 민족주의(혹은 애국주의)가 강조되고 있는데, 바로 지배계급인 이들 민족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민족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사회주의를 말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은 사적소유를 공격하지 않고 나아가 사적소유를 부활시킨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 계급적 본성상 사적소유를 공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도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장하지만 사적소유를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미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수식어일지라도 사회주의를 말한다는 점에서 진보성을 띠고 있을 뿐이다. 차베스의 사회주의는 민중주의적 한계에 갇힌 사회주의이고, 사적소유를 폐지하지 않는 사회주의이다.

등소평 노선과 차베스의 노선은 역사성은 틀리지만 민족부르주아지를 대표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쏘련 붕괴 이후 아직은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계급의 사회주의는 전면화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4. 결론

 

등소평의 노선은 수정주의의 결말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중국의 소위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세계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의 한 축으로서 제국주의적ㆍ반동적 질서에 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수정주의에 대한 국제적 차원에서 투쟁은 불가피하다. 등소평 노선의 수정주의적 뿌리를 들어내고 이를 비판하면서 다시금 사회주의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실패하고 주자파가 집권하여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부활한 것은 역사의 한계이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7은 성과이고 3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21세기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부여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 혁명 노선을 대중운동노선과 결합시킨 점, 국제적 수정주의에 대한 세계적 차원의 투쟁이었다는 점,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단위는 농공복합체라는 것 등이 모택동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인류에게 남긴 자산이다.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자본주의가 부활한 것은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류 최초로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래 진보를 거듭하던 역사가 수정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파경을 맞게 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로 사회주의가 붕괴된 점이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0세기와 비교할 때 사회주의적 변혁의 물질적 조건은 매우 성숙했다. 최근의 세계적 공황이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이 사회의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였다는 것,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중반 이래 무너져 내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복원하고 수정주의에 대한 국제적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변혁을 준비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복원은, 한편으로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필연적이다. 자본의 세계화로 인해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의 동질성이 높아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복원하고 강화할 때 일국의 변혁, 약한 고리에서 변혁의 승리도 가능할 것이다.

 


 

1) 정재호 편, <<중국 개혁ㆍ개방의 정치경제 1980-2000>>, 까치출판사, 2002, p. 441.

 

2) 정재호 편, 같은 책, p. 446.

 

3) 우노 시게아끼, <<중국공산당사>>, 일월서각, 1984, p. 237.

 

4) 정재호 편, 같은 책, p. 116.

 

5) 정재호 편, 같은 책 p. 25.

 

6) <<세계철학사 II: 변증법적 유물론>>. 녹두, 1985, p. 266.

 

7)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에는 근본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등소평 문선>>(선집) 제3권, 인민일보사(북경), 1993, p. 148.

 

8) “네 개 항의 기본원칙을 견지하자”, <<등소평 문선>> 제2권, 1983, p. 182.

 

9) “계획과 시장 모두 생산력 발전의 방법이다”, <<등소평 문선>> 제3권. 1993, p. 203.

 

10) “일체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실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등소평 문선>> 제3권, p. 252.

 

11) <<등소평이론개론>>, 고등교육출판사(북경), 1999, p. 71.

 

12) “무창ㆍ심천ㆍ주해ㆍ상해 등지에서 담화의 요점”, <<등소평문선>> 제3권, pp. 373-374.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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